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라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쯤 되자 군인들도 약간의 동요를 보이게 되었다. 왜 라울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가 묻고는 싶지만 정말 그러지는 못했다. 그들은 그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라우젝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언제 모여 있었냐는 듯 좌악 흩어져 딴청을 피웠다.
그걸 못 느낄 라우젝이 아니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그건 그의 장기였다. 그런 식으로 10년 넘게 살았으니 느는 건 눈치고 장기는 분위기 파악이었다. 보너스로 가벼운 술수를 부릴 수 있었다.
“이보게. 라우젝!”
부름에 라우젝은 뒤를 돌아봤다.
튜완 사령관이 성난 코뿔소처럼 씩씩거리며 라우젝에게 걸어왔다.
“라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기에 얼굴을 내밀지도 않는 거야!”
원래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작정하고 소리를 치니 귀가 아팠다. 불쾌하기도 했던 라우젝은 잠시 뚱한 얼굴로 있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제 동생을 왜 그렇게 찾으시는 겁니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렇지! 왜 내 아들놈을 곁에 두지 않으려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봐야겠네!”
허리에 양손을 올리며 말을 하는 튜완 사령관은 당당했다. 아들놈이 능력이 없어 라울에게 내쳐진 거였다. 내쳐져도 본인이 나서서 다시 복귀할 의욕을 보이면 좋았으련만 이런 식으로 아버지 덕을 보려 하다니.
지금도 노드만은 튜완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 이쪽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라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지 얼굴을 보고 말 좀 잘해줘. 그리 말하고 싶어하는 눈빛이었다.
쓰레기들. 이런 놈들이 그녀의 곁에 있었던 건가.
라우젝의 미소가 한결 더 화사해졌다.
“노드만이라고 했던가요. 꽤나 출중한 실력을 지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물론이지. 내 아들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재능이 많은 놈이다!”
튜완은 노드만의 팔을 잡아 앞으로 세웠다. 라우젝의 앞에 서게 된 노드만의 얼굴이 굳어졌다. 껄끄러움을 감추지 않으며 그는 웅얼거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노드만이라고 합니다.”
대답을 하며 이쪽을 흘겨보는 눈초리에 선명한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변종에 대한 역겨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간혹 있었다.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돌연변이에 대해서 제 감정을 드러내는 놈들이 말이다. 참으로 변변찮은 놈들이었다.
“내 아들은 못 하는 게 없어. 그런데 왜 쫓아낸 건가. 그게 말이 되나. 내 아들놈은 앞으로 더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될 거란 말이야. 라울 대령과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면 서로에게 좋을 텐데, 왜 내쳤는지를 모르겠어.”
“그렇군요. 왜 그랬던 걸까요. 제 동생놈이 부족한 탓이 아니겠습니까.”
유들유들하게 말을 잘 받아주는 라우젝 덕분에 튜완 사령관은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그는 턱을 위로 올렸다.
“자네가 말을 잘해주게나. 내 아들놈을 다시 라울 대령의 곁에 있게끔 해줘.”
“제가 말을 하는 것보다, 아드님께서 능력을 보여주시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능력이라니?”
“말 그대로입니다. 성과를 올려 라울의 마음에 들게끔 하는 겁니다. 그리고 여왕 폐하의 인정을 받게 된다면, 승진도 한결 빨라질 겁니다.”
튜완과 노드만의 눈동자 안쪽으로 교활한 빛이 번득였다.
낚였구나. 속으로 그들을 비웃으면서 겉으로는 무표정을 가장한 채로 라우젝은 눈을 치켜떴다.
어때? 해볼래?
도발하는 시선에 노드만은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중얼거렸다.
“아직 전 개별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지금 난 일시적이라 하나 사령관의 직함이 있다. 개별 수행권 정도는 우습지.”
말은 튜완을 바라보면서 했다. 이번 일의 결정권은 노드만이 아닌 그의 부친인 튜완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우젝의 예상대로 튜완은 일견 탐스럽게 흔들리는 라울의 낚싯바늘을 덥석 물었다.
“그러면 부탁을 하겠네. 꼭 좀 부탁하겠어.”
“그럴까요. 한번 힘 좀 써볼까요?”
라우젝은 웃었다.
해냈다. 때문에, 그 미소는 화사했다.
라우젝의 계획을 들은 튜완과 노드만은 한결 밝은 얼굴이 되었다. 이쪽 말대로 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올라가는 동안에도 노드만은 몇 번이나 굽실거렸다.
병신 같은 놈. 한심하기 짝이 없다면서 라우젝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A3 구역 복도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또 뭘 하려고?”
가이나를 발견한 라우젝의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라우젝은 문을 닫고 복도로 들어와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그걸 확인한 직후 가이나의 경솔함을 탓하는 말을 했다.
“그런 식으로 돌아다니지 마. 위험하잖아.”
“괜찮아. 네가 있는 장소니까. 위험하지 않을 거야.”
쓸데없는 신뢰는 무거울 뿐이었다. 사령관이라 해도 임시직이었다. 다른 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여왕이 한정적으로 부여한 권한. 그것이 얼마나 덧없는 건지는 가이나 그녀가 더 잘 알 거다.
혼자 있기가 싫었던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이리로 나온 것일까. 라우젝의 시선을 외면하며 여왕은 중얼거렸다.
“라울이 돌아올까?”
“한번 정하면 뒤도 안 돌아보는 놈이지. 절대로 오지 않으려 들 거야. 이쪽이 섣불리 움직이면 보복을 할 수도 있어.”
“……보복이라.”
중얼거린 여왕의 눈빛이 한결 어두워졌다.
최악의 상황을 막고 서로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그녀가 욕심을 버리는 수밖에 남아 있질 않았다. 그녀가 포기하지 않고 모든 걸 손에 쥐고 있으려 한다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라우젝은 팔짱을 끼고는 지나치는 투로 말했다.
“마기휼이라면 돌아올 거야. 다정한 놈이니까.”
“그 사내는 어떤 사람이야?”
“좋은 사람.”
라우젝의 추상적인 설명에 가이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하고는 다르네.”
“많이 다르지.”
자신과도 다르고, 라울과도 달랐다. 그는 분명 그만의 해결 방법을 손에 쥐고 있을 터였다. 그것이 지금의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무리였다. 변화를 시키는 건 모두의 욕망이 충족되는 시점일 때에나 가능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다면 다른 수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은 숨바꼭질에 장단을 맞춰주는 수밖에는 없어.”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 라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변화는 그때부터 시작될 거다.
레이라는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그걸 확인한 후에 언덕을 마구 뛰어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간 그녀는 숲에 도착을 해서 재차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정리가 된 산길 옆구리로 들어가 한 5분 정도를 걸었을까. 작고 아담한 오두막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오두막 앞에 있는 작은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레이라가 반가움에 한 손을 들기가 무섭게 사내, 마기휼이 고개를 들었다.
“오, 레이라.”
“큰오빠.”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마기휼의 행동에 레이라의 미소가 한결 밝아졌다.
단숨에 그의 앞으로 달려간 레이라는 챙겨 들고 온 바구니를 내밀었다.
“샌드위치.”
“그래. 고맙다.”
마기휼은 손에 묻은 흙을 털고는 바구니를 받아 앞에 내려놨다. 그리고 하나를 꺼내 입에 넣는 걸 확인한 레이라가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가만히 마기휼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엄마가 돌아왔어.”
“잘됐네.”
“큰오빠가 구해준 거지? 고맙습니다.”
레이라는 고개를 숙였다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샌드위치를 입에 문 마기휼이 눈을 댕그랗게 뜨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가휼 오빠가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는 거라고 했어.”
녀석, 쓸데없는 소리를 하다니. 마기휼은 입 안에 든 것을 우물거리고 먹으면서 팔꿈치로 레이라를 가볍게 툭툭 쳤다.
“오빠라고 부르더니 왜 이름을 붙이고 그래?”
“하지만 가휼 오빠만 챙겨주는 것 같으면 큰오빠가 섭섭할 거 아니야. 전에는 오빠가 하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이름 붙이는 거야. 큰오빠. 가휼 오빠. 이제는 이렇게 부를 거야.”
방긋 웃는 얼굴이 귀여웠다. 레이라를 보면 화를 낼 마음도 사라진다. 그냥 따뜻한 마음이 되어버렸다.
착한 녀석. 마기휼은 레이라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듯 레이라는 소리 내 웃었다.
“간지러워.”
웃던 레이라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오두막을 열고 라울이 나오는 게 눈에 들어오자 바로 고개를 돌린다. 뺨이 붉게 물드는 걸 확인한 마기휼이 그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놀리듯 물었다.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건데? 설마하니 취향이야?”
레이라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안 그래. 나는 그냥, 그저―”
레이라는 조금 더 수줍은 얼굴이 되어선 고개를 숙였다.
“큰오빠랑 닮은 것 같아서…….”
마기휼은 눈을 끔벅였다. 그리고 문 앞에 뚱한 얼굴로 서 있는 라울을 보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라울의 얼굴과 내 얼굴. 잠시 동안 생각을 하더니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전혀 안 닮은 것 같은데?”
“아니야. 안 그래. 큰오빠가 얼마나 멋진데. 키도 크고, 자상하고, 그리고―”
레이라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더 말을 하지 못했다.
왜 그러나 싶어 빤히 보자 벌떡 일어났다.
“나 갈게. 내일 또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엄청난 속도로 본인이 할 말만을 한 레이라는 당장 몸을 돌리고 뛰어갔다. 그 모습에 실실거리고 웃음이 난다. 귀여운 녀석. 흐뭇한 마음으로 레이라가 달려간 쪽을 보고 있으려니 옆으로 튼실한 다리가 다가와 섰다. 마기휼은 바구니에서 꺼낸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먹어.”
라울은 순순히 마기휼이 건넨 샌드위치를 받아 한입 물었다. 우물우물 씹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맛있군.”
“그렇지? 음식 만드는 솜씨가 꽤 좋은 것 같아.”
마기휼도 샌드위치를 먹었다. 여섯 살짜리가 만든 거라고 생각하면 감탄사가 나올 정도는 아니더라도 제법이었다. 무엇보다 이쪽을 생각해서 만든 거라는 것에 점수를 높게 쳐주고 싶었다. 우물거리면서 마기휼은 옆을 쳐다봤다. 라울은 묵묵히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들어가버리고 싶어했다. 결국 정착한 곳은 여기였지만 말이다.
로노베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자꾸만 뭔가가 발목을 붙잡았다. 아직은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많아 쉽사리 발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집안 소유의 호숫가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라울의 기분은 별로인 것 같았다. 일단 계획한 일을 할 수 없게 된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거겠지. 마기휼은 슬쩍 라울의 속을 떠봤다.
“화났어?”
“화가 날 일이 뭐가 있지? 난 그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야.”
“바보 같지는 않지. 그저 유치할 따름이지.”
순간 라울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이쪽을 흘깃 보나 싶더니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문다. 미간 사이로 선명한 주름이 만들어져 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화났지?”
“……안에 들어가 있겠다.”
보아하니 딱 삐친 거였다. 이런 걸 보면 저쪽이 어리긴 어리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이쪽도 나이를 괜히 먹은 게 아니란 말이지. 삐친 아이가 있으면 달래주고만 싶어진다. 마기휼은 바구니를 들고 라울의 뒤를 쫓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 쪽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라울이 보였다.
또 독서 중이다. 마기휼은 소파 옆에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안 돌아갈 거야?”
“내가 왜 돌아가야 하는 거지?”
날이 선 대답. 마치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다.
마기휼의 입술 꼬리가 비죽이 올라갔다.
“떠나고 도망 다니는 게 이기는 것 같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장 책을 덮는다. 그걸 옆에 내려놓은 라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기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곳에 있으면 여왕과 혼인을 해야 한다. 넌 그걸 지켜볼 수 있어?”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놈이 눈을 치뜨니 굉장한 박력이었다. 괜히 화나게 한 건가. 그리 생각하고 있으려니 라울이 재차 물어왔다.
“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는 걸 두고 볼 수 있나?”
“당연히 아니지.”
그런 건 정말 싫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다니. 이쪽이 이렇게나 라울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던 건가 싶어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단호하게 나온 마기휼의 대답에 라울은 속이 풀린 것 같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던 라울은 다시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책을 읽는 옆얼굴이 아름다웠다. 잘 정돈이 된 그는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았다.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왕자님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아까워.”
저도 모르게 나오는 말에 라울이 재차 이쪽을 봤다.
“이런 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야.”
라울의 얼굴이 굳어진다. 불쾌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 말에 대해서는 이미 무를 수 없었다. 라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날 과대평가 하지 마라. 난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아니. 넌 대단한 사람이야. 그리고 대단해야만 해. 그렇게나 도망 다니던 내가 선택한 남자인데. 별 볼일 없으면 그게 더 곤란해.”
마기휼의 얼굴 위로 장난스러움이 퍼진다. 그걸 바라보던 라울이 마기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하반신을 붙여 온다. 맞닿은 부분에서 뜨겁게 발기가 된 커다란 게 느껴졌다. 침착하라는 듯 마기휼은 양손을 들어 라울의 어깨를 잡았다.
“낮부터 왜 이래?”
“가만히 있어.”
고개를 숙인 라울은 마기휼의 입술을 깨물었다. 저릿하게 퍼지는 통증에 바로 입을 다문다. 이내 라울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떨어지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뛰었던 마기휼은 고개를 젖히며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나 정말 못 말리겠네.”
하지만 이쪽도 하고 싶어졌다. 그럴 기분이 들었다며 라울의 등에 손을 댔다.
입 안을 탐하던 입술이 점점이 내려간다. 목에 입술을 대고 빨아들이는 느낌에 마기휼은 한숨을 토해 냈다. 떨리는 숨결이 유혹으로 다가왔다. 라울은 마기휼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 넣고 몸을 밀착했다. 앞으로 넘어온 마기휼의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넘기고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는 동안 옷을 벗었다. 마기휼도 스스로 옷을 벗으면서 생각했다.
해도 되겠지? 전에 하고 나서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그건 배에 직방으로 충격을 주는 일인데 자주 한다 해서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아이 생각에 더럭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만둘까? 그리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곧장 라울이 목을 깨물었다. 따끔한 통증에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가슴에 달라붙은 라울은 눈을 감고 있었다. 열중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더는 망설일 수 없어졌다.
어쩔 수 없나. 사람은 본능에 따르는 존재이니까.
마기휼은 라울의 얼굴을 끌어안은 채로 몸을 숙였다.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은 라울의 위에 올라탄 상태가 된 마기휼은 그의 턱을 잡고 곧장 키스를 시도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이 벌려지고 기다렸다는 듯 혀가 맞닿았다.
물컹하게 닿는 혀의 감촉과 더불어 입술이 닿는 느낌이 최고였다. 어디선가 굉장히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마기휼의 얼굴은 이미 반쯤 풀어진 채였다.
나른했다. 몸이 축축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균형은 딱 맞았다. 낮에서 저녁까지 줄창 하다가 밤에 자기 시작한 것이었다. 심하게도 안 했다. 손으로 자극을 주고 사정을 한 것도 몇 번 있었다. 이대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고 평소대로 움직이면 되었다.
곤히 잠들어 있나 싶던 마기휼은 눈을 떴다. 그리고 이쪽으로 몸을 돌린 채로 누워 있는 라울과 눈이 마주쳤다. 라울이 몸을 일으키자 마기휼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나가 볼게.”
“가만히 있어라.”
마기휼의 손목을 잡아 침대 위에 내려놓은 라울은 침대 아래로 두 다리를 내렸다. 급한 대로 바지만 입었다.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는 걸 마기휼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거실은 어두웠다. 벽에 걸린 등불의 화력을 세게 한 라울은 그걸 들고 현관 쪽으로 이동했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등불을 내밀었다. 정원 쪽으로 누군가 서 있었다.
“거기 누구냐.”
묻는 라울의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살기가 서린 음성에 상대가 움직였다. 느리게 다가온 사내의 얼굴은 금방 확인되었다. 낡은 망토를 쓰고 있는 건 가휼이었다.
라울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왜 온 건가.”
인사를 하자마자 왜 온 것인지에 대해 묻는 것인가. 과연 직설적이었다. 가휼은 순순히 대답을 했다.
“형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이 늦은 시간에 말인가.”
“이럴 때가 아니면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눈을 내리뜬 가휼은 피로한 얼굴이었다. 그가 좋은 말을 하기 위해 왔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 달갑지 않은 듯 가휼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마기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누구야?”
가휼이 고개를 든다. 마기휼의 목소리를 듣고 반응을 보이는 게 달갑지 않았다. 라울은 선을 그어 놨다.
“일단 기다리도록.”
그리 말을 한 라울은 안으로 들어갔다. 등불을 거실에 있는 테이블에 두고 반쯤 열린 방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고 있던 마기휼은 앞을 가리듯 서는 라울을 올려다봤다. 그를 보다가 위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현관 앞에 서 있는 사내가 보였다.
누군지 바로 알았다. 마기휼의 표정이 굳어졌다.
레이라 이놈. 불었구나.
마기휼은 라울을 흘깃 쳐다봤다.
“왜 온 거래?”
“할 말이 있는 듯싶더군.”
할 말이라.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마기휼의 안색이 굳어졌다. 가만히 있나 싶던 그는 뒤로 물러났다.
“일단 씻어야. 아니, 그 전에 옷이나―”
움직이다 말고 마기휼은 움찔했다. 문을 잡고 눈을 감은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통증 때문인 모양이었다. 안색을 굳힌 라울이 마기휼의 팔을 잡았다. 그의 통증을 완화할 수는 없고, 그저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마기휼은 애써 웃어 보이며 손으로 허리를 주물렀다.
“옷 입고 올 테니까 차 좀 부탁할게.”
차라니. 순간적으로 라울은 주춤했다. 한 번도 그런 거 해본 적 없었다. 그리 말을 하고 싶었으나 마기휼은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미처 라울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것뿐이었다. 빼도 박도 못하고 차를 끓이게 된 라울은 망설이다가 몸을 돌렸다. 의자에 걸쳐져 있던 셔츠를 집어 올렸다.
고개를 들자 가휼과 눈이 마주쳤다. 가휼은 바로 입을 열었다.
“아―.”
더 말을 하지 못한다. 어색함이 감돈다. 라울은 안을 가리켰다.
“들어올 텐가.”
“……실례하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온 가휼의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라울의 채 단추를 잠그지 않은 셔츠를 흘겨봤다. 그 모습에서 뭔가를 깨달은 듯 눈빛이 가라앉는다. 그러던 그는 테이블 앞의 의자를 끌어 그 위에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번에도 가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곳에 계셨던 겁니까.”
“나름 지내기에 불편함은 없다.”
“형님이 이런 장소를 좋아하시긴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하고는 어울리지 않는군요.”
대답이 없다. 라울은 주방 쪽으로 들어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화롯불을 확인했다. 이걸로 물을 끓일 수 있을까. 그리 궁리하는 듯한 얼굴을 본 가휼은 급히 말했다.
“차는 됐습니다. 늦은 시간이 아닙니까.”
가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울은 기다렸다는 듯 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과일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가휼에게 다가갔다.
“과일이라도 먹을 텐가.”
“고맙습니다.”
가휼이 순순히 하는 말에 라울은 알게 모르게 안도했다. 차를 끓이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의자에 앉은 라울은 그간 자신이 마기휼이 해준 것만 먹고 지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때문에 차를 끓이는 간단한 일에도 주춤했던 것이다. 그건 옳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차근차근 배워 둬야 했다.
“형님과 정확하게 어떤 사이신 겁니까?”
“내가 그걸 자네한테 말해야 하는가.”
사람에 따라 굉장히 거북하게 여겨질 수 있는 주제였다. 하지만 라울은 태연하게 받아치며 맞은편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가휼을 노려봤다.
“돈을 받고 마기휼을 우리 집안에 판 건 자네가 아니던가.”
“……그랬지요.”
날이 선 라울의 말투에서 그가 이쪽에 적의를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걸 모르는 쪽이 어리석은 걸지도 몰랐다.
“죄책감을 느끼나.”
“느낄 자격도 없다는 걸 압니다. 그럼요. 알고 있습니다.”
가휼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릿한 눈동자로 테이블 모서리 부분을 바라보던 그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레나와의 사이를 알게 되셨을 때 당당하게 굴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굴었지만, 아니었습니다. 두렵고 그냥 무섭더군요. 심장이 괜히 뛰고 가슴이 답답하고 예민해졌습니다. 그 후로 몇 번이나 큰소리를 치고 집 밖으로 나가고 쉽사리 안정을 유지할 수 없었지요. 그러는 동안 레나도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그녀는 저만을 의지했으니까요. 제가 제대로 중심을 잡아야 했다는 말도 우습지만, 그래야 했습니다. 그래야지 그녀도 안정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몰래 사랑을 나누는 건 애틋함을 키웠습니다. 이대로 함께 도망가자는 말도 나누었지요. 하지만 모든 게 들키자 현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간 우리가 즐기고 있었던 건 불륜이었습니다. 불륜인데도 그 당시에는 서로가 마치 비극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애달프기 그지없었습니다.”
쓴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라울은 그의 감정에 동조하지 않았다. 냉랭한 비평가라도 되는 양, 더 말을 해보라는 눈빛을 던졌다.
가휼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양손을 움켜쥐었다.
“아버지가 도박에 빠져들고 가세가 기울고 레나는 절 닦달했지요. 저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아버지를 막아보라 했지만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레나도 저도 미칠 것 같았습니다. 끔찍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우리들의 미래 같아서 두려웠습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비밀을 알고 손가락질을 하고 돌을 던진다 한들 어찌 그들을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을 한 건 우리들인 걸요.”
“그 말을 왜 나한테 하는 건가.”
더는 네 변명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한 말투에 가휼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아니라 뒤에 있는 마기휼이 들으라는 소리군. 그의 얼굴을 보고 직접적으로 말을 할 용기도 없나.”
“그렇습니다. 전 비겁한 사람이니까요.”
가휼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렸다.
참담한 표정을 지은 채로 가휼은 재차 말을 꺼냈다.
“형님께 전해주십시오. 형님을 판 것은 형님이 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말하길, 그도 형님만 찾았다고 하더군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괜히 밉더군요. 부모님은 모두 형님만 사랑하고 있어. 난 아무것도 아닌 거야.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다 제가 못난 탓인데, 그걸 형님에게 뒤집어씌웠던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빚쟁이가 달려들었습니다. 돈은 없는데 그들의 공세는 두려울 정도더군요. 저와 레나만 있으면 상관이 없지요. 하지만 레이라가 있었습니다. 동생이지만 제 딸처럼 키웠습니다. 제 손으로 어르고 달래고 밥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금이야 옥이야 정성을 다해서 키운 그 아이가 불행해지게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의가 들어왔을 때 수락한 겁니다. 형님은 어른이고, 나보다 강한 사람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니 괜히 과거의 일이 떠오르면서 형님을 미워했던 감정이 강해지고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어졌습니다. 형님이 집안에 있었으면 레나와 그런 사이가 되지도 않았을 거라는, 너무도 비겁하고 추잡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명할 때에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습니다. 정말, 조금도 없었습니다.”
“제의가 들어왔던 건가.”
“그렇습니다. 당신의 집안사람들은 형님의 신체에 대해 알고 있더군요.”
라울은 눈을 내리떴다. 오르베. 그 여자가 조사에 들어갔던 것이로구나. 라울 본인이 후손에 대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으니 별의별 수를 다 써서 마기휼을 찾아냈던 것이다.
“당신은 형님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바라보는 라울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살피며 가휼은 재차 물었다.
“형님을 사랑하십니까.”
“그걸 왜 자네가 묻는 거지.”
“전 마기휼이라는 사람의 동생이니까요.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도 형님을 걱정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쓰레기라 칭하는 건가. 우스웠다.
라울은 가휼을 바라봤다.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에 가휼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라울 특유의 분위기를 당해낼 수 없었던 그는 금방 눈을 내리뜨게 되었다.
“나는 너라는 인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아버지의 여자는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하는데도요?”
“사람이라면 생각을 해야 하지. 끝까지 책임을 질 수 있는 각오가 되어야 하지 않나. 너는 지금 도망을 치려 할 뿐이 아닌가. 들켰을 때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마기휼을 팔았을 때에도, 그가 돌아왔을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모두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어. 그걸 보이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닌가.”
차분하게 이어지는 말들이 모두 가휼을 후벼 파는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 그것도 라울이 상대이다 보니 전해지는 충격이 더 컸다.
“저는―”
“나는 마기휼을 사랑한다.”
가휼은 숨을 들이켰다. 고개를 든 가휼은 놀람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설마하니 이리도 직설적으로 고백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왕통이고 미래의 노르디아 왕 후보. 그런 내가 사내인 마기휼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게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내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는 내가 키운다. 설령 다른 이가 그 아이를 가지고 가려 한다면, 마기휼에게 해를 가하려 한다면, 내 의지를 꺾으려 든다면 모두 죽이겠다. 죽이고 죽이다가 그러고도 안 된다면 그 순간에는 마기휼을 죽일 거야.”
불빛이 흔들렸다. 라울의 눈동자 안쪽으로 음영이 서렸다. 스산한 기운이 풍겼다.
“그래서 영원히 내 사람으로 만들고 나도 죽을 거다. 나는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다.”
나직한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의 말이 귓속으로 파고드는 순간 가휼은 소름이 도는 걸 느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있는 가휼을 확인하며 라울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너는, 너희는 그만한 각오가 있는 거냐.”
더는 라울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수 없었던 가휼은 고개를 떨구었다. 하얗게 질리는 얼굴을 확인한 라울의 표정이 더 차갑게 변했다.
“각오도 없으면서 입만 나불댈 따름이지. 어쩔 수 없다고. 그건 정해진 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야. 나는 그런 것 따위에 휩쓸리지 않아. 동참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내 갈 길을 갈 따름이다.”
그릇된 것을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다. 그걸 유지할 따름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너는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고 강요를 한다. 이쪽에게 이해를 시키지 않고 그냥 계속해서 압력을 행사할 뿐이다. 그런 식으로 구는데 어찌 따를 수 있단 말인가. 따르지 않을 거다.
돌아가지 않는다. 여왕과 혼인도 하지 않는다. 몇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가문이 뭐, 그게 뭐라고? 나는 그런 것보다는 지금 이 상황이 더 중요했다. 모든 게 다 허상이었다. 신기루에 불과했다. 망령이었다. 그런 하잘것없는 것에 사로잡혀 정말 중요한 걸 놓칠 순 없었다. 놓치면 그 날이 바로 자신의 심장이 멈추는 순간이라는 걸 알기에, 다른 어느 때보다 단호히 말할 수 있었다.
가휼이 오르베로 보였다. 라우젝과 가이나로 보였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라울은 그들에게 말했다.
“너는 도망가면 안 돼. 넌 그럴 자격도 없다.”
가휼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내린 선택이었을 거다. 그 통보를 마기휼에게 하고 싶었을 테지. 그리고 암묵적인 허락을 받았다는 걸로 다소 편하게 걸음을 옮길 수 있었을 터였다. 어림도 없었다.
라울은 일어섰다.
“돌아가라. 마기휼에게는 따로 말을 해 두겠다.”
“저는―”
“애초에 손을 댔을 때, 이리될 것을 예상했어야 했던 게 아닌가. 보다 정확한 태도를 취해라. 이런 건 마기휼에게도 그 여자에게도 좋지 않아. 넌 발전이 없는 놈이로군.”
“…….”
마지막 순간까지도 숨통을 조여 온다. 인정사정이 없는 사내였다. 공황상태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멍하니 있던 가휼이 비틀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가휼이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을 걸어 잠갔다. 테이블에 올렸던 등불을 들어 벽에 다시 걸어두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캄캄했다. 오른편을 내려다보자 마기휼이 보였다.
마기휼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세운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처량맞은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라울은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어 마기휼의 어깨에 올렸다. 마기휼이 움찔하고 몸을 떤다.
“돌아갔을 거다.”
마기휼은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다. 가만히 있나 싶던 마기휼은 한숨을 토해 냈다. 습한 내음이 났다. 마기휼이 울고 있다는 걸 확인한 라울의 안색이 굳어졌다.
“……내 동생이야. 한 번도 부모님의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한 불쌍한 놈이야.”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응석을 받아주면 안 된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응석을 받아줄 수 있는 게 있고, 아닌 게 있는 법이었다. 가휼이 한 건 받아줄 수 없는, 받아줘서도 안 되는 응석이었다.
마기휼은 고개를 들어 라울을 쳐다봤다. 눈물은 없지만 눈 아래가 벌겋게 익어 있었다.
“고맙다. 네가 내 대신에 많은 말을 해줬어.”
말을 하고 싶어도 나오지 않는 상대였다. 그걸 라울이 대신 해준 거였다. 뭐, 중간에는 본인 일이 겹쳐서 조금 감정이 묻어난 부분도 없잖아 있었지만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마기휼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서 많은 것이 풍겨져 나왔다.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려 했을 때, 마기휼이 고개를 저었던 이유에 대해서 알 것 같았다. 짐작만 했던 것이 보다 확실해진다. 책임감이 강한 사내였다. 집안을 두고 그냥 떠날 수 없었던 거겠지. 장남이라서 그런 걸까.
“너는 정말로 가족을 사랑하는군.”
“남 말 하지 마. 너도 마찬가지잖아.”
마기휼은 라울의 목을 끌어안았다. 순순히 안겨 오며 라울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기휼의 몸을 감쌌다.
라울의 체취를 맡으면 안심이 된다. 이대로만 있고 싶었다.
“솔직해져봐.”
속삭임에 라울은 눈을 내리떴다.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
“미우나 고우나 네 고모고, 형님일 거 아니야. 그리고 네 나라 노르디아지.”
라울은 잠시 생각을 해봤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곳과 그가 있었던 자리에 대해서 말이다. 점점 라울의 표정이 지워져 간다.
마기휼은 라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도망가지 말라는 건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야. 우리 일단은 상황이 정리되면 여기를 뜨든지 말든지 하자. 그렇다고 해서 여왕과 결혼하는 걸로 상황을 정리하려 하면 나 절대로 가만히 안 있어.”
마지막 말은 농담 삼아 할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감정이 실리게 되었다. 좀 살벌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것에 라울이 웃어버렸다.
피식-, 웃는 얼굴을 본 마기휼이 이를 드러냈다.
“웃기도 하고 말이야.”
손가락으로 라울의 턱을 쿡쿡 찔렀다.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할 수 있었다. 아마도 확신이 있기 때문이겠지. 이 사람이라면 뭘 해도 자신을 다 받아줄 거라는 확신 말이다.
라울은 마기휼의 몸을 끌어안고 그의 머리에 뺨을 댔다. 눈을 감았다.
“그래. 어정쩡하게 처리를 하고 물러나는 건 너나 나답지 않은 일이지.”
“당연하지. 우리는 할 건 확실하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래. 그렇지.”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다독이려 해도 점점 목소리가 작아진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중간한 건 결국 발목을 잡을 뿐이었다.
확실하게. 정말 확실하게 하자.
“아침이 되면 천천히 준비하자.”
중얼거림에 라울은 천천히 고개를 까닥였다.
걸어가는 동안 마기휼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그건 라울도 마찬가지였다. 뒤를 볼 때마다 라울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는 것을 보면 둘 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서 가라는 듯 마기휼은 손짓을 했다. 라울은 앞으로 고개를 돌렸고 걸음을 옮겼다.
라울은 군함 쪽으로, 이쪽은 저택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것밖에는 없는 거겠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마기휼은 터덜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면 가휼이 있겠지. 어떤 얼굴로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외면하고 있으면 안 된다. 기합을 넣고 확실히 해야만 했다. 그래. 확실하게 말이다. 마기휼은 걸음을 서둘렀다.
“큰오빠!”
철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레이라가 알아보고는 달려왔다. 바로 앞에서 멈춘 레이라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마기휼을 올려다봤다.
“큰오빠. 돌아온 거야?”
“응. 우리 꼬마 아가씨가 보고 싶어서 왔어.”
“정말?”
눈을 반짝이며 레이라가 양팔을 위로 주욱 뻗었다. 이제는 서슴지 않고 안겨 오려는 게 귀엽다. 하지만 이쪽 몸 상태가 안 좋으니까 바로 덥석덥석 안아주기가 힘들었다. 아가씨. 오빠는 어제 야한 짓을 했단다. 때문에 작은 너 하나 안아 들 수가 없구나.
괜히 겸연쩍게 느껴진 마기휼은 레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기휼이 안아주지 않자 레이라는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투정을 부리는 듯한 얼굴이 되었지만 말은 없었다. 그런 레이라의 손에 바구니가 들려 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이 의아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그건 뭐야?”
“엄마한테 줄 거야.”
“엄마한테 가는 거로구나.”
“응. 엄마랑 같이 먹을 거야. 그런데 왜 엄마는 집 안으로 안 들어오는 걸까.”
중얼거린 레이라는 바구니를 끌어안으며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어렴풋이 뭔가를 직감한 것일까. 어린애들은 의외로 감이 좋으니 말이다.
내려다보는 마기휼의 눈동자는 차분했다. 그걸 읽어낸 레이라는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엄마, 집으로 들어오면 안 돼?”
“……….”
레이라의 머리를 토닥이던 마기휼의 손이 멈추었다. 굳어지는 마기휼의 얼굴을 확인한 레이라는 입술을 비죽였다.
“엄마, 돌아오면 안 되는 거야?”
레이라가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가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이 어정쩡한 상태는 좋지 않았다. 뭐라도 좋으니 대책이 필요했다. 그게 뭐가 있을까.
“큰도련님!”
부름에 고개를 들자 집사가 보였다. 레이라와 마찬가지로 반가움이 역력한 얼굴의 집사는 옆으로 다가와서는 손을 덥썩 잡았다.
“오셨습니까. 지난 사흘간 도대체 어디에 가 계셨던 겁니까?”
“바람 좀 쐬고 싶어서 나갔다 왔어.”
“걱정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셔서 안심이 됩니다.”
염려의 말 속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눈빛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마기휼은 아래에 있는 레이라의 머리를 손으로 토닥였다.
“레이라가 어머니를 만나러 가려는 모양이야. 혼자 가면 위험하니까 마차를 태워서 보내.”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집사는 레이라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저를 따라오세요.”라고 하는 말에 그녀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집사가 레이라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마기휼이 입을 열었다.
“집사도 같이 가서 어머니가 지내는 곳을 좀 둘러봐. 필요한 게 있으면 마련해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집사와 레이라가 마차에 타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시종들이 공손하게 그를 맞이했다. 식사를 할 건지, 목욕을 먼저 할 건지에 대해서 묻는 이들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주변에 있는 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조용히 있으려니 이내 가휼이 나타났다.
계단을 내려온 가휼은 마기휼을 보는 순간 안색이 굳었다. 하지만 피하는 일 없이 그 앞으로 걸어와 공손히 말을 건넸다.
“형님, 오셨습니까.”
“그래. 일단은 우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해 볼까.”
“서재로 가시지요.”
이미 예상하고 있던 패턴이라는 듯 가휼은 크게 당황하지도 않았다. 마기휼이 앞장을 서고 가휼이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일까. 고용인들은 알아서 물러나줬다. 서재 앞에 도착을 한 마기휼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쪽에 있는 소파에 앉아 옆에 서 있는 가휼을 올려다봤다.
“앉아. 왜 그렇게 서 있는데.”
“실례하겠습니다.”
맞은편 소파에 앉은 가휼은 긴장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굳은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마기휼은 지나치듯 물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내가 노골적으로 널 비난했으면 좋겠지? 그러면 속이 편할 것 같지?”
“아닙니다. 전 그저―”
“레나와 함께 있고 싶은 거냐. 그녀를 아직도 사랑하는 거냐.”
돌리는 일 없이 바로 본론을 꺼내는 말에 가휼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복잡함을 띠고 있는 눈을 하고 있던 가휼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를 아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그래서 멀리 보내버리고 싶지만, 그러면 그녀만 피해를 보는 거지. 그녀가 갈 것이 아니라 널 멀리 떠나보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거야. 하지만 레이라가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그건 안 될 일이야.”
가휼은 말이 없었다. 레나가 사라짐으로 인해 레이라가 얼마나 불안해할지, 그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테지.
“레이라를 어떻게 생각하냐.”
“동생입니다. 딸 같은 제 동생이지요.”
“그리고 내 동생이기도 하고. 그 아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겠지?”
“물론입니다. 그 아이가 불행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새어머니를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게 할 거다.”
가휼은 놀란 듯 당장 고개를 들었다. 설마하니 마기휼이 그런 선택을 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쫓아내고 멀리 보내는 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건 멍청한 짓이야. 거리낄 것이 없어 시작했던 거잖아. 그런데 다 들통나니 숨기려 하는 건 도대체 뭔 짓거린데? 그녀는 돌아올 거다. 그래서 이 집안의 안주인 노릇을 하겠지. 넌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 집안의 주인이 되어야 해.”
“아닙니다. 이 집안의 주인은 형님이셔야―”
“네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장남이기 때문에 내가 이 저택을 책임질 필요가 없어.”
단호한 말에 가휼은 입을 다물었다.
마기휼은 그런 그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20만 베리는 다시 안제크가에 돌려준다. 그리고 네가 살림을 맡아서 집안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놔. 몇 년이 걸려도 상관없어. 아버지가 진 빚은 네가 다 갚아라. 그걸 다 갚으면 그때 부모님 무덤 앞에 함께 가자. 그 전까지 너는 아버지 앞에 나타나지도 마라. 빚을 다 갚기 전까지는, 아버지께 죄송하다는 말도 꺼내지 마.”
가휼은 가만히 있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상관치 않았다. 이미 이렇게 하기로 정했다.
자신이 집안의 모든 빚을 떠안는 건 안 되었다. 이번 일은 저지른 이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가휼이 평생에 걸쳐 돈을 갚고 아버지에게 속죄를 해야만 했다. 그 전까지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떠나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다.
만약 가휼이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을 간다면 마기휼은 당장 그 뒤를 쫓아 그의 목덜미를 잡고 끌고 올 거였다.
네가 뿌린 씨앗은 네가 거두어라.
침착한 마기휼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가휼은 쓰게 웃었다.
“……너무하시는군요.”
중얼거린 가휼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너무하다고 하는 말에도 마기휼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군함과 일반 운송함은 무게와 사용하는 동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음향에도 약간의 다름이 있었다. 묵직한 음향. 그 소리는 노르디아의 것과도 달랐다.
뭔가 싶었던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건, 군함이었다. 하얀색의 군함. 그것은 알센 연방국의 군함이었다.
“……무슨?”
어째서 알센의 군함이 로노베 영토로 들어오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던 라울의 안색이 굳어졌다.
군함이 만들어내는 강한 바람이 그의 긴 금발을 마구 흩트렸다. 그럼에도 굳은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기만 하고 있으려니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쳐다보자 말을 타고 달려오는 군인 둘이 보였다. 그들은 라울과 눈이 마주치자 당장 손을 흔들었다.
“대령님!”
서둘러 라울의 앞에 당도한 그들은 말에서 내려 라울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동안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안 보이셔서 걱정했습니다.”
“알센의 군함이 어째서 로노베에 온 거지?”
안부에 대해 묻는데 곧장 알센 군함에 대해 물으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군인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모르셨습니까? 레드존에 이상이 생겨 지금 분위기가 뒤숭숭한 것 같은데요.”
“레드존이라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은 아이작과 마리아였다. 그들이 달리 일을 벌이는 건가 싶었던 라울은 안색을 굳혔지만 군인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레드존에 문제가 생긴 것만 알지 구체적으로 뭐가 문제인지는 모를 거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라우젝, 그뿐이었다.
“설마―.”
일을 친 건가.
거기까지 생각을 한 라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인적이 드문 곳에 라우젝은 서 있었다. 애초에 이쪽이 올 것을 알고 주변 정리를 해 둔 것 같았다.
팔짱을 낀 라우젝은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료하고 지루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빠른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1미터 남짓을 두고 멈춰선 라울을 본 라우젝은 바로 미소를 지었다.
“여-, 라울.”
“무슨 일을 한 거야?”
인사를 건네면 그쪽도 한마디 해주면 좋잖은가. 추궁을 하듯 묻는 건 좋지 않았다. 라우젝의 성격상 살짝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곧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뭐가?”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거냐고.”
그 순간 라우젝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한쪽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린 라우젝은 턱에 손가락을 대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널 자유롭게 해주려는 거야.”
“뭐?”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라울의 미간 사이로 진한 주름이 만들어졌다.
바깥에서 큰 소리가 났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튜완 사령관의 목소리였다. 라울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쳐다봤다. 일이 터진 걸 예감하기 때문일까. 그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라우젝은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알센의 군함이 착함했어. 시끄러운 일이 생길 것 같던데 같이 가 볼까?”
“그 일을 친 게 당신이 아닌가.”
불신하기 때문에 내내 날카로운 말이 나오게 된다. 정확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다른 때라면 무시할 테지만 지금은 그리하지 않았다. 라우젝은 라울의 앞으로 다가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를 못 믿나.”
“나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왜 아무것도 없다는 거지? 난 네 형이야.”
손을 든 라우젝은 라울의 팔을 붙잡았다. 그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를 조금 더 믿는 편이 좋아. 라울. 이 상황에서 너에게 도움이 될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니까.”
라우젝의 눈동자를 마주 응시하는 라울의 표정엔 흔들림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속내가 읽히질 않았다.
마냥 무표정을 한 채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에 라우젝은 웃고 말았다. 재미없는 놈, 이라고 중얼거린 그는 라울의 팔을 놓고 그를 지나쳐 갔다.
라우젝이 나가고 혼자 남겨진 라울의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