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7)

#26

약속했던 시간은 늘 빨리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편지를 보내 달라 했던 레이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마기휼은 펜을 들었다.

초반에는 이런저런 할 말도 많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줄어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펜을 굴리며 몇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펜을 입술 위로 올린 채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뚱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은 펜을 내려놓고 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으윽.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최근에는 찾아갈 수 없는 실정이다 보니 편지에 조금 더 정성을 쏟아부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는데 말이다.

낑낑거리던 마기휼은 옆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무얼 하세요?”

고개를 들자 풍만한 몸매에 인자한 인상의 40대 후반의 여성이 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 출산을 위해 두 달 전에 별장에 들어올 때 함께 온 사람이었다. 어떻게 수소문을 해서 모시고 온 건지 모르겠으나 성격이 좋고 대화도 잘 통해서 지금은 마기휼도 그녀를 상당히 믿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별장에서 주로 그녀와 있다 보니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상당 부분을 알게 되었다.

지금 마기휼이 붙잡고 있는 게 무엇인지도 단박에 알 수 있었던 그녀는 눈으로 마기휼의 빈 편지지를 내려다봤다.

“동생분에게 편지를 쓰시나요?”

“벌써 편지를 쓸 때가 되었네요.”

“정말 자상한 오빠시네요.”

칭찬의 말에도 마기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는 걸 확인한 안나가 재차 물었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나요?”

“딱히 써줄 것들이 기억나지 않아서요.”

“그러면 산책을 나가도록 하지요.”

몸을 움직이면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해주는 것에 마기휼은 위를 쳐다봤다. 가만히 있다가 그렇게 하자며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뒤로 끌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른 부분은 다 날씬하고 길죽한데 유독 배만 튀어나와 있었다. 낙낙한 옷을 입고 있어도 감추어지지 않았다. 배가 부르는 걸 처음부터 봐 왔기 때문에 지금은 별 느낌이 없지만 그래도 막 일어나 거울 앞에 설 때에는 깜짝 놀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다가 급히 거울 앞을 떠나곤 했다.

전에는 어떻게 될까 싶었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뱃속에서 노는 아이의 느낌에도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침대에 누워서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하고 ‘배에서 뭐가 뛰어다니는 것 같아.’라고 질린 채로 중얼거리고는 했는데 말이다. 무거운 배에 대해서도 이제는 익숙했지만 어깨가 뻐근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허리도 안 좋아졌다면서 마기휼은 주먹으로 허리 뒤를 두드렸다.

별장의 앞마당, 볕이 잘 드는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지만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한 마기휼을 확인한 안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좀이 쑤시시죠?”

“네. 졸린데요.”

“그렇다고 공놀이를 할 수는 없잖아요. 배에 맞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그리고 지레 겁이 나서 이런 몸으로는 뛰어다닐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뭔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 언제나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는 건 최대한 자제하는 편이었다.

앉아만 있는 게 이렇게나 지루하고 좀 쑤시는 일이라는 걸 최근 들어 너무도 절절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일에 대해서 하나둘 배우게 되었고 그중에는 뜨개질도 있었다. 원래 손재주는 있는 편인지라 처음 하는 뜨개질도 썩 잘해서 지금은 수준급에 다다라 있었다.

마기휼의 무릎 위로 길게 늘어뜨려진 목도리를 확인한 안나는 감탄을 했다.

“정말 잘하시네요.”

“이것도 하다 보니 느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하나를 다 완성하겠다는 집요함을 품고 하다 보면 시간도 금방 가는 것 같았다. 꼬인 실을 풀어 반대편으로 내려놓던 마기휼은 옆으로 다가온 안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딸일 것 같습니까. 아들일 것 같습니까.”

“마기휼 님은 딸이 좋으세요? 아드님이 좋으세요?”

“원하는 아이에 대해서 말하면 반대로 낳는다는 말이 있어서 딱 짚어 말하기가 그런데요?”

“하지만 저는 왠지 어떤 아기를 원하는지 알 것 같아요.”

안나의 말에 마기휼은 어색하니 웃었다. 레이라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역시나 여자아이가 귀엽다니까.’라며 예찬을 늘어놓던 마기휼이 아니던가. 바보라도 이쪽이 원하는 게 여자아이라는 걸 알 거라며 마기휼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잠은 잘 주무시고요?”

“나쁘지 않게 자요. 그래도 중간에 깨기는 해요.”

왜 깨는지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그저 안나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불안해하지 마세요. 아무 문제도 없을 거예요. 아이도 마기휼 님도 건강하실 거예요.”

“당연하죠.”

대답은 그렇게 해도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가시는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남자이니까. 배가 점점 불러 올수록 아이의 존재감은 뚜렷했다. 금방 태어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 따라 불안은 점점 커졌다.

괜찮을까.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겠지.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들로 인해 잠을 자다가도 몇 번이나 깨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라울이 손을 잡아주곤 했지만 불안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라울 님이 오시네요.”

안나의 말에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말대로 정원 안으로 들어오는 라울이 보였다. 군복을 그대로 입은 걸 보아하니 일이 끝나자마자 이리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라울이 앞으로 다가와 걸음을 멈추자마자 마기휼은 웃었다.

“오늘은 금방 왔네?”

“일이 적었다.”

거짓말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노르디아가 라울에게 거는 기대는 점점 커졌다. 그에 비례해 그가 맡은 임무들은 과중할 정도였다. 그의 곁에 훌륭한 인재들이나 라우젝이 없었다면 진작 과로사했을 거라는 게 마기휼의 생각이었다.

앞으로 다가온 라울은 마기휼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당기고 무거웠다. 배가 커지면서 행동에도 많은 제약이 있었다. 늘 바람처럼 뛰어다니는 것에만 익숙했기에 그런 상태가 상대적으로 낯설었다.

눈을 내리뜬 마기휼의 얼굴이 침울해 보였다. 라울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을 모르는 듯싶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안나는 한숨을 쉬었다.

“옆구리에 있는 이 부분을 이런 식으로 절개할 겁니다.”

끝이 뭉툭한 막대가 그림으로 그려진 신체의 일부분을 가리켰다. 옆구리, 가슴 바로 아래에서 골반 위까지 지익 내리는 순간 마기휼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입술을 씰룩이며 반사적으로 본인의 옆구리를 양손으로 가렸다. 그런 마기휼 쪽으로 몸을 돌리며 호그는 말을 이었다.

“가운데 부분을 자르면 위험성이 높습니다. 가능한 상처가 덜 남는 방향으로 수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전 마취에 들어갈 거고, 혈압 체크는 계속될 겁니다. 문제 상황이 발생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안전하고 빠른 수술이 될 겁니다.”

안전한 건가. 하지만 걱정스러운데. 지금까지 몸에 칼을 댄 적은 없었는데.

불안한 듯 눈을 내리뜨는 마기휼의 옆에 라울이 앉아 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호그의 설명을 듣는 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무덤덤하게 호그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이쪽은 그리할 수 없었다.

마기휼은 고개를 숙였다. 지금 호그가 설명하는 건 모두 자신과 관련이 된 일인데도 별로 귀담아듣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졸리기 때문에 이런 걸지도 몰랐다. 마기휼의 눈동자가 점점 몽롱하게 변했다.

“질문은 없으십니까.”

“……졸려.”

중얼거림을 들은 건가 호그가 “네?” 하고 되물었다.

마기휼은 눈을 반쯤 뜬 채로 중얼거렸다.

“너무너무 졸려.”

라울은 마기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숙인 마기휼의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 라울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명은 잘 들었다. 우리들은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하지.”

“아, 네. 이만 들어가서 쉬십시오.”

라울은 마기휼 쪽으로 몸을 숙이며 일어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무반응이던 마기휼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일어섰다. 라울이 마기휼을 부축하고 방에서 나가자 호그는 막대로 머리를 긁적였다.

“불안하신 것 같아요.”

호그는 옆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찻잔을 내미는 안나가 보였다. 웃는 얼굴로 고맙다며 잔을 받아 든 호그는 차의 맛을 보고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이내 한숨을 쉬었다.

“불안도 하시겠지요. 남자의 몸이지 않습니까.”

“마기휼 님은 건강하고 아이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별문제는 안 생길 거예요. 그렇지요?”

“물론이지요. 문제는 생기지 않습니다. 저 라울 님이 그렇게나 노력을 하시는데 문제가 생길 리가 없지 않습니까.”

생겨서도 안 된다며 호그는 차를 다 마셨다.

차 맛이 좋았다. 예전부터 안나와는 아는 사이였던 호그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런 깊숙한 숲에 들어와 생활을 하시느라 힘드시지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마기휼 님이 워낙에 착하고 다정다감한 분인지라 아들과 함께 있는 기분이라지요. 덕분에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편한 것 같습니다.”

“그렇죠. 마기휼 님은 원래 남에게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니지요.”

그런 게 좋기는 하지만 때로는 나쁠 수도 있었다.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만 끌어안고 있으면 그게 덧날 수 있었다. 보아하니 마기휼이 성질부리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라울로 말이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한 건지, 안나와 호그는 긴 한숨을 쉬었다.

“배가 아파.”

기다렸다는 라울은 침대에 앉은 마기휼의 다리 아래로 베개를 대어줬다. 그러기가 무섭게 당장 인상을 쓰며 끙끙거리는 것에 라울이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배에 한 손을 올렸다. 손바닥으로 배 전체를 문지르자 마기휼이 한숨을 토해 냈다. 하지만 미간 사이의 주름은 펴지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괜찮나?”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아.”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던 마기휼의 몸이 옆으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마기휼을 부축해 그가 편안하게 자리에 누울 수 있도록 한 라울은 손을 들어 마기휼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몽롱한 눈을 하고 있던 마기휼이 눈을 감았다.

“정말 자는 건가.”

“말했잖아. 졸리다고.”

점점 목소리가 늘어진다. 마기휼은 하품을 했다.

“진짜 졸려. 밤에 거의 못 잤거든.”

그건 라울도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간 밤에 자지 못하고 몇 번이나 일어나서 본인의 다리를 주무르곤 했던 것이다. 다리로 피가 안 통하는 것 같아. 중얼거리며 안색을 굳히는 마기휼은 정말로 힘겨워 보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라울의 얼굴색 또한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라울은 마기휼의 다리를 더 열심히 주물렀다.

마기휼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기분 좋아.”

“안쪽이 더 저린가?”

“아니야. 아무 데나 해도 괜찮아.”

아주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 같지만 그걸로 땡이었다. 라울이 마냥 다리만 주물러주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마기휼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얼굴은 살짝 무료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던 마기휼은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답답한 것 같아.”

중얼거림을 들은 라울은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냥 나온 말인 것 같았다. 하지만 라울이 봤을 때 지금 그는 정말 답답해하고 있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마기휼의 배는 많이 불러 있었다. 열흘 안에 출산을 할 터였다. 잠시 생각을 하던 라울은 말을 건넸다.

“내일 근처 마을에서 축제를 연다고 하던데, 그리로 내려가 볼까.”

마기휼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잠에 취한 눈이긴 했지만 기대하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온 지 벌써 석 달이었다. 답답할 만도 했다. 만삭이니 다른 곳에 가는 건 위험할 테지만 간단한 기분 전환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가 볼까?”

“가도 괜찮아?”

“나도 함께 가는 거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다.”

“……그렇겠지?”

중얼거리던 마기휼의 입술 양 끝이 위로 올라갔다.

“내일 꼭 축제에 가 보고 싶어.”

마기휼은 기분 좋게 말했다.

가운뎃손가락에는 신부 인형이 꽂혀 있고 엄지에는 신랑 인형이 꽂혀 있었다. 첫날밤을 보내야 하는데 신부가 무섭다며 도망을 치고, 화가 난 신랑이 시끄럽게 떠들자 사람들 사이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간간이 진한 농담도 섞여 있었지만 어린애들은 이해하지 못해 눈을 끔벅일 뿐, 어른들만이 박장대소를 했다. 그중에 마기휼도 있었다.

크게 웃으며 라울의 팔을 붙잡았다.

“나 진짜 미치겠네. 웃겨 죽겠어.”

인형들의 익살과 수위가 있는 대화를 들으며 마기휼의 웃음이 더 커졌다. 그에 반해 라울은 조용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자 인형이 여자 인형의 치마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는 반복하고 있었다. 여자 인형은 죽겠다는 듯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아이고 저놈의 큼직한 물건이 내 아래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네. 아이고, 죽겠네. 죽겠어!”

“오늘만 죽어보고 내일부터는 삽시다. 자, 이리로 오소!”

“에그머니나! 저 망할 놈의 큰 물건! 저리로 가지 못해요?!”

남자 목소리로 만들어내는 간드러지는 울림이 우습기만 했다. 마기휼은 더 크게 웃었고 라울은 그런 그를 확인하고는 표정이 풀렸다.

바닥에 앉아 구경하는 인형극은 그의 취향에 맞진 않았으나 마기휼이 즐거워하니 그럭저럭 만족이었다. 그러는 동안 인형극은 점점 끝으로 치달아 갔고 이내 합방이 시작되었다. 근처에 있던 어른들은 어린애들을 쫓아내기에 급급했고, 어린애들은 싫은 듯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도 순순히 자리를 떴다. 어른들을 위한 인형극은 역시나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배꼽 빠지게 하던 인형극이 끝나고 마기휼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냈다.

“진짜 재미있게 봤다.”

“잘됐군.”

밍숭맹숭한 대꾸에 마기휼은 라울을 올려다봤다.

“넌 재미없었지?”

“그럭저럭 흥미로웠다. 직설적인 화법에 낯이 뜨거워지기도 했지만 말이야.”

“전혀 뜨거워진 얼굴이 아닌데?”

마기휼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장난을 치듯이 팔을 툭툭 치자 라울의 표정이 풀린다. 라울의 편안한 모습에 마기휼의 미소가 한결 진해졌다.

모처럼 만에 열리는 큰 축제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즐거운 일이었다. 곳곳에 이상한 분장을 한 사람들이 넘쳐났기 때문에 망토를 깊게 눌러쓴 라울이나 마기휼은 크게 특이할 것이 없었다. 마기휼의 배가 앞으로 크게 나와 있어도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네들은 그저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축제를 만끽했다.

너무 밝을 때에 오면 안 될 것 같아서 저녁에 온 것이 잘한 일인 것 같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 정말 편했다.

마기휼은 라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저기로 가 보자.”

마기휼이 가리키는 곳은 여성들의 장신구를 파는 장소였다. 여자 둘이 서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 걸 본 라울은 선뜻 걸음이 옮겨지지 않았으나 마기휼은 그렇지 않았다. 안 움직이고 뭘 하느냐는 듯 계속해서 잡아끄는 손길에 엉거주춤하게 있다가 다리를 움직였다. 마기휼은 머리핀이나 귀걸이, 목걸이들이 놓인 곳을 유심히 살폈다. 마기휼이 이런 걸 보는 이유는 하나뿐일 거다.

“레이라의 선물인가?”

“응. 이번에는 편지는 짧게 쓰고 선물로 환심을 사볼까 해.”

그러면 아가씨가 좋아하겠지.

마기휼은 앞에 놓인 보랏빛의 나비가 달린 핀을 집어 들었다.

“이거 예쁘네.”

“하지만 어린애가 하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한 것 같군.”

“……레나에게 줄 선물도 사볼까.”

자신 없이 중얼거린 마기휼은 라울을 흘깃 쳐다봤다.

“그냥. 사 주고 싶네. 이상할까?”

“받는 사람도 처음에는 이상하다 생각하겠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보냈을까 싶으면서도 결국에는 사용하지 않을까.”

“그렇겠지?”

어쩌면 보기도 싫다며 서랍 구석에 처박을지도 몰랐다.

이건 노력하는 레나의 선물이었다. 레이라와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그녀가 점점 안정을 찾아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가휼이나 레나도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새어머니와 아들의 역할을 다 하는 듯싶었다. 그렇다 해서 과거의 일이 묻히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괜찮아질 거다.

“레이라의 선물로 이건 어떨까?”

“뭐?”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초록색 리본이었다. 색이 진한 것 같지만 귀여운 모양이었다. 레이라의 갈색 머리카락에 딱이었다. 라울이 고른 핀이 마음에 쏙 들었던 마기휼은 감탄을 했다.

“귀엽네. 너 의외로 센스가 있구나.”

“어울릴 것 같은 걸 고르는 것뿐이지.”

라울은 품에 손을 넣었다. 딱 봐도 뭘 할 생각인지 알 수 있었다. 왜 이러나 싶었던 마기휼은 당장 라울의 행동을 막았다.

“이러지 마셔. 계산은 내가 할 거야.”

“레이라는 소중한 오빠를 빼앗아 간 날 미워하고 있지. 환심을 사야 할 사람은 나야.”

“아, 그런 건가.”

한때는 라울이 레이라의 첫사랑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가휼의 연락을 받게 되었을 때 의외로 레이라의 첫사랑이 자신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며칠간은 우느라고 난리도 아니었다며 ‘형님을 정말 좋아했나 봅니다.’라고 말하는 가휼은 알게 모르게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귀여워했는데 다른 남자가 더 좋다 하는 딸을 둔 심정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이건 네가 계산해. 레나 건 내가 계산할 테니까.”

“알았다.”

결국 계산은 각자 하게 되었지만 물건을 파는 입장에서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두 사람이 건네는 돈을 받아 들며 주인장의 입술 양 끝이 크게 올라갔다. 그들이 고른 물건은 모두 고가품이었다. 그런 게 초반에 팔리는 걸 봐서 오늘 하루는 장사가 아주 잘될 모양이었다. 주인은 굽실거렸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쪽 분은 배가 왜 이렇게 나오셨데?”

지적을 받은 마기휼은 움찔했다. 라울도 겉으로는 내색을 안 할 뿐이지, 약간의 동요가 있었다.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그렇게 배가 나오면 쓰나. 나중에 나이 들면 고생해. 지금부터라서 술 좀 줄이고 운동 좀 하는 게 어때?”

그쪽으로 가는 건가? 혹여라도 이상한 말을 들으면 어쩌나 싶었던 마기휼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그렇지요? 최근 들어 모임이 잦아서 배가 이렇게 나와버리네요.”

“배만 나왔을 뿐이지 다른 데는 날씬하구만. 조금만 관리하면 되겠어.”

“당연하지요. 아직 서른밖에 안 되었는데 나이 들어 고생하기 싫으면 지금부터 관리해야겠지요.”

“어머나. 벌써 서른이야? 난 아직 스물 중반밖에 안 된 줄 알았는데―.”

“아이고 어머님. 왜 이러십니까. 전 가난해서 이거밖에 못 삽니다.”

“내가 더 팔려고 이러는 줄 알아? 정말 어려 보인다니까?”

“아하하. 정말 고맙습니다. 어머님.”

변죽 좋게 어머님이라 부르는 호칭에 가게 주인은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머리핀이 들어간 봉지에 고무 밴드를 몇 개나 더 넣어주면서 “서비스다!”라고 하자 마기휼은 당장 손뼉을 치며 “멋쟁이!”라고 외쳤다.

그렇게 덤을 더 얻은 마기휼은 완전 들떴다. 가게 앞을 나와도 연신 산 것을 보며 싱글벙글이었다. 라울은 그런 마기휼을 보며 점점 마음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나오길 잘한 것 같았다. 그 전부터 이런 식으로 기분 전환을 시켜주는 건데. 마기휼 스스로 불러 오는 배를 다른 이들에게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별장에만 머무르게 했던 게 후회가 되었다.

“나 그러고 보니 벌써 서른이네.”

갑자기 고개를 들며 중얼거리는 마기휼의 모습에 라울은 차분히 말했다.

“그렇게 안 보여. 가게 주인 말대로 아직 스물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보이는 모습은 그렇지. 정말은 서른이야. 이십 대하고는 확실히 다르겠지.”

싱글벙글 웃던 게 언제였냐는 듯 마기휼은 대번에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진 마기휼은 라울을 올려다봤다. 이내 늘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겠다아― 아직 이십 대라서.”

“그리 좋지만은 않아.”

“아니야. 좋을 거야. 앞이 2랑 3인 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단 말이야.”

라울은 입을 다물었다.

종종 마기휼은 저런 식으로 말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에는 어떤 식으로 말을 해줘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위로를 한답시고 괜한 말을 하면 마기휼은 더 우울해지고는 했다. 그래서 입을 딱 붙이고 있는 동안 마기휼의 중얼거림은 점점 길어졌다.

“내 청춘은 이렇게 다 가버렸구나. 진짜 우울하다. 난 내가 서른이 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단 말이야.”

한숨을 푹푹 쉬는 마기휼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그를 어떤 식으로 위로해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기휼은 본인이 서른이라는 걸 암담해하고 있었으나 라울이 보기에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거였다. 나이를 먹는다 해서 마기휼이 아니게 되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마기휼은 뺨을 감싸고는 고개를 들었다.

침울하게 마냥 있을 것 같던 마기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어? 아이스크림이다!”

마기휼은 당장 작은 가게 앞으로 달려갔다.

“라울. 난 이걸 먹을 거야!”

“사주지.”

바로 대답을 하며 라울은 사내를 쳐다봤다. 무언의 눈동자가 말하는 건 분명했다. 금방 아이스크림 두 개를 준비한 사내는 ‘고작 이거 먹으러 오면서 왜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야.’라고 속으로 투덜댔지만 내색은 할 수 없었다.

돈을 받아 든 사내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를 했다.

가게 앞을 떠나자마자 마기휼은 크게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입 안으로 퍼지는 차갑고 달콤한 맛에 표정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감탄을 하듯 입술 양 끝이 위로 올라갔다.

“맛있다아―.”

“괜찮은 맛이로군.”

“그렇지?”

만면으로 미소가 걸렸다. 언제 우울하고 침울했냐는 식이었다. 정말 금방금방 변했다. 그야말로 변덕이 죽 끓듯 했다. 하지만 안나는 원래 그런 거라고 알려줬다. 그러니 많은 인내와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을 해줬다.

하지만 그녀가 그리 말을 하지 않아도 라울은 마기휼의 모든 걸 수용할 수 있었다. 그가 되지도 않는 걸 요구한다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마기휼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게 자신의 아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임신의 고통을 나눌 순 없지만 적어도 마음과 몸만은 편하게 하고 싶었다. 그의 불안을 덜어주고 싶은 게 라울의 마음이었다.

“저기에서 쉬자.”

다른 생각을 하던 라울은 마기휼이 가리키는 쪽을 살폈다. 골목길 안쪽으로 돌계단이 보였다. 차갑고 딱딱해 보였지만 이미 마기휼은 마음은 정한 듯싶었다. 안 된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던 라울은 순순히 그리로 가서 돌 위에 깔 손수건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 전에 마기휼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 거 필요 없어.”

실제로 마기휼은 라울이 손수건을 깔기 전에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를 주욱 펴고 앉은 마기휼은 생글거리고 웃는 얼굴이었다. 아이스크림 하나 덕분에 확실히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하지만 라울은 맨바닥에 앉는 마기휼의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은 좋지 않아.”

“아무려면 어때. 난 계속 이런 식으로 아무 곳에나 앉았어. 새삼스럽게 뭘 깔고 앉는 게 더 불편하고 이상해.”

마기휼은 얼굴을 가리던 망토를 내리더니 두어 번 고개를 턴다. 시원하다며 눈을 반짝이며 라울을 올려다봤다.

“뭐 하고 있어? 앉아.”

라울은 마기휼의 옆에 앉았다. 조금 전 손수건을 꺼내려 했던 걸 빗대어 마기휼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손수건 깔고 그 위에 앉아도 되는데.”

“그렇게 앉을 리가 없잖나.”

“그런 주제에 나한테는 왜 깔아주려고 했던 건데?”

그건 마기휼이기 때문이었다. 마기휼은 본인이 임신한 상태라는 자각이 있는 걸까. 조금 더 소중하게 그 몸을 생각했으면 좋을 텐데. 물론 이런 말을 한다 해서 마기휼이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마기휼은 원래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임신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묶여 있는 거였다. 그것에 대한 불편함과 고충에 대해 이쪽이 헤아릴 필요가 있었다.

“바람이 기분 좋아.”

마기휼의 속삭임에 라울도 눈을 감았다. 따스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 사이로 마기휼의 느낌이 전해졌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마기휼이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안심이 된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끼며 자연스럽게 라울의 표정도 느슨해졌다.

“사람들의 웃음이 더 커지네. 분명 공터에 모여서 춤을 추는 거겠지.”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춤이었다. 모두가 모여서 공터에서 춤을 추며 축제를 만끽하는 동시에 젊은 총각, 처녀들은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대담한 어프로치를 하게 된다. 이루어지면 다음 날에 연인이 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였다.

평소에는 수줍어하고 말도 제대로 걸지 못했던 사람에게 고백을 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니만큼, 지금 이때를 기다리는 이들은 많았다. 자신도 저런 자리가 마련이 되면 날아다니곤 했는데. 마기휼은 라울을 돌아봤다.

“우리 춤 한번 춰볼까?”

“음?”

막 아이스크림에 입을 댄 채로 라울은 마기휼을 쳐다봤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당황한 듯 눈이 살짝 커진 채였다. 그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방심한 얼굴이자 깜찍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마기휼은 웃음이 터졌다.

“너 지금 되게 귀여운 거 알아?”

주먹으로 입을 막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려 하지만 피식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걸 본 라울은 아이스크림에서 입을 떼어 냈다. 입술에 묻은 걸 핥아 내는 것과 동시에 마기휼은 크게 웃어버렸다.

“아하하하!”

너무 크게 웃는다. 이쪽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려 했던 것뿐인데 저렇게 웃을 필요가 어디에 있나 싶었다.

“왜 웃지?”

“지금 그 얼굴도 너무 귀여워! 너 진짜 귀엽다-.”

라울이 은근히 귀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번 게 제일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마기휼은 라울의 뺨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마기휼의 행동에 라울은 적잖이 당황해 그가 뺨을 잡아도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마기휼은 라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굳은 그의 얼굴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가까워지는 마기휼의 얼굴에 라울은 눈을 깜박였다. 그 순간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쪽. 하고 장난처럼 울리는 소리에 라울은 숨을 죽였다. 그런 라울을 빤히 바라봤다.

갑자기 웃더니 입을 맞춘다. 라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들떴다. 즐거웠다. 아마도 라울과 함께 이런 곳에 왔기 때문일 거다. 마기휼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그거 알아? 너랑 놀러 나온 거 이번이 처음이야.”

그 순간 라울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미안함이 담긴다.

지나치게 바빴기 때문에 밤에 돌아와 마기휼의 곁에 있는 게 고작이었다. 라울의 입장상 그것도 대단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들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다.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곁에만 있어도 안심이 된다. 그러면서 더 큰 것을 요구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함께 더 즐거운 걸 하고 싶다. 그런 마음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 욕구가 이번 일로 아주 조금은 해소된 것 같다.

정말 즐거웠다. 당분간은 별장에 가만히 있으면서 뜨개질을 해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마기휼은 라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댄 채로 속삭였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야.”

“……미안해.”

“왜 사과를 하는데? 말했잖아. 기분 좋은 날이라고. 그런 날에는 사과 같은 거 하는 게 아니야. 무드 깨지니까.”

라울의 뺨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지는 듯한 그 손길에 라울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린다.

라울은 마기휼의 턱을 잡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몇 번이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라울의 얼굴에 손가락을 대고 마기휼은 입을 벌렸다. 안으로 들어온 혀는 입 안을 살짝 건드리고는 그대로 빠져나갔다.

감질이 난다. 이런 것 말고 더 농후한 것을 원했다. 불현듯 치미는 성욕에 마기휼은 혀를 내밀어 입술 아래를 핥았다. 그리고 라울을 빤히 바라봤다.

“우리 할까?”

“……괜찮겠나?”

“엎드려서 하면 되잖아. 그 자세가 제일 낫다고 한다던데?”

라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건 또 누가 알려준 거지?”

“안나가. 그녀는 모르는 게 없어. 배려심도 깊고, 이해심도 많지.”

그래서 구체적으로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알아서 대답을 해주곤 했다.

남자가 임신을 한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일단은 아이를 가졌다는 건 축복을 받아야 할 일이고,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서 태어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렇다고 너무 아이만 보살피면 안 된다. 당사자도 즐거움을 느끼면서 지내야 했다.

성생활도 그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성생활을 할 때에 추천하는 체위는 이런 것이다. 등등등.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니 이쪽도 한결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걸 알게 되었다 해서 바로 시도를 할 기분이 드는 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움츠러들게 되는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과감하게 시도를 해볼 생각이었다. 이렇게나 즐거운 날, 그게 빠지면 섭섭하지.

마기휼은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어때? 할래?”

대답 대신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라울은 마기휼의 양손을 잡았다. 라울에게 의지한 채로 일어선 마기휼은 라울 쪽으로 한 발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마기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마기휼?”

웃던 얼굴이 경직되고 미소가 사라진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걸 확인한 라울이 마기휼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왜 그러지?”

묻는 순간 마기휼은 손을 내렸다. 마기휼의 손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라울의 팔도 같이 내려갔다. 라울의 손을 잡은 채로 마기휼은 자신의 엉덩이 아래에 손을 댔다. 축축했다.

“…….”

라울의 표정 또한 마기휼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떤 식으로 행동하면 된다고 들어두기는 했다. 그때에는 절대로 잊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비어 있었다. 백지장 같았다. 멍하니 있는 동안 마기휼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눈동자가 잘게 흔들린다.

마기휼은 라울의 몸을 끌어안았다.

“어떻게 하지?”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라울은 당장 마기휼의 몸을 안아 올렸다. 위로 들려지는 순간 아랫배에 손을 댄 마기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통증을 느끼는 듯싶지만 소리를 내지 않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라울은 마기휼을 안은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마차를 세워 둔 쪽으로 달려갔다.

“괜찮을 거다.”

누구에게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라울은 재차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아이도 마기휼도 무사할 거다.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반드시 그리되어야만 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다급한 외침에 라울이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내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눈을 반쯤 뜬 채로 있던 마기휼은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안 아파.”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긴 했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걸 어필하기 위해 짓는 미소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마기휼이 누운 침대가 안쪽으로 이동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호그와 안나를 비롯한 의원들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기휼이 아이를 낳기 위해 모든 걸 준비해 둔 수술실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준비하기 위해 수십 번도 넘게 모의 수술을 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믿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걱정할 게 없었다.

마기휼과 라울은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이들이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불안한 듯 그들을 바라보던 마기휼이 라울을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른 침을 삼키게 된다. 마기휼은 애써 웃어 보였다.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아까는 놀랐던 것뿐이야.”

“내가 계속 곁에 있을 거다.”

마기휼의 웃음이 점점 사라진다. 약한 얼굴이 되는 마기휼의 손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라울은 말했다.

“계속 곁에 있어줄 테니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고, 마기휼 너와 우리의 아이는 건강할 거다.”

“그래. 맞아. 건강할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라울의 말을 반복하며 마기휼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이 경사스러운 날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잠깐만 잤다가 일어나면 되었다. 그러면 아이가 태어나 있을 테고, 배는 다시 줄어들어 있을 터였다.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라울―.”

“15분 후에 집도의가 도착하게 될 겁니다. 그때 바로 수술을 시작하겠습니다.”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중간에 호그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정신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뭐라 할 수 없었다. 라울과 마기휼이 동시에 이쪽을 쳐다보는 걸 확인하며 호그는 다소 딱딱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에 계실 겁니까? 그러면 옷을 갈아입고 소독을 하시지요.”

호그의 말에 라울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라며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라울 너는 나가 있어.”

바깥으로 나가 준비를 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고 있던 라울은 아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숙였다. 굳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마기휼과 눈이 마주쳤다. 나가 있으라는 말은 그가 했던가. 라울은 당장 고개를 저었다.

“곁에 있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네가 안 보여야 안심이 될 것 같아. 그러니까 옆방에 가 있어. 다 끝났을 때, 그때 나를 보러 와.”

“…….”

“다 끝나고 괜찮아진 모습일 때 만나자.”

마기휼은 입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본 순간 더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침묵한 라울은 마기휼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호그가 그런 라울을 다독이며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후, 마기휼은 입을 벌렸다. 하아- 하고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곁에 있게 하시지 왜 나가게 하시는 건데요.”

안쓰러움이 섞인 목소리에 마기휼은 한쪽 눈을 떠 옆을 확인했다. 안나가 서 있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조금 더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기휼의 입가로 힘겨운 미소가 걸렸다.

“안나. 나는 괜찮을 거예요. 그렇지요?”

“물론이지요. 훌륭한 의사 선생님들이 이렇게나 많아요. 걱정할 건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멍청한 나는 최악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 일이 정말 벌어지게 되었을 때, 라울이 그런 나를 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안색을 굳힌 안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기휼 님. 말이 씨가 된다고 했어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어요.”

“알아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거. 그래도 난 너무 멍청하고 나약해서, 어쩔 수가 없어요. 아이를 낳는 건 나인데. 내가 낳는 건데. 그 정도 불안쯤은 당연한 거라고요.”

“……마기휼 님.”

안나의 얼굴로 안타까움이 서렸다. 어떤 식으로 말을 해서 이쪽에 용기를 줘야 하나 싶을 거다. 하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무슨 말을 들어도 쉽사리 용기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믿을 뿐이었다. 나와 내 아이를. 그리고 신을 말이다.

지금까지 신을 믿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런 상황이 되다 보니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사람은 위급할 때에만 신을 찾는다 하지 않는가.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신이시여.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끔 해주세요. 그래서 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라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여자아이만 고집하지 않을게요. 남자아이가 태어나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요. 제발―.

라울은 손을 펼쳤다. 그의 손에 들려진 것은 검은 막대였다. 마기휼이 즐겨 사용하는 채찍은 마치 그의 분신과도 같았다. 손에 쥐고 있는 동안 마기휼의 손을 잡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기휼. 너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고, 우리들에게 슬픈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절대로 말이야.

“라울 님. 차 좀 드세요.”

“아니. 괜찮다.”

바로 거절을 하는 말에 안나는 말없이 옆에 찻잔을 내려놨다. 쟁반을 끌어안은 채로 라울을 바라보는 안나의 얼굴로 걱정이 가득했다. 그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솔직히 좀 거슬렸다.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 몇 시지?”

“시작한 지 이제 20분 정도가 지났습니다.”

“그것밖에 안 지난 건가?”

한 2시간 정도는 지난 것 같은데.

흐트러진 라울의 눈동자가 몽롱했다. 이런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던 안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라울 님. 마음을 편안히 먹으세요. 마기휼 님은 열심히 싸우고 계시잖아요.”

“불안하지 않아. 난 괜찮아.”

“계속 그리 생각하고 계세요. 그러면 이 힘든 시간은 금방 지나가게 될 거예요.”

그래. 기다리다 보면 금방 지나갈 일이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마기휼과 얼굴을 마주하고 재차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다. 꼭 그리될 거라며 라울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고개를 숙이는 라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기휼 소령이다.’

누군가의 말에 라울은 그쪽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이내 한 사내가 설렁거리며 들어오는 게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내린 사내는 갈색 피부에 보랏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눈에 띄는 특징과 달리 얼굴은 평범했고 몸은 호리호리했다. 오늘이 테스트가 있는 날이기 때문에 나온 거지, 안 그랬으면 계속 잠을 잤을 거라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하는 것에 근처에 있던 이들이 혀를 찼다.

‘저 흐트러진 모습 좀 보라지. 저러고도 소령이야?’

‘저런 사람이 군인이라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수치라니까. 저런 사람은 바로 잘라버려야 하는데 말이야.’

수군거리는 목소리 안쪽으로 시기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마기휼 그가 정말 엉망인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굴 필요가 없었다. 싫다면 싫은 걸로 끝내면 그만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말들이 많은 걸까. 아마도 무시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대충 하는 것 같은 마기휼이나 실상은 뭐든지 제대로 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있는 거다.

오늘은 사격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다른 이들은 진작 끝낸 일이었으나 마기휼은 늦은 시간에 나타났다.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는 얼굴은 몽롱했다. 지금부터 시험을 본다는 사실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마기휼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생각했다. 하지만 금방 마기휼의 시선이 떨어졌고, 대신에 그는 이리로 걸어왔다. 그리고 옆에 있던 사격대를 가리켰다.

‘여기 사용해도 되나?’

한 군인이 앞으로 나섰다. 사용하지는 않지만 마기휼이 이용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런 의사가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사용하셔도 됩니다.’

안 된다는 말을 하려던 군인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누가 끼어드나 싶어 뒤를 돌아봤던 그는 말을 한 것이 라울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근처에 있던 다른 군인들도 의외라는 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라울은 마기휼을 응시했다. 마기휼도 잠시 이쪽을 확인했다. 그의 입술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짜증 나네.

그리 말하는 걸 듣지는 않았어도 입술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기계에 자신의 넘버와 이름을 입력하고 지문도 찍은 마기휼은 연습 없이 바로 시험에 들어갔다.

마기휼은 총을 들고 과녁을 겨냥했다. 그가 자세를 취하자 누군가 ‘얼마나 하나 두고 보자.’라고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마기휼은 쉬지 않고 10발을 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쏴 대는 것에 그를 빈정거리던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이들도 더러 있었다. 마기휼은 총을 내리고 과녁판을 바라봤다. 다른 군인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점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3초 후 합산이 된 점수는 [100]이었다.

‘말도 안 돼.’

‘정말로 올이야? 하나도 안 틀리고 올이라는 거야?’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그걸 그도 느낀 것일까. 총을 내려놓은 그는 뒷머리에 손을 대고는 중얼거렸다.

‘이런, 실수했네.’

설렁설렁 했어야 했는데 그만 실력이 나오고 말았다.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마기휼은 실력이 뛰어난 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소령으로 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거였고, 사령관은 집요하게 그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요구를 하는 거였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것에서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만 있었다. 본래 실력을 드러내지 않고 현재의 삶에 안주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실은 뭐든지 할 수 있으면서.

어쩌면 자신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마기휼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지나치는 찰나 이쪽을 흘겨봤다. 바라보는 보랏빛 눈동자에 서린 뚜렷한 감정을 읽었을 때 라울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걸 느꼈다. 적의까지는 아니지만 이쪽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있었다. 재수 없는 놈.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듯싶었다.

마기휼이 왜 저런 눈빛을 보내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왜 마기휼이 저런 눈빛을 보냈다고 이렇게나 흔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싫은 기분이 드는 걸까.

어쩌면 자신은 그때부터, 아니 훨씬 더 전부터 마기휼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라울 님!”

큰 소리에 라울은 감은 눈을 떴다.

라울은 방금 전에 잠들었다는 걸 알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한 눈빛으로 안나를 확인하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지? 무슨 일이지?”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마기휼은?”

“괜찮으세요. 마기휼 님도 아기도 모두 건강하세요. 축하드립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안나를 보고도 바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기가 태어났다는 말인가. 정말로?

마기휼과 나의, 우리의 아이가 태어났다고?

“마기휼을 봐야 해.”

중얼거린 라울은 급히 밖으로 나갔다. 바로 문을 열고 옆을 확인했다.

의사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밀쳐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미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리던 이들은 그것이 라울임을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라울은 수술이 이루어졌던 곳을 주욱 둘러봤다. 단박에 보고자 하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마기휼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몸을 덮고 있는 하얀 천 여기저기에 피가 묻어 있었다. 아직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알고는 있으나 보는 순간 움찔하게 된다.

그래. 마기휼이 현명했다. 자신은 의사가 칼을 들고 마기휼의 몸에 대는 순간 바로 그걸 막으려 들었을 거다. 마기휼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 걸 봤다면 당장 난동을 부렸을 테고 말이다. 자신이 다른 곳으로 가 있게 한 그가 현명했다며 라울은 손을 들어 마기휼의 입술 부근에 묻어 있는 피를 엄지로 닦아 냈다.

“마기휼.”

크게 부를 수도 없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코 아래에 손을 대자 가느다란 숨결이 느껴졌다.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마기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라울의 곁으로 다가온 호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지금 단계에서는 아주 성공적입니다. 절개나 봉합 모두 잘 되었습니다. 수술 여부에 따라 재임신이 가능할지, 아닐지가 결정되는데 수술 경과가 좋아서 또 임신하시는 것도 가능하실 것 같습니다.”

“아니. 아이는 더 낳지 않아. 이런 경험은 한 번으로도 족하다.”

이런 식으로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감각은 더는 사양이었다. 굳은 얼굴이 되는 라울이었으나 그 위로 서리는 안도감은 감추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안나는 라울 쪽으로 다가서 조용히 말을 건넸다.

“아이를 보러 가시겠습니까.”

라울은 고개를 들어 안나를 바라봤다.

안나는 인자한 어머니처럼 미소를 지었다.

“예쁜 공주님이랍니다.”

“여자아이인가.”

“네. 그렇습니다.”

“마기휼이 기뻐하겠군.”

여자아이가 좋다고 늘 말을 해 왔으니 말이다. 라울도 여자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마기휼의 말대로 공주님처럼 평생을 소중하게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감격스러워서일 테지. 실제로 아이를 보면 어떨까 싶었다.

“이리로 오세요.”

안나가 팔을 붙잡았다. 마기휼을 한 번 더 바라본 라울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이는 안쪽에 있는 따뜻한 방으로 옮겨졌다. 거기서 몸을 씻고 난 후에 바로 데리고 나올 예정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라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마기휼 만큼 라울도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안나는 문을 열며 말했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있을 겁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보심이―”

안나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아이를 씻기러 들어갔던 여인이 쓰러져 있고 그 주변으로 물이 흥건했다. 뒤집어진 욕조에서 쏟아진 물 위로 물건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고, 정면으로 보이는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안나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장 비명을 질렀을 테니 말이다. 비틀거린 그녀는 라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라, 라울 님, 꺄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울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열린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바닥에 착지를 하자마자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라울은 일단 정면으로 달려갔다.

풀과 나뭇가지들이 몸을 마구 긁어 댔다. 앞을 가리는 것들을 팔로 밀쳐 내며 앞으로 계속 달려 나갔다. 그러면서 최대한 집중했다. 그런 그의 귀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더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당장 그리로 달려가자 쓰러져 있는 사내를 발견해낼 수 있었다. 별장 주변의 경계를 맡겼던 이였다. 당장 그 앞으로 가 쓰러진 자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정신 차려라!”

“으윽―”

신음을 흘리는 군인은 눈을 뜨지 못했다. 그를 내려놓은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불자 숲이 흔들렸다. 바람이 나무 사이를 통과하는 음향이 들려오고 스산한 기운이 전신을 짓눌렀다.

아이를 빼앗겼다.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으로 인해 라울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셨다.

마기휼이 걱정하는 것에는 분명 출산 자체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불안은 바로 아이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여왕이 아이를 가지고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늘 말했다. 아이와 마기휼을 지켜줄 거라고. 그런데 이게 뭔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누가 아이를 훔쳐 갔을까.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죽여버리겠어.”

엄청난 증오심이 몸속을 들쑤셨다. 날뛰는 흥분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어금니를 악문 라울은 당장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왕좌에 앉은 가이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꼰 채인 그녀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가이나의 입술이 열리고 긴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눈을 뜬 그녀는 이마에 손을 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만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가 봐야 할 듯싶었다.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정면에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고요한 공간에 울리는 요란한 소리에 가이나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표정을 굳힌 그녀는 문을 닫는 여인을 확인하고는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오르베, 이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죄송합니다, 여왕 폐하.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기에 이리도 급히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무릎을 조아리고 고개를 숙이는 간단한 인사를 한 오르베는 당장 가이나의 앞으로 걸어갔다. 붉은 융단을 밟고 지나가기 때문에 구두굽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가이나의 안색이 변했다.

오르베는 그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르베는 품에 안고 있던 포대기를 가이나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울음이 조금 더 크게 들린다. 가이나는 오르베를 내려다봤다.

“이게 뭡니까?”

“여왕 폐하, 보십시오.”

포대기를 한 팔로 지탱한 오르베는 윗부분을 살짝 내렸다. 그러자 하품을 하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작고 하얀 얼굴이 나타났다.

갓 태어난 아기는 아직 쭈글쭈글한 상태였다. 눈도 채 뜨지 못하는 아기의 포대기 밖으로 나온 손가락 사이에는 채 닦아 내지 못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데리고 온 것이 분명했다.

가이나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오르베, 지금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라울의 아이입니다.”

가이나의 입이 반쯤 열렸다. 이내 그녀는 허탈한 듯 미소를 지었다.

오르베는 그러지 말고 좀 자세히 보라며 안고 있는 아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한 손을 아이의 말랑말랑한 뺨에 댔다.

“하얀 피부에 보랏빛 눈동자. 머리카락은 분명 눈부신 블론드일 겁니다. 라울을 닮아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라겠지요. 지금도 보세요.”

아이를 바라보는 오르베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넘쳐나는 애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아이의 엄마라도 된 듯 굴었다.

“어쩌면 이리도 예쁠까―.”

오르베는 아이의 이마에 자신의 뺨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가이나를 올려다봤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그녀지만 이내 평정을 찾았다. 그녀는 한결 차분한 얼굴이 되어 오르베의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봤다. 양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꿈틀거리는 모습이 결코 사랑스럽다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조금 더 살이 붙고 자라야 예뻐질 터였다. 그럼에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정말 예쁘군요.”

“너무너무 사랑스럽지요? 이 아이를 폐하께서 키우시면 됩니다. 거둬들여서 후계자로 키우세요.”

나직한 속삭임에 가이나의 눈꼬리가 파르르 흔들렸다.

그녀의 망설임을 읽어낸 오르베가 적극적으로 말했다.

“뭘 망설이세요. 그러지 말고 한번 안아보세요. 어서요.”

오르베는 반쯤 몸을 일으켜 가이나의 품에 억지로 아이를 밀어 넣었다.

너무도 작디작은 아이. 안기 싫다며 밀쳐 내면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아기를 안아 들게 되었지만 그 폼이 엉거주춤했다. 오르베는 웃으며 가이나의 손 위치를 바로잡아줬다.

“엉덩이를 잡아주시고 팔로 등 쪽을 대주세요. 그리고 목은 이런 식으로 고정해주셔야 해요. 어떠신가요?”

“……한결 안기가 수월하군요.”

중얼거린 가이나는 아기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비릿한 내음이 났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군요.”

“아직 제대로 씻지 못해서 그럽니다. 깔끔하게 씻고 옷을 입으면 분명 더 귀여울 테지요.”

그래. 그럴 거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아름답게 변하겠지.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가 미워질 턱이 없을 거다. 가이나는 자신의 팔에 들린 아기의 무게를 느꼈다. 너무도 가벼웠다. 실수를 해서 떨어뜨리면 어쩌나 싶어서 팔에 들어간 힘을 뺄 수 없었다.

“아기라는 건 이렇게나 작은 거로군요.”

“금방 자라 몇 년 후면 폐하보다 훨씬 더 키가 커질 겁니다. 그때가 되면 폐하께서 이 어린아이를 올려다보게 되는 날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 당신의 곁에 두십시오. 이 아기를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마세요.

지금 오르베가 이쪽을 바라보며 하는 말은 명확했다. 라울의 아이를 왕실에서 키우라는 거였다. 하지만 라울이 가만히 있을 것인가.

지금 오르베는 당연히 라울의 뜻과 상관없이 아기를 무작정 데려왔을 거다. 나중에 라울이 아기를 찾으러 오겠지. 그때 자신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걸까.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 아기의 존재는 무척이나 귀했다. 라울과 척을 진다 해도 빼앗기지 말아야 했다.

전이라면 그리했겠지.

그래, 전이라면 말이다.

“…….”

가이나는 아기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을 감고 있는 그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은 조금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내 아기가 아니니까.

이리도 작고 가벼운 생명체. 누군가의 소중한 아기. 나는 그걸 빼앗기 전에는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일까. 그렇게라도 가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빼앗긴 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상대가 라울이 된다면, 앞으로 자신들의 관계는 어찌 될 것인가.

덧붙여, 라우젝과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 변하게 될까.

옳지 않은 일이다. 라울이나 라우젝, 그 둘을 동시에 잃을 순 없었다. 지금 단계에서 반목이란 위험한 것이었다.

가이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르베,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이 아기는 폐하의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오르베가 움찔하고 몸을 떠는 걸 놓치지 않은 가이나는 재차 말했다.

“이러면 안 되는 겁니다. 이럴 순 없습니다.”

“폐하. 마음 약하게 먹으시면 안 됩니다. 후계자가 없지 않습니까. 라울의 아이입니다. 분명 잘 자랄 겁니다. 훌륭하게 자라서―”

“라울이 당신과 나를 죽이려 들 겁니다.”

차분한 속삭임에 오르베는 입을 다물었다.

가이나는 그녀가 아닌 아기의 얼굴을 바라본 채로 말을 이었다.

“라울은 전의 그가 아닙니다. 아기를 되찾기 위해서 저에게서 등을 돌리게 될 겁니다. 그건 노르디아에 큰 위기가 될 테지요. 후계자를 얻으려다 내분을 일으킬 순 없습니다.”

“라우젝이 있습니다. 그가 폐하를 지켜줄 겁니다.”

“오르베, 정신 차리세요. 정말 모르겠습니까. 이건 인륜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가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응시하는 눈동자는 괴로움으로 인해 일그러져 있었다. 정말 이러지 맙시다. 그리 말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 아닙니까.”

“폐하, 저는―”

“라울이 당신과 같은 마음을 품게 하고 싶습니까? 그런 식으로 그가 당신처럼 절망하기를 원하는 겁니까.”

오르베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고개를 젓다가 이내 행동을 멈췄다. 무표정을 한 채로 있던 오르베는 자신 없이 눈을 내리떴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가이나는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조심스레 오르베에게 내밀었다.

“가서 돌려주세요.”

“폐하, 하지만 당신은―”

“명령입니다. 어서 가서 돌려주세요.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이 나에 대한 얼마나 큰 모욕인지 정말 모르십니까. 당신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나를 무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아이를 키우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여자인 나에게 있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지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가이나는 억지로 오르베에게 아기를 떠넘겼다. 아기를 받아 든 오르베는 재차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가이나는 듣지 않았다.

“가세요, 오르베. 더는 말을 할 기운도 없습니다.”

가이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오르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텅 빈 눈동자를 하고 있던 오르베는 꼼지락거리는 느낌에 눈을 내리떴다. 아이가 인상을 쓴 채로 있었다. 낯선 사람의 품에 있는데도 더 울지도 않고 잘 있었다. 어쩌면 기운이 달린 걸 수도 있었다. 갓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졌으니 말이다. 이대로 두면 죽게 될까.

오르베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가이나는 눈을 감았다.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로 비참했다.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더더욱 비참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순간적으로 그 아이가 너무도 탐이 났다는 것에 있었다. 가지고 싶었다. 평생 동안 내가 가질 수 없는, 너무도 찬란한 그것을 끌어안고 놓고 싶지가 않았다. 실상 오르베에게 돌려주기까지 얼마나 큰 결의가 필요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왜 나는 모든 걸 가진 것 같으면서도 정작 이 손에 쥐고 있는 게 없는 걸까. 도대체 왜―

“우는 거야?”

물음에 가이나는 손바닥에서 얼굴을 떼어 내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 소년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왕좌 양 손잡이에 각각 한 손을 댄 채로 있는 소년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렇게 접근을 할 때까지 왜 모르고 있었을까 싶었던 가이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소년의 아름다운 얼굴. 예전 자신이 너무도 사랑했던 바로 그 얼굴. 모든 걸 다 주고 싶었던, 그가 원한다면 이 왕좌까지도 넘겨줄 수 있었다.

예전의 감정 때문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을 느끼며 가이나는 입을 열었다.

“라우젝.”

이름을 부르자 라우젝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가이나도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기다렸다는 듯 속삭임이 들려왔다.

“라울의 아기야. 너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몰라.”

“너까지도 그런 식으로 말하기야?”

자꾸만 들쑤시면 재차 욕심이 난다. 지금이라도 오르베에게 달려가 그 아이를 빼앗아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까지 가면 정말 밑바닥이었다. 여왕인 주제에, 남의 아이를 빼앗는 그런 최악의 일을 하고도 남들 앞에서 고고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할 수 없었다.

“사랑스러운 아이였지. 전에는 어떤 아기라도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았어.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아. 아무리 잘 키운다 해도 결국은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나는 그 아이를 버리게 될 거야. 도구로만 이용하겠지. 나는 그것이 두려워.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가 내 곁에 있음으로 인해 불행해지는 걸 원치 않아.”

“거기다가 라울이 등을 돌리는 게 두려운 거지?”

“……아주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라울의 인기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알센과 치울스도 지금은 라울을 주시하고 있었다.

현재 그는 노르디아의 방패였다. 그런 그가 적으로 돌아선다면 더 큰 혼란이 야기 된다. 외부의 적과의 전쟁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게 내분이었다. 속이 곯아선 안 되었다.

가이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라우젝을 바라봤다.

언제나 늘 같은 얼굴로 존재하는 소년 같은 사내. 그를 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미움도, 증오도, 거부와 그리움도 있었다. 감정이 뒤죽박죽인 상태가 되어 라우젝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가 입을 열었다.

“실은 너에게 사과할 것이 있어서 왔어.”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가이나도 따라 웃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소년이 웃으며 꺼낸 사과라는 말에는 걱정의 무게가 없었다.

“무슨 사과를 하려는데?”

“너를 사랑하는데, 동시에 너무도 미워.”

“…….”

가이나의 미소가 굳어졌다.

“가이나. 네가 미워. 정말 너무도 미워. 죽이고 싶을 정도로―.”

“……라우젝?”

“왜 나를 포기했는데? 왜 마음이 변했지?”

놀란 듯 숨죽이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라우젝은 속삭였다.

“다른 사람들이 다 등을 돌려도 넌 그래선 안 되었어.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했잖아. 그런데 너는 나를 버렸지. 내가 아닌 라울을 선택하고 너는 여왕이 되었어.”

라우젝은 아니다. 그리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그런 것 따위 없어져도 괜찮았다. 애초에 아무런 의미가 없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가이나, 그녀는 아니었다.

자신이 내쳐질 때에 그녀의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여왕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작은 실수가 엄청난 흠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라우젝은 믿었다. 그녀가 사람들을 모두 뿌리치고 자신에게 달려올 거라고. 손을 잡아줄 거라고. 그리 믿었었다.

바라보는 라우젝의 눈동자에 서린 원망에 가이나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었어. 난 여왕이 되었어야만 했어.”

“모든 걸 포기하고 나를 선택할 수 없었던 거야?”

가이나의 고갯짓이 멈추었다. 대신에 그녀의 얼굴 위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이 서렸다. 이미 저질러버린 일에 대한 미안함이 풍겼다. 하지만 그런 걸로는 보상받을 수 없었다.

라우젝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이런 몸이기 때문에, 그래서 너는 날 포기했던 거야. 너라는 여자는 결국 여왕의 자리가 더 소중했던 거지.”

“아니야. 안 그래. 절대로 그렇지 않아.”

가이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 죄책감이 점점 커진다. 가슴이 먹먹했다.

가이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잖아. 난 여왕이 되기 위해 태어났단 말이야.”

“나는 너를 위해 태어났어.”

“…….”

단호한 말에 가이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라우젝은 그 눈동자를 놓치지 않고 노려봤다.

“가이나, 너만을 사랑하려고 태어났어. 난 그렇게 믿었지.”

라우젝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왕좌를 잡은 그의 손등으로 힘줄이 올랐다.

라우젝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고 눈동자가 벌겋게 익었다. 핏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두려웠던 가이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라우젝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눈물 사이로 납처럼 무거운 그의 말이 떨어져 내렸다.

“나는 왜 이런 몸인 거야. 왜 나는 어른이 될 수 없는 거지? 화가 나. 절망적이야. 미칠 것 같아. 그래서 더더욱 너를 놓을 수 없어. 너만이 날 사랑해줄 거라고 믿었어. 너만은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을 거라 믿었어. 하지만 친애하는 여왕님, 너는 나를 버렸어.”

가이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녀의 흐느낌이 점점 깊어졌다. 미칠 것 같았다. 라우젝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머리가 이상해져버릴 것만 같았다.

가이나는 라우젝을 끌어안았다. 그의 머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채로 오열을 터트렸다. 지금껏 울어본 적이 없는 아이처럼 가이나의 울음은 이상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서 입을 크게 벌리고 울었다. 필사적으로 라우젝을 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를 영영 잃게 되는 것처럼.

가이나에게 끌어안긴 라우젝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콧속 가득이 밀려오는 가이나의 향기. 사랑스러웠다. 미치도록 좋았다. 이 체취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라우젝은 손을 들어 가이나의 몸을 끌어안았다.

여자가 된 가이나. 예전의 어린 육체가 아니었다. 자신을 버린 그녀는 혼자만 어른이 되었다.

라우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를 사랑해. 하지만 미워. 증오해.”

“그만해. 제발…….”

라우젝은 고개를 들었다. 동공이 풀린 눈동자가 먹먹했다. 일렁거리는 눈동자를 타고 재차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메마른 라우젝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이대로라면 정말 미칠 것 같아. 자살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라우젝. 제발 그만해.”

흐느낌에 섞인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울고 또 우는 가이나는 라우젝이 두려웠다. 그럼에도 그를 놓을 수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안다. 그렇기에 더더욱 필사적으로 그의 몸에 매달린 채로 가이나는 울고, 또 울었다.

앞을 보며 걸어가는 오르베는 몽롱한 얼굴이었다. 씩씩하게 여왕을 찾으며 걸어 다니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없었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발을 멈춘 오르베는 고개를 숙였다.

봉긋한 가슴에 작은 손이 달라붙어 있었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어미의 젖을 찾고 있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힘겹게 고개를 드는 그 몸짓에 오르베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배가 고픈 거로구나. 나는 이미 젖이 나오지 않는데.”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아기는 계속 입술을 오물거렸다.

귀여웠다. 그래서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라울의 아기라는 것조차 상관없었다.

품에 안은 작고 소중한 생명체. 여왕이 아닌 자신이 가지고 싶었다. 이대로 아이를 안고 먼 곳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그 마음이 간절했다.

“내 아기가 왜 네가 아닌 걸까.”

이리도 아름답고 건강한 아이를 왜 낳을 수 없었던 거지. 나는 왜 내 아이의 자란 모습을 볼 수 없는 거지? 어른이 된 아이에게 의지를 하며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걸까? 왜 내 미래에는 내 아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거지?

“왜 내 아이들은 모두 죽은 거지?”

중얼거린 오르베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아기.”

묻어 두고 감추었던 상처가 다시금 덧나기 시작한다. 남들은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저런 짓을 하면서 사방을 다 들쑤시고 다니지 않으면,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생각이 나 견딜 수 없었다. 이 손으로 묻은 아이들이 말이다.

오르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눈물이 아기의 배에 닿았다. 그걸 손으로 닦아 내며 오르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존재가 서 있었다.

“……라울.”

“아기를 돌려줘.”

노려보는 라울의 얼굴이 무시무시했다.

당장 총을 꺼내 들어 머리에 총알을 한 방 박아 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오르베는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녀의 품에 안긴 아기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다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위로 팔을 주욱 뻗었다. 그걸 확인한 오르베가 앞에 딱 멈춰 선 라울 쪽으로 아기를 내밀었다.

혹여라도 오르베가 순순히 아기를 내놓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의아할 정도로 순순히 아이를 내놓고 있었다.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달리 꿍꿍이가 있나 싶으면서도 라울은 황급히 아기를 안아 들었다. 그런데 너무 작고 가벼웠다. 품에 안겨 오는 몸은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아 순간적으로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렵다니. 이 내가 두렵다는 생각을 하다니.

“그렇게 안으면 안 돼.”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오르베의 손이 팔에 닿았다. 그녀는 라울의 팔과 손을 바로잡아줬다.

조금 전 가이나에게 아기 안는 방법을 알려주었듯이. 그렇게 라울의 팔과 손을 바로잡아준 오르베는 천천히 손을 뗐다. 그리고 흘린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 냈다.

라울은 경계를 하면서도 오르베가 만져준 대로 팔과 손 모양을 유지했다.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당신은 알고 있나.”

“아기를 훔쳐서 달아났지.”

순순히 대답을 하자 라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건가?”

“너라면 나도 죽이고 여왕 폐하도 죽일 수 있겠지. 분명히 그럴 거야.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폐하는 그 아기가 필요 없다고 하셨으니까.”

오르베의 중얼거림에 라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런 말은 듣게 될 줄 몰랐다는 듯 가만히 있는 라울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녀가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자 라울은 한숨을 토해 냈다. 안심이 되는 것과는 반대로 한숨이 나왔다. 라울은 품에서 꼼지락거리는 걸 느끼곤 눈을 내리떴다.

아기가 크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뭔가를 찾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슬슬 부아가 나는 듯 양손을 위로 들었다.

솔직히 귀엽다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게 우리의 아기였다. 지금쯤 마기휼이 아기를 찾고 있을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라울은 급히 몸을 돌렸다. 빠른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의 팔 모양은 오르베가 고쳐준 그 상태 그대로였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굉장히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불편한 기분이 드는지 이해할 수 없어 옆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배에서 퍼지는 통증에 입을 벌렸다. 말도 안 돼. 절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의 통증이었다. 신음을 흘리자 찬 수건이 이마에 닿았다.

“바로 몸을 움직이려 들지 말고 눈부터 뜨세요.”

시키는 대로 순순히 눈을 떴다. 어지러웠다. 토할 것 같았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마기휼은 주변을 살폈다.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이는 걸 확인한 안나가 마기휼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보이세요?”

“……안나?”

이름을 부르자 안나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글썽거린다 생각했을 때 그녀는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그걸 손으로 닦아 낸 그녀는 마기휼의 손을 잡았다.

“잘하셨어요.”

어떤 의미로 칭찬을 받는지 모르진 않았다.

이쪽은 수술을 하는 동안 잠만 자고 있었다. 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도 없는데 저런 칭찬을 받으려니 상당히 민망했다. 동시에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한 건을 제대로 했구나. 마기휼은 주변을 살폈다. 익숙한 공간이었다. 별장에 와서 주욱 생활을 했던 자신의 방이었다. 멍하니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던 마기휼은 손을 내렸다. 배를 만지자 아직 딱딱하고 부풀어 있었다. 그 순간 마기휼의 안색이 굳는다.

“안 태어난 겁니까?”

“아니요. 배가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그동안에 몸조리도 잘 하셔야 해요.”

그런가. 안 태어난 게 아니로구나.

안심이 되어 한숨을 토해 낸 마기휼은 재차 안나를 올려다봤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인다. 그걸 느낀 안나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싶던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기휼 님. 실은 그것이―”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간간이 라울의 이름이 들리는 것 같았다. 뭔가 싶어 눈을 들어 닫힌 문을 쳐다봤다. 동시에 라울이 들어왔다.

거친 숨을 헐떡이는 라울을 본 순간 마기휼은 눈을 끔벅였다.

“왜 그래?”

왜 그렇게 숨 차 하는 건데? 어디 다녀왔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으려니 라울의 얼굴 위로 다른 감정이 생겨난다. 안도한 듯 짧은 한숨을 쉰 라울은 앞으로 걸어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안고 있는 걸 조심스레 앞으로 내밀었다.

처음에는 그게 뭔가 싶었던 마기휼은 그 정체를 알아보고는 그쪽을 바라보려 했다. 몸을 움직이는 건 아직 힘들어서 고개만 돌리는 것뿐이었지만 침대에 눕혀진 작은 아기는 확실히 보였다. 천에 감싸인 아이는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간간이 입을 벌리기도 했지만 이내 우물거렸다.

마기휼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원래 아기라는 건 이렇게 생긴 건가?”

“조금 더 있어야 귀여운 상태가 된답니다.”

안나의 말에 마기휼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아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자 안나는 감동한 듯 양손을 들어 얼굴에 댔다. 그리고 라울을 내려다봤다. 다행히 그가 아기를 때에 맞춰 잘 찾아 왔다. 정말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마기휼은 손을 들어 아기의 작은 손을 만져봤다.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붙잡은 손을 맹랑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기휼은 정말 놀랐다.

“날 잡았어.”

“그래.”

잡은 것만이 아니라 있는 힘껏 힘을 주고 있었다. 아기가 잡은 손가락 쪽으로 입을 벌리려 하자 마기휼은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픈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내 배 속에 있었던 건가 싶었다.

“기분 진짜 이상해.”

“나도 그런 기분이 드는군.”

마기휼은 조금 더 아기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멍하니 보고 있는 동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손가락을 붙잡은 손을 슬슬 흔들며 마기휼은 라울을 올려다봤다.

“여자아이?”

“그래. 여자아이다.”

“좋은데?”

마기휼의 얼굴로 미소가 걸린다. 웃는 게 분명한데, 우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건지 아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보랏빛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걸 본 순간 더더욱 안심했다. 전부 다 라울만 닮는 건가 싶었는데 그래도 눈동자는 내 거네.

마기휼은 아기의 턱을 툭툭 건드렸다. 바로 입을 벌린다. 먹을 걸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아기의 턱을 엄지로 슬슬 문지르며 마기휼은 눈을 깜박였다.

“다행이다.”

아무 일도 없이 잘 태어나서.

낳자마자 아이가 잠시 다른 곳에 갔다가 돌아왔지만 그걸 모르는 마기휼은 재차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라울도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정말 다행이다.”

둘은 동시에 아기의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막 태어났을 때에는 쪼글쪼글한 것이 귀엽다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내심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좀 지나고 나서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기는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키워 나갔다.

눈도 뜨고 머리카락도 드문드문 나왔다. 태어난 지 이제 막 한 달이 되었을 뿐인데도 빤히 쳐다보면 그때마다 마기휼은 기가 막힌다며 웃곤 했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주욱 편 마기휼은 하품을 했다. 그런 마기휼의 배에 엎드려 누운 채로 아기가 올려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옷을 잡아당기며 잘 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자고 만다. 그걸 보고 있는 동안 똑같이 졸려진 마기휼은 눈을 반쯤 뜬 채로 있다가 감아버렸다.

“마기휼 님. 여기서 주무시면 감기에 걸리세요.”

온화한 목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래도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그걸 확인한 안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기도 잘못 하면 떨어질 것 같군요. 방으로 들어가시는 게 어떨까요?”

“……그런데 졸려서 못 일어나겠어요.”

“그래도 일어나세요. 어서요.”

안나는 먼저 아기를 안아 올렸다. 이쁜이가 안나의 품으로 가자 아쉬워졌다. 불만이라는 듯 입술을 내밀던 마기휼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재차 입을 쩍쩍 벌리자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에는 임신 중이라 잠이 많은 줄 알았는데 그저 단순히 평소에도 잘 자는 분이셨던 거군요.”

“아니에요. 아직 몸이 덜 풀려서 그런 거예요.”

마기휼은 붓기가 덜 빠진 배를 보란 듯이 내밀었다.

“아, 네. 그렇겠지요.”

대답한 안나는 아기의 등을 토닥였다. 아기는 아까는 좀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한결 편안한 얼굴이었다. 역시나 안는 방법이 잘못되었던 걸까. 미안하다며 마기휼은 아기의 손을 붙잡았다. 바로 아기가 눈을 번쩍 뜬다. 정확하게 마기휼을 쳐다보던 아기가 가만히 있다가 인상을 쓰며 하품을 했다. 마기휼은 감탄을 했다.

“나랑 닮았어.”

“좋으시겠어요.”

웃음기가 섞인 안나의 말에 마기휼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게 좋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설마하니 다른 것도 날 닮아서 뭐든지 대충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정말 곤란한데. 적어도 본인 할 일은 제대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앞으로는 뭐든지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겠어.”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마기휼은 지금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설렁설렁한 모습만 보여서 그걸 아기가 따라 하면 큰 낭패였다. 앞으로는 빠릿빠릿하고 정확하고 명료한 사람이 될 거다. 그래서 아기가 그런 내 멋진 모습을 보고 그대로 자랄 수 있게 해야지.

남자든 여자든 라울처럼 자라야 한다며 마기휼은 작게 기합을 넣었다.

하루에 절반 넘게 잠만 자는 것 같았다. 본인 생각은 하지도 않고 마기휼은 아기가 눈을 뜰 때가 되면 ‘이쁜이 너는 왜 이렇게 잠이 많은 거냐.’라고 투덜대고는 했다. 푹신한 이불 위에 누워 있던 아기는 그럴 때마다 마기휼을 빤히 쳐다봤다. 시끄럽게 쨍알거리니까 내 눈길 한번 던져주마- 그런 느낌이었다.

누워 있는 아기 앞에 책을 잔뜩 쌓아 놓고 지식을 쌓자며 단호한 얼굴을 하던 마기휼이었지만 책을 읽은 지 정확히 20분 후에 잠들어버렸다. 엎드려 누운 마기휼을 옆에 둔 아기는 양손을 위로 들었다. 공중에 손을 든 채로 기운 없이 휘두른다. 그렇게 혼자서 놀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마기휼. 여기에 있나?”

안으로 들어온 라울은 바닥에 엎드려 자고 있는 마기휼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저런 모습으로 있을 것 같았다. 라울은 그쪽으로 걸어가 마기휼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마기휼. 여기서 자면 안 된다.”

말을 하며 옆으로 시선을 옮기자 아기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쪽으로 손이 움직인다. 라울은 아기의 손을 잡았다. 기다렸다는 듯 잡아 오는 손길에 라울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걸렸다.

“으응―”

인상을 쓴 마기휼은 곧 하품을 했다. 입이 찢어져라 크게 벌려 대다가 눈을 가늘게 뜬다. 몽롱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은 라울에게로 손을 뻗었다.

“뭐야? 벌써 왔어? 요새도 들렀다가 오는 거 아니었어?”

“금방 돌아왔다. 그리고 이름도 지어왔어.”

“이름?”

잠이 깨버렸다.

아기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되었지만 아직 이름이 없었다. 이름을 정하기 위해서는 나라에 출생신고를 하고 이름을 등록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게다가 안제크가는 대대로 이름을 정해주는 집안이 있다 들어서 그쪽은 라울에게 맡겼다. 이름이 나오면 아이의 출생 신고도 하기로 했던 것이다.

드디어 이름이 나온 건가 싶었던 마기휼은 당장 몸을 일으켰다.

“카이란, 이라는 이름이야.”

앞으로 내밀어지는 종이를 받아들고 이름을 확인했다.

카이란. 나쁘진 않았다. 그런데 도도한 것 같기도 하고, 팔자가 세질 것 같기도 했다. 마기휼은 걱정스레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세 보이지 않아? 거기다 너하고 나하고 전혀 접점이 없는 것 같은 이름이야.”

중얼거린 마기휼은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들었다.

으음- 하는 소리를 내던 마기휼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좀 도도한 아이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래서 자신이 뭔가를 실수하거나 잘못을 하면 당장 큰 소리를 낼 것 같았다.

상상해봤다. 조금 더 자란 카이란이 팔짱을 끼며 ‘아빠. 그러면 안 돼.’라고 말을 하는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아, 꽤나 좋을지도.

손을 마주 잡은 채로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짓는 마기휼을 바라보던 라울이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춘다. 부드러운 감촉에 마기휼은 눈동자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왠지 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기휼은 은근슬쩍 라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에 진통 때문에 못 했지?”

마을의 축제에 참여를 하는 도중에 일이 생겨서 그걸 하지 못했다. 그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그럭저럭 괜찮지 않을까. 마기휼은 라울의 어깨에 손을 대고 그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라울은 마기휼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막 입술이 닿으려던 찰나 문이 열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차를 가지고 왔는데…….”

고개를 든 안나는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얼굴이 근접하게 붙은 상태로 있는 두 사람을 확인한 안나는 차분히 물었다.

“지금 두 분 무엇을 하시는 거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대답을 한 것은 마기휼로, 잽싸게 라울에게서 떨어졌다. 라울도 옆으로 물러나 아닌 척을 하고 있었다.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안나의 눈이 점점 더 가늘게 떠졌다.

“두 분. 아기가 보는 앞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셨던 거지요?”

“정말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니까요. 이상하네.”

중얼거린 마기휼은 아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안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창가 쪽으로 가버리는 걸 확인한 후, 라울도 몸을 일으켜 근처에 있던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책을 구경하는 모습이 어설펐다.

서로 다른 쪽에 서서 아닌 척을 해 대고 있었지만 그런다고 모를 안나가 아니었다. 쟁반을 든 채로 방으로 들어온 안나는 한숨을 쉬며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러지 마세요. 아기는 모르는 것 같아도 다 알고 있어요. 그런 건 안 보이는 곳에서 해주세요. 두 분이 남자끼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일반 부부들도 그런 건 주의해줘야 하는 법이에요.”

“그냥 뽀뽀만 한 거라니까요. 그 정도는 보여도 되잖아요?”

순간 안나는 마기휼을 찌릿- 하고 노려봤다.

“라울 님의 손이 마기휼 님의 엉덩이를 붙잡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흠흠!”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듯 라울은 헛기침을 했다. 안나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쟁반 위에 있던 음식과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마기휼은 아기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그리고 뒤를 힐긋 쳐다봤다. 라울도 책을 든 채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곤란한 얼굴을 하며 재차 고개를 돌렸다.

다음에는 주의를 해야겠군.

서로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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