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전히 입가만 끌어 올려진 미소였다.
그런데, 저걸 과연 미소라고 할 수 있을까?
저 남자에 대해서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여주로서는 그가 화를 내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남태오는 쉽게 감정의 동요를 내비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그녀의 정체가 충격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대표님을 속이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았습니다.”
“아니, 난 이해합니다.”
“이해……해 주시는 건가요?”
“난 오히려 곤 작가 같은 분이 어시를 따로 뒀다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면 안 된다지만, 어느 정도는 작가가 비춰지기 마련이니까. 선생님 작품에는 철저히 개인주의 성향이 드러나는데, 거기에는 일상에서조차 타협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거든요.”
“…….”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선생님.”
선생님…….
정체를 숨겼을 때 들었던 선생이라는 호칭 못지않게 어쩐히 부끄러운 호칭이었다.
남태오보다 그녀의 나이가 어려서일까?
여주는 목가를 손끝으로 긁어 문지르는 것을 꾹 참았다.
긴장했다고 해도, 지금은 독자 앞이었다.
작가로서 품위 있는 태도로 그를 대하고 싶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선생님?”
“……아뇨. 괜찮습니다.”
그녀를 먼저 소파에 앉게 한 그가 건너편에 마주 앉았다.
여주는 곧고 길게 뻗어 있는 남자의 긴 다리부터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하필 딱 마주쳐서 눈을 피할 수가 없어.’
여주가 다리 위에 올려 둔 손을 슬그머니 허벅지 밑으로 넣었다.
긴장하고 있다는 걸 남자에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시다면 다행이지만.”
그는 역시나 평소 습관대로 상대를 빤히 보고 있었다.
평소 흠모했던 대상이기 때문일까?
실체로 그 앞에 나타났음에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세상 앞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 본 적 없는 작가.
그 작가가 지금 그의 앞에서 앉아 있었다.
내부는 조용해서,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다.
낱낱이 들여다보는 그 시선을, 여주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조부조차 지나치게 날카롭다고 평한 그의 눈빛이었다.
그러니, 마주한 용기만큼은 인정해 줄까?
솔직히 그가 보기에는 그녀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는데. 정말 괜찮습니까?”
그가 손가락으로 제 이마를 가볍게 가리켜 보였다.
흠칫, 놀란 여주가 얼른 손을 뻗어 만져 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농담을 참 재밌게 하시네요.”
“선생님께서 긴장을 너무 하시는 것 같아서.”
“아…… 네.”
방금 전보다 여자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확실히 긴장을 했고, 괜찮지 않은 것도 맞았다.
상대가 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이 상황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참 잘 놀라시는 분이군요.”
그러고 보니 엘리베이터 앞에서 봤을 때도 저런 얼굴이었다.
평소에는 딱딱해 보이던 얼굴이 제법 귀염성 있게 보였다.
‘그때도 나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았고.’
저 여자가 의식했던 것은 도지성 편집장이었다.
분명 그의 눈에는 그랬다.
“혹시 대표님께서 제가 곤 작가처럼 보이지 않으시다면, 질문을 하셔도…… 전 괜찮습니다.”
차여주는 꼭 면접장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남태오는 상대가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다.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아직 테스트가 끝난 건 아니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선생님.”
예의상으로도 그는 아직 눈앞의 다과조차 권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작가가 아니고서는 대답할 수 없는 내용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네. 그럼 질문하세요. 대표님.”
‘이렇게 쉽게 바로 믿어 줄 리가 없는 건 예상했잖아.’
여주 역시 목이 말랐지만, 지금은 찻잔에 손을 뻗고 싶지 않았다.
그의 테스트를 통과하고 나서 마음 편히 먹고 싶었다.
흔들림없는 시선을 유지하자, 곧 그가 입술을 뗐다.
“그래서, 싸이코패스 살인마의 외모 묘사는 본인을 참조하신 겁니까?”
“실례지만…… 대표님께서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지금 보니까 묘사가 정확해서요. 그것도 꽤나 말입니다.”
그의 날카로운 말에 여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마 싸이코패스의 외모를 실존 인물, 그것도 작가 본인이었을 거라고는 전혀 몰랐다는 말투였다.
물론 그녀 역시, 다른 누군가가 그걸 알아줄 거라고는 몰랐었다.
“제 책을 정말 인상 깊게 읽으셨네요.”
“씹어 먹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해서.”
“가, 감사합니다.”
솔직히 그를 인기 소설을 읽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 여겼다.
이렇게까지 진심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여주가 놀라기는 아직 일렀다.
“궁금한데. 왜 주인공이 아닌 악역에 본인의 외모를 넣은 겁니까?”
“……제가 작품 속에서 악역의 성별을 밝힌 기억은 없는데요.”
“그렇지만, 남자는 아니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야 했죠.”
“내내 작가의 의도가 궁금했습니다만.”
“의도가…… 물론 없지는 않았어요.”
이건 틀림없이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할 수 있는 대화였다.
여주는 일부러 작품 속에서 살인마의 성별을 밝히지 않았다.
대신, 외모 묘사만 실감 나게 해 뒀다.
덕분에 독자들은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것이다.
당연히, 작가의 의도는 있었다.
성별을 정해 두면, 그로 인한 편견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처음부터 밝히지 않으면 독자들의 흥미도 더 높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그다지 그럴싸하지가 않았다.
“과정을 들려주시면, 선생님께 확신이 들 것 같은데.”
그에게는 마지막 의심 2% 정도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가 작가가 맞으니, 과정을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막상 듣고 보면 저 애독자께서 실망하지 않을까?
그것도 잠시, 그에게 기대할 만한 요소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애독자에 대한 예의를 차려야 할 것 같았다.
“글이 막혀서 찬물 세수를 하러 갔었거든요. 그때 마침 거울을 보니까, 저 얼굴을 범죄자로 써먹으면 좋겠다 싶어서…….”
“상당히 본인에 대한 평가가 야박하시군요.”
“……한창 마감 중이라 인간의 몰골이 아니었거든요.”
말을 하고 나니 여주는 제 얼굴에 먹칠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숨길 것도 없는 사실이 그러했다.
작가에게 마감 기간이란 숙명과도 같았다.
씻지도, 먹지도 않고 앉아서 노트북 앞에서 자신과의 싸움이다.
계속 쥐어짜 내서 쓰고 지웠다가 쓰고.
그 짓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작가가 돼서 마감을 친다는 건.
당분간 사람이길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저 글을 쓰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질문입니다. 범죄자의 성별을 나중에라도 밝힐 생각이 있으십니까?”
남태오의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니요, 대표님. 저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그 인물 그 자체를 그려 내고 싶었습니다. 성별로 인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난 그런 인물이요.”
그리고 여주는 이 방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막힘없이 제 의견을 펼쳤다.
어디 가서도 밝혀 본 적 없던 작가의 의도를 말하고 나니, 묘하게 속이 후련했다.
“그러시군요.”
“네. 제 생각은 그랬어요.”
“다과 드시죠. 선생님.”
그제야 남태오가 손을 뻗어 다과를 권했다.
여주는 사양하지 않았고, 이내 그는 와인 잔을 채워서 건넸다.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여주는 와인 역시 사양하지 않았다.
마침 목도 마르고 긴장도 풀고 싶었다.
이미 저 남자에게 긴장한 걸 들켜 버린 마당이었다.
“맛이 꽤…… 달달하네요. 쓰지 않고.”
전생에서도 마셔 본 적 없던 와인이었다.
여주 스스로 자신과는 맞지 않는 고급 취미처럼 느껴졌기에 멀리했다.
하지만 지금 마셔 보니 와인의 맛도 다양하다는 걸 알았다.
“가실 때 한 병 챙겨 드리죠. 선생님.”
남태오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여주는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생각해 보면 저 남자와는 인연이 남다른 것 같았다.
어렸을 때 희망 고아원에도 왔었다니.
어쩌면 지나가다 한 번쯤 마주쳤을지도 몰랐다.
그동안 남태오가 보여 줬던 배려.
그리고 지금의 솔직함.
적당한 호의가 섞인 다정한 태도.
예상하지 못했던 과거의 인연이라던지, 또 그녀의 작품에 대한 팬이었다는 사실까지.
그가 보여 준 솔직함은 그녀가 타인에게 세웠던 방어막을 조금은 느슨하게 만들었다.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저 유방암 판정 받았습니다. 아, 죽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아요.”
그녀의 솔직한 말에 그의 손이 멈칫했다.
테이블 위에 있던, 그의 와인 잔을 넘어트렸다.
베이지 카펫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흘러내린 몇 방울이 여주의 흰 구두 위로 튀었다.
“아…….”
“실례했습니다.”
그녀는 그가 보인 반응에 놀랐다.
반면, 그는 잃었던 이성을 되찾고 어느새 남태오 대표로 돌아와 능숙하게 대처했다.
“구두를 선물해 드리고 싶은데, 사이즈가?”
여주 발목을 잡고 남태오가 물어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당황하고 말았다.
“대, 대표님.”
남의 손에 발목이 잡혀 본 것이 전생에도 있었던가?
이렇게까지 타인과의 은밀한 접촉도 처음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대표님.”
“사양 말고 사이즈를 알려 주시죠. 선생님.”
남자에게 잡혀 있는 발목이 화끈거렸다.
여주는 갑자기 취기가 확 올라오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