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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팅 웨딩-15화 (15/60)

15화

“그럼, 뭐 더 좋은 방법 있어? 네가 나서 봤자 작가 이미지에 먹칠이나 하지.”

저렇게 단정 짓는 도지성 때문에 그녀도 지난날, 그렇게 생각했었다.

돌아온 지금, 그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저런 확신을 가지는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말해 봐요.”

“사람들은 널 남자라고 생각해. 당연하게도. 네가 지망생 때 투고했던 원고를 처음 읽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오죽하겠어?”

“내가 여자라면 안 된다니, 고작 그런 이유인가요?”

“언론에 노출되기라도 해 봐. 그럼 다들 달려들어서 널 평가할 거야. 지금까지는 네 글만 보고 말했다면, 앞으로는 네 얼평 몸평도 하겠지. 어떻게든 까내리는 인간들도 나올 거라고! 네가, 그걸 감당할 수 있어?”

물론 그녀도 알았다.

전생에 끝까지 내몰려서 자살했었지.

악에 받친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 주지 않았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게 너무나 비참하고 외로운 일이라 그녀는 스스로 죽어 버렸다.

세상은 해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과 유명인으로서 도의적 책임만을 원했다.

죽음만이 그녀에게는 도피처였다.

끝까지 내몰려 봐서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알아요. 나 같은 게 작가라고 나서면 다들 비웃겠죠.”

그 많던 팬들이 하루 아침에 돌변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게 인간이라는 거, 어릴 때부터 알았다.

그건 그녀가 나이 먹고 나서도 바뀌지 않았다.

“알기는 알아? 네가 네 스스로 네 글을 깎아내릴 셈이야?”

“……내가 나를 깎아내린다고요?”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얼굴 팔리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고.”

“그런가요.”

“그래! 그렇대도. 대인 기피증 환자에 너 인간 혐오하잖아. 그러니까 그런 소설을 쓰는 거겠지. 생각해 보라고. 네가 널 드러내면 마이너스밖에 없어! 제발 정신 차리고 수술 잘 받을 생각이나 하라고.”

“아, 정말 그렇네요.”

열변을 토하는 도지성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밑바닥은 아닐 거라고 여겼는데.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다.

“이제야 알겠네요. 도지성 씨. 지금까지 당신이 해 왔던 짓들. 날 업신여기고 깎아내리는 일. 전부 다 날 이용하기 위해 그런 거였어.”

“뭐? 뭔 소리야?”

“지금도 하고 있잖아! 헤어진 전 남친 주제에, 날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데!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나한테 함부로 한들, 뭐 어쩌겠어요. 안 그래?”

“야. 나는 다 널 위해서.”

“그만! 그 입 닥쳐. 날 위한다는 말 다신 하지 마!”

악에 받친 그녀의 목소리는 절규 그 자체였다.

카페는 거의 문 닫을 시간이라 손님은 둘뿐이었다.

알바생도 잠시 자리를 비운지라 눈치 볼 이는 없었다.

여주가 평소에 피곤해서 반쯤 감겼던 두 눈을 똑바로 뜨자, 사람이 달라 보였다.

눈빛이 불빛처럼 또렷하게 타올랐다.

“너, 너…….”

그녀의 기세에 떠밀려 도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차여주가 저런 얼굴도 할 줄 아는 여자였나?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살아 돌아온 것처럼 처절했으며, 섬뜩했다.

“내 말 알아들었으면 고개 끄덕여요.”

여주는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다.

도지성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입장 알았으니까 이제 진짜 끝내죠. 다시는 연락하지 마요.”

여주는 제 할 말을 다하자,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카페를 빠져나갔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는 길,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에 걸렸다.

주먹을 꽉 쥐고 간신히 목구멍 뒤로 넘겨 보낸 그녀가 심호흡을 하고 받았다.

지금이라면 제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네. 대표님. 저 차여주입니다.”

- 전화했던데. 회의 중이라 못 받아 봤는데 무슨 일입니까.

“저, 내일 오후에 선생님 모시고 대표님께 찾아뵙겠습니다.”

- 생각보다 빠르군. 좋습니다.

“네. 어디로 가면 될까요.”

- 약속 장소는 내가 정하죠. 기사 보낼 테니까.

“네. 그럼 곧 뵙겠습니다.”

* * *

남태오 대표를 만나기 전, 여주는 미용실로 향했다.

너저분하게 어깨 밑까지 기른 머리카락이 숙련된 미용사의 손 아래 바닥으로 쓸려 내려갔다.

최대한 성숙한 스타일로 부탁한다는 말에 미용사는 앞머리가 없는 게 좋겠다고 했다.

잠시 후, 잘 다듬어진 단발을 하자 조막만 한 그녀의 얼굴이 돋보였다.

메이크업을 받고 나자 이목구비가 한층 또렷해졌다.

방금 전, 차여주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너는 차여주가 아냐. 너는 그냥 곤 작가야, 무려 선생이라고!’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그녀가 속으로 외쳤다.

무려 남태오 대표와 곤 작가의 일대일 만남이었다.

그녀로서는 처음으로 작가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떨리고 설렜다.

정확히 약속된 시간에 뉴콘텐츠 건물 앞에 도착했다.

건너편에 대기하고 있던 차량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안 실장이라고 합니다. 대표님 연락받고 선생님 모셔 가기 위해 왔습니다.”

차에서 내린 젊은 남자가 정중하게 뒷문을 열어 줬다.

그녀는 고개만 살짝 숙이고 뒷자리에 올랐다.

‘천재 작가. 까칠하고 괴팍한 성격. 현실 부적응자.’

전생에서 사람들에게 알려졌던 곤 작가의 이미지는 그랬다.

오늘 남태오 대표를 대할 때는 정반대의 이미지로 나가야 했다.

과거에는 그녀의 모습을 알고 지인으로서 증언했던 이가 도지성과 박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만남을 기점으로 남태오 대표도 그녀의 지인이 될 수도 있었다.

“다 왔습니다. 선생님. 조심해서 내리십시오.”

도착하자, 안 실장이 차문을 열어 주고 그녀를 부축했다.

부축받을 정도로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받아들였다.

이미 그녀의 얼굴을 봤으니 대충 나이를 짐작했을 텐데도 호칭에는 변화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호칭 자체는 과분하게 느껴졌지만 누군가로부터 높여지는 느낌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대로부터 존중받는 기분이라 기뻤다.

* * *

“이곳은 대표님께서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계신 펜트하우스입니다. 보안은 철저하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한 다과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대표님께서 걸음하실 겁니다.”

안 실장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집 안 내부는 잘 꾸며진 호텔 스위트룸 같았다.

층고가 높고 거실 쪽 통창으로 햇빛이 잘 들었다.

거실에서 테라스로 향하는 문이 있었고 한강 뷰가 펼쳐졌다.

잠시 따사로움에 몸을 맡겼던 여주는 돌아섰다.

‘남 대표가 살고 있는 곳은 아닌 것 같네.’

생활 공간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머무는 흔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호텔처럼 누군가 관리를 해 주고 있는지 아주 깨끗했다.

그녀가 어느 곳에든 앉으면, 그 완벽함이 깨질 것 같았다.

그래서 선뜻, 어딘가에 못 앉고 서 있었다.

‘이런 곳에 사진이 다 있네? 남태오 대표 사진인가?’

거실 쪽을 서성였을 때, 탁자 쪽에 있는 작은 액자가 눈에 밟혔다.

턱시도를 입은 꼬마 신사가 엄마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주 품위 있어 보이는 여인은 미소 짓고 있었다.

아이는 뭔가에 심통이 난 것처럼 울상 짓고 있었다.

아주 잘생긴 꼬마 신사가 그러니 귀여웠다.

‘기분 탓인가? 두 사람이 굉장히 낯익네.’

그녀가 유심히 여인과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너무 집중하느라 뒤에서 누가 들어온 줄도 몰랐다.

“그건 어렸을 적, 어머니와 고아원에 봉사 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에서 울상 짓고 있는 꼬마가 나고.”

그녀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낮은 어조로 덤덤하게 내뱉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저 모습이 남태오 대표의 어릴 적 모습이었다니…….

그럼 그녀가 어릴 때 본 적이 있다는 건데, 말이 안 됐다.

“손에 들고 가까이서 봐도 되는데.”

그녀의 어깨 위로 긴 팔이 뻗어졌다.

달콤쌉싸름한 향기가 공기에 섞였다.

사진을 건네는 손이 부드러웠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받아 들었다.

사실 좀 더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여기는 마리아 원장이 운영하는 희망 고아원인데.’

두 사람의 배경 쪽을 주의 깊게 보자 건물이 보였다.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게 이상하리만치, 익숙한 곳이었다.

희망 고아원.

마리아 원장.

전부 다 그녀가 묻어 둔 옛 과거였다.

‘아니. 난 몰라. 나랑은 이제 상관없어.’

그녀가 고개를 저었을 때였다.

“어머니께서 데려오려던 아이가 있었는데.”

그의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훅 파고들었다.

“아마 지금쯤 컸다면, 그 아이, 차여주 씨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순간, 제 이름에 놀란 그녀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몸을 돌렸다.

“아직입니까, 선생께서는?”

마주한 남자는 다른 사람 같았다.

블랙 턱시도 차림과 올빽 머리를 한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다.

마치 사진 속 꼬마가 몸만 커진 것처럼.

“……안녕하세요. 대표님. 작가 곤입니다.”

그녀를 알아본 남태오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냉소적인 미소가 입가에 스쳤다.

남들이 보면 비웃음처럼 보일 만큼 오만해 보였지만, 여주는 그것이 그의 평상시 모습이라는 걸 알았다.

“어시가 아니었군.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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