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팅 웨딩-6화 (6/60)

6화

“아, 네. 그건 그렇죠.”

이번에도 남태오는 관대하게 넘어가 줬다.

조금 과한 친절일지 몰라도 도움이 됐다.

집에서 옷을 챙겨 나온 것도 아니니, 그녀의 옷은 이거 하나였다.

오늘 집에 들어갈 계획은 없고, 쇼핑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최대한 이 블라우스로 버텨 볼 생각이었다.

“내가 과한 친절을 베푸는 것 같습니까?”

손수건을 빨아서 돌려주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그가 먼저 말했다.

대답을 요구하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마치 혼잣말처럼 손으로 턱 밑을 쓸면서 이어 말했다.

“착각이 아닐 겁니다.”

그녀의 속을 읽어낸 것처럼, 신기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데 착각이 아니란다.

뭐지, 저 남자?

“저, 이건 세탁해서 다음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물론 그에게 먼저 돌려줄 방법은 없었다.

그를 찾아갈 것도 아니고, 만나자고 할 생각도 없었다.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데.

“배려받을 자격, 충분합니다. 당신은…….”

남자가 문을 닫기 전, 그렇게 말했다.

언뜻 미소 비슷한 걸 짓는 것 같았는데.

뒷말은 미처 들을 수 없었다.

‘남태오 씨. 나 결심했어요.’

그의 말이 그녀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언제가 기회가 온다면, 지난 생, 그리고 오늘의 은혜를 갚을게요.’

반드시 그의 은혜에 보답해 줄 것이다.

당신은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은인이니까.

‘어쩌면 하늘이 보내 준 유일한 내 편일지도 모르지…….’

* * *

“확실히.”

남태오는 문을 닫고 소파로 걸어갔다.

긴 몸을 눕히고 팔짱을 꼈다.

“과한 친절은 맞지.”

제가 생각해도 오늘 한 행동은 그답지 않았다.

평소의 남태오라면,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타인을 먼저 알아보고 겸석을 권하고, 대화를 나누고.

또 손수건까지 건넨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친절이었다.

하지만, 저 여자만큼은 예외였다.

정확히 말하면 황금배 출판사 직원이라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저 여자는 일개 출판사 직원이 아니잖아?

무려 곤 선생의 어시스트였다.

곤 선생의 옆에서 보좌하는 역할이란 말이다.

이 정도 친절을 베풀어도 될 이유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랬다.

남태오는 소설가 곤의 독자였고, 팬이었다.

처음 곤 작가의 데뷔작 <한몸>의 영화를 보고 나서 전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원해서 보러 간 것은 아니었다.

그의 동생인 태희가 조르고 졸라서 가 준 것이었다.

책하고는 거리가 멀던 그 녀석이 영화관까지 가자고 조르다니.

‘어디 얼마나 재밌나 봐주겠다는 마음이었지.’

팔짱을 낀 채로 여유롭게 보던 그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자신의 몸을 지배하는 충격은 혼돈이었고, 색다른 감동이었다.

“크큭. 역시 오빠도 우리 곤 작가님한테 빠졌구나?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런 그를 동생 태희가 신나하며 놀렸더랬다.

아무렴 어떤가.

그날 바로 원작을 주문해서 반나절 만에 읽어 버렸다.

첫 페이지를 넘기던 순간, 펼쳐지던 사건들.

영상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작가의 상상력과 대범한 스토리 전개까지.

그를 흠뻑 매료시켰다.

그는 그때, 조부인 남 회장의 회사를 물려받기보다 본인의 사업에 치중했다.

사업적인 감각을 타고난 그답게 성과는 확실했지만, 무료했다.

그런 찰나에 곤 작가의 작품은 한 줄기 빛이 됐다.

작가에 대해 궁금해졌다.

어떻게 그런 글을 썼나 싶었더니 작가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출간 시점에는 생일이 지나 스무 살이라고 했다.

곤 작가를 발굴한 편집자가 바로 도지성이었다.

곤 작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었다.

“정말이지 미스테리하군.”

독자들은 저마다 작가의 실체를 상상하며 팬이 됐다.

남태오 역시, 나름대로 존경하는 뜻을 담아 ‘곤 선생’이라 별명 지었다.

존경하는 대상에 나이와 성별 같은 건 중요치 않았다.

미스테리한 인물이고, 실존 인물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혼자만의 호칭이었기에 평소 어디 가서 말한 적은 없었다.

그는 아무와도 곤 작가에 대한 이 마음, 생각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 미치도록 탐닉하고 좋아하고 싶었다.

대외적으로는 그가 사업의 확장을 위해 곤 작가의 첫 작품부터 판권을 따낸 줄로 알 것이다.

그때 딱 한 번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도지성 편집장을 만났을 때, 작가를 한 번만 만나면 안 되냐고 했었다.

지금은 후회했다.

곤 선생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겠다는데,

그것이 곤 선생의 뜻이라면 따라야 했다.

그것이 팬의 숙명이었다.

그래도 곤 선생이 변심을 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팬의 소망일 뿐이었다.

“부디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그는 와인을 하나 꺼내, 잔을 들어 올렸다.

곤 작가의 어시를 만난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하루였다.

* * *

이틀 후, 여주는 병원을 찾았다.

“차여주 환자분, 유방암 1기입니다.”

“1기라니. 다행이네요.”

결과를 듣는 여주의 얼굴이 차분했다.

“환자분, 1기라고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너무 안일한 것 같다고 여긴 의사가 덧붙였다.

“절제술까지는 안 가더라도, 보존술을 하게 되면 재발되거나 전이가 될 수 있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병행해야 할 수도 있고요.”

“네. 그렇군요.”

“면역력도 굉장히 떨어집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유방암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암입니다, 암.”

“네. 알고 있습니다.”

“허허허.”

이 환자 뭐지?

꽤 포커페이스인 의사가 오히려 당황했다.

남 일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환자라니 너무나 신박했다.

인생 2회차나 3회차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반응이랄까?

저런 반응이라면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할 것이다.

그때 가서는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의사는 충격 요법을 쓰기로 했다.

“혹시 환자분, 밤에 불 켜 놓고 자는 편인가요?”

“네. 자주 그럴 때도 있고. 설마, 그게 원인인가요?”

여주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얘기가 나오자, 귀를 기울였다.

“밤에 무드니 로망이니 챙긴다고 불 켜 놓고 자는 분들 있는데 그거 치명적입니다. 특히 여성분들은 발병률이 20%가 넘어가요. 그래서…….”

“선생님. 그러니까 제가 원인이라는 말씀이시네요.”

“그렇습니다. 그래도 너무 자책은 마시고. 내 몸은 내가 챙겨야 합니다. 건강을 잃으면 돈, 명예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아직 젊으니 이 말이 와닿지 않을 테지만.”

의사는 그녀가 어느 정도 충격을 받은 것 같자, 부드럽게 달랬다.

“아뇨. 선생님. 정말 맞는 말씀 하셨습니다. 저 완전 이해했어요.”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수긍했다.

지난 생에서 수면 시간과 작업 시간을 바꾼 줄 알았다.

근데 수명과 맞바꾼 거였다니…….

‘내가, 내 몸한테 죄인이었던 거구나.’

여주는 사실, 천재가 아니라 노력형 범재였다.

글이 안 써질 때 어떻게든 쓰고 자려고 하다 보니 불을 끄지 못하고 깜빡 잠드는 거였다.

솔직히 말해 보자면, 그런 날이 태반이었다.

그때마다 도지성은 그녀의 정신력을 높게 평가했다.

“작가 곤은 천재여야 해. 알겠어? 사람들은 천재에 열광하지. 범재? 노력형? 그런 걸 누가 알아줄까. 차여주. 넌 천재야. 대한민국에서 딱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그런 천재.”

그래. 나는 천재를 연기했던 범재에 불과했어.

천재가 되기 위해서, 죽어라 쓰고 고쳐야만 했다.

데뷔작이 생각보다 큰 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일은 커졌다.

대다수의 언론은 곤 작가를 두고서 대단하다 치켜세웠지만, 일부 언론은 아니였다.

소년등과(少年登科).

젊은 나이에 빠르게 성공하니, 고깝게 보는 사람도 많았다.

어쩌다 얻어걸린 요행이고, 한 번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그런 편견과 맞서 싸워야 했다.

성공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해 내야 했다.

‘아쉽게도, 도지성의 전략이 먹혀들었지.’

당시, 그녀가 황금배 출판사로 보낸 원고를 본 게 도지성이었다.

그는 바로 출판 계약을 제안했다.

아마 그 순간부터 그는 곤 작가를 천재로 만들 계획이었겠지.

결과적으로 그의 말대로 됐다.

세상으로부터 주목받기에 천재의 탄생보다 좋은 건 없었다.

“선생님 말씀이 정말 옳으세요. 저는 왜 몰랐을까요.”

그녀는 지난 생을 더듬어 보며 중얼거렸다.

의사가 해 준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뭘 몰랐다는 건지, 말해 볼까요.”

다행히도 의사는 그녀의 회상을 깨지 않았다.

인내심을 갖고 들어 줬다.

“명예, 부귀. 그런 거요. 정말 뜬구름 같았어요. 정말…….”

그 위치까지 가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

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는 건 쉽지 않았다.

어렵게 올라갔지만, 작가 곤의 명예와 부귀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대로 누려 보질 못했다.

정작, 그녀가 세상의 관심을 필요로 할 때.

그녀가 아이를 잃고 절망에 빠졌을 때는.

아무도 그녀를 구원해 주지 못했다.

“허허허. 환자분.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됐지요. 가장 늦었을 때가 빠를 때라는 말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완치시켜 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이 명의입니다.”

의사는 그녀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던지, 명찰을 가리켰다.

‘명, 의. 의사 선생님 성이 명씨구나.’

명씨는 정말 드문 성씨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명의. 병을 잘 고친다는 이름이라니.

환자 입장에서는 저절로 신뢰감을 갖게 만들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농담 같은 그 이름도, 웃픈 이 상황도.

비현실적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