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오빠라니.
여주에게는 참 낯설고도 겸연쩍은 호칭이었다.
한때 도지성이 그놈의 오빠라는 호칭에 집착할 때가 있었다.
그녀보다 나이가 많기는 했지만, 여주는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왜 그놈의 오빠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 그럼 저 남태희라는 여자가 남태오 이사의 여친이겠구나.’
자연스레 여주는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여자는 남태오와 그리 닮지 않았다.
생김새도 그랬지만,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왜 때문인지 몰라도 순간, 강아지가 떠올랐다.
남태오 대표가 시베리안허스키의 느낌이라면, 여자는 포메라니안 같았다.
‘어쩜 저렇게 눈이 초롱초롱하지?’
그녀가 남자라고 해도, 저런 여자한테 반할 것 같았다.
“네. 제가 그 정도 질문은 할 수 있는 사이거든요.”
태희는 일부러 자기가 태오의 여동생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종종 태오를 노리고 접근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능력 있고 모델 같은 키에 배우 뺨치게 잘생긴 남자이니 그럴 만도 했다.
“왜요. 내 말이 틀린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태희는 자기 선에서 쳐냈다.
어차피 태오는 여자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여자는 좀 달랐다.
‘옷이 날개라더니, 그런 건가? 아니면 원래 예뻤다는 건데.’
태희도 열심히 상대를 탐색했다.
지난번에는 똥물이 묻은 블라우스더니, 오늘은 멀쩡해 보였다.
회색 셔츠와 남색 바지. 무난한 차림이라 여자의 생김새가 더 눈에 들어왔다.
워낙 남태오, 남태희 두 남매가 이목구비가 화려한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상대 여자를 보면서 말티즈를 떠올렸다.
군기가 바짝 들어간 소형견.
그게 태희의 여주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아니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여주는 여주대로, 두 사람이 서 있으면 참 잘어울리는 한 쌍이겠다고 생각했다.
저쪽에서도 대놓고 그녀를 빤히 보고 있으니까, 이쪽도 그러는 중이었다.
“그래요? 그럼 우리 오빠,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냐고?
훅 들어오는 질문에 여주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굳이 여자가 저런 질문을 하는 의도를 따져 봤다.
‘아. 내가 남태오 대표한테 마음이 있을까 떠보는 건가?’
남태오의 여친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여자가 대표실에서 나오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 정도의 남자라면 역시 경계를 하는 거구나.
전생에서도 남태오는 여성 잡지 표지 모델도 했었고, 인기도 많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 찾아와 준 걸 보면, 나름대로 의리도 있고.’
객관적으로 분명 멋진 남자인 건 분명했다.
그의 대단한 집안을 생각해 보면 저 여자는 약혼녀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단속을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렇다면 괜한 오해 사지 않게 대답을 잘해야겠다.
“뭔가 오해하신 모양인데. 저 정말 대표님과는 아무 사이 아닙니다. 제가 그런 질문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어요.”
“……흐음. 그럴 리가 없는데.”
태희는 미심쩍은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는 거래처 직원이라는 이유로 대표실까지 들이지 않았다.
대부분 비서를 통해 용건을 전달하는 식이었다.
분명 저 여자와 오빠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
“우리 오빠,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제 마음에 들고 말고 할 분이 아니세요.”
철벽같은 여주의 태도에 태희는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분이죠? 어느 출판사예요?”
“황금배 출판사입니다. 근데 그건 왜.”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제가 거기 작가 팬이거든요.”
“아, 네.”
“참! 그리고 개인 취향이라는 게 있다지만 그냥 다 통하던데. 저기, 혹시 최근에 안과 가 보셔서 시력 검사해 보셨어요?”
“시력은 보통입니다. 참,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세요.”
“네? 그게 무슨.”
“그럼 저는 이만.”
태희의 붙임성 좋은 태도에 여주는 끝까지 단호박으로 대처했다.
이것저것 묻는 말에 대답하다 보면 계속 붙잡혀 있게 될 것이다.
거기다 그녀가 상대해야 할 적수는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한 명이라도 더 늘렸다가는 무척 곤란해질 테니 피하고 싶었다.
* * *
태희는 곧바로 대표실에 들어갔다.
그는 그의 비서를 호출해 내보내려 했지만, 비서는 이미 태희의 편이었다.
혹 낯선 여자가 그를 찾아오면 바로 연락하라고 해 뒀었다.
“대표실까지 불러서 무슨 얘기를 나누셨을까. 응?”
“무슨 일인데.”
역시나 태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근처 온 김에 오빠 얼굴도 좀 보려고 왔어.”
“결혼 준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됐대도. 나랑 동구 씨, 그냥 소박하게 능력껏 살면 돼.”
태희는 올해 결혼하기로 날짜가 잡혀 있었다.
아직 시간은 남았다지만, 태오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
“소박하게 말고, 현실을 좀 봐라.”
뭣보다 동생의 결혼 상대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어여쁜 동생을 데려가는 놈 주제에, 집안 배경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놈의 동구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굳었다.
“말 잘했어 오빠! 오빠 나이가 내일 모레 서른인데, 현실 직시하고 장가 가야지. 지금이야 잘나가니까 아쉬울 게 없겠지만 그래도 그게 아니라니까? 한번 사는 인생, 즐겁게 좀 살아야지.”
태희는 이미 그런 반응에 해탈했다.
이제는 오히려 역으로 애늙은이처럼 그에게 잔소리를 해 댔다.
“걱정 마. 네 결혼식, 회장님 설득은 내가 해.”
남 회장은 남매의 조부였는데, 여태까지 고집을 부렸다.
태희를 손녀로 인정하지 않고 결혼식에도 불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난 정말 괜찮은데? 할아버지는 우리 엄마도 아직까지 며느리로 못 받아들이겠다시는데, 뭘.”
“쓸데없는 고집이시지.”
“나, 누구한테 인정받으려고 결혼하는 거 아냐. 그냥 나 행복해지고 싶어서 그래.”
“……그래. 널 누가 말리겠냐.”
남 회장의 고집도 고집이었지만, 태희의 고집도 장난 아니었다.
그런 면모는 딱 그들이 혈연 관계임을 증명했다.
“그러니까 오빠, 오빠도 빨리 좋은 사람 만나서.”
“곤 작가 말인데.”
태희가 또 그의 인생에 참견하자, 태오는 아예 화제를 돌려 버렸다.
“응? 곤 작가 왜?”
태희는 관심사 얘기에 바로 넘어왔다.
“넌 어떤 사람일 것 같냐.”
“글쎄. 남자 아닐까. 응. 남자야, 백퍼 남자야.”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다들 그러던데? 팬 카페에서도 그러고, 그렇게 거침없이 질주하는 전개도 그렇고. 범죄자를 응징하는 방식도 과감하잖아.”
태희는 곤 작가의 팬 카페에 가입했을 정도였다.
“아아. 기왕이면 잘생긴 남자면 좋겠다. 나 팬 카페도 가입했단 말이야. 오빠 생각은 어떤데?”
“난 상관없어.”
“상관없다니?”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다고.”
“치이! 사실은 나도 그래. 그냥 오빠도 이참에 팬 카페 가입할래?”
태희는 이 기회에 카페 회원 수 하나 더 늘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우리 동구 씨도 가입했거든. 내가 좋다니까, 자기도 좋다더라.”
“사양한다.”
그 말에 남태오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수많은 팬 카페 회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놀림받지 않기 위해, 속으로만 생각했다.
곤 선생은, 선생 그 자체로 완벽하다고.
그러니 그의 눈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 * *
여주는 저녁에 집으로 오겠다는 도지성더러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미 헤어지는 쪽으로 결말이 나다시피 했으니 집으로 들이는 게 더 이상했다.
빠른 시일 내로 새로 이사 갈 집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박하나에게 대필 제안을 했던 일이 생각처럼 잘 안 됐나?
딱딱한 얼굴로 앉아 있는 도지성을 빤히 보고 있는데,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차여주 너. 혹시 남대표, 남태오 그 남자한테 딴마음 있는 건 아니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생각해 보니까 네가 남 대표를 따로 만났다는 게 수상하잖아.”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그가 박하나와 바람을 피운다고, 그녀까지 그럴 거라고 여기다니.
전생에서 그녀가 정말 맞바람이라도 피웠다면, 그나마 덜 억울했을 것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죠?”
그녀가 침착하게 받아치자, 도지성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남 대표가 뭐가 부족해서 그러겠어? 하지만 차여주 너도 여자잖아?”
그가 보기에도 남태오가 잘난 남자이긴 한 모양이다.
그니까 지금 그녀를 깎아내리려나 본데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지금 도지성 씨가 하고 있어요.”
“그래, 아니라고 치자. 믿어 줄게. 그럼 3일 안에 곤 작가 어떻게 데려다 놓을 건데? 네가 한 짓 때문에 지금, 선투자금 지급 결정이 보류된 건 알아? 우리 황금배 출판사 망하면 네가 책임질래?”
결국 저게 본론이었다는 거잖아.
여주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곤 작가를 데려가야죠.”
“미쳤어? 차여주 네가 타인 앞에 나설 수 있다고?”
“왜 안 될 거라고 생각하죠?”
“그게 될 거였으면 벌써 나섰겠지! 해외에서 수상했을 때 그 많은 방송국 촬영 요청, 언론사 인터뷰 네가 다 못 하겠다고, 제발 안 하게 해 달라고 나한테 애원했잖아. 벌써 잊었어?”
“그때랑 지금의 나는 달라요.”
“고작 1년 사이에 네가 뭐가 달라졌다는 건데? 차여주, 주제 파악이 그렇게 안 돼? 그리고 지금의 네가 달라? 너 혹시 나한테 숨긴 과거라도 있어?”
그런 태도를 감지한 도지성이 위협적으로 여주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내가 뭘 숨겼다는 건데요?”
“너, 나 만나기 전에 미국에 있었다며. 고아였고. 한국에서 네 얼굴이 알려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냐고.”
도지성의 말에, 여주는 깊숙이 숨기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미국으로 입양되기 전의 한국에서도 좋았던 기억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과거의 상처와 얽히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하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한 번은 과거의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는 걸, 여주는 각오한 뒤였다.
“없어요. 그런 거.”
“그럼 그냥 나서지 마. 쥐 죽은 듯이 있어.”
“왜요? 나 대신 대타라도 세울 셈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