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멀리서 하얀 배가 내려왔다. 돈 많은 귀족들이나 소유할 수 있는 여객선이었다. 저런 건 해적의 사냥감이 되기 쉬웠다. 호위를 하는 군함은 하나도 붙이지 않고 저것만 타고 온 건가 싶었던 라우젝의 안색이 굳는다. 그것에 상관없이 배가 서서히 착함을 시도했다.
가까워지자 거센 바람이 느껴졌다. 손을 들어 얼굴 앞을 가리고 있던 군인은 배가 완전히 내려앉자 라우젝을 돌아봤다.
“모셔오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라우젝은 군함의 끝으로 가서 몸을 날렸다. 날씬한 몸이 솜씨 좋게 군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갔다. 보통 이상의 운동신경을 가져야 가능한 몸놀림이었다. 섣불리 따라 하려 했다가는 최하 전치 2주는 될 거라며 군인은 놀랍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
라우젝은 곧장 하얀 배 쪽으로 걸어갔다. 착함을 하면서 생기는 강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트려 놨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라우젝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배가 완전히 내려앉고 가운데 부분으로 선이 생겨났다. 배의 옆구리가 좌우로 벌어지고 그 안에서 계단이 내려왔다.
문이 다 열리고 안에 타고 있던 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뒤에 몇몇 사람을 붙이고 가장 앞에 선 여성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녔으나 무척이나 기품 있는 외모였다.
머리를 하나로 모아 묶어 내린 그녀는 다른 이들과 달리 바지로 된 하얀 제복을 입고 있었다. 뒷짐을 진 채로 주변을 둘러보나 싶던 가이나는, 열린 문 아래에 서 있는 라우젝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건강해 보이는군요. 라우젝 사령관.”
“어서 오십시오. 여왕 폐하.”
내려온 계단을 올라간 라우젝이 고개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가이나는 그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섰다. 그런 그녀를 따라온 수행원 중에는 튜완 사령관과 그의 아들 노드만이 보였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서 있는 건 오르베였다.
최대한 여왕의 취향에 맞춘 것인지, 그녀답지 않게 평범한 하얀 드레스에 장신구가 덜 달린 올린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은 듯 안색을 굳히고 있던 그녀는 라우젝이 쳐다보자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뭘 봐.’ 그리 묻는 시선에 라우젝은 냉소를 지었다. 비웃음을 받은 오르베의 안색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그녀의 표정 변화 정도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가이나를 에스코트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정리가 되지 않은 바닥에 그녀의 하얀 구두가 내려왔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아래를 살피던 라우젝은 가이나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여왕은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진 군함 앞에서 멈춰 섰다.
“이게 라울이 타고 간 군함이로군요.”
“그렇습니다.”
가이나는 말없이 군함을 살펴봤다. 수리를 한다고 여기저기 뜯어 놓았고, 군데군데 찌그러지거나 검게 그을린 곳도 더러 보였다. 신형 군함이 고물이 되어 있었다.
가이나의 태도를 살피던 튜완 사령관이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그 훌륭한 군함을 이리 만들어 놓다니! 라울 대령의 자질이 의심되는군!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군함을 이리 만든 것에 대한 문책을 받아야 할 거네!”
“군함은 이리되어도 라울은 무사합니다. 그걸로 이 군함은 제 역할을 다 한 거랍니다.”
차분한 여왕의 말에 튜완 사령관은 입을 다물었다. 헛기침을 한 그는 “폐하께서 그리 말씀을 하시니 참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그의 태도 변화에 가이나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라우젝을 바라봤다.
“라울 대령이 부상을 입었다 들었습니다. 지금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로노베에 도착한 다음날 의식을 차리자마자 잠도 자지 않고 군함의 상태를 파악, 레드존에서 마찰이 있던 이들을 추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휴식을 위해 잠시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여왕 폐하가 오신다는 언질을 듣고 지금 사람을 보내 이리로 오게끔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많이 다친 건 아니고요?”
“심하게 다치진 않았으나 피를 흘렸습니다.”
순간 가이나의 안색이 변했다.
굳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라우젝은 옆으로 한 발 물러났다.
“폐하. 절 따라오시지요.”
가이나만을 데리고 가려 하자 튜완 사령관의 안색이 돌변했다. 반발하듯 그가 앞으로 몸을 내밀었으나 그 전에 가이나가 그들을 제지했다.
“그대들은 여기에 남아 있거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정말은 쫓아와서 이쪽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모두 듣고 싶을 터였다. 본인들에게 이득이 될 만한 정보는 없을지 캐고 싶겠지. 쥐새끼 같은 놈들.
그들을 바라보는 라우젝의 눈초리는 차가웠다. 그걸 느낀 가이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노골적인 표정은 좋지 않아요. 라우젝.”
“어쩔 수 없잖습니까. 놈들은 쓰레기입니다. 능력도 뭐도 없이 목청만 큰 멧돼지에, 라울의 스토커 아들놈이 아닙니까. 저런 이들을 곁에 두시다니. 폐하의 위엄에 손상이 갈 겁니다.”
“사고뭉치들은 따로 떨어뜨려 놓는 것보다 함께 움직이는 편이 안심이 됩니다. 절 이해해주세요.”
“알아서 다 잘하실 텐데, 제가 달리 무엇을 이해하겠습니까.”
그리 말을 해도 그 얼굴이 개운치 않았다. 미간 사이로 선명한 주름이 만들어진 걸 확인한 가이나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그녀는 군함 안으로 올라섰고, 여왕이 비밀리에 도착한 것을 모르고 있었던 군인들의 경악한 얼굴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들의 놀라움과는 상관없이 가이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너무도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여왕을 보고도 멍하니 있던 군인들은 바로 정신을 수습하고는 급히 경례를 취했다. 그들에게 맞춰 경례를 한 가이나는 위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라우젝과 단둘이 있게 되자 가이나는 웃었다.
“다들 놀라는 얼굴 봤어? 귀여워라.”
“그러지 마. 성격 이상해 보여.”
라우젝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놓았고 가이나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뭐 어때. 난 원래 성격이 나빠.”
가이나는 라우젝의 팔에 팔짱을 끼며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여자치고는 장신인 가이나와, 18세에 성장이 멈춰 172센티미터인 라우젝은 키가 비슷했다. 그리하고 있어도 별 위화감은 없으나 연인처럼은 여겨지지 않았다.
팔을 잡는 가이나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라우젝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둬. 남들이 보면 큰일 날 거야.”
“큰일이 생기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그러지 마. 넌 여왕이야.”
라우젝의 말에 가이나의 눈빛이 한결 깊어졌다. “여왕 취급도 안 해주면서.”라고 중얼거린 그녀는 잡고 있던 라우젝의 팔을 놓았다.
문이 열리자 그녀가 먼저 내렸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회선을 점검 중이던 군인은 “미인이네?”라고 흘겨봤다가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가이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벌떡 일어났다. 그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공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흩어졌다.
“여, 여왕 폐하!”
“수고하시는군요. 계속 노력해주세요.”
“네! 네! 감사합니다!”
두 번이나 네, 라는 대답을 해버렸다. 멍청이로 보였겠지. 본인의 실수에 얼굴을 붉히며 군인은 급히 경례를 했다. 가이나도 그런 군인에게 경례를 하며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라우젝은 앞으로 손을 뻗었다.
“여깁니다.”
가이나는 순순히 발길을 떼었다. D3이라고 적힌 문을 열자 안에 있던 군인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인 반응을 보였다. 여왕을 보고 경례를 하는 그들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이런 곳에 어떻게 여왕이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리 묻고픈 얼굴들이었다.
라우젝은 턱짓을 했다.
“다들 나가 있어라.”
“물러나 있겠습니다.”
군인들이 서둘러 바깥으로 나가고 문이 닫혔다. 가이나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 그 위에 앉았다. 테이블 가득 널려 있는 지도와 문서를 확인했다.
“그래. 라울을 그리했던 이들은 지금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치울스와 알센 연방국이 움직여 뒤를 쫓고 있지. 붙잡히면 죽고, 안 붙잡혀도 두 번 다시 들어오지 못할 거야.”
“그건 장담할 수 없어. 무모한 일을 꾀하는 이들은 그 목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결코 멈추지 않아.”
“그럴 것 같기는 하더군. 이번 일을 주동했던 이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거물이 나왔어. 아이작이야.”
라우젝은 그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그림 위에 그려진 사내는 선이 굵고 강렬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하얗다. 동공이 없었다.
그걸 확인한 가이나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백안인가.”
“세뇌의 힘을 가지고 있지. 사용하기에 따라 우리들에겐 위협적이야.”
“아무래도 그렇겠군.”
세뇌의 힘을 어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파급력이 적고, 커질 수가 있었다. 이만한 일을 꾸밀 정도라면 꽤나 거물이라는 거겠지. 언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불안했다.
라우젝은 가이나의 안색이 굳어지는 걸 확인하며 말했다.
“돌연변이에 대한 차별 철폐. 그런 걸 요구하는 것 같은데 실은 그게 아니야. 정말은 본인의 왕국을 세우고 싶은 거지. 하늘의 땅을 위로 올려 이 세계를 통제하길 원했던 거야. 멍청한 놈이지. 하늘의 땅이 떠올라도 그걸 지배할 수 있는 건 피를 지닌 자일 뿐인데 말이야.”
“힘이 움직이는 근본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로군.”
중얼거린 가이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물을 통해 하늘로 땅을 올리고 그를 먹이로 준다. 그리고 본인은 이인자가 되어 제물이 된 존재를 대신해서 땅을 통치하려 했던 거야.”
“하지만 불가능했어. 라울은 그 땅에 피를 흘렸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그건 말하지 마.”
“왜? 두려워? 수백 년 동안 근친과 온갖 더러운 짓을 반복하여 지켜 왔던 그 피가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게?”
가이나는 라우젝을 노려봤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우리의 피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건 다른 연방국도 마찬가지야.”
가이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정말로 화가 난 얼굴이었지만, 라우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란 듯이 양손을 펼쳐 본인의 가슴을 눌렀다.
“1500여 년 전에 가라앉은 땅. 그 지배 혈통의 피. 그 피를 유지하고 이어 나가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지만, 모두 쓸모가 없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라우젝!”
“그리고 그걸 증명할 순 없어. 다른 연방국이 노르디아를 우습게 볼 테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에 가이나의 입이 다물어졌다. 대신 그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다. 듣고 싶지 않은 말. 더는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 말. 가이나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는 있으나 말하길 멈출 순 없었다. 그녀도 이쪽이 하는 말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을 거다.
“라울의 피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류의 변화가 생기긴 했어. 하지만 지하에 잠들어 있는 땅의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지. 그것에 대해서 다른 이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어. 일단은 은폐되어야만 해.”
치울스와 알센에 절대로 알려지면 안 되는 사실이었다. 실질적으로 그들의 피도 별반 다름이 없을 텐데, 노르디아 왕통의 피가 레드존 지역 내에서 아무런 파급력을 행사하지 못했음이 밝혀진다면 두 연방국이 손을 잡을지도 몰랐다. 간신히 유지되는 평형적인 관계가 어긋나버리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본인들의 세력을 넓히려 들 거다.
“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 자신들의 피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걸 말이야. 레드존에 잠이 든 땅은 고대 유물일 뿐이고, 전설일 따름이야. 하지만 언제고 그 땅이 떠오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해.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의 희생이 보상받을 수 없게 되는 거니까. 피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몸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는데, 그 피가 실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밝혀진다면 얼마나 비참해.”
실은 제대로 된 왕통이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왕통들은 하나같이 백치에 기형에 정신분열 증세를 겪고 있었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변이보다 훨씬 더 비참했다.
가이나는 이마에 한 손을 짚고 있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있던 그녀는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라울은 지금 어디에 있지?”
“곧 올 거야. 지금 한창 꿈을 꾸고 있는 중이겠지. 그 꿈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꿀 수 있도록 기다려줘.”
라우젝은 팔짱을 끼었다.
뜨뜻한 물 속에 들어가 있으려니 세상 편했다. 온몸이 노곤한 것이 그냥 이대로 자고만 싶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마기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 마기휼의 턱 아래로 손가락이 내려왔다. 위로 들라는 듯 툭툭 건드리는 손길에 마기휼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건드리지 마. 지금은 자고 싶어.”
“이대로 자면 큰일 난다.”
“큰일 날 게 뭐가 있어. 네가 있는데.”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라울이 보였다. 욕조에 등을 기댄 채로 앉아 있는 그는 이쪽과 별반 다름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더 멋있긴 했다. 잘생긴 것들은 좋구나.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잘나 보이니까.
마기휼은 라울에게서 떨어져 욕조 가운데로 이동했다. 바깥으로 팔을 내밀고 엎으로 고개를 숙였다. 물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넘기며 하품을 했다.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라울이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기휼의 팔뚝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다가 쓰러지지 말고 이리로 와라.”
“응? 괜찮아. 쓰러지진 않아.”
말을 하면서 재차 하품을 했다.
“그렇게 하품만 해 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잠이 들어도 하나 이상할 것 없겠군.”
라울의 중얼거림에 마기휼은 소리 내 웃었다. 눈이 가늘게 휘어진 채로 라울을 쳐다봤다. 기다렸다는 듯 라울이 조금 더 끌어당겼고 그 품 속에 폭하니 안기게 되었다. 서로 사내다 보니 한품에 안기는 느낌은 없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늘 혼자서 버티고 서 있기만 하다가 남에게 의지를 하는 기분도 그리 썩 나쁘진 않았다.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마기휼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신기하네. 너랑 이렇게 있기도 하고 말이야. 나 남하고 욕조에 들어간 건 아버지 이후로 처음이야.”
“나도 그렇다.”
라울의 대답에 마기휼은 아하하- 하고 웃었다.
“안 해본 거 하면서 살아도 10년은 금방 가겠는데. 그렇지?”
“아마도 그렇겠지.”
대답을 하며 라울은 마기휼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두피를 간질이듯 애무하는 것에 마기휼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간지러웠다.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다른 손도 마기휼의 몸에 닿아 있었다. 주물거리며 계속해서 만져대는 손길에 마기휼은 소리 내 웃어버렸다. 라울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그동안 만지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냐.”
그리고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자신이라니. 참으로 생소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뭐, 어때.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자신의 가벼운 느낌에 편승하듯이 라울도 편안한 얼굴이었다. 라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마기휼은 얼굴을 내밀었다. 막 입술이 닿으려던 찰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그러자 또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무드 없기는. 그래도 한창 하는 중에 소리가 들린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마기휼은 머쓱하니 웃었다.
“밥 먹어야겠다.”
“나도 배고프군. 같이 먹도록 하지.”
“분명히 우리 집사 긴장해서 덜덜 떨 거야.”
라울은 이곳에 왔을 때 마주쳤던 집사를 떠올렸다. 집사는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채로 이쪽을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그 얼굴 변화를 봤기 때문에 마기휼의 말에 라울은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데.”라고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예상을 한 대로 식사를 하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집사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배가 고프니 지금 당장 준비를 해 달라는 말에는 안색이 더더욱 굳었다. 숨을 죽인 채로 멍하니 있던 집사는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20분이 지났을 때 그럭저럭 괜찮은 음식이 차려졌다.
“부족하지만 부디 맛있게 드십시오.”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차려 놓고 무슨 말인가 싶었다.
어이없다며 마기휼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면 괜찮은 거야. 이게 부족하면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은 울 거라고.”
“도련님도 참…….”
라울 대령님이 계시는데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지는 말아 달라며 눈을 흘기던 집사는 움찔했다. 라울이 마기휼의 팔을 잡아 그가 자리에 앉는 걸 도와줬던 탓이었다. 쿠션이 2개나 깔린 의자에 앉는 순간 마기휼의 미간 사이로 주름이 만들어졌다. 그 순간 라울의 표정 또한 달라지는 걸 집사는 똑똑히 봤다.
걱정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동료를 바라보는 눈빛이 결코 아니었다. 묘한 느낌이 풍기는 눈빛이었다. 라울 그가 왜 마기휼을 저런 식으로 바라보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어 멍하니 있는 동안 마기휼이 집사에게 손짓을 했다.
“이만 나가 있어. 필요한 게 있으면 따로 부를 테니까.”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집사가 황급히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자 마기휼은 허리에 양손을 대고는 한숨을 쉬었다. 천천히 허리를 돌리다가도 인상을 쓴다. 그걸 본 라울이 옆에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
“역시 안 좋나?”
“편하진 않네.”
그런 커다란 물건이 몇 번이나 엉덩이 안쪽을 들쑤셔 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있기란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었다. 허리를 주먹으로 두드리던 마기휼은 이내 빵을 집어 들었다. 식기는 했어도 아직 부드러웠다. 그걸 반으로 잘라 수프에 넣고 스푼으로 꾹꾹 눌렀다. 마기휼이 식사를 시작하는 것을 확인한 라울 또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집사 앞에서는 태연한 척 굴었어도 막상 라울이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긴장하게 된다. 그의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싶어서 자꾸만 쳐다보자 라울이 고기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맛있어.”
그 순간 마기휼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정말이야?”
“그래. 맛이 좋아. 가정식이라는 느낌이 드는군.”
음식 맛도 그렇지만 만들어진 요리가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웠다.
“구석구석 체취가 묻어나는 곳이야. 마기휼. 네 냄새가 날 것 같아.”
“응? 내 냄새?”
나한테서 이런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거냐. 야한 놈.
혼자서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수프를 떠서 먹었다. 맛있다. 이번에는 고기를 썰어서 입에 넣으며 우물거렸다. 라울을 앞에 두고도 편안하기만 했다.
그래서일까. 넋두리를 하듯이 말이 나왔다.
“어려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 저택 안을 들쑤셔 댔지. 모두가 놀이터였거든. 그때에는 정말 모든 게 재미있었어. 별거 아닌 일에도 몇 번이나 웃고 떠들고 즐거워했지. 부모님은 그런 우리들을 다정하게 바라봤어.”
그런데 그런 일이 생겨났다. 라울과 할 때에는 그것에만 집중해 다른 건 생각나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다시금 떠오른다. 가휼이 했던 말들이 마기휼을 괴롭혔다. 마기휼은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었다.
미간 사이로 선명한 주름. 괴로워하는 얼굴.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라울이 손을 뻗었다. 옆자리에 앉은 마기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에, 마기휼은 웃었다. 고개를 들어 라울을 바라보는 눈빛이 부드러웠다.
“위로하는 거야?”
“그런 모습으로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해줄 수는 없어.”
그래서 머리를 쓰다듬는 건가. 나쁘진 않았다. 어렴풋이 예전의 일도 떠오르고 말이다.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손길이 뺨에 닿았다. 얼굴을 쓱쓱 문지른다.
이런 식으로 만지는 건, 자신의 모든 부위 중에서도 특히나 외모가 그의 마음에 들기 때문이겠지. 이건 좀 너무 나대는 걸까. 외모라니. 잘난 걸로 따지면 이쪽보다는 라울 그가 훨씬 더 낫지 않던가.
말자며 마기휼은 눈을 떠 옆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라울의 표정이 온순해진다. 그의 엄지가 입술 부근에 닿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웃었다.
“너랑 있으면 확실히 심장이 빠르게 뛰는구나.”
입술에 닿아 있던 엄지가 살짝 떨렸다. 알게 모르게 그의 동요가 읽히는 듯싶어 마기휼은 왜 그런가 하고 빤히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라울은 손을 떨어뜨렸다.
“의도치 않은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설레는군.”
마기휼은 눈을 끔벅였다. 의외인 말을 들었다는 듯 가만히 있던 그는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라울의 어깨를 쳤다. 라울은 그리 싫은 눈치가 아니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있던 라울은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고기를 썰어 크게 한입 넣었다.
그가 음식을 먹는 걸 본 건 이게 처음인 것 같았다. 처음이지만 그가 음식을 맛있게 잘 먹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마기휼도 스푼을 들어 수프를 떠먹었다.
쓰렸던 속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중얼거렸다.
“그냥 계속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못 있을 것 같나?”
“글쎄. 잘 모르겠어.”
이 평화로움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평범한 남자도 아니고 이쪽이 여자인 것도 아니었다. 라울이라는 한 사람만 보고 살아갈 수 없었다. 그에게는 곁다리로 붙은 게 너무도 많았다. 정말, 진짜,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았다.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자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져버렸다.
마기휼이 스푼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래가 소란스럽네.”
말 울음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리는 걸 보아하니 무슨 사고라도 난 모양이었다. 마기휼이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되었다는 듯 라울이 그쪽으로 한 손을 뻗었다.
“있어. 내가 일어나 보지.”
라울이 일어서 창가 앞으로 다가섰다. 가만히 있으라 해서 정말 그리 있을 마기휼이 아니었다. 라울의 옆으로 다가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누가 왔는데?”
“라우젝이 날 부르러 사람을 보낸 모양이야. 내려가 봐야겠어.”
“어? 가려고?”
순간적으로 드는 서운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속마음이 겉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버렸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아뿔싸 싶었던 마기휼은 이내 웃는 얼굴로 손을 들었다.
“부르면 가 봐야겠지. 그 녀석 성격 이상하잖아. 늦지 않게 어서 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마기휼이었지만, 라울은 조금 전 그가 지었던 아쉬워하는 얼굴을 봤다. 그게 숨기지 못한 진짜 얼굴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선뜻 발을 뗄 수 없었다. 왜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마기휼의 곁에 있고 싶다. 그런 마음이 강하게 드는 걸 느끼며 라울은 마기휼 쪽으로 갔다. 테이블에 손을 딛고 마기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래에 내려가서 돌려보내고 오겠어. 잠시 기다려.”
“아니.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
“내가 여기에 있고 싶어서 그런다.”
이쪽이 더 말을 할 수 없게끔 단호히 대꾸하자 마기휼의 입이 다물렸다. 마기휼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끔벅였고 라울은 그에게서 떨어졌다. 문이 닫히고 라울이 나가자 마기휼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반신 쪽으로 아릿한 통증이 퍼졌다. 그리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마기휼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하필이면 먹는 중에 가버리냐.”
밥이나 다 먹고 나서 올 것이지. 이래서 군인들이 센스가 없다는 말을 듣는 거라며 마기휼은 손으로 배를 문질렀다.
복도로 나온 라울은 걸음을 서둘렀다. 금방 내려가서 군인을 돌려보내고 돌아오면 된다. 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채워진 채였다. 고개를 든 라울은 맞은편에서 오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상대도 라울의 존재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상당히 어색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그 사내와의 간격이 세 걸음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 라울은 발을 멈췄다.
가휼이 먼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전 가휼이라 합니다.”
“마기휼의 동생인가. 조금 닮았군.”
“닮은 곳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생김새라고 하던데요.”
중얼거린 가휼은 눈을 내리떴다. 그 눈동자가 영 기운 없었다. 진한 애수가 묻어나는 눈빛에 라울은 붕대가 감긴 그의 이마를 눈으로 가리켰다.
“이마는 다친 건가.”
“아, 네. 넘어져서 약간 다쳤습니다.”
대답을 하며 손으로 이마를 가리는 것이 상처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가휼은 라울이 나왔던 방을 가리켰다.
“형님과 계시다 나오는 길이십니까.”
“그는 내 부관이지. 의논할 일이 있었네.”
“그렇습니까.”
대답을 하며 눈을 내리뜨는 가휼이었으나. 달리 더 묻고 싶은 말이 있는 듯싶었다. 가휼은 오르베에게 돈을 빌린 자였다. 하지만 그 혼자서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결정이 내려진 배후에는 레나가 있었다. 오르베와 안면이 있었던 레나가 가휼을 부추겨서 마기휼을 돈을 빌리는 대가로 이용한 것이다.
때문에 라울도 가휼의 면상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사내이기에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막상 만나게 된 가휼은 유약한 인상이었다. 본인이 한 일에 대해서 후회를 하는 듯싶었다.
그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왜 후회를 하고 자책감을 느끼는 것인가. 본인이 내린 결정에 대해서 책임감 있는 태도를 취하지 못할까. 그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 때에는 두 번 다시 마기휼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거라는 각오 정도는 했어야 했던 게 아니냔 말이다.
보다 확실한 사내이기를 원했다. 마기휼을 물건처럼 판 것에 대해 따져 물었을 때, 확실하게 본인 의사를 밝힐 만한 강한 사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영 기대 이하였다. 때문에 실망이었다.
“자네는 왜 마기휼을 돈을 받고 팔아야 했지?”
가휼이 흠칫하고 놀랐다.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 안쪽은 당황이 역력했다.
“그런 식으로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건가. 일그러진 자네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건가. 그리고 지금은 그 결정에 후회를 하는 건가.”
“아닙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야 할 거네. 진심으로 미워하지 않는 자에게 어설픈 보복을 해 봐야 되레 자신에게 상처만을 남길 따름이라는 걸, 말이야.”
가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괴로워 보이는 그 얼굴에 라울의 눈빛이 더 차갑게 변했다.
“후화를 해도 늦을 거라는 말이야.”
가휼은 고개를 떨구었다. 이쪽이 하는 비난을 더는 들을 수 없다는 듯 나약하게 외면해버리는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라우젝처럼 뻔뻔하게 나가는 편이 더 나을 텐데.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면 그만큼 감정 소모가 크겠지만, 찝찝한 부분은 남지 않는다. 하고 싶을 만큼 서로에게 퍼부어 대면 그만이니 말이다. 라울은 가휼을 지나쳐 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모여 있던 시종들과 하녀들이 당황하며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밖으로 나갔다. 라울이 나오자 군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라울 대령님.”
“무슨 일인가. 라우젝이 날 데리고 오라 하던가. 하지만 난 당분간 여기서 떠날 마음이 없다. 조금 더 휴식을 취한 후에 알아서 돌아가겠다.”
이쪽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빠르게도 본인의 말만을 하는 라울의 태도에 군인은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라울을 부르는 건 라우젝이 아니었다. 우선 그것에 대해 정확히 해야 할 것 같았던 군인은 라울의 곁으로 다가가 나직이 속삭였다.
“여왕 폐하께서 로노베에 오셨습니다.”
여왕이 왜 이곳에 온 거지.
불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걸 숨기며 되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지금 라우젝 님과 함께 계십니다.”
라우젝과 여왕이 함께 있다는 건가. 그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굳은 얼굴로 있던 라울은 위를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었던 창가 앞에 있는 마기휼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마기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금방 올라온다며?’라고 되묻는 얼굴을 하며 창가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지금은 가야 할 장소에 대해 마기휼에게 자세히 말을 해줄 여유도 없었다. 일단은 움직여야 했다. 다시 들어가 마기휼에게 말을 전하는 걸 다른 이들이 본다면 소문밖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라울은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라울이 마차에 오르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들었다.
“가는 건가.”
어쩔 수 없겠지. 하는 일이 많으니까. 라우젝이 지랄을 떨어 대면 라울도 어쩔 수 없을 터였다.
혀를 찬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어깨가 축 처지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그냥 라울이 본인 할 일을 하러 간 것뿐이었다. 그걸 가지고 이런 식으로 침울해할 필요가 없었다.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기휼은 머리를 마구 긁적이며 몸을 돌렸고 열린 문 옆에 서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레이라가 달라붙어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 레이라. 언제 왔어? 이리로 와.”
머뭇거리던 레이라는 안으로 들어와 마기휼의 다리에 매달렸다. 처음 봤을 때에는 레나와 가휼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는데 이틀 정도 같이 있었다고 그 사이에 많이 친근감을 느끼게 된 모양이었다. 하긴 친분을 다진 걸로 따지면 어제 저녁이 최고였다.
마기휼은 레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밥은 먹었니?”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게 안아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로는 무리였다. 안아주려면 이쪽 허리가 완전 뽀작날 판이었다.
“레이라. 정원으로 나갈까? 나가서 샌드위치 만들어 먹자.”
“샌드위치?”
따라 말하는 것에 마기휼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오빠는 레이라가 만든 샌드위치를 먹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큰오빠를 위해서 만들어줄 수 있으려나?”
레이라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만들 수 있을까. 그리 고민하는 듯싶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모한테 말해서 준비하고 올 거야.”
“이야, 신나는데. 레이라가 만들어주는 샌드위치를 먹다니. 난 이 세상 제일의 행운아야―.”
마기휼은 엄지를 앞으로 뻗으며 익살을 떨었다. 다른 이들이 보면 실소를 흘릴 만한 모습이라도 레이라에게는 아주 잘 먹혔다. 시무룩한 얼굴로 왔던 레이라의 뺨으로 홍조가 서렸다. 레이라는 당장 몸을 돌려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우리 꼬마 아가씨랑 놀아주자. 가장 가까운 곳에 쓸쓸해하는 숙녀분이 있는데 다른 걸 먼저 신경 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왠지 라울이 가고 난 후에는 입맛도 뚝 끊겼다. 레이라가 준비하고 나오는 동안 정원으로 나가 볕이 잘 드는 곳에 누워 있자며 마기휼은 크게 팔을 휘저었다. 그리고 복도로 딱 나오는 순간 가휼과 눈이 마주쳤다.
둘 다 굳은 얼굴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거다. 가휼을 보고 이렇게나 차분할 수 있다니. 스스로의 감정 상태에 놀라워하며 마기휼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마기휼은 가휼의 앞에 멈춰서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부터 레이라랑 같이 소꿉놀이 할 건데, 너도 낄래?”
응시하는 눈동자가 차분했다. 그 시선을 마주한 가휼은 긴장한 듯 얼굴이 굳어졌다.
“형님 저는―”
“레나가 떠나 레이라가 혼자 남아 있어. 저 어린 게 매일 밤, 잠도 못 자고 엄마를 찾으면서 이 넓은 저택을 돌아다니고 있단 말이야. 그 상태가 지속돼서 레이라가 제대로 자랄 수 있을 것 같아? 정서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으냐고.”
마기휼은 입을 다물고 굳은 얼굴을 하는 가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네 동생이자 내 동생이지. 난 내 어린 동생이 결핍되어 자라는 건 원치 않아. 그러니까 너 혼자 온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진 것 같은 얼굴은 그만두고 네 역할이나 잘 해. 그건 모두 네가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것이나 다름 없어. 너는 레이라의 오빠이자, 아버지가 되어야 해. 딴생각하지 말고 그 역할이나 제대로 해. 너를 어떻게 할지는 내가 생각하고 내 스스로 결정할 문제야. 두 번 다시 총을 꺼내 들면 나한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두들겨 맞을 줄 알아.”
더는 할 말도 없었다. 마기휼은 가휼을 지나쳐 갔다. 마기휼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 전신에 힘을 주고 있던 가휼은 막상 그가 지나치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손을 들어 이마를 감싸는 그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문이 열리자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이 보였다. 가이나는 때에 맞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라울을 발견하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라울. 건강해 보이는군요.”
안으로 들어온 라울은 곧장 가이나의 앞으로 걸어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여왕 폐하를 뵙습니다.”
“격식은 됐어요. 그저 당신의 상태가 걱정되어서 와 봤을 뿐입니다. 그리고 괜찮은 것 같아서 안심이 되네요.”
가이나는 맞은편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는 의자에 라울이 앉자마자 가이나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얼핏 보이는 라울은 괜찮았다. 부상을 입었다 해도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던 듯싶었다. 다른 때라면 다른 대화를 더 시도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라울. 레드존에 들어갔다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미 알고 계실 거라 생각됩니다. 폐하께서 듣고 싶은 건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 역시 라우젝에게서 들었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대답을 하며 고개를 든 라울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강경함이 서려 있었다. 뭔가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그가 저런 얼굴을 하는 이유가 단지 레드존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 가이나는 짐짓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역시나 아니었던 겁니까.”
“그렇습니다.”
라울의 대답에 가이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라우젝에게 이미 들었음에도 라울에게 재차 확인을 받는 느낌이 그리 좋지 않았다. 굉장히 속이 거북해진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으나 이제는 다 틀렸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가.
“알고 있었습니다.”
중얼거린 가이나는 기운 없이 고개를 들었다. 라울을 바라보며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던 일입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되어버리니, 뭐라고 말해야 할까. 마치 지금 존재하는 나 자신이 부정되는 것 같군요. 도대체 난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싶습니다.”
“다른 연방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봤을 때에도 1500여 년 전의 피가 아직도 남아 있을 순 없습니다. 모두가 그저 허상을 붙잡으려 그렇게 발버둥을 쳤던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있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할 순 없습니다. 삼국의 균형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치울스와 알센은 노르디아를 침공하려 들 겁니다.”
동등한 입장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다. 왕통의 피가 레드존 안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노르디아는 더 이상 협력해야 할 대상이 아닌 점령해야 할 나라가 될 터였다. 그건 큰 위기 상황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관심사를 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당장 침공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이쪽은 준비가 필요했다. 또는 이번 일을 무마할 만한 일이 필요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가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를 결심한 듯 그녀는 라울을 똑바로 응시했다.
“라울. 나 가이나는 당신에게 청혼을 합니다.”
라울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말에 대한 동요라고만 생각한 가이나는 재차 본인의 의사를 전달했다.
“나와 결혼해주십시오.”
입을 다문 가이나는 단호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다른 두 공국에는 이쪽에 대한 일이 흘러들어 갔을 거다. 레드존 지역 내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는 사실도 알려질 거다. 그로 인해 어떤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지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지. 하지만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은닉하려는 거다.
살아남은 자신과 여왕이 국혼을 서두르는 것으로, 이쪽의 피가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어필하고 싶은 거다. 서둘러 진행이 되면 될수록 자신의 피가 레드존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착각을 그들에게 심어줄 수 있었다. 레드존에서 피가 작용했기 때문에 여왕이 급히 결혼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 생각할 거다.
라울이 바로 대답하지 않자 가이나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전 여자를 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고 계시잖습니까.”
“저 또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입니다. 당신의 취향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불임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그 진실을 아는 이들은 극히 드뭅니다. 때문에 제가 아이를 만들어 와야 하는 입장이지요.”
가이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라울이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확답을 하지 않는지, 이상했다. 처음 라울을 대면했을 때부터의 그의 강경한 태도에 다른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나는 초조함을 숨기며 물었다.
“라울, 왜 그러는 겁니까.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일이 정말 제가 해야 할 일입니까.”
되묻는 말에 가이나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아무런 효력도 없는 왕통의 피를 잇기 위해서 제 아이가 희생되어야 합니까. 제가 마음에도 없이 사람을 안아, 아이를 만들어야 하는 겁니까. 저는 단지 왕통을 잇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할 뿐입니까.”
라울은 가이나를 바라봤다. 그는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던진 물음은 너무도 당돌한 것이었다. 명색이 왕통이라는 자가 할 말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가이나의 얼굴은 어느덧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라울. 말조심하세요. 그건 숭고한 일입니다. 그를 위해 지금 당신이 존재하고 그 지위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 가문이 혜택 받는 삶을 살기 위해선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다 포기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나오는 대꾸에 가이나의 입이 반쯤 열렸다. 방금 들은 말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는 여왕을 바라보며 라울은 본인의 의사를 재차 드러냈다.
“다 포기할 겁니다. 전 마음도 없는 상대와 몸을 섞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제 아이를 희생시키지도 않을 겁니다.”
가이나는 눈을 감았다.
여왕이 되어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일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라울이 저런 말을 한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이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얼굴로 미미한 분노가 떠올랐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가문도 지위도 권력도 다 필요 없습니다. 왕이라는 허물 좋은 자리도 원치 않습니다. 그런 걸 바란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라울은 일어섰다. 그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여왕은 다소 당황했다. 놀라 뒤로 몸을 물리기가 무섭게 라울이 여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전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절 버리십시오. 폐하.”
“……라울?”
이름을 부르고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상황이 현실인가 싶었다.
아주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라울의 이런 태도를 어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라울은 농담을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가 하는 말 모든 게 진심이고 사실이었다. 그를 버리고 그에게서 핏줄을 잇게 하는 일을 떠넘기지 말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었었다.
‘폐하.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굳이 피를 이어 갈 필요는 없다고 말입니다.’
다른 쪽을 바라보며 말을 하던 라우젝의 얼굴이 떠올랐다. 햇빛이 눈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뜨던 라우젝은 어쩌면 이런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변화에, 대해서 말이다.
“실례하겠습니다. 여왕 폐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내부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뭔가 싶었던 라울과 여왕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열리는 문을 쳐다봤다.
오르베가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당장 무릎을 꿇고 앉아 가이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실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라울에게는 이미 연인이 있습니다.”
“오르베! 입 다물어!”
“그는 이미 임신을 한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라울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다가오기도 전에 오르베는 말을 해버렸다. 라울이 아닌, 여왕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앙칼지기 그지없었다.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그가 저런 식으로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아이와 그 사내를 지키기 위해서 저러는 것입니다!”
목소리를 높인 오르베는 라울을 돌아봤다. 눈을 크게 뜬 채로 노려보는 오르베의 모습에 라울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너무도 화가 나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르베에게 정말 총을 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오르베, 당신 정말 내 손에 죽고 싶은 건가?”
“너 때문에 우리 가문이 몰락해야겠어?!”
“가문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그 가문을 위해서 내 아이가 셋이나 희생되었어!”
악을 쓰는 목소리가 내부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르베의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눈에 핏발을 세운 채로 그녀는 소리쳤다.
“내 아이! 제대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걸어보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했던 내 아이가 셋이나 죽었지! 그 잘난 가문을 위해서 말이야! 그런데 너 때문에 그 가문이 몰락하게 생겼어! 너 하나 때문에! 네가 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내 아기들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는 없어!!”
크게 떠진 눈동자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내 아기를 묻은 그 저택은 절대로 몰락할 수 없어! 내 아기의 뼈와 살과 피가 그 땅에 살아 숨 쉬면서 영원을 살아가게 될 거야! 내 아기의 커다란 무덤이자 요람인 장소야! 그런 곳을 하찮은 놈들이 흙발로 짓밟을 수 없는 법이야! 사람들이 경애하고 우러러보는 장소로 영원토록 있어야 해! 그래야지만 내 아기의 죽음이 조금이라도 보상 받을 수 있어!”
입을 다문 오르베는 라울을 노려봤고, 라울 또한 날카롭게 응수했다. 그 사이에 낀 가이나도 어느새 일어난 채였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를 간 라울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 소리 하지 마.”
“나도 내가 미친 걸 알아. 너도 내 입장이 되면 알 수 있을 거야. 제대로 키워보지 못하고 품에서 아이를 셋이나 잃은 어미는 무서워.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두지 않을 거야. 절대로 말이야.”
오르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흘러내린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 낸 그녀는 여왕을 바라봤다.
“폐하. 사람을 푸십시오. 마기휼이라는 사내입니다. 그 사내는 분명 라울의 아이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오르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울이 움직였다. 빠르게 다가서는 라울의 손이 당장 오르베의 목 쪽으로 향했다. 저 손에 잡히면 당장 목이 부러질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오르베는 다가오는 라울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바라봤다.
라울의 손이 오르베의 목에 닿기 직전 중간에서 나타난 손이 라울의 손목을 잡아챘다. 강하게 밀어 대는 라울의 손목을 더 강하게 붙잡으며 라우젝은 오르베의 팔뚝을 잡아 자신의 뒤로 돌렸다.
라우젝은 흥분한 라울을 노려봤다.
“진정해. 아무리 그래도 고모님이야. 손을 대면 넌 천하의 몹쓸 놈이 되어버려.”
라울을 잡고 있는 라우젝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빌어먹을- 하고 중얼거린 라우젝은 웃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라울은 당장 손을 치워 냈다. 바로 밖으로 나가버리자 오르베가 그쪽으로 몸을 돌리며 소리를 질렀다.
“어디를 가려는 거야!”
라우젝은 혀를 차며 오르베의 몸을 붙잡았다.
“그만해. 오르베. 더 하면 구질구질해져.”
라우젝에게 잡혔다 한들, 그 몸에는 그리 큰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라울이 나간 방향을 노려보던 오르베는 서서히 눈을 내리떴다. 그녀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라우젝의 팔을 붙잡았다.
“난 최선을 다했어.”
“그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건 의미 없는 짓이야.”
라우젝의 말에 오르베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숨을 쉬나 싶던 그녀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구석을 바라보는 그 얼굴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조금 전 미친 듯이 분노하고 화를 터트리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넋이 나가버린 듯한 모습은 마치 길을 잃은 소녀 같았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었다.
마지막 자식을 제 손으로 묻었을 때 이후로 말이다.
“진실은 밝혀져. 우리뿐만이 아니라 알센이나 치울스도 거치고 넘어가야 할 산이지. 어쩌면 그들도 이미 검증을 거쳤을지도 몰라. 자신들의 피가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숨기고 있을 거야.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말이지.”
라울은 고개를 돌렸다. 가이나가 보였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서 있는 그녀는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라우젝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좋게 생각해. 저들보다 먼저 진실을 알게 된 만큼 우리는 준비를 갖출 수 있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두 연방국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면 되는 거야. 사건이 터지면 먼저 치는 쪽이 이기게 되어 있어.”
“그래서. 라울은 포기하라고? 그와 혼약을 하지 말라는 거야?”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단지 난 의미 없는 짓은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할 따름이야, 가이나.”
파리한 안색이 된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라울의 눈빛이 지워지지 않았다. 똑바로 응시하는 얼굴은 이미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모든 걸 잃어도 좋으니 자유를 원하고 있었다.
자유를 바라면서도 원조는 끊이질 않기를 바라던 속물들과는 달랐다. 모든 걸 제 손으로 다시 시작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더니만, 이런 식으로 크게 한 건을 터트리는구나 싶었다. 어쩌면 예상은 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이나는 양손을 들어 스스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너 아닌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
팔을 감싸는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 그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은 분명히 들었다.
라우젝의 얼굴로 일그러진 미소가 생겨났다.
“20년도 전에 했던 말을 왜 다시 하는 거야.”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야. 너 아닌 사람과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난 여왕이야.”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스스로의 몸을 감싸는 손의 떨림은 강해지는 듯싶지만 이내 진정이 된다. 그냥 팔짱을 낀 상태로 서 있는 여왕을 확인한 라우젝은 심장에 한 손을 올렸다.
“폐하. 결정은 당신이 내리시면 됩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것에 따릅니다. 저의 주인은 오로지 여왕 폐하뿐이니까요.”
고개를 조아리는 라우젝의 얼굴에는 어느덧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