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7)

#16

온몸이 노곤했다. 손가락 하나 까닥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늘어진 채로 멍하니 있다가 눈을 떴다. 눈앞으로 여러 가지 영상이 떠돌아다녔다.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이런저런 것들이 교차가 되어 가고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달빛을 봤다. 하얗게 빛나는 달을 본 마기휼은 멍하니 있다가 그쪽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조금 더 풍경이 정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반쯤 열린 창 바깥으로 달이 보였다. 동그란 원형의 달.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불현듯 붙잡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위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옆에서 나타난 손이 그런 자신의 팔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동시에 몸 위에 올라타 있는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흐트러진 금발 머리카락. 그리고 녹빛 눈동자. 참 아름다운 사내였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어도 한눈에 들 정도로 잘난 남자였다.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상대의 손길이 뺨에 닿았다. 느리게 만지는 손길에 취하듯 눈을 감았다.

다리가 벌려지고 그 사이로 뜨거운 것이 들어왔다. 내벽을 벌리고 묵직하게 파고 들어오는 게 무섭고 두려웠다. 자신을 부서뜨리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간신히 지키고 있었던 그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가 강하고 깊게 파고들 때마다 단단한 벽과도 같은 것이 맥없이 허물어져 내린다. 지금껏 지켜 왔던 것은 우습다는 듯 말이다.

그런 게 아니야. 중얼거려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느덧 사고가 마비된다. 몸 안쪽이 얼얼해지고 뜨거웠다. 머릿속으로 열이 몰렸다.

라울과 하게 된 순간에 깨달았다. 자신의 몸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말이다.

남자면서 아이를 가질 수 있다. 어느 여자라도 본인의 아기를 원한다. 인간이라는 건 결국 자손을 남기고 싶어한다. 내 몸도 그걸 바라고 있었다. 스스로 아이를 품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렇게나 부정하고 거부를 했던 것이 맥없이 허물어져 내리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눈을 감고 열중한 라울이 보였다.

장담하건대, 저놈의 저런 표정 나 말고는 그 누구도 본 적이 없을 터였다. 저렇게 절박하고 뭔가를 바라는 얼굴은 말이다. 그래서 좋았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어도 정신적으로는 한없이 만족스러웠다. 저런 잘난 놈이 자신을 이렇게나 원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서 말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다른 영상이 보였다. 이번에는 붙잡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 그러자 여러 가지 얼굴들이 보였다.

자신을 끌어안고 웃는 어머니와 손을 잡고 언덕 위를 달리는 아버지와 그릇을 깨고는 두려워서 엉엉 울던 가휼. 처음 시집을 와 저택으로 들어왔을 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계모 레나. 그리고 그런 레나의 뒤에 숨어 있던 레이라. 호탕한 성격의 사령관. 북방군 내에 있던 동료들. 술집 첫사랑의 마담인 마리아. 그녀의 곰방대에 머리를 맞고도 즐거워하는 수많은 얼간이들. 마지막으로는 오르베와 라우젝까지. 비슷한 용모의 다섯 아이들까지 주르륵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고 마지막으로는 아이작과 톰까지 떠올랐다.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때문에 느꼈다.

자신의 정신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말이다.

“마기휼, 괜찮아?”

괜찮지 않아. 너도 그걸 알고 있잖아. 그러니 괜히 묻지 마.

가만히 있으려니 뺨으로 손길이 닿았다. 끝이 까슬한 손길이었다. 마리아의 손을 처음 잡아봤을 때 ‘얼굴하고 어울리지 않게 손이 꽤 거치네?’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여러 가지 일을 한 손이니까.’라고 말하곤 했다.

그때 네가 말했던 여러 가지 일이라는 게 이런 걸까. 마기휼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곱슬곱슬하고 짧은 단발 머리카락을 지닌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미소가 피어올랐다. 둘 다 웃으면서 서로를 쳐다봤다. 마리아가 마기휼의 뺨을 문질렀다.

“머리는 어때?”

“……깨질 것 같아.”

“목소리도 엉망이네. 가여워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마리아의 동정은 받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멍했다. 사고가 이어지지 않았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장면들을 조합해서 마리아가 라울이 쏜 총에 맞았다는 걸 떠올렸다.

“어깨는 괜찮아?”

“안 괜찮아. 진통제를 먹고 있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정말 아팠을 거야.”

마리아는 손을 들어 왼쪽 어깨를 감쌌다. 눈을 내리뜨는 표정에 감추어지지 않는 불쾌함이 감돈다. 이렇게 보니 그녀가 정말 악당처럼 여겨졌다. 예쁘게 웃으면서 군인들 사이를 돌며 모두의 사랑을 받던 그녀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마기휼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제는 지겨워지려고 하는데 말이지.”

“나도 이렇고 싶지 않아. 너에게는 거칠게 대하고 싶지 않으니까.”

“거짓말하시네.”

마기휼은 빈정거렸다. 이후로 의미 없는 말들이 더 오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미묘한 느낌이 풍기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로 내려다봤다. 뭐라 설명할 수 없으나 껄끄러움이 풍기는 미소였다. 왜 저렇게 보는 건가 싶어 의아해져 가만히 있는 동안 마리아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축하해.”

“……내가 이렇게 붙잡힌 걸 축하할 셈이야?”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굉장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지금 당장 마리아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마기휼이 그리하기도 전에 그 말은 마리아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임신한 거 축하해.”

입을 다문 마리아의 입술 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지금 한 말에 대해서 의아함을 품거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당연하게 할 말을 했다는 식이었다. 그런 마리아를 바라보는 기분은 참으로 오묘했다. 처음으로 마리아가 밉상으로 보일 정도였다.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이미 알고 있잖아. 알고 있는데도 그냥 모르는 척하고 싶을 뿐이잖아. 안 그래?”

마기휼의 말을 중간에 자른 마리아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내가 한 말에 대해서 달리 반박할 수 있다면 해보라는 식이었다.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을 한 채로 있던 그는 천천히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 눈동자가 날카롭게 마리아를 노려봤다.

“내 몸속에 아이가 있다고 쳐. 그걸로 뭔가를 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건 라울에게 달린 문제야.”

지랄하고 자빠졌다. 아이가 있는 건 내 몸이라고. 그게 왜 라울에게 달렸어. 내게 달린 문제야.

속이 배배 꼬여서 상당히 까칠한 상태였다. 마리아를 보기 싫을 정도였다. 마기휼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돌로 된 벽면을 확인하고는 주춤했다. 벽뿐만이 아니었다. 복도나 벽 앞으로 세워진 기둥, 그리고 천장은 모두 돌로 되어 있었다. 잘 다듬어 놓은 곳도 있고 오돌토돌한 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부분도 있었다. 더군다나 이쪽이 누워 있는 곳은 지붕이 없었다.

위로 뻥 뚫린 검은 공간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고 그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그제야 스산한 바람이 느껴진다며 마기휼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여기 어디지?”

“하늘의 땅이야.”

마기휼은 눈을 깜박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는 순간 마리아가 그의 옆에서 떨어졌다. 두어 걸음 떨어진 후에 마기휼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늘의 땅 안에 온 것을 환영해. 마기휼.”

마리아는 보란 듯이 양팔을 벌렸다. 그리고 미소 짓는 그 얼굴이 당당했다. 그 얼굴을 보자니 왜 이리도 역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저 역겹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 얼굴이 일그러진다.

“정말 구리군.”

“앞으로는 안 구려질 거야.”

“재미있어질 거야.”라고 말한 마리아는 몸을 돌렸다.

그녀가 나가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다가 묶인 손을 위로 당겼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손을 당기던 마기휼은 한숨을 쉬며 재차 천장을 올려다봤다.

뻥 뚫린 공간. 그곳으로 구름이 보였다. 왜 갑자기 그 그림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하늘의 땅이 가라앉자 절망하며 제물을 바치던 사람들의 모습이 말이다. 설마하니 나도 그런 일을 당하는 건 아니겠지. 생각을 하다 말고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요즘 세상에 제물이라니. 말도 안 되지. 안 되고말고―.

거기까지 생각을 하던 마기휼은 발자국 소리에 급히 눈을 내리떴다. 그러자 마리아가 나간 쪽 반대편으로 누군가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톰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눈이 마리아가 나간 쪽을 쫓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톰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미친놈이 왜 이리로 오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아이작이 나았다. 저 톰이라는 놈은 마리아의 말만을 듣는 정신 나간 놈이었다. 이쪽에 갑자기 무슨 짓을 저질러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놈이었던 거다.

놈의 모습이 점점 커지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기다려. 나한테 손 하나 대지 마. 그러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무표정으로 쳐다보는 얼굴이 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네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뭘 어쩔 건데? 그렇게 묶인 꼴로 뭘 할 수 있겠어. 그것 말이다.

“내가 지금 아무것도 못 할 것처럼 보이지? 하지만 아니야. 네가 나한테 이상한 짓 하면 그 순간 너도 황천길이야.”

암만 말을 해도 톰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바로 옆에 붙어 서는 순간 마기휼은 그를 노려봤다.

“제기랄, 오지 말라니까!”

톰의 커다란 손이 얼굴 쪽으로 내려왔다.

그 순간 마기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쉴 새 없이 자판을 두드렸다. 벌써 이게 몇 시간째인지 모르겠다. 손가락이나 손목은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중간에 손을 멈출 수는 없었다. 뒤에 서 있는 존재가 무섭기도 하지만 통신병도 지금 당장은 찾아봐야 할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갔던 마기휼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렸다. F4 창고에는 침입자들도 없었다. 그들이 마기휼을 데리고 간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건지 모르겠다. 그보다 라울은 왜 저렇게 기분이 안 좋은지 모르겠다.

뒤를 흘깃 쳐다봤다. 팔짱을 낀 채로 있는 라울이 보였다. 그는 정말로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 때문에 마기휼을 찾아내는 걸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당장 한 소리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령님.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안쪽에서 나온 보고에 모두가 그쪽을 쳐다봤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 틈을 타 한숨을 돌리기까지 했다. 귀에 커다란 장비를 댄 채로 있던 군인은 눈을 감았다. 정신을 집중해 모든 걸 청력에 모으고 있던 자는 눈을 떴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뭔가가 다가옵니다.”

“이쪽에서도 포착했습니다.”

화면 안으로 뭔가 잡히는 게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미약했다. 이만한 거리에 들어와서야 포착이 되다니. 도대체 정체가 뭔가 싶었다. 라울도 바로 보고 파악할 수 없었던지 인상을 썼다.

“어디냐.”

“곧 육안으로 보이게 됩니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창 너머를 바라봤다. 그리고 사막의 경계선 위로 나타나는 물체를 확인하고는 아연한 얼굴들이 되었다. 오래된 사전에서나 봄 직한 구형 차량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위에 떡하니 달려 있는 건 백기였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가 일순간 탁 풀렸다.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만 나왔다.

“……저건 뭐야.”

장난하냐.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유인책을 사용하고, 기습을 하고, 사람 하나를 납치해 간 주제에 뭔 백기란 말인가. 분명 달리 꿍꿍이속이 있는 거다. 모두가 그리 생각을 하며 다가오는 차량을 노려봤다. 그러는 동안 그것은 조금 더 확실하게 보이게 되었다.

“대령님. 상대측에서 통신을 요청해 왔습니다.”

“연결해라.”

통신병은 상대방의 통신을 수락하고는 통신기를 라울에게 내밀었다. 옆에 서 있던 라울은 한 손으로 그걸 받아들고 귀에 댔다. 바로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울 대령님과 일대일 대화를 원합니다. 괜찮으시다면 군함에서 내려와주십시오.]

예상치 못했던 어린 목소리였다. 그렇다 해서 이쪽이 저자세로 나가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자연스럽게 라울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나갔다.

“내가 너희의 요청을 수락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마기휼이라는 자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원하는 건 마기휼이 아닌 당신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아이작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아이작. 며칠 전만 해도 알지도 못하는 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매번 거론이 되어 이쪽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독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찾아내 그 몸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 번도 누군가를 상대로 이리도 살의가 치민 적이 없었는데―.

라울의 눈빛이 점점 굳어졌다. 그가 지금 어떤 결심을 내렸는지를 느낄 수 있었던 통신병이 그를 올려다봤다.

“내려가지 마십시오. 유인책입니다.”

“군함 밖으로 나가는 즉시 저격될 우려가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다른 쪽에서도 말이 나왔다. 모두가 라울을 돌아봤다.

지금 저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위로 구조 요청을 보냈으니 아군이 도착하는 걸 기다리는 게 현명했다. 저들이 예상치 못한 공격 패턴을 보인다 해도 아직은 이쪽이 유리했다. 소령 하나를 잃은 것이 애석하기는 하지만, 아직 라울이 있었다. 그걸로 된 것이 아닌가.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군함에서 내리겠다. 호위할 자를 준비해 둬라. 난 지금 바로 내려가겠다.”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통신병은 눈을 깜박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울은 귀에 댄 것을 내려놨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에 놀란 이가 중얼거렸다.

“정말 어울리지 않게 행동을 하시네.”

말을 한 이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대령을 상대로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 옳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에 대해서 타박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라는 듯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모두가 이쪽과 같은 생각을 한다 해서 그게 마냥 기쁜 건 아니었다. 지금 라울은 내려갔다. 그를 호위할 실력 좋은 이들을 뽑아 놔야 했다. 통신병은 당장 내부 방송으로 버튼을 바꿨다.

검은 차량은 많이 낡고 허름했다. 거의 다 왔다 싶었을 때에는 문제가 생겼는지 속도가 더 느려졌다. 그래서 라울의 앞에 설 때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먼저 군함에 내려와 있었던 이들은 차량이 멈추고 문이 열리자 총구를 세웠다. 하지만 막상 차 문을 열고 내리는 것이 16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 하나라는 것에 주춤했다.

갈색 피부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짧은 백발을 지닌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였다. 보는 순간 평범한 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라울은 손을 들었다. 군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 총구를 내렸다. 그걸 확인한 소년은 입술 꼬리를 살며시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왔다. 맨발이었다. 이내 라울의 앞에 선 소년은 라울을 올려다봤다.

미소를 짓는 여유로운 얼굴. 그걸 보자 누군가가 떠올랐다. 라우젝. 잠시 자신의 형님을 떠올린 라울은 소년의 뒤에 세워진 차량을 흘겨봤다.

“낡은 차량이로군.”

“엔진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것이지요. 한 1200년 전의 것이 아닐까요.”

나오는 목소리가 나른하고 억양도 독특했다.

엔온에 속한 이들은 하나같이 이리도 특이한 건가. 라울은 소년의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네 이름이 뭐지?”

“아스카라고 합니다. 엔온 소속이고 나이는 당신보다 많을 겁니다.”

라울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것에도 주눅 들지 않은 아스카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알려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살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을 시 괜한 죄책감을 갖지 마십시오.”

“너를 죽인다 해도 죄책감은 들지 않을 거다. 넌 성장하지 않는 자로군.”

“아니요. 전 성장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제 의지로 이 신체를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가장 튼튼하고, 빠르고, 영리하고 동시에 적이 방심하게 만드는 외관이니까요. 전 제 자신의 시간을 조절하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시간을 조절한다라.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몸에 대해서 꽤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라울의 눈동자 안쪽으로 이채가 떠올랐다.

“독특한 해석이로군.”

“그렇게 해야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스카는 품에 손을 넣었다. 놀란 군인들이 재차 총구를 위로 세웠다. 하지만 아스카의 손에 들려져 나온 것은 검은 막대였다. 손바닥만 한 길이에 굵기는 3센티미터 정도. 중간에 갈라진 면이 있는 그 물체는 투박하고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라울은 보는 순간 눈빛이 달라졌다.

“이게 누구의 것인지 아십니까.”

마기휼이 즐겨 사용하는 채찍이었다. 그의 몸의 일부분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아주 효과적으로 라울을 자극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몸이 먼저 움직일 뻔했다. 가까스로 그걸 조절한 라울은 차분히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모래 바닥 아래에 있습니다.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작은 당신과 거래를 원합니다. 그러니 따라와주십시오. 저기에 있는―”

아스카의 눈동자가 라울의 뒤에 서 있는 군인들을 살폈다. 시선에 닿자 더 긴장한 듯 몸에 힘을 주는 모습들에 아스카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저 멍청한 군인들은 뒤로 하고 당신 혼자만 오십시오.”

멍청한 군인 운운하는 순간 군인들의 안색이 돌변했다. 굳은 얼굴로 달려들려는 동료의 팔을 붙잡으며 군인은 라울을 눈빛으로 가리켰다. 대령이 가만히 있으니 너희들도 얌전히 있으라는 사인에 군인은 분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노려보는 눈초리가 날카로웠으나 그 시선에도 아스카는 태연했다. 붉은 눈동자가 정확히 라울을 바라봤다.

“그리하실 수 있겠습니까.”

“거절한다면?”

“마기휼은 죽습니다.”

단호한 말에 라울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눈을 감았다 뜬 그는 아스카의 붉은 눈동자를 직시했다.

“너희들이 왜 그의 목숨을 가지고 거래를 하는 것이냐.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는 거냐.”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왠지 모를 위협을 느끼면서도 아스카는 차분하게 대답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닙니― 컥!”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이 잡혀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두 다리가 허공에 떠서 버둥거린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아스카는 크게 입을 벌리며 숨을 쉬려 노력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목을 붙잡는 라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아스카의 눈동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절명하기 직전 라울이 손을 풀었다.

모래 위로 쓰러진 아스카는 고개를 숙인 채로 기침을 해 댔다. 그런 그를 차갑게 노려보며 라울은 입술을 달싹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없다. 모든 건 너희들이 계획하고 꾸민 일이 아니냐. 애초에 이리될 일이었다. 그걸 가지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느니 따위로 포장하지 마라.”

모든 게 이놈들이 꾸민 계략이었다. 그로 인해 마기휼이 지금 자신의 곁에 없는 거였다. 이상한 곳에 끌려간 그가 지금 어떤 상태로 있을 것인가. 그걸 조금만 상상해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쾌해졌다.

아스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너무도 살벌한 눈빛을 보내는 라울을 확인한 직후 마른침을 삼켰다. 그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걸 확인한 라울은 채자 말했다.

“그가 죽으면 너희도 죽는다. 그것 하나는 명심해야 할 거다.”

목을 감싼 아스카는 숨을 죽였다. 그를 흘겨본 라울이 몸을 돌렸다. 군인들은 다가오는 라울을 쳐다봤다. 굳은 라울의 얼굴에서 뭔가가 느껴진 것일까. 라울이 앞에 다가서자마자 바로 만류를 했다.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저들의 말을 따르실 겁니까. 그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행동이십니다. 가지 마십시오. 그 소령보다는 대령님이 훨씬 더 중요하십니다.”

라울의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인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 그걸 확인한 군인은 한 말을 재차 강조했다.

“저희들에게는 대령님이 훨씬 더 중요하십니다. 당신은 노르디아 연방국에 꼭 필요하신 분입니다.”

“나는 필요 없다.”

망설임 없이 나오는 말에 군인들은 놀라 라울을 쳐다봤다.

그가 대답을 한 내용이 어떤 류인지 알 수 없었다. 노르디아 연방국이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 말이다. 당황한 그들의 상태가 느껴진 라울은 고개를 돌렸다.

“아군이 올 거다.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어라.”

이미 라울은 갈 마음을 굳힌 듯싶었다. 그의 결심을 되돌리기에는 무리였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다.”

그건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불안한 듯 쳐다보는 시선에 라울은 재차 말했다.

“절대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그 무슨 일도 생기지 말아야 했다.

라울의 의지가 전해진 것인지 군인들은 별다른 말을 할 수 없게끔 되었다. 다만 걱정이 되는 눈길을 보낼 따름이었다. 그런 그들을 주욱 살펴본 라울은 몸을 돌렸다. 다가오는 라울을 확인한 아스카의 입가로 미소가 걸린다. 그는 옆으로 몸을 물렸다. 라울은 아스카가 타고 온 차에 탔다.

차 안은 좁고 답답하고 더웠다. 의자는 딱딱하고 영 불편했다. 어정쩡하게 앉아 있으려니 옆으로 아스카가 올라탔다.

“좁군.”

“그리고 지저분하지요? 그래도 참으십시오.”

아스카는 문을 닫고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정면으로 보이는 군인을 확인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의 라울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느낄 수 있었던 아스카는 라울을 흘겨봤다.

“저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취하질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에라도 뒤를 쫓는 것 같은 기미가 엿보일 경우 대령님께서 보호하고 싶어하시는 그분의 목숨은 없습니다.”

라울은 아스카를 노려봤다.

“그따위 말은 더 이상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쪽도 필사적이니까요.”

아스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속도를 높였다. 더불어 승차감도 더 최악이 되었다. 덜컹거리는 차량은 의자도 들썩이게 만들었다. 이렇게나 느낌이 안 좋은 차량은 난생 처음 타본다. 자연스럽게 라울의 안색은 더 굳어졌다.

라울을 태운 차량이 점점 멀어졌다. 그걸 보고도 속수무책이었다. 라울과 같이 있던 이들은 그렇다 쳐도 왜 중앙실에 있는 이들마저 얌전한 건지 모르겠다. 참다못한 군인이 가만히 있기만 하는 통신병을 붙잡으며 물었다.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건가? 뒤를 쫓아야 하는 거잖아.”

“대령님께서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으셨어. 이대로 기다리고 있어야 해. 우리가 독단적으로 움직일 순 없어.”

“그러다가 대령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라고! 대령님이 죽기라도 한다면 우리 모두의 책임이야! 대령님은 왕통이고 여왕 폐하의 부군 후보시라고! 더군다나 안제크가의 후계자! 그분의 몸에 변고가 생겼을 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이라도 뒤를 쫓는 게 당연한 거였다. 초조한 듯 자꾸만 라울이 간 쪽을 돌아보는 군인의 모습에 앞에 서 있던 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걸 모르는 듯 재차 쫓아가자 재촉하는 말에 군인은 날카롭게 상대를 쏘아붙였다.

“그분의 안위를 걱정하는 거냐. 아니면 단순히 네 걱정을 하는 거냐.”

상대는 주춤했다. 입을 꾹 다물고 말을 하진 않으나 그의 속내가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라울이 아닌 본인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염려하다니. 하지만 그게 비단 그뿐일까.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고 그건 자신도 똑같았다. 군인은 라울을 떠올렸다. 그 단호함을 상기했다. 그리고 마음을 굳혔다.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대령님의 명에 따른다.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령님의 직속 부하가 될 수 없다. 명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내쳐질 뿐이야.”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라니까. 융통성 있게 좀 굴어야―”

저 낡은 차량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행동을 취하는 게 옳았다. 그것에 대한 역설을 하려는데 어디선가 삐익- 하는 소리가 울렸다. 고막을 두드리는 묘한 음향. 동시에 모두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외부 회신이다!”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 통신병은 몸을 날려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통신기에 귀를 대고 화면을 확인한 통신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호인데?”

묘한 선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바로 잡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반대편에서는 계속해서 연결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무작정 연결을 신청하다니. 상식 외의 행동이었다. 통신병은 주파수를 맞추면서 물었다.

“여기는 노르디아 중앙군 소속 A-023번 군함입니다. 귀하는 누구십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잡음이 사라졌다. ‘깨끗해졌네?’라는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반대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노르디아 왕실군 소속 라우젝 사령관이다.]

“……어?”

어린 소년의 목소리에 놀랐다. 다음으로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통신병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상대방은 말을 늘어놓았다.

[노르디아 왕실군. 정확히 20분 후 레드존에 진입한다. 이후에 있을 충격에는 알아서 대비해라.]

알아서 대비를 하라니. 당황한 통신병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으나 이미 연결은 끊긴 채였다. 소리를 듣던 통신병은 고개를 들었다.

라우젝 사령관. 분명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직 자신이 어렸을 때 그는 최연소 왕실군 사령관이 되어 수많은 해적을 소탕했다. 하지만 그는 곧 스스로 물러났고 두 번 다시 군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다시는 그 이름을 듣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지금 이 상태가 믿기질 않았다. 통신병은 멍해졌다.

“라우젝 사령관이라고?”

“하얀 매 소속의 라우젝 사령관? 말도 안 돼. 그건 전설이잖아.”

누군가의 말에 중앙실 내부가 조용해졌다.

라우젝에 대해서 모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거론하는 이들은 없었다. 더는 성장하지 않는 몸. 그 약점을 감당할 수 없었던 라우젝은 모든 것에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그 뒤를 라울이 이어받게 되었다.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비밀. 그러나 은밀히 수면 아래로 묻힌 인물.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알아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라우젝은 영원히 전설로 남게 될 인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현실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그래 봤자 보이는 건 칙칙한 색의 천장이었다.

“20분이라고 했지.”

중얼거림에 모두가 고개를 내리고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통신병은 내부 방송을 시작하는 한편, 이 사실을 어떻게 하면 라울에게 알릴 수 있을지에 대해 고심했다.

요즘 들어 이상한 일을 많이 당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불쾌하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그런 상태였다.

마기휼은 멍하니 있다가 눈을 내리떴다. 그러자 자신의 배 위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가 보였다. 덩치도 큰 놈이 무릎을 꿇고 앉아 배에 귀를 대고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평온했다. 마치 순한 양 같았다. 톰이라고 했다. 이 사내가 이런 얼굴로 있는 건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머리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무겁지는 않아도 굉장히 불편했다. 거북하고 징그럽기도 했다. 왜 저렇게 귀를 대고 있는 거야. 무슨 소리가 들리나. 순간 마기휼의 안색이 굳어졌다. 더는 못 참겠다.

“어이. 이봐.”

부르는 순간 톰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배에 귀를 댄 채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모습에 마기휼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만 좀 비켜줄래? 기분 영 안 좋으니까 말이야.”

톰은 가만히 있었다.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기분 나빴다. 이런 놈과 닿아 있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마기휼의 얼굴은 험악해졌다.

“무겁다고. 나한테 마음이 있었던 거라면 이런 방식 말고 다른 거로 표현을 해주면 안 될까?”

“아직은 작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마기휼을 빤히 바라보며 톰은 중얼거렸다.

“아직은 작고 불안해.”

“……뭐라는 거야.”

단박에 이해할 수 있는 말도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으니 한번 꼬게 된다. 칙칙한 얼굴로,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있으려니 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선 채로 배를 내려다봤다. 배 속에 있는 뭔가가 보이는 듯 말이다. 참으로 불쾌했다. 마기휼은 몸을 비틀어 톰의 시야에서 배가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러는 동안 톰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불쌍하다는 듯 보는 시선에 마기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기분 나쁘게―.”

저런 동정의 눈빛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묶여 있다고 해도 아직은 심한 짓 당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 눈빛 치우지 못해? 다소 날카로운 상태가 되어 노려보자 톰의 눈동자가 글썽거렸다. 눈물이 맺혔다.

“불쌍해.”

톰의 눈물을 본 마기휼은 입을 살짝 벌렸다. 지금 보고 있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댕그랗게 뜨고 있는 동안 톰은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톰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불쌍해.”

“……나 정말 미치겠네.”

덩치는 산만 한 것이 왜 저렇게 소녀처럼 우는 거야. 말이 돼? 기가 차지도 않아서 가만히 있는 동안 톰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기분 나쁘다. 동정받는 것이 자신이 아닌, 배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일 거라는 생각까지 미치자 분노의 감정이 주체되지 않았다.

“계집애처럼 울지 말고 당장 저리로 꺼지지 못-!”

“화를 내면 몸에 좋지 않아.”

발작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던 차에 들리는 목소리에 마기휼의 고개가 황급히 돌아갔다. 마리아가 나갔던 방향에서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아이작이었다. 언제나 늘 망토를 두르고 있던 그는 지금은 검은 바지에 상의를 입고 있었다. 덕분에 튼튼한 팔뚝과 털이 무성한 팔이 고스란히 드러난 채였다.

얼굴의 윤곽도 보다 뚜렷했다. 회빛의 머리를 하나로 모아 묶으니 꽤나 단정한 용모가 드러났다. 차림새가 달라지니 풍기는 느낌도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낯선 듯 쳐다보는 마기휼을 지나친 아이작은 선글라스 너머의 눈동자를 움직여 톰을 내려다봤다.

울고 있던 톰은 아이작의 시선이 본인에게 닿자 긴장한 듯 숨을 죽였다.

“톰. 지금 뭘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그의 기분이 안 좋아진 것 같으니 그쯤 하고 그의 손목에 걸린 쇠사슬을 끊어줘라.”

망설이는 듯싶던 그는 마기휼 쪽으로 몸을 숙였다. 커다란 손이 마기휼의 손목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너무도 쉽게 풀어냈다. 덕분에 자유로운 상태가 된 마기휼은 바로 옆으로 몸을 굴려선 돌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톰을 노려보다가 아이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이 풀리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이는 게 재미있는 듯 그는 웃고 있었다.

“……왜 풀어주는 거지?”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자, 따라와라.”

아이작은 옆으로 몸을 돌리며 팔을 뻗었다. 말없이 바라보는 눈동자가 부드러웠다. 날 따라와도 괜찮을 거라 말하는 눈빛이나 저것이 모두 공갈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 다른 음모가 있을 거다. 하지만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단계에서 이쪽은 선택권이 없었다. 마기휼은 손을 감싼 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이작을 따라가려 하자 톰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왜 그러나 싶어 뒤를 돌아보자 톰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마치 아이가 엄마를 바라보는 그런 얼굴이었다.

난 네 엄마도 뭣도 아니야. 그런데 뭘 그렇게 보는 건데? 묻고 싶은 말을 꾹 참으며 아이작의 뒤를 쫓았다. 걸어가는 동안 몸 상태를 확인했다. 막 눈을 떴을 때에는 안 좋았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허벅지 쪽으로 바로 주사 바늘이 들어왔지. 이상한 약물 때문에 나중에라도 배 속에 있는 애한테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

마기휼은 걸으면서 다리 상태를 확인했다. 동시에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은 동굴 같았다. 마리아는 여기가 하늘의 땅이라고 했지만 믿겨지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곳에 데리고 와 놓고는 사기 치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하늘의 땅이라고?”

“그래. 하지만 중심부는 아니야. 정말 중요한 곳은 달리 있지.”

“……지금 그리로 가는 거야?”

“지금은 못 가지. 대령이 없으니 말이야.”

이상한 말이었다. 앞장서 걸어가는 아이작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라울 대령이 있어야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을 하네?”

“아주 아니라고는 볼 수 없지.”

라울이 하늘의 땅으로 가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자꾸 라울을 찾는 건지 모르겠다. 그놈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니야. 알고 보면 의외로 평범하다니까. 그리고 괜히 건들지 말란 말이야. 한번 화나면 엄청 무서워지는 놈인데 여기에 있는 것들이 그걸 제대로 모르는 듯싶어 참으로 유감스러웠다.

“확실하게 말을 해. 지금 무슨 꿍꿍이인 거지?”

“그건 일단 보고 나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보고서 이야기를 한다고? 그럴 필요 없이 당장 말을 해줘도 되는데. 그리 생각을 하며 아랫입술을 툭 내밀던 마기휼은 동굴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서선 위를 올려다봤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앞서가는 아이작을 놓치면 이상한 곳에서 미아가 되겠다 싶었던 마기휼은 일단 그를 쫓아갔다.

아이작은 네모난 모양으로 된 돌 위에 섰고 마기휼도 그 위에 올라탔다. 한쪽에 난간 같은 것도 있어서 그 위에 한 손을 대는 순간 갑자기 바닥이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놀란 마기휼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사색이 되었다.

“우왓! 이건 뭐야!”

“움직이는 다리야. 이런 건 처음이겠지?”

“당연하지!”

똑바로 선 아이작은 태연했다. 이리되는 현상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가로, 세로 2미터 남짓의 공간의 끝부분에 앉은 채로 주변을 살피는 마기휼은 지금 이 상황이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식이었다. 지금 이 돌만 움직이고 있었다. 아래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 상당히 무서웠다.

그냥 평범하게 가면 안 되는 건가. 일부러 겁을 주려고 이런 방식을 선택한 거 아니야? 저놈이라면 그리하고도 남음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마기휼의 안색은 굳어졌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오만상을 찡그리다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디로 나가는 거야.”

미친 척 뛰어내릴까. 그게 아니면 위로 올라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검은 공간 너머로 보이는 물체에 안색을 굳혔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것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붉은 배였다. 그리 크지 않은 보통 크기의 배는 쇠사슬로 고정이 되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어떤 원리로 매달려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 공간은 평범한 동굴이 아니라 기지였나.

갑자기 움직이는 이런 이상한 돌 같은 것들도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암만 보고 싶어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재차 배를 보게 되었다. 디자인이 참 수수했다.

“저건 꽤나 고물인데?”

“붉은 해적선 뮤스테라다. 1500여 년 전에는 하늘을 모두 누비고 다녔지.”

1500년이라고? 저 배가 그렇게나 오래됐다는 거야? 말도 안 돼. 그 정도라면 삭고도 남았겠다며 마기휼은 불신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작은 붉은 배의 옆을 가리켰다.

“저것이 여신의 자리였던 곳이야.”

마기휼의 고개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별 관심은 없지만 그쪽이 보라고 하니 보는 것뿐이다. 그런 어필을 팍팍 냈다.

붉은 배의 옆으로 가느다란 기둥이 높이 솟아 있는 게 보였다. 그 위로 뭔가가 달려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여신의 자리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별것도 아닌 걸 두고 너무 거창하게 구는 거 아니야. 그런 걸로 두려움에 덜덜 떨 거라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라고. 마기휼은 빈정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황량하지 않아?”

“그래도 한때에는 저곳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지. 여신이라는 상징적인 인물로 인해서 말이야.”

이쪽이 빈정거리는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냐.

아이작의 말을 듣고 있으면 참 이상했다. 여신이라니. 하늘의 땅이라니. 이쪽은 그런 거 관심도 없었다. 물론 1500여 년 전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란 말이야. 그건 망상이라니까. 그걸 믿고 뭔가를 하려는 이놈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광신도들 같지 않은가.

원래 본인들의 뜻이 절대적이라 생각하며 그것에 매달리는 놈들이 가장 위험한 법인데 말이다.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난 그저 아이작이라는 이름을 지닌 돌연변이일 뿐이야. 엔온에서 한 자리를 꿰고 있고, 지금은 같은 무리가 수용할 수 없는 돌발행동을 함으로 인해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지.”

“……지금 이 행동들이 엔온 전체의 뜻이 아니라는 건가.”

“물론이야. 그 겁쟁이들은 변화와 혁신을 원치 않아. 안주하고 약탈할 따름이지. 미개하고 멍청한 것들이다.”

멍청한 것들이라니. 그래도 일단은 네 편이잖아.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는 거야? 엔온도 내분이 있는 모양이로군. 그리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려는데 갑자기 아이작이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기휼은 놀라 움찔했다.

마기휼은 어느새 양반 다리를 하고 편하게 앉아 있었다가 무안함을 느끼는 듯 무릎을 세웠다. 그런 모습에 아이작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옛날이야기를 해보도록 할까?”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하늘의 땅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할 건데 듣고 싶지 않나?”

“…….”

그런 거라면 듣고 싶었다. 내내 알 수 없었던 것의 실체가 밝혀지는 건가 싶었던 마기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바닥이 덜컹거렸다. 또 뭔가 싶었던 마기휼은 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내 판이 정지하고 아이작은 먼저 아래로 내려가 마기휼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일단은 내리도록 하지.”

“혼자서 일어설 수 있어.”

실제로 벌떡 일어난 마기휼은 아이작을 노려보며 그 옆을 지나쳤다. 먼저 계단을 내려선 그를 흘겨본다. 왜 안 내려오냐. 그리 말하고 싶은 듯 쳐다보는 시선에 아이작은 피식- 하고 웃었다. 아이작은 느리게 계단을 내려와 평지에 한쪽 발을 내렸다. 그리고 앞장을 섰다.

다시금 동굴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아이작의 말이 시작되었다.

“예전 하늘 위에 땅이 존재하고 있었을 때, 그 땅 위의 지배자를 모두가 여신이라 칭했지. 그녀들은 하늘의 모든 걸 통치하고 아래 땅을 지배했어. 하늘의 땅과 여신의 존재와 힘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이들은 감히 그들과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 하지만 간간히 이상한 놈들은 있기 마련이고, 대항하는 이들은 여신의 땅에서 내려온 군함이 응징했지. 여신과 그녀의 군대는 막강한 힘으로 아래 땅의 모든 걸 억압했어.”

하늘의 땅이 아래를 억압하는 건가. 어느 시대든 그런 건 똑같구나.

마기휼은 그냥 옛날 옛적 이야기를 듣는 느낌으로 가만히 있었다.

“당시 하늘에는 해적이 있고 인어가 있었다. 인어는 포악하고 남자를 사냥해 아이를 가졌지. 여아만이 인어가 될 수 있었고, 남아는 태어나는 즉시 죽거나 대단히 운이 좋아야 살아남을 수 있었어. 그렇게 만들어진 인어들 사이에서 힘의 격차가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가장 강한 인어는 특별히 하늘의 땅으로 들어가고 여신의 위업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지. 그리고 여신을 쓰러뜨리면 그 인어가 다음의 여신이 되는 것으로 돌아가는 세계였어. 이건 당시 아주 큰 비밀이었지. 지금도 비밀이고 말이야. 저 삼국이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는 비밀, 말이야.”

마기휼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인어라니. 너 정말 왜 이러는 거냐. 그런 느낌이 강했던 마기휼은 아이작을 흘겨봤다. 그 얼굴로 한심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너에게 필요하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듣지 않으려는 것뿐이겠지.”

“아니. 그 이야기가 지금 이 상황에서 꼭 들어야 하는 건가 해서 말이야.”

“꼭 들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곤란해질 테니까. 라울 대신에 희생당하고 싶진 않겠지.”

“……희생이라고?”

나와 라울이 왜 희생을 당해야 하는 건데?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기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작은 본인의 말을 할 따름이었다.

“하늘의 땅을 지탱하는 건, 바로 가장 강한 인어지. 그 피를 이어받은 자만이 하늘의 땅을 지탱할 수 있는 거야. 그 원리로 지난 1500여 년 전 하늘의 땅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거다. 그 원리를 이용해서 일을 도모할 거야.”

“기다려. 가장 강한 인어의 피를 가진 게 라울이라는 거야. 뭐야?”

“삼국에 존재하는 각 왕통이라는 건, 그들이 원하는 가장 진한 피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지. 그것이 바로 인어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이라는 거다.”

라우젝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연방국의 왕족들은 저들끼리 혼인을 하고 피를 진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을 말이다. 그로 인해 그들 사이로는 명과 건강의 문제가 생겨난다는 말도 들었다. 그때 그 말과 지금 아이작이 한 말이 겹쳐졌다.

아이작은 마기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양팔을 벌린 그는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어의 피. 가라앉은 땅을 다시 위로 올릴 수 있는 원동력. 우리는 그것이 바로 라울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 피를 사용해서 이 땅을 하늘로 올리고 그곳의 주인이 된다. 이 세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하얀 눈동자. 그 눈동자에 서린 건, 강한 의지였다. 꼭 해버리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미친놈.”

정말 딱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은 동력을 사용해서 배와 군함이 뜨고, 차가 달리는 시대였다. 그런 곳에서 하늘의 땅이라고? 인어라고? 피라고? 그게 다 뭐야?

마기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당장 아이작에게 삿대질을 했다.

“넌 미친놈이야! 이게 무슨 공상과학 소설인 줄 알아?! 꿈 깨시지! 최면인지 뭐시기로 사람들을 네 뜻대로 움직이다 보니 뭐가 똥이고 뭐가 지랄인지도 모르는 거냐?! 헛소리 작작 하지 못해?!”

마기휼은 진정으로 화가 났다. 그 어떠한 확신도 없고 정확성도 없었다. 이건 그저 놈들의 망상에 불과했다. 그런 걸로 인해 지금까지 이런 일이 생겨났던 걸까? 이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에 끌려가고 있었다는 건가.

라울의 말이 옳았다. 이런 놈들하고는 타협은 필요 없었다. 미친개에게는 그저 몽둥이가 최고인 법인데!

정색을 하는 마기휼을 본 아이작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 이해하기엔 무리가 따르는 모양이로군.”

중얼거린 그는 선글라스의 끝을 잡아 위로 살짝 올렸다.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아이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주변이 밝아졌다. 어두운 곳에 서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직도 동굴을 걷고 있는 중이라고만 생각을 했던 마기휼은 당황해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밝은 빛이 익숙해질 즈음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뜬 마기휼은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공터라 부를 수 있는 공간. 그곳에는 스물 남짓의 사람들이 있었다. 원을 그린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들이 불량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 여기에 와 있었던 거지. 그보다 저놈들은 뭐야. 마기휼은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놈들은 또 뭐야.”

“우리들도 지금은 모든 게 처음이니까 가능한 역사를 따라 할 수밖에 없지.”

“역사라고?”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건 벽면의 그림이었다. 제단에 사람이 누워 있고 그 배를 가르고 심장을 꺼낸다. 그걸 신께 바치는 것이었다. 신께 바침으로 인해 본인들이 소망하는 것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뭐야? 이놈들 지금 라울의 심장을 파내겠다는 거야. 뭐야?

믿을 수 없었던 마기휼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대조적으로 아이작의 미소는 한결 진해졌다.

“라울로 끝내게 되기를 원하네. 안 그러면 마기휼 너도 곤란해질 거야.”

반사적으로 양손으로 배 앞을 가렸다. 이내 본인의 행동에 놀라 팔을 내렸지만 그 얼굴은 이미 굳어진 채였다. 창백하게 질린 마기휼의 안색을 확인한 아이작은 한쪽 입술 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걱정하지 마. 넌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배만 살짝 갈라 아이만 꺼내도록 하지. 그 크기라면 심장이 아니라 전체를 다 바칠 수 있을 거야. 여신께서 더 만족하시지 않겠나?”

“미친놈.”

아까도 말했지만 저건 진짜 미친놈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놈을 어떻게 하면 좋지?

정말 당황스러웠다. 이놈들 단체로 미친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짓을 꾸밀 수 있지?

초반 마리아가 라울을 데리고 가려 했을 때 말했던 타협이라는 의미가 이런 거였나? 말도 안 되는 하늘의 땅과 라울을 앞세워 뭔가를 요구하려는 거다. 마기휼이 볼 때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 전설을 맹신하는 이들이나 그 피를 지키는 이들이라면 아이작이 이리 말을 했을 때 동요를 보일 수 있었다.

놈들은 지금 두 가지의 일을 해낼 수 있었다.

라울과 하늘의 땅을 엮어 노르디아 및 다른 두 연방국에 압력을 가하고, 동시에 라울의 심장을 꺼내 이 땅을 하늘로 올린다는 말도 안 되는 방식 말이다.

정말 미친놈들이었다. 마기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속을 읽을 수 없는 얼굴들이었다. 마치 가면을 쓴 듯이 무표정을 하고 있는 자들 사이에 서선 점점 더 초조해진다.

마기휼은 아이작을 노려봤다.

“나는 납치를 했다지만 라울은 어떤 식으로 불러들일 생각이지? 놈은 머리가 좋아. 암만 네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이리로는 쉽게 데리고 올 수 없을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마. 네가 있으니까. 널 미끼로 하면 그놈은 올 거다.”

확신을 품은 말에 마기휼은 당장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웃기는 소리 하네. 나를 미끼로 삼는데 왜 라울이 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아이작. 아스카로부터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지금 라울 대령과 함께 이쪽으로 오는 중이라 합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사내의 말이 날아왔다. 동시에 마기휼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듣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마기휼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아이작은 차분히 말했다.

“들었지? 네가 여기에 있으면 그는 온다. 사랑하는 여자와 아이가 있으니 말이야.”

마기휼은 바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마기휼의 입가로 어색한 웃음이 걸렸다.

“……여자라고? 이게 지금 장난하나.”

난 지금까지 남자로 살았고, 암만 봐도 여자 얼굴은 아니거든? 그리고 아이가 뭐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하란 말이야.

언제나처럼 부정하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하지만 이쪽을 응시하는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작의 안구가 반질거린다. 이미 모든 결정을 내린 얼굴이었다. 이쪽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저 저 좋을 대로 하려는 인간의 얼굴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된다. 이 우습지도 않은 장단에 박자를 맞춰야 하는 건가. 라울. 왜 오는 거야. 오지 말 것이지. 네가 오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거냐.

앞에 없는 라울을 생각하며 마기휼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질려 갔다.

한 15여 분 정도를 달린 것 같았다. 갑자기 시동이 멈추는 걸 느낀 라울은 고개를 돌렸다. 아스카는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라울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리시지요.”

“벌써 다 온 건가?”

“지금부터는 다른 방식으로 이동할 겁니다.”

다른 방식이라는 말에 라울은 순순히 아스카를 따라 움직였다. 차 바깥으로 나오자 더 시원한 것 같았다. 차 안은 정말 더웠다.

손등을 들어 턱 끝에 맺힌 땀을 닦아 낸 라울은 차 너머로 움직이는 아스카를 확인했다. 아스카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멈춰 서선 라울을 바라봤다. 그리로 오라는 건가.

라울은 차량을 지나 아스카의 옆으로 다가섰다. 아스카가 조금 더 옆으로 오라는 듯 손짓을 한다.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순순히 다가서자 바닥이 조금 흔들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서 있던 지점이 내려가게 됨에도 라울은 동요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이 서 있던 곳은 지하로 내려앉고 있었다.

머리 위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라졌다. 천장이 위로 생겨나고 떨어지던 모래의 수도 줄어들었다. 어느 순간 라울과 아스카가 서 있는 곳으로 칸막이 같은 것이 생겨났다. 라울은 중얼거렸다.

“엘리베이터인가.”

“1500여 년 전의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지요?”

말을 하며 주변의 것들에 손을 대는 아스카는 능숙했다. 버튼을 누르고 방향을 트는 것도 이미 여러 번 해본 솜씨였다. 그걸 확인한 라울의 표정은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너희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거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지요. 저희가 지내기에는 바깥쪽보다 안쪽이 더 수월하답니다.”

눈에 띄는 돌연변이는 삼국 중심가로 나아갈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돌연변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의 생활에 섞이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랐다. 주변 눈치도 보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모두가 기피하고, 그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덥고 식량 조달에 어려움이 있을 뿐이지 그 외에는 바깥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편안했다. 때문에 이곳 레드존에 상주하는 이들은 그 숫자가 꽤 되었다.

“삼국이 암만 감시의 눈길을 보낸다 한들, 마음만 먹으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곳은 여신의 가호가 닿는 곳인지라, 때때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들은 그들에게서 저희들을 숨겨주기도 하니까요.”

자기장 폭풍이 불 때에, 군함은 이곳을 통과하지 않는다. 운이 나쁠 때에는 죽을 확률도 높고 추락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이쪽이 몸을 사리는 동안 이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무작정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산맥을 넘거나 바다를 통하는 방식도 있었을 거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이 안으로 들어와 그들만의 터전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레드존에 남아 있는 여신의 땅을 이용해서 말이다.

“이곳의 모든 곳을 가봤나.”

물음에 아스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모르는 곳이 많습니다. 저희들은 단지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부분을 출입할 뿐이고, 아닌 곳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지요. 우리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다릅니다.”

고개를 든 아스카는 라울을 똑바로 바라봤다. 열망이 서린 아스카의 뜨거운 눈빛과 달리, 그런 그를 바라보는 라울의 태도는 냉랭하기만 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실제로 라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라울은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괜찮아 보이는 강한 모습에 감탄밖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직접 보고 나니 알겠습니다. 당신은 특별한 존재이고 선택된 사람입니다. 당신이라면 우리가 갈 수 없었던 곳까지 들어갈 수 있겠지요.”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로 열망이 서렸다. 그걸 확인한 라울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런 식으로 날 쳐다보지 마라. 역겹다.”

순간 아스카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어린 얼굴 위로 추악한 감정이 드러난다. 이내 그걸 내리누른 아스카는 입술 끝을 씰룩였다.

“제가 역겹다고요?”

“그래. 역겹다. 너희는 모두 악취가 나는 것들이야. 본인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남에게 전가를 하고 있다. 그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얼마나 더 피를 흘려야 하는 거냐. 지금 이 체제에 타협을 하고 적응을 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단지 새로운 걸 시작하려고만 하지. 그런 너희가 진짜로 새 시대를 얻게 되었을 때, 제대로 그걸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 다시금 빼앗기게 될 것이고, 너희는 다시금 남 탓을 하겠지. 결국 그 정도밖에 되지 못 하는 놈들인 거다.”

라울은 입을 다물었지만 아스카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라울을 노려본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라울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쳐줄 수 있다. 그리 말하는 눈빛과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멈춰 서 있었다. 적막함이 감도는 곳에 아스카와 라울은 서로를 바라본 채로 있었다. 그 침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스카의 등 뒤로 문이 열렸다.

“아스카. 너답지 않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아스카가 몸을 돌렸다. 열린 문 바깥쪽으로 하얀 망토를 몸에 두른 여성이 나타났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작고 하얀 얼굴은 매력적이었다. 단발 형식의 웨이브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매력을 증폭했다.

라울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안녕. 라울.”

“지긋지긋하군.”

인사를 하기가 무섭게 나오는 말에 마리아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웃음도 사그라진 마리아는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이런 상황인데도 건방지네. 짜증 나게.”

마리아는 당장 총구를 세워 라울의 턱 아래를 눌렀다. 그녀의 행동에 놀란 듯 아스카는 마리아를 만류했다.

“그만둬. 위험하잖아.”

“상관없지 않아? 필요한 건 심장뿐이야.”

총구가 턱 바로 아래에 있음에도 라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로 라울은 덤덤히 물었다.

“나를 제물로 쓸 생각이냐.”

“이래서 영리한 사내하고는 대화하는 재미가 있어. 쓸데없는 설명은 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런 되지도 않는 전설을 정말로 믿는 거냐.”

“안 믿어.”

짤막하게 대꾸한 마리아는 총을 허리춤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빈정거렸다.

“안 믿어도 무슨 상관이야. 실패해서 네가 죽는다 한들 무슨 상관이냐고. 아무런 상관없어. 이게 아니면 다른 방식을 찾으면 되는 거고 말이야.”

“한심하군.”

“말 좀 가려서 해. 지금 너무도 총구를 당기고 싶어졌거든?”

마리아의 눈초리는 무시무시했다. 아직도 너에게 맞은 어깨가 욱신거려 아파 죽을 것 같다는 듯 바라보던 마리아는 짧게 코웃음을 쳤다.

“네가 이렇게 제 발로 걸어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덕분에 마기휼이 무사하게 된 거잖아? 난 그가 마음에 들거든. 죽이고 싶지 않아.”

그쯤 해서 그만두었으면 좋았을 터였다. 하지만 마리아는 옆으로 몸을 물리며 들으라는 듯 빈정거렸다.

“마기휼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걱정하지 마. 엔온의 한 축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주지. 마기휼의 외로움은 내가 달래줄게. 난 양쪽 다 되는 사람이니까.”

순간적으로 라울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날카롭게 변하는 얼굴에도 마리아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라울에게서 저런 표정을 이끌어내는 게 재미있기까지 했다. 흥미롭다는 듯 한쪽 입술 꼬리를 비틀려 올린 마리아는 턱짓을 했다. 이동 시켜. 그 사인을 읽은 아스카는 라울의 등을 살짝 눌렀다.

“가시지요.”

라울은 순순히 아래로 내려갔다. 혹여라도 라울이 반항하면 그걸 빌미 삼아 한두 대 칠 생각을 하고 있었던 마리아는 혀를 찼다. 애석함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는 내려갔다.

앞장 서는 마리아의 뒤를 따르며 라울의 눈동자가 주변을 살폈다. 좁은 복도였다. 길은 앞으로 이어진 것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꽤나 짧아서 10미터 앞으로 문이 하나 있었다.

“지금부터 어디로 가는 거지.”

“왜? 벌써부터 무서워진 거야? 걱정하지 마. 아이작은 격식 차리는 걸 좋아하거든. 책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해야만 성이 풀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야. 한 시간 후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빈정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눈빛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꽤나 나를 미워하는군.”

“그러면 좋아할 수 있겠어? 아직도 너에게 맞은 어깨가 아파 죽겠단 말이야.”

“이마를 관통시키지 않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게 아닌가.”

“……빌어먹을 자식.”

이를 악문 마리아가 라울 쪽으로 접근을 하려 하자 아스카가 당장 그쪽으로 팔을 뻗었다. 고개를 젓는 얼굴이 단호했다.

마음만 먹으면 아스카를 밀쳐 내고 당장 라울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었지만 여기서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낼 순 없었다. 재미없다는 듯 마리아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들어가. 그 뻔뻔한 얼굴도 조금 있으면 바이바이야.”

주먹으로 벽을 치자마자 커다란 문이 열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아가리를 쩍 벌리는 것 같았다. 아스카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간 라울은 나타난 공터와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안색을 굳혔다. 그 무리의 중심에 아이작이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라울 대령.”

환영한다는 듯 양팔을 벌린 사내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이곳에 있는 자들 중에서는 가장 강한 분위기를 풍겼다. 웃고 있는 얼굴이 마치 굶주린 맹수와도 같았다. 암시장에서 언뜻 봤을 때와는 그 존재감이 다르다고 느끼며 라울은 그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네가 아이작인가.”

“그렇습니다. 절 알고 계시는군요.”

“모를 수가 없지 않은가.”

아이작과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선 라울은 주변을 살폈다. 오른쪽, 왼쪽을 돌아봐도 그가 찾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눈앞에 있는 것들이 그를 숨겨 둔 모양이었다. 최후의 인질로서 말이다.

“마기휼은 어디에 있지?”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믿지 않는다. 그를 데리고 와라.”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왕통을 지닌 소중한 마기휼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것입니다.”

“난 너희를 믿지 않는다. 그것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 되었을 거라 믿는다. 그러니 입 아프게 다른 말을 하게끔 하지 마라.”

라울의 말이 진행되는 동안 마리아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그리 말하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당장 총을 빼 들어 라울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꽤나 세게 밀어 넣었음에도 라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는 재차 요구했다.

“마기휼을 내 눈앞에 보여.”

입을 다물고 똑바른 시선을 던지는 라울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지금 처한 상황을 보면 그가 불리하다는 걸 누구라도 알 텐데 왜 저렇게 자신만만한 건지 모르겠다. 마리아는 화가 난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아스카는 가만히 있었다. 판단을 내리는 건 아이작이었다.

무표정을 하고 있던 아이작이었으나 서서히 그 입술 꼬리가 올라간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는 중얼거렸다.

“마기휼도 그렇지만, 당신도 꽤나 흥미로운 인간입니다.”

“딴말은 하지 말고 마기휼부터 보여.”

아이작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정말 푹 빠진 모양이로군.”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뒤에 서 있던 이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데리고 와라.”

아이작의 명령을 받은 이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움직이자 라울은 재차 눈앞에 있는 아이작을 노려봤다. 그가 무슨 꿍꿍이를 벌이지나 않을까 싶어 바라보는 그 눈초리가 매섭다. 마리아는 라울을 노려봤다. 허락만 된다면 당장 어찌 해버리고 싶다는 듯 자꾸만 총을 만져 댔다. 그때 안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선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왜 사람을 자꾸 오라 가라 해. 이러면 성격 좋은 나도 가만히 안 있어? 싫은 소리 해도 뭐라 하지 마! 너희가 지금 나한테 잘못하는 거잖아!”

목소리가 보다 선명하게 들리고 통로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양쪽으로 팔이 붙잡혀 있어 자유로운 움직임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질질 끌려오면서도 사내는 기가 살아 시끄럽게 굴었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던 마기휼은 아이작과 그 앞에 선 인물을 발견하고는 흠칫했다.

“……라울?”

마기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렇게 빨리 오다니. 이상하잖아?’ 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얼굴은 이내 당혹으로 굳어졌다. 라울이 갑자기 거침없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불현듯 움직이는 라울의 행동에 당혹스러운 건 마기휼 뿐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당장 그쪽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얌전히 있지 못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아쇠를 당겼고, 아이작이 그런 마리아의 손목을 내리쳤다. 총알은 바닥에 박혔고 마리아는 손목을 감싼 채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리아는 이를 악문 채로 아이작을 노려봤다.

“무슨 짓이야?!”

“지금 네가 내 일을 망치려는 거냐.”

살벌한 시선에 마리아는 주춤했다. 하지만 곧 표독스럽게 쏘아봤다.

“시간 끌지 말고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거야. 그걸 왜 모르지?”

“그렇게 함부로 막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성스러운 의식이야. 그걸 방해하지 마. 아무리 너라 해도 용서치 않을 거다. 마리아.”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차가웠다. 그 눈빛을 마주한 마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이내 날카롭게 말했다.

“아이작. 하나 잊었나 본데 저들은 우리보다 막강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 나타나 있을지 모른다고. 놈들은 우리들과 타협하지 않아. 오로지 힘으로 억압할 따름이야. 그러니 일단은 할 일만 하고 실패하면 도망가야 해.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야!”

“나는 언제나 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마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쪽이 하는 말에 대해선 이해는 하지만 공감은 할 수 없다는 듯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는 것을 확인한 아이작은 양팔을 펼쳤다.

“한 끗 차이겠지. 하지만 잘하면 모든 것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다. 하늘의 땅을 얻는 자가 세계를 통제하게 되지. 그 기회가 지금 내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거야.”

고개를 돌린 아이작은 마기휼 앞에 선 라울을 바라봤다.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을 확인한 아이작의 입가로 한줄기 미소가 그려졌다.

“조금 더 이 감미로운 설렘을 만끽하게 해줘.”

아이작의 얼굴로 만족스러움이 번진다. 그걸 확인한 마리아는 아랫입술을 깨무나 싶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목을 쥐고 천천히 문지르며 라울을 노려봤다. 그 눈초리가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도 같았다.

끌려 나올 때는 지랄거리던 마기휼도 막상 라울을 앞에 두고는 입을 벙긋도 할 수 없었다. 굳은 얼굴로 있던 마기휼은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이내 다물었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로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라울이 이리로 온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에는 정말 기가 막혔다. 제 발로 호랑이굴 속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보게 되면 당장 한심한 놈이라고 해주려 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자신들이 참으로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거지.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색을 굳힌 채로 눈을 내리뜨는 마기휼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라울은 물었다.

“몸은 괜찮나?”

“……아프지는 않아.”

“아이를 가졌다고 들었다.”

마기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소리를 낼 뻔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걸 필사적으로 참으며 마기휼은 라울을 올려다봤다. 이쪽을 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지했다. 잘못한 것은 한 개도 없는데 차마 라울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마기휼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나, 나도 안 지 얼마 안 되었어. 일부러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야.”

“지금 후회를 하고 있나?”

흔들던 손이 멈춰진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다소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쳐다보는 눈동자에 의문이 담겨 있는 걸 확인하며 라울이 재차 물었다.

“후회가 되나?”

의문은 이해로 바뀌었다. 라울이 묻고자 하는 걸 잠시 생각해보던 마기휼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아.”

“그러면 싫은가.”

싫다니. 그건 너무 극단적이잖아. 그나저나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보는 눈들도 많은데. 무안해서 구시렁거리던 마기휼은 막상 라울을 보는 순간 멈칫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라울은 너무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쪽이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지 않으면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하여튼 고집은. 거기다가 끈질긴 면도 있었다. 결국에는 본인이 원하는 걸 듣고서야 물러날 거다. 그런 라울의 성격을 알기에 마기휼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아. 그러니까 나는…….”

마기휼은 입을 다물고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더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갔다.

“……솔직히 아직은 혼란스러워.”

“싫지는 않다는 거지.”

그래. 싫지는 않았다. 그렇게나 거부하던 임신인데 왜 싫지 않은지 모르겠다. 저기 사막 가운데에 서서 머리를 부여잡고 ‘내가 미친 거냐!’라고 소리를 치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마기휼은 자신 없이 웅얼거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내 책임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마기휼 너만 알아서 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건 우리가 서로 생각을 해보고 책임을 져야 할 문제다.”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빠르게 뛰었다. 갑자기 얼굴로 피가 쏠린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더듬거렸다.

“괜히 멋진 척하지 마. 그래 봤자 이런 상황이잖아.”

너나 나나 뭘 할 수 있겠어. 주변이 온통 적인데. 이런 위험한 곳에 너 혼자 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정말 계획성 없다. 어이가 없을 따름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마기휼은 더 말을 하지 못했다.

라울은 손을 뻗어 마기휼의 손목을 감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마기휼은 그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라울이 속삭였다.

“미안하다.”

“…….”

심장 안쪽으로 직격으로 오는 알싸한 감정에 마기휼은 울고 싶어졌다.

마기휼의 얼굴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 표정 하나하나를 모두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에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이만 떨어지는 게 어떻겠나?”

한창 분위기 좋을 때였다. 알게 모르게 꽃향기가 나는 것도 같은 착각 속에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는 그 모든 환상을 처참하게 부숴버렸다. 아차 싶어 고개를 들자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이쪽을 보는 마리아가 보였다. ‘한심하네.’ 그리 말하고픈 얼굴을 하고 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지금 당장 쥐구멍 속에라도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어지럽게 눈동자만 굴려 대고 있으려니 아이작이 재차 말을 꺼냈다.

“이제 슬슬 시작하고 싶은데 말이야.”

라울의 손은 여전히 마기휼을 잡고 있었다. 그 상태로 라울은 물었다.

“너희들이 원하는 건 내 피를 이용해서 이곳을 하늘로 띄우는 건가.”

“그래. 바로 그거다.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피로만 된다면 굳이 심장을 꺼내지 않을 테니까.”

“내 심장을 꺼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못 꺼낼 것도 없잖은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걸 위해서는 말이야.”

“이루고자 하는 것이라.”

중얼거린 라울은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잠시 동안 무표정을 하고 있던 라울은 아이작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거 알고 있나. 아무거나 골라잡는 건 위험한 일이다.”

“아무거나 골라잡지 않았다. 나는 딱 필요한 존재를 선택했지. 바로 너 노르디아 공국의 라울을―”

“노르디아에는 이제 더 이상 인어의 피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호한 말에 아이작의 표정이 변했다.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이내 그 얼굴로 불쾌함이 서렸다.

“……그건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다. 지금 노르디아 왕실에 흐르는 피는 괴물의 피다. 독선과 아집과 욕망과 분노와 좌절. 본인들이 만들어낸 세계에 틀어박힌 되지도 않는 것들만 남아 있을 따름이야.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내 피를 사용한다 한들 얻어낼 수 있는 건 없다.”

라우젝과 오르베. 그리고 자신. 모두가 왕통이었다. 그 외에 달리 존재하는 왕통도 분명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주목 받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가장 그럴싸하기 때문이었다.

남들 눈에 내보여도 부족함이 없는 듯싶으니까. 수치스럽지도 않으니까. 가장 정상인 것처럼 보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앞으로 내세워지는 것일 뿐이었다. 현재 존재하는 노르디아 연방국의 왕통이라는 건 고작 그런 의미였다. 피가 진한 걸로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안되었군. 실망하게 만들어서.”

아이작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잠시 생각을 하다가 라울이 시간을 벌기 위해 저런 말을 한다고 판단을 내린 건지, 그는 곧 표정을 수습했다.

“그런 말로 이쪽을 동요하게 할 셈인 모양인데 의미 없는 일이다. 이미 우리는 확신을 품고 있으니까.”

“그런 근거 없는 확신과 자신감 때문에 네놈이 삼류인 거다. 진짜로 일을 도모하려 했으면 내가 아닌 여왕을 선택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라울의 말에 반응을 보인 건 아이작도 마리아도 아닌 마기휼이었다. 입을 반쯤 벌린 그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냐는 눈빛을 던졌다.

라울은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여왕이 가장 강한 인어의 피를 지니고 있다. 빤히 아는 걸 외면하고 이차적인 대용품인 나를 선택하다니. 넌 진심으로 이걸 원치 않아. 결국 네가 그토록 원하고 도모하려는 일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거다. 안되었군. 지금 하려는 이 알량한 짓거리도 결국 네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듯싶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게 네 한계인 거겠지. 이게 바로 네 그릇인 것이다.

라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떠졌다. 그 속으로 숨겨지지 않는 경멸이 서렸다.

“이런 오합지졸들 무리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니 기분 좋았나? 우쭐하겠지. 이곳은 너의 그 유치한 뜻과 이상을 떠받들어 줄 테니 말이야. 그로 인해 넌 만족감을 느끼고 그것이 전부라고 맹신했겠지.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치 않아. 그런 것에 상관없이 여기에 있는 놈들은 결국 네 뜻을 따라줄 테니까. 지금 이 모든 일은 단순히 너의 그 연극 무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망쳐도 상관은 없을 거야. 다른 막을 열면 될 테니까. 그런 식으로 넌 네 환상을 쫓아 영원을 살게 되는 거다. 남는 건 하나도 없는 그런 소모적이고도 쓸데없는 짓거리를 반복하면서 말이야.”

라울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입을 다물자 내부는 지나칠 정도로 조용해졌다.

마기휼은 안절부절 못해했다. 아이작이 당장 미처 날뛰는 건 아니었지만 눈초리가 무시무시했다. 마기휼은 긴장한 채로 라울과 아이작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순간 아이작의 한쪽 입술 꼬리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정답이야.”

아이작이 앞으로 다가오나 싶었을 때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날아오는 주먹을 라울은 피하지 않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라울이 바닥으로 쓰러지자 놀란 마기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라울!”

당장 라울에게 달려가려 하자 근처에 있던 놈들이 팔을 붙잡았다. 라울에게서 떨어뜨리려 하자 마기휼은 당장 팔을 휘둘렀다.

“젠장! 손대지 마!”

예민하게 반응을 보이는 동안 몇몇이 더 마기휼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는 동안 바닥에 주저앉은 라울을 내려다보며 아이작은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작 그 정도의 인간밖에 되지 않아. 나는 오합지졸이지. 그걸 네 입으로 말하지 마라. 너처럼 잘나고 모든 걸 갖춘 자가 그런 식으로 지껄이면 화가 나거든. 마리아.”

아이작의 부름에 마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아가며 품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게 말했잖아.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라울이 이곳에 들어오는 즉시 실행해야 할 일이었다. 모든 곳이 여신의 땅이었다. 어디에 피를 흘려도 될 일이었다. 그리고 라울의 피에도 이곳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그냥 없애버리면 그만이었다.

검을 들고 다가오는 마리아의 모습이 무시무시했다. 붙잡으려 하는 놈들에게 주먹을 선사한 마기휼은 급히 라울의 뒤로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젠장! 일어나! 피하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왜 이러나 싶어 마기휼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급한 건 이쪽뿐이었다. 라울은 바닥에 앉은 채로 다가오는 마리아를 쳐다볼 뿐이었다. 지금 자기를 죽이려 접근하는 건데 뭘 이렇게 앉아만 있는지 모르겠다.

굳은 라울의 얼굴을 바라보던 마기휼은 이내 마리아를 쳐다봤다.

“잠깐만 기다려!”

앞으로 손을 뻗자마자 마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한 손에 칼을 빙글빙글 돌리는 폼이 마치 ‘죽이기 전에 말이나 들어보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마기휼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라울을 건드리면 노르디아 연방국 전체가 움직일 거야! 이놈은 미래 여왕의 부군이 될 거라고!”

“그러면 네 배 속의 아이는 뭐가 되는데? 마기휼. 너 혼자 애 카우는 거 아니야? 가엽게도. 그런 제멋대로인 사내는 내버려 두고 나랑 다시 시작하는 거 어때?”

이쪽이 꺼낸 말에 역으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동시에 화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던 마기휼의 얼굴이 점점 험악하게 변했다.

“난 장난하자는 게 아니야! 이게 다 마리아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난 진짜로 널 걱정하고 있는 거라고!”

“나도 진심으로 마기휼 널 걱정하고 있어.”

차가운 말에 마기휼은 성을 내던 모습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굳은 마기휼을 노려보며 마리아는 말했다.

“네가 라울의 아이를 낳게 됨으로 해서 얻을 게 뭐지? 아이를 낳아 봤자 바로 빼앗기게 될 거야. 사내의 몸으로 아이를 낳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네 몸은 너덜너덜해질 거고, 믿었던 저기 저 라울이라는 사내에게 버림을 받으면 마음에도 큰 상처를 입게 되겠지. 넌 이용당할 대로 당하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어. 사내인 네가 노르디아의 왕통을 낳았다는 진실은 저기 위에 있는 자들에게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이 될 테니 말이야. 나는 그런 꼴 보기 싫어.”

일그러지는 마리아의 얼굴에 마기휼은 심장이 뛰었다. 그의 눈동자가 떨리는 걸 확인한 마리아가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지막 권유야. 우리들에게 와. 배 속에 있는 아이도 지워주지. 이곳에 있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어. 모두가 너와 같은 입장이니까 네 신체에 대해 뭐라 할 사람은 없어. 이곳에서 너는 존중 받을 수 있어. 그리고 얼마 전까지 네가 살던 모습 그대로 마음대로 살 수 있어. 가족이나 라울, 그리고 아이, 모든 것에서 자유가 되어 너 하나만 생각하고 살면 되는 거야. 그 얼마나 행복해. 안 그래?”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도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마리아는 혀를 찼다.

“순진하기는. 착해 빠졌다니까. 뭐, 그게 나쁘지 않지만―”

중얼거린 마리아가 앞으로 크게 한발 내디뎠다. 바로 그때 라울이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마리아는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녀는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한쪽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미 마기휼과의 대화를 통해 충분할 정도로 시간을 끌었어. 더는 하지 않아.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쓸데없는 생각이 아니라 너를 위해 충고를 하는 거다. 마기휼은 아무래도 네가 죽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으니까.”

“지금 마기휼이 걱정할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야.”

대화를 하면서 질질 시간을 끄는 건 이제 질렸다. 한 방이면 되었다. 죽은 이의 심장이라도 피가 흐르고 있으니 효력은 있을 터였다. 아이작이 원하는 대로 제단에 라울의 심장을 올리면 되는 거다. 그로 인해 달리 변화가 생기면 좋을 일이고, 아니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일단은 시도를 해봤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거였다. 마리아는 라울의 정수리 쪽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우리는 다른 자들과 달라.”

억압과 차별을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변종들과는 달랐다. 그런 나약한 이들과 달리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를 꾀할 거다. 그로 인해 얻어지는 모든 보상은 온전히 이쪽 것이 되어야 한다며 마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동시에 마리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쿵- 하는 진동이 퍼진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왓!”

앞으로 몸이 넘어간 마기휼은 단단한 바닥에 얼굴을 부딪쳤다. 아프진 않았지만 바닥이 계속 흔들려서 당황스러웠다. 그 손은 반사적으로 옆을 더듬고 있었다. 묵직한 것이 만져지자 그쪽으로 팔을 뻗어 끌어당겼다. 금발에 얼굴을 묻은 마기휼은 주변을 살폈다.

큰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바닥으로 인해 다른 놈들도 혼비백산인 상태였다. 엔온 일당은 우위에 있다는 생각에 느슨해져 있었기에 더 당황하는 것일 거다. 이쪽과 별반 다름이 없는 모습으로 바닥에 엎드려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런 어중이떠중이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아이작과 마리아였다. 마기휼은 그녀가 서 있던 장소를 쳐다봤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마리아가 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뭔가를 찾고 있는 걸 파악하는 순간 마기휼의 눈동자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놓인 총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그쪽으로 팔을 뻗었다. 총을 집어 드는 순간 마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다소 굳은 그 얼굴.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마기휼은 당장 총을 들어 마리아를 겨누었다. 마리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장난은 가시고 날카로움만이 남는다. 네가 날 쏠 수 있겠어? 그리 묻는 눈동자에 마기휼 또한 단호함으로 맞섰다.

지금 이 상황에서 너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다, 라는 눈빛을 던졌다.

눈빛에 담긴 살기가 느껴진 것인지 그녀의 안색이 더 굳어졌다. 분한 듯 어금니를 악무는 걸 확인하며 마기휼은 다른 손으로 라울을 붙잡았다.

“라울. 너 지금 괜찮냐?”

“……물론이다.”

하지만 목소리가 이상했다. 마기휼은 마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라울의 팔을 잡아당겼다. 몸을 일으키는 라울의 등에 팔을 두르는 순간, 손가락 끝으로 질척한 것이 묻어났다.

마기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다 해서 고개를 돌리는 멍청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왼쪽 옆구리. 관통은 아니고 스친 것인데 깊었다.

“……빌어먹을.”

마기휼은 라울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아도 따라 일어나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총을 쐈다. 탕탕탕. 3번의 총성과 함께 벽에 걸려 있던 등이 모두 박살이 났다. 중앙을 정확하게 겨누었기 때문에 핏- 하는 소리와 함께 전류가 나가버렸다.

일시적으로 어둠이 내려앉자 여기저기서 당혹스러운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뛰어!”

도망치려면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마기휼은 라울의 몸을 부축한 채로 달렸다. 라울도 잘 따라왔다.

다른 이들처럼 앞이 보이는 건 아니나 이쪽이 빠져나온 쪽은 기억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파편으로 인해 넘어질 뻔도 했으나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더 부지런히 걸음을 놀렸다. 얼마 안 있어 뒤에서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이 흔들려서 똑바로 걷기가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나왔던 통로가 큰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조금만 늦었다면 저기에 깔렸을까. 얼굴이 하얗게 질린 마기휼은 더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였다. 중간에 다리가 꼬여 비틀거리자 라울이 마기휼에게서 떨어졌다.

벽에 등을 기댄 라울은 눈을 내리뜬 채로 한숨을 토해 냈다. 그쪽으로 몸을 돌린 마기휼이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물었다.

“괜찮아?”

“괜찮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입만 살아선.”

마기휼은 옷을 찢어 라울의 손에 들려 줬다. 라울은 아무 말 없이 그것으로 상처 부위를 눌렀다. 조금 더 길게 천을 찢은 후 라울의 허리에 두른 마기휼은 “이 악물어.”라고 말했고 바로 매듭을 지었다.

허리가 조이는 통증에 라울의 안색이 굳어졌다. 통증으로 인해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한 번 더 감아주고 싶지만 뒤를 쫓는 이들이 있으니 그리할 순 없었다. 마기휼은 먼저 일어나 라울의 팔을 붙잡았다.

“일단은 누르고 있어.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간 후에 상태를 확인해줄 테니까.”

라울의 한쪽 팔을 어깨에 걸치고 걸음을 옮겼다. 라울도 잘 따라오고 있었다.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참을성 많은 라울의 안색이 굳어 있는 걸 보아 좋지만은 않은 듯싶었다. 피 냄새가 풀풀 났다. 피 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피를 흘리는 사람이 라울이라고 생각하니 점점 초조해졌다.

“아까 정확하더군.”

“뭐가?”

“사격. 테스트를 볼 때와는 다르던데?”

그런 건 또 언제 보고 있었던 거냐며 마기휼은 웃었다.

“나는 원래 주목 받는 게 싫어. 적당히 하면서 딱 중간 정도인 게 다른 사람들한테 밉보이지도 않고 찍히지도 않고 여러모로 편하단 말이야.”

“100의 힘이 있을 때 30 정도는 비축을 해 두는 건가.”

“왜 이래? 나 그렇게 능력 좋은 남자 아니야. 원래 위급한 상황일 때 초인적인 힘이 발휘된다고 하잖아. 지금이 그런 경우인 거겠지. 그 외에 별다른 이유는 없어.”

속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계속해서 바닥이 흔들리고 흙먼지가 떨어진다. 매몰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진다.

“조금 더 빠르게 걸을 수 있겠어?”

“걸을 수 있다.”

대답을 들어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마기휼은 라울 쪽으로 몸을 붙였다. 조금 더 이쪽에 체중을 실어도 된다는 말을 하려던 찰나 쿵, 소리와 함께 시야가 들썩였다.

몸이 위로 떴다가 내려앉았다. 바닥에 물결치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벽으로 최대한 밀착했다.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뭐야? 위에서 폭격이라도 있나?”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에 마기휼은 당장 라울을 쳐다봤다.

“너 군함으로 여기 공격하라고 했어? 그러면 너도 죽어.”

“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만 했다. 이리 움직이는 건 내 명령을 듣지 않는 이들뿐이겠지.”

“네 명령을 안 듣는 놈들은 다 잘라버려!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거잖아!”

“아마도 라우젝이 움직이고 있겠지.”

순간적으로 마기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기서 왜 라우젝의 이름이 나오는 건가 싶어 의문에 차 눈을 깜박이던 것도 잠시, 마기휼은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라우젝이 왜?”

“10여 년 전에 활약했던 하얀 매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했나?”

“하얀 매? 물론 들어봤지. 노르디아 왕실군이잖아.”

“라우젝은 그 하얀 매의 사령관이었어.”

말이 왕실군이지 크게 두각을 드러낸 적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군이 나서서 해결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때때로 모둔 군대를 통틀어 왕실군이 활약하는 때도 분명히 있었다. 10여 년 전이 좀 대단했었던 것 같았다. 하얀 매라는 이름이 노르디아 전역으로 퍼졌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이름은 금방 사라졌다. 이후로 왕실군이라는 이름이 크게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다.

라우젝이 하얀 매의 사령관이었다고? 그는 10여 년 전에 모든 걸 잃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노르디아 전역에 쟁쟁하게 울리던 그 명성은 모두 그의 것이었다는, 그런 말이야?

마기휼의 얼굴이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그러면 지금 바로 그 라우젝이 공격하고 있는 거야?”

“그래. 분명 이 지하를 전부 날려버릴 생각이겠지.”

“지하를 전부 날려버린다고? 그러면 우리도 죽어!”

“알아서 잘 도망가면 될 게 아니냐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무책임한 소리 하지 마!”

알아서 잘 도망가다니. 그게 말이나 쉽지, 정말 그리할 수 있을 턱이 없잖아. 이 상태라면 둘 다 이 지하에 매몰될 터였다. 사람이 좀 생각을 좀 해보라며 매섭게 눈을 치뜨는 마기휼이지만, 라울은 침착했다.

“일단은 날 따라와라.”

옆구리를 감싼 채로 라울이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마기휼은 기겁을 하며 당장 라울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를 가려고? 지금은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다 죽어!”

“이곳이라면 알고 있다. 그러니 따라와.”

여기는 하늘의 땅이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있다는 건데?

의문이 들어도 앞장서 걸어가는 라울을 재차 붙잡을 수 없었다. 불안한 듯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마기휼은 이내 그 옆에 달라붙어 팔을 붙잡았다. 부축을 하는 마기휼을 내려다본 라울은 그에게 약간의 체중을 실었다.

-다음 권으로 계속

WET NOVEL RED ZONE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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