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호텔에 밥을 먹으러 갔다고?”
“응. 그렇다니까. 그냥 말 안 할까 하다가, 비밀로 할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여주는 입맛이 뚝 떨어지는 걸 느꼈다.
박하나가 말하지 않았어도, 호텔 얘기를 꺼내려고 했었다.
주도권을 빼앗긴 것에 대해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정 그 얘기를 그렇게 빨리 하고 싶다면, 맞춰 줘야지.
“그래서, 식사는 맛있게 했고?”
“응. 엄청 맛있지는 않아도 그냥저냥. 참, 룸도 넓고 분위기 좋더라고.”
“알지. 나도 그날 거기 갔었거든.”
“어머. 진짜?”
“진짜지 그럼.”
여주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며, 박하나의 표정을 살폈다.
방금 제 입으로 그냥 밥 먹으러 갔다 해 놓고, 룸 컨디션 얘기를 하다니.
머리가 나쁜 건지, 나쁜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
전자라면 앞으로 여주가 박하나를 요리하기 쉬울 것이나.
후자라면 좀 골치가 아플 것이다.
“그럼, 여주 너 거기서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걸 봤다는 거네?”
“응. 봤는데 왜?”
“아니. 봤으면, 그럼 그때 아는 척이라도 하지 그랬어. 혹시, 너 편집장님이랑 나랑 둘이 오해하고 그런 거 아니지?”
“오해? 내가 무슨 오해를 해?”
“아니. 그렇잖아. 너랑 사귀는 남자가 나랑 단둘이 있었다는데, 여주 너는 화도 안 나?”
“화나고 말 것도 없어. 이미 헤어진 사이라.”
“헤어졌다고? 왜, 갑자기?”
“바람피웠거든.”
여주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반면, 박하나는 포크로 집어 먹고 있던 고기를 접시로 떨궜다.
“……진짜? 그럼, 그 바람피운 상대가 누군지는 알고?”
“글쎄, 나는 별로 알고 싶지가 않아서.”
여주가 그 말을 하면서, 제 접시에 놓인 고기를 집어 먹었다.
슬쩍 시선을 올리자 박하나는 손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어디 어떻게 반응하나 지켜봐 주마.
“……여주 너 진짜 대단하다? 남친이 바람을 피웠는데, 아무렇지가 않다니.”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 거에 신경 쓰고 싶지 않더라고.”
여주는 먹던 포크를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몸이 안 좋아?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데?”
“그냥 좀 안 좋아…….”
남 걱정이라곤 해 본 적이 없을 테니, 어색하기 짝이 없는 박하나의 얼굴을 보면서 여주는 말을 흐렸다.
“……그럼 여주 너, 헤어지길 잘 한 것 같아. 나 사실 편집장님한테 관심 있었는데 너 때문에 말 못 하고 있었거든?”
“그랬구나. 전혀 몰랐는데.”
“응.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더라고.”
“그래. 그럼 나 상관 말고 고백해.”
“정말, 그래도 돼?”
이쯤에서 여주는 제 패를 먼저 까기로 했다.
곧이어 바로 박하나의 패를 까 버릴 참이었다.
그러면 박하나 입장에서 좀 공평하게 느끼려나?
“응. 나 어차피 암이거든.”
“저, 정말로? 어쩌다가…….”
“걱정 안 해 줘도 돼. 암이라고 다 죽는 거 아니거든.”
“그, 그거야 그렇지만. 근데 설마 이거, 몰카 그런 거 아니지?”
“아니니까 걱정 말고 더 먹어.”
여주는 어서 더 먹으라고 손짓을 했다.
박하나가 뒤늦게 미안하다며 웅얼거렸다.
눈을 자꾸 찡긋거리는 걸 보니 우는 흉내라도 내고 싶나 본데.
눈꼽만큼도 상대를 가여워하는 마음이 없으니 쉽지 않나 보다.
‘어떻게든 쥐어짜려고 애쓴다.’
여주가 재차 더 먹으라고 권하자, 박하나가 막 포크를 입으로 가져갔을 때였다.
“근데 하나야.”
“어?”
“편집장님도 알고 있어? 너 박 회장님 본처 자식 아닌 거.”
“……차, 차여주 너.”
쨍그랑!
이번에는 박하나도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포크가 접시에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소음이 났다.
사실, 박하나의 콤플렉스는 전생에서도 ‘출생의 비밀’이었다.
어지간하면 현생에서도 모른 척해 주려 했지만, 하는 짓을 보니까 그럴 이유가 없었다.
“회장님이라니, 내가 어떻게 그런……. 여주 네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몰라도 아냐, 절대 아니야.”
뒤늦게 박하나는 부정했지만, 글쎄.
격한 부정은 긍정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에이. 하나 너도 참. 그런 대단한 사실을 언제까지 숨기려고 했어?”
“야. 차여주.”
“그렇잖아. 나 같은 고아도 아니고, 정말 부럽더라.”
“야! 내가 아니랬지! 이게 어디서 겁도 없이 입을 함부로 놀려?”
박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잡히는 대로 물컵을 잡고 휘둘렀다.
촤아악!
여주의 얼굴 위로 찬물이 쏟아져 내렸다.
여주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N유업 박 회장님, 맞지? 입학식 때, 너랑 차 타고 같이 오셨던 거 봤어. 그런데 이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도 돼?”
“네가 그걸 봤다고? 근데 그걸 왜 이제 얘기해?”
“이제 기억이 났을 뿐이야.”
전생에서 박하나는 대외적으로 재벌 자식이라고 말하고 다닐 수 없었다.
박 회장의 혼외 자식일 뿐만 아니라, 타고난 인성이나 하는 짓이 품위가 떨어졌다.
그 또래보다는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런 환경에 대해 콤플렉스가 엄청났다.
여주는 지금 그걸 살짝 건드려 줬을 뿐이었다.
“아, 미안. 너한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일 텐데.”
전혀 미안하지 않았지만, 여주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너, 너어. 차여주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나 엿 먹이려고.”
“그럴 리가. 이 집 스테이크 진짜 맛있다, 더 안 먹니?”
여주가 씨익 웃으며 냅킨으로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 냈다.
보란 듯이 포크를 집어 스테이크 조각을 집어 먹었다.
이미 식어 버린 스테이크였지만, 아까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됐어. 밥맛 다 떨어졌고, 너랑 밥 먹다가는 체할 것 같아.”
“벌써 가게? 아직 많이 남았는데.”
“너, 어디 가서 내 얘기 했단 봐. 내가 너 죽여 버릴 테니까.”
박하나의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어지간히도 제게 들킨 것이 억울한 모양이었다.
금방이라도 여주를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는데, 레이저 나오는 줄 알았다.
“글쎄. 박하나 너야말로 손버릇 조심해야지?”
“뭐라고?”
“그렇게 함부로 남의 얼굴에 물 끼얹으면,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나쁜 마음 먹게 되잖아, 안 그래?”
박하나가 부들거리더니 이내 켁! 기침을 하더니 제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헛구역질까지 하는 걸 보고,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 마. 도지성은 아직은 네 비밀을 몰라.”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우욱!”
“그럴 리가. 앞으로 처신 잘하라고. 저녁 잘 먹었어.”
“야, 너 거기 안 서? 우우욱!”
여주는 뒤돌아서 먼저 자리를 떴다.
상대의 약점을 먼저 잡고 있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갑자기 물을 맞기는 했지만, 속은 후련했다.
만약 박하나가 진짜 미안해하거나 울었다면, 피곤했겠지만.
본성을 드러내 보였으니 앞으로 공격하기 쉬울 것이다.
‘박하나 너는 대체 왜 나를 그렇게 시기하고 미워했던 거지?’
전생에 여주는 무척 궁금했었다.
얼마나 사람을 증오하면, 그 깊이가 얼마나 깊으면.
그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앗아 가 버릴 수가 있는 걸까?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현생에서 박하나를 무너트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첩의 딸이던 박하나가 어떻게 본처 딸로 둔갑했던 걸까?
그건 차차 지켜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대하라고, 박하나.
* * *
“젠장, 젠장.”
박하나는 여주가 자리를 뜨고도 한참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여주를 한바탕 골려 주고 그 도도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망가지는 꼴을 구경했어야 했다.
그런데, 당한 건 오히려 제 쪽이었다.
호텔 룸 얘기까지 꺼내 도지성과 바람났다는 걸 대놓고 말해도 흥분하지 않았다.
그보다, 차여주는 좀 이상했다.
마치 박하나의 비밀에 대해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차여주 저게 어떻게 안 거지? 내 입으로 말하고 다닌 적은 없는데.”
박하나는 불길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여주가 자신을 박 회장의 혼외 자식이라고 확신한 근거가 부족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차여주가 박 회장을 따로 만난 게 아니라면 내 정체를 알 수가 없다고!’
애초에 차여주가 알 수가 없는 정보였다.
그녀가 가짜 재벌이라는 건, 재벌계가 아니면 알 수 없었다.
차여주의 정체가 곤 작가라고 해도, 그건 알기가 불가능한 정보였다.
‘차여주 네가 생각보다 멍청하지는 않다는 건 알겠어.’
초조해진 박하나는 손톱을 입에 넣고 물어뜯었다.
네일 파츠와 스톤이 뜯겨 나가는 줄도 모르고 머리를 마구 굴렸다.
박 회장이 평생놀고 먹게는 해 준다고 했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말라고 했었다.
그러니까 막상 이게 알려지면 박 회장의 원조가 끊기는 셈이었다.
설마 박 회장을 따로 만났던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앞으로도 어떻게든 그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망할 차여주. 기억력은 쓸데없이 좋아 가지고.”
박하나에게 대학 입학식은 지금까지 인생 중 끔찍한 기억 중 하나였다.
바로 그날부터, 차여주와 악연이 시작됐다.
당시, 박 회장은 재단 후원 관련자로 참석했었다.
단상 위에 올라온 여학생이 바로 차여주였다.
“뉘 집 딸래미인지 참 잘 키웠어. 수석 입학생이랬지, 아마.”
그녀가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옷차림에, 저보다 별로인 외모였다.
부모도 없이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청승맞기 그지없었다.
거기다 옆을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박 회장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때 우리 엄마가 질색하는 게 참 볼만했는데 말이야.’
박하나의 친모인 이은숙은 눈치코치 없이, 새로 젊은 첩 들이는 거 아니냐고 불안해했다.
물론 박 회장의 전적을 생각하면 의심이야 당연했다.
그러나 그날의 박회장의 눈빛은 좀 색달랐다.
여자를 보면 돌아가던 눈이 아니라,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이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그런 우수에 젖은 눈빛을 박 회장에게서 봤기 때문에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이 소름이 끼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