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7)

#13

촛불 하나로 밝혀진 방 안에 라울이 있었다. 책상 앞에 앉은 그는 귀에 작은 통신구를 달고 있었고 그의 손은 지도 위를 더듬었다. 통신구에서 들려오는 정보를 모두 모아서 재차 위치 추적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모두 요새에서 끝낼 일이었는데 느낌이 안 좋아 먼저 나와버렸다. 그게 잘한 일인 듯싶었다. 길거리에서 라우젝과 함께 있는 마기휼을 발견해냈으니. 이쪽과 마주치는 순간 마기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낭패감이 가득한 얼굴은 분명히 본인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가 저택에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왜 그런 식으로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이쪽도 마기휼이 자유롭게 다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왜 그가 그냥 저택 안에만 가만히 있기를 바라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을 한 라울의 표정은 점점 진지해졌다.

[대령님.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라울은 통신구를 타고 흘러나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듣고 있다.”

[대기의 흐름에 변동이 생겼습니다. 거대한 물체의 이동이 감지되었습니다.]

그 순간 라울의 눈이 빛났다.

“암시장이 이동하는 건가?”

[지금까지 모은 정보에 의하면 그것이 가장 유력합니다. 위치를 정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통신병은 빠르게 보고를 했다. 라울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누르고 있다가 통신병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 손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라울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그렇게 무표정을 한 채로 손을 움직이던 라울이 최종적으로 멈춘 장소는 야골 산맥 뒤편의 평야였다.

산새가 험해서 인간이라면 넘을 수 없다 칭해지는 야골은 노르디아 동쪽 국경선과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까운 마을로는 로노베가 있었다.

“로노베인가.”

마기휼의 고향인 장소였다. 이런 곳과 인접해서 암시장이 열리는 건가.

라울의 표정이 굳어졌다.

[5일 후 저녁 8시를 기점으로 이동이 완료가 될 듯싶습니다. 어찌할까요?]

“내일 새벽에 바로 그리로 이동한다. 계획하던 대로 일을 진행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 알려라.”

[네. 알겠습니다.]

통신병이 급히 연락을 끊자 라울은 귀에 대고 있던 통신구를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그리고 지도를 살폈다. 야골 산맥을 살피는 그 얼굴은 진지했다.

여기서 모두가 모이게 되는 것일까. 마리아나 그 일당들도 말이다. 하지만 마리아가 암시장이 아닌 이곳 안베르에서 먼저 얼굴을 내민 것은 확실히 의외였다.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붙잡힐 것이 분명한데도 나타나다니. 대담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 그리 움직이는 것일까.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왜 마기휼의 앞에 나타난 거란 말인가. 상대가 왜 그런 것인지 심중을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을 방해하는 거북함 때문에 멈춰야 했다. 라울은 생각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은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방에는 하녀들이 들어가게 하지 않았더니 며칠 만에 이 모양이었다. 욕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옷가지가 잔뜩 널려 있고 책장 앞으로는 반쯤 빠진 책들이나 활짝 펼쳐진 채로 바닥에 늘어진 책이 보였다.

테이블 위도 체스판이 놓인 채로 있었고 책상 위도 종이 같은 것들이 간간이 흩어져 있었다. 커튼을 반쯤 연 채로 잠들어 있는 걸 확인 라울은 그 앞으로 가서 끝까지 닫았다. 그리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를 내려다봤다.

이불을 돌돌 만 채로 자고 있어 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가서 보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사내가 보였다. 평온한 얼굴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잘 자는 사내였다. 이런 좋은 침대에서 자는 것이니 편한 얼굴로 못 잘 이유가 없었다. 이쪽과 다르게 말이다.

말없이 잠든 마기휼을 내려다보던 라울이 침대에 한 손을 내렸다. 끼익, 소리와 함께 그의 체중이 실린 침대가 기울어졌다. 몸을 숙여 마기휼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뺨에 입술이 닿나 싶더니 행동을 멈추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에 코가 닿았다. 숨을 천천히 들이켜자 마기휼 특유의 향기가 난다. 라울은 눈을 감았다.

침대를 누르지 않고 있는 다른 손이 어정쩡하게 있었다. 그 손을 움켜쥔 라울은 허리를 세웠다. 마기휼은 아까와 별다름 없는 자세로 있었다. 건드리지 않으면 계속 저 상태로 잠드는 것도 가능하겠지. 라울은 몸을 돌렸다.

“그냥 나오는 거야? 욕심이 없군.”

걸음을 멈춘 라울은 뒤를 돌아봤다. 으슥한 안쪽에 서 있는 자가 보였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그는 라우젝이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겁니까?”

“조금 전에 왔어. 그러다가 네가 마기휼의 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을 뿐이고.”

중얼거리며 라우젝은 손가락 사이에 머리카락을 끼고 빙글빙글 돌렸다.

안 그래도 오늘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날카롭게 나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 나는 오르베처럼 쫓겨나고 싶지 않거든.”

라우젝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오르베를 거론해서 이쪽을 빈정거리고 있었다. 그걸 모를 라울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

“그렇게 걱정이 되면 마기휼을 달고 다니면 될 거 아니야. 내가 자극을 하지 않아도 마기휼 그는 원체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야. 네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언제 갑자기 저택 바깥으로 나갈지 몰라. 그러다가 오늘 낮처럼 이상한 자를 만나 다치거나 죽게 되더라도, 그건 내 책임이 아니지.”

어깨를 으쓱인 라우젝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었으나 라울은 그렇지 않았다. 바라보는 얼굴로 숨겨지지 않는 불쾌함이 드러났다.

라우젝은 벽에서 등을 뗐다.

“정말 재미있단 말이야.”

대수롭지 않은 말일지도 모르나, 그 말을 듣는 라울은 마치 조롱을 당하는 것 같았다. 라우젝은 더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린 채로 느린 걸음을 옮겼다. 점점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던 라울은 고개를 돌렸다. 닫힌 마기휼의 방문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을 자극하려 했다. 어떻게 하면 이쪽이 움직여 그들과 타협을 하게 할 수 있을지를 재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할 방법 중에 새롭게 마기휼이 거론된 것인지도 몰랐다.

왜 하필 마기휼일까. 뭔가를 알아낸 걸까.

……아니. 뭔가를 알아내지 않았어도 누군가 이 저택 안에서 머무르는 것은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일족 외에는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은 장소. 그곳 깊숙한 곳에 머무르고 있는 마기휼. 이상하다 생각하면 끝도 없는 법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라울은 마기휼의 방 쪽에서 시선을 뗐다.

아침에 눈을 뜬 마기휼은 멍한 얼굴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던 그는 잠에 취한 상태로 비틀거리고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새벽이었다. 이른 시간이 아니었다. 일단 물을 마시고 화장실에 들러 몸속에 있는 걸 시원하게 빼버린 후에 다시 자면 될 것 같았다. 좋은 계획이었다. 스스로 만족한 듯 마기휼은 헤죽거리고 웃었다.

벌써 이런 생활을 열흘도 넘게 하고 있었다. 처음 일주일은 집안에만 얌전히 있는 게 좀이 쑤셔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편했다. 상팔자가 달리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먹을 게 나오고 편한 잠자리가 있고 씻을 수 있다면 그게 장땡이었다.

잘 걸어가나 싶다가 비틀거린 그는 창가 쪽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어차피 혼자 사용하는 방이니 어떤 몰골로 있어도 신경 쓸 일은 없었다. 팔을 휘적이며 구석으로 간 마기휼은 창가에 달라붙어 하품을 했다. 우연히 창밖을 보게 되었다.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곳으로 군인이 내리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잠이 싹 달아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숨을 죽인 그는 당장 창문에 달라붙어 아래 상황을 살폈다. 군인이 나가고 그 뒤에 실려 있던 것이 내려갔다. 다른 짐이 들어가는 걸 확인한 마기휼의 미간으로 주름이 생겨났다.

“어디를 가나?”

이 이른 시간에? 문득 전에 라울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암시장이 한 번 연기되었다. 하지만 다음에는 열릴 테지.’

“열리는 건가.”

며칠 전에 말을 들었는데 오늘 아니면 내일 열리는 건가. 그러니까 라울이 뜰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암시장. 지금까지 듣기만 했지 한 번도 그걸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없었다. 태어나서 한번쯤 그런 유명한 장소에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영영 볼 수 없겠지만 지금은 기회였다. 그 유명한 곳을 보고 들어갈 수 있는 기회. 물론 라울은 질색을 할 테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

“좋았어.”

안 들키고 마차 안에 들어가면 그걸로 게임 오버였다. 그놈도 더 뭐라 할 수 없을 거라며 마기휼은 급히 몸을 돌렸다. 빨려고 벗어 둔 옷 중에서 검은색을 골라 몸에 걸쳤다. 구겨진 셔츠를 잡아 아래로 주욱 늘이고 밑창에 가죽이 덧대진 군화를 신었다.

머리를 손으로 마구 비벼서 하나로 대충 묶었다. 원래 스타일의 완성은 댕기 머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바쁘니까 생략했다. 화장실이랑 식사도 넘겨야 했다. 정말 바쁘다면서 마기휼은 문을 살짝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가 볼까.”

마기휼은 바깥으로 한쪽 발을 내밀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는 그는 순식간에 계단 쪽으로 이동을 한 상태였다.

아래를 살피자 문이 열려 있고 군인 하나 안쪽 복도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마기휼은 쏜살같이 계단을 내려가 바깥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었다. 마차 뒤에 달린 짐칸이 닫혀 있는 걸 확인하고는 잽싸게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조금 남은 짐칸에 몸을 구겨 넣기까지 장담하건대 2초도 걸리지 않았다. 캄캄하고 좁은 곳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마기휼은 주먹을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좋았어. 됐어. 역시 난 대단해.

민첩함에 스스로 만족하며 마기휼은 입술의 양 끝을 올렸다.

굉장히 기분이 좋았던 마기휼은 생글거리고 웃다가 하품을 했다. 그러고 말 생각이었는데 재차 하품이 나온다. 입이 찢어져라 크게 벌려졌다. 그리고 그 눈도 몽롱하게 변한다. 눈을 반쯤 뜬 채로 있던 마기휼은 뒤로 몸을 젖혔다.

“아, 졸려.”

중얼거리자 더 졸려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지나치게 일찍 일어났다. 앞으로 암시장같이 대단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잠이 부족하면 안 되지. 그러면 될 일도 안 될 거라며 마기휼은 몽롱한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눈꺼풀이 내려왔을 때 바로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몸에 들어간 힘을 뺀 마기휼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마기휼이 들어간 마차는 조용했다. 더는 주변으로 수상한 기척도 없었다. 그리고 고요하게 놓인 마차를 쳐다보는 이가 있었다. 3층의 창가 앞에 서 있는 건 라울이었다. 팔짱을 낀 채로 있던 라울은 몸을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뒤에 서 있던 군인이 입을 열었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그래. 이제 이동하자.”

“모두에게 그리 말을 전하겠습니다.”

군인의 표정이 그제야 풀어졌다. 모든 것은 실수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라울이 기다려보라 했을 때에는 긴장했다. 달리 준비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쪽이 실수한 부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라울이 이동을 하자 말을 하니 안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이동을 시작합니다.”

목깃 안쪽에 둔 칩에 대고 말을 전한 군인이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따르면서 라울은 검은 군모를 눌러썼다. 하나로 묶어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라울이 군모를 쓰자 그 인상이 달라진다. 이십 대 중반의 사내가 갖추기 어려운 중후함을 풍겼다.

라울이 1층 홀로 내려오자 기다렸던 한 군인이 들고 있던 걸 내밀었다.

“이번 보고서입니다. 이번 암시장에 참가를 할 것 같은 자들의 명단도 작성했습니다.”

“수고했군. 이번에는 엔온도 참가를 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엔온의 수장인 자가 움직인다는 말도 은밀히 떠돌고 있습니다.”

“엔온의 수장이라.”

중얼거린 라울은 눈을 빛냈다. 그놈을 붙잡으면 엔온은 쉽사리 움직일 수 없을 거다.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였다. 나타나는 순간 붙잡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그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터였다. 라울은 바깥으로 나왔다. 마차의 뒤쪽에 달린 짐칸을 살펴보나 싶던 그는 조용히 마차에 올라탔다. 군인 하나가 뒤따라 올라타고 한 사내가 마부석으로 올라갔다.

마차가 흔들리는 걸 느끼며 라울은 서류를 넘겼다. 안색을 살피던 군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노드만 중령이 연락을 취해 오셨습니다. 왜 요새로 들어가는 통행증이 말소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더는 필요가 없어졌다고 솔직하게 말을 하면 되잖은가.”

“아니. 그것이―”

노드만은 성격이 강한 사람으로 군인은 그를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그런 사내를 상대로 통행증 말소 운운을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무슨 사달이 나라고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상상만 해도 무섭다며 눈을 내리떴지만, 라울이 하라고 한 일에 대해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다음에 연락이 온다면 그때에는 솔직하게 말을 하자며 군인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요새 안으로 진입으로 하자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 많은 군인이 나와 있었다. 정해진 일을 하기 위해서 움직이던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는 마차를 발견했다.

중앙 건물에 도착을 한 마차의 문이 열리고 라울이 내려왔다. 가던 길을 멈춘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경례를 한 후에 재차 움직였다. 요새 안의 상황을 주욱 훑어본 라울은 뒤따라 내리는 군인을 돌아봤다.

“군함은 준비가 되었나.”

“그렇습니다. 오후 1시경에 먼저 야골 산맥 인근에 있는 마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뒀습니다.”

“그 외에 달리 준비할 것들에는 문제가 없겠지.”

“물론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지금부터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일단은 라울이 안으로 들어가 준비를 거친 뒤에 배에 올라타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라울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차의 뒤로 돌아갔다. 왜 그런 곳으로 가나 싶었던 군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령님?”

부름에 상관치 않고 마차의 뒤에 서서 짐칸을 열었다. 넓은 수건이 위쪽에 덮어져 있었다. 그걸 옆으로 치워 내자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내가 보였다. 용케도 들어갔구나 싶을 정도로 협소한 장소였다. 하지만 마기휼은 거기서 코까지 골면서 완전히 숙면 상태였다.

감겨진 속눈썹이 길었다. 대충 묶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흘러내려 있었다. 무릎 위를 감싸는 긴 손가락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입을 반쯤 벌리고 인사불성인 모습으로 코까지 고는 마기휼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한 채로 라울은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씰룩거리면 마기휼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다. 짤막한 한숨을 쉬나 싶더니 호흡이 더 깊어진다. 라울은 재차 말했다.

“당장 일어나. 마기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마기휼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멍하니 있던 것도 잠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던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라울과 눈이 마주쳤을 때에도 멍한 얼굴이었다. 지금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이해를 할 수 없는 듯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우왓!”

소리를 친 마기휼은 벌떡 일어났다.

짐칸에서 갑자기 나타난 마기휼의 모습에 근처에 있던 군인들은 놀랐다. 몇은 품에서 총을 꺼내 들기도 했지만, 라울은 쏘지 말라는 듯 그쪽으로 차분히 손을 들어 보였다.

군인이 주춤하는 사이 마기휼은 짐칸에서 내려왔다. 바지와 셔츠를 양손으로 탁탁 털던 마기휼은 머리를 잡아 주욱 당겼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라울을 흘깃 봤다. 어설픈 미소가 떠올랐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는 먹히지도 않는다. 이미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 정색을 하니까 민망했다. 입을 꾹 다문 마기휼은 큰 눈을 굴렸다.

난감하기 짝이 없다. 마차가 도착하기 전에 몰래 빠져나와 암시장으로 가는 배에 몰래 올라타려고 했는데. 하지만 이왕 이렇게 들켜버린 마당에 솔직해지자 싶었다.

“저택에만 있는 건 답답해서 싫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뒤를 쫓고자 한 건가? 허락을 받지 않고 이 요새에 들어온 자는 그 자리에서 처분 대상이 된다. 험한 꼴을 당하고 싶은 건가.”

“험한 꼴을 당하고 싶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당하게 말하려 했지만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끝으로 가서는 웅얼거리는 걸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기휼은 라울을 흘겨봤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완전 정색을 하고 있었다. 사람 무안해지게 왜 저리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나쁘기도 하지만, 주변 군인들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마기휼은 사과의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마기휼의 눈동자가 힘을 잃는다. 아래로 내리떠진 눈동자나 불만을 담아 툭 튀어나온 입술을 확인한 라울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라와라.”

따라오라고?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자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라울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쪽이 말을 잘못 들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따라오라고 할 때 쫓아가는 게 제일이었다. 미적거리다가 쫓겨나면 큰일이었다.

신이 나 쫓아오는 마기휼을 확인한 군인이 라울의 뒤에 붙어 섰다.

“저분은 전에도 뵌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시는 분이십니까?”

“내 손님이니 신경 쓰지 마라.”

“하지만 오늘은 암시장으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손님을 요새에 모시는 건 난감한 일이 아니십니까?”

“그도 암시장으로 함께 갈 거다.”

“……그렇습니까.”

전에도 요새에 온 적이 있어 안면이 익다 해도 아직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암시장에 데리고 가도 되는 건가. 혹여라도 중간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자는 건가. 하지만 그 말을 꾹 참으며 군인은 라울의 뒤를 따랐다.

라울은 신이 나 따라오는 마기휼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더 환하게 웃는다. 그걸 확인한 라울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기휼을 저택에 두면 그는 라우젝과 단둘이 남는다. 마리아가 안베르 내에 있다가 이쪽이 없는 틈을 타 마기휼에게 접근을 할 수 있었다. 마기휼은 그런 식으로 접근을 하는 것에 약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무슨 말을 걸 때, 그것에 어영부영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원래 사람을 좋아하는 마기휼이었다. 몇 년 동안 아는 사이였던 마리아를 단박에 테러범으로 인정할 수는 없을 거다. 그런 여러 가지 요소를 정리해 봤을 때 그가 저택에 머무르는 건 되레 안 좋은 상황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암시장으로 데리고 가는 편이 나을 거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쪽 시야 안에 있는 것이니 말이다.

군함이 아닌 그냥 평범한 여행용 배였다. 물론 겉으로만 그러했다. 내부로 들어온 마기휼은 배를 이루는 금속과 안에 장착된 각종 기계를 확인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이건 완전히 군함 축소판이었다. 지금 평상복을 입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도 모두 제대로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었다. 그리고 저기 배를 조종하는 이의 옆에 서 있는 흑발의 사내는 바로 라울이었다.

암시장으로 진입을 하기 위해서는 군인의 모습인 채로 갈 순 없었다. 그런 꼴로 알짱거린다면 암시장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벌집이 되어버릴 테니 말이다. 그래서 라울은 가발을 쓰고 렌즈를 끼어서 검은 눈동자가 되었다.

붉은 동양풍의 의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봤을 때 느낌이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아까도 봤지만 눈이 마주칠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라울의 잘생긴 얼굴이야 지금까지 수십 번도 넘게 봤는데도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아 고개가 돌아갔다. 다른 쪽을 쳐다보며 어설프게 휘파람을 부는 이쪽의 모습에 라울은 잠시 표정을 굳혔다.

마기휼은 한 걸음 물러났다. 벽에 걸린 금속의 면으로 자신이 보였다. 그도 가발을 눌러썼다. 금발이었다. 하나로 조여서 머리통에 딱 고정을 한 머리카락 때문에 두피가 당기는 느낌이었지만 지금까지 금발인 자신의 모습 같은 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묘했다.

낯선 지금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어금니 쪽에 인위적으로 낀 치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턱 선이 달라져 언뜻 보면 다른 사람 같았다. 신기해서 빤히 보고 있으려니 옆을 지나치던 군인이 이상하다는 눈길을 보내 왔다. 마기휼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리로 오는 라울이 보였다.

“그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미리 말을 전해 뒀나?”

“그렇습니다. 마을에 먼저 머무르고 있던 이들에게는 오늘 중에 친척이 온다는 식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해 두었다 합니다. 지금 찾아간다 해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군함이나 무기의 이동은 예정대로 되고 있나.”

“오후에 야골 산맥 부근으로 강한 바람이 분다 해서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최대한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실수가 있어선 안 된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움직여야 할 거다.”

“물론입니다. 실수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하는 군인의 얼굴로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제대로 일 처리를 해서 인정을 받고야 말겠다는 야망이 읽히는 얼굴이었다.

군인이 앞으로 이동을 하고 라울만 이쪽으로 오게 되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기휼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엉성하게 서 있던 마기휼은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눈을 굴렸다. 이번에도 오랫동안 라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먼저 눈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정말 왜 이러지.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다가오는 라울을 의식하고 만다. 라울이 옆에 멈춰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더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던 마기휼은 옆에 선 라울을 올려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이상한 얼굴이로군.”

“…….”

이상한 얼굴이라고? 난 적어도 네가 미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지금 넌 분장한 내 얼굴이 이상하다고 하는 거냐?

어이가 없고 화가 나기도 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문이 막혀 헛숨만 터져 나온다.

“그 모습으로 있으면 아무나 쉽게 널 알아차리지 못하겠군.”

“그건 대령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아주 멋지십니다그려. 카사노바 같으신 걸요?”

야유하듯이 하는 말에 라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굳어지는 그 얼굴에 마기휼은 눈을 부라렸다.

넌 이상한 얼굴이라고 했지만 난 카사노바라고 한 거라고. 그러니까 너무 기분 나쁘다는 얼굴은 하지 말아줄래? 그런다고 해서 자신이 쫄 거라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하지만 라울의 눈초리보다는 그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고작 머리카락이나 눈동자가 바뀐 것뿐인데도 다른 사람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마기휼은 시선을 피하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야골 산맥 어디쯤인 겁니까? 그 뒤에 있는 평야입니까.”

“거기가 가장 유력하지. 이쪽 예측으로는 8시 반부터가 시작일 거다.”

“8시 반부터라. 기대되는군요.”

중얼거린 마기휼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그 유명한 암시장 구경인가. 이건 억만금을 줘도 못 하는 구경거리였다. 어떻게 순식간에 그 거대한 시장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는 건지를 똑똑히 봐줄 거라며 마기휼은 손바닥에 주먹을 두드렸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마기휼은 주눅 드는 일이 없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분명한데도 되레 투지를 불태우는 게 바로 마기휼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라울이 말했다.

“로노베 상공을 지나치게 된다.”

“그렇습니까.”

로노베는 마기휼의 고향이었다. 일단 명칭을 꺼낸 후, 마기휼 그가 가기를 원하는지 아닌지를 파악하려 했는데 지금 이 반응을 보아하니 안 봐도 척이었다. 가기가 껄끄러운 건가.

라울은 고개를 돌렸다.

“가족들이 보고 싶으면 잠시 내려도 된다는 말을 할 생각이었을 뿐이다.”

“…….”

라울은 다른 곳으로 갔고,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라울이 다른 쪽으로 들어가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마기휼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름 신경을 써주는 거였을까. 자신이 가족들을 보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가족이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직은 껄끄러웠다. 가휼을 만나는 건 모든 것들이 정리된 후에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라울의 마음만 감사히 받을 생각이었다.

마기휼은 팔짱을 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은근히 착한 구석이 있다니까.”

중얼거리고 나자 괜히 들뜨게 된다.

마기휼은 동그란 창 쪽에 붙어 아래로 보이는 구름을 살펴봤다.

새하얀 양 떼가 언덕의 절반을 뒤덮고 있었다. 족히 200여 마리가 될 듯싶은 양들을 관리하는 건 14세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 둘이었다. 건강하게 그을린 갈색 피부와 검은 눈동자에 머리카락을 지닌 아이들은 터번으로 머리를 가리고 반팔 티에 무릎까지 오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맨발로 다니면서 막대를 휘두르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건 양을 몰기 위함일 터였다. 평범한 차림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화려한 귀걸이와 목걸이가 반짝거렸다. 딱 봐도 고가품이었다. 야생에 가까운 환경인데 저런 값비싼 것들을 장신구로 사용하는 건가 싶었던 라울은 그쪽을 쳐다봤다.

“양을 키우면서 가죽과 고기 등을 팔아 사용하지만 동시에 언덕 아래로 원석이 깔려 있지요. 때문에 생활이 풍족해요. 허름해 보여도 다들 알부자일 걸요?”

라울이 모르는 듯싶어 설명을 해주자 바로 쳐다본다.

“사는 곳은 천막이나 나무로 엉성하게 지어진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 곳에 보석을 두면 누가 훔쳐 달아나지 않는 건가.”

“야골은 산세가 험하기 때문에 배를 사용해야지만 하지요. 더군다나 이곳은 유명한 상인들이 자주 드나들어서 그만큼 따라오는 경비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보여도 꽤나 잘 싸웁니다. 웬만한 어른 정도는 간단히 무찌를 걸요.”

“신체 조건이 좋은 건가.”

“원래 로노베 출신은 다른 곳보다 재빠른 움직임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지요.”

“그래서 마기휼 네가 그렇게 잽싼 거로군.”

라울이 궁금한 것이 많아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에 대답을 해주는 게 나름 재미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꼭 마무리를 저런 식으로 지어야만 하는 건가 싶었다.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툭 내밀었다.

“라울 님 이쪽입니다.”

다른 사내가 다가와서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아니었다면 라울은 잽싼 마기휼의 주먹에 나가떨어지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진짜로 때릴 수는 없고 그저 분해서 씩씩거리는 동안 그들은 언덕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다.

커다란 천막 앞으로 늙은 노인 하나와 그 뒤로 중년 여성에서부터 젊은 여성까지. 연령대가 다양한 이들이 서 있었다. 모두가 장로의 부인일 거다.

유목을 하는 이들은 다수의 아내를 맞이하는 게 흠이 되지 않았다. 장로는 가장 강한 사내만이 될 수 있었고, 여자로서 그런 사내의 아내가 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 생각하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았다.

사내의 안내를 받아 장로의 앞에 선 라울은 그를 바라봤다. 새의 깃털로 짠 긴 모자를 쓰고 다른 이들과 달리 잘 차려입은 옷에 장신구도 화려하고 신까지 신고 있었다. 지팡이 위에 양손을 올린 장로는 라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을 흘깃 보나 싶던 라울은 옆에 선 사내를 흘겨봤고, 사내는 손으로 노인을 가리켰다.

“이 무리의 장로라고 합니다. 카투휼이라 합니다.”

“휼?”

라울은 마기휼을 돌아봤다. 끝자리가 같다 이거냐?

마기휼은 손가락을 터번 속으로 집어넣고 긁적였다.

“집시의 피를 이어받은 이들은 휼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그런 식으로 동족이라는 걸 알리고 싶은 거지요.”

하지만 그래도 라울은 잘 모르겠다는 식이었다. 왜 바로 이해를 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네가 라울이고 네 형님이 라우젝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라니까. 너희 두 사람도 앞에 라- 자가 붙잖아. 더 설명을 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훨씬 더 낫다는 판단을 내린 마기휼은 장로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전 마기휼이라고 합니다.”

장로는 고개를 들어 마기휼을 바라봤다. 커다랗고 맑은 동공이었다. 그 눈동자로 마기휼을 바라보나 싶던 장로의 입가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가까운 땅에서 친구가 찾아왔군. 짧게 머무르는 동안 편히 쉬었다 가시오.”

장로는 팔을 벌려 마기휼을 끌어안았다. 그의 등을 토닥이며 기도문을 읊었다.

“마음의 안식을 얻기를.”

“고맙습니다.”

마기휼은 장로의 등에 한 손을 대고 두어 번 문질렀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떼어 내고는 물러났다. 라울을 쳐다봤다. 직접적으로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식으로 하면 되는지 행동으로 보여줬다. 나머지는 라울의 창의성에 달려 있었다.

귀족이라 튕길 거냐. 아니면 이해를 못 하는 걸까. 그도 아니라면 촌스럽게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 거냐. 만약 그렇다면 정말 실망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라울은 마기휼의 염려와 달리 팔을 벌려 장로를 끌어안았다. 장로도 키가 크고 몸이 좋은 라울을 안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대는 짐을 내려놓는 편이 좋겠군.”

마기휼을 따라 인사를 했던 라울은 주춤했다.

장로는 그런 라울을 끌어안고 있는 팔을 풀며 다정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봤다.

“마음의 안식과 평화를 얻기를.”

“……고맙소.”

말이 지나치게 짧았다. 마기휼이 눈을 부라렸지만 라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장로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방문을 한 이들을 주욱 훑어보며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이곳으로 이리도 건장한 사내들이 온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군. 원래 외부 손님에게는 친절한 우리들이니 불편함 없이 지내셨으면 좋겠소. 물론 이곳은 땅과 풀과 자연의 바람을 중시하는 곳이기에 당신들이 왔던 곳처럼 딱딱한 돌바닥은 없고 벌레도 종종 몸에 달라붙을 수도 있을 거요. 그 정도는 문화적 차이이니 감안해주시오.”

“물론입니다. 갑작스런 방문을 마다하지 않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과한 요구는 하지 않을 겁니다.”

라울의 말에 장로는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라울을 데리고 온 사내를 쳐다봤다.

“무라이. 가서 손님들이 머무실 천막으로 안내를 해드려라.”

“네. 고맙습니다. 장로님.”

미소를 짓는 사내 무라이를 바라보는 장로의 눈길은 온화했다. 그 눈동자 아래로 깔린 신뢰가 숨겨지지 않았다. 무라이는 라울 일행을 데리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내를 받아 걸어가는 동안 몇이나 되는 아이들이 달려와 무라이에게 매달렸다. 무라이는 그런 아이들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했다.

무라이의 커다란 손길이 기분 좋은 듯 활짝 웃던 아이들은 이내 다른 쪽으로 달려갔다. 아이들과 근처에 있는 부족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품이 익숙했다. 마치 현지인 같았다. 무라이의 옆에서 걸음을 옮기던 라울이 한마디 했다.

“꽤나 친분을 쌓았던 모양이로군.”

“이곳에 있는 것도 벌써 4년째입니다. 이 정도 친분이야 당연한 거지요.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모두 성격이 좋습니다. 초반에도 이방인인 저를 밀어내지 않았지요.”

말을 하는 동안 무라이는 기분 좋게 웃었다. 해맑게 웃는 얼굴에서 군인의 모습을 발견해낼 수 없었다. 거의 이곳 생활에 동화를 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마기휼은 그런 사내를 흘겨보다가 눈동자를 움직였다.

커다란 천막 앞에 도착하자 무라이가 천으로 된 문을 옆으로 치워 냈다. 그 안으로 라울과 마기휼. 그리고 군인 몇이 들어왔다. 천을 내린 그는 가운데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곳을 중심으로 모두가 동그랗게 원을 그리듯 섰다. 무라이가 먼저 긴장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꽤나 큰 스케일인지라 못내 걱정이 됩니다. 혹여라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요.”

“그런 일은 없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직접 온 것이다.”

“대령님께서 그리 말씀을 해주시니 안심이 됩니다.”

라울의 단호한 태도에 진심으로 안도한 듯싶은 그는 품에 한 손을 넣어 종이를 끄집어냈다. 꼬깃하게 접은 그것을 펼쳐 테이블 위에 펼쳤다. 야골 산맥의 형세가 그려진 것이었다.

사내의 손이 곧장 평야를 가리켰다.

“야골을 중심으로 동에는 칸. 남에는 훈. 그리고 북에 률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우리들의 예측으로 암시장이 내려앉는 곳은 바로 이곳입니다.”

무라이가 가리키는 지점. 그곳으로 모두의 시선이 옮겨졌다. 마기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보기에도 가장 확률이 높은 장소로 보였다. 라울은 중얼거렸다.

“률인가.”

“그렇습니다. 다른 두 곳은 바람이 심하게 불고 평야도 좁습니다. 가파른 면도 있지요. 암시장은 넓은 면적을 요구한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람의 영향도 적게 받는 장소여야 하더군요. 률은 바람이 적게 불고 평야가 넓으며 동시에 야골의 가장 높은 산맥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저는 암시장이 이곳에서 열릴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곳과의 거리 차이는?”

“차량이나 마차로는 이동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키우는 호피가 있습니다. 말과 비슷하지만 몸집이 작고 다리가 튼튼하고 빠르지요. 절벽도 기어 올라가는 놈들입니다. 그걸 타면 2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호피를 타기가 어려우실 겁니다. 저도 2년 반 만에 간신히 마스터를 했으니까요.”

“그걸 타지 않고 걸어서 간다면?”

무라이는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반나절도 빠른 겁니다.”

“오늘 저녁 암시장이 선다. 반나절은 안 돼.”

“그러면 호피를 타야만 하겠군요. 제가 간단히 타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무라이는 지도를 접어서 라울에게 건넸다. 자세한 지형이 표시된 지도는 무척이나 귀한 것이었다. 그걸 받아 든 라울은 품 안에 밀어 넣었다.

무라이는 테이블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나가시지요.”

바로 움직이는 건가. 쉴 틈이 없군. 마기휼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껄렁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천막 바깥으로 나가자 아이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서 이쪽을 엿보는 꼴을 보아하니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마기휼은 그런 아이들 쪽으로 눈을 까뒤집으며 혀를 내밀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놀란 듯싶던 아이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마기휼의 우스운 꼴을 보라며 손가락질을 하며 웃어 대는 청아한 소리에 마기휼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들을 웃겼을 뿐인데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왠지 한 건 제대로 했다는 느낌이다. 신이 나서 걷던 마기휼은 팔을 툭 치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붙어 서 있는 라울이 보였다. 솔직히 좀 당황했다. 왜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건가 싶어 옆으로 슬슬 물러났다.

“호피에 대해서 알고 있나.”

마기휼의 귀가 팔랑거렸다. 그는 옆에 선 라울을 흘겨봤다. 얼굴을 보아하니 별다른 목적을 품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경계심이 누그러지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자신만만한 얼굴이 되었다.

“이래 봬도 로노베 출신입니다. 물론 로노베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호피를 몰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수준급이지요. 내 멋진 모습을 보고 놀랄 준비나 하시지요. 대령님.”

“기대해볼 만하겠군.”

그래. 기대해봐라. 네놈은 분명 호피에 올라타자마자 굴러떨어질 거다. 이 몸은 그걸 보고 호탕하게 비웃어줄 테니 그때가 돼서 얼굴 붉히면서 창피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마기휼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라이가 아이에게 사심 없이 활짝 웃는 얼굴을 본 마기휼은 라울 쪽으로 접근을 했다.

“저 무라이라는 사내 이번 일 끝나면 당장 퇴직하고 이 마을에 정착해버릴 것 같은 기세인데요?”

라울은 마기휼을 보다가 무라이를 봤다. 잘 모르겠다는 듯 무뚝뚝한 얼굴을 하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중얼거렸다.

“그런 느낌이 들어서 하는 말입니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요.”

“나도 알고 있다.”

“순순히 놓아줄 겁니까. 이런 곳에 혼자 와서 4년 동안 이렇게나 적응을 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외지인을 경계하지 않는다 한들 이 정도로 친화력을 보이는 걸 보면 꽤나 훌륭한 자질을 지닌 게 아닐까요?”

“그렇다 해도 본인이 싫다면 놓아줘야 하는 거다. 붕 뜬 상태로는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닐 뿐이야.”

그래. 너 잘났다. 나중에 가서 놓아줄 수 있을지 어떨지 두고 보겠다며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기 언덕 위에 세워진 나무 벽을 확인한 그는 눈을 빛냈다. 호피가 있는 곳에 도착을 다 한 모양이라며 단숨에 그리로 달려갔다. 마기휼이 달려가자 라울이 그쪽을 쳐다봤다. 씩씩하게 앞서 달려가는 마기휼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호피라는 종은 순한 말과는 달랐다. 탈 수 있는 건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을 한 이들뿐이었다. 영리했기 때문에 자신을 보살펴준 이들을 알아보고 그들이 타도 큰 저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부인의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경계심이 발동을 해서 올라타지도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 때문에 라울이 애를 먹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타기 힘들어하면 옆에서 비웃어주거나 훈수를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잘 타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호피를 탄 라울은 능숙하게 그것을 몰았다. 초반에 호피의 뺨을 감싸고 다정하게 눈빛을 주고받았을 때부터 거시기하더니만 저놈의 호피. 라울에게 푹 빠진 듯 엄청나게 잘 태워주고 있었다. 내 살다살다 말처럼 구는 호피는 또 처음이었다.

네놈은 호피로서의 자긍심을 얻다 판 거냐!

마기휼은 눈을 부라렸고, 그 순간 그가 타고 있던 호피가 예고 없이 위로 뛰어올랐다.

“우왓?!”

떨어질 뻔했던 마기휼은 당장 고삐를 틀어쥐었다. 급히 앞으로 몸을 숙여도 넘어가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놀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괜찮습니까?”

뒤로 호피를 끌고 내려온 무라이가 다급히 묻는 말에 마기휼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조심하십시오. 호피는 예민해서 타고 있는 사람의 감정에 잘 이끌리거든요.”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어설프게 웃던 마기휼의 시야로 라울이 뒤를 돌아보는 게 들어왔다. 그가 이쪽 실수를 두고 코웃음을 치거나 비웃는 표정을 짓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봤다가 고개를 돌리는 그 행동에서 말도 못 할 굴욕을 느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라울에게 실수를 보였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얼굴이 온통 붉게 달아오른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젠장.

실수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라울인데 왜 이렇게 돼버리는 거야.

마기휼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라울이 호피를 훌륭하게 모는 걸 칭찬했다.

“능숙하시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처음인 것 같지 않으십니다.”

“순한 놈이라 타기가 수월한 것뿐이다.”

“하지만 다른 분들은 모두 애를 먹고 있지 않습니까. 저 마기휼이라는 분도 호피를 타는 게 능숙하시더군요.”

그 외에는 모두 호피에 찰싹 달라붙어 금방이라도 멀미를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상태로 있다가는 률 평야에 도착하기 전에 다들 기진맥진인 상태가 될 게 뻔했다. 하지만 이동을 감행해야만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분들은 반대편에서 돌아오시는 겁니까?”

“산맥 뒤에 숨어 있다가 신호가 오면 바로 움직일 거다.”

“괜찮을까요? 암시장 내에서는 무력 충돌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암묵적인 무역지였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몰리고 다양한 물건들이 모이는 만큼 그 위험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 그들이 모두 총기를 난사하거나 무기를 들게 된다면 암시장은 유지 자체가 어려워진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고자 암시장 내에서는 감시가 철저했다.

혹여 문제를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 날로 암시장 출입 금지가 되며 동시에 끈질긴 추격을 받게 된다. 암시장에 피해를 입히면 100배의 보상을 받아낸다는 암묵적인 룰을 따라서 말이다.

“이는 나라의 일이다. 그들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해줬으면 좋겠지만 말입니다.”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라울이 있으니 그가 현명하게 일처리를 할 거다. 그리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라이는 금세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나저나 오늘에야 드디어 암시장의 실체를 보게 되겠군요.”

말로만 듣던 암시장이었다.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 모두가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로 전달되는 정보는 무척이나 한정적이었다. 때문에 소문만 무성한 게 바로 암시장이었다. 그걸 오늘에 들어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 될 테지만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라이는 눈을 반짝였다.

붙어서 사이가 좋은 듯한 무라이와 라울의 모습에 마기휼은 점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러다가 타고 있는 호피가 고개를 흔들자 급히 고삐를 쥐었다.

“알았어. 예민하게 안 굴면 되잖아.”

손으로 붉은 털을 쓰다듬자 금세 안정을 찾은 듯싶었다. 걸어서라면 꽤나 힘들었을 언덕을 능숙하게 오르는 호피는 간간이 크고 맑은 검은 눈동자를 깜박이고는 했다. 그 눈 아래를 손가락으로 긁어주며 마기휼은 머릿속에서 잡생각을 지우려 노력했다.

일단은 이동하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이쪽이 멋대로 쫓아온 거니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되었다. 마리아가 눈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동요를 할 순 없었다.

어디까지나 침착하고 차분하게.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며 스스로에게 말하며 마기휼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산새가 험한 산맥을 넘자 률 평야에 도착하게 되었다. 허리까지 오는 황금의 풀이 가득한 곳 구석으로 유적지를 하나 발견해낼 수 있었다. 하얀 기둥이 10여 미터나 줄지어진 곳이 있는가 하면 그럭저럭 원형의 상태를 유지한 건물도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존재를 했던 곳 같았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구경을 하는 건 라울뿐으로, 다른 이들은 모두 녹초가 되어 늘어져 있었다.

마기휼도 별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주먹으로 라울 모르게 허리를 두드렸다. 다른 이들처럼 내색하면서 다리를 주무르거나 몸을 풀 수 없는 건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신전이었군.”

건물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고풍스러운 느낌이로군. 그리 생각만 하고 있었던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라울은 앞에 놓인 커다란 벽면을 바라봤다. 침묵을 한 채로 있던 그는 중얼거렸다.

“신께 제물을 바치는 그림이다.”

그냥 벽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구나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던 마기휼은 라울의 설명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앞으로 걸어가 그림을 살폈다.

사람들이 일렬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한 사내가 제단 같은 곳에 누워 있었다. 그 뒤에 있던 자가 누워 있는 이의 가슴 위로 양손을 대고 있었는데, 동그란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잘 봐도 잘 모르겠다.

마기휼은 그걸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게 뭐야?”

“심장이다.”

“이게 심장이라고?”

경악한 마기휼은 당장 그림에서 떨어졌다. 일그러진 얼굴을 하는 마기휼이었으나 라울은 태연히 계속해서 그림을 보기를 종용했다.

“심장 말고도 특이한 게 더 있으니까 자세히 봐.”

“싫어. 심장이라니. 신에게 제물의 심장을 주는 거야?”

제물이 된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만약 이쪽이 그런 입장이 된다면―. 치가 떨렸다. 마기휼은 몸을 부르르 떨었고 라울은 그런 그를 바라봤다. 말로써 강요를 하는 건 아니지만 쳐다보는 눈빛이 분명히 요구하고 있었다.

이 변태 같은 놈. 싫다는데 왜 자꾸 보게 하는 거야. 이런 걸로 놈의 성격이 완전 나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거라며 입술을 씰룩거린 마기휼은 가자미눈을 뜨며 옆을 돌아봤다.

일부러 심장을 꺼내는 부분은 보지 않고 다른 쪽을 살폈다. 쭉 뻗어 있는 다리가 조금 이상했다. 위로 살짝 올라간 그 모양새는 다리라기보다는 물고기의 꼬리 같았다. 너무 무서워서 다리를 모아 위로 살짝 구부린 건가.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중얼거렸다.

“다리가 붙어 있나?”

“다리가 아니라 꼬리다.”

“꼬리라고?”

지적을 받은 마기휼은 당장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더 확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 보니까 다리가 아닌 꼬리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뭐야? 이건 인어 인간인 거야?

“1500여 년 전 이 땅에는 인어가 존재하고 있었지.”

“그런 건 나도 알아. 신화나 이야기에서 종종 나오는 말이잖아. 그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걸?”

“인어가 사라지고 난 후 하늘 위의 땅이 내려앉은 걸 아는 사람은 드물지.”

어린애들도 다 아는 정보를 가지고 잘난 척하지 말라며 틱틱거리려던 마기휼은 입을 다물었다.

하늘 위의 땅? 그건 뭔데?

묻고 싶어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걸 확인한 라울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하늘의 땅이 무너지고 이 세계는 통제할 힘을 잃었다. 지상은 혼란과 범죄로 가득 차게 되었지. 사람들은 재차 땅을 하늘로 올려 보내려 했다. 모든 특권을 누리던 하늘의 땅은 그들에게 있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지만, 신적인 영역의 존재들이었으니까. 때문에 그들은 몇 남은 인어를 잡아 심장을 꺼내 신께 바치는 행위를 반복했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인데도 말이야. 그래 봤자 추락한 땅은 다시 떠오르지 않아.”

단호함. 반드시 그리되어야 한다는 강한 뉘앙스였다.

“세상은 이 체제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 혼란이 야기되지 않아.”

입을 다문 라울은 눈을 내리떴다. 굳은 그 얼굴을 확인한 마기휼은 눈동자를 움직여 재차 그림을 살펴봤다. 제물의 심장을 꺼내 신께 바치는 그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통곡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늘의 땅을 잃어 세계의 질서가 사라진 그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주어진 선택과 자유와 시작이라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세계는 이런 형태로 유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비록 변종 차별이나 빈부격차나 군의 동력 소유권 등의 문제가 있다 해도, 살 만은 했다. 간신히 여기까지 이루어내 정착 단계에 와 있는 거였다. 문제 사항은 앞으로 서서히 수정을 해 나가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차적인 충돌이 없어질 것이다.

“그들은 혼란을 바라고 있지.”

그들이 누구를 일컫는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마리아 일당, 엔온인가.

언제나 늘 라울은 말했다. 범죄자들에 대해 동정심을 품지 말라고, 냉정하게 대처를 하라고. 군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막아야 한다.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마라. 마기휼.”

“…….”

아주 조금씩 라울의 생각에 동조하게 된다. 거부감도 적었다. 라울이 하는 말이 틀린 게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를 대할 때 생기는 주저함이 모든 걸 망치게 할 터였다.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위험하게 할 거다. 그건 안 좋은 것이었다. 고쳐야 할 것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거라며 마기휼은 안색을 굳힌 채로 눈을 내리떴다.

마기휼의 안색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걸 확인한 라울도 옆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그러던 차에 그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했다. 라울이 고개를 듦과 동시에 다른 쪽에 있던 군인이 놀라 위로 손을 뻗었다.

“대령님. 저곳을 보십시오!”

마기휼도 바로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하늘이 보였다. 갑자기 날이 흐려진 건가 싶었다. 순식간에 세상이 어둡게 변했다. 처음에는 보고도 인정을 할 수 없어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잖은가. 머리 위로 거대한 땅덩이가 갑자기 나타난 것을 어찌 인정할 수 있을까.

땅으로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아니었다. 바닥으로 간간이 빛무리가 터졌다. 저건 땅으로 보이는 배였다. 저런 규모와 모습의 배라니. 암시장이라는 게 터전을 잡고 짐을 내리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자체가 나타나 떡하니 내려오는 걸까? 저 검은 판 위로는 수많은 건물들이 있겠지? 그래서 사람들은 몸하고 물건만 옮겨 태우면 그만인 거였다.

마기휼은 멍하니 입을 살짝 벌렸다.

“저게 암시장인가.”

저런 게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게 암시장인데. 시장을 열지 않을 때에는 어디에서 그 모습을 숨기고 있는 거지? 대륙이 없는 바다 쪽으로 옮겨가 있는 건가.

“말도 안 돼.”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기휼은 손을 움켜쥐었다. 전율이 일다 못해 소름이 돋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가만히 있는 동안 검은 판의 모서리 부위에 동그란 것이 생겨나더니 거기서 줄이 튀어나왔다. 줄은 바닥 위에 꽂혔고, 흙과 파편이 튀어 올랐다.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그 위치로 판이 내려간다. 뮬 평야로 암시장이 선다.

“달린다.”

마기휼은 눈을 끔벅였다.

“뭐?”

묻는 순간 눈앞으로 검은 머리채가 휙 지나갔다. 순식간에 저 앞으로 사라져버리는 라울의 모습에 마기휼은 앞으로 손을 뻗었다.

“기, 기다려! 같이 가야 할 거 아니야?!”

소리를 쳐도 소용이 없었다. 라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저만큼이나 달려가 버렸다. 엄청난 바람이 고막을 두드리는 날카로운 음향은 절로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런데도 아랑곳않고 뛰어가버리는 라울의 모습에 마기휼도 자극을 받았다.

질 수야 없지. 마기휼은 이를 악물고 뒤를 쫓았다. 마기휼이 움직이자 다른 군인들도 움직였다. 그들은 엉거주춤하게 있다가 힘겹게 앞으로 달려갔다.

섬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저대로 내려오면 아래에 있는 이쪽은 깔려 죽을 게 분명했다. 그 위를 살피면서 마기휼은 열심히 달렸다.

커다란 땅덩이가 내려앉으면서 생겨나는 강풍으로 인해 몸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을 주고 간신히 버티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멀지 않은 곳에 닻을 단 줄이 내리꽂혔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줄은 튼실해 보였다. 다들 그쪽으로 달려가 줄을 잡고 위로 올라갔다.

몇 번이나 몸이 날려 떨어질 뻔했지만 놓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암시장은 내려오고 몸은 무거워지고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이를 악물고 순식간에 위로 올라가 아래를 살폈다.

군인들 몇이 낑낑거리며 올라오는 게 보였지만 기다리고 있다가는 이쪽도 발목이 잡힐 것 같았다. 때문에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고개를 들자 막 올라탄 라울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라울이 턱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와라. 그리 말하는 사인을 읽은 마기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다 갑자기 크게 흔들리는 진동에 헛숨을 들이켰다.

“윽?!”

뒤로 몸이 넘어갔다. 라울이 달려와 그런 마기휼의 손목을 붙잡아 위로 당겼다. 아슬아슬하게 끝부분에 걸린 마기휼은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잡히는 걸 붙잡고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사다리에 달라붙은 채로 숨을 고르기도 전에 바로 밀쳐졌다. 등을 누르는 손길이 말하는 건 명확했다. 마기휼은 당장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몸은 흔들리고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긴장은 되고. 정말이지 정신 하나도 없었다. 나름 필사적인데 라울은 옆에서 타박이었다.

“먼저 올라가라!”

“제길! 힘들어 죽겠네!”

이렇게까지 해서 올라가야 하는 거야? 그냥 이 땅덩이가 내려앉으면 그때 올라타면 안 되는 거냔 말이야.

씩씩거리며 마기휼은 간신히 위로 올라가 아래를 살폈다. 라울은 자력으로 잘 올라오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은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로 사다리를 올라탔다.

고정된 상태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흔들리는지라 너무 힘들었다. 끙끙거리면서 계속 올라갔다. 그리고 끝까지 가자 망루 같은 곳이 나타났다. 매달려 바깥으로 손을 뻗자 라울이 그걸 붙잡는다.

올라타려는 순간 재차 큰 진동이 느껴졌고 라울의 몸이 들썩였다. 묵직한 느낌에 마기휼은 이를 악물었다. 괴력을 발휘해서 라울의 몸을 끌어당기는 것에 성공한 건 좋았지만 그 반동으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벌러덩 넘어가기가 무섭게 그 위로 라울이 엎드려 온다. 전체적으로 눌러오는 묵직함에 마기휼은 헛숨을 들이켰다. 밀어내고 싶었지만 워낙에 흔들려서 그리할 수도 없었다. 진동을 느끼는 동안은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그런 마기휼의 허리 아래로 손이 들어왔다.

놀란 마기휼은 눈을 크게 떴지만 라울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라울의 손이 다른 이유 때문에 이쪽을 감싸는 게 아니라, 몸이 튀어오를 수 있으니 그걸 예방하고자 함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머뭇거리던 마기휼은 재차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에 라울의 등을 끌어안았다.

전신으로 진동이 느껴졌다. 추락하다가 다 박살 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서서히 진동이 잦아들었다. 주변에서 불어오던 강풍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싶었다.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카락이랑 라울 때문에 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마기휼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 끝난 건가.”

“그런 것 같군.”

중얼거린 라울이 몸을 일으켰다. 그를 감싸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것에 괜히 무안함을 느낀 마기휼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 같은 건 다 깨졌겠네.”

분위기 전환을 위해 한 말인데 라울은 받아주지 않았다. 망루 바깥으로 고개를 내미는 얼굴이 진지했다. 왜 저러나 싶어 마기휼도 뒤를 쫓아 바깥을 내다봤다. 이쪽이 잘 기어 올라갔던 쪽으로 철창이 생겨났다. 그 위로 미미하게 전류가 흐르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인상을 썼다.

이래서 라울이 서둘렀던 거로군. 이 암시장이 내려앉았을 때 올라가려 했으면 더 힘들기 때문에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른 거였다.

“무모하게 안 들어왔으면 아예 출입도 못 할 뻔했네. 그런데 다른 군인들은 괜찮을까.”

“다들 몸놀림이 좋은 이들이니 어떻게든 안에 들어올 수는 있었을 거다. 문제는 제시간에 집결을 할 수 있느냐는 거겠지.”

“위치는 사전에 정해 둔 거야?”

“그렇다. 대충이라면 정해져 있지.”

그러면 별문제 없겠군. 마기휼은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가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에 입을 살짝 벌렸다.

건물의 색이 칙칙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 어느 지역의 한구석에 있을 법한 마을의 모습이었다.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그 마을은 좌측과 우측의 사이를 가르듯 가운데 대로가 있고 그 가장 위쪽으로 검은색의 큰 2층짜리 큰 건물이 보였다. 아마도 저기가 중심부인 듯싶은데 말이다.

마기휼은 웃음이 나왔다. 이런 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란 말이지?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

“대단하군. 이건 뭐 작은 마을 수준이잖아.”

“이만한 공간이 하늘에 떠오르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동력이 필요하단 말인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세상 온갖 게 모인다는 암시장이야. 그 관리인이라면 엄청난 부자겠지. 이만한 걸 띄울 만한 동력을 손에 넣는 것도 식은 죽 먹기였을 거야.”

“동력을 손에 넣는 것이 식은 죽 먹기라. 위험한 발언이다.”

이쪽은 나름 라울의 심각함을 달래줄 심산이었다. 하지만 안색이 더 굳어지는 걸 보아 차라리 말을 말 것을 싶기도 했다. 무안해진 마기휼은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폈다. 아직은 조용했다. 하지만 암시장이 자리를 잡았다는 걸 알리면 사방에서 배가 날아오겠지. 실제로 저기 멀리서 묘한 빛이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라울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허가가 된 배들이 착륙을 하는 것인가.”

기다렸다는 듯 배들이 착륙을 하고 있었다. 겉면에 달린 불빛이 일정하게 깜박거렸다. 착륙 허가를 받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인 모양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누르며 마기휼은 중얼거렸다.

“범죄의 소굴에 들어오게 된 거네.”

범죄도 그냥 범죄가 아니었다. 그 존재에 대해 인식을 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던 장소에 들어와 있었다. 예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규모를 지닌 이 거대한 배이자 시장인 공간을 두고 마기휼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두려움마저 생겨났다.

복잡하게 뒤엉킨 건물과 건물 사이로 좁은 길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개성적인 건물들의 문 앞에는 알파벳과 숫자로 그 이름을 정해 두고 있었고, 건물의 가운데로 그나마 대로라 부를 수 있는 길목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대로 가운데로 벤치가 줄지어 있어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쉴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밤이 되고 달빛이 드리우자 대로 양옆으로 세워진 기둥에 불을 붙이며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등이 굽고 눈에 검은 안대를 한 노파는 천천히 걸으며 등에 불을 붙였다. 불이 붙으면 선명한 붉은 빛이 사방에 뿌려진다. 그러면 가게도 불이 켜지고 어디선가 경쾌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가게의 문을 열고 나온 사람들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옆 가게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 하늘에는 수십 대의 배가 암시장에 착륙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그냥 평범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지나치는 사람들의 험악한 얼굴이나 색다른 차림새. 그리고 간간이 알 수 없는 물건과 동물이 운반되는 걸 봤을 때, 암시장이라는 게 느껴지고는 했다.

마치 낯선 나라에 와 있는 듯한 느낌. 몽롱한 것 같기도 했다. 마치 꿈을 꾸는 중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별천지네.”

중얼거리고 있는데 누군가와 부딪쳤다. 뭔가 싶어 눈을 내리뜨자 어린 소년이 보였다. 금빛 눈동자를 지닌 소년은 마기휼을 빤히 쳐다보더니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아이의 머리카락 속으로 귀여운 귀가 툭 튀어나왔다. 그걸 보고 아연한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아이는 몸을 돌리고 달려가 버렸다.

아이의 엉덩이로 기다란 꼬리가 살랑거리고 흔들렸다. 저렇게 이상한 것이 달린 건 그 아이뿐만이 아니었다. 거리에 하나둘씩 나타난 사람들은 어딘가 조금씩 다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봤을 때 그건 변종이었다.

때문에 라울의 존재가 눈에 튀었다. 이쪽은 평범한 얼굴이니 구석에 서 있으면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겠지만 라울 그는 달랐다. 검은색 가발에 렌즈를 끼고 있었다 해도 미남이었다. 그것도 확 튈 정도의 미남 말이다. 마기휼은 라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라울은 눈을 내리떴다. ‘왜 그러나.’ 그리 묻는 눈빛에 마기휼은 당장 뒤를 가리켰다.

“일단 이리로 오십시오.”

“왜 그러지?”

“역시나 대령님의 얼굴은 지나치게 눈에 띕니다.”

“내 얼굴이 이상하다는 건가?”

“너무 잘생겨서 되레 튄다는 말입니다. 이번 일은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대령님 때문에 파투나게 생겼단 말입니다.”

물론 아직까진 라울의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선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저 마리아 일당을 붙잡기 위해 움직이는 거였다. 사전에 다른 이들의 눈에 들어 정체가 발각된다면 좋을 거 하나 없었다. 이왕 은밀하게 움직이기로 한 거, 끝까지 그렇게 되도록 해야지 않겠나.

마기휼은 주변을 둘러봤다. 마땅한 곳이 없어 결국 뒤로 물러났다.

“가면을 파는 곳이 있으면 일단 그리로 가 보도록 하지요.”

“갈 필요가 없어. 얼굴은 숨기지 않는다.”

“뭐라고요?”

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돌아보는 마기휼을 힐긋 보며 라울은 담담히 말했다.

“이 넓은 곳에서 그들을 찾아낼 확률은 낮다. 그러니 그들이 다가오게 할 거다.”

그래서 저격이라도 당하면? 총 맞고 난 후에 ‘감히 왕통에 손을 대다니! 이 무례한 것들!’ 같은 대사를 날리면 그놈들이 무섭다며 벌벌 떨 것 같으냐?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면서 마기휼은 입술 꼬리를 씰룩거렸다.

마기휼이 이상한 얼굴을 하거나 말거나 라울은 특유의 무표정을 한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라울의 눈동자가 한곳으로 고정되었다.

“저기가 마음에 드는군.”

그래. 이쪽 말에 따를 마음은 조금에 조금도 없다 이거지?

마기휼은 기운 없이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건 검은 장미가 그려진 간판이었다.

딱 봐도 술집이었다.

“술이 고프십니까?”

“일단은 앉아 있을 장소가 필요하다.”

라울은 마기휼을 지나쳐 걸어갔다. 나름 이쪽은 생각을 해서 말을 꺼낸 건데 저렇게 무시를 해버리니 상당히 언짢았다. 바닥에 있는 돌을 쳐 내며 마기휼은 껄렁거리는 걸음으로 라울의 뒤를 쫓았다.

가게의 문을 열자 붉은 홍등으로 밝혀진 칙칙한 내부가 드러났다. 손님을 받을 생각인지 어떤지 모를 정도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내부는 테이블 의자가 엉성하게 빼내어져 있고 빗자루나 대걸레 같은 것들도 벽에 대충 기댄 상태로 있었다. 더군다나 쓰레기통 바깥으로 쓰레기들이 넘쳐흐를 정도인데 냄새가 나지 않는 게 용했다.

이런 곳이라니. 마기휼은 그럭저럭 OK였지만 라울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를 흘깃 보자 의외로 괜찮은 듯싶었다. 라울의 안색을 확인하고 나서 마기휼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에 움찔했다.

바 앞에 굉장히 화려한 왕관을 쓰고 드레스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밋밋한 가슴이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깊게 파인 섹시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사내는 온갖 장신구로 몸을 휘어 감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얼굴에는 화장기 하나 없었다. 밋밋해 보이는 외모는 그럭저럭 봐줄 만했지만 그 차림새 때문인지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 마기휼이 놀라 가만히 있는 사이 라울이 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는 눈을 내리떠 라울을 바라봤다. 그 용모를 확인하고는 살짝 웃었다.

“이게 누구야. 몇 년 만에 보는 미남인지 모르겠네.”

바 위에 양팔을 올린 사내는 라울 쪽으로 고개를 주욱 내밀었다. 부담스러울 만한 접근에도 라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당황한 것은 마기휼 쪽이었다. 이 무슨 상황인가 싶으면서도 의자를 끌고 그 위에 앉았다. 그제야 온 것이 라울뿐만이 아니라는 걸 안 사내는 옆을 쳐다봤다. 마기휼의 얼굴을 확인한 사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쪽 눈썹을 위로 휙 올렸다.

“일행인 거야? 아니면 애인인 거야?”

대수롭지 않은 듯 묻는 질문에 마기휼은 당황해 반사적으로 라울을 쳐다봤다. 라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신부다.”

“…….”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놈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마기휼은 어이없다는 식으로 라울을 쳐다봤다. 그러는 동안 사내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야유를 보냈다.

“뭐야. 그게 이렇게 멋진 남자한테 임자가 있다는 말이야?”

그냥 그런 말만 하고 끝났으면 나았을 거다. 하지만 이쪽을 흘겨보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라울 쪽으로 재차 얼굴을 들이밀며 적극적인 구애를 날렸다.

“그러지 말고 나는 어때? 내가 더 잘해줄 수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당장으로서는 달리 애인을 만들 마음은 없군.”

“그래? 정말 아쉽네.”

사내는 아랫입술을 툭 내밀었다. 암만 생각을 해봐도 라울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를 몇 번이나 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려 뒤에 있던 술을 몇 병 내리고 잔도 새롭게 꺼냈다. 마개를 따면서 잔을 든 그는 윙크를 던졌다.

“나는 당신 같은 사내를 알아. 집요하게 달라붙으면 10년 사랑도 식어버릴 게 분명해. 언제 또 이곳을 찾을지 모르겠지만 오게 된다면 꼭 나를 찾아줘. 난 밥을 잘 짓거든.”

“밥 잘 짓는 게 정말 좋은 신부라잖아?”라고 말한 사내는 이내 현란하게 손을 움직였다. 통에 술과 각종 액체, 향을 넣더니 휙휙 돌리고 장식을 한 잔에 만든 술을 따랐다. 맑은 빛 술이 채워진 걸 라울 쪽으로 내밀었다.

“자, 마셔봐. 갈증이 사라질 거야.”

라울은 잔을 들어 순순히 맛을 봤다. 꿀꺽- 하고 한 모금 넘기는 걸 확인한 마기휼의 얼굴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뭘 믿고 저렇게 선뜻 마시는 건지 모르겠다. 저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마기휼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울은 상관치 않고 조금씩 목구멍으로 술을 넘겼다. 영 마음에 안 들어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사내가 마기휼을 흘겨봤다.

“그쪽은 뭐로 줄까?”

라울과는 달리 완전 틱틱거리는 목소리였다.

자연스럽게 마기휼의 목소리도 퉁명스럽게 나왔다.

“저는 그냥 물이나 주십시오.”

“웃기시네. 여기서 물을 달라고? 지금 나랑 장난치는 거야?”

술집에서 물을 찾는 건 이쪽을 모욕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는 폼이 마치 그리 말을 하고 싶은 듯싶었다. 왠지 모르게 기에 눌리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장난하자는 게 아니니까 물을 달라는 게 아닙니까. 난 독살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네가 라울을 마음에 들어하니 날 죽이고 그를 취하려고 할 것 같아서 내 이러는 거다. 괜히 이런 말 꺼내는 게 아니라니까. 그리 말하는 눈빛을 보내자 사내의 표정이 풀린다. 그는 눈꼬리를 내리며 코웃음을 쳤다.

“당찬데? 마음에 들어.”

사내는 순순히 물을 한 잔 따라 그걸 마기휼에게 내밀었다. 주는 잔을 받으며 마기휼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토해 냈다. 왜 이래야 하는 거야. 라울을 사이에 두고 이러는 건 마치 치정싸움 같잖아. 사람 입장 정말 우스워지는 것 같다면서 마기휼은 잔을 들었다.

팔짱을 낀 채로 마기휼과 라울을 번갈아 보던 사내의 입가로 흐뭇한 미소가 감돌았다.

“뭐하면 우리 3P라도 해볼까? 나 둘 다 가능한데 말이야.”

마기휼은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뿜을 뻔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라울의 말에는 결국 기침이 나와버렸다.

“그것도 괜찮겠지만 아직은 내 신부 한 사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

마기휼은 멍한 얼굴로 라울을 쳐다봤다. 원래 이런 식의 농담도 쉽게 받아쳐 낼 수 있는 사람이었나? 지금의 나는 라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해낸 걸까? 어쩌면 진심이 아닌 장난인 것뿐일지도 모르지. 저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라울이라니. 진짜 새로운 발견이었다.

마기휼은 기침으로 인해 당겨진 목을 축이기 위해 물을 마셨다. 그러는 동안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빈 가게라 생각했는데 금방 자리가 채워졌다. 그들 중 몇은 곧장 여장을 한 가게 주인과 아는 척을 하거나 진한 인사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내 사랑 장미. 오랜만인데?”

“그런 말 하지 마. 전에는 다른 가게로 들어갔던 거 다 알고 있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나는 당신밖에 없다니까.”

사내는 바 너머로 손을 뻗어 사내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그 난잡한 손길에도 사내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새초롬한 표정을 지은 사내는 엉덩이를 더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 사내의 행동에 상대의 호흡이 점점 가빠진다.

“여전히 요염하군. 오늘 시간 있어?”

“괜한 거에 시간 쓰지 말고 가서 물건이나 팔아. 오늘 제대로 장사를 하지 못하면 1년 공치는 거야. 알면서 그래?”

“알지. 알다마다. 우리 장미는 이런 말도 서슴지 않고 해서 정말 좋다니까.”

마지막으로 장미라 부르는 사내의 엉덩이를 찰싹 때린 자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이어서 몇몇 사내들이 더 들어왔다.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차림의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엉성하게 배치되어 있는 의자를 끌고 자리에 앉아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집중을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10명 넘게 사람이 들어오기는 하는데 대화 속에서 영양가 있는 정보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마기휼이 보기에 라울이 여기 와서 할 수 있는 건 저 장미라는 자와 시시덕거리는 것뿐이었다.

“여기에 있어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이후의 계획은 있는 겁니까. 다른 군인들하고는 어디서 모이기로 했던 건데요?”

대답 없이 술만 홀짝이는 라울의 모습에 마기휼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미간 사이로 진한 주름을 만들며 마기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보쇼. 지금 술 마시고 싶어서 여기에 와 있는 건 아니겠지요?”

“조금만 기다려봐라.”

뭘 더 기다려보라는 건지 모르겠다.

불만은 한가득이지만 애써 그걸 내리눌렀다. 대신에 불편한 속내를 어필하는 헛기침을 하며 마기휼은 살짝 돌아앉았다. 그 틈을 타 장미가 재차 라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기, 더 필요한 거 없어? 자기한테라면 뭐든지 만들어주고 싶은데 말이야.”

“정보를 원하는데 그래도 괜찮은가.”

장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오홋. 이것 봐라.’ 그리 말하고 싶은 듯 눈을 빛내던 것도 잠시, 장미는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질문 내용에 따라 대답을 해줄 수 있는 게 있고, 아닌 게 있는 법이지.”

“엔온은 어디서 모이지?”

“어머나. 나도 엔온 소속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스스로를 가리키는 것에 마기휼은 놀라 장미를 쳐다봤다.

장미는 느긋하게 손을 펼쳐 가게 안에 있는 사내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나뿐만이 아니라. 암시장을 이용하는 절반가량이 엔온 소속이야.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물으면 안 돼. 엔온이라고 해도 부류는 다르거든. 나처럼 이름만 올려놓는 이들이 있고, 무기를 대는 이들이 있고, 돈을 대주는 이들도 있고, 그리고 일선에서 움직이는 여러 무리들이 있고 말이야.”

“여러 무리라고?”

“다 틀려. 엔온이라고 해 봤자 오합지졸이야. 하나로 모여지지 않으니 해적질을 하기도 하고 테러를 하기도 하고, 괜한 짓거리를 저지르기도 하는 거야.”

장미는 라울의 목에 한 팔을 두르고 그의 귀에 입술을 댔다. 갑작스럽게 얼굴을 가까이 붙이는 것에 옆에서 지켜만 보던 마기휼의 눈이 커졌다.

마기휼이 잔에 입술을 댄 채로 멍하니 있는 동안 장미가 속삭였다.

“배에 숨어들어 노르디아의 왕통을 빼돌려 레드존으로 들어가려는 짓 같은 거 말이지.”

“…….”

고개를 떨어뜨린 장미는 라울의 표정을 확인했다.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 흥미롭다는 듯 장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정확하게 말을 해. 엔온의 누구를 찾는 거지?”

미소를 짓는 장미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라울에게 뭐라 속삭인 건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해도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라울은 가만히 주변의 모든 것들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그리 판단을 내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리아는 어디에 있지?”

“마리아? 마리아라고?”

장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내내 여유로움을 가장하던 그의 안색이 돌변했다. 뒤로 몸을 물린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정말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답해주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는 오래 살고 싶거든.”

쓰게 웃는 웃음 너머로 진심으로 곤란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마리아는 이쪽이 보기에도 만만치 않았다. 괜히 건드려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래도 정보는 모아야만 했다.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장미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달리 어떤 식으로 질문을 해야지만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생각할지도 몰랐다. 라울 그는 오늘 상당히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걸 이용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마기휼은 괜히 기분이 언짢았다.

다른 이들이 건드리면 당장 안색을 굳히거나 싫은 내색을 하던 놈이, 왜 저놈이 건드릴 때에는 가만히 있는 거야.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장미를 노려봤다. 라울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심히 거슬렸던 그는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아이작은?”

부드럽게 휘어져 있던 장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고개가 휙 돌아가 마기휼을 노려보는 것과 동시에 등 뒤에 가래 섞인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이라고?”

“누가 지금 아이작의 이름을 말한 거야?”

갑자기 가게 내부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마기휼과 라울은 뒤를 돌아봤다. 그와 동시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이들이 마기휼과 라울, 두 사람을 노려봤다.

“너희들이냐?!”

“붙잡아! 죽여버려!”

괴성을 지르며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품에서 단검이나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끄집어냈다. 마기휼과 라울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들이 있던 곳으로 테이블이 던져졌다. 테이블 다리가 박살 나자 안색이 변한 장미가 외쳤다.

“가게 물건 부수면 10배로 변상할 줄 알아!”

마기휼과 라울은 양쪽으로 갈라져 그들의 공격을 받아냈다.

“제길!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날아오는 주먹을 피해 뒤로 몸을 꺾었다. 때에 맞춰 칼이 날아왔다. 암시장 내에서 싸움을 일으키면 안 된다 해서 총의 소지가 금지된 게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이 자식들 총부터 꺼내 들었을 거다.

한 사내가 기습적으로 옆구리에 매달려 왔다. 그대로 쓰러뜨리려는 걸 마기휼은 간신히 벗어났다. 날아오는 단검을 피해 고개를 돌리면서 주먹을 날리고 발차기를 선보이고, 마지막으로는 의자를 집어 들었다.

“저리 꺼지지 못해?!”

의자가 박살이 날 정도로 있는 힘껏 휘둘렀다. 그리고 남은 다리를 잡고 힘껏 버둥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테이블과 의자를 건너뛰는 동안 쓰러져 있던 이들은 벌떡 일어나 다시 덤벼드는 근성을 보였다. 벽에 기대어져 있던 대걸레를 휘두르며 앞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는 동안 주먹을 휘두르는 라울이 반대편 쪽에 붙어 있는 게 보였다. 그를 쳐다보자 라울도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재차 덤벼드는 이들 때문에 마냥 그쪽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산만하게 투닥거리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을 때, 가만히 있던 장미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아이작은 건드리면 안 돼. 그는 우두머리거든.”

하지만 다들 열심히 싸우고 있어서 이쪽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장미는 사내들 사이에 있는 라울을 쳐다봤다. 검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움직이는 라울은 우아함과 기품이 철철 넘쳤다. 흉악한 것들 사이에 서 있으니 더더욱 그 미모가 빛을 발한다.

장미는 양 뺨에 손을 댔다. 이미 그는 뿅간 얼굴이었다.

“역시나 멋있어.”

날름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란 말이야.

흐뭇한 얼굴로 있던 장미는 바 아래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붉은 버튼을 눌렀을 때 갑자기 라울이 서 있던 곳 바닥이 열렸다. 놀란 라울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는 아래로 푹 꺼져버렸다.

“라울?!”

라울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마기휼은 아연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사색이 된 마기휼 쪽으로 사내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마기휼은 재차 대걸레를 휘둘렀다.

“젠장!”

욕설을 토해 내자 한 사내가 앞으로 몸을 날렸다. 머리통을 후려치자 대걸레 끝이 박살이 났다. 그걸 쥔 채로 장미를 노려봤다.

“너 지금 뭘 한 거야?!”

“네가 없으면 그 사내는 내 것이 되는 거겠지?”

살의가 가득 서린 목소리에 움찔했다. 놀란 듯 눈을 댕그랗게 뜨고 있는 마기휼을 흘겨보며 장미는 나직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냥 죽어줘. 그 사내는 내가 잘 보살펴줄게.”

“웃기고 자빠졌네.”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듣고 앉았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당장 허리춤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검은 막대를 꺼내 들자 사내들이 그를 비웃었다.

“그런 막대로 뭘 하겠다는 건데?”

“아이구, 무서워라. 겁나서 쉬가 찔끔거리면서 나오네.”

“그러지 말고 이리로 와. 그럭저럭 야리야리하니까 우리가 다 돌아가면서 맛있게 먹어줄 테니까.”

“오늘 완전히 엉덩이 구멍 질펀하게 늘어나겠구만.”

조금 더 있다가는 완전 귀가 썩을 음담패설이 마구 쏟아질 것 같았다.

“누구 구멍이 늘어나는지는 해봐야 알겠지.”

검을 막대를 옆으로 휘두르자 그곳에서 길고 가느다란 줄이 좌악 늘어났다. 빈 공간을 가르며 날아간 채찍이 사내들을 후려치고 가장 왼쪽에 있던 사내는 목이 감겨진 채로 옆으로 밀쳐 내졌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사내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자빠지는 이들을 두고 마기휼은 재차 채찍을 휘둘러 그대로 후려쳤다. 장미는 황급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 얼굴이―!”

장미의 날카로운 외침을 들으며 마기휼은 당장 가게를 박차고 나왔다. 나오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무슨 일인가 싶은 듯 쳐다보는 눈빛에 마기휼은 당장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이동했다. 건물 사이로 난 길로 들어섬과 동시에 등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그 개새끼 어디로 갔어?!”

지금으로선 혼자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일단은 라울이 어디로 가버린 건지를 알아내야 했다. 가게 아래로 빠졌으니까 달리 연결된 비밀통로가 있지 않을까. 그러면 다시 건물 쪽으로 가야만 하는데.

“빌어먹을. 그 여장 변태가 만지는 대로 가만히 있으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잖아.”

건드려도 가만히 있고 아무 소리 하지 않으니까 그놈이 완전 기어오르는 거잖아. 이번 일에는 라울 그의 잘못이 크다면서 마기휼은 발을 멈췄다.

라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혼자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더 움직여 봤자 안 좋을 거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돌아가 볼까?

마기휼은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귀로 딸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마기휼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설마하니 이런 장소에서 그리운 그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때문에 처음에는 환청이겠거니 싶었다. 그래도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몸을 숨긴 채로 이동을 해야 한다는 건 머리로 생각하고 있지만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마기휼은 가운데 쪽의 큰 대로로 나왔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아무도 마기휼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팔 물건에 대해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궁리했다. 그런 그들을 지나쳐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건물 아래에 작은 가판을 깐 채로 주저앉아 있는 작은 몸짓의 사내를 발견했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내는 알 바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가판 위의 물건이었다.

가장 구석에 작은 보석 몇 개와 방울 한 개가 달린 가느다란 검은 줄이 보였다. 다른 이들에게 있어 하찮고 별거 아닌 물건일 수도 있으나 마기휼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 물건을 여기서 본 것을 어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나 싶었다. 마기휼은 가라앉다 못해 칼칼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물건은 어디서 난 겁니까?”

“넌 뭐야? 이걸 사고 싶은 거냐?”

물으며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망토 아래로 불에 지져져 흉하게 변형된 눈과 얼굴의 반을 가린 검은 마스크가 보였다. 흉측하게 생긴 용모는 거부감이 들게끔 했지만 마기휼은 신경 쓰지 않고 사내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버지가 도박에 빠졌을 때 집안의 물건을 모두 바깥으로 들고 나갔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때문에 어머니의 유품들 중에서 제대로 남은 건 그 무엇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마기휼이 가장 애착을 가지는 물건을 굳이 고르라 한다면 그건 바로 이 발찌였다. 어머니가 어린 마기휼을 안고 다닐 때 늘 그녀의 발목에서 소리를 내던 물건이었다. 이 소리를 들으며 놀고, 잤던 추억이 생생했다.

감정이 격해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마기휼은 웃는 표정을 가장했다.

“관심이 생기는 걸요? 제 애인한테 주면 딱이겠습니다.”

“이건 집시들이 발목에 차는 물건이야. 이런 걸 애인한테 주면 뺨 맞아.”

“그래도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아니십니까? 얼마입니까?”

“너한테는 이걸 안 팔아.”

마기휼의 눈가가 파들거리고 떨렸다. 순간적으로 험한 소리가 나올 뻔했다. 가까스로 그걸 참은 마기휼은 재차 미소 짓는 얼굴을 보였다.

“파는 물건을 왜 안 파신다는 겁니까?”

“너에게 그냥 주마.”

사내는 발찌를 집어 마기휼에게 내밀었다. 바가지를 씌울 생각인가 싶었던 마기휼은 예상치 못한 패턴에 놀라 숨을 죽인 채로 있었다.

사내가 재차 발찌를 흔든다. 딸랑거리는 소리에 손을 내밀어 그걸 받았다. 손바닥 위에 올라간 발찌를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움켜쥐었다. 그걸 본 사내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물건이 기뻐하는군. 원래 네 물건이었던 모양이야.”

“……아는 분의 물건입니다. 친척 아주머니시지요.”

실은 어머니였지만, 그런 것까지 세세히 말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마기휼은 손바닥 안을 살폈다. 설마하니 암시장에서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도 못 했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걸로 어머니의 물건을 팔아버린 아버지의 죄책감을 하나 지울 수 있겠거니 싶었다. 안도감을 느끼는 마기휼을 빤히 바라보던 사내가 갑자기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내가 이 물건을 얻으면서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해줄까?”

“재미있는 이야기라니요?”

“그 사내가 미친 이유에 관한 이야기.”

살짝 오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마기휼은 중얼거렸다.

“그 사내라면-.”

“구제온, 말이야”

“…….”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이 사내의 입에서 어찌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는 건가 싶었던 마기휼은 숨을 삼켰다. 그러는 동안 사내는 낮고 쉰 목소리로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박에 미쳐서 집안의 모든 물건을 빼돌렸지. 돈이고 땅이고 저택이고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말이야.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달리 있었어. 그는 아내와 함께 장만한 그 모든 것들이 그들의 소유가 되는 걸 바라지 않았던 거야.”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어버릴 것 같았다.

어느덧 마기휼의 얼굴은 가면을 쓴 듯, 완전한 무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도박을 할 때 나는 옆에 있었어. 나는 불행한 사람이 좋거든. 풍기는 특유의 그 분위기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거야. 그래서 구제온의 곁에 달라붙어 계속 캐냈어. 그가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 비밀로 하고 싶어하는 것들. 죽을 때까지 무덤으로 가지고 가고 싶어하는 진실에 대해서 말이야.”

사내는 조금 더 얼굴을 내밀었다. 마스크로 반이 가려져 있다 한들 워낙에 흉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에 집중하고 있었던 마기휼에게 있어 그건 큰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그 집에 아주 예쁜 여자가 있지. 두 번째로 맞이한 부인 말이야. 그 부인이 바람을 피운 거야. 다른 사내하고. 그래서 낳은 딸도 하나 있었다지. 그걸 알게 된 거야. 그래서 구제온은 망가지기 시작한 거고 말이야.”

“뭐라고요?”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

되묻는 말에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마기휼의 사고는 정지된 채였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귀가 멍멍했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건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휼, 이라는 이름의 사내였지.”

가만히 있던 마기휼의 눈동자가 점점 크게 떠졌다.

마기휼이 놀라고 절망하면 할수록 사내의 눈동자가 빛났다. 즐거워 죽겠다는 듯, 그는 신이 나 떠들어 댔다.

“구제온하고는 달라. 준수하고 영리하고 몸도 좋고 무엇보다 젊지. 다 늙고 제대로 된 구실도 못 하는 수말은 돈을 얹어 줘도 안 사. 하지만 건강하고 튼실한 수말은 누구나 원하지. 예쁜 여자들은 잘생긴 모든 사내들을 아래 입으로 먹어치우길 원한단 말이야. 그래도 너무 심했지. 배 아파 낳은 게 아니라 해도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눈 뜨고 뻔히 살아 있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계모와 그 짓을 해서 아이까지 만들어? 나는 참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사내는 눈은 교활하게 빛났다. 계속해서 변하는 마기휼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도 지금 불행한 거로군. 그렇지? 너에게서 구제온과 같은 냄새가 나.”

어느 순간부터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헉헉-거리고 깊게 뿜어내는 기분 나쁜 호흡 소리와 동시에 사내의 얼굴도 점점 붉은빛으로 변해 갔다.

“나는 남의 불행이 너무나 좋아. 정말이지―.”

사내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반질거리는 것이 혐오스러웠다. 사내는 입을 가리고 있던 걸 천천히 내렸다.

“침이 고일 정도로 말이야.”

중얼거리며 헤죽- 하고 웃은 사내의 양 입술 꼬리가 완만하게 올라갔다. 귀 바로 아래까지 길게 올라가는 입을 보는 순간 마기휼은 토할 것 같았다. 그는 당장 일어나 사내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 주먹에 사내가 쓰러지고 앞에 놓인 물건은 엉망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주먹다짐에도 길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생기는 하나의 일상쯤으로 여기는 듯싶었다.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 너머로 마기휼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방울이 달린 장신구를 들고, 다른 손은 주먹을 쥔 채였다.

그 손등 위로 미미하게 힘줄이 생겨났다. 어금니를 악물며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마기휼을 올려다보는 사내의 코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그저 전해 들은 말에 대해서만 말을 할 뿐이야. 그리고 이 보석의 주인의 결말이 어찌 되는지 지켜볼 따름이지. 구제온 그가 믿고 있던 진실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어. 나도 그 어린 딸년을 본 적이 있었거든. 진짜 그의 딸일 수도 있어. 그런데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그 여자랑 가휼이라는 사내가 이상한 짓을 했다는 거지 않겠어? 티를 냈으니까 의심을 하게 된 거지. 불쌍하지. 늙은 놈들은 젊은 것들을 이길 수가 없어.”

“……끄러워.”

“정말 안되었지 뭐야. 매번 얼굴을 보는 귀여운 딸이 진짜 자신의 딸일지 아닐지 의심을 하다가 확 돌아버린 거니 말이야. 불쌍하지. 완전히 말이야. 그래서 난 좋은 물건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던 거고 말이야.”

“시끄러워! 입 다물어!”

소리를 치고 나자 머리가 멍해졌다. 급격하게 가라앉은 기분 상태에 맞춰 마기휼은 지금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불현듯 드는 욕구를 내리누를 수 없었다. 그는 도망을 치듯 몸을 돌렸다.

앞을 살피지 않고 있는 힘껏 달렸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덩치가 큰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마기휼이 튕겨져 나갔다. 사내는 인상을 쓴 채로 뒤를 돌아봤다.

“뭐야?”

“죄송합니다.”

얼굴을 보지도 않고 바로 사과를 한 후에 달려갔다. 달리는 동안 몇 번이나 사람들과 부딪쳤다. 그때마다 기계적으로 사과를 하던 마기휼은 골목길 사이로 들어갔다.

어두워서 음습한 곳으로까지 들어선 마기휼은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멈추고 벽에 등을 기댄 그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믿을 수 없다. 정말 믿을 수 없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진짜라면 어떻게 하지?

레이라. 그 아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더라. 그 여자와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가휼을 닮은 것도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던 마기휼은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가휼이 그런 짓을 저지를 턱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갑자기 도박에 빠져 사람이 이상하게 변하는 건 이상했다. 아버지에 대해 잘 아는 만큼 그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안제크가에 팔려 오게 되었을 때에도 잠자코 있었던 건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변화를,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주변 상황에도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잡아 흔드는 대로 휘둘리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가휼이 그녀와 그런 짓을 해서 레이라를 낳은 거라면.

그거 알게 된 아버지가 이상하게 변한 거라면.

그게 진짜라면 난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거지?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그 눈동자가 혼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집에서 멀리 나온 어린애처럼, 갈 곳을 찾지 못해 헤매는 것처럼 초점이 맞지 않았다.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지금 이 상태를 잡아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짜잔하고 나타났으면 좋겠다.

마기휼은 멍하니 있다가 입을 살짝 벌렸다.

라울.

목소리로 나오지 않는 이름을 반복하며 마기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들의 잘못이야.’

그래. 넌 그렇게 말을 해줬지. 지금도 또 그렇게 말을 해주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조금이라도 빨리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줘. 지금만큼은 너에게 의지를 하고 싶단 말이야. 그러니까―.

머리가 뒤죽박죽.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러다가 머리통이 박살이 나버릴 것 같았다.

“마기휼.”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던 마기휼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휙 돌아간다. 그리고 누더기 같은 긴 망토를 두르고 있는, 체구가 큰 사내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정리가 되지 않은 붉은 더벅머리를 지닌 사내는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마기휼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사내는 마기휼과 눈이 마주치자 이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는군. 그렇지 않나?”

“아이작.”

마기휼이 이름을 부르자 아이작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마기휼의 앞에 서 그를 내려다봤다.

“언제나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 같아.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신선한 즐거움을 느끼지. 우리는 인연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돼.”

듣기 좋은 목소리에 변죽 좋은 말이었다. 지금까지 저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워 삶았을까 싶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서 만나고 싶은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덕분에 두통이 사라져버렸다. 한결 머릿속이 정리되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등을 기대고 있던 벽에서 떨어졌다. 벽에 한 손을 집은 채로 앞에 서 있는 아이작을 흘겨봤다.

“나는 왜 당신이 내가 있는 장소에만 나타나는 것 같지요?”

“내가 마기휼 자네의 뒤를 쫓아다니는 것 같은가?”

“그냥 기분상으로 그렇다는 거지요. 솔직히 암시장이 그리 흔한 장소는 아니니까.”

“그렇겠지. 암시장은 쉽사리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지.”

아이작은 한쪽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여유가 묻어나는 미소. 상당한 연륜이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삼십 대 중후반 정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위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거물일 테지.

마기휼은 입술을 달싹였다.

“마리아는 어디에 있지?”

반말로 물어도 아이작은 태연했다.

“그를 왜 나에게서 찾지?”

“안베르로 와서 그녀를 탈옥시켰을 거 아니야. 지금 같이 행동하는 게 아닌가?”

“아니.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지. 함께 일을 할 때에는 붙어서 행동하지만 아닐 때에는 그렇지 않아. 그는 내가 고삐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아이작의 말에 마기휼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역시나 이 사내는 마리아와 관련이 된 이였던 건가. 그런 그가 마리아의 위치를 모를 턱이 없었다.

“거짓말.”

“거짓말?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나? 그런 사내로 보여졌다니. 좀 씁쓸하군.”

사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애석해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만났다면 완전 넘어가버렸을 거다. 진심으로 이 사내를 위로했을지도 모르지.

아이작을 바라보는 마기휼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 시선을 받은 아이작은 짐짓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안색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딱 잘라 선을 만들어내는 말투였다. 그것에 아이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조금 더 마기휼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였다.

“강한 척하면서 숨기려 들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어. 자네의 그늘과 고민과 그리고 욕망에 대해서도 말이야.”

정말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듣고 있으면 묘하게 졸려진다. 머리가 몽롱해진다. 마기휼은 벽을 짚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줬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이작의 속삭임은 계속되었다.

“나를 믿어. 나와 함께 있는 게 너에게는 더 나을 거야. 애초에 우리는 비슷한 점이 많고, 때문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짝이 될 수 있어.”

아이작이 점점 다가왔다. 눈이 반쯤 감겨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그는 마기휼의 바로 코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이작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나타난 하얀 눈동자로 마기휼의 시선이 고정된다. 그걸 확인한 아이작의 입가로 만족의 미소가 걸렸다. 그는 양손을 내려 마기휼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아, 마기휼. 나에게 와라.”

속삭이며 점점 더 아이작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하는 지점에서 마기휼의 입술이 달싹였다.

“어림도 없어.”

마기휼은 반쯤 떠진 채로 있던 눈을 부릅떴다. 그걸 확인한 아이작은 짐짓 놀란 얼굴이 되더니 급히 뒤로 물러났다. 마기휼도 급히 아이작에게서 떨어져 크게 고개를 털었다.

위험했다.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놈의 세뇌에 넘어갈 뻔했다. 머릿속이 징징거리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한쪽 눈을 감은 채로 아이작을 노려봤다.

“그런 유치한 최면에 넘어갈 것 같나? 어림도 없어.”

마기휼은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그러는 동안 아이작의 시선은 움직이는 마기휼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를 바라보나 싶던 그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애석하군. 그리고 정말 아까워.”

중얼거린 그는 벗어 뒀던 선글라스를 다시금 썼다. 그는 마기휼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쪽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에게 왔으면 정말 귀여워해줬을 텐데 말이야.”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아.”

그러니 괜히 너 혼자 난리 치지 말라고.

마기휼은 씩씩하게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그 행동에 아이작은 웃었다. 선글라스를 한 손으로 누른 채로 마기휼을 바라보며 “정말 아까워.”라고 중얼거리는 아이작의 얼굴로 숨겨지지 않는 욕망이 드러났다.

토가 나올 것 같았다. 다른 사내가 저런 식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건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다. 인상을 팍 쓴 채로 있던 마기휼은 살기를 느끼고는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바닥을 두어 번 구르고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서 있던 곳과 굴러다닌 곳으로 단검이 몇 개나 박혀 있었다.

놀라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자 아이작의 앞으로 새롭게 나타난 존재가 보였다. 몸에 딱 달라붙은 검은 전신 타이즈에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은 여성은 굽실거리는 금발 머리카락에 촉촉한 파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유난히 붉은 입술 꼬리를 올리며 매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손 키스를 날리는 건 마리아였다.

“안녕. 자기.”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런 식상한 전개는 언제 어느 때나 그저 식상할 뿐이다.

혀를 찬 마기휼은 당장 채찍을 끄집어냈다. 일단 바닥을 후려치고는 다른 손으로 채찍의 끝을 잡아 팽팽하게 당겼다. 정면을 노려보는 시선이 살벌했다. 쏘아보는 눈빛에 마리아는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자기 섹시한데? 그걸로 나랑 싸울 생각이야?”

“당연하지. 어차피 이 안에서는 너도 총을 다루지 못할 거 아니야.”

“총은 못 다뤄도 이건 사용할 수 있지.”

마리아는 허리춤으로 손을 넣나 싶더니 이내 기다란 검을 끄집어냈다. 달빛 아래로 보이는 장검을 확인한 마기휼은 이를 드러냈다.

“너무 살벌한데? 덕분에 오줌 지리겠어.”

“섹시해서가 아니라 살벌해서 오줌을 지리겠다니. 이상한 표현 아니야? 정말 웃긴 사내라니까―!”

마지막 말을 외치며 마리아가 달려들었다.

달려오자마자 길게 검을 휘둘렀다. 여자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스피드에 완력이었다. 급한 대로 몸을 피하는 마기휼의 움직임을 따라 마리아가 뱀처럼 쫓아왔다. 능숙하게 날아오는 검을 피하기 위해 별짓을 다 하는 동안 쓰고 있던 터번이나 가발은 진작 날아가버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확- 하고 퍼졌다가 마리아가 날린 검으로 인해 일부분이 잘려 나갔다.

“우왓! 진짜 장난 아닌데?!”

마기휼도 간간이 채찍을 휘두르거나 몇 겹으로 둘러서 정면으로 떨어지는 검을 막아내기도 했다. 탕탕- 하고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찍에 부딪힌다고 이런 소리가 나냐? 막으면서도 마기휼은 어이가 없어 이상한 표정이 지어졌다. 그러는 동안 얼굴 변형을 위해서 어금니 쪽에 끼워두었던 보형물을 뱉어 냈다.

마리아는 엄청난 힘으로 달려들었다. 그녀의 검을 막는 채찍의 면에 흠집이 생길 정도이니 할 말은 다 한 셈이었다. 마리아는 달려들었고 마기휼은 그걸 막았다. 검으로 누르는 걸 채찍으로 감아 막고 이내 채찍을 퉁기듯 휘둘렀다.

내리누르던 힘이 고스란히 튕겨져 나와 손바닥이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낀 마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검을 잡은 손을 살짝 놓았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기휼은 검을 빼앗아 들었다. 한 손에는 채찍, 다른 손에는 검을 든 채로 마기휼은 눈을 빛냈다.

“잡았다!”

“검은 또 하나 있어.”

별 거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말을 하며 마리아는 새롭게 생긴 검을 잡아 흔들었다.

말도 안 돼! 어디서 그렇게 빨리 나타나는 거야?

따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마기휼은 마리아를 노려봤다.

“슬슬 본격적으로 해볼까.”

마기휼은 자세를 취하며 검을 위로 세웠다. 자세가 바로 나왔다. 그걸 확인한 마리아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진심으로 나와 겨룰 마음이 든 모양이지? 군대 NO.1의 검사씨.”

“그래. 검술로는 아무도 날 못 이기지. 저 라울조차도 말이야.”

언제나 늘 검술은 만점을 받던 몸이란 말이야. 총질을 하는 시대에 검이 웬 말이냐 싶겠지만 어쩌겠나. 제일 잘하는 것인걸.

마기휼은 검의 끝을 살살 돌리며 앞으로 한 발 크게 내밀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지금은 그리 여유가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말이지!”

달려드는 마기휼을 바라보던 마리아는 휘두르는 검에 맞춰 있는 힘껏 휘둘렀다. 챙- 하고 부딪친 검이 떨어졌다가 다시 마주쳤다. 몇 번이나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둘은 떨어졌다. 원을 그리면서 이동을 하며 서로를 견제했다. 마리아는 마기휼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던 그녀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마기휼. 그런 얼굴은 당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두 번째인 것 같아. 왜 그래? 또 슬픈 일을 당했어?”

자세를 낮추고 검을 앞으로 내민 채로 있던 마기휼의 검 끝이 살짝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도 미미한 떨림을 보였다. 그걸 읽어낸 마리아는 한쪽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정곡이었구나. 역시나 당신은 솔직하다니까. 그래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마리아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걸 느끼고 이상하다 싶었을 때 등 뒤로 묵직한 뭔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당황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뒤에서 나타난 두터운 팔이 마기휼의 몸통을 끌어안았다. 그대로 위로 들어 올려졌다. 갑자기 변한 시야에 당황해 있는 사이 마리아는 들고 있던 검을 아래로 내렸다.

“이미 너무 많이 개입되어버린 것 같으니 같은 편이 될 수 없다면 죽어줘야겠어.”

아래로 양손이 내려간 상태로 상체가 단단히 안겨져 손도 못 쓴다. 쥐고 있던 검은 떨어뜨린 후였다. 그러는 동안 몸통을 끌어안고 있는 팔로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숨도 숨이지만 팔이 눌린 부위가 너무도 아팠다.

고통스러웠던 마기휼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기침을 토해 낸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톰은 이를 악문 채로 더 강한 힘을 줬다.

“으-!”

우득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몸통이 반으로 쭉 갈라져서 터져버리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통증을 참을 수 없었던 마기휼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으아아악!”

고통이 담긴 비명에 마리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안타까워. 좋은 사람이었는데.”

“난 아직도 미련이 생기는군.”

중얼거림을 들은 마리아가 당장 아이작을 올려다봤다. 날카로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태연히 말했다.

“난 저자가 마음에 들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면 우리는 사랑의 라이벌이 되는 건가.”

“마리아. 네가 라이벌이라니. 정말 무섭군.”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마리아의 입술 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미묘한 그 미소에 아이작 또한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뭔가를 더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동시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기휼의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감싼 채로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톰과 바닥에 쓰러져 기침을 하고 있는 마기휼이 보였다. 마리아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박치기인가.”

저런 상태에서도 박치기를 하다니 마기휼답다고 할까. 마리아는 냉정한 눈빛으로 마기휼을 응시했다.

마기휼은 팔꿈치를 이용해 바닥을 기어갔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기침을 하면서 기어가는 마기휼의 어깨를 커다란 손이 붙잡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이 돌려져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밤하늘은 곧 사라지고 화가 난 사내가 대신 차지를 했다.

“이놈이!”

“-윽?!”

아래로 주욱 당겨졌다. 위로 몸이 돌려진 채로 그대로 끌어안겨졌다. 마기휼은 주먹으로 톰의 머리통을 후려쳐졌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간간이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도 톰은 마기휼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 쪽으로 고개가 내려간다. 톰은 이를 악물었다.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팔에 힘을 딱 주려던 찰나 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더 팔로 힘이 안 들어간다. 왜 그러나 싶었던 마기휼은 막힌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톰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칠 때, 톰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엄마?”

“…….”

약하게 재차 기침이 나왔다. 마기휼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로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톰은 멍하니 그런 마기휼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갔다.

차라리 목을 조르는 편이 나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매달리는 건지 모르겠다며 마기휼은 기겁을 하며 몸을 비틀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톰은 마기휼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엄마. 엄마?”

“자, 잠깐 기다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라 해도 너 같은 아들 낳은 적 없어. 너같이 덩치만 산만 한 거라니. 징그러워 죽겠다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마기휼이었지만 톰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마기휼에게 매달렸다.

“엄마. 엄마. 엄마.”

“왜 이러는 거야! 이런 젠장-!”

자꾸만 매달리려 하는 게 비위 상해 돌아가실 것 같았다. 정말 끔찍하니까 이러지 말라며 있는 힘껏 톰을 밀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커다란 사내새끼가 달라붙어 있다니. 진짜 너무너무 불쾌했다.

마기휼은 당장 험한 욕설을 퍼부으려 했고, 바로 그때 옆으로 다가온 마리아가 톰의 몸통을 후려쳤다.

“그에게서 떨어져. 톰.”

마리아에게 맞은 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마리아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눈을 내리뜨나 싶던 톰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로 빠지는 순간 마리아가 대신해서 마기휼의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봤다. 톰이 물러난 것은 좋았지만 마리아가 재차 나타났다. 마기휼은 옆으로 몸을 물렸다.

“뭐, 뭐야.”

“마기휼 너는 역시나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내려다보는 마리아의 얼굴 가득히 만족한 기색이 서린다. 묘하게 사람 신경을 건드리는 얼굴이었다. 불쾌해지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무슨 소리를 할 생각이야.”

“톰은 상대의 감정에 쉽게 동화가 되지. 일시적으로 그 사람의 모든 정보를 읽어낼 수 있어. 고도의 과학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신체에 관한 것까지도 말이야.”

“……뭔 말이야.”

톰 저 자식이 내 정보를 얻었다는 거야? 그러면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라는 것도 알았다는 거네? 그게 날 엄마라고 부르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순간 스산한 것이 몸을 흩고 지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화가 났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고?!”

“쉿. 그렇게 화를 내면 안 돼.”

다른 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마기휼의 고개가 움직였다. 무릎을 꿇고 앉는 아이작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웃었다. 그리고는 마기휼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밀어 넣더니 그 몸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읏! 저리 가! 날 잡지 마!”

아직도 톰에게 눌린 부위가 아팠다. 그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서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그런 상태인데 억지로 움직이려 하다 보니 더 괴로웠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기침을 하는 동안 어느새 아이작에게 반쯤 안긴 상태가 되어 있었다. 마리아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마기휼의 눈물을 닦아 내고는 손가락 위에 혀를 댔다.

“달콤한 맛이야.”

마리아는 마기휼의 뺨에 한 손을 대고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나의 귀여운 마기. 거칠게 대해서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이래야지만 확신을 품을 수 있었으니 말이야.”

“마기라. 귀여운 이름이로군.”

“그편이 훨씬 더 귀엽지? 후훗.”

마리아는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가늘게 휘었다. 머리카락이 짧아진 만큼 전보다 더 귀여워진 것 같기는 하지만 호감이 생기진 않았다.

왜 멋대로 뒤에 글자를 빼서 부르는 거야. 내 이름은 마기휼이란 말이야. 내 몸 멋대로 만지지 말고 더듬지도 마. 너희들이 그렇게 막 건드릴 수 있는 몸은 아니란 말이야. 빌어먹을 젠장.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그렇게 아랫입술을 깨물면 안 돼. 아프잖아.”

아이작의 손이 턱 아래로 내려와 피부를 슬슬 문지르자 마기휼은 진저리를 쳤다. 정말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걸 확인한 마리아는 소리 내 웃었다.

“아이작. 네가 이렇게 거부를 당하다니. 처음 있는 일 아니야?”

“그렇군. 그래서 색달라.”

아이작은 마기휼의 몸을 더 강하게 끌어안고 그의 목덜미로 얼굴을 묻었다.

“억지로 취해서 내 걸로 만들고 싶어져. 처음 봤을 때부터 땡겼었는데 말이야.”

“그만둬. 소중한 몸이야. 함부로 손댔다가 문제 생기면 네가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쪽을 두고 주고받는 말들에 마기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질렸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화가 나서 대번에 험악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런 젠장, 빌어먹을―!”

“그런 험한 말을 하면 안 돼. 안 좋다니까.”

마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정말 끔찍했다. 조금만 몸이 수월한 상태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이런 일은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빌어먹을! 라울 넌 어디에 있는 거야?!

마기휼은 가슴을 더듬는 손길을 피해 옆으로 몸을 돌렸다.

탕- 하는 소리가 공기를 가로질렀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마기휼은 분명히 들었다. 눈을 뜨고 옆을 돌아봤다. 그러자 당혹스러운 듯 눈을 크게 뜬 마리아가 보였다.

조금 전 입가에 머금은 여유로운 미소는 오간 데 없었다. 안색을 굳힌 채로 있던 그녀는 천천히 눈을 내리떴다. 그녀의 오른쪽 어깨 쪽으로 동그란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그 점의 면적이 점점 확산되면서 옷 전체로 퍼져 나갔다.

총에 맞은 건가. 그러면 도대체 누가―.

마기휼은 고개를 길게 빼 마리아의 등 뒤쪽을 쳐다봤다. 마리아도 총에 맞은 부위를 감싸고는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긴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특징은 달라져 있지만 그 얼굴은 한번 보면 쉽사리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라울을 확인함과 동시에 마리아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라울, 네놈!”

마리아의 외침과 동시에 라울이 재차 총을 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얼굴을 스치고 날아간다. 헛숨을 들이킨 마리아는 라울을 노려봤으나 아이작이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일단 피하자.”

“이것 놔! 내 저놈을 갈가리 찢어버리겠어!”

마리아가 발작을 일으키려는 순간 아이작이 망토를 들어 그녀의 몸을 가렸다. 탕탕- 하고 총알이 날아왔지만 망토에 닿는 순간 바로 퉁겨져 나갔다. 망토의 말도 안 되는 효능을 확인한 라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는 총을 내리고 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검을 빼내기가 무섭게 톰이 커다란 상자를 들어 라울에게 집어 던졌다.

날아오는 상자를 피해 옆으로 몸을 물린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이 보였다. 라울은 그 뒤를 쫓지 않았다. 라울은 마기휼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몸을 안아 들었다.

“마기휼. 정신 차려.”

고개를 위로 들게 하고 뺨을 두어 번 두드렸다. 처음에는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었으나 계속해서 뺨을 두드리자 눈을 뜬다. 반쯤 떠진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는 걸 확인하며 라울은 마기휼의 턱을 잡아 위로 들게끔 했다.

“괜찮나?”

“……라울?”

“그래. 나다. 어디가 안 좋은 거지?”

물으며 라울의 눈이 마기휼의 전신을 주욱 훑어봤다. 굳은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 라울은 이쪽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냥 보여주는 표정만이 아닌,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중얼거리는 순간 갑자기 긴장이 턱 내려앉는다. 그리고 아이작과 마리아 때문에 잠시 동안 구석에 밀어 두고 있었던 불안한 감정이 폭발했다.

마기휼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울먹거렸다.

“빌어먹을-.”

필사적으로 참으려 했지만 나오는 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갑자기 감정이 격해진 듯 흐느끼는 마기휼의 모습에 라울의 안색이 굳어졌다. 가만히 마기휼을 바라보던 라울은 이내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 마기휼이 매달려 온다.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르며 울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리아 일당을 쫓아야만 했다. 여기서 머뭇거리고 있는 건 방해가 되는 일일 뿐이었다.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고 마기휼을 떨어뜨린 후 움직여야 한다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행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라울은 들고 있던 총을 허리춤에 밀어 넣고 왼쪽 손을 위로 들었다. 가느다란 팔찌에 입을 댔다.

“들리나?”

[네. 들립니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상대방이 대답을 하자 라울도 바로 명령을 내렸다.

“작전을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군인의 대답을 들은 후 라울은 팔찌에서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안겨있는 마기휼의 등에 천천히 양손을 둘렀다.

마기휼이 안겨 오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라울, 하고 이름을 부른다. 별거 아닌데도 이상했다. 심장 한쪽이 따끔거린다. 묘한 감각에 라울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조금 더 마기휼을 강하게 끌어안고 그의 목덜미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품에 폭하니 안겨 오는 가느다란 사내의 몸을 품에 안은 채로 라울은 눈을 감았다. 급박한 상황이고 이럴 여유가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지금만큼은 이렇게 있고 싶었다.

암시장의 가운데 쪽 큰길을 따라 이동하면 그 끝에 2층짜리 건물이 있었다. 검은 철로 이루어진 곳은 규모가 커도 겉으로 보기에 단조로운 디자인으로 된 건물이었다. 하지만 암시장을 이용하는 이들은 그 건물 속에 있는 자들을 두려워했다.

검은색으로 된 2층짜리 건물. 그 속에는 이 암시장을 운영하는 자들이 있었다. 모두가 그들을 지도자라 불렀고, 가장 중심에 있는 이가 최고 지도자 또는 수령으로 불리었다.

옥상 쪽의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다섯의 사내들이 바깥으로 나왔다. 하나같이 검은 망토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바깥으로 나와 아래 상황을 살폈다. 이제 시작 단계였기 때문에 소란스러웠다. 정리가 되지 않은 시장은 떠들썩했다. 그런 틈을 타서 문제가 발생했다. 총성이 들렸고 하늘에서 이상한 기류가 포착되었다.

한 번 취소가 됐으니 이번에는 제대로 치르고 싶었다. 그걸 방해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가운데에 선 최고 지도자는 불쾌함이 담긴 억양으로 말했다.

“협정을 깨트리는 자가 있군.”

“아이작이 불러들인 이들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말에 최고 지도자는 그쪽을 돌아봤다. 검은 망토 아래로 지나치게 어린 얼굴과 짙은 핏빛을 띤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이작은 오래전부터 이곳의 사람이었다. 그를 이번 문제로 인해 쫓아내야 하는 건가.”

“그가 데리고 있는 자들은 지나치게 자유롭습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하는 말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작은 지금 분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이쪽의 몫이었다. 이 시장을 이용하는 모두에게 그 피해가 전가될 거다. 안 될 말이었다.

“우리는 단지 시장으로만 존재할 따름이야.”

최고 지도자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다. 최고 지도자는 고개를 숙인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물건을 팔고, 거래를 하고, 저들에게 환상을 제공하고, 일순간의 꿈을 꾸게 해주는 대가로 돈을 얻고 그걸로 다음의 시장을 준비한다. 그뿐이다. 때문에 규칙은 지켜져야 하는 거다. 분란을 일으키는 이들은 붙잡도록 해라.”

“말씀대로 실행하겠습니다.”

다섯 사내들의 뒤를 따르던 사내들 중 하나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달이 하늘 높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검고 날씬한 선체를 지닌 군함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군함의 겉면에는 하얀 매가 또렷이 그려져 있었다.

하얀 매. 노르디아 연방 소속, 중앙군의 군함이었다.

땡땡땡-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거리를 가득 채우는 소리에 막 장사를 시작하려 했던 이들은 뭔가 싶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보이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암시장이 열리는 날에는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약속이 있었다. 군함이나 다른 나라가 간섭을 할 수 없다는 조약 말이다.

그런데 저건 또 뭐야. 야외에 자리를 펴놓고 술을 마시던 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검은 밤하늘을 타고 내려오는 정체불명의 배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실은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강한 바람과 묵직한 동력음을 듣고도 마냥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순 없었다.

한 사내가 “말도 안 돼.”라고 중얼거렸고 동시에 노르디아 중앙국 군함의 옆구리가 열리고 가느다란 철심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내들의 얼굴이 똥을 씹은 듯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착함하고 있잖아! 모두 자리를 뜬다!”

“물건 챙기고 빨리 일어나! 어서! 오늘 장사는 쫑이다!”

“이런 니미럴! 1베리도 못 벌었다고!”

“이거 날짜 지나면 팔 수도 없는 물건인데 대체 어쩌라는 거야!”

갑자기 자리를 뜨게 되어 다들 난리도 아니었다. 은근슬쩍 자신의 것이 아닌 물건을 집어 드는 이들도 있었고 그로 인해 여기저기서 큰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 사이를 지나 달려가는 무리가 있었다. 좁은 길 쪽으로 달려가던 마리아는 머리카락을 움직이는 거센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군함이 여러 대 보였다. 저것 모두가 착함할 필요는 없었다.

“돈지랄은.”

중얼거린 마리아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바로 몸을 돌렸다. 아이작이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이쪽보다 움직임이 빨랐기 때문에 순식간에 저 앞으로 나아간 상태였다.

마리아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힘들었다. 총에 맞은 어깨가 욱신거렸다. 통증이 강했던 탓에 그녀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러다 중간에 다리를 삐끗해서 비틀거렸다. 넘어진다고 생각을 하는 순간 뒤에서 나타난 손이 그런 마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안아 올려진 마리아는 톰을 내려다봤다.

“고마워.”

마리아의 말에 톰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진지한 얼굴이 된 톰은 아이작의 뒤를 열심히 쫓았다. 금방 따라잡아 옆에 붙어 선 톰을 발견한 아이작은 씨익- 하고 웃었다.

“편하게 오는군.”

톰에게 몸을 기댄 마리아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아이작에게 윙크를 날렸다.

“나는 미인이잖아. 땀 내면서 달리는 건 어울리지 않지.”

마리아의 말에 아이작은 웃었다. 핏- 하고 소리를 낸 그는 고개를 돌렸고 막 배가 밀집되어 있는 곳에 도달하기 전에 그 앞을 검은 망토의 사내들이 막아섰다. 그들에 대해서 모르진 않았다. 아이작은 발을 멈추고 앞을 막은 자들을 노려봤다.

뭣도 모르고 그 부근으로 왔던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재빨리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연스럽게 그 공간에는 아이작, 마리아, 톰과 검은 망토를 쓴 이들이 대치를 한 상태로 있게 되었다.

“이게 누구신가?”

가장 앞에 있던 아이작이 먼저 말을 걸며 입술 꼬리를 올려 보였다. 나름 친근함을 풍기는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맞은편에 선 사내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아이작. 수령께서 널 찾으신다.”

“말이 지나치게 짧은데?”

날카로운 목소리에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톰에게 거의 몸을 기댄 채로 마리아는 이를 갈며 내뱉듯 말했다.

“네놈 따위가 아이작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주제를 알아야지.”

“마리아, 네놈은 낄 자리가 아니다.”

“뭐라고?”

마리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기분 나쁨을 숨기지 않는 그녀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 미묘한 움직임을 감지한 사내들 사이로 긴장이 서렸다. 마리아는 이를 갈았다. 팽팽한 신경전을 중재한 것은 아이작이었다.

“그만둬라.”

그만두라는 말에 마리아는 당장 아이작을 쳐다봤다. 선글라스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가 굳어 있었다. 말 들어. 그리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아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를 물러나게 한 아이작은 앞에 선 이들을 바라봤다.

“그래. 수령께서 왜 날 찾으시는 거지?”

“너는 암시장의 계율을 어겼다. 이곳의 기강을 흩트리고 문제를 일으킨 너에게 처벌을 내리실 거다.”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군. 나는 암시장 내의 그 어떠한 계율도 어긴 적이 없어.”

“노르디아의 군함을 이리로 불러들인 게 너의 탓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내가 불러들인 게 아니라 놈들이 날 쫓아온 것뿐이다.”

아이작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 좋게 보이나 그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사내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말장난을 할 기분이 아니다. 얌전히 우리의 뒤를 따라라.”

뒤에 서 있던 다른 검은 망토의 사내들이 앞으로 한 발씩 내디뎠다. 그걸 확인한 아이작의 선글라스 너머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마리아. 네 말대로야.”

분한 듯 이를 악문 채로 있던 마리아는 중얼거림을 듣고는 그쪽을 바라봤다. 정면을 바라보는 아이작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놈들은 지나치게 말이 짧아.”

그 순간 마리아가 움직였다. 톰의 등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나 싶더니 소형총을 끄집어냈다. 정확히 4번의 총성이 울리고 검은 복면을 한 사내들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미처 방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손놀림이었다. 정확하게 모두의 심장을 관통한 마리아는 손가락 사이에 총을 끼고 두어 번 돌렸다. 그리고 비릿한 미소를 짓는 모습에 바닥에 손을 짚은 채로 있던 이가 이를 갈았다. 이내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낸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세상은 변한다.”

아이작은 앞으로 걸어 나가며 양팔을 넓게 벌렸다.

“암시장이 언제까지 절대 권력을 지닐 것 같은가. 군함 몇 대 떴다고 벌벌 떨면서 나를 붙잡으러 오다니. 예전의 명성에 비하면 참으로 하찮아졌군.”

아이작은 선글라스를 위로 올렸다. 하얀 눈동자 안쪽으로 뚜렷한 살기가 서렸다.

“권력에 대항하려 하지 않고 빌붙어 타협을 보려는 네놈들은 이미 쓰레기다.”

아이작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자는 입을 반쯤 벌렸다. 그는 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단검을 꺼내든 그는 스스로 제 가슴에 그것을 박아 넣었다. 피를 토해 내며 쓰러지는 자를 지나친 아이작이 빠른 걸음을 옮겼다. 마리아도 총을 허벅지 벨트 안쪽에 밀어 넣고 뒤를 쫓았다. 세 사람은 배가 모여 있는 곳으로 사라져 갔다.

군함이 완전히 착지한 것은 아니었다. 아래로 사다리를 내렸고, 그걸 붙잡고 라울이 위로 올라왔다. 거의 끝까지 올라온 라울의 손을 잡아 군함 안으로 무사히 들어올 수 있게 한 군인은 밝은 얼굴이었다.

“라울 대령님!”

암시장 안으로 라울이 먼저 들어갔을 때에는 걱정도 많이 했는데 이렇게 무사한 모습을 보게 되어 좋았다. 하지만 군인은 라울의 한쪽 어깨에 걸쳐진 존재를 확인하고는 움찔했다. 눈을 감고 있는 그는 분명 마기휼이었다. 왜 저런 모습인가 싶었던 군인은 금세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당하신 겁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 군인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라울은 사다리를 타느라 어깨에 걸쳐 두었던 마기휼을 살살 끌어내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를 안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추격에 들어간다.”

“말씀하기 이전부터 신호를 잡고 있었습니다. 1분 전에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쏜 총알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고가의 추적 장치가 달려 있었다. 그가 총알을 빼내기 전까지 그것은 라울에게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터였다.

“위치는?”

“레드존입니다.”

“예상대로군.”

그대로 이쪽을 끌고 가려는 건가. 눈에 훤히 보이지만 까딱 잘못했다가는 휘말릴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 둘 필요가 있었다.

“바로 뒤를 쫓도록 한다. 난 잠시 방에 다녀오겠다.”

“네. 알겠습니다.”

라울은 마기휼을 안아 든 채로 안쪽으로 사라졌다.

다른 때라면 바로 중앙실로 올라갈 라울이었다. 그런데 방으로 가는 건가.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라울이 지시한 사항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군인은 먼저 위로 올라갔다.

라울이 누군가를 안아 들고 있는 걸 본 일이 없었다. 때문에 가다 마주치는 이들은 하나같이 놀란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라울이 품에 안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기는 해도 다가와 먼저 묻지는 않았다.

지금 자신이 취하는 행위가 소문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라울은 마기휼을 내려놓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온 라울은 당장 마기휼을 벽 쪽에 붙어 있는 일인용 소파에 앉혔다. 고개를 숙인 마기휼은 기다렸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기휼. 손을 치워라.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말을 하자 더 몸을 움츠린다. 마치 그 누구도 자신을 보지 말았으면 하는 몸짓이었다. 그 행동에 라울의 표정이 덩달아 굳어졌다.

“마기휼. 이런 건 너다운 일이 아니야.”

“……아버지가.”

중얼거림에 라울의 미간으로 주름이 만들어졌다.

마기휼은 아버지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했다. 그런데 새삼 그것 때문에 이리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가. 이상했다.

마기휼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드러난 일그러진 얼굴을 확인한 라울은 숨을 들이켰다. 마기휼은 울먹거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내 동생 때문이야.”

“그게 무슨 말이지?”

“레이라가 내 동생의 아이래.”

라울은 가만히 있었다.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를 하고 있지만 그건 분명 이쪽을 배려하기 위함일 거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다 싶어 저리 경직된 얼굴을 하는 것뿐이었다.

마기휼은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정말 말도 안 되었다. 있을 수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나는 도대체 뭘 한 건가 싶었다. 가휼과 그 여자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데 나는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거야.

질끈 감긴 마기휼의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나?”

마기휼은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다는 투였지만 라울은 재차 물었다.

“누가 그 말을 했지? 그게 확실한 건가?”

“몰라.”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크게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는 재차 얼굴을 가리려 한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저 혼자서 삭히려 들고 있었다. 그런 행동이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라울의 목소리가 커졌다.

“마기휼!”

“모른다잖아!”

라울이 목소리를 높이자 그에 자극을 받은 듯 마기휼의 목소리도 한결 커졌다.

“빌어먹을! 젠장!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어서도 안 돼!”

마기휼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점점 흥분되는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다. 정말 화가 났다. 누구에게로 향해지는 화인지 알 수 없었다. 몸속에서 날뛰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커다란 손이 마기휼의 어깨를 붙잡았다. 잡힌 채로 고개가 위로 휙 올려진다. 벽으로 밀쳐진 마기휼은 눈을 크게 떴다. 떠진 눈동자로 눈물이 떨어진다. 라울은 그 눈물을 혀로 받아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입술을 겹쳤다.

입술을 모두 덮어버리고 혀로 사악 핥았다. 커다란 손이 뒷목을 감싼 채로 있었다. 그 뜨거운 손길에 마기휼은 저도 모르게 조금 더 라울에게 달라붙었다. 그렇게 입술만 댄 채로 있다가 라울이 떨어졌다.

천천히 얼굴이 떨어지고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로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던 마기휼은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라울은 재차 마기휼의 뺨에 입술을 댔다. 뺨에 닿는 부드러운 입술에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

뺨에 머물러 있던 입술이 점점 위로 올라간다. 눈꺼풀 위를 덮으며 물기를 빨아들인 후, 입술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금 입술을 눌렀다.

닿은 입술이 뜨겁고 부드러웠다. 그러는 동안 차차 마음이 안정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지금 얼굴이 괜찮을까- 하는 것이나, 눈물 콧물로 완전 엉망진창인 거 아니야. 그런 생각들 말이다.

문득 정말 그러면 어쩌나 싶었다. 라울 이놈은 이렇게나 멀쩡한 상태인데 가뜩이나 추한 이쪽이 이상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면―.

그 순간 마기휼은 숨을 들이켰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라울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이, 이제 그만해.”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꼴사납다.

마기휼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제는 괜찮아. 그러니까―”

“확실한 말은 네 동생에게서 들어야 할 거다.”

커다란 손은 여전히 얼굴을 감싼 채로 있었다. 그 상태로 마기휼은 옆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남의 입에서 전해지는 말은 결국 거짓이야. 그러니까 네 동생을 만나 확실하게 들어봐. 그러고 나서 화를 내도 늦지는 않는다.”

라울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 조언을 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들었지만 입은 저도 모르는 사이 부정적인 의미를 토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을 믿지 않나?”

마기휼의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마기휼은 잠자코 자신의 동생 가휼의 얼굴을 떠올렸다. 늘 착하고 마음이 여리던 아이였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이쪽으로 달려와 의논을 하던 아이. 10살이 되어 소변을 지렸을 때에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장 먼저 찾은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작은 손으로 필사적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종종걸음을 옮기던 가휼.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일 년간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마음이 쓰이는 동생이었다. 비록 지금은 이쪽보다 덩치가 좋았지만 그래도 동생은 동생이었다. 마기휼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휼을 믿어.”

“그러면 기다려라. 지레짐작하고 분노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

단호한 말에 이상할 정도로 안심이 된다. 묵직하게 누르고 있던 뭔가가 사라지는 걸 느끼며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앞에 있는 라울을 바라봤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할 수 있지.”

“경험담이다.”

“…….”

뼈가 있는 한마디였다. 때문에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졌다.

마기휼은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내고 축 처진 채로 있었다. 그의 양손이 기운 없이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는 걸 확인한 라울이 손을 움직였다. 마기휼의 손을 잡으려던 찰나 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령님.”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마기휼과 라울은 동시에 닫힌 문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얼굴 상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마기휼은 급히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아 냈다. 그런 마기휼의 앞으로 손수건이 내밀어진다. 밋밋한 하얀 손수건이었다. 갑작스러운 친절에 당황한 듯 주춤하던 마기휼은 이내 그걸 받아 들었다.

마기휼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내는 걸 확인한 후, 라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먼저 나갔다.

“무슨 일인가?”

묻는 말에 서 있던 군인이 긴장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암시장 최고 지도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이라고?”

“통신으로 들어왔습니다. 대령님과 직접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계속 기다리고 있겠다 했습니다.”

폐쇄적이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암시장의 우두머리였다. 그런데 음성으로 연락을 취해 온 건가. 라울은 순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쿵- 하는 음향과 군함이 흔들렸다.

소리를 지르며 군인이 바닥으로 쓰러졌고 라울은 벽에 한 손을 짚은 채로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처음 한 번만 흔들림이 있었을 뿐이지 금방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아래로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고 들렸다.

[대령님. 괜찮으십니까?]

복도에 걸린 스피커에서 들리는 소리에 라울은 벽면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나는 괜찮다. 무슨 일인가?”

[암시장 선착장에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배가 운집해 있기 때문에 연쇄적으로 폭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단은 암시장에서 떨어지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 폭발에 휘말리지 않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통신을 끊고 라울은 벽에 손을 기댄 채로 집중했다. 군함의 흔들림은 심하지 않았다. 아래의 폭발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군함이 흔들릴 때 바닥에 쓰러졌던 군인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령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은 거냐.”

“물론입니다.”

대답을 하며 자세를 바로 하기는 했지만 미미하게 구겨진 표정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런 군인을 흘겨본 라울은 몸을 돌렸다. 올라가야 하는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에 군인이 의아해져 물었다.

“어디를 가십니까?”

묻는 동안 라울은 이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물으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 앉아 앞으로 다리를 주욱 뻗고 있는 마기휼이 보였다. 막 코를 풀려 했던 건지 손수건으로 감싼 코를 붙잡고 있던 마기휼은 라울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무사해.”

코를 붙잡고 있어 목소리는 이상했지만 표정은 괜찮았다. 아까에 비해 확연하게 좋아진 얼굴색이었다. 그걸 확인한 라울은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라울이 나가고 난 후, 마기휼은 코를 풀까 말까 하다가 참았다. 그리고 눈물로 얼룩덜룩해진 손수건을 잘 접어 품 안에 밀어 넣고는 그대로 코를 삼켰다.

두어 번 코를 삼키던 마기휼은 벽에 몸을 기댔다.

“지친다.”

정말 지쳤다. 손가락 하나 까닥이고 싶지 않았다. 자고만 싶었다. 하지만 잘 수 없는 것은 바깥에 있는 라울이 바쁘기 때문일 터였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한 가지 엄청나게 고민을 하고 있던 것이 라울의 도움을 받아 흐지부지해졌다. 그래. 정확하게 하려면 일단은 가휼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했다. 괜한 걸로 오해를 해 가휼을 잡는다면 얼마나 억울할 텐가. 형제 사이는 수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틀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진짜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눈을 내리뜬 채로 있던 마기휼은 조금 더 눈동자를 옮겼다. 의미 없이 데굴거리고 있다가 조심스레 아래를 살폈다. 그리고 날씬하게 들어간 배를 확인하고는 마른 침을 삼켰다. 숨을 죽인 채로 가만히 있다가 손을 내려 배를 슬슬 문지른다. 그 얼굴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중얼거림이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마기휼은 재차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입을 다문 마기휼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더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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