소설리스트

리셋팅 웨딩-21화 (21/60)

21화

“대표님.”

여주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걸 알았다.

남태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지성이 눈을 부릅떴다.

“……야. 시발 차여주. 너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야!”

“이미 늦었어요. 대표님도 다 알고 계세요.”

여주가 그 말을 하면서 살짝 웃었다.

곤 작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이제 셋이었다.

도지성, 박하나, 그리고 남태오 대표까지.

전생에서는 그녀 스스로 정체를 숨겼지만, 현생에서는 반대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챌수록 좋았다.

도지성의 만행이 벌어지기 전에 막을 수 있었다.

그래야만 도지성에게서 그녀가 벗어날 수 있었다.

“이봐, 도지성. 추태는 거기까지 하지.”

남태오가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손을 뻗어 도지성의 팔을 잡아챘다.

단번에 뒤로 꺾여져 휘청거린 도지성이었다.

“이보세요. 남태오 대표님! 당신이야말로 무슨 자격으로 차여주랑 제 일에 끼어드는 건데요?”

도지성은 이제 남태오에게 대들고 있었다.

“차여주 씨는 잠시 내 뒤로.”

그리고 남태오는 제 뒤로 여주를 서게 하고, 도지성과 대치하고 섰다.

“자격. 지금 내 앞에서 자격을 논하는 건가?”

남태오가 차갑게 일갈하는데, 여주는 소름이 돋았다.

어쩌다 이렇게 셋이, 이 밤에 제집 앞에서 이렇게 된 걸까?

전생에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자격! 저는 차여주 전 남친이라는 자격도 있지만, 대표님은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차여주를 감싸냐고, 그걸 묻고 있는 겁니다!”

도지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그럴수록 여주는 쥐구멍을 찾고 싶어졌다.

‘저런 철면피가 또 있을까!’

지난번 선투자금으로 개무시당하고, 제 형에게 까인 울분이 폭발하는 듯 보였다.

‘아니. 왜 뺨 때린 사람 놔두고 여기서 화풀이야?’

그럼 제 형한테 가서 멱살잡이라도 할 것이지.

왜 하필 상대가 남태오 대표란 말인가!

여주가 보기에는 도지성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도지성의 인간성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남태오가 GK기업 남 회장의 손자라는 걸 몰라서 저러는 것이리라.

만약 알았다면 절대 저렇게 오만불손하게 대들진 못할 것이다.

“내가 무슨 사이인들, 바람펴서 헤어져 놓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그쪽보다야 나은 사이 같은데.”

남태오가 하는 말에 여주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도지성한테 하는 말, 다 들었구나.

내가 곤 작가인 걸 아는 남태오인데.

사람 보는 안목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당사자인 도지성의 몫까지 부끄러움은 전부 제 몫인 듯했다.

“그래요, 뭐. 내가 차여주랑 헤어진 거는 맞는데, 구질구질하게 매달려? 내가? 남태오 대표님. 말씀 좀 가려 하시죠? 당신이 대표면 다야?”

미쳤구나. 도지성.

제발 저 입 좀 다물지.

비즈니스 상대를 넘어서 엄청난 고객에게 저게 뭐 하는 짓이야?

여주가 더는 참지 못하고, 남태오 대표의 뒤에서 소리쳤다.

“이보세요. 도지성 편집장님, 그쪽은 쪽팔리지도 않아요? 그만하고 돌아가라고요.”

“이거 놔, 시팔! 차여주. 지금 내 편이 아니라 남태오 대표 편을 들어?”

도지성의 눈이 홱 돌더니, 와락 여주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리 와, 차여주! 오늘 일 너 내가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 테니까!”

타악!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코앞까지 뻗어 온 주먹이 남태오에게 잡혔다.

“그만하라니까 내 말이 우습나?”

퍼억!

이어 단단해 보이는 주먹이 도지성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어으어억!”

남태오가 뒤로 물러서자, 도지성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버둥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상당히 충격이 큰 듯했다.

그대로 기절해 버렸는지, 꿈틀거림도 없었다.

뭐라 할 말이 더 없어, 여주는 고개를 돌렸다.

“무시합시다.”

남태오가 여주의 손을 잡아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안 실장이 대기한 차량에 오르기 전, 자신의 양복 쟈켓을 벗어서 여주의 어깨 위로 덮어 줬다.

“추울 텐데 입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여주는 그제야 제 상의가 찢어졌다는 걸 알아챘다.

밤공기는 찼고,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일단 탑시다.”

여주는 일단 남태오와 함께 뒷좌석에 탔다.

운전석의 안 실장과는 눈으로 인사를 주고받았고, 차는 부드럽게 달려갔다.

얼떨결에 타긴 했지만, 이미 그에게 민폐를 끼쳤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긴 했지만, 이 이상 그에게 도움만 받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집 주소, 도지성이 알고 있나 봅니다?”

“……네. 집 알아보러 다닐 때 도움 받은 게 있어서.”

신호에 잠시 걸렸을 때, 남태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는 유리 칸막이로 분리되어 방음이 됐다.

그럼에도 남태오는 목소리를 낮춤으로써 여주를 안심시켜 주려 했다.

“도움이 아니라 감시였을 텐데.”

“그건 대표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여주가 순순히 긍정하자, 남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안을 제시했다.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니까, 집 말고 다른 곳으로 갈 만한 장소는 없습니까?”

“글쎄요. 대표님. 집 말고 다른 곳이라면…….”

“가족이나 알고 지내는 믿을 만한 친구라든가.”

그러나 남태오의 말에 여주는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그의 말대로 그런 사람 하나쯤 있어야 하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이럴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을 테지.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군이 하나도 없었다.

적군만 수두룩했다.

“……그런 사람이 없네요. 언젠가 알게 되셨을 테지만, 제가 사실 고아거든요. 대표님.”

“하나도 없다는 겁니까?”

“네.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고민하길 잠깐, 여주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니, 이제 더 이상 고아란 배경은 그녀의 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조건은 결코 아니기도 했다.

그녀가 처한 현실을 모두 알고 있는 남태오 대표이니.

이쯤에서 그녀를 동정 어린 눈으로 본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생에서는 최소 둘은 내 편인 줄 알았지.’

전생에서는 그런 존재가 도지성과 박하나라고 여겼으니.

정말이지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고아였고, 죽을 때도 혼자였는데 말이다.

“그렇군요. 처음 알게 된 사실이네요.”

그러나 그의 눈길에는 동정의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

“저 괜찮습니다. 대표님. 집 안에서 문 잠그고 있으면 되죠.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집을 옮기려고도 생각했고요.”

여주 역시 도지성이 집 주소를 알고 있는 것이 꺼림칙했다.

언제라도 나쁜 마음을 먹으면, 해코지를 할 수도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까 봐서는 이미 남태오에게 제대로 맞고 뻗어 버렸으니, 자기 집에 가기도 벅찰 것이다.

“내가 안 괜찮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남태오가 고개를 저었다.

“신원 보장되고, 곤 작가를 알고, 믿을 만한 사람. 지금으로선 나밖에 없는데. 안 그렇습니까?”

“대표님께는 계속해서 안 좋은 모습만 보여드려서 죄송하네요.”

정말 그의 말대로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너무 많은 것을 들켜 버렸다.

그녀의 의지와 다르게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남 대표 앞에서 더 팔릴 쪽은 없을 줄 알았는데.’

단지 남태오가 저를 차여주 어시로만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저 남자는 내 독자이고, 내가 곤 작가인 걸 알고 있는데.

그가 생각했던 곤이란 소설가의 이미지와는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적어도 ‘헤어진 전 남친한테 가스라이팅 당하는 여자’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을 텐데.

과연 그에게 정체를 드러낸 것이 잘한 일인지, 후회가 들려고 했다.

턱 밑에서부터 처올라 오는 수치심 때문에 여주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다.

그의 생각보다 훨씬 한심한 사람으로 보여질까 봐, 그걸 생각하면 여주는 마음이 저릿저릿했다.

“차여주 씨. 나, 믿습니까?”

“그럼요. 물론입니다. 대표님은 믿고말고요.”

속으로 자책하며 어쩔 줄 몰라하던 여주였지만, 대답만큼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 나는 당신을 믿고 있다.

당신만 믿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건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그녀 혼자만의 신뢰였지만, 그녀는 현생에서도 그를 믿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독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한 그가 보여 준 배려에게 고마움을 느껴서,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여주가 믿는 건 그의 사업가적인 기질이었다.

“대표님께서 보시기에, 곤 작가라는 브랜드는 앞으로도 투자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계시는 거겠죠?”

그는 아무에게나 잘해 주고 관심을 주는 남자가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하든, 그는 GK기업 남 회장의 손자였다.

타고난 기업가 마인드가 피에 고스란히 흐르고 있을 터였다.

전생에서도 그가 곤 작가의 팬이었던가?

그건 몰랐지만 그때도 그는 그녀의 가능성에 많은 투자를 했던 인물이었다.

“투자 가치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남태오가 지그시 쳐다보며, 뒷말을 흐렸다.

그는 뭔가 더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그 화제로는 더 말이 없었다.

‘그래. 투자 가치가 있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자.’

여주는 제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오히려 안심했다.

이유 없는 친절은 불편하기만 했다.

이유 없는 동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행스럽게도 남태오 대표는 그 둘 모두를 베풀지 않았다.

“일단 내가 머무는 펜트하우스로 가죠.”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아니, 고마워할 거 없습니다.”

이어지는 남태오의 말이 여주에게는 어떠한 말보다 위로가 됐다.

“나는 차여주가 아니라 곤 작가를 돕고 싶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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