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ZONE 5
레드존
네르시온
Contents
#24
#25
#26
#27
RED ZONE plus
#24
하얀 장갑을 낀 라울에게 군모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든 라울은 천천히 군모를 쓰고, 정면을 응시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사내는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이었다. 완벽하게 꾸며진 라울의 모습은 그를 보좌하는 이들에게 자신감과 우월감을 선사했다. 라울이라는 사람을 모신다는 것 자체에 깊은 만족감을 느끼는 군인들은 하나같이 뿌듯한 얼굴이었다.
선망으로 가득 찬 시선이 쏠려도 라울은 태연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며 라울은 옆의 군인을 돌아봤다.
“지금 시간은?”
“12시 56분입니다.”
“곧 회의가 시작되겠군.”
“그렇습니다. 이동하시지요.”
군인의 말에 라울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삼국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굉장히 중요한 날임과 동시에 뭔가가 변하는 계기가 마련될 날이기도 했다. 라울은 양손을 깍지 낀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녹안이 다른 어느 때보다 굳어 있었다. 라울은 몸을 돌렸다.
바깥으로 나가는 라울의 뒤를 몇몇 수행원들이 뒤따랐다. 앞으로 가야 할 장소가 만만치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하나같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들은 다른 무리와 마주치게 되었다. 다른 쪽 길목에서 나타난 건 가이나 여왕과 그 측근들이었다.
라울은 가이나의 앞으로 다가가 가벼운 목례를 했다.
“여왕 폐하.”
“라울 대령. 준비는 다 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는 그 얼굴이 평온했다. 모든 건 그의 뜻대로 될 거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럴까. 이쪽이 예지력을 갖춘 것도 아닌데 말이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가이나는 몸을 돌렸고, 라울이 그 옆을 따랐다.
멀리 문이 하나 보였다. 저 문 안에 각국의 지도자와 대표가 모여 있었다.
회의를 위해 그들은 현재 치울스 수도에 와 있었다. 삼국의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경비는 삼엄했다. 복도에 늘어서 있는 이들도 치울스의 정예병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눈으로 확인하며 가이나는 중얼거렸다.
“그들의 기세가 남다르군요.”
“치울스는 원래 군에 대한 투자가 많지 않습니까. 사내들은 의무적으로 군에 배속되어 3년의 훈련을 받도록 되어 있지요.”
“앞으로 노르디아도 그리해야 할까요.”
“그건 폐하의 판단에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 확실한 것은, 국방의 보호는 의무감으로만 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재를 양성하고 군의 배치를 효율적으로 하는 한편, 무기의 보급을 늘려야 할 겁니다.”
“그렇군요. 군함의 제조에 더 박차를 가해야겠군요.”
“그러지 않으셔도 현재 노르디아의 군함 기술력은 삼국 중 최고입니다.”
“인재 또한 삼국 중 으뜸이라 할 만하지요.”
가이나의 표정이 한결 부드럽게 풀렸다.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끼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앞을 막고 있는 건 문 하나였다. 그리고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건 가이나와 라울뿐이었다. 나머지 수행원들은 뒤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그들이 도착한 것을 감지한 건지 문이 저절로 열렸다. 라울은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가시지요.”
“고맙습니다.”
인사를 한 가이나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하지만 금방 내부가 밝게 밝혀지고 원형의 회의실이 드러났다. 원형의 탁자에는 총 네 개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곳에 이미 두 사람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나는 중년 남자. 또 하나는 가이나와 비슷한 연배의 여성이었다. 먼저 앉아 있는 이들 중에서 중년 남자, 치울스의 왕이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노르디아의 여왕 폐하.”
“갑작스러운 회의 요청을 받아들여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삼국은 협력이 기반이 되어 유지되어야 하니까요.”
치울스 왕의 말에 가이나의 입가로 온화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지요.”
대꾸한 가이나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의자 옆에 서자 라울이 뒤에 섰다. 의자를 빼서 가이나가 자리에 앉는 걸 도운 후에 옆으로 한 발 물러나 고개를 조아렸다.
치울스와 알센의 지도자에게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보기 힘든 미남자의 존재에 각 나라의 주인들은 만족감을 내비쳤다. 그중에서 알센 여왕의 관심은 유독 컸다.
“라울 안제크 님이라 하셨습니까. 과연 듣던 대로입니다. 늠름하고 아름다우시군요. 기대하던 대로의 모습이신지라 참으로 즐겁습니다.”
“저도 어제 노르디아 여왕과 라울 대령의 모습을 보고 눈이 즐거웠답니다. 선남선녀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노르디아 여왕께서는 마음이 든든하시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훌륭한 인재가 늘 곁에서 저를 지켜주니 안심이 됩니다.”
가이나의 말에 알센 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라도 안심이 될 것 같습니다.”
알센 여왕은 라울에게 열렬한 눈빛을 던졌다.
라울이 노르디아의 대표적인 왕통이고 언젠가 그가 가이나의 짝이 될 거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노골적으로 그를 바라보는 알센 여왕의 태도는 확실히 무례했다. 하지만 가이나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고 치울스 왕도 말이 없었다. 초반 인사를 주고받았을 때와는 다른 침묵이 형성되었다. 하나같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알센 여왕만이 재미있다는 듯 빙글거리고 웃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지닌 알센 여왕은 총명하지만 감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잘 구슬리지 않으면 언제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이를 세울지 몰랐다. 실제로 격렬한 그 성품은 수백이나 되는 측근들을 알센의 땅에서 쫓아내버렸다.
그에 반해 벌써부터 희끗한 머리카락을 지닌 치울스의 왕은 심약하고 느긋한 성품이었다. 귀가 얇아 대신들이나 권력가들이 하는 말대로 움직이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만 열이 넘게 있었다. 하나같이 건강하고 욕심이 많은 이들이었다. 그가 죽고 난 후, 치울스는 분명 내분이 있을 거다. 거기까지가 소문의 전부였다. 이쪽은 그들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그들은 과연 이쪽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가이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자리를 준비한 것은 레드존 때문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꽤나 충격적이었으니까요.”
충격적이라. 그리 말을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번 사건은 그저 예상치 못한 사고였다. 그걸 크게 부풀려 말을 하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가이나와 라울이 침묵하는 걸 확인한 알센 여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엔온-이라는 집단이지요. 돌연변이가 모여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이들이 말입니다.”
“거창한 평가는 옳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해적일 뿐이지 않소.”
알센 여왕은 치울스 왕을 흘겨봤다.
“단지 해적이 아닙니다. 그들은 레드존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걸 이용하려 했습니다. 만약 그들 뜻대로 되었다면 이건 삼국의 위기입니다. 정말 큰 일이 날 뻔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소. 앞으로 조금 더 경계를 삼엄하게 한다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오.”
“지금보다 더 경계를 삼엄하게 하라고요? 그건 무리입니다. 알센의 병사들을 나라가 아닌 레드존을 지키라고 모두 그쪽으로 몰아줄 순 없지 않습니까.”
“엔온의 무리가 원하는 대로 레드존이 움직이게 된다면 삼국의 위기라 한 것은 알센의 여왕, 당신이지 않습니까. 나는 다만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그걸 막는 게 어떠냐는 것이요.”
“레드존을 지키는 데에 굳이 군을 움직일 필요는 없습니다.”
알센 여왕은 눈동자를 옆으로 움직여 라울을 바라봤다. 속을 떠보는 눈빛에도 라울은 담담했다. 흔들림 없는 그 모습에 여왕은 재미있다는 듯 한쪽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라울. 당신은 노르디아의 왕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말은 즉, 레드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바로 당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폐하. 당신의 아우이신 쥴라이 후작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여기서 왜 내 아우가 거론되는 것입니까.”
당황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급하게 말이 나왔다. 지나치게 날이 선 반응에 치울스 왕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봐왔다. 알센 여왕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시선을 돌렸다.
라울이 그녀를 떠보듯 말을 던졌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센 여왕은 이를 악물었다. 라울이 꺼내는 화제는 그녀에게 있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자꾸만 쿡쿡 찌르는 건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 설마하니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걸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며 알센 여왕은 라울을 노려봤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요.”
더는 그것에 대해서 거론하지 마. 노려보는 눈빛이 요구하는 건 명확했다. 하지만 라울은 무시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반응에 알센 여왕은 이를 갈았다. 치울스 왕은 갑자기 이쪽을 보는 라울의 행동에 눈을 끔벅였다.
“치울스 왕. 한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뭐든지 물어보시오. 알고 있는 선에서 성실하게 답변하도록 하지요.”
“11년 전에 어째서 레드존으로 들어가신 겁니까.”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던 치울스 왕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되물었다.
“무엇을 듣고 싶은 건가.”
“그저 묻는 것뿐입니다. 왜 레드존으로 들어가신 건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것도 비밀리에 말이지요.”
알센 여왕이 치울스 왕을 쳐다봤다.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묻는 눈빛을 던지자 치울스 왕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알센은 즉위 문제로 혼란스러웠고 노르디아는 제 형님이신 라우젝으로 인해 시끄러웠던 참이었지요. 나라 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바깥일에는 상대적으로 무심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 어째서 레드존으로 들어가신 겁니까?”
재차 이어지는 라울의 질문에 치울스 왕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곤혹스러웠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추궁을 당하는 것에 취약했던 치울스 왕은 목소리를 높였다.
“무례하다! 지금 날 모욕할 셈인가!”
“우리 모두가 같다는 걸 다 알고 있습니다.”
치울스 왕과 알센 여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처음 느긋했던 그들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하나같이 불쾌하다는 얼굴을 한 채로 라울을 노려봤다. 하지만 라울은 본인의 말을 했다.
“이번 일은 알센, 치울스. 각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공교롭게도 원치 않은 진실을 확인받았을 뿐, 불쾌한 일이 되어버렸지요. 역으로 말씀드리자면―”
약간의 뜸을 들인 후 라울은 조금 더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이 사고로써 레드존은 아무것도 아닌 곳이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진실은 아직 우리들밖에 알아선 안 되는 일입니다. 이 진실이 외부로 발설이 될 경우 핏줄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거니까요.”
알센 여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분노한 듯 아랫입술을 깨문 그녀는 가이나를 노려봤다.
노르디아의 여왕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라울에게 모든 걸 맡기겠다. 그리 말하는 태도였다. 이 자리에 계속 앉아 저런 말을 들은 이유가 없었다.
판단을 내린 알센 여왕은 벌떡 일어섰다.
“기분 나쁘군! 여기에 더 있고 싶지가 않아!”
“여기서 나가신다면 그 순간 알센은 치울스와 노르디아의 공격을 받게 되실 겁니다.”
내내 가만히 있던 가이나가 입을 열었다. 차분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는 라울 이상의 힘을 발휘했다. 당장 바깥으로 뛰어나가려 했던 알센 여왕은 오만상을 찡그린 채로 가이나를 노려봤다. 가이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알센 여왕. 자리에 앉으십시오.”
“노르디아 여왕. 어찌 이리도 무례하단 말입니까!”
“살고자 한다면 자리에 앉으십시오.”
알센 여왕은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도 노골적인 협박에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정말 노르디아에서 저런 말을 한 건가. 이건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한 나라의 주인이 어찌 다른 나라의 주인에게 이런 식으로 굴 수 있단 말인가.
알센 여왕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가이나는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걸 모두 놓치지 않고 확인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고압적인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하나 명심해 둘 것이 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의 피는 특별합니다. 우리들의 핏줄은 1500여 년을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우리는 선택 받은 인간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레드존의 주인이 될 수 없다 한들―”
가이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질거렸다. 눈물인가 싶었을 때, 금세 표정이 평온해져선 말을 이었다.
“레드존의 주인이 될 수 없다 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시대의 주인이니까요.”
잠시의 침묵이 감돌았다.
시대의 주인. 달콤한 울림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치울스의 왕은 반응을 보이듯 뺨이 붉어졌다. 자부심으로 가득한 얼굴이 된 그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가이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엔온의 무리. 우리의 삶 깊숙한 곳에 들어온 그들은 이미 만만치 않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레드존에 정착한 상태이고, 지하에 존재하는 하늘의 땅을 일부 사용하고 있다더군요. 그리고 라울을 그리로 끌어들여 피를 이용해 땅을 위로 올리려 했습니다.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늘의 땅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노르디아의 왕통이 쓸데없는 거야.”
중얼거림에 가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선 채로 있던 알센 여왕은 가이나와 라울을 씹어 삼키고 말겠다는 듯 살벌하게 노려봤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네 입으로 스스로 노르디아의 왕통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리는 꼴밖에 되지 않아. 우리가 삼국의 주인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현혹하려 하지만 쓸데없는 일이야.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달라붙고 싶은 모양인데 어림도 없다. 피가 쓸모없는 노르디아의 왕통은 더 이상 이 시대를 다스리는 나라가 될 수 없어!”
“그렇다면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가이나의 반말에 알센 여왕이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이게 감히 어디서 건방지게―!”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가이나는 라울이 들고 온 문서를 잡아 위로 던졌다. 라울은 당황한 듯싶었으나 금방 표정을 정리했고 가이나가 던진 문서들이 허공에 떴다가 팔랑거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이 명확한 증거를 봐라! 네 동생이 가지고 간 건 너의 피가 아닌가! 알센의 가장 진한 피가 레드존에 그리도 가득 뿌려졌는데도 조금의 미동이 없었어! 그런 주제에 네가 어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너야말로 어울리지 않은 곳에 억지로 그 천한 몸을 끼워 넣은 것밖에 되지 않아!”
“뭐라고?! 이게―!”
알센 여왕은 동요가 역력했다. 가만히 있으려 했지만 결국 그녀는 테이블 위에 가득 뿌려지는 종이를 모두 끌어모았다. 가만히 있던 치울스 왕이 종이를 하나 집어 들자 급히 그걸 빼앗으며 만지지 말라고 소리를 쳤다.
무시무시한 기세에 놀란 치울스 왕은 아무것도 만지지 않겠다는 듯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러는 동안 테이블에 떨어진 종이를 모두 긁어모은 알센 여왕은 바닥에 떨어진 것들로 시선을 옮겼다. 구겨진 종이를 한가득 잡은 알센 여왕의 손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미친 듯이 종이에 달려들던 자신의 추한 모습에 대해서 생각하는 듯, 그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아니야. 나는 여왕이야. 나는―”
“알센 여왕. 우리는 그 외에도 다른 비밀을 더 알고 있습니다.”
헐떡거리며 알센 여왕은 라울을 바라봤다.
“당신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응시하는 라울의 눈동자는 차분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걸 믿고 싶지 않았다.
알센은 지금 단계에서 어떻게 해서든 우위를 점해야만 했다. 레드존의 사건은 노르디아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이 되어야만 했다. 그걸 이용해서 새롭게 협정을 맺을 작정으로 이 자리를 찾아온 것이었다. 저런 두 잡것들의 세 치 혀에 휘둘려 이런 추악한 모습을 보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알센의 여왕이다. 나를 지키려는 수많은 병사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도도하게 존재하면 그걸로 땡이었다. 그런데 이놈들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실은 왕실의 피가 절반도 섞이지 않은 자신의 비밀에 대해서 말이다.
알센 여왕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웃기지 마.”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런 준비도 없이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지나칠 정도의 야욕은 결핍된 것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까. 애초에 당신은 그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
알센 여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깊이 숨을 들이켠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서히 그 몸이 무너져 내린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알센 여왕은 넋이 나간 듯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가이나와 라울은 동시에 치울스 왕을 바라봤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던 치울스 왕은 어느새 감정이 모두 사라진 무표정을 한 채였다.
치울스 왕은 차분히 말했다.
“노르디아의 여왕. 그리고 젊고 패기 넘치는 자네. 무엇을 원하는 건가? 우리 모두가 서로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는 건가. 우리의 피가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그편이 더 낫다는 건가. 하지만 레드존은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는 그 땅을 다시 올리고 싶어해. 겉으로는 협력의 관계를 가장해도 뒤로는 그 노력을 멈추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하늘의 땅을 손에 넣어 이 세계를 지배하려 하겠지. 그 추악한 인간의 욕심을 자네들이 어떤 말로 멈추게 하겠다는 건가.”
“송구하오나 치울스 왕. 저는 제 피가 레드존에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치울스 왕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당장 라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제 피는 아직 효과가 있는 듯싶습니다.”
내내 멍하니 있던 알센 여왕이 고개를 쳐들고 라울을 노려봤다.
“거짓말하지 마. 지금 이게 사기를 치려고―!”
“그대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 아닙니까.”
냉랭한 눈빛에 알센 여왕은 움찔했다. 그녀가 뒤로 몸을 물리는 걸 확인하며 가이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일시적인 레드존의 기류 변화와 지진을 감지했을 것이 아닙니까. 때문에 라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을 때 엔온을 추격하는 척을 하면서 땅을 조사했던 게 아닙니까. 혹여라도 땅의 위치가 달라졌나,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
알센 여왕과 치울스 왕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기묘한 침묵이 그곳을 감싸고 있었다. 가이나와 라울은 그에 밀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그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한번은 떠보는 말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해서 그들의 반응을 끌어내게 된다면 이쪽은 한결 더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애초에 같은 의도를 지니고 이 자리에 참석했기 때문에 가이나도 꽤나 잘해주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릴 것임을 예감하며 라울은 알센 여왕을 노려봤다. 여왕의 입술 꼬리가 살짝 꿈틀했다. 그 반응에 라울은 확신을 얻었다.
치울스 여왕은 레드존에 대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애초에 측실의 아이였다. 인어의 피가 전혀 흐르지 않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존재. 순수한 혈통은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을 거다. 그런 그녀와 동생이 암만 노력을 해본다 한들, 그 무엇도 얻어낼 수 없을 거다.
알센 왕은 그와는 다른 의미지만 그래도 비슷한 면모가 있었다. 피를 이어 나가던 그들은 심각한 돌연변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조금씩 다른 가문의 사람들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그리해서 지금 알센 왕의 아들들은 모두가 건강했다. 고집스럽게 핏줄을 지키려 했다면 그렇게까지 튼튼한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은 11년 전에 시도를 해본 것이었다. 자신의 피가 얼마나 레드존에 통할 것인지 시험을 해보고 싶었을 테지만 결과는 암담했다.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에 반해 노르디아는 착실할 정도로 피를 지켜 나가고 있었다.
지금이 한계선일지도 몰랐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제대로 된 인간이 태어날 수 없을 거다. 포기를 하고 마느냐. 아니면 그래도 피를 이어가느냐. 그 길목에 서 있는 입장이었다.
어쩌면 이번 사고는 좋은 계기를 마련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떤 식으로든지 변화는 필요했으니 말이다. 저들에게도 말이다.
“한 가지 더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까.”
“이제는 듣기가 무섭군.”
알센 여왕의 심기가 불편한 듯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이번에 엔온의 무리가 제 유전자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치울스 왕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그는 라울 쪽으로 몸을 불쑥 내밀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말 그대로입니다.”
“유전자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것을 훔쳐 간다 해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 복제는 지금의 과학 단계에서 이루어질 수 없어.”
“유전자라고 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 않겠습니까.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여인이 제 아이를 임신할 수도 있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정자가 있으면 될 일이었다. 그 정도는 지금 기술로 어떻게든 가능할 법도 한 일이었다. 하지만 위험률이 높아 왕실 내에서도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걸 엔온에서 빼돌려 간 거란 말인가.
믿을 수 없었던 치울스 왕은 중얼거렸다.
“정자를 추출해 놓고 있었던 건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가이나와 라울은 둘 다 입을 다물었고 알센 여왕은 테이블을 후려쳤다.
“그런 위험한 짓을 하다니! 도대체 엔온의 어떤 놈들이 그걸 가지고 간 거란 말입니까?! 이번에 마찰이 있었던 그들입니까?!”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엔온은 집단이나 그 갈래가 여러 가지입니다. 암시장과도 연결이 되어 있지요.”
“네 유전자가 흘러나간 것에 암시장이 개입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런 거라면 암시장에도 압력을 행사해야 할 겁니다.”
순간적으로 알센 여왕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당황이 전해졌다. 라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왜 그러십니까? 암시장은 건드리기 껄끄러우신 겁니까.”
“아니다. 그저…….”
“이미 저는 그들과의 마찰이 있었습니다. 두 번의 마찰이야 두렵지 않습니다.”
엔온과 그들이 관련이 되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두 나라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들은 선뜻 이쪽 생각에 동조할 수 없는 거였다. 어떤 식으로든지 그들은 이 화제를 회피하려 할 거다. 암암리에 암시장과 튼 거래가 수도 없이 존재할 테니.
“암시장은 여러 가지 요인을 생각해 볼 때 존재하는 것이 낫소.”
역시나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이미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기에 라울이나 가이나 둘 다 당황하지 않았다. 치울스 왕은 다른 대안을 생각한다는 듯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엔온을 붙잡아야겠군. 누가 당신의 그것을 빼돌려 간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야. 혹여라도 그들이 아이를 가져 그 아이가 태어나게 된다면―.”
“레드존에 들어가 재차 시도를 해볼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그들 나름의 핏줄을 만들어 언젠가 레드존을 손에 넣으려 들 겁니다.”
그 아이가 레드존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거라 확신을 품고 이런 말을 하는 건가. 동시에 그것에 대해서 생각한 치울스 왕과 알센 여왕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치울스 왕이 가이나에게 물었다.
“노르디아 여왕. 아직 당신들의 피가 레드존에 통한다는 걸 이런 식으로 알려주려는 겁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노르디아의 왕통이 인어에 가장 근접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반박하실 수 없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레드존에 라울이 들어간 거지, 제가 들어갔던 것이 아닙니다.”
가이나의 이번 발언에는 라울도 그녀를 돌아보게 되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로 가이나는 말을 이었다.
“라울은 상처를 입었을 뿐입니다. 흘린 피의 양이 적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서 심장에 검을 박아 피를 뿌린다면 어찌 될지, 한번 시도를 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 위험한 발언을 하시다니―!”
“이번 일을 통해 치울스와 알센이 연합해서 노르디아에 압력을 행사한다면 전 바로 그리할 것입니다.”
치울스 왕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가이나는 알센 여왕을 노려봤다. 강렬한 눈빛에 알센 여왕은 숨을 죽였다. 기에 눌리는 듯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빈정거리거나 표독스럽게 굴던 모습은 모두 사라졌다. 순식간에 가이나가 모든 걸 사로잡았다. 지금까지 조용했던 그녀가 한 발언은 다른 두 나라의 주인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치울스 왕은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위험한 발언은 하지 마십시오.”
“앞서 지루하게 말을 했던 모든 것들이 여러분들이 할지도 모르는 행동에 사전 경고를 하기 위함입니다. 아직 전 레드존에 들어가지 않았고, 노르디아에는 다른 왕통이 존재합니다. 라울뿐만이 아니라 라우젝도 있습니다.”
라우젝에 대한 말은 모두의 귀에 들어갔을 거다. 10여 년 전에 라우젝은 다른 나라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만큼 뛰어난 이가 있으면 그리된다. 하지만 성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러나야만 했다. 왜 그래야 했던 걸까.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 슬프기도 하나 동시에 화도 났다. 이건 단순한 화풀이일 뿐이라고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 것을 경고 드립니다. 엄밀히 말해서 지금 이 시대에 레드존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건 엔온이나, 라울, 그리고 당신들이 아닙니다. 바로 나입니다.”
힘이 실린 말은 모두를 기죽게 만들었다.
“나 가이나가 레드존의 주인이 되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끔 해주십시오. 그 모든 것들이 당신들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입을 다문 가이나는 알센 왕과 치울스 여왕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에 라울도 움직였다. 여왕이 지나갈 수 있도록 의자를 다른 쪽으로 치워 내려 했지만 가이나는 그 전에 빠져나왔다.
빠른 걸음을 옮기는 가이나의 안색은 굳어 있었다. 가이나의 옆을 따라잡으며 라울은 그녀를 불렀다.
“여왕 폐하.”
“라울. 이번 일은 네 뜻대로 하면 된다. 하지만 책임도 져야 할 거다.”
발을 멈추며 동시에 가이나는 라울을 노려봤다.
“네 말대로 되지 않아 전쟁이 반발하게 된다면 너는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목이 잘리는 것만으로는 그 책임을 다 지지 못할 거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걸 마주하며 라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전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확신하지 마. 그건 위험한 거다.”
“폐하. 이미 뿌려진 패입니다. 그것이 거짓이라도 진실이 되게 해야 합니다.”
라울의 말에 가이나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거짓이라도 그게 진실이 되게 한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저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역사는 희대의 사기꾼과 허풍쟁이로 인해 움직인다. 그런 이들을 지금까지 몇이나 봤다. 나는 그 역할을 할 이가 라우젝이나 오르베라 생각했다. 그게 네가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정말로 몰랐다.”
“그들 모두 같은 핏줄입니다. 저라 해서 뭐가 다르겠습니다.”
“아니. 넌 다른 사람이다.”
라울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절 특별한 사람 취급을 해주시는 겁니까.”
“그런 존재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단호한 말에 라울은 입을 다물었다. 복잡함을 띤 눈동자를 하고 있는 라울을 노려보며 가이나는 말했다.
“너는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테지. 하지만 난 너를 계속해서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할 거다. 그리고 노르디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 믿고 따르게 해야 할 거다.
믿음과 신뢰는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 여왕으로서 나는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너도 그걸 따라야 할 거다. 이 정도쯤은 해줄 수 있겠지?”
지금까지 네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원하는 것을 모조리 하며 살 수는 없었다. 이미 패는 던져진 후였다. 어떻게든 전쟁은 막을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제부터 뒷수습이 관건이었다. 암시장과 엔온. 그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할까. 잠자코 있던 라울은 중얼거렸다.
“전 노력할 것입니다. 폐하.”
그 말을 들은 가이나의 굳은 얼굴이 아주 조금 풀렸다.
하품을 하는 동안 마기휼의 입이 점점 커졌다. 찢어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크게 벌어지자 레이라는 눈을 댕그랗게 떴다. 바로 입을 다물긴 했지만 신기해하는 레이라의 눈빛에 마기휼은 멋쩍어했다.
“왜 그렇게 봐? 오빠가 하품하는 게 이상해?”
“이상해. 책에서 본 하마 같아.”
“하마라니. 너무한데. 오빠는 하마보다 잘생겼어.”
마기휼은 냅다 레이라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그 위에 턱을 비볐다. 아프기도 하지만 모처럼 예쁘게 머리를 묶어 올렸던 레이라는 잽싸게 물러선 레이라는 양손으로 머리 모양을 확인했다. 그 모습에 마기휼은 시무룩해졌다.
“레이라 너무해. 큰오빠보다 그깟 머리 스타일이 더 중요한 거야?”
“그깟이 아니야. 이건 엄마가 정성껏 묶어주신 머리란 말이야.”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는 레이라지만 마기휼은 내내 침울한 얼굴이었다.
“아아. 여자애들은 크면 소용이 없다더니 딱 그 짝이야. 큰오빠는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그런 말을 해도 이제는 안 속아 넘어가. 얼른 일어나서 옷 갈아입어. 점심은 다 함께 먹기로 했잖아. 다들 준비가 되었는데 큰오빠만 아직도 한밤중이야!”
“어쩔 수 없잖아. 큰오빠는 요새 자도 자도 졸리단 말이야.”
웅얼거리며 마기휼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눈이 반쯤 풀린 게 불안했다. 저대로 있다가 바로 자버릴 것 같았던 레이라는 다급히 마기휼의 옆으로 가 마기휼의 등을 토닥였다.
“큰오빠, 안 돼. 지금 눈 떠야 돼. 벌써 11시란 말이야!”
“아직 11시인 거네. 40분에 일어나서 20분 만에 후다닥 씻고 옷 입으면 돼.”
“그러면 안 돼!”
“하아―.”
더 늑장을 부리고 싶어도 레이라 때문에 안 될 것 같았다. 졌다며 양손을 든 마기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적거리기는 하나 마기휼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레이라는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이제부터 씻고 옷 입어.”라고 하더니 바로 밖으로 나갔다. 애초의 목표였던 마기휼의 잠 깨우기를 성공하자 더는 용무가 없어진 거다.
하지만 레이라가 나가고 난 후, 더 졸려졌다. 침대 가에 몸을 기댄 후 마기휼은 입을 크게 벌렸다. 레이라가 보면 재차 하마라고 놀려 댈 만한 모습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마기휼은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맹한 얼굴을 하던 것도 잠시,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고개를 짧게 두어 번 털어 냈다.
요새는 자도 자도 졸렸다. 원래 이맘때쯤이면 잠이 많아지긴 했지만 요즘은 더 심했다. 머리만 붙이면 당장 꿈나라고, 서 있다가도 졸기가 일쑤였다. 무슨 병에 걸린 게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병이라. 걸렸다면 그거 하나밖에 없는데. 그건 바로 임신이었다.
“그걸 하면 원래 잠이 많아지나.”
아직 8개월도 넘게 남았을 텐데 벌써부터 이러면 앞으로는 어쩌라는 거야.
목을 좌우로 까닥이며 마기휼은 천천히 일어섰다. 방 안에만 있으면 더 늘어질 것 같았다. 간단하게 걷기부터 할까. 그런 느낌으로 복도로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장신의 사내가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일어나셨습니까.”
인사를 건네는 사내는 시종의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건장한 체격에 단단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저택에서 일을 하는 시종은 아니고 라울이 붙여 둔 군인이었다. 그 외에도 몇몇 더 있었다. 저택 안과 밖으로 더 많은 군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목적은 모두 마기휼을 보호하는 것에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짓 하면 다들 알아볼 게 아니냐고 생각했던 마기휼이었으나 이제는 편안했다. 수시로 라울과 연락을 취할 수 있기도 했고 말이다.
마기휼은 사내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이야. 잠은 좀 잤나?”
“새벽에 2시간 정도는 잤습니다.”
“2시간이라…….”
이쪽더러 그리 자라고 한다면 못 버틸 게 분명했다. 요즘은 거의 10시간 가까이 자는 것 같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굉장히 게을러진 거였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좋지 않았다. 슬슬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최근 똥배도 나오고 몸도 둔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안 좋았다.
설마하니 애가 한 달 사이에 커져서 아래 배가 나올 리는 없겠지. 이상한 생각을 다 한다며 스스로에게 타박하며 마기휼은 사내를 지나쳐 걸어갔다.
라울이 떠날 때, 그는 마기휼이 이곳에 있었으면 했다.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왠지 좀 큰 건인 것 같았다.
라울은 숨기려 들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눈치 백단인 자신에게 걸리면 다 끝장이었다. 문제는 언제 라울이 그것을 순순히 불 것이냐는 거였다. 언제까지고 숨기려 들면 재미없는데. 뚱한 얼굴을 하던 마기휼은 이내 뒷목을 주물렀다.
일단은 할 일부터 할까. 마기휼은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가족들과 다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테이블 가득 맛있는 음식이 좌악 깔려 있었다. 각각 입맛에 맞는 걸 준비하도록 했다. 분위기가 어색한 것도 곤란한데 맛없는 걸 먹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즐겁고 행복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주문했다.
“맛있겠다.”
각자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할 수 있도록 했다. 레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므라이스를 앞에 둔 레이라는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옆에 앉은 마기휼을 올려다봤다.
“나 이거 다 먹어도 돼?”
“다 먹으면 돼지 될 거다. 절반만 먹고 절반은 큰오빠한테 양보하는 건 어떨까?”
돼지 된다는 말에 레이라는 당장 볼을 통통하게 부풀렸다.
“너무해. 레이라는 지금 날씬하단 말이야. 뭘 먹어도 날씬해.”
“지금은 그래도 자라면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큰오빠 미워.”
“미워하지 말고 반만 주면 되잖아. 그러면 큰오빠도 닭요리 절반 줄게. 어때?”
마기휼은 자신의 몫으로 나온 닭 날개 튀김 요리를 슬쩍 내밀었다.
노릇하게 익어 소스가 듬뿍 발라진 고기는 입 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맛있어 보였다. 순간 혹해버린 레이라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심 쓰듯이 오므라이스의 반을 잘랐다.
“돼지라고 놀려서 주고 싶지 않지만 닭요리를 위해서 나누어 주는 거야.”
“아이고. 우리 레이라는 착하기도 하지.”
접시에 반으로 가른 오므라이스가 놓이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잘 먹겠다고 외쳤다. 그리고 바로 수저를 들고 맹렬하게 먹기 시작했다. 한입 크게 먹은 레이라는 뺨을 감싸며 몸을 배배 꼬았다.
“맛있어―.”
“진짜 맛있다. 그치?”
묻는 말에 수저를 입에 문 채로 레이라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해하면서 오므라이스를 크게 떠 입 안에 넣는 동안 마기휼도 오므라이스와 닭날개 요리를 함께 맛을 봤다. 닭요리도 일품이긴 하지만 오므라이스도 부드러운 게 목 넘김이 좋았다. 폭신폭신한 달걀이 일품이었다. 우리 주방장이 이렇게나 솜씨가 뛰어났나? 급료를 인상해줘야겠다며 마기휼은 감탄을 했다.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었다. 왜 이렇게 맛있는 게 많은지 모르겠다. 갑자기 샐러드도 당긴다. 어디에 있나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드는데 다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레나와 가휼이 보였다. 옆을 내려다보자 레이라도 먹던 걸 멈추고 수저를 입에 물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이상한 짐승을 보듯이 쳐다보는 눈빛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왜 그래?”
“큰오빠 정말 잘 먹는다.”
“당연하지. 레이라 너보다 몸이 얼마나 크냐.”
“키는 커도 몸은 호리호리하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이 먹어?”
그러고 보니 평소에도 먹는 양이 대단했다. 밥 먹고 간식 먹고, 그러다가 또 밥 먹고 간식 먹고 하기를 반복하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리 먹고도 배는 별로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뱃속으로 커다란 주머니가 있어 먹는 대로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체격이 좋은 것도 아니고.
레이라는 앞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엄마랑 가휼 오빠는 왜 하나도 안 먹어?”
지적을 받은 가휼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지금부터 먹을 거야.”
가휼이 느릿하게 칼질을 하는 걸 확인한 레이라는 이번엔 레나를 쳐다봤다. ‘왜 안 먹고 있어?’ 그리 묻고 싶은 눈빛을 던지자 레나도 먹을 거라는 대답을 하며 스튜에 스푼을 넣었다.
난리를 떨던 마기휼과 다르게 두 사람이 식사를 하는 건 무척이나 조용했다. 왁자지껄하게 함께 어울려 먹는 편이 훨씬 더 즐거운데.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재차 말을 꺼낼 수 없었던 레이라는 마기휼을 흘깃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마기휼은 당장 고기를 썰어 그릇에 내려놨다. 그리고 빙긋 웃자 레이라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된 레이라는 마기휼의 그릇에 놓인 당근을 집어 크게 한입 넣었다. 그리고 다시 즐겁게 음식을 먹었다.
잘 먹는 레이라를 흡족하게 보던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가휼과 레나는 음식을 먹고 있어도 그게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를 모르는 듯싶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겠지. 지금 이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고 싫을 거다. 하지만 이런 자리는 중요했다. 그들에게도, 레이라에게도 말이다.
마기휼은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맛있다. 심각한 분위기라 할 수 있는데도 왜 이렇게 입맛이 도는지 모르겠다. 그냥 아무거나 막 먹어도 맛이 좋았다. 살이 찌려고 그러나.
포크를 입에 문 채로 마기휼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저울에 올라가서 위에 길게 내려온 줄에 추를 걸었다.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추가 점점 평형을 맞춰 간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 마기휼은 저울의 눈금을 확인하곤 안색을 굳혔다.
“쪘잖아?”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똑같은 체중이었는데 지금 확실하게 체중이 불었다. 무려 2.2kg이나 말이다. 하긴 그렇게나 먹어 댔는데 살이 안 찌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그래도 심각한데. 앞으로 체중 유지를 해야겠다며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저울의 눈금을 노려봤다.
“큰도련님.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묻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주방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쪽을 보는 얼굴은 당황이 역력했다. 그에 반해 마기휼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 체중을 재보고 있었어.”
“그건 육류를 재는 체중계인데요.”
“아무려면 어때. 무게는 정확하게 나올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말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걸어서 무게를 쟀던 저울에 떡하니 서 있는 마기휼이라니. 솔직히 처음 보고 놀랐다. 주방장이 이도 저도 아닌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저울에서 내려온 마기휼이 밖으로 나갔다.
고기 창고 밖으로 나온 마기휼은 허리에 양손을 올리곤 고개를 들었다. 강렬한 햇빛이 기분 좋았다. 온몸으로 내리쬐는 느낌이 일품이라면서 활짝 웃고 있으려니 소리가 들렸다. 바람을 가르는 음향. 눈을 뜨자 저기 멀리서 날아오는 화물선이 보였다.
로노베로 배가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흐음.”
하루에도 몇 번씩 배가 들어온다. 그것에 일일이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겠지만 반사적으로 그리로 시선이 가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저기에 라울이 타고 있는 건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집중해서 위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의 얼굴을 못 본 지도 거의 10여 일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기에 이렇게나 얼굴 보기가 힘든지 모르겠다. 설마하니 안 올 생각은 아니겠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기휼의 얼굴이 굳어진다. 뚱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툭 내밀고 있던 그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재수 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안 오지는 않을 터였다. 지금은 그저 바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야. 암, 그렇고말고.
고개를 끄덕이며 마기휼은 발을 뗐다.
오늘 하루도 뭘 하면서 지내야 할까. 지금까지 이런저런 놀이를 잔뜩 하고 있었는데 슬슬 식상해지던 참이었다. 말이나 호피를 타고 싶지만 그건 몸이 흔들리니까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싶어 할 수도 없었다. 종종 잊고 있지만, 지금 임신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배 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걸음을 멈춘 마기휼은 양손으로 배를 눌렀다. 배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진지했다.
괜찮겠지. 잘 크겠지. 태어나는 게 걱정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나에 꽂혀서 걱정을 하면 끝도 없는 법이라며 마기휼은 옆을 쳐다봤다.
창고에서 짐마차가 나왔다. 그곳에 걸터앉아 있는 건장한 시종들을 확인한 마기휼은 눈을 빛내며 그리로 달려갔다.
“이봐! 지금부터 밭으로 가는 거야?!”
마부석에 걸터앉아 있던 사내는 마기휼을 발견하고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그걸 가슴에 댄 채로 공손히 말했다.
“지금부터 밭을 갈아 둬야 나중에 일하기가 수월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러면 나도 같이 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시종들은 ‘응?’ 하는 반응을 했다. 지금 마기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들은 그가 냉큼 마차에 올라타자 당황했다.
“같이 가자니요. 이러지 마십시오. 주인님께서 아시면 큰일 납니다.”
“주인님이라는 사람이 내 동생이야. 큰일 날 게 뭐가 있다 그래. 그러지 말고 어서 가기나 해. 시간 늦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그들이 머뭇거리는 동안 마기휼은 구석에 놓인 신을 꺼내 신었다. 서서 신는 게 불편한지 마차 안에 둔 낡은 천 위에 철퍼덕 앉는다. 그리고는 구석에 있는 신을 찾아 신고는 매듭을 묶는 손길이 능숙했다. 이런 일은 이미 몇 번이나 해본 적 있다는 투였다.
갑자기 나타나 최근 저택에 머무르는 마기휼은 시종들에게 있어 아직은 낯선 인물이었다. 동생인 가휼이 주인님 노릇을 하며 실권을 다 쥐고 있는 것 같은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늦게까지 잠을 자고 아무 때나 밥을 찾고, 복도를 걸으면서도 거침없이 하품을 하거나 했다. 귀족인데도 털털한 면은 사용인들과 똑같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군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노르디아에서 유명하다는 라울 대령과 함께 일을 하고, 그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다는 소문이 도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느슨하게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아도 정말은 대단한 사람일 거라며 시종은 조심스레 시선을 교환했다.
밭으로 가서도 마기휼이 흙을 만지지 않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면서 그들은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언덕 위까지 모두가 가문의 땅이었다. 이번에는 돈이 될 만한 걸 재배할 예정이었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땅도 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훨씬 더 힘이 들 거다. 열심히 하자며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들은 농기구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그때 관리 감독을 맡은 얀은 뒤를 돌아봤다.
“큰도련님이 어디로 가셨지?”
어떤 식으로 일을 하면 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할 때까지만 해도 뒤에 있었던 마기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얀의 눈에 저기 아래에 서 있는 마기휼이 들어왔다. 언제 간 건지 한 손에는 농기구를 들고 있었다. 동시에 그걸 높이 들어 올리는 걸 본 얀은 기겁을 하며 그리로 뛰어갔다.
“큰도련님! 하지 마십시오!”
이 사실을 가휼이 알게 되면 불호령이 떨어질 거다. 가휼은 평소에도 마기휼을 끔찍하게 생각했다. 마기휼이 저택에 지냄에 있어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않도록 하라며 몇 번이나 고용인들에게 신신당부를 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 사실을 안다면―. 상상만 해도 무섭다며 한달음에 마기휼에게 다가선 얀은 그가 쥐고 있던 농기구를 붙잡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왜 그래?”
막 농기구를 높이 들어 바닥을 내려치려 했는데 왜 그걸 붙잡는 건지 모르겠다. 덕분에 양손을 위로 든 채로 멈춰버렸지 않나. 지금 이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기나 하냐며 인상을 쓴 채로 마기휼은 뒤를 돌아봤다.
험악한 마기휼의 얼굴에 아랑곳없이 얀은 단호하기만 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이걸 주인님께서 아시면 전 얻어맞습니다!”
“그 전에 나한테 두들겨 맞고 싶으냐? 나는 지금 이걸 하고 싶다고. 그런데 그걸 방해해? 장난하냐? 앙?”
실실거리면서 웃고, 하품을 하고, 아무 데서나 픽픽 쓰러져 자던 마기휼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가늘게 떠진 보랏빛 눈동자에 서린 날카로운 기운을 감지한 얀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았다. 얀의 손이 떨어지자 마기휼은 짧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다시 밭을 갈았다.
처음에는 어설프게 하는가 싶더니만 점점 능숙해진다. 이런 일은 이미 몇 번이나 해본 적이 있다는 투였다. 조금 전 보였던 무서운 얼굴은 일부러 그런 걸지도 몰랐다. 이쪽을 겁줘서 하는 일을 방해 받고 싶지 않은 거다. 하지만 나서서 일을 하는 귀족 같은 건 본 적이 없었던 얀이니만큼 지금 이 상황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은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지만, 언제 갑자기 마음이 바뀔지 모르는 일이었다. 자기가 한 일을 가지고 이쪽이 시켜서 그런 거라고 말을 한다면 당장 모가지였다. 저택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거였기 때문에 얀의 심경은 복잡하기만 했다.
“걱정하지 마.”
마치 속이 읽힌 것 같았다. 움찔한 사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자주 밭을 갈았어.”
마기휼은 농기구를 밭 위에 꽂고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농기구에 묻은 흙을 손가락으로 털어 냈다.
“네가 언제 이 저택에 온 건지 모르겠지만 이 근방에 있는 밭은 대부분 아버지와 내가 매년 와서 정리를 했지. 씨도 뿌리고, 농작물이 나면 수확도 같이 했다고. 지금 아버지는 안 계시지만 일을 하면서 그때의 느낌을 되살리고 싶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이런다 해서 너한테 아무런 문제는 없을 거야.”
마기휼은 얀을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큰도련님 소리를 들어도 너희들 주인님의 형님이야. 말발로는 내가 더 위라고.”
반짝거리는 보랏빛 눈동자가 마치 아이 같았다. 평범하지만 선이 곱다고 생각했던 사내가 저렇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니 괜히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상한 설렘이 드는 걸 느끼며 얀은 얼굴을 붉혔다.
“힘드시면 말씀하십시오.”
“됐으니까 그만 가 봐. 난 열심히 일하고 싶으니까.”
“……실례하겠습니다.”
더는 마기휼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달은 얀은 조용히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혼자 남게 된 마기휼은 농기구를 바닥에 내려놓고 양손을 흙 안에 넣었다. 햇빛을 받은 흙이 따스했다. 더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 넣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따뜻하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손만이 아니라 발도 넣고 싶었다.
마기휼은 엉덩이를 대고 앉아 신을 벗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시종들이 이쪽을 보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신을 다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가락이 흙 속으로 들어가자 안심이 된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파랗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카락을 흔드는 걸 느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고향의 냄새가 났다. 태어나서 오랫동안 맡고 느낀 바로 그 감각이었다. 새삼 이렇게 하고 있으려니 이 땅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 걸 느꼈다. 아름다운 장소였다. 여러 가지 일이 그 사이에 벌어졌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웠다. 모든 것들이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기휼은 양손을 들어 배를 눌렀다.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초조함은 사라지고 그저 너그럽기만 했다. 한결 편안해진 채로 미소를 짓던 마기휼은 농기구를 다시 집어 들었다. 오늘 내가 여기 절반은 다 갈아버릴 거라며 눈을 반짝이며 높이 농기구를 들었다. 허공으로 뜬 농기구의 겉면의 녹이 슨 부분이 내리쬐는 햇빛의 절반을 가렸다.
가운데 땅을 경계로 위가 아버지의 땅이고, 아래가 자신과 가휼의 땅이었다. 기본적인 것들에 손을 빌려주긴 했지만 세세한 모든 건 고용인들의 몫이었다. 그들이 알아서 잘 키워주기는 했지만 내기를 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잘 자라면 전부 자신의 덕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가 되어 잔뜩 쌓은 작물을 보고 그 양을 재고는 했다. 이기면 아버지에게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기면 이쪽이 주는 상은 늘 똑같았다. 뺨에 뽀뽀. 그것뿐이었고 그건 15살이 훌쩍 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바위에 앉은 마기휼은 가지런히 정리된 밭을 내려다봤다. 어렸을 때에는 한참이 걸렸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의외로 시간이 적게 걸려서 놀랍기도 했다. 거기다 꽤나 쓸 만하게 잘 갈아냈다. 새롭게 간 땅은 돌이 걸려 힘들었지만, 한쪽에 잔뜩 쌓인 돌들을 보니 내심 뿌듯했다.
군인 그만두고 농사나 지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말과 동시에 옆으로 물 잔이 내밀어졌다. 그걸 받은 마기휼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 가지고 피곤하면 다 된 거지. 난 아직 이십 대야.”
내년은 서른이지만 말이다.
물을 마신 마기휼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시원한 느낌에 눈을 감고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정말 좋다. 그런 심정으로 멍하니 있다가 얀을 올려다봤다. 얀은 마기휼이 간 밭을 보고 감탄을 하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어때? 나 도움이 되지?”
“정말 잘하시는군요.”
“경험자라니까. 내가 4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나왔어.”
너희들보다는 훨씬 더 잘할 거다. 그런 생각도 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모처럼 몸을 움직여서 기분이 좋았다. 싱글거리고 웃는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은 위에서 들리는 말 울음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마차가 보였다.
마차 창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한 마기휼의 얼굴로 미소가 걸렸다.
“레이라다.”
마기휼은 일어서선 위로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차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던 레이라가 활짝 웃으며 양팔을 흔들었다. 바깥으로 떨어질 것 같았는지 안쪽에서 나온 손이 레이라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그 뒤로 나온 얼굴은 가휼의 것이었다.
아직은 좀 껄끄럽다. 하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지는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이 나왔다. 편안한 상태로 마기휼은 손을 흔들었고, 그 손길에 가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태운 마차는 금방 밭 앞에 도착을 했다. 밖으로 나온 레이라는 주변을 둘러보다 마기휼을 똑바로 응시했다. 밭을 정리하던 중이라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로 가기 위한 정리된 길이 없었다. 마기휼을 보려면 흙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면 예쁜 구두가 지저분해질 것 같았다. 말은 안 해도 큰오빠가 이리로 왔으면 싶은 눈으로 쳐다보는 게 뻔했지만, 마기휼은 손을 까닥였다.
레이라는 망설임이 가득한 얼굴로 있다가 천천히 밭으로 한쪽 발을 내렸다. 근처에 있던 시종이 그런 레이라를 만류했다.
“아가씨. 넘어지십시다. 구두도 더러워질 거예요.”
움찔한 레이라가 시종을 쳐다봤다. 시종이 깨끗한 차림이었다면 레이라를 안아 들고 내려가는 게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그리할 수 없었다. 레이라는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가휼이 미소를 지었다.
“레이라. 땅은 더러운 게 아니야. 이 땅은 큰오빠가 정리를 한 거란다.”
“더럽다고 생각하진 않아.”
웅얼거린 레이라는 당장 밭으로 들어갔다. 한 발 넣자마자 흙이 구두 위를 덮는다. 근처에 있던 시종이 놀라 움찔하는 게 보였지만 레이라는 씩씩하게 마기휼에게 걸어갔다. 울퉁불퉁한 밭을 걷는 게 익숙지 않아서 몇 번이나 비틀거린다. 그렇게 간신히 코앞으로 온 레이라를 향해 마기휼은 귀부인들에게나 할 법한 인사를 건넸다.
“아가씨. 어서 오십쇼. 이곳은 어떠십니까?”
언제나처럼 장난을 거는 마기휼을 똑바로 바라보며 레이라는 뒷짐을 지었다. 입술을 앙다무는 게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하는 것 같았다. 레이라는 턱을 위로 들며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나쁘진 않아요.”
“아가씨의 예쁜 구두가 지저분해졌는데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상관없어요. 묻은 흙은 털면 되는 거니까요.”
“그래. 똑똑하다.”
마기휼은 레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위해서 손을 들었다. 나이 차가 20살 넘게 나다 보니 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밭을 정리했기 때문에 손은 지저분한 상태였다. 레이라의 단정하게 묶은 머리를 건드리기에는 조금 무리가 될 듯싶어, 위로 손을 든 채로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레이라가 그런 마기휼의 손을 붙잡았다. 하얗고 작은 손에 감싸인 갈색의 손은 흙이 묻어 있었다. 레이라는 상관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레이라의 행동에 처음에는 놀랐던 마기휼은 곧 미소를 지었다. 그러던 그는 맨발을 위로 들었다.
“레이라, 이거 봐라.”
“어? 신 벗었다. 그러면 엄마한테 혼나.”
“큰오빠는 어른이라 엄마한테 안 혼나. 그리고 맨발로 흙 위에 서는 거 꽤나 기분 좋아.”
“정말?”
바로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얀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큰도련님. 흙 속에 날카로운 게 있으면 상처가 생깁니다.”
그러니까 레이라에게 괜한 말은 하지 말라는 거였다.
하지만 얀이 하는 말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기휼은 레이라를 내려다봤고, 레이라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가휼의 다리를 붙잡나 싶더니 구두를 벗고 레이스가 달린 양말도 벗었다. 구두를 든 채로 레이라는 흙을 밟고 있는 자신의 맨발을 내려다봤다. 처음에는 낯선 듯 발가락 하나하나에 모두 힘이 들어가 있었으나 금방 적응을 마친 듯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마기휼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마기휼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어때?’라는 눈빛을 보냈다.
“이상한 느낌이야.”
“이 땅에서 레이라 네가 먹는 채소와 야채들이 나는 거야.”
레이라는 눈을 깜박였다. 아직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을 했다. 아주 예전에 했었던 놀이가 떠올랐다. 마기휼은 손짓을 했다. 이리 오라는 사인을 읽은 레이라가 냉큼 마기휼의 옆으로 가 섰다. 그런 레이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마기휼이 본인이 있는 곳을 경계로 위와 아래를 손으로 갈랐다.
“잘 봐라. 레이라. 지금 이 바위를 경계로 이 위는 이제부터 큰오빠의 밭이고, 아래는 레이라 너의 밭이야.”
마기휼이 하는 말을 들은 가휼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어렸을 적, 그들 형제와 부친이 했던 일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가휼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레이라에게 교육을 하고 싶었다. 레이라가 다른 여자들처럼 재미없는 귀족가의 아가씨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말괄량이에 우악스러워도 상관없었다. 보다 주관이 뚜렷하고 영리하고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개척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었다.
자신과 가휼은 그런 면이 부족했다. 움츠러들고 스스로를 숨기고, 그러다가 실수를 저질렀다. 레이라가 두 사람처럼 될 필요는 없었다. 아주 나중에 레나와 가휼에 대한 일을 알게 된다 해도 그걸 그 나름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 되었으면 싶었다. 물론 평생 알지 못하도록 엄청난 노력을 할 테지만 말이다.
“한 해를 정리할 때가 되면 창고에 많은 것들이 쌓이게 될 거야. 그때 수확되는 양을 보고 누가 이기나 경쟁을 해보자.”
마기휼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레이라는 고개를 들었다.
“아래 땅에서 나오는 건 모두 레이라의 거야?”
“그래. 그리고 위의 땅에서 나오는 모두 큰오빠 거야.”
“수확이 되는 양을 두고 겨뤄보자는 거야? 그러면 내가 이 땅에 직접 씨를 뿌리고 작물을 키워야 하는 거야? 그건 너무 힘들 것 같아.”
“시종들이 나와서 일을 할 때 조금만 도와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어때? 해볼래?”
“응. 해볼래.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러면 이걸 받아.”
마기휼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뭔가를 끄집어냈다. 레이라는 반사적으로 양손을 내밀었고 그 안으로 작은 것들이 후두득 떨어졌다. 작은 손바닥 안에 가득 담긴 것은 씨앗이었다.
“씨앗이다.”
“레이라 네 땅에 씨앗을 뿌려야지. 아직은 아무도 먼저 씨앗을 뿌리지 않았어. 그러니까 네가 얼른 가서 심어.”
레이라는 기쁜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맨발로 뛰어 내려갔다. 양손으로 씨앗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달려가는 모습이 다소 불안해 보였다. 간신히 아래로 내려가 자리를 잡고 씨앗을 하나하나 흙 속에 집어넣는 모습이 귀여웠다. 저렇게 넣으면 하나도 안 자랄 거다. 그래도 직접 하는 게 어딘가 싶어서 그냥 보고만 있었다.
옆으로 그늘이 생겨났다. 고개를 들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가휼이 보였다. 마기휼과 마찬가지로 레이라를 바라보면서 가휼이 말했다.
“예전에 아버지가 저희들과 했던 내기로군요.”
“그냥 내기가 아니라 교육적인 측면도 강했지. 그때 재미있었는데 말이야.”
그때는 정말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때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그 당시처럼 지내진 않을 거다. 가휼과 더 많은 시간을 지내고 스스로를 단련할 거다. 강해질 거다. 그리고 부모님과 가휼이 조금 더 시간을 지내게 하고 싶었다. 그랬다면 다른 결과가 생겨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마기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털며 재차 농기구를 잡았다. 가휼이 그런 마기휼의 손에서 농기구를 들고 갔다.
“왜? 너도 그만하라고 하게?”
“아닙니다. 저도 오랜만에 해보려 합니다.”
농기구를 들고 간 가휼은 소매를 걷고 겉옷을 벗었다. 옷을 대충 바위 위에 올리고 농기구를 짊어지고 아래로 내려갔다. 씨앗을 하나하나 흙 안에 심던 레이라가 다가오는 가휼을 발견하고는 밝은 얼굴이 되었다. “오빠? 뭐 하게?” 같은 대화 소리를 들으며 마기휼은 다시 바위 위에 앉았다.
바람이 시원했다. 땀이 다 식은 건지 아까처럼 춥지는 않았다. 허벅지 위에 한쪽 발을 올리고 뒤로 몸을 젖혔다. 눈을 감은 마기휼은 바람을 만끽했다. 흙냄새가 향긋했다. 그냥 이대로 누워서 잠을 자고 싶었다. 정말 그리할까 싶었는데 위가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주인님! 큰도련님!”
뭐지? 새참이라도 왔나? 안 그래도 출출했는데 맛있는 게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팔을 흔드는 시종의 뒤로 나타난 사내를 발견하고는 눈이 크게 떠졌다. 부름에 고개를 들었던 가휼도 흠칫한 얼굴이 되었다. 가휼과 마기휼이 모두 이쪽을 쳐다보는 걸 확인한 시종은 조심스레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 뒤에 서 있던 사내가 앞으로 한 발 더 나섰다.
하나로 묶은 단정한 금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군모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무섭도록 아름다웠다. 서늘함을 풍기는 녹빛 눈동자는 정확히 마기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마기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래로 손을 떨군 채로 방심하고 앉아 있으려니 사내가 밭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안내한 시종은 놀라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정리가 되지 않은 곳입니다.”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울은 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대단한 미남의 등장에 근처에 있던 시종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어쩐지 이곳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얀은 손짓을 했다. 슬슬 새참을 먹고 한 번의 휴식을 취해야 할 때였다. 시종들을 데리고 얀이 위로 올라가는 걸 확인한 가휼도 농기구를 든 채로 레이라에게 걸어가 손을 뻗었다.
“레이라, 가자.”
“나 아직 씨앗 다 못 심었어.”
“그건 이따가 와서 같이 하자.”
남아서 더 하고 싶었지만 쳐다보는 가휼의 눈빛이 진지했다. 더 투정을 부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소 불만이 생긴 레이라는 아랫입술을 내밀다가 마기휼의 앞에 선 라울을 쳐다봤다.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걸 느끼며 레이라는 가휼의 옆에 붙어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큰오빠랑 있는 저 사람은 누구야?”
“친구분이란다. 일단은 가자.”
가휼은 레이라를 안아 들고 위로 올라갔다. 일부러 라울과 마기휼 쪽은 보려 하지 않았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는 척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레이라와 가휼도 위로 올라가 근처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동안 라울은 앞에 서선 말이 없었다. 말없이 이쪽을 내려다보는 게 부담스럽다. 마기휼은 라울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반반한 얼굴이었다. 말끔하고 말이다. 밭을 간다고 바지를 접어 무릎까지 올리고 셔츠 하나를 입은 후줄근한 이쪽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마기휼은 웃었다.
“온다는 말을 해줬으면 저택에서 기다렸을 텐데.”
“예정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 바로 달려왔다. 연락을 먼저 취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잘 되지 않더군.”
당장은 이리로 오고 싶다는 생각만 했으니 말이다.
라울이 하지 않은 말이 전해지는 듯싶었다.
십여 일간 안 나타나던 라울이었다. 그래서 이쪽을 잊은 건가 싶기도 했지만 막상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니 기분 되게 묘했다. 좋은 건 분명하지만 그걸 솔직하게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숨기고 싶어지는 마음이 쑥스러웠다. 소녀처럼 왜 이러나 싶었던 마기휼은 손가락으로 코 위를 긁적였다.
그러자 당장 라울의 손이 내려와 마기휼의 턱 아래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으로 흙이 묻어났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은 본인의 손을 내려다봤다. 지저분했다. 이걸로는 더는 얼굴을 만지면 안 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라울이 옆으로 다가와 바위 위에 앉았다.
라울이 옆에 앉았을 때 좋은 향기가 났다. 그에 반해 자신은 흙냄새밖에 안 나겠구나 싶어서 기분이 거시기했다. 조금 더 옆에서 떨어져 있을까. 그런 느낌으로 꼼지락거리려니 라울이 입을 열었다.
“밭을 갈았나.”
“응. 어려서부터 했던 일이라 오랜만에 하려니 좀 힘들긴 해도 재미있더라고.”
“너무 무리하진 말아라.”
마기휼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눈을 가늘게 접은 그는 유쾌한 표정을 지은 채로 라울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 고작 이런 일을 한다고 내 몸이 어떻게 되는 게 아니야.”
아이가 떨어지는 그런 불상사도 생기지 않을 거다.
자신만만한 마기휼이지만 라울은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라울이나 마기휼 모두 초짜였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사고는 언제 갑자기 생길지 모르는 일이었다. 바라보는 라울의 눈빛이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에 마기휼은 말문이 막혔다. 너무 빤히 봐서 무안하기까지 하다면서 마기휼은 입술을 오므린 채로 딴청을 피웠다.
바람이 불어 앞머리카락을 모두 뒤로 넘겼다. 앞머리가 없으면 얼굴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신경 쓰여서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지나치듯 물었다.
“그런데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레드존에 관한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 듣자 하니 그쪽으로 알센이나 치울스의 군함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던데 그게 정말이야?”
“그건 또 어디서 들었지?”
“북방군 사령관님하고 연락을 좀 주고받았지.”
손을 귀 옆에 대고 통신하는 흉내를 냈다. 이쪽을 보는 라울의 눈빛이 진지했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알게 되어 자신이 제멋대로 움직이지나 않을지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그걸 읽은 마기휼은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래? 난 아직 그쪽 소속이야. 두 달 넘게 복귀하지 못하는데 걱정된단 말이야. 이러다가 군인도 뭣도 아닌 백수가 되면 어떻게 해. 난 레이라한테 멋있는 오빠가 되고 싶단 말이야.”
지금도 충분히 멋있는 오빠지만 말이다.
마기휼은 갑작스럽게 나오는 하품에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자 마기휼의 목덜미가 보였다. 하얀 셔츠와 대조가 되는 갈색의 피부. 그 위에 검은 머리카락이 몇 올 달라붙어 있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그런 마기휼의 목덜미에 닿았다. 닿았다 떨어지는 손가락 감촉에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불쾌함은 없었다. 시선이 부딪치자 마기휼은 눈을 깜박였고, 라울이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입을 맞췄다.
라울은 금방 떨어졌지만 그 온기는 아직 남아 있었다. 달콤하고 아릿했다. 입술에 닿았던 느낌이 서서히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몸이 달아오른다. 라울을 바라보는 마기휼의 눈동자가 일렁이나 싶었을 때 마기휼은 그걸 꾹 참으며 라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한숨을 토해 냈다.
“제기랄.”
중얼거린 마기휼은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움켜쥐었다.
순간적으로 참지 못하고 냅다 라울의 품으로 몸을 던질 뻔했다. 왜 이럴까. 나름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작 뽀뽀 하나에 이렇게나 달아오르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얼굴을 붉힌 채로 눈을 내리뜨려니 라울이 마기휼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전에 있던 그곳으로 갈까?”
전에 있던 곳이라니. 잠시 도피를 위해 몸을 피했던 그 오두막 말인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이쪽만큼 라울도 참지 못할 것 같았던 모양이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다. 라울의 완고한 표정이 속내를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편안해졌다.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휘며 어깨를 으쓱였다.
“전에 있던 곳보다야 저택이 더 가까워.”
라울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이런 상태로 저택으로 가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싶은 모양이었다. 마기휼은 먼저 일어나서 앞장서 걸어갔다. 뒤를 쫓아오라는 말은 없지만 라울이 따르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묘한 긴장이 느껴졌다. 등의 솜털이 다 설 정도였다. 심장이 이상하게 뛴다. 호흡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오므린 마기휼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필사적으로 평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자극에 약한 인간이었던가.
마기휼은 머리를 긁적였다.
“형님.”
위로 올라가자 가휼이 다가왔다.
“이야기는 다 나누신 겁니까.”
“아니. 장소가 아닌 것 같아서 저택으로 들어가려고.”
마기휼의 눈에 가휼과 레이라가 타고 온 마차가 보였다.
마기휼은 그걸 엄지로 가리켰다.
“나 저것 좀 빌려도 될까?”
“물론입니다. 저는 레이라와 조금 더 이곳에 있겠습니다.”
“고마워.”
마기휼은 레이라의 머리를 토닥이며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때라면 레이라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여유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은폐된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먼저 마차에 오르고 바로 라울이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자 마차가 움직였다. 이제부터 저택으로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게 될까.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눈을 굴려 댔다.
……밀폐된 공간에 있기 때문일까. 괜히 더 라울을 의식하게 된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가 지금 어떤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을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게 되었을 때 굉장히 어색한 기분이 들면 어쩌나 싶었다.
쎄한 분위기가 되는 건 싫은데.
나름 진지한 얼굴을 하던 마기휼은 어금니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어색한 분위기는 싫어. 쓸데없는 얘기라도 대화를 나누자 싶었던 마기휼은 막상 라울과 눈이 마주치게 되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다리를 꼰 채로 앉은 라울이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진지했다. 무표정을 하고 있으나 눈빛 자체는 뜨거웠다. 무릎 위에 올리고 있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마기휼의 입술이 살짝 열리는 순간 라울이 움직였다. 마기휼의 옆으로 와서 자리를 잡고 앉기가 무섭게 당장 마기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곧장 입술이 겹쳐졌다.
벌린 입술 사이로 혀가 밀려들어 왔다. 입천장과 치아를 더듬는 뜨거운 혀에 델 것 같았다. 서로의 혀가 닿았을 때에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마기휼은 라울의 목을 끌어당겼다. 서로의 몸이 손가락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찰싹 달라붙었다.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다가 코가 눌렸다. 숨쉬기가 불편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혀를 섞는 묘한 소리에 더 흥분하게 된다. 할딱거리는 서로의 호흡이 마차 안을 뜨겁게 달구었다. 위험할지도 몰라. 마기휼은 조금 더 라울에게 몸을 밀어붙였다. 라울이 마차 구석으로 밀쳐졌다. 거의 그 몸 위로 올라탄 채로 밀어붙이며 더 입을 벌렸다. 라울이 기다렸다는 듯 마기휼의 허리를 감싸 자신 쪽으로 당겼다.
머릿속으로 붉은 빛이 번득였다. 위험해. 여기서 발기하면 안 돼. 나중에 마차에서 내려야 할 때 걸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어떻게 해. 아니지. 지금도 충분히 걷기가 곤란한 상태일지도―.
마기휼은 눈을 떴다. 라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허리가 부르르 떨렸다. 소름이 좌악 돋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당장 라울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닿아 있던 입술만 떨어졌을 뿐, 몸은 여전히 밀착된 상태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라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었다.
이런 야한 모습이라니.
얼굴이 달아오른 마기휼은 손등으로 턱 아래를 훔쳤다.
“그, 그만하자.”
나오는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다. 이런 건 좋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곤란한 일이었다.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마기휼은 손바닥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마기휼은 흐트러진 숨을 할딱거렸다. 밭에서 한창 일을 하고 온 터라 지저분한 몰골이었지만, 라울은 그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기휼은 열심히 열을 식혔다. 적어도 저택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원상태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라울은 기습적으로 마기휼의 턱을 깨물었다.
“우왓!”
소리를 지른 마기휼은 바로 입을 막았다. 바깥에 소리가 나가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라울은 계속해서 마기휼에게 입을 맞추려 들었다. 라울의 허벅지 위에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 터라 적극적으로 피할 수도 없었다. 마기휼은 뒤로 허리를 뺐다.
“왜 그래. 너답지 않게.”
“보고 싶었다.”
더 적극적으로 몸을 빼내려던 순간 그게 막혔다. 마기휼은 뭔 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라울을 내려다봤다.
그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본인이 한 말에 대해 조금의 어색함도 느끼지 않는 얼굴이었다. 내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그리 묻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에 마기휼의 얼굴 위로 미심쩍음이 생겨났다.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한 거야?”
그보다 이게 정말 라울일까.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마기휼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 의심스러운 눈빛에 라울은 살짝 화가 난 얼굴이 되었다.
“이런 짓을 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원래 좀 네가 직설적인 면은 있지만-.”
듣는 사람 무안해질 말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질 때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잖아. 익숙하지 않는 만큼 어떤 식으로 행동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속 편하게 좋아할 수 없다고나 할까. 얼굴이 더 붉어진 마기휼은 마른 침만 꿀꺽 삼켜 댔다. 하지만 라울의 무릎 위에 앉은 상태에서 안정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슬쩍 라울의 팔을 밀어내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더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다른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답지 않다고 할 수 있는 모습에 마기휼도 몸에 들어간 힘을 빼내곤 그를 바라봤다.
라울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고만 있는데도 마음이 안정됨을 느낀다. 마기휼은 주먹으로 라울의 이마 가운데를 툭툭 쳤다.
“무슨 일 있구나.”
단정적으로 하는 말에 라울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이쪽은 그간 고향집에 있으면서 편하게 있었지만 라울은 그게 아니었다. 분명 달리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잔뜩이었을 터였다. 동분서주했겠지. 그런 라울의 곁에는 라우젝이나 오르베가 있었다.
……그들이 딱히 도움을 줬을 것 같진 않은데. 마기휼은 라울을 빤히 보다가 팔을 벌렸다.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마기휼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된 라울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이 행동은 또 뭔가 싶은 얼굴을 하던 그는 꼼지락거렸다. 얼굴을 들려 하자 마기휼은 팔에 더 힘을 줘 라울을 끌어안았다.
“가만히 있어 봐.”
다소 강제적으로 그리 말을 한 후 라울의 뒷머리를 토닥였다.
착하지.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을 게 분명하니까 내가 칭찬을 해주지. 그런 느낌이 풍기는 손길에 라울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가만히 있나 싶던 라울의 입가로 미소가 생겨났다. 라울은 마기휼의 가슴에 얼굴을 댄 채로 눈을 감았다.
저곳에 있었을 때에는 날이 선 상태였다.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즉시 그들이 물어뜯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노력의 보상이 이런 거라면 나쁘지 않았다. 이 보상을 받기 위해서 몇 번이고 더 고생할 용의가 있었다.
라울에게 기운을 불어넣고 싶어서 그의 머리를 끌어안은 것이긴 했지만 막상 하고 났더니 마기휼 쪽에서 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기분 좋았다. 만나기 전에는 20여 년 넘게 남이었다가 알게 된 후 고작 열흘 정도 떨어져 있었다고 이런 애틋한 기분이 드나 싶었던 마기휼은 라울의 정수리 부근에 뺨을 대고 눈을 감았다. 아, 편하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때 바깥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택 문을 지나치겠습니다. 흔들림에 주의해주십시오.”
문턱을 지날 때 마차가 좀 흔들리긴 했지만 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약간 흔들리던 마차가 잠잠해지고 속도가 느려진다. 그걸 느낀 마기휼이 다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려가야겠는데?”
“그래야겠군.”
서로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굉장히 어색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라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는 건 어찌된 연유인지 모르겠다며 마기휼은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최대한 태연하고 침착하게 행동해야 했다.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큰도련님. 오셨습니―”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던 집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집사의 모습에 마기휼은 뒷머리에 손을 댔다.
밭에서 열심히 일을 했더니 몰골이 엉망이었지. 그걸 보고 저렇게 놀라나 싶었던 마기휼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이건-”
“라, 라울 대령님이 아니십니까?!”
아, 그것 때문에 그리도 놀란 얼굴이 되었던 거냐?
집사는 마기휼의 뒤를 따라 내리는 라울을 보고는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듯 헐떡거렸다. 그리고는 황급히 예의를 차리며 물었다.
“어떻게 오신 겁니까?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는데요!”
“미안하게 됐군. 급하게 온다고 연락을 주지도 못했네.”
“아닙니다. 연락이 없으셨다고 탓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준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아, 이를 어째야 하나.”
편안한 상태로 있던 집사는 갑자기 나타난 라울을 접하는 순간 혈압이 급상승한 모양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익어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보기에 불쌍했다.
라울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해주려 했는데 그 전에 집사가 급히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걸 본 마기휼은 라울을 돌아봤다. 라울은 태연한 얼굴인데 저택에 있던 시종이나 하녀들은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이었다. 소문이 자자한 라울을 접하게 되어 놀랍겠지. 그래도 같은 사람인데 너무 저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덕분에 이쪽이 어색하게 굴어도 그걸 알아차릴 사람들은 없었다. 그거 하나는 다행이라며 마기휼은 안쪽을 엄지로 가리켰다.
“일단 들어가자.”
마기휼이 앞장서 들어갔다. 가는 동안 이쪽을 보는 시종이나 하녀들이 놀라움의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비단 이쪽만을 보고 저런 얼굴들을 하는 건 아니었다. 라울인가. 하긴 놈은 눈에 띄는 데다 초미남인데 어련하시겠어. 그래도 침 떨어지는 얼굴로 볼 필요는 없는 건데. 괜히 좀 거시기해졌던 마기휼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그쯤 되자 정신이 돌아온 집사가 급히 그들을 따르며 말했다.
“곧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응접실로 오시지요.”
“오늘은 마기휼 소령과 중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온 것이니 차는 필요 없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방해를 받고 싶지 않으니 방으로 찾아오지도 말게.”
“아, 그러십니까. 방해하지 않을 테니 대화를 나누십시오.”
훌륭했다. 일을 하는 걸로 연막을 쳐서 방으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수라니. 라울이나 되니 거짓말도 저리 능숙하게 하는 거지, 만약 이쪽이 저런 말을 하려 했다면 금방 들통났을 거라며 마기휼은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2층 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마기휼은 괜히 또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방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하게 되는 걸까.
본인의 생각에 얼굴로 열이 오른다. 기분이 이상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그러다가 곧 미간 사이로 주름이 만들어진다. 뭐, 어때. 나는 라울의 아이까지 가졌고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게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너무 의식을 하다 보면 서로가 힘들어지니까 최대한 자연스러운 행동을 취하는 게 서로에게 좋았다.
“돌아오셨습니까.”
마기휼의 방 앞에 있던 사내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마기휼의 뒤를 따라오는 인물을 확인하고는 기꺼워하며 앞으로 나섰다.
“대령님. 언제 오셨습니까?”
사내를 확인한 라울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방금 왔다. 그간 마기휼 소령의 호위를 잘 해줬더군. 수고했다.”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말은 그리해도 사내의 얼굴로 서리는 뚜렷한 기쁨은 감추어지지 않았다. 그걸 보는 마기휼의 기분은 그리 썩 유쾌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라울의 추종자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북방군에 있었을 때에도 그놈의 추종자들이 한 백여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라울이니 이 정도의 일은 가볍게 넘어가야 하겠지만 싫은 건 싫은 거라며 마기휼은 인상을 썼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간 마기휼은 욕실로 곧장 이동했다. 욕조에 물이 받아지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씻을 정도는 있을 거다. 일을 해서 땀을 흘린 상태이니 한번 씻고 싶었다. 마기휼은 뒤따라 들어오는 라울을 돌아보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금방 씻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러지.”
대답을 하는 라울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거칠게 덮치길 바란 건 아니지만 너무 태연하니 그건 그것대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이 시시각각 변하는지 모르겠다며 입술을 씰룩이던 마기휼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 옆에 있는 커다란 통에 물이 받아져 있었다. 허물을 벗듯이 옷을 벗고 낮은 의자를 들고 가 통 앞에 앉았다. 당장 바가지로 물을 받아 머리부터 끼얹었다. 온몸으로 떨어지는 물이 차가웠다. 몸을 움츠린 마기휼은 부르르 떨었다.
“완전 차가워.”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도 처음이라 이런 거였다. 몇 번 더 끼얹으면 괜찮아질 것을 알기에 두어 번 더 물을 뿌리고 세수를 했다. 발에 물을 끼얹고 발가락 사이사이를 문질렀다. 그리고 몸을 문지를 것을 찾기 위해 고개를 들던 찰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건 라울이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기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나 다 안 씻었어.”
“그래도 흙은 대충 떨어지지 않았나.”
“아니야. 아직 제대로 안 떨어졌어. 그러니까 오지 마!”
끝에 가서 목소리가 커진 건 라울이 성큼성큼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앞에 버티고 서서 손을 뻗는 것에 놀란 마기휼은 양손을 위로 들었다.
“기다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순식간에 몸이 들려지고 끌어안겨졌다. 허리가 단단한 팔에 감싸이고 당장 입이 막혔다. 항의의 소리는 콧소리에 묻혔다. 주먹으로 라울의 어깨를 마구 두드렸지만 격렬함을 품은 혀놀림에 금방 흐물해진 상태가 된다.
라울의 어깨를 치던 손은 그의 몸을 잡아당기고 몸을 밀착했다. 라울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로 마기휼은 거친 숨을 할딱거렸다. 입술은 떨어졌지만 마기휼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풀렸다. 마차 안에서야 불편해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었던 거고, 여기는 안전하다 싶으니까 금방 이성을 잃게 된다.
젖은 몸으로 라울에게 달라붙었다. 기다렸다는 듯 마기휼을 끌어안던 손이 아래로 내려간다. 허리를 타고 내려가서 엉덩이를 스치자 몸이 파르르 떨렸다.
“아읏.”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에 라울의 눈빛이 한결 어둡게 변했다. 마기휼의 귀를 깨물면서 라울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기휼.”
다른 사람이 부르는 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울림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아버리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것 같았던 마기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내 이름 부르지 마.”
그런 젖은 목소리로 부르지 말라고 하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라울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마기휼의 몸을 안아 올렸다. 입을 맞추면서 욕실 밖으로 나갔다.
자꾸만 오므려지려는 다리를 벌리고 그 아래로 손이 들어갔다.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내려간 손가락이 주름 사이로 사라진다.
주름을 넓게 벌리고 삽입되는 손가락은 벌써 세 개가 되어 있었다. 아슬아슬할 때까지 넣으면 네 개도 가능했다. 그리고 네 개가 되어야지만, 진짜를 넣었을 때 마기휼도 덜 힘들 거다.
마른침을 삼키며 라울은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아까부터 집요하게 만져 댄 탓에 이미 녹초가 된 상태였다. 갈색 피부 위로 땀이 아닌 점액질의 액체가 드문드문 뿌려져 있었다. 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있던 마기휼은 라울의 손가락이 더 깊숙이 들어와 안쪽을 건드리자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응―”
힘겨워 보이지만 아프기만 해서 저런 얼굴을 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 마기휼이 느끼는 건 쾌락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하니 저렇게 필사적인 거다. 촘촘하게 달라붙는 내벽에 들어차 있던 손가락을 서서히 빼내자 젖은 음향이 울렸다. 마기휼은 기다렸다는 듯 다리를 오므리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축 늘어진 채로 거친 숨을 헐떡였다.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당장 파고들 줄 알았던 라울이 너무도 정성스럽게 애무를 해 댄 탓에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몇 번이나 사정을 해버렸다. 지금도 몸 안쪽이 욱신거렸다. 고작 손가락뿐인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눈을 반쯤 뜬 채로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허벅지에 닿는 손길을 느끼곤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상반신을 다 벗은 라울이 마기휼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들어왔다. 똑바로 누운 상태가 된 마기휼은 가까워 오는 라울의 얼굴에 몽롱해졌다.
마기휼의 뺨에 입을 맞추며 라울은 손을 내렸다. 자신의 성기를 붙잡고 베개를 아래에 대 위치가 높아진 마기휼의 엉덩이 골로 접근했다. 뜨겁고 투박한 성기가 느껴지자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긴장되었다. 하지만 라울이 잘 풀어 뒀으니까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아무리 거근이라 해도 라울과 하는 동안 거기가 찢어지는 일은 없었고―.
“아으-!”
두터운 물건이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등 뒤로 식은땀이 맺혔다.
휘어지는 허리를 단단히 붙잡으며 라울은 계속해서 밀어 넣었다. 강하게 안으로 파고드는 느낌에 마기휼의 눈가로 눈물이 맺혔다. 라울의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줬다.
“천, 천천히 움직여―”
“곧 좋아질 거다.”
대답을 하는 라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이쪽이 느끼는 동안 라울이 많이 참고 있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아팠다.
동시에 라울의 것이 빠져나갔다가 한번에 깊이 들어왔다. 허리가 울리고 뒷골이 당길 정도로 강하게 파고드는 것에 헛숨이 토해져 나왔다. 아픔에 소리를 내자 곧장 눈가 부근에 입술을 누른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허리를 감싸는 단단한 손길과 더불어 몸 안으로 뜨거운 열기를 품은 물건이 빠르게 움직였다.
받아들일 수 없는 곳을 벌리고 억지로 파고드는 감각. 끝까지 비틀고 들어와 뜨거움을 전달한다. 익숙할 리 없는 느낌과 더불어 다른 이에게 깔려 있다는 달콤한 동통은 이내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라울을 받아들이는 곳이 크게 벌려져 얼얼하고 물건이 끝까지 파고들 때에는 숨이 막혔다. 몸 안쪽이 이상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센 움직임에 찔러 올려질 때마다 숨을 헐떡거렸다. 큰 소리를 낼 수 없어 몇 번이나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그때마다 라울이 키스를 갈구한다.
입을 막은 손등에 닿는 입술이 원하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줄 수 없었다. 소리가 나면 바깥에서 다 듣게 될 거 아니야. 하지만 집요하게 키스를 구하는 라울의 움직임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 그만해. 아―!”
소리를 내기가 무섭게 안을 후벼 파듯 움직이던 것이 빨라졌다. 맞닿을 때마다 살이 부딪치고 점액질 액체가 튀는 소리가 음란하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입술이 막혀서 콧소리가 났다.
질끈 감은 마기휼의 눈가로 눈물이 맺힌다. 그 눈물이 떨어지는 순간에 맞춰 더 강하게 파고들어 왔다. 휘는 허리를 감싸며 라울은 몸을 밀착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에 맞추어 정신이 날아간다. 머리가 새하얗게 타버리는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소리를 죽이려는 쪽은 윽윽거리는 울음을 토해 내며 어떻게든 참으려 했지만 라울은 소리를 내게 하려 집요하게 굴었다. 맞닿은 엉덩이로 열이 올라 이제는 따끔거렸다. 이를 악물고 헐떡거리던 마기휼은 몸속을 지피는 불길이 너무도 거세서 어쩔 줄 몰라했다.
헐떡거리며 고개를 들자 라울과 눈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보랏빛 눈동자는 갈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런 마기휼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울은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마기휼. 귀여워. 그리 속삭이는 순간 마기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라울의 걸 잔뜩 문 채로 사정해버렸다.
쏟아내버려서 개운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귀엽다는 말로 가버리다니. 그런 생각이 들어 허탈했다. 그에 반해 본인이 한 말에 반응을 보인 마기휼을 두고 더 흥분한 라울은 가느다란 몸을 끌어안고 거세게 밀어붙였다.
침대가 끼익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끙끙거리고 앓는 소리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멈추지 않았다.
그간 쉬지 못했던 숨을 토해 내며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이 노랬다. 더는 못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라울 성격상 다시 달라붙을지도 몰랐다. 그 전에 물이라도 마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라울이 위로 엎드려 온다. 끌어안더니 옆으로 몸을 돌려 눕고는 이쪽 몸을 끌어당겼다.
라울의 품에 안긴 상태가 된 마기휼은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라울과 눈이 마주쳤다.
“……이걸로 끝?”
“더 하고 싶나?”
묻는 말에 마기휼은 당장 고개를 저었다.
더 하고 싶기는. 라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쪽은 더 나올 것도 없었다. 더 하면 기절할지도 모른다면서 재차 고개를 젓자 라울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그 웃는 얼굴에 마기휼은 숨을 죽였다. 멍하니 있다가 눈을 내리떴다.
최근 라울은 지나치게 많이 웃는 것 같았다. 전에는 웃는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물론 저 웃는 얼굴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괜히 부끄럽고, 혹여라도 남들 볼까 무서웠다.
라울이 잘 웃는 사람이라는 게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면 더 인기가 많아질 테니까. 지금도 많은데 더 많아지면 곤란했다. 라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산처럼 쌓여 있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면 싫을 것 같았다.
품에 안긴 마기휼은 조용히 있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을 보아하니 분명 또 혼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 거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괜한 생각이 아니었으면 좋을 텐데. 라울은 마기휼 쪽으로 몸을 돌리고 조금 더 그를 끌어안았다.
땀과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서 이렇게 안고 있으면 찝찝했지만 떨어지고 싶진 않았다. 모처럼 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마냥 있고 싶었다.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대낮이었다. 해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라울하고 그걸 하다니. 하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나 참을성이 없어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은 바쁠 것 같다.”
바로 눈이 떠졌다. 라울을 빤히 보던 마기휼은 이내 강한 척 웃는 얼굴을 가장했다.
“안베르로 돌아가는 거라면 괜찮아. 나는―”
“너도 함께 갔으면 한다.”
마기휼은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라울이 재차 말했다.
“이번에는 같이 가자. 소속은 중앙군으로 옮기도록 하고, 안베르 요새에서 일을 하면 될 거다. 그 편이 낫지 않겠나.”
내 저택으로 들어와 편히 쉬어라. 같은 말을 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NO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안베르 요새에서 군인으로서 일을 하라는 거였다. 이런 제안을 들으니 고민이 된다. 가서 일을 해볼까? 모종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저택에 머물고 있지만 그렇다 해서 자신이 마냥 여기에서 감시자 노릇을 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 있기 때문에 둘다 시침 뚝 떼고 있을지도 몰랐다. 잠시 다른 곳에 가 있으면서 레나와 가휼이 자신이 경고한 바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지키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내가 너무하는 건가. 아니다. 호적상 레나는 어머니로 되어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전의 관계로 돌아가게 둘 수는 없었다. 레이라도 있는데 말이다.
마기휼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라울이 재차 말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야. 하지만 한 달 안으로 짐을 다 옮겼으면 한다.”
“떨어져 있으면 아이작 일당이 다시 공격할 것 같아?”
“그들은 우리들 앞에 나타날 수 없을 거다.”
단호한 말에 의아한 얼굴이 된 마기휼은 “어째서?”라고 물었다.
“아이작은 알센과 치울스의 공적이 되었으니까.”
“공적이라고?”
“레드존을 건드린 대가는 혹독하지.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두 연합군이 아이작을 추격할 거다. 암만 날고 기는 자라고 해도 3년은 버틸 수 없을 거다.”
레드존에서 아이작들이 한 일은 확실히 규모가 크기는 했다. 그렇다 해서 갑자기 치울스와 알센이 나서는 건 이상했다. 이쪽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 아니야? 궁금했지만 라울이 순순히 대답을 해주진 않을 터였다. 정말 궁금하다면 이쪽이 나서서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안베르로 들어가 라우젝과 접촉을 하면 그 입 가벼운 놈이 뭔가를 나불거릴 수도 있을 테지만―.
아, 라우젝을 생각하니 스트레스 받는다. 암만 시간이 흐른다 해도 자신과 라우젝이 사이좋아질 일은 없을 거라며 마기휼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고민이 되는 일인가.”
마기휼이 쉽사리 대답을 해주지 않으니 라울도 초조해진다. 타박의 말에 마기휼은 눈을 깜박였다. 보랏빛 눈동자 속에 비치는 사내의 얼굴이 질투로 일그러져 있었다. 실제 라울의 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본인의 생각엔 그랬다.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마기휼의 모습에 괜히 초조함을 느낀다. 라울은 재차 물었다.
“이곳에 남아 있고 싶은 건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마음에 걸려서…….”
“그들은 어른이다. 두 번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 걱정이 없지.”
하지만 사람의 마음처럼 약한 게 없었다. 잘 견디고 있다가 갑자기 이성의 끈이 끊어져 상황이 어찌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레나와 가휼. 차라리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것이지. 그랬다면 조금 더 수월했을 텐데. 그 두 사람은 왜 이렇게 힘든 길을 간 거냐며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은 곧 피식- 하고 웃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저은 마기휼은 라울 쪽으로 더 파고들어 갔다.
덩치는 훨씬 좋고 얼굴은 반반한 데다 스펙도 짱짱한 라울이었다. 그런 그의 품 안에 여자처럼 곤하게 안겨 있는 몰골이라니. 뭐, 이게 편안하니 어쩔 수 없는 건가.
라울이나 자신도 쉽게 가는 길이 분명 있었다.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이런 관계를 이어가고 임신까지 한 것을 보면 남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대답은 조금 더 생각한 후에 해줄게.”
웅얼거리는 속삭임에 라울은 눈을 내리떴다.
썩 흡족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며칠 정도 기다려줄 순 있었다. 그리고 마기휼이 정 이곳에 있고 싶어한다면 억지로 데리고 가는 방안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마기휼은 단지 아이작에 대해서만 염려를 하고 있지만, 라울은 달랐다. 라우젝이나 오르베, 그리고 여왕이 걸렸다. 지금은 같은 목적이 있으니 손을 잡고 있다 하지만 언제 갑자기 변화가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할 수 없다며 라울은 마기휼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