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2화 (12/27)

RED ZONE 3

레드존

네르시온

Contents

#12

#13

#14

#15

#16

#12

거리를 돌아다니는 청년은 갈색 피부에 보랏빛 눈동자를 지녔다. 평범한 인상이었지만 호리호리한 몸을 감싸는 옷은 고급이었고,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댕기 머리가 그의 분위기를 한결 상큼하게 했다. 하지만 그의 양손에는 짐이 한가득이었다. 모두 고급 상점가에서 산 것이 분명한 선물 세트뿐이었다. 거의 얼굴을 가릴락 말락 할 정도의 상자를 양팔에 올린 마기휼은 앞서 걸어가는 라우젝을 흘겨봤다.

작은 주머니를 손가락에 걸고 빙글빙글 돌리는 그 얼굴은 여유로웠다. 콧노래를 부르며 쇼핑에 푹 빠진 그와 달리 뒤를 쫓는 마기휼의 얼굴에서는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윽고 저기 앞으로 마차가 나타나자 마기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걸음이 빨라졌다. 단숨에 마차에 도착한 마기휼은 들고 있던 상자를 안에 집어 던졌다. 이미 상자로 절반가량이 채워진 채였다. 홀가분해진 손을 털며 마기휼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여자와도 쇼핑을 한 적이 없던 자신이 사내놈의 짐 시중이나 들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피곤해 죽겠다는 듯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한숨을 쉬는 마기휼의 모습을 흘깃 보던 라우젝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 다른 곳으로 또 가 볼까?”

“또 어디를 간다는 겁니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합- 하고 입을 다문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이쪽을 보는 라우젝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필요한 물건은 다 사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슬슬 들어가시지요.”

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마기휼이 봤을 때 라우젝이 산 모든 물건이 쓸모가 없는 거였다. 사내자식인 주제에 왜 이렇게 치장할 것들을 많이 사 대는 건지 모르겠다. 이건 생긴 것만 계집애 같은 게 아니라 그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이쯤 해서 다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와 바깥으로 튀어 나가려 했다. 그런 마기휼을 위아래로 흩어보며 라우젝은 빈정거렸다.

“이제 슬슬 들어가면? 너도 들어갈 거야?”

“아니. 전 모처럼 나온 거니까 조금 더 돌아다녔다가―”

“그걸 라울이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

입을 다문 마기휼의 얼굴 표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미간 사이로 생긴 주름이 그의 기분 상태를 알려준다. 왜 지금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오는 건데. 그리 묻고도 싶은 얼굴을 하는 마기휼이었으나, 라우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보다 방금 나한테 큰소리친 거였어?”

“아니요. 제가 언제 큰소리를 쳤다고 그러십니까?”

“아까 나한테 큰소리쳤잖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큰소리 같은 건 치지 않았습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마기휼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댔다. 그리고 손을 마주 잡은 채로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그 웃음에 라우젝의 한쪽 눈썹이 위로 찬찬히 올라갔다. ‘정말일까?’라고 묻는 눈빛에 한껏 올라간 마기휼의 입술 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모처럼 나온 거였다. 그런데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라우젝의 앞에서 이렇게 간도 쓸개도 다 내놓을 것처럼 굴고 있는 거였다. 동시에 자신이 왜 이런 처지가 된 것인지 참으로 분통이 터졌다.

라울과 그렇고 그런 일이 생긴 지 이제 겨우 일주일 정도가 지난 것 같았다. 할 때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고 다음 날까지도 별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하게 한 후라 이틀째부터는 전신 근육통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3일째 저녁부터 점점 이성이 돌아왔다. 그리고 본인의 임신 상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한 방에 홈런을 날린 거면 어쩌나 싶었다. 지금은 날씬하게 잘 빠진 배가 어느 순간부터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면 어쩌나 싶어 초조해 있는 동안 점점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라울도 그 많은 생각에 더해졌다.

두 사람이 자게 된 것에는 여러 상황들이 복잡하게 개입이 되었던 거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치고, 앞으로는 안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한 말에 라울은 재차 그 일을 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래서 라울이 보이면 몸을 움츠리기도 하고, 일부러 피하기도 했다.

그렇게 피해 다니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게 되었고 저택을 나가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를 있어 봤지만 저택을 나가자고 생각을 해도 그걸 실행으로 옮기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라울이 그답지 않게 일주일 내내 집안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이쪽이 움직일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떡하니 나타나는 것도 마기휼의 발목을 붙잡는 요소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보다는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저택은 가만히 있는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몸을 옭아매고 있는 것 같았다.

저택 안에는 오르베도 없고, 라우젝이 나타나서 이쪽을 건드리지도 않고 조용한 상태이다 보니 살짝 방심한 것도 없잖아 있었다. 그렇게 있다 보니 점점 나른해져서 스스로의 의지로는 저택 밖으로 나갈 의욕이 생기지 않는, 그런 묘한 상황 속에 있었다. 그러다 마침 오늘 낮에 라울이 여왕의 부름을 받아 왕국으로 들어가고, 라우젝이 갑자기 나타나 쇼핑을 가자는 말에 이렇게 따라 나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껄끄러웠으나 결국에는 나오게 되었다. 나가고는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아 누군가 같이 나갈 것을 권하길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대신에 라우젝은 여러 가지 단서를 붙였다.

자신의 뒤만 쫓아올 것, 사는 물건을 들어줄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웃는 얼굴을 잊지 말 것, 그리고 덤비지 말 것. 상당히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요구 상황을 줄줄이 내뱉는 것에 마기휼은 배알이 꼴렸다. 그래 봤자 결국 이렇게 따라 나와버렸지만 말이다.

나도 참 멍청했다. 왜 라우젝을 따라온 건지 모르겠다. 이 인간도 오르베처럼 만만찮은 성격인데 말이다. 따라나섰다가 괜한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만약 라울이 알게 되면 뭐라는 거 아니야.

아니지. 그놈이 나가지 말라고 한 건 아니잖아. 비록 어디를 가려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앞에서 알짱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놈이 나가지 말라고 해서 내가 얌전히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난 자유의지를 지닌 이 노르디아의 국민이라고. 누가 나에게 뭐라 할 수는 없는 거야.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라고. 암. 그렇고말고. 여왕이라 할지라도 내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수는 없는 거라며 마기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내 그 주먹이 너무도 초라하게 보여 아래로 내렸지만 말이다.

나 진짜 이상해진 것 같아.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네.

라울이랑 한 것은 그냥 사고였다고. 나쁜 추억으로 남지 않은 사고. 그냥 잊어버려. 라울이 이상한 말을 한 건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났다 해서 라울 그놈과의 관계에 달리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이 그런 취급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빚 때문에 신부로 그놈에게 팔려 온 상황이 있다 한들,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냥 쿨하게 넘겨버리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미간 사이로 진한 주름을 만들었다.

“저기로 가 볼까?”

이번에는 또 뭐야. 그런 느낌으로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이는 2층짜리의 아기자기한 건물을 확인하고는 숨을 삼켰다.

저건 또 뭐야.

숙녀들이 좋아할 법한 메르헨 풍의 건물은 외관도 깜찍하기 그지없었다. 차와 케이크를 파는 장소였다. 실제로 어린 소녀 둘이 들어가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아연한 상태로 물었다.

“저 가게는 또 뭡니까?”

“내가 자주 가는 가게야.”

잘도 그러시겠네. 그런 말이 목구멍 바로 앞까지 나왔다.

라우젝은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었다. 이쪽을 데리고 나올 때부터 계속 저런 상태였던 것 같다. 때문에 지금 진심으로 저러는 건지 단순히 장난인 건지를 알 수 없었다. 실제로 라우젝이 자주 가는 가게인지 아닌지 따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저 얼굴 보고는 아무것도 확신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쪽을 골리려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역시나 괜히 따라왔다.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바이바이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정말 그리해버릴까 싶어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라우젝이 마기휼 쪽으로 몸을 돌렸다.

“혹시 다른 곳으로 내뺄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은 안 하고 있습니다.”

단호한 태도로 말을 하자 라우젝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과연 그럴까.’ 그리 말하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혀를 찼다.

“가고 싶으면 가도 괜찮아. 하지만 라울은 네가 여기서 발을 옮기는 순간 바로 옆에 서 있을 거야.”

“그―”

놀란 마기휼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오른쪽을 보고 왼쪽을 봤다. 라울은 분명 없었다. 그래도 모르는 일인지라 주변을 주욱 둘러본 그는 마지막으로 라우젝을 노려봤다.

“그 무슨 기분 나쁜 소리를 하는 겁니까!”

“하지만 그게 사실이니까.”

이쪽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린 라우젝은 먼저 몸을 돌렸다. 일부러 이쪽을 보지도 않았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느낌이었다. 너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건 자유지만 그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거였다.

마기휼은 거리를 주욱 둘러봤다.

성에 들어간 놈이 이렇게 빨리 나오지는 않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나는 놈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한 번 했다고 놈이 정말 자신의 무언가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가고 싶으면 가는 거야. 넌 그래도 돼. 자, 마기휼 용기를 내서 네 갈 길을 가자!

마기휼은 라우젝과는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주먹을 쥐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그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이내 중간에 걸음을 멈춘 마기휼은 고개를 위로 들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한숨을 쉰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

나 진짜 미치겠네. 내가 어떻게 되어버린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는 마기휼의 얼굴은 오만 생각으로 인해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거기에 앉아.”

주변의 귀여운 풍경 속에 라우젝은 잘 어울렸다.

미소년이라 위화감이 없는 것이었고, 이쪽은 아니었다. 실제로 여기까지 안내를 한 점원은 등을 돌리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키득거리고 웃는 소리에 마기휼의 표정은 더 굳어졌다.

입구에 서서 가만히 있던 것도 잠시, 마기휼은 커튼으로 문을 가리고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맞은편의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한 라우젝은 빈정거렸다.

“왜? 당장 도망갈 것처럼 굴더니.”

“……충분히 기분 이상하니까 너무 그렇게 건드리지 말아주십시오.”

“싫은데?”

그래.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냐. 그냥 괜한 일로 사람 속만 안 긁으면 그것으로도 다행일 텐데 말이야.

한숨을 쉰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그리고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우는 음식을 확인하고는 주춤했다. 작은 접시로 15개가 넘는 게 좌악 깔려 있었다. 조각 케이크들이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질렸다는 듯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뭐가 이렇게 많은 겁니까?”

“다 내가 먹고 싶어서 시킨 거야. 내가 먼저 맛을 본 건 먹어도 좋아.”

실제로 작은 조각 케이크 몇 개에는 딱 한입만 파먹은 흔적이 있었다. 그것도 가장 양이 적은 부분에 한해서 말이다. 라우젝은 포크를 들어 다른 케이크의 맛을 봤다.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새 조각 케이크였다.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맛을 보는 거야.”

“그렇게 맛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먹으라고요?”

“이건 내가 먹으려고 시킨 거야. 남이 무슨 상관이지?”

그러니까 이렇게나 다양한 새 조각 케이크의 맛을 한 번씩만 보고 그걸로 끝이라는 거냐? 너는 이렇게 한입씩만 먹은 걸 나더러 먹으라는 거고 말이다.

이게 더럽다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먹은 것을 이쪽이 못 먹을 건 없었다. 하지만 이건 안 되는 게 아닌가? 다 먹을 수 있을 것만 시켜서 먹어야 낭비도 없는 게 아니냔 말이다. 이렇게 조금씩 뜯어 먹으면 다른 사람들은 어쩌라고?

멍하니 있는 동안 벌써 조각 케이크 열 개가 그런 참담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모양새는 원래 그대로의 예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꼬랑지만 조금씩 뜯겨 있었다. 모두 라우젝이 맛을 본 것들이었다.

마기휼은 기가 막혀 죽을 지경이었으나 정작 그 일을 한 라우젝은 태연히 차를 마셨다. 홍차의 맛을 본 라우젝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진짜 어이가 없어서…….”

저 인간은 지하 감방 같은 곳에서 일주일 동안 굶어봐야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며 마기휼은 케이크 하나를 통째로 찍어 두 입에 나누어 먹었다. 입술에 묻은 건 엄지로 닦아 냈다.

고급 케이크였기 때문에 그 맛이 환상적이었다. 라우젝이 먹는 걸 보고 불만을 품고 있었으나 케이크의 맛을 보고는 많이 누그러졌다. 우물거리면서 입술 주변에 묻은 걸 닦아 내는 마기휼의 모습에 라우젝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제대로 포크를 사용해서 깔끔하게 먹도록 해.”

그래 봤자 조각 케이크였다. 이건 그냥 한입에 넣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리하고 입 안 가득 들어가 있는 케이크를 보여줄까 보다. 그러면 완전 난리 치면서 기절을 할까?

마기휼은 원체 개김 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에 바로 한마디 했다.

“이제는 남이 뭘 먹는 것도 참견하는 겁니까.”

“참견을 해야지. 너같이 망둥이 같은 녀석에게서 태어난 가문의 후계자는 원치 않거든. 조금이라도 다듬어진 상태에서 태어나는 아이어야지만 우리의 기대에 부응을 할 수 있지 않겠어?”

케이크를 찍던 마기휼의 손이 움찔하고 떨렸다. 마기휼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라우젝을 봤다. 본인이 한 말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 태연함에 기가 막혔다.

포크를 내려놓고 이마에 한 손을 짚은 마기휼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지금 상황에서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싶어서 곧장 본론을 꺼냈다.

“아이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임신하게 될 거야. 라울과 사이가 좋잖아.”

“하나도 안 좋습니다!”

“라울은 너를 좋아해.”

테이블을 내리치며 목소리를 높이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의외인 말을 들었다는 듯 그 상태로 굳어버린 마기휼을 확인한 라우젝은 넌지시 다음 말을 꺼냈다.

“너도 라울에게 아주 조금은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 틀린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목소리가 가라앉아서 나왔다. 이런 자신 없는 뉘앙스는 좋지 않았다. 마기휼은 목을 고르며 재차 차분하게 말을 했다.

“애초에 전 남색이 아니었어요. 전 노말이라고요. 몸이 이럴 뿐이지 지금까지 사귄 상대는 모두 여자였단 말입니다!”

“진심은 1g도 실리지 않은, 네 장난에 맞장구를 쳐주는 여자들뿐이었겠지.”

날카로운 지적에 마기휼은 말문이 막혔다.

달리 할 반박 거리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라우젝의 말은 계속되었다.

“어울려서 즐겁게 웃고 심각한 분위기는 한 번도 형성한 적이 없는 그런 여자들만이 너랑 어울릴 수 있었던 거겠지. 그건 사귀는 거지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안 그래?”

라우젝은 입을 다물고는 마기휼을 바라봤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미소를 짓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마기휼은 테이블 한쪽에 있던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그 수건을 구겨 테이블 한쪽에 던진 마기휼은 팔짱을 끼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초반에 라울 말고 댁이랑 사귀자고 말을 했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신데요?”

또 무슨 꿍꿍이인 건데. 이 자식아. 네가 이렇게 나오면 불길하다고. 기분 나쁘단 말이야.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자 라우젝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너를 위해서 라울이 오르베를 쫓아낸 것 같더라고.”

마기휼은 주춤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은 모양이었다. 다소의 경계심을 보이는 모습에 라우젝은 포크로 앞에 놓인 케이크의 크림을 살살 긁어 냈다.

“이번 일로 라울은 심경의 변화가 생긴 모양이야. 더는 자신의 문제를 다른 이들로 인해 해결을 보지 않으려는 결심이 선 것 같았어. 그래서 오르베를 쫓아내는 걸로 그 의지를 확고히 했지. 쫓겨난 건 오르베지만 모두에게 경고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두 번 다시 개입하지 말라는, 그리고 널 건드리지 말라는 메시지지.”

뒤의 말은 순순히 듣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솔직하게 인정을 할 수도 없는 부분이었고 말이다. 때문에 마기휼은 지금 당장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물었다.

“오르베가 쫓겨난 겁니까?”

“그래. 지인의 저택에 떡하니 들어가 여전히 여왕 노릇을 하면서 잘 지내는 모양이야. 하지만 라울에게서 쫓겨난 건 그녀에게 있어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은 일이라 화병이 나 쓰러져 있다는 말도 들었어.”

그런 일이 있었던가. 오르베가 보이지 않는 게 단순히 사고를 치고 나서 당분간 수습을 하는 차원에서 다른 곳에 가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 시끄러운 아이들이 며칠 동안 안 보였던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런데 왜 라울이 그녀를 쫓아내야만 했던 거지? 고모가 아니었나? 그럴 이유가 도대체 뭐지?

그 일 때문인가. 나에게 이상한 걸 먹인 것 때문에?

하지만 그래도 그건―.

“라울이 그렇게나 아끼는 너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라우젝을 쳐다봤다. 라우젝은 손가락 사이에 포크를 끼고 살살 돌려 댔다.

“정말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건지, 단순히 이쪽을 방심하게 했다가 뒤통수를 치고 싶은 건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사람을 너무 의심하네. 나는 손을 뗄 때에는 확실히 하는 사람이야.”

“과연 그럴까요.”

마기휼의 야유에도 라우젝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응시하는 눈동자는 맑은 빛이었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눈동자. 그것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라울이었다.

형제는 닮는다고 하더니. 이런 때에 그걸 확인받고 싶지는 않았는데.

다소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마기휼은 뒤로 몸을 물렸다.

동요하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다시 케이크나 먹을까 싶었는데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여자보다는 네가 나아.”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라우젝을 노려봤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다 까놓고 말해보자. 오르베 같은 고모가 집안에 있고, 성장하지 않는 이름뿐인 왕통인 나 라우젝이 있고, 남색인 라울이 있지. 그 어떤 여자가 와서 살고 싶겠어? 안 그래?”

“…….”

애초에 라울은 남자 취향이니까 여자가 와도 안을 수가 없잖아. 생각한 말을 내색하지 않으며 마기휼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 생각을 해보면 그 외에도 다양한 문제가 있었다.

장신에 준수한 용모를 지닌 사내들을 이끌고 다니는 라우젝과, 15살 정도의 분위기 비슷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기가 센 오르베. 그런 두 사람을 여자가 당해낼 수 있을까? 장담컨대 라울이 암만 자상하고 미남이라 할지라도 두 사람 때문에 당장 도망을 갈 게 분명했다.

그렇군. 그런 거로군. 확실히 보통 여자라면 견딜 수 없는 집안이야.

“그리고 이상하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

“안베르의 수도가 아닌 외곽으로 나가면 다양한 돌연변이를 볼 수 있어. 겉이 멀쩡해도 너나 라울처럼 드러나지 않는 종류의 변이가 있을 수 있지.”

살짝 욱했다. 자신의 몸에 관한 것이야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문제이니 지적을 당해도 화가 나지 않지만 라울은 아니었다. 그저 성적인 취향이 다를 뿐이 아니던가.

사내가 사내를 좋다고 하는 게 변이에 속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그저 개별적인 문제 상황일 뿐이었다. 미묘하게 일그러진 마기휼의 얼굴을 어찌 해석한 건지 라우젝은 말을 지속했다.

“그런 변이가 우리 안제크가 내에서도 이루어지는 거야.”

숨을 죽이는 마기휼을 똑바로 바라보며 라우젝의 입술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왕통이 뭔지 알아? 그건 바로 혈통이야. 노르디아 연방국. 여왕의 혈족들. 그 피를 이어받은 우리 미혼인 사내들을 가리켜 왕통으로 칭하지. 그중에서도 피의 농도에 따라 조금 더 대우를 받고, 덜 대우를 받아. 지금 이 시점에서는 라울이 가장 대우를 받는 왕통이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라야 했는지, 너는 알까?”

라우젝은 양손을 마주 잡았다. 그 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권력을 쥔 이들은 그 달콤함을 뱉어 내지 못해. 한번 맛을 보면 계속 입 안에 물고 싶은 거야. 권력이라는 건 사탕과도 같아서 커다란 때에 받아먹는 즐거움이 큰 만큼, 그것이 줄어들면 들수록 그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두려움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이지. 그래서 그들은 다른 맛의 커다란 사탕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야. 피를 진하게 하고 외부와 차단을 하고 저들끼리 똘똘 뭉치는 거지. 우리 부모님이 왜 돌아가셨는지 알아? 그건 바로 피가 너무 진하기 때문이었어.”

라우젝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내내 남을 조롱하고 내리깔고 무시했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다.

라울은 눈을 가늘게 떴다.

“피가 진해.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는 거야. 사탕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근친혼이 만연함에 따라 그에 대한 부작용 또한 대단하지.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오르베가 낳은 아이들은 하나같이 기형이었어. 그 남편은 요절하고 마지막으로 3살까지 키웠던 아이는 모든 구멍에서 피를 토해 내며 죽어버렸고 말이야. 나는 이렇게 성장하지 못하는 몸이야. 나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계속 이 모습으로 있겠지. 내가 태어나고, 내가 살아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나는 결코 높은 자리로 오를 수 없어. 내가 이렇게 저택 안에서 머무르며 라울을 괴롭히는 동안에는 내 성장하지 않는 몸에 대해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겠지만, 내가 라울처럼 일선으로 나서게 된다면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비난을 하겠지. 세간의 평판과 말들이 나를 죽이려 할 거야. 나는 그들에게 있어 당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숨기고 싶어하는 추악한 그들 모두의 치부이니까.”

라우젝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웃지 않은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무표정.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얼굴의 라우젝은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았다.

조금도 변하지 않는 얼굴.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는 늘 같은 얼굴일 거다. 그 끔찍함에 대해서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라울은 괜찮아. 성향이 다를 뿐이야. 아직까지 그는 건강해. 그런 그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는 더 건강할 테지. 때문에 무리수를 쓴 거야. 혈족 중에서 여자를 고르지 않고 임신을 할 수 있는 남자를 고른 거지. 남자의 몸은 여자와 달라서 DNA 조합이 반반씩 이루어지지 않아. 형성을 해도 아이의 대부분을 이루는 건 정자에 달렸어. 그걸 알기 때문에 네가 선택이 된 거야. 99%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75% 정도의 건강한 왕통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야.”

라우젝은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를 보는 순간 구역질이 밀려왔다.

아직은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는 대낮이었다. 그런데 묘한 오한이 들었다. 피부로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그 위에 한 손을 올렸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는 동안 라우젝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한 말을 들었으니 너도 말을 해봐야지. 그리 말하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있던 마기휼은 아주 재미없는 말을 끄집어냈다.

“라울은 여왕의 부군 후보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왕은 불임이야.”

말문이 막혔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아, 그런 건가.

스스로 중얼거리는 동안 라우젝은 눈빛으로 대답을 했다.

그런 거라고 말이다.

“병이 생겨 자궁을 통째로 들어냈지. 그걸 아는 사람들은 몇 안 돼. 어쩌면 이 비밀을 들은 넌 이 순간부터 척살 대상 1호에 올랐을지도 몰라.”

“…….”

척살 대상이니 뭐니 하는 건 크게 중요치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고, 그 존재에 대해 떠올려본 적도 없는 여왕의 불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이런 식으로 연결될 줄은 몰랐다.

여왕과 라울은 혼인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여왕은 불임이고 라울은 여자를 안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눈앞이 캄캄해진 마기휼은 라우젝을 바라봤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저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가 노르디아 다음 왕이 될 거야. 여왕이 되든가.”

라우젝은 웃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쓴웃음. 그는 스스로를 비웃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자체를 말이다.

“여자든 남자든 상관은 없어. 태어나기만 하면 돼. 그러면 그 아이는 무조건 노르디아의 주인이 될 거야. 대신에 너는 그 무엇도 주장해서는 안 돼. 네가 아이를 낳았다 해서 그에 관한 권리를 요구하는 순간, 너는 물론이거니와 네 가문은 그 날로 몰살이야. 존재 자체가 지워지게 될 거야.”

라우젝은 마기휼을 바라봤다.

이쪽이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나 본데 천만의 말씀이었다. 이런 상황. 그런 말을 들은 입장에 달리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마기휼은 굳은 얼굴을 한 채였다. 그걸 확인한 라우젝은 찻잔을 들었다.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이쯤에서 씨받이 노릇을 관두고 싶겠지만, 아이 하나 낳아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네가 낳은 아이로 인해 라울은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더 많은 걸 누릴 수 있을 거야. 본인이 지닌 재능을 200% 발현할 수 있게 되지. 라울을 사랑하지는 말고 필요한 것만 제공해. 그 외의 것들은 열외로 치도록 해. 그러는 편이 나을 거야.”

후룩거리며 차를 마신다. “역시나 식은 차는 맛이 없어.”라고 중얼거린 라우젝은 인상을 쓴 채로 찻잔을 내려놨다.

의미 없는 행위였다. 이 상황 모두가 이상하고 뒤틀려 있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네가 불쌍해서 그러지.”

내려놓은 찻잔을 멀찍이 밀어 놓았다. 이런 맛없는 건 먹고 싶지 않아. 그런 뉘앙스의 손길이었다.

찻잔에서 손을 뗀 라우젝은 마기휼을 흘겨봤다.

“너도 결국에는 이용당하다가 버려질 테니까. 그런 비참함을 알기에 이리 말을 해주는 거야. 나도―.”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다. 라우젝의 얼굴이 일그러지나 싶었을 때, 그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건 참담함에 전 중얼거림이었다.

“나도 19살 때까지는 모든 이들에게 기대를 받는 입장이었으니까.”

하지만 스무 살이 되고 스물한 살이 되고, 그리고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도 그의 외관에는 변화가 없었다. 약간의 동안. 그 정도로만 생각을 했던 이들은 서서히 라우젝의 몸에 대해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그가 더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해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는 즉시 갈아탔다. 라울에게로 말이다.

모든 것들이 라우젝 그에게 걸려 있었을 터였다. 그 모든 걸 빼앗긴 것이다. 라울에게 품는 그의 깊고 깊은 그림자에는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그래. 그런 거로군. 라우젝은 다 가졌다가 빼앗긴 자였던 거다.

라우젝은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 그는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눈빛을 던졌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기휼은 속이 답답했다. 쉽사리 편안해지지 않았다. 헛기침을 하고 물을 마셨는데 당장 기침이 나왔다. 손으로 그걸 막으며 라우젝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비웃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있었다.

마기휼은 냅킨으로 입술 주변을 닦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언을 하자면 지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때 나가.”

뒤를 돌아보는 마기휼의 눈동자는 날카로웠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그를 앞에 두고 라우젝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느긋한 미소를 던졌다.

“여기는 개미지옥이거든.”

라우젝은 손가락을 세워 허공을 눌렀다. 그리고 슈우욱- 하는 소리를 내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아래로 내렸다. 그 손가락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닿았을 때 보이는 표정과 눈빛. 그걸 보고 마기휼은 라우젝이 이쪽보다 훨씬 더 연상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람이라는 것도.

얼굴을 마주하기가 굉장히 껄끄러웠다. 마기휼은 걸음을 서둘렀다. 마치 도망을 치듯이 빠져나가야만 하는 지금 이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오로지 그 생각으로만 머릿속이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아버지 때문에? 아니었다. 그런 게 더 이상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것이 계기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원인은 되지 못했다. 정말 싫었다면 초반에 벗어났었을 거다. 그걸 질질 끌고 가 지금 이 상태로 만든 건 어디까지나 이쪽 책임도 있었다.

어리석었어. 내가 정말 멍청했던 거야. 그걸 깨닫게 되었는데 그 해결책은 무엇이 있을까? 지금이라도 벗어나? 도망을 가버릴까? 이 모든 것들에서?

그 순간 라울이 떠올랐다. 언제나 늘 같은 얼굴로 바라보던 사내. 하지만 그 눈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고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전하고 싶어했다. 자신은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걸어가던 마기휼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마기휼의 눈동자가 비치는 쪽은 한 건물의 구석이었다. 그곳에 어린아이 다섯이 주르륵 앉아 있었다. 낡은 옷을 입은 아이들은 쪼그리고 앉아 굉장히 불쌍해 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두 아이는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쳐 내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의 앞에는 조그마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 그릇 안에 동전 몇 개가 들어가 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허탈한 듯 웃었다.

저것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마기휼은 아이들의 앞에 가서 섰다. 아이들은 훌쩍거릴 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얼굴로 숨겨지지 않는 침울함이 전해졌다.

“너희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묻자 바로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 있는 마기휼을 발견한 아이의 눈동자가 글썽거렸다. 눈물이 맺히나 싶던 아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돈을 벌고 있어요.”

“돈을 벌고 있다고?”

마기휼은 그릇 안을 제대로 살폈다. 동전 몇 개가 들어 있기는 하나 그리 큰돈은 아니었다. 이걸로는 오늘 하루 묵을 여관비도 못 되었다.

“왜 이래? 색다른 장난 거리가 필요해진 거냐?”

“장난이 아니에요. 마담이 더 이상 우리는 필요가 없데요.”

기운 없는 중얼거림에 옆에 가만히 있던 아이들도 하나, 둘씩 말을 꺼냈다.

“우리는 무능하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다른 아이를 고르겠다고 했어요.”

“마담에게 버려졌어요. 바깥은 너무 춥고 배가 고파요. 그래서 돈을 벌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노력해야만 해요. 여기에 있는 두 아이는 우리보다 20일 더 어리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야 해요.”

울고 있던 아이들이 마기휼을 흘깃 쳐다보다가 이내 눈물을 삼켰다. 고개를 조아리기가 무섭게 바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일부러 만들어낸 소리는 아니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전보다 핼쑥해져 있었다. 생채기도 났고 씻지 못한 듯 얼룩도 보였다. 다른 때라면 바로 달라붙을 아이들이 지금은 일어나지도 않고 있었다. 마기휼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이가 그런 마기휼을 흘깃 보다가 눈을 내리떴다.

어깨가 축 처진 그 모습이 낯설었다. 이것도 혹시 연극이 아닐까? 이렇게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돌변하는 거 아니야?

마기휼은 인상을 썼다.

“화 내지 마세요.”

지적을 받고는 바로 인상을 풀었다. 하지만 불편한 기분마저는 어찌할 수 없었다.

“화는 안 나. 그래. 너희를 버린 마담은 지금 뭘 하고 있냐?”

“……파티를 열고 있을 거예요.”

“파티라고?”

“마담은 즐거운 걸 좋아하는 분이시거든요.”

저택에서 쫓겨나 화병에 걸린 게 아니라 지금 파티를 열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이 아이들을 버린 거고 말이다. 마기휼은 이마를 한 손으로 집었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마기휼은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아이 둘이 열심히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었다. 두 눈동자 가득히 눈물을 담고 있는 주제에 말이다.

“너희들은 정말 못 말리겠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더는 상대를 할 수 없었다.

마기휼은 아이들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만 돌아가-”

“여전히 다정한 남자로구나.”

말을 하던 중에 입을 다물었다. 이건 또 뭔가 싶어 숨을 죽였다. 급히 위를 쳐다보자 하얀 망토를 쓴 사람이 보였다. 낙낙한 망토를 입고 있어도 날씬한 체형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망토. 그 아래로 웨이브진 금발 머리카락이 살짝 보였다. 고개를 들자 아름다운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니까 나 같은 벌레가 꼬이는 거야.”

가늘게 휘어지는 섬세한 눈매. 그리고 달콤한 목소리.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숨이 막혔던 마기휼은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리아?”

“안녕. 자기.”

웃으며 마리아가 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동시에 마기휼은 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늦어.”

중얼거린 마리아가 총을 꺼내 든 것과 내내 가만히 있던 아이들이 마리아의 다리에 매달리거나 그녀의 팔을 붙잡아 깨문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러난 마기휼은 채찍을 끄집어냈지만 그걸 휘두를 순 없었다. 아이들이 날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마리아에게 달라붙어 소리를 질러 댔다. 아이들이 워낙에 팔짝거려서 쉽사리 마리아를 공격할 수 없었다.

“신부님을 건드리지 말라고!”

“마기휼을 건드리면 더 아프게 물어버릴 거야!”

“당장 꺼져! 나쁜 놈!”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아이들에 당황한 건 마기휼뿐만이 아니었다. 마리아의 안색도 굳어졌다. 망토가 뒤로 넘어가고 단발에 가까운 금발이 나타났다. 아이는 그런 마리아의 배로 주먹을 날렸다.

“이거 먹고 떨어져!”

“멍청아! 바보! 이 똥개야!”

소리를 치며 위협을 하면서도 아이들의 두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무서워하면서도 그걸 필사적으로 참아내고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였다. 마기휼이 묘한 기분을 느끼며 머뭇거리는 사이, 마리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그녀는 총을 든 손을 들었다. 설마 그걸로 애들을 치려는 건 아니겠지?

그리 말을 하려는 것과 동시에 바람을 가리는 날카로운 음향이 울렸다.

놀란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고 손에서 총을 놓친 마리아를 확인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이쪽의 뒤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기휼도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마리아를 봤다. 아주 짧은 순간 확인한 뒤에는 라우젝이 서 있었다. 그가 총을 쏜 건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마기휼은 채찍을 휘둘렀고 마리아가 뒤로 몸을 날렸다. 바닥에 한 손을 짚더니 솜씨 좋게 공중제비를 돌아 바닥에 착지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있는 힘껏 도주를 하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당장 그 뒤를 쫓았다.

“기다려!”

“쫓아가지 마세요!”

달려가려던 찰나 다리가 죽 당겨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내리자 이번에는 아이들이 이쪽에게 매달려 있었다.

“위험해요. 쫓아가지 마세요.”

“그러다가 다치시면 큰일이잖아요.”

다리에 매달린 아이들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쳐다봤다. 그 모습에 솔직히 찡한 구석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고 있는 동안 마리아는 점점 멀어졌다. 순식간에 시야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마기휼은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리아!”

앞으로 걸어가려 하자 더 많은 아이들이 달라붙었다. 다섯 모두가 달라붙어 징징거리니 무슨 일인가 싶어 사람들이 이쪽을 봤다. 개중 몇몇은 마기휼이 채찍을 휘두르는 걸 봤고, 몇은 총성을 들은 듯 주변을 둘러봤다.

제길.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어쩔 수 없는 거냐며 마기휼은 아이의 머리에 한 손을 올렸다.

“안 쫓아갈 테니까 일단은 떨어져. 무겁잖아!”

“싫어요. 그러다가 쫓아가시면 어쩌라고요?”

“쫓아가도 괜찮아! 난 연약한 몸이 아니라고! 나 군인이라니까?!”

“군인이 아니라 주인님의 신부시잖아요!”

“어허! 어디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사람들 들으면 어쩌라고!

마기휼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며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이들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하긴 이상하게 보일 만도 한 상황이었다. 괜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들을 떨어뜨릴 필요가 있었다.

마기휼은 끙끙거리며 아이들을 붙잡고 밀어냈다. 그러자 오만상을 찡그린 아이들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 댔다. 고집스럽게 입을 악물고 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입을 반쯤 열었다.

“너희들 정말 왜 이러는 거―”

“떨어져라.”

등 뒤에서 울리는 다른 목소리에 아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마기휼에게서 떨어졌다. 벽 쪽으로 일렬로 서선 고개를 푹 숙인다. 그 모습에 마기휼은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이쪽이 당장 떨어지라 해도 듣는 척 마는 척을 했던 놈들이 왜 저렇게 고분고분해지는 거야. 이 사람 때문인가. 마기휼은 옆으로 와서 서는 라우젝을 쳐다봤다.

언제 온 건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느긋한 폼으로 다가온 라우젝은 벽에 주욱 서 있는 아이들을 흘겨봤다.

“그녀가 또 뭔가를 시킨 모양이로군. 그렇지?”

라우젝의 냉랭한 물음에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저들끼리 모여서는 고개를 푹 숙인다.

이쪽은 만만한데 라우젝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너무 차갑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 조금 전 마리아가 있었을 때에도 이 녀석들의 도움을 받았고 말이다.

마기휼은 슬그머니 말을 꺼내려 했지만 그 전에 라우젝이 그를 쳐다봤다.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군.”

라우젝은 몸을 돌렸다. 하지만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그것이 조금 전 대화 때문인 거라고 생각을 한 건지 라우젝은 그를 흘겨봤다.

“여기에 있으면 아까 그자가 다시 찾아올 거다. 머리통에 구멍 나서 바람을 느끼고 싶지 않으면 어서 따라와.”

바람을 느끼다니. 말 참 살벌하게 한다.

하지만 마기휼도 거리에 나와 있으면 위험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말은 없어도 아이들을 흘겨보는 모습에 라우젝의 인상을 썼다.

“뭐야? 그놈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놈들은 오르베에게 충실한 놈들이야. 어떤 식으로 접근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데리고 가면 너만 피해를 볼걸?”

“하지만 불쌍하잖습니까. 오르베가 쫓아냈다고 하던데―”

“너 진짜로 멍청하구나.”

라우젝은 입꼬리를 올렸다.

“오르베가 잘도 놈들을 쫓아내겠다. 자신 입맛에 맞도록 무려 5년 동안 훈련시킨 아이들이야. 외모는 저래도 실상은 더 먹었어. 한 스물은 되었을걸?”

“스물이라고?”

놀란 마기휼은 아이들을 쳐다봤다. 이쪽보다 머리 하나는 훨씬 더 작은 아이들이 눈치를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내리떴다. 숨겨 왔던 것을 들켰다는 듯 구는 그 모습에 마기휼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뭐야? 라우젝의 말이 진짜라서 이러는 거야?

“어쭙잖은 동정심을 발휘해서 저놈들을 데리고 가면 라울도 싫어할걸? 요즘 라울이 예민한 것 같던데 괜히 자극하지 말고 얌전히 있는 게 어때?”

라우젝의 말에 욱했던 마기휼은 대번에 인상을 쓰며 그를 노려봤다.

“내가 그놈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는 거 아닙니까?”

“아니지만 넌 결국 그놈의 눈치를 볼 거잖아?”

“…….”

단정적으로 하는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분하다는 듯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그 라울이라는 놈은 워낙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이쪽이 그 속을 헤아려 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싫어도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이었다.

그게 그렇게 나쁜 건 아니잖아. 그런 걸로 따지면 라우젝도 라울의 눈치를 보는 것 같더만.

마기휼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아이들의 거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마냥 그러고 있을 듯싶었다. 그 모습에 라우젝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사람 좋은 척을 하고 싶다면 내 도와주지. 내가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저택에서 그 아이들이 살게 해주겠어.”

라우젝의 말에 마기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정말입니까?”

“정말이고말고. 이래 봬도 소유한 저택 많아.”

원래 대귀족이니 건물 한두 개쯤은 소유할 수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을 한 마기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으로 이놈들을 데리고 가면 라울과 마찰을 일으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요새 묘한 분위기인데 괜히 자극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싶었다. 라우젝이 소유한 저택에 있으면 이 아이들도 한결 살기 편할 테고 말이다.

그렇게 하자는 말을 하려는데 옆에서 “저기.”라는 중얼거림이 들렸다. 뭔가 싶어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고 눈이 마주친 아이가 어물거리며 말했다.

“그냥 저희는 여기에 있을게요.”

“왜? 이런 곳에 있으면 춥고 배고프잖아. 모처럼 좋은 장소를 찾아냈으니―”

“하지만 라우젝 님의 저택은 무서워요.”

마기휼은 자신의 말을 자르고 나오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바로 뭐라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는 동안 아이들은 웅얼거렸다.

“그런 곳에 머무르고 있으면 단명할 것 같아요.”

이건 또 뭔 소리야? 단명이라니? 라우젝이 암살자라도 보낼 것 같다는 거야 뭐야?

황당했던 마기휼은 라우젝을 쳐다봤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것들이 지금 나랑 놀자는 건가. 그리 말하고 싶은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라우젝은 호통을 쳤다.

“이 거지 같은 것들이 라우젝 님이 내리는 은혜를 마다하는 거냐! 입 닥치고 살라는 곳으로 들어가서 쪼그리고 있어!”

워낙에 큰 목소리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결 많아지고 아이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정말 무서웠던지 히익,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이는 아이들의 모습에 마기휼은 당황했다.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십시오. 애들이 뭘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까.”

“뭘 모르다니! 이 몸이 이런 식으로 호의를 베푸는 게 흔한 일인 줄 알아?! 영광스러운 일을 몰라보고 제멋대로 지껄여 대다니! 주제를 알아야지!”

“그러니까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내면 사람들이 쳐다본다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다가오는 마차가 보였다. 마차를 피하기 위해서 마기휼은 라우젝의 팔을 잡아 안쪽으로 당겼다. 라우젝은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섰다. 마치 나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거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에 화가 났다.

왜 이러는 거냐고 따져 물으려던 찰나 마차가 멈췄다. 당황한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고, 마차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키가 큰 사내가 내려왔다.

라울이었다.

“…….”

타고 나갔던 마차하고 다르잖아.

반사적으로 드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러다 라울의 눈동자가 묘하게 굳어 있고, 그의 시선이 라우젝을 붙잡고 있는 자신의 팔에 고정되었다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슬그머니 손을 놨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로 웃었다. 이런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한들 라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겠지만.

라울은 마기휼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라우젝을 봤다. 그러다 구석에 모여 있는 다섯의 아이들까지도 봤다. 라우젝과는 다른 의미로 라울이 불편했던 아이들은 숨을 죽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걸 확인한 라울은 마기휼을 쳐다봤다.

“저택 안에만 있는 게 아니었던가.”

“아니. 그게 그러니까…….”

정말 난감했다. 몸이 배배 꼬일 지경이었다. 동시에 이쪽이 라울 앞에서 이렇게나 쫄 필요가 어디에 있나 싶기도 했다.

자신은 어디를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있었다. 멀리도 아니고 저택 인근의 거리로 나왔다 해서 라울의 추궁을 들을 필요도 없고 변명도 필요 없었다. 그래. 당당해지자. 마기휼은 눈을 부라리며 라울을 쳐다봤다.

“내가 외출하면 안 될 이유는 없잖아. 안에만 있으면 얼마나 숨이 막히는 줄 알아? 그래서 바람 쐬러 왔다고. 난 아무런 잘못도 없어.”

“그래서 조금 전에는 이상한 자와 마주치기도 했고 말이야. 금발 머리카락을 지닌 날씬한 체형의 사람이었지. 총을 꺼내 드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라울과 일대일로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옆구리에서 갑자기 끼어드는 목소리에 모든 것이 무산되었다. 느낌 탓인지 모르겠지만 라울의 눈초리가 굉장히 날카로워진 것 같다.

“아니. 그건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니야!”

우선 그 말이 먼저 나왔다.

마기휼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마리아를 만났다 쳐! 하지만 그건 내 탓이 아니야! 그런 곳에서 떡하니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마리아라고 했나?”

착 가라앉은 음성과 동시에 라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차 싶었던 마기휼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손으로 입을 막고 라울을 쳐다봤다. 라울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쉽사리 풀릴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있던 라울은 옆으로 한 발 물러났다.

“일단 타라.”

너 같으면 타고 싶겠냐.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아 버티고 서 있으려니 뒤에 서 있던 라우젝이 비실거리고 웃었다.

“어서 타. 나는 여기에 남아서 이 아이들을 안전한 저택에 데려다 놓고 돌아갈 테니까.”

너는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그리 말하고 싶은 듯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는 마기휼이었으나 그 시선을 앞에 두고도 라우젝은 태연했다.

“너무도 친절한 마기휼은 어린아이들이 거리에서 동냥하는 게 마음 아팠나 봐. 나에게 이 아이들이 편안한 곳에서 지낼 수 있게 애걸복걸을 하기에 자애로운 내가 희생을 해주기로 했지.”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따져 물으려던 찰나 라울의 손이 마기휼의 등을 눌렀다.

“마차에 올라타.”

“…….”

목소리를 높이거나 눈을 부라리는 건 아니었다. 그냥 평소 익히 아는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찍 소리도 낼 수 없는 건지를 모르겠다. 이렇게 잠자코 있는 건 성질머리에 안 맞는데.

마기휼은 라우젝을 봤다. 그는 다른 쪽을 쳐다보며 ‘난 몰라.’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화상. 모든 걸 다 책임지기는 뭘 책임진다는 말이야. 결정적인 순간에 발 쏙 빼고 너 혼자만 살면 그걸로 되는 거냐. 마음 같아서야 당장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마기휼은 마차에 올라탔다. 버티고 있어 봤자 상황만 더 안 좋아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라울이 올라타고 바로 마차가 움직였다.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라울은 눈을 내리뜬 채로 있었다. 타자마자 똑바로 바라보면서 추궁을 할 줄 알았는데.

마기휼은 라울을 봤다. 마차에 오르는 순간 당장 닭 잡듯이 들들 볶을 것 같더니만 지나치게 조용한 게 아닌가 싶었다.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올라탔는데 너무 조용하니까 그게 더 불안했다. 결국 참다못한 마기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시지?”

“저택에만 있어서 답답했겠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으니까 할 말은 없다.”

너무 또 순순히 말을 해버리면 이쪽은 더 기가 죽는다. 동시에 제멋대로 저택에서 나온 것도 잘못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라울이 타박을 하고 뭐라 하면 이쪽도 큰소리를 칠 수 있지만, 이건 아니었다.

마기휼은 땋아 내린 꼬랑지 머리 끝을 만지작거렸다. 앉아 있는 곳이 불편한 듯 눈을 굴려 대는 마기휼을 바라보던 라울이 물었다.

“마리아가 온 건가.”

“아. 그건……. 사실 나도 놀랐어.”

마기휼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애들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잖아. 갑자기 총을 꺼내 드는데 아이들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녀석들 날 구해주겠다면서 마리아를 붙잡고 늘어지더라고. 그리고 라우젝이 도와준 것도 없잖아 있고.”

대신에 라울에게 이쪽을 팔아넘긴 듯한 상황인지라 고마움은 상당히 감소가 된 상태이기도 했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그 당당한 면상에 주먹을 먹이고 싶다면서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리아가 왜 너에게 접근을 한 걸까.”

라우젝의 멱살을 잡고 그를 두어 번 후려치는 상상을 하던 마기휼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응?” 하며 고개를 들었다.

라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반사적으로 말이 나왔다.

“나를 죽이려고 했을까.”

“비단 그것이 이유일까?”

“몰라. 이유를 안 물었으니까 나도 잘 모른다고.”

투정과도 같은 투덜거림이었다. 라울을 상대로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게 참 거시기하긴 했지만 원래 이런 말투였다. 이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기분 나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마기휼은 라울을 손가락질했다.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연기 실력을 갖추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

의심하지 않아서 좋기는 한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나는 연기가 안 되니까 첩자 노릇은 못할 거라는 거야? 이거 섭섭한데? 이래 봬도 어렸을 적에는 몇 번이나 연극 무대에 서본 경험이 있다고. 물론 그 모든 것들도 학교에 다녔을 때에 쌓은 경험이었지만 말이다.

“암시장이 한 번 연기되었다. 하지만 다음에는 열릴 테지.”

암시장이라. 라울은 마리아 일당이 그곳에 들어갈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나타난 것 때문에 달리 노리는 게 있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일행과 합류를 할 터였다. 암시장으로 들어갈 테고, 라울은 그들을 추격할 거다.

“암시장에 가서 그들을 일망타진할 거야?”

“여왕께서는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사건을 마무리 지을 것을 원하고 계신다.”

“아, 그래.”

라우젝에게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라울이 여왕을 거론할 때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북해져선 어설픈 표정을 지었다. 라울은 그런 마기휼의 얼굴을 흘겨봤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물고 마는 모습에 마기휼도 팔짱을 낀 채로 창밖을 봤다.

확실히 뭔가 묘했다. 라울도 그걸 느끼고 있을 테지. 이 묘한 것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라울과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문득 드는 생각에 마기휼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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