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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팅 웨딩-7화 (7/60)

7화

“차여주 환자, 수술 날짜 잡혔으니까 일정 좀 확인해 보지.”

“네. 교수님. 그런데 혹시…… 그건 물어보셨나요? 아무래도 좀 걱정이 돼서요.”

“아…… 차여주 환자…… 유전.”

오후쯤, 명의 교수가 지도하는 레지던트가 들어왔다.

레지던트는 조금 염려하는 얼굴이었다.

환자 한 명마다 제 일처럼 챙기고 생각하는 그를, 교수는 아꼈다.

“교수님께서도 차여주 환자, 걱정하셨던 거 알고 있습니다.”

“왜 아니겠나. 내 딸처럼 한창때 아닌가.”

차여주 환자는 수술 날짜를 잡고 돌아갔다.

명의 교수는 최대한 빨리 잡아 줬고, 2개월 뒤였다.

완치율이 높고, 유방암 전문인 그를 찾는 환자들은 많았다.

그에게도 차여주 환자와 비슷한 나이의 딸이 있었다.

딸은 모계 유전으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차여주 환자의 나이는 올해로 스물이었다.

그렇기에 검사 결과를 말해 줄 때 보다 신경을 썼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이 좀 많이 돼서 말이야.”

차여주 환자의 이력은 예상보다 독특했다.

보호자 연락처에는 누구의 번호도 적지 않았다.

적어야 한다고 했더니, 가족이 없다고 했다.

거기다 유방암 검사를 받은 적도 없다고 했다.

외가 쪽이나 엄마 쪽일 확률이 높은데, 그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자신은 고아라고 했다.

그럴 것이라고 짐작은 했었지만, 명의 교수는 말문이 막혔다.

“교수님. 브라카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아닐 겁니다. 만약 유전이었다면 증상을 느꼈을 거고 검사를 이전에도 받아 봤겠죠.”

브라카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3주 정도 걸렸다.

명의 교수도 아니길 바랐다.

만약 질병과 연관성이 의심되는 변이가 발견된다면, 상황은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절제술을 해야 했다.

가슴을 잘라 내는 건 극심한 충격일 것이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기를 바라봐야겠지.”

“네. 교수님.”

매번 암 진단을 받는 환자를 대할 때마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두 사람이었다.

* * *

수술 날짜는 2개월 뒤로 잡혔다.

무슨 유전자 검사 결과가 또 3주 뒤에 나온댔는데.

여주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수술을 하면 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 나이가 돼서도 고아인 게 슬플 줄이야.”

덤덤하게 말해 보지만, 서글펐다.

시간이 갈수록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분명, 그녀를 세상에 나게 해 준 부모님이 있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이름도 모르지만.

어쩌면 엄마나 외가 쪽 유전자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니.

두 번째 생을 얻었음에도 발목이 잡히는 걸까?

이 무슨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람.

손끝이 저릿저릿하고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환자분. 이거 다 읽어 보시고 체크하시고, 마지막에 사인해 주시면 돼요.”

날짜를 잡고도 수술에 대한 이런저런 안내를 해 준 간호사가 말했다.

“저기, 천천히 해도 될까요?”

“네. 환자분. 물론이죠. 천천히 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모자를 푹 눌러쓴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간호사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 줬고, 방에는 그녀 혼자 남겨졌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자.’

이번 생에도 ‘고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차피 가슴을 잘라 낸다는 건 각오하지 않았던가.

의사의 말대로 명예, 부귀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지난 생을 보면, 결국 재주는 그녀가 부렸고 누리는 건 도지성과 박하나였다.

그녀가 죽고 난 뒤의 상황은 안 봐도 뻔했다.

고아였으니 도지성에게 모든 저작권과 인세가 양도됐을 테지.

그리고 박하나와 재혼도 했겠지.

박하나의 배경은 말이 많긴 해도 재벌가였고, 그녀 같은 소설가였다.

두 사람은 상처를 사랑으로 극복해 낸 커플이 됐으려나?

그렇게 그녀를 거름 삼아 날아올랐겠지.

그녀는 유방암 말기의 고통과 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슬럼프를 겪고 말았다.

그러자 도지성은 그녀를 대체할 작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게 박하나였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 눈을 질끈 감게 됐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제발.’

무교였지만,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설마 하늘이 그녀를 되살려 놓고도, 바로 죽이진 않겠지.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이 한 고비를 넘게 도와줄 것이다.

‘제발.’

이제 시간이 없었다.

2개월 안에 최대한 빨리 도지성과 절연해야 했다.

대학 동기인 박하나와도 손절해야 했다.

그렇다면, 결국 그들과 대면해야 했다.

어쩔 수 없지만 그녀의 시간은 촉박했다.

그녀는 호텔에서 더 머물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수고하셨습니다. 3주 뒤에 뵙겠습니다.”

간호사에게 동의서를 건넨 뒤, 그녀는 빠르게 걸었다.

로비를 지날 때 어떤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빠르게 지나가 닿지 않았다.

그녀는 한낮의 거리로 꿋꿋하게 걸어 나갔다.

* * *

“오빠, 누군데 그래? 아는 사람이야? ”

여주에게 손을 뻗었던 어떤 남자는 바로 남태오였다.

옆에는 동생인 남태희였다.

남매는 조부인 남 회장의 지인을 찾아 병문안 온 길이었다.

“……아니.”

“뭔 소리세요. 방금 저기까지 손 뻗는 거, 내가 다 봤는데.”

그런데 한 여자가 지나가자, 길 잘 가던 태오가 멈췄다.

잡으려고 손까지 뻗는 걸, 태희는 똑똑히 보았다.

“잘못 봤겠지.”

“나 시력 양쪽 다 2.0이거든! 방금 전 무슨 영화 보는 줄 알았네.”

태희는 여자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했다.

심지어 여자는 태오를 외면하고 가 버렸다.

정말 못 봤을 수도 있었지만, 태오의 비쥬얼은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일부러 외면한 것이 분명했다.

“방금 그 여자 볼 때 오빠 표정이 어땠는 줄 알아? 막 사연이 있어서 헤어진 연인 다시 재회한 줄. 와 진짜 얼마나 애틋했는지 봐 봐. 나 여기 팔에 소름 돋았잖아.”

“치워라.”

“싫은데? 싫은데. 어떤 여자야? 나도 알려 줘. 응?”

“그냥 직원이야.”

“거짓말. 오빠네 회사에 저런 직원이 있다고? 저런 꼴로 출근하게 냅둘 오빠가 아니신데.”

“…….”

“누군데. 오빠 회사 직원 아니지? 거래처 직원인가?”

태희는 틈을 주지 않고 마구 질문을 던졌다.

귀찮게 하면, 귀찮아서라도 빨리 치워 버리려고 답을 던져 주는 태오인 걸 알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출판사 직원.”

“출판사? 무슨 출판사?”

“빨리 안 타면 닫는다.”

“말 돌리기는! 같이 가 오빠!”

그러나 태오는 태희를 무시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일단 입을 다물었지만 태희의 머릿속에는 더 많은 물음표가 떠다녔다.

30년 인생에 연애는커녕, 여자를 좋아해 본 적도 없는 오빠 아닌가.

오죽하면 조부 남 회장이 그더러 ‘저놈 게이냐고 물어봐라’ 그랬을까.

‘뜬금없이 무슨 출판사 직원이야? 거기다 그 여자는 오빠한테 관심도 없어 보이던데.’

태희는 여자의 인상 착의를 다시 떠올렸다.

초코색인지 똥색인지 묻은 블라우스를 입었던 여자.

모자는 푹 눌러쓰고, 패션 센스라곤 전혀 없었다.

‘어떻게 우리 오빠 같은 남자를 무시할 수 있지?’

아니, 패션 센스야 개성이라 그렇다치자.

‘혹시 시력이 많이 안 좋은 걸까?’

오빠 바보인 태희는 여자의 시력을 의심했다.

“다 왔다. 내려.”

태오는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똥 씹은 표정을 짓는 동생을 봤다.

사실은, 그도 아까 그 여자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곤 선생의 어시라던 그 여자.

‘이제 보니 이름도 모르네.’

빠른 시일 내로 황금배 출판사의 도지성 편집장에게 물어봐야겠다.

곤 선생의 어시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 둬야 했다.

그게 곤 선생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그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 * *

여주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려 할 때, 복도 끝에 도지성이 있었다.

출근했다가 돌아왔는지 양복 차림이었다.

“여주야. 병원은 왜 갔어?”

“건강 검진이랑 수액 좀 맞았어요.”

카드 결제 내역을 본 모양이었다.

잘 다녀왔냐는 말보다 따지는 게 먼저라니 역시 도지성다웠다.

“참, 지난번 원고는 잘 고쳤던데.”

“그나마 다행이네요.”

“뭐, 다행 아닌 일이라도 있었어?”

“편집장님, 나 믿어요?”

“믿지 그럼. 나 이제 네 남편 될 사람이잖아.”

피식. 그녀의 입가에서 웃음이 나왔다.

남편은 남의 편 줄임말이라던데, 그 말이 딱이었다.

그는 절연 이전에 안전 이별해야 할 대상이었다.

“나 당분간 좀 쉬려고요.”

“쉬다니, 지금 휴재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래요.”

“그래. 쉬어. 아예 이참에 확 쉬어 버리든지.”

“그럴까요, 그럼?”

그녀는 덤덤하게 받아쳤고, 그 역시 농담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이봐, 곤 작가!”

“나, 곤 작가 어시 아니었어요?”

“그건 사정이 있었어. 고작 그런 이유로 휴재라니 어림없는 소리.”

“작가인 내가 휴재하겠다는데, 편집장님이 무슨 권리로 그래요?”

“너, 너 차여주 맞아? 미쳤어? 돌았냐고!”

도지성은 기가 차서 복도가 울리도록 소리를 마구 질러 댔다.

저 여자, 진짜 차여주가 맞나?

어디서 차여주 껍데기를 뒤집어쓴 가짜가 나타났어?

“후우. 일단 진정해. 진정하자고. 차여주.”

도지성은 버럭 내질러 놓고 바로 후회했다.

너무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듣긴 했지만, 상대는 차여주였다.

작가 지망생일 때부터 쭉 지켜봐 왔다.

사람은, 특히 차여주는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세상 물정 모르고 글만 쓰던 글쟁이가 어디 갔을 리가.

“우리 일단 릴렉스하고 차분하게 대화를 나눠 보자고. 이렇게 싸워서 얻을 게 뭐겠어. 안 그래, 여주야?”

그는 최대한 말투를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불평불만의 ‘불’자라도 꺼내려 할 때면 늘 이렇게 타일렀다.

너를 위하는 건 나뿐이라고, 주입하면서.

“도지성 씨, 당신이나 진정해요.”

“뭐? 사람이 좋게 좋게 얘기하자는데, 태도가 왜 그따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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