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27)

#18

멀리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시원한 것 같기도 하고 미지근하기도 했다. 유난히 나른한 오후. 모든 게 무료하고 지루했다. 심드렁한 얼굴로 창틀에 앉아 오늘은 뭘 해야지 재미있을까. 그것에 대한 궁리만 하고 있었다. 지켜야 할 규율이 많은 군이라지만 마기휼과는 잘 맞았다.

혈기왕성한 때라 다양하게 다뤄야 하는 총 같은 것도 위험하게 여겨지지 않고 재미있기만 했다. 총을 들고 있으면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면 위험하다고 할만한 생각이지만 어쩌겠는가. 이쪽은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심드렁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보는 순간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장신에 다부진 체격. 긴 금발에 녹안. 무서울 정도로 잘 정돈된 외모에 사람을 압도하는 묘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저런 사람, 이야기 속에나 존재할 줄 알았지. 지금 내가 너무 지루해하다가 졸고 있나 싶어 맹하니 있다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사내의 등 뒤로 헐떡거리며 다른 놈이 나타났다. 잘 봐주면 보통이라고 평할 수 있는 외모였지만 저런 미남의 옆에 서 있으니 동그란 건 얼굴이고 눈, 코, 입은 모두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상대가 참 불쌍하다면서 빤히 쳐다보는 동안 군인이 미남을 가리켰다.

‘소령님. 이번에 새로 같은 방에서 생활하게 될 라울 안제크라고 합니다. 라울. 저기에 있는 사람이 마기휼 소령님이시네. 자네의 곁에서 군 생활에 적응을 잘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실 거야.’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싶었다. 지금까지 그런 말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 갑자기 저런 미남 하나 던져 두고 무슨 사기를 치려는 거야? 내가 군 생활에 적응을 잘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준다고? 그런 일 할 리가 없잖아.

머릿속으로는 심드렁한 생각을 해도 내색할 순 없었다. 어정쩡한 상태로 있으려니 군인이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곤 나가버렸다.

원래부터 2인실이었다. 지금까지 편하게 혼자 방을 사용했지만 누군가 왔는데도 계속 혼자이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그래도 저렇게 생긴 놈이 나타나면 곤란한 거 아니야? 딱 봐도 대귀족인 것 같은데 왜 군인이 되려는 거야.

지도자가 되기 위한 중간 절차를 거치는 중인가. 팔자 좋군. 살짝 빈정거리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기휼의 눈은 라울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방 안으로 들어온 라울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침실은 안쪽입니까?’

‘구경해 볼래? 이리로 와.’

잘생긴 놈이 목소리까지 듣기 좋네. 다소 니글거리는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옆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뒤를 쫓아 들어온 라울은 나란히 있는 침대를 살피다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침대를 가리켰다.

‘제 자리는 이곳입니까?’

‘뭐, 그렇게 되겠지?’

원래 같은 방에서 자게끔 되어 있는 거야. 그래도 나는 소령이라서 방 두 개나 있는 거라고. 가운데에 응접실 용도로 쓸 수 있는 장소도 있고 말이야. 이 방이 싫으면 나가줬으면 하는데 말이다.

그걸 바라고 빤히 보자 라울이 오른편을 돌아봤다.

‘건너편 방은 어떤 용도로 쓰이는 곳입니까?’

‘거기는 창고야. 이것저것 별의별 것이 다 들어가 있지.’

‘그렇습니까.’

그래. 그렇지. 그리고 별거 아닌 건데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생각을 해도 대놓고 묻지 못하고 있으려니 라울은 가만히 주변을 살폈다. 어디에 무엇이 있고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 것인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쪽을 바라보았을 때,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하고 생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그 소리에 스스로가 민망해져 얼굴을 붉히려니 라울이 몸을 돌렸다.

가방을 침대에 올린 라울이 밖으로 나가자 마기휼의 입가에 지어져 있던 미소도 사라졌다. 아랫입술을 비죽이 내민 마기휼은 ‘같이 잘 지내기 어렵겠는걸.’ 하고 중얼거렸다. 저런 놈들이야 빤했다. 며칠 지내보다가 불편하다고 난리를 쳐 댈 게 분명했다. 그때가 되면 이쪽은 다시 혼자 생활하게 되는 거지. 마기휼은 위로 팔을 죽 뻗었다.

이쪽만 몰랐지 라울은 모두가 아는 유명인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등장하면 어디서든지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다. 끝내준다. 인종 자체가 다른 것 같다. 나중에는 분명 여왕의 측근이 될 거다. 등등등. 너무도 많은 말이 나오기 때문일까. 초반에는 그런 라울의 곁으로 사람이 몰리지도 않았다. 워낙에 대단한 분위기가 풍기니까 선뜻 다가설 수 없어진 모양이었다. 때문에 라울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

그러고 보니 그때에도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전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지금 보기에 생소하다 싶은 것들도 그때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하고 있어?’

책상에 걸터앉으며 말을 걸자 시간 터울을 두고 라울이 고개를 들었다.

‘책을 읽고 있습니다.’

‘공놀이 안 해? 바깥에서 공 잡기 하고 있던데?’

‘제가 가면 그들이 불편할 겁니다.’

라울의 대답에 마기휼은 우습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네가 스스로 너는 다른 사람하고 다르다는 어필을 하는 것뿐이잖아.’

종이를 넘기던 라울의 손이 멈추었다. 라울이 듣기 싫어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이쪽은 그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할 뿐이었다.

지 혼자 잘났다는 듯 고고하게 구는데 누가 쉽게 말을 걸 수 있겠는가. 인사라도 한번 해보고 싶어하는 놈들이 수두룩하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건지, 그저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를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평생 가도 혼자 있게 될걸?’

‘평생 혼자일 일은 없을 겁니다. 전 왕통이니까요.’

‘응? 뭐라고?’

되물으면서 귀를 후볐다. 애초에 별 관심이 없는 놈, 혼자 있는 게 불쌍해 보여서 말을 걸었을 뿐이었다. 귀를 후비려니 저 안쪽이 더 가려워지는 것 같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손가락 끝에 힘을 주려는데 라울과 눈이 딱 마주쳤다.

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마기휼은 당장 표정을 풀며 한쪽 입술 꼬리를 올렸다. 어색하게만 여겨지는 미소가 이상하게 보이겠지. 귀를 후비던 손가락을 빼내고 라울을 빤히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돼. 그런 시선을 보내자 라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왕통입니다.’

‘그게 뭐? 네가 왕이라는 거냐?’

난 또 무슨 대단찮은 말을 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다시 귀에 손가락을 넣었다. 그때 라울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끝에 걸린 왕건이를 낚기 위해 마기휼은 그쪽으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때 그 모습에 실망을 했던 걸까. 라울은 다음날 짐을 모두 창고로 옮겨버렸다. 그리고 잠을 잘 때에도 안쪽에서 문을 걸어 잠가 열지 못하도록 했다. 그걸 확인한 후 마기휼은 ‘역시나 까칠한 놈이었던 거야.’ 라고 중얼거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들이 실수였다.

왕통이 얼마나 대단한 건데 그걸 알아주지도 않고, 막 잠에서 깨어나면 위험한 상태가 되는데 무신경하게 간간히 문을 두드리며 잠을 깨웠으니 얼마나 큰 실수인가. 지금처럼만 라울에 대해서 알았으면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잘 대해줬을 텐데.

어쩌면 라울 그놈은 외로웠던 걸지도 모르지.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남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사로잡혀 늘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지 않는 채로 있었다. 다 가진 것 같아도 외로웠을 거다. 어딘가 비워진 구석이 존재하고 있었을 테지. 그걸 감싸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나도 라울에게 조금 더 의지했으면 더 나았을 거고.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연을 이어 가지 않았을까. 조금 더 쉬운 길을 걸을 수 있었을 텐데.

마지막으로 생각을 마치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흐릿한 시야로 뭔가가 보였다가 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

눈을 뜨고는 있어도 그 얼굴이 멍했다.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있던 마기휼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옆으로 몸을 돌린 마기휼은 기침을 토해 냈다.

“쿨럭쿨럭! 쿨럭!”

계속해서 기침이 나왔다. 기침을 멎으려 하면 할수록 더 나오게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주 속 편하게 기침을 했다. 꽤나 괴로워서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으려니 누군가 등을 토닥여줬다.

“괜찮으십니까? 물 좀 마시십시오.”

“콜록! 콜록! 고, 고마워!”

옆으로 튀어나온 잔을 받아들고 물을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물이 시원하다. 마기휼은 꿀꺽꿀꺽 삼키면서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를 쭉 펴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나타난 손이 잔을 들고 가자 어깨를 축 늘어뜨린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 머리 아파. 목 튀어 나갈 뻔했네. 기침을 하다가 그런 몰골이 되면 얼마나 우습겠어. 그리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거야.”

인상을 쓴 채로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 괜찮지. 기침을 하는 걸로 죽는 사람은 없어.”

“다행입니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주먹으로 이마를 비비던 마기휼은 행동을 멈췄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낯설게 여겨져서 바로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하지만 듣다 보니 익숙한 음성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마기휼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건 준수한 용모의 사내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온화했다. 그 얼굴에서 아버지가 엿보였다. 처음 봤을 때하고는 조금은 다른 느낌이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을 게 없었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은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웃었다.

“……가휼, 건강해 보이네.”

“형님은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괜찮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저 조금 놀랐을 뿐이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라울은 어디에 있는 건데? 난 분명히 군함을 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마기휼의 눈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이내 지금 있는 곳이 로노베의 저택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여긴 자신의 방이었다.

내 방이라. 십 년 넘게 생활했던 곳인데도 생소하기만 했다.

얼떨떨하기도 했던 마기휼은 가휼을 바라봤다.

“가휼.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몸이 편찮으신 것 같다고 이곳에 형님을 모시고 오셨습니다.”

“누가?”

“라우젝 님께서요.”

와, 이 빌어먹을 새끼. 나만 달랑 여기에 던져 둔 거야? 그러면 라울은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치료를 받고 있나?

“이틀 전에 갑자기 로노베 상공으로 군함이 여러 척 나타났을 때에는 꽤 놀랐습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마기휼은 가휼을 봤다. 아직은 마기휼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하지 못한 것인지 가휼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서 파견 나온 참이었다고 하시더군요. 다른 배는 괜찮지만 중앙군 군함의 수리를 위해서 지금 외곽 쪽에 착함한 상태고요. 사람들이 대부분 그리로 구경을 나가 있습니다. 로노베에서는 군함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으니까요.”

“아, 그렇겠지.”

군함을 수리하고 더불어 라울의 부상도 치료하기로 한 건가. 로노베에는 실력 좋은 의사들이 많았다. 약초도 잘 나오는 편이고. 그러면 괜찮겠지.

눈으로 확인을 해 보고 싶은데. 지금 당장 일어나볼까.

마기휼은 가휼을 흘깃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그 얼굴을 확인한 마기휼도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얼굴을 마주하며 두 형제는 웃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굉장히 어색한 느낌. 몸속이 근질근질해지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입술 꼬리를 파들거리고 떨었다. 그리고 그건 가휼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그도 이쪽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내가 어색한 티를 너무 내고 있었나?

마기휼은 헛기침을 했다.

“그간 잘 지내고 있었지? 저택은 여전히 조용하구나. 빚쟁이들이 오는 시간이 아닌 모양이지? 지금 나타나면 내가 나가서 한 소리 해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돈을 빌리고서 큰소리를 치는 것처럼 어이없는 일이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재촉을 당하는 입장은 열 받기 마련이었다. 돈 떼어먹을 것도 아니고 갚을 건데 너무 닦달하면 줄 돈도 안 주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 아니던가.

아닌가. 이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인가? 돈을 빌려준 사람의 속 타는 마음을 헤아려줘야 하는 걸까. 팔짱을 낀 채로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가휼이 대답했다.

“최근 들어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군함이 내려왔으니 더 오지 않겠지요. 돈을 독촉하러 오는 이들의 대부분은 증서가 없는 이들이거든요. 아버지께서 구두로 돈을 빌려 갔다 하시며 돈을 내놓으라는 식이었지요.”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뭐야, 그건. 믿을 수 없는 말이잖아. 그런 놈들은 쫓아내버려.”

“얼마 전부터 그리하고 있습니다. 전화로도 알려드렸지요? 그래서 지금은 거의 찾아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군함이 나타났지 않았습니까. 형님을 모셔다 드리기 위해서 군인들이 이 저택을 출입하기도 했고 말이지요. 그 모습을 보고 겁을 먹은 거겠지요. 정말 아버님이 돈을 빌려갔다면 그런 거에 상관없이 찾아와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걸 보아하니, 역시나 그자들은 사기꾼이었던 것 같습니다.”

“암만 봐도 그러네.”

딱 보니 어린 청년과 미망인, 그리고 어린애만 달랑 있는 저택이니까 우습게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집안은 로노베에서 무려 수십 년을 자리를 잡은 명가였다. 로노베에서는 꽤나 이름이 있는 가문이란 말이다. 그런 곳에 파리가 꼬이다니. 아버지가 그리되어서 평판이 떨어졌기 때문인가.

순간 마기휼은 암시장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기분 나쁜 사내가 했던 말이 생각나면서 갑자기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정말이면 어떻게 하지. 아니야. 남이 하는 말은 믿지 말자. 가휼은 동생이다. 하나 남은 혈육이 아닌가. 그런 그를 의심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잖아. 하지만. 그래도…….

“저택이 조용하구나.”

안 좋은 생각은 잠시 접고 싶었다. 화제를 돌릴 양으로 마기휼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는 척을 했다.

“새어머니와 레이라는 방에 있는 거냐?”

“이 저택에는 레이라만 있습니다.”

“새어머니는 어디에 있고?”

“떠났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마기휼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떠났다고. 왜?”

“저와 다투었기 때문이지요.”

“……….”

아들과 다투어 집을 나가는 새어머니의 관계라는 건 이상했다. 뭐라 딱 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친아들이 아니고 나이차도 10살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더 이상했다.

왜 그녀는 레이라를 두고 혼자 나간 거지? 나가려면 자기 딸도 챙겨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지. 떠난다는 어감 자체가 이상했다. 잠시 나갔다가 들어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영 떠나버렸다는 거야? 그런 의미인 말일까? 왜 그래야 하는 거지?

“생활고를 비관하던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나가버렸습니다. 언제 올지, 다시 돌아오기나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입을 다문 가휼은 고개를 숙였다. 그 얼굴로 씁쓸한 감정이 내비친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우나 그저 새어머니가 바깥으로 나가 침울해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랐다. 자연스럽게 말을 던질 수 있는 기회. 마기휼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가휼. 너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바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짐을 내려놓는 듯 묵직한 음향이 들려왔다. 마기휼은 입을 다물었고, 가휼은 고개를 드나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에 사람이 온 모양이로군요.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가휼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뭔가를 물으려 그쪽으로 몸을 내미는 마기휼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서웠다. 이쪽이 건넨 말에 가휼이 어떤 말을 할지, 그것이 너무도 두려웠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가휼을 믿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그냥 넘기자. 그런 상태로 있다가는 가휼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 터였다. 결국 그것은 다른 불신을 낳을 뿐이었다. 일단은 말을 꺼내는 게 좋았다. 가휼이 기분 나빠하지 않게끔, 그가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야―

“제길.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하는 거야.”

오만상을 찡그리며 마기휼은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자고 이런 타이밍에 이 저택으로 돌아온 거야. 그 망할 라우젝놈 모든 걸 알고 이러는 거 아니야? 하여튼 음침하고 기분 나쁘고 재수 없는 놈. 분명 자신이 고뇌하고 힘들어하는 꼴을 보고 싶은 거라며 마기휼은 끙끙거렸다.

“……마.”

마기휼은 눈을 떴다. 아주 작은 소리이긴 했지만 분명 들렸다. 문 쪽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재차 그 소리가 들렸다.

“엄마.”

울음 섞인 작은 목소리.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때문에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훌쩍거리는 소리에 침대 아래로 한쪽 발을 내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울음이 점점 커진다. 마기휼은 문으로 달려가 아주 조금 열고 복도를 살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하얀 잠옷 차림의 여자아이가 보였다. 토끼 인형을 끌어안은 아이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울다 나온 건지 눈 아래가 벌겋게 익어 있었다.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녹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눈물이 나오자 손등으로 그걸 닦아 냈다.

“엄마. 엄마.”

훌쩍거리며 우는 아이는 불안해 보였다. 그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마기휼은 바깥으로 한쪽 다리를 내밀었다. 살금살금 그리로 걸어갔다. 그러는 동안 레이라는 벽에 붙어서 양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숙인 고개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큰소리를 내 울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훌쩍거리기만 하는 모습이 보기에 안타까웠다. 아이는 지친 듯 간간이 한숨을 쉬기도 했다. 이쪽이 접근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눈앞에 이상한 사람이 떡하니 나타나면 놀랄 텐데.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마기휼은 아이가 먼저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주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레이라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는 것에 맞추어 양손을 펼쳐 얼굴 옆에 대며 활짝 웃었다.

“안녕. 예쁜 아가씨?”

“…….”

나름 환히 웃으며 말을 건넨 것이었는데 레이라는 별 반응이 없었다. 움켜쥔 손을 입술 부근에 댄 채로 이쪽을 빤히 바라본다. 무서워하거나 소리를 지르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얼굴 옆에 활짝 펼친 양손을 대고 있는 이런 모습이라니. 분명 바보 같겠지. 어린애 눈으로 봐도 한심할 거다. 레이라가 생각처럼 무서워하지 않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할까. 마기휼은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손을 내렸다.

“안녕. 내 이름은 마기휼이라고 하는데, 네 이름은 레이라지?”

“……아저씨 이름 알고 있어.”

아저씨라니. 살짝 자존심에 타격을 입은 마기휼이나 레이라가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말을 해주는 게 어딘가 싶었기에 재차 말을 꺼냈다.

“이런 곳에서 왜 울고 있는 거야? 어디가 아프니?”

“엄마가 사라졌어.”

레나를 찾는 건가. 가휼에게 들어 그녀가 바깥으로 나간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 사실에 대해 솔직하게 아이에게 말할 순 없었다.

“잠시 어디를 다녀오시는 거겠지. 금방 올 거야.”

“하지만 오빠랑 크게 싸웠어.”

레이라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굵직한 눈물을 흘릴 것처럼 일그러졌다.

“다 알고 있어. 아주 큰 소리를 내면서 싸웠단 말이야. 무서웠단 말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이라는 흐으- 하고 울기 시작했다. 몸을 바르르 떨면서 우는 아이는 지금 이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울기만 할 따름인 그 모습에 마기휼의 안색이 굳어졌다.

말없이 있던 그는 레이라 쪽으로 양손을 내밀었다.

“일단 이리로 와.”

레이라는 울면서 마기휼을 봤다. 선뜻 다가오지 못하는 모습에 마기휼은 최대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알아. 큰오빠지? 늘 오빠가 말해줬어. 큰오빠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큰오빠가 오면 보여주겠다고. 정말 강한 사람이니까 나쁜 사람들 몇 명이 달려들어도 괜찮을 거라고 했어.”

“……아, 그렇구나.”

그런 식으로 설명을 했던가. 가휼 녀석도 참. 그건 허풍이잖아. 실제로 난 그렇게 강하지 못하단 말이야. 애한테 괜히 사람을 과대포장해서 알려주면 난 어쩌라는 거야. 민망하네.

마기휼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레이라는 앞으로 다가갔다. 마기휼은 안겨 오는 아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이는 작았다. 아직 6살 정도이니 작은 게 당연했다. 이런 아이가 엄마 없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싶었던 마기휼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밥은 먹었니?”

레이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지금부터 뭘 할까? 바깥으로 나가 놀까? 아니면 책 읽어줄까?”

“……오빠한테 갈래.”

큰오빠는 나고, 그냥 오빠는 가휼인가. 별거 아닌 호칭의 차이인데도 묘한 벽이 느껴졌다. 딱 들어도 이쪽보다는 가휼을 더 친근하게 여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당연한 거겠고 말이다.

“그래. 오빠한테 가자.”

마기휼은 레이라를 안아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로 가야 할까. 소리가 나서 나갔으니 바깥에 있을까. 마기휼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가휼이 보였다. 작은 마차가 보이고 거기서 음식이 내려오고 있었다. 식재료가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집사와 함께 의논을 하면서 음식을 골라 내리는 가휼은 신중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러웠다. 저런 일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 거겠지. 언제나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다.

“아빠 냄새가 나.”

“응? 뭐가?”

미처 레이라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한 건가 싶어 레이라를 내려다보려니 아이가 목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아빠 냄새가 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찰싹 달라붙은 레이라가 점점 안정을 찾아 가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이 귀엽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사랑스럽다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생이었다. 잘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마기휼은 레이라의 등을 토닥였다.

“아버지는 잘 대해주셨지?”

“아니. 무서웠어.”

레이라의 등에 닿아 있던 마기휼의 손이 주춤했다.

그러는 동안 레이라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한 번도 안아주지도 않고 놀아주지도 않고 늘 서재에만 있었어. 아빠는 날 보고 웃어준 적이 없었어.”

그럴 분이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안색을 굳힌 채로 있으려니 레이라가 마기휼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들어 마기휼의 뺨을 건드렸다. 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만져도 되는지 어떤지 모르겠다는 듯 말이다.

“따뜻해.”

중얼거린 레이라는 마기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은 레이라를 안은 채로 있던 마기휼은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언제 나가셨지?”

“7일 밤은 지났어. 7일만 지나면 온다고 했는데. 엄마는 거짓말쟁이야.”

레이라의 눈빛이 흐려진다. 재차 울 것 같았기 때문에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마기휼은 보란 듯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 집은 너무 넓구나. 그렇지?”

“응. 너무 조용해. 그래서 무서워. 잠을 잘 때에는 몇 번이나 깨는데, 그러면 엄마한테 갔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그래서 더 무서워.”

“오빠가 있잖아.”

“오빠는 요새 계속 화가 난 얼굴이야. 늘 인상만 쓰고 있어서 말을 걸 수가 없어서 싫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가휼이 보였다.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가휼은 이쪽과 눈이 마주치자 안색이 변했다. 아마도 레이라와 자신이 함께 있기 때문이겠지. 마기휼은 말없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가휼이 망설이면서도 마기휼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는 레이라의 머리에 한 손을 올렸다.

“레이라. 일어났니?”

묻는 순간 레이라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바로 고개를 든 레이라가 가휼을 돌아봤다. 가휼을 확인하자마자 당장 그리로 팔을 뻗는다. 순순히 안겨 있던 아이가 가휼 쪽으로 가버리는 걸 보고만 있었다.

가휼은 자신에게 안겨 오는 레이라를 안아 들면서도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마기휼의 눈치를 보다가 레이라의 등을 토닥였다.

“이제 일어났니? 이제 그만 자자. 이러다가 저녁에 또 못 자겠다.”

레이라는 고개를 마구 저어 대더니 더 세게 가휼을 끌어안았다. 투정이 심한 그 모습에 가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애가 응석이 늘었어요.”

“아직 어린데 곁에 어머니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렇지요.”

대답을 하는 가휼의 얼굴로 씁쓸함이 서렸다.

마기휼은 레이라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를 많이 닮았네.”

“그렇지요.”

“아버지도 조금은 닮은 것 같아.”

물으면서도 일부러 가휼을 보지 않았다.

이건 심술궂게 굴려는 게 아니었다. 속내를 파악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는 말이었다. 자신과 가휼에게도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레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셋의 비슷한 점을 지니고 있는 게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가휼은 레이라의 등을 토닥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레이라. 큰오빠 앞에서 잠옷 차림으로 있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란다. 가서 옷부터 갈아입고 오자.”

“싫어. 오빠랑 있고 싶어.”

“그러지 말고 큰오빠한테 예쁜 모습을 보여줘야지. 가자. 유모한테 데려다줄게.”

레이라는 칭얼거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거려도 가휼은 흔들리지 않았다. 능숙하게 아이를 다루는 모습에서 연륜이 느껴졌다. 레이라를 다독이며 몸을 돌리던 가휼은 마침 아이를 찾아 나오던 유모와 마주쳤다. 유모는 급히 가휼에게 달려가 팔을 벌렸다.

“아가씨. 여기에 계셨나요?”

가휼은 다가온 유모에게 레이라를 건네려 했다. 레이라가 유모에게 안기는 걸 확인한 가휼이 차분히 말했다.

“씻기고 옷 좀 갈아입혀줘. 저녁 식사는 다 함께 하고 싶으니까 그 준비는 집사에게 말해 두고.”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고개를 조아린 유모가 소중하게 레이라를 안고 몸을 돌렸다. 그녀들이 멀어지자 가휼은 머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는데도 저러는군요.”

“당연한 일이잖아. 네가 이 저택의 주인인걸.”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형님이 있는데 어떻게 제가―”

“난 그런 거 답답해서 싫어. 알지? 그냥 너희에게 도움이나 되었으면 좋겠어.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건 없어.”

“……형님.”

가휼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마기휼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으쓱였다.

머리 복잡한 상황은 이걸로 되었다. 집안의 주인님 소리 못 듣는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 외에 달리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떤 식으로 끄집어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자연스럽게 말이 나오게끔 하는 게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서 술만큼 좋은 게 없었다.

“오늘 저녁에 술이나 할까? 그러면서 지난 이야기를 나누자.”

“좋지요. 그간 저도 술이 꽤 늘었습니다. 놀라실 겁니다.”

“그래 봤자 몇 잔이겠지. 나 마기휼은 술고래로 유명하단 말이야.”

“그건 나중에 마셔 봐야 알 일이겠지요.”

“제법 세게 나오네? 그러다가 나보다 못 마시면 개망신 당하는 거야.”

“그럴까요?”

가휼과 마기휼은 웃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왠지 모를 석연치 못한 기분이 있었다. 때문에 웃고는 있어도 알게 모르게 껄끄러운 기분이 든다. 불편하다. 그걸 감추기 위해서 마기휼은 입술 꼬리 끝이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더 환하게 웃었다.

“주인님. 이쪽에 계십니까?”

복도 끝에서 나타난 존재가 이렇게 반가울 때가 없었다. 가휼과 마기휼이 동시에 쳐다보자 시종은 움찔하는 듯싶었으나 이내 그들에게 다가왔다.

“물건 정리를 하다가 특이한 게 나와서요.”

“그래? 알았다. 금방 그쪽으로 가 보지.”

대답을 한 가휼은 마기휼을 바라봤다.

“형님. 몸도 안 좋으신데 방에서 쉬십시오. 그리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사람을 시키시고요. 저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셔도 무관합니다.”

“아니야. 바쁜 사람에게 뭘 시킬 수야 없지. 기다리고 있네. 어서 가 봐.”

“형님이 오시면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그리되지가 않는군요. 금방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가휼은 사내를 따라 움직였다.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점잖아 보였다. 전에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볼 수 없었는데 꽤나 능력 있는 사내 같았다.

“믿음직스럽네.”

이렇게 보면 정말 자신의 동생인가 싶을 정도였다. 이제는 완연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자신과 다르게 할 일을 다 하는 사내. 누가 보더라도 괜찮은 사내. 그건 여자의 시각으로도 마찬가지겠지.

이런 음침한 저택에 재취로 들어온 레나는 성격이 안 좋아도 아름다웠다. 친지들의 등살에 밀려 원치 않게 결혼을 한 아버지는 어머니를 늘 그리워했다. 그리고 가휼은 원래부터 정에 굶주린 듯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주는 아이였다. 그런 세 사람이 이 저택 안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마기휼은 저택 안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자 가슴이 답답해진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을 느끼며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군함이 로노베에 착함했다는 건가. 그렇다면 분명 공항 근처일 거다. 그곳에 라울이 있겠지.

가만히 있으려 했지만 발바닥이 근질거렸다. 움직이지 않고는 못 배길 상태가 되어버린 마기휼은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1층으로 내려가 로비를 지나자 집사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집사는 들고 있던 걸 옆에 있던 자에게 건네고 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도련님 어디를 가십니까?”

“아, 집사. 오랜만이야.”

웃으며 손을 흔들긴 해도 어디를 간다고 정확하게 말을 해주지 않았다.

집사는 마기휼의 뒤를 쫓았다.

“어디를 가실 거면 말씀하십시오.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줄래? 그러면 나 공항에 갈 건데 거기까지 데려다주겠어?”

“군함에 가 보시려는 겁니까?”

“응. 다들 어떻게 있는지 궁금해.”

실은 다들이 아니라 라울, 그가 어찌 된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런 속내를 감춘 채로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알았다며 집사가 마차를 준비하는 동안 마기휼은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껄렁하게 서 있었다. 그런 자신은 확실히 눈에 띄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알게 모르게 흘깃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지금 모습이 크게 이상한 건가 싶어 눈을 내리뜨고 살펴봐도 딱히 거슬리는 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낯설 거다. 마기휼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 저택의 장남이 말이다.

전에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냥 그랬다. 아무려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남들이 어떻게 봐도 자신이 이 저택의 장남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바깥으로 나와 고개를 위로 젖혔다. 피곤했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려니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마차가 나오고 있었다. 마기휼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뒤로 다가온 집사가 멈춘 마차의 문을 열어줬다.

“빨리 왔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중간에 갑자기 쓰러지실지도 모르고요.”

“응? 쓰러져? 괜찮아. 그럴 일은 없어.”

자리에 앉으며 손을 흔드는 마기휼이었지만 따라 올라타는 집사는 단호했다.

“군함에 타고 계실 때에도 몇 번이나 빈혈 때문에 고생했다고 들었습니다. 애써 제 앞에서 강한 척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도련님이 기저귀를 차고 기어 다니실 때부터 봐 왔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괜한 허세 부리지 마십시오. 그리 말하고 싶은 듯 눈을 크게 뜨는 모습에 마기휼은 어정쩡한 얼굴이 되었다.

“빈혈이라니? 누가 그런 말을 해?”

“라우젝 사령관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망할 자식! 순간적으로 욱- 하고 올라왔다. 사람을 바보로 만들 작정이로구나. 내가 빈혈을 일으켜? 어렴풋한 기억 속으로 라울이 치료를 받으러 가고 난 후, 라우젝 앞에서 의식을 잃은 건 사실이지만 난 원래 빈혈이 없었다고!

라우젝이 말도 안 되는 사기를 친 거라는 말을 해주려 했지만 그 전에 집사는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쳐냈다.

“어려서부터 건강하셨던 도련님께서 혹사를 당하시어 허약해지신 건 아닌지, 전 정말로 걱정이 됩니다.”

“아니야. 뭔가를 잘못 안 거야. 난 혹사당하지도 않고 허약해지지도 않았어. 난 정말로 건강하단 말이야.”

“일부러 괜찮은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다 이해합니다. 분명 힘드셨을 겁니다. 빚을 갚기 위해서 혼자 그 먼 곳으로 가셨으니,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손수건을 꺼내 눈 아래를 훔치는 집사의 모습에 마기휼은 아연해졌다.

여기서 하나 단단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었다. 단지 빚을 갚기 위해 간 걸로 아는지, 아니면 라울의 신부로 팔려 간 사실까지 아는지 말이다.

“그 사실에 대해서 누가 또 알고 있지?”

“저 외에는 더는 모를 겁니다. 그 이야기는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내가 빚을 갚기 위해 안제크가로 가는 건 다른 사람이 알아도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임신할 수 있는 몸이라는 건, 모두가 알아선 안 되었다.

집사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돌보던 존재였다. 그가 알고 있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오해하는 건 안 되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렇게 심하게 혹사당하지 않았다. 물론 오르베나 라우젝 같은 사람들이 속을 건드려 대긴 했지만.

“저기 도련님.”

부름에 마기휼은 집사를 쳐다봤다. 굳은 눈빛에 집사는 머뭇거렸다.

“이런 질문은 굉장히 무례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어.”

무슨 질문을 하는지 빤했다.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설령 라울에게 팔려 간 거고, 벌써 그걸 했다고 해도 그 사실을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는 거였다. 마기휼은 태연히 말했다.

“다들 좋은 분들이야. 나에게 잘 대해줬지.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잘 대해주기는 개뿔. 사람 속 완전 긁어 놨다니까! 소리를 치면서 그들의 험담을 늘어놓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거기다 지금은 몸속에 아이가 있는 것 같다는 심증도 있었다.

아이라. 정말 배 속에 뭐가 들어가 있는 건가? 마기휼은 흘깃- 하고 눈을 내리떴다. 날씬했다. 인상을 쓴 채로 있던 마기휼은 집사를 바라봤다.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 의원이 진찰을 했어?”

“그렇습니다. 피로가 쌓였을 뿐이라고만 하시는데 저는 안심이 안 되어서요.”

“그 외에는 별다른 말이 없고?”

“없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중얼거린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하지만 톰은 알 수 있다고 했다. 라울과 하고 난 지 대략 2주가 지난 건가. 그 기간 동안 아이가 생겼다고 한들 알아차릴 수 있나? 적어도 몇 주가 되어야 아는 거 아니야? 어쩌면 낚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톰은 돌연변이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는 다른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 알 수 있는 걸까.

그러면 정말 생겼나.

“배가 아프십니까?”

“응?”

“배를 자꾸만 문지르시네요.”

지적을 받자마자 마기휼은 손을 내렸다. 이쪽이 그렇게 티가 나도록 배를 문질렀던 건가 싶어 살짝 무안하기도 했다. 마기휼은 괜찮다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속이 좀 더부룩해서.”

별거 아니라는 뉘앙스로 말을 했지만 바로 집사가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것 보십시오. 역시나 몸이 안 좋은 게 아닙니까.”

“틀려. 아니야. 정말 괜찮아. 이런 건 좀 달리면 금방 내려가게 되는 거야.”

“일부러 괜찮은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몸이 안 좋으면 솔직하게 말해주십시오.”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그만해.”

마기휼은 선을 딱 그으며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강경한 태도가 전해졌는지 집사는 머뭇거리며 뒤로 몸을 물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요새 이상하게 조급증이 생겨나서.”

중얼거린 집사는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전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이를 먹었으니 그게 당연한 거겠지만 말이다. 마기휼은 팔짱을 끼었다. 다리를 꼬고 창 밖을 내다봤다.

익숙한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은 많이 달라져 있어도 산과 호수의 정경은 여전했다. 아름답게 빛나는 수면을 바라보던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전히 아름답네.”

“로노베는 노르디아 연방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일 겁니다.”

“그래. 그렇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라서가 아니라 로노베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만한 자연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은 그리 흔치 않다면서 창밖을 내다보며 마기휼은 모르는 척 물었다.

“왜 새어머니가 저택을 떠난 거지? 레이라는 그녀가 가휼과 싸웠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이야? 그 두 사람이 싸울 일이 뭐가 있다고 그녀가 떠나기까지 한 거지?”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눈을 내리뜨는 집사는 분명히 뭔가를 아는 얼굴이었다. 그걸 숨기려 들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집사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더 입을 걸 것 같지 않았다. 덕분에 마기휼은 조용히 이동을 할 수 있었다.

조용하다 해도 마음을 가득 채우는 불편함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공항 옆으로 군함 세 척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일반 배하고는 다른 위용을 지닌 군함이 나란히 있으니 박력이 넘쳤다. 하늘을 지나치는 군함을 본 적이 있기는 해도 저런 식으로 세워진 것은 로노베 마을 사람들에게 처음일 거다. 그 때문인지 앞으로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마차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마기휼은 마차를 멈추게 하고 내렸다. 집사가 걱정스러운 듯 마기휼을 쳐다봤다.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시지요.”

“아니. 괜찮아.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갈 테니까 따라오지 마.”

“도련님. 같이 가야- 도련님?”

집사가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안 들리는 척 혼자 내려갔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앞줄로 가자 줄이 쳐져 있었다. 그 앞으로 군인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일반인들은 더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모양이었다.

마기휼은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군인을 불렀다.

“이봐!”

부름에 군인이 반응을 보였다. 쳐다보긴 했으나 그 얼굴이 낯설었다. 마기휼은 상대를 모르고 상대도 마기휼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불렀기 때문에 빤히 보긴 봤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며 군인 앞까지 접근했다.

“난 북방군 소속의 마기휼 소령이라고 하는데 안에 들어가 봐도 괜찮겠나?”

“허락된 자 외에는 출입이 불가합니다. 거기다 당신이 북방군 소속이라는 걸 어떻게 믿겠습니까.”

“왜 못 믿어? 나 정말 군인이라니까. 나도 저 군함을 타고 이리로 왔단 말이야. 난 라울 대령이랑 라우젝도 잘 알고 있어.”

“어디서 감히 사령관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겁니까.”

그저 안면이 있다는 걸 어필하려던 것뿐이었다. 그걸 두고 군인이 이렇게 정색을 할 줄은 몰라서 가만히 있는 동안 그는 크게 팔을 휘저었다.

“헛소리 늘어놓지 말고 냉큼 물러나십시오. 그렇지 않는다면 끌려 나가게 될 겁니다.”

뭐 이런 꼴통이 다 있어. 난 정말로 라울도 알고 라우젝도 알고 있다니까? 지금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나 진짜 미치겠네.

억울하고 화가 나기도 했던 마기휼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 그를 바라보는 군인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저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만 듣는 신참이로구나. 뭐 이런 걸 앞에 세운 거야.

마기휼은 혀를 찼다. 이런 놈이라면 안으로 들어가기는 글러먹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라울을 봐야만 했다. 그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는 게 중요했다. 억지로 밀고 들어갈까? 그리 생각을 하며 예리하게 눈을 빛내자 젊은 군인의 표정 또한 굳어졌다. 이쪽이 발칙한 결심을 한 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이윽고 군인은 마기휼 쪽으로 한 발 내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당신 여기서 떨어져-”

“소령님?”

군인이 다가오기 전에 뒤에서 누군가 아는 척을 해 왔다. 마기휼은 당장 그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레드존 내에서 이런저런 일이 있어 나름 죽이 잘 맞았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마기휼 소령님. 무사하셨군요! 안 보이셔서 어떻게 된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자네는-!”

이름은 몰라도 통신병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마기휼은 냉큼 줄을 넘어가 통신병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최대한 친한 척을 하며 깐깐하게 굴던 젊은 군인을 흘겨봤다.

“이래도 내 신분을 못 믿겠어?”

군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신분이 증명되긴 했지만, 살짝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군인은 다가온 통신병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북방군 소속의 마기휼 소령님이신 겁니까.”

“물론이다. 라울 대령님을 적군에서 무사히 구출해낸 분이시기도 하지.”

통신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선 밖에 서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대단하다는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이 아닌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저런 식으로 쳐다보면 아주 조금 민망해진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려니 통신병이 마기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대령님의 상태를 보러 오신 건가요? 절 따라오시지요. 많이 좋아지셨어요.”

“좋아졌어? 정말로?”

“그렇습니다. 누워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군함 여기저기를 살피고 다니셔서 난감합니다.”

어쩔 수 없는 분이라며 쓴웃음을 짓는 통신병의 모습에 마기휼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라울이라면 그리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피를 많이 쏟아서 의식을 잃기까지 했다. 그런 주제에 여기저기를 다니고 있다고? 당장 침대에 누워 있으라는 말을 해야겠다며 마기휼은 군함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튀어 나가는 마기휼의 모습에 통신병이 놀라 왼쪽을 가리켰다.

“소령님! 대령님이 계신 곳은 왼쪽입니다!”

직진을 하던 마기휼이 재빠르게 방향을 틀었다. 왼쪽 군함으로 달려가는 걸 확인한 통신병도 급히 그 뒤를 쫓았다.

팔짱을 낀 라울의 미간 사이로 선명한 주름이 만들어져 있었다.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부상 때문에 저런 얼굴을 하는 거라면 그냥 침대에 누워 있으면 좋을 텐데 왜 굳이 여기에 있어서 저런 분위기를 풍기는지 모르겠다.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다들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보다 더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대령님. 잠시 이리로 와주십시오.”

부름에 라울은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통신병이 가리키는 쪽을 살폈다.

“이 부분에 자꾸 오류가 뜹니다. 아마도 레드존 지역에 들어갔을 때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이런 건 여기서 복구를 할 수 없습니다. 일단은 안베르로 돌아가서―”

한창 설명을 잘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외관을 지닌 청년이 보였다. 갈색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반짝거리는 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청년의 이름은 바로 마기휼이었다. 레드존 지역 안에 들어갔을 때 그와 함께 군함의 프로그램 복구를 하지 않았던가.

군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소령님!”

더 아는 척을 하고 싶지만 옆에 서 있는 라울이 신경 쓰여서 소심하게 손가락을 까닥이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마기휼의 시선은 군인이 아니라 라울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마기휼은 당장 라울의 앞에 서선 그를 위아래로 살폈다. 라울의 얼굴은 평소와 같지만 창백한 듯도 싶었다. 마기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족 눈썹을 위로 올렸다.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라며. 그런데 이렇게 서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괜찮다. 다 나았다.”

“웃기고 있네. 그런 얼굴로 잘도 괜찮다고 말한다?”

마기휼은 주변의 군인들이 놀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걸 느끼곤 입을 다물었다. 직급이 대령과 소령이었다. 반말 짓거리는 남들 보기에 이상한 거였다.

나중에 뒷말 듣고 싶지 않았던 마기휼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뿐입니다. 아직 다 안 나으셨으면 그냥 쉬십시오. 이 군함 내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습니다. 아픈 대령님이 굳이 왔다 갔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침대로 가십시오. 쉬란 말입니다.”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진지했다. 가능만 하다면 지금 당장 라울의 팔을 잡고 끌고 가고 싶다는 투였다. 그런 마기휼을 내려다보던 라울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바깥으로 질질 끌고 갔다.

“어? 왜, 왜 이래?”

저항을 하고 싶어도 라울이 아직은 성치 않은 몸 상태였기에 순순히 다리를 움직였다.

밖으로 나와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해서야 라울은 발을 멈췄다. 끄는 대로 끌려오긴 했는데 왜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오는지 모르겠다. 마기휼은 잡힌 손목을 문질렀다.

“왜 사람 없는 곳으로 데리고 오는 건데? 이상하잖아.”

이상한 의미로 이상하다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좀 거시기할 뿐이지.

쑥스러운 감정 상태를 숨기기 위해서인지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툭 내밀었다. 라울은 그런 마기휼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몸은 괜찮나.”

“당연하지. 난 누구처럼 총알도 못 피해서 피를 질질 흘리지 않았으니까.”

분위기 전환을 위해 한 말인데 라울은 별 반응이 없었다. 무표정으로 있으니까 심히 무안했다. 마기휼은 헛기침을 하며 라울을 흘겨봤다.

아까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안색이 창백할 따름이지 그 외에는 다 괜찮은 것 같다. 그것에 안도한 마기휼은 웅얼거렸다.

“로노베에 들어올 줄은 몰랐어.”

“가장 가까운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라우젝이 수리를 하기 위한 준비를 이곳에 미리 해 두었더군. 애초에 이리로 들어올 생각이었던 거야.”

“라우젝이?”

미리 이곳에 준비를 해 두었다고? 무슨 속셈으로? 그놈은 방심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혹여라도 이상한 짓거리를 상상하는 건 아니겠지? 우리 집안하고 관련해서 일을 칠 생각이라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레드존 지역 내에서 도와준 것은 둘째 치고라도 당장 묵사발을 내줄 거다. 왕통 운운하면서 지랄거리는 그 입부터 후려쳐줄 거라며 마기휼은 이를 악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라울은 마기휼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점점 알게 된다. 라울이 저렇게 진지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의미를 말이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그걸 참고 있었다.

녹빛 눈동자 아래로 깔린 미묘한 감정 상태를 읽은 마기휼은 손을 들어 라울의 뺨을 감쌌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건데?”

“동생과는 만나봤나?”

“아, 뭐. 만났지. 눈을 뜨자마자 보이던데?”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였기 때문에 보이는 게 가휼이라는 것에 솔직히 좀 당황하기도 했고 말이다.

“이야기는 나눠봤나?”

“아직은 아니야. 저녁에 술을 마시기로 했으니까 그때에나 말을 꺼내봐야지.”

레이라와 가휼. 그리고 레나에 대해서 말이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마기휼은 허리에 한 손을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 얼굴이 심란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야 아무런 해결도 되지 않을 터였다. 확실하게 물어서 아니면 아니고, 맞으면― 아, 정말 싫다. 거기서부터 생각이 중단이 된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

애써 마음을 차분히 한 마기휼은 라울을 봤다.

“그런데 언제 안베르로 돌아갈 거야?”

“수리가 되는 대로 이동하게 될 거다. 그리고 아이작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파악할 거야.”

“아직도 쫓는 거야?”

“쫓아서 끝장을 낼 거다.”

“……….”

끝장을 내는 건가. 그래야만 할 거다. 놈들은 지나치게 이상하고 저돌적이었으니까. 이쪽이 예상치 못하는 방법으로 다시 파고들 수 있을 거다.

그런 폭격에서도 살아남아서 도주를 하는 중인 건가. 하여튼 대단하다니까. 그리고 마리아도 말이다. 톰과 그녀를 떠올리는 순간 기분이 가라앉는다.

살아 있겠지. 죽었다 한들, 그건…….

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굳은 얼굴이 되는 마기휼을 확인한 라울이 말했다.

“그놈들은 너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어.”

마기휼은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냥 대충 흘려듣고 넘기면 될 말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묘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마기휼은 라울을 올려다봤다. 이상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 관계가 알려지는 게 두려워?”

“그놈들이 너를 상대로 또 무슨 장난을 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아, 그런 건가. 나는 또 천하의 라울이 남색이라는 게 세상에 알려지는 게 두려워 저런 말을 하는 줄 알았네. 안심이 된 얼굴로 마기휼은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이런 일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당했던 거고, 알고 있었다면 알아서 잘 처리를 할 수 있었던 일이야.”

“놈들이 작정을 하고 달려든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나. 사건은 터지게 될 거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마음 편히 쉴 수가 없다.”

라울은 단호했다.

“바로 출발해서 놈들을 다 없애버리겠다. 레드존에서 있었던 일이나, 그걸 본 이들 모두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겠어. 그러니 그동안 너는 로노베에 남아 있어. 이곳에 군함 하나를 영구적으로 배치하겠다.”

태도가 강건하고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은 모습에 레드존이나 마리아에 대해선 더 말을 꺼낼 수 없어졌다.

레드존에서 당한 일이 어지간히 짜증났던 모양이었다.

하긴 라울 성격에 피를 많이 흘려 기절을 했으니 오죽할까. 타격을 입은 자존심이 회복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거라며 마기휼은 입술을 비죽였다.

“여기에 남아 있으라고?”

“그렇다.”

단호한 대답에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라울이 자존심에 타격을 입었다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자존심 다시 챙겨야 하는 거겠지. 그렇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이쪽에 대한 제지를 가하려는 건 좀 아니다 싶었다.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확 올라갔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아니야. 난 강해. 너도 알잖아.”

“위급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을 때, 마기휼 네가 군함을 움직일 수 있나?”

가만히 있던 마기휼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기분 나쁨이 역력한 그 얼굴을 보면서도 라울은 말하길 멈추지 않았다.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나?”

권한이 없는 자는 군함을 움직일 수 없었다. 레드존에서 이쪽이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건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때라면 어림도 없었다. 그것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바였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사람 기분 나쁘게 구는 건 무슨 심보인가 싶었다. 자연스럽게 날이 선 대꾸가 나왔다.

“할 수 없어.”

“그렇다면 지금은 내 말을 따라줘.”

그냥 네 말 듣고 저택에 쿡 처박혀 있으라는 거냐. 그것 말고 달리 할 말은 없는 거야? 레드존에서 있었던 일들은 다 잊었어? 막상 바깥으로 나오니까 너 당한 게 억울한 거냐? 지금 당장 아이작을 추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마기휼은 혀를 찼다. 신경질적으로 라울을 흘겨봤다.

“너 진짜로 연애하기 글러먹었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라울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지 않았다. 마기휼은 당장 몸을 돌렸고 걸음을 옮겼다. 당장 비상구로 가서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누군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문 옆에 서 있는 자는 공교롭게도 라우젝이었다.

망할 자식. 분명 일부러 저기에 서 있는 거야. 라우젝이 모든 걸 예견하고 그곳에 있을 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거슬렸다. 그를 무시하며 문을 통과하려는데 당장 손목이 붙잡았다.

“함부로 만지지 마!”

안 그러려고 했는데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경계심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이런 목소리는 원치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라우젝이다 보니 평정을 찾기가 힘들었다.

뒤로 물러난 마기휼이 노려봐도 라우젝은 태연했다.

“안녕.”

“시끄러워. 댁 얼굴 보고 싶지 않다고.”

손을 흔들던 라우젝은 마기휼의 날이 선 말에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느리게 벽에서 등을 떼나 싶더니 갑자기 앞으로 쑤욱 나타나 배에 손을 댄다. 기겁을 하며 마기휼은 당장 라우젝의 팔을 뿌리쳤다.

“왜 이래?!”

“너 임신했지?”

마기휼은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눈썹 꼬리가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살짝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눈꼬리를 확인한 라우젝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정답인가?”

“정답은 무슨― 헛소리하고 자빠졌네.”

지금은 그리 여유가 없었다. 살벌한 표정을 능숙하게 조절할 수 없었다. 농담으로 가볍게 넘어가야 할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얼굴 전체로 떠오르는 건 살기였다.

그걸 본 라우젝은 마기휼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흥미롭네. 뭐야? 허니문 베이비야?”

정말 짜증 났다. 라우젝의 멱살을 붙잡고 두어 방 때려버릴까.

아니다. 말자.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

“하나 충고를 해줄까.”

충고 좋아하시네.

라우젝이 하는 말 모두가 고까웠던 마기휼은 당장 눈을 흘겼다.

“댁한테 들을 충고 따위 없어.”

“아이는 지우는 편이 어때?”

무슨 말을 해도 동요치 않을 생각이었다. 설령 말을 들어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러 넘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라우젝이 하는 말은 모든 예상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진 마기휼은 라우젝을 바라봤다.

“……뭐라고?”

“아이를 떼라고.”

마기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던지 마기휼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나 임신한 거 아니야. 거기다 라울의 아이라면 왕통일 텐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잖아.”

“너도 피에 대해서 들었을 거 아니야. 왕통이라는 건 과거 천 년도 전에 하늘의 땅을 지배하던 이들의 후손이야. 하늘의 땅 같은 건 모두 옛날 옛적의 일이고 전설일 뿐이라고 하면서도 뒤로는 그런 식으로 피를 보존하고 있었지. 삼국이 모두 그래. 모두가 아닌 척하면서 근친과 불법 수혈을 병행하면서 보다 진한 왕통의 피를 지니려 하고 있어. 그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 것 같아? 다시금 하늘의 땅을 지배하고자 하는 거야. 그래서 이 세계를 손에 넣으려는 거지.”

라우젝이 하는 말은 이미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이었다. 저기 아이작이 지껄여 대던 말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걸 왕통들도 따라서 하려 한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변하는 마기휼의 표정을 읽으며 라우젝은 말을 이었다.

“왕통? 낳으면 좋지. 고생 안 하고 편히 살 수 있을 거야. 놀고만 먹어도 왕통을 키우라며 1년에 100만 베리가 지급될걸. 하지만 넌 아이를 만날 수 없어. 아이는 바로 여왕에게 가게 된다. 라울은 여왕과 혼인을 하게 될 거고, 아이는 그 두 사람이 낳은 걸로 될 거야. 그리고 네 아이는 다음 왕통을 낳기 위한 도구로밖에 이용되지 않을 거야.”

도구라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도 안 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라우젝은 충격을 받은 마기휼이 불쌍하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여왕이나 왕이 될 수 있을 거라 했지. 아니야. 안 시켜줘. 네 배를 빌려 태어난 아이는 인정받지 못해. 종이 인형이 되어 놈들이 원하는 걸 만들어내는 도구밖에 될 수 없어. 남자아이라면 씨만 뿌려 댈 거고, 여자아이라면 1년도 쉬지 않고 아이를 낳아야 할걸. 아이 낳는 기계도 아니고, 그게 뭐야.”

라우젝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진정으로 화가 난 듯 라우젝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나는 그런 게 싫어. 구역질이 나. 다른 사람이라면 나중에 어떤 비참한 꼴이 되든 신경 쓰지 않겠지만, 너는 아니야. 너처럼 강단 있는 놈이 무너져 내리는 건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다 지워버려.”

라우젝의 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다른 때라면 당장 기겁을 하며 후려쳤을 테지만 지금은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라우젝이 내민 걸 살폈다. 붉은 주머니였다.

“고통 없이 없앨 수 있을 거다. 눈 감았다 뜨면 그걸로 끝이야. 그리고 너와 라울은 편하게 살 수 있어. 라울이 여왕의 부군이 되는 건 정해진 일이야. 암만 네가 라울을 사랑하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어.”

“난 라울을…….”

“넌 라울을 사랑해.”

마기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우젝은 그걸 중간에 잘라버렸다.

이쪽을 바라보는 마기휼의 눈동자가 굳어 있었다. 혼란으로 가득 찬 그 얼굴을 마주 보며 라우젝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확신해. 나도 예전에는 너같이 굴었으니까.”

사랑. 그 하나에만 모든 걸 걸었던 적이 있었다. 주변의 모든 걸 버려도 괜찮다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게 어리석었던 거다. 사랑이라니. 우습지도 않았다.

“사랑해서 모든 걸 다 해줘도 괜찮다고 생각했지. 함께 있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적이 있었어. 하지만 버려졌지. 선택된 것은 내가 아닌 라울이었어. 나보다는 라울이 사람들 앞에 내보이기에 더 적합할 거라는 판단을 내린 거야. 마기휼.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일을 해내. 사랑의 마음과는 별개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지. 라울도 그럴지도 몰라. 여왕과 혼인을 해도 사랑은 너와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할지도 몰라. 그리되었을 때, 넌 정말로 비참해지겠지.”

라우젝이 앞으로 다가왔다. 굳은 얼굴의 마기휼이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라우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기휼의 손을 잡은 후 그 안에 주머니를 밀어 넣었다. 손안에 들어간 주머니를 내려다보는 마기휼의 눈이 충혈된다.

라우젝은 마기휼의 몸을 한 팔로 끌어안았다.

“이곳에서 필사적이 되면 안 돼. 진정성을 지니면 안 돼. 장난처럼 즐기다가 바이바이 하는 거야. 그 방법을 내가 알려주는 거야. 상처는 받지 마. 설령 받는다 한들 그게 혼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잖아? 둘이 되어야지. 둘이 동시에 죄를 짊어져야 하는 거야.”

“……….”

비뚤어진 영혼이 여기에 있었다.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어긋나 있고 시기와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안정이 된 듯싶지만 그게 아니었다. 라우젝은 세상의 모든 것을 증오하고 있었다.

모든 것에서 버려지고 사랑에 배신당했다. 나의 것이라 믿었던 존재가 등을 돌렸고, 대신 선택한 것은 동생이었다. 동생인 라울이 선택되어 자신이 올라간 지위에까지 올라 인정받는 걸 바라보는 심정을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로지 라우젝 그만이 감당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그의 운명이었다.

“여기는 개미지옥이야.”

라우젝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련함과 독기를 동시에 품은 눈빛이었다.

“외부의 상식은 여기서 통하지 않아. 세상의 1%. 선택된 존재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존재하고 있지. 그걸 네가 알게 된 거다. 그로 인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잘 막아주지. 너는 마음에 드는 놈이니까. 내가 보호해주겠어.”

그런 말을 들었으니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그의 눈빛은 손에 쥐어진 주머니를 내려다봤다. 시선이 고정된 채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라우젝은 그의 곁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마기휼은 그 후로도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렸을 적에나 좋아했던 음식과 음료가 나왔다. 나름 자신을 위해서 준비된 것이었겠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좀 맛있게 먹는 척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마기휼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있기만 하는 걸 보고 레이라가 유모를 쳐다봤다.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유모가 조용히 하라는 듯 레이라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레이라의 자리가 빈 것을 그제야 확인한 마기휼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레이라는 어디로 갔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은 이제 슬슬 끝났으니까요.”

“아, 그렇구나.”

식당으로 하녀들이 들어와 음식을 정리했다. 아직 많이 남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대로 치워지면 버려질 거다. 아깝지만 먹고 싶진 않았다. 마기휼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많이 남겨서 미안하네. 정성껏 준비를 해줬을 텐데 말이야.”

“입맛이 없으신 겁니까. 잠시 군함에 다녀왔다 들었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무슨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마기휼은 웃었다. 그 얼굴이 다소 지쳐 보이긴 했지만 딱히 이상함을 감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휼은 다른 말을 입에 담았다.

“마을 사람들이 형님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라울 대령님을 구해주셨다지요? 대단하다며 칭찬 일색이라 합니다. 덕분에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 뭐, 좋게 말을 해주면 좋을 일이지.”

“그렇지요. 형님 덕분에 집안의 평판이 다시금 좋아져서 안심이 됩니다.”

가휼은 포크를 내려놨다. 그의 접시에도 상당량의 음식물이 남아 있었다.

“너도 많이 안 먹었구나.”

“네. 오랜만에 형님께서 앞에 계시니 긴장이 되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는군요.”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긴장할 게 뭐가 있냐고. 머리로는 생각해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하녀가 들어와 계속해서 음식을 정리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 계속 있을 순 없었다. 이만 옮겨야 할 듯싶었다.

“술 마실래?”

“그러면 자리를 옮길까요? 절 따라오시지요.”

먼저 가휼이 일어서고 마기휼이 그 뒤를 쫓았다. 가휼은 밖으로 나와 따라오는 마기휼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마기휼은 웃었다. 가휼도 웃었다. 서로 진심으로 웃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걸 둘 다 느끼고 있을 거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음을 옮겼다. 터덜거리며 걸어가는 동안 괜히 기운이 빠졌다. 마기휼은 손을 들어 목 부근을 긁적였다.

“여기서 형님과 많이 뛰어놀았지요.”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가휼이 보였다. 눈을 내리떠 바닥을 바라본 채로 그는 말을 이었다.

“형님은 다리가 빠르고 전 느렸지요. 뒤뚱거리며 쫓아가다 넘어지면 형님은 어김없이 절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하면 아버님께서 밖으로 나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 괜찮으면 정원으로 나가 놀지 않겠느냐고 사정을 하곤 하셨지요.”

“아아, 그랬지. 그거 굉장히 오래전의 이야기 아니야?”

“그렇군요. 제가 한 5살 때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정말 재미있었지.”

“아버님이 있고 어머니가 있는 저택은 정말 아름다웠지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온 세상이 반짝거렸습니다. 일어나 복도로 나와 걸어가면 테이블 가득 맛있는 음식이 있고, 형님과 어머니가 앉아 있고 아버지가 오셨지요. 늘 네 식구가 모여서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는 그 일상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늘 그런 일상이 이어질 거라 믿었지요.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셨을 겁니다.”

마기휼은 가휼을 쳐다봤다.

고개를 숙인 채로 있는 가휼의 얼굴은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너무도 사랑하셨습니다. 애초에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순수한 분이셨지요.”

“……그랬지.”

그래서 새어머니가 이 저택으로 들어왔을 때 놀랐던 것 같다. 친척들 등쌀에 밀려 그리된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때에는 ‘역시나-’로 생각이 바뀌었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벌써 도착한 모양이었다.

걸음을 멈춘 가휼이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마기휼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 쪽으로 동그란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위로 술과 잔, 그리고 간단한 안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촛대가 있어 은은한 분위기가 풍기는 게 썩 괜찮았다.

“멋진데? 준비를 다 해 두고 있었구나?”

“저녁에 한잔하자고 먼저 말을 꺼낸 건 제 쪽이니까요.”

“그랬지. 이런 걸로 네가 어른이 되었다는 걸 느끼다니. 생소한데?”

“놀리지 마십시오.”

뭐 어떠냐며 마기휼은 주먹으로 가휼을 툭 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를 끌고 자리에 앉자 다소 들뜨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져봤지만 가휼은 처음이었다.

어린 줄만 알았던 가휼이 성인이 되어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다니. 감개가 무량하다며 마기휼은 가휼이 하는 걸 살펴봤다. 마개를 딴 가휼이 잔에 술을 채웠다. 잔의 절반보다 못하게 따라진 술에서 진한 향이 풍긴다. 가휼이 본인의 잔에도 술을 따르는 걸 확인하고 잔을 들었다.

“자, 일단 한잔 주욱 들이킬까?”

“좋습니다.”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가휼이 한 번에 잔을 비운다. 그걸 지켜본 마기휼은 술이 든 잔을 내려놨다.

“안 드시는 겁니까?”

“오늘은 속이 안 좋아서 향만 맡을게. 하지만 네 잔에 술이 떨어지게는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는 마.”

빈 잔으로 붉은 액체가 가득히 채워진다.

빛이 참 아름다웠다. 이걸 바라보려니 어머니가 떠오른다. 정갈하게 머리를 묶어 올리고 소박한 옷을 입은 채로 술을 담갔다. 그녀는 술을 즐기진 않아도 맛있는 술을 만드는 걸 좋아했다. 그걸로 사람을 대접하고 그들이 즐거워하는 걸 행복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가휼은 마기휼을 바라보며 잔을 들었다.

“오늘따라 술이 달군요.”

중얼거린 가휼은 술을 마셨다. 마치 술에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렇게 30여분이 지났을 때 가휼 혼자 한 병 반을 다 마시게 되었다. 마기휼은 처음 한 잔을 그대로 둔 채였다.

마기휼은 맞은편에 앉은 이를 바라봤다. 동생인 가휼. 그런데도 그 모습이 낯설게만 여겨졌다. 남처럼은 아니지만, 진짜 동생 같은 느낌은 적었다. 전에도 그랬다. 앞으로도 그런 식일까. 아니면 보면 볼수록 괜찮아지는 걸까? 익숙해질까?

마기휼은 테이블에 내려놓은 잔을 한 손으로 감쌌다.

“가휼.”

“네. 형님.”

“레나와는 어떤 관계였던 거지?”

가휼이 술에 취했기 때문일까. 머리 아프도록 고민하던 것을 이리도 쉽게 물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더 한 것도 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녀와 잤나?”

“그렇습니다.”

순순히 대답을 하는구나.

가휼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이 괘씸했다.

“언제부터?”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모르진 않습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 말이지요. 아버지도 그걸 의심하셨지요. 레이라가 제 딸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레나를 안은 건, 레이라가 2살이었을 무렵부터입니다.”

레이라가 2살 때부터인가.

마기휼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머릿속이 텅 비어졌다. 아마도 술기운을 빌려 너무도 엄청난 걸 묻고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마기휼은 어느덧 표정이 모두 사라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이라가 태어난 후에 레나를 안은 것이 제 면죄부라면, 그렇습니다. 그것이 제 면죄부입니다. 레이라를 낳고 난 후 레나는 변화를 기대했지요. 아버지가 조금 더 자신에게 잘해주고 딸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줄 거라 믿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같았습니다. 형님이 계셨을 때에는 종종 밖으로 나오거나 먼저 말을 걸기도 하셨던 분이 방에서 책만 읽으셨지요. 그림을 그리셨고, 그건 어머니의 초상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 가휼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언제나.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레나는 절망을 느꼈지요. 그녀는 젊고 꿈이 있었습니다. 행복하게 잘 살면서 여자로서의 기쁨도 누리고 싶었던 거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딱 한 번 그녀를 안았고, 그걸로 레이라가 태어났습니다. 레나는 혼자 레이라를 키웠고 힘들어도 아버지에게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도하고 차갑던 그녀는 우습게도 아버지의 무관심에 점점 빛을 잃더군요. 심각할 정도의 우울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지요.”

가휼은 쓰게 웃었다.

“부모님은 늘 형님을 걱정하고 더 불쌍하게 생각하셨지요. 아마도 형님의 그 몸 때문일 겁니다. 어렸을 때 기억을 되짚어 보면 이 저택은 늘 아름다웠습니다. 빛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그건 저를 제외한 형님과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의 기억입니다. 저는 늘 한 발 떨어진 곳에서 그걸 구경하는 입장이었지요.”

“가휼.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건 그렇지 않아.”

“아니요. 원래 그런 게 아닙니까. 건강하고 튼튼한 아이보다 다른 문제가 있는 아이를 더 신경 쓰고 마음 아파하는 게 바로 부모라는 게 아닙니까. 그걸 모르진 않습니다. 지금은 어른이니까요. 하지만 예전의 전 어린애였습니다. 아이였습니다. 부모님이 형님께 쏟아붓는 관심에 대해 싫은 내색을 할 수 없는 아이였지요. 저는 늘 외로웠습니다. 가슴 한구석이 늘 빈 듯한 느낌이 떨어지지 않았지요.”

가휼은 양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는 그 얼굴로 그늘이 내려앉았다. 싫은 기억이 떠오른 탓일까. 무표정을 하고 있던 그는 고개를 들었다.

마기휼도 그걸 따라 눈동자를 위로 들었다. 낡은 천장에 나비 한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날개를 파닥인다. 그러다가 다른 쪽으로 날아가버렸다.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나비를 바라보던 가휼은 양팔을 벌렸다.

“이 저택은 넓습니다. 이런 곳에서 레나와 저는 방치되었지요.”

긴 한숨을 쉰 가휼은 술병을 집었다. 잔에 술을 채우고 그걸 한번에 주욱 들이켰다.

“형님이 떠나고 난 후, 아버지는 더 심해지셨습니다. 필요한 행동 외에는 하지 않게끔 되었지요. 단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형님이 떠났을 뿐인데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아직은 제가 있고 레나가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저택은 조용했지요. 사람이 사는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분 나쁜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희는 서서히 어둠에 잠식되는 걸 느꼈습니다. 아버지가 그러니 고용인들도 조용해지고 우리가 지나가도 인사를 하는 것 외에는 필요한 대화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형님. 침묵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십니까? 그건 사람을 참으로 초라하게 만듭니다. 스스로를 하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지게 만들지요. 바깥도 아닌, 집이라는 장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사람은 더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레이라를 가진 레나의 배는 점점 불렀고, 레이라를 낳을 때에는 기력이 너무도 없어 아이를 낳다가 죽을 뻔도 했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레이라를 낳았고 아이의 울음이 저택에 울려 퍼지자 아주 조금은, 사람 사는 장소가 된 듯싶더군요. 늘 조용하던 곳에 레이라의 울음이 들리고 레나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레나는 히스테리를 부려 댔지요. 듣기 싫을 법도 한 그 음성도 듣기가 좋았습니다. 왠지 사람 사는 장소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전 레이라를 보러 갔습니다. 레이라는 아주 작고 사랑스럽더군요. 그런 아이가 얼굴이 발갛게 익어서 콧물까지 질질 흘려 가며 우는데 그 모습조차도 귀여웠습니다. 하지만 레나는 아니었지요. 우울증이 있었기에 아이의 울음도 힘겨워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레이라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내내 절망으로 물들어 있던 가휼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가휼은 한 손을 들어 가슴에 댔다.

“레이라는 정말 착한 아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 품에서는 울음도 그치지 않던 아이가 제가 안으면 뚝 그치더군요. 웃기도 잘 하고, 잠도 잘 자고, 그리고 조용해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제가 레이라를 보러 그녀의 방으로 가게 되는 일이 많았고 대화도 나누었지요. 레나는 엄마가 되기 위한 준비가 아무것도 되지 않은 상태였지요. 같이 공부를 하고 의견을 나누고 레이라를 어떤 식으로 키우고, 어떤 옷을 입히고, 어떻게 재우면 될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원래 그건 모두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이었지요. 하지만 그걸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딱딱하고 냉랭하기만 여겨졌던 레나가 흐트러진 머리 모양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수척해진 모습으로 레이라를 안고 어찌할 줄을 모르는 그 모습이 점점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시작이 되었지요.”

입을 다문 가휼은 눈동자를 움직였다. 마기휼의 손을 살폈다. 테이블에 올려진 마기휼의 손은 움켜쥔 채로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형님. 제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마기휼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입을 열었을 때, 칼칼한 목소리가 성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더 말을 해봐.”

“레나는 몰락한 귀족 가문의 외동딸이었지요. 부모님은 집안의 몰락에 큰 실의에 빠져 자살을 선택했고, 살아남은 레나는 어려서부터 친척들 집을 전전하게 되었지요. 자존심 강한 그녀가 남의 집을 다니면서 받았을 괄시가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요. 레나는 이를 악물고 결심했을 겁니다. 꼭 살아남아 보이겠다고. 그리고 행복해지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오게 된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을 하자면 그녀를 돌보던 친척이 귀찮아져서 아버지에게 떠넘긴 거라고 보면 되겠지요.”

“…….”

“그런 그녀가 아버지의 냉대를 견딜 수 있었을까요. 그런 그녀의 앞에 나타난 저의 존재가 어떻게 비쳐졌을 것 같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두 사람은 잦은 접촉을 하고 대화를 나누고, 의지를 하게 됩니다.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녀가 저를 원하고, 제가 그녀를 원하는 게 그리도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때 그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저와 레나는 둘 다 외로웠으니까요. 서로를 끌어안아 아주 조금밖에 얻을 수 없는 온기에 매달릴 정도로 약해진 상태였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잤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이라는 걸 알아도, 죄책감을 품고 있어도 행복하더군요. 첫 여자를 제 품에서 여자로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 그로 인해 제가 만족감을 얻는 것.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건 저뿐이라고 말입니다.”

가휼은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올렸다.

“그녀를 가져야 제가 행복해질 것 같았습니다.”

가휼은 마기휼을 바라봤다. 마기휼의 보랏빛 눈동자는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싸늘하게 식은 눈빛을 확인한 가휼은 더 절박한 얼굴이 되었다. 마치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공감을 해 달라는 듯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절박하게 서로를 갈구했습니다. 사람의 시선을 피해 늘 그녀를 안았습니다.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숨은 채로 서로의 손을 잡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일까.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을 말이야-, 라고.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들키게 되었지요. 창고에서 그녀를 안는 걸 아버지가 보셨습니다.”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제 됐다.”

“아니요. 더 들으십시오.”

마기휼이 막으려 들자 가휼은 더는 멈출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절박함은 다른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버지는 놀라고 충격을 받으시더군요.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냐며 저희를 비난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버지에게 욕을 퍼부었습니다.”

가휼의 손이 테이블 끝에 닿았다. 움켜쥔 손등으로 힘줄이 튀어 올랐다. 어금니를 악문 그는 악이 받힌 듯 빠르게 말을 토해 냈다.

“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던 거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태어난 레이라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안아준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방에 틀어박혀 어머니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수도 없이 사랑을 나누었고 레나의 남편은 아버지가 아닌 나라고 확실하게 말을 했지요. 우리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 당신이 충격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도 했습니다. 내가 내 여자를 안는 것이 아버지께 충격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변했습니다.”

처음에는 당당했지만 곧 자신감이 사라진다. 그 눈빛이 흐려졌다. 가휼은 테이블 위에 양손을 올렸다. 고개를 숙이나 싶더니 웅얼거렸다.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술을 마시더군요. 이후로는 집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고요. 바깥에서 만난 질 나쁜 놈들에게 홀려 도박에 손에 대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집안의 돈을 들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돈이고 보석이고 골동품이고 가리지 않았습니다. 돈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들고 나갔습니다. 단지 도박만을 위해 그리한 게 아닙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 저택을 우리에게 주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모두 바깥으로 빼돌려 우리가 빈털터리가 되기를 원하셨던 거겠지요. 어느 것 하나 주고 싶지 않으셨던 겁니다. 그래서 빚이 생기게 된 겁니다. 집안과 땅과 별장이 전부 넘어가고 십만 베리를 넘는 빚이 생겼지요.”

가휼은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졌다.

고개를 숙인 채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 얼굴을 확인해 보고는 싶으나 똑바로 보는 게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마기휼은 침묵했고 가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칙칙했다. 그는 마기휼에게 매달리듯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제가 사람이 아닌 겁니까. 역시나 제가 나쁜 겁니까.”

마기휼은 입을 꾸욱 다물었다. 뭔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가휼은 덜덜 떨면서 애원하듯 마기휼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기휼은 그런 가휼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박을 하시는 아버지를 막을 수 있었다. 그가 돈이고 보물이고 모든 걸 가지고 가려 했을 때 네가 그걸 막을 수 있었을 거야. 왜 막지 않았던 거냐.”

“그건 그저…….”

“땅 문서를 들고 가려 했을 때 그걸 빼앗으면 되었다. 그런데 왜 막지 않고 빚이 생기는 걸 보고만 있었던 거냐. 그리도 당당하게 아버지에게 대들었던 놈이, 왜 그걸 못 했던 거지?”

마기휼은 가휼을 노려봤다. 그 눈빛이 차가웠다. 마치 타인을 앞에 두고 있는 듯 바라보는 눈빛에 가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휼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으니까요.”

한숨과 동시에 말이 나왔다. 가휼은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더는 의자에 앉아 있을 기운도 없었다. 서서히 무너져 내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게 되었다. 바닥에 엎드린 가휼은 고개를 조아렸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는 그의 뒷모습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보였다.

가휼은 재차 한숨을 토해 냈다. 하아- 하고 흘러나오는 숨결이 떨고 있었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머리를 감싸고 있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떨림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가휼이 조금 몸을 일으키나 싶었을 때, 그의 손이 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온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가휼은 허리를 세웠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가휼은 양손으로 총을 잡아 마기휼 쪽으로 겨누었다.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마기휼은 똑바로 바라봤다.

피하지 않는 곧은 눈빛을 확인한 가휼은 이내 체념한 듯 웃었다.

“당신밖에 없습니다.”

가휼은 총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그리고 서서히 내려간 손이 바닥을 딛고, 재차 고개를 떨구었다.

모든 판결을 당신에게 맡기겠다.

지금 모습이 말하는 건 바로 그뿐이었다.

마기휼은 눈동자를 움직여 총을 확인했다. 구식 총. 저런 투박한 건 취향이 아니었다. 마기휼의 입술 꼬리가 올라갔다. 메마른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너를 죽이라고?”

“저를 죽일 수 있는 건 형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아버지께서도 마음이 편하실 겁니다.”

“아버지가 마음이 편해지신다고?”

마기휼은 웃었다. 아하하- 하고 메마른 웃음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금방 그 웃음을 지운 마기휼은 총을 든 채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총을 위로 들고 있는 힘껏 내리쳤다.

머리를 맞은 가휼이 옆으로 쓰러졌다. 한 대 더 치려다가 말았다. 총을 머리 위로 든 채로 마기휼은 전신에 힘을 줬다. 천천히 팔을 내렸다. 들고 있던 총을 집어 던지기가 무섭게 호통을 쳤다.

“아버지가 정말 그걸 원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 한심한 놈아!”

방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큰소리에 가휼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가휼이 마기휼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쳐내며 마기휼은 빠른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쓰러진 가휼은 피가 흐르는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싼 채로 마기휼을 붙잡으려 했다.

“형님. 가지 마십시오. 그냥 나가지 마십시오. 제발, 제발요!”

부르는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그리고 섞이는 울음이 발목을 잡는다.

마기휼은 외면하고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복도에 서자마자 비틀거렸다. 주저앉을 뻔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준 마기휼은 눈을 감고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심장이 아팠다. 머리도 아프고.

눈을 감은 마기휼은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말도 안 되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어떻게 하는 게 현명한 거지?

마기휼은 기운 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복도가 보였다. 그리고 발길을 옮겼다.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어떤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 나직한 그 소리는 연약하기 그지없었다. 자신보다 훨씬 더 나약한 그 울음을 쫓아 걸음을 서둘렀다.

“엄마―”

소리를 내 엄마를 찾던 여자아이가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걸 확인한 아이는 소리 내 울었다. 어깨를 떨면서 벽에 조금 더 몸을 붙였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하염없이 저택 안을 돌며 있을 리 없는 엄마의 존재를 찾는 게 아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우는 아이를 바라보던 마기휼은 손을 들어 벽을 두드렸다. 작은 소리에 레이라가 고개를 들었다.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있던 레이라는 벽에 기대고 서 있는 마기휼을 발견하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엄마.”

“……이리로 와.”

레이라는 가만히 있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는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한번 눈을 깜박일 때마다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마기휼은 무릎을 꿇고 앉아 양팔을 벌렸다. 괜찮다며 웃자 레이라가 천천히 다가와 마기휼의 목을 끌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 레이라를 안아 들고 일어섰다. 레이라의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아래가 축축했다. 마기휼은 레이라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수했어?”

“……히잉.”

부끄러운 모습을 들켰다 생각하는 건지 레이라는 당장 마기휼의 품으로 파고들어 갔다. 얼굴을 감추고 훌쩍거리는 모습에 마기휼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옷은 갈아입으면 되고, 잠이 안 오면 내가 노래를 불러주면 되니까. 뭐하면 옛날이야기라도 해줄까. 나도 얼마 전에 안 이야기란다. 1500년 전 하늘 위에 떠올라 있던 거대한 땅에 대해서 말해줄게.”

오늘은 자신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굉장히 긴 밤이 될 거다. 그 밤을 지나기 위해 동료가 하나 생긴 셈이었다. 잘되지 않았느냐며 마기휼은 레이라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니까 울지 마.”

이 넓고 넓은 저택 안에 울고 있는 아이가 둘 있었다. 하나는 이렇게 안아줄 수 있지만, 다른 하나는 안아줄 수 없었다. 이미 그 아이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본인이 저지른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을 거야. 어쩌면 이건 어설픈 원망일지도 몰랐다.

마기휼은 계속해서 훌쩍거리는 레이라를 달래며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걸어갔다.

아버지는 늘 자신의 걱정을 했다.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돌아가시던 순간 마지막까지 잡은 건 바로 이 손이었다. ‘내 아이, 마기휼.’ 그 이름만 불렀을 따름으로, 가휼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어머니를 응시했다.

마지막 순간 그 역시 어머니의 손길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뭔가를 말해주길 바랐을 테지. 하지만 어머니는 죽음의 마지막에서 장남을 더 생각했다. 제대로 사내의 몸으로 태어나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 말을 했었다.

마지막까지 장남을 걱정하던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를 잃고 난 후 내내 힘들어하시던 아버지. 그는 어머니를 지나치게 그리워해서 주변의 것을 제대로 둘러볼 여력이 없었을 거다. 그러는 동안 가휼은 재차 방치가 되었고 아버지 대신에 저택을 꾸려 나갔겠지. 지금처럼 말이다.

그리고 레나. 새어머니.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성격 나쁠 것 같은 여자. 그녀는 아버지의 냉담함에 지쳐 갔을 터였다. 그런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걸 아버지가 알게 되었고, 자괴감에 빠져 엉망이 되었던 거다.

아버지는 레이라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걸까. 가휼의 딸이라고 믿었던 걸까.

마기휼은 레이라를 내려다봤다.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은 아이는 눈가가 발갛다. 계속 훌쩍이다 잤기 때문이었다. 좋지 않은데. 잘 때마다 이렇게 울어버리면 마음 아프잖아. 마기휼은 레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을 움츠린 레이라가 조금 더 마기휼 쪽으로 달라붙었다. 그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방 안은 환해져 있었다. 안 되지. 이러다가 애가 또 일어나서 엄마를 찾으면 큰일이었다. 마기휼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커튼을 모두 쳤다. 그러고 나서 더 뭐 할 게 있나 싶었으나 딱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기운 없이 축 처진 상태로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마기휼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걷는 내내 칙칙한 상태였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생각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집사가 보였다. 이내 마기휼을 발견한 그는 반색하며 그 앞으로 달려왔다.

“도련님. 여기에 계셨습니까?”

“가휼은 어디에 있지?”

묻는 말에 집사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에, 마기휼이 재촉을 했다.

“왜 그래? 가휼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치료를 받고 지금 방에 계십니다. 아침에 되었는데도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고 조용히 계시기만 하는 게, 그러니까 그게…….”

과연 그런 건가. 이쪽과 술을 마신 가휼이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으로 나왔으니 저리도 불안해하는 거였다. 도대체 뭐 때문에 다툰 건가 싶겠지. 마기휼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치료를 받았어? 어디 다쳤나? 그 녀석 어제 너무 마시더라고. 그만 마시라고 말만 해주고 먼저 일어나서 나가버렸더니 결국 사고를 친 건가. 정말 어쩔 수가 없네.”

어깨를 으쓱이는 마기휼의 얼굴에서 그늘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닌 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제야 집사는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거였군요. 저는 또 두 분께서 크게 다투신 줄 알았습니다.”

“동생하고 싸울 일이 뭐가 있겠어. 아무것도 없어.”

“그렇지요. 사이가 좋은 두 분이 아니십니까. 싸울 일이 있을 턱이 없지요.”

거듭해서 말하는 걸 보아하니 살짝 의심하는 것도 같았다. 집시가 의심을 하든 말든 관심 없었다. 마기휼은 심드렁하니 뒷머리를 긁적였고 집사는 화제를 돌렸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씻기부터 하고. 레이라 달래느라 진이 다 빠졌어.”

그러고 보니 마기휼은 레이라의 방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주고 있었던가. 어쩌면 이렇게 상냥할 수 있는 건가 싶었던 집사의 얼굴이 감동으로 젖어들었다. 마기휼은 윙크를 하며 그를 지나쳐 갔지만 혼자가 되자 웃는 얼굴은 점점 무표정이 되어 갔다.

터덜거리며 방으로 들어가자 정리를 하고 있던 하녀가 보였다. 인사를 한 하녀들이 재차 방 정리를 시작하자 마기휼은 손짓을 했다.

“괜찮으니까 이만 나가. 그보다 욕조에 물이 받아져 있나?”

“혹시나 싶어서 방금 따뜻한 물로 가득 채워 놨습니다.”

“그래? 그러면 좀 씻을 테니까 다들 나가 있어줘.”

“달리 시중이 필요하시면 말씀을 하십시오.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괜찮으니까 다들 나가 있어.”

“물러나겠습니다.”

하녀들이 모두 나가고 난 후 마기휼은 옷을 벗었다.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한쪽 발을 넣었다. 미끄러지듯이 욕조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아, 늘어지네-.”

몰랐는데 이렇게 있으니까 완전 피곤했다. 레이라랑 너무 놀아줬던 걸까. 중간에 눈치보고 살짝 나오는 센스가 필요했는데 애가 너무 애절하게 쳐다보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가여운 것.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구나.

마기휼은 욕조 바깥으로 손을 뻗었다. 바닥을 더듬자 손가락 바깥으로 옷이 걸렸다. 그걸 집어 들고 품 안쪽을 뒤적이자 작은 주머니가 나왔다. 라우젝이 준 물건이었다.

그래. 이걸 먹으면 금방 끝난단 말이지. 나는 괜찮고 아이만 싹 사라진다는 거냐. 하여튼 눈치가 백단인 놈이다. 내가 라울의 아이를 가진 걸 또 어찌 알고 말이다.

가만히 주머니를 바라보던 마기휼은 그걸 열었다.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건 붉은 구슬 같은 약이었다. 그 약을 바라보는 마기휼의 눈동자는 어두운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낳자마자 빼앗기게 될 아이. 그 아이는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단지 피를 잇게 할 도구로만 사용되게 될 거다. 높은 신분을 지니게 되겠지만,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그들 마음대로 이리저리 흔들리게 될 존재. 그 아이는 그런 자신의 입장에서 행복을 느끼게 될까.

―느낄 리가 없잖아. 그런 취급을 받게 되는데.

마기휼은 주머니에서 붉은 약을 끄집어냈다. 그걸 눈앞으로 올리고 빤히 바라본다.

내 아이. 또는 라울의 아이.

남자의 몸으로 무사히 태어나게 할 수나 있을까.

그냥 낳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눈빛을 가라앉힌 마기휼은 천천히 입을 벌렸다.

벌린 입술 사이로 붉은 구슬이 점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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