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정말 수고했어. 지유 녀석, 철없어서 지가 직접 중고 거래를 나가겠다잖아?”
“네. 제가 대신 다녀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최근, 아들이 빠져든 소설책 초판본을 구한답시고 난리를 쳤다.
보통 6살짜리가 아닌 머리가 굉장히 좋은 아이였다.
“그런데 이사님, 혹 화장실에서 무슨 일 있으셨나요?”
“아. 그냥 좀 기분이 묘하네. 두 번이나 마주치다니.”
유해라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화장실에서 본 두 여자 중 하나는 얼굴만 알고, 하나는 구면이었다.
아들과 통화하다가 듣다 보니까 황당해서 나가서 쏴 준 거였다.
박하나는 꼴통으로 알아줬다.
재벌가에서는 따돌림당하니까 다른 물로 갔나 본데.
나이 많은 N유업 박 회장이 첩실에게서 본 혼외 자식이었다.
천박하게 노는 꼬락서니를 좀 혼내 준 거였다.
이내, 유해라는 아들 얘기를 계속했다.
“그나저나 우리 지유 말야. 너무 조숙한 거 같지 않아? 나이에 안맞게 무슨 범죄 추리 소설을 읽냐고.”
“도련님이야 이사님 닮으셔서 워낙 영특하시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아이스크림 먹을 때 빼고는 애답지가 않잖아.”
말은 그렇게 해도 아들에 대한 애정이 엄청난 그녀였다.
들어 보면 다 아들 자랑이었다.
“조 비서한테만 하는 말인데, 사실 애가 글을 너무 빨리 읽잖아. 분명히 이번 책도 하루도 못 가서 읽어 버릴 텐데.”
“그러게요. 문제는, 곤 작가 소설은 시리즈죠.”
“그래. 거기다 미완이라면서.”
“그렇죠. 연재 중이니까.”
“이노무 자식이, 완결이 나야 지도 공부할 마음이 생긴다나? 요새는 그 곤 작가 소설을 읽고 밤에 꿈까지 꾼대잖아.”
차량에 오른 뒤로도 아들 얘기는 계속됐다.
듣고 있던 조 비서가 빙그레 웃었다.
“한마디로 현망진창이네요.”
“현망진창?”
“어떤 것에 지나치게 빠져들면 현실 생활이 불가능해진다는 말인데요. 하아. 이래서 연재 중인 건 건드는 게 아니랬는데.”
“가만. 설마 조 비서도 그 작가 팬이야?”
“당연하죠. 한번 읽으면 못 놓아요, 절대 네버요. 이참에 이사님께서도?”
“사양할게. 나 무서운 거 잘 못보잖아.”
책 표지만 봐도 어두침침한 게 별로라며 유해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책을 구했다.
기뻐할 아이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 * *
뉴콘텐츠 대표실.
남태오가 책상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고, 그 앞에 도지성은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지?”
태오는 존칭을 생략했다.
그건 그의 기분이 가라앉았다는 거고, 상대에게는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비즈니스 상대에서 제외시키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대표님. 투자금 선지급 결정 보류시켰다고 사장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지라 제가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려고요.”
뻔히 자금줄 막혀서 찾아온 걸 알면서, 저렇게 거만하게 굴어?
도지성은 속이 부글거렸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황금배 출판사는 가족 회사였고, 사장은 그의 형이었다.
“오해?”
“예. 오해십니다. 그 어시한테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 몰라도.”
“적어도, 선생께서는 그 어시를 신뢰하시던데.”
“대표님. 그건……!”
너는 어시만큼도 신뢰를 못 받더라.
명백하게 비꼬는 말에 도지성은 순간 발설할 뻔했다.
그거야 그 여자가 곤 작가 본인이니까 그렇지!
차여주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거라고!
집에 얌전히 있으랬더니 그새 또 나가서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그게, 선생님께서 건강 문제가 생기신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별문제 없이 연재 이어 나가실 수 있습니다.”
속으로 빠드득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혀를 굴려 댔다.
“어떻게.”
“제가 방안을 모색해 내겠습니다. 대표님. 시간을 좀 주십시오.”
“아니. 곤 선생, 내 앞에 데려와.”
도지성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내 눈으로 선생을 직접 봐야겠어.”
“아니, 대표님. 죄송하지만 그건 좀 어렵겠습니다.”
“그럼, 당신네랑은 계약 끝이지.”
“대표님! 이건 너무 갑작스럽고 부당한 처사로.”
안 된다. 남태오를 놓치면 출판사를 형한테 뺏기고 말 거다.
하도 장남 장남 하는 아버지 때문에 바지 사장으로 앉혀 놓은 건데!
그는 황금배 출판사를 손에 넣을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봐, 도지성. 지금 내가 장난하는 것 같지.”
“대표님, 제발! 기회를 주십시오. 어,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3일.”
“알겠습니다. 대표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망할 차여주.
덕분에 X됐다, 아주.
당장 차여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닦달을 해야겠다.
도지성은 허리를 숙이고 다급하게 방을 나갔다.
잠시 후, 가볍게 목과 어깨를 꺾으며 근육을 풀던 남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가 우두커니 서자 훤칠한 자태 위로 한낮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로서는 아직까지 도지성, 차여주 모두 믿을 수 없었다.
두 사람 다 말이 다르니까 어쩌겠는가.
확실한 건 당사자를 만나는 거였다.
어찌 됐든, 차여주 그 여자가 이번에는 맞았다는 것이다.
“제법이네. 차여주.”
* * *
박하나는 서점에 도착해서도 씩씩거렸다.
분하고 원통해서 죽을 것 같았다.
“그 미친년, 어디서 봤었지?”
차여주와 마주친 김에 멕이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그것도 짜증 나는데 처음 보는 여자 때문에 망쳐 버렸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 ……아!”
박하나는 머리를 쥐어짜 냈고, 기억해 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S호텔 회장 딸 유해라였다.
그녀와는 타고난 피부터가 다른, 진짜 재벌이었다.
“아악! 재수 없어!”
박하나는 재벌이면서, 재벌을 증오했다.
'운 좋아서 본처 딸로 태어난 주제!'
‘어차피 지나 나나 회장 딸인 건 마찬가진데!’
엄마가 본처냐, 첩이냐 단지 그 차이밖에 없잖아?
박하나는 주변의 시선을 눈치채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다음에 유해라를 만나면, 오늘 받은 이 모욕을 꼭 갚아 주겠노라 다짐했다.
‘여기도 재수가 없어.’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 코너를 가자 전부 작가 곤의 소설들이었다.
매대를 점령하다시피 했는데, 정말이지 분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차여주는 왜 저렇게 잘나가는 건데?’
죽었나 깨어나도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의 차이.
하지만 그 재능 말고 차여주는 저보다 볼품없었다.
박하나는 신경질적으로 지나가던 직원을 붙잡았다.
“여기 서점에 박하나 작가 책은 없어요?”
“박하나 작가요? 처음 들어 보는데 그게 누구지. 손님. 잠시만요.”
직원이 컴퓨터로 가서 도서를 검색했다.
그러나 박하나가 원하던 게 아니었다.
“이 서점에서 일하면서 박하나 작가를 모른다고요?”
“네. 잠시만요. 손님. 아, 저희 서점에는 재고가 없다고 하네요.”
“기본이 안 돼도 너무 안 됐네. 웃겨서 정말. 아니, 고객이 어떤 책을 원할지 어떻게 알고 책을 맘대로 안 들여놔요?”
“오늘 예약 해 주시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준비를.”
“됐어요. 이미 기분 잡쳤다고요.”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서점이냐며 박하나는 씨근덕댔다.
무슨 수를 써서든 뺏어 올 것이다.
차여주가 가진 것들, 가지게 될 것들 모조리 다 그녀가 가져야 했다.
‘차여주 너는 그냥 비천한 고아 출신일 뿐이야. 절대 나와 동등해질 수 없어.’
박하나가 이를 갈면서 우두커니 서 있자, 직원이 의아해했다.
“손님. 또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곤 작가 소설 싹 다 주세요. 하나도 빠짐없이.”
박하나가 카드를 긁으며 이를 꽉 악물었다.
* * *
“차여주, 너! 네가 제정신이야!”
도지성은 뉴콘텐츠 건물을 나서마자자 차여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의 위치를 추적하자마자 달려온 것은 남태오에게 겪은 모욕감을 떨쳐 내기 위함이었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왔어요?”
여주는 광화문의 대형 서점 입구 쪽에서 그에게 붙잡혔다.
놀라는 척하면서 살피자, 남태오에게 한바탕 깨지고 온 모양이었다.
‘빨리도 달려왔네.’
전화도 하지 않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단번에 오다니.
여주는 그의 재빠른 등장이 의문스러웠다.
“아픈 사람이 왜 돌아다니고 있어! 남 대표랑은 왜 만났지?”
그녀를 걱정하는 척했지만, 왜 쓸데없는 짓 했냐는 추궁이었다.
“남 대표한테 네 정체라도 들킬 셈이야? 그래?”
구석으로 그녀를 끌고 간 도지성이 다그쳤다.
“양심에 찔려서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게 투자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을….”
“차여주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는데?”
“이제부터라면요?”
“됐고, 너 당장 집에 가서 쉬어!”
도지성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다. 저녁에 찾아갈 테니 두고 보자는 식이었다.
“근데 편집장님은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여주는 침착하게 듣고 있다가 궁금했던 걸 따졌다.
흥분하지도 않았고, 놀랍지도 않았다.
“……길 가다가 봤어. 이제 별 게 다 의심스럽나 보지?”
도지성이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그의 반응에 여주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어떤 예리한 직감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알겠으니까 가서 일 봐요.”
“집으로 바로 가. 알아들어?”
“알았대도요.”
순순히 대답하는 그녀가 이상했던지, 도지성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요.”
그녀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도지성은 형 도지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도지철의 능력은 별로였지만, 장남 위주로 돌아가는 집안이라 그랬다.
“……그거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그리고 그건 도지성의 컴플렉스였다.
전생에서 여주는 글만 쓰느라 시댁 쪽 일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도지성이 제 형 앞에서 그녀를 무기처럼 휘둘렀다는 건 기억했다.
결국, 나중에 황금배 출판사를 차지했고 형제는 서로 원수가 됐다.
도지철만 빈손으로 쫓겨났지만, 이번에는 도지성이 그렇게 될 거다.
그녀가 그렇게 만들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