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27)

#27

모두가 잠이 들어 조용한 시간. 마차 한 대가 은밀히 안제크가에 들어왔다. 사전에 연락을 받았던 집사를 비롯한 고용인들은 멈추는 마차의 앞으로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러자 마차의 문이 열리고 마기휼이 먼저 내렸다. 뒤를 이어 라울이 내렸는데 그의 품에는 작은 포대기가 들려 있었다. 그 사이로 작은 손이 살짝 나오는 걸 본 집사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라울을 쳐다보자 그는 말없이 그 앞을 지나쳐 갔고 마기휼이 뒤를 쫓았다.

마기휼이 갑자기 저택에서 나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었다. 물론 마기휼이 이 저택에 지나치게 오래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유머가 있고 말주변도 있어서 칙칙한 저택 분위기에 짓눌려 있던 그들에게 있어 숨통을 트여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내심으로 마기휼의 부재를 쓸쓸해하며 도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건가 싶어 궁금해하던 그들이었으나 황급히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는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봤다. 라울의 품에 안겨 있던, 작은 생명체를 말이다.

“으- 피곤해.”

침대에 주저앉자마자 뒤로 넘어가는 마기휼을 확인한 라울은 품에 안은 아기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그러자 착하게도 내내 조용히 있던 아기가 그때부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라울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고 마기휼이 옆으로 몸을 돌리며 한쪽 팔을 들었다.

“침대 위에 눕혀.”

라울은 침대 위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안고 있던 란을 조심스레 내려놨다. 푹신한 침대에 눕게 되자 란은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라울의 품에서 떨어진 것이 싫었던지 울려 하자 마기휼은 당장 그쪽으로 몸을 붙였다.

“그래그래. 착하지?”

마기휼은 아기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당장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벌린다. 먹이를 찾듯 말이다. 곤란한 일이었다. 마기휼은 엎드려서는 아기를 가만히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쪽을 집중해서 바라본다. 마치 이쪽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듯 말이다. 보랏빛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던 마기휼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정말 귀엽네.”

“배가 고픈 모양인데 유모를 부를까?”

“이미 도착해 있겠지?”

안나는 이쪽이 들어오기 3일 전에 먼저 도착해 있게끔 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쪽이 도착했다는 건 이미 그녀의 귀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지금쯤 오지 않을까.

생각하기가 무섭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라울 님. 저 안나입니다.”

“들어와라.”

허락이 떨어지자 안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편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마기휼과 아기. 그리고 옆에 서 있는 라울을 확인한 그녀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오시느라 힘드셨겠습니다.”

“우리들이야 배를 타는 건 일상적인 일이라 괜찮은데 아기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중얼거리며 마기휼은 아기의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당장 입을 벌려 그 손가락을 깨문다. 우물거리며 입술을 움직이자 마기휼은 당장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 입술을 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긴장이 풀린다. 아기가 칭얼거리지만 않았다면 더 그렇게 있고 싶었으나 손을 뻗어 뭔가를 잡는 시늉을 내니 마냥 품에 둘 수 없었다. 마기휼은 아쉬운 듯 아기에게서 떨어졌다.

“배가 고픈 모양인데요.”

“그럴 만도 하지요. 제가 데리고 가도 괜찮으시겠어요?”

“아, 그렇게 하세요.”

마기휼은 자리에서 일어나 란을 안아 들었다. 아기 특유의 냄새가 났다. 이마에 입을 맞춘 후에 안나에게 조심스레 넘겼다. 품에 안기는 아기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안나는 속삭였다.

“모유를 먹이고 오겠습니다. 그러는 동안 쉬세요.”

안나가 란을 안고 나가는 걸 확인한 후, 마기휼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 걸로는 안 되겠지.”

젖에서 뭔가가 나오긴 하는 것 같은데 양은 적었다. 그 느낌이 찝찝해서 속옷을 자주 갈아입으면서 냄새를 맡아봤더니 모유인 것 같기는 한데 긴가민가했다. 호그도 비슷한 게 나오는 것 같다며 불확실한 말을 했다. 나오기는 해도 그게 불확실하고 양도 적으니 아이한테 먹일 수 없었다. 나올 때마다 닦아 내고 아기는 다른 여자가 모유를 먹여주고 있었다. 워낙에 잘 먹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쑥쑥 자라는 것 같다.

그렇게 순식간에 꼬마 아가씨가 되고, 어른이 되는 건가. 그러다가 어느 놈팽이한테 시집을 가버리는 건가.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에 내가 손을 잡아줘야 하는 걸까. 아니면 라울이?

시집 같은 거 안 보내면 안 되나? 이상한 놈이 나타나서 데리고 가겠다고 한다면 무지 화가 날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리도 살벌한 얼굴인 거지?”

“우리 애가 나중에 커서 결혼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라울의 안색 또한 굳어졌다. 돌처럼 경직되는 그 얼굴을 보자니 웃음부터 나왔다. 마기휼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풋- 하고 웃는 흉내를 냈다.

“역시나 너도 화나는 거로구나.”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다.”

“왜 이러셔. 눈 감았다 뜨면 다 커 있을지도 몰라.”

입을 굳건히 다문 라울의 표정이 싸하게 식어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게 눈에 빤히 보일 정도였다. 그게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아하하. 하고 웃다가 이내 하품이 나왔다. 침대에 머리를 대고 누운 채로 라울을 올려다봤다.

“근데 여기로 돌아와도 아무런 문제는 생기지 않겠지?”

“누군가 아기를 데리고 가버릴 것 같아?”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르겠어.”

목소리 톤이 낮아지고 마기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누군가 훔쳐 가면 그 상대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 그렇지.”

막 태어난 아이를 오르베가 훔쳐가 여왕에게 주려 했었다. 하지만 여왕은 그걸 거부했지. 지금 당장은 절박하지 않아서 거절을 했던 걸지도 모르고, 라우젝이 달리 손을 썼을 수도 있었다.

아기를 되찾으러 달려가는 동안에는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오르베를 목 졸라 죽여야겠다는 결심을 했었지만 우려했던 그런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쪽을 방심하게 해 놓고 뒤통수를 치려 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아직까지는 잠잠했다. 여왕도 오르베도, 라우젝도 말이다. 무슨 생각인 걸까.

이 사실에 대해선 마기휼에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도 종종 불안한 듯 아기를 안은 채로 창밖을 내다보는 그였다. 말을 꺼내는 순간 당장 아기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겠다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라울이 보기에 이곳이 가장 안전했다.

노르디아의 수도고 요새와도 가까웠다. 이번에 새롭게 사람을 교체해 내부에 오로지 자신만의 사람들로 채워 넣고 주변에 감시를 깔아 두면 쉽사리 들어올 수 없을 거다.

“또 라우젝이랑 신경전을 벌어야 하는 거겠지.”

중얼거림에 눈을 내리떴다. 마기휼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 댔다.

“오르베는 다시는 이쪽으로 안 돌아온대?”

“제정신이라면 못 들어올 거다. 그리고 라우젝은 저택에서 나가게 할 거다.”

“쫓아낼 거야?”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라우젝이 순순히 나갈지 모르겠네.”

중얼거리며 마기휼은 핏- 하고 웃었다. 라울은 그런 마기휼을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럽게 입에 입을 맞추는 것에 놀란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라울이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을 올렸다. 목을 감싸고는 입술을 댄다. 부드럽게 쪽쪽거리는 입맞춤을 받는 동안 마기휼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간지러워서 소리 내 웃으며 라울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적였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안나는 눈치가 있는 사람이다. 예상은 하고 있겠지.”

그래. 예상은 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이쪽이 그녀의 얼굴을 태연히 볼 수 있느냐는 거였다. 안나는 앞으로 아기의 유모가 될 예정이었다. 오랫동안 함께 있을 사람이니 세세한 문제로 얼굴 붉히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도 부담감 갖지 말고 그냥 당당하게 생각하도록 하자. 그리 마음을 먹은 마기휼은 라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일어나서 아기가 누워 있는 요람으로 걸어갔다. 그 안에서 잠이 들어 있을 아기를 상상하며 내려다봤다. 하지만 텅 빈 요람을 확인한 마기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바라봤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바깥에서 부는 바람이 커튼을 마구 흔들어 댔다. 그 너머로 보이는 검은 배경을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란. 아기의 이름 하나만을 또렷이 떠올리며 마기휼은 눈을 부릅떴다.

“헉?!”

숨이 차 가슴이 먹먹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마기휼은 침대 주변을 둘러봤다. 옆에 누워 있던 라울도 보이지 않았다.

“라울?”

부름에 대답이 없다. 불현듯 별장에서 안제크가 저택으로 돌아온 게 떠올랐다. 그리고 조금 전에 꾼 꿈의 내용도 말이다. 어디까지나 꿈이겠지만 불길한 예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겨버린 거면 어떻게 하지?

마기휼은 당장 침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는 순간 울음이 들렸다. 아기 울음을 듣는 순간 안도하게 된 마기휼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옆방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앞에 서자 라울이 보였다. 라울의 뒷모습을 보는 동안 안도감에 한숨이 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건지 라울이 몸을 돌렸다.

“마기휼. 일어났나.”

그리 말을 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라울의 품에 아기가 안겨 있었다. 찾고 있던 두 사람이 확인되는 순간, 말도 못하게 안심이 됐다. 몸에 들어간 힘이 주욱 빠질 정도였다. 어쩌면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라울이 이상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는 마기휼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쟁반을 들고 서 있는 안나가 보였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마기휼 님 죄송해요. 란 님이 갑자기 열이 나서 약간 소란스러워졌어요.”

“란이 열이 났습니까?”

중얼거리며 라울의 앞으로 걸어가 고개를 숙였다. 라울의 커다란 팔에 안긴 아기는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훌쩍거리고 있었다. 이미 한바탕 운 건지 눈 아래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란의 목 아래에 대어진 천이 축축하게 젖은 걸 확인하고는 아기의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 입을 맞췄다. 따끈따끈했다. 이상한 냄새도 났다.

인상을 쓴 채로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토했어?”

“아주 조금만 넘어왔고 심한 건 아니었어요.”

설명을 해도 마기휼의 굳은 표정을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갑자기 열이 오르더니 많이 우시더라고요. 그 소리에 라울 님이 나와서 안아주고 달래는 동안 금방 내렸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 호그 의원님께 연락을 취했어요. 금방 오실 거예요.”

마기휼은 란의 몸에 손을 댔다. 라울은 마기휼에게 란을 넘겼다. 란을 받아 들어 등을 토닥이자 칭얼거린다. 땀 냄새랑 침 냄새. 그리고 토한 냄새 등, 그리 좋은 향기는 아니었지만 떼놓고 싶지 않았다.

란의 등을 위, 아래로 쓰다듬자 칭얼거림이 점점 잦아든다. 이내 길게 토해 내는 한숨이 들렸다.

“아기 주제에 한숨을 다 쉬네?”

“마기휼 네가 안아주니 더 차분해지는 것 같군.”

“내 배 속에 있었던 걸 아는 거지.”

란의 몸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작게 뛰는 심장 소리가 맞닿은 부분에서 울려 퍼졌다. 그걸 듣고 나서야 안심했다.

긴장한 근육이 이완되는 걸 느끼며 라울을 바라봤다.

“자다가 일어난 거야? 난 그것도 모르고 완전 푹 자버렸네.”

“피곤해 보였으니까 조용히 일어났다. 란이 열이 나는 건 아무래도 장소가 바뀌어서 그러는 모양이야.”

라울은 란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 미지근했다. 열은 내리고 표정도 한결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서서히 잠이 드는 것 같았다. 그걸 보자니 라울도 마음이 놓였다.

안나는 가만히 있다가 라울과 마기휼을 번갈아 봤다. 키가 크고 잘생긴 사내 둘 사이에 안긴 아기는 편안해 보였다. 이쪽이 달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확실히 부모라는 느낌이었다. 흡족하게 웃는 안나의 모습에 마기휼은 뻘쭘해졌다.

“왜 웃는 건데요?”

“자라는 아기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달라지곤 한답니다. 그래도 란 님은 걱정이 없겠네요. 이렇게 걱정해주는 두 분이 계시니까요.”

마기휼과 라울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행동에 안나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의원님이 오면 진찰을 받도록 하죠. 한 분은 들어가서 이만 쉬세요.”

“아니. 호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저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차피 잠은 다 깼어요.”

마기휼은 란을 안은 채로 침대로 가 천천히 안았다. 움찔하고 몸을 떤 란은 깊은 숨을 토해 냈다. 자는 것 같았다. 마기휼의 앞에 서 있던 라울은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란의 발가락을 잡아 살살 당겼다. 그런 라울의 손을 바라보기만 하려니 그가 지나치는 어조로 물었다.

“소리가 들렸나? 란의 울음은 금방 잦아들었는데 말이야.”

“아니. 실은 이상한 꿈을 꿔서 깨버렸어.”

“꿈이라니?”

“그냥 웃고 넘길 만한 꿈이었어.”

하지만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팔 안에 들린 아기는 가벼웠다. 그런데 사라졌다 생각하는 순간 가슴 한가운데로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다. 지금도 손이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다 꿈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란의 등을 토닥였다.

민머리의 란은 어느덧 금발이 나오기 시작했다. 풍성하진 않지만 조금이나마 머리카락이 있으니 더 귀여운 것 같다. 피부는 뽀얗고 눈동자는 반짝거리는 보랏빛이고 머리카락은 블론드였다.

정말 귀여워서 천사 같았다.

“지나치게 예쁜 거 아니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순간 란을 돌보고 있던 젖어미와 안나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쪼그리고 앉아 란을 빤히 보고 있던 마기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곧 본인이 한 말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노, 농담입니다. 그냥 헛소리가 나왔어요.”

애써 변명을 해보지만 그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를 맞대며 키득거리는 게 ‘팔불출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팔불출이라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해버린 건지 모르겠다며 헛기침을 하는데 바깥이 술렁거린다. 평소에는 무척이나 조용한 저택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안나가 중얼거렸다.

“바깥이 소란스럽네요.”

“왠지 좀 싸한 기분이 드는걸?”

들리는 소리 사이에 섞인 건 분명 아이들의 목소리였다. 그 얼굴 똑같은 놈들 말이다. 설마하니 찾아온 건 아니겠지?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신부님!”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것은 다섯 아이들이었다. 합창을 하며 이쪽을 부르나 싶더니 갑자기 굳어버린다. 왜 그러나 싶어 아이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자니 유모의 품에 안긴 란이 있었다. 아뿔싸 싶었던 마기휼은 당장 란을 숨기기 위해 양팔을 벌렸다.

동시에 아이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

“완전, 완전, 완전 천사야!”

다른 아이들은 말을 하지도 못했다. 대신에 동시에 한꺼번에 란에게 달려들었다.

마기휼은 쳐들어오는 아이들을 모두 막아내며 질색을 했다.

“저리로 안 가?! 보지 마!”

모두가 란 쪽으로 손을 뻗어 대는 걸 확인한 마기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안나와 젖어미는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듯 제대로 된 방비조차 못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앞으로 뻗어 왔다.

“마, 만지고 싶어.”

“만지지도 말라고!”

냅다 란을 안아 들고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아우성을 치며 아이들이 뒤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려서 더 서둘렀다. 최대한 란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하면서 속도를 높였다. 휙휙 주변 풍경이 빠르게 바뀌고 곧 계단 위쪽의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쪼그리고 앉기가 무섭게 아래로 아이들이 지나쳐 갔다.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에 소름 끼친다며 몸을 부르르 떨고는 란의 상태를 확인했다. 품에 안긴 란은 마기휼의 검은 머리카락을 잡아 물고 있었다. 머리카락 끝은 이미 축축해졌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은 란의 턱 아래로 흐르는 침을 닦아 냈다.

작은 손이 꼬물거리며 올라와 마기휼의 손가락을 붙잡는다. 그리고 앙- 하고 물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는 것이나 그 보드라운 촉감에 눈앞으로 별이 반짝인다. 너무 귀여워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헤벌쭉 웃자 눈을 깜박인다.

왜 따라서 안 웃는지 모르겠다. 라울을 닮아서 잘 안 웃는 거 아니야? 뭐, 그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이구, 우리 란. 이쁘기도 하지.”

헤실거리며 끌어안았다. 마기휼의 어깨에 턱을 올린 채로 란은 잡은 머리카락을 죽죽 당겼다. 그래도 좋다며 웃고 있는데 아래로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설마-? 경계심이 7단까지 오른 마기휼은 숨을 죽이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아래 복도를 지나치는 오르베가 보였다.

아이들만 온 줄 알았더니 그녀도 온 거였어? 놀란 마기휼은 란의 등에 한 손을 대고는 조금 더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오르베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안색을 굳혔다.

“뭘 찾는 거야?”

발을 멈춘 오르베는 뒤를 돌아봤다.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의 라우젝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비웃듯 한쪽 입술 꼬리를 위로 올렸다.

“아이를 찾고 있는 거야? 가이나는 이미 거절한 걸로 알고 있는데?”

“내 아이들을 찾고 있는 것뿐이야.”

“그 시끄러운 놈들? 란을 보고 한눈에 반했던지 우르르 몰려가던데?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쪽에 있지 않겠어? 이런 조용한 곳에는 없을 걸?”

라우젝은 빈정거리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하니 그 애들을 핑계로 란을 한 번 더 보러 온 건 아니겠지? 란은 정말 사랑스러운 아기니까 말이야.”

“그 아이는 다시는 보지 않을 거야. 나랑은 맞지 않아. 나 같은 거에 닿으면 그 아이도 단명하게 될 거야.”

고개를 돌린 오르베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그녀의 단정적인 말에 라우젝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저주를 퍼붓고 그래.”

“저주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내 아기들은 모두 세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렸으니까. 나랑 가까워지면 분명 그 아이도 그리될 거야.”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해도 내심으로는 그녀의 속내가 느껴졌다. 아이를 셋이나 잃은 그녀는 아기를 만지고 싶어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안아봤던 아기의 체온을 잊을 수 없어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으면서도, 그걸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거였다.

라우젝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사라져간다. 그걸 읽은 오르베는 동정 따위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들며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들었어. 다시 왕실군으로 가게 될 것 같다며? 축하할 일이로군.”

“그렇지. 이번에는 그들 뜻대로 좌지우지되지 않을 거야. 한번 박히면 절대로 뽑히지 않는 바위가 되어주겠어.”

“대단한 각오네. 그래. 넌 독한 녀석이니까 그리할 수 있을 거야.”

“오르베보다야 못하겠지.”

계속되는 빈정거림에 오르베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무표정을 한 채로 바라보는 동안 라우젝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울이 오기 전에 이 저택에서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충고한 그는 오르베를 스쳐 지나갔다.

라우젝이 가고 난 후 오르베는 이마에 한 손을 짚었다. 그리고 가려고 했던 복도 쪽을 바라봤다. 이 방향은 라울과 아기의 방이었다. 갔다가 괜한 오해를 받을 테니, 이쯤에서 발길을 멈추어야 했다.

복도의 저편을 바라보는 오르베의 눈동자가 점점 깊어졌다. 이내 쓰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점점 표정이 어두워진 오르베는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고개를 들었고, 그리고 푹신한 어떤 것에 얼굴이 푹- 하고 부딪쳤다.

“풉?!”

놀란 오르베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보이는 건, 아기였다. 공중에 대롱 매달린 아기는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동그란 눈으로 오르베를 바라보던 아기는 입을 벌렸다. 그 사이로 침이 지익 떨어졌다. 놀란 오르베가 숨을 삼키는 순간 아기가 아래로 내려가고 옆으로 마기휼이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마기휼?”

이름을 부르고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왜 이런 장난을 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굳은 눈빛을 하던 오르베의 눈동자가 움직여 아기를 바라봤다.

아기는 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밀어 넣겠다는 듯 주욱 집어넣는 것에 놀란 오르베가 손을 들었다.

“손가락―!”

“란, 그러면 안 돼.”

소리를 침과 동시에 마기휼이 차분하게 란을 고쳐 안고 입 안에 들어간 손을 빼줬다.

손바닥으로 침을 닦아 내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란을 고쳐 안아 엉덩이를 토닥이는 모습이 능숙했다. 여러 번 아이를 키워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많이 달라진 마기휼의 모습에 오르베는 위로 든 손을 내렸다.

“최근 어디서 지내십니까?”

멍하니 란을 바라보던 오르베는 헛숨을 삼켰다. 그리고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마기휼을 흘겨봤다.

“남 걱정하지 말고 본인 걱정이나 하시지그래?”

“제 걱정이랄 게 뭐가 있겠습니다. 걱정거리 하나도 없습니다.”

“호오, 그래? 집안에 빚이 있잖아? 뭔 배짱인지 모르겠지만 잘도 20만 베리를 되돌려줬더군. 그 큰돈을 언제 벌려고 무모한 짓을 하는 거지?”

“제가 갚을 게 아니라서 별 걱정은 없습니다.”

“그럼 누가 갚을 건데?”

“제 동생이 다 갚을 겁니다.”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오르베의 안색은 그리 편치가 못했다.

“속 편한 말을 하는군.”

불만 섞인 중얼거림에 마기휼은 소리 내 웃었다.

“독설은 여전하십니다. 아직 살 만하신 모양이지요?”

“그러는 그쪽은 꽤나 무례해졌네. 안제크가의 후계자를 낳아서 기고만장해진 거야?”

“이 아이는 안제크의 후계자가 아니라 마기휼의 딸입니다. 라울의 딸이기도 하고요. 때문에 아주 강하고 튼튼하답니다. 미신 같은 것에도 끄덕없지요. 솔직하게 란을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한다면 문전박대는 하지 않겠습니다.”

란이 위로 손을 뻗으며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작은 손가락이 계속해서 허공을 더듬었다. 그 귀여운 손짓에 눈길이 가고 어쩔 수 없이 란을 바라보게 된다. 오르베는 괴로운 듯, 뭔가가 떠오르는 듯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평정을 유지하며 마기휼을 노려봤다.

“나를 동정하는 거야?”

“동정이랄 것까지는 없고 엄마 역할을 해줄 사람이 없어서 그럽니다. 란은 아빠만 둘이지 않습니까.”

오르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을 내리뜬 그녀는 긴 한숨을 토해 내더니 눈을 감았다 떴다. 잠시 우울한 얼굴을 하던 오르베는 말없이 마기휼을 지나쳐 갔다.

이런 일이 쓸데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아기 얼굴을 보는 것 정도는 허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에는 몰랐던 오르베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아이를 잃은 슬픔이나 두려움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다른 생각을 하던 마기휼은 기침 소리에 눈을 내리떴다. 입에 손가락을 하나 넣고 있던 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엄지로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 냈다. 더 기침을 하지 않았지만 이만 방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 날이 따뜻해지면 산책이나 나와야겠다며 방으로 걸어갔다.

-RED ZONE 完

RED ZONE plus

“다녀오세요―.”

두 손을 위로 흔들며 또박또박 인사를 건네는 사랑스러운 딸의 모습에 마기휼은 표정이 풀렸다.

제 딸이긴 해도 정말 귀엽다. 지금 이 모습을 혼자서 보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림으로 그려 두거나 영상으로 박제해 둘 순 없었을까. 가뜩이나 하루하루 자라는 게 눈에 보여서 아까워 죽겠는데.

마기휼은 쪼그리고 앉아서 올해로 만 세 살이 된 카이란의 두 손을 잡곤 위아래로 흔들었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그동안 잘 지내고 있어.”

“응.”

“기침이 더 나오거나 머리가 지금보다 따끈해지는 것 같으면 집사 할아버지에게 말하고. 알겠지?”

“응, 응.”

대답할 때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토끼 같다.

마음 같아서야 같이 데려가고 싶지만, 갑자기 열이 올라서 그럴 수 없었다. 아직은 어려서 배를 타고 고지대로 데려가는 게 부담스러웠던 마기휼은 딸의 손을 잡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카이란을 대할 때하고는 영판 다른, 다소 경직된 눈빛과 억양의 말이 튀어나온다.

어린 조카의 등 뒤에 팔짱을 낀 채로 버티고 서 있던 라우젝은 그런 마기휼의 부탁에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알겠다거나,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해줄 생각은 없는 걸까. 자신들을 대할 때하고 카이란을 대하는 태도가 다름을 알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며칠뿐이라 할지라도 열이 나는 카이란을 두고 가기가 좀―.

그때 카이란이 작게 콜록, 기침을 한다.

당황한 마기휼은 재차 딸을 바라보면서 괜찮으냐고 물으려 했고 동시에 라우젝이 허리를 굽히곤 조카를 안아 들었다. 익숙한 것처럼 라우젝의 품에 안정적으로 안긴 카이란은 한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오세요.”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카이란의 머리를 묶은 붉은 리본을 보자마자 그리로 손이 간다. 조금 삐뚤어져 있는 걸 바로 잡아준 후 마기휼은 옆에 둔 짐가방을 들었다.

가서 옷과 필요한 몇 가지를 전달하고 바로 돌아오면 되었다. 왕복 거리에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다 합쳐도 삼 일도 채 걸리지 않는다. 카이란을 데리고 가면 좋겠지만, 재차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리곤 켈록, 기침하는 모습에 마기휼이 들어가라며 손짓한다.

“찬 바람 쐬면 안 될 것 같으니까 이만 들어가요. 형님, 정말 잘 부탁드립니다.”

“아까부터 같은 말을 몇 번이고 하고 있어. 그렇게나 내가 못 미더운 거냐.”

그러면 댁이 미덥겠냐.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힘겹게 삼킨 마기휼은 누가 봐도 어색할 만한 미소를 지었다.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언제까지 틱틱거릴 순 없었다. 그 모습에 실소를 흘린 라우젝은 근처에 서 있던 집사가 들고 있던 담요를 받아서 그걸 란 위에 덮었다. 그리곤 무척 조심스럽게 안은 채로 몸을 돌렸다.

확실히 마기휼과 라울을 대할 때하고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이쪽과 대화를 나누어도 눈길조차 주지 않더니만 란을 보듬는 손길은 섬세했다. 아기였을 때부터 라우젝을 보고 자라 왔던 란도 그의 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깨에 뺨을 기댄 채로 재차 마기휼에게 손을 흔든다.

고작 며칠 나갔다가 바로 돌아오는 것뿐인데도 이렇게나 벌벌 떨다니. 다른 사람들 보면 비웃을 일이겠지. 언제까지 품 안의 자식일 순 없으니 적당히 해 둬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그때 란이 제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는 그걸 마기휼에게 날린다. 마기휼이 종종 딸과 라울에게 장난스럽게 날리곤 하는 손키스였다. 곁에서 보고 자라다 보니 저런 것도 스스럼없이 하게 되는 모양이라면서 마기휼은 소리 내 웃었다.

어려도 자신이 걱정이 되어 쉬이 발길을 옮기지 못한다는 걸 느낀 것이다.

슬슬 배 시간이 다가오기도 했던 만큼 마기휼은 바로 몸을 돌렸다.

근처에 대기해 있던 마차에 올라탄 마기휼은 의자에 앉았다.

“아가씨 걱정은 마시고 조심해서 잘 다녀오십시오. 라우젝 님께서 저러셔도 아가씨를 많이 아끼시잖습니까.”

자신이 쉬이 안심하지 못하는 게 지나치게 티가 났던지 뒤따라 온 집사가 말을 건넨다.

마기휼은 웃었다.

“저도 압니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습니다.”

인사를 나눌 땐 걸음이 안 떨어졌는데 막상 마차에 앉으니 괜찮아졌다.

자신들이 며칠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투정을 부릴 아이도 아니었다. 금방 돌아와서 좋아하는 장난감 몇 개를 사 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기휼은 집사에게 저택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일해 왔던 집사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 팔짱을 낀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

움직이는 마차와 동시에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뛴다.

이번에 만나러 가면 대체 얼마 만에 그 얼굴을 보는 걸까. 한 달은 넘은 것 같은데.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한 마기휼은 재차 눈을 뜨곤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두 뺨이 발긋하게 달아오른 그는 긴 숨을 내쉬었다.

란이 태어나고 1년이 되었을 때, 라울은 여왕에게서 노르디아의 군사권 전부를 넘겨받았다. 모든 절차와 격식을 무시하고 갑작스럽게 결정된 사안이었다. 당연히 반발이 뒤따랐지만, 여왕은 그것이 나라와 자신을 위한 결정이라며 모든 걸 묵살했다.

여왕이 밀어붙이니 감히 누가 그걸 말릴 수 있을까. 그러는 동안 어둠 속에서만 있던 라우젝도 모습을 드러냈다. 성장하지 않는 몸을 지닌 그는 그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다. 그저 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본인의 뛰어난 모든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원망이 컸다. 하지만 언제부터일까. 갑자기 슬슬 밖으로 나다녀봐야겠다고 말하더니 지금은 라울의 든든한 아군이 되었다.

본래 노르디아의 한 축을 담당하던 쟁쟁한 가문의 사내들이었다. 덧붙여 라우젝과 라울 형제는 빼어난 능력을 갖춘 군인이었다. 한때 다른 두 나라와의 관계가 경직된 적이 있었는데, 그걸 해결한 게 그들 형제라는 게 알려지면서 국민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치솟았다. 자연스럽게 그들을 신임하고 따르는 자들은 점점 늘어났다.

라우젝의 경우에는 특이한 신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한편, 또 그것에 열광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라울의 강인함과 빼어난 미모에 매료된 사람들은 남몰래 초상화 같은 걸 만들어 유포하기도 했다. 그 초상화가 노르디아뿐만 아니라 알센과 치울스에서도 꽤나 팔려 나간다 한다. 대체 어떻게 그렸을까 싶어 마기휼도 그걸 하나 구해서 본 적 있었다.

꽤 잘 그리긴 했지만 실물을 전부 담지는 못했다. 보자마자 이게 뭐냐고 아쉬워하는 마기휼이었지만, 라울은 웃고 말 뿐이었다.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사람에겐 뒷골목에서 본인과 비슷하게 그려진 그림이 거래되는 건 크게 문제 되지 않는 일이었던 거다.

시간이 흐를수록 강력한 힘을 손에 쥐게 된 라울에 대한 반발은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온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여왕과 혼인을 할 셈인가 싶었지만, 이후로 2년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뭔가 저들이 알 수 없는 암묵적인 거래가 오간 게 아닌가 싶어 그걸 알아내려 하는 자들도 종종 나타났다. 물론, 그들에 대한 처리는 라우젝과 오르베가 해주었지만―.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어느 순간 카이란이 존재가 외부에 알려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딸이지만, 저택에 계속 두고 키울 생각은 없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또래가 다니는 학습소에 보내거나 어울리게끔 할 셈이었다. 하지만 알려진 이상, 평범한 아이들처럼은 살 수 없겠지. 최대한 맞춰주려고 해도 그게 안 될지도 모른다. 때문에 마기휼은 벌써부터 생각이 많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 고민하는 그에게 라우젝이 조언이라고 해준 말이 있었다.

‘애초에 평범한 아이가 아니야. 그러니 다른 아이들처럼 키우려는 생각은 접어. 그건 네 환상이야.’

그러니 적당히 포기할 건 포기하고 카이란에 대한 교육법을 다시 수정하라는 거였다.

라우젝과 라울처럼, 그들이 자란 환경에 카이란을 맞춰야 하는 게 맞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기휼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자랐을 때처럼 키울 순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여러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 노력하는 또 다른 사내를 하나 더 알고 있기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피익-, 귓가에 울리는 작은 소음에 마기휼은 눈을 떴다.

푹신한 의자에 눕다시피 해서 담요를 덮고 있었던 그는 기지개를 켜면서 크게 하품을 했다.

“아, 잘 잤다.”

일어나 앉은 마기휼은 물병을 들어 물을 마시면서 옆에 난 작은 창문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봤다. 낮잠을 청한 몇 시간 사이 이동선은 목적지에 다다라 있었다.

험준한 산맥과 짙은 안개가 무겁게 깔려 있는 곳은 노르디아의 북서쪽에 자리한 영토였다.

3년 전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었던 황량한 벌판이 몇 년 사이에 참으로 많이 바뀌었다. 산 몇 개를 통째로 밀어버려서 만든 거대한 요새 곳곳에는 라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내는 신형 군함이 수십 척이 넘었다.

높은 하늘 위에서도 확인이 되는 매끈하게 잘빠진 군함을 확인한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떴다.

“…….”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기분이다. 가능한 한 차분하게 마주하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았던 마기휼은 주변을 정리했다.

저곳이 보이기 시작하면 착함하는 건 금방이었다. 의자를 바로 세우고 담요를 정리하면서 두고 가는 건 없는지를 확인하자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일어났어.”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건 군인이었다.

“곧 착함합니다. 배가 완전히 내려앉을 때까진 자리에 앉아 계셔주십시오.”

육아에 더 신경 쓰고 싶어서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있긴 했지만, 마기휼도 한때 나름 잘 나가던 군인이었다. 그 정도 기본규칙은 일일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고 있다면서 가볍게 손을 흔들자 고개를 숙인 군인이 문을 닫고 나간다. 다시금 혼자가 된 마기휼은 턱을 괸 채로 창밖을 내다봤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이곳은 아무나 출입할 수 없었다. 마기휼도 인근까지 다른 배를 탔다가 이후 군대 전용 이동선으로 갈아타야만 했다.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이 된 독립적인 공간이나 마찬가지인 이곳에 그 녀석이 있었다.

라울. 혀 위로 이름을 굴려본 마기휼은 긴 한숨을 쉬었다.

마기휼은 오랫동안 자신의 특이한 신체를 부정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다 라울을 만났고 여러 다양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본인이 원치 않던 방향으로 일이 흘러갔지만, 그 속에서도 스스로 선택한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라울을 받아들이고 카이란을 낳은 것 같은.

카이란이 생긴 이후에도 고민의 나날이 이어졌지만, 막상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그 가벼운 무게에 반비례하는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흔들림 없는 눈빛에서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되는지 바로 결정을 내렸다. 더 이상의 고민과 망설임은 사치였다. 그건 라울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본인이 처한 상황을 벗어나 보다 주체적이 되기로 했다. 때문에 일 년여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여왕을 회유하고 협박해서 원하는 걸 손에 넣었고, 계획하던 것들을 밀어붙였다. 알센과 치울스가 알지 못하는 장소에 독립적인 군사 기지를 만들어서 완전히 개량된 군함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당장은 평화로운 나날이지만, 언제 갑자기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었다.

장차 카이란의 나라가 될지도 모르는 노르디아를 삼국 중에서 압도적인 강대국으로 올리기 위해서, 또 그걸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다. 때문에 한 달 넘도록 이런 곳에 처박혀 돌아오지도 않는 거다.

“최근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어서 총독께서 무척 흥분하셨지요. 저희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새롭게 개발된 기술 때문에, 이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 자신이 짐 몇 개를 챙겨 온 거고 말이다.

워낙 구석진 곳에 있다 보니 필요한 물건을 바로 공수할 수 없었다. 하루에 한 번씩 외부로 나가 필요한 몇 가지 물건들은 바로바로 공수하긴 했지만, 그중에서 라울이 원하는 게 매번 포함되는 건 아니었다.

카이란과 함께 있으면서 육아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라울도 챙기게 되었다. 입는 것에 한해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마기휼이 신경 써줬다. 그래 봤자 주문만 넣어서 배달 받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라울은 마기휼이 그런 식으로 준비해준 속옷이나 의상이 아니면 영 불편해했다. 분명 똑같은 브랜드의 제품이라도 마기휼이 사 준 게 아니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딱 드러내게 티를 내지 않더라도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예상보다 길어진 일정 덕분에 속옷과 갈아입을 옷이 부족해지자 마기휼이 그걸 챙겨 온 것이고 말이다.

물론, 이게 큰 부분을 차지하긴 했지만,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었다.

속옷 같은 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과 떨어져 혼자 있는 게 싫은 게 아닐까.

“저기에 계십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군인의 안내를 받은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높은 사다리차 위에 서 있는 몇몇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 사이로 검은 제복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금발의 사내가 눈에 들어온다. 라울이었다.

“…….”

꼴랑 한 달 만에 보는 건데 왜 이런 기분이 들까.

반갑기도 하고 동시에 짠해진다. 자신만큼 란과 함께 있으면서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을 텐데. 물론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일단 기반만 다져 놓으면 그때부터는 라우젝과 번갈아 가면서 관리하면 되니까 보다 오래 저택에 머무를 순 있겠지.

조금만 더 참으면 되었다. 그러면―.

그때 군함을 살피던 라울이 아래로 고개를 돌린다. 자신을 봤을까 싶었던 마기휼은 바로 한 손을 들었다. 나 왔어. 그런 느낌으로 가볍게 흔들자 라울이 바로 사다리차에서 몸을 날린다.

“위험―!”

위험하다는 말이 무색해지게도 중간 다리에 가볍게 착지해서는 이후로는 계단으로 빠르게 내려온다. 그렇게 한달음에 마기휼 앞까지 달려온 라울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왔나.”

“…….”

담담한 얼굴이지만, 이렇게 서둘러 달려오는 것에서부터 글러먹었다.

이 정도로 보고 싶었던 거라면 그냥 집에 올 것이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걸 체크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성격이란 건 참 답답한 거로구나.

마기휼은 뒤를 가리켰다.

“일단, 필요한 짐을 준비해서 왔습니다. 확인해보시겠습니까.”

“그래야겠지. 무슨 일이 있으면 알리도록.”

근처에 서 있던 군인에게 한마디 건넨 라울은 먼저 움직였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건 대기 중에 있던 차량이었다. 먼저 조수석 문을 연 후에 뒤따르는 마기휼을 본 그는 자연스럽게 운전석으로 넘어갔다. 라울이 열어준 문을 통해 조수석에 앉은 마기휼은 안전벨트를 매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라울의 숙소는 여기서 멀지도 않았다. 금방 도착하겠지만―.

문이 닫힌 차량에 나란히 앉자마자 심장이 뛴다. 라울 특유의 체취를 맡을 수 있었던 마기휼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란은?”

“형님하고 같이 있어. 데려오고 싶었는데 열이 나더라고.”

“많이 안 좋은 건가?”

“아니. 오늘 하루 푹 쉬면 괜찮아질 거야.”

평범한 부부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라울이 시동을 건다.

운전대를 돌리면서 운전을 하는 모습을 안 보는 척하면서도 몇 번이고 곁눈질을 하게 된다. 흘깃거리며 보는 중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 라울과 시선이 부딪친다. 운전 중에 어딜 보는 거냐고. 앞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겠느냐는 말을 하고 싶어도 입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매번 먼 거리를 왕복하는 와중에도 사나흘에 한 번씩은 저택으로 돌아왔던 라울이었다. 열흘은 뭐야, 한 달 가까이 안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통신을 하거나 편지도 한 번 주고받았지만, 역시 실물을 보는 것하고는 달랐다.

“좀 마른 것 같다. 밥을 잘 챙겨 먹기나 하는 거야?”

“일단은 끼니 때마다 준비해주니까.”

준비는 해줘도 그것이 전부 라울의 입맛에 맞지 않을 수도 있었다.

보나마나 커피는 한번에 들이켜고 빵 한 조각이나 입에 물고 말겠지. 육류나 생선도 다 챙겨서 먹어야 하는데. 덩치도 좋은 녀석이 제대로 안 챙겨 먹으면 근육 다 빠지는 거 아니야. 몸 되게 좋은데―.

어느덧 차량은 라울의 숙소 앞까지 도착했다.

다른 군인들과 다른 입장이니 기지 안에 독립적인 건물이 있었다. 차량을 넣을 수 있도록 벽과 나무로 가려진 독립적인 주차장도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내리면 외부의 시선에서 완전히 차단되었다.

주차장에 차를 밀어 넣은 후 라울은 시동을 끄고 열쇠를 뻗어 안쪽 수납함에 대충 넣었다. 그리곤 운전대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마기휼을 바라봤다. 아까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그 시선에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올라간다.

늘 보던 얼굴인데도 낯선 기분이 들었다.

이처럼 군복을 제대로 차려입은 모습이 오랜만이라 그럴까. 그게 아니면―.

그때 라울이 손을 뻗어선 마기휼의 팔뚝을 잡았다. 큰 손으로 두어 번 주무르듯 만지더니 점점 위로 올라간다. 어깨로 그의 손가락이 닿았을 때 마기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동시에 라울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입술이 닿자마자 성급하게도 벌려진 사이로 혀를 밀어 넣는다. 점막이 마찰 되면서 혀를 세게 빨아들이는 느낌에 마기휼의 감겨진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흥분으로 단숨에 불씨가 튀었다.

지난날 동안 라울을 그리워했던 건 마기휼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입술이 맞닿은 채로 마기휼은 라울 쪽으로 이동했다. 여전히 마기휼의 얼굴을 한 손으로 붙잡은 채로 계속 키스를 하던 라울은 의자를 뒤로 빼내 제 허벅지 위에 마기휼이 보다 편하게 앉게끔 했다.

마기휼이 허벅지에 올라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허리를 두 팔 가득히 끌어안는다. 마기휼도 라울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은 채로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혀를 빨아들이고 입술을 핥고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가면서 그의 입술을 탐했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타액이 달았다. 라울도 그렇게 느낄까 싶었을 때 성급하게 옷을 내리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바지 뒤로 내려간 손이 드러난 엉덩이를 아프게 움켜쥔다.

“흡―.”

막힌 입술 사이로 막힌 숨이 토해져 나오자 라울의 손은 더 대담하게 변했다.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만져서 그 형태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부족한 것처럼 몇 번이고 주무르다가 더 아래로 손을 내린다. 라울의 몸 위에 앉아 있었던 마기휼은 그의 하반신이 단단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못지않게 흥분해 있었기에 노골적이다 싶을 만치 엉덩이를 문지르면 입술로 누른 곳에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온다. 살짝 리드하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질 뻔했지만, 허리를 한 팔로 감싼 라울의 손이 둔덕을 타고 내려가 주름에 닿자 또 달라졌다.

섬세하게 주름 주변을 만지작거리다가 그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기대감에 몸은 달아올라 있었지만, 무턱대고 삽입하는 건 무리였다. 때문에 손가락으로 풀어주고 난 후에 넣을 참이었던 라울은 생각보다 부드럽게 들어가는 그곳을 느끼곤 입술을 뗀 후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떨어진 그 사이로 두 사람의 뜨거운 호흡이 섞인다. 동시에 의구심이 담긴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라울을 두고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라울이 왜 이렇게 올려다보는지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던 마기휼은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쉽게 말을 잇지 못하던 마기휼은 곧 더듬거리며 덧붙였다.

“전날 약간 풀어줬어.”

뭘 어떻게 해서 풀어줬는지는 묻지 말았으면 싶었다. 그냥 오늘 라울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이것저것 준비하는 김에 그곳의 상태도 좀 체크한 것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서 괜히 먼산을 바라보는 마기휼을 두고, 처음에는 가만히 있었던 라울의 한쪽 눈썹이 서서히 올라간다.

직후, 그의 기분을 드러내듯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것과 마주하기가 참으로 민망했던 마기휼은 재차 말했다.

“얼굴 보자마자 할 게 뻔하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울이 마기휼의 상의를 잡아 뜯었다.

좌우로 벌려지는 상의에 날아가는 단추를 본 마기휼은 크게 당황했지만, 더 당황스러운 건 다음 일이었다. 상의는 단추가 날아간 것으로 끝났지, 셔츠는 그대로 찢어버린 거다.

찌이익, 하고 시원하게 갈라지듯 찢기는 셔츠에 당황한 마기휼이 뭐라고 하려던 찰나 라울은 곧장 그리로 얼굴을 묻었다.

가슴 가운데를 혀로 길게 핥고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선 이를 세워 작은 살덩이를 깨물었다.

“아파-!”

허리를 들썩인 마기휼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허리에 닿는 건 운전대였다.

라울의 위에 올라타 있는 이상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었고, 라울은 원하는 걸 차근차근 해 나갔다.

마기휼이 살짝 일어난 상태를 이용해서 그의 바지 앞섶을 빠르게 풀어내고 속옷과 함께 내려버렸다. 누구 못지않게 발기된 성기가 노출되고 찬 공기가 그곳에 닿자 소름이 돋았다. 당황해서 허리를 굽히기가 무섭게 라울은 재차 그의 허리와 엉덩이 아래를 각각 팔로 받친 후에 제 쪽으로 당겼다.

“허어-!”

엄청난 힘에 끌려간 마기휼은 차량 천장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무릎을 세운 채로 있어 제 중요 부위가 노골적으로 라울 눈앞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렇다 해서 감출 필요는 없었다. 이미 볼장 다 본 사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

라울의 진한 눈빛에 반응한 게 잘못이었다. 잘 달래서 적어도 넓은 방 안에서 시작하는 거였는데.

마기휼의 절절한 후회와 달리 라울은 이미 제 얼굴 앞으로 다가온 마기휼의 성기를 거침없이 물었다. 촉촉한 곳으로 성기가 빨려 들어가자 마기휼은 등을 구부리면서 헐떡였다. 라울의 위에 엎드려선, 좌석 머리 받침대 위를 한 손으로 붙잡은 채로 간신히 제 몸을 지탱하는데 앞을 문 라울이 이번에는 뒤로도 손을 뻗는다. 손가락으로 간질이듯 주름을 건드리더니 그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라, 라울-! 조금만 천천히 해!”

시큰하게 올라오는 쾌감에 오금이 저렸다. 하지만 그것도 세게 성기를 흡입하는 순간 지워진다.

기분 좋았다. 잠시 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마기휼은 허리를 들썩였다. 제 입 안으로 조금씩 밀려 들어오는 성기에 맞춰서 입을 움직이던 라울은 계속해서 마기휼의 뒤를 만졌다.

손가락 하나에서 두 개로, 조금씩 개수를 늘려 가면서 그가 좋아할 만한 곳을 자극하자 몇 번이고 몸을 떨면서 허, 헉, 하고 가쁜 숨을 토해 낸다. 나중에는 열에 취해서 허리를 들썩이면서 제 이름만을 부르는 마기휼을 확인한 라울은 아래로 손을 내렸다. 선반을 눌러 그곳에서 튜브형 물건을 꺼냈다. 마기휼이 정신이 없는 동안 그곳에서 결합을 보다 수월하게 해줄 수 있는 걸 가득히 뿌려서 재차 마기휼의 뒤에 갖다 댔다.

“차가워…….”

헐떡거리면서 마기휼은 뒤를 돌아봤다.

좁아서 잘 보이지 않지만, 라울이 재차 손가락을 밀어 넣자 아까보다 부드럽게 잘 삽입되었다. 마기휼은 뒤로 한 손을 내렸다. 라울의 손가락이 깊숙이 들어가 있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더듬자 곧장 다른 손이 움직여선 마기휼의 손목을 붙잡았다.

당황한 마기휼이 뒤로 몸을 물리자 라울은 물고 있던 성기를 빼냈다. 덜렁거리던 성기가 마기휼의 몸이 무너져내리면서 라울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마기휼은 다리를 벌린 채로 라울의 위에 주저앉아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분명 잡혀 있는 손 때문이겠지.

그가 곤혹스러워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던 라울은 낮게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전날 어떻게 풀어줬는지를 보여줘.”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여기선 보이진 않을 테니까 뭘 어떻게 했는지만 알려줘.”

“…….”

뒤로 돌아간 손목을 움켜쥔 손으로 더 강한 힘이 들어간다.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해서 이쪽이 뭐라 해도 들을 생각 따위는 없겠지.

얼굴이 온통 붉어진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손가락을 갖다 댔다. 이미 라울의 손가락이 세 개나 들어가 있었다. 마기휼이 손가락이 닿자마자 일부러 내벽을 꾸욱 눌렀고 그 때문에 짧게 신음을 흘린 마기휼은 다리를 오므렸다. 그래 봤자 발기된 성기를 감출 순 없었다. 진짜 성격이 이상해졌다면서 마기휼은 일부러 시선을 피한 채로 라울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천천히 눌렀다.

몇 번이나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보려 했지만, 안 될 것 같았다. 댔다가 떼기를 반복하던 마기휼은 깊은 한숨을 토해 내며 라울을 올려다봤다.

“이미 네 손가락이 들어가 있어서 나는 넣을 수 없어.”

그 말에 마기휼의 눈동자를 똑바로 본 채로 라울이 손가락 하나를 빼냈다. 두 개만 넣은 채로 옆으로 슬쩍 피해준다. 어떻게든 시키고야 말겠다는 라울의 의욕이 느껴졌기에 마기휼은 눈 딱 감고 해주기로 했다. 그냥 살짝 넣었다가 빼면 되지 않겠느냐 싶어서 슬금슬금 손끝을 살짝 넣은 채로 라울의 안색을 살폈다.

설마 이보다 더한 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 그런 거라면 넌 변태야.

생각은 그렇게 해도 막상 라울과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뭇거리며 마기휼이 입술이 열렸다가 다물길 반복하더니 힘없이 시선을 떨군다. 그걸 봄과 동시에 라울은 눈을 가늘게 떴고, 당장 그 안에 넣고 있던 손가락을 빼내곤 다시 마기휼의 허리를 붙들었다.

“어?”

당황한 마기휼이 한 소리 내면서 자세를 바로 할 새도 없이, 라울은 그 엉덩이를 위로 들고는 제 바지 앞섶의 지퍼를 열었다.

벌려진 옷 사이로 튀어나오듯 모습을 드러내는 거근을 본 마기휼은 기함했다.

“자, 잠깐만―”

알고 있어도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사이즈였다.

라울의 어깨를 붙잡곤 버텨보려 했지만, 제 위에 마기휼을 맞춘 라울은 그대로 아래로 잡아끌었다.

“……!!”

주름에 귀두가 닿는 순간, 그대로 한번에 끝까지 삽입되었다.

내벽이 확장되면서, 손가락으로도 닿지 않았던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왔을 때 마기휼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본능적으로 다리를 더 크게 벌리고선 몸에 힘을 빼려 했지만, 힘들었다. 불편한 자세는 라울이 더 노력하지 않고도 결합이 깊어지게 했다. 제 체중을 실어서 고스란히 몸 안쪽으로 성기를 받아들인 마기휼은 몸을 떨면서 신음을 흘렸다.

라울은 제 성기를 품어주는 점막의 뜨거움과 강한 압박감을 느끼곤 긴 숨을 내쉬었다.

“……좋아.”

나직하게 쉰 목소리로 내뱉는 짧은 감상에 마기휼의 허리가 떨린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드는 것에 맞춰서 라울이 그의 허리를 더 단단히 붙잡곤 그 위를 들어 올렸다.

“허어-!”

아직 익숙해지기도 전에 움직이려는 라울에 당황한 마기휼은 몸을 뒤로 젖혔다. 한쪽 팔꿈치로 운전대에 기대곤, 다른 손을 그의 어깨를 움켜쥐듯 붙잡고는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위아래로 흔드는 움직임에 맞춰서 힘겹게 몸을 들썩였다.

힘들지만, 익숙해지면 지금보다 더 좋아질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아래가 단단히 이어져 있고, 어떤 자세를 잡아야 할지 알 수 없어 힘겨워하면서 끙끙거리는 자신을 뚫어지라 주시하는 라울의 시선에 마기휼은 흥분했다.

강압적이다 할 만큼 단단히 붙들어서 어떻게든 하고 싶어하는 라울의 욕정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자신만이 그를 만족시켜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오는 신음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절반쯤 빠져나간 성기가 갑자기 퍽, 치고 올라오자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올라온다. 짧게 깊게 파고들 때마다 일정하게 자극을 받은 곳에서 저릿거리는 쾌감이 퍼진다. 거듭 헐떡이면서 마기휼은 자세를 달리하려 했다. 라울의 위로 똑바로 서보려 했지만, 기다렸다는 듯 성기가 빠져나가자 오금이 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

중심을 잃었기에 주저앉았고, 그 때문에 결합이 깊어졌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마기휼은 라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거칠게 헐떡였다. 하아, 하아, 하고 토해 내는 숨에 눈앞이 어지러워진다.

라울은 제 성기를 죄이는 내벽이 주는 쾌감을 충분히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줄 몰라하면서 다리를 오므리는 마기휼의 행동에는 결국 참을 수가 없었다.

자세를 살짝 바꾸는 동시에 마기휼의 허리를 한 손으로 붙들곤 그대로 그 몸을 움직였다. 저항하듯 마기휼이 고개를 저으면서 잠시 기다려보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반쯤 빼낸 성기로 위를 찔러 올리자 마기휼이 막힌 숨을 토해 낸다. 힘겹게 억누르려는 신음에 보란 듯이 라울은 허리를 들썩였다. 처음에는 느리게 그러다 점점 깊어지는 결합에 마기휼은 헐떡거렸다.

점점 빨라지는 허릿짓에 몸속이 울린다. 접합부가 마찰할 때마다 울리는 찌걱거리는 음향이 귓가에 맴돌아 머릿속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흥분으로 눈가가 달아오른 마기휼은 라울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 마기휼을 마주 끌어안은 라울은 조금 더 수월하게 그의 몸속으로 제 성기를 찔러넣었다. 힘겹게 몸을 위아래로 들썩이면서 마기휼은 연거푸 신음을 토해 냈다. 오랜만의 정사라 그럴까. 아니면 바깥이라 참으려는 걸까. 억누른 신음에 라울은 의자 레버를 당겨서 아예 일자로 넘어가게 했다.

갑자기 펼쳐지는 등받이에 당황한 마기휼의 허리를 잡은 채로 빠르게 몸을 돌린다.

“뭐 하는, 아―!”

자세가 바뀌면서 박혀 있던 성기가 빠져나갔다. 내벽 위쪽을 강하게 긁어 내는 감각에 마기휼은 가쁜 숨을 헐떡였다. 그 사이에 마기휼의 몸 위로 올라탄 라울은 그의 무릎을 잡아 벌리면서 다른 손으로 그의 엉덩이 아래를 들어 올렸다.

곧장 하반신이 들려진 마기휼은 당황하면서도 운전석 옆 창문 바로 위를 발로 눌렀다. 두 다리가 활짝 열렸지만, 이제는 부끄러운 것도 모르겠다.

동시에 빠져나간 라울의 성기가 한번에 깊이 박혔다.

“아아, 아, 아, 아욱-!”

삽입하기 수월하진 자세에 들어온 성기가 빠르게 움직였다.

괴롭지만 동시에 쾌감으로 일그러진 마기휼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라울은 강하게 그 몸을 쳐올렸다. 여전히 아플 정도로 성기를 물어 대는 내벽에 머리끝까지 쾌감이 치민다. 뇌수까지 뜨거워지는 감각에 라울의 호흡이 가빠지고 악문 이 사이로 거친 말이 토해져 나왔다.

마기휼 쪽으로 몸을 숙인 라울은 더 깊이 성기를 쑤셔 넣었다. 깊이 연결이 되자마자 내벽의 수축이 엄청나서 그대로 사정할 뻔했지만, 간신히 억누르면서 몇 번이고 빠른 추삽질을 이어 나갔다.

“아, 아! 하윽! 그, 그만-! 아아-!”

연거푸 예민한 곳을 찔러 대자 마기휼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치댈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이면서 허리가 휜다. 라울의 어깨에 걸쳐진 한쪽 다리와 다르게 반대편 다리는 어디에 있어야 할지를 모르는 것처럼 창문을 짓이겼다.

몸속을 치대는 격통에 마기휼은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너무 심할 정도로 두들겨진 뱃속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몇 번이고 찔려지는 격통에 막을 수 없는 신음이 토해져 나오고 동시에 라울의 행위가 더 격해진다. 마구 들쑤셔지는 동안 흔들리는 게 제 몸인지 차량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만하라는 말도 나오지 않아 힘겹게 제 얼굴 옆에 지탱해진 라울의 손목을 붙잡아 보지만, 단단하고 뜨거운 성기가 재차 있는 힘껏 찔러 넣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아, 하아, 윽-!”

라울은 정신없이 오랜만에 품는 마기휼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정신없이 격렬한 허릿짓으로 그를 밀어붙이는 동안에도 제 성기를 꽉꽉 조이는 내벽에 참을 수 없는 신음이 새어 나온다. 더는 여유를 찾을 수 없었다. 오랜만이라 가진다 할 수 있는 행위니 살살 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게 몇 번이고 마기휼의 이름을 읊조리면서 라울은 그대로 사정했다.

“……!”

마지막 신음은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가장 깊이 결합한 채로 마기휼 안에 사정한 라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정의 여운은 오래 갔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한참을 그리 있던 라울은 천천히 눈을 뜨곤 아래를 살폈다. 보이는 건 얼굴이 벌겋게 익은 채로 가쁜 숨을 헐떡이는 마기휼이었다.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은 죄 풀어지고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었다. 시선을 느끼곤 천천히 눈을 뜬 마기휼의 눈동자는 멍했다. 초점이 맞지 않은 그 눈동자를 확인한 라울은 고개를 숙였다.

마기휼의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싼 채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점점 내려갔다. 마기휼의 뺨에 입술을 누른 라울은 찬 숨을 고르면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직 부족해.”

“…….”

제 성기를 묻고 있던 내벽으로 힘이 들어간다.

맞닿은 피부로 느껴질 만큼, 움찔하는 마기휼을 느끼면서 라울은 생각했다.

한 번으로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라울은 당장 성기를 빼내면서 벗겨버린 상의를 찾아 그걸로 마기휼의 몸 위를 덮어주었다.

“뭐, 뭘 하는 거야?!”

당황한 마기휼이 저항하기도 전에 그대로 마기휼을 잡아 앉히면서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차 문을 열었다. 먼저 내린 그는 한 손으로 바지 앞섶을 대충 올리면서 앉아 있는 마기휼의 두 팔을 각각 잡아당겼다.

“기다려, 조, 조금만 쉬자-, 나 힘들어!”

힘들다고 주장하는 순간 기침이 나왔다.

고개를 돌린 마기휼이 기침을 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냅다 안아 든 라울은 발로 차 문을 닫았다. 그리곤 발 빠르게 움직여선 숙소로 들어갔다. 라울에게 안긴 마기휼이 정신을 차렸을 때 벽면에 밀쳐진 채로 격렬한 입맞춤을 당하고 있었다.

앞서 한 행위의 여파가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몸속이 저려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똑바로 서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제 혀를 아플 정도로 세게 빨아들이는 라울 덕분에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만큼, 그도 마찬가지였을 거란 걸 모르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참지 말고 알아서 돌아오면 좋지 않나 싶지만, 결국 그 모든 게 투정일 뿐이었다.

라울도 좋아서 이렇게 오랫동안 나가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모든 게 전부 자신들을 위함이라는 걸 왜 모를까.

“…….”

눈가가 시큰해진 마기휼은 라울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 몸을 타고 내려온 두 손이 엉덩이를 잡아 벌리면서 그 안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손가락으로 몇 번 안을 쑤시고는 바로 한쪽 다리를 들어 팔에 걸치고 아래로 귀두를 맞춘다. 입구에 닿는다 싶었을 때, 이미 들어오고 있었다.

“흐읍-!”

입술이 막힌 채로 마기휼은 더 세게 라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래가 열리면서 거근이 제 몸속 깊은 곳으로 밀고 들어온다.

힘들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결합에 마기휼의 내벽이 반응한다. 시작부터 강하게 쳐올리자 마기휼의 등이 벽이 부딪친다. 몇 번이고 밀어 올릴 때마다 한쪽 발로 지탱하고 있는 몸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 아아, 아-!”

차 안에서도 참을 수 없었지만,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요란스럽다 싶을 정도로 크게 울리는 신음이 듣기 좋았을까. 라울은 마기휼의 허리를 잡으면서 성급하게 성기를 쑤셔 넣었다. 크게 벌려진 곳으로 몇 번이고 빠르게 성기가 드나들면서 마기휼을 마구 밀어 올렸다.

질퍽하게 젖은 내벽은 거센 압박감에 몇 번이고 경련을 일으켰다. 힘껏 올려질 때마다 몸이 위로 떠서 발끝으로 간신히 스스로를 지탱한 마기휼은 여러 가지 의미로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마기휼의 몸을 벽으로 밀어붙인 라울이 몇 번이고 세게 그 몸을 뒤흔들었고, 마기휼은 정신을 잃을 뻔했다. 치대는 마찰력에 연결된 부위가 후끈거리면서,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압박감에 아랫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사정하고는 다른 뭔가가 올라오는 걸 느끼면 마기휼은 끙끙 앓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흔들리던 마기휼은 침대 위에서도 한 번 더 해야만 했다.

귀를 두드리는 요란한 빗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옆으로 누운 채로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냐.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는 걸까.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눈을 붙일까.

이래저래 고민을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사내가 있어 뒤를 돌아봤다. 옆자리를 텅 비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서운하진 않았다. 그래 봤자 근처에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에 마기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윽―.”

욱신거리는 허리 통증에 그곳에 한 손을 올린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역시 너무 무리했다. 들려져서 몇 번이고 쑤셔졌었지. 기운이 차고 넘치는 라울은 자신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지만 마기휼은 아니었다. 찔려질 때마다 몸이 망가지는 줄 알았다. 떠올리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면서 허리를 두드리던 마기휼은 바로 라울을 발견했다.

그는 침대 아래쪽에 등을 기댄 채로 앉아서 뭔가를 보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 아주 제대로 소리를 질러 댔으나 어쩔 수 없겠나 싶었던 마기휼은 뒤를 돌아보는 라울의 얼굴을 보고는 침대 위를 엉금엉금 기어갔다. 라울 뒤에 앉아선 다리를 내렸다. 자연스럽게 마기휼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 앉은 상태가 된 라울의 손에는 종이가 들려 있었다. 라울의 짐을 챙길 때 그 위에 란이 올려 둔 거였다.

하얀 종이 위에는 다양한 색을 사용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직은 서투르지만 대충 형태는 알 수 있었다. 가운데 가분수처럼 얼굴이 큼지막한 건 라울이었고, 근처에 총과 전함 등이 추가로 그려져 있었다. 엉성해도 표현력은 대단한 것 같았다.

팔불출 같지만 이만한 걸 세 살짜리가 그렸다고 누가 생각할까.

“그거 너래.”

“알고 있어.”

담담하게 대꾸한 후 라울은 그림 위의 제 얼굴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몇 번 닿았다가 떨어지는 손길에 괜히 마음이 짠해진다.

고개를 숙인 마기휼은 라울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란이 보고 싶지?”

라울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많이도 보고 싶을 거다. 그 마음을 왜 모를까.

하지만 말이다―.

마기휼은 라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 장난처럼 앞뒤로 흔들었다.

“보고 싶으면 일만 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그러란 말이야. 지금 단계에서 여길 더 신경 써야 한다는 걸 모르진 않지만, 이번에는 너무 심했어.”

어떻게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오질 않는 거냐면서, 그러다가 란이 네 얼굴도 잊어버릴 거라고 말하려다 말고 말았다. 서운하긴 해도 거기까지 말하면 라울이 충격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몇 번 더 라울의 머리를 잡고서 그동안 쌓인 걸 표출하려 했지만, 그동안 라울이 논 것도 아니고, 이것이 전부 자신들의 장래를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라울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카이란을 보호하고 싶겠지.

그래도 너무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

허리를 세운 마기휼은 라울의 턱 아래에 손가락을 집어넣고선 그의 고개를 들게끔 했다.

위에서 내려다보기 때문일까. 올려다보는 라울의 얼굴이나 눈빛이 순한 게 영판 귀엽다.

턱을 더듬다가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 마기휼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있잖아.”

고개를 들면서 나직하게 속삭이는 말에 라울이 눈을 깜박인다.

“우리 공주님이 더 자라면 그땐 나도 시간이 더 늘 거야. 그때 많이 도와줄 테니까, 쉬엄쉬엄해.”

“…….”

카이란이 자신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순수하게 즐거워할 시간도 얼마 안 남았다. 지금보다 더 자라면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더 즐거워할 거다. 아니지. 우리 딸은 착하니까 어쩌면 다 자라서도 아빠들과 놀아줄지도.

제 입으로 한 말인데도 묘하게 마음 아프다.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말걸. 후회해 봤자 이미 틀린 걸지도 모르겠다면서 씁쓸하게 웃고 난 후, 마기휼은 한마디 덧붙였다.

“지나치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두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돌릴지도 모른다?”

이거야말로 웃기지도 않는 말이었다. 천하의 라울이 곁에 있는데 다른 사람이 눈에 들 리가 없었다. 귀담아들을 가치도 없을 말이었기에 라울도 그렇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올려다보는 두 눈동자로 힘이 들어간다. 뭔가 미세하게 변한 표정에서 그의 불쾌함이 읽히는 것 같았던 마기휼은 당황했다.

왜 갑자기 표정이 이렇게 바뀐 건데. 그리 물을 새도 없이 갑자기 라울이 마기휼의 허벅지 안쪽으로 팔을 감고는 그 위로 이를 세웠다.

“아파-!”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낼 만큼 정말로 아팠다.

기겁한 마기휼은 벗어나려 했지만, 그 전에 몸을 일으킨 라울이 마기휼을 잡아 침대 위로 쓰러뜨린다. 그리곤 곧장 무릎 한쪽을 잡아 누르면서 그 사이로 들어왔다.

“뭐, 뭐, 뭘 하는 거야? 아까 그걸로 끝난 거 아니었어?!”

참에서도 하고 방으로 돌아와서도 정신을 잃을 만큼 했다. 못 만나는 동안 하지 못했던 것만큼 모든 걸 쏟아부을 듯이 굴었으면서 왜 또 아래를 세우는 걸까.

덤벼오는 라울을 밀어내려던 마기휼은, 벌어진 가운 사이로 보이는 복근과 무성한 음모 사이로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며 자기주장을 심하게 하는 남근을 보곤 사색이 되었다.

“나 허리 나갔어! 앉아 있던 것도 겨우 간신히-!”

노력한 결과였다는 말은 곧장 엉덩이 사이를 파고드는 성기 때문에 멈췄다.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비벼지고 마찰 된 내벽은 다시금 밀고 들어오는 침입자를 막으려 들었지만, 워낙 강인하게 밀어붙이니 곧 포기했다. 익숙하고 능숙하게 내벽을 벌리고선 깊은 곳까지 집어넣은 후, 라울은 말했다.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 만족할 수 있겠어?”

“…….”

한번에 삽입된 여파로 이를 악물고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와중에 괴상망측한 말을 들어버렸다.

그러는 너는, 너는 어떤데?

묻고자 했던 말은 강하게 밀어붙이는 강인한 몸짓에 저 멀리로 날아갔다.

‘모두를 지키고 싶어.’

어떻게 만져야 할지 고민스러울 정도로 작디작은 딸을 품은 채로 오랫동안 고민하던 라울이 내린 결론이었다.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 누구도 쉬이 자신의 소중한 것을 건드릴 수 없도록 하겠다. 그걸 위해선 스스로 힘과 권력을 손에 쥐고 말 것이다. 카이란이 아닌, 자신이 이 노르디아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모든 설계를 해 두고 난 후 이 작은 생명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거였다.

말린다고 해서 하지 않을 사내가 아니었다. 지켜야 할 건 카이란뿐만이 아니었다. 결정한 뒤 그것에 대해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라울이 바라본 건 마기휼이었다.

나는 너도 지켜낼 거야.

우리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겠어.

그의 진심을 알기에 마기휼은 말릴 수 없었다. 그저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 때, 라울을 위해서 뭐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호를 받고 지켜지기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 말고도―.

눈을 뜬 마기휼은 본능적으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손으로는 서류를, 다른 손으로는 의자 팔걸이에 올려진 제 손을 깍지 끼고 있는 라울이 보였다. 서류의 내용을 살피는 와중에도 버릇처럼 깍지 낀 마기휼의 손을 엄지로 느리게 어루만진다. 그 감촉이 기분 좋아서 다시금 잠이 들 뻔했다. 하지만 이곳이 라울의 숙소가 아님을 알기에 어떻게든 졸음을 몰아낸다.

눈을 꾸욱 감았다가 재차 뜨자 라울이 고개를 돌린다.

“일어났어?”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거처럼 태연하게 말을 건네는 라울이지만, 마기휼은 그럴 수 없었다.

몇 번이고 해 대서 허리가 나간 것 같다. 몰아서 한번에 할 셈이라면 더더욱 나흘에 한 번씩은 돌아오라면서 마기휼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가는데?”

“저택으로 가는 중이야.”

“…….”

“아무래도, 얼굴을 봐야겠어.”

카이란을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카이란이 보낸 그림이 단숨에 그리움을 일깨웠을 거다. 당장 달려가서 란을 끌어안고 싶어졌겠지. 그렇게나 딸을 좋아하는 주제에 어떻게 참았을까. 그 모든 게 자신들을 위험이었다. 그걸 알기에 라울의 이런 반응이 귀여우면서 미안하고,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 든다.

“나도 노력할 거야.”

아직 잠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거라며 마기휼은 중얼거렸다.

“노력해서, 너와 란을 지켜줄 거야.”

제 얼굴에 닿는 라울의 시선을 느끼면서 마기휼은 긴 숨을 내쉬었다.

“이 행복을 끝까지 지켜내고 말 거야.”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몽롱해지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더듬어보는데 라울이 잡고 있던 마기휼의 손 위로 다른 손을 포개며 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마기휼.”

“…….”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와 란에겐 큰 힘이 되니까.”

무슨 말을 할 셈인가 싶었던 마기휼은 라울의 덧붙이는 말에 숨을 삼켰다.

가만히 라울을 바라보던 마기휼의 눈동자 안쪽이 반질거리더니 이내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그는 다른 손으로 눈 안쪽을 눌렀다.

“왜 사람을 울려.”

“그렇게 울었으면서 또 흘릴 눈물이 있는 건가.”

여기서 울면 분위기만 더 이상해진다. 어떻게든 감정을 잘 추슬러보려 했던 마기휼은 움찔했다.

최근 마기휼이 울었던 일은 앞에 있는 사내 때문이었다. 죽겠다고 하는데도 덤벼들어서 결국 기절하듯 잠들게 만들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씻기고 옷을 입힌 후에 여기에 앉혀 뒀으면서-, 뭐가 어쩌고저째?

눈물이 쏙 들어갔던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라울을 올려다봤다.

“너 너무 느끼해졌어.”

그나마 둘이 있으니 저리 말을 해도 괜찮은 건지 다른 사람들 앞에선 말조심해야 할 거다.

물론, 자신이 걱정할 필요 없이 알아서 잘하는 녀석이었지만.

여전히 제 손을 두 손으로 포근하게 감싸 쥐고 있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고마워.”

이것저것 할 것 없이 전부 다 고맙고 감사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줘서, 정말로 라울에게 고마웠다.

“나도 마찬가지야.”

“…….”

“우리에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

기어이 사람을 울리는구나.

대체 뭘 하자는 거냐면서, 마기휼은 고개를 숙이곤 훌쩍거렸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키는 마기휼을 두고 라울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조금 더 다가가선 그의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복도를 채우는 나직한 허밍에 맞춰서 열려 있는 창문 위로 새가 하나둘 내려앉는다. 날개를 펼쳤다가 내리면서 듣기 좋은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에 귀 기울이는 건 비단 새들만이 아니었다.

복도를 지나쳐 반쯤 열려 있는 문에 손을 댔고, 안쪽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내가 보였다. 언제나 늘 똑같은 모습인 미소년은 허벅지에 여자아이를 앉히곤 등을 토닥이면서 노래를 불러주었다.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취한 것처럼 기분 좋게 눈을 감고 있던 란은 문이 열리자 고개를 들었고, 눈이 크게 떠졌다.

동시에 라우젝의 가슴을 두 손으로 두드리면서 문을 가리킨다. 그제야 본인이 만들어낸 평화로운 공간에 나타난 침입자를 깨달은 라우젝은 특유의 날 선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한 사내를 발견한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란을 잡아서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기다렸다는 듯 내려온 란은 두 팔을 벌린 채로 한달음에 달려가 라울에게 안겼다. 거의 날아들듯이 달려온 란을 높이 안아 든 라울은 딸을 품에 안고선 뺨이며 이마며 할 것 없이 입을 맞췄다. 간지럽다며 웃으면서도 란도 라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뺨에 제 뺨을 부볐다.

오랜만의 만남에 열렬한 기쁨을 드러내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마기휼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야 좀 마음 편히 쉴 수 있겠거니 싶었다.

일단 따뜻한 물이 받아진 욕조에 들어가 앉고, 차를 마신 후, 푹신한 침대 위에서 라울과 란을 데리고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야지. 그러다 밤이 되면 야시장에 나가서 실컷 먹으면서 돌아다닐 거다. 늦게 돌아와서 다음 날까지 늦잠을 잔 후에는 다시 셋이 외출해야지. 최근 인형보다 장난감 군함이나 총에 관심을 더 보이는 란에게 근사한 선물을 안겨줄 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댄 채로 눈을 가늘게 휘고 있는 라울을 보면서 마기휼도 웃었다. 그렇게 좋냐면서 라울의 허리를 쓰다듬던 마기휼은 얼굴에 닿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란을 안고 있을 땐 본인의 편함을 포기하고 요람 노릇을 하더니만, 라우젝은 지금 의자에 반쯤 걸쳐진 채로 다리를 꼬고 있다.

동시에 엄지를 세우면서 한마디 던진다.

“잘 낚아 왔다.”

란의 그림과 자신의 콜라보가 훌륭한 성과를 낸 것만 같이 뿌듯해진다.

마찬가지로 엄지를 세운 마기휼은 라울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RED ZONE plus 完

WET NOVEL RED ZONE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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