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7화 (17/27)

RED ZONE 4

레드존

네르시온

Contents

#17

#18

#19

#20

#21

#22

#23

#17

“빌어먹을!”

소리를 침과 동시에 옆으로 돌이 우르르 쏟아졌다.

근처에 있던 사내는 놀라 마리아 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담! 이리로 오십시오! 그쪽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미 절반가량 매몰된 상태였다. 지금 같은 상태에서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만두는 게 좋다는 의미로 만류를 하자 마리아는 이를 갈았다.

“일단은 이곳을 피해야 한다.”

“모두 너 때문이잖아!”

기다렸다는 듯 노려보는 마리아의 행동에 아이작의 안색은 굳어졌다.

“그러게 라울이 나타나는 순간 처리를 해버렸으면 좋았잖아! 이게 대체 뭐야! 네가 우월감에 젖어 나대는 동안 모든 것들이 엉망이 되어버렸잖아!”

“……나댔다고?”

“그러면 아니야?!”

자아도취에 빠져 다 된 일을 망친 건 아이작이었다. 닥치고 바로 처리해버렸으면 좋았잖아. 그랬다면 적어도 라울의 목만은 수중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분하다는 듯 어금니를 악물고 노려보는 마리아와 그런 그녀를 마주 보는 아이작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쉽사리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였으나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사내는 안색을 굳힌 채로 마리아의 팔을 붙잡았다.

“일단은 피하십시오. 계속해서 공격하고 있습니다. 놈들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지금 이렇게 말을 하는 와중에도 머리 위에서는 커다란 무언가가 내리치는 둔탁한 느낌이 퍼졌다. 이대로 가다간 이 공간이 모두 내려앉아버릴 게 분명했다. 사내의 초조함이 전해졌던 것일까. 아이작이 먼저 발을 옮겼고 마리아도 내키지 않는 얼굴로 옆을 따랐다.

이동을 하는 동안 아이작이 물었다.

“누가 공격을 하는 거지?”

“다수의 군함이 포착되었습니다. 모두가 구형으로, 신형은 아니었습니다.”

“구형이었다고? 상대방의 전파 수신 중 읽어낸 것은 없나?”

“아직은 없습니다. 일단은 배에 올라타야 할 것 같습― 크윽?!”

갑작스런 바닥의 진동에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동시에 벽으로 금이 가나 싶더니 그 사이로 모래 같은 먼지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왔다. 놀란 사내는 당장 위를 올려다봤다.

떨어진 커다란 돌 파편이 사내의 머리를 호되게 강타했다. 쓰러진 자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걸 본 이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멍하니 있는 사이 다른 자들이 마리아의 뒤로 다가서 그녀의 등을 밀었다.

“이, 일단 뛰십시오!”

“이런 젠장!”

애써 여유를 가장하고 있었지만 더는 힘들었다.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내부의 흔들림은 더 커져만 갔다.

계속해서 폭탄이 투하되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치솟는 모래와 바위 사이로 간간히 철근 같은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확인한 라우젝은 그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중점적으로 탄을 떨어뜨려라.”

“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이가 회신을 통해 다른 군함을 타고 있는 이들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그러고 나서 망원경을 든 그는 아래 상황을 살폈다. 철근이 나오는 지점. 그 아래로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나 이 레드존 사막 아래에는 과거에 존재했던 유물이 남아 있는 것인가.

진지한 얼굴로 아래를 살펴보던 이는 망원경을 떨구곤 라우젝을 돌아봤다. 푹신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라우젝은 마치 지금 상황에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속지 않는다. 지안은 라우젝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와는 군 생활 동기였던 것이다.

예전부터 라우젝의 뛰어남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라우젝이 대령으로 활약하며 노르디아 왕실군을 지휘하는 3년간. 안베르 상공의 해적 수가 유례없을 정도로 극감했을 정도였다. 전도유망하고 여왕과도 좋은 분위기를 형성했던 그가 성장하지 않는 병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지나치게 강해서 모두가 선망하던 라우젝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모두가 그에 대해서 알고 있어도 말을 꺼내지 않고, 애써 부정하려 했다. 그러는 10년간 지안도 라우젝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종종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던 존재가 지금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예전 라우젝이 탔던 구형 군함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 10여 년 전과 전혀 다름이 없는 라우젝의 모습은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아닌가. 오히려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진 건가. 그때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은…….

멍하니 라우젝을 바라보던 지안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헛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그걸 확인한 라우젝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등 뒤로 식은땀이 나는 걸 느끼며 지안은 더 열심히 일하는 척을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손이 멈추었다. 지안은 라우젝을 돌아봤다.

“왜 그러지?”

“1분 25초 정도 폭격을 이어 가면 이 아래는 함몰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지점에 라울 대령이 있는 것으로 포착이 되고 있습니다.”

“그 녀석이라면 저 지하 미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다. 지금쯤 안전한 장소에 도달해 있을 테니 계속 떨어뜨려라. 원래 바퀴발레 박멸하는 데에는 무식한 방법이 제일이다.”

눈을 내리뜬 라우젝은 한쪽 입술 꼬리를 올렸다. 희미한 미소를 짓는 얼굴이 스산했다. 오한이 도는 걸 느끼며 지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안은 고개를 돌렸다. 예전과 하나도 다름이 없었다. 한번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뒤로 물리는 게 없었다. 일단은 밀어붙인다. 그게 바로 라우젝의 방식이었다.

그래도 동생인데, 라울인데 이리해도 괜찮은 걸까? 나중에 모든 잘못을 이쪽이 뒤집어쓰는 건 아닌가 싶어 심히 걱정스러웠다. 때에 맞춰 통신병이 라우젝을 돌아봤다.

“라우젝 님. 적에게서 통신이 잡히고 있습니다. 받을까요?”

“아니. 받지 않는다. 공격을 계속해라.”

“정말 괜찮을까요? 혹여라도 라울 대령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고작 이런 일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놈은 내 자리를 채울 만한 그릇이 못 되는 거다.”

냉랭한 목소리에 중앙실 안에 있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에 아랑곳않고 라우젝은 차분하게 말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기어올라야 앞으로 닥칠 일도 현명하게 잘 처리할 거라 믿는다.”

나름 생각해주는 척 말은 했지만, 왠지 모를 살벌함이 풍겼다. 지금이라도 정예병을 보내서 라울 대령을 수색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권하고 싶지만 통하지 않을 듯싶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라우젝의 말을 성실하게 따르는 것뿐이었다. 의아함이 들어도 그걸 내색할 순 없다며 지안은 재차 망원경을 들었다.

멀리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폭탄이 많기도 하구나.

폭탄이 떨어지는 지점에 있을 때에는 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는데 어느 정도 안전한 장소에 도착을 했다 생각하니 여유로워졌다. 그러다가도 마기휼은 이내 옆에 있는 라울을 바라봤다. 라울은 옆구리에 한 손을 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은 당장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 치워봐. 상처를 확인해 보자.”

라울은 감은 눈을 떠 마기휼을 바라봤다.

“아직은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써줄 때 순순히 받아들여. 꼭 이럴 때마다 자기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놈들이 제일 열 받는다니까. 손 치워.”

날이 선 목소리에 마냥 거부를 할 수 없었다. 라울은 순순히 허리를 누르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천 위로 피가 흠뻑 묻어났다. 그걸 풀어내며 마기휼은 중얼거렸다.

“왜 피가 멈추지 않는 거지.”

“계속 움직였으니까.”

“그러면 지금부터 움직이지 마. 여기는 나름 안전한 것 같으니까.”

처음 라울이 앞장서 갈 때에는 불안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어찌어찌 이런 공간도 찾아냈다. 아이작과 함께 탔던 것과 비슷한 원리였지만 여기는 벽과 천장이 다 있었다. 움직이는 작은 방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게 어디로 가느냐는 것이었지만, 당장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게 어딘가 싶었다.

“라울. 이 악물어.”

피에 젖은 걸 치워 내고 안에 입은 셔츠를 벗었다. 겉에 대충 재킷을 걸친 상태로 셔츠를 좍좍 찢었다. 하나로 연결을 해서는 그걸 라울의 허리에 둘렀다. 상처 위로 천을 누르고 라울을 흘깃 봤다. 꽈악- 졸라맸다.

“아프면 말해.”

“……이 악물라고 해 놓고 앞뒤가 안 맞잖아.”

“원래 돌팔이들이 그러잖아.”

애써 우스갯소리를 해봐도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기휼은 라울의 상처를 묶은 천 위에 손을 댔다.

“아파?”

“참을 만은 하다.”

대답을 한 라울은 벽에 머리를 기대곤 어금니를 악물었다.

물론 참을 수는 있겠지. 그렇다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지금 필사적으로 통증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그런 라울의 상태를 알 것 같았기 때문에 마기휼의 손놀림은 더더욱 급해졌다. 천을 눌러 피가 스며 나오자 그 위로 한 번 더 둘렀다. 하지만 제대로 된 붕대가 아니다 보니 역시 무리였다.

마기휼은 혀를 찼다.

“달리 묶을 건 없나.”

“대충 해도 되니까 신경 쓰지 마.”

“신경을 안 쓸 수가 있냐고!”

소리를 치고 나서 아뿔싸 싶었다. 괜히 이럴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안절부절하는 모습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마기휼은 고개를 수그렸다.

“……지금 좀 짜증 난 상태니까 괜히 건드리지 마.”

눈을 내리뜬 마기휼의 안색은 경직된 채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라울의 눈빛은 잔잔했다. 가만히 있나 싶던 라울의 손가락이 위로 살짝 올라갔다. 동시에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흔들리자 마기휼은 놀랐다.

“왜, 왜 멈추는 거야?”

혹시 바깥에서 일부러 멈춘 건가. 문이 열리면 이상한 놈들이 서 있는 건가 싶었던 마기휼은 급히 그쪽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라울은 마기휼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다 도착한 거다. 괜히 긴장할 필요 없어.”

라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까보다 훨씬 더 무거워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마기휼은 당장 라울의 팔을 잡아 부축해줬다. 마기휼의 도움을 받아 앞으로 나아간 라울은 벽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스카가 눌렀던 방식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눌렀다. 그리고 정면의 문이 열리자 마기휼은 중얼거렸다.

“사람 긴장되게 하네.”

좁고 캄캄한 장소였다. 여기가 어딘가 싶어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던 마기휼은 라울이 비틀거리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울의 몸을 끌어안으며 “괜찮아?”라고 묻자 대꾸가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서 치료를 받게 해야만 했다. 라울이니까 이렇게 참는 거지 다른 놈들이라면 어림도 없었다. 온갖 엄살을 부려 댈 것이 분명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쪽이 제대로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라울을 바라보던 마기휼은 뺨을 스치는 차가운 감촉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을 떠다니는 빛이 나는 작은 물체를 발견하고는 눈을 깜박였다.

“어? 이건 또 뭐야.”

중얼거리며 눈동자를 위로 들었다.

좁은 길은 사라져 있고 나타난 것은 넓은 공간이었다. 어두운 건 여전했지만 공간 가운데에 떡하니 있는 지름 3미터 정도의 나무는 확실하게 보였다. 그 나무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이런 지하에 나무라니.

더군다나 저렇게 빛을 내는 것이라니. 기괴스럽기까지 했다.

“왜 나무가 있지?”

“이미 말라비틀어져 죽은 나무다.”

말라비틀어진 것은 맞지만 빛이 흘러나오고 있다니까? 늙은이들이 저런 걸 봤다면 성스러운 것이라며 당장 절부터 하려 들었을 거다. 물론 마기휼에게 있어선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쩍은 물건밖에 안 되었지만 말이다.

마기휼은 주춤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나무 앞에 놓인 뭔가가 보였다. 검은 판 같은 것이었다. 네모난 것이 길게 세워져 있었다.

“이건 뭐야?”

“비석이지.”

“비석이라고? 그럼 여기가 무덤이야?”

남의 무덤에 멋대로 들어와 천벌을 받는 건 아닌가 싶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 마기휼은 숨을 죽인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라울은 마기휼을 지나쳐 비석 앞에 섰다.

“아주 오래전 아직 이 땅이 하늘 위에 존재하고 있을 때, 그것을 다스리던 자들의 무덤이다.”

아이작도 여신에 대해 말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그 느낌이 확연할 정도로 달랐다. 그때에는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하면 지금은 믿어진다. 마기휼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여신이 정말 있었다는 거야?”

“상징적인 의미지. 세계를 통제하고 강한 힘을 소유했던 존재를 여신이라 칭했던 것뿐이야.”

세계를 통제한단 말인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옛날에는 그런 게 가능했던 걸까. 하긴 이런 공간이 하늘 위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지 않은가. 완전 다른 세상이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런데 왜 그게 유지되지 않은 것일까. 왜 추락해버려야만 했던 거지? 알 수 없었다.

“왜 이 거대한 땅이 추락해버린 거지?”

“새로운 주인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지.”

새로운 주인을 원치 않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마기휼이었으나 라울의 시선은 정면에 있는 나무에 고정되어 있었다.

“여신을 연모하던 자가 다른 존재가 나타나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금 존재하는 여신이 영원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영원토록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일부러 땅을 떨어뜨린 거다. 마지막 순간, 그 둘은 분명 함께였겠지.”

사랑하는 여신이 영원을 살 수 있도록.

해석하기에 따라 굉장히 로맨틱했다. 하지만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았다. 세계를 통제했다면서 이 땅이 추락하면서 생기는 혼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건가. 무책임했다. 이쪽도 무책임하긴 하지만, 그쪽은 더했다.

자연스럽게 마기휼의 표정은 진지하게 변했다.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은 어쩌라고 그런 선택을 한 거래?”

“내가 정말 사랑한다면. 그래서 그와 함께 있고 싶다면. 그 존재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 거고, 그가 영원을 살기를 바라겠지. 삶이 아니라 해도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영원토록 이어져 있고 싶을 거야. 그런 식으로 소유함으로 인해, 둘은 하나가 되는 거다.”

라울은 입을 다물고 나무를 바라봤다. 그 표정이 진지했다. 하지만 마기휼은 라울의 저 표정을 이해할 수 없고 그가 하는 말도 이상하다 여겨졌다. 죽음으로 하나가 된다라. 그런 건 싫었다.

죽는 건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거였다. 죽어도 서로를 느끼지 못할 텐데. 그냥 살아서 끝까지 함께 있는 편이 훨씬 좋았다.

“이상한 말이야.”

중얼거리는 말에 라울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느낀 마기휼은 고개를 숙였다. 괜히 딴청을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라울은 물었다.

“마기휼.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순간 목구멍 바깥으로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라울이 하는 질문치고는 굉장히 이상했다. 정말 방금 그 말을 라울이 한 건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쳐다보자 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반드시 듣고야 말겠다는 얼굴이었다.

마기휼은 주춤거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이,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어쩌면 여기서 죽을 수 있다.”

“죽는다고?”

놀란 마기휼은 숨을 삼켰다.

눈을 댕그랗게 뜬 채로 있는 마기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라울은 재차 말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나는 네가 내 아이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네가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물론 전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야.”

“…….”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지금 상태를 굳이 말로 설명을 하자면, 누군가 머리를 잡고 물속으로 처박는 것 같았다. 아니면 망치로 머리통을 내려치거나. 그도 아니면 한 2분 동안 숨을 못 쉬어서 뇌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태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이 들릴 리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 라울의 말. 그리고 그의 눈빛. 너무도 진지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숨이 막혔다.

“사람을, 인간이라는 존재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건 이게 처음이다.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런 거 내 알 게 뭐야. 그러면서도 왜 저놈은 저런 얼굴인가 싶었다. 저렇게 밋밋하고 뻣뻣한 얼굴이라니. 조금 더 무드 있게 굴 순 없는 건가. 아무리 달콤한 말이라 해도 저런 밍밍한 얼굴이라면, 감동이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헛소리를 늘어놓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라울은 지금 부상을 입고 있었다. 거기다 이런 이상한 곳에 와 있었다.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다 보니 머리가 이상해진 걸지도 몰랐다. 이상해진 라울의 장단에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그가 이상하게 행동을 취한다면 이쪽이 이성적으로 움직이면 되었다. 그래. 그러면 되지.

마기휼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라울. 너 지금 상태 이상해. 정신 차려. 그리 말을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소리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계속 내 이상한 몸이 싫었어. 그래서 늘 움츠러들고, 자신이 없고, 앞으로 나서길 꺼려했지. 그런 내가…….”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얼굴로 열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지금 굉장히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너랑 했고, 아이를 가지게 된 것에 대해서 그리 싫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야.”

그래.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 29여 년간의 인생에서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의 몸에 대해 알게 되고 나서 분명히 움츠러들어 있었다. 이런 몸이라도 절대로 아이는 갖지 않아. 그리 굳건히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런 상황이다. 지금 이 배 속에는 아이가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라울의 아이가.

지금까지 내내 부정하고 피하려 했던 문제였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기휼은 재차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니까. 그보다 이런 분위기 싫어. 이상한 소리를 해버릴 것 같아. 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분위기 완전 망쳐버릴 것 같아. 이럴 때에는 입 다물고 있는 게 나았다. 그래야 겨우 이렇게까지 된 분위기를 망치지 않게 될 거라며 마기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라울은 그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부드러운 감촉. 사실은 꺼끌했다. 흙이 묻어 있어서 이상한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묘하게 부드럽고 달콤해 저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입을 반쯤 벌린 채로 바라보는 마기휼은 참으로 멍청한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마기휼이 보여준 얼굴들 중에서 가장 이상한 것 같았다. 동시에 마음에 들었다.

눈빛이 부드럽게 변한 라울은 나직이 속삭였다.

“한 번 더 해도 되나?”

한 번 더 해도 되느냐니. 뭐를?

재차 라울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리고 입술에 닿는 순간 마기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라울의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 그의 호흡이 느껴졌다. 시선이 느껴졌다.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안아 오며 조금 더 진하게 입을 맞추는 걸 피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기분 좋았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라울에게 적극적으로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시금 그를 품었을지도 모르지. 믿을 수 없겠지만 정말 그리했을지도 모른다.

힘든 상황 속에서 알게 모르게 자신을 지지해주던, 아닌 척하면서도 위로를 해주고 달래주던 그였다.

가고 싶다고 해서 요새에 데리고 가는 게 어디에 있어. 소속도 다른 자신을 암시장까지 데리고 가는 건 말도 안 되었다. 그런데도 라울은 데리고 다녔다. 걱정이 되기 때문이겠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면 그리할 수 없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라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을.

그리고 자신의 안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도 말이다.

인정을 하고 분명히 해야 했다.

마기휼은 눈을 떴다. 라울은 떨어진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분한 그 눈길을 받아들이며 마기휼은 마른 침을 삼켰다.

“라울,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얼굴이 붉어진다.

마기휼은 열심히 마음을 전하려 노력했다.

“라울, 나는 그러니까 너를―”

앞으로 한 발이었다. 이것만 넘으면 편해지는 일만 남았다. 마기휼은 라울을 똑바로 바라봤다.

“라울. 난 네가 좋아!”

이대로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렇게 놀고 있다가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도 그 누구도 원망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기휼은 더 씩씩하게 외쳤다.

“정말 좋다!”

입을 다물고 라울을 쳐다봤다.

라울은 가만히 있었다.

“…….”

……사람 무안하게 왜 저렇게 무표정인지 모르겠다.

내가 너 좋다고 하는 거잖아. 그러면 너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용기를 냈으니 너도 그만한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사랑스럽다며. 그러면 날 사랑한다고 말해. 난 네 아이도 있어. 흔히들 신혼부부가 임신한 새댁을 공주님 안기로 들고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까지는 바라진 않아도, 비슷한 짓은 해야 하지 않겠어?

마기휼은 벌겋게 익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일자로 다문 채로 라울을 노려보는 그 얼굴은 진지했다. 그리고 그런 마기휼을 앞에 둔 라울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아닌가? 좀 창백한가?

마기휼은 급히 라울의 손목을 붙잡았다.

“라울?”

이름을 부르기가 무섭게 라울이 눈을 감았다.

그가 비틀거린다 싶었을 때 마기휼 쪽으로 쓰러졌다.

“우왓!”

놀라서 앞으로 양팔을 벌린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라울을 끌어안은 채로 뒤로 넘어가는 건 이쪽이 예상한 부분이 아니었다.

주저앉은 마기휼은 위에 쓰러진 라울을 내려다봤다. 축 처진 라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팔을 들어 그의 등을 감쌌다. 강하게 끌어안으며 그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라울?”

이름을 부르자 반응이 없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지금 라울은 의식이 날아간 거였다. 마기휼은 라울의 왼쪽 옆구리에 손을 댔다. 만지자마자 축축한 것이 가득 묻어났다.

손을 들자 손바닥 전부가 피 범벅이었다.

“……….”

피가 멈추지 않는다. 이 상태라면 앞으로 1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깊이 숨을 들이킨 마기휼은 무릎을 세웠다. 바닥에 한 손을 딛고 몸을 일으켰다. 뒤로 넘어가려는 라울의 멱살을 잡았다. 먼저 일어선 마기휼은 라울의 팔을 잡아 그가 쓰러지지 않도록 한 후 몸을 돌렸다. 그리고 라울의 몸을 등에 걸쳤다.

묵직했다. 하지만 못 업을 정도는 아니었다. 축 처진 라울을 업은 채로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라울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거지? 어디로 가야만 하는 거지? 일단 바깥으로 나가면 된다. 나가면 군함이 있을 테고 라울을 거기에 태우면 상황 종료였다.

“그래. 그러면 될 거야.”

군함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놈들이 이쪽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라울을 치료해줄 거다. 라울이 죽으면 곤란한 건, 이쪽보다 노르디아 놈들이 아니던가.

정신 차리자. 지금 이 상황에서 정신 똑바로 차릴 사람은 바로 너 마기휼이야. 라울만큼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아버지처럼은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마기휼은 당장 나무를 지나 그 뒤로 걸어갔다.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닿지 않은 곳은 어두웠다. 바로 앞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으면서도 마기휼은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였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마냥 움직일 뿐이었다. 그렇게 걸어가는 마기휼에게 업힌 라울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점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마기휼의 얼굴은 진지했다. 열심히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쿵쿵거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아주 반대편까지 뚫어버려라.”

무식한 라우젝놈. 그놈 성질을 볼 때에 지하의 모든 것을 파괴해야 성이 찰 거라며 마기휼은 혀를 찼다. 그러면서 흘러내리려는 라울을 추슬렀다.

“라울. 넌 절대로 여기서 죽으면 안 돼.”

나오는 목소리가 딱딱했다.

“절대로 죽으면 안 돼. 여기서 죽으면 그야말로 개죽음이야.”

천하의 라울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장소에서 죽게 된다면 모두의 비웃음을 사게 될 거다. 너는 조금 더 화려한 인생을 살아야 해. 보다 더 큰일을 해야 한다고.

그리고― 넌 이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책임져야 해.

마기휼은 이를 갈았다.

“절대로 나 혼자서 안 키워.”

아이를 가지는 건 좋았다. 낳는 건 어디로 해야 하는 거야. 라울놈의 물건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어 죽을 뻔했는데, 거기로 아이가 나오는 걸까? 완전히 다 찢어져서 너덜거리는 거 아니야? 나중에 생리 현상은 어떻게 처리해야만 하지?

아이를 낳는 입장이 아닌 사람은 임신에 대해서 그저 막연한 생각만을 할 따름이겠지만 마기휼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미 모든 게 현실이었다.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이었다. 그러니까 작은 하나라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대충 건성으로 넘기는 건 용납할 수 없어. 그러기 위해선 나도 그렇지만 라울 너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일단 돌아가게 되면 라울놈 교육부터 시킬 거다. 이런 위험한 장소에 올 때에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이다.

어떻게 너 혼자 올 생각을 한 거냐. 암만 내가 인질로 있다 해도 말이지.

“……….”

내가 있기 때문에 온 거냐.

정말 그런 거냐. 라울?

이를 악물고 다리를 더 열심히 움직이던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둠의 저편에서 번쩍이는 두 개의 뭔가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얼빠진 소리를 내며 마기휼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반짝이는 것이 갑자기 마기휼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상 이변이 일어납니다.”

가만히 있던 라우젝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움직임이 너무도 느려서 기다리는 동안 지안은 애가 탔다. 그리고 라우젝과 겨우 눈이 마주치게 되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바람의 세기가 강해졌습니다.”

“바람의 세기가 강해졌다라―”

중얼거린 라우젝은 이 보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싶었다. 하지만 레드존 내에서 기상변화는 중요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군함에 직접적인 타격이 올 정도는 아니나 폭탄이 떨어지는 각도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폭격을 중지한다.”

라우젝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공격이 중지되었다. 그래 봤자 상당량을 퍼부었기 때문에 아래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연기와 먼지가 뒤섞여 아래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라우젝은 혀를 찼다.

“아래가 잘 보이지 않는군.”

“이 정도라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런 곳에 라울이 있었다. 만약 정말 죽은 거라면 어째야 하는 걸까. 원래 자신들이 이리로 온 목적은 라울을 구출하기 위함이었는데 말이다. 얼굴이 굳어지는 지안과 달리 라우젝은 느긋했다. 그렇게 가만히 있던 라우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통신병의 옆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다가오는 라우젝에 놀란 통신병은 온몸에 힘을 주었다.

“외부 통신을 연결해라.”

적들이 보내는 통신도 모두 무시하더니만 왜 갑자기 외부 통신을 연결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의아한 얼굴을 하던 것도 잠시, 통신병은 순순히 손을 움직였다.

모든 연결이 끝나고 라우젝을 바라봤다.

“연결했습니다.”

“외부 방송을 시작하겠다. 내 목소리가 크게 잘 들리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적들에게 경고할 셈일까. 하지만 벌써 저렇게나 해버렸다. 경고를 한다 해도 들을 사람이 있을까.

“되었습니다.

통신병은 통신기기를 내밀었다. 하지만 라우젝은 그걸 받아들지 않았다. 눈짓으로 이쪽 키에 맞춰 잡으라는 압력을 행사하는 것에 통신병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불만이 있어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라우젝. 라울의 형님이자 한때 왕실군의 대령이지 않았던가.

통신병은 공손히 통신기기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라우젝이 입을 열었다.

“아이작. 내 목소리가 들리나.”

‘아이작이 누구지?’ 그런 생각을 하며 통신병은 라우젝을 바라봤다. 그러는 동안 라우젝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

“분명 지하 어딘가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겠지.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이왕이면 죽어주는 편이 손이 덜 가서 좋긴 하겠지만, 아직 살아 있는 거라면 지금부터 경주를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나?”

경주라니. 지안을 비롯해 곁에 있던 모든 군인들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우젝은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시간은 딱 10분이다. 그동안 최대한 멀리 달아나라. 그 시간 안에 내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너는 산다. 하지만 붙잡히면 죽어.”

라우젝의 얼굴 위로 미소가 걸렸다.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적을 구석에 몰아넣고 하나하나 제압을 하는 감각은 사냥과 똑같았다. 아주 오래전에 즐겼던 그 감각이 되돌아오는 걸 느끼며 라우젝의 목소리 안쪽으로 희열이 감돌았다.

라우젝의 목소리는 크게 울려 퍼져 레드존 위의 사막과 그 지하에도 전달이 되었다. 일시적인 폭격 중단 상태에 맞물려 라우젝의 목소리는 아이작 일행에게도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나름의 배려를 해주는 거야. 너희 같은 것들과는 타협할 필요가 없어. 학살만이 너희의 어리석음을 단죄하는 처벌의 척도가 될 테니 말이야. 하지만 시대가 변했지. 요즘은 널널하게 제압을 하는 게 유행인 모양이야. 시대를 따르지 않을 수 없지. 그래서 이런 관대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다. 지금부터 10분이다. 열심히 도망쳐보도록.]

손에 들린 통신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사내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마리아는 이를 갈았다.

“건방진 놈!”

“마리아. 참아라.”

참으라는 말을 하는 아이작을 노려보는 마리아의 눈초리는 날카로웠다. 반발심으로 똘똘 뭉친 그 눈빛에도 아이작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몸을 돌렸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에 마리아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아이작. 어디를 가려는 거야?”

“일단은 피해야 한다.”

“어디로 피한다는 거지?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어.”

날이 선 목소리에 아이작은 걸음을 멈췄다.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사내들만이 불편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몸을 숨기고 주변이 잠잠해진 것을 기다리고 난 후에는 뭐? 다시 이 짓을 시작하는 거야? 오랜 시간을 투자해 하나만을 목표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가 한 방 터트리기만을 기대하는 거? 난 이제는 싫어.”

마리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다 해도 은연중 드러나는 분노는 감출 수 없었다.

“나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이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손을 들어 선글라스를 위로 올렸다. 눈빛을 감추며 중얼거렸다.

“참을 수 없으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야.”

“나에게는 그게 더 어울려. 등을 보이고 도망가는 건 나 마리아답지 않아.”

마리아는 옆에 선 사내가 들고 있던 총을 빼앗아 들었다. 탄피를 확인하고 그걸 어깨에 메고는 소형총을 허리춤에 꽂아 넣는다. 당장 튀어나갈 준비를 하는 모습에 아이작은 혀를 찼다.

“성질 좀 죽여. 그렇게 나대지 않아도 네가 사내라는 건 모두가 알아.”

마리아는 웃었다. 하- 하고 소리를 내 웃던 것도 잠시, 그녀는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난 사내지. 분명한 사내야. 그래서 더는 못 참겠어.”

앞으로 넘어온 금빛 머리카락 너머로 파란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이 났다.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그의 모습에 근처에 있던 이들이 당황해 아이작을 쳐다봤다.

“붙잡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가 우리와 함께 하는 건 여기까지다.”

이후로는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할 거다. 멀어지는 마리아를 바라보던 아이작은 몸을 돌렸다. 그 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아이작의 등 뒤에서 “희망이 없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들렸음에도 아이작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무표정을 한 채로 눈을 내리뜬다.

희망이 없다라.

중얼거린 아이작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미로. 딱 그거였다. 이제는 여기가 하늘의 땅이니 뭐니 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어떻게 이런 곳이 존재하는 걸까. 사람 열 받게 하지 말고 길은 하나로 통일하면 좋잖아. 도대체 몇 번이나 굽이굽이 꺾어지는 길을 지난 건지 모르겠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던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앞장서서 부지런히 걸어가는 덩치 좋은 사내가 보였다.

“야. 너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묻자마자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이 미터가 훌쩍 넘는 키. 우락부락한 것 같지만 한없이 순한 눈망울을 지닌 자는 바로 톰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달려들 때에는 엄청 놀랐는데 다짜고짜 ‘배가 있는 데를 알아. 날 따라와.’라고 말을 할 때에는 긴가민가했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소리를 치면서 당장 꺼지라고도 했지만 이내 냉정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헤매는 것보다야 이곳 지리를 대충이나마 아는 톰을 따라가는 편이 훨씬 더 낫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놈이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아마도 간간이 자신의 배를 보면서 걱정이 돼 죽겠다는 얼굴을 하는 것 때문이겠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점점 의심스러워졌다.

어쩌면 함정일지도 몰라. 마리아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려는 거 아니야?

마기휼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하자 톰은 안쪽을 가리켰다.

“이리로 가야 한다.”

“정말로 가면 배가 있는 거지?”

“그렇다.”

벌써 15분 정도였다. 더는 시간을 늦출 수 없었다. 라울은 무겁고 그는 계속해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마기휼은 톰을 흘겨봤다.

“왜 도와주는 거야.”

“아이가 불쌍해.”

또 저 말인가. 왜 불쌍하다는 거야.

속으로 중얼거린 마기휼은 강하게 반박했다.

“불쌍하게는 안 만들 거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였다. 그런데 초반부터 재수 없게 왜 자꾸만 불쌍하다는 거야? 남자가 낳아서 그러냐? 걱정 말이라. 내가 백수인 것도 아니고, 집안에 빚이 좀 있긴 하지만 못 갚을 정도는 아니란 말이야.

힘들어서 속으로만 투덜거리게 된다. 물론 험악한 표정으로 속내가 모두 드러나 버리지만 말이다.

톰은 발을 멈추고 터널이 끝나는 바깥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다.”

마기휼은 황급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넓은 공터를 발견하고는 숨을 들이켰다. 꽤나 넓은 공간. 그곳에 소형 배 두 척이 놓여 있었다. 단조롭게 생긴 검은색의 배. 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모양새가 상당히 생소했다.

마기휼은 그중 한 척으로 걸어갔다. 최대 수용인원은 5명이나 될까? 몇 명 못 탈 것 같은 배의 겉면을 살피던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이건 몇 년 전 거야?”

“천 년은 넘었을 거야.”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지만 이런 곳에 있는 게 이상해서 물었더니 역시나 인가. 천 년인가. 요즘 만든 배도 1년에 한 번씩은 꼭 정비를 해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천 년이라니.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확실한 게 좋았던 마기휼의 표정은 자연스럽게 구겨졌다.

“타자마자 폭발하는 거 아니야?”

“여기에 있는 걸 분해해서 우리가 타고 다니는 걸 만든다. 튼튼하고 재질이 좋아.”

“암만 튼튼해도 천 년 동안 있으면 멀쩡할 것 같아? 어림도 없어.”

중얼거린 마기휼은 라울을 업은 팔에 힘을 주며 발끝을 세웠다.

창 너머로 보이는 안쪽을 살피자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았다. 안도 겉도 멀쩡한 듯싶지만 속은 어떨까. 천 년 정도 보관이 된 배가 이렇게나 멀쩡한 상태다. 괜찮을 것 같지만 어쩔까.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어 불안했다. 안색을 굳힌 채로 있던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높은 천장. 자세히 보자 가운데가 갈라져 있었다. 개폐가 되는 구조였다.

천장을 올려다본 채로 중얼거렸다.

“이 공간은 뭐지?”

“나갈 수 있을 때 나가는 편이 좋아.”

옆에 선 톰은 초조한 얼굴이었다. 자꾸만 바깥을 쳐다보는 것이 누군가 들어오면 어쩌나 싶은 얼굴이었다. 그로서도 지금 이 행동은 위험한 것일 거다. 그런데도 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정말 왜 도와주는 거야.”

물음에 톰은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가만히 있나 싶던 사내는 허리를 수그려 마기휼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댔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는 게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왜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거야.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숨을 죽인 채로 있으려니 톰이 중얼거렸다.

“엄마 같아.”

이건 또 뭔 소리야.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살짝 일그러지는 마기휼의 얼굴과는 상관없이 톰은 재차 중얼거렸다.

“나를 버린 우리 엄마 같아.”

“…….”

입을 다물고 이쪽을 바라보는 그 얼굴이 진지했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촉촉해진다. 그 얼굴을 보자 속이 불편해진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 임산부나 붙잡고 그런 말 하지 마. 기절한다.”

마기휼의 말에 톰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옆으로 움직여 배의 옆구리에 손을 댔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안이 드러났다.

“어서 타. 여기는 위험하니까.”

내부는 그럭저럭 쓸 만한 듯싶었다. 그걸 확인하고 조금 더 안심한 마기휼은 톰을 올려다봤다.

“고맙다. 나중에 무슨 일 안 생겼으면 좋겠다.”

마리아는 성격이 세니까 나중에라도 이 일을 알게 되었을 때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톰을 잡으려 들겠지. 그래도 일단은 여기서 나가야 했다. 라울의 안전을 살피는 게 최우선이었다.

마기휼은 몸을 돌려 라울을 밀어 넣었다.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라울의 머리 쪽으로 이동했다. 그의 겨드랑이를 붙잡고 안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주변을 살폈다.

라울이 똑바로 눕자 벽면을 쓰다듬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소형 배와 비슷한 부분에 안전대가 걸려 있었다. 그걸 당겨 라울의 몸통을 고정했다. 상처 부위가 눌리지 않도록 주의한 후 사방을 둘러봤다. 고물은 고물이었다.

“제길. 다 구형이야.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중얼거린 마기휼은 조종칸 앞으로 넘어가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배치가 이상해서 다른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그렇군. 지금 있는 배들도 결국에는 예전 모델을 따라가기 마련이었다. 기본은 다 똑같은 형태라는 거겠지.

마기휼은 조종칸을 한번 훑어봤다. 순식간에 모든 걸 다 외워버린 그는 밖으로 나왔다. 누운 라울의 다리를 잡아 안쪽으로 잘 둔 후, 열린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톰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봐. 나 간다.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

마기휼의 말에 톰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기뻐하고 있었다. 부모에게 칭찬을 받은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그걸 보자니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덩치만 산만 하지 정말은 어린애가 아닐까. 정신적으로는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게 아닐까. 저런 놈들은 분명 이용만 당할 거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지 못하고 그냥 하라는 대로 따르는 거다. 마리아와 아이작의 명령만을 듣고선 말이다.

“같이 갈래?”

저도 모르게 한 말에 톰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사라진다.

마기휼은 재차 권했다.

“같이 가자. 넌 여기랑 안 어울려.”

톰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망설이고 있었다. 마기휼은 앞으로 팔을 뻗었고, 순간 싸하게 올라오는 느낌에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조금 전까지 서 있던 곳으로 총알이 박혔다. 한 발이 아니라 두어 발 더 날아왔다. 욕설을 한 마기휼은 안쪽으로 들어가 누워 있는 라울의 어깨를 손으로 잡고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품 안쪽에 넣어 두었던 총을 꺼내고 열린 문 쪽으로 붙었다.

언뜻 보이는 시야로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가느다란 체형도 볼 수 있었던 마기휼은 외쳤다.

“마리아!”

“안녕! 자기!”

이름을 부르자 마리아도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반갑다는 건 아니었다.

발이 빠른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럴 때에는 그냥 보내주면 안 되는 거냐.

문을 닫고 조종칸으로 넘어가는 동안 그녀도 과연 가만히 있어줄까. 그러기는 좀 힘들 것 같은데. 마기휼은 인상을 쓰며 내뱉듯 말했다.

“이제는 그 예쁜 얼굴도 좀 지겨워지는데, 어떻게 생각해?”

“상관없어. 앞으로 더 볼 일도 없을 테니까.”

마리아는 앞으로 팔을 주욱 뻗었다. 상처 입은 오른쪽 어깨가 욱신거렸지만, 집중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마리아의 눈이 가늘게 떠질 즈음 커다란 덩치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시야가 막히자 혀를 차며 총구를 치워 냈다. 고개를 들자 울먹거리는 얼굴의 톰이 보였다.

“그, 그러지 마. 우리 엄마야.”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톰을 확인한 마리아의 표정이 더 험악하게 변했다. 톰은 그녀를 설득이라도 하려는 듯 앞으로 한 발 내밀었다.

“우리 엄마야. 배 속에 아이가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너희 엄마가 어디에 있어.”

“…….”

냉랭한 목소리에 톰이 굳어버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그리 묻고 싶은 듯 바라보는 눈빛에도 마리아의 냉정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보다 50센티 가까이 큰 키의 톰을 노려봤다.

“너희 엄마는 없어. 널 버린 게 바로 너의 엄마지. 버림받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널 지금까지 데리고 다녔던 게 바로 나야. 그런데 어디서 이런 짓을 해. 네가 미친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순 없지. 안 그래?”

“……마담.”

톰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매달리려 하는 순간 마리아는 방해가 된다는 듯 턱짓을 했다.

“저리로 가 있어. 날 방해하면 너도 가만두지 않겠어.”

톰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런 그를 바라보는 마리아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다 들으며 마기휼은 총탄을 확인했다.

한 발뿐이었다.

마기휼은 총을 양손으로 감싸고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마리아. 어린애 괴롭히면 재미있나.”

말을 붙이자 철컥- 하고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도 재미없지. 하지만 애초에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라서 말이야.”

빈정거리는 말을 들으며 마기휼은 눈동자를 움직였다.

40센티 옆에 달린 판을 내리면 문은 닫힌다.

닫히고 나서 뭘 해야 하지?

3초, 아니 1초면 된다.

“마기휼. 넌 정말 다정한 사내야. 너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가벼워져. 고민하던 것들도 별게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 넌 모두를 평등하게 대해. 신분이 높고 낮은 건 아무래도 좋아. 그저 너와 잘 맞으면 그걸로 어울릴 수 있어. 너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내가 나답지 않은 짓을 한 거야. 애초에 널 죽였어야 했어.”

마리아의 말이 들렸지만 모두 한쪽 귀로 빠져나간다.

마기휼은 무릎을 세우고 앞뒤로 몸을 흔들면서 박자를 맞췄다.

하나, 둘. 하나, 둘. 할 수 있다.

“절대로 도망가지 못하게 할 거야.”

“유감스럽지만 난 도망가고 싶거든.”

마기휼은 발끝으로 안쪽의 판을 걷어찼다. 열린 문이 닫히고 곧장 마리아가 총을 쏴 댔다. 처음에는 끄덕도 하지 않던 방탄유리에 금이 갔다.

마기휼은 바닥을 기어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머리 위쪽에 붙은 판을 열고 안에 있던 줄을 잡아당겼다. 검은 배 겉면의 윗부분이 열리고 눈부신 빛이 터졌다. 연락탄이었다. 아니면 어쩌나 싶었는데 얼추 때려 맞힌 듯싶었다.

마기휼은 다시 문을 열었다. 뭔가가 걸리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고 마기휼은 일어서 총을 든 팔을 앞으로 뻗었다.

문이 열리고 모든 것이 마리아의 앞에 드러났다. 기다렸다는 듯 마리아가 그쪽으로 총구를 겨누었고 마기휼도 마찬가지였다.

탕- 하고 두 개의 총성이 하나인 것처럼 울렸다.

처음 마리아를 봤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 있는 게 너무할 정도로 미인이었다. 하지만 장사수완이 좋고 애교가 넘치는 데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그녀를 보면서 차라리 이쪽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잘 벌어서 밖으로 나가 좋은 사내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마리아와 사이가 좋은 자신을 질투하는 것 같았지만, 실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마리아와 함께 한방에서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었지만 그때에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그저 잠만 잤다. 그때에는 아깝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건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각자의 마음에 비밀이 있다. 그걸 드러낼 수 없으나 알게 모르게 그늘은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마리아와 자신은 그걸 쓰다듬어주는 관계였다. 그저 친구였다.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죽을 때까지도 좋은 친구로 남아 있을 수 있었겠지.

‘자기는 좋은 남자야.’

나직이 속삭이며 뺨에 입을 맞추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마기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마담!”

둔탁한 외침과 동시에 톰이 마리아의 몸을 끌어안았다.

“……….”

마리아는 마기휼을 바라봤다. 여전히 양손으로 총을 잡은 채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기휼, 그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마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손으로 배를 눌렀다. 질척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마기휼이 쏜 총알이 배에 박혔다. 심장을 비켜간 지점, 절묘했다. 즉사가 되지 않도록 옆으로 살짝 피해갔다.

마리아의 입술 꼬리가 일그러져 올라간다.

“실력이 좋은데.”

“노린 표적은 절대로 놓치지 않아.”

한번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명중시킬 수 있었다. 그 대상이 마리아라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지만.

마기휼은 팔을 내렸다. 그 순간 마리아의 몸이 허물어져 내렸다. 다급히 그 몸을 안아 든 톰은 울먹거렸다.

“마담! 엄마! 엄마!”

쓰러진 마리아를 끌어안은 톰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기침을 하는 그녀의 입가에서 피가 토해져 나왔다. 그걸 끝까지 볼 수 없었던 마기휼은 톰의 뒤를 향해 소리를 쳤다.

“당장 데리고 가! 아직은 살릴 수 있을 테니까!”

이쪽이 하는 말을 들었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마리아의 상태가 걱정되지만 그보다는 라울이었다.

마기휼은 문을 닫고 라울의 상태를 살폈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 창백했다.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자 호흡이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마기휼은 라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제 가자.”

몸을 숙여 라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곧장 조종칸으로 넘어갔다.

자리에 앉아 천장과 옆에 달린 버튼을 하나하나 올렸다. 그러자 우웅거리면서 내부로 진동이 퍼졌다. 배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모든 버튼을 올리고 조종기를 붙잡았다. 손바닥을 펼쳤다가 강하게 조종기를 붙잡고는 아랫입술을 핥았다.

할 수 있어. 스스로에게 그리 말을 하고 조종기를 위로 당겼다. 묵직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쉽사리 몸체가 떠오르지 않아 일순 불안했지만, 곧 서서히 떠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기휼은 위를 올려다봤다. 닫힌 원형의 통로가 보였다. 가운데로 선이 그어져 있는 걸 보아하니 개폐식이 분명했다. 문제는 이 배가 접근하기 전까지 저것이 제대로 열릴까 하는 것이었다.

“자동이겠지. 자동이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암, 그렇고말고―.”

아니면 곤란했다. 배는 떠올랐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 못 나가게 되면 그게 뭔 소용이야.

마기휼은 천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열려라. 열려라. 열려라. 열려라.

몇 번이나 그 생각을 반복하는 동안 배는 점점 막혀 있는 통로에 가까워졌다. 불과 3미터 정도를 남겨 놓고 마기휼은 배를 옆으로 틀었다.

“이런 젠장맞을!”

자동도 뭣도 아니었던 거냐?! 그럼 수동이야? 내려가서 문을 열고 다시 출발하라는 거야 뭐야?!

어정쩡하게 배가 떠오른 상태가 더 위험한 법이었다. 이륙은 했지만 그 외에 달리 필요한 기술이 없는 마기휼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위기였다. 마기휼은 초조하게 위를 올려다봤다. 문은 여전히 굳건하게 닫혀 있었다. 마기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 되겠다. 다시 내려가야―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쿵- 하는 충격이 내부로 퍼졌다. 놀라 고개를 들자 닫혀있던 천장의 통로 가운데가 움푹하게 파였다. 동시에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 두꺼운 철판이 떨어지면서 배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오른쪽에 있었다면 철판에 깔릴 뻔했던 마기휼은 놀라 거친 숨을 헐떡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뚫린 통로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하얀 군함도 눈에 들어왔다.

“……하얀 매인가.”

왕실군이었다. 저기에 라우젝이 타고 있는 걸까.

일단은 구멍으로 빠져나가기나 하자며 마기휼은 조종기를 몸 앞으로 주욱 당겼다. 묵직한 소형 배는 불안하기는 하나, 마기휼이 모는 대로 떨어져 나간 반쪽 통로 쪽으로 들어갔다.

구멍이 난 사이로 소형 배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걸 바라보던 마리아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안고 있는 톰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울음을 꾹 참는 그 얼굴을 확인한 마리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어서 날 옮겨. 이대로 있다간 죽을 거야.”

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마리아의 몸을 안아 들며 훌쩍거렸다.

“엄마. 미안해.”

“미안하면 두 번 다시 이러지 마. 임신한 여자들이 모두 네 어머니인 건 아니야.”

톰의 울음이 조금 더 깊어졌다.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통에 몸이 흔들려 더 아팠다.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마리아는 중얼거렸다.

“마기휼이 정말 네 엄마였다면 넌 분명 행복했겠지.”

바보 같지만 정이 깊고 순진한 사람이라 어떤 괴물이 태어나도 분명 소중하게 잘 키웠을 거다. 본인이 상처받고 있는데도 그걸 감내하며 오로지 제 자식 하나가 잘되기를 바라겠지.

검은 배가 푸른 하늘 사이로 사라졌다.

그걸 확인한 마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쁘지 않아.”

그래도 마기휼 그에게 자신은 여자로 기억되겠지.

사내의 성기가 달린 괴물 마리아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총을 들게 된 비운의 여자 마리아로 말이다.

다음에 만나 그 작은 머리통에 총구를 겨누면 과연 어떤 표정을 보여줄까. 마기휼이라면 나이를 먹어도 귀엽겠지. 그가 낳은 아이라면 라울의 피가 섞여도 사랑스러울 것 같다며 마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일보 후퇴를 하는 것일 뿐, 이게 마지막인 건 아니었다. 지금은 너희들과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일 뿐이지 몇 년이 지나 다시 나타날 때에는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며 마리아는 배 가운데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일단은 하늘로 올라갔다. 상공으로 뜨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게 마기휼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간신히 위로 뜬 것까지는 좋은데 군함의 포구가 이쪽으로 향해졌다. 설마 공격을 하려고?

얼굴이 핼쑥하게 질린 채로 있으려니 포구가 조금 흔들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잡것들아! 아군이라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안에 라울이 타고 있거든?!

하지만 이런 소리도 직접적으로 들려야 먹힐 거다. 마기휼은 급하게 외부통신을 찾았다. 그런데 헷갈린다. 워낙 다급하다 보니 손가락도 꼬인다. 그 순간 군함이 위로 뜨나 싶더니 포구에서 포탄이 발사되었다.

“으아악!”

죽기 싫어!

사색이 된 마기휼은 있는 힘껏 옆으로 배를 틀었다. 하지만 잘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야 진작부터 저기 저 멀리까지 피신해 있는데 말이다. 바로 그때 눈앞으로 빛이 화악- 하고 터졌다. 외부 충격으로 인해 배가 마구 흔들렸다. 조종기를 붙잡은 마기휼은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으려 했다.

마기휼과 라울이 타고 있는 소형 배를 향해 떨어지던 포탄은 왼쪽에서 날아온 미사일에 부딪쳐 공중에서 분해되었다. 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소형 배가 뒤로 주욱 밀려났다. 공중에서 휘청거리긴 했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소형 배는 군함에서 조금 떨어졌다.

그 배에 타고 있는 마기휼은 덜덜 떨고 있었다. 사색이 된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걸 확인했다. 또 다른 군함이 나타나 있었다. 저건 그가 알고 있는 군함과 좀 다른 것 같았다. 저놈 덕분에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구형이라 해도 멋지게 보였다.

“……죽다 살았네.”

한숨을 쉰 마기휼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워낙 긴장하고 있다가 풀린 탓인지 온몸이 노곤했다.

멍하니 있으려니 정면으로 다가온 군함의 뱃머리가 열리는 게 보였다. 저리로 들어오라는 거다. 누가 안에 탔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센스였다. 마기휼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혼자만 있으면 멍때리고 몇 시간이고 있는 게 가능했지만, 라울이 있었다. 일단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마기휼은 열린 쪽으로 배를 몰았다.

해치를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냉큼 올라타는 소형 배를 확인한 지안은 라우젝을 돌아봤다.

“들어오고 있습니다. 안에 탄 것이 누군지 확신할 수 없는데 괜찮을까요?”

“분명 라울과 마기휼이 타고 있겠지. 난 마중을 나가볼 테니 여기는 당분간 네가 맡고 있어라.”

“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지안은 라우젝이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한숨을 쉬었다.

“식은땀 나 죽는 줄 알았네.”

중얼거린 지안은 주먹으로 이마를 훔쳤다.

라우젝이 무리한 것을 요구하거나 욕설을 하면서 난동을 부린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괜히 긴장해서 평소보다 배는 더 고되다. 너무 힘을 주고 있어 어깨나 목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며 고개를 좌우로 까닥이는 지안의 옆에 있던 통신병이나 다른 군인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주먹으로 어깨를 토닥였다.

배가 바닥에 닿는 느낌이 들자마자 곧장 일어나 뒤로 갔다. 뒤칸으로 넘어가자 얌전히 누워 있는 라울이 보였다. 그의 상반신을 흠뻑 적신 피도 눈에 들어왔다. 마기휼은 당장 배의 문을 열고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몰려든 군인들을 주욱 흩어본 마기휼이 소리를 쳤다.

“군의관을 불러와!”

갑자기 얼굴을 내밀더니 다짜고짜 군의관부터 찾는다. 마기휼의 얼굴을 알 턱이 없었던 군인들은 불쾌함을 드러내며 딱딱한 억양으로 말했다.

“소속과 이름을 대라.”

“그런 거 할 시간 없어! 당장 군의관하고 붕대부터 찾아오란 말이야!”

마기휼의 거친 언사에 군인 몇의 안색이 굳어졌다. 소리를 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었다.

조급함으로 인해 마기휼은 더 정색했다.

“너희들의 소중한 라울 대령이 부상을 입었다니까!”

“……라울 대령님이?”

그제야 안색이 변한 군인 몇이 움직였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은 라울의 옆으로 기어갔다.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 건 느낌 탓일지도 몰랐다. 마기휼은 라울의 옆구리를 한 손으로 눌렀다. 그 손가락 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다른 곳에 정신을 팔 때에는 몰랐지만 막상 안전한 곳에 들어와 라울 하나만 보고 있으려니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진다.

“라울.”

이름을 부르며 다른 손으로 뺨을 감쌌다. 차가웠다.

마기휼은 숨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다가 울겠군.”

익숙한 목소리에 마기휼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옆을 돌아보자 안으로 들어오는 라우젝이 보였다. 그는 곧장 라울의 상처를 확인했다. 옆구리를 누르고 있는 손길을 확인한 라우젝이 한마디 했다.

“세균 범벅인 손으로 잘도 누르고 있군.”

지적을 받은 마기휼은 움찔했으나 이내 기분 나쁨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의사 자격증 있으십니까?”

“아니. 없어.”

“그러면 잘난 척 나불대지 말고 입 다물고 계시지요.”

한 마디 한 마디 끊어서 하는 말에 라우젝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이것 봐라.’라고 말하고픈 얼굴로 있던 라우젝은 손을 들어 마기휼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갑작스럽게 한 방 맞은 마기휼은 라우젝을 노려봤지만 그 얼굴 전체로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새 무표정이 된 라우젝은 마기휼을 빤히 응시했다.

“괜한 사람 잡지 말고 눈깔아. 말했지? 난 건방진 놈들이 싫어. 그런 놈들은 도와주고 싶다가도 그런 맘이 달아난다니까.”

마기휼은 험한 말을 할 뻔했지만 그걸 가까스로 참고 눈을 내리떴다.

그때 군의관이 급히 안으로 뛰어 올라왔다.

“라울 대령님께서 얼마나 다치신 겁니까?”

군의관은 급히 라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어설프게 묶은 천 위로 피가 스며 나와 있었다. 도구를 사용해 천을 상처에서 분리한 후, 벌어진 살점 상태를 확인하고 따로 챙겨온 붕대로 응급 처치를 했다.

“피를 많이 흘리셨군요. 일단 자리를 옮겨야겠습니다. 혹시 머리에 충격을 받으신 겁니까?”

“그런 거 없이 총 한 방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중간까지는 의식이 있었는데 갑자기 픽 쓰러지고, 피는 멈추지 않고. 설마하니 죽는 건 아니겠지요?”

횡설수설이었다. 말을 하면서 점점 불안해진다. 마기휼은 굳은 얼굴로 있다가 이윽고 눈꼬리가 처지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버리자 군의관은 움찔했다.

“아직은 확실히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일단은 자리를 옮깁시다. 거기! 들것을 끌고 와!”

군의관의 외침에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안으로 군인이 몇 더 들어왔다. 너무 많아서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었기에 마기휼은 먼저 내려오게 되었다. 라우젝이 뒤를 따르고 군인들에 의해 옮겨지는 라울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마기휼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서 옮겨! 빌어먹을! 사람 다 죽이게 생겼네!”

“……살살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당장 눈을 부라리는 마기휼의 까칠한 태도에 군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조용히 라울을 들것 위에 눕혔다. 군의관이 라울의 상처를 확인하며 종종걸음을 옮겼다. 마기휼도 뒤를 쫓으려 했다.

“기다려.”

말과 동시에 붙잡는 손길에 마기휼은 오만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마기휼의 모습에도 라우젝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네가 가 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거야. 그러지 말고 올라가서 좀 씻는 게 어때?”

왜 또 갑자기 씻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내 마기휼은 자신의 양손과 옷 등에 점점이 묻은 피를 확인했다. 자신의 것은 아니고, 모두 라울의 피였다. 그걸 보는데 왜 이렇게 머리가 핑 도는지 모르겠다. 가벼운 현기증이 이는 걸 느끼며 비틀거리자 라우젝이 팔을 놓았다.

“왜 그래?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그래? 몸이 안 좋은 거라면 말을 해. 군의관을 시켜 영양제를 놓아주도록 하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마에 손을 집은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가 목 뒤를 한 손으로 잡았다.

라울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말 위험할지도 모른다 생각을 했다. 이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물론 라울의 자세한 상태에 대해선 알지 못해도 한결 정리된 상태였다.

군의관이 보살필 테니 괜찮을 테지. 죽지는 않을 터였다. 여전히 마음이 쓰였지만 아까처럼은 아니었다. 한숨을 쉰 마기휼은 라우젝을 흘겨봤다. 이쪽을 빤히 보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마기휼은 아이작 일당에 대해 물었다.

“그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왕통에 손을 대는 발칙한 것들은 그만한 처벌을 받아야지. 뒤를 쫓으라고 말을 해 두긴 했다. 그것에서 잘 도망치면 사는 거지만, 아니면 죽는 거지.”

“……그렇습니까.”

아이작이 없어야지만 이런 일이 더는 생기지 않게 될 거다. 그가 살아남는다면 언제고 재차 위험한 일이 생길 거다. 그 전에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을 봐야 할 텐데.

눈을 내리뜬 마기휼의 얼굴색이 전과 달랐다. 라우젝이 지나치듯 물었다.

“안색이 좋지 않아. 심한 일을 당했나?”

“심한 일은커녕 이상한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머리가 깨질 것 같습니다.”

“여신과 인어와 피에 관한 이야기? 그거 모두 사실이야.”

마기휼은 이마에 한 손을 댄 채로 라우젝을 봤다.

“모두 사실이기에 그렇게나 혈통에 집착을 하는 거지만,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쓸모없는 것들이라 생각해. 그들은 그저 우월감에 젖고 싶은 거야.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다른 피를 지닌 특별한 존재라는 걸 확인받고 싶은 거지. 유치하게도 말이야.”

말을 하는 라우젝의 입술 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원래 라우젝은 시니컬한 사람이었다. 그것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저런 태도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은 저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마기휼은 지친듯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라울의 상태를 확인해 보고―”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목구멍이 턱 하니 막혔다. 불쾌한 답답함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목을 손으로 감싼 마기휼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리는 걸 확인한 라우젝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마기휼?”

독특한 억양으로 울리는 이름.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었다. 분명 그렇긴 한데 왜 이렇게 생소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이내 그 이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머리가 제정신인 상태가 아니니 모든 게 멀리서 들리는 듯싶은 거다.

눈앞으로 별이 반짝거리더니 귀가 멍멍해졌다. 라우젝의 눈이 크게 떠지는 걸 확인함과 동시에 마기휼은 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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