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두 번째 기회를 얻어 낸 그녀는 달라졌다.
그녀는 소설가의 인생에만 목을 매던 차여주가 아니었다.
오늘 검사 중에서도 특히, 유방암 검사를 반드시 받아야 했다.
‘그래야 내가 살아.’
방치했다가는 지난 생처럼 3기, 4기 판정을 받을지도 몰랐다.
미리 알기만 했어도 그녀는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늦은 오후쯤, 그녀는 검사를 다 끝마쳤다.
“차여주 환자분. 48시간 이내로 결과 나올 테니 귀가하셔도 됩니다.”
간호사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병원 복도를 빠져나왔다.
로비로 나왔으나 현실감은 덜했다.
가까운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부터 들여다보았다.
스무 살의 그녀는 역시나 마스크와 모자를 푹 눌러쓴 차림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녔던 과거의 그녀다웠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슬쩍 모자를 벗었다.
눈 밑으로 내려온 다크서클과 희끄무레한 피부가 먼저 보였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화상이, 흉터가 없어!’
이마부터 눈가를 덮었던 화상 자국이 사라졌다.
그 자국은 도지성과 박하나의 불륜 현장을 덮쳤을 때, 생겼었다.
그녀에게 들키자마자, 박하나가 주방 쪽으로 도망을 쳤었다.
그녀 역시 감정이 폭발해 쫓아갔다가 끓던 주전자를 정면으로 맞고 말았다.
‘됐어. 일단은 잊어버려.’
아직 이곳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미래였다.
그렇다 해도, 바뀌지 않는 사실.
도지성은 개자식이었다.
일탈을 결심한 그녀는 호텔로 향했다.
그녀가 작가가 되고 나서 첫 일탈이었다.
늘 집과 작업실 방만 오가던 인생이었다.
오늘 집으로 들어갔다가는 도지성과 마주칠 것이다.
분명 결과 받으러 병원에 갈 때 또 해명해야 했다.
그럼 지난 생처럼, 마감을 핑계로 외출을 막아설 게 분명했다.
‘어차피 사고 칠 거 크게 치지 뭐.’
단, 작가로서의 임무는 지키기로 했다.
그녀의 개인 노트북은 집에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동안 써 온 정은 있지만, 이참에 하나 바꾸지 뭐.’
어차피 원고는 그녀의 머릿속에 전부 있었다.
보안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따로 메모하지 않았다.
간혹 이야기가 복잡해질 때면 리갈 패드에 적어 볼 뿐, 그것마저도 파쇄기로 들어갔다.
지난 생에서는 그런 작업 방식이 참 비실용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써내지 않는 한, 그 누구에게도 원고는 가지 않을 테니까.
더는 타인을 위해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글을 쓰면서 즐거웠던 때가 언제였지?’
인생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담당 편집자였던 도지성과 결혼하고 그것마저 빼앗겼다.
두 번 다시, 그녀의 것을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을 것이다.
“여주야. 작가는 말이야. 평생 글만 쓰면서 살아도 좋은 사람들인 거야. 그게 진정한 예술이지. 여주 너도 할 수 있잖아. 그렇지?”
그녀의 첫 인세조차 그녀가 써 본 기억이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작가가 되게끔 도와줬던 도지성에게 고마워 전적으로 일임했다.
계약서에 찍힌 건 그녀의 도장이었지만, 모두 도지성의 손이 한 일이었다.
그때는 그게 부부간의 도리이고 의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그녀의 생각이었던지, 도지성이 했던 말인지.
이제 와서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겠지만,
지나고 보니 그건 개소리였다!
* * *
여주는 호텔에 가서 반신욕을 했고, 룸서비스를 시켰다.
라운지나 고급스러운 바에도 가 보고는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렀음에도, 바뀌지 않는 건.
바로 그녀의 대인 기피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희망 고아원 원장과 양부모의 학대를 받으며 자랐었다.
그렇기에 사람이 많은 곳은 여전히 두렵고 꺼려졌다.
“좋아. 오늘 원고는 여기까지가 좋겠어.”
최신형 노트북으로 원고 작업을 거의 마쳤을 때였다.
도지성의 전화였다.
- 여주 너. 저녁인데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원고 상태가 이렇게 거지 같은데.
원고 상태에 따라 도지성은 어투가 달라졌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여주는 놀라지 않았다.
“그래서 고치느라 시간 좀 걸렸어요. 지금 보낼게요.”
- 그럴 거였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걱정했잖아.
“걱정하지 마요. 난 괜찮으니까.”
여주는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봤자 평소 말을 잘 하지 않아 쉰 목소리였다.
-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잖아. 호텔 간 거야?
“네. 맞아요.”
- 그래. 바깥 바람이 그리울 때도 됐지.
“그렇죠. 그럼 원고 보낼 테니 확인해요.”
- 그러지. 여주야. 수고했어.
그녀가 어딨는지, 지금쯤이면 알 것이었다.
현금이 없기도 했고, 지갑에는 도지성 명의의 카드가 있었다.
그녀가 어디서 돈을 쓰고 다니는지 문자가 갔을 테지.
아직은 도지성의 의심을 사서는 곤란했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서, 생각에 잠겼다.
‘정리, 정리를 하자.’
정말 그녀가 5년 전으로 돌아왔다면.
이제 이틀 이내로 초기인 유방암 1기 판정을 받겠지.
그럼 절제술을 해야 했다.
가슴 한쪽이든, 두 쪽이든 살 수만 있다면 떼어 낼 것이다.
여자로서의 몸 같은 건 이미 포기했다.
지난 생, 도지성은 그녀를 잘 돌보지 않았었다.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었을 거다.
비즈니스였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니,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녀는 도지성을 믿었었다.
편집자로서 가장 먼저 그녀의 재능을 알아봐 줬던 그 마음.
남자로서 가장 먼저 그녀도 여자라는 걸 알게 해 줬던 그 기억.
그런 것들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줬으니까.
다만, 그것들이 전부 거짓이라는 게 문제였다.
“차여주. 난 편집자로서 너를 존경하고…… 그리고 남자로서 너를 사랑하고 싶어. 언제나 네 곁에서 서포트할 수 있게 해 줘.”
순진하게도 그녀는 그의 사랑이 자신에게 향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도지성은 그녀에게 작가로서 재능이 없었다면.
사랑이란 말조차 꺼내지 않았을 남자였다.
‘답답해.’
어쩔 수 없는 지난 생의 기억들이 꼬리를 물었다.
호텔 창문을 보다가, 손을 뻗어 열려 했지만 밀리지 않았다.
그 대신,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도시의 빌딩 숲이 만들어 낸 풍경은 화려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는 듯했다.
‘시원한 밤공기를 들이마신 적이 언제였지?’
그녀의 작업실 방은 환기가 잘 되지 않았다.
책들로 빼곡했는데, 햇빛이 너무 잘 들어와도 책이 상한다는 게 도지성의 뜻이었다.
책을 아꼈던 그녀 역시 그곳에 적응해 갔다.
그 쾌쾌했던 공간을 떠올리던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밤공기가 마시고 싶으면, 가면 그만이었다.
두 번째 생의 기회를 얻었는데.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살 것이다.
* * *
여주는 라운지 바 입구 쪽에 서 있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밤공기를 마시러 1층 로비로 갈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순간, 두 커플을 보고 숨이 막혀 왔다.
시간을 돌렸음에도 대인 기피증은 고쳐지지 않았다.
‘참아. 여주야. 참아.’
그녀가 머무는 층수는 고층에 속했다.
1층까지 가느니 꼭대기 층에서 내리는 게 나았다.
얼떨결에 같이 내렸지만, 차마 들어가지는 못했다.
습관적으로 입구에 있는 안내판 글자를 읽어 내렸다.
평일 저녁은 밤 10시까지 운영된다고 했다.
오른편은 식사가 가능한 레스토랑이 있었다.
왼편으로는 야외 테라스가 있었다.
야외로 가고 싶었지만, 그곳은 예약제였다.
‘어떻게 하지?’
왼편으로 간다면 그녀도 식사를 해야 했다.
낯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식사까지 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다시, 그녀의 룸으로 돌아가야 했다.
엘리베이터를 다시 타야 하나?
운이 좋으면 사람이 없을 수도 있었다.
‘후우. 조금만 참자.’
역시 밖으로 나오는 건 아직 무리였나, 싶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렸을 때였다.
그녀 앞에 있던 문이 열리고,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태오! 저 남자가 여기 왜?’
남자는 통화 중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저 남자는 전생에 그저 한 사업가였고, 투자자였다.
그녀의 작품들이 영화와 드라마화 됐을 때, 아낌없이 판권료를 지불했었다.
그렇게 인정 넘치는 인상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랬었다.
‘기분이 좀 이상하네.’
그녀의 마지막 순간, 곁에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건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이었다.
평소 그녀를 향해 냉소를 서슴지 않던 그였다.
별로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상대였다.
“아, 실례했습니다.”
여주는 남자가 전화를 끊자마자, 사과했다.
옆으로 비켜서자, 남자의 눈동자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혹 날 알아본 걸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녀는 혹시나 싶어 기억을 더듬었다.
저 남자가 자신의 정체를 이렇게 빨리 알게 됐을 리가 없는데.
그녀는 확신했다.
“황금배 출판사 직원, 아닙니까?”
남자의 입술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 나왔다.
굳게 다물린 그 입술은 할 말을 하고서, 다시 다물렸다.
‘날 출판사 직원으로 알고 있어?’
여주는 정말이지 묘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나비 효과인 걸까?
그녀는 전생에서 이렇게 일대일로 우연히, 남태오와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출판사에서 어쩌다가 스쳐 지나갔다면 모를까.
그렇다 해도 그녀의 신상을 아는 건 도지성밖에 없었다.
“아닙니까.”
그녀가 말이 없자, 남자는 대답을 재촉했다.
성미가 급한 남자였다는 게 생각났다.
“저, 우리가 어디선가 마주쳤던가요?”
그녀가 조심스레 질문하자, 그의 입술이 일순 살짝 휘었다.
“질문에 질문이, 답입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일전에 잠깐 도지성 편집장과…….”
남태오의 말은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반대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도지성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헉!’
그녀는 돌발 상황에 놀라 남태오 쪽으로 아예 돌아섰다.
‘이쪽으로 오면 큰일인데!’
등을 내보이며 서있는데, 다행히 그녀를 못 본 듯했다.
도지성은 급히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무척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남태오와 심하게 가까이 붙어 있었다.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