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건 치즈 샌드위치.”
내민 샌드위치는 엉성했다. 빵 사이로 치즈와 야채가 튀어나와 있고 양념도 작은 손가락에 묻어 있었다. 그게 지저분하다고 여겨지진 않았지만 치즈만 들어간 건 땡기지가 않았다.
마기휼은 넓게 깐 천 위에 누운 채로 아양을 떨었다.
“큰오빠는 햄 들어간 게 좋아.”
덩치 큰 사내가 귀여운 척을 하며 말하는 게 얼마나 통할까 싶지만 레이라는 금방 다른 샌드위치를 만들어냈다. 이번에는 치즈는 물론이거니와 햄이 두 장이나 들어간 것이었다. 그걸 자신만만하게 내밀었다.
“이건 햄 샌드위치.”
마기휼은 샌드위치를 받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오물거리면서 행복한 듯 웃었다.
“아가씨가 만들어주니까 더 맛있네. 입에서 아주 살살 녹아요.”
햄이랑 치즈 맛이 지나치게 강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린애가 신경 써서 만들어줬기 때문인지 정말 맛있기도 했고 말이다.
마기휼은 푹신한 담요 위에 뒹굴거리면서 만든 샌드위치의 맛만 보고 있었지만 레이라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스스로 빵을 가르고 그곳에 여러 가지를 넣고 그때마다 마기휼이 먹어주는 게 즐거운 것 같았다. 맛있게 먹어주면 줄수록 더더욱 표정이 좋아졌다.
어린 아가씨의 기분을 좋게 하는 건 나름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더 먹으면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너무 무리를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리 생각을 하며 아랫배를 슬슬 문지르려니 레이라가 고개를 들었다.
“오빠.”
동시에 크게 팔을 흔든다. 마기휼은 레이라가 손을 흔드는 쪽을 힐긋 봤다. 가휼이 오고 있었다. 마기휼을 보고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던 가휼은 레이라 쪽으로 걸어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레이라. 재미있는 걸 하고 있구나.”
“오빠. 다쳤어?”
멀리 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오니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가휼은 손을 들어 붕대를 누르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넘어졌어.”
“왜 넘어졌어? 아파?”
그리 묻는 레이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라며 가휼이 고개를 저어도 레이라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쪽과 있으면서 즐거워하는 레이라였지만 확실히 가휼을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더 애틋했다. 어쩔 수 없겠지. 태어나면서부터 주욱 함께 있었던 가휼이었으니 말이다.
마기휼은 본인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서 있지 말고 저리로 가서 앉아.”
마기휼은 지금 바닥에 깐 천과 담요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편하게 드러누운 채로 가휼에게는 자리의 끝에 앉으라는 거였다. 샌드위치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본인은 자리를 비킬 수 없다고 생각을 한 레이라는 당장 마기휼의 다리를 밀어냈다.
“큰오빠가 뒤로 더 가야 오빠가 앉을 수 있단 말이야.”
“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최고라고 하더니 가휼이 왔다고 바로 배신이냐? 이러면 곤란하지. 아가씨, 내가 제일 좋다며?”
건들거리며 아가씨 운운하자 레이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도 가휼 오빠가 앉을 자리는 필요하니까 큰오빠가 일어나.”
“너무하네―.”
마기휼은 꼼지락거리면서 몸을 움직였다.
“그래. 앉아라, 앉아. 내가 치사해서 눈물이 다 난다.”
마기휼은 뒤로 물러났고 가휼은 당황했다. 레이라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려 했으나 마기휼은 이미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로 가휼은 레이라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레이라는 금방 가휼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가휼을 보며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게 재잘거리는 새 같았다. 오랫동안 레이라를 돌봐 왔기 때문인지 가휼도 레이라를 대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때때로 두 사람의 강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속이 복잡해진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가휼을 나가라 하고 싶지만, 레이라가 있었다. 레나도 없는 마당에 가휼까지 가버리면 이쪽이 잘 대해준다 해도 어린아이는 안정을 찾지 못할 거다. 더 심해지겠지.
한숨을 쉬던 마기휼은 이내 그런 복잡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서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흑흑거리고 우는 흉내를 냈다.
“어린 동생에게 구박받는 큰오빠의 마음은 찢어질 것 같구나, 흑흑흑.”
엄살을 부려 댄다는 게 느껴졌던지 레이라는 소리 내 웃었다. 그 모습에 가휼은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가 마기휼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소리 내 웃는 것 같아서.”
마기휼은 샌드위치를 물었다.
“나는 애들한테 인기가 많아. 어떤 까칠한 아가씨라도 다 넘어오게 할 수 있지.”
이름하야 마성의 마기휼이지. 저 라울도 나한테 넘어왔거든.
느긋하게 있으려니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어차피 생각은 자유니까 상관없을까. 그리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레이라가 새롭게 만든 두툼한 샌드위치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오빠. 이것도 먹어.”
“이런. 레이라. 큰오빠는 너의 요리 솜씨를 이미 충분할 정도로 알고 있단다. 네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는 축복을 작은오빠에게 넘기고 싶은데, 괜찮겠니?”
레이라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들고 있던 걸 가휼에게 내밀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말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먹어. 그 눈빛에 가휼은 순순히 샌드위치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 맛있게 잘 먹을게.”
샌드위치를 받은 가휼은 마기휼을 쳐다봤다. 이리로 오고 자리에 앉기까지 몇 번이나 마기휼의 안색을 살폈는지 모른다. 눈치를 본다는 걸 알면서도 마기휼은 가휼을 무시했다. 네가 쳐다보든 말든 나는 몰라. 그리 말하는 얼굴이었다.
한숨을 쉰 가휼은 샌드위치의 맛을 봤다.
“맛있어?”
입에 대자마자 맛있냐고 묻는 것에 가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솜씨가 좋구나.”
“엄마가 가르쳐줘서 그래.”
가휼은 흠칫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어색하게 반응을 보이는 가휼과 그런 가휼을 빤히 쳐다보는 레이라. 레이라는 언제 엄마가 돌아올 거냐고 묻고 싶을 터였다. 하지만 어린애들은 어리지만 분위기를 읽을 줄 알았다. 정말 궁금해도 물으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입을 다물고 마는 거다. 하지만 금방 눈물이 글썽거리고 맺혔다. 마기휼은 툭 치면 울 것 같은 표정인 레이라에게 손을 쑥 뻗었다.
“레이라. 머리카락에 뭐 붙었다.”
“응? 뭐?”
레이라는 당황했고 마기휼의 손이 꼬마 아가씨의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나풀거리고 이내 그 안에서 마기휼의 손이 나왔다.
그 손에는 분홍빛의 작은 꽃이 들려 있었다.
“짜잔. 꽃이 붙어 있네.”
윙크를 하는 마기휼의 모습에 레이라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마기휼은 꽃을 흔들며 레이라에게 그걸 건넸다. 양손으로 꽃을 받아든 레이라는 그곳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았다.
“냄새 좋아.”
중얼거린 레이라는 마기휼을 흘깃 봤다. 장난스러운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이라의 양 뺨이 더 붉어졌다.
“큰오빠는 바람둥이야.”
“어? 왜?”
마기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바람둥이라니. 설마하니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몸을 일으키자 레이라는 뚱한 얼굴이 되었다.
“바람둥이야. 카사노바야. 믿을 수 없는 남자야.”
“심한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큰오빠 완전 충격받는다?”
다 너를 위로해주려고 했던 거 아니야. 그걸 가지고 큰오빠를 카사노바라 하는 건 정말 너무하잖아. 의외로 이 큰오빠는 순정파란다?
억울해 죽겠다는 듯한 마기휼을 흘겨보던 레이라는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기휼 쪽으로 몸을 날렸다. 안겨 오는 레이라는 가벼워서 받아들이는 데에 별문제가 없지만 허리는 아니었다. 욱신 하고 올라오는 통증에 마기휼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지는 걸 확인한 가휼이 급히 레이라의 몸을 안아 올렸다.
겨드랑이가 잡혀서 반쯤 일어선 자세가 된 레이라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가 자신을 들고 있는 가휼을 봤다.
“오빠. 왜 그래?”
“아니. 갑자기 움직이면 옆에 둔 재료가 엎어질 것 같아서.”
“아, 그렇구나.”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던 레이라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확인하고 나서야 가휼은 레이라의 몸을 아래로 내렸다. 재차 무릎을 꿇고 앉은 레이라는 마기휼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뭘 드시고 싶으세요?”
“큰오빠는 너무 많이 먹어서 더 먹으면 안 되어요. 딱 10분만 기다려주면 금방 소화시키고 우리 아가씨가 해주는 맛있는 샌드위치를 냠냠해줄게요.”
“그러면 딱 10분만 기다려 줄 테니까 그때까지 다 소화시키세요.”
“물론이지요, 레이디.”
마기휼의 대화는 어린 레이라의 눈높이에 딱 맞았다. 재미있었다. 마기휼이 소화를 시키는 동안 더 맛있는 걸 만들자며 눈을 내리뜬 레이라는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재료가 부족하네. 더 가지고 올게.”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라는 저택 쪽으로 달려갔다.
콧노래를 부르며 달려가는 게 정말 기분 좋아 보였다. 저게 몇 시간이나 갈까. 점심에 간식 먹고 낮잠 잘 때가 되면 또 훌쩍거리며 우는 거 아니야. 그게 성가시거나 귀찮은 건 아니지만 마음이 쓰였다. 그렇다고 바로 그 여자를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기휼은 가만히 있다가 가휼을 흘겨봤다. 눈이 마주치자 가휼은 흠칫하고 놀랐다. 그 반응에 마기휼은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찼다.
“뭘 그렇게 쳐다봐?”
“아니요. 아이를 다루는 게 능숙하구나 싶어서요.”
“너도 어렸을 때에는 내 손바닥 안이었어. 벌써 잊었냐.”
“하긴 그랬지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건 아니더라도 마기휼은 가휼을 귀여워했다. 마치 아버지처럼 가휼과 놀아주고 챙겨줬던 것이다. 애초에 정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족만이 아니라 마을 대부분의 아이들과 사이가 좋았다. 지금도 거리로 나가면 마기휼의 안부를 묻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마기휼을 내려다보자 그는 허리에 한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냥 지나쳐도 되었으나 인상을 쓰고 있는 게 암만 봐도 이상했다.
“허리가 안 좋으십니까?”
“그래. 안 좋아. 그래서 계속 누워 있는 거잖아.”
대답을 하는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하긴 다정하게 말을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인상을 쓴 채로 옆을 보는 마기휼을 내려다보던 가휼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형님.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아무것도 묻지 마.”
중간에 가휼의 말을 딱 자른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눈을 감았다.
“지금의 너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묻지도 마.”
그런 게 어디에 있어. 너 정말 유치하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지금의 가휼에게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서나, 몸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를 가진 것에 대해서도 말이다. 다른 때라면 가장 큰 아군이 되었을 놈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외면을 하는 마기휼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가휼은 짧은 한숨을 토해 냈다. 동시에 바깥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가휼은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시끄럽지?”
“제가 가 보겠습니다.”
“아니. 내가 간다.”
마기휼은 바닥에 손을 짚고 한번에 몸을 일으켰다. 반동을 줘서 일어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아픈 것 같았다. 일어서선 허리를 좌우로 돌린 마기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쁘지 않은 컨디션이라며 씩씩하게 걸어갔다.
저택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집사도 있었다.
마기휼은 껄렁한 걸음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거기, 무슨 일이야?”
“큰도련님, 주인님.”
뒤를 돌아본 집사의 얼굴이 이쪽을 볼 때와 가휼을 볼 때가 확연히 달랐다.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본심이 드러난 거였다. 이쪽보다는 가휼을 더 의지하고 있던 본심이 말이다.
마기휼이 느낀 걸 가휼이라고 해서 모를 턱이 없었다. 때문에 마기휼의 눈치를 보면서도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무슨 일이지?”
묻기가 무섭게 집사의 뒤에서 한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고개를 든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가휼의 안색이 돌변했다.
“너는 레나와 함께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
“아이고, 큰일이 났습니다!”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사내는 주먹으로 본인의 가슴을 두드렸다. 잔뜩 울상을 한 표정도 그렇고, 입가에 달라붙어 있는 피딱지도 수상쩍었다. 직감적으로 일이 생겼음을 확신한 가휼의 목소리가 커졌다.
“무슨 큰일?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빚을 받으러 그 몹쓸 놈들이 마님이 있는 곳으로 와서는, 행패도 그런 행패가 없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와서 제멋대로 소파에 앉고 물건을 부수고, 저희도 두들겨 패고 말도 못 합니다!”
“뭐라고?”
“일단은 가셔야 합니다! 어서요! 마님이 위험하십니다!”
“그래, 지금 당장―!”
가자는 말과 함께 몸을 돌리던 가휼과 마기휼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가휼은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가휼의 눈동자는 굳어 있었다. 수많은, 정말로 많은 생각과 감정이 교차되는 걸 볼 수 있었던 마기휼은 솔직히 좀 당황했다.
“아저씨!”
잠시 당황해하는 사이에 작은 뭔가가 다리 사이를 쑥 지나쳤다.
사내의 다리에 매달리는 것은 레이라였다.
“엄마는? 엄마는 어디에 있어?!”
“아가씨…….”
가휼과 마기휼은 당황했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라가 나타나다니.
레이라는 더 묻지도 못하고 사내를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주변을 살폈다. 익숙한 얼굴은 있는데 왜 엄마가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듯 떨리는 눈동자를 하고 있던 레이라가 뒤를 돌아봤다. 오빠들에게 매달리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어딘데?”
사내는 마기휼을 쳐다봤다. 누군가 싶은 얼굴이었으나 분위기상으로 그가 이 중에서는 가장 힘이 세다는 걸 감지한 모양이었다.
사내는 황급히 뒤를 가리켰다.
“제,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절 따라오시지요.”
사내를 따르며 마기휼은 집사를 바라봤다.
“집사. 복대 가지고 와. 지금 당장. 그리고 넌 발 빠른 말 가지고 오고.”
“알았습니다.”
마기휼의 지시를 받은 이들이 급하게 움직이자 레이라가 마기휼의 앞에 서선 그를 올려다봤다.
“큰오빠.”
쳐다보는 눈동자 아래가 발갛게 번져 있었다.
레이라의 머리에 한 손을 올린 마기휼은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걱정하지 마. 큰오빠는 능력 있는 군인이란다.”
마기휼 특유의 익살에 레이라가 아주 조금 웃었다. 하지만 금방 불안한 얼굴이 된 레이라는 마기휼의 다리에 매달렸다. 꼬옥 끌어안으며 “엄마가 보고 싶어.”라고 중얼거렸다.
애달픈 목소리에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진다. 마기휼도 20살 무렵에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도련님. 복대입니다. 지금 막 말린 거라 아주 뽀송뽀송할 겁니다.”
마기휼은 위에 옷을 올리고 집사가 가지고 온 복대로 허리를 감았다. 세게 잡아주자 그럭저럭 움직일 만했다.
“괜찮군.”
이 정도면 날뛰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마기휼은 이쪽으로 오는 말 쪽으로 걸어갔다. 조심스레 올라탄다고는 하지만 그 부위에 딱딱한 안장이 닿자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게 된다. 인상을 쓴 채로 고개를 숙이는 마기휼의 모습에 괜찮으냐고 누군가 물어 왔다. 안 괜찮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기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의사 표현을 대신했다.
“안내해.”
고개를 든 그는 이쪽을 쳐다보는 사내에게 짤막하게 말했다.
레나의 거처는 로노베 외곽에 있지만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나가라고 했더니만 자리를 잡은 게 고작 여기인가.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숲의 가운데에 지은 별장을 살폈다. 말이 몇 마리나 묶여 있고 근처에 사내들도 몇 서 있었다. 껄렁한 폼을 보아하니 다른 곳에서 꽤 활개를 치던 깡패 놈들인 듯싶었다. 마기휼은 쪼그리고 앉아 덜덜 떠는 사내를 흘겨봤다.
“전부 몇이나 됐어?”
“한 10명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해. 몇 명이야.”
“아니. 저기. 그게 그러니까―”
사내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봤다. 그런데도 잘 모르겠다. 마기휼의 눈빛에 주눅 든 사내는 점점 더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키는 걸 느꼈다.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내를 앞에 두고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이쪽이 알아내는 편이 나을 모양이다.
마기휼이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옆에 있던 가휼이 말을 건넸다.
“형님. 이쪽 머릿수로는 무리입니다.”
“무리겠지. 사람을 더 불러올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러는 동안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마기휼은 무표정을 하고 있어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가휼은 품에 손을 넣더니 뭔가를 끄집어냈다.
“형님. 이게 있습니다.”
그가 내민 건 총이었다. 가휼이 쏴 달라며 내밀었던 총인가 싶어 흠칫했던 마기휼은 다른 디자인이라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언제 챙겼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이런 게 저택에 상당히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는 모양이로군.”
“……다양한 빚쟁이들이 왔으니까요.”
중얼거림을 들은 마기휼의 입술 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팔로 가휼이 들고 있는 총을 밀어냈다. 치우라는 무언의 사인을 모를 정도로 가휼은 어리석지 않았다. 가휼이 머뭇거리며 품에 다시 총을 넣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별장을 살폈다.
“바깥에 3명. 1층에 왔다 갔다 하는 그림자만 3개, 그리고 2층에 2개. 10명이라면 나머지 둘은 더 안쪽에 있다는 거겠지. 레나와 함께 말이야.”
마기휼의 말에 사내는 당황해선 별장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가 암만 봐도 알 수 없었다. 마기휼은 건물 속까지 다 꿰뚫어 볼 수 있는 건가 싶어 놀랍기만 했다. 대단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기휼은 재차 물었다.
“레나가 몇 층에 있었지?”
“2층에 계셨지만 제가 온 사이에 1층으로 내려오셨을 수도 있습니다.”
“놈들은 수가 많아. 도망가는 널 붙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냥 둔 것은 유인을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지.”
“유인이라니요.”
되묻는 것은 사내가 아닌 가휼이었다.
마기휼은 손가락으로 가휼과 본인을 가리켰다.
“너나 나를 불러들이고 싶었을 거야. 협상이 가능한 자가 오면 빚 운운하며 돈을 뜯어내고 싶었겠지. 아니면 정말 아버지가 빌려 간 돈을 받고 싶어서 이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걸 수도 있고 말이야.”
말을 들은 가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답답한 속내가 전해졌다.
가휼을 흘겨본 마기휼은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가휼이 나랑 같이 내려가 보자.”
“같이 말입니까.”
“그래. 일단 둘이서 내려가서 이야기나 좀 들어보자고. 타협할 만하면 해줄 것이고, 아니면…… 알지?”
그때에는 법보다 주먹이었다. 저런 놈들은 그런 방법이 더 잘 먹히기도 했고 말이다.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던 가휼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은 뒤에 붙어 선 사내를 쳐다봤다.
“넌 저택으로 가서 사람 몇을 더 불러와. 그리고―”
순간적으로 라울이 떠올랐다. 그놈이라면 분명 큰 힘이 될 거다. 하지만 아까 그를 데리고 가는 군인은 다급한 얼굴이었다. 일이 생겨 간 것이 분명한 사람을 오라 가라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대령이니 해야 할 일이 오죽 많겠는가. 그게 당연한 일임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기분이 가라앉는다.
입을 다무는 마기휼의 모습에 사내가 되물었다.
“더 하실 말씀은 없는 겁니까.”
“거기까지야. 일단은 잘 싸울 것 같은 놈들을 모두 데리고 와.”
“네. 최대한 빨리 움직이겠습니다.”
사내는 엎드린 채로 뒤로 물러났다.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건지 기어서 이동하는 것이 느리기만 했다. 저런 속도로 가서 언제 사람을 불러오려는 건지 모르겠다. 탐탁지 않았으나 더 내색을 하지 않고 마기휼은 풀을 헤치고 아래로 내려갔다.
소리가 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내려가는 마기휼의 행동에 가휼은 놀랐다. 이내 뒤를 쫓아 내려갔다.
“거기! 누구냐!”
몸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려가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별장 앞에 서 있던 사내 둘은 언덕 쪽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을 확인하고는 황급히 검을 뽑아 들려 했다.
가휼은 긴장했지만 마기휼은 아니었다. 침착한 마기휼의 뒤에 서 있는 가휼을 본 사내들 중 하나가 눈을 빛냈다.
“가휼인가.”
“이봐! 가휼이 왔다! 두목에게 알려!”
가휼을 본 사내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쪽을 살피는 눈초리가 하나같이 더러웠다. 딱 ‘돈 뜯어낼 수 있겠다.’라는 눈빛들이었다. 그 순간 마기휼은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더러운 새끼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주지도 않은 놈들이 지금 사기를 치려는 거였다. 마음 같아서야 지금 당장 날뛰고 싶었지만 레나가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사람은 미워도 레이라를 생각하고 참기로 한 마기휼은 주변을 살폈다. 그 눈동자의 움직임을 파악한 건지 한 사내가 정확히 마기휼을 가리켰다.
“넌 뭐냐.”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기휼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전 가휼 주인님의 개인 비서입니다. 자산 관리를 하고 있지요.”
“……그래?”
자산 관리를 한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모양이었다.
긴가민가한 얼굴을 하는 사내의 등 뒤의 문이 열렸다.
“이봐. 두목이 부르신다. 들어와.”
앞에 서 있던 사내 둘은 허락이 떨어지자 당장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휼이 먼저 움직이고 마기휼이 뒤를 따랐다. 그러자 문을 연 사내가 마기휼을 가리키며 “잰 뭐야?”라고 물었고 다른 사내가 손가락으로 동전 모양을 그리며 “이걸 관리한대.”라고 말했다.
돈을 관리한다는 말에 마기휼을 쳐다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그 속에 일말의 욕심도 섞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기휼은 앞만 쳐다봤다. 그렇게 별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별장 안은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부서진 가구의 파편들이 널려 있고 벽 쪽에 붙인 테이블에 걸터앉은 이상한 놈도 더러 있었다.
예전에는 훨씬 더 깔끔한 곳이었는데.
기분 나빠진 마기휼이 속으로 혀를 차는 순간 2층에서 한 사내가 내려왔다.
더벅머리에 턱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사내는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목을 좌우로 돌리거나 코를 씰룩이는 등, 쓸데없이 강한 어필을 해 보이고 있었다. 이 무리의 두목이 분명했다. 그는 느리게 걸음을 옮겨 가휼의 앞에 멈춰 서서는 지저분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건강해 보이십니다그려.”
화를 참을 수 없었던 가휼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식으로 굴다니. 정말 지저분하군.”
“하지만 이런 식이 아니라면 저희를 상대도 해주지 않으실 거잖습니까.”
“시끄럽다. 레나는 어디에 있지?”
레나를 찾는 순간 두목의 입가로 이상한 미소가 걸렸다. 찾을 줄 알았어. 그리 말하고픈 얼굴을 하고 있는 두목을 확인한 가휼의 눈가가 파르르 하고 떨렸다.
두목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내와 함께 레나가 내려왔다. 수수한 녹색 드레스를 입은 레나는 흐트러진 모습이었지만, 그 외에 달리 험한 짓을 당한 것 같진 않았다. 사내는 아주 아래층으로 내려왔지만, 레나는 계단 중간에 서선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나타나자 가휼의 시선이 잠시 그쪽으로 고정되었다. 마른침을 삼킨 가휼은 앞에 선 두목을 노려봤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아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다 도련님에게 달린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드러내며 웃는 두목의 비열함에 가휼은 이를 갈아 댔다. 그 소리가 마기휼에게도 들릴 지경이었다.
가휼은 점점 격양되어 가는 것 같았으나 반대로 마기휼은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선 그는 가휼의 태도 변화와 두목이라는 자가 취하는 행동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게 되지도 않는 말만 주고받는 건가 싶었으나 이내 상대방이 먼저 흑심을 드러냈다.
그는 보란 듯이 품에 손을 넣더니 종이를 끄집어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아버님께서 우리에게 끼친 피해액입니다.”
종이를 펄럭이나 싶더니 그걸 옆에 선 사내에게 건넨다. 종이를 받은 사내가 가휼에게 걸어가 그걸 건넸다. 채 가듯이 종이를 들고 간 가휼은 금액을 확인했다. 그 순간 가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가휼은 당장 종이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이런 게 말이 되기나 해?! 너희들처럼 돈도 없을 것 같은 놈들이 어떻게 이만한 금액을 아버지에게 빌려줄 수 있었단 말이냐!”
“있는 돈 없는 돈 죄다 댁 아버님한테 빌려준 거라니까. 덕분에 우리들은 이렇게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거고 말이야. 어때? 할 말 있어?”
“이 무례한 놈들이―”
가휼의 비난을 들은 두목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곳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더러운 짓은 뒷구멍으로 다한 주제에 왜 새삼스럽게 점잖을 떠는 건지 모르겠네. 이래서 내가 귀족 나부랭이들이 싫은 거라니까.”
“뭐라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두목을 비롯한 사내들이 키득거리고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가휼을 가리켰다. 몇몇은 레나를 올려다보며 수치심을 느낄 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나가 고개를 숙이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가휼은 당장 앞으로 나섰다.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두목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심드렁하니 중얼거렸다.
“다들 알고 있다고. 너희 두 연놈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말이야. 하늘이 무섭지도 않냐? 그래. 아버지의 여자를 품으니 그렇게도 좋더냐? 하긴 다 늙어 시들어 빠진 무말랭이보다는 탱탱하고 튼실한 호박이 더 좋은 법이지. 아주 아래 구멍을 쫄깃하게 만들어줬을 거 아니야. 안 그래? 아가씨?”
레나를 흘겨본 두목이 보란 듯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사악 핥았다. 더는 견딜 수 없었던 레나가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으며 당장 계단에 주저앉았다.
“이, 이놈들이!”
가휼이 소리를 치는 것과 동시에 마기휼이 앞으로 나섰다. 마기휼은 가휼의 품에 손을 넣어 총을 끄집어냈고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팔을 크게 휘둘렀다.
탕탕탕. 하고 총 쏘는 소리와 함께 느슨하게 있던 사내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지거나 뒤로 나자빠졌다. 가휼을 모욕하고 여자 희롱하는 일에 막 재미가 들린 상태였던 두목은 놀라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마기휼이 위로 부웅 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기휼은 두목의 턱을 후려쳤고 옆에 있던 사내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바닥으로 쓰러진 두목이 움찔거리는 순간 마기휼의 발이 그의 가슴을 눌렀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콱- 하고 누르자 그가 헐떡거렸다.
올려다보자 이쪽을 겨누고 있는 총이 보였다.
순식간에 다섯의 사내가 당했다. 셋은 허벅지 총을 맞아 피가 흐르는 곳을 누르면서 이상한 소리를 질러 댔고 턱을 맞은 사내는 소리를 내진 못해도 통증으로 눈물을 질질 흘려 댔다. 두목도 배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간간이 기침을 토해 냈다. 문가에 서 있던 사내들이 놀라 앞으로 달려오는 걸 확인한 마기휼이 그쪽을 노려봤다.
“움직이지 마. 그 순간 이놈 머리통 한가운데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생길 테니까.”
내내 가만히 있던 마기휼이 갑자기 달라졌다.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보랏빛 눈동자에서 살기가 서린다. 마기휼이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를 알기 때문에 두려웠지만 이쪽은 다섯이었다. 하나 정도 못 잡을까. 그들의 생각을 읽은 마기휼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농담하는 것 같아? 이래 봬도 난 군 내에서도 꽤나 유명했다고. 일부러 과녁 어긋나게 해서 4점 아래 소수점 맞추기가 쉬운 일인 줄 알아? 그런 거 아무나 못 해. 그리고 난 그걸 7년째 해 왔다고.”
그제야 사내들은 마기휼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자산 관리인 같은 게 아니라 가휼의 형님이었던 것이다. 로노베에 정박한 군함에서 내린 사내. 라울 대령이라는 엄청 유명한 사람을 구해줬다는 걸로 현재 로노베 내에서 상당한 화제의 인물이었다.
가휼도 간간이 마기휼을 들먹이며 사기를 친다면 군에 수색을 의뢰하겠다고도 했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그 당사자가 정말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똥 밟았다. 그런 생각이 든 두목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가슴을 누르는 마기휼의 발목에 손을 댔다. 당장 더 힘이 들어갔다. 컥- 하며 숨을 토해 내던 두목은 어설프게 협상을 시작했다.
“왜, 왜 이래, 형씨. 설마하니 당신이 그 사람이야? 저 등신 같은 놈의 형님이라는 사람 말이야. 그러면 그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와야 하는 거 아니야? 저 두 연놈들 때문에 당신 아버지가 죽은 거라니까. 그냥 우리들이랑 같은 편 먹자고. 복수하고 싶을 거 아니야. 아버지를 죽게 만든 원흉들에게 말이야.”
내려다보는 마기휼의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계속 하다 보면 넘어오게 되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마기휼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당장 이쪽에 붙어 저 두 사람을 혼내주는 것에 협력할지도 몰랐다. 그 순간 “아니야.”라는 찬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들을 비난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뿐이야. 네놈들은―”
마기휼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득였다.
“절대로 아니야.”
마기휼은 당장 뒤를 쳐다봤다. 막 가휼의 뒤로 살금살금 걸어오려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사내의 어깨로 총알이 관통했다. 다른 쪽에 있던 사내의 뺨을 스쳐 지나갔고, 마지막으로 계단 위에서 내려오던 사내의 발목에 명중했다.
“우와아앗!”
소리를 지른 사내가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난간 쪽에 붙어서 앉아 있던 레나가 비명을 질렀다. 아래 바닥까지 떨어진 사내는 발목을 감싸고는 소리를 질러 댔다.
마기휼은 두목의 가슴을 누르고 있던 발을 떼어 내고는 당장 그의 다리 사이를 올려 찼다. 두목의 눈이 크게 떠졌다. 비명은 아주 늦게 터져 나왔다.
“아아악!”
한번 소리를 치고는 더 비명을 토해 내지도 못했다. 사타구니를 감싸고는 벌벌 떠는 자를 노려보며 마기휼은 주변을 주욱 둘러봤다. 쓰러져 굴러다니는 이들 사이로 서 있는 가휼이 보였다. 그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인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뭐가 두려워? 원래 이런 일은 이런 식으로 처리해야 하는 거야. 사람을 인질로 삼아 돈을 뜯어내려는 이놈들은 가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질이야. 협상이 제대로 되었다 해도 놈들은 여흥 삼아 너를 두들겨 패고 레나를 돌려먹었을 놈들이란 말이야. 총 한두 방 정도 맞아도 다음에 또 이런 짓을 할 놈들이란 말이지.
너처럼 한 일에 대해서 벌벌 떠는 놈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나쁜 일이라는 건, 바로 이런 거지. 마기휼은 엎드려서는 덜덜 떨어 대는 두목의 등에 발을 올렸다. 그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어설픈 짓 하지 마. 난 군인이야. 너희들 한둘 죽여 봤자 영창에서 한 달 있다 나오면 그만이야. 그게 아니라도 돈 좀 쓰면 하루만 있다가 나올 수 있지. 하지만 너희는 아니야.”
두목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벌겋게 된 그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귀족 능멸죄가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지 몰라? 조금만 조사 들어가면 너희 가족은 몰론이거니와 사돈에 팔촌까지 알아낼 수 있어. 그 머리 위로 군함이 내려앉으면 어떨 것 같아? 아니면 아예 신분 상승의 꿈을 막아버릴까. 앞으로 100년 동안 너희들과 관련된 모두가 군대에 지원할 수 없고, 공식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도록 해줄까? 사업을 하고 싶어도 허가가 나지 않고, 다른 나라로 가고 싶어도 허락되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아아, 이런 것도 있네.”
말을 하는 동안 점점 흥이 생겼다.
나 정말 악당 같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마기휼은 본인이 굉장히 비열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는 너희 자식들 모두가 평생 동안 범죄자의 자식이라는 낙인을 찍고 살아가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야.”
두목은 기침을 했다. 통증에 점점 익숙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거 회복하려면 꽤나 시간 걸릴 거다. 그동안 쥐 죽은 듯 얌전히 있으라고. 응?
마기휼의 활약은 두목을 비롯한 다른 사내들에게 달갑지 않은 것일 터였다. 그들은 아파도 크게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있었다. 멀쩡한 두 사내들은 벽에 달라붙어 덜덜 떨었다. 그 와중에 두목은 근성 있게도 재차 말을 꺼냈다.
“우, 우리는 어디까지 당신 아버지가 빌려 간 돈을 받기 위해서―”
“설령 아버지가 빌려 갔다고 해도 안 갚아도 돼. 왜냐하면 내가 갚고 싶지 않으니까.”
두목의 얼굴이 멍해졌다. 지금 뭔 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올려다보는 시선에 마기휼은 보란 듯이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환하게 웃었다.
“내가 안 갚는다고 했으니 이걸로 땡이야. 두 번 다시 이런 짓 저지르면 그 날로 넌 세상 하직이야. 당장 그 혀를 뽑아버리고 목을 비틀어버릴 테니, 그리 알아.”
두목의 얼굴은 완전히 구겨졌다. 처음의 느물거리던 얼굴은 오간 데 없었다. 이렇게까지 일을 쳤는데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그들은 오만상을 일그러뜨렸다.
상대는 고작 하나였다. 하지만 쉽사리 덤빌 수 없었다. 덤벼 봤자 이쪽만 피를 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두목은 바닥을 기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똥 밟았잖아!”
두목이 나서서 도망가는데 똘마니들은 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바닥을 기어가던 두목은 몸을 일으켜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다른 사내들도 상처를 대충 싸매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멀쩡한 사내들이 동료를 부축해 모두 밖으로 나가고 말에 올라타는 걸 도왔다. 두목이 앞장을 서 달려나가자 그 뒤를 다른 사내들이 뒤따른다.
서둘러 멀어지나 싶더니 한 사내가 미련이 남은 듯 뒤를 돌아보자 마기휼은 당장 총을 쐈다. 총성에 섞여 “제기랄!” 하는 외침이 들리는 걸 확인한 후, 마기휼은 총을 허리춤에 밀어 넣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계단에 주저앉아 있는 레나가 보였다.
“괜찮나.”
묻는 목소리가 냉랭했다. 하지만 그가 다정하게 말을 해주길 기대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거다. 숨을 죽인 채로 있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기휼과 눈이 마주치자 레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고맙습니다.”
그 말을 하고 난 후, 레나는 고개를 숙였다. 초췌한 안색에 흐트러진 머리 꼴을 하고 있어서 더 추레해 보였다. 기억 속의 그녀는 늘 날카로운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은 어떻게 봐도 초라했다. 보통의 평범한 여자였다.
레나를 바라보는 마기휼의 눈빛이 점점 어둡게 변했다. 그런 마기휼을 살펴보던 가휼이 조심스레 레나 쪽으로 걸어갔다.
“내 눈앞에서 그녀에게 다가가지 마.”
한 걸음을 옮기기가 무섭게 바로 멈춰야만 했다. 뒤를 돌아보는 가휼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건 레나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든 레나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말했지. 너희 두 사람을 비난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야. 그러니까 내 앞에서 절대로 달라붙지 마. 화가 나면 어떻게 할지도 몰라.”
가휼은 고개를 떨구었고 레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지독한 절망감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하지만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냥 물에 물 탄 듯 넘어갈 수 없었다.
마기휼은 밖으로 나갔다. 혹 있을지도 모르는 사건에 대비하기 위해서 주변을 살피면서 위층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군. 마기휼은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봤다. 얼마 되지 않아 별장으로 이어진 길목으로 달려오는 사내들이 보였다. 말을 타고 있는 그들은 모두 이쪽을 돕기 위해서 저택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있던 이는 마기휼이 보이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무사하십니까?!”
사내는 한달음에 마기휼의 근처에 와서는 구르듯이 말에서 내려왔다. 소매를 걷은 사내는 데리고 온 이들 덕분에 용기가 백배인 상태였다.
“이 새끼들! 다 어디로 갔어? 내가 아주 피떡을 만들어버릴 테니까!”
안으로 들어가자 난장판이긴 했지만 이쪽이 상대하길 원하는 사내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계단에 주저앉은 레나와 근처에 서 있는 가휼만이 보일 따름이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것일까. 사내는 바로 밖으로 나와 마기휼의 곁에 섰다.
“다들 어디로 간 겁니까?”
“상황 종료다. 때맞춰 잘 왔군.”
심드렁하게 말을 한 마기휼은 내려갔다. 멍하니 있던 사내는 문 옆에 박힌 총알을 발견해냈다. 그 외에 부서진 난간 등을 확인하고는 재차 물었다.
“저, 정말 어떻게 된 겁니까.”
“다 정리가 되었다니까. 그것만 알고 있으면 돼.”
그러니까 더 귀찮게 말 걸지 마. 지금 마기휼이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그거였다. 더 뭘 물을 수 없게 된 사내는 입을 다물었고 마기휼은 별장 안쪽을 돌아봤다. 가휼이 나오는 게 보였다. 이쪽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다소 불쌍해 보이긴 했다. 그렇다고 동정을 하진 않았다.
“호숫가에 있는 오두막에 그녀의 거처를 마련해라. 레이라와 만나게 해줘.”
순간 가휼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떠졌다. 마기휼은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건 저 여자를 위함이 아니라 레이라를 위해서였다. 매일 밤 엄마를 찾으면서 속옷에 쉬를 지리게 할 수는 없잖아. 일단은 어린애를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그뿐이었다. 레나가 가까이 왔다 해서 가휼이 딴 생각을 한다면 그때에는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며 마기휼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말에 올라탄 마기휼은 옆구리를 세게 후려쳤다. 그대로 숲 안쪽으로 달려갔다. 일부러 집 쪽으로 가지 않았다. 지금은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속도를 빠르게 할 순 없었다. 있는 힘껏 달리기에는 허리가 너무 아팠다. 엉덩이도 쓰라렸고 말이다.
몸 상태를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날뛰었던 걸지도 몰랐다. 마기휼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투레질을 하는 말의 갈기를 손가락으로 긁어주며 걷게 했다.
바닥을 내려다보는 마기휼의 얼굴은 칙칙했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싶어.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점점 더 침울해지는 것 같았다.
“하아, 미치겠네.”
중얼거린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길가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숨을 삼켰다.
놀라는 기색이 역력한 마기휼을 앞에 둔 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런 얼굴이지?”
“허리가 아파서―.”
반사적으로 대꾸하고 말았다.
실수했다. 이런 대답, 무드가 하나도 없었다. 다른 대답을 할걸. 그리 생각하며 입술을 오므리려는 찰나 상대가 한마디 했다.
“말을 타니 허리가 아픈 게 당연하잖아.”
마기휼은 하- 하고 웃었다.
“애초에 네가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으면 말을 탔어도 아플 리가 없잖아.”
마기휼은 손을 뻗어 길가에 서 있는 라울을 가리켰다. 지금 우스운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마기휼은 라울을 가리키던 손을 내렸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못 해먹겠어.”
이제는 뒷골마저 댕겼다. 이러다가 혈압 팍 올라서 죽을 것 같았다.
“가휼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레이라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레나 그녀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거냐고. 그리고―”
갈 길이 태산이었다. 나는 신이 아니야. 이런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일일이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있겠어. 절대로 무리였다. 마기휼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고개를 숙이는 마기휼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라울이 움직였다. 마기휼의 곁으로 가서 손을 뻗었다. 기다렸다는 듯 마기휼은 당장 라울 쪽으로 몸을 날렸다. 말에서 내려 아이처럼 안겨 오는 마기휼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너랑 떨어지고 싶지 않아. 지금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끌어안기자마자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말에 라울의 눈동자가 가라앉는다.
차분한 눈빛을 한 채로 라울은 마기휼의 등에 한 손을 댔다.
“여왕이 이곳에 왔다. 내게 청혼을 하더군.”
“……뭐라고?”
지금 뭔 소리를 들은 건가 싶었던 마기휼은 당장 라울에게서 떨어졌다.
이쪽을 쳐다보는 라울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것에 이끌려 마기휼도 한결 냉정하게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여왕과 라울이 결혼을 하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라울하고 이런 관계가 되기 이전부터 왕통이다 부군이다 말이 많았었다. 그것에 대해 새삼 말을 꺼내는 것도 이상한 거였다. 마기휼은 지금 자신이 굉장히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결혼해도 나쁘진 않겠지. 원래 그게 정해진 일이었잖아. 그러니까―”
“정말 네가 원하는 게 뭐지?”
마기휼은 찡그린 얼굴을 한 채로 라울을 올려다봤다. 미묘한 얼굴이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라울은 마기휼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네가 원하는 일을 할 거다.”
마기휼의 얼굴이 조금 더 이상해졌다.
너도 알잖아. 안 그래도 난 생각 많은 사람이라니까. 정리해야 할 것들도 많단 말이야. 그런데 왜 나한테 대답을 하라는 거야. 그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그래. 진짜로 너무했다.
마기휼의 입술이 달싹였다.
“결혼 같은 거 하지 마.”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상관없나. 원래 이런 말은 크게 할 필요도 없는 거였다.
“평생 혼자 살아. 그러면…….”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나도 평생 혼자 살 거야.”
그렇게 계속해서 둘은 혼자 살면서 함께 있으면 되었다. 같이 있다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러면 옆집에서 사는 것도 괜찮았다. 그러면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가 주로 맡아서 키워야 하나?
아니다. 라울이 키우는 편이 나을지도.
틀려. 라우젝하고 오르베가 있잖아.
마기휼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너무도 생각이 많아 머리가 터져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상태에 있었다.
그런 마기휼을 내려다보던 라울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자.”
마기휼은 고개를 들어 라울을 쳐다봤다.
여전히 생각이 많았지만 그래도 라울의 가자는 말 하나는 정확하게 들었다.
“어디로?”
“우리들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이내 기운 없이 한쪽 입술 꼬리를 살짝 올렸다.
“다 포기를 하겠다고?”
“그곳에 네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라울은 양손으로 마기휼의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네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바라보는 눈동자가 뜨거웠다.
라울이 이렇게나 열렬한 놈이었던가.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놈이었단 말이야? 이상한 느낌이었다.
마기휼은 라울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 손이 미미하게 떨린다. 입을 열자 한숨이 먼저 나왔다.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내가 여자였다면 이 순간 완전 반해버렸을 거야.”
“남자라서 내가 한 말에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은 건가.”
그럴 리가 있나. 지금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데 말이다.
행복했다. 그런 생각이 가장 강하게 들었다. 라울의 어깨에 손을 올린 마기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넌 역시 멋진 놈이야.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마치 동화 속 왕자님을 눈앞에 둔 소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 순간 라울이 마기휼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너를 볼 때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
“…….”
가만히 있던 마기휼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웃어 보이려 했다. 그런 느끼한 말은 또 어디서 배워 가지고 온 거냐. 장난스럽게 굴려 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이상했다. 코끝이 시큰해진다. 울보이긴 했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고백을 받은 거니까.
이럴 때에는 웃어야 했다. 어떻게 그런 닭살= 돋는 말을 할 수 있는 거냐며 능청을 떠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다 실패했다.
마기휼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웃어버렸다. 그러다가 아래 입을 꾹 다물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점점 이상하게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마기휼은 히끅거렸다. 그런 마기휼을 바라보던 라울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마에 입을 맞추다가 가볍게 마기휼을 안아 든 채로 몸을 돌렸다. 그대로 숲속으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