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아. 저 그게 그러니까.”
얼른 뒷걸음질 쳐 거리를 두고 섰다.
여주는 그녀답지 않게 얼버무렸다.
“그게, 뭡니까.”
남태오의 눈빛이 설명해 보라는 것처럼 번뜩였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저, 저기 방금 전에는 제가 좀 놀라서.”
“뭐, 됐습니다.”
“아, 네.”
퍽 당황스러웠던 탓에 그녀는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다는 것인지…….
왜 이 남자 앞에 있으면 긴장되고, 그녀답지 못하게 행동하는 건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 줬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이야 있었지만, 현재로선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저 남자가 미래의 일을 알 수는 없었다.
“식사, 했습니까?”
“네?”
두 번째 듣게 된 질문 역시 놀라웠다.
일개 출판사 직원과 식사를 하겠다고?
우리가 무슨 이유로 식사를 같이 해?
혹시 내가 모르던 인연이라도 있었던가?
근데 레스토랑이라면 곤란한데.
이미 도지성이 들어간 직후였다.
그녀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그가 말했다.
“야외 테라스, 꽤 좋은데.”
기분 탓인지 몰라도 그는 그녀가 겸석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작업 멘트를 할 위인은 결코 아니었다.
마네킹 저리 가라 하는 몸매에 딱 맞춰 입은 양복은 날렵해 보였다.
거기다 오만하면서도 자신만만한 눈동자.
높다란 콧날, 적당히 그을린 피부까지.
온몸에서 섹시한 페로몬을 풍기는 남자였다.
설마 식사를 같이할 사람이 없을 리가.
“죄송하지만, 테라스 쪽은 예약석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갑자기는 좀 제가 실례를 하는 것 같아서요.”
그녀는 뒤로 더 물러났다.
저 남자는 철저한 사업가였다.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그 의도를 충족해 줄 수 없었다.
지금으로선 그녀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다.
“곤 작가, 어시라고 들었습니다.”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곤 작가의 어시라고? 내가?
“네? 제가요?”
이번에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들어 본 적도 없던 얘기였기 때문에.
“도 편집장이 그러던데, 아닙니까?”
“…….”
이미 저 남자는 확신을 하는 말투였다.
그 확신을 준 작자는 다름 아닌 도지성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떻게 그녀를, 곤 작가의 어시로 만들었을까?
곤 작가는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알아야 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럼 실례가 아니라면, 겸석할게요.”
“좋습니다.”
그녀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겸석하기로 했다.
테라스라면 그래도 레스토랑 쪽보다는 덜 붐빌 것이다.
자리에 앉자 와인, 치즈와 샐러드류가 준비됐다.
그녀는 순간, 가격표를 떠올리고 표정 변화에 신경 썼다.
‘우연히 만난 거래처 직원에게 이런 비싼 음식을.’
점점 저 남자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요새 글은 잘 써집니까?”
“……네?”
순간, 그녀는 놀라 혀를 깨물 뻔했다.
하마터면 늘 똑같죠, 뭐. 심드렁하게 대답할 뻔했다.
“라고 소설가 곤 선생께 전해 줬으면 하는데.”
어느새 남자의 호칭이 달라져 있었다.
“아……. 선생님께요.”
“어렵겠습니까.”
순간, 그녀의 직감이 발동했다.
그러니까 그녀를 굳이 겸석시킨 것이 곤 작가 때문이었나?
글은 잘 써지냐, 그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만약 저 남자가 동종 업계였다면.
그건 그냥 인사치레 같은 말이었다. 너무나 당연했다.
글이 써지든 안 써지든 무조건 써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연재를 기다리는 독자들을 배신하는 거였다.
도지성의 혹독한 감시 아래, 그녀는 글을 써냈다.
그런데, 저 남자가 물어봐 주니 색달랐다.
마치 가벼운 안부 인사처럼 느껴졌다.
“네. 선생님께는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남자를 살폈다.
저 표정 별로 없던 남자의 눈빛에 순간 이채가 돌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소설가였다.
비록 사람을 무서워하고, 꺼렸지만 그들을 늘 관찰했다.
사람에 대해 다루는 만큼,
인간의 어두운 속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정확히는 그런 속성을 글로 옮기는 것에 재능이 있었다.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 주기에 범죄 추리라는 장르는 완벽하게 부합했다.
‘종합해 보자면 남태오, 저 남자는.’
곤 작가의 팬인 것으로 보여졌다.
아직은 추측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확신 쪽에 가까웠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를 잡아 둘 이유가 없었다.
‘의외네. 장르 소설은 전혀 안 읽게 생겨서.’
편견이 아니라 정말, 그는 그만큼 귀족적인 생김새였다.
고상하고 고결해 보이는 이미지로 보자면, 세계 문학 전집만 읽을 것 같았다.
“식사합시다.”
남태오가 포크를 들어 올리자, 간단한 동작임에도 무척이나 우아해 보였다.
저 손에 그녀가 써낸 책들도 한 번쯤 들렸을까?
그녀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를 거느렸었지만, 현실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거기다 남자 독자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남자의 매력은 차고 넘쳤다.
매끈하게 뻗은 길다란 손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손가락 마디 마디가 굵은 그녀의 손과는 태생 자체가 달라 보였다.
어린 시절 뚝뚝 마디를 끊던 습관 때문에 못생겨졌다.
“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그녀는 은연중에라도 손을 내보이지 않으려 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손을 보면, 괜스레 제 손이 부끄러웠다.
“나 말고 곤 선생께 감사해요.”
“네. 그러겠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녀도 그게 편했다.
이상하게 저 남자 앞에서는 대인 기피증이 좀 덜했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좋지 못했던 기억으로 여자보다 남자가 더 불편했다.
하지만 남태오 앞에서의 그녀는?
말도 떨지 않게 할 수 있었고, 눈을 마주할 수도 있었다.
왜 이 남자랑은 대화가 되는 걸까?
이 남자는 뭐가 다르지?
전생에서 그녀가 마주하고 얘기할 수 있는 남자는 도지성이 유일했다.
그건 그가 그녀를 인정해 줬고, 존중해 줬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그녀가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믿게 만든 것이 도지성의 능력이라면 능력이었고.
담당자로서의 신뢰감이 아무래도 가장 컸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와는 아직 유대감이 없었다. 지금의 현실에서는 그랬다.
“곤 선생 말입니다.”
와인 잔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쥐고 마시던 그가 시선을 맞췄다.
저렇게 타인과 눈을 마주치는 데 주저함이 없다니.
그녀는 그의 자신감에 순간 감탄했다.
“네. 말씀하세요.”
“선생께서는 이번 계약도, 대리인 통해 할 거랍니까?”
“아……. 네. 그 부분은 역시 그럴 것 같습니다.”
선생이라니.
그러고 보니 자꾸 선생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호칭에 순간, 그녀는 닭살이 돋았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는 계속해서 ‘곤 선생’이라고 했다.
‘내가 당사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내가 존칭을 받을 정도로 나이가 많지는 않은데.
살짝 억울해지는 그녀였다.
세간에 알려진 곤 작가의 이미지가 저럴까?
그 이미지가 저 남자에게도 영향을 끼쳤을까?
“그런데, 그 부분은 왜 궁금해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찌 됐든, 그녀는 곤 당사자였고 남자의 호의가 고마웠다.
비록 제삼자인 척 행세하고 있지만, 작가란 그랬다.
자신의 글을 좋아해 주는 독자라면, 날개 없는 천사처럼 보였다.
겸석까지 하게 됐으니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남태오를 대할 생각이었다.
“솔직히, 난 선생이 실존 인물인지 궁금합니다.”
“쿨럭!”
그녀는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시, 실존 인물이냐니…….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물론 그녀가 신비주의를 고수하기는 했었다.
어디까지나 작품 집필 활동에만 매진하겠다는 명목으로.
그렇다고 해서, 실존 인물이냐고 의심까지 받을 줄이야.
‘여기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하지만 저 남자가 어찌 알겠는가.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녀의 정체를 결코 알 수 없었다.
지난 생에서 알게 된 것도 그녀가 밝힌 것이 절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들켰던 건데.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니라 그녀는 후회했었다.
“하긴, 선생을 실제로 뵀겠군요.”
“그럼요. 네. 뵙고 말고요.”
“방금 말은 혼잣말입니다.”
“아,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남태오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면, 저 남자는 계약 초기부터 소설가 당사자와 만남을 원했었다.
도지성이 나중에서야 들려준 말로는 그랬다.
알았다 해도 여주가 특별히 나설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결국 고집을 꺾은 건 저 남자였다.
‘이게 참, 무슨 운명의 장난이야.’
돌아가서 도지성을 보게 되면 물어봐야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곤 작가의 어시스트로 둔갑시켰냐고.
‘앞으로 이 남자와는 보는 일이 없게 해야겠어.’
일대일로 만나는 자리는 이게 마지막이어야 했다.
그녀로서는 충분히 뜻깊은 시간이었다.
두 번째 삶에서, 그래도 팬인 듯한 사람도 만났으니.
나름 작가와 독자의 만남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감사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저, 대표님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어요. 선생님께는 꼭 안부 전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만 돌아가야 했다.
아쉬울 때가 가장 좋은 때라는 말도 있었다.
“감사했습니다. 나야말로.”
분명 저 말도 의례적으로 하는 말일 텐데도.
진중한 말투라 진심으로만 들렸다.
남자의 답변에 그녀가 설핏 미소 지으며 자리를 뜨려 할 때였다.
‘저 인간은 왜 또 나타난 건데?!’
도지성이 테라스 입구 쪽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거기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있는 여자는 박하나였다.
아주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이번 생에도 꼭 붙어 있었다.
“하아.”
그녀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좀 컸다.
남태오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상사가 싫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