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어. 난데, 저 수석 입학생이라는 차여주에 대해 알아봐라.’
결정적으로, 박 회장은 그날 비서에게 차여주에 대해 뒷조사를 지시했었다.
조사 결과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몰래 통화 내용을 엿들은 박하나는 그때부터 차여주를 미워했다.
박 회장의 시선이 가장 마음에 걸렸었다.
차여주를 보던 시선은 단순히, 첩 삼을 여자나 보던 그런 시선이 아니었다.
그런 질 떨어지는 시선이 아니라, 좀 더 인간적인 시선이었다.
그런 시선을 정작 딸인 박하나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박 회장이 예전에 아끼던 여자가 글을 좀 썼었다며?’
박 회장의 환심을 얻기 위해 문창과를 갔던 박하나였다.
그녀더러 대학 진학을 하라고 한 건 은숙이었다.
어떻게든 딸더러 환심 좀 사 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억지로 들어간 대학이었으니, 박하나는 모든 것이 불만이었다.
차여주는 입학할 때부터 모든 교수들의 관심을 받았다.
거산대학 문학상에서 아예 수상도 못하게 되자, 박 회장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수상을 위해서 심사 위원 중 일부를 돈으로 매수까지 하려고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건 마땅히 자신이 받았어야 할 관심이었다.
박하나는 참을 수 없었다.
저보다 생김새도 환경도 볼품없는 애가 글 쓰는 재주 하나로 그녀에게 올 다른 사람들의 환호와 관심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
“재수 없는 차여주.”
박하나에게도 차여주는 끔찍했다.
겨우 등단을 하고 나서야, 박 회장은 다시 그들 모녀를 만나 줬다.
재벌 첩과 그 자식으로서 품위 유지라는 명목으로 돈이 주어졌지만.
그깟 푼돈에 만족할 박하나가 아니었다.
박하나는 어떻게 해서든, 정식으로 박 회장의 호적에 오르고 싶었다.
“편집장님. 나 박하나예요. 차여주 대타, 내가 하고 싶은데요. 지금 잠깐 이리 와 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차여주처럼 되어야만 했다.
그러면 박 회장의 환심을 살 수 있을 터였다.
* * *
박하나의 연락을 받고 나타난 도지성은 분통을 터트렸다.
“한발 늦었어. 차여주 그 여자가 무슨 수를 썼는지, 남 대표가 이미 곤 작가 만났대.”
“벌써? 그렇게 빨리요? 정말 차여주가 남태오 대표랑 만난 거래요?”
차여주가 무슨 수를 어떻게 썼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남 대표가 이미 그의 형인 도지철 사장과 얘기를 끝냈다는 거였다.
그 내막에 대해 도지철 사장은 동생에게 전혀 알려 주지 않았다.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말았다.
“원래 얘기됐던 선투자금의 30%만 지급하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려는 모양이야.”
그도 출판사 사장이자 형인 도지철한테 깨지고 오는 길이었다.
차여주를 만나 한바탕하기 전에 기분이나 풀려고 온 거였다.
박하나는 그에게 그런 존재였다.
“근데, 누구랑 식사 끝난 거야?”
“자기. 내가 누구랑 식사했을 것 같아요? 맞춰 봐요.”
“박하나. 지금 너랑 농담 따 먹기 할 기분 아냐.”
맞추지 못하는 도지성에게 박하나가 한쪽 입술만 끌어 올렸다.
“당신 전 여친, 차여주랑 먹었어요. 아주 예쁘고 비싼 구두 신고 왔던데. 당신이 먼저 바람피우니까, 차여주도 어디 가서 맞바람이라도 피우는 거 아닌가 몰라.”
“그건 또 뭔 소리야?”
“그냥 내가 말해 버렸다고요. 차여주 걔한테 나랑, 당신이랑 호텔 갔다고.”
“너 미쳤어? 차여주가 알았다고?”
도지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박하나가 그의 손을 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일단 진정하고 들어 봐요. 차여주 걔도 진짜 웃겨. 호텔 룸도 갔다는데, 안 놀라는 거 있죠?”
“그래서, 고작 차여주 반응 보겠다고 그런 짓을 했다고?”
“사실은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눈 하나 깜짝 안하지.”
도지성의 표정이 일순 굳어 버렸다.
박하나가 생각보다 더 깜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거다.
근데 평소처럼 그게 귀엽기는커녕,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박하나. 지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리가, 또 엄청 진지한 사이는 아니지.”
“하.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차여주 걔도, 너한테 듣고 나서 너무 놀라서 그런 걸 거야. 내가 설마 미쳤다고 차여주를 버리고 박하나 너랑……. 그 정도로 주제 파악 못 하는 애였어?”
도지성은 정색하면서 말했다.
박하나와 관계를 진전시키기에는 아직 상당히 일렀다.
차여주가 정말 죽어 버리지 않는 한, 박하나와 진지한 사이가 될 생각까지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차여주 대타로 내세울 요량이었고, 잠깐 즐기는 상대라고만 여겼다.
“잠시만요. 그래서, 지금 나랑 엔조이, 뭐 그랬다는 거야?”
“그러는 박하나 넌, 뭘 바랬는데?”
“차여주 그 여자, 암 환자랬다니까? 걔 얼마 못 산다고!”
“그건 아직 몰라. 요즘 기술 좋아서 완치도 가능해.”
그렇게 말하는 도지성은 누가 봐도 차여주의 완치를 바라는 모습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박하나가 깔깔 웃었다.
“지성 씨. 자기, 진짜 잔인한 사람이야. 차여주 이용 가치가 없어질 때까지 다 뽑아 먹고 버리겠다는 거구나? 그렇죠?”
“……날 너랑 똑같은 취급하지마.”
“그래요. 그렇다고 해. 당신 참 연기 잘한다니까.”
속내가 고스란히 읽히자 찔린 도지성이 괜히 더 큰소리쳤다.
“박하나 네가 뭘 알아? 우린 헤어졌어도 여전히 차여주 담당자는 나라고.”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당신이 나랑 바람피운 건 사실인데?”
“네가 날 꼬신 거잖아. 너처럼 제2의 차여주 만들어 달라고 나한테 줄 서서 꼬리친 년들이 너 하나뿐이었는 줄 알아?”
“아아. 그러셔? 그렇게 나오면 나라고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박하나는 당장이라도 차여주가 가던 길에 사고가 나길 바랐다.
차여주만 죽으면 이 짜증 나는 일이 전부 사라질 것 같았다.
“한 번 대 주면 책 내 주겠다고, 순진한 작가 지망생 꼬드겨서 가지고 논 편집자 되고 싶어요?”
박하나는 대범하게 테이블 밑으로 도지성의 허벅지 위로 손을 올렸다.
“야, 박하나. 허세 그만 부려. 어차피 너나 나나 지금 이래 봤자 둘 다 손해야. 그 정도는 알잖아?”
도지성은 박하나의 손을 내처 버리고는, 떠날 준비를 했다.
“그래서 지금 또 어디 가는데요?”
“네가 친 사고 수습하러 가야지.”
“흥. 가서 무릎이라도 꿇으려나 보지? 대신, 나 먼저 데려다줘요.”
도지성을 따라서 일어난 박하나가 팔짱을 꼈다.
내친 김에 입술까지 쪽, 부딪쳤다.
“뭐,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도지성은 역시나 박하나를 적극적으로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언제나처럼 여지를 주겠다는 거였다.
아직은 도지성에게, 박하나가 그만한 이용 가치가 있었다.
‘두고 봐. 차여주.’
박하나는 박하나대로 이날의 모욕감을 잊지 않기로 다짐했다.
날 첩 딸이라고 업신여긴 거,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 * *
여주가 집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도지성의 차량으로 보이는 게 오피스텔 앞에 있었다.
‘뭐야. 그 사이에 박하나가 쪼르르 달려가서 일렀나 보지?’
혀를 찬 여주가 집 말고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나, 생각했다.
오늘 저녁은 박하나 하나를 상대한 것만으로도 기력이 다했다.
도지성까지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뭐 좋은 얼굴이라고, 헤어진 마당에 또 본단 말인가?
그때 여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남태오 대표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네. 대표님.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 있으세요?”
- 깜박했습니다. 아까.
“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
- 작가 사인 받는 거 말입니다.
“……아아. 사인이요.”
- 난 오늘 꼭 받고 싶은데.
“저기, 대표님. 제가 이미 집 근처라, 시간도 늦었고. 이번주 내로 대표님 시간 괜찮으실 때 제가 회사 건물로 찾아뵙는 게 어떨까요?”
- 아니. 오늘 해 주는 걸로 하시죠. 선생님.
“그, 그러실까요? 대표님께서 그러시겠다면.”
- 내가 맞게 찾아온 것 같은데. 지금 보이거든요.
“네?”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마치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그가 달려올 것 같았다.
그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역시 익숙하지가 않다고, 여주가 생각할 때였다.
“야, 차여주! 너, 전화도 안 받고 어디 갔다 이제서야 나타나?”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세게 움켜잡았다.
여주가 그의 손을 쳐내며, 천천히 돌아섰다.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도지성 씨가 여긴 어쩐 일이시죠?”
“아무리 우리가 헤어졌다고 해도, 우리가 어디 보통 인연이야? 나 네 남친으로서 온 거 아니고 네 담당자로서 온 거야. 내 말 알아들어?”
“그런 얘기라면 굳이 이렇게 얼굴 보고 할 필요 없지 않나요?”
“뭐라고? 이게 진짜 꼬박꼬박 말대꾸네? 너 진짜 뭐 잘못 먹었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너 원래 이런 성격 아니었잖아!”
도지성이 두 눈을 부릅뜨고 윽박질러도, 여주는 전생처럼 그가 두렵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렇게 당당하게 지껄이는 것도 재주였다.
“그건 도지성씨가 더 이상 상관할 바 아니고요. 그냥 신경 끄고 이만 가죠.”
그를 피해, 집으로 가려는 여주를 도지성이 또다시 붙잡았다.
“너 박하나한테 다 들었다며. 근데 왜 화도 안 내냐? 진짜 내가 바람피운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 그랬던 거야? 이거 진짜 무서운 애네.”
“됐고요. 그만하자고요. 다 끝난 사이에 구질구질하게.”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도지성에 어이없었지만, 그녀의 귀한 시간을 이렇게 쓸 수 없었다.
“야, 어디 가냐고. 내 얘기 다 안 끝났는데!”
쫘아악!
도지성의 손에 여주의 옷이 뜯겨져 나갔다.
시간이 아까워 죽겠는 여주가 얼굴을 팍 찡그리는데.
“그 손 내리지 그래?”
끼이익. 멈춰 선 차량에서 남태오의 긴 다리가 뻗어져 나왔다.
“아니, 대표님께서 여기는 왜. 차여주 어시랑은 더 이상 볼일이 없으실 텐데요.”
“차여주 어시 말고, 곤 작가 보러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