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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팅 웨딩-5화 (5/60)

5화

다섯, 아니면 여섯 살이나 됐을까?

아이는 미안함보다 제 아이스크림이 망가졌다는 충격이 더 컸던지, 큰 소리로 울었다.

“내 아이스크림 어떡해. 으어어엉. 엄마아아!”

아이는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여주는 새하얀 블라우스가 초코색으로 젖어 들어가는 걸 멍하니 봤다.

먹물처럼 빠르게 번져 갔다.

옷을 어쩔까보다는 아이를 달래 줘야 할까?

그 생각이 앞섰지만,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와도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지유. 무심코 아이의 기억이 스며들었다.

“엄마. 지유랑 아이스크림 같이 먹으면 안 돼요?”

“미안한데 지유야. 엄마가 지금 바빠. 잠시만.”

“엄마. 이건 지유가 좋아하는 초코맛 아이스크림이에요. 보세요.”

“잠시만. 음. 잠깐 거실에 나가 있을래?”

“……거짓말! 엄마는 맨날 일만 하잖아요. 엄마 미워!”

“지유야?”

“나도 아이스크림 안 먹어! 맛없어!”

그날은 아이가 평소와 달리 투정을 부렸다.

그녀 앞에서 소리를 높이고, 아이스크림을 책상으로 내던졌다.

하필 그녀가 방금 떠오른 아이디어를 적어 둔 종이였다.

그녀는 서둘러 종이가 젖기 전에 옮겨 적어야 했다.

아이가 뛰쳐나간 건 신경도 안 쓰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죽어라 글만 써 댔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이가 보여 줬던,

아이가 아이다웠던 순간들이었다.

“지유……. 미안해. 내 아들. 미안해.”

만약 그녀의 아이가 멀쩡히 살아 있었다면 저 정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에선 아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살았는데, 내 아이는 살릴 수 없게 됐어.’

아예 그녀의 아이는 세상에 나올 수조차 없었다.

살아 돌아왔음에도, 절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도지성과는 결혼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그녀의 아이는 원래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될 수밖에.

“미안해. 엄마가…… 정말.”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그녀는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잇새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이곳이 호텔 복도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한참 울던 아이가 보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갑작스러운 슬픔이었으나, 금세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녀에게 찾아온 진실은 너무도 잔인했다.

“누나, 누나! 왜 울어요?”

어느새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그녀를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

우느라 통통한 뺨이 붉었고, 조그만 손이 그녀를 만졌다.

처음 보는 아이인데도, 여주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분명 울고 나면 저런 얼굴이었겠지.’

한 번도 아이의 얼굴을 제대로 봐준 적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깟 소설이 뭐였다고, 일이 뭐였다고!

“아 진짜! 누나! 울지 마요. 아이스크림 사 달라고 안 할게요. 그만 울어요. 네?”

자책하는 그녀를 보며 아이가 조잘거렸다.

“안 울게. 아줌마는 괜찮아.”

“아줌마요? 누나 아니고요?”

그녀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느라 아이가 이상한 표정으로 보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어머, 어머머! 지유 너어! 엄마가 뛰지 말랬지? 잠깐 기다리라니까 그새를 못 참고 먼저 뛰쳐나가서는.”

복도 저편에서 헐레벌떡 아이 엄마가 달려왔다.

아이 이름이 불려지자 여주의 눈가에 또 눈물이 고였다.

“으아악 엄마다 엄마!”

아이는 제 엄마를 보자마자, 얼른 여주 뒤로 숨었다.

그래 봤자 아이치고는 꽤 몸집이 커다래서 가려지지 않았다.

“어머 어떡해. 괜찮으세요? 혹시 저희 아이 때문에 우는 거예요?”

아이 엄마는 아이를 혼내기 전에, 여주 얼굴을 보고 물었다.

“아이 이름이…… 지유인가요?”

여주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런데, 정말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셨어요? 혹시 저희 애하고 부딪치셨어요?”

아이 엄마는 당황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

여주가 그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아이 엄마는 결론지었다.

그러고는 여주가 보는 앞에서, 아이를 꾸짖었다.

“지유 너! 엄마가 뛰지 말랬지. 여기가 우리 집이야?”

“엄마는! 집에서도 못 뛰게 했으면서!”

“이노무 자식. 어디서 엄마한테 말대꾸야!”

“맞잖아요. 그리고 여기는 우리 집이나 마찬가지랬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여기 주인이니까…… 으읍!”

“우리 지유, 그만 시끄럽게 하고 가자, 응? 가서 엘리베이터 누르고 있어.”

가만 보니 두 모자가 참 비슷했다.

귀여운 아이 얼굴처럼, 아이 엄마도 앳돼 보였다.

아이 입에서 뭔가 엄청난 말이 나온 것 같았지만, 아이 엄마가 얼른 막았다.

“저, 못 들었어요. 방금 말은 전혀요.”

여주는 눈물을 닦아 내며, 덤덤하게 말했다.

뭔가 두 사람의 대화에 대해 모른 척해 줘야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네. 그건 그렇고 정말 미안해요. 아무리 혼내도 애가 철이 없어요. 더 따끔하게 가르쳐서 이런 일 없게 할게요. 이건, 세탁비로 쓰도록 해요.”

아이 엄마는 그녀의 손을 잡고, 수표를 꺼내 줬다.

“저기, 저는 정말 괜찮은데.”

그녀는 타인의 접촉이 낯설었기에 거부감이 들었다.

금전적 보상을 받을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해요. 부디, 즐겁게 머물다 가세요.”

아이 엄마는 거부할 수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떠났다.

여주는 그제야 한숨 돌렸다.

꼭 아이 엄마가 진짜 호텔 주인 같았다.

그녀도 룸으로 돌아가려는데, 앞쪽에서 문이 열렸다.

하필 또 남태오, 저 남자였다.

여주의 눈에 고여 있던 마지막 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아직도 울고 있습니까.”

“왜, 왜 거기서 나오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 방에서 머무니까.”

참 난처할 때마다 저 남자와 마주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우연이란 말인가.

여주는 남자의 무덤덤한 대꾸에 수긍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사과를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아……. 저, 방해, 많이 되셨죠. 시끄럽게 해서 죄송해요.”

“알긴 압니까?”

“네. 별일 아니었는데 제 개인 사정이라. 전 갈 테니 편히 쉬세요.”

여주는 빨리 돌아가기로 했다.

어서 룸으로 들어가 혼자가 되고 싶었다.

오늘은 다시 삶을 맞이한 첫날이었는데 너무나 피곤했다.

지난 생에서 1년 동안 만날 사람들을 하루에 본 것이었다.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뭣보다 남태오와 계속 부딪치는 게 염려스러웠다.

그의 배려를 받고 고마워할 때까지가 좋았는데.

지금은 또 그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첫인상은 모르겠지만, 지금도 좋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저 남자가 대체 날 뭘로 볼까?’

모자란, 아니 좀 많이 모자란 여자로 보지 않을까.

반대 입장이라면, 여주는 그랬을 것이다.

“다 큰 어른이 아이스크림 좀 묻었다고 웁니까.”

그래, 분명 그녀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미래에서 온 그녀의 사정까지 어떻게 알겠어?

남태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건 아니지만……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여주는 반은 수긍하고, 반은 수긍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그냥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주는, 아이 생각을 하면서 울고 난 뒤였다.

남태오의 무뚝뚝한 말투에 살짝 울컥해 버렸다.

“근데 다 큰 어른은 좀 울면 안 되나요?”

지난 생에서 그녀가 운 적은 거의 어릴 때뿐이었다.

운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건 없었다.

희망 고아원에서 남자 아이들이 괴롭힐 때 울면 더 신나서 괴롭혔다.

마리아 원장은 계집애 티를 낸다며 더 회초리를 휘둘렀다.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울고 나면, 억울하거나 화나는 것이 가라앉기는커녕.

더 비참해졌다.

아무도 그녀가 왜 우는지 물어봐 주지 않았다.

그만 울라고 다독여 주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울 때는 울 만한 상황이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어른도, 울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가 있는 거라고요.”

아까 그녀의 아들과 이름이 같았던 그 아이도 울음부터 터트렸다.

그건 그 울음을 받아 주고 달래 줄 엄마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가능한 거였다.

그녀의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딱 한 번 투정은 부렸을지언정, 울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었겠지. 바로 그녀가 그런 엄마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빈말로라도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아이는 그녀와 같은 어린 시절을 겪은 것이었다.

“물론 대표님께서는 그럴 일이 없었겠지만요.”

감정의 파도에 휩쓸린 나머지, 그녀는 이성을 내려놨다.

소설가 곤이 아닌, 지유 엄마가 아닌 그냥 여자 차여주로서 말했다.

“뭐, 우는 거야 본인 자유니까.”

“네. 그러니까요.”

예상과 달리 남태오는 그녀의 말에 수긍해 줬다.

고개까지 끄덕이며 그러니, 그녀는 져 버린 기분이었다.

그녀 마음대로 단정 짓고 하는 말에 그는 별로 기분 상해 하지 않았다.

저렇게 어른스러운 태도라니.

그에 비해 감정적으로 대처한 자신이라니.

‘이럴까 봐 저 남자를 피하려고 했는데.’

여주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자책하는데, 남자가 손수건을 건넸다.

“받아요.”

“……네?”

코앞으로 내밀어진 손수건에서 쿨 워터 향이 났다.

쌉싸름하면서도 달달한가 싶다가 알싸한.

참 묘한 향기에 여주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옷.”

“네?”

“내가 닦아 줘야 합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니 계속 묻히고 있었다.

그가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들고 블라우스를 훔쳐 냈다.

그의 쌀쌀맞은 말투도 어쨌든 고마웠다.

“제가 원래 눈물이 좀 많아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요.”

여주는 자신의 모자란 이미지를 좀 만회하고 싶었다.

막상 하고 나서, 안 하니만 못한 말이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자꾸 허둥거리는 스스로가 낯설기까지 했다.

“나한테 해명할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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