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남 회장은 아무리 피가 섞였다고 해도, 가차 없었다.
그건 자신을 배신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따라 집 나간 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아들이 죽고, 기어코 그 여자에게서 본 손주를 데려와서도 그랬다.
철저한 장사꾼 기질로 태오의 능력을 알아봤고, 투자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는 손자 녀석의 부탁이라고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오야. 너, 이참에 장가나 가라.”
남 회장이 또다시 결혼 얘기를 끄집어낼 줄은 몰랐다.
태오가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남 회장이 바라던 건 하나였다.
아무리 일이 좋다지만.
아무리 능력이 우선되는 사회라지만.
그렇게 키워 낸 것도 남 회장이었지만.
서른이 다 되도록 여자 하나 없는 건 비정상이라면서.
“제 부탁은 없던 일로 하죠.”
태오는 식탁 위 젓가락 하나 들지 않은 채였다.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려고 하는 꼴을 볼 남 회장이 아니었다.
“앉아! 너 진짜 게이냐?”
“회장님, 게이가 뭔지는 알고 물으시는 겁니까?”
“알다마다! 아니면 뭐 바이냐?”
“가 보겠습니다.”
남 회장은 쓸데없이 신세대적인 면모가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나 줄임말을 곧잘 써먹었는데, 안 어울렸다.
“인맥 동원해 줄게. 잔말 말고 그 여자 데려와.”
“그건…….”
처음으로 냉랭하던 태오의 얼굴에 곤란함이 번졌다.
그는 그 여자가 남 회장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 어떤 사이냐고 설명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이놈아. 수술 빨리 받게 해 달라는 거 여자 아니냐? 구두도 사 줬다면서! 나 닮아서 냉정하기 짝이 없는 네가 뭔 사연이 있다고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해? 내 말이 틀렸냐?”
남 회장은 감 잡았다는 듯, 강력하게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렇게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 참! 너, 벌써부터 여자한테 잡혀 사냐? 네 애비랑 아주 똑같구나.”
“부모님 얘기는 하지 마시죠.”
태오가 버럭 성질을 내자, 남 회장이 씨익 웃어 보였다.
이미 약점을 잡은 승자의 미소였다.
“그 여자 데려와서 결혼하고 너, 내 회사로 들어와.”
“수지 타산이 안 맞습니다.”
태오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남 회장은 제가 옆에 끼고 가르쳐 키운 손자답다고 여기는 한편, 오늘만큼은 그 역시 물러서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놈아. 나도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10년 전에도 그 말씀, 하셨습니다.”
남 회장이 약한 소리를 하자, 태오 역시 바로 받아쳤다.
서로 막상막하로 노려보는 두 사람이었다.
“너! 그럼 그렇게까지 해 주면서 그 여자랑 결혼도 안 할 거냐?”
결국, 아쉬운 쪽은 남 회장이었으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타일러 보기로 했다.
당사자인 태오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남 회장에게는 인생의 남은 숙원과도 같았다.
귀하게 키웠던 외동아들이 여자를 데려온 날.
결혼 허락을 안 해 주자, 저희 둘끼리 식도 안 올리고 혼인 신고를 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살면서도 소식이 없더니,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
그때의 충격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의 생살이 쥐어뜯긴 느낌이었다.
그러니 손자인 태오만큼은 제대로 식도 올려 주고,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세상에 남녀 관계가 다 그런 쪽으로만 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태오는 굽힐 뜻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럼 고집이라도 그만 부리든지! 너 내가 정해 준 집안 딸이랑 결혼해라. 싫다 소리 말고.”
그래서 남 회장도 또 버럭 외쳐 버렸다.
“저더러 아무렇게나 살라는 말씀이십니까?”
“답답한 놈! 금방 서른 될 놈이 여자 하나 없는 게, 아무렇게나 사는 게 뭔지는 알아? 아이고!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네놈 말대꾸 들어주기도 힘들다.”
남 회장은 골골대는 척, 기침을 해 댔다.
하지만 그의 핏줄답게, 태오도 꺾일 줄을 몰랐다.
“어머니는 더 이상 안 계시니 그렇다 치죠. 태희는, 회장님 손녀입니다. 제 동생이고요.”
“여기서 그 애 얘기는 왜 꺼내?”
“인정할 건 인정하세요. 회장님이야말로 그 연세에 고집 좀 그만 부리시죠.”
“뭐, 뭐야 이놈아?”
“그거 똥고집입니다.”
태오는 남 회장이 또 잡을세라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가 버렸다.
“후우.”
남 회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하던 기침을 하려니까 괜히 더 목이 끓는 것 같았다.
그는 시원한 물 한 모금이 간절해졌다.
“진 여사! 진 여사 좀 이리 와 봐.”
그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 가정부 진 여사가 나타났다.
“네. 회장님. 여기, 좋아하시는 냉채랑 약과 좀 드셔 보세요.”
아직 냉채를 먹을 날씨는 아니었지만, 남 회장이 워낙 찬 걸 좋아했다.
싹싹하게 입안에 떠 넣어 주는 진 여사의 태도에 그는 마음이 풀렸다.
“날도 더운데 무슨 요리를 했어.”
“회장님께서 맛나게 잡수시면 그만인걸요. 이런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허허 사람 참.”
그가 적당히 단 맛에 흐뭇해하며 표정이 풀어졌다.
진 여사는 그 사이에 얼른 말했다.
“좋게 말로 하시지 않고요. 다 알아들을 텐데.”
“응?”
“남 대표 말씀이에요. 회장님 잘난 손주요.”
못 알아듣는 척하는 남 회장에 살포시 웃는 것까지, 진 여사는 요령이 있었다.
“아, 그 녀석. 누구 닮아서 고집이 보통이어야지.”
“제 보기에는 회장님이랑 손주분들 다 똑 닮았어요.”
“끄응.”
남 회장이 부정은 하지 않자, 진 여사가 연이어 대화를 진행했다.
“듣자 하니 태희 올해 결혼한다면서요. 회장님께서는 정말로 혼주석 비워 두게 하실 참이에요?”
“아 내가 괜히 그래? 지 부모 둘이 내가 반대하는 결혼 하고 애 낳고 살 때부터 정해진 결론이었어.”
“회장님께서도 참……. 지금 생각해도 참 안됐어요. 안 그래요? 회장님. 태오나 태희나 참 잘 컸어요.”
“나 설득하려면 관두게. 올해는 꼭 남태오 저 녀석, 장가보내고 말 거야.”
남 회장은 얼마 전 건강 검진을 받고 왔다.
겉으로는 정정해 보여도 그의 나이가 벌써 여든이 넘었다.
이 나이면, 언제 간다고 해도 이상하지가 않았다.
이미 남 회장은 어떻게 해서든 올해 안에 태오를 장가보내기로 결심을 굳혔다.
“아유. 누가 말리겠어요. 우리 회장님 고집.”
진 여사가 맞장구를 쳐 주자, 남 회장은 본심을 드러냈다.
“진 여사. 그, 결혼한다는 놈 어떤 집안인지 알아봐.”
“네?”
“태희랑 결혼한다는 놈 말이야. 팔다리는 멀쩡한지, 부모는 멀쩡히 살아 있는지 형제자매는 몇인지, 뭐 해서 먹고 사는지 말이야.”
“네. 회장님. 그럼 제가 태희한테 가서 슬쩍 물어볼게요.”
“그건 알아서 하고, 최대한 빨리 알아봐.”
남 회장은 거기까지 말하고 약과 하나를 집어 먹었다.
손주 두 놈이 있는데, 손녀고 손자고 그의 뜻대로 되는 애가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지들 고집대로만 하려 드는 건지.
생김새에 그런 성격까지, 저희 부모를 똑 닮았다.
‘두고 봐라. 내 올해 태오, 너 이 녀석 꼭 장가보내고 만다.’
남 회장은 태오에게 생긴 여자의 정체가 제일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쪽은 태희보다는 좀 더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태오 몰래 알아보려고,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나야. 거, 안 실장 좀 이리로 오라고 해 봐.”
안 실장은, 태오가 수족처럼 달고 다니는 이였으니 이 방법이 제일 빠를 것이다.
“대체 어떤 집 딸이길래 꽁꽁 숨기는지 내 보겠다 이거야.”
전화를 끊고 나서, 남 회장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여주는 박하나와 유명 레스토랑에서 만나고 있었다.
박하나가 정한 장소였는데, 여주는 태오가 사 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여주야, 너 그 구두 네가 산 거야?”
보자마자 박하나는 구두부터 관심을 보였다.
“아, 이거 선물 받았는데. 어때, 괜찮아?”
“엄청 예쁜데. 그거 편집장님이 사 주신 거야?”
“으음. 그건 아니고. 그보다…… 뭐 시켰어?”
“아 여기는 다 괜찮아. 여주 넌 잘 모를 것 같아서, 그냥 적당히 내가 알아서 골랐어.”
“흐응. 그래.”
여주는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박하나는 이런 곳에 익숙해 보였다.
알아서 잘 시켰으려니 여긴 여주가 괜스레 제 옷을 만지작거렸다.
백화점에서 구입해 입은 옷과 딱 맞춘 것처럼 어울리는 구두까지.
화장실 거울로 비춰진 제 모습은 박하나와 비교해 뒤처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박하나는 늘 부잣집 막내딸 이미지였다.
“그 구두 되게 비싼 건데. 사실 나도 너무너무 사고 싶었거든.”
“아아. 정말?”
“응. 그걸 선물로 받았다니, 정말 부러운걸? 누군지 너무 궁금한데, 비밀이야? 혹시 남자야?”
박하나는 그녀의 구두가 정말로 탐이 나는 눈치였다.
여주로서는 이제 구두 얘기는 그만하고 싶었지만 말이다.
“그냥 아는 분인데, 하나 넌 잘 모를 거야.”
“아아. 그냥 아는 분이었구나.”
박하나는 여주의 대답을 듣고 바로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여자한테 구두를 선물해 주는 게 남자 아니면 또 누구겠어?
제가 가지지 못한 물건이 여주의 손에 들어가니까 화가 났다.
‘뭐야? 차여주, 꼴에 남자 생긴 거 아냐? 돈 많은 남자라도 물었나?’
도지성이 저랑 바람피우고 있으니, 차여주도 그럴지도 모르지.
박하나는 저 좋을 대로 해석했다.
잠시 후, 음식들이 차례로 나오고 박하나가 입을 열었다.
“참. 여주 너한테는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나, 사실 며칠 전에 편집장님이랑.”
“하나 너, 도지성 편집장이랑 호텔 갔다는 얘기 하려는 거야?”
“어? 어떻게 알았어? 근데 호텔이라고 하니까 좀 어감이 그렇다. 난 그냥 편집장님이랑 호텔에 있는 레스토랑에 밥 한 끼 먹으러 간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