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7)

#15

레드존에 진입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솔직히 좀 흥분하기도 했다. 일이 재미있어진다고 생각하는 것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내부 방송으로 자기장 폭풍이 운운했을 땐, 흥분이고 뭐고 싹 사라졌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당장 위로 올라가려던 것을 참은 건 라울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괜찮다. 아무 일도 없을 거다.]

그리 단호하게 말을 하자 군함 여기저기로 미미하게 라울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등신 같은 놈들은 지금 사지에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라울의 이름을 불러 재끼고 있었다. 한번 된통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거라며 마기휼은 초조하게 있었다. 이미 위에서 결정을 내린 것 같은데 이쪽이 나선다 해서 크게 달라질 일은 없었다. 그저 속으로 라울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1시간 후, 군함 내로 엄청난 진동이 퍼져 나갔다. 진동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이후로 갑자기 전기가 오르거나, 동력이 멈추거나, 그대로 군함이 뚝 추락해버리는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리될까 봐서 침대 가운데에 앉아 필사적으로 이불을 쥐고 있으려니 갑자기 군함이 마구 흔들렸다. 마기휼은 기다렸다는 듯 소리를 지르며 라울의 욕을 해 댔고, 거짓말처럼 문이 열리고 라울이 들어왔다. 그리고 라울이 커다란 검은 천과 함께 덮쳐 왔다.

욕 좀 했다고 깔아뭉갤 셈이냐-라고 할 정도로 무거웠다. 숨이 턱 막혀 가만히 있는 동안 군함이 더 세게 흔들렸다. 전기가 흐르는 듯도 싶었다. 그리고 마기휼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말로만 듣던 레드존. 내가 네 안에 들어가 보겠다고 이게 뭔 고생인지 모르겠다. 혹 모르지. 눈을 떴더니 천국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그러면 뭐야. 라울도 나랑 같이 가는 건가?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저렇게 잘난 놈이 함께해준다면 아주 조금은 안심이 될지도 모르겠다.

“마기휼, 눈을 떠봐라.”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며 뺨을 토닥였다. 그 손길이 기분 좋아서 더 자고 싶었다. 의식은 돌아오고 있지만 일부러 자는 척을 했다. 그리하면 안 된다는 듯, 상대는 재촉을 해 왔지만 말이다.

“마기휼, 어서 눈을 떠.”

“으음― 피곤해.”

피곤하고 졸리고 온몸이 나른하단 말이야. 난 원래 누가 자는 중에 깨우는 게 싫다니까? 물론 라울 너처럼 완전 미쳐서 날뛰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오만상을 쓴 얼굴이 수많은 말을 전달하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손은 계속 마기휼의 뺨을 토닥여 댔다. 그 손길에 두 손을 들어버린 마기휼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보이는 미남을 확인하고는 맹하니 있었다. 표정은 멍청하지만 눈은 떴다. 그걸 확인한 라울이 중얼거렸다.

“정신을 차렸나?”

묻는 목소리에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만큼 놈이 이쪽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거니 말이다.

마기휼은 손으로 눈 아래를 비볐다.

“여기는…… 천국이야?”

“유감스럽게도 이승이다.”

“……아직 살아 있는 거라고?”

“그래.”

단호한 말에 눈이 조금 더 커졌다. 당혹스러운 듯 마기휼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추락을 했으니 분명 엄청난 몰골이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였다.

“추락한 게 아니었나?”

“유감스럽게도 그리되지 않은 모양이다.”

유감스럽게도라니. 잘되었다고 해야지. 아니지. 지금은 그런 걸 가지고 시비를 붙일 때가 아니었다.

“지금 여기가 어디야?”

“안 그래도 바깥으로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함께 가겠나?”

“갈래. 가 볼래.”

마기휼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군함이 어떤 상태이고 지금 어떤 위기상황인지는 알 바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레드존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거였다. 마기휼은 당장 침대에서 내려가려다 비틀거렸다. 당황해 머뭇거리는 동안 뒤에서 뻗어온 팔이 급히 마기휼의 몸을 감싸 뒤로 당겼다.

마기휼은 푹신한 침대에 주저앉아 옆에 있는 라울을 쳐다봤다.

“괜찮나?”

묻는 얼굴이 굳어 있다. 비틀거린 사람을 잡아준 것 치고는 지나치게 정색을 하고 있었다. 무안해진 마기휼은 어색한 얼굴이 되었다.

“괜찮아. 뭘 그렇게 정색을 해. 중심을 잃었어도 그냥 앞으로 고꾸라지면 그만인데.”

대수롭지 않은 듯 그리 말을 전한 마기휼은 웃었다. 어설픈 미소에도 라울의 굳은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딱 봐도 건강한 내가 넘어지는 걸 가지고 그가 저렇게 심각해질 필요는 없는 거였다. 왠지 모를 싸한 기분이 드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재차 몸을 일으켰다. 아까처럼 비틀거리거나 하지 않았다. 똑바로 선 채로 마기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라울을 내려다봤다.

“나 혼자 바깥에 나가 봐도 괜찮아?”

“아니. 함께 나가야 한다.”

라울이 일어서 마기휼을 지나쳐 갔다.

“따라와라.”

마기휼은 잠자코 앞서가는 라울의 뒤를 쫓았다. 가면서 알게 모르게 배를 쓰다듬었다.

아까는 그냥 느낌 탓이었을 거다. 자신도 라울이 갑자기 넘어지려 했다면 그를 붙잡아 주려 했을 터였다. 그것과 같은 맥락이지 그 외에 별다른 게 있을 턱이 없었다.

암. 그렇고말고.

스스로의 불안을 달래는 마기휼이었다.

쇠막대를 돌리자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건장한 체구의 군인은 보기와는 달리 닫힌 문과 힘겹게 씨름했다. 하지만 조금씩 막대가 돌아가고 동그란 원형의 문이 흔들렸다.

기다렸다는 듯 군인 여럿이 문에 달라붙어 앞으로 밀자 벌어진 틈으로 모래가 흘러들어왔다. 그걸 본 마기휼은 기겁을 했다.

“괜찮은 거야?”

억지로 문을 열어서 모래가 밀려들어 오는 거 아니야? 그러면 우리들은 거기에 깔려 죽는 거고. 위험한 거잖아. 마기휼은 급히 라울의 소매를 움켜잡았다.

“모래에 파묻힌 상태가 아니니 괜찮다.”

“정말 괜찮을지 어떨지 어떻게 알아.”

원래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쪽이 더 불안한 거라고. 넌 레드존에 대해서 굉장히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이쪽은 아니란 말이야. 네가 그렇게 쿨하게 괜찮다고 해서 바로 안심할 수는 없다니까?

어느새 문은 점점 더 많이 열렸다. 초반에는 굉장하게 흘러들어 오던 모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수그러들었다. 그 순간을 노리고 군인이 발로 문을 후려쳤다. 큰 소리와 함께 문이 확 열렸고, 마기휼이 걱정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열린 문 아래로 모래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

군인은 열린 문 옆에 서선 라울을 돌아봤다.

“대령님 다 열었습니다.”

“잘했다.”

뒤에서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눈치를 보다가 잽싸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걸 본 라울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리고 바로 마기휼의 뒤를 쫓았다. 그것이 마치 어린애가 물가에 나가는 걸 걱정하는 부모 같은 느낌이 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문을 열었던 군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쪽이 괜한 생각을 하는 건가- 하고 문을 더 단단히 잡았다.

마기휼은 당장 앞으로 달려가 주변을 둘러봤다. 기대감으로 반짝거리던 얼굴은 금방 실망으로 젖어들었다. 보이는 건 모래뿐이었다. 옆이고 앞이고 뒤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모래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 이런 곳을 사람들은 사막이라고 표현하고는 있다.

그 유명한 레드존이었다.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상상만 거창하게 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기는 했다.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는 이것들은 마기휼의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어깨에 들어간 힘이 좌악 빠진다.

“사막이야?”

“아무것도 없다고 내 말하지 않았나.”

마기휼은 다가온 라울을 돌아봤다. 혹여라도 근처에 수상한 움직임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 주변을 살피며 라울은 마기휼의 옆에 붙어 섰다.

“아무것도 없다. 이곳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야.”

“정말 그런 것 같네.”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정면을 바라봤다. 그래 봤자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보통 때에 볼 수 없는 사막을 잘 보고 있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재미없다는 듯 흐음, 소리를 내던 마기휼은 라울을 돌아봤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눈으로 들어왔다. 손으로 그걸 치워 내며 마기휼은 재차 라울을 쳐다봤다.

“그들도 이리로 들어왔어?”

“그래.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군. 지금 군함이 먹통인 상태라 추적을 할 수 없어.”

“자기장 폭풍을 뚫고 들어온 거야. 먹통인 상태도 감지덕지지. 죽지 않은 게 어디야.”

여기에 있는 수많은 군인들은 네 추종자라 죽어도 덜 억울하겠지만, 난 아니라고. 죽었으면 엄청 억울했을 거란 말이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이미 충분할 정도로 자신의 의지가 전달되었을 거다.

하지만 라울의 눈빛은 이미 이쪽을 비켜가 있었다. 지금 그가 바라보는 건 레드존 지역이었다. 팔짱을 낀 채로 사막의 저편을 응시하는 그 모습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금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기에 저런 얼굴인 걸까. 계속해서 불만인 눈빛을 보내기가 상당히 거시기한 상황이었다.

“대령님. 잠시 안쪽으로 와주십시오.”

군인의 부름에 마기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잘됐다. 그리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슬금슬금 옆으로 물러났다. 끝자락에 서서 쪼그리고 앉기가 무섭게 안으로 들어가려던 라울이 그런 마기휼을 불렀다.

“마기휼. 거기서 뭐 하나?”

“구경 좀 하고 있으려고요. 사고 안 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언제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안으로 들어와라.”

입을 다문 라울은 눈을 치떴다. 당장 안 들어와? 그리 말하고픈 얼굴이었다.

여기에 혼자 있는다 해서 뭔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냥 버티고 싶지만 안 들어가면 라울도 마냥 저렇게 서 있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나. 입술을 씰룩거리고 싶어도 라울이 너무 빤히 쳐다봐서 할 수 없었다. 결국 마기휼은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군함 내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라울은 문을 닫도록 했다.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 그렇게 문을 꼭꼭 닫지 않아도 이제는 안 나간다니까. 마기휼은 구석에 가서 라울과 군인이 대화를 나누는 걸 쳐다봤다.

“착함을 할 때 피해가 없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했지만 일부분 손상이 간 곳이 있습니다. 일단은 그쪽부터 수리를 해야 통신 쪽이 살아날 것 같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지?”

“기술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자기장 폭풍을 지날 때 쇼크로 기술자 둘이 다운되었습니다. 엔진실로 내려가 군함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가벼운 전기 쇼크가 온 모양입니다. 그들은 바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 있는 인원으로 고치려 든다면 2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너무 늦다.”

“하지만 그게 최선입니다.”

라울은 군인을 노려봤다. 최선을 운운했던 군인은 기가 죽어 입을 다물었다. 라울은 재차 말했다.

“통신병이나 기계를 잘 다루는 이들을 최대한 투입을 해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군인이 황급히 몸을 돌려 달려갔다. 라울은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앞으로 어찌할 것인지 궁리를 하는 것 같았다. 머리가 좋으니까 뭘 해도 되겠지. 2시간 걸리는 것도 1시간 안에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는 동안 이쪽은 뭘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쪼그리고 앉아 있던 마기휼은 라울과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지금부터 뭘 할 거야?”

“일단은 군함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게 우선이다.”

“너도 군함을 고칠 줄 알아?”

“간단한 교육이라면 받아봤다.”

“난 전문 교육을 이수했어.”

마기휼의 말에 라울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언제?’ 묻는 눈빛에 마기휼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하도 농땡이만 치니까 사령관님이 한 1년 동안 정비공이나 되라며 그쪽으로 빡세게 돌린 적이 있었는데. 모르나?”

알 턱이 없었다. 그때 라울과 마기휼은 완전 극과 극이었다. 공동 교육이 아니라면 마주칠 일도 없었다. 농땡이 치는 걸 참다못한 사령관이 2, 3달 동안 일반 훈련을 금지하고 군함 만드는 기술이나 배우라며 큰소리를 쳤어도 그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가 들어갈 턱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때 마기휼은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는 거였다. 하지 않았을 뿐이지 뭐든 하려고 하면 되는 사람. 그게 바로 나 마기휼이란 말이지. 마기휼은 뿌듯한 듯 한쪽 입술 꼬리를 사악 올렸다.

“나도 현장으로 나가 볼까? 훌륭한 솜씨를 보여주지.”

“아직 전류가 흐르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감전의 위험이 있어.”

“그걸 막기 위해서 손에 장갑을 끼고 복장도 갖춰 입는 거 아니야. 시간 단축하고 싶지 않아? 나 정말 잘한다니까.”

빙글거리고 웃는 얼굴로 있는 마기휼은 이미 현장으로 나갈 마음을 굳힌 듯싶었다. 이쪽이 그만두라 한다 해서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라울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만히 있으라 한다면 있을 건가.”

“말도 안 되지. 네가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내가 어디로 튀어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까 일거리를 달란 말이야.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는 게 정말 싫단 말이야.

“그러면 중앙실로 가자. 그쪽이 문제를 일으켰으니까.”

“중앙실이라고?”

끽해야 현장으로 보낼 거라 생각했던 마기휼은 중앙실 운운하는 것에 화들짝 놀랐다.

중앙 프로그램은 좀 불안한데? 잘한다고 공수표를 날리긴 했지만 손을 대지 않은 지 오래인지라 아직은 좀 불안했다. 그때 라울이 “할 수 없는 건가?”라고 되물었다.

내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거냐. 마기휼은 당장 일어났다.

“중앙실도 우습지. 잘할 수 있어.”

“그러면 같이 올라가도록 하지.”

라울이 앞장을 섰다. 그 모습이 그리 썩 예뻐 보이지 않았다.

혹시 시험해보려는 건가. 하나 안 하나 뒤에서 팔짱 끼고 구경하는 거 아니야? 은근한 구석에서 성격 나쁜 걸 드러낸다면서 마기휼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러면서도 두 다리는 부지런히 라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중앙실 절반 가량이 검게 탔다. 방전으로 인해 저렇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게 제대로 돌아가기나 하는 거야?

중앙실로 처음 올라와보는 것도 이유겠지만 엉망으로 변한 내부를 보자니 어떤 식으로 손을 대야 할지를 모르겠다. 안색을 굳힌 채로 있던 마기휼은 라울을 돌아봤다. 라울은 한 군인을 앞에 두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안경이 부러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제대로 하고 싶은데 앞이 안 보여서 못하고 있는 거였다. 그런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지는 거겠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옆에 서 있던 동료가 어깨를 토닥였다.

“지금 당장은 쉬는 것만 생각하도록 해라.”

동료와 군인이 동시에 라울을 올려다봤다. 라울은 차분하게 말했다.

“너는 인재이니 이런 일 때문에 혹사를 시킬 순 없다. 걱정하지 말고 방으로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고맙습니다.”

고맙다고는 해도 그 얼굴이 썩 밝지는 않았다. 음울한 얼굴이 된 군인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밖으로 나갔고 마기휼은 앞으로 걸어갔다. 통신병의 옆으로 빈자리가 생겨났다.

군함 내부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통신 쪽은 수리를 겸하면서 익히기도 했다. 정확히 표현을 하자면 정보 빼돌리기 쪽으로 말이다. 워낙에 성격이 유들유들하다 보니 사령관은 스파이 쪽으로 전향시킬 생각도 하는 듯싶었다. 마기휼이 워낙에 대충 해서 곧 꿈을 접어야 했지만 말이다.

과연 이걸 잘 다룰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기계에 손을 댔다.

“거기. 함부로 만지지 마라.”

지적을 받은 마기휼은 당장 양손을 들었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는데요? 그런 어필을 하는 모습이 보기에 장난스러웠다. 누군가 싶었던 군인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소속이 어떻게 되나?”

“내가 데리고 온 자니 염려치 말아라.”

라울은 마기휼의 옆으로 와서 섰다. 다른 이도 아니고 라울이 보증을 하는 이였다. 괜한 간섭은 해선 안 되었다. 군인은 고개를 숙인 채로 물러났고 라울은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할 수 있겠나?”

“글쎄요.”

뒷말을 흐리던 마기휼은 라울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당장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라울은 손으로 계기판을 가리켰다.

“중앙 프로그램은 대충 복구가 되었지만 다른 건 미비한 수준이지. 그것부터 해결을 해주겠나?”

“좋습니다. 한번 해보지요.”

손을 털며 마기휼은 의자를 끌고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1년간 집중 훈련을 받은 것도 한 3년 전의 일이었다. 뭘 먼저 건드리면 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도와준다고 먼저 말을 꺼낸 건 이쪽인데 더 머뭇거리고 있을 순 없었다.

하여튼 라울 저놈은 성격이 나쁘다니까. 도와준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라면 가벼운 걸 생각하기 마련인데 어떻게 된 게 당장 중앙실로 데리고 올 수 있나 싶었다. 혹 모른다. 이쪽이 제대로 하나, 못 하나 감시할 생각인지도 말이다. 정말 그런 거라면 어떻게 하지? 상당히 짜증 날 것 같은데?

오만상을 찡그리며 마기휼은 자판을 두드렸다. 오랜만에 두드리는 거라 그런지 몇 번이나 삐끗했다. 그런 식으로 구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바로 옆에 앉은 통신병 자리에서 삐익- 하는 음향이 울렸다.

“자, 잠시만― 지금 오류가 일어났습니다.”

“이쪽도 오류가 생겼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말에 마기휼은 손가락을 딱 멈췄다.

다들 라울이 뒤에 서 있으니 뭐라 말은 못 하지만 눈빛이 전하는 건 분명했다. ‘어디서 튀어나왔을지 모르는 놈이. 그냥 얌전히 있어.’라고 말이다.

상당히 뻘쭘하고 무안했다. 이를 어쩌면 좋으나 싶어서 손가락을 꼼질거리던 마기휼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냥 평소대로 가만히 있는 건데. 뭘 하겠다고 나서서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지 모르겠다. 자신 때문에 괜히 라울만 입장 곤란해지는 거 아니야? 굳이 놈의 입장에 대해서 생각을 해줄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심으로는 진지해지게 된다. 인상을 쓴 채로 있으려니 등 뒤로 온기가 느껴졌다.

“긴장하지 마라.”

‘역시나 못하는 건가.’라는 식의 말을 듣게 되면 어쩌나 싶었던 마기휼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느낌 탓인지 모르겠지만 긴장이 풀렸다. 마기휼은 라울을 흘겨봤다.

“나는 원래 긴장 같은 거 하는 사람이 아니야.”

섭섭하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 장난스럽게 그리 대꾸를 한 마기휼은 긴 숨을 토해 냈다. 눈을 감았다 뜬 마기휼은 천천히 자판에 손을 댔다. 그리고 하나하나 눌러 나갔다.

초반에 오류가 떠서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던 군인들은 내색을 하지 못한 채로 화면을 내려다봤다. 하나하나 살피면서 문제점을 고쳐 나갔다.

갑자기 와서 이런 자리에 앉으라 하니 긴장이 되었던 것뿐이지 하면 할수록 괜찮아졌다. 어떤 식으로 하면 되는지 슬슬 감이 돌아왔다.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잘 잡아내고 있었다. 엄청난 집중도를 보이는 마기휼을 흘겨보던 통신병은 어느새 왼편에 와서 서 있는 라울에게 보고를 했다.

“60% 정도 회복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실력이 좋은 것 같습니다. 간간이 오류를 내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건 발견하는 쪽이 수정하면 될 일이고요.”

“그런가.”

“원래 저희와 같은 계통에 있던 사람입니까?”

“그 어떤 계통에도 있지 않았다. 그저 저 하고 싶은 대로 살던 사람이지.”

“……그렇습니까.”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치고는 꽤 괜찮잖아. 그리 생각을 하며 군인은 고개를 숙였다.

라울은 등을 보인 채로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는 마기휼을 바라봤다.

하려고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주제에 늘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남 구경만 하던 사람이었다. 애초에 먼저 나서서 뭔가를 하려는 의지가 빈약했다. 그런 그가 먼저 나서서 하고 있는 거였다. 라울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이쪽이 해야 할 일을 할 때였다.

자기장 폭풍의 위력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되었다. 망가진 부분이 너무도 광범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도 살릴 수 있는 건 한정적이었다. 욕심을 부려 이것저것을 건드리려 한다면 상황은 더 복잡해지고 꼬일 따름이었다. 때문에 라울은 통신 쪽 하나만 복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무기는 모두 수동으로 전환한다. 함내에 있는 군인들에게 무기 소지를 허락한다 전해라.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을 시, 무조건 상부의 명령을 따라주길 바란다. 개별적 행동이나 판단은 허용하지 않겠다.”

방송을 끝낸 후 라울은 팔짱을 낀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보이는 건 모래뿐으로, 이상한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 군함이 이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데 상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문제는 위치였다. 놈들이 어디에 있어 무슨 짓을 꾸밀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레드존으로 들어오는 게 익숙한 듯싶었다. 엔온이 레드존에 서식하고 있다는 말이 암암리에 돌고 있었다. 그것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띠딕- 하는 음향을 들은 라울은 통신병을 바라봤다.

“진행이 어찌 되어 가고 있나?”

“78% 정도 복구가 되었습니다.”

“주변 환경을 파악할 순 없는 건가?”

“4분 34초부터 가능합니다.”

4분이라. 나쁘진 않았다. 그 전까지는 망원경을 들고 직접적으로 주변을 살피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손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라울은 옆으로 건너가 마기휼의 뒤에 섰다. 다른 이들보다 진행 속도는 느리나 확실히 해 나가고 있었다. 라울이 보기에도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잘 되어 가고 있나.”

“나름 노력하고는 있는데―”

중얼거리면서도 마기휼의 눈은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이 침침한지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더 집중을 한다.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든 마기휼은 앞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자세가 보기에도 불편해 보였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무리 같은 거 하지 않아. 여유만만이라고.”

대답은 그리해도 손은 계속 움직이고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냥 대충 하고 말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적어도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 거야. 그런 의지가 느껴졌다. 라울은 마기휼을 가만히 바라봤다.

4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 라울이 원했던 기능이 돌아왔다. 그래서 보고를 하려 했던 통신병은 마기휼을 내려다보는 라울을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또 뭔가 싶었던 통신병은 눈을 끔벅였다. 그 시선이 느껴진 탓인가. 라울이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치자 통신병은 급히 말했다.

“통신을 회복했습니다. 주변 탐색 들어가겠습니다.”

“배를 찾아라. 놈들이 타고 갔던 배를 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통신병의 손이 자판 위를 춤을 추듯 움직였다. 타닥거리면서 자판을 두드리던 그는 곧 어떤 신호를 잡아냈다.

“찾았습니다. 동남쪽 25Km 지점입니다.”

“생명 반응은 없는 건가?”

“확인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기휼도 잠시 손을 멈추고 통신병을 봤다. 귀에는 통신구를 달고 손으로는 자판을 두드리던 통신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곁으로 다가선 라울을 올려다봤다.

“배 근처로 이동이 있습니다.”

라울은 화면에 뜨는 표식을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수가 적군. 고작 이 정도만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미 이동을 한 걸지도 모릅니다. 저 배는 이쪽 군함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쪽이 당하기 전에 먼저 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정말 어떤 상태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먼저 접근하는 건 함정에 걸려들 위험이 있었다. 어쩌면 운이 좋아 놈들을 잡을 수도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라울은 마음을 정하고 고개를 들었다.

“움직일 수 있는 차량을 점검해라. 직접 잡으러 가야겠다.”

“밖으로 나갈 거야?”

놀란 마기휼이 반쯤 몸을 일으켰다.

“마기휼. 넌 그냥 이곳에 있어라.”

말을 하면서 라울이 걸어왔다. 당장 뭐라 하고 싶었던 마기휼은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는 가만히 있다가 라울이 곁에 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내뱉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런 일인데 당연히 나도 따라가야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넌 그냥 이곳에 있어라.”

“나도 군인이거든?”

“마리아를 보는 즉시 사살할 수 있나? 저격할 수 있다면 데리고 가겠다.”

입을 다문 라울이 마기휼을 빤히 바라봤다. 네가 마리아를 저격할 수는 없을 거다. 그렇게 확신을 하는 눈빛과 태도였다.

마리아가 끼어들면 라울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가 의심할 만한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단지 예전에 친구였을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불륜의 상황을 막으려는 남편처럼 필사적이 될 필요는 없었다. 본인이 예로 든 상황이 우습기만 했던 마기휼의 입술 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크나큰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그건 내가 아니라 너다. 이곳은 레드존이지. 침입자는 무조건 사살이다. 그렇게 정해져 있다. 때문에 나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보이는 즉시 그 자리에서 사살하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를 안전하게 한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그러니 넌 여기서 네가 할 일을 해라.”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라울의 카리스마에 눌린 것도 있겠지만 마땅히 반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동안 라울은 그를 지나쳐 갔다.

“준비해라. 15분 안에 출발할 수 있도록 해라.”

라울이 밖으로 나가고 난 후 중앙실 내는 조용해졌다.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라울과 마기휼이 어떤 내용을 나누었는지는 알지 못해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라울이 15분 안에 준비를 하라 했으니 서둘러야 하는데.

옆에 있는 통신병이 불안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 마기휼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마기휼이 자리를 잡고 앉는 걸 확인한 통신병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건넸다.

“소령님. 프로그램 확장을 부탁드립니다.”

“……프로그램 확장 말입니까?”

그게 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몇 번 만져봤더니 전문용어도 단박에 기억이 났다. 그래. 맞아. 나 이거 잘 하고 있었지. 현장에 나가서 채찍을 휘두르는 것도 장기지만, 가만히 앉아 자판 두드리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이러는 동안 라울은 바깥으로 나가 저 마리아 일당과 일전을 벌이는 건가. 총질을 하겠지. 그래서 만약 다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라울이 다치면 어떻게 하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팠다. 눈을 감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마기휼은 손을 움켜쥐었다 폈다.

“지금은 위급 상황이라 그렇지만, 다른 때라면 함께 나가시는 것도 가능하셨을 겁니다.”

막 중앙 프로그램에 접속을 하려는 순간 옆으로 가까이 다가온 통신병이 말을 건넸다. 뭘 말인가 싶어서 마기휼은 그를 쳐다봤고, 입가에 손을 댄 통신병은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는 듯 작게 속삭였다.

“레드존은 사막처럼 보이지만 언제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지역입니다. 저희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라울 대령님은 많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위험한 장소라는 걸 알고 있는 겁니다. 소령님께서 기초 지식이 부족한 듯싶어 데리고 가지 않는 것뿐이지, 실력을 폄하하는 건 아닐 겁니다.”

이쪽이 현장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안색이 좋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생각에 대해 굳이 반박을 하고 싶지 않았던 마기휼은 웃고 말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려니 조금 더 얼굴을 내민 자가 “그런데 정말 실력이 좋으십니다. 벌써 97% 회복이 되어 갑니다.”라고 말했다. 칭찬을 해서 이쪽 기분을 풀어주려는 거겠지만 딱히 좋지는 않았다. 마기휼은 그저 예의상 웃으면서 화면을 확인했다.

잘하는 걸 해서 도움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 모르는 곳에 라울이 가서 뭔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싫었다. 왜 싫은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싫었다. 굉장히 말이다.

군함의 옆구리가 열리고 특별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차량이 나왔다. 유리도 방탄으로 된 것으로, 총알로는 쉽사리 뚫을 수 없었다. 육중한 바퀴가 모래를 밟고 사막을 빠르게 지나갔다.

나간 차량은 총 5대. 가운데에 있는 게 라울의 차량이었다. 뒷좌석에 앉은 라울은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정면을 감시하며 통신을 했다.

“생체 감지에서 이상이 발견되면 바로 연락을 주도록. 그리고 상대방 배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조사에 들어가고. 지원 군함에 대한 파악도 해서 바로 보고하도록.”

[물론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내 걱정은 하지 마라.”

통신을 끊은 라울의 시선은 여전히 앞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운전병을 제외하고 조수석에 앉아 있는 자와 라울의 왼쪽에 앉은 이들은 바로바로 보고를 했다.

“현 온도 42도입니다.”

“주변으로 이상한 움직임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창문에 붙은 이들이 전하는 말을 모두 들으며 라울은 위로 올린 차단 고글을 내렸다. 정면으로 보이는 걸 모두 체크하는 그의 뺨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턱 끝에 맺힌 땀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40도가 넘는 기온을 실감했다. 이 상태가 지속이 되면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도 있음이었다.

“언제 갑자기 나타날지 모르는 놈들이다. 방심은 하지 마라.”

“네. 알았습니다.”

대답을 하며 군인들은 재차 창밖을 내다봤다.

라울도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운전석 앞에 달린 화면을 살피는 내내 그는 경직된 얼굴이었다.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호흡이 길게 늘어진다. 그 소리가 생생하게 마기휼에게 전달되었다.

중앙실에서 알아낸 정보에 대해 바로 연락을 주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통신이 이어져 있었다. 덕분에 마기휼도 라울이 직접적으로 내리는 명령을 알 수 있고, 그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원래 다른 이들보다 순간 집중력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라울의 호흡 소리를 훨씬 더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동안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야한 의미가 아니라 그래도 좀 덜 걱정이 된다고나 할까.

……아니지. 원래 슈퍼맨 같은 놈이다. 굳이 걱정할 필요가 어디에 있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라며 마기휼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본 통신병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짤막하게 대답한 마기휼은 화면을 바라봤다. 일만 완전 열심히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통신병은 본인의 화면을 살폈다. 금방 그 얼굴이 밝아졌다.

“100% 회복되었습니다.”

초반이 힘들었지 하다 보면 점점 수월해지게 된다. 완성이 된 기초위에 성을 쌓기만 하면 되는 것과 같은 원리인 셈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인지라 마기휼은 화면에 손가락을 댄 채로 이리저리 살펴봤다.

통신 쪽으로는 대부분 살아난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걸 이용해서 군함을 하늘로 띄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 정도면 군함을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몰라.”

“한번 해볼까요?”

중얼거림을 들은 통신병이 받아친 말에 마기휼의 표정이 짐짓 진지하게 변했다. 해보는 건 나쁘지 않겠지만 가장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실패 같은 게 두려운 게 아니었다. 지금 가장 신경 쓰이는 딱 하나뿐이었다.

“대령이 뭐라 할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요?”

별생각 없이 말을 던졌던 통신병도 이내 걱정스러운 얼굴이 된다.

그걸 보자니 슬슬 호승심이 생겨났다.

“한번 시도해볼까. 잘하면 이쪽이 날아서 대령보다 먼저 도착할지도 몰라. 그러면 분명 놀라겠지.”

“그리고 당장 화를 내실 겁니다.”

마기휼은 통신병을 돌아봤다.

‘화를 낼까?’라는 눈빛에 ‘당연하지요.’라는 사인이 던져졌다. 그걸 보고는 마기휼은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때에 장난은 금물이었다. 그냥 말만 해본 거라며 마기휼은 내부 통신을 체크했다. 안 되는 곳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무난한 편이었다.

“내부 연락은 잘 되는 것 같고, 외부는 한번 확인을 해볼까.”

외부로 나간 사람이라고 해 봤자 라울뿐이었다. 통신을 걸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내 통신병 쪽으로만 연결이 되었던 게 이쪽에서도 되는 거였다. 위급한 상황이니 장난은 금물이라는 걸 알지만 속이 근질근질거렸다.

마기휼은 참지 못하고 당장 외부 회선을 열었다. 그러자 라울의 호흡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통신병의 것을 끌어다 같이 쓸 때와는 역시나 다르구나. 마기휼은 라울의 숨소리를 집중해서 들으며 입을 열었다.

“대령님. 제 목소리가 잘 들리십니까?”

편안하게 이어지던 호흡이 아주 잠깐 흔들린다.

뒤를 이어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장난은 치지 마라.]

“장난이라니요. 중앙실 통신망이 100% 회복되었음을 보고 드리려는 건데요.”

[그렇다면 외부로 회신을 보내라. 자기장 폭풍의 이동 경로도 확인해보도록.]

이미 그건 확인에 들어가 있었다. 동쪽 상공에 흩어져 있던 자기장 폭풍이 점점 흩어지는 게 확인되었다. 안전하다고는 못 해도 이쪽이 뚫고 지나갔을 때 정도로 위험하진 않았다.

“1시간 이내에 걷힐 것 같습니다.”

[그런가. 알았다.]

그것만 궁금했던 거냐. 달리 명령을 내릴 건 없고?

그냥 이대로 끊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았던 마기휼은 재차 말을 건넸다.

“그쪽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은 겁니까.”

[아직은 없다. 문제가 생겨도 아무 일 생기지 않을 거다.]

“그러시겠지요. 천하의 라울 대령님이 아니십니까.”

[지금 날 놀리고 싶은 건가? 그럴 상황이 아니다. 마기휼 소령.]

“놀리고 싶은 게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는 건데요? 왜 그렇게 제 말을 곡해해서 들으십니까? 섭섭합니다.”

[소령답지 않은 말을 하기 때문이 아닌가.]

“제가 무슨 답지 않은 말을 했다는 겁니까. 이상하네요.”

별거 아닌데도 대화를 나누는 게 재미있었다. 툭툭 치는 말에 라울이 반응을 보이는 게 재미있었다. 어느새 실실거리고 웃고 있었다. 또 어떻게 당황하게 해줄까 싶었던 마기휼은 시선을 느끼곤 옆을 쳐다봤다. 통신병이 굉장히 이상하다는 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뿔싸 싶었던 마기휼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괜히 자판을 두드렸다.

“상대편 배에선 별다른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곧 도착하게 된다. 나머지는 이쪽이 확인을 해보겠다.]

“수고하십시오.”

[……걱정하지 마.]

그런 거 하지 않는다니까.

라울이 던진 말에 반사적으로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마기휼의 입은 꾹 다물린 채였다. 그러는 동안 통신은 끊겼고 마기휼은 의미 없이 자판을 두드렸다. 그런 그를 보던 통신병은 고개를 갸웃했다.

라울과 함께한 기간이 길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 거의 처음이지 않나 싶었다. 투닥거리는 것 같아도 알게 모르게 다른 뭔가가 느껴졌다. 하지만 같은 남자끼리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지.

거기까지 생각한 통신병은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배로 접근하는 차량의 거리를 재봤다.

[대령님. 앞으로 4km 남았습니다.]

라울이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군인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다들 총을 바로 잡고 있었다. 내부로 긴장감이 감돈다. 운전병도 갑자기 날아올지 모르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운전대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멀리 사막의 열기 사이로 어렴풋이 어떤 물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운전병의 말에 라울은 망원경을 재차 눈에 댔다. 멀리 보이는 배는 모래에 반쯤 파묻힌 채였다. 저 상태라면 제대로 하늘로 뜰 수도 없을 터였다. 그런데 왜 아무런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는 건가 싶었다.

“대령님. 생명체 반응이 없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라울도 확인을 해봤지만 생명체는커녕 뭔가가 움직이는 기척도 없었다. 이동하는 동안 달리 수상쩍은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또 모르지. 이상한 술수를 부리고 있을지도.

라울은 무전기에 입을 댔다.

“일단은 간격을 띄우고 접근한다.”

5대의 차량이 넓게 퍼졌다. 거리를 확인하고 있으려니 운전병이 거울을 통해 라울을 흘깃 봤다.

“육안으로 확인이 됩니다. 하지만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 정도로까지 이쪽이 접근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는 건가. 먼저 도발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PX03을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초반부터 세게 나가는 건가. 운전병은 급히 탄을 바꾸어서 달도록 설정을 해 놓았다. 그리고 5초 후에 OK 사인이 떨어지는 걸 확인한 라울이 재차 명령을 내렸다.

“후미를 겨냥해라.”

운전을 하면서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닫혀져 있던 칸을 열고 그 안에 접혀져 있던 조종기를 잡아 당겼다. 기다란 막대 같은 것이 나오고 그 위에 달린 붉은 버튼에 엄지를 댄 채로 운전병은 배를 노려봤다. 그리고 차가 살짝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버튼을 눌렀다. 기세 좋게 쏟아져 올라간 미사일이 정확히 배의 후미에 맞고 이내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폭발음은 차에도 전달될 정도였다. 흔들리는 차량을 몰면서 운전병은 점점 가까워지는 배를 살폈다. 뒷부분은 계속 폭발을 일으키고 겉면은 순식간에 검게 타버렸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배였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대응이 없었다. 너무 잠잠한 것도 이상했다. 운전병은 보고를 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라울도 모든 걸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탄은 남아 있었다. 조금 더 퍼부어도 상관은 없었다. 그쪽이 버티고 있겠다면 억지로 끌어내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러기가 꺼려졌다. 왠지 모를 불쾌한 느낌이 몸 안으로 퍼져 나갔다.

무표정으로 있던 라울은 몸을 내밀었다. 망원경을 눈에 댄 채로 찬찬히 배를 살폈다. 그리고 모래가 쌓인 배의 표면에서 이질적인 뭔가를 발견해냈다.

“배에 바싹 붙여라.”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 붙여라. 확인을 해 봐야 할 게 있다.”

라울이 내린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운전병은 순순히 차의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배의 코앞에 차를 세웠다. 기다렸다는 듯 라울이 내렸다. 그러다가 공격이라도 당하면 어쩌려는 건지 모르겠다. 기겁을 한 군인이 라울의 이름을 부르며 그 뒤를 쫓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성큼성큼 걸어가 배를 오르기 시작했다. 후미에 날린 탄으로 인해 언제 갑자기 재폭발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안전하다 할 수 없는 상황인 곳을 라울이 혼자서 올라가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간 즈음까지 빠르게 오른 라울이 멈춘 틈을 타서 다른 군인 몇도 급히 그 위로 올라갔다.

라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뭔가를 발견해낸 건가. 군인 둘이 급히 라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배의 겉면에 달린 검은 물체를 확인하고는 입을 벌렸다.

“이것은…….”

검은 테이프로 둘러싸여서 면에 찰싹 달라붙은 기계의 안쪽으로 붉은 빛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군대에 있었을 때 사용하는 교란기였다. 생명체 반응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진 군인이 라울을 올려다봤다.

“대령님. 속임수였습니다.”

애초에 사람이 없었는데 이 장치로 인해 있다고 착각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망연한 얼굴로 있는 동안 교란기의 빛이 다른 색으로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본 라울이 급히 소리쳤다.

“다들 여기서 떨어져라!”

말을 함과 동시에 무릎을 꿇고 있던 자의 뒷덜미를 잡은 채로 아래로 몸을 날렸다. 모래 위로 떨어진 둘은 동시에 일어서 차량에 올라탔다. 타자마자 라울은 운전병에게 소리쳤다.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라! 시한폭탄이다!”

“아, 알겠습니다.”

갑자기 일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운전병은 급히 후진을 한 후에 옆으로 차를 틀었다. 그리고 바로 최대 속력을 냈다. 다른 차량도 마찬가지였다. 잘 따라오나 싶던 차량 중 하나가 헛바퀴만 돌고 있는 게 보였다. 라울은 뒤쪽 유리에 달라붙어 그쪽을 살폈다. 차량의 바퀴에 뭔가가 걸려 있었다.

“바닥을 조심해라! 놈들이 이상한 걸 깔아둔 것 같군!”

라울의 말과 동시에 운전병은 눈을 빛내며 주변을 살폈다. 원래부터 훈련을 받아 왔기 때문에도 이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운전병은 침착하게 차량을 몰면서 속도를 높였다. 점점 배와의 거리가 멀어졌지만 딱 한 대가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차에서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통신이 오는 것과 동시에 배의 중심부로 빛이 몰렸다.

그 빛이 순식간에 커져 시야 가득 퍼져 나갔다. 엄청난 충격이 그들을 덮쳤다.

마기휼은 귀에 꽂고 있던 걸 빼냈다.

라울과 통신을 마치고 난 후, 갑자기 배가 출출해졌다. 화장실도 가고 싶어졌다. 일단 일어나서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먹을 걸 좀 얻어 와야겠다며 마기휼은 의자를 뒤로 빼냈다.

“출출하지 않아? 뭐 좀 가지고 올게. 뭐 먹을래?”

“이쪽으로는 음식물 반입이 금지입니다. 대령님께서 아시면 가만히 있지 않으실 겁니다.”

말을 전하며 이쪽을 보는 통신병은 ‘괜히 찍힐 일 하지 마시고 가만히 계시지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에 마기휼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배가 고픈 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

중얼거리며 위를 쳐다보는 마기휼은 완전 편하게 늘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저런 모습으로 있었던 사람이 있었을까. 마기휼이라면 라울이 옆에 있어도 저런 태도를 취할 것 같았다. 정말 자유롭구나. 저런 모습이 부러웠다. 살짝 따라 해볼까도 싶었지만 그로 인해 돌아올 여파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아직은 조금 더 이곳에서 일하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 배가 고프시면 내려가서 드시고 오십시오. 이쪽은 제가 커버를 하고 있을-! 으왓!”

갑자기 소리를 치며 뒤에 꽂고 있던 걸 빼내는 통신병의 행동에 마기휼이 놀라 그쪽을 쳐다봤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군인들이 귀에 꽂고 있던 걸 빼내고는 양손으로 귀를 감쌌다. 충격을 받은 듯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을 보고 마기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봐. 왜 그래?”

묻는 말에 바로 대답을 하지 않은 통신병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양손으로 귀를 감쌌다. 눈물을 찔끔 흘리며 통신병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 너무 큰 소리가 나서.”

“큰 소리라니?”

“폭발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폭발음이라고?”

왜 폭발음이 들린단 말인가. 이쪽의 대부분은 라울과 통신을 연결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그쪽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까.

마기휼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급히 빼고 있던 것을 귀에 꽂았다.

“라울! 내 목소리가 들려?”

귀에 꽂은 채로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기계 특유의 피- 하는 소리만 날 따름이었다. 다급해진 마기휼은 재차 물었다.

“이봐! 지금 내 목소리가 들리냐고 묻잖아!”

“4시 방향에서 수상한 물체가 접근 중입니다!”

귀에 한 손을 댄 채로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저기 사막 너머로 검은 물체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뒤를 이어 사방에서 보고가 날아왔다.

“10시 방향과 7시 방향에서도 포착이 되었습니다! 뒤에서도 옵니다!”

“빠른 속도로 접근을 합니다! 이대로라면 13분 후에 군함에 닿게 됩니다!”

“미사일은 아닙니다! 차량입니다! 엔온의 마크를 확인했습니다!”

다급히 날아오는 보고에 마기휼은 굳은 안색을 한 채로 있었다.

통신은 복구가 다 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사방에서 달려오는 거야? 나더러 어쩌라고? 선 채로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내부 방송 버튼을 눌렀다.

“적이 접근하고 있다!”

일이 터졌구나. 그제야 실감이 난 마기휼은 재차 소리를 쳤다.

“다들 공격할 태세를 갖춰라! 일단은 접근할 수 없도록 날려버려! 만약 이 군함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 모두 대령한테 얻어맞는다!”

라울이라면 조금 더 격식을 차렸겠지. 하지만 이쪽은 아니었다. 마기휼은 당장 앞으로 달려가 통유리 앞에 달라붙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점점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마기휼은 얼어붙은 채로 있는 군인을 내려다봤다.

“여기는 공격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 있습니다.”

“저리로 가 봐.”

마기휼은 군함의 겉면에 달린 무기들을 확인했다. 군함 내에 있는 무기들은 모두 수동으로 돌려 놨다. 하지만 군함에 붙은 것들은 알 수 없었다.

라울이 그것도 수동으로 해 놓으라 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마기휼은 군인을 쳐다봤다.

“수동이야? 자동이야?”

“모두 수동으로 해 놨습니다.”

“그러면 저걸 날려버려!”

“알았습니다. 하겠습니다.”

하겠다고 말을 하는데 영 버벅거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혀를 차며 당장 군인의 어깨를 잡아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대신 버튼을 조작했다. 두어 번 두드리나 싶더니 바로 발사 버튼을 날린다. 날아간 미사일은 다가오는 것 근처에 떨어졌다. 하지만 두 번째로 날린 것은 정확하게 명중했다.

요란한 폭발음을 내며 차량이 공중으로 붕 뜨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다른 쪽에서 달려오는 걸 노렸다. 이번에도 육안으로 거리를 가늠하고 미사일을 날렸다. 한 방에 명중했다. 마기휼은 질린 듯 얼굴이 창백해져 있는 군인을 쳐다봤다.

“알았냐?! 이렇게 하는 거야!”

멍하니 있던 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머리가 멍했다. 눈으로 보고 미사일을 날려 명중을 시키다니. 그런 게 가능한 일인가.

원래 자동보다 수동이 몇 배나 더 힘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계산이 필요했다. 기계의 힘을 빌려도 하기 힘든 걸 마기휼은 해냈다. 암산인가. 아니면 단순한 감인가? 믿을 수 없어 쳐다보는 동안 마기휼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재차 라울과의 연결을 시도했다.

“라울! 내 목소리 들리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치직 하고 울리는 소리가 불안했다. 때문에 화가 난다.

“어디서 나자빠져 있는 거야!”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문득 드는 생각을 접으며 마기휼은 자기 조절에 들어갔다. 눈을 감은 채로 정신을 집중하기로 한 그는 눈을 떴다. 달려오는 차량을 날려버린 쪽에서 새로운 차량이 재차 나타나고 있었다. 그걸 노려보던 마기휼은 옆에 있는 통신병을 내려다봤다.

“지속적으로 대령에게 연락을 취하고 대답이 있으면 말을 해줘.”

“어디를 가실 생각이십니까?”

“본격적으로 저놈들을 잡을 수 있는 곳으로 가야지.”

중앙실에서는 제대로 된 무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 아예 군함 바깥으로 나가서 응전을 하는 게 나을 거다.

저기 달려오는 차량 중에 마리아가 타고 있는 건가. 그 아이작이라는 놈도 있는 걸까. 이번에 나타난다면 망설이지 말아야 했다.

그들이 재차 도망가게 하는 건 또 다른 번거로운 일을 만드는 격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는 이쪽이 먼저 선수를 쳐야만 했다. 그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스스로를 다독인 마기휼은 내부 버튼을 눌렀다.

그나마 가장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총기가 있는 쪽을 검색해볼 생각이었다. 한 20초 검색하고 바로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던 마기휼의 눈으로 이상한 게 들어왔다. 보고도 바로 반응을 보일 수 없어 가만히 있다가 아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뭐야?”

“뭐가 말입니까?”

통신병은 화면에 마기휼이 보고 있는 걸 띄웠다. 그리고 마기휼과 마찬가지인 얼굴이 되었다. 붉은 점이 하나 나타났다. 내부로 침입자가 들어온 것이었다.

“내부로 침입자가 있다! F4층! 001관 창고 쪽이다!”

프로그램에 허락 되지 않는 총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점이 띄워진 것이었다. 다른 때라면 바로 소리가 났을 터였다. 하지만 제대로 통신망이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었다.

침입자가 생겼다는 말에 중앙실 내부로 술렁거림이 생겨났다. 라울은 없고 사방에서 적이 달려오고 내부로는 적이 있었다. 그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 마기휼을 보고 있었다. 마기휼은 마기휼대로 분석에 들어가고 있었다.

“뒤로 들어온 건가?”

후미 쪽이었다. 그쪽에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있었던가? 있었기 때문에 놈들이 이리도 대담하게 침입을 할 수 있었던 거겠지.

빌어먹을 놈들.

마기휼은 당장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벽으로 가서 버튼을 누르고 총을 끄집어냈다. 줄을 늘여서 등을 가로질러 멜 수 있도록 한 후, 소형총 하나도 꺼내서 옆구리에 밀어 넣었다. 허리 뒤춤에 달린 기다란 막대를 손으로 확인한 후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이에게 말했다.

“내부 침입자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외부는 네가 맡아라. 알았냐?”

“제, 제가 말입니까?”

“말 더듬지 마! 라울이 없으면 각자 판단대로 행동한다! 실수 없이 제대로 해! 그래야 중앙군의 군인이라 할 수 있는 게 아니겠나?!”

그것도 못 할 거면 당장 군인 배지(badge)부터 떼어 내라며 마기휼은 눈을 매섭게 떴다. 딸꾹질이 나올 정도로 강렬한 눈빛에 군인은 기가 죽어 입을 다물었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은 당장 밖으로 나갔다.

소형총을 끄집어내서 탄알을 확인하고 장전을 바로 했다. 그리고 서둘러 복도를 달려 계단을 내려갔다. 그것도 느린 것 같아 난간을 타고 한번에 주욱 내려갔다.

순식간에 F4층에 도착을 한 마기휼은 그 앞에 있는 군인을 확인했다. 안으로 진입을 하려 했던 군인은 갑자기 나타난 마기휼에 당황한 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안에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그런 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보고를 하란 말이야.”

너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설마하니 혼자 처리를 할 생각이었던 거냐? 타박하는 눈초리에 군인은 어물거리려다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있는 군인에게 옆으로 가 있으라는 턱짓을 한 마기휼은 문 앞에 섰다. 귀를 기울이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버튼에 손을 대자 근처에 있던 군인이 급히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침입자가 있다.”

바로 나오는 대답에 군인은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그럴 리가 없다고 반박을 하고픈 얼굴이 되었으나, 마기휼은 무시하고 명령을 내렸다.

“이 앞이랑 연결이 된 환기구 앞으로 군인들을 배치하도록 해. 여기에 있는 놈들이 더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중앙군 소속도 아니고 라울 직속도 아니었다. 마기휼이 명령을 내릴 권한은 없었으나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기에 눌리는 걸 느끼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군인이 위로 올라가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옆으로 붙어 섰다.

내부는 캄캄했다. 연 문이 닫히자 당장 그쪽에 총을 겨누고 두어 발 쐈다. 바로 비상 경보등이 울리고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이걸로 자동으로는 열리지 않게 된 셈이었다. 날카로운 음향을 들으며 마기휼은 앞으로 한 발 내밀었다.

앞으로 주욱 이어진 복도로 비상등이 커져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왔다. 덕분에 이동이 한결 수월했다. 오기 전에 고글을 쓰는 건데.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는 앞으로 총을 겨누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누가 들어온 걸까. 이 정도로까지 알아차릴 수 없게끔 하는 기민함이라면 마리아일까. 아니다. 그녀는 라울이 쏜 총에 부상을 입었다. 들어오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을 거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긴장으로 인해 이마로 땀이 촘촘히 맺혔다.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라울을 유인했지만 진짜 목적은 이곳이었던 거다. 내부로 침입해서 군함을 폭발시킬 생각이었던 걸까. 라울의 발목을 붙잡고 그를 이 레드존에 박아 둘 생각이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달리 무슨 속셈일까.

알 수 없었다. 정말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나 불필요한 짓거리를 저지르는 거야. 갑자기 화가 났다.

“아이작!!”

소리를 치자 텅 빈 공간이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기휼은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이 자식아! 너지?! 당장 이리로 나와!”

“꽤나 입이 험하군.”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마기휼은 놀라 총을 높이 세웠다. 숨을 죽인 채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앞으로 두어 발 총을 더 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아이작의 위치는 멀지 않았지만 소리가 울려서 그런지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 복도의 끝 양옆으로 창고가 있었다. 문은 둘 다 열려 있었다.

오른쪽일까. 왼쪽일까. 어쩌면 양쪽 다 있을지도 모르지. 놈 혼자 들어오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래. 마리아가 못 움직이니 네가 나선 거냐. 마기휼은 재차 소리를 쳤다.

“어디냐고! 이 자식아!”

“나는 숨어 있는 입장이고 날 찾는 건 마기휼 너지. 그렇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봐야 할 것이 아닌가.”

“웃기고 자빠졌네. 넌 이미 독 안에 든 쥐야. 순순히 나오시지? 그러면 무릎 관절 하나로 용서해주지!”

“아하하하.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웃는 소리에 복장이 터진다. 긴장하고 있기 때문에 유머도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마기휼은 이를 갈았다.

“진짜 짜증 나는군.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야?!”

“목소리만 들어도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알 것 같군. 하지만 이제 곧 끝이야. 이번이 우리의 마지막 시도가 될 테니 말이지.”

“마지막 시도? 뭘 하려고? 하늘의 땅을 되돌리려고?”

이쪽의 말에 아이작이 조용해졌다. 놈이 생각하는 것이야 뻔했다. 라울도 그리 말을 했다. 놈들은 레드존 어딘가에 묻혀 있는 땅을 노리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 손에 넣으면 모든 걸 다 해낼 거라고 자신하는 건가? 어림도 없었다.

“천 년도 훨씬 전의 일이야. 이미 사람들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전설 중에서도 가장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라고. 그런 것에 연연해서 일을 저지를 생각을 하다니. 머리 완전 멍청한 거 아니야? 이미 사람들은 지금의 이 상태에 만족하고 있어! 이 상태로도 충분히 평화로워!”

“그건 너에게도 해당되는 일인가.”

총을 잡고 있는 마기휼의 손가락이 흔들렸다. 숨을 죽인 마기휼은 대꾸가 없었다. 침묵한 채로 있는 동안 아이작의 말이 이어졌다.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나. 그것이 족쇄가 되어 스스로를 죽이고 있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도 그걸 드러낼 수 없어. 너무 사람들 눈에 띄면 자신의 비밀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는 거야. 그로 인해 받게 될 비난이나 조롱이 걱정스러운 거지. 안 그래?”

“……시끄러워. 어차피 내 문제야.”

“그렇게 스스로를 죽이는 삶이 진짜로 행복한 것인가.”

이런 데서 내 행복에 대해 논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철학적인 거 관심 없었다.

아이작 놈. 생긴 것답지 않게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다면서 마기휼은 이를 악물었다. 가만히 있는 동안 아이작의 말은 계속되었다.

“평범하고 무지한 사람들 절반. 그리고 우리들처럼 돌연변이가 절반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는 그 어리석고 본인들밖에 모르는 보통 인간들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어.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고와 능력을 겸비하고 있음에도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죽이고 있지. 세상은 뛰어난 이가 지배를 해야 발전하게 된다. 그걸 알기 때문에 그들 평범한 인간들은 우리를 멸시하고 조롱하고 힘으로 내리누른다. 우리가 위로 올라가는 걸 막는 거야. 필사적으로 말이지.”

“변화에는 단계가 있는 법이지. 안정을 찾으면 곧 거론될 문제야. 돌연변이에 대한 처우 개선도 곧 시작될 거야.”

“그러는 동안 우리는 계속 참고 인내해야만 하는 건가. 나는 내 능력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도를 하는 거다.”

시도라니.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마기휼은 당장 소리를 쳤다.

“하지 마. 문제를 일으키지 마! 네가 하려는 짓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막으려는 건가.”

왜냐니. 네놈들이 먼저 이쪽을 건드리고 있는 거잖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자면, 놈들이 자극을 가해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왜 라울은 군함을 움직이면서까지 놈들의 뒤를 쫓는 걸까?

불현듯 마기휼이 떠올린 의문을 감지한 것일까. 아이작이 재차 물었다.

“라울과 노르디아는 왜 우리를 막으려는 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냥 구경만 하면 될 일이 아니던가.”

라울은 여왕이 서둘러 처리를 하길 원한다고 했다. 노르디아의 수도인 안베르 내로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으니 여왕으로서는 잠잠한 걸 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조속한 수정을 원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그래. 그냥 거기까지만 생각하자. 어쩌면 이건 놈의 술수일지도 몰랐다. 사고에 휘말리게 해서 이쪽의 반응 속도를 늦추려는 거다. 이제는 넘어가지 않아. 말을 듣지도 않을 거라며 마기휼은 이를 악물었다.

“마기휼. 너는 하나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들을 막는 놈들은 같은 사정을 지닌 이들이거든.”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야.”

이제는 그런 거에 안 넘어가거든?

마기휼은 한쪽 입술 꼬리를 올렸다.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가장하려 했다.

“라울도 엄연히 말하면 돌연변이라 할 수 있어. 본인의 약점을 드러내지 못해 몸을 사리는 건 우리랑 같아. 그리고 잘 보면 우리를 막는 건 꼭 그런 존재들뿐이지.”

“헛소리야. 라울은 정상이야.”

그는 돌연변이 같은 게 아니었다.

내내 아이작의 말로 인해 사고가 흐트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라울이 돌연변이라 하는 순간 모든 게 정리되었다.

라울은 완벽한 인간이었다.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존재였다. 너나 다른 놈들이 함부로 돌연변이니 뭐니 하는 식으로 말을 할 만한 사내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 식으로 그에게 흠집을 내려 하지 마. 놈이 얼마나 필사적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기휼은 발을 움직였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일단 들어가서 신나게 총이나 쏴 대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재차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범하다 칭해지는 이들은 위에 서서 우리들의 싸움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건 같은 돌연변이라는 거야. 보통의 평범한 인간은 결코 우리를 막을 수 없어. 통제할 수 없어. 그들은 매번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무능을 드러낸다. 때문에 나는 그들을 인정치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마기휼 네가 필요하다.”

“시끄러워! 입 다물어!”

더는 듣고 싶지도 않다니까!

성질을 내며 목청을 높이는 것에 맞춰서 덜컹- 하는 음향이 들려왔다. 놀란 마기휼이 오른쪽 창고 쪽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자 뭔가가 앞으로 쓰러졌다. 정말 놀랐다. 반사적으로 총을 쏠 뻔했다. 하지만 쓰러진 것은 정비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뭐야?”

순간적으로 판단이 되지 않아 멍하니 있는 동안 상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의 절반이 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사내는 천천히 한 손을 위로 뻗었다.

“괴, 괴로워.”

창고에서 작업을 하던 정비사였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적의 함정일 수도 있었다.

마기휼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동공이 반쯤 풀려 있었다. 피를 토해 내나 싶더니 재차 손을 뻗어 온다. 괴로워 보이는 그 모습은 가짜가 아니었다.

“이리로 와!”

적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무턱대고 달려갈 순 없었다.

“어서 기어와! 나는 부축 같은 건 해줄 수 없어!”

가만히 있나 싶던 사내는 바닥에 손을 대고 천천히 몸을 끌었다. 팔꿈치를 세우고 천천히 기어오는 간간이 피를 토해 냈다. 그리고 느리게 움직이다가 신음을 흘리며 뭐라 중얼거렸다.

“괴로워. 젠장. 저 괴물들이…….”

목소리 안쪽으로 깊은 증오심이 묻어났다. 가짜로 저러는 것 같지는 않지만 100% 믿을 수 없었다. 사내가 천천히 움직여 옆을 지나치자 마기휼은 벽으로 몸을 붙이고 뒤를 흘깃 바라봤다.

“기어서 뒤로 가. 어서! 제길 문 다 박살 내 놨는데-!”

자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부상으로는 스스로 문을 열 수 없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빠르게 처리를 한 후에 도와줄까? 재수가 없어 이쪽이 쓰러지는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마기휼의 몸이 움찔하고 흔들렸다.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옆을 지나치던 사내의 손이 자신의 허벅지에 닿아 있는 걸 확인했다. 사내는 뭔가를 쥐고 있었다. 그건 주사였다.

“……뭐야.”

중얼거리는 동안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이쪽을 쳐다보는 사내의 눈동자는 반쯤 풀려 있었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눈동자. 약에 취한 눈빛이었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이작, 세뇌인가!

마기휼은 당장 상대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한 발 옮기는 순간부터 몸이 축축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눈앞이 흐릿하게 변하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총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앞으로 뻗으며 총을 쏘려는 순간 그대로 쓰러졌다. 이상하게 몸이 구부러진 게 느껴졌다. 정말 지독한 마취약이었다.

거칠어진 숨이 거칠어지고 눈앞이 흐릿해진다. 벌린 입 안으로 침이 고였다. 맞닿은 부분에서 땀이 차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때 깨달았다. 놈들이 라울을 유인해서까지 이리로 온 목적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바로 놈들의 목표였던 것인가. 도대체 왜?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은 빙글빙글 돌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끝까지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기휼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렸다.

“11시 방향으로 새로운 물체 접근 중!”

누군가의 외침에 “빌어먹을!”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위급할수록 냉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으니 냉정한 대응을 하기가 영 힘들었다.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군함이 크게 흔들렸다. 그 충격에 통신병은 옆으로 쓰러졌다. 머리가 부딪치는 순간 눈앞으로 별이 반짝였다.

“크윽!”

“소각로가 타격을 입었다! 폭발의 위험이 있으니 공간을 폐쇄하겠다! 근처에 있는 자들은 모두 피하도록! 다시 한번 말한다! 3번 소각로를 폐쇄한다!”

사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다들 패닉 상태인 듯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기란 영 힘들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냉정한 대응이 필요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어찌 행동을 취하는 게 옳은 걸까. 그리고 20여 분이 지날 때까지 기억을 하지 못했던 얼굴이 눈앞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마기휼.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통신병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마기휼 소령님의 위치를 알아봤나?!”

“내려가신 이후로 연락이 없습니다! 아래에 있는 자들 말로는 F4 창고에서 사람이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 모두 그쪽을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리시고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총성이 몇 번 울리더니 이후로는 잠잠해졌다고 합니다!”

“그럼 큰일 아니야?!”

총성이 울렸다니. 죽은 거 아니야?

본인의 생각에 스스로가 놀란 통신병은 급히 내부 방송 버튼으로 손을 뻗었다.

“일단은 그리로 사람을 보내야-!”

“적들이 물러납니다!”

앞에서 들리는 외침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얼굴을 들었다. 말대로 검은 차량은 물살이 빠지듯 물러나고 있었다. 요리조리 피하면서 잘도 공격을 해 대더만 왜 또 퇴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 생각을 해도 당장은 안심이 되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어깨에 들어간 힘을 탁 빼놓고 있으려니 망원경을 들고 있던 자가 황급히 말했다.

“4시 방향에서 뭔가가 접근을 합니다!”

“다들 방심하지 마라! 다른 게 오는 걸 수도 있어!”

다들 물러난 후 새롭게 나타나는 거라니. 거물인 거 아니야? 통신병은 긴장으로 목 뒤가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어쩌면 라울의 허가 없이 군함의 폭격탄을 사용해야 할지도 몰랐다. 짧은 순간 망설이던 그는 자판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앞에서 다른 외침이 들려왔다.

“라울 대령님이 타고 나가신 차량입니다!”

“뭐? 정말인가?”

순간적으로 정신이 확 돌아왔다. 내내 안개가 끼인 듯 몽롱했던 머리가 맑아진다. 통신병은 급히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하단에 금이 난 방탄유리에 달라붙어 바깥 상황을 살폈다. 뭔가가 나타나긴 했다. 그것이 눈에 익었다.

방심하지 않고 통신병은 옆에 서 있던 군인의 손에 들려 있던 망원경을 빼앗아 들고 갔다. 가지고 있던 걸 빼앗겨도 군인은 싫은 얼굴이 아니었다. 망원경을 들고 바깥을 살핀 통신병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대령님이시다. 이제 살았어!”

살았다. 통신병은 환희에 차 양손을 위로 번쩍 들었다. 그런 그에 동화되듯이 중앙실 안쪽에 있던 이들이 환호를 올렸다.

군함 옆으로 차량이 멈추고 그곳에서 라울이 내렸다. 내리자마자 어깨를 두어 번 털며 다가오는 라울을, 군인들은 반갑게 맞이했다.

“대령님! 무사하십니까!?”

“놈들의 계략에 휘말린 건가.”

중얼거린 라울은 군함을 확인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으로 파손된 곳이 더러 있었다. 그걸 확인한 라울이 굳은 얼굴이 되는 걸 확인한 군인이 황급히 말했다.

“소령님께서 지시를 잘 내려주셔서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현재 제 3소각로가 타격을 입어 그쪽을 폐쇄 중에 있고 외부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그리 심한 상태는 아닙니다.”

“마기휼 소령이 지시를 내렸던가?”

그렇다며 군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급 상황에서 현명하게 처신을 잘 해주셨습니다.”

“지금 그는 어디에 있지?”

“저기 그것이…….”

어물거리는 순간 라울의 표정이 급변했다. 안 좋은 예감이 드는 걸 느끼는 순간 자연스럽게 태도가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말을 해라!”

“F4층에 침입자가 발생해서 혼자 아래로 내려가셨습니다. 직후 적들의 공격이 몰아쳐서 그쪽으로는 신경을 쓸 수 없었습니다. 이리로 내려오는 동안 그쪽으로 몇을 보냈습니다.”

“침입자라고?”

“실은 안에서 총성이 몇 번 울리고 난 후에 잠잠해졌다 하는데,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습니다. 저희들도 방어하기에 급급해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울이 움직였다. 이쪽을 지나쳐 위로 올라가는 얼굴이 하도 진지해서 순간적으로 한 대 맞는 건 아닌가 싶었다. 놀라 양손을 황급히 들었던 군인은 라울이 군함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자 뒤를 돌아봤다. 멍하니 있던 그는 급히 라울의 뒤를 쫓았다.

F4층에서 창고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 선 군인은 끙끙거리며 문을 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간신히 문이 밀리자 군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순간적인 힘을 써서 문을 끌어당겼다. 덜컹- 하고 문이 절반 정도 열렸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연장을 들고 온 동료인가 싶어 고개를 돌린 군인은 안으로 들어서는 게 라울임을 확인하고는 급히 일어섰다.

“대령님. 오셨습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울이 절반쯤 열린 문에 손을 댔다. 그리고 힘을 주자 단박에 열렸다.

자신이 매달려 있을 때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문이 라울이 힘을 줬다 해서 이렇게도 쉽게 열려도 되는 건가 싶었던 군인은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그러다가 급히 안으로 들어가 라울을 만류했다. 아직 안에는 마기휼 소령이 있고 침입자가 들어왔기에 위험하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에 군인은 사색이 되었다. 어두운 복도 가운데에 쓰러진 동료가 보였기 때문이다.

급히 그리로 달려가 목에 손가락을 대보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맥박은 정지된 상태였다. 군인은 고개를 들어 라울을 올려다봤다.

“주, 죽었습니다.”

그 순간 라울의 표정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굳어졌다. 라울은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공간에는 이쪽 외엔 아무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불을 켜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군인은 허겁지겁 움직였다. 라울의 뒤를 따라왔던 이들은 급히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문 옆에 달린 버튼을 두어 번 조작하나 싶더니 이내 복도가 훤히 밝혀졌다. 바깥에 있던 군인 모두가 안으로 들어가 양측에 있는 창고를 모두 뒤졌다. 왼쪽 창고에서 외부의 침입 흔적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기휼 소령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라울에게 보고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라울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꾸도 하지 않으니 보고를 한 군인의 안색은 점점 칙칙하게 변했다. 이를 어쩌면 좋으나 싶어 숨을 죽인 채로 있으려니 왼쪽 창고에서 다른 군인이 달려 나왔다.

“대령님. 이런 걸 발견했습니다.”

라울은 군인이 내미는 걸 받아들였다. 하얀 리본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졌다. 구겨진 리본의 면으로 적혀진 글자가 보였다. 라울은 급히 그걸 바로 펴서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 그 위에 적힌 글귀를 보는 순간 그 얼굴은 말도 못할 정도로 굳어버렸다.

[라울. 마지막 순간이다. 와라.]

누구의 글씨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한 손에 리본을 쥔 채로 라울은 이를 악물었다.

“감히―.”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라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렇게나 무섭게 화를 내는 라울은 처음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에 군인은 큰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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