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내 아들이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임시로 만든 관 안에 누워 있는 사내는 얼굴의 절반이 검게 타들어 가 있었다.
천으로 몸을 가리고 있지만 분명 상당 부분이 탔을 거다. 타들어 간 시신은 고약한 악취를 만들어냈지만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튜완은 상관치 않고 오열을 터트렸다.
“도대체 누구냐!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
“알 수 없습니다. 노르디아의 군함 2척은 모두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겼을 리가 없잖아! 분명 공격을 받은 거다!”
울부짖는 튜완의 모습에 알센 군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뭔가를 숨기는 것이 역력한 그 모습에 튜완은 눈치를 채고는 앞에 선 자의 멱살을 잡았다.
“뭔가가 있군? 그렇지? 그러니까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야!”
멱살이 잡혀 몸이 마구 흔들려도 군인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머뭇거리는 동안 뒤에 있던 군인이 앞으로 나서며 한마디 했다.
“레드존에서 이상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에 대해 말을 해도 되나.
알센 군인 둘이 말을 꺼낸 자를 쳐다봤다.
“지하에서 열 반응이 일어났고 직후 군함에서 위급 신호가 왔습니다. 연결을 시도하려는 찰나 군함이 폭발한 것입니다.”
설명을 들은 튜완 사령관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그는 말을 한 자를 두들겨 팰 기세로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레드존에서 왜 그런 반응이 일어난 거야?!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곳에서 왜 갑자기 열 반응이 일어나는 건데?!”
“침입자를 거부하는 게 아닐까요.”
흥분한 튜완 사령관은 정말 위험했다. 그러던 찰나 들리는 미성에 알센 군인들과 튜완이 모두 뒤를 돌아봤다.
계단을 내려오던 라우젝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내려다봤다.
“레드존은 아마도 시끄러운 게 싫은 거겠죠. 그래서 침입자를 거부했을지도 모르지요.”
느리게 계단을 내려온 라우젝이 1층에 도착했다. 그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 본 튜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라우젝은 튜완을 지나쳐 관 앞에 섰다.
“불쌍한 노드만.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되다니.”
관 속에 누워 있는 노드만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 애처로움이 감돈다.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듯싶은 얼굴이었다.
18세의 미소년이 나타났다 싶었던 알센 군인은 그런 라우젝의 모습에 안색을 굳혔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설마 싶었던 군인은 손으로 라우젝을 가리켰다.
“당신은 설마…….”
라우젝은 고개를 들어 앞에 선 자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말문이 막혀 멍하니 있는 존재를 확인한 라우젝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안녕하십니까.”
“라우젝? 정말 자네인가.”
반색을 하는 사내의 태도에 라우젝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그는 알센 군인의 가슴에 달린 계급장을 확인하고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령인가. 자네라면 그리될 줄 알았지. 능력이 되는 사내였으니 말이야.”
“자네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었지. 노르디아의 하얀 매라 불렸던 자네가 아닌가. 나는 두 번 다시 자네를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네. 그런데 어떻게 된 건가?”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겼으니 나 같은 인물도 나서게 되는 거야. 그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나라에 위급한 일이라고?”
의아해하는 군인 쪽으로 갑자기 라우젝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코앞으로 크게 보이는 얼굴에 놀란 자는 헛숨을 들이켰다. 군인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 귀에 입술을 댄 라우젝은 그만이 들을 수 있도록 나직이 속삭였다.
“레드존에서 생긴 문제는 나라의 문제이지. 알센 연방국과 치울스 연방국, 삼국이 나서서 해결을 봐야 하는 사안이네.”
처음에는 라우젝이 가까이 접근하자 얼굴을 붉혔던 군인은 이내 안색이 굳어졌다.
레드존에 무슨 문제가 생겼단 말인가? 이쪽은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었다.
이미 라울과 라우젝이 관련해 레드존에서 어떤 일을 벌였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라울이 부상을 입었다는 것도 알아낸 바였다. 그 사건의 배후에 엔온이 개입되어 있다는 정보를 추가적으로 얻어 대외적으로는 그들을 추격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뒤로는 은밀히 라울의 부상과 관련해 레드존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알아보고 있었다.
즉, 알센은 노르디아의 왕통이 과연 레드존에 효력을 발휘했는지에 대한 은밀한 정보를 캐고 있었다. 선택된 몇 명만이 아는 진실. 그것을 라우젝도 알고 있을 거다. 그는 왕통이 아니던가. 어쩌면 이쪽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레드존 상공에서 군함이 폭발한 것이 라우젝만이 아는 정보와 관련이 있을까.
굳은 얼굴이 된 군인을 바라보며 라우젝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아들을 봐야 할 것이 아닌가!”
마치 멧돼지가 꿀꿀거리는 것 같았다. 성가셨던 라우젝은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튜완은 발을 동동 구르며 죽은 노드만을 가리켰다.
“라우젝! 내 아들이 죽었네! 이걸 어찌할 건가!”
“할 일을 하다 군인으로서 명예롭게 죽은 겁니다. 그거면 된 게 아닙니까.”
냉랭한 대꾸에 튜완은 움찔했다.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뭐라고?”라고 되묻는 튜완을 노려보며 라우젝은 차갑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한 노드만은 모든 군인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전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저이니만큼, 지금 노드만의 이런 죽음이 참으로 부럽군요.”
라우젝이 승승장구하고 그 이름이 삼국에 널리 퍼질 무렵, 그는 도망치듯이 물러나야만 했다. 그의 어린 용모와 성장하지 않는 몸에 의문을 품던 이들은 확신하게 되었고, 그렇게나 칭송하고 필요할 때마다 부르던 라우젝을 가차 없이 내쳐버렸다. 그리고 개떼처럼 그의 자리에 달라붙어 그가 누리던 모든 것들을 나누어 가지고 갔다.
튜완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차지한 자리는 예전 라우젝의 것이었다. 라우젝을 쫒아날 때에도 앞장을 섰던 그였다.
10년 넘게 지난 일이라지만 그걸 기억하지 못하고 나에게 도움을 받고자 접근한 건 멍청한 일이 아닌가. 매서운 라우젝의 눈빛에 튜완 사령관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들었다.
“너, 너, 너―”
하지만 더 말을 하지 못했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듯 헐떡거리는 그를 외면하며 라우젝은 앞에 있는 군인을 바라봤다.
“이번 일은 은밀하게 논의돼야 할 거야. 이쪽도 나름의 조사를 거쳐 결과에 대해선 공유하도록 할 거다.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줄 텐가.”
라우젝은 참으로 믿음이 갔다. 덧붙여 과거 그와 함께 훈련을 받았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압도적일 정도의 지도력과 추진력을 지닌 라우젝은 굉장했었다. 삼국의 내로라하는 인재들 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드러내던 그가 아니었던가. 예전의 기억이, 그때의 모습이 지금과 겹쳐진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모습은 신뢰감을 키웠다.
알센의 군인은 굳은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네라는 사내를 믿네.”
“그건 다 과거의 일이네. 그래도 좋게 봐주니 고맙군.”
라우젝은 손을 내밀었고 알센 군인이 그 손을 잡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신뢰가 오간다. 알센 군인은 라우젝의 손을 놓으며 경례를 했다.
“이만 물러나겠네. 뒤처리를 잘 부탁하네. 그리고 훌륭한 귀국의 군인의 죽음에 대해선, 깊은 애도를 표하는 바이네.”
“고마워. 덕분에 노드만도 한결 편히 갈 수 있을 것 같군.”
노드만을 내려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 라우젝의 모습에 군인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우를 생각하는 마음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리 말하고픈 얼굴들을 하고 있던 그들은 몸을 돌렸다.
그들이 군함에서 내리는 걸 확인한 라우젝은 고개를 들었다. 뒤에 떨어져 서 있던 자를 옆으로 오게끔 했다.
“부르셨습니까.”
“지금 당장 이 관을 노르디아에 옮기고 장례를 치르도록 해라. 그리고 튜완 사령관의 입단속을 시키도록.”
바닥에 엎드린 튜완은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몰려든 군인들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튜완 사령관을 조용하게 만드는 건 힘든 일입니다. 워낙에 소란스러운 자라―”
“약을 먹이든지 구속을 하든지 해서라도 조용히 만들면 될 것이 아닌가.”
군인은 놀라 눈을 치떴다. 당황하는 자를 노려보며 라우젝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의사는 분명했다. 그걸 파악할 수 있었던 군인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군인이 황급히 안쪽으로 사라지고 라우젝은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가 2층으로 통하는 통로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멍청이들.”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오자마자 하는 말에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있던 라울이 그를 바라봤다. 날카로운 눈빛을 보아하니 아까 있었던 일을 다 듣고 본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는 일이라며 라우젝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얼굴도 때때로 좋아. 불쌍한 척만 하면 다 넘어오거든.”
본인의 뺨에 손을 대며 미소를 짓는 얼굴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과도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능구렁이 백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불신으로 인해 라울의 눈동자가 굳어졌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사건은 내가 일으켰어. 그러면 그걸 유리하게 움직이도록 하는 건, 너의 몫이야.”
“유리하게 움직이다니?”
“말 그대로야. 지금 이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 너에게 있어서 유리한 쪽으로 말이야.”
라우젝은 라울의 앞으로 걸어갔다.
“노드만에게 레드존으로 들어가 장치 하나만 떨어뜨리면 된다고 했어. 그러면 라울 네 아래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고 했지. 그 멍청이는 죽을지도 모르는 장소로 달려가 신이 나 그 물건을 떨어뜨렸고, 그게 열 반응을 일으켜 폭발하게 된 거야. 동시에 군함 내에 장착을 해 두었던 폭발물이 반응을 일으켜 연쇄작용이 일어난 거지. 함께 쾅, 하게 된 거야.”
손을 마주 대었다가 옆으로 벌리며 웃었다. 그 웃음이 더는 순진하게만 보이지 않았다.
노드만은 라우젝의 계략으로 인해 살해당한 거다. 어떻게 그런 걸 계획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왜 이런 말을 하는데도 이리도 태연하단 말인가. 라울은 있는 힘껏 벽을 후려쳤다. 텅- 하는 소리와 동시에 라울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우리를 위해서 한 짓이야.”
“우리라고?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네가 가이나와 혼인을 하기 전에는 이 상황은 수습되지 않아. 하지만 넌 가이나와 혼인을 하고 싶지 않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지만 너와 마기휼, 두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거야.”
마기휼의 이름을 들먹이는 순간 라울의 입이 바로 다물어졌다. 하지만 표정은 아직도 수긍하는 투가 아니었다. 라우젝은 잘 들으라는 듯 라울의 머리에 한 손을 올렸다. 고개를 저으며 손을 떨어뜨리려 하자 아예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들어. 정직한 노선으로 가다 보면 그 끝은 절벽뿐이야. 사람은 약고 이기적이어야 해. 자기 밥그릇은 확실히 챙길 줄 알아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갑자기 일이 터졌을 때 그 혼자만 피해를 보게 돼. 다 끌어안고 자폭하게 되는 수밖에는 없지. 너는 그리된 예를 직접적으로 본 적이 있잖아. 내가 구석으로 내몰리게 되었을 때, 넌 그걸 봤잖아.”
바라보는 라우젝의 눈동자 안쪽으로 칙칙하게 번지는 빛을 발견한 라울은 숨을 죽였다. 라우젝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라울은 모든 걸 봤다. 높은 곳에 있다가 당장 구렁텅이로 빠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도 그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으리라 보기는 어려웠다.
“보고 무슨 생각을 했지? 나도 저렇게 되어야겠다? 그건 정말 멍청한 생각이지. 그러면 달리 뭐가 있을까?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 그래. 그게 바로 정답이야. 라울. 넌 나처럼 되지 말아야 해. 그러기 위해서 사람은 타락해야만 하는 거야.”
라우젝은 양손으로 라울의 얼굴을 단단히 붙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농담도 하고 거짓말도 해라. 사기도 치고 배신도 해. 오로지 너 하나만 생각해. 그래야지만 행복해질 수 있어. 마기휼과 네 자식놈을 지켜낼 수 있을거야.”
본인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는 꼼짝도 하지 않으나 마기휼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자 그 눈빛이 달라진다. 진지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걸 확인한 라울의 입가로 재미있다는 미소가 걸렸다.
“방법은 네가 알 거다.”
라우젝의 손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이윽고 그의 양손은 라울의 심장이 있는 부위에 닿았다. 그곳을 누르며 라우젝은 라울을 노려봤다.
“타락해버려. 라울.”
똑바로 응시해 오는 라우젝의 모습은 악마와도 같았다.
타락해버리고, 변질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전이라면 눈 하나 까닥이지 않았을 거다. 나 하나만 존재하고 있다면 유혹 따위에 넘어가진 않았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하자.’
손에 턱을 괴고 웃던 사내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순간 라울은 어떤 결심이 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라우젝의 종용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전부터 변하기 시작하는 자신이 느껴졌다.
왕통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핏줄을 잇기 위해 여왕과의 혼인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아이를 빼앗기지도 않을 거다. 마기휼과 떨어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미래에 마기휼은 꼭 함께 있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라울은 눈을 감았다. 침묵하고 있던 그가 서서히 눈을 떴을 때, 분위기가 변해 있었다. 차분한 것은 예전과 다름이 없으나 그 속에 스며들어 있는 어둠이 보였다. 자신과 같은 것이었다. 라우젝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라울을 부추기던 자신만만한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대신해서 자리를 잡은 것은 씁쓸함이었다. 라우젝은 라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드디어 너도 우리와 같아지는구나,”
중얼거림을 들은 라울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 얼굴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눈을 뜬 것은 빗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로 창문이 덜컹거리는 음향이 요란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심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건지 모르겠다.
맹한 얼굴로 있던 마기휼은 누워 있던 곳에서 일어났다. 이인용이라 하나 소파는 소파였다. 확실히 침대에서 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 마기휼은 목 뒤에 한 손을 댄 채로 멍하니 있었다.
“……뻐근해.”
그리고 피곤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마기휼은 눈을 반쯤 떴다. 그러다가 소파 구석에 있던 담요를 들어 품에 끌어안고는 엎드렸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려는데 문이 열리고 집사가 들어왔다. 입을 크게 벌린 채로 있었던 마기휼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도련님. 막 일어나신 겁니까. 꿀물이라도 타 드릴까요?”
“아니야. 빈둥거리는 나한테 무슨 꿀물이야. 과분해.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아니. 그것이―.”
집사는 눈을 내리떴다. 굉장히 말하기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간신히 그 말을 입에 담았다.
“레나 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그러면 내려가 봐야겠군.”
의외로 마기휼은 순순히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머리를 정리하는 그 얼굴은 동요가 없었다. 너무도 담담한 마기휼의 모습은 집사에게 있어 의외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뭐가? 새어머니가 나갔다가 돌아오시는 거야. 반갑게 맞이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렇군요.”
대답을 하면서도 집사의 얼굴은 썩 밝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것쯤이야 눈에 빤했다.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레나와 가휼의 일은 암암리에 퍼져 있을 거다. 집사도 그걸 알 거다. 그래서 이쪽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영 껄쩍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거고 말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진실이 거짓이 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레나가 이 저택으로 돌아오는 건,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레나에게 매달리는 레이라는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기쁘고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레나도 저택 안에서 레이라를 만나게 되는 게 믿을 수 없었던지 연신 딸의 몸을 끌어안고 얼굴을 확인했다.
아이를 사랑하는 게 모성이라 한다면 레나도 당연하게 그 감정을 가지고 있을 거다.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할 레이라였다. 레이라를 생각하면 이래야 한다. 둘 다 잘못을 한 거라면, 둘 다 책임지게 해야지. 그래. 둘 다.
“큰오빠다!”
레이라는 레나에게서 떨어져 마기휼에게 달려왔다. 양팔을 한껏 벌리고 달려오는 얼굴로 숨겨지지 않는 환희와 기쁨이 드러났다.
마기휼의 다리를 끌어안은 레이라는 눈물이 가득 담긴 눈으로 마기휼을 올려다봤다.
“큰오빠 고마워! 너무너무 고마워!”
“그러지 마. 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
“하지만 큰오빠가 엄마를 돌아오게 해준 거잖아. 그렇지?”
역시나 아이들은 예리했다. 말해주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다. 마기휼은 이도 저도 아닌 표정으로 레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레이라의 미소가 한결 환해졌다.
“큰오빠. 사랑해.”
올려다보는 눈동자 가득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에게 힘이 되고 큰 기쁨을 주는 일이기에 저토록 반짝이는 눈빛을 던지는 거다.
레나가 이 저택으로 들어온 이면으로는 일그러진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만큼이나 기뻐하는 아이가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는다. 이쪽이 내린 결정이,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위안 말이다.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굳은 눈빛을 한 레나가 서 있었다. 그 얼굴 위로 숨겨지지 않는 긴장이 드러났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은 레이라 앞으로 쪼그리고 앉았다. 시선을 똑같이 하고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레이라, 큰오빠도 새어머니랑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잠깐 방에 가 있을래?”
“……방에?”
불안한 얼굴을 하던 레이라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 곧 마기휼이면 괜찮다 싶었던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라가 올라가고 난 후, 레나가 느리게 마기휼 앞으로 걸어왔다. 마기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라보는 얼굴이 초췌했다. 굳은 얼굴로 있던 그녀는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모습은 보이지 마십시오. 레이라가 어디서 보고 있을지 모릅니다.”
레이라의 이름을 거론하는 순간 레나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근처에 레이라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해보는 듯한 모습에 마기휼은 안쪽을 가리켰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까요?”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에 그녀의 안색이 굳어진다. 긴장한 레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은 먼저 몸을 돌렸다. 마기휼은 안쪽 복도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방문을 열었다.
평소 응접실로 사용하는 방이었다. 청소를 하고 있던 하녀 둘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레나가 들어오도록 했다.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를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있던 테이블로 가 먼저 의자에 앉고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레나는 조심스레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내리떴다.
분명 이쪽이 무슨 말을 꺼낼지에 대해 알고 있을 거다. 때문에 마기휼도 편안히 말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가휼에게서 대충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초조하고 불안하겠지. 이런 대화는 나누고 싶지 않을 거다. 여자로서 부끄럽고 다른 사람과 말을 주고받기에 민망한 이야기니.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처음 봤을 때에는 강하고 독한 여자로 보였다. 그런 실수를 저지를 만한 여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아버지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당신 아버지가 사랑한 사람은 딱 하나뿐이었지요.”
“그건 제가 아니었어요.”라고 중얼거린 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짧은 순간 많은 상념에 사로잡힌 듯싶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눈빛을 한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제 나이는 이제 32살이 되었을 뿐입니다. 당신보다 딱 3살이 많군요. 그리고 그때에는 이보다 훨씬 젊었고요.”
“젊었을 때 실수하신 거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전 그저―”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재차 레나의 입이 다물어졌다. 무릎에 올려진 그녀의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이 점점 강해지는 듯싶자 레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입 안이 마르는지 몇 번이나 침을 삼키고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러는 동안 마기휼은 레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중간에 화를 내거나 목소리를 키웠다면 레나 그녀가 반응하기도 한결 수월했을 거다. 하지만 마기휼은 어디까지나 차분한 상태를 고수하고 있었다.
“가휼은 정말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착하고 곧은 사내였지요. 그런 가휼의 배려를 받으면서 점점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저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의지하고 믿게 되는 순간 몸과 마음이 열리는 건 너무도 쉽고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실 겁니까.”
레나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가휼과 레나는 몇 번이나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었을 터였다. 그때의 만족감과 환희에 대해서도 잘 알 거다. 여자로서의 행복과 절정을 주는 그것을 그만둘 수 있느냐 물었을 때, 바로 그만둘 수 있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다. 때문에 레나의 저런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계속 가휼과 그런 관계로 있게 된다면 당신은 이곳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건 가휼도 마찬가지겠지요. 레이라가 저를 좋아한다 해 봐야 두 사람과의 애착과 비교하면 아주 하찮은 것입니다. 당신 둘 중에 하나라도 사라진다면 레이라는 극도로 불안해할 겁니다. 이미 두 사람은 레이라에게 있어 부모와도 같은 존재니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겁니까.”
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듯 바라보는 눈동자를 피하지 않으며 마기휼은 분명하게 말했다.
“다들 뒤에서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레이라가 가휼의 딸일 거라고 말입니다. 그 소문이 퍼지게 된다면 레이라가 제대로 귀족가의 여식답게 잘 자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이 꼬리말처럼 달라붙게 될 겁니다.”
처음에는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던 레나였으나 이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색을 굳힌 그녀는 한 손을 들어 뺨을 감쌌다.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야 뻔했다. 가휼과 레나가 그 짓을 해서 태어난 아이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지만 모두가 그리 말을 하면 평생 레이라의 꼬리표가 될 거다. 그 소문을 레이라가 알게 되었을 때 생길 파장이 너무도 두려웠다. 레나는 울먹거렸다.
“역시나 제가 나가야 하는 겁니까.”
“당신이 나가면 소문에 기름을 끼얹는 격입니다. 모두가 그 말이 사실이었다고 믿게 될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레나는 히스테리를 부리듯 목소리를 높이며 마기휼을 노려봤다.
“제가 뭘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도대체!”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린 레나는 소리를 치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장 테이블 위로 얼굴을 묻고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녀는 저런 식으로 굴면 안 되었다. 어디까지나 순종적인 태도를 취해야만 했다. 하지만 본인의 잘못에 대해 알고 있고 어떤 식의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도 스스로 견디지 못하는 상황은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레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던 뭔가가 폭발한 것이었기 때문에 마기휼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그녀의 격한 감정 상태에 휩쓸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현 상황에 맞춰 처신하고 있었다.
“당신과 가휼은 여기서 지내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전과 같은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할 겁니다.”
떨리던 레나의 어깨가 멈추었다. 마기휼은 기다렸다. 그리고 레나가 고개를 들어 떨리는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는 것에 맞춰 말을 이었다.
“여자의 인생을 선택하시든지, 아니면 어머니로서의 삶을 선택하시든지, 그건 당신의 몫입니다. 레이라가 성장하고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다면 재혼을 하셔도 됩니다. 그 전에 레이라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주셔야겠지요.”
“……뭐라고요?”
“가휼도 서른이 되기 전에 혼인을 하게 될 겁니다.”
레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말도 안 된다는 듯 바로 반박하려 “그건―”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려 들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테이블에 올려진 그녀의 손이 떨렸다. 동요를 알려주는 듯 복잡하게 눈동자가 움직였다. 결국 참을 수 없어진 레나가 마기휼을 똑바로 바라봤다.
“장성한 가휼이 계속 혼자 지내는 건 이상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가휼은 다른 여자와 혼인하게 될 거고, 당신은 새어머니로서 그런 가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셔야 할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도 소문을 잊게 되겠지요.”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 수그러들게 될 거다. 레나와 가휼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뭐야. 그러면 그렇지.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나이 차가 얼마 안 된다 해도 어머니잖아. 그런 패륜은 정말 말도 안 되지.’라고 말하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날 거다. 시간이 지나면 소문은 가라앉게 될 테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자들도 사라지겠지.
“다, 당신은 혼인을 하지도 않을 거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레나를 응시하며 마기휼은 당당히 말했다.
“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왜 가휼이 혼인을 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러면 당신과 결혼시킬까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말에 레나는 숨을 들이켰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걸 눈으로 확인하며 마기휼은 빠르게 토해 냈다.
“믿고 의지만 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육체적인 결합은 참았어야 했던 게 아닙니까. 진심으로 가휼을 사랑하고 레이라를 생각했다면 그래야 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나는, 나는―”
“당신에게만 책임을 지라는 게 아닙니다. 가휼도 책임을 지게 될 겁니다. 집안을 가휼이 책임을 지고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겁니다. 안제크가에서 받은 돈은 모두 갚을 예정입니다. 이자까지는 못 쳐줘도 원금은 고스란히 토해낼 겁니다. 그게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말이지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달리 더 있었다.
“매년 아버지의 무덤 앞으로 가서 인사를 드릴 겁니다. 당신과 가휼, 그리고 레이라도 함께 갈 겁니다.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부인, 아버지의 아들로서 행동해야만 할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죽을 때까지. 그게 바로 당신들이 짊어져야 할 업보가 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머리가 나빠서 이 방법이 가장 최선인 것 같습니다. 달리 좋은 방법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을 해주십시오. 그러면 그쪽으로도 생각을 해볼 테니까요.”
레나는 기운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곧 침묵하게 된다. 입을 다문 그녀는 눈을 내리떴다. 이쪽이 하는 말에 따라야 함을 인정하게 될 것일 터였다. 그리해야만 했다. 그래야 그녀 자신도 살고, 가휼도 살고, 레이라도 살게 될 거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아닌 척하면 된다. 그런 과거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냥 비밀로 묻어버리면 되었다. 이것이 아버지가 원하는 해결책일지는 모르나 최선이라고는 믿고 싶었다.
라울, 갑자기 네가 보고 싶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너에게 말을 해주고 싶고, 내가 잘 하는 일인지 확인도 받고 싶어.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려고 했다면 분명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렸을 거야. 그저 감정적으로만 행동을 취하려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불안하고 초조하고, 동시에 화도 아주 많이 나지만 괜찮아. 견디어낼 수 있어. 그러고 나서 네 얼굴을 봤을 때 확인을 받고 싶어. 내가 잘하고 있는 거라고 말이야.
이런 일은 잘하고 있다고 본인 스스로가 믿어야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일이야. 의문이 생기면 그 후로는 뭘 하기가 상당히 힘들어져. 지금도 반복적으로 생각하지.
난 잘못하지 않았어. 잘하고 있는 거야.
……정말 잘하고 있는 건가요. 아버지.
마기휼은 지친 듯 눈을 내리떴다.
의자에 앉은 가이나는 피로한 얼굴이었다. 근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라우젝이 보이자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내 마음을 다잡은 가이나가 안색을 굳히자 라우젝이 안으로 들어왔다.
조용히 여왕의 앞으로 다가와 의자를 끌고 그 위에 앉았다.
“무슨 짓을 저지른 모양이더구나.”
앉자마자 던져지는 질문에 라우젝은 잠자코 있었다. 속을 읽을 수 없는 얼굴에 가이나가 말없이 손을 들었다. 라우젝의 얼굴을 더듬었다. 가이나의 눈동자 안쪽으로 아련함이 차오른다.
라우젝도 양손을 들어 가이나의 손을 잡고 그곳에 얼굴을 묻었다.
“난 아직도 널 사랑하는 것 같아.”
라우젝의 고백에 멍하니 있던 가이나는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녀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걸리고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들어 갔다.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라우젝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붙인 여왕은 속삭이듯 물었다.
“10년 동안 어땠어?”
“지옥이었지.”
가이아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라우젝은 속삭였다.
“다른 이들이 뭐라 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는 것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 하지만 널 만날 수 없다는 건, 그 자체가 지옥이었어.”
라우젝은 눈동자를 들어 가이나를 바라봤다.
“내 여자인 네가 다른 놈에게 안기는 건 상상만 해도 토악질이 나오는 일이야.”
가이나는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확인한 라우젝도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마주 바라보는 눈동자 사이로 숨겨지지 않는 애정이 드러났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보던 평화로움을, 라우젝이 깨트렸다.
“가이나, 내려놔.”
순간적으로 가이나의 표정이 멍해졌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가만히 있던 여왕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내 존재가 뭐가 되지?”
“너는 너일 뿐이지. 너는 영원히 여왕으로서 살 수 있어. 내가 꼭 그리해줄 거야.”
가이나의 손을 붙잡는 라우젝의 손으로 힘이 들어갔다. 아플 정도였다. 그만큼 그를 믿어 달라 하고 있었다.
내려놓음.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일까. 그래야만 하는 걸까. 그러면 편해지겠지. 머리 아플 일도 없을 거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망설임 없이 선택할 순 없었다. 그리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가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라우젝의 얼굴이 굳어진다. 괴롭게 변하는 라우젝을 바라보며 가이나는 속삭였다.
“여자로서 살 수 없다면, 노르디아의 여왕으로서 당당하게 남고 싶어. 그래야지만 너에게 있어서도 난 언제나 대단한 가이나로 남을 수 있는 거야.”
“가이나, 그건 그렇지 않아. 나는―”
“나이를 먹어 가는 내 추한 모습을 너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아.”
라우젝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서서히 무표정이 되어가는 라우젝을 확인하며 가이나는 그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서서히 빼냈다.
“라우젝. 너에게만은 언제나 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고 싶어.”
손이 모두 떨어지고 라우젝과 가이나 사이에 남은 건 사무적인 태도뿐이었다. 무표정을 한 채로 서로를 바라봤다. 예전에 풋사랑을 나누었던 라우젝과 가이나는 없었다. 지금 남아 있는 건 안제크와 여왕뿐이었다.
가이나는 눈을 내리떴다. 한숨을 쉬자 한결 감정 정리가 수월하게 되는 듯싶었다. 가이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선 그녀는 여전히 앉아 있는 라우젝을 내려다봤다.
“네가 원한다면 지금의 지위는 끝까지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겠어. 전에는 내가 아무런 힘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내가 내 뜻대로 너를 그 위치에 머무르게 해줄 수 있어. 나는 노르디아의 여왕이니까.”
입을 다문 여왕이 대답을 기다렸다. 여왕이 한 말에 대답하지 않는 건, 경우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지 반응을 보여야만 했다.
라우젝의 입술 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그래. 넌 여왕이야. 나의 여왕이지.”
“……고마워.”
살짝 지어진 가이나의 미소가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표정을 감추었다. 밖으로 나가는 동안 라우젝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가이나가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군인이 달라붙었다. 라우젝이 오기 이전에 이미 이곳을 떠난다는 말을 해둔 참이었다. 붙어선 군인이 긴장한 얼굴로 모든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을 하자 여왕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바로 떠나자고 말했다.
군함에서 내려 옆 공터에 작은 배가 이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창 준비를 하는 도중에도 여왕이 나타나자 모두가 할 일을 멈추고 예를 갖추었다. 그런 그들에게 하던 일 마저 하라는 손짓을 보내며 가이나는 계단을 올랐다. 막 군함에 올라타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황급히 달려오는 오르베가 보였다. 아래쪽에 멈춰 선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
“폐하. 어디를 가십니까?”
“노르디아로 돌아가겠다.”
“그런,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곳에 있어 봤자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아. 그러니 돌아가겠다.”
“라울, 그 아이와 대화를 나누어보신 겁니까. 그때에는 그 애가 잠시 머리가 이상해져서 헛소리를 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라울의 마음을 모르진 않아.”
중간에 오르베의 말을 자르고 가이나는 차분히 말했다.
“오르베. 나는 아이를 낳은 당신의 마음을 몰라. 하지만 만약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겠지. 죽음으로 아이를 잃은 당신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오르베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망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확인하며 가이나는 고개를 돌렸다.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폐하.”
“여왕 폐하.”
다른 쪽에서 여왕을 부르는 소리에 오르베는 움찔했다. 놀라 고개를 들자 정확히 이리로 걸어오는 사내가 보였다. 긴 금발을 흩날리며 다가오는 건 라울이었다.
오르베는 급히 뒷걸음질을 쳐 그 앞에서 물러났고, 라울은 계단을 올라 가이나의 옆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그가 군함에서 나간 것만 알지 돌아온 것에 대한 말을 전해 듣지 못했던 가이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라울, 언제 돌아왔지?”
“노드만에 관한 일을 들으셨습니까?”
언제 돌아왔느냐고 묻는데 오히려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것에 의문을 품지 않고 여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튜완 사령관이 힘들어하더군요.”
“그 일과 관련해서 삼국 회의를 열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가이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앞을 확인했을 때, 라울은 뭔가를 결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폐하.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나직한 목소리의 울림. 예전에 라울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에는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낯설고 이상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가 도대체 왜 이러나 싶기만 했다.
“라울. 당신, 왜 이러지?”
“무엇이 말입니까.”
되묻는 얼굴은 태연하나 분명 뭔가가 이상했다. 이런 라울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올곧고 정직해 보는 마음이 편안하기만 했던 사내가 지금은 불안하고 다소 뒤틀려 있었다. 음습한 뭔가가 느껴졌다. 그가 달리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전해졌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폐하와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 저런 얼굴을 하는지 모르겠다. 가이나는 오르베를 흘겨봤다. 오르베 또한 변모한 라울을 느낀 것인지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오르베를 뒤에 두고 가이나와 라울은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 방으로 들어서는 여왕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었던 이들은 방으로 들어서는 가이나와 라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방으로 들어서자 가이나는 먼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라울이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를 바라봤다.
“폐하. 지금 제가 드리는 말에 대해선 차분하게 대처해주십시오.”
“무섭군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 이러는 겁니까.”
“전 알센과 치울스 연방국을 상대로 큰 도박을 하려 합니다. 아니. 사기라 칭하는 편이 더 옳겠군요.”
“사기라고요?”
가이나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사기라는 건 라울과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 부분에 대해선 말로 설명을 하는 것보다 다른 방식을 사용하는 편이 훨씬 더 유용했다.
“이번에 제가 알아본 정보들입니다. 확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라울이 건넨 건 두툼한 서류 봉투였다. 지금껏 라울과 대화를 나눌 때에는 없었던 패턴이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가 싶기만 했던 가이나는 순순히 봉투를 받아 들고 안에 담긴 서류를 살폈다. 돌아가는 현 상황이 곤혹스러운 듯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가이나는 서류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굳어졌다.
멍하니 있던 가이나는 황급히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살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서류를 닫아 테이블에 내려놓은 가이나는 라울을 노려봤다. 그녀의 얼굴은 믿을 수 없는 충격에 빠져, 혼란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이걸 어디서 얻은 거지요?”
“뒷돈을 주고 사들였습니다. 암시장과 거래를 했습니다.”
가이나의 입이 살짝 벌려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던 것도 잠시, 가이나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라울, 당신 왜 이러는 거지요? 이건 당신답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이게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이건 저답지 않거나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입니다.”
라울은 테이블에 떨어진 서류에 한 손을 올렸다. 그것들을 누르는 손끝에 힘을 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울스와 알센 연방국은 이미 레드존으로 들어가 그들의 피를 사용했습니다. 비밀리에 움직여 하늘의 땅을 조종하려 했던 겁니다. 하지만 실패했지요. 그들은 그 사실을 필사적으로 은폐하려 했지만 암시장은 그 정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정보를 2억 베리를 사용해 얻어냈습니다.”
“2억 베리라니! 그렇게 큰돈을!”
“전쟁이 일어날 것을 감안한다면 적은 돈이 아닙니까.”
전쟁이 시작되면 2억 베리는 우스웠다. 돈보다 더 귀한 인명피해가 일어날 거다. 전쟁이 시작되어 부서지고 망가지고 엉망이 된 것들을 복구하려면 그보다 훨씬 더 비싼 돈이 들 거다. 그건 계산을 할 수조차 없는 부분이었다. 전쟁이 예견된다면, 그걸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라울은 여왕이 감추고 있는 서류를 눈빛으로 가리켰다.
“이걸로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할 겁니다.”
당치도 않다는 듯 가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더 큰일이 생겨나게 됩니다. 대륙이 피바다가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라울은 품에 손을 넣었다. 이번에는 또 뭔가 싶었던 가이나의 얼굴이 불안으로 굳어졌다. 숨을 죽인 채로 있던 그녀의 눈앞으로 작은 통이 내려왔다. 검은 통, 손가락 반 마디만 한 것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 건가 싶었다.
“이건 뭔가요?”
“제 정자입니다.”
가이나의 눈이 놀람으로 치떠지고 급히 라울을 바라봤다. 그건 서류를 볼 때와 비견이 될 바가 아니었다. 놀람을 넘어서 경악을 내비치는 여왕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라울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엔온 측에 넘길 겁니다.”
“……뭐라고요?”
“그들 자체적으로 왕통을 만들어보게 할 생각입니다.”
더는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제는 분노까지 느낀다. 가이나는 당장 테이블을 내리쳤다.
“라울! 당신 정말 미친 건가요?!”
“이것은 강제적으로 발생한 일이 될 겁니다. 엔온은 불법적인 방식으로 제 정자를 훔쳐 간 것이 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치울스와 알센은 생각하게 될 겁니다. 제 피가, 노르디아의 왕통이 레드존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에 엔온이 그리 움직이는 거라고요. 덧붙여 노드만의 일도 그와 관련된 것이라고 추측을 하겠지요. 그들은 당장 움직임을 멈추고 추이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엔온이 훔쳐 간 제 정자의 위치를 파악하려 들 테고, 그걸 손에 넣으려 할 겁니다.”
라울이 하는 말들이 너무도 엄청나서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그만하라는 말을 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라울의 길고 긴 말은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폐하와 제가 혼인하는 걸 막으려 들 겁니다. 폐하께서 불임인 것을 모르는 이들은 저와 폐하의 혼인이 달갑지 않겠지요. 가장 강한 왕통이 이어진다는 건 그들에게 있어 큰 위협이 될 테니까요.”
가이나의 얼굴이 점점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국혼을 싫다 거부한 라울이었다. 이 모든 일이 그것이 목적이었던 것이 아닐까. 자신과의 국혼을 피하기 위해서 이런 번거로운 짓을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가이나는 멈추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도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울이 말하는 이 비열한 계획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폐하와 저의 아이가 당연하게 노르디아의 다음 주인이 될 테고, 그 존재라면 레드존을 하늘로 띄울 수 있을 거라 착각들을 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그 진실을 아는 건 우리들뿐일 겁니다.”
가이나는 눈을 감았다.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대로만 된다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하지만 이런 계획을 꾸미는 게 라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라우젝이었다면 좋았을 거다. 왜 라울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지, 왜 이렇게 변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친 가이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뭐가 말입니까.”
“당신마저 왜 이러는 겁니까.”
라울만은 이래선 안 되었다. 그만은 변해선 안 되었다.
여왕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라울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폐하. 상황이 이렇습니다. 달라져야 제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뿐입니다.”
“마기휼이라는 사내 때문입니까. 고작 사내입니다. 여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송구하오나 폐하, 제가 남색임을 잊으셨습니까.”
고개를 든 가이나는 충격으로 얼굴색이 하얗게 번져 나갔다. 라울은 건조하기까지 한 억양으로 말을 이었다.
“전 남자밖에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하고나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사랑하고 곁에 두고 싶은 존재는 이 세상에서 오로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결의 같은 게 느껴졌다. 라울은 멈추지 않는다. 세운 계획을 철회하려 들지도 않을 거다. 그가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이번 사태는 무마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리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가 여왕인 자신이나 노르디아라는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거였다.
“그 사내와 아이를 지키고 싶은 겁니까.”
“자신의 진심을 잃고 싶어할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폐하도 그걸 이미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진심. 그 마음을 가이나는 십여 년 전에 버려야만 했다. 그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선택지밖에 남아 있는 게 없다 믿었다. 하지만 지금 라울이 결정한 선택과 밀고 나갈 방식은 예전 가이나가 했던 모든 것들을 조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렇게까지 하는데 순순히 포기해버린 너는 뭐냐, 라고 말이다.
포기하는 자와 포기하지 않는 자. 그렇구나. 그것에는 이리도 큰 차이가 있는 거로구나. 문득 지금까지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가 싶었다. 지금껏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싶었다.
가이나는 허탈한 듯 한숨을 쉬었다.
“라울. 당신 정말은 무서운 사람이었군요.”
“전 라우젝의 동생입니다. 그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바라보는 가이나의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안제크가는 대대로 본인들이 원하는 걸 이루고자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살아남은 건 저와 라우젝, 그리고 오르베뿐입니다. 모두가 만만치 않은 괴물들이지요.”
라우젝.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내. 한때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사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때 하지 못했던 일을 지금에 와서 라울이 하려 하고 있었다. 가이나는 중얼거렸다.
“어긋나지 않으면 당신들은 제 힘이 될 테지요.”
“어긋나도 라우젝은 폐하의 곁에 남아 있을 겁니다. 그는 폐하를―”
“아니요. 그 말은 됐습니다.”
라울이 하려는 말을 중간에 멈추도록 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가이나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고개를 숙였다. 그 자세로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녀에게 있어 무척이나 굴욕스러운 일이었다. 여왕은 여왕으로서의 체통을 지켜야 했다. 남들에게 업신여겨져선 안 되며 언제나 늘 의연하게 있어야 했다. 어긋나서도 안 되고 잘못 판단을 내려서도 안 되었다. 늘 중심을 지켜야만 했다. 그게 바로 여왕이라는 존재였다. 그것이 레드존의 비밀을 알고 있는 노르디아 왕통이 해야 할 몫이었다.
언제나 늘 스스로 만든 굴레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을 제대로 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세상이 변해 가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다.
“제가 당신들처럼 조금만 강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중얼거린 가이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잠자코 있던 그녀가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던 라울은 고개를 돌렸다.
어떤 식으로든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레드존은 움직이지 않는다. 가라앉은 땅은 다시 떠오르지 않으며 동시에 그 거대한 힘을 지배할 존재는 이 세상에 없었다.
레드존은 삼국의 감시 지역으로 영원토록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 식으로 삼국은 균형을 맞추면서 유지 되어야만 했다. 이번 일이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되어야만 했다. 노르디아가 삼국 중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는 떨어지게 된다. 이쪽이 굳이 여왕의 부군이 될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존재 가치가 떨어져서도 안 되었다. 신경 쓰이는 존재이나 왕성으로의 진입을 막아야만 하는 존재. 그 누구도 우습게 보지 않고 두려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라우젝이나 오르베에게 휘둘려지지 않은 그런 존재가 말이다. 그래야지만 지킬 수 있었다.
마기휼과 아이를 말이다.
한창 잠들어 있던 시간이었다. 누가 옆으로 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누군가 뺨을 두드렸다. 이쪽을 보라는 듯 건드리는 손길이 익숙했다.
실은 누가 이러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일부러 눈을 뜨지 않으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마기휼의 상태를 알아차렸는지 그가 고개를 숙여 코를 살짝 깨물었다. 그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며 마기휼은 당장 고개를 들어 이쪽을 내려다보는 존재를 쳐다봤다.
달빛 속에 떠오르는 하얀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워 감탄이 나왔다. 굉장하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손을 들어 라울의 턱 아래를 툭툭 쳤다. 그러자 라울의 입술 양 끝이 올라갔다.
움찔했다. 라울이 웃는 걸 최근 들어 좀 보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접하게 되니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 상태가 뻐근한 것도 잊고 라울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오늘 새벽에 안베르로 떠나게 될 것 같다.”
“그게 정말이야?”
“응. 그렇게 되었어. 거기서 처리해야 할 문제가 생겼지.”
“심각한 일이야?”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다.”
거짓말. 반사적으로 그리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입을 통해 말하진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웃음이 먼저 나왔다. 라울은 한 손을 들어 마기휼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귀 뒤를 넘어 뒷머리를 감싸는 손길이 기분 좋아 눈을 감았다. 두어 번 더 마기휼의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라울은 지나치는 어조로 물었다.
“레나가 들어온 것 같더군. 어떻게 하기로 했어?”
“두 사람이 저지른 일이니 둘이서 처리하라고 했어. 너희 집안에 빌린 돈은 그 둘이 알아서 갚게 될 거야. 나는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을 거고. 이것저것 생각해 봤는데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아. 아버지를 생각하면 갑자기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을 때도 있지만 동생이라서, 귀여웠던 때도 확실히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레이라도 있고 하니까.”
마기휼은 라울의 안색을 살폈다. 진지하게 이쪽 말을 들어줬다.
그 눈빛을 읽은 마기휼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무른 인간인가.”
“네 문제이니 네가 판단을 내리고 선택한 결과가 가장 옳아. 남들은 저 좋을 대로 말을 할 뿐, 나타난 결과에 대해서 함께 책임을 져주지 않으니까.”
“그래. 맞아.”
그게 정답이었다.
지금 닥친 상황이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함께 짊어지고 나아갈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마기휼이었다. 가휼이고 레나였다. 이 문제는 이쪽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나는 레이라가 잘 컸으면 좋겠어. 지금 당장은 그 생각밖에 하지 않아.”
동시에 레이라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가 하나 있으니까 다들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되었다. 어른들의 문제에 그 아이가 피해를 보게 하지 말자. 그 아이만이라도 잘 클 수 있도록 하자. 그런 생각이 모여 이 아슬아슬한 상태를 유지해낼 수 있었다. 자신도 이 저택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이유가 생기게 되었다.
마기휼은 한숨을 쉬다가 놀라 눈을 내리떴다. 라울의 손이 배에 닿아 있었다. 손바닥 전체로 배를 감싸자 마기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왜, 왜 그래?”
“지켜줄게.”
창피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해서 라울의 손을 떨어뜨리려 했던 마기휼은 움찔했다.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자 라울은 조금 더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너와 우리의 아이를 내가 지킬 거야.”
찡- 하고 감동이 밀려온다. 행복하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동시에 불안한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을 느끼며 마기휼은 오묘한 눈빛을 던졌다.
“너 설마 위험한 일을 하려는 건 아니지?”
“하지 않아.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런데 왜 이런 분위기야? 굉장히 무거운데? 아닌 척하면서 뒤로 일 치는 건 아니지?”
“절대로 아니야.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아.”
강한 부정에 마기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원래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는 라울이었다. 불안하긴 하지만, 그가 아니라 한다면 아닌 거였다. 그런데 묘하게 기분이 껄쩍지근한데, 정말 괜찮은 걸까.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라울이 팔을 뻗어 마기휼의 몸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멈칫하던 마기휼도 이내 익숙한 듯 라울의 등에 양손을 둘렀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눈을 감았다.
편안해졌다.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라울의 품에 안겨 이렇게나 안정된 상태가 되다니. 이러다가 이 녀석하고 떨어진다는 것만으로도 불안한 기분이 들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잠자코 안겨 있는 마기휼의 체취를 맡으며 라울은 눈을 감았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상태라면, 이 느낌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두렵지 않았다. 마기휼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뭐든지 한다. 있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행복을 간신히 손에 넣었다. 그걸 놓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라울은 마기휼을 끌어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눈을 뜬 라울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정직하고 올곧은 것만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어.’
라우젝의 말을 상기하며 라울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래. 너의 말이 옳다. 일직선의 방향으로 걷기만 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때문에 지금부터 변할 거다. 지키기 위해서.
“……라울?”
라울의 품에 안겨 있는 건 너무도 좋지만, 눌린 부분이 아팠다. 너무 기합을 넣는 게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도 라울과 떨어진 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떨어지고 싶지 않아.
마기휼은 몸에 들어간 힘을 뺀 채로 멍하니 있었다.
언젠가 아이가 태어날 터였다. 그 아이가 태어나고 난 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게 될 것인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니다. 이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말고, 꼭 행복해질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자.
난 마기휼이야. 뭐든지 잘될 거야. 걱정할 필요도 없어. 아이가 태어나면 뭐 어때? 라울을 닮으면 굉장할 테고, 날 닮아도 평생 굶어 죽을 걱정은 없을 거다. 뭘 해도 대성한 사람이 될 거다. 남자아이도 좋고, 여자아이도 좋았다. 일단은 제대로만 태어나주라며 마기휼은 라울의 등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불현듯 ‘내가 이놈하고 이렇게 될지 그 누가 알았겠어.’ 라는 생각이 든 마기휼은 피식- 하고 웃었다. 라울이 왜 그러냐고 묻는 말에 마기휼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 했다.
서로에게 말하지 못하는 게 분명히 있을 거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부러 추궁을 하거나 닦달을 해서 듣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 때가 되면 알 문제이고 듣게 되겠지. 아직 갈 길이 먼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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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T NOVEL RED ZONE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