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요.”
여주는 속으로 흥, 콧방귀를 꼈다.
예전이었다면 그의 말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이미 약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이미 도지성의 실체를 알고 난 뒤라 그런지, 가증스러웠다.
“여주 너 뭐 잘못 먹었어? 오늘 진짜 이상한 거 알아?”
“앞으로 할 말은 하고 살려고요.”
이상한 게 아니라 이제라도 정신을 차린 거였다.
순종적이던 그녀만 알던 도지성에게는 충격이겠으나, 알 바인가.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이유는 많았다.
그러나 성공적인 복수를 위해서라면!
최대한 그녀의 감정을 내리눌러야 했다.
마치 그녀의 소설 속에서 완벽 범죄를 꿈꾸던 주인공처럼.
“누가 하지 말래? 당신 태도가 문제라는 거야! 이제 남편 될 사람한테, 그게 뭐냐고.”
“이봐요. 도지성 씨.”
그렇다 해도 말 같지 않은 소리는 더 참아 줄 수가 없었다.
여주는 그의 이름 세 글자를 차갑게 불렀다.
“지금 내 이름 막 불렀어? 진짜, 막 나가자는 거야?”
“후우.”
소리 높이는 도지성과 반대로 여주는 길게 숨을 골랐다.
‘벌써부터 흥분하네. 폭탄 하나 더 날아갈 텐데.’
집으로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암 환자라는 걸 언제 밝혀야 할까?
그 타이밍이 무척이나 중요할 것이다.
최대한 미룰까?
숨길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해답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얻을 게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행보를 위해서라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해야 했다.
그러려면 도지성의 약점을 최대한 많이 알아내야 했다.
그는 전생에서 부당하게 그녀의 저작권과 인세를 취했었다.
담당자 이상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 결혼을 하자고 했었다.
지난 생에서는 그의 불륜을 뒤늦게 알았고, 복수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1기 판정을 받은 지금 시점에서는 해 볼 만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연기가 필요했다.
“지금 내가 말하는데 한숨을 쉬었어?”
“편집장님. 나…… 아, 암이래요.”
여주가 머리를 떨군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다시 얻게 된 삶에서도 그녀에게 따라붙은 암이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비통함이 끓어올랐다.
“……뭐라고?”
“유방암이요, 암 몰라요?”
“차, 차여주…….”
그녀는 누가 봐도 불쌍해 보이는, 시련당한 얼굴이었다.
평소 햇빛도 제대로 못 봐서 창백한 얼굴이 시체처럼 희멀거니 떠 있었다.
도지성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얘기였던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 얼마 못 살 것 같아요. 정말, 얼마 안 남았대요.”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눈물을 짜냈다.
스스로 듣기에도 흐느끼는 목소리가 괜찮았다.
너무 오버하지 않기 위해 자제를 했다.
“노, 농담이지? 무슨 암이야. 갑자기, 무슨.”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어요! 편집장님한테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정말 고민했어요. 하, 하지만 숨긴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당분간 글을 쓸 수가 없게 됐어요. 이제 다 끝났어요…. 나는, 나는 이제 어쩌면 좋아요?”
그녀는 절규하면서 하이톤으로 내질렀다.
마지막으로 현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지성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안 돼. 아직은, 안 돼. 아직은 내가…….”
그녀의 충격과 고통보다는, 본인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그래. 나한테 빨대 꽂던 인생 이제 못 할 테니까 슬프겠지.’
평생 그녀더러 글만 쓰라고 했던 인간이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가 본색을 감추려고, 혹시나 그녀를 먼저 위로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 무색하게 저렇게 드러내 보이니.
그녀로서는 정말 다행이었다.
* * *
도지성은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집으로 들어오더니 베란다로 나갔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그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지성이 무슨 말을 하든, 그녀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앞으로 수술까지는 2개월이 남았다.
그 안에 도지성과 박하나에게 불을 붙여야 했다.
‘박하나는 내게 열등감을 갖고 있었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가 두 사람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박하나가 짜 놓은 판에 그녀가 걸려들었던 거였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녀는 그냥 장기판의 말이었다.
‘도지성은 내 마지막까지 빨아먹으려고 접근했다면, 박하나는 달랐어.’
그녀에게 존경한다며 먼저 접근해 온 것도 박하나였다.
어떻게 그녀의 정체를 알았는지는 몰라도, 비밀 유지를 약속했다.
나중에 어떤 파멸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철썩같이 믿었다.
‘설마 도지성까지 눈독 들였을 줄이야.’
도지성은 잘생기고 능력 좋은 편집장이었다.
실상이 어찌 됐든, 대외적인 이미지는 그랬다.
박하나는 도지성과 바람피우는 걸 티 내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것이 여주에게 유일하게 우월감을 표출할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이제부터 그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틈을 좀 더 내주자.’
그래야 증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녀가 암 환자인 걸 알았으니 그들은 방심할 거다.
위기를 기회로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여주야. 내가 곤 작가, 아니 여주 너, 그리고 우리의 미래. 또 앞으로 일에 대해 생각을 좀 해 봤어.”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온 도지성의 얼굴은 초췌했다.
누가 보면 저쪽이 암 환자인 줄 알겠다.
“네. 그럼 결론이 나온 건가요?”
“일단 당분간, 그래. 말한대로 원했던 대로 쉬어. 당분간 휴재를 하자고.”
“좋은 생각이네요.”
동정심인지 뭔지 몰라도 도지성의 태도는 아까보다 정중했다.
나긋나긋하게 대하는 모습만 보면 정말 연인을 아끼는 것 같았다.
물론 여주는 그 속내를 훤히 알았기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래서 말인데……. 여주야. 우리 결혼도 이참에 다시 생각해 보자. 유방암도 암인데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잖아. 내 말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역시…… 그렇겠죠? 이참에 일을 좀 쉬고 싶어요.”
“그래. 쉬어. 넌 그냥 이제부터 수술받고 나을 생각만 해.”
아까 울고 나서, 아직은 진정이 안 된 것처럼 그녀가 울먹거렸다.
최대한 불쌍해 보일수록 좋았다.
전생에서는 그녀가 유방암 3기 판정을 받고 슬럼프가 오자마자 도지성이 이혼하자고 했다.
삶에 조금도 미련이 없었던 그녀는 도장을 찍었고 독주를 마셨었다.
지금은 그렇게 몸 상태가 심각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녀의 약점을 드러냄으로써 도지성의 본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흑. 미안해요. 정말. 나 때문에 편집장님 커리어까지. 으흑! 다들 나한테 실망하겠죠. 끄, 끝내 완결도 못 짓고 그냥 이대로 죽어 버리면.”
멈췄던 눈물을 다시 쏟아 내면서 그녀가 흐느꼈다.
적어도 겉으로는 소설밖에 모르고 살던 차여주처럼 보이길 바라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약한 소리 하지 마. 네가 글을 못 쓴다 해도 아무도 욕을 못 해. 누가 뭐래도 여주 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작가야.”
도지성이 그녀를 위로하듯, 어깨 위로 손을 올려 토닥거렸다.
제법 그녀를 위해 주는 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지금쯤 그의 머릿속에서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시기가 좀 이르기는 했지만, 그의 인간성은 여전할 테니까.
“그, 그런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내가 날 용서할 수 없어요. 난, 난.”
그녀는 병을 핑계로 그와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싶었다.
차츰차츰 거리를 두고, 그의 눈을 피해 계획한 일들을 해야 했다.
“그래. 그 마음 다 알아. 힘들겠지. 그래도 희망을 가지자고. 요즘 기술 좋잖아. 투병을 이겨 내고 돌아온 작가 곤, 어때. 타이틀 뽑기도 좋잖아?”
저런……. 벌써 거기까지 생각을 한단 말이야?
도지성이 한 말 중에 가장 진심 어린 말처럼 들렸다.
그녀의 이용 가치가 유효할 거라는 희망 사항을 품고 있었다.
여주는 그의 집착과 비양심적인 모습에 치가 떨렸다.
그래도 티를 내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야 그렇지만…… 그보다 편집장님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리 그냥 헤어져요.”
“여주 너…….”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자고 먼저 말한 건 도지성이었다.
이미 그 시점에서 그는 아픈 그녀를 두고 발을 뺄 생각부터 한 것이 분명했다.
그의 이기심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아예 이참에 쐐기를 박아 두는 거였다.
“그래. 여주야. 쉽지 않았겠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나도 생각해 볼게. 일단 각자 시간을 좀 가지는 걸로 하자.”
“어차피 헤어질 건데…… 시간을 가질 이유가 있나요?”
“그러지 마. 여주야. 오늘 당장 헤어지면 내가 꼭 아픈 너를 두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 같잖아.”
대외적인 이미지를 고려하며 도지성이 뱀 같은 혀를 놀려 댈 때였다.
그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조금 독특하다 싶은 멜로디였는데, 그녀의 입가에 실소가 비집고 나왔다.
‘박하나겠네.’
예전에는 누구길래 특정 벨 소리를 지정했을까 궁금했다.
지금 보니 불륜 상대를 숨기려던 행동이었다.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도지성은 다시 베란다로 나갔다.
문까지 닫는 걸 보던 여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란다와 이어진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고 귀를 갖다 댔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짐작이 맞았다.
“그래. 박 작가. 지금 좀 만나야겠어. 지난번 썼다던 원고 가지고 나와. 아니, 메일로 보내지 말고 나한테 직접 가져와. 이유는 만나서 얘기하지. 급하니까 서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