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상사가 싫냐고?
그의 질문에 여주가 정신을 차렸다.
저런 말을 들을 정도로 표정이 좋지 못했구나.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해도 이 기분은.
정말이지 소름 끼치게 싫은 느낌이었다.
“네. 좀 많이, 끔찍하네요.”
“그렇습니까.”
“네. 퇴근하고 나서도 상사를 보는 부하 직원 심정, 모르시겠지만 지금 제 심정이 딱 그래요…….”
남태오의 의심을 살까 봐, 대충 둘러댔다.
그녀는 원래 감정 표현에 서툴렀지만, 지금만큼은 솔직했다.
가슴이 들끊는 이 기분은 끔찍함 그 이상이었다.
작가로서 표현의 한계를 느낀다는 것도 짜증이 났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저 두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꾹 내리눌러 참은 것은, 더 큰 복수를 위해서였다.
‘알고 있었잖아. 저 둘의 관계 따위.’
알고는 있었지만, 장소가 달라졌을 뿐이지만.
그래도 지난 생의 그 적나라한 현장보다는 나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가슴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속에서 불길은 또 치솟았다.
바뀐 생에서도 혹시나 싶었는데.
너희 연놈은 똑같구나. 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그녀의 입가를 비집고 나온 건 조소였다.
‘저 둘을 또 보게 만드는 것이 하늘의 뜻일까?’
그녀를 다시 살게 한 것도, 이런 연출조차도.
복수를 하라는 신의 계시려니.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 잠시 돌아앉죠.”
굳어 있던 그녀의 몸이 남자의 손길에 움찔했다.
남태오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에 살짝 올렸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두 남녀를 등지게 됐고, 눈앞에는 야경이 보였다.
룸에서 봤던 도시의 야경이 아닌, 남산타워가 보이는 쪽으로.
그녀가 타워의 불빛에 집중하는 사이, 두 남녀는 빠르게 멀어졌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인사에 남자의 손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만 갑시다.”
남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넓은 어깨와 단단한 체격의 그가 꼭 엄호하듯 뒤에 섰다.
그녀는 꼿꼿이 허리를 펴고 앞서 걸어갔다.
가볍게 눈짓을 주고받은 후, 그들은 그렇게 각자 갈 길로 갔다.
그는 알았을까?
잠시나마 연인 행세를 해 줌으로써 사람 목숨 셋을 살렸다는 걸!
여주는 궁금했다.
남태오는 과연, 그녀의 말을 납득했을까?
설령 아니더라도 그는 그녀를 배려해 줬다.
그건 타인에게서 처음으로 받은 위로였다.
다시 돌아온 세상이 처음으로 살 만하게 느껴졌다.
* * *
“어디 간 거야. 차여주 이 여자.”
도지성은 S호텔로 오자마자, 바로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야외 테라스와 레스토랑이 있는 곳.
여주의 핸드폰에 위치 추적기 어플을 깔아 놓았다.
당연히, 차여주 그 여자는 몰랐다.
잠깐 바람을 쐰다고는 해도, 안심이 될 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 여자는 세계적인 소설가였다.
그 여자 스스로는 제 값어치를 잘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아니, 그 여자의 문제가 그로서는 오히려 복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어디 가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해 왔고 앞으로도 해 나갈 사업과 비즈니스 관계들이 모두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이다.
‘추적기는, 예비 남편이자 담당 편집자로서, 관리 차원에서 한 일이다.’
그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봤지만 차여주의 그림자도 안 보였다.
“하긴, 그 여자가 이런 곳을 올 리가 없지.”
올 생각조차 못 할 거고, 함께 올 사람도 없었다.
그 여자에게는 언제나 그랬듯이, 도지성 자신뿐이었다.
‘그게 고맙지만, 가끔은 그 여자가 혐오스럽다.’
예술하는 사람들이 그렇지만, 차여주는 정도가 지나쳤다.
대인 기피증은 물론이고, 사람 많은 곳을 질색했다.
결혼할 사이였지만, 그녀와 함께 외출을 한 적도 손에 꼽았다.
평생 글만 쓰다 죽어 줬으면 하는 여자.
평생 그 여자를 움켜쥐고 살아가야 할 삶.
그에게 차여주는 그 정도의 쓸모와 가치가 있었다.
“뭐지? 어플이 오류인가.”
아주 가끔이지만, 그녀가 집에 있어도 위치가 다르게 뜬 적이 있었다.
어차피 집과 작업실 방이 아니면 갈 곳도 없는 여자였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몰라도, 처음 한 번이니 봐줄 생각이었다.
딴생각을 하느라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두 남녀를 미처 보지 못했다.
레스토랑 입구로 들어가자, 박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성 씨! 자기야, 여기야 여기.”
“목소리 낮춰. 내가 호칭 주의하랬지.”
방방 들뜬 목소리에 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만에 하나 두 사람의 관계가 알려져서는 무척이나 곤란했다.
뭣보다 차여주를 찾을 수 없는 게 짜증이 났다.
“뭐예요. 혹시, 여주가 여기 있대요?”
박하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거 들킬까 봐, 겁나서 그래요? 자기?”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여전히 호칭은 그대로였다.
“박하나.”
도지성이 경고하듯, 서늘하게 뱉어 냈다.
그제야 박하나가 눈치껏 행동했다.
“알겠어요. 그럼 딱딱하게 편집자님, 그렇게 부를까요?”
“편집장님. 공과 사 구분 좀 해.”
“알겠어요. 알았대도.”
공과 사를 구분하라.
바람난 두 남녀 사이에 오갈 말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도지성의 표정은 당당했다.
그는 스타 작가를 발굴하고, 키워 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렇기에 황금배 출판사에서 책을 낸 박하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박하나의 배경이 남달랐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화 풀어요. 편집장님. 네?”
그리고 박하나는 그런 도지성이라서, 좋았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배경을 알고 나면 굽신거리거나 혐오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지금처럼 가까워져서도 뻣뻣하게 굴었다.
박하나에게는 그게 참 매력적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얼른 들어가요. 나 배고픈데.”
“그리고, 내가 왜 겁을 내?”
도지성은, 짚고 넘어가기 전에 레스토랑은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에도 딱 힘주고 버텨 섰다.
“아니, 나는 자기가 여주 찾는 거 아닌가 했죠.”
박하나가 립스틱을 칠한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도지성의 콤플렉스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박하나의 콤플렉스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차여주.
아이러니하게도 그 여자가 두 사람을 맺어 줬다.
물론 직접적으로 이어 준 건 아니었지만, 뭐랄까.
매개체 역할로는 충분했다.
결혼할 사이라고는 했지만, 그들은 그저 비즈니스 관계였다.
박하나가 본 두 사람의 관계는 얄팍했다.
조금만 틈이 있어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박하나는 차여주한테 부끄러운 게 없었다.
“내가 그 여자를 겁낼 이유가 없잖아.”
도지성은 콕 집어내는 박하나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여우같이 굴 줄 아는 그런 면이 매력적이었다.
새침데기 같으면서도 남자를 흔들 줄 아는 여자.
타고난 배경이 모자람 없어서 자존심마저 높은 여자.
만약 이 여자와 결혼했더라면?
그의 인생은 지금보다 더 나았을지도.
그런 이유로 도지성은 박하나에게 틈을 허락했다.
“설령 지금 이 모습을 차여주가 본대도 뭐라고 할 거야. 아마 너랑 내가 진짜 밥이나 같이 먹고 온 줄 알 거다.”
들킬 일도 없겠지만, 들켜도 둘러댈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애초에 차여주는 남녀 관계에 무지했다.
사람 관계에서도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미성년자였던 차여주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를 맹목적으로 신뢰하게 만들었다.
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치. 알겠어요.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해요. 나 원래 테라스 가고 싶어서 예약해 뒀는데. 레스토랑은 사람 많아서 별로라고요.”
박하나는 적당히 물러나면서, 도지성의 팔짱을 꼈다.
가벼운 투정을 부리자 그의 찌푸려졌던 미간도 풀렸다.
‘일단 식사하고 테라스로 가자고 해야지. 예약은 내가 했으니까.’
원래 박하나는 야외 테라스로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도지성이 예약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차여주의 원고를 보느라 바빠 그랬을 것이다.
‘차여주 걔가 글 하나는 잘 쓰긴 하지.’
차여주가 곤이라는 것을 알아냈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도지성의 약점을 잡았다.
그것을 빌미로 만남을 갖게 됐고, 이렇게 비밀스런 사이가 됐다.
이제 소설책 한 권을 낸 박하나였지만, 곤의 소설을 읽는 순간 알았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너처럼 글은 못 쓰겠지.’
그 대신, 차여주보다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바로 남자를 홀리는 재주였다.
‘차라리 차여주가 우리 사이를 알아채면 좋겠어.’
그렇다면 이 지지부진한 관계도 어떻게든 끝이 날 것이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도지성과 비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차여주가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으니 그 대신 차여주의 것을 갖고 싶었다.
박하나는 갖고 싶으면, 반드시 가져야 직성이 풀렸다.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나저나 내일 마감도 제대로 해야 할 텐데 말이지. 하여간 골치 아픈 여자라니까.”
도지성은 무신경하게 굴었고, 그럴수록 박하나는 애가 탔다.
그의 머릿속의 반 이상 아니 90%는 차여주가 쓴 소설 내용으로 가득했다.
편집자였지만, 그는 거의 원작자 이상으로 소설에 몰입해야 했다.
그것이 담당자로서의 완벽한 서포트라고 여겼다.
“그러니까 골치 아프게 뭘 자꾸 생각해요. 일단 가요. 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그녀는 질투심이 샘솟는 걸 억누르며, 그를 잡아끌었다.
* * *
그 시각, 여주는 룸이 있는 복도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5분 전.
복도를 내달려 오던 아이 하나와 부딪친 뒤였다.
아이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지금은 여주의 블라우스에 고스란히 엎어져 있었다.
“내, 내 아이스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