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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팅 웨딩-9화 (9/60)

9화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벌써부터 그녀의 대타를 찾아 나서는구나.

‘그런데 그게 하필 박하나였다니.’

곤 작가의 고스트라이터!

즉, 대필 작가를 물색하겠다는 생각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 대상의 이름은 악몽처럼 들렸다.

도지성이 정신이 나간 걸까?

어떻게 박하나로 그녀의 필력을 대신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다시 회사 들어가 봐야 하니까 집에서 밥 잘 챙겨 먹고 있어.”

“이렇게 늦었는데 회사에 가겠다고요?”

“급한 일이야. 괜히 머리 복잡하게 알려고 들지 말고 집에 얌전히 있어.”

도지성은 통화를 끝내고 방에서 나오더니 바로 사라졌다.

회사를 핑계 대고서 박하나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밥을 꼭 챙겨 먹으라고 말은 했지만, 말뿐이었다.

암 판정을 받았다는 그녀에게 손수 차려 주는 성의는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하여튼 말만 번지르르한 인간이었다.

“어쩜 지난 생이나 현생이나 변한 게 없네.”

이제는 놀라는 것도 지겨웠다.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밥을 차렸다.

전생의 그녀는 먹는 즐거움을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살려고, 일하려고 배만 채우기 바빴었다.

집 안에서 편하게 작업하기 위해서 가정부도 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집도 그녀에게는 그저 작업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쉰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지금은 적어도 복수라는 목표 의식이 생겼기 때문인지 억지로라도 밥을 욱여넣었다.

다 먹고 난 뒤, 그녀는 도지성이 바삐 나가느라 두고 간 노트북 전원을 켰다.

그녀는 글만 쓰던 글쟁이 노릇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그의 이메일 계정으로 들어가기였다.

여태까지는 곤 작가와 관련된 대외적인 일들은 모두 도지성이 처리했다.

전생에서 그녀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도지성도 따로 잠금을 해 두지 않았다.

로그인 유지된 그의 이메일로 들어가 보자 그동안 주고받은 내역들이 보였다.

각종 언론사의 기자들과 방송국 관계자들의 취재 요청 제안이 빼곡했다.

그들 모두 그녀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대면 인터뷰가 정 어렵다면, 이메일로라도 인터뷰 답을 달라고 했다.

‘나에 대해 이렇게까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여주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대중 매체와 거리를 뒀었다.

작품 집필에 영향을 준다고 자료 조사와 관련된 게 아니면 보지도 않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21세기 최고의 소설. 대한민국이 낳은 천재.’

몇 개만 읽어 봤을 뿐인데도 볼이 화끈거렸다.

그녀를 향한 찬사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침착하게 usb를 꽂고 관련 자료들을 모두 옮겼다.

‘가능한 그러고 싶지 않지만, 필요하다면 신비주의도 탈피해야겠지.’

그녀와 도지성이 헤어지는 일은 어찌 보면 간단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일들은 그녀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결국, 그녀가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 꺼렸기 때문에 도지성에게 여지를 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 두 사람의 추락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얼마든지 화염의 재로 사라질 수 있었다.

한껏 불타올라 그들을 태워 버리고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목표였다.

그 이후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늘이 도와서 다시 살게 됐다지만, 나는 아니야.’

그녀는 원래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지만 그 이상 욕심내지 않는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2개월 후, 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말이다.

그녀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건 그때였다.

“어라.”

그때, 받은 메일함에 새로운 메일이 떴다.

보낸 사람은 남태오 대표였다.

주저 않고 메일을 누르자, 만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간 주고받은 메일을 보자 밑도 끝도 없이 만나자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용건이 따로 없어도 도지성을 언제든 불러낼 수 있다라.

과연, 그는 도지성이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뉴콘텐츠의 대표 이사.

대외적으로 알려졌던 그의 커리어는 그랬다.

뉴콘텐츠는 주로 문화 공연과 미술 전시회 사업을 해 왔다.

점차 영화와 드라마 제작까지 확장시켰다.

그는 손을 대는 족족, 성공을 이뤄 냈다.

그의 개인 자산만 해도 최소 100억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남태오는 그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지.’

전생의 기억을 조금 빌려 보자면, 그는 GK기업 남 회장의 손자였다.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기업을 물려받는 대신, 개인 사업에 치중했다.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았던 시기는 먼 훗날이었다.

그녀의 정체를 그에게 들키고 난 뒤였다.

하지만, 지금은 순서가 바뀌었다.

<안녕하십니까. 뉴콘텐츠 남태오 대표님. 최근 메일 주소가 바뀌었으니 참고하시어…….>

그녀는 평소 도지성이 답변한 말투를 참고했다.

앞으로는 이쪽으로 연락 부탁드린다며 그녀의 메일 주소와 핸드폰 번호를 첨부했다.

남태오 대표는 도지성의 고객 리스트에서 가장 먼저 뺏어 와야 할 인물이었다.

곤 작가의 어시인 지금, 시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의 배경에 대해서는 최대한 모른 척해야 할 것이다.

그보다 우선, 그가 얼마나 곤 작가에 대해 진심인지 파악해야 했다.

어쩌면 그에 따라 이번 계획의 성공률이 크게 좌우될 수 있었다.

‘일단, 만나서 시도를 해 보면 알게 되겠지.’

도지성은 지금쯤, 박하나를 포섭하고 있을 터.

그녀는 남태오 대표를 공략하기로 했다.

보낸 메일함과 수신 확인함에서 흔적을 지웠다.

잠시 후, 그녀의 핸드폰으로 남태오가 약속 장소와 시간을 보내 왔다.

답장까지 보내 놓고 난 뒤, 그녀는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근데 옷을 어떻게 입고 가야 하지?”

……가만. 내가 왜 이걸 고민하는 거야?

그 사람은 나를 곤 작가의 어시로 알고 있잖아?

그러고 보니 도지성은 사정이 있다고만 둘러대고 말을 안 해 줬다.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생각을 끝낸 그녀는 옷장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옷을 꺼내 입었다.

다만, 그녀는 색깔 감각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연두색 셔츠, 형광색 바지를 입고 나자, 마지막으로 꽃무늬 가디건이 눈에 밟혔다.

‘언니. 나 한번 걸쳐 봐.’

노란 바탕에 알록달록한 꽃들이 그녀를 불렀다.

“그래. 카페는 추울 수도 있으니까 냉방병 조심해야지.”

추위를 잘 타는 그녀는 가디건을 챙겨 입었다.

엄밀히 따져 보면 그 옷들은 죄가 없었다. 조합이 잘못됐을 뿐.

그 가디건이 그녀에게 어떤 후폭풍을 가져올지.

여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 *

그 시각, 도지성은 강남 카페의 룸에서 박하나와 만났다.

“편집장님이 먼저 만나자고 하고, 웬일이래요?”

“가져왔지? 줘 봐.”

자리에 앉자마자 도지성은 손을 내밀었다.

박하나가 써 온 원고를 주자마자, 그는 빠르게 훑어 내렸다.

잠시 후, 그가 원고를 테이블에 휙 던져 놓았다.

“영 눈에 안 차죠? 알아요. 어련하겠어요. 차여주 걔 글 보다가 읽으면, 누구 글이든 형편없을걸요.”

박하나는 그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

“박하나. 이게 정말 네 최선이야?”

도지성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지금 박하나가 하는 대답이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판가름할 것이다.

“왜요. 내가 더 잘 쓰는데 일부러 발로 쓴 것 같아요?”

“이걸로는 안 돼. 부족해.”

곤 작가의 성공 이후, 그에게 글 좀 봐 달라는 작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기 글 좀 봐 달라면서 놓고 가는데, 역시 모자랐다.

이따위 글로는 절대 차여주를 이길 수 없다.

대신할 수 없어.

게임이 안 돼.

상대조차 안 돼.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혀를 찼다.

그러다가 마지막 장까지 읽다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

“박하나. 너, 곤 작가 책 많이 읽었나 보다?”

“말했잖아요. 나 여주 팬이라고.”

“너 같은 팬이 세상 어디 있지?”

그야말로 진짜 팬들을 기만하는 태도라고 생각하면서, 도지성이 비웃었다.

“팬이라고 해서, 꼭 좋아하고 환호만 해야 돼요? 시기 질투해서 악성 댓글 달고 루머 퍼트리고.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잖아요. 저, 여주 팬 맞아요.”

박하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래. 지금 다시 보니까 너 이거…….”

“역시, 눈치챘구나. 알아보겠어요?”

“……재밌네.”

도지성의 예리한 눈은 알아차렸다.

박하나가 열심히 꼼수를 부려 놓았지만, 이건 차여주 글을 본딴 것이었다.

옆에 두고 썼는지, 아니면 그만큼 읽고 참고했는지 몰라도.

제법 차여주 흉내를 내고 있었다.

“조금 더 연습해 봐. 나쁘지 않아.”

어차피 박하나의 오리지널로는 어림없었다.

그는 박하나에게 팁을 줬다.

“나요, 편집장님이 해 보라니까 하는 거예요. 나도 작가로서 자존심이 있다고요.”

“그래. 박하나 너를 최대한 버려. 그게 중요해.”

차여주가 수술을 하고 회복할 때까지는 장기 휴재였다.

그렇게까지 길게 기다려 줄 생각 따위 없었다.

그는 차여주의 글을 대신 써 줄 사람이 필요했다.

성공한다면, 차여주도 원망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우리 이제 뭐 해요?”

“뭐 하긴. 가서 네 할 일 해.”

“치이. 이렇게 불러내 놓고 밥도 같이 안 먹어요?”

“호텔에서 먹은 걸로 부족해? 나 바빠.”

“그럼 나 뭐 안 사 줘요?”

“네가 나보다 돈 많잖아. 아냐?”

도지성은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렸다.

정말이지 무심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박하나가 더 매달렸다.

그녀는 좀 더 차여주의 책을 읽고 따라 쓰는 걸 연습해 보기로 했다.

만약 차여주의 인생을 돈을 주고 살 수 있었다면, 박하나는 벌써 지불했을 것이다.

대학교 입학식에서 차여주를 처음 본 그 날부터였다.

박 회장의 관심을 앗아 갔던 그 애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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