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라울이 중앙실로 들어오자 모두가 뒤를 돌아봤다. 라울이 한쪽 눈썹을 올리자 언제 딴청을 피우고 있었냐는 듯 재차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걸 확인하고 난 후, 라울은 통신병에게 걸어갔다. 통신병은 들고 있던 걸 라울에게 건넸다. 귀에 통신구를 밀어 넣고 마이크를 입 앞에 댔다.
“라울 대령이다.”
통신기 저편에서 들릴 소리를 기다렸다. 연결 불안인지 치직- 하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이내 차분하고 독특한 억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전 미스닉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암시장의 최고 지도자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암시장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왜 연락을 취해 온 것인지 그 이유를 들어봐야겠군.”
[이유에 대해서는 대령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아니. 난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대가 설명을 잘 해보도록.”
[이런, 정말 재미있는 분이시로군요.]
상대는 웃음으로 분위기를 전환해보려 했지만 라울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뻣뻣남인 라울이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침묵하고 있으려니 미스닉의 웃음도 사라졌다. 그는 보다 더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군함이 나타남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놀라 제대로 된 거래를 시도하지도 못하고 급히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그로 인해 얻은 우리들의 손실액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장담컨대 노르디아 연방국의 1년 예산과 비견될 만한 금전적인 손해일 겁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암시장은 삼국의 암묵적인 허락하에 운영되고 있던 곳입니다. 그걸 대령님께서 망치신 겁니다.]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군.”
냉랭하게 던진 말에 반대편이 침묵을 했다.
라울은 눈을 내리떴다. 만약 미스닉이라는 자가 그 앞에 서서 표정을 봤더라면 그대로 굳어버렸을 만한 고압적인 태도였다.
“삼국은 너희를 암묵적으로 허락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너희가 제공하는 정보를 이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부탁을 하기만 하면 바로 비공식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자금을 대주는 너희가 편리해서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거다. 또한 범죄자들이 불법으로 얻은 물건이 한 장소에서 거래되게끔 하여 외부로 흘러나가는 걸 막기 위한 것도 너희가 유지될 수 있게 하는 한몫을 하는 부분이지.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암시장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다른 다양한 시장이 형성되게 된다. 그리될 경우 그를 감시할 세력도 분산되어야만 했다. 그건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암시장이라는 존재를 삼국이 눈감아주고 있는 거였다.
거대한 규모로 운영이 되어 때로는 위협적이지만, 암시장 하나만 감시하고 견제를 하면 물건의 유통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해서 암시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간이라는 건 아니었다.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긴 하겠지만 이쪽이 원하면 너희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스스로 알아낼 수 있다. 딱 5년만 불법거래 품목에 대한 삼국의 제재가 들어가면 지금 암시장을 이용하는 놈들의 절반을 잡아들일 수 있단 말이다. 너희의 존재가 절대적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지금의 이 체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이런 식으로 나에게 연락을 취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네놈들은 그저 존재하고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우리의 편의를 봐주기만 하면 되는 거다.”
라울이 말을 하는 동안 주변에 있던 군인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라울의 냉랭한 태도는 듣기만 하는 그들의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그 말을 직접적으로 받아내는 이는 오죽하겠는가. 얼굴을 모르는 이가 새삼 불쌍하게 여겨졌다.
잠시간의 침묵 후, 미스닉이 입을 열었다.
[저희를 꽤나 무시하시는군요.]
“무시하고 있는 거다. 네놈의 이 행동을 비웃고 있는 거다. 이럴 시간이 있으면 폭발을 일으키는 배들의 처리에 손을 쓰는 편이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 될 텐데?”
반대편으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대충 무마를 하고 있었다. 미스닉 그가 이쪽을 상대하려 함에 있어 상당 부분의 전의를 잃은 걸 느낀 라울은 본론을 꺼냈다.
“아이작에 대한 정보를 넘겨라. 그렇다면 이번 일에 대한 문제 상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보상을 해주지. 하지만 재차 이런 건방진 태도를 취한다면 앞으로 너희들에게 어떤 제재가 가해질지 나도 장담할 수는 없다.”
위험한 주사위를 던지고 있었다.
강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나 이것은 아직 여왕에게 보고 된 부분이 아니었다. 여왕은 암시장 위로 군함을 대는 것에 대한 커버만을 약속했다. 직접적으로 선전포고를 하라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라울은 암시장을 이끄는 이들이 교활한 자들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쪽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마지못해 수긍을 할 자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신은 노르디아의 유력한 왕통이시지요. 하지만 그건 바람 앞의 촛불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로 인해 당신을 곤란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나직한 목소리는 협박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라울의 표정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런 걸로 내가 곤란해질 것 같은가.”
이쪽이 건넨 패에 비해서 지금 이자가 하는 말은 무척이나 약한 것이었다.
그래. 내가 사내밖에 안을 수 없는 몸이라는 걸 너희가 알고 있다는 거냐. 그래서 그게 뭐가 어때서? 이들은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거라며 라울은 눈을 내리떴다.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유약한 인간이 아니다. 그런 걸로 내 약점을 잡을 생각이라면 해도 좋다. 하지만 결과물을 두고 본다면 나보다야 네놈들이 피해가 더 막심할 것이다. 하늘의 땅이 가라앉고 1500여년 동안 이어져 오던 암시장. 그 거대한 땅이 바다 속으로 침몰하게 될 것이다. 내 장담하지.”
라울은 입을 다물었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서늘한 뭔가가 그에게 감돌고 있었다. 지금껏 라울에게 접하지 못했던 날카로운 기운에 중앙실에 있던 모두가 숨을 죽인 채로 침묵을 유지했다. 그건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다.
생각을 해보는 듯싶었다. 굴욕을 당하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감정적으로만 행동을 취할 수는 없을 거다. 그에게는 막대한 책임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쪽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기다림을 유지하는 동안에도 군함은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작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 기다림이 지루하게 여겨질 즈음 긴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알았습니다. 이번 일은 모두 묻겠습니다.]
묻겠다라. 그래도 자존심을 유지하고 싶다는 거냐. 굳이 그런 것까지 트집을 잡을 마음은 없었다.
“나는 아이작을 찾고 있다. 그들을 소탕하는 데에 너희들의 정보를 원한다.”
[저희는 그에 관해서는 그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스닉의 단호한 말에 라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기운을 읽어낸 것인지 미스닉은 말을 이었다.
[장사도 신뢰가 기반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암시장에 속하는 대부분의 이들이 엔온에 소속되어 있고 아이작은 그들 중에서도 특별한 부류에 속합니다. 그에 대한 정보를 넘겨 그가 당신에게 잡히고 문제가 생기게 된다면 우리에겐 내부적인 분란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암시장을 비난하는 장사꾼들도 생겨나게 될 테고, 그들은 이곳을 이용하려 들지 않겠지요. 대령님.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 해서 화를 내거나 저희를 협박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당신들, 선택된 권력자들이 아래의 땅을 자유롭게 이용하며 모든 걸 누리고 있지만 우리들 돌연변이 엔온들은 그리할 수 없습니다. 일반인들은 모르는 은밀한 시장을 이용해서 물건을 팔고 돈을 버는 음흉한 짓을 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곳을 이용함으로 인해 친분을 쌓고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며 그들만의 규칙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공간이 바로 이 암시장입니다. 시장은 그 스스로 굴러가게 둬야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당신이 두 번 다시 이곳을 찾지 않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아이작 또한 이곳에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동료를 죽이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그에 대한 처벌을 모두 당신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당신들 스스로 그를 찾아내 죽이든 살리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보고만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통신은 일방적으로 끊겼지만 그것에 대해 뭐라 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라울은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통신기를 내려놨다.
군인들은 안 듣는 척하면서도 라울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 더군다나 통신기를 내려놓은 라울은 더없이 굳은 얼굴이었다. 앞으로 할 일정에 대해서 계속 의논을 해야만 했기에 물러나 있던 군인이 다가와 물었다.
“대령님. 어떻게 할까요?”
정말은 대화의 내용이 궁금할 거다. 하지만 계급상 그런 걸 물을 순 없었다.
눈치를 살피는 군인을 외면한 채로 라울은 입을 열었다.
“레드존으로 들어간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군인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치울스와 알센에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허가를 받지 않은 배가 그리로 들어간다는 것도 알려줘라. 그리고 저격해도 좋다는 말도 전해라.”
“네. 알겠습니다.”
군인이 물러나고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제공하지 못하는 공간이라는 건가.
그자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은 너무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통의 기준을 넘어서거나 부족한 것을 원치 않았다. 시간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많이 흘렀음에도 인간의 사고는 굳은 채로 진보할 줄을 몰랐다. 자신과 다르면 배척하고 밀어내고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세상에서 돌연변이들은 살 장소를 잃게 된다. 그리고 그 체제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사람들은 그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뿌리 깊은 차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보통의 선을 넘어서는 것. 그런 걸로 따지면 자신도 정상은 아니었다. 돌연변이인 것이었다. 그런 자신이 이 땅에서 당당히 살아갈 자격이 없는 것인가.
라울은 눈동자를 움직여 앞에 앉아 있는 자들을 찬찬히 살폈다.
지금은 모두가 자신의 말에 복종하며 따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성향을 알게 될 경우 태도가 돌변하게 될 것인가. 귀족이니 그런 유희를 즐기는 것쯤이라며 마음 넓게 받아들일 것일까.
생각하던 라울은 이내 사고를 멈췄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라울은 잡념을 지우고 정면을 노려봤다. 아이작과 마리아. 그 두 사람이 어찌 움직일지를 예측해야만 했다.
세수하고 난 후에 머리를 다시 묶었다. 옷을 갈아입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거울 속에 비치는 건 마기휼. 그 이름을 지닌 사내였다. 거기서 더 달라지거나 이상해질 건 없었다.
마기휼은 이를 드러내며 웃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엄청 가식적인 웃음이다. 그런 얼굴을 하는 것 자체가 멍청하게 여겨져 입꼬리를 내렸다.
침대에 걸터앉은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금 쉬었다. 또 쉬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한숨을 쉬면 쉴수록 가슴이 더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뻥- 하고 터지는 게 없다면서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기운 없이 눈을 들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라울이 보였다.
“……왔어?”
지금 단계에서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게 고작 그거였다. 딱히 달리 할 말도 기억나지 않아서 하기는 했는데 반말이었다. 저 깐깐한 놈이 기분 나쁘다 할 수도 있었다.
“오셨습니까.”
“편한 대로 해도 괜찮다.”
전이라면 라울이 저런 식으로 말을 하면 바로 인상을 썼을 터였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어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그런 생각부터 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선 라울은 겉에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암시장에 침입해 들어갔을 때 걸쳤던 의복을 하나하나 벗는 걸 확인하며 마기휼은 중얼거렸다.
“앞으로 어디를 가는 거지?”
“레드존으로 들어간다.”
레드존이라니. 정말 그런 곳으로 가는 거란 말인가.
살아생전 그 금지 구역으로 들어가게 될 일이 있을 줄이야. 정말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래 봤자 고작 30여 년 남짓이지만 말이다.
“들어가는 즉시 벌집이 되는 거 아니야?”
“그들은 그렇게 되겠지. 그리된다면 이쪽은 수고를 더는 거다.”
그들이라면 아이작과 마리아를 말하는 건가. 그러면 이쪽은 아니라는 거다. 다른 나라인 알센과 치울스에 레드존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은 걸까. 옆으로 눈동자를 내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마기휼은 침대가 흔들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라울이 침대에 앉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편한 차림을 하고 머리카락도 길게 풀어 내린 채로 있었다. 일이 많았기 때문인지 다소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작이라는 자는 뭐지?”
멍하니 라울을 쳐다보고 있었던 마기휼은 눈을 깜박였다. 바로 대꾸를 하지 못하고 쳐다만 보는 마기휼을 똑바로 응시하며 라울은 재차 물었다.
“그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아주 친한 건 아니야. 그저 딱 3번 만났을 따름이야.”
더듬거리며 하는 대답에 라울은 재차 추궁에 들어갔다.
“어디였지? 마지막은 암시장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알고 있겠지. 그쪽과 마주쳤으니 말이다.
지금 라울이 묻는 건 그저 정보를 모으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왜 추궁을 받는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마누라가 바람을 피우는 것 같으니 그걸 묻는 남편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내 자신의 생각에 마기휼은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멍청하기는,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왜 웃는 거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웃겼을 따름이야.”
“그 사내와 만났던 순간이 재미있었던 건가?”
왜 이렇게 집요할까 싶었다. 전이라면 완전 이상하다며 이쪽도 정색을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질투하지 마.”
다른 따르면 이런 말 하지도 않았을 거다. 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라울이 어떤 반응을 취할지 솔직히 좀 궁금했다. 그래서 그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라울은 가만히 있었다. 무표정이다. 역시나 괜한 말을 했던가.
“그 사내를 죽일 작정이다.”
마기휼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돌아보는 마기휼은 맹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노려보며 라울은 차분하게 말했다.
“너를 끌어안고 네 목에 입술을 대고 있더군. 그래서 죽이고 싶었는데 마리아가 방해가 되었다. 그를 쏘고 나서 그 아이작이라는 놈도 죽이려 했는데 이상한 걸 몸에 두르고 있더군. 하지만 다음에 마주치면 그놈은 내 손에 반드시 죽어. 그것이 질투의 감정이라 생각하나.”
“…….”
이쪽이 장난으로 말을 했으면 그쪽도 그냥 가볍게 받아주면 그만이었다.
뭘 저렇게 정색을 하는 거야. 사람 이상해지게 말이다.
마기휼은 다리 사이에 양손을 넣고 허벅지를 오므렸다. 몸을 움츠리자 라울이 “춥나.”라고 물었다. 마기휼은 고개를 저었다.
뭐라 확실하게 말을 할 순 없지만 상당히 묘했다. 지금 이 상황이나 분위기는 정말 어색하고 이상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겠지만 진짜로 연애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연애라. 그러고 보니 그런 거 해본 적도 참 오래되었구나. 마기휼 인생 최고의 황금기는 13살에서 17살까지였다. 그때 정말 여자가 많이 따랐는데. 그때 이 얼굴도 나름 미소년 축에 속했지. 살짝 핀트가 어긋난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헤죽거리고 웃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라울의 시선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집요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지금 그가 무엇을 궁금해하고 저리 쳐다보는지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마기휼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처음은 너와 함께 군을 떠났을 때 만났고, 두 번째는 안베르였지. 그때 마리아가 탈옥을 했어.”
“그때부터 그들이 같은 편이었다는 걸 짐작했었나?”
“짐작은 했지. 그리고 군 무기고가 털렸을 때 확신했고 말이야. 그냥 막연한 감으로 두 사람이 같이 움직인다는 걸 알고 있었어.”
특이하고 묘했다.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풍길 수 없는 분위기가 두 사람에게 감돌고 있었다. 그건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걸지도 모른다. 둘이 같은 편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번 암시장 사건을 통해 보다 확실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을 향해 치달아 가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걸까.
마기휼은 중얼거렸다.
“마리아는 죽는 건가.”
“왜? 죽지 않았으면 하나.”
“그런 걸 떠나 그녀가 왜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건지 알 수 없을 따름이야.”
“힘을 얻고 싶은 거겠지.”
이상한 말이었다.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너를 끌어들이는 게 힘을 얻는 거야?”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라울을 자극하려 했다. 그를 자극해서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계속 연결이 될 리가 없잖은가. 지금도 잘 생각을 해보면 자신도 라울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생각을 하다말고 가만히 있었다. 멍해진 채로 있으려니 라울이 입을 열었다.
“사람은 극한으로 내몰리게 되면 확실하지 않은 것에 매달리게 되지. 그 환상의 힘을 손에 넣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지는 거야.”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고? 어떤 식으로?”
“하늘의 땅. 그걸 다시 떠올리고 싶은 모양이지.”
마기휼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건 또 무슨 말?’ 그리 묻는 얼굴이었다.
“예전에 이 세계는 하늘의 땅과 그곳에 군림하는 여신에 의해 통치되었지. 그 땅은 절대적이었다. 모두가 그 땅을 두려워하고 연모하며 시기하고 동시에 갈구했지.”
라울은 손바닥을 펼쳐 그것을 내려다봤다. 잔잔한 눈빛을 하고 있던 라울은 천천히 손을 움켜쥐었다.
“그 강한 힘을 갈구했어. 손에 쥐면 모든 걸 누리는 그 막대한 힘을 말이야. 하지만 어떤 시대, 어떤 상황이든지 한곳으로 집중이 된 것은 뒤틀림을 유발하기 마련이지. 결국 하늘의 땅은 가라앉았고 어둠의 시기가 도래했다. 지금의 이 체제를 유지하기까지 정말 많은 노력을 쏟아야 했어.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지금의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마기휼은 라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니다.
그저 말을 듣는 입장으로 가만히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모두의 입맛에 맞출 수는 없다. 가장 안전한 가치를 중심에 세우고 가지치기를 하는 거다. 그로 파생되는 문제점들은 시간을 들여서 차차 개선하면 된다. 하지만 저들은 그걸 믿지 않지. 지금의 이 체제가 계속 유지되고 자신들은 계속 차별을 받을 거라고 확신을 하는 거다. 때문에 이런 단정적인 짓을 저지르는 거고 말이야.”
언젠가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지만 아직은 그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막연한 미래만을 보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마기휼은 중얼거렸다.
“차별은 없어질 수 없어. 기득권들이 있는 한은 말이야.”
“하지만 변화는 생겨날 수 있다.”
“네가 그 변화를 이룩해낼 수 있어?”
마기휼은 라울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라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난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축을 이룰 수는 있겠지. 앞으로 변화해 가는 흐름에서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을 거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왜 자신을 가리키는 건가 싶었던 마기휼은 당황해 눈을 끔벅였다.
“큰 것부터 상상하면 막연해질 따름이지. 지금 당장은 한 축을 이루는 것. 작은 것에서부터 계획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일이야.”
작은 것에서부터 계획하는 것인가. 그런 건가. 라울이 생각하는 것은 그런 것들인가. 처음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말을 들으면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래. 넌 역시 좋은 놈이야. 그냥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있잖아, 라울.”
“왜 그러나.”
되묻는 어조는 딱딱해도 목소리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왠지 모르지만 부드러운 것 같았다. 이쪽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하지만 이쪽 상태가 안 좋았을 때에도 라울은 그저 달래줄 뿐이었다. 큰 소리를 내거나 윽박을 지를 것 같은 이미지인데 그답지 않게 자상했지. 이런 상황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라울에게 마음이 많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연하인데. 남자인데. 그런데 도대체 왜―.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마리아 일당이 이상한 소리를 한 걸지도 모르나 그게 정말이라면 어떻게 하나 싶었던 마기휼은 긴장해 입술을 혀로 핥았다. 한번 말이나 꺼내보자 싶어 고개를 들었다.
“있잖아―”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건, 차분한 녹안이었다. 그 눈동자에 빨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 정신 차리기로 했다.
조금 전 자신의 느낌에 당황한 마기휼은 생각이 나는 대로 말을 해버렸다.
“너는 여왕과 혼인을 하는 거야?”
“뭐라고?”
라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설마하니 이쪽에서 그런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동시에 마기휼도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것도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었다.
“너는 왕통이잖아. 모두가 그러던데? 네가 여왕의 가장 유력한 부군 후보라고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내가 그러니까. 이, 임신을 하게 되면 그 아이가 여왕에게로 가버리는…….”
말을 잘 하려 했는데 점점 횡설수설이 되어버린다. 지금 뭔 말을 하는 거야. 스스로를 자책하는 순간 라울이 갑자기 어깨를 붙잡아 왔다. 덥석- 하고 강하게 붙잡는 것에 놀란 마기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고개를 들자 정색을 한 라울의 얼굴이 보였다.
“몸에 뭔가 이상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야! 절대로 안 그래!”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손을 마구 흔들어 댔다.
“안 그래!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술집에서 완전 날뛰는 거 봤지? 나 완전 날았어! 몸에 이상이 있으면 그렇게 못 움직여. 안 그래?”
“……그런가.”
중얼거린 라울은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하지만 그 얼굴에 서린 의구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걸 지워내버리겠다는 듯 마기휼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니까 꼭 나라는 건 아니고, 네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는 여왕에게로 가는 거냐는 말이야. 아이를 낳은 사람이 키우지 못하게 되는 거냐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울이 재차 내려다봤다. 그 눈빛에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왜 또 저러는 건가 싶어 마기휼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왜, 왜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데?”
“내가 아무나 안아 아이를 만들 사람으로 보이나?”
“…….”
나는 네가 하반신 가볍다고 말한 적이 없어. 그런데 왜 그렇게 정색을 하는 건데? 이상하잖아. 내가 무안해지잖아. 그리 따져 물으려던 마기휼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꼭 나라는 건 아니라는 말이 거슬렸던 거다. 라울은 지금 자신이 한 말을 이상하게 돌려서 받아들인 거다. 마기휼은 당장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안 그래.”
이걸로는 부족했다. 이쪽이 나름 실수한 거니까 더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안 그렇다는 말의 의미는 말이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안아서 아이를 만들 것 같지는 않단 말이야. 아니, 이건 아니고. 다시 돌려 말해서 아무나 함부로 안지 않을 거라는 의미야. 그러니까 만약 네 아이가 태어나게 된다면―”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끔 되었다. 목이 바싹바싹 타올랐다. 그러는 동안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내가 낳게 되는…… 걸까?”
중얼거리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라울을 바라봤다.
라울은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쪽이 혼란스럽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속을 읽어낼 수 없었다. 어떤 생각을 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전이라면 그게 답답했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쳐다보는 동안 무지무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은 어색함. 그것을 라울도 느꼈던 건지 그는 몸을 일으켰다.
“잠깐 위에 올라갔다 오겠다. 피곤해 보이니 누워 있도록 해라.”
라울은 당장 밖으로 나갔다. 내색하지 않은 그의 동요가 느껴진다. 그렇게 라울이 나가고 문이 닫혀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마기휼은 당장 침대 위로 쓰러졌다. 똑바로 누운 마기휼은 양손을 마주 잡았다.
“제발.”
눈을 감았다.
지금 생각하는 그것이 그저 상상이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내일모레면 서른이었다. 그 나이를 먹는 동안 단 한 번도 임신의 가능성을 점쳐본 적이 없었다. 라울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은 건 딱 하룻밤이었다. 물론 횟수는 여러 번이었어도 말이다.
아니지.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제발. 지금은 안 돼. 지금은 안 된단 말이야.”
양손에 힘을 주고 눈을 질끈 감은 마기휼의 얼굴로 간절함이 감돌았다.
임신은 안 돼. 절대로 안 돼. 그러면 너무 불쌍하잖아. 아이가 진짜 불쌍해지는 거라며 마기휼의 표정은 괴롭게 일그러졌다.
밖으로 나온 라울은 바로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암만 생각해봐도 마기휼의 태도가 이상했다. 웃다가 진지해졌다가 횡설수설을 했다가 당황을 했다가 눈치를 봤다가 했다. 10초 안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표정을 보여준 건지 모르겠다. 그에게서 동요가 읽혀졌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설마…….
순간적으로 라울의 표정이 굳어졌다. 진지하게 변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닫힌 문 너머로 마기휼이 있었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쪽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어째야 하는 건가.
정말로 마기휼이 임신을 한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대령님.”
부르자마자 바로 라울의 고개가 돌아갔다. 눈을 매섭게 뜨고 바라보는 것에 군인은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군인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노, 놀라신 겁니까?”
“아니다. 무슨 일이지?”
아니라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 표정은 굳어 있었다. 상당히 어색하게 속내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군인은 알아낸 것을 보고했다.
“레드존 주변으로 자기장 폭풍이 일고 있습니다.”
“뭐라고?”
자기장 폭풍이라니. 라울은 더 묻지 않고 군인을 지나쳐 걸어갔다. 라울이 서두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군인도 그 말을 듣고는 순간적으로 글렀다는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군인은 급히 라울의 뒤를 쫓았다.
통신병 주변으로 몰려든 군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돌파는 어렵겠는걸. 그런 말을 주고받는 와중에 문이 열리고 라울이 들어왔다.
중앙실에 있던 모두가 그런 라울을 돌아봤다.
“오셨습니까?”
“보고해라.”
라울이 다가오자 군인들은 통신병의 주변에서 떨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통신병이 화면을 가리켰다.
“일단 화면을 봐주십시오.”
하단 가운데의 하얀 점이 군함이고, 위로 올라가는 붉은 점이 추격을 하는 무리였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동그란 원이 일정하게 퍼져 나가는 게 확인되었다. 화면 윗부분에는 5단계의 위험도에서 4단계를 알리는 표식이 깜박거렸다.
“아직은 비활동성입니다. 하지만 언제 갑자기 강해질지 모릅니다.”
“언제부터 확인이 된 거지?”
“2분 34초 전입니다.”
화면 아래에 적힌 시간을 확인하고 바로 대답을 했다. 라울은 굳은 얼굴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런 상황에서 통신병은 한 가지를 떠올렸다. 레드존. 삼국의 감시 지역인 동시에 전설이 가라앉은 땅이 아니던가. 그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레드존이 활동을 하는 걸까요?”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과한 분석은 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입을 다문 통신병은 무안한 얼굴이 되었다. 정확한 건 하나도 없는 건데 우스운 말을 했구나 싶었다. 레드존의 활동이라니.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었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지역이 아니던가. 때에 맞춰 라울이 고개를 들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구름이 깔린 하늘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저들은 멈추지 않을 거다.”
“자기장 폭풍에 휘말리게 된다면 그 순간 박살입니다.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 없게끔 됩니다. 저들이 자기장 폭풍을 뚫고 간다 해서 우리들까지 그 뒤를 쫓을 필요는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자기장 폭풍이 발생했는데 더 움직이는 건 자살 행위였다. 라울도 그걸 알 터였다. 여기서 멈출 것을 명령하지 않을까. 하지만 라울은 통신병이 기대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2대의 군함은 3km 지점에서 멈추고 우리들만 저들의 뒤를 쫓는다.”
“하지만 대령님. 만약 자기장 폭풍에 휘말리게 된다면―”
“남은 2대의 군함이 대공포를 발사한다.”
통신병의 입이 살짝 벌려졌다. 중앙실에 있던 군인들이 하나같이 ‘말도 안 돼.’ 같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라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얽힌 구름을 뚫으면 우리들은 최대한 자기장이 적게 흐르는 지점을 통과해 레드존 지역 내로 진입을 한다.”
구름 사이에 섞인 이물질이 자기장을 증폭할 수 있고 그 면적을 확대할 수도 있었다. 대공포로 그런 구름을 갈라 내는 건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리 자극을 받은 자기장이 활성화될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었다. 재고를 바란다는 눈빛을 보내봤지만 라울은 단호했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이미 결정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그가 결정한 것에 대해 번복이란 있을 수 없었다. 통신병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체념을 하자 생각의 전환이 한결 빨라졌다. 그는 손을 들어 경례를 했다.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다른 군인들도 순순히 경례를 하고는 본인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걸 확인하고 난 후 라울은 화면에 손을 올렸다.
“방송을 통해 앞으로 자기장 폭풍을 지나친다는 것을 알려라. 만약 쇼크를 받아 쓰러지는 이들이 생겨날 경우 함부로 건드리거나 깨우지 말고 바로 군의관에게 보고할 수 있도록 한다. 지금 그대들이 알아야 할 건 바로 그것뿐이다. 나머지는 본인들이 더 잘 알 테니 더 말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리고―”
화면에 비친 자기장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갑자기 그 면적이 폭발적으로 커질지 아무도 몰랐다. 반반의 확률.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다. 라울은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다.”
근거 없는 공수표 발언이었다. 하지만 저 말을 하는 건 바로 라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신뢰가 생겨난다. 뭔지 모르지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군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확인한 라울은 화면에 비치는 자기장의 영역을 재차 확인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작 일당이라면 직진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니 놓치지 않는다. 놈들이 뚫고 지나가는 걸 이쪽이 피할 순 없었다. 라울은 군함이 나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항공 궤도를 정할 암산을 시작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화면을 티딕- 하고 건드렸다.
“재미없네.”
손을 치운 마리아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 한쪽 팔을 걸쳤다. 배를 조종하는 사내는 너무도 긴장해서 입을 벙긋도 하지 못했다. 그 옆 조수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건 아이작이었다. 정면을 바라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마리아는 그를 도발하듯 이죽이는 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들어가면 박살이야. 완전 통구이가 되어버리겠어.”
“그래도 가지 않을 수는 없지. 한번 시작을 한 이상 끝을 봐야 하는 거니까.”
끝을 본다는 말을 할 때에도 아이작은 느긋했다.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작정이겠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래에 타고 있는 똘마니 중에는 자기장 폭풍을 지나친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바로 탈출을 하는 놈들이 있을 수 있었다. 마리아는 핏- 하고 웃었다.
“선택의 여지도 주지 않겠다는 건가.”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보다야 화려하게 마무리를 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화려한 마무리인가.”
중얼거린 마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깊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를 바라보던 톰이 팔을 벌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매달려 오는 톰을 느낀 마리아는 다정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니?”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가느다란 마리아에게 매달린 모습은 확실히 이상해 보였다. 하지만 톰이나 마리아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앞으로 둘러진 톰의 손을 토닥였다.
“괜찮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야.”
창 너머로 보이는 부연 구름들. 벌써부터 자기장의 영향권 내로 진입을 한 모양이었다. 뚫고 지나갈 때의 대비를 해 둬야겠지만 지금 당장으로선 움직일 기분이 나지 않았다. 마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우리는 악운에 강했으니까.”
그리고 그 악운은 끝까지 자신들을 인도해줄 것이다. 그 끝에서 이쪽이 살아남게 될지, 아닐지는 모두 하늘에 달려 있었다. 그래. 하늘에 달려 있었다.
부디 마지막 순간에는 신께서 저 선택 받은 이들이 아닌 자신들의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며 마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앉아 라우젝은 체스를 뒀다. 그는 언제나 늘 무료하다는 얼굴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진지했다. 그를 상대하는 건 준수한 용모의 사내였다. 그리고 주변으로 사내와 비슷한 복장을 걸친 장신의 사내가 셋 더 있었다. 그들이 지켜보는 동안 라우젝은 말을 옮겼다. 움직인 말이 여왕의 앞에 멈췄다. 그걸 확인한 사내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졌습니다.”
“왜 마지막까지 잘하다가 꼭 결정적인 순간에 기세를 늦추는 거지? 일부러 져주는 거야?”
“아닙니다. 저는 부족합니다. 이기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내가 기뻐할 거라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라우젝의 손이 체스 판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옆으로 주욱 쓸었다. 그의 손에 걸린 말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 너머로 얼음처럼 서늘해진 라우젝이 보였다.
“이런 건 백 년도 일러. 너 같은 거의 배려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제대로 다시 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정말 강해. 네가 봐주지 않았어도 내 스스로 이길 수 있었을 거야.”
“……죄송합니다.”
대답을 하는 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신이 한 행동으로 인해 라우젝이 정말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었다. 커다란 실수를 한 걸지도 모른다며 안색을 굳힌 채로 있으려니 라우젝이 옆에 선 사내를 올려다봤다.
“말을 다시 주워 놔.”
“네. 알겠습니다.”
사내가 무릎을 꿇고 앉아 체스의 말을 주워 들었다. 그걸 확인하며 라우젝은 하품을 하며 바깥쪽을 쳐다봤다.
무료하고 심심했다. 이렇게나 나른하다니. 멍하니 있던 라우젝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래로 소란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라우젝은 고개를 들었다.
“아래가 소란스럽군.”
그리고 듣고 싶지 않은 여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저 목소리의 주인이 이후로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예상할 수 있었다.
라우젝은 사내의 손으로 인해 다시금 정리가 되는 체스 판 위의 말들을 바라봤다. 가만히 있는 동안 구두굽 소리가 들렸다. 요란하고 시끄러웠다. 이 안에서 저런 식으로 달려올 수 있는 사람은 그 여자밖에 없었다. 오르베, 말이다.
“라우젝!”
생각하기가 무섭게 나타난 오르베는 당장 라우젝의 옆으로 달려왔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그녀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라울이 행방불명되었다고 들었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뭐가?”
다급한 여자와 달리 라우젝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체스 판 위를 살피는 것이 마치 ‘어떤 식으로 시작을 해야 이쪽이 초반에 기세를 잡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라우젝은 여유로웠으나 오르베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라울이 레드존으로 들어갔다 들었어! 자기장 폭풍에 휘말려 군함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던데 너는 왜 이렇게 태연한 거야!”
“군함의 위치가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행방이 묘연하다 표현하는 건 이상하지. 지금은 자기장 때문에 모든 통신이 마비가 된 것 같지만 폭풍이 가라앉고 나면 곧 발견될 거야. 노르디아 중앙군의 군함은 튼튼하기로 정평이 나 있지 않나.”
라우젝은 말을 들어 앞으로 옮겼다.
시작을 하는 건가. 오르베를 슬쩍 쳐다보던 사내도 말을 들어 앞으로 옮겼다. 이쪽은 얼굴이 벌겋게 익을 정도로 달려왔는데 라우젝은 심각한 사태를 두고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마치 라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것 자체가 그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인 듯싶었다. 오르베는 테이블을 후려쳤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체스 말이 몇 개나 쓰러졌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라우젝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쓰러진 말을 바라볼 뿐이었다. 고용한 분위기가 감도는 걸 느낀 사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라우젝이 물러나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들은 알아서 물러나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한 사람이 나가고 나자 오르베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설마하니 너 라울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
“그런 멍청한 짓을 바랄 리가 없잖아. 라울 말고 이 저택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말이야.”
“그러면 도대체 왜―!”
“이 낡아빠진 저택에 남아 있는 건 미친 라우젝과 정신병자 오르베뿐이야. 그 둘은 이 드넓은 곳을 지켜낼 수 없어. 사람들의 존경도 얻지 못하고 왕실과 소통도 할 수 없지. 우리만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진작부터 그걸 가늠해서 라울에게 잘 보였으면 좋았을 걸, 왜 그 속을 건드린 건지 모르겠군.”
라우젝이 가만히 있는 이유에 대해 알 수 없어 비난을 하려 했던 오르베는 줄줄 이어지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있던 그녀는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단 말이야.”
“그래. 마기휼이 아이를 낳으면 그걸 왕실에 진상할 생각이었겠지. 그래서 네가 더 잘될 것 같아?”
너, 라고 칭하는 순간 오르베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정말 화가 나는 듯 숨을 죽였지만, 라우젝은 지루한 일을 앞에 두고 있는 듯 나른했다.
“오르베. 구질구질하게 굴지 마. 계속 이러면 언젠가 라울은 저택에서 쫓아내는 게 아니라 널 죽일 수도 있어.”
오르베는 입을 벌리며 고개를 들었다. 기가 차다는 그녀만의 표현 방식이었겠지만 그것에 공감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라우젝은 그녀의 연극조의 행동에 점점 눈빛이 차갑게 변해 갔다.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아? 난 너희들의―”
“고모님일 뿐이지. 우리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야.”
오르베의 안색이 변했다. 표정 자체가 사라진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라우젝을 노려봤다. 라우젝도 그 만만치 않게 차가운 눈빛이었다.
“어디까지나 그것뿐이야. 우리가 네 죽은 아이들이라 생각하고 좌지우지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라우젝은 오르베를 올려다봤다. 얼굴이 온통 창백하게 질린 여자가 보였다.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겠지만 그럴 수 없을 거다. 그래서 그녀가 어리석은 거였다. 아니.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되어버리는 걸까.
낳은 자식마다 하나같이 고통스러워하며 결국에는 죽어버리고, 오빠가 남긴 어린 핏줄을 기르며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 아이들이 자신의 것인 양 여기고 소유하고 제 뜻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거겠지.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달리 있을까.
라우젝은 말을 들어 앞으로 주욱 나아갔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세워져 있던 여왕을 쓰러뜨렸다.
“체크 메이트.”
여왕의 자리에 말을 세우고 라우젝은 오르베를 올려다봤다.
“이와 같은 이치야. 우리는 더 이상 네 도움이 필요 없어. 나는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라울은 지금 단계에선 뭐든지 할 수 있어. 네가 암만 노력을 한다 해도 그에게 흠집을 낼 수 없을 것이며 그의 앞길을 방해할 수 없어. 넌 네가 대단하다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니야. 안 그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실제로 라울에 대해 듣자마자 이쪽으로 달려온 것이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을 볼 수 없으니 이쪽을 움직여 대신 해결을 하려 할 셈인 거다.
초라하고 입만 나불댈 줄 아는 여자. 그게 바로 오르베였다.
“넌 남편에게 버림받고, 아이를 셋이나 잃은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고 스스로를 화려하게 치장하며 뭐라도 되는 양 굴고 있지만 그 모든 건 발악일 뿐이야. 세상은 우리를 알아주지 않아.”
언제나 늘 자신만만하던 오르베의 눈동자 안쪽으로 균열이 인다.
스스로 설 힘을 잃은 그녀는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든 힘이 빠져나간 그녀는 무표정을 한 채로 웅얼거렸다.
“함부로 말하지 마.”
이리로 오는 동안 그녀의 목적은 딱 하나뿐이었다. 라우젝을 종용해서 그가 움직이도록 하는 것 말이다. 이런 식의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듣고 싶지도 않았다. 허탈한 듯 하얗게 지워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걸 확인한 라우젝의 입술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나는 너에게 충고를 하는 것뿐이야. 너나 나나 어차피 처지가 같으니까.”
“나는 달라. 너하고는 달라. 라울하고도 달라. 나는― 난―”
“넌 다 늙은 여자일 뿐이야. 오르베.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오르베의 손으로 힘이 들어갔다. 당장 발악이라도 할 것 같았던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대신 한 손을 들어 가슴을 눌렀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대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얼굴로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정리가 되지 않는다.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았다. 오르베는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바닥에 엎드렸다. 언제나 늘 자신만만하고 폭군에 가까웠던 그녀가 쓰러지자 놀란 아이들이 숨어 있던 곳에서 달려 나왔다.
다섯 아이들에게 있어서 라우젝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그 앞에 나서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오르베의 주변을 둘러싼 아이들의 눈동자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울지 마요.”
“마담. 울지 마요. 우리가 있잖아요.”
“제발 울지 마요. 제발―.”
다른 두 아이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오르베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위로를 하며 진심으로 슬퍼하는 아이들은 이내 꺽꺽거리고 울기 시작했다. 엉겨 붙어 있는 것이 마치 나뭇가지에 휘감긴 넝쿨 같았다.
저렇게 딱 붙어 있지 않으면 서로를 지탱할 수 없는 거겠지. 마치 자신과 저 바깥에 서 있는 사내들처럼. 나보다 못하고 약한 것을 두면서 우월감을 느낀다. 동시에 가지지 못한 걸 소유하며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오르베는 아이를.
자신은 성장한 건장한 사내를.
“구질구질해.”
이런 게 최악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쳐지지가 않는다. 아니라는 걸 느끼면서도 도대체 왜 이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비뚤어져 있었다. 그래서 곧고 바르기만 한 라울에게 콤플렉스를 느꼈던 것이다. 물론 더 다양한 것들이 개입되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모든 걸 지니고 점점 당당한 사내가 되어 가는 라울을 볼 때마다 자신의 결점을 확인하게 된다. 그가 빼앗아 간 모든 것들이 떠오르면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시기와 미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의 감정일 뿐, 라울에게 영향을 끼치진 못한다.
라울은 오르베를 내쳤을 때, 자신과 다른 길을 걷기로 했던 것이었다. 자신들이 없는 그들만의 삶을 걷기로 결정을 내린 거겠지. 오르베가 나가면 그 다음은 자신인가.
라우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르베의 곁에 모여들어 있던 아이들이 놀라 위를 올려다봤다. 두려워하면서도 물러나진 않았다. 끝까지 남아 있겠다는 건가.
나약한 것들이 저리 모여 있는 걸 보면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괴롭히고 싶고, 눈물이 나게 하고 싶다. 실제로 그리해버릴까 싶어 라우젝은 비열하게 여겨지는 미소를 지었고 아이들은 더더욱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라우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을 지나쳐 가버렸다.
복도로 나오자 아무도 없었다. 이쪽 곁을 지키던 사내들은 오르베가 와서 난동을 치니 모두 몸을 숨긴 모양이었다. 하여튼 겁쟁이들뿐이라며 라우젝은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꺾어지는 복도에 접어든 그는 고개를 들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한 여자가 복도에 서 있었다. 뒷짐을 진 채로 창밖을 내다보는 자세가 다른 이들과 다르게 기품 있고 반듯했다. 하얀 사각의 모자로 높이 올린 긴 머리카락을 감추고 목까지 올라오는 깃으로 몸을 가렸다. 그래도 날씬한 체형과 봉긋한 가슴이 그녀가 여성임을 드러냈다.
가만히 있는 사이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눈빛이 마주치는 동안 두 사람은 가만히 있었다. 어느 한쪽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을 터였다.
그 어색함을 없앤 것은 라우젝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여자에게 다가섰다.
여자, 가이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라우젝.”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왕 폐하.”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이는 라우젝에게선 평소의 모습을 찾아낼 수 없었다. 더 없이 진지하고 차분하고. 그리고 무거웠다. 내리뜬 눈동자가 이쪽을 향하지 않는 걸 봤을 때 여왕은 그가 이쪽을 피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척 물었다.
“그간 왜 왕실에 놀러 오지 않으신 겁니까. 전 그리운 친구를 무척이나 오랫동안 기다렸답니다.”
“제가 폐하께 접근하면 싫은 말을 하는 무리가 있을 겁니다.”
“그런 건 신경 쓸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평판은 중요한 겁니다.”
“당신이 절 잊은 건가 싶었습니다.”
라우젝은 입을 다물었다. 말을 주고받는 동안 시선이 비켜간 채로 있었지만 마냥 그리할 순 없었다.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였다. 가이나를 똑바로 봤다.
가이나가 라우젝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때 라우젝이 지녔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정리한 감정이었다.
라우젝은 고개를 돌렸다.
“달리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게 아닙니까.”
화제를 돌리며 다른 쪽을 응시하는 라우젝이 이쪽을 밀어내고 있음을 여왕이 모를 턱이 없었다. 용건부터 꺼내라인가. 어쩔 수 없이 서운한 마음이 생긴다. 여왕은 라우젝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나만 늙어버리는 걸까요?”
“사람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겁니다.”
“그렇죠. 원래 그래야 하는 거겠죠. 하지만…….”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본인의 지위를 상기했다. 입장과 분명히 취해야 할 태도 등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라우젝과 함께 있었을 때에는 그저 어린 공주였겠지만 지금은 여왕이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에 짊어진 것은 노르디아 연방국 그 모든 것이었다. 그런 자신이 이리로 온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라울이 레드존으로 진입을 했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오르베가 그리 말을 해줘서 알고 있었습니다.”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찾지 않아도 알아서 할 겁니다.”
건성인 태도였다. 실제로 라우젝은 라울의 행방불명을 위급 상황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될 거다. 그리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태연한 것은 라우젝 그뿐으로, 다른 이들은 그처럼 행동을 취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라울에게 문제가 생겨선 안 됩니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모두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입을 다문 가이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과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괜히 입맛이 썼다.
이번에도 라울인가. 모두가 라울에게 거는 기대는 불합리할 정도였다. 본인들이 할 수 없으니 그 모든 걸 라울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잘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라울이 조금이라도 기대에 어긋나거나 부응하지 못했다면, 그가 실종이 되었다 해서 여왕까지 나서지는 않았을 거다.
그들은 모르는 사이에 지나칠 정도로 라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만약 그 엄청난 기대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이들은 어떻게 될까. 어떤 식으로 변모하게 될까.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라울을 비난할 터였다.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모든 걸 빼앗아 가고 설 자리조차 빼앗으려 들 거다. 그리고 여왕은 절망하겠지. 간신히 안정을 찾은 그녀가 재차 무너지게 된다면, 그건 지옥이었다.
간신히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 속은 곯을 대로 곯아 뒤틀린 미친놈은 하나만으로도 족했다. 그런 존재가 더 늘어나는 건, 곤란했다.
“폐하.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굳이 피를 이어 갈 필요는 없다고 말입니다.”
여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잠시 보였던 동요는 금방 지워졌다. 대신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비난의 말을 여왕이 하기 전에 라우젝은 선수를 쳤다.
“당신이 안 되면 아드리드 후작의 자식이어도 됩니다. 그들도 왕통이니까요. 제가 아니라면 다른 친척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저희보다 피가 옅으나 역시 왕통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경계선을 넓히면 더 많은 왕통이 존재하게 되고,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우리는 더 자유롭게 됩니다. 보다 더 홀가분해질 수 있는 거지요.”
자유. 그것은 모두에게 있어 독이 될 것인가. 약이 될 것인가.
하지만 지금 창백하게 질리는 여왕의 얼굴을 보아하니, 그녀에게 있어 약은 아닌 듯싶었다.
숨을 죽인 채로 말없이 있던 그녀는 천천히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라울이 변하는 걸 보고 조금 자극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이라도 해보는 겁니다.”
정말 별 의미 없이 한 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며 가볍게 굴었다. 그럼에도 여왕의 표정은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또렷이 바라보는 눈동자가 느껴졌다.
라우젝은 여왕의 존재 자체가 불편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외면을 했다.
“그래요. 라울이 위험해진 상태라 이거지요. 어쩔 수 없군요. 그런 상황이라면 제가 나서야겠지요. 군복과 군함이라―”
라우젝은 하늘 가운데에 떠오른 햇빛이 눈부신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거의 10년 만에 그것들과 재회하게 되는 거로군요.”
중얼거린 라우젝의 입술 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 얼굴에서 연륜이 묻어났다. 18세의 소년의 육신에 가두어진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여왕은 그 얼굴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괴로운 듯 안색을 굳힌 채로 있던 여왕은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 얼굴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