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아, 아뇨! 절대요. 그럴 리가요. 제 취향이 아닙니다.”
여주는 열심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남태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 버렸다.
아무래도 이참에 옷 쇼핑을 좀 해야겠다.
최대한 멀쩡해 보이게끔 말이다.
여주는 그길로 줄달음쳐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저, 마네킹이 입고 있는 그대로, 주세요.”
여성 의류 브랜드 매장으로 곧장 걸어갔다.
평일이라 한가했고,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고객님께서 마네킹 몸매라 정말 잘 어울리실 거예요.”
“아…… 네.”
쭈뼛거리며 구입 의사를 밝히자 직원은 활짝 웃었다.
“정말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 고객님.”
비록 난데없이 안구 테러 패션으로 나타난 그녀였지만, 직원의 예리한 눈은 피할 수 없었다.
마네킹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가녀린 팔다리, 잘록한 허리 라인.
상식선에만 맞춰 입으면 어떤 옷이든 잘 어울릴 몸매였다.
“저, 보기에 어때요. 괜찮나요?”
“세상에. 고객님. 정말 잘 어울리세요!”
피팅 룸에서 갈아입고 나온 그녀를 본 직원이 박수를 쳤다.
“모자만 벗으시면 더 완벽하실 텐데.”
“아, 그건 제가 차차 알아서……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도지성의 카드를 시원하게 일시불로 긁었다.
휘리릭. 숫자 0들이 날아가고 조금 후련해졌다.
“저기, 화장실이 어딘가요?”
그녀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차여주? 너 차여주 아니야?”
그런데 그곳에서 박하나와 마주칠 줄이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박하나가 방금 쇼핑한 명품 백을 배 앞으로 쭉 내밀었다.
“혹시, 나 기억 못 하니? 너랑 같은 대학이라고 편집장님이 소개해 줬었는데.”
여주는 적당히 아는 체를 하기로 했다.
“기억하지. 박하나, 맞지?”
예전이었으면 친근하게 다가와 팔짱을 꼈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고 그녀의 반응부터 살폈다.
아니, 좀 위아래로 훑는다고 해야 하나.
‘근데 박하나가 지금 내가 곤 작가인 것도 알고 있으려나?’
돌아온 뒤로 박하나와 처음 만난 자리였다.
도지성과 있는 건 봤지만, 이렇게 단둘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여주야. 편집장님이 가방 안 사 줘?”
“가방?”
“편집장님 그 정도 능력 되시는 줄 알았는데. 너도 참 서운하겠다.”
그녀와 도지성의 관계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나더러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여주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도지성이 가방을 사 주고 안 사 주고에 대해 왜 자신이 서운해야 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됐다.
“그게 내가 서운해야 하는 일이야?”
전생에서 돈을 버는 액수를 따지면, 그녀가 도지성보다 많았다.
도지성은 월급쟁이에 기껏해야 성과급 아니면 보너스를 받았다.
그렇기에 전생에서도 그녀는 그에게 선물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기념일이라고 선물을 챙겨 준 적도 없었다.
“음. 그래. 차여주 네가 서운하지 않다면야 하는 수 없지.”
어쩐지 박하나가, 제 반응을 보고 실망한 것 같았다.
여주는 그것보다 박하나가 지금 곤 작가의 정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나보다는 하나 네가 편집장님한테 조르는 게 어울릴 것 같아.”
“……나 말이야? 내가 왜? 나 편집장이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알지. 그런데 어떻게 둘이 친해졌는지 궁금해서.”
“아아. 곤 작가 알지? 내가 그 작가 팬이라 출판사까지 찾아갔다가 편집장님하고 마주쳤지 뭐야. 그렇게 차차 알아 가다가 내가 부탁 좀 드렸거든. 출간 행사에도 초대해 주셨지만, 얼굴만 좀 아는 사이지, 뭐.”
“그래. 얼굴만 아는 사이구나.”
……세상에나 마상에나.
여주는 감쪽같이 연기하는 박하나를 빤히 봤다.
생각해 보니 도지성과 가까워진 계기 자체가 바로 곤 작가의 정체였을 텐데.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구는 것이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도지성이 박하나를 소개시켜 줬었다.
대학 동기이고, 같은 출판사니 친하게 지내라면서.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이렇게 단둘이서 먼저 만나게 됐다.
박하나, 우리가 정말 인연이긴 한 걸까?
물론, 악연도 인연으로 쳐준다면 말이다.
“그렇다니까. 근데 차여주, 우리 동기인데 자주 연락 좀 하고 지내, 응? 물론 넌 자퇴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난 괜찮으니까.”
“그래.”
너가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아.
이번 생에 다른 사람 다 친해져도 너랑은 안 친해져.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절대 재앙을 끌어들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여주야. 가방 하나 정도는 마련해. 명품 백 하나쯤 필요할 나이잖아? 곧 결혼한다면서 편집장님한테 하나 사 달라고 조르던지.”
“응. 하나 네가 나랑 같은 대학이라고 했지?”
“어. 나도 곧 휴학하고 작품 집중하려고. 근데 그건 왜 물어봐?”
“그 나이면 너 자체로도 충분히 빛나. 스스로 브랜드가 되려고 노력해 보지 그래?”
명품에 의존하는 걸 돌려 까자, 알아들은 박하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서, 네 말은 그러니까 내가 지금 고작 이깟 명품에 의존했다 그거야?”
“아아. 그렇게 들렸니? 으음. 내 말은…….”
그녀가 손사래를 치면서 오해라고 말하려는데.
“그래. 지유야. 엄마 지금 화장실이니까 빨리 말하래도.”
화장실 옆 칸 문이 벌컥 열리면서 여자가 나왔다.
선글라스를 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척 봐도 고가의 세련돼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명품을 잘 모르는 여주가 봐도 그냥 여자 자체가 명품으로 보였다.
"참. 사람이 명품이어야지, 아무나 명품 든다고 다 명품인 줄 아나 봐."
여자는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대고 통화 중이었다.
세면대로 와서 손을 씻으며 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헐. 누구지. 누구시길래 저렇게 용감한 건지.
누가 봐도 박하나를 칭하는 말이었다.
여주는 꿀꺽, 침을 삼켰다.
아쉽게도 그녀는 작전상, 아직 박하나의 배경에 대해 모르는 척해야 했다.
“저기 지금 그거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빡친 박하나가 가만 있을 리 없었다.
“그래. 지유야. 엄마는 아들 믿어.”
“저기요. 이봐요!”
“엄마, 오늘도 좀 늦을 거야. 쌤 말씀 잘 듣고, 알았지?”
하지만 여자는 박하나 쪽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거울 속에 비친 스스로만 쳐다보더니 통화를 계속했다.
‘강적이다.’
여주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핸드 타올 좀 줄래요?”
손을 다 씻고 난 여자가 우아하게 여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손짓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여주는 홀릴 것 같았다.
마치 남태오를 보았을 때처럼, 여자에게서는 귀티가 잘잘 흘렀다.
“여기요.”
여주는 단정하게 구비된 타올 중 하나를 집어 건넸다.
“고마워요.”
받아 가는 여자가 선글라스 너머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S호텔에서 봤던 아이 엄마였다!
말하는 아이 이름이 어쩐지 낯익더라니.
‘이건 또 무슨 우연일까.’
여주가 잠깐 생각하는 사이, 여자는 박하나 쪽으로 돌아섰다.
“거기, 좀 버려 줘요.”
손을 닦은 타올을 건네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나긋한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강경함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을 부리는 주인의 포스였다.
“……아니, 이걸 왜 나한테.”
박하나마저 엉겁결에 받아 들고는 순간 멈칫했다.
“저기요!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그러는 넌 뭔데 네 집 안방처럼 시끄럽게 떠드니?”
“뭐, 뭐라고요?”
박하나가 소리 높여 따졌지만, 여자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난 그냥 내 아들이랑 통화했는데.”
“거짓말! 아까 거울로 나 흘깃대면서 비웃는 거 내가 다 봤거든요? 여주 너도 아까 다 봤지?”
“응? 글쎄.”
딴에는 정말 억울했던지, 박하나가 여주까지 끌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여주는 모른 척했다.
당장 그녀가 할 수 없었지만, 박하나가 깨지는 건 재밌는 구경거리였다.
“그냥 웃겨서 웃었는데. 짝퉁이 진짜 흉내 내니까 안 웃겨?”
“지금, 지금 말 다 했어요? 짜, 짝퉁이라니!”
“그래서 너 정말, 짝퉁 아니니?”
여자의 태도는 위풍당당했고, 품격 있었다.
어조 하나 높이지 않고서 꼿꼿하게 박하나를 내려다봤다.
이제 보니 여자는 무척이나 키가 컸다.
‘저분께서도 박하나의 배경을 알고 계시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초면에 저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배경이든, 인성이든 진짜 박하나를 아는 사람이 그녀 말고 또 있다니.
그녀는 마치 구세주를 본 것처럼 반갑기까지 했다.
그래서 여주는 옆에서 조용히 관전하고 있었다.
“지, 진짜지 그럼! 이 백화점에서 산 건데, 그럼 짝퉁일까 봐요?”
“말귀가 어둡나 봐. 난 가방 말고 네 얘기 한 건데.”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내,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쫄깃하고 재밌는 장면은 처음이었다.
여자가 대사를 칠 때마다, 여주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대리 만족이 이런건가 싶었다.
“좀 비키지? 내가 좀 바빠서.”
“뭐 저딴 여자가 다 있어? 재, 재수 없어.”
여자는 박하나의 어깨를 세게 밀치고 나가 버렸다.
여주는 순간 보았다. 박하나가 애써 버텼지만 여자의 힘에 밀려서 삐끗한 걸.
“아아악! 별 미친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설을 내뱉던 박하나가 멈칫했다.
“아, 아니. 나는 그러니까, 저 여자가 너무 재수 없어서.”
그때까지 관람객처럼 있던 여주가 못 본 척,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나야. 우리 조만간 식사 같이 한번 할래?”
“아, 그럴까? 좋아. 언제 볼까?”
“조만간.”
그녀의 제안에 왠 떡이냐는 듯 박하나는 좋아라 했다.
마치 정말 친한 동기처럼 말이다.
* * *
“이사님. 바로 차로 모시겠습니다.”
화장실 밖에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던 조 비서가 바로 따라붙었다.
여자는 S호텔 대표 이사 유해라였다.
본업은 그렇고, 부업은 아들 지유맘이었다.
“지유 도련님과는 통화 잘 끝내셨나요.”
조 비서는 그녀가 결혼하기 전부터 보좌해 왔던 터라 스스럼없었다.
“그럼. 조 비서, 지유한테 줄 책은 사 왔지?”
“네. 초판 한정본이고 무려 곤 작가 사인본으로 구했습니다.”
“수고했어. 그 무슨 마켓이랬지?”
“홍당무 마켓입니다. 이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