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창가 앞에 선 사내는 각 잡힌 군복을 입은 굉장한 미남이었다. 긴 금발을 하나로 단정히 묶어 내린 그의 눈동자는 선명한 녹색이었다. 마치 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예술 작품 같았다. 정말로 살아 움직이고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그냥 그림이 아닐까? 그게 아니면 꿈을 꾸는 게 아닐까.
벽에 붙어선 레이라는 라울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라울의 곁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검은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은 사내는 껄렁거리는 폼으로 다가와 라울의 곁에 섰다. 눈부신 라울에 비하면 평범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건강하게 그을린 갈색 피부와 잘 웃는 입매, 그리고 가늘게 휘어진 보랏빛 눈동자가 매력적이었다. 키가 크지만 호리호리하게 잘빠진 몸매가 인상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쉽사리 접근을 하지 못하는 라울의 옆에 서선 그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린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더니 크게 웃었다. 불편한 모습은 조금도 없었다. 굉장히 친한 사이로 보였다. 그리고 라울이 마기휼을 바라보는 눈빛도 심상치 않았다.
“레이라?”
나름 잘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마기휼이 부르자 정말 놀랐다. 움찔하고 크게 몸을 떨며 고개를 드는 레이라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숨을 죽인 채로 가만히 있으려니 마기휼이 이리 오라는 듯 손짓을 한다. 그 옆에 선 라울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사내였다. 남자에게 아름답다는 표현을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는 아름다웠다.
그냥 다른 곳으로 가버릴까 싶었지만 마기휼이 부르는 거였다. 무시할 수 없었다. 어찌하나 싶어 미간 사이로 진한 주름을 만든 채로 있던 레이라는 주춤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느린 걸음을 옮겨 마기휼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런 곳에서 뭘 하고 있었어. 안 그래도 라울을 소개해주고 싶었는데 잘됐네. 레이라, 이 사람은 라울 안제크라고 해. 노르디아에서는 정말 유명한 미남자지. 더군다나 안베르 요새를 담당하는 데다 서른도 안 된 주제에 벌써 대령이야. 소령인 큰오빠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는 남자란다.”
넉살을 잘 떠는 마기휼은 본인 자랑하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모르겠지만 동생 앞에서는 폼 잡고 싶어해서 지금까지 자기보다 잘난 사람에 대한 말은 거의 한 적 없었다. 그런데 지금 마기휼은 풀어진 얼굴로 라울 자랑을 해 대고 있었다. 그 얼굴로 숨겨지지 않는 자부심이 드러난다.
왜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싶으면서도 레이라는 순순히 라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레이라라고 합니다.”
“나는 라울이다. 귀여운 꼬마 숙녀와 만나게 되어 기쁘군.”
예전에 그가 마기휼과 함께 숲속의 오두막에 함께 있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레이라는 들뜬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저야말로 멋진 분과 인사를 하게 되어 기쁩니다.”
치마 자락을 붙잡고 뒤로 한 발을 빼며 인사를 하는 폼이 제법이었다. 언제 이런 인사를 배웠나 싶어서 레이라가 기특하기만 했던 마기휼은 감탄을 했다.
“레이라 굉장하다. 정말 어른처럼 말을 하네.”
“큰오빠만 날 어린애로 알고 있는 거야.”
웅얼거리면서 아랫입술이 살짝 튀어나온다. 애가 투정을 부리는 그 모습이 또 귀여웠다. 마기휼은 레이라를 가리키며 라울을 쳐다봤다.
“내 동생 귀엽지?”
“그래. 영리하고 여성스럽군. 멋진 여성으로 자랄 거야.”
“그렇지? 그렇지? 내 동생이니까 그게 당연한 거지.”
헤벌쭉하고 얼굴이 풀어진다. 칭찬의 말을 하려면 이쪽을 보고 해야지 왜 라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지 모르겠다. 마치 이 공간 안에 그만이 있다는 듯, 그쪽만 집중해서 바라보는 모습에 레이라의 입술이 조금 더 나왔다.
“큰오빠. 바보.”
“응? 레이라 뭐라고 했어?”
“나 갈래.”
웅얼거리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그쪽을 쳐다보는데 레이라는 당장 달려가버렸다.
뛰어가버리는 폼이 마치 화가 난 것 같다. 이쪽이 딱히 잘못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그러나 싶었다. 벌써 사춘기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려니 배로 뭔가가 닿았다. 뭔가 싶어 눈을 내리뜨자 라울이 이쪽 배에 한 손을 대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배를 누른 채로 바라보는 얼굴이 진지하다. 그 얼굴과 태도에 마기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다고 뭐가 느껴져?”
라울은 그제야 손을 떼며 변명을 하듯 말했다.
“미안하다.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가는군.”
“만져보고 싶어? 하지만 아직 티는 안 나.”
그래도 몸 상태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건 느껴졌다. 최근 들어 지나치게 많이 먹고 자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도 몸이 찌뿌둥하고 허리 아래는 얼얼했지만 일어난 건 순전히 먹기 위해서였다. 야채 샐러드가 굉장히 먹고 싶다. 달콤한 소스로 버무린 거라면 한 통도 거뜬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양팔을 위로 들며 기지개를 켜듯 하는 모습에 라울이 물었다.
“운동은 하나?”
“아니. 그런 거 안 해. 나 원래 게으른 거 알잖아.”
“그런 것치고는 운동신경은 좋은 편이고 말이야.”
“그럼. 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완전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야.”
주먹을 쥔 마기휼은 앞으로 훅을 날리는 시범을 보였다. 장난기가 한가득인 그 모습에 라울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진다. 그런 라울을 보고 있으면 마기휼도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둘이서 있는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들뜨고 기분이 좋았다. 실없는 말이라도 좋으니 하고 싶었다. 물론 이쪽이 날린 멘트가 어이가 없어 라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큰도련님.”
부름에 라울과 마기휼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라울을 마주 보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집사는 마기휼 쪽으로 향한 채로 말을 했다.
“음식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빠르네.”
내 야채 샐러드 맛있게 먹을 수 있겠다.
마기휼은 기분이 좋은 듯 양손을 마주 잡으며 당장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마기휼을 뒤를 라울이 쫓았다.
평소보다 훨씬 더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준비할 시간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음식도 그렇고 장식도 그렇고 그릇도 평상시에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집안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집사도 다 알면서 왜 이러나 싶었다. 마기휼은 집사를 흘겨봤다.
“너무하는 거 아니야?”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마기휼이 흘겨보는 시선의 의미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모르는 척 말을 하며 집사는 뒤로 한발 물러났다. 라울은 노르디아의 대귀족이었다. 그런 그에게 흠잡힐 일을 만들고 싶지 않겠지. 이 저택을 그럴싸하게 치장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지나쳤다. 맞은편에 앉은 가휼도 너무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고 말이다.
“많이 드십시오.”
음식을 권하는 얼굴이 경직되어 있다. 심지어 라울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시선은 바닥으로 향한 채로 있는 그 자신 없는 모습에 마기휼은 입 안이 썼다. 예전 라울에게 한 소리 들은 게 아직 가슴에 남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때 라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 모든 말이 가휼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이 어색한 분위기를 마냥 이어 갈 수는 없었다. 마기휼은 양손을 마주쳤다. 짝. 하고 울리는 소리가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을 느끼며 마기휼은 기분 좋게 웃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죽상을 하고 있으면 곤란하지. 맛있게 먹자고.”
“잘 먹겠어. 호화스러운 저녁이군.”
라울도 나름 이쪽에 맞춰주고 있었다. 그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재미있었다. 마기휼은 싱글벙글하며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가장 먹고 싶었던 샐러드를 찾았다. 하지만 암만 눈을 크게 떠도 샐러드가 보이지 않았다. 하나같이 폼을 잡은 것 같은 이상한 음식들뿐이었다.
마기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집사. 내 샐러드는?”
“큰도련님. 이런 자리에 샐러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기휼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어울리지 않는다니? 내가 주문한, 양상추와 각종 채소를 얇게 썰어서 달콤한 소스를 듬뿍 친 샐러드가 이 자리에 맞지 않아서 준비하지 않았다는 거야? 호화판 그릇이 아니라 동그랗고 큰 대접에 대충 섞어서 들고 오라는 게 틀렸던 거야? 순간적으로 집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마기휼은 벌떡 일어섰다.
한창 식사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다니. 큰 실례가 되는 일이었다.
집사는 당장 마기휼 쪽으로 다가갔다.
“큰도련님. 나중에 준비를 해 드릴 테니 지금은 이 음식들로―”
“난 지금 당장 샐러드가 먹고 싶은 거야.”
나오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딱딱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샐러드를 못 먹으면 죽을 것 같았다. 마기휼은 당장 밖으로 나갔다.
붙잡을 새도 없이 나가버리는 것에 집사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마기휼의 뒤를 쫓았다. 집사가 마기휼을 붙잡기 위해 나가고 혼자 남게 된 가휼의 얼굴이 굳어졌다. 긴장으로 경직된 그를 앞에 두고 라울은 차분하게 가운데 그릇에서 고기를 썰었다. 놀란 가휼이 몸을 일으켰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큰 그릇에 올려진 칼과 포크를 들어 가운데에 놓인 고기를 얇게 썰었다. 전에도 몇 번이나 한 적이 있는데 오늘따라 잘되지 않았다. 긴장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그래도 나름 괜찮게 고기를 썰어낼 수 있었던 가휼은 그걸 집어 라울의 그릇에 올렸다. 간격이 넓어 옮기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실수를 하진 않았다.
“드십시오.”
“고맙군.”
라울이 고기의 끝을 써는 걸 확인한 가휼은 본인의 그릇에도 고기를 한 덩이 썰어 넣고 자리에 앉았다. 나이프가 접시에 닿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수프 같은 건 먹지도 않는 건가. 그리 생각을 하면서 시선은 복잡하게 뒤엉킨다. 칙칙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가휼은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들었다.
“형님을 데리고 가실 겁니까.”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은 채로 라울은 가휼을 바라봤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것에 눌리는 걸 느끼며 가휼은 재차 말을 이었다.
“이상한 의미로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형님은 뛰어난 분이시니 군에서도 요직에 있으셨겠지요. 곁에 두면 큰 도움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네 말대로 마기휼은 데리고 가고 싶다. 여러 가지 의미로 나는 그를 이곳에 두고 싶지 않아.”
라울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보다 더 강렬한 시선을 던졌다.
“너는 마기휼에게 왜 믿음을 주지 못하는 거냐. 그를 안심시켜줘야 마기휼이 날개를 펴고 날아갈 수 있다. 자유롭게 본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이다. 지금 이 저택과 너와 레나와 레이라라는 아이는 마기휼에게 족쇄일 뿐이야.”
“그건―”
“아닐지도 모르지. 마기휼은 가족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건 좋게 볼 때의 의미일 뿐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너희 모두가 마기휼에게 짐이야.”
가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당장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게 이렇게나 분한 일인 줄 미처 몰랐다. 가휼은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줬다.
“형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에도 물었던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이미 듣지 않았나.”
“당신과 있으면 형님이 위험해지실 것 같습니다.”
왕통이고 대귀족이었다. 거기다 안베르 요새에 있는 사람. 여왕과의 교류도 있고 얼마 전 군함과 함께 이리로 오지 않았던가. 그때 군함은 상당히 파손된 상태였다. 군함이 그렇게 될 정도라면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단 말인가. 평화스럽게만 보이는 하늘이지만 그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곳에 마기휼이 있으면서 다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가휼은 라울을 바라봤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형님은 안전하신 겁니까.”
“다른 건 몰라도 마기휼은 지켜줄 수 있다.”
사랑하기 때문인가.
마기휼과 라울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이인지 알 수는 없어도, 두 사람의 관계는 묘했다. 둘이 마주하고 있으면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때문에 낮에도 레이라를 데리고 급히 자리를 피했다.
본인의 잘못이 없다면 당장 마기휼에게 가서 라울과의 관계를 물어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리할 수 없었다. 가휼은 지친 듯 눈을 내리떴다.
“형님께서는 저보다는 당신의 곁에 있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군요.”
“당연한 소리 하지 마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오는 말에 포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가휼은 잠시 화가 난 표정이었지만, 서서히 몸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진심으로 화가 나고 분노를 하더라도 그걸 표현해서는 안 되었다. 아직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 과거에 있었던, 어쩌면 지금도 남아 있는 어리석은 감정이 모든 자격을 박탈해 갔다. 그리고 그 자격을 되찾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거다. 때문에 라울의 앞에 있으면 스스로가 한없이 작게만 여겨진다. 너무도 작아져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라며, 가휼은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
빨래를 들고 밖으로 나오던 하녀는 맞은편에서 오던 마기휼을 확인하고는 움찔했다. 샐러드가 든 통을 끌어안은 마기휼은 행복에 젖은 얼굴이었다. 신이 난 얼굴로 서둘러 지나치는 마기휼을 빤히 보던 하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마기휼은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는 걸 상기한 하녀는 걸음을 서둘렀다.
원하는 걸 손에 넣은 마기휼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이 기분으로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방으로 가서 혼자서 충분히 맛을 음미하면서 먹을 거다. 누가 빼앗아 먹지는 않겠지만 혼자 있고 싶었다. 딱딱한 의자에 앉으면 엉덩이도 아프니 말이다. 라울이 집요하게 굴지 않고 그냥 쌈박하게 한 번만 넣고 끝내줘서 좋았던 것 같다며 마기휼은 생글거리고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런 거 싫다니까!”
날카로운 목소리에 마기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레이라의 화난 목소리가 연속으로 들렸다. 레이라는 나이는 어리지만 순한 편이어서 보통 때에는 저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무슨 일인가 싶었던 마기휼은 살금살금 이동했다.
조용히 움직여서 문이 조금 열린 방 앞에 도착한 마기휼은 안쪽으로 고개를 붙였다. 문틈으로 안에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레이라와 레나였다.
레이라는 화가 난 것 같았고 레나는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엄마는 아이들에게 약한 모양이었다. 급기야 무릎을 꿇고 앉아 레이라의 손을 붙잡았다. 뭐라고 말을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원래 남의 말 엿듣는 건 하면 안 되는 일이긴 했지만, 저 착한 레이라가 왜 저리 심통이 난 건지 궁금했다. 살금살금 걸어가 벽에 붙은 마기휼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큰오빠는 유능한 군인이니까.”
“그런 말 하지 말고 엄마가 말해서 큰오빠가 그냥 이곳에 있게 해 달란 말이야.”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니. 라울이라는 사람은 굉장히 유명한 분이야. 나라를 위해서 노력하는 군인이시지. 그런 라울 님의 곁에서 일한다는 건 영예로운 일이란다. 큰오빠를 생각하면 가지 못하게 막을 게 아니라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착한 아이란다.”
“그러면 레이라는 착한 아이 안 할 거야.”
“왜 그런 말을 하니. 엄마 속상하게.”
“……큰오빠가 가버리면 다시 여기가 이상해져버릴 거야.”
레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가 아닌 다른 쪽을 바라보며 레이라는 웅얼거렸다.
“다시 이상해져버릴 거야. 레이라는 그런 거 싫어.”
입을 앙다문 레이라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리를 죽인 채로 숨죽여 우는 모습은 도저히 6살 짜리 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많은 것을 마음에 품고 있는 듯한 그 모습에 레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있던 그녀는 레이라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투정을 부리던 레이라였지만 레나의 그런 모습에 마냥 화가 난 얼굴로 있을 수 없었다. 안색을 굳힌 레이라는 레나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엄마. 왜 그래? 울어?”
“아니. 안 울어.”
“그러면 얼굴 들어. 내가 보고 확인할 거야.”
작은 손이 머리를 건드렸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이 흐트러졌지만 상관치 않고 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 울지 않았다. 그것에 레이라가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엄마는 안 울어. 레이라가 있으니까.”
레나는 웃었다. 하지만 그 웃는 얼굴이 우울하게만 보였다. 시무룩한 채로 있는 레이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나는 레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저택이 이상하게 되는 게 걱정인 거로구나.”
“이상하게 되는 건 정말 싫단 말이야.”
“앞으로는 안 그럴 거야.”
레나의 우울함이 전염되듯 시무룩하게 있던 레이라는 눈을 반짝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며 당장 레나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정말?”
“정말이야. 엄마가 노력하면 돼. 노력하면 괜찮아질 거야. 레이라가 마음에 들 만한 집이 될 수 있도록 할게. 그러니까 큰오빠는 보내주자.”
레이라는 코를 훌쩍였다. 낮에 봤던 라울을 떠올리며 괜히 싫은 듯 표정을 찡그렸다.
“역시나 그 사람이 큰오빠를 데리고 가려는 거로구나.”
“큰오빠가 가서 훌륭한 일을 하게 해줘야 하는 거야. 붙잡아 두면 안 돼. 여기에 있으면 망가질 거야. 엄마는 그렇게 된 사람을 알고 있어. 그러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힘들어진단다.”
레이라는 눈을 깜박였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레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갈 사람은 가고 남아 있을 사람은 남아 있어야 하는 거겠지.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하는 거야.”
많은 의미가 포함된 중얼거림이었다. 어린 레이라는 그것들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레나가 너무도 슬픈 얼굴을 하는 게 싫었다. 안색을 굳힌 채로 있던 레이라는 당장 레나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눈을 질끈 감고는 레나의 머리에 뺨을 비볐다. 울먹거렸다.
“알았어. 큰오빠가 가도 붙잡지 않을게. 하지만 레이라는 큰오빠가 정말 좋단 말이야.”
입을 앙다문 레이라는 필사적으로 울음을 죽이려 했다.
그 모습에 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큰오빠가 레이라의 첫사랑이 된 모양이로구나.”
“몰라. 난 그런 거 몰라. 하지만 큰오빠가 가버리면 싫어.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파. 엄마가 떠났던 것처럼.”
레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레이라는 훌쩍거렸다. 레나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레이라의 몸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모녀의 모습을 살피던 마기휼은 벽에 등을 기대었다.
레이라가 커갈수록 생각이 많아지고 말도 더 능숙하게 될 거다. 레나는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전형적인 부모의 모습을 갖추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그녀가 알아서 조절하는 게 가능할 거다. 그리고 그건 가휼도 마찬가지겠지.
한때의 바람이 될 것인가. 하지만 그 바람은 낙인과도 같았다. 매번, 매 순간, 계기가 있을 때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괴로워할 거다.
이제야 깨달았다.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는 필요 없다는 걸 말이다. 여기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오히려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눈치를 보게 될 것이고 개선을 시도할 수 없게끔 될 터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도 되는 건가. 마기휼답게 말이다.
마기휼은 그릇에서 얇게 썬 당근을 집어 입에 넣었다.
상의를 걸치고 그 위에 허리띠를 맸다. 구두 상태를 체크하고 장갑을 끼고 난 후, 테이블에 올려 둔 군모를 썼다. 군모의 각도를 바로 잡으며 거울 속을 살폈다. 검은 군복. 노르디아 중앙군을 알리는 문양이 왼쪽 가슴에 달려 있었다. 반짝거리는 휘장을 확인한 마기휼은 턱을 슬쩍 들었다.
“멋있군.”
역시나 난 잘난 놈이야.
거울 속의 자신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며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나 어때?”
침대에 앉아 있던 라울은 마기휼과 눈이 마주치자 순순히 대답을 했다.
“잘 어울리는군.”
“당연하지. 난 팔다리가 길어서 뭘 입어도 멋스러움 좔좔이라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다고 노르디아 최고의 미남 라울의 앞에서 할 말은 아니겠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내가 만족스러운데.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본인의 모습을 앞뒤로 살피더니 활짝 웃고 만다. 만족스러워하는 마기휼을 지켜보던 라울은 몸을 일으켰다.
“배 시간이다. 지금 이동을 해야 할 거야.”
“그래. 알고 있어.”
대답을 하는 순간 알게 모르게 입가로 씁쓸함이 퍼진다. 이미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발길을 옮기려 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갑자기 사라진다 해서 무슨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다. 없으면 없는 대로 굴러가는 게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거였다.
라울의 손가락이 목덜미에 닿았다. 아래로 내려가서는 옷깃을 바로 세우는 것에 마기휼은 그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라울은 “결심은 선 건가.”라고 물었다. 물음에 마기휼은 눈을 깜박였다.
라울이 함께 가자는 말을 했을 때 마기휼은 조금 더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저녁에 바로 ‘너와 가겠어.’라고 말을 했던 것이다. 라울이 생각했던 것보다 대답이 빨랐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의외라는 듯한 얼굴을 하면서도 더 뭐라 하지 않았다. 빨리 대답을 하는 게 그에게 있어 더 득이 되는 일일 테니.
한번쯤 자신이 빠진 상태에서 그들끼리 지지고 볶고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가면 좋을 일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중얼거림에 라울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는다. 라울이 골치 아픈 만큼, 이쪽도 나름대로 생각이 많았다. 편하게만 살 순 없는 거라며 그가 전하고 싶은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역시나 다정한 녀석. 어쩌면 자신한테만 그럴지도 몰랐지만, 당장 위안을 받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라울의 가슴을 어깨로 가볍게 쳤다.
짐은 많이 가지고 갈 필요가 없었다. 안베르로 가면 갈아입을 옷이라 해 봤자 군복이 다였고, 원래 바리바리 싸 들고 가는 타입이 아니었다. 정착을 하면 거기서 얻는 게 살림의 전부였다.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될 거다.
바깥으로 나오자 모두가 배웅을 하기 위해서 앞마당에 모여 있었다. 가휼이나 레나, 그리고 레이라까지 있었다. 원래 이런 게 당연하긴 해도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던 마기휼은 뒷머리에 손을 대고는 고개를 꾸벅였다.
특유의 장난스러운 행동에도 다들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레이라는 침울함 그 자체였다. 레이라가 신경 쓰였지만 이쪽이 먼저 말을 걸 순 없었다. 조용히 그 앞을 지나쳐 마차 앞으로 갔다. 그러자 앞으로 다가온 레이라가 작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거 받아.”
“이게 뭐야?”
“샌드위치야. 가다가 배고프면 먹어.”
말을 하는 동안 레이라는 이쪽을 보려 하지 않았다. 미운 건 아니고 그저 서운한 것뿐일 거다. 내심으로는 가지 말라고 매달리고 싶은 걸 레나와 나눈 대화가 있으니 필사적으로 참는 거였다. 그것도 약발이 얼마나 들지 모르겠다. 레이라의 마음이 정리가 되었을 때 후다닥 떠나려고 서두른 것도 사실이다. 레이라가 막상 울며 매달리면 마음 아플 테니까.
마기휼은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고맙다. 레이라. 정말 기특하다.”
머리를 토닥이는 손길에 레이라는 고개를 들었다. 웃는 마기휼이 보였다. 새초롬한 얼굴을 하고 있던 레이라지만 그런 마기휼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표정이 누그러진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언제 올 거야?”
목소리도 울먹거린다. 위험한데. 정말 울 것 같다며 마기휼은 레나를 살짝 봤다. 사이가 서먹하긴 하지만 아이를 상대로 주고받는 사인은 정확한 법이었다. 레나는 레이라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레이라. 군인은 자유롭게 외출을 할 수 없어. 숙소도 정해져 있는 데다 외박도 정해진 날짜에밖에 이루어지지 않아. 그것도 일이 바쁘면 쓸 수 없는 거야.”
“그게 뭐야. 그런 건 싫어.”
레이라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마기휼이 당장 언제 나올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던 건 임신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배가 부르기 시작하면 바깥으로 다니긴 좀 그럴 것 같았다. 몇 개월째부터 배가 나오려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3, 4개월은 조심해야겠지. 배 부른 모습을 가휼이나 레나가 보면 곤란했다. 하지만 초반에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근시일 내에 다시 찾아올게.”
“정말이야?”
“물론이지. 큰오빠는 거짓말 안 해.”
“……거짓말은 안 해도 어른이니까 어떤 식으로 말이 바뀔지 모르는 거잖아.”
웅얼거리는 말에 마기휼이나 레나, 가휼의 안색이 변했다. 알게 모르게 서먹한 뭔가가 그들 사이에 감돌았다. 레이라는 영리한 아이라 구체적으로 날짜를 정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마기휼은 헛기침을 하고는 레이라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러면 딱 30일 지난 후에 올게. 상황이 좋아지면 더 일찍 올 수도 있어. 설령 못 오게 된다 해도 통신으로 연락을 취하거나 편지도 보낼 거야. 그러면 되지?”
레이라는 입을 악물었다. 눈을 깜박이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마기휼은 엄지로 그 눈물을 닦아 냈다. 마기휼이 하는 걸 지켜보던 레이라는 살짝 누그러진 얼굴이 되었다.
“편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써야 해.”
“그래. 꼭 그렇게 할게.”
“한 달 후에 꼭 와야 해?”
“꼭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거야.”
“……그러면 됐어.”
한결 누그러진 중얼거림에 가휼과 레나의 얼굴 위로 안도감이 서린다. 그건 마기휼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애가 집안의 폭군이라더니. 레이라가 거칠고 함부로 행동을 하는 건 아니지만 아이가 짓는 표정이나 행동에 하나하나에 이렇게까지 영향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며 마기휼은 허리를 세웠다. 기다렸다는 듯 라울이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이만 가자. 배 시간에 늦겠군.”
“아아, 그래.”
더는 여기서 시간을 끌면 안 되었다. 떠날 결심이 섰을 때 움직여야 했다. 마기휼은 당장 마차에 올라탔다. 라울이 그 뒤를 따르고 문이 닫혔다. 마차가 흔들릴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마기휼은 당장 천을 걷고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것은 가휼이었다. 떠나는 이쪽을 바라보는 그는 어린애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것들이 부담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어린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가 해결을 봐야 하는 일들이었다. 난 절대로 도움을 주지 않을 거야. 그리 스스로에게 말을 한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레이라와 눈이 마주쳤다. 움찔한 레이라는 당장 앞으로 달려 나왔다.
“오빠! 꼭 편지 써야 해! 꼭이야!”
“물론이지! 뛰지 마라! 넘어지겠다!”
넘어진다는 말에도 레이라는 더 열심히 달렸다. 결국 가휼이 중간에 안아 들어서 더는 달리지 않게 되었지만 마차가 멀어질 때까지도 열심히 양팔을 흔들어 댔다. 똑같이 손을 흔들던 마기휼은 철문을 지나 레이라가 더는 보이지 않게 되자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편하게 앉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잘한 결정인가 싶어 괜히 가슴이 답답해진다. 동시에 레이라가 정말 귀엽구나 싶었다. 그 아이 덕분에 보다 수월하게 집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아이가 앞으로 해낼 일들이 많을 터였다. 그 아이를 주축으로 레나나 가휼도 변하게 될 테고. 더는 나빠지면 안 되었다.
“역시 여자아이가 귀여워. 여자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어.”
“뭐?”
이런 말은 라울 그에게도 당황스러운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하는 말은 멈출 순 없었다.
“여자아이는 정말 사랑스러운 것 같아. 아이가 태어난다면 여자애가 좋을 것 같아.”
그 아이가 자라서 시집을 간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상한 놈팽이가 나타나 딸을 달라고 한다면 당장 이마에 총구멍을 만들지 않을까. 라울이라면 어떨까? 군함을 이륙하라 할지도 몰랐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었다. 태어나는 아이가 여자애일지, 남자애일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제대로나 태어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희미한 미소를 베어 무는 마기휼의 옆얼굴로 씁쓸한 뭔가가 전해졌다. 그걸 느낄 수 있었던 라울은 마기휼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그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마기휼은 목을 좌우로 까닥이다가 뒤로 고개를 젖혔다. 위를 쳐다보는 보랏빛 눈동자가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다.”
“그런 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리도 진지한 얼굴을 하는 거란 말인가. 그리 물으려던 찰나 갑자기 정색을 한 마기휼이 앞으로 몸을 내밀더니 라울을 빤히 바라봤다.
“나 살찐 것 같지 않아?”
“……뭐?”
“보라고. 이 뱃살을.”
마기휼은 아래 배를 붙잡았다. 억지로 잡아당기자 한 1센티 정도의 살이 잡히는 것 같았다. 2킬로 정도 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라울의 벗은 몸을 보고 달라졌다.
라울은 여전히 잘빠지고 근육질에 단단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앞으로 나이를 먹는다 해도 그는 그 체형을 유지하겠지. 그에 반해 자신은 곧 서른이 되는 데다가 배도 불러 오게 될 거다. 거기다 살까지 쪄버린다면―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살찌는 거 아니야? 턱도 두 겹이 되고 배는 삼 겹이 되고 허벅지가 완전 이렇게 돼서 뛸 때마다 살이 출렁거리는 거 아니냐고.”
마기휼은 굉장히 진지한 얼굴이었지만 라울은 그렇지 않았다. 마기휼이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는 살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입을 열었다.
“적당히 살집이 있는 것도 나름 괜찮은―”
“잘도 그러시겠다. 넌 뭘 해도 잘난 놈이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야.”
빈정거림에 라울은 당장 입을 다물었다. 팔짱을 낀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저택에서는 나왔으니 앞으로는 이차적인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일단 군인으로서 복직을 해 기반을 다져 놓을 거다. 그리고 체력 훈련을 할 거고, 임신과 육아에 대해서도 알아볼 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두를 거 없이 제대로 잘하고 싶었다. 난 원래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스스로 의지를 다지며 결연한 표정을 짓는 마기휼을 옆에서 바라보던 라울은 위로 든 팔을 내렸다. 그런 라울의 오른쪽 팔이 상당히 쓸쓸해 보였다.
“안녕. 마기휼.”
“…….”
상큼하게 인사를 건네는 라우젝을 보는 순간 마기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정말, 조금도 반갑지 않아.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본 라우젝이 키득거리고 웃었다.
“왜? 스트레스 받아서 하혈이라도 할 것 같아?”
“……그런 종류의 말들도 성추행의 범위에 들어간다는 걸 아십니까?”
“아니. 몰라.”
그러시겠지요.
마기휼은 입술을 씰룩였지만 라우젝 특유의 페이스에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라우젝의 모습을 위, 아래로 살펴봤다. 하얀색 제복. 노르디아 왕실군의 또 다른 의상이었다.
이걸 라우젝은 이제 당연한 듯 입게 된 건가.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성으로 들어가 볼 거야. 여왕 폐하와의 알현이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넘기려 했지만 알게 모르게 움찔하게 되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여왕이라.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보고 싶진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면 분명 이상한 기분이 들 거다. 괜히 배를 가린다거나 하는 거 아니야? 저도 모르게 ‘아이는 내가 키울 거다! 넘보지 마라!’ 같은 촌스러운 소리도 할 것 같았다.
“아이는 잘 자라고 있어?”
마기휼의 표정이 굳어졌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나오는 표정이었다. 마기휼은 라우젝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남의 일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으십니까.”
“태어나면 내 조카일 게 아니야. 당연히 관심이 많지.”
“관심 가지지 마십시오.”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된다니까.”
정말 화가 나는 사람이었다. 이쪽이 피하고 싶은 화제를 자꾸만 거론하니 예민한 반응이 나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이만 가 보겠습―”
“고마워.”
마기휼의 목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굉장히 기분이 나빠짐을 느끼며 마기휼은 당장 고개를 돌려 라우젝을 내려다봤다. ‘이 자식아. 이번에는 또 무슨 속셈이야? 나 놀라게 해서 애 떨어지게 할 셈이냐?’ 그리 따져 물으려 했던 마음은 미소를 짓는 라우젝을 확인하는 순간 사라졌다.
“아이를 안 지워서 정말 고맙다.”
음모가 있는 걸지도 몰라.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 건 그만큼 라우젝이 신뢰를 주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기에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사람을 안심하게 해 놓고는 뒤통수치는 거 아니야.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기휼의 얼굴로 경계심이 가득 서렸다. 그걸 본 라우젝이 웃었다.
“역시나 재미있다니까. 건드린 보람이 있어.”
뭐? 그러면 지금까지 순전히 이쪽 반응이 재미있어서 건드려봤던 거였어?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마기휼은 손을 움켜쥐었다. 당장 강펀치를 날리려는데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었다.
“마기휼. 이리로 와라.”
이리로 손을 뻗는 라울은 굳은 얼굴이었다.
이제야 군인하고 대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라우젝이 말을 걸 때에는 본인 일만 하다가 다 끝나니까 이제서 저런 얼굴인 거냐. 그래 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다면서 입술을 비죽인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라울에게 가기 전에 마무리로 라우젝에게 경고를 할 셈이었다. 앞으로 다시금 이 저택에서 머물 텐데 그동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라우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 어디 갔어?”
그 짧은 순간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야?
당황한 마기휼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바깥쪽에 있던 마차에 유유히 올라타는 모습을 보곤 당장 이를 갈았다.
“저 자식, 진짜 사람 열 받게 만드네.”
“무슨 일인데.”
물으면서 마기휼이 쳐다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차의 문이 닫히긴 했으나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모르진 않았다.
“그가 이상한 말을 한 건가.”
“그런 게 한두 번이야?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눈앞에 딱 나타날 줄은 몰랐지.”
“조심해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진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멋쩍어졌다. 내가 연약한 여자였다면 당장 라울의 품에 몸을 날리며 ‘자기가 날 보호해주셔야 해요~.’ 같은 닭살 멘트를 날렸겠지만, 일단 이 몸은 남자였다. 군인이고 마기휼이었다. 웬만한 일로는 징징거리지 않는다. 마기휼은 주먹으로 라울의 가슴을 툭 쳤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내 몸 하나쯤은 지킬 수 있어.”
“그렇겠지. 레드존에서도 인질로 끌려가―”
“그 말을 왜 하는 거야!”
그 엄청난 실수를! 마기휼은 당장 라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건 아이작의 능력을 깜박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놈의 장기가 세뇌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제 두 번 다시 넘어가지 않을 거라며 마기휼은 단호히 말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실수였어! 실수였다고!”
라울은 입을 누르는 마기휼의 손목을 잡아 떼어 냈다.
“그래. 그렇다고 해 두지.”
그렇다고 해 두지-라니. 그런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니까.
살짝 불만인 얼굴을 하는 마기휼이었으나 이내 말자는 생각이 들어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내 방은 어디야?”
“전에 사용하던 그 방이다.”
“그래? 그러면 먼저 올라간다.”
손을 흔든 마기휼은 당장 저택으로 달려갔다. 서두르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건지 모르겠다. 라울은 당장 마기휼의 뒤를 쫓았다.
단숨에 방에 도착한 마기휼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대로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청소가 되었을 뿐이지 모든 게 제 위치에 있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이 낯선 공간에 있음에도 묘할 정도로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 놀라웠다.
짧은 시간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이렇게나 정이 들었던 걸까. 마기휼은 안으로 들어와 침대 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부드러운 시트를 손으로 문지르며 뒤로 몸을 젖혔다. 푹신한 침대에 몸이 폭 감싸인다.
로노베에서 안베르로 오는 여정이 힘들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려니 굉장히 졸렸다. 이대로 푹 자고 싶었다.
몽롱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던 마기휼은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마기휼. 지금 여기에 있나?”
방 안으로 들어온 라울은 침대에 누워 있는 마기휼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침대 옆으로 다가간 라울은 마기휼의 옆에 앉아 내려다봤다.
“벌써 자는 건가. 아직 저녁이 아니야.”
타박을 하는 듯싶어도 나오는 목소리는 작았다. 애초에 마기휼을 깨울 생각은 없었다는 듯 말이다.
마기휼의 호흡이 점점 깊어졌다. 입이 살짝 벌어지고 그 사이로 색색거리는 숨이 토해져 나온다. 잠든 마기휼을 내려다보던 라울은 위에 있던 시트를 끌어 마기휼의 위에 덮었다. 푹신한 이불의 감촉에 마기휼의 미간이 꿈틀한다. 뭔가 싶었는지 옆으로 몸을 비트는 것에 라울이 마기휼의 가슴에 한 손을 올려 두어 번 토닥였다. 그러자 재차 호흡이 깊어진다.
평안하게 잠든 얼굴.
마기휼이 언제나 이 상태로 있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네가 있는 이 공간이 안전할 수 있도록 하겠어.”
그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타락해버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마기휼을 바라보는 라울의 눈빛이 어두운 빛으로 가라앉았다.
마기휼이 안베르 요새로 전입한다는 말에 군인 몇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레드존에서의 그와 활약상을 익히 알고 있었던 이들은 이미 이쪽 소속이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지금이라도 같은 소속이 되어 좋다는 분위기로 금방 변해버렸지만 말이다.
마기휼 특유의 넉살과 레드존 내에서 라울을 구해냈다는 소문은 이미 요새를 두 바퀴 반이나 돈 시점이었기 때문에 마기휼 그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 같이 군함을 타고 레드존으로 들어갔던 이들하고는 이미 절친이 되어버렸다.
“마기휼 소령님!”
입에 손을 대고 큰 소리로 부르자 요새의 성벽 중간 지점에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마기휼을 올려다보며 성벽 아래에 있던 군인들 모두가 손을 흔들었다.
“식사 시간입니다! 이만 내려오세요!”
“기다려봐! 이것 좀 마무리 짓고!”
그러니까 너희들 먼저 가 있으라는 손짓을 보낸 마기휼은 외벽 앞에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요새를 둘러싼 벽은 튼튼했지만 이렇게 간간이 엉성한 부분이 있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마기휼은 그럴 수 없었다.
외벽 아래에 깔린 전선을 확인하는 판이 좀 어긋나 있었다. 대충 넘어가도 되겠지만 거슬렸다. 그래서 잘 좀 맞춰보려 했는데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뚝- 하는 소라와 함께 판이 뜯어져 나갔다. 손바닥 하나만 한 것이 사라져버리자 그 아래에 다닥다닥 연결된 선이 흉물스럽게 드러났다.
이런 젠장. 애초에 손대지 말걸. 마기휼은 주변을 스윽 둘러보다가 뜯어진 판을 연결되어 있던 부위에 대고 살며시 눌렀다. 잘 안 붙어 있으려 했지만 억지로 힘을 주자 그럭저럭 달라붙게 되었다.
“밥이나 먹어야겠다.”
그리고 이걸 제대로 수리하는 건 밥을 먹고 난 후가 되어야 할 것 같다며 마기휼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오기가 무섭게 그 주변으로 군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마기휼이 있었던 곳을 올려다보며 궁금증을 드러냈다.
“뭘 하셨던 겁니까?”
“조금 거슬리는 게 있어서 손을 봤다가 더 망가뜨린 것 같아.”
“안베르 요새를 소중히 대해주세요. 망가뜨리면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 벌금 물기 전에 잽싸게 원상 복구해 놓을 테니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마기휼이었으나 다들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정말 제대로 고칠 수 있는 거야. 그리 보는 시선에는 일말의 장난스러움도 섞여 있었다. 마기휼은 모르는 척 다른 곳을 돌아보며 물었다.
“대령님은 아직 안 들어오신 건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요새 왕실로 들어가는 일이 잦기는 하더라고요. 오늘 오후에는 들어오신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대령님만 한 인재가 없으니 자주 찾는 게 당연한 일이지 않겠어? 그보다 그거 알아? 요즘 왕실이 들썩거린다는 거.”
“들썩거린다니?”
식당으로 이동하는 동안 군인들이 주고받는 말에 마기휼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라울 대령님이 왕실로 오는 시간에 맞춰 젊은 아가씨들이나 중년 부인들이 진을 치고 쫙 깔려 있다가, 지나가면 일부러 부채를 떨어뜨리거나 손수건을 던지거나 해서 난리도 아니래. 어쩔 때에는 가터벨트나 속옷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고 하더라고. 그뿐인 줄 알아? 돌아가는 길에는 일부러 마차가 고장 났다고 해서 대령님의 발목을 잡으려는 여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거야.”
“속옷까지 나오고 마차 고장을 들먹여? 대단한데?”
혀를 내두르자 뭘 모른다는 듯, 군인은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령님이시잖아. 여왕 폐하가 있으니 정실은 언감생심 넘볼 수 없어도 측실은 아니잖아. 혹시나 싶어서 불나방처럼 달라붙는 여자들이 수백 명이라고 하잖아.”
“수백 명이라니. 거짓말―”
“왜 거짓말이야. 노르디아는 물론이거니와 알센 치울스까지 이름이 알려졌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대령님의 그림이 고가에 팔린다잖아.”
“우와. 그게 정말이라면 엄청난 거잖아.”
“거짓말도, 농담도 아닌 진짜야. 지금 이 순간에도 대령님을 보기 위해 몰려든 마차가 왕실 문 앞으로 줄지어 있다니까?”
설명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양손으로 줄을 좍좍 만들자 다른 이들이 감탄을 토해 냈다. 엄청 대단하다는 듯 보는 눈빛에 어쩐지 우쭐해진 군인은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령님이 누구를 연모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상대는 분명 엄청난 행운아야.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아니고서야 어찌 대령님의 사랑을 얻을 수 있겠어.”
그러면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는 말이냐.
마기휼은 한쪽 입술 꼬리를 올렸다. 미묘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으나 근처에 있는 군인들은 미처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라울의 대단함에 대해서 나불댔다.
그래. 라울이 대단하기는 하지. 그런 놈 세상에 둘도 없었다. 그리고 그놈은 바로 내 거였다.
……내가 미쳤나. 지금 뭔 생각을 한 거야. 저도 모르게 한 생각에 기겁을 한 마기휼은 고개를 마구 저어 댔다. 어느덧 식당에 도착하게 되어 모두가 한 줄로 섰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그의 이상함을 깨닫지 못했다.
마기휼은 팔짱을 끼었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자. 이건 너답지 않은 일이야. 정신 차리라고. 넌 쿨한 남자란 말이야.
“뭐로 주문하실래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가 어느새 본인의 차례가 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뒤에 서 있던 이가 ‘뭘 하는 거야?’라며 흘겨보자 마기휼은 급히 주문을 넣었다.
“돼지고기 볶음라이스 곱빼기에, 햄버그 2개에, 샐러드 대자로 거기다 매콤한 스파게티 추가로!”
주문하는 대로 받아 적던 조리사는 의아한 얼굴이 되어 그를 바라봤다.
“여럿이서 먹을 겁니까?”
“저 혼자 먹을 겁니다.”
“……음식 남기면 벌 받아요.”
그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지금까지 음식을 남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양념까지 싹싹 핥아 먹어줄 거라며 자신만만한 마기휼이었지만, 조리사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장정 넷이 족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주문해서 남기려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음식이 잔뜩 남은 그릇을 들고 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라며 조리사는 주문서를 옆으로 넘겼다. 조금 기다리자 금방 음식이 나왔다. 대자 쟁반으로도 다 담을 수 없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음식을 나르는 것에 성공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마기휼의 앞으로 음식이 그득 쌓였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지나치게 많은 양의 음식을 보는 순간 다들 질린 얼굴이 되었다.
“그걸 정말 다 드실 겁니까?”
“아무리 배가 고프다 해도 적당한 선을 지키셔야지요. 정말로 음식 남기면 벌 받으십니다. 바깥에 굶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잘 먹겠습니다.”
주변에서 걱정을 하는 말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일단은 배가 고팠고 음식이 눈앞에 있으니 모조리 다 먹을 생각밖에 없었다.
눈을 번득인 마기휼은 당장 포크를 양손에 들고 햄버그를 썰어 크게 한입 넣었다. 순식간에 한 개를 다 먹어 치우고 두 개째는 잘게 썰어서 스파게티에 넣어서 살살 비볐다. 그리고 면과 섞어서 후르륵거리면서 먹었다. 간간이 돼지고기 볶음라이스를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산뜻한 맛일 것 같은데 정말은 매콤해서 입에 쫙쫙 달라붙었다. 속이 좀 더부룩한 것 같으면 샐러드도 비벼서 크게 한입 먹었다. 쩝쩝거리면서 엄청난 속도로 음식을 흡수하는 마기휼의 모습은 경악 그 자체였다. 호리호리한 저 몸 어디로 다 들어가는 걸까.
모두가 밥 먹기를 멈추고 벙찐 얼굴로 마기휼을 바라봤다. 그러는 동안 볶음라이스를 절반가량 먹으면서 샐러드를 해치우던 마기휼이 고개를 들었다.
“얼큰한 국물 요리가 땡기네.”
“차, 참으십시오!”
지금 먹는 것도 엄청난데 더 뭘 먹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 먹다가 배가 터져 죽을 거라며 다급히 말리는 군인과 달리 마기휼은 심드렁한 얼굴로 샐러드를 크게 찍어 입에 밀어 넣었다.
“얼큰한 걸로 속 풀고 싶단 말이야.”
“그러면 지금 드신 거 다 소화된 다음에 드십시오.”
“소화는 금방 된다니까.”
“그러지 마시고요. 그간 스트레스 받는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폭식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폭식이라니…….”
그건 또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지금 내가 폭식을 하는 것 같아? 아니야. 난 지금 충분히 음식 맛을 음미하면서 식사를 하는 거란 말이야. 하지만 이쪽을 보는 눈초리가 하나같이 이상했다.
마기휼은 아직 음식에 손도 대지 못하는 자들을 확인하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그만 먹도록 할까?”
“소령님의 건강을 생각해서 꼭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응시하는 눈빛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그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없었다. 남자가 임신을 했을 거라고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최근 지나치게 먹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마기휼은 샐러드를 조금씩 찍어 입으로 옮겼다. 그런 마기휼의 모습에 비로소 군인들은 안심을 하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젠장. 밥 먹을 때마다 이렇게 눈치 봐야 하는 거야. 그런 건 싫은데. 먹고 싶은 건 그냥 화통하게 흡입하는 게 좋은데.
그렇게 먹고도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 있었던 마기휼은 옆을 흘깃 쳐다봤다. 저기 매콤한 국물 요리를 들고 가는 자가 보였다.
아, 정말 먹고 싶다.
지나치는 음식을 바라보는 마기휼의 얼굴은 처량맞았다.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든 군인은 문 앞에 멈춰 서선 문을 두드렸다. 처음 한 번으로는 알지 못할 거다. 최근 라울은 일을 할 때 딱 그것에만 집중을 하고는 했다. 속으로 다섯을 센 군인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들었는지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렸다. 군인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대령님.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쪽에 둬라.”
쟁반을 내리는 장소는 늘 정해져 있었다. 군인은 눈을 내리뜬 채로 문에서 가까운 쪽에 놓인 테이블에 준비해 온 음식을 내려놨다. 막 준비한 음식은 따뜻한 김이 올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뭐든지 갓 준비했을 때 먹어야 하는 법이었다. 군인은 빈 쟁반을 든 채로 라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류가 잔뜩 깔린 책상 앞에 서 있는 라울이 보였다. 진지한 얼굴로 책상 위를 살피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같은 사내가 보기에도 혹할 정도인데 여자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서 왕실 앞으로 긴 줄을 서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조금 전에 막 왕실에서 돌아왔는데 바로 일을 시작하는 건가. 좀 쉬면서 해야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텐데 말이다. 군인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대령님. 쉬시면서 하시지요.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괜찮다. 이만 나가 봐라.”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주십시오.”
“마기휼 소령은 지금 어디에 있지?”
나가 보라 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바로 질문을 던지는 건가. 군인은 빠르게 마기휼의 얼굴을 기억해내고 그를 어디서 봤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냈다.
점심시간 때에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 치우던 그를 떠올렸다.
“점심 때에 엄청나게 드시고는 소화를 시켜야겠다며 연병장으로 가셨습니다.”
“엄청나게 먹었다고?”
“그렇습니다. 적어도 3, 4명은 먹을 수 있는 양을 혼자서 다 드시더군요.”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말이다. 체격이 좋은 이가 그리 먹어도 놀라운데 마기휼처럼 날씬한 사내가 그것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혀를 내두르는 군인은 라울의 얼굴을 보고는 흠칫했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방금 라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가 웃었다. 라울과 함께 일을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가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방금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착시인가. 환각인가. 방금 그건 도대체 뭐였지? 혼란스러워 멍하니 있는 동안 라울은 예의 무표정을 한 채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
“나가 봐라.”
“실례하겠습니다.”
몸을 돌리며 군인은 아무래도 최근 몸이 안 좋아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한 환각을 보다니. 그간 라울의 곁에 있으면서 긴장을 한 것이 좋지 않았다면서 그는 굳은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군인이 나가고 혼자 남게 된 라울은 서류를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중요한 내용이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내 그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또 잔뜩 먹었겠군.”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도 속이 허해서 더 먹고 싶은 걸 참았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중에 저택으로 돌아가서 이쪽을 붙잡고 잔뜩 해 댈 말들도 예상할 수 있었던 라울은 재차 웃었다.
“왜 내가 먹는 것에 눈치를 봐야 하느냔 말이야.”
포크를 들고 정면을 쳐다보는 마기휼은 진지했다. 당장 어떤 호응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때문에 가만히 있던 라울은 순순히 대꾸해줬다.
“먹는 데 간섭을 하는 게 가장 서운한 일이라고 하던데.”
라울의 말에 마기휼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먹는 데 간섭하면 정말 섭섭해. 더군다나 나는 더 먹고 싶었단 말이야.”
말을 하는 동안에도 마기휼은 부지런히 음식을 입으로 옮겼다. 상상을 초월하는 스피드로 순식간에 음식을 흡수해버린 마기휼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요즘에는 왜 이렇게 입맛이 당기는지 모르겠어.”
“임신을 했으니 뭐든지 잘 먹는 게 좋다.”
“……그런가.”
대답을 한 마기휼의 미간 사이로 주름이 생겨났다.
조금 전까지 맛있게 잘 먹어 놓고 왜 또 저런 얼굴인지 모르겠다. 저러고 있다가 종종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마기휼이었기 때문에 라울은 일단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잘 먹으면 좋은 거야. 몸이 그만큼의 영양분을 원하는 것이 이유일 테니까. 폭식 같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많이 누그러졌다. 그러면서 마기휼은 생선 살 바른 걸 수저로 모아 입에 넣었다.
생선 특유의 맛과 소스가 가미되어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맛있다. 수저를 문 마기휼의 얼굴이 행복감으로 젖어들었다. 그걸 확인한 라울은 말없이 생선 한 마리의 살을 발라내 옆에 있는 작은 접시에 옮겼다.
그가 왜 저런 일을 하는지 모르진 않았다.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보고 있으려니 금방 생선 한 마리를 발라낸 라울이 접시를 마기휼에게 내밀었다. 마기휼은 냅다 그걸 받아 앞에 내려놓고 야금야금 먹었다.
생선 살을 발라내는 라울이나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먹는 마기휼. 둘 다 이상했지만 정작 본인들은 아랑곳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문득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들자 바로 라울이 쳐다봤다. 이쪽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바로바로 반응을 보이는 게 재미있었다.
마기휼은 수저를 문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려워하지 말고 해도 된다.”
“그러면 하나만 물어볼까? 최근 왕실로 많이 들어가던데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 거야?”
“엔온에 관한 처리와 레드존 일을 마무리 짓고 있다.”
“그래? 그거 복잡하겠네.”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는지 듣지 않아도 그 두 단어가 주는 복잡함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라우젝도 요즘 왕실로 들어가는 것 같던데, 외부 활동을 하기로 한 거야?”
“레드존으로 군함을 이끌고 들어간 것으로 인해 그의 평판이 좋아졌어. 재차 그를 군인으로서 복직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게 좋은 일인가.”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좋은 일이 될 수 있었다. 저택에 있으면서 마주칠 빈도가 줄고, 라우젝이 다른 일을 하다 보면 그쪽에 집중하게 되어 이쪽을 덜 신경 쓰게 될 테니 말이다. 어쩌면 거의 마찰하는 일이 없어질지도. 그거 하나는 잘된 일이었다.
여러모로 괜찮을지도. 마기휼은 팔짱을 낀 채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맞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그쪽을 보는 것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실례합니다. 호그 의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곧 가겠다 전해라.”
“알겠습니다.”
라울은 마기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 라울이 발라준 생선 살을 다 먹어 가던 참이었다. 물을 마시며 마기휼은 의자를 뒤로 끌었다.
“나도 다 먹었어. 일어나자.”
“더 먹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아니야. 정말 배불러. 목구멍 바로 위까지 찼어.”
손가락으로 목 바로 위를 툭툭 건드리는 마기휼의 행동에 라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복도로 나왔다.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라울의 모습에 절로 시선이 간다. 하지만 식사 시간에도 시중은 필요 없다며 사람을 물리던 라울이었다. 보는 시선이 싫기 때문에 그리한 것일 거다. 그가 암만 아름답다고 해도 계속해서 흘겨보면 이 저택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될 게 뻔했다.
그들은 라울과 마기휼이 지나칠 때마다 고개를 숙이며 그들을 보지 않고 있다는 어필을 해야만 했다. 그래 봤자 두 사람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서로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호그가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라울이 문을 열고 마기휼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호그는 두 사람이 들어오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기휼 님.”
“오랜만입니다. 이번에 손주를 보셨다고요.”
앞으로 다가가며 묻는 말에 호그는 무안한 얼굴이 되었으나 그 아래로 숨겨지지 않는 기쁨이 드러났다.
“그렇습니다. 때문에 부르실 때에 바로 달려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경사가 있는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게 잘못한 거지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일단 웃는 얼굴로 인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기는 하는데 상당히 어색했다. 마기휼은 괜히 라울을 쳐다봤고, 그걸 확인한 호그가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실례하겠습니다.”
마기휼은 의자를 끌고 그곳에 엉덩이를 붙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는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간단하게만 할 겁니다.”
“그렇지요. 간단하게요. 네. 알았습니다.”
하나도 긴장하지 않았다는 어필을 하고 있지만 말하는 게 평소랑은 달랐다. 허리를 주욱 펴고 앉아 허벅지에 양손을 내리고 있는 폼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검사를 빨리 하고 가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을 내린 호그는 청진기를 꺼냈다.
“죄송합니다만, 옷을 올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요.”
고개를 끄덕인 마기휼은 겉옷을 올리고 그 안에 있는 셔츠를 잡아당겼다. 앉은 자세인 데다 껴입은 것도 많아서 빼내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본 라울이 옆으로 다가왔다.
“겉옷을 벗는 편이 낫지 않겠나?”
“그럴까? 그게 더 낫겠다.”
마기휼은 바로 겉옷을 벗었고 라울이 그걸 받아 들었다. 겉옷을 벗을 때 셔츠가 끌려 올라오자 바로 잡아주는 라울의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여러 번 그리해봤다는 듯 말이다. 그런 라울의 친절에 마기휼은 별말 없이 있다가 그가 물러나자 셔츠 아래를 잡고 위로 올렸다. 약간 통통하게 올라온 배가 보였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라울과 마기휼의 사이가 굉장히 좋아 보였다. 마치 신혼 분위기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본인이 한 생각이지만, 믿을 수가 없어 멍하니 있던 호그는 시선을 느끼고 눈을 내리떴다. 마기휼이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왜 검사를 안 하시는 겁니까?’라고 묻는 눈빛을 본 호그는 황급히 청진기를 귀에 꽂았다.
“죄송합니다. 바로 검사를 하겠습니다.”
호그는 진지한 얼굴로 배에 청진기를 댔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여자가 아닌 남자이니만큼 그도 이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입 다물고 진찰만 할 수가 없었던 호그는 먼저 말을 꺼냈다.
“배가 많이 부르셨습니다. 알기로는 아직 두 달 정도인 것 같은데―.”
“방금 저녁을 엄청 먹고 왔거든요.”
“아, 그래서 배가 이렇게 나온 겁니까.”
쌍둥이가 들어선 건가 싶었던 호그는 이내 무안한 얼굴이 되었다. 식사로 인해 배가 부른 걸 가지고 뭐라 말을 한 게 부끄럽게 여겨졌다. 예전 마기휼과 라울이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을 때, 마기휼은 임신에 대해 거론을 하는 걸 굉장히 껄끄러워했다. 그래서 이번에 오게 되었을 때, 내심 긴장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마기휼은 의외로 괜찮은 얼굴이었다. 임신에 대해서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고나 할까. 라울과의 관계가 친근하게 변한 게 그 원인이 된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면 이쪽도 긴장해서 괜한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침착하게 할 일만 하자며 호그는 집중한 얼굴이 되었다. 호그가 눈을 감고 진지한 얼굴이 되자 역으로 마기휼은 걱정스러워졌다.
문제는 없겠지. 마기휼은 옆을 흘겨봤다. 라울 또한 이쪽과 별반 다름이 없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걸 보자 상대적으로 안심하게 된다. 마기휼은 자리를 고쳐 잡았고, 동시에 호그가 청진기를 떼어 내며 눈을 떴다.
“아직은 이상을 감지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지만 건강한 것 같습니다.”
“성별을 알 수 있는 겁니까?”
묻는 마기휼의 얼굴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아이의 성별이 궁금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그게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마기휼이기 때문에 재미있었다. 정색을 하며 아이 같은 건 절대로 생길 리 없다고 말했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일 거다. 호그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런 건 신께서 결정하는 일입니다.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두 분을 닮았다면 아름다운 아이가 태어나지 않겠습니까?”
“저 말고 라울이라고 딱 집어서 말씀하시지요.”
“마기휼 님도 매력적이십니다. 두 분의 장점만 딱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러면 굶어 죽을 일은 없겠네요.”
자질구레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테니 말이다. 거기다 라울의 얼굴을 닮으면 세상 살기 참 편할 터였다. 남자라면 기둥서방이 될 수도 있고, 여자라면 귀부인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닌가. 라울의 가문은 워낙에 쟁쟁하니 그보다는 훨씬 더 대단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 되는 걸까.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려니 호그가 손을 뻗어 왔다.
“손을 주시겠습니까? 혈액을 채취해서 더 자세한 상태를 검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기휼이 순순히 손을 내밀자 호그가 날카로운 침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보게 되는 순간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긴장한 마기휼이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침이 손가락을 파고 들어갔고 금방 피 한 방울이 흘러나왔다. 그걸 병에 담았다. 호그의 손이 떨어지자 마기휼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의외로 따끔하네?”
“감염을 막기 위해서 끝에 약이 발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그러고 보니 끝이 좀 얼얼한 것 같다면서 입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별생각 없이 쪽쪽거리고 있으려니 라울이 마기휼의 손을 잡아 준비한 붕대를 감아줬다. 그리하는 게 당연하다는 얼굴이고 마기휼도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이 두 사람 언제 이렇게 사이가 좋아진 거지? 호그는 놀랍기만 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듭을 지으면서 “아프지 않나?”라고 묻는 말에 마기휼은 고개를 저었다.
무척 자연스럽게 응석을 부린다. 뭔가 뜨끈뜨끈한 것들이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런 두 사람을 마냥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던 의원은 짐을 챙기고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혈액 검사가 끝나면 경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진 않은데 짐짓 진지한 얼굴이었다. 호그는 이곳에 자신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는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문에 손을 댔다.
“가는 건가?”
이제야 이쪽을 기억이라도 했나.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호그는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혈액 검사 결과는 추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역시나 아까 이쪽이 한 말은 들리지 않았던 거로구나. 뭐, 두 사람만의 세계에 푹 빠진 것 같던데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공손히 인사를 한 호그는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답답함이나 염려 때문에 나오는 게 아니었다. 한숨의 의미는 안도감이었다. 정말 어찌 될까 싶은 두 사람이었는데 그럭저럭 괜찮은 듯싶었다. 임신한 것에 대해 마기휼이 난동을 부리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다행이지 않냐며 호그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속이 메스꺼웠다. 기분이 좋지 않고 가라앉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한참을 누워 있었다. 다른 때라면 잠에서 깨자마자 벌떡 일어났을 텐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잘못 일어나면 토할 것 같았다.
……역시나 전날에 너무 많이 먹은 걸까. 그래서 된통 체한 거 아니야? 이런 걸 가지고 아프다 하면 바보 취급을 당하겠지. 라우젝 같은 경우는 당장 손가락질을 하며 ‘식충이’라고 할 게 뻔했다. 그런 말을 듣느니 조금 참아보는 편이 나았다. 때문에 오만상을 찡그리면서도 마기휼은 점점 속이 안 좋아지는 걸 참고만 있었다.
다른 때라면 누구보다 먼저 식당을 찾아와야 할 마기휼이 오지 않고 있었다. 조금 더 기다리다 보면 오겠지 싶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안 좋은 예감이 드는 것을 느끼며 라울은 집사를 쳐다봤다.
“마기휼은 어떻게 된 거냐?”
“안 그래도 시종을 시켜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알아보라 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조금 더 기다려보면 될 거다. 라울은 눈을 내리떴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자 창밖으로 내리는 굵은 빗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서늘하기 때문일까. 유독 방 안이 어둡고 칙칙한 것 같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우중충하군.”
“커튼의 색을 밝은 것으로 바꿀까요?”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는 하지 마라.”
“네. 알겠습니다.”
이 저택에 오르베가 있었다면 비가 오는 걸 확인하자마자 당장 소파와 커튼의 색을 바꾸려 들었을 거다. 우중충한 건 싫어. 밝고 화사한 게 좋다고 늘상 말하던 그녀였으니 말이다. 오르베가 없어 할 일이 줄어들고 조용한 것은 좋았지만 분위기가 너무 칙칙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야 사람 사는 느낌이 드는 법이다.
하긴, 그 전에도 이 저택은 늘 조용하긴 했다.
“실례합니다.”
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 뒤를 따라와야 할 마기휼이 보이지 않자 집사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왜 너 혼자 오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바깥에서 암만 말씀을 드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직접 들어가 살펴봤나?”
“아닙니다. 방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당부를 들었기에―”
“답답하구나. 어찌 방에도 들어가 보지 않고 안 계신다 할 수 있는 거-”
근엄하게 하녀를 탓하던 집사는 몸을 툭 치는 느낌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라울이 빠르게 그 앞을 지나쳐갔다.
당장 문이 열리고 닫혔다. 순식간에 라울이 사라져버렸고 닫힌 문 너머로 다급한 발걸음 소리만 크게 들렸다. 그러는 동안 집사나 하녀는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했다.
한달음에 마기휼의 방에 도착을 한 라울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커튼을 올리지 않은 방 안은 어두웠다. 그리고 그런 방 오른편에 배치된 침대 위에 아직까지 누워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마기휼.”
이름을 부르며 당장 침대 안쪽에 한쪽 무릎을 올렸다. 보이는 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마기휼이었다. 인상을 쓴 채로 있다가 이쪽을 흘깃 보나 싶더니 안색이 더 굳어진다. 끙, 하고 마른침을 힘겹게 넘기는 모습에 라울의 안색 또한 굳어졌다.
“아픈가?”
“……몰라. 속이 메스꺼워.”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물으면서 라울은 마기휼의 어깨를 붙잡았다.
안아 올리려 했지만 마기휼은 당장 고개를 저었다.
“건드리지 마. 죽을 것 같아.”
오만상을 찡그리며 끙끙거리는 모습에 덩달아 라울의 안색도 변했다. 마기휼을 바라보나 싶던 라울은 기다려 보라는 말을 남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니. 어디로 가는 거야. 사람 아파 죽겠다는데. 마기휼은 떠지지 않는 눈동자를 움직여 나가는 라울을 살폈다. 의원을 부르라 하는 것 같았다. 아, 그렇군. 아예 가버리는 건 아니란 말이지?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거야. 정말 싫다.
인상을 쓴 마기휼은 계속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세상이 노랗게 보였다. 그러다가 하얗게 변한다 싶었을 때, 의식이 멀어졌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랐다. 아픈 것보다는 기절을 해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더 좋다면서 마기휼은 몸에 들어간 힘을 완전히 빼버렸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즐겁게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듣는 동안 점점 마음이 느슨해진다. 편안해지는 걸 느끼며 마기휼 또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파서 쫓기듯이 잠이 들었는데 지금은 굉장히 편안했다. 별로 아프지도 않는다면서 마기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 드디어 눈을 떴다.
“신부님~.”
“…….”
반가워하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여기저기라 해도 눈을 뜨자마자 이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다섯 아이들은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오르베의 꼬붕들이었다.
이놈들 다른 곳에 가 있었던 게 아니었나? 왜 여기서 알짱거리고들 있는 거야. 다른 때라면 놀랐겠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봐도 딱히 동요가 생기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같은 상태가 된 마기휼은 눈을 깜박였다.
“오르베도 왔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서 나왔다. 스스로도 ‘최악이네.’라는 생각을 할 정도인데 듣는 쪽은 오죽하겠는가. 아이들은 금방 진지해져선 말을 주고받았다.
“목소리가 듣기에 이상해.”
한 아이가 아래로 내려가 물이 든 잔을 들고 오는 걸 본 마기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꽤나 기특한 짓을 하네. 그리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이가 내민 잔을 받아 들고 물을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찬 느낌이 기분 좋아 한숨이 나왔다.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잔에 입을 대고 고개를 끄덕이는 마기휼은 아직 좀 멍한 얼굴이었다. 피로한 것 같기도 하고 졸린 것 같기도 했다.
“몸조리 잘하세요. 홑몸도 아니신데.”
“푸훕-!”
입에 머금고 있던 걸 뿜어냈다. 젖은 입술을 그대로 둔 채로 마기휼은 아이들을 쳐다봤다. 아이들은 마기휼이 뿜어낸 물을 급히 닦았다.
“왜 그러세요. 천천히 마시세요.”
태연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마기휼은 괜히 허탈해졌다.
알고 있는 거냐. 하긴 오르베지 않은가. 이런저런 정보를 다 주워듣고 있을 텐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할 거다. 하지만 소문을 내는 건 좋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자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이 그 아이를 좋아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싫어할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자 상당히 침울해진다.
그런가. 싫어하게 될까.
가슴이 답답해져서 짧은 한숨을 쉬었다.
“어디가 안 좋으세요?”
“아니. 괜찮아. 이거나 치워.”
마기휼이 건네는 잔을 치운 아이들은 재차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똑같은 얼굴이 나란히 앉아 싱글벙글인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사나워. 마기휼은 이마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그런데 너희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놀러 왔어요.”
“신부님이 보고 싶어서 몰래 들어온 거예요.”
“맞아요. 그 외에 수상한 의도는 한 개도 없어요.”
똑같은 얼굴, 똑같은 말을 하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던졌다. 지금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 이 말을 믿어줘. 그리 말하고픈 태도를 취하는 것에 마기휼은 피식- 하고 웃었다. 그러다가 냅다 앞에 있던 아이의 목에 팔을 감으며 팔꿈치로 정수리를 찍어 눌렀다.
“웃기지 말고 제대로 말 안 해?!”
“으아아악!”
아팠기 때문에 요란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마기휼의 선공에 놀란 아이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멍하니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마기휼에게 잡힌 아이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아예 한쪽 다리를 들어 허리에 감으면서 목을 감싼 팔에 더 힘을 줬다.
“얼른 불어. 이 저택에 오르베가 있는 거냐?”
“몰라요! 몰라! 으아앙!”
“운다고 봐줄 줄 알아? 너희들 21살이라며? 전에 라우젝이 한 말 다 들었거든?”
생긴 것처럼 어렸다면 이러는 게 미안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십 대라면 이런저런 일을 함에 있어 죄책감이 줄어든다. 예전에 당했던 일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팔에 더 힘이 들어간다.
죽자고 버둥거리던 아이는 이내 축 늘어졌다. 포기한 건가. 마기휼은 팔에서 살짝 힘을 풀었다. 그리고 그때 기습적으로 달려든 다른 아이가 마기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우왓?!”
찌르르- 하고 올라오는 이상한 느낌에 마기휼은 급히 몸을 틀었다. 그 틈을 타서 잡힌 아이를 끌고 내려간 아이 둘이 부축했다. 다른 두 아이가 마기휼을 견제하면서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문까지 달아난 아이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길게 혀를 내밀었다.
“너무해! 폭력쟁이!”
“정말 폭력적이야! 너무해!”
“신부님 그러면 포악한 아기가 태어날 거예요!”
“다음부터는 신부님 근처에 가지도 않을 거야!”
“메롱! 메롱!”
당한 게 억울했던지 메롱거릴 때에는 지나치게 혀가 길게 나왔다. 마기휼이 주먹을 쥐며 “이놈들이!”라고 소리를 치자 놀라 황급히 몸을 돌렸다. 달아나는 아이들을 확인한 마기휼은 혀를 차며 손바닥에 주먹을 두드렸다. 마음 같아서야 뒤를 쫓고 싶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아이가 이리 왔다는 건 오르베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녀가 다시금 저택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건가. 그걸 라울도 알고 있는 걸까. 하긴 허락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밖에 없기는 했다. 흐음- 하는 소리를 낸 마기휼은 침대 아래로 한쪽 발을 내렸다. 그리고 일어서선 몸 상태를 확인했다.
아플 때에는 손가락 하나 까닥이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은 괜찮았다. 속이 좀 허한 것 빼고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냥 좀 아프고 말 거였나. 이럴 줄 알았으면 오두방정 떨지 않는 건데. 아니다. 그때에는 진짜 아팠으니 어쩔 수 없었다면서 마기휼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옷장 앞으로 걸어가 가운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하품을 하면서 머리를 풀고 하나로 대충 땋아 내렸다. 그러면서 밖으로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조용했다. 왜 이런 거지. 라울 그 녀석 왕실로 들어간 건가.
“그러면 좀 섭섭한데…….”
죽을 정도로 아팠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끙끙 앓았다. 그런 자신을 두고 일하러 들어간 거라면 서운했다.
아니지. 여자도 아닌데 그런 것 가지고 일일이 트집을 잡을 순 없었다.
아니야. 서운해한들 뭐 어때. 난 놈의 아이까지 있는 몸이라고.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앞으로 배를 주욱 내밀었다. 이내 자신의 행동이나 사고 자체가 굉장히 유치하다는 걸 상기한 마기휼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말자.”
그래 말자. 혼자 있으면 정말 웃기지도 않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니까. 뒷머리를 긁적인 마기휼은 복도의 양옆을 살폈다. 그리고 터덜거리며 걸어갔다.
조금 전에 침대에 누워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할 정도로 아팠던 게 거짓말인 것 같았다. 이러면 곤란한데. 안색이라도 나빠야 아침에 그리 오두방정을 떤 것이 덜 민망해지잖아.
그보다 라울은 어디에 있지? 아침은 벌써 다 먹고 치웠겠지? 배고픈데.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앞으로 주욱 이어진 복도의 왼편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을 발견했다.
잘되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는데 밥 좀 준비해 달라 하면 될 듯싶었다. 잘 생각해 보면 지나치게 많이 먹어서 배가 아팠던 게 몸살이 된 게 아닐까 싶었다. 너무 많이 먹는 것도 안 좋은 거니까 적당히 준비를 해 달라 해야겠다며 마기휼은 한 손을 들었다.
“이봐. 거기.”
별생각 없이 상대를 불렀던 마기휼은 막상 상대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는 순간 움찔했다. 처음에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상대는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하얀 제복에 분위기가 남달랐다.
하나로 모아 위로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고정하는 핀에 박힌 보석은 다이아인 것 같고 귀에서 반짝이는 작은 귀걸이 또한 고급스러웠다. 그 외에도 얼굴이 장난 아니었다. 그냥 보통의 미인이 아니라, 얼굴 전체에서 빛이 났다. 흔히들 말하는 비범한 사람들이 풍기는 분위기를 뿌리며 여자는 마기휼을 바라봤다.
일단 부르긴 했는데 막상 눈이 마주치자 더 말을 할 수 없게끔 되었다. 한 손을 든 채로 굳어버린 마기휼을 바라보던 여자는 한쪽 입술 꼬리를 위로 올렸다.
“이리 가까이 와 보세요.”
“……아, 네.”
엉성하게 대답을 하며 마기휼은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완전 기가 죽어서 슬금슬금 걸어갔다. 여자에게 다가서긴 했지만 너무 가까이 붙진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선 채로 눈을 굴렸다.
누구지? 이런 여자가 이 저택에 어떻게 들어온 거지? 라울의 먼 친척인가.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좀 비슷한 것 같았다. 조심스레 여자를 흘깃거리고 보다가 그만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마기휼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었고, 여자 또한 환하게 웃었다.
“나를 하녀로 착각한 건가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아까 나를 부르는 태도는 분명 하녀를 대하는 투였습니다.”
존대를 하고 있으나 위압감이 느껴졌다.
확실하게 말하건대 절대로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다. 이런 여자가 평범하다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내들은 기를 제대로 펴지도 못할 거라며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순순히 인정을 했다.
“죄송합니다. 막 잠에서 깬 상태인지라 눈에 뵈는 게 없었습니다.”
“이 늦은 시간에 일어나다니. 늦잠인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파서 그랬습니다.”
실은 요새에 나가지 않는 날에는 늘 늦잠이었다. 요새에 나가서도 쉴 때에는 낮잠을 잤지만 그걸 솔직히 밝힐 필요가 없다는 게 마기휼의 생각이었다. 이쪽 말을 믿어 달라는 듯 눈을 크게 뜨자 여자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그렇습니다. 푹 자고 일어났더니 괜찮아졌습니다. 아무래도 꾀병이었던 모양입니다.”
“점심이 지난 시간입니다. 방금 일어났다면 배가 고프시겠습니다.”
“참을 만합니다. 거기다 최근 지나치게 많이 먹어서 양을 좀 줄여볼까도 싶었습니다.”
“얼마나 드신다고 양을 줄인다는 겁니까. 갑자기 식사량이 줄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가게 될 겁니다.”
“괜찮습니다. 정말 엄청나게 먹어 대니 거기서 좀 줄인다고 뭔 일이 생기지도 않을 겁니다.”
요즘 배도 나오는 것 같고 여러 가지를 보더라도 식사량 줄이는 건 필수였다. 이번에는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꼭 실행으로 옮겨 보이겠다며 파이팅을 다지는 마기휼을 바라보던 여자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재미있는 분이로군요. 이곳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마기휼은 재차 웃었다. 두 사람 사이로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애초에 본인의 처지만 아니었다면 ‘아가씨. 차나 한잔하실까요?’라는 느끼한 대사를 날려 봄 직한 상황이었다. 그 전에 일단 이 여성의 정체를 파악해야 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저, 말입니까.”
되묻는 여자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흥미로워하는 눈빛. 정말 날 몰라서 묻는 거냐. 그런 눈빛을 받은 마기휼은 웃었다. 달리 꿍꿍이가 느껴지지 않는 미소에 여자는 이내 본인의 이름을 밝혔다.
“가이나라고 해요.”
“좋은 이름이네요.”
“그뿐인가요?”
좋은 이름이라고 말을 해줬더니 그뿐이냐니. 달리 더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지? 그리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눈을 위로 들었다. 그러다가 한마디 생각해냈다.
“당신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십니다.”
“아하하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터져 나오는 통쾌한 웃음에 마기휼은 움찔했다.
한참 만에 웃음을 멈춘 그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 냈다.
“모처럼 기분이 좋네요. 아주 유쾌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인이 즐거워하시니 저도 좋네요.”
“미인이라. 그런 칭찬도 들어본 지 꽤나 오래된 것 같군요.”
아니. 그리도 칭찬에 인색한 자들과만 있었던 걸까. 나는 안 그러는데. 그리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더 환하게 웃었다. 가이나는 그런 마기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깊고 깊은 눈동자에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껄끄러웠다. 속이 다 읽히는 듯한 느낌인지라 피하고 싶어졌다. 그리 있으려니 가이나가 물어왔다.
“이름이 뭔가요.”
“마기휼이라고 합니다.”
이왕 미인에게 이름을 알려주는 것이니 산뜻한 미소를 함께 날렸다. 그 순간 가이나의 안색이 굳어졌다. 눈에 확 보일 정도로 경직되는 얼굴을 확인한 마기휼은 입가에 지어져 있던 미소를 바로 지워버렸다.
실수한 건가? 그저 이름을 알려준 것뿐인데?
당혹스러워 굳은 얼굴을 하는 동안 가이나는 중얼거렸다.
“당신이 마기휼이었던 거로군요.”
마치 전부터 이쪽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이내 그녀의 눈동자가 내려가 마기휼의 배에 닿았다. 굳은 눈동자를 확인한 마기휼은 반사적으로 손으로 배를 가렸다. 어쩐지 그런 식으로 행동을 취하게 된다. 왜 그럴까. 마기휼의 행동에 가이나는 재차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마기휼!”
가이나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마기휼은 당황해하며 그쪽을 쳐다봤고, 라울이 보였다. 잘됐다. 안 그래도 어색한 상황이었기에 나타난 라울이 반가웠다.
마기휼은 당장 그쪽으로 손을 들고 아는 척을 했지만 라울은 그런 그를 지나쳐 여자의 앞에 섰다. 그리곤 고개를 숙였다.
“여왕 폐하. 이런 곳에 계셨습니까?”
가이나는 그런 라울을 보지 않고 마기휼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마기휼은 마기휼대로 굳어선 이쪽을 바라보는 가이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었다. 여왕? 여왕이라고? 지금 내가 들은 게 환청이 아니라 이 여자가 정말 여왕이라는 거야? 마기휼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긴장된 얼굴을 하는 마기휼의 얼굴 옆으로 라울의 시선이 닿았다. 탓을 하거나 나무라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저 그는 경직된 태도를 취했다.
마기휼은 스스로를 차분히 진정시켰다. 이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말을 하며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가슴에 한 손을 대고 허리를 숙였다.
“노르디아의 여왕 폐하를 뵙습니다.”
라울과 가이나는 동시에 마기휼을 바라봤다. 인사를 하고 허리를 세운 마기휼은 가이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몰라보고 무례했던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바로 대답을 한 가이나 또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녀는 곁에 서 있는 라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라울. 지하에 내려가 있다더니 금방 올라오셨습니다.”
“폐하께서 오신 걸 듣고도 계속 그곳에 있을 순 없습니다.”
“제가 갑자기 찾아온 것이 달갑지 않은 듯싶습니다.”
“놀라긴 했으나 달갑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빈정거리는 일은 없었다. 여왕은 어디까지나 차분히 말을 하며 라울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다정했다. 희미한 미소를 짓는 얼굴에서 조금 전의 경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르베와는 달랐다. 음습한 구석이 없었다. 산뜻한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라울이 앞으로 팔을 뻗었다.
“안으로 가시지요. 제가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가이나는 마기휼을 재차 바라봤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아, 네. 그렇게 된다면 무한한 영광일 겁니다.”
인사를 할 때에는 태연하게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좀 버벅거렸다. 꼴사나운 모습일 거다. 조금 더 자연스럽게 구는 편이 좋았을 텐데. 그리 생각을 하며 안색을 굳히는 동안 라울과 가이나가 걸어 나갔다. 멀어지는 동안 라울이 이쪽을 흘깃 봤다. 그 순간 마기휼은 그러지 말라는 듯 손짓을 했다. 여왕 에스코트나 잘 해. 그런 사인을 보내자 라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느낌 탓일까. 아니면 그저 이쪽의 바람일까. 여왕과 함께 있는 라울이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으면 하는 건 말이다.
라울과 가이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기휼은 손을 내렸다. 괜히 기운이 빠지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여왕인가.”
“뭐가 말입니까?”
이제는 이런 식의 등장에 익숙했기에 놀라지도 않았다. 마음 같아서야 무시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그리하면 후환이 두려운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 성가시게 구는지 모르겠다며 안색을 굳힌 채로 마기휼은 뒤를 돌아봤다.
라우젝이 서 있었다.
“왜 이렇게 갑자기 다가오는 겁니까?”
“놀랐어? 그래서 애 떨어질 것 같아?”
“그걸 바라시는 겁니까?”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정도는 알 게 아닌가. 왜 매번 이런 식으로 이쪽 성질을 건드리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안 좋으니까 라우젝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로를 위해서 당분간 눈앞에 알짱거리지 말라는 말이라도 할까 싶었는데 라우젝의 눈빛이 묘했다. 또 무슨 말을 하려 저런 눈빛인지 모르겠다. 마기휼은 뒤로 고개를 물렸고, 동시에 라우젝이 입을 열었다.
“예상치 못했어.”
“뭐가 말입니까.”
“여왕과 마주치게 될 줄이야.”
“…….”
자신이 여왕과 마주치게 된 것이 예상치 못한 일이라는 거야? 그게 너에게 있어 놀라워해야 할 일이냐. 그럴 리가 없잖아. 이 상황을 즐기면 즐겼지 말이다. 말려들어 가면 감정 소모만 되었다. 마기휼은 다른 걸 물었다.
“여왕 폐하가 이런 식으로 이 저택에 방문한 게 처음이 아닌 겁니까?”
“전에도 종종 온 적이 있었지. 폐하와 나는 소꿉친구였으니까. 그리고 라울과는 거의 공식적인 커플이지. 그런 그녀가 여길 찾아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야.”
그러시겠지. 마기휼은 입술을 씰룩였다.
공식적인 커플이라. 그래.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겠지. 노르디아에서 모두가 아는 라울 대령과 여왕이다. 분명 축복받는 커플이 되겠지.
빈정거릴 요량으로 생각을 했는데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는다. 안색을 굳힌 채로 있으려니 라우젝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라울과 함께 있기로 마음을 먹은 거로군. 그렇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라울과 함께 극복할 자신이 있으니까 저택에 눌러앉아 있는 거잖아. 요새 쪽으로 이동을 하면서까지 말이야. 정말 우스워.”
우습다니. 이쪽도 나름 생각을 많이 하고 결정을 내린 거였다. 그리고 이건 나와 라울 두 사람의 문제였다. 라우젝 네가 끼어들면 곤란하다니까. 마기휼은 살짝 비꼬는 투로 말했다.
“남의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많이 쓰십니다. 그렇게나 시간이 많으십니까. 그러면 가서 오르베와 함께 있으시지요? 두 사람은 굉장히 잘 어울립니다만?”
“뒤틀려 있기 때문에 어울리는 거겠지.”
뒤틀려 있다는 표현,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은 성격이 나쁘니까 죽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의미에서 말을 한 거였다. 이쪽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꼬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굳이 입 아프게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이쯤에서 대화를 중단하자며 마기휼은 손을 들었다. 그만하고 서로 갈 길을 가자는 말을 하려 했다.
“너는 라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어?”
마기휼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다른 때처럼 그냥 무시할 순 없는 말이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든 것인지 마기휼의 눈동자가 굳어졌다.
“……일이라니요?”
“모르면 그걸로 되겠지. 속 편하고 즐겁게, 너답게 그렇게 지내면 되는 거야.”
라우젝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또 이런 식이다. 사람을 건드리고 뒤로 쏙 빠져버리는 거다. 이번에는 그냥 그렇게 두지 않을 거라며 마기휼은 당장 라우젝의 팔을 붙잡았다.
“라울이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다는 겁니까?”
“별거 아니야. 그냥 이쪽이랑 비슷한 과가 되려는 것뿐이야.”
“비슷한 과라고?”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 정말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약간의 변화를 꾀하는 것뿐이니까.”
이상한 말을 남긴 라우젝은 굳은 마기휼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느릿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는데도 불러 세울 수 없었다.
가이나가 밖으로 나가고 군인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바로 올라타지 않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이쪽을 봤고, 자신도 그녀를 봤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를 하고 있던 그녀가 마차에 올라탔고, 마차가 출발했다. 뒤를 이어 새롭게 나타난 마차에는 오르베와 아이들이 올라탔다. 그들이 모두 타자 문이 닫히고 여왕이 탄 마차의 뒤를 쫓았다.
이 저택에 있을 수 없으니까 이제는 여왕의 부하 노릇이라도 할 생각인가. 오르베라면 그런 것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왕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치마 속에 푹 감은 채로 제 뜻대로 해 댈 사람을 구하는 거라면 선택이 잘못되었다.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응시하는 그 얼굴이 굳어 있었다.
상대가 노르디아 여왕이었다. 아이를 그들이 빼앗아 갈 수도 있었다. 그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예민해지고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괜히 초조하고 답답해진다. 어느새 손끝이 차가워졌다.
“마기휼.”
부름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정면을 응시하는 마기휼은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채로 있으려니 뒤로 라울이 접근을 했다. 인기척이 느껴질 텐데도 반응이 없다. 결국 라울은 마기휼의 옆에 서선 그를 바라봤다. 밖을 내다보는 마기휼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화가 난 건가.”
“내가 화를 낼 필요가 뭐가 있겠어. 그냥 좀 당황스러웠을 뿐이야.”
“무엇이 당황스럽지?”
“의외로 여왕의 존재가 가까이 있었다는 거.”
그리고 짐작만 하던 일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거 말이다.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를 빼앗길 것 같아?”
“잘 모르겠어. 그런데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빼앗길 수도 있겠다는 느낌. 그리고 정말 빼앗기게 된다면 그 아이를 다시 되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상대가 여왕이고 나라라면 나같이 작고 초라한 사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자조적이 된다. 나 자신이 이렇게나 작은 사람이었던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희미한 미소를 짓는 마기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민에 빠진 그 얼굴을 확인한 라울이 마기휼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체온이 내려갔군.”
“고민이 많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기분이 가라앉고 체온도 내려간 것 같았다. 사람의 몸이라는 건 이래서 무섭다니까. 생각이 병을 키운다는 말이 딱 맞았다.
아직 심란했다.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라울을 똑바로 보기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마냥 그를 외면하고 있을 순 없었다.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여왕이 왜 온 거야.”
“이번에 처리할 일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의논을 하러 온 거다.”
“어떤 문제?”
“사소한 문제다. 몰라도 되는 거야.”
“나는 그냥 모르고 있는 편이 낫다는 거야?”
평소와는 다른 뉘앙스였다. 그것이 전해진 것인지 라울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라울.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묻고는 바라보는 마기휼의 눈동자가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이쪽이 뭔가를 숨기고 있으니 그걸 파헤쳐내고야 말겠다는 듯 바라봐 오는 시선에 라울은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기휼. 나는 군인이다. 그리고 폐하의 측근이지. 소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내 귀에 들어오게 되면 그에 관련한 일 처리를 하는 게 당연한 거야. 매번 그런 식이었다. 너와 함께 안베르로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주욱 이어진 일들이었지. 그 일에 관심이 없다가 갑자기 궁금해하는 건, 어찌 된 일이지?”
“너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야. 그저 걱정이 될 따름이야.”
가만히 있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달리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은 라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이용해서 위험한 일을 하려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로 인해 그만 피해를 입게 되는 건 안 되었다.
“우리의 일이 너의 희생으로만 결정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게 싫어.”
입을 다문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그 얼굴이 창백했다. 미간 사이로 주름이 잡히는 걸 바라보던 라울이 마기휼의 어깨를 붙잡았다. 강한 힘이 들어가 있어 살짝 아팠다. 이쪽이 한 말에 화가 난 건가 싶어 그를 봤다. 하지만 차분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고백이 이어졌다.
“너를 사랑한다.”
“물론 나도 널…….”
“아이를 사랑할 거야.”
마기휼은 입을 다물었다. 말이 없어진 마기휼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한 채로 라울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아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건 사치였지. 누구를 만나 행복해지고 2세 걱정을 하는 건 나에게 있어 평생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내 곁에 있다. 나는 그걸 지켜내고 싶을 뿐이야.”
평소 말이 없는 라울이기 때문에 지금 하는 모든 말들에 신뢰가 갔다. 듣고만 있어도 얼굴이 벌겋게 익는 게 느껴졌다. 떨리는 눈동자를 내리뜨며 아랫입술을 깨무는 마기휼의 뺨에 한 손을 댄 채로 라울도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아. 나는 전보다 훨씬 더 몸을 사리게 되었으니까, 크게 다치거나 죽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그러니 염려하지 마.”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라울 너를 믿으니까 네가 하는 일에 이상한 게 없을 거라고 확신에 차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기휼은 웅얼거렸다.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어.”
“알 것 같아. 우리의 주변에는 이상한 일들이 너무도 많지. 그건 모두 우리를 시기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바로 웃음이 나왔다. 피식- 하고 웃어버린 마기휼은 코앞으로 다가온 라울을 바라봤다.
“우리처럼 사이가 좋지 못하니까 시기를 할 뿐이라고 생각하라는 거야?”
“그게 사실이지 않나.”
그래. 사실이었다. 거짓은 아니었다. 라우젝이나 오르베나 자신들처럼 곁에 누군가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눈꼴시어서 괜히 괴롭히려 드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은 한결 편안해진다.
그리고 생각보다 느끼한 말을 하는 라울에게 새삼스럽다는 눈길을 던졌다.
“너 이런 말도 하는 사람이었구나.”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는 말이야.”
자신의 앞이기 때문에 이런 말도 하는 건가. 나쁘지 않았다. 기쁘기도 하고 말이다.
은근히 사람을 달래는 재주가 있다면서 웃던 마기휼은 라울 쪽으로 몸을 붙였다. 기다렸다는 듯 라울이 끌어안아 온다.
뺨과 뺨을 댄 채로 있었다. 안심이 된다. 그냥 이렇게 체온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이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태가 지속될 수 있을까. 주변에 워낙에 쟁쟁한 인간들이 많아서 앞으로 있을 일들이 막막했다.
“괜찮을 거다.”
이쪽이 하는 생각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속삭이는 말에 마기휼은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볼 줄도 아는 거냐.
마기휼은 라울의 뒷머리에 손을 대고 슬슬 문질렀다.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라울의 입술이 닿는다. 마기휼의 턱 아래를 잡아 누르고 입을 벌리게 하고는 그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마기휼도 기다렸다는 듯 혀를 내밀어 라울의 혀를 툭툭 건드렸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되었지만 이내 서로에게 달라붙어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게 되었다.
마기휼은 잠들어 있었다. 쪼그리고 누워 있는 모습이 불편하게 보였다. 그의 어깨를 잡고 똑바로 누울 수 있게끔 하자 바로 한숨을 쉰다. 인상을 쓰나 싶더니 금방 편한 자세를 취하고 고른 숨을 토해 냈다.
확실히 전보다 마기휼은 먹는 양이 늘고 잠자는 시간도 많아졌다. 한번 잠이 들면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를 정도로 숙면 상태에 돌입하고는 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라울은 손을 펼쳐 마기휼의 눈앞에서 살짝 흔들었다. 미동이 없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옆방으로 간 라울은 미리 준비한 옷을 갈아입었다. 귀걸이형 통신구를 귀에 꽂고는 복도로 나왔다. 어둡고 조용한 복도. 잠시 멈춰선 라울은 마기휼이 있는 방 쪽을 쳐다봤다. 가만히 그쪽을 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마음을 굳힌 듯 그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가는 거야?”
고개를 들자 라우젝이 보였다. 그가 올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바이기 때문에 동요치 않았다. 라울은 라우젝의 앞에서 멈춰 섰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
“시끄럽게 굴면 마기휼이 깰까 봐서?”
대답을 할 가치도 없는 문제라는 듯 라울은 입을 다물었다.
라우젝은 굳은 인상의 라울을 가만히 살펴봤다.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의 같은 것도 느껴졌다. 이미 결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물러나지 않을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후회하지 않겠나.”
“후회를 왜 해야 하는 거지. 이미 결정을 내린 사안이다.”
그래. 그렇지. 이미 결정을 내린 부분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망설임 없이 한 방에 주욱 밀고 나갈 수 있다는 건가.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면서 라우젝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나와는 정말 다르군.”
“나는 당신처럼 하고 난 후에 후회를 하지 않을 거다.”
“그래.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전이라면 하는 말에 대해서 안색을 굳히거나 경직된 태도를 취할 라우젝이 지나칠 정도로 태연했다. 왜 그럴까. 그가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의심하고 걱정하는 라울의 앞으로 작은 유리병이 내밀어졌다. 처음에는 자신이 준비한 것인가 싶었다. 그 정도로 비슷하게 생겼다.
손가락만 한 푸르스름한 유리관. 라울이 자신의 정자를 넣어 두었던 그것과 똑같았다.
그의 얼굴 위로 의구심이 떠올랐다.
“이건 뭐지?”
“내 정자야.”
“……뭐라고?”
“네 정자는 아무 쓸데가 없어. 이왕 하려면 내 정자를 사용하는 편이 어때?”
말을 하며 라우젝은 유리관을 흔들었다.
장난스러운 그 행동에 라울의 안색이 굳어졌다.
“필요 없다.”
“라울. 일을 덜 시끄럽게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거야. 네가 엔온에게 정자를 넘겼다는 걸 마기휼이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난리 날 거다. 그걸 감당할 수 있겠어?”
다른 의미로 라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중에 마기휼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그것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라우젝이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라울은 라우젝의 얼굴을 확인했다. 장난스럽다고만 생각했던 그의 눈빛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그저 농담이나 장난을 위해 이런 행동을 취하는 게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속내가 궁금했다. 그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일까.
“굳이 네가 이럴 필요가 어디에 있지?”
“작은 복수를 하고 싶어서.”
라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얼굴이다. 그걸 본 라우젝의 입술 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나를 선택해주지 않는 사람이 미워서. 그래서 상처를 주고 싶어서 그래.”
바라보는 눈동자 안쪽으로 광기가 읽혔다. 예전에 본 적 있는 눈이었다.
10여 년 전 모든 것에서 떠밀린 라우젝은 저택으로 들어왔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에 반해 그의 눈동자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뭔가를 갈구하고 원망하던 그 눈. 그 눈빛이 향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라울은 알고 있었다.
그 감정이 아직도 정리가 되지 않은 채로 있었단 말인가. 라울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라우젝 너는…….”
“사랑받는 넌 절대로 이 마음을 몰라.”
라울이 하는 말을 중간에 자른 라우젝은 그를 노려봤다.
“내 이 마음을 그 누가 알겠어. 그 누구도 모르지. 그걸 이해받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네가 해줘야겠다. 그 정도쯤은 해도 되잖아. 내 모든 걸 빼앗은 건 너이니까.”
바로 네놈이 내 행복을 빼앗아 간 거야.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에게라도 좋으니 몰아세울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밖에 이 격렬한 마음을 정리할 수 없다.
바라보는 라우젝의 눈동자가 점점 더 칙칙하게 변해 갔다. 그는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울은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오랫동안 병든 라우젝과 함께 있었다. 그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연민한다. 그와 자신의 처지는 어차피 같았다. 이용을 당하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버려질 거다. 자신들은 그저 핏줄을 잇기 위한 도구밖에 되지 않았다.
라울의 손이 라우젝이 내민 유리관을 쥐었다. 차가운 그 느낌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온다. 기분 나쁜 감각에 라울의 눈빛이 어둠에 물들었다.
“죄가 시작되는 건가.”
“아니. 새로운 시작이지.”
라우젝은 라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가 새로운 문을 여는 거야. 그런 식으로라도 난 이 세계에 내 자취를 남기겠어. 나라는 사내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다 크고, 화려하고, 대단하게 말이야.”
라우젝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잘 다녀와라. 다치지 말고.”
물러난 라우젝은 화사한 미소를 보냈다.
그것에 등이 떠밀린 라울은 걸음을 옮겼다.
반경 3km 내에서는 생명체 반응을 알 수 없고, 통신도 모두 막아 놨다. 그리고 300m 지점으로 입이 무거운 군인들을 세워 놨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렇게 하지 않아도 비밀 통로를 알고 있는 그들은 알아서 접근하고 도망을 칠 테지만 말이다.
노르디아의 외곽, 사람이 살지 않아 버려진 마을에 라울이 서 있었다. 하얀 망토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침착했다. 눈을 내리뜬 채로 있던 그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앞에 있던 건물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전신이 달라붙는 검은색 옷을 입은 여자는 짧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미인으로 보이는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그녀가 걸어 나오는 걸 확인한 라울의 눈동자가 빛났다.
역시나 살아 있었던 거냐. 달가워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의 굳은 눈동자를 확인한 마리아도 그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그들은 금방 얼굴을 마주한 채로 서 있게 되었고 라울은 쓸데없는 시간을 끌고 싶지 않다는 듯 들고 있던 가방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가방을 받아 든 마리아는 경계심이 서린 눈빛을 던졌다.
“이게 정말로 당신의 정자인가?”
“라우젝의 정자다.”
마리아의 한쪽 눈썹이 위로 사악 올라갔다. 굳은 눈빛을 하고 있던 마리아의 입가로 한 줄기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말하니 믿음이 가는군.”
라울의 정자라고 확언을 했다면 절대로 믿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라우젝이라니. 그 순간 묘하게 신뢰가 생겨났다. 믿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마리아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는 그 위를 손바닥으로 토닥였다. 그 얼굴 위로 만족의 미소가 서리는 걸 확인한 라울이 물었다.
“너희들은 멈추지 않을 거다. 그렇지?”
이미 다 말이 끝난 상황에서 왜 저런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마리아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당연하지. 절대로 멈추지 않아. 언젠가 다시금 나타나 네 그 잘난 얼굴에 상처 하나 정도는 남겨주지. 마기휼도 반드시 빼앗을 거야.”
“빼앗을 수 있다면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무덤덤한 말에 마리아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걸 내색하지 않은 그녀는 대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번 거래는 위험하다는 걸 마리아도 아이작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울이 건네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일이 불발로 끝나 버렸기 때문에 앞으로는 라울이나 그와 관련된 인물에게 접근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들의 유전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알센이나 치울스의 피가 이미 흐려진 상태라는 건 진작 알고 있던 바였다. 때문에 노르디아의 왕통만을 고집하는 것이었다.
라울의 피가 흘렀을 때 레드존에서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기류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이 라울의 피 때문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그것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가능성이었다. 그것 하나에 매달려 새로운 상황을 여는 것이 필요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알센과 치울스가 혈안이 되어 이쪽 뒤를 쫓고 있었다.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걸 파악한 듯싶었다. 동시에 라울의 정자가 이쪽에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그걸 빼앗으려는 거겠지. 재차 왕통을 이어 나가려는 거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건 우리들의 것이었다.
마리아는 라울을 바라봤다. 잘나고 뻣뻣한 사내를 보는 순간 구역질이 났다. 본능적으로 맞지 않았다. 아마도 마기휼을 놈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거다. 하지만 적대감만을 품기에는 지나치게 아까운 사내였다. 회유라는 건 아이작이 좋아하는 짓거리였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따라 하고 있었다.
“네놈도 결국 우리 과야. 알면서도 그 자리에 있겠다는 거냐.”
“너희가 꿈꾸는 이상은 위험하다. 너도 내 입장이 되어, 내 사람과 내 아이가 다치게 된다면 그리 날뛰지 못할 거다. 내가 아닌 남의 희생이기 때문에 그리도 악질적일 수 있는 거다.”
“악질이라. 과연 그럴까―.”
“너도 아이를 가져보면 알 거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빈정거리려던 마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마리아를 내려다보며 라울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이는 분명 네 몸을 빌려 태어나게 될 테지. 그렇지 않나?”
“물론이지. 반드시 위대한 인어의 핏줄을 지닌 아이를 낳겠어. 그래서 이 세계를 내 손 안에 쥘 거야.”
“그래. 반드시 성공하기를 빈다.”
라울의 한쪽 입술 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처음으로 보는 라울의 미소였다. 그것이 비웃음이라니. 마리아의 아랫입술이 파들거리고 떨렸다. 라울을 노려보지만 그의 표정에는 미동이 없었다. 네가 말을 하는 대로 일이 진행이 될지, 한번 두고 보겠다는 식이었다. 마리아는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몸을 돌렸다.
건물을 지나치자 마리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자 라울도 몸을 돌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마리아는 건물 속에 있는 비밀 통로를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터널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톰이 당장 몸을 일으켰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물건을 받아온 것을 기뻐하는 톰의 뺨을 두어 번 쓰다듬으며 마리아는 아이작의 곁으로 갔다.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아이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리아를 내려다봤다. 마리아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확인한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왜 그런 얼굴이지?”
“기분 나빠서 그래.”
목소리도 좋지 않았다. 큰소리는 나지 않던데 라울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때 마리아가 중얼거렸다.
“사람은 변하는 거로군.”
“누가? 라울이 말인가?”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라울을 봤을 때 그는 주변에 관심이 없던 사내였다. 어떤 의미에서 마기휼보다 훨씬 더 대충 살아가는 자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변하고 있었다.
지킬 것이 생겨난 이는 노르디아라는 나라 자체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공격을 하는 순간 목이 베인다. 지금의 라울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되는 놈이 되었어. 위험한 냄새가 풀풀 나.”
“그래서 투지가 생기는 거지. 적이 똑같은 상태를 유지하면 재미없어서 겨룰 마음이 생기지 않지만 그 반대라면, 달라지지.”
아이작의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발했다.
“반드시 쓰러뜨리고자 하는 의욕이 생겨나게 되는 거다.”
중얼거리는 목소리 안쪽으로 짐승의 목 울림이 섞인다. 누가 보더라도 위험한 이 상황에서 흥분을 하는 건가. 이상해 보이는 모습이나 그런 그의 상태에 대해서 뭐라 비난할 순 없었다. 마리아도 서서히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이로써 삼국의 추격을 받게 되겠군.”
아이작의 말에도 마리아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두려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건 톰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심드렁한 얼굴들이었다.
왕통을 손에 넣는 대가는 엄청난 것일 거다. 그것이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잘 하면 이번 일로 인해 수명이 단축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어차피 한 번 살게 되는 세상,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거다. 그러다가 운이 좋아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면 그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었다.
아이작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택으로 들어선 라울은 조용히 움직였다. 애초에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을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은밀하게 마기휼이 있는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문을 닫고 고개를 든 라울은 흠칫했다.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마기휼이 창가 앞에 서 있었다.
“왔어?”
“……일어나 있었나?”
“이제는 놀라지도 않네. 바람피우고 들어와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을 놈일세.”
마기휼은 손가락을 까닥이며 라울을 흘겨봤다.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이지만 라울은 말없이 그에게 걸어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지친 듯한 라울의 행동에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어디서 응석이야. 이런다고 해서 내 화가 풀릴 것 같아? 그거 한 다음에 아무 말도 없이 쏙 나가버리면 어떻게 하냐. 그러면 기분 되게 이상하다니까?”
실은 라울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은 다 깬 상태였다. 하지만 나가는 라울을 붙잡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거였다. 일단 일을 다 끝내고 돌아오면 추궁을 할 생각이었는데 이쪽에 머리를 기댄 라울은 꽤나 침울한 모습이었다.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기 때문에 의아해졌다. 정말 왜 이러나 싶은 기분도 적잖아 들었기 때문에 마기휼은 라울의 등에 한 손을 올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일이 있었지. 하지만 다 해결하고 왔다.”
그게 정말일까. 잠시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등에 한 손을 댄 채로 있으려니 라울이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세우자 확실히 이쪽보다는 키가 컸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내려다보는 건 좀 거시기했다. 따져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할 수 없게 된다.
눈을 굴리는 마기휼은 고민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온 건지 추궁을 할까, 말까. 그리 궁리하는 얼굴이었다. 굴러가는 마기휼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라울이 마기휼의 몸을 끌어안았다. 부드럽게 안아 오는 팔을 밀어낼 수 없었다. 지금 라울이 고민이 많은 상태라는 게 전해졌기 때문에 더더욱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라울은 품에 안겨 있는 마기휼의 등을 쓰다듬었다. 느리게 쓰다듬던 팔이 마기휼의 등을 감싸고 그의 머리에 뺨을 댄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대로 굳어버린 듯 얌전히 있는 라울은 낯설었다. 지금 이런 자세도 민망했다.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무슨 일을 하고 온 거야. 범죄라도 저질렀냐.”
“범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다 용서해줄 수 있나?”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말을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라울은 마기휼에게서 떨어졌다. 그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곤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바라보는 얼굴이 진지했다.
왜 이렇게 자꾸만 분위기를 잡는지 모르겠다. 괜히 불안해지잖아.
“너 나한테 용서를 구할 만한 일을 한 거야?”
“그런 건 하지 않았다.”
“그러면 됐어.”
마기휼이 조금 더 길게 말을 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너무도 산뜻하게 되었다 하는 것에 라울은 당황했다.
“그냥 그걸로 끝나는 건가?”
“그러면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해줄까?”
원래 라울은 일을 많이 하는 사내였다. 그가 하는 일 중에는 아이작이나 마리아, 엔온과 관련된 것들도 있고 왕실 일도 있을 거다. 레드존 때문에 다른 두 나라와의 분위기도 오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할 일이야 많겠지. 그런 라울의 일에 일일이 간섭을 할 순 없었다.
알아서 잘 하다가 힘들면 도와 달라 하겠지. 거기까지가 이쪽이 할 수 있는 일로, 괜히 라울이 하는 일에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었다.
괜히 혼자서 폼 잡고 있었나. 그래서 라울이 이렇게 분위기를 잡나 싶기도 했다.
“넌 거짓말 같은 거 못 하는 놈이잖아. 살인을 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남 등쳐먹는 일만 안 하면 그걸로 돼.”
“……….”
나라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그들의 등 쳐먹는 짓도 했다. 당장은 잠잠할지 몰라도 곧 다방면으로 일이 생기게 될 테고 그러면 사상자는 자연스럽게 생겨날 거다.
마기휼이 하지 않으면 된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했다. 거짓말과 농담을 싫어한다는 사내는 어느새 그런 걸 할 수 있게끔 되었다. 하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마기휼의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라울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우습지만 면죄부를 얻은 것 같다.
마기휼만 이렇게 있어주면 된다. 가슴 속으로 가득 파고드는 강렬한 생각이 라울의 표정을 한결 단단하게 만들었다.
“마기휼.”
“응, 왜?”
“나도 여자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어.”
“……갑자기 뭔 말이야?”
물론 이쪽이 여자아이가 더 좋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따라 라울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내내 가만히 있다가 왜 갑자기 여자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거야. 사람 창피해지게.
본인이 마구 주장을 할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라울이 이리 말을 하니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른 마기휼은 라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도망가려는 마기휼을 끌어안고 그가 벗어날 수 없도록 하며 라울은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라울의 팔을 밀쳐 내며 왜 이러냐고, 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마기휼이지만 이내 몸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얌전히 안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