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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팅 웨딩-13화 (13/60)

13화

“그럼요. 내가 편집장님보다 남 걱정을 하겠어요?”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도지성을 위하는 척했다.

나는 네 편이라고, 넌 날 믿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 자식을 사장에 앉혀 놓는 게 아니었어. 능력은 쥐뿔도 없고 욕심만 많은 자식. 좋아. 알겠어. 저녁에 상황 봐서 연락할게.”

그녀가 해 준 말이 퍽 위안이 됐던지, 도지성은 그녀를 살짝 안아 줬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태도 변화에 그녀는 속으로 비웃었다.

도지성과 헤어지고 그녀는 목적지를 바꿨다.

원래는 서점에 들어가서 베스트셀러 코너를 가 보고 싶었다.

그녀의 책들이 어떻게 진열되어 있는지 보고 싶었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 * *

“제가 아무래도 스토킹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핸드폰 좀 봐주시겠어요?”

그녀는 집 근처 핸드폰 대리점으로 달려갔다.

직원에게 조심스레 핸드폰을 내밀었다.

“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대리점 직원은 그녀를 잠시 훑더니 핸드폰을 가져갔다.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을 보니 백화점 브랜드였다.

그의 여친이 잡지를 보며 눈독 들이던 것이라 알아챘다.

‘돈이 없는 것 같지는 않고, 얼굴은 스토킹 당한 몰골이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쪽으로 소질이 있었고, 잠시 후 위치 추적 어플이 깔렸다는 걸 알아냈다.

그는 이번 달 실적표를 떠올려 보고, 친절한 미소로 접근했다.

“고객님. 아예 이참에 기기를 변경하시는 게 어떠세요?”

“제가 스토킹 당하는 걸 눈치챈 거, 스토커 쪽이 몰랐으면 해서요. 만약 알아낸다면, 더 큰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거든요.”

여주는 대리적 직원의 권유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설마 실적을 올리려고 그러는 줄은 몰랐다.

“저런. 그러시구나. 그렇다면 이참에 세컨 폰을 만드시는 건 어떠세요?”

직원은 그녀가 어리숙해 보여도, 말투는 단호하다는 걸 감지했다.

저런 고객의 경우 니즈를 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세컨 폰이요? 그런 것도 있어요?”

“네. 고객님! 요즘에는 비즈니스하시거나 개인 사업하시는 분들이 많이들 선호하세요. 실례지만 고객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시죠?”

“……저는 문화 업계 쪽에 종사하는데. 그래도 필요할까요?”

“어우! 고객님 어쩐지 들어오실 때부터 너무 교양이 넘쳐 보이시더라.”

“교양이, 있어 보여요? 그게 보이는 건가?”

“아, 아하하. 고객님 진짜 재치 넘치시네요.”

응? 이 고객님 대체 뭐지?

고객의 말에 적극적으로 맞춰 주며 밀어붙이는 게 직원의 전략이라면 전략인데.

이번 손님은 좀 특이했다.

궁금해서 묻는 건지, 그의 드립을 비꼬는 건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았다.

“흐음. 그럼 세컨 폰 하나 만들게요.”

여주는 직원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른 채, 재밌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녀는 하나 더 만들기로 했다.

기기 변경을 하면 번호도 바꿔야 하는데, 그게 더 복잡했다.

갑자기 그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으면 도지성은 백퍼 의심할 테고.

“고객님! 정말 생각 잘하셨어요. 정말 시원시원하시네요. 그럼 이쪽으로 와서 앉아 주실까요?”

그녀가 바로 결정을 내리자, 직원은 한층 더 과장된 미소로 잡아끌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면서 지금 하는 일이 잘하는 거라고 확신했다.

“다음에 또 오세요. 고객님! 요새는 서드 폰도 유행이랍니다!”

잠시 후, 직원이 그녀를 우렁찬 목소리로 배웅했다.

여주도 눈인사를 보내며 밖으로 나왔다.

‘그럼 이제 전화를 해 볼까?’

집으로 가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하나야. 나야. 우리 식사하기로 했었지? 내일 저녁 시간 괜찮아? 그래.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응. 그럼 내일 봐.”

그녀는 전화를 끊었고, 마침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그게 꼭 그녀에게 희망의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박하나, 너도 이제 본성을 드러낼 때가 됐잖아.’

그녀는 박하나에게도 공평하게 알려 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암 환자라는 걸.

5년이나 질질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그녀라면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가 있었다.

* * *

여주는 원래 사용하던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외출했다.

가방 속에는 세컨 폰이 들려 있었다.

대리점 직원이 설명해 준대로 몇 번 설정을 해 줬다.

그 폰으로 오는 전화를 이 폰으로 받을 수 있다니!

정말 좋은 세상이었다.

‘서점에 오면 내 책이 저렇게 진열되어 있었구나.’

아까 가지 못했던 서점에 다시 가 보았다.

돌아온 생에서, 더는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신기해.’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 매대 앞에서 그녀는 멍하니 서 있었다.

“곤 작가 책 신작 나온 거 봤어? 이번에도 재밌대.”

사람들이 그녀의 책을 집어 들고 그 자리에서 훑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을래? 이 책만 사고 바로 갈게.”

책을 들고 바로 계산대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작업실에서 늘 글만 쓰던 그녀가 세상으로 나와 본 풍경은 그랬다.

때로는 죽지 못해 써냈던 글.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책이 됐고, 누군가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니.

벅찬 감성에 젖어 여주는 매대 앞에서 방해가 되는 것도 몰랐다.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밀치며 핀잔을 줬다.

“뭐야? 책도 안 살 거면서 왜 가로막고 있어.”

“그니까. 저기요. 민폐니까 좀 비키세요.”

“……미안합니다.”

옆으로 비켜서며 여주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고, 목이 메였다.

‘내, 내가 왜 이러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당혹스러울 때, 전화가 왔다.

뉴콘텐츠 대표인 남태오였다.

- 우리, 대표실에서 잠깐 봅시다.

* * *

뉴콘텐츠 대표실.

여주는 비서의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그녀에게 자리를 권한 그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기한은 3일. 선생, 내 앞에 모셔 오면 됩니다.”

태오는 차여주에게도 똑같이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편집장과 어시스트.

전자는 직책이 높았지만 그의 신뢰도가 하락했다.

후자에게도 기회를 주는 게 맞을 것이다.

“……도지성 편집장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하겠다고 하던데.”

“……네. 그렇군요.”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지성이 하겠다고 했다니, 그 인간은 무슨 꿍꿍이일까?

설마 진짜로 그녀를 데려갈 생각은 아닐 것이다.

대타를 내세울 게 아니고서야…….

거기까지 생각하다 여주는 문득 깨달았다.

하긴 대필 작가도 내세우는 인간인데 대타라고 못 세울까.

성별도 그의 맘대로 정할까?

갑인 남태오 대표 앞에서 을인 도지성이 못 하겠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그와 상관없이 그녀는 하겠다고 했다.

여기서 못 한다고 하면 그건 남태오라는 최대 투자자를 도지성에게 거저 주는 것밖에 안 되니까.

“대표님. 혹 제게도 기회를 주신 걸, 편집장님도…….”

“모를 겁니다.”

“감사합니다.”

“만약 차여주 씨가 못 한다면, 제안 자체가 없었던 걸로.”

“네. 제 입장을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도지성이 그녀가 뒷통수를 치려는 걸 알면, 더 막무가내로 나올 거다.

그걸 상대하는 것도 상당히 골치 아플 거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먼저 선수를 치는 수밖에 없다.

남태오 대표, 저 남자에게만 정체를 보인다는 것.

남 앞에 나서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넘어야 할 고비였다.

“그럼, 저도 대표님 제안에 응하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차여주 씨.”

“그 대신,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

“만일 제가 선생님을 모셔 온다면 그분의 신상에 대해서는 보안 유지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고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조차 원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물론. 곤 선생 본인이라는 전제하에.”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대표님.”

남태오 대표와 단둘이서만 만난다면 그녀가 나서야 했다.

도지성 쪽에서 대타를 내세운다면 이쪽은 진짜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남태오 대표를 속이려 든다면?

신뢰가 깨질 것이고 회복 또한 불가능했다.

“차여주 씨, 믿어 보죠.”

“네. 그 믿음,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대표님.”

여주는 돌아서 차분하게 대표실을 나왔다.

* * *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정 내렸기 때문일까?

비즈니스 상대로 신뢰도를 주기 위해서는 어떤 모습으로 남태오 대표 앞에 서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런 여주를 슬쩍 곁눈질한 비서가 핸드폰을 숨기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또한 복도 반대편에서 내달려 오던 태희도 미처 못 봤다.

“엄마야!”

“……아, 죄송.”

무대뽀로 앞만 보고 달려오던 태희와 부딪쳤다.

여주가 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낯선 사람이라 저도 모르게 벽쪽으로 몸을 피했다.

“잠깐만요! 그때 병원, 맞죠?”

“네?”

“맞네 맞아. 그때보다는 패션이 많이 평범해지셨네요.”

그런데 상대는 그녀를 아는 체했다.

느낌 탓인지 몰라도 경쾌한 목소리가 반가워하고 있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상대를 경계하느라 여주는 약간 어깨를 움츠렸다.

여자는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저는 남태희라고 해요.”

남 대표와 성씨가 같다는 것만 빼고는,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다.

머리를 굴려 봤지만, 눈앞의 늘씬한 미인은 초면이었다.

“저, 누구신지 저는 정말 잘 모르겠는데요.”

“에이. 그야 차차 알아 가면 되죠. 벌써부터 너무 거리감 둘 필요 없잖아요?”

정말로 발랄하고 통통 튀는 여자였다.

마치 어릴 적부터 사랑을 받고 자란 부잣집 딸 같았다.

구김살 없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소개를 하는 것부터 그랬다.

여주는 참,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 같다고 느꼈다.

“그보다 진짜 우리 오빠랑 아무 사이도 아니세요?”

“……오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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