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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팅 웨딩-17화 (17/60)

17화

“그럼, 잠시만요. 대표님. 제 사이즈가 그러니까…….”

여주는 침착하려고 노력하며 자신의 발 사이즈를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면 구두 가져오게 하죠.”

남태오는 안 실장에게 연락해 여주의 구두를 구입하도록 지시했다.

최대한 빨리 가져오라는 말로 전화를 끊고 나서야, 그는 자각했다.

안 실장은 틀림없이 익숙한 남 회장의 백화점으로 갔을 것인데, 예감이 별로였다.

‘설마, 회장님께서 눈치채실 리가.’

그런 관계는 전혀 아니었지만, 여자 구두를 사 오라고 했다면 분명 의심할 분이었다.

그에게로 들어오는 맞선 제의를 전부 걷어찼기 때문에, 노발대발하셨던 분이니.

‘잊자고.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남태오는 그보다 지금 곤 작가와의 만남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블랙 턱시도 차림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조부인 남 회장과 저녁 약속이 잡혀 있었다.

그것과 별개로 독자로서 작가를 만나는 자리니만큼, 특별히 예를 갖춘 것이었다.

그는 집요하다고 할 만큼 여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비스켓 하나를 집어 든 손과 입술로 가져가는 움직임까지.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좀처럼 존재를 드러내는 법이 없던 상대이니 더욱 그랬다.

“저, 대표님. 제 발은 이제 그만 좀 놓아주시면…….”

“아. 그러죠.”

그는 여주의 말에 손을 내렸다.

제 손으로 움켜잡기도 힘들 만큼 가느다란 발목이었다.

뼈마디가 저렇게 얇다니.

호리호리한 체형인 줄은 알았지만, 만져 보니 여자는 생각보다 더 말라 있었다.

상대의 정체를 알고 나서일까.

여자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던 평소의 그와 달리 유심히 보고 있었다.

“아. 대화할 때 사람을 빤히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남태오가 말했다.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주는 이미 그의 시선에 익숙해진 뒤였다.

전생에서도 그는 저렇게 사람을 노골적으로 보면서 대화를 했다.

그때는 그의 눈을 보기가 솔직히 어려웠지만, 지금은 한결 나았다.

남자는 은인이었고, 제가 쓰는 글의 팬이라고 하니 경계심이 옅어졌다.

“신기하네요. 나에 대해 알게 될 기회는 별로 없으셨을 텐데.”

“……그냥 좀 여기저기서 들은 것도 있다고 해 둘게요.”

남태오의 말에 여주는 하마터면 제가 말실수를 할 뻔했다는 걸 알았다.

전생에서 그를 여러 번 접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그와 접점이 별로 없으니 주의해야 했다.

“더 드시죠. 선생님. 아직 시간 좀 남았는데.”

“네. 대표님도 드세요.”

남태오는 재차 먹을 것을 권했고, 여주도 권했다.

그녀는 자신이 단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카롱을 먹어 보니 많이 달지 않고, 고소한 필링이 맛있었다.

“와인 가져가시는 김에, 간식도 챙겨 드리면 어떠신지?”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남태오 역시 원래 단것을 잘 먹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달게 먹었다.

누구와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즐거움이 달라진다던데.

지금이 그랬다.

아주 오래전.

어린 그를 데리고 그의 모친은 자주 다과 시간을 가졌다.

홍차를 끓여 주고, 이런 저런 차의 맛을 알려 주고 맛난 과자를 먹었다.

그는 지금처럼 소파에 앉아,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동동거리며 모친의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그의 모친은 셜록 홈즈 팬이었다.

보통 어린아이에게 들려주는 동화가 아닌,

아주 미스테리한 사건들을 해결하려는 탐정들의 이야기였다.

‘곤 작가를 만나려고 투자금을 흔든 보람이 있군.’

그는 아주 오랜만에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모친은 이미 세상을 떠나, 다시는 그 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동생인 태희는 어렸을 때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갖고 있는 모친에 대한 그리움을 같이 나눌 수 없었다.

여전히 그의 동생은 어렸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

그런 동생 앞에서 그가 어린아이처럼 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여주가 질문을 하자 그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억을 회상하는 걸 멈췄다.

“실례가 안 된다면, 대표님께서는 어떻게 제 소설을 읽게 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여주가 그가 어떻게 곤 작가의 팬이 됐는지, 그 계기가 궁금했다.

처음으로 현실에서 만나 대화까지 하게 된 팬이었으니 꼭 물어보고 싶었다.

“돌아가신 내 어머니께서 추리 소설을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네.”

“어릴 적에 부모님과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두 분은 돌아가시고 나와 동생만 남았죠. 사실, 조부께서는 두 분의 만남을 반대하셨으니…… 자연스레 어머니와 관련된 것들을 모두 덮어야 했죠.”

“…….”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영화를 보러 가자더군요. 선생님의 첫 작, 한몸. 그 작품이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나니, 내 잊어버린 유년 시절의 과거를 되찾은 것 같았습니다.”

그의 유년 시절 얘기는 처음 들었다.

전생에서는 그를 통해 들을 수 없었으니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녀가 집중하는 자세를 취하자 그가 미소를 걷어 냈다.

아주 잠깐 그에게서 풍겼던 인간미가 사라졌다.

“……구구절절한 얘기까지는 안 하려 했는데.”

“아닙니다. 대표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 감사히 잘 들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선생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습니다. 이제 돌아가도 좋습니다.”

때마침 안 실장이 들어왔고, 새로운 구두를 놓고 갔다.

베이지빛의 투명한 색감이었는데 척 보기에도 고급져 보였다.

여주가 신고 온 구두보다 훨씬 굽이 높았는데, 막상 신어 보니 발이 편했다.

“역시, 잘 어울리네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대표님.”

“피부 톤이 밝으셔서 그런가.”

남태오의 스스럼없는 칭찬에 여주는 좀 부끄러웠다.

떠나기 전, 그녀는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저, 대표님. 다음부터는 저를 그냥 차여주로만 대해 주시면 좋겠어요. 곤 작가로서는 아마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네요.”

“편하신 대로. 그럼 조심히 돌아가요. 차여주 씨.”

그는 여주가 돌아가는 길에도 안 실장에게 데려다주도록 지시했다.

덕분에 그녀는 편하게 집까지 갈 수 있었다.

* * *

남태오는 다시 대표실로 출근했다.

한차례 업무 보고를 받고, 서류 결재를 마쳤다.

오후쯤, 안 실장이 다녀와서 보고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대표님.”

“그래. 잘 모셔다드렸나?”

“네. 다만, 한사코 집 앞까지 데려다 드리겠다는 걸 거절하시는 바람에, 가까운 역 근처로 모셔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 잘했어.”

안 실장의 말에 남태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원체 남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작가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여주로서도 큰 각오를 하고 오늘 나타났을 것이다.

그가 도지성을 비롯해 황금배 출판사에 투자금을 빌미로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표님. 그분께서는 아무래도 베일에 쌓이길 원하시는 분 같았습니다. 신비주의, 그런 걸까요?”

“안 실장도 그게 궁금해?”

“네. 제가 작가님 같은 분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잖습니까. 생각보다 젊으신 분이라서 놀라웠고 신기하고, 존경스럽기도 해서.”

평소 안 실장답지 않게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확실히 여주의 존재가 신기하긴 할 것이다.

작가, 특히 소설가라는 직업은 희소성이 있는 직업이니까.

“할 말 더 남았나?”

보고를 끝내고, 할 말도 다 했으니 나갈 줄 알았던 안 실장이 머뭇거렸다.

“저기, 평소보다 대표님 안색이 많이 편안해 보이십니다.”

그가 돌아보자 안 실장이 말했다.

“……티 나나?”

“네. 근데 회장님 아니시면, 제 눈에만 보이는 걸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남태오는 워낙 포커페이스가 뛰어났다.

오래 함께했던 안 실장 정도가 아니면 알아채기 어려웠다.

부모를 잃은 뒤, 그를 옆에 끼고 가르친 조부 남 회장의 엄격한 가르침 덕분이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전화 받으십시오.”

안 실장이 방을 나가고, 남태오는 전화를 받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남 회장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 네놈, 여자 생겼냐?

“용건 없으시면 끊습니다.”

- 내 백화점으로 안 실장 다녀갔다며. 나도 긴말하기 싫다. 어느 집 따님이시냐?

그는 어차피 저녁에 볼 남 회장이 왜 굳이 전화를 했는지 알게 됐다.

그러니까 아까 안 실장이 구두를 구입한 것이, 벌써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설레발 치는 남 회장에 태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사이, 아닙니다.”

- 예끼!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 이놈아.

“이따 저녁에 뵙죠.”

- 이 버릇 없는 놈 보게. 너! 끊지 마! 끊으면 저녁에 아주…….

“네. 이따 뵙겠습니다.”

태오는 그대로 통화를 종료했다.

조부라고는 해도 남 회장과 저녁 식사 한 끼가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어렸던 그에게는 부모님 대신 지원을 해 주셨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남 회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잔정이 많지 않고 엄격했던 철옹성이었다.

그를 손주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의 어머니를 며느리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하긴, 남씨 그 고집이 어디 가겠는가.

그런 조부의 입장을 이해한다기보다는.

오늘 남 회장과의 저녁 식사에는, 그에게도 응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곤 작가가 유방암이랬지.’

그는 국내에서 알아주는 유방암 전문의를 찾고 싶었다.

남 회장의 인맥이 넓다는 것은, 워낙 유명하니 가서 물어보기라도 할 참이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조부에게 ‘부탁 비슷한 것’을 해 볼 생각이었다.

주변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곤 작가를 100% 완치시켜 주고 싶었다.

* * *

“뭐? 다시 한번 말해 볼테냐?”

“회장님께서 인맥 동원, 가능한지 여쭸습니다만.”

저녁 시간, 남 회장 댁으로 간 태오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남태오 네가 요청, 내지는 부탁을 하는 거네?”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그럼 네 녀석은 나한테 뭘 줄 테냐?”

“제가 회장님께 뭘, 드리면 됩니까?”

“올해 안으로 증손주, 보게 해 줄 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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