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라울의 방 안은 묘한 적막감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쪽에 마련된 침대에 앉아 있는 라울만 아니었다면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조용했다.
알몸으로 앉아 있는 라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표정을 하고 있던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숨소리를 들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쪽과 마찬가지인 상태로 누워 있는 마기휼을 확인했다.
옆으로 돌려진 얼굴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굳건하게 감긴 눈꺼풀이 보였다. 닫힌 그 눈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잡아 모두 옆으로 치워 냈다. 그러자 마기휼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왜 기운 없이 축 늘어진 그 얼굴에 욕정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바라보는 라울의 눈동자가 혼탁한 빛으로 감싸인다.
가만히 있나 싶던 그는 이내 마기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을 내렸다. 마기휼의 턱을 타고 내려간 손가락이 목을 쓰다듬고 가슴을 타고 내려와 배 부근에 닿았다.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배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가 조금 더 내렸다. 축 늘어진 성기가 보였다. 그걸 건드리는 손길에도 머뭇거림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조금 더 내려간 손가락이 마기휼의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어 갔다. 잡아서 다리를 벌렸다.
벌려진 다리 사이로 숨겨져 있던 은밀한 부위가 눈에 들어왔다. 꾹 다물어져 있는 주름 사이로 묘한 액체가 드문드문 묻어 있었다. 지금은 입을 딱 다물고 있으나 저곳이 어떤 식으로 벌어졌는지를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 속에 들어가면 얼마나 큰 쾌감을 얻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가라앉은 눈빛을 한 채로 있던 라울은 고개를 숙였다. 마기휼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댔다가 떨어뜨리고 그를 내려다본다. 마기휼은 여전히 눈꺼풀을 닫고 있었다. 이쪽이 무시하려 저러는 건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의식을 차릴 수 없는 상태일 터였다. 그걸 알면서도 다시 원하게 된다.
라울은 마기휼의 다리를 조금 더 벌리게 한 후에 그 사이로 자신의 성기를 갖다 댔다. 마기휼의 알몸을 조금 만지는 것만으로도 그의 성기는 발기된 상태였다. 주름에 귀두의 끝을 대자 움찔하고 떨려 온다. 그 주름을 밀어내며 천천히 성기를 삽입했다. 평온하게 잠들어 있던 마기휼의 미간 사이로 주름이 잡힌다. 통증을 느끼는 듯 입술을 살짝 벌리며 소리를 냈다. 그걸 들으면서도 라울은 멈추지 않았다.
라울의 팔에 끼여 어정쩡하게 세워져 있던 다리로 힘이 들어갔다. 라울의 굵직한 성기가 다 넣어지자 이내 다리가 주욱 펴졌다. 마기휼은 몸을 비틀었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미간 사이로 주름이 더 많아졌지만 라울은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움직이는 순간 바로 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여전히 눈은 꾹 감겨 있었다. 그런 마기휼을 확인하며 라울은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이미 몇 번이나 안에 토정을 했다. 촉촉하게 젖은 내벽은 라울의 성기를 익숙한 듯 물고 빨아들였다. 성기에 착 달라붙는 내벽의 감각에 라울의 입술을 타고 나직한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느리게 움직이던 행위가 점점 거칠어졌다.
라울의 허리 양쪽으로 나와 있던 다리가 밀어 넣을 때마다 흔들렸다. 세워진 발끝으로 힘이 들어간다. 버티려 했지만 계속해서 강하게 밀어 넣어지는 성기에 참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렸다. 어정쩡하게 다리를 편 상태로, 몸 안으로 단단한 양물이 박힐 때마다 근육이 묘하게 뒤틀렸다.
“아, 아아, 읏―”
찡그린 얼굴을 한 채로 마기휼이 애끓는 소리를 냈다.
계속해서 몸속을 들쑤시는 감각에 마냥 의식을 잃은 상태로 있을 수 없었다. 마기휼은 힘겹게 눈을 떴다. 드러난 보랏빛 눈동자가 라울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운이 없던 눈동자로 힘이 들어갔다.
마기휼은 팔을 들어 라울의 목을 감았다. 닿아 오는 몸을 마다하지 않고 라울도 마기휼을 끌어안았다. 그를 안아 들고는 더 강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파고들 때마다 마기휼은 입을 벌리며 몸에 힘을 줬다. 참을 수 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윽! 앗! 아!”
허리를 뒤틀자 도망가는 것이라 생각한 건지 라울이 더 강하게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재차 굵직한 성기가 파고들 때마다 몸속이 욱신거렸다. 아랫배가 들쑥날쑥 날뛰는 것 같았다. 들어올 때에는 힘들었지만 빠져나갈 때에는 더 원하게 된다. 가지 말라며 집요하게 달라붙는 자신의 내벽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싫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라울이 내벽을 비비며 파고들 때에는 쾌감의 소리를 내게 된다.
이미 몇 번이나 마찰된 내벽이 쓰라리고 아팠지만 그럼에도 더 원하게 되었다. 이제는 약효 같은 건 다 사라지고 없는데도 왜 이렇게 원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건지 기억이 없었다. 자신이 죽어 간다는 걸 느끼며 그대로 의식이 끊어졌다. 하지만 곧 몸속을 들쑤시는 느낌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라울이었다. 자신의 몸 위에서 움직이는 사내였다.
그걸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저 결국 이렇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곧 본능이 이성을 밀어냈다. 사내를 원하고 있던 몸은 너무도 솔직하게 반응을 보였다. 남자면서도 사내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게 능숙했다. 이쪽이 달려들듯이 몸을 내던지자 라울은 주춤했다. 당황하는 듯싶었으나 이내 자극을 받아 그도 강하게 움직였다.
세게 박아 넣어질 때마다 몸이 두 동강이 날 것 같았다. 쾌감과 동시에 통증을 느끼며 마기휼은 울부짖었지만 그래도 피할 순 없었다. 더 적극적으로 다리를 벌려 라울을 끌어당겼다. 원하고 있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행위.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하고 있는데도 이 육체는 사내에 대해 무척이나 잘 알고 있다는 듯 음탕하게 굴었다. 스스로의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의 쾌감에 울부짖는 비명과 난잡한 음향들. 그리고 갖가지의 체위들. 몇 시간 동안 라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스스로도 색에 미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난리를 부렸지만 라울도 만만치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맞춰주지 못할 그 모든 것들을 다 받아냈다. 어쩌면 그도 즐겼을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과하게 구는 자신의 몸을 내리누르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파고들었으니 말이다.
나중에는 너무 심하게 몸속을 쑤셔 대서 몸이 걸레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토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의식을 잃고 눈을 떠보니 욕실이었고, 몸을 씻기는 라울을 쳐다보다가 입을 맞추고, 또 하게 되었다.
약의 영향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숨겨져 있던 본성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내내 내리누르고 있었던 욕망이 폭발을 한 거였다.
라울도, 자신도 말이다.
“아읏!”
날카로운 통증에 마기휼은 흐릿한 눈을 떴다. 귀를 깨문 라울이 이쪽으로 고개를 숙여왔다. 금발이 얼굴에 닿아 간지러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물음과 동시에 엉덩이 한쪽을 잡아 비틀었다. 동시에 끝까지 성기를 밀어 넣는 것에 마기휼의 아랫배가 씰룩거렸다. 이제는 아래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헐렁해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라울은 여전히 자신을 뜨겁게 원하고 있었다.
땀에 젖은 피부가 이런 느낌일 줄은 몰랐다. 여자처럼 다리를 벌리고 사내의 물건을 받아들이고, 그 괘씸한 것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헤쳐지고 있는데도 편안했다.
누군가에게 안겨 그저 쾌감을 느끼기만 하는 것이 이리도 편안할 줄은 몰랐다. 그냥 이대로 있고 싶었다. 계속 이런 상태로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할 수는 없겠지.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
스스로 듣기에도 끔찍할 정도로 갈라진 목소리였다.
마기휼은 힘겹게 손을 들어 땀에 젖은 라울의 등을 감쌌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미끄러질 뻔했으나 손톱을 세워 간신히 고정했다.
마기휼은 계속해서 자신을 원하는 라울에 맞춰 허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내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행동을 멈췄다. 더는 못 하겠다. 그리 생각을 하며 양손을 다 들고 있으려니 라울의 허릿짓이 거세졌다.
“으……!”
더는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짐승이 온몸을 들쑤시고 있었다. 라울에게 안긴 채로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멀미가 날 것처럼 인정사정없이 몸속을 흔들어 대던 것이 가장 깊숙이 파고들어 왔고 이내 뜨거운 것이 몸속으로 퍼져 나갔다.
마기휼은 눈을 떴다. 땀이 눈 속으로 들어가 따끔거렸다. 멍하니 있는 동안 여전히 자신의 위에 엎드려 있는 사내가 느껴졌다.
우습게도 이제는 그 체온이 익숙하기만 했다.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손을 들어 라울의 어깨를 감쌌다. 촉촉한 피부를 문지르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울의 뺨에 입술을 대고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피임했어야 했는데.”
올라탄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참으로 멋없는 말을 한다는 인식은 있었다. 하지만 입술이 본인의 의지를 꺾고 재잘거린다.
“나 임신했을까?”
남자이면서 임신이 가능했다. 그것에 대해 알게 되었을 무렵부터 마기휼은 폐쇄적인 사람이 되었다. 실없고 한없이 자유로운 것 같아도 일정한 선이 있었다. 그 틀 안에서 빠져나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늘 움츠러든 채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자신에 대해 매 순간, 매 시간을 느껴야 했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지켜 왔던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런 식으로 그 선이 무너져 내렸다.
사내에게 안기고 그걸로 즐거움을 느낀다. 먼저 매달려 요사스럽게 허리를 흔들던 자기 자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순간 눈 바로 아래가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나오려는 울음은 호흡으로 가다듬었다. 그러자 라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달라붙어 있던 건장한 육체가 떨어지고 몸속에 들어차 있던 성기가 빠져나갔다. 여전한 굵기를 자랑하는 그것이 나가자 속이 횅했다. 하지만 애써 그 느낌을 지우려는 듯 마기휼은 다리를 오므리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라울의 손이 마기휼의 팔을 잡았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엎드린 위로 라울이 달라붙어 온다. 묵직한 체중에 눌려 숨을 쉴 수가 없어졌다. 아래로 들어온 손이 늘어진 성기를 붙잡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더 할 거야?”
대답이 없다. 대신에 그는 위로 올라간 마기휼의 엉덩이를 성급하게 벌리고 그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두어 번 들쑤시자 정액이 흘러나왔다.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정액의 느낌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성기와는 다른 미묘한 터치감이 느껴지자 재차 흥분하게 된다. 마기휼은 눈을 감으며 육체가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장난으로 라울의 손가락이 깊숙이 들어왔을 때에 맞춰 몸에 힘을 줬다. 내벽이 손가락을 꽉 물자 그가 주춤했다. 가만히 있나 싶더니 자극을 한 것에 대해 보답을 하겠다는 듯 바로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성기가 밀고 들어왔다.
“아읏―”
짓이기듯이 밀고 들어오는 두꺼운 물건에 절로 소리가 나왔다. 얼굴을 찡그린 마기휼은 라울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금방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그 얼굴이 미묘한 쾌감으로 인해 일그러져 있었다.
라울은 처음이었다. 사내를 안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도 선천적으로 섹스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금욕적인 그 얼굴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을 마기휼에게 요구했다. 내내 내리누르던 것이 폭발한 듯 거침없이 이 몸을 살피고 들쑤시고 만지고 관찰했다. 자신과 같은 물건이 달린 사내인데도 그 손길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생물체를 만지는 것 같았다.
거칠지만 때로는 부드럽다. 지금은 유연하게 움직이지만 언제 또 거칠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게 싫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재차 거세지는 라울의 육중한 물건을 느끼며 마기휼은 목까지 찬 헐떡거림을 토해 냈다.
라울이 방 밖으로 나온 건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였다. 긴 금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뜨린 그는 바지에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얼굴에서 그늘이 느껴졌다. 등 뒤의 문을 닫은 채로 그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달리 생각하는 게 있는 듯 굳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복도 가운데에 등을 보인 채로 앉아 있는 의원을 발견해냈다. 호그의 고개가 옆으로 조금씩 흔들렸다. 앉아서 졸고 있는 모습에 라울이 발을 뗐다.
“호그.”
이름을 부르자마자 눈을 뜬 의원은 멍한 얼굴이었다.
그는 옆에 서 있는 라울을 확인하고는 눈을 더 크게 떴다.
“도련님.”
이내 자신이 라울을 부르는 호칭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은 그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대신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손을 마주 잡았다. 호그는 졸음을 모두 지워내고는 라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무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에서 딱히 그늘을 발견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눈빛이 전보다 훨씬 더 깊어진 듯싶었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잘했느냐고는 물을 수 없었다.
“치료를 부탁해야 할 것 같군.”
“다치신 겁니까?”
“내가 아니네.”
짤막한 대답에 의원은 눈을 감았다. 한 거로구나.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완벽한 라울의 비밀을 엿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알지 않아도 될 것을 알아버렸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일단 약 상자를 들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머리가 복잡했다. 생각을 하기보다는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서둘러 달려가는 의원을 쳐다보던 라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 얼굴이 굳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던 라울은 느리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크게 열었다. 그리고 창가로 가 모든 창을 열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였다.
“추워.”
침대에서 가장 가까운 창을 열었을 때 흘러나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라울을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볼록하게 솟은 부분이 보였다. 옆으로 돌려 누운 채로 마기휼은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한 시간 전에 대충 씻었기 때문에 아직 머리가 젖어 촉촉한 상태였다. 그런 머리카락이 피부에 달라붙는 느낌을 싫어하는 마기휼이었지만 지금은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러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녹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마기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그런 얼굴이지? 넌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쉰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거북함이 있었다. 그렇다 해서 마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순 없었다. 마기휼은 이불을 끌어 품으로 당기며 중얼거렸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너도 나도 어린애가 아니잖아.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뿐이야. 그리고 남자에게 안기는 거라면 네가 제일 나아.”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그가 기뻐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흥분해서 다시 달라붙을 리도 만무했다. 그렇게나 해 댔다. 반나절 가까이 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몸 상태는 최악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상대가 라울이 아니었다면 기분은 더 최악이었을 거다.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서서히 졸음이 몰려왔다.
“그냥 이걸로 지나갈 문제야. 그러니까 깊게 생각하지 마. 나를 안게 되어서 너라는 사람이 변하는 건 아니야. 성적 취향 때문에 네가 갑자기 최저의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야. 그저 개개인의 문제일 뿐이라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몽롱한 머릿속을 토닥이며 계속해서 말을 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꼭 해야 했다. 그래야지만 저 상처 입은 라울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나 자신을 생각하기보다 라울의 자존심을 달래주는 일부터 하다니. 나 지나치게 사람 좋은 거 아니야? 속으로 빈정거리는 생각을 해도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건 반대가 되는 말들이었다.
“네 말대로 우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야. 이 상황이 아주 조금 어긋나 있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우리 괜한 자책감은 갖지 말자. 서로를 대하는데 어색함이 없도록 하자. 그런 건 정말 싫으니까.”
막상 하고 났더니 그건 더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게끔 되었다. 그저 나른하기만 했다. 쉬고 싶고 더 자고 싶었다. 당분간은 아무도 날 건드리지 말아줬으면 싶었다. 옆으로 묵직한 것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라울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조금 전만 해도 라울이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하면 더럭 겁부터 났다. 또 하려는 거야? 그런 생각부터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더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달리 할 말이 있어 접근하는 것이겠지. 막연하게 그리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가라앉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배는 안 고픈가.”
배라. 고프긴 했다. 어제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 이 상태로 뭔가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굉장히 나른하고 허리 아래로는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자고만 싶었다.
멍한 얼굴로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고 있으려니 라울이 손을 내렸다. 그의 손가락은 마기휼의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제멋대로 이 몸을 굴려 대던 거친 손길이 지금은 머리카락 만지는 일에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전해졌기 때문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 상태를 뭐라고 해야 할까. 묘한 상황이었다. 서로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거부감은 적었다. 되레 이번 일을 통해서 서로의 사이가 더 가까워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연인 사이 같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와 비슷한 상태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따름으로, 라울에게 응석을 부린다면 그가 다 들어줄 것 같았다.
이쪽은 이런데 라울은 어떨까.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확인을 하고 싶지만 동시에 꺼려졌다. 아주 만약에 그가 싫은 얼굴을 하고 있다면 어째야 하는 건가 싶었다. 혹여라도 그가 굉장히 껄끄러운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빛을 하고 있다면― 그런 거라면―.
……그렇다고 해도 이쪽이 크게 충격을 받을 필요는 없는 거잖아. 아까 라울에게 말을 했듯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안 했으면 내가 죽었을 테니까. 그냥 목숨 구해줘서 고맙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만인 상황이 안 되면 어떻게 하지.
혹시라도 아이가 생겼다면…….
그 순간 마기휼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새벽 즈음에 라울에게 피임 운운하면서 아이가 생기면 어쩌냐고 말을 했던 것과는 또 다른 상황이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 더 이성이 잔존해 있었다. 정말 그 짐승 같은 행위의 끝에 아이가 생겨버렸다면 그때에는 어째야 하는 거지? 낳아야 하는 건가? 하지만 난 사내인데?
마기휼의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지워졌다. 더불어 그의 눈동자가 굳어진다. 아까부터 시시각각 변하는 마기휼의 얼굴을 살피던 라울은 검은 머릿결을 감싸던 손가락을 뒤로 물렸다. 천천히 물러났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열린 문 옆에 서 있는 호그 의원이 보였다. 진즉 도착해 있기는 하나 분위기가 이상하니 들어오지를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라울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들어와라.”
라울의 말에 마기휼은 바로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들자 중년 사내가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당황한 마기휼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가 찌르르 올라오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눈가로 눈물이 살짝 맺혔다. 어금니를 악문 채로 마기휼은 천천히 자세를 바꿨다. 간신히 앉는 자세가 되어 물었다.
“누구야?”
물으며 마기휼은 시트로 몸을 돌돌 감았다. 아직은 몸을 움직이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낯선 사람 앞에서 알몸을 보일 순 없었다.
……아니다. 마기휼은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침대의 시트는 여기저기가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고 간간이 이상한 얼룩이 진 곳도 더러 보였다. 더군다나 침대의 주인인 라울은 그답지 않게 편안한 차림이고, 그의 침대에 있는 건 알몸인 사내였다.
누가 보더라도 수상하게 생각할 만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모르고 그냥 지나칠지도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온 의원의 긴장된 눈빛을 확인한 순간 마기휼은 헛된 희망을 버려야 함을 깨달았다. 이쪽을 보는 시선에서 껄끄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복잡함이 얽혀 있을 따름이었다. 그 속에는 일말의 걱정스러움도 담겨 있었다.
그런가. 이 의원은 라울에 대해 아는 건가. 동시에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마기휼은 숨을 죽인 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다렸다는 듯 허리로 퍼지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절로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마기휼의 팔을 라울이 붙잡았다. 멀찍이 떨어져 있다가 마기휼이 비틀거리자 순식간에 그를 부축해준 것이었다. 의원이 놀란 눈빛을 보내는 걸 확인 후, 라울은 붙잡고 있던 마기휼의 팔을 놓았다.
라울은 애초에 마기휼을 잡은 적이 없다는 듯 옆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지만 그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특유의 어색한 분위기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껴 있는 의원은 어색함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상태였다. 그렇다 한들 마냥 이러고 서 있을 순 없었다. 의원은 용기를 냈다.
“안녕하십니까. 전 호그라고 합니다. 이곳 안제크가의 전담의로서 벌써 33년가량을 일해 왔습니다.”
의원이라는 건가. 그를 누가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마기휼은 라울을 흘깃 쳐다봤다. 난 모른다는 식으로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차는 한편, 마기휼은 먼저 호그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마기휼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러니까― 북방군 소속의 소령입니다.”
이런 상태로 악수를 청하다니. 실수를 한 건가.
순간적으로 그리 생각을 했지만 호그는 상관치 않고 내밀어진 마기휼의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군인이셨던 거로군요. 저희 주인님의 친구분이신 모양입니다.”
“친구라기보다는 상관이라 해야겠지요. 아, 그가 처음 군에 들어왔을 때 제 아래에 배속이 된 적이 있기는 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저희 주인님의 상사셨군요.”
“기간도 짧고, 워낙에 대령님이 대단한 분이신지라 제가 큰 가르침을 사사하진 못했지만, 최근에는 그때 기합을 좀 줬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아하하하. 그렇군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의원은 정말 기분 좋게 웃었다. 그 웃음에 마기휼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한 웃음은 지속성이 짧기 마련이었다. 금방 웃음이 뚝 끊기고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함이 감돌았다.
의원은 입을 다문 채로 다른 화제를 찾아 헤맸고 그건 마기휼도 마찬가지였다. 이도 저도 아닌 얼굴을 한 채로 있으려니 의원이 조심스레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고 그 위에 앉았다. 머뭇거리나 싶던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몸은…… 어떠십니까?”
여러 가지의 질문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러하니만큼 이쪽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할 필요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하반신의 어느 구석이 어떤 식으로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말이다. 때문에 얼버무리게 되었다.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그래도 제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이니 한 번만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디를 보여주라는 겁니까?”
식겁한 마기휼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통증에 뒤로 몸을 젖힌 채로 굳어버렸다. 태연한 척을 하려 했으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그걸 본 의원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몸을 움직이지 마십시오. 누워 계셔도 되니까 편안히 있으십시오.”
“아니요. 전 이 상태가 편합니다.”
대답을 하며 천천히 몸을 세웠다. 엉덩이를 대고 어찌어찌 앉는 것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굳은 안색은 풀리지 않았다. 내리뜬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러지 말고 누워 계십시오. 그리고 다리만 살짝 벌려주시면 제가 금방 확인을 할 테니―.”
“아픈 데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단호하게 딱 잘라 하는 말에 호그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마기휼은 조금 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아무 곳도 아프지 않으니 그만 가주십시오.”
“치료하지 않으면 더 힘들어지실 겁니다.”
“지금도 안 힘듭니다. 그러니까 그만 가라고요.”
마치 어린애가 투정을 부리듯 말을 한 마기휼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서 의원을 상대로 이러는 게 부끄럽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몸을 다른 이에게 보여줄 순 없었다. 곁에 라울이 저렇게 버티고 서 있는데, 그 앞에서 의원더러 확인을 하라고 다리를 벌리다니. 그런 건 절대로 싫었다.
마기휼은 몸을 두르는 시트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허벅지 부근에 놓인 손이 주먹을 쥔 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걸 본 의원은 입을 살짝 벌렸다. 더 권하고 싶지만 그러면 마기휼의 반발심만 키울 뿐이었다. 그는 라울을 쳐다봤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었지만, 라울은 마기휼을 보고 있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마기휼을 바라보는 그 눈초리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렇게 걱정이 된다면 따뜻한 말이라도 건넬 것이지. 저렇게 팔짱만 끼고 있으면 어쩌란 말인가. 라울도 그렇고 마기휼도 그렇고 지나치게 숙맥인 듯싶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더더욱 대하기가 어려웠다. 뭔가를 좀 알면 바로 다리를 벌리고 속을 보여주는 편이 본인에게 훨씬 낫다는 걸 알 텐데 말이다.
의원은 생각에 잠겼다. 어찌 하는 게 더 좋은 방법인지에 대해 생각하던 그는 오늘은 이쯤 해 두자는 생각에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러면 약 처방만 해드리겠습니다.”
가방을 열고 작은 주머니 두 개를 꺼냈다. 하얀 주머니와 붉은 주머니를 각각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설명을 했다.
“진통제와 해열제는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연고입니다.”
나무로 된 통을 주머니 옆에 내려놓은 의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그 안쪽에 바르시면 됩니다. 그러면 붓기도 빠지고 통증도 감소할뿐더러 아무는 속도도 빨라질 겁니다. 그렇다 해서 바로 평상시처럼 행동을 하면 절대로 안 되십니다. 며칠간은 침대 생활을 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복도에 앉아 있으면서 라울이 얼마나 오랫동안 침실 안에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기 그지없었으나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리고 이걸 드리겠습니다.”
내밀어진 것은 붕대였다. 내내 굳은 얼굴로 의원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던 마기휼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냥 얌전히만 있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마기휼은 붕대를 들었다. 알싸한 향이 화악 퍼진다. 마기휼은 붕대 가운데 부분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느낌 탓이 아니었다. 정말 약초 냄새가 났다.
“이건 뭡니까? 약초 향이 나는데요?”
“그걸 배에 두르고 계십시오. 그러면 좋을 겁니다.”
순간적으로 감이 왔다. 마기휼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무엇에 좋을 거라는 겁니까?”
“착상이 잘 되어 임신의 확률이 높아집니다. 붕대 안쪽에 넣은 베아크라 약초는 그런 효능을 품고 있지요. 불임인 부부들이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할 때에는 일부러 마기휼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혹여라도 눈이 마주치게 되었을 때 이상하게 변한 그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더 길게 말을 할 수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 않으셔도 크게 상관은 없으나 남성의 몸이지 않으십니까.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하게 되어 유산이라도 하시면 큰일이 아닙니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도록 말입니다.”
그래.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야만 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면 이 두 사람이 이렇게나 한 의미가 없는 거였다. 시작이 어떻든 간에 결과가 좋아 건강하고 영리한 안제크가의 후계자가 태어나기만 한다면, 그건 분명 가문의 큰 기쁨이 될 거다. 라울도 어깨를 펴고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의원은 마기휼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 정도까지 말을 하면 그가 무슨 말을 할만도 했다. 그런데 지나치게 조용했다.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걸 느끼며 호그 의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붕대를 앞에 내려놓은 마기휼의 얼굴은 가면을 쓴 듯이 무표정이 된 채였다. 그걸 보는 순간 다소 겁이 났지만 의원은 웅얼거렸다.
“제가 틀린 말을 한 겁니까.”
“꼭 임신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요.”
의원은 눈을 깜박였다. 이쪽을 대함에 있어 어렵고 조심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몸짓을 보여주는 그를 향해, 마기휼은 천천히 한쪽 입술 꼬리를 올렸다. 그 웃음이란 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초야에 단박에 성공을 하는 부부는 드뭅니다. 했다고 제가 바로 임신을 하게 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혹시라도 임신을 하셨다면-.”
“임신은 안 됐을 겁니다. 그렇게 몸 상태가 안 좋았는 걸요.”
의원이 더 무슨 말을 하기를 막듯이 마기휼은 어깨를 으쓱였다.
“피까지 토하고 오한에 발열 상태가 왔다 갔다 했지요. 최악의 컨디션이었는데 임신이 되었겠습니까? 제가 볼 때에는 힘들 것 같은데요.”
“……확실히 그건 그렇지요.”
듣다 보니 수긍이 가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의원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앞에 놓인 약재와 통을 집어 들었다.
“이건 감사하게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붕대는 필요 없으니 그냥 들고 가시지요.”
마기휼은 미소 띤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는 그 얼굴에서 이쪽을 확실히 밀어내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의원은 마기휼이 임신이라는 상황을 기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긴 그렇기 때문에 저 오르베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약물을 사용한 것이겠지. 그렇게 해서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를 낳게 하겠다는 건가. 라울의 성정을 보면 아주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라울은 이런 비열한 방법을 써야지만 아이를 만들 생각을 할 테니 말이다. 그것이 자의가 아니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 라울을 보면 마기휼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른 것 같은데? 그리 생각을 하며 라울을 흘깃 쳐다보자 바로 눈이 마주쳤다. 아까는 이쪽이 아닌 마기휼을 보고 있던데 언제부터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던 건지를 모르겠다. 무안한 기분이 든 의원은 붕대를 집어 들었다.
“이건 가지고 가겠습니다.”
붕대를 가방 안에 넣었다. 잘 들어가지 않았다. 분명 긴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는 것일 거다. 붕대를 제대로 넣는 것을 포기한 의원은 그걸 대충 밀어 넣고 가방 문을 닫았다. 가방을 양손으로 들어 올린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조심스레 한마디를 더 했다.
“혹시라도 몸이 편찮으시면 바로 불러주십시오. 당장 달려오겠습니다.”
“일부러 달려오게끔 해드리진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마기휼의 말에 의원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물러나기 직전에 라울을 쳐다봤다. 다른 쪽을 쳐다보는 라울은 속을 읽을 수 없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 상황에 개입을 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무거운 한숨을 쉬며 의원이 밖으로 나갔다. 한쪽 문은 열린 채고, 다른 한 쪽만 닫았다. 그 문을 쳐다보던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양손에 들린 주머니 2개와 나무로 된 통. 그걸 보는 순간 왜 이렇게 기분이 착잡해지는지 모르겠다. 그것을 숨기듯 손을 움켜쥔 마기휼은 한숨을 토해 냈다.
“정말 임신이 안 되었다고 생각하나.”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잠시 그 눈동자 안쪽으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빛이 스며들었다. 잠자코 있던 마기휼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안 되었을 거야. 임신은 그리 간단히 되지 않아. 우리 어머니도 날 2년 만에 얻으셨다고.”
“나의 어머니도 날 5년 만에 얻으셨지. 형님의 경우 10년 만이었고.”
“……꽤나 힘드셨겠네.”
숫자로 세면 라울은 15년 만에 얻은 아들이라는 거였다. 라울의 어머니도 그 시간 동안 꽤나 가슴을 졸였을 터였다. 라우젝을 낳았을 때에도 말이다.
이렇게 두 가지의 경우만 보더라도 임신은 바로 되는 게 아니었다. 허니문 베이비 같은 건 100명 중에 한 쌍이 성공할까 말까 한 엄청난 확률이었다. 더군다나 요즘은 임신하기가 더더욱 어렵다고 한다. 하물며 남자들끼리의 임신이라니. 불가능했다.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에 또 한다고 해도 임신이 될 가능성은 없겠군.”
지금 당장 임신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을 하려던 찰나 들려온 묘한 소리에 마기휼은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라울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정말 그 말을 한 건지, 어떤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신이 환청을 들은 건가. 하긴 지금 몸 상태가 안 좋기는 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마기휼의 얼굴은 참으로 어색하게 변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그냥 묻지 않고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편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말을 꺼내서 쓸데없는 소리를 듣느니 모르는 척 자리를 피하는 게 더 현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라울의 눈빛이 변했다. 착 가라앉은 눈동자에 마기휼은 이미 다 가린 몸을 숨기며 주춤거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나도 사내다. 마음이 있는 상대를 안고 나서 참으라 한다면, 그건 힘든 일이지 않겠나.”
“……뭐라고?”
그래. 내가 네 취향이라고 치자.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는데 뼈와 살이 타는 밤을 보낸 것도 사실이었다. 라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쪽도 굉장히 적극적으로 허리를 흔든 기억이 선명했다. 하지만 그걸로 마지막이라고 알게 모르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듣게 된 말에 마기휼은 적잖이 당황했다.
“다시 또 할 거라는 거야?”
라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속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로 바라보더니 바로 고개를 돌린다. 말없이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한쪽에 남아 있던 문까지 닫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허탈함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엎드려 누운 채로 있던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뜨고는 있어도 그 얼굴이 멍했다. 마기휼의 머릿속으로는 조금 전 라울이 한 말과 그가 보낸 눈빛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복도를 걷는 동안 라울의 무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실제로 복도를 걷던 고용인들은 라울이 나타나면 모두가 옆으로 물러서고는 했다. 그렇게 침묵이 감도는 저택 안에서 조금씩 시끄러운 소리가 퍼져 나갔다. 그건 아래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특유의 높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확인한 라울은 발을 멈췄다. 가만히 있나 싶던 그는 계단을 내려갔다.
홀 가운데로 짐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새롭게 포장이 된 것들에서부터 원래 있던 가방들까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고용인들과 키가 작은 아이들은 그 짐을 옮기기 위해 낑낑거리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서 있는 오르베는 산뜻한 얼굴로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역시 집이 최고야. 다른 곳은 영 나와는 맞지 않아. 다시 샤워를 하고 새 드레스로 갈아입어야겠어. 배가 고프니까 식사 준비도 해 두도록.”
“네. 오르베 님.”
오르베의 지시에 여자가 급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한 시종이 분홍 상자를 집어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오르베의 손이 그를 가리켰다.
“그 짐은 조심해서 운반하도록 해. 그 안에 든 건 너희의 목숨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있는 것들이란 말이야.”
눈을 매섭게 뜨는 모습이 무시무시했다. 기가 죽어 ‘조심히 운반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한 시종이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걸 확인한 오르베는 짤막한 코웃음을 쳤다. 오르베는 부채를 꺼내 흔들었다. 그 손길이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녀는 몸을 돌렸고, 계단 가운데에 서 있는 라울을 발견하고는 눈이 크게 떠졌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내 귀여운 조카님.”
동요조차 없었다. 그녀는 너무도 해맑게 웃으며 라울에게 달려가 그의 앞에 섰다. 부채로 얼굴의 반을 가린 그녀는 눈을 가늘게 휘었다.
“어쩐지 하룻밤 만에 사람이 달라진 것 같네? 얼굴색도 좋고, 조금 더 늠름해진 것 같아. 완연한 사내라고나 해야 할까? 진정한 어른이 되었구나.”
부채를 접어 라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장난스러운 그 반응에도 라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무섭도록 굳은 얼굴. 그 얼굴이 다른 때와 달랐다. 미소로 무마를 하려 해도 더는 무리였다. 오르베는 부채를 양손으로 감싼 채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그렇게 화를 내지 마세요. 나만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었잖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을 위한 일이었어요.”
“나를 위한 일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럼요. 모두 라울 당신을 위한 일이었어요.”
오르베는 라울이 서 있는 계단 옆으로 올라갔다. 라울의 팔에 양손을 두르고 발끝을 세워 그의 귀에 입술을 댔다. 라울만이 들을 수 있도록 나직이 속삭였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취향인 사내를 품어 아이를 낳으면 그만큼 좋을 일이 없잖습니까. 그 아이가 미래의 노르디아 국왕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노르디아 내에서 우리 안제크의 지위는 확고해집니다. 더불어 당신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되지요. 모든 게 당신의 뜻대로 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사내를 취해도 되어요. 저런 촌스러운 사내 말고, 세련되고 아름답고 훈련을 잘 받은 청년들로 말이지요. 라울. 당신만의 하렘을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오르베는 간사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들이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지금 하는 말에 자신의 이득은 손톱만큼도 들어가 있지 않다. 내 말을 따르면 얼마나 좋은지 아느냐. 반질거리는 눈동자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런 식이었다. 이 여자는 말이다.
그 순간 라울은 치밀어 오르는 혐오와 분노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끔 되었다. 그는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웃던 오르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지고 그녀가 급히 뒤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있던 그녀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계단에 주저앉았다. 한껏 화려하게 치장을 한 머리가 흐트러져 한쪽으로 무너지고 그녀가 아끼던 드레스가 구겨져버렸다. 그 외에도 드레스에 장식되어 있던 보석이 떨어져 나갔다.
아무도 움직일 수도 없고 소리도 내지 못했다. 오르베가 산처럼 가지고 온 짐을 옮기기 위해 분주했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듯 행동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동안 라울은 주먹을 쥐었다. 옆으로 뻗은 팔을 천천히 내렸다. 그는 주저앉은 오르베를 내려다봤다.
녹빛 눈동자에 서린 또렷한 혐오와 증오를 읽은 오르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나에게 이 무슨―”
더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오르베는 라울을 바라봤다. 재차 그 복잡함이 담긴 눈동자를 보게 되었을 때, 오르베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당장 이 저택에서 나가.”
더 소리를 지르려던 오르베가 움찔했다. 안 그래도 큰 그녀의 눈이 더 크게 떠졌다. 지금 들은 말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라울은 더 정확한 억양으로 말을 전했다.
“너 따위가 들어와서는 안 되는 장소였다. 이곳은 너 같은 게 들어와 네 멋대로 굴어서는 안 되는 장소란 말이다.”
가만히 있던 오르베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녀는 웃으려 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어찌 천하의 오르베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다른 곳도 아닌 저택에서. 그것도 다른 고용인들이 다 보고 있는 곳에서 말이다.
어이가 없고 너무도 분했다. 치유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자존심에 크나큰 타격을 입었다. 오르베는 앞으로 몸을 내밀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곳에서 한 발도 나가지 않겠어! 여기는 내 집이야!”
“그러면 나갈 마음이 들게 하면 되겠군.”
무덤덤하게 중얼거린 라울은 계단을 내려갔다. 직후 그가 한 행동은 홀에 쌓인 짐을 바깥으로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모두 던져버렸다. 상자나 가방에 담겨 있던 것들이 던져져 흙바닥 위로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 안에 드레스나 보석들이 흘러내렸다. 고풍스러운 새하얀 드레스가 바닥에 떨어져 흙 범벅이 되었을 때, 아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 주인님! 그러지 마세요!”
“꺄아아악!”
소리를 치는 사람들을 본체만체하며 라울은 할 일을 했다. 상자를 던지고 가방을 던졌다. 건장한 사내라 해도 양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무거운 짐을 한 손으로 잘도 던졌다. 휙휙 던져진 것들이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박살이 나듯 입을 벌렸다. 라울은 멈추지 않았다. 이쪽이 막을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울며 오르베에게 달려갔다.
“마, 마담. 무서워요.”
“살려주세요. 마담-!”
아이들은 그녀에게 매달리지도 못하고 그 주변에 모여 숨을 죽였다. 아이들이 덜덜 떠는 만큼 다른 고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렇게나 거친 라울은 처음이었다. 거의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큰 충격에 빠진 듯 모두가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하고 침묵하는 동안 라울이 손을 털며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당장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모든 짐을 바깥으로 옮기도록 해라. 이 저택에서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그런데도 나가지 않는다 한다면 찬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정원에서나 살게끔 해라.”
라울의 말에 집사는 입을 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르베였다.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오르베가 계단을 한 칸 내려왔다. 아래에 모여 있던 아이들은 숨을 죽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르베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나를 이리도 모욕을 주고 괜찮으실 것 같습니까?”
악문 이 사이로 나오는 나직한 증오가 라울에게 향해졌다. 하지만 라울은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발칙하다는 듯 오르베는 목소리를 더 크게 냈다.
“너의 비밀을 숨겨주고 지금까지 뒤를 봐준 나에게 이 무슨 짓거리야! 부모를 잃은 너희 두 형제가 이 안제크가의 주인으로 성장한 것은 모두 내 덕이었어! 그런데 나를 이리 박대해?! 지금 당장 네가 지닌 그 모든 것들을 빼앗아버리겠어! 널 온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게 할 거야!”
“할 수 있다면 그리하시지요.”
차분한 반박에 오르베는 숨을 삼켰다.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고 그녀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앙 다문 입술이 씰룩거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그녀의 전신을 휘몰아쳤다. 지금 당장 쓰러지지 않는 게 용할 따름이었다. 오르베는 이를 잘근잘근 씹었다.
“꽤나 세게 나오는데? 그래 봤자―”
“나의 몰락이 곧 안제크의 몰락이 될 것이다.”
오르베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라울은 그런 그녀에게 서서히 접근을 했다.
“나 하나에 의지해 지나치게 많은 패를 던진 것은 바로 오르베 당신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대 멋대로 행동할 수 있을까.”
라울은 오르베의 앞에서 멈춰 섰다.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 순간 그가 말했다.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리 단정적으로 말하는 의사가 전해졌다.
오르베의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들어 갔다. 너무도 분해서 견딜 수가 없어 눈물이 나오는 거였다. 그녀를 외면한 채로 라울은 위로 올라갔다. 오르베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미동이 없었다.
두 사람의 다툼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홀에 있는 이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했다. 숨을 쉬지 못해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3층 난간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던 라우젝은 희미한 조소를 머금었다.
“폭풍이 불겠군.”
알에 잠들어 있던 용이 눈을 뜬 격이었다. 계기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언제고 이리될 일이었다. 라우젝은 동생 라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금욕적이고 바른 사나이로 보이는 그이지만 결국 그도, 안제크가의 사람이었다. 근본부터 뭔가가 뒤틀리고 추악하게 일그러진 괴물 같은 집단에서 태어난 생물이었다. 그런 그가 다른 이들과 같겠는가.
지금 건드리지 않았으면 몇 년 동안은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무리한 수를 써서 이렇게 비참한 꼴을 당하는 거였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더 히스테리를 부리지도 못한 채로 오르베는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라우젝의 입술 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비웃는 표정. 그걸 본 오르베의 얼굴이 더 창백하게 질렸다. 분함을 참지 못한 그녀는 머리에 꽂고 있던 진주 장식을 잡아 바닥에 던져버렸다.
바닥에 부딪힌 진주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르베는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라우젝은 키득거리고 웃었다.
“드디어 마녀를 쫓아냈군.”
라우젝은 기둥에 등을 기대고는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넘겼다.
“이제는 망가진 마녀의 지팡이만 쫓아내면 될 텐데, 나는 그냥은 안 물러나고 싶은걸.”
라우젝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쳐다봤다. 빛에 따라 그 색이 달라지는 샹들리에는 눈처럼 하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마기휼은 오늘의 몸 상태를 확인해 봤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난 이틀간보다는 상당히 나아진 수준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은 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기휼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한쪽 발을 내리자 서늘한 감각이 발바닥 전체를 통해 퍼졌다. 안도감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똑바로 서서 몸을 돌리거나 양팔을 위로 들거나 했다. 나쁘지 않았다. 마기휼은 만족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잽싸게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3일째였다. 그간은 몸을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어 내내 방 안에만 처박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마기휼은 복도를 달려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이내 멈춰야 했다.
지나치게 조용한 듯싶었다. 원래 이런 식으로 바깥으로 나오면 나타나야 할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시끄럽게 구는 아이들이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었지만 너무 조용한 것도 좋지 않았다.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주변을 살폈다.
적막감에 감싸인 상태라니.
이 저택에 와서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어이―?”
부르고 가만히 있었다. 별 반응이 없었다. 이건 정말 이상한데?
눈을 굴린 마기휼은 천천히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복도의 저 끝을 쳐다봤다. 꺾어진 복도 쪽으로 작달막한 머리통이 나타날지도 몰랐다. 그 뒤로 똑같은 얼굴 네 개가 더 나타날지도 모르지.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시끄럽게 웃으면서 재잘거릴 거다. 이쪽은 그런 아이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가 없으니 그저 조용히 해 달라는 턱도 없는 부탁을 하게 될 거고 말이다.
턱 끝에 손을 댄 채로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려던 찰나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은 바로 등 뒤에서 전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라울이었다.
눈이 마주치는 동안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문 채로 가만히 있으려니 라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를 가려는 거지?”
“……몸이 한결 개운해져서.”
“그래서 뛰어다니는 건가?”
신나서 방에서 나오자마자 뛰어다니는 걸 본 건가? 뛰다가 갑자기 쪼그리고 앉는 것도 봤을까?
마기휼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그 오묘한 얼굴을 확인한 라울은 손을 내밀었다. 말은 없지만 의사는 전해졌다. 잡으라는 건가.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다. 그러니까 괜히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나는 보호를 받아야 할 여자도 아니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갑자기 꽁해 있는 성격도 아니란 말이지.
마기휼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로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은 것 같네.”
진짜 실없는 말이었다. 이렇게 어색한 말이라니.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을 걸. 지금은 뒤로 물러나는 라울의 손을 잡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시선을 느끼고는 바로 입을 앙다물었다.
빌어먹을. 이제는 입술을 핥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는 거냐. 물론 입술을 핥는다 해서 당장 뭔 일이 생기는 건 아닐 테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무엇을 방심할 수 없는 거냐고 묻는다면 그에 따른 대답을 하기가 상당히 곤란해질 것 같았다.
마기휼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자연스럽게 이 불편한 상황을 넘기자고. 그리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라울은 마기휼을 응시했다.
“여기서 나갈 건가.”
“아직은 거기까지 생각을 안 해봤는데―.”
지금 당장은 몸 상태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3일째인 오늘이 딱 좋은 것 같았다. 마기휼은 한쪽 입술 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웃는 얼굴로 분위기 좀 전환해보려 했는데 라울은 여전했다.
저놈의 속을 읽을 수 없는 얼굴 표정. 답답해 죽겠네. 마기휼은 혀를 찼다.
“알았어. 방으로 들어가면 될 거 아니야.”
그래.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고 있다니까. 내가 이렇게 나와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잖아.
마기휼은 당장 몸을 돌렸고, 라울은 그런 마기휼의 팔을 붙잡았다.
“방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물론 말은 하지 않았지. 하지만 표정이 모든 걸 말하고 있잖아.”
내가 이렇게 나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이야.
라울을 똑바로 바라보나 싶던 마기휼은 그의 손을 치워 내고 앞으로 크게 한 발 내밀었다. 그러다가 잠시 멈추더니 뒷걸음질을 쳐 라울의 앞으로 돌아왔다. 손가락으로 라울을 가리켰다.
“대령님. 요즘 좀 한가하시나 봅니다?”
대령이라는 호칭에 존대를 사용해서 말하자 라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었다. 언제나 늘 바쁘던 라울이 어쩐 일로 3일씩이나 저택에만 있는 거란 말인가. 물론 저택에 계속 붙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지난 며칠 동안 이쪽이 방에서 나가기만 하면 꼭 눈에 보이는 쪽에 서 있고는 했다. 마치 감시를 하듯이 말이다.
감시라. 그런 걸 할 만한 사내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이것도 전부 라울의 대답을 들으면 확실해질 일이었다.
“당분간은 자택 근무를 할 예정이다.”
“왜 그런 겁니까?”
“내 마음이다.”
“…….”
때때로 라울은 이런 식으로 어린애같이 굴 때가 있었다.
내 마음이라. 그래 네 몸이니까 네 마음대로 해도 상관은 없겠지. 그래도 그런 식의 말이 너랑 어울릴 것 같으냐. 그리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걸어가는 동안 라울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피부에 찰싹 달라붙는 듯한 감각이었다. 언제부터 이쪽을 저런 식으로 쳐다봤던 거지? 처음부터 저리 봤었던 걸까?
묘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분이 드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인상을 쓰며 걸음을 서둘렀다. 라울의 눈빛이 너무도 묘했기 때문에, 주시를 당하고 있으면 이쪽마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만큼, 자연스럽게 마기휼의 걸음은 빨라졌다.
폭신한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한쪽 눈을 떠 창밖을 내다봤다. 한적하고 조용했다. 이러고 있으려니 이쪽 팔자가 완전 좋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이 집안의 뭐라도 되는 것 같았다. 첩 같은 거 말이다. 마기휼은 핏- 하고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5일째였다. 조금 더 몸 상태가 좋아진 것 같았다. 어쩌면 거의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기도 했다.
마기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복도로 나온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러다가 갑자기 나타난 라울과 마주치는 거 아니야? 눈이 마주치면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리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뒷짐을 지었다.
군에서 나온 지 열흘도 넘었다. 이 상태라면 제적도 가능했다. 물론 그 전에 통보가 있어야 할 테지만 말이다.
“마기휼 님.”
이름이 불리는 것에 놀란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집안의 집사가 보였다. 그는 마기휼이 돌아보자 공손한 태도를 취하며 마기휼에게 다가와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이분께서 연락을 취해 오셨습니다.”
누가 연락을 취해 온 건가 싶어 마기휼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안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곤 눈을 끔벅였다.
고개를 든 그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제 동생 이름인데요?”
“30분 후에 다시 연락을 주기로 하셨습니다. 통화를 바라신다면 절 따라오시지요. 통신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대귀족이자 왕통이 있는 저택은 뭐가 다르긴 하구나. 통신실도 따로 있는 거냐. 그런 게 있으니까 그 라울놈도 자택 근무 운운을 했던 걸까.
이쪽으로 편지도 보냈던 가휼이었다. 자신이 여기에 있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일일 터였다. 문제는 왜 자신에게도 연락이 왔느냐는 거였다. 이런 거라면 중간에 라우젝이나 오르베가 방해를 할 만도 한데 말이다.
지나치게 조용한 저택. 그리고 가휼의 통신 연락.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웠다.
“지금 라우젝은 어디에 있습니까?”
“승마를 하시러 가문 소유의 농장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면 라울은 저택 안에 없는 겁니까?”
“밖으로 나가진 않으셨는데 어디에 계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원래 한 곳에 들어가시면 모습을 잘 드러내는 분이 아니시기에…….”
웅얼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정확하게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외부에서 연락이 올 경우 이런 식으로 이쪽으로 직접 연결이 되는 건 굉장히 드문 것이 아닐까. 원래는 안 되는 일인데 특별한 경우가 아닐까. 아니면 달리 음모가 개입되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 망할 집안. 도무지 안심을 할 수 없다니까. 지금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 오르베와 라우젝이지만 언제 갑자기 짜잔 하고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도 좀 찝찝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가휼이었다. 마기휼은 집사를 슬쩍 흘겨봤다.
“이런 연락이 전에도 종종 온 적이 있었습니까?”
“제가 매번 연락을 받는 건 아니라서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이 저택에 마기휼 님이 계시는 걸 아는 걸 보아 전에도 한 적이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럼 그렇지. 마기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실은 어디입니까?”
안내를 해주겠다며 집사가 안쪽으로 팔을 뻗었다. 뒤를 따르며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조용한 저택. 그래서 더 이상했다. 결코 방심할 수 없다면서 마기휼은 부지런히 집사의 뒤를 쫓았다.
집사가 안내를 해준 곳은 의외로 평범한 응접실같이 생긴 장소였다. 하지만 가운데에 있는 건 군함에서도 쉽사리 접할 수 없는 최첨단의 통신기기였다. 너무 이질적이라 더 눈에 띄었다.
가만히 서 있으려니 집사가 뿌듯한 얼굴로 있었다. 자랑하고 싶어하는 얼굴이었다. 이쪽이 무슨 오두방정이라도 떨어줄 것을 기대하는 모양이겠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마기휼은 집사를 흘깃 봤다.
“이걸 사용하는 방법은 알고 있으니까 이만 나가주시겠습니까. 동생하고 통화를 끝내고 알아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한 20분 후에 다시 연락이 오실 겁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여기까지 안내를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고개를 조아린 집사는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집사가 나가고 난 후, 혼자 남게 된 마기휼은 의자를 끌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통신구 위에 양손을 올렸다.
정말 본격적이구나. 이런 게 저택 안에 있다니. 새삼 라울이 엄청난 부자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냥 이거 떼어다가 내다 팔면 15만 베리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잠시 생각을 해보던 마기휼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때 통신구 위에 달린 붉은 빛이 들어왔다.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더 일찍 반응을 보이는 통신구에 놀란 마기휼은 뒤를 돌아봤다. 20분 후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쪽에서 온 연락이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그러는 동안 붉은 불은 계속 들어왔고 마기휼은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천천히 동그란 통을 내려 귀에 댔다.
[실례합니다. 전 가휼이라고 합니다. 마기휼 씨와 통화가 가능하겠습니까.]
통신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조금은 다르게 들렸다. 이런저런 복잡함을 많이 느끼게 하는 상대라 해도 동생이기 때문에 듣는 순간 반가웠다.
마기휼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가휼. 딱딱하게 말하지 마라. 나다.”
평소와 크게 다름이 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편이 조용해졌다. 가휼도 갑자기 이쪽 목소리가 들리니 놀란 모양이었다. 당황스러운 듯도 싶었다. 그것이 느껴지자 보다 가벼운 기분이 되었다. 마기휼은 소리 내 웃었다.
“왜 아무 말도 없는 거지? 먼저 연락을 취한 사람이 대화를 주도해 나가야 하는 거 아니냐?”
[갑자기 형님 목소리가 들려서 놀랐습니다.]
“네가 통신으로 연락을 취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굉장히 놀랐지. 그래. 잘 지내고 있냐. 전에 내가 5만 베리 보냈는데, 잘 사용했고?”
5만 베리. 여기로 온 것도 그렇고, 다시 돈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에도 참으로 여러 가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끌어안고 있을 순 없었다. 잊을 수 있는 건 최대한 빨리 잊는 편이 좋았다. 난 머리가 나쁘니까 그런 거 금방 잊었다. 그래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할 수도 있었다. 가휼도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쳐줬으면 좋겠다.
[그 돈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빚을 갚는데 사용했으면 잘했다고 말을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휼이 하는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사용하지 않았다니?”
[너무 형님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 같아서 그냥 들고만 있습니다. 물론 20만 베리는 벌써 써버렸지만 말이지요. 저택과 호수가의 길, 그리고 형님이 좋아하셨던 언덕은 모두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20만 베리. 큰돈이었다. 저택을 지키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면 그걸로 좋았다. 그건 모든 가족과 조상님들이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었다. 장손이라는 의무를 떠나서 그건 마기휼이 개인적으로 꼭 지켜내고 싶은 부분이었다. 아버지는 지켜내지 못했지만, 하다못해 추억이 가득한 그 장소만이라도―.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5만 베리를? 이미 보낸 돈에 대해선 미련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뭔가 달리 문제가 생긴 건가. 마기휼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가휼. 5만 베리도 사용해도 되는 거야. 그건 너 주는 거라니까.”
[그 돈을 저한테 주기 위해서 형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에 쓸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라니. 오르베라는 망할 여자가 독 같은 약을 먹여서 죽을 뻔하고, 라우젝이 종종 속을 완전 뒤집어 놔서 위염에 걸릴 것 같고, 탈옥한 마리아 덕분에 스펙터클한 모험에 휘말릴 것 같기는 해도 아직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아닌가. 라울과 그런 일이 있었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한 걸 어찌 생각한 것인지 가휼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20만 베리로 적지 않은 빚을 갚고 저택도 넘어가지 않게끔 할 수 있었습니다. 노로베에 있는 수천 평 대지는 조금 팔아버렸습니다. 헐값은 아니고 좋은 금액으로요. 그걸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습니다. 내년이 되면 좀 나아지겠지요. 변호사를 고용해서 무턱대고 찾아와 돈을 갚으라고 행패를 부리는 이들에 대해서 적절하게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문서상으로 남지 않은 내용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 하더군요.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리 말을 하자 이번에는 깡패들을 끌고 오더군요. 그래서 저도 용병을 썼습니다. 그리고 형님이 북방군의 소령이라는 것도 소문을 냈습니다. 지금은 안베르 요새에 배치되어서 군함도 몬다고, 약간 허풍도 떨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찾아와 아버지께 돈을 빌려줬다 말하는 이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참 다행이지요?]
그런 거라면 다행이기는 했다. 무엇보다 당장 5만 베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면 그럭저럭 괜찮아진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상황이 더 악화되면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거지. 더군다나 가휼도 나름 잘 대처를 하는 듯싶어 안심이 되었다. 개선이 되는 게 보이면 더 열심히 할 의욕이 생기는 것 같다. 그냥 좀 편안해졌다.
“혼자서 힘들겠군.”
[아니요. 힘들지 않습니다. 전 형님이 걱정이 됩니다.]
걱정이 된다라. 라울과 그걸 하지 않았다면 단호하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도 아니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싶어 망설이게 된다.
“가휼. 나는…….”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왜 그랬던 걸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버린 일이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형님께 할 짓이 아닌 걸 많이 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가휼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마기휼은 긴장한 채로 숨을 죽였다. 그리고 정확히 13초 후, 가휼이 물었다.
[언제 로노베에 오십니까?]
말을 듣는 순간 마기휼의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좌악 빠졌다. 또 무슨 심각한 말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전에는 저택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가휼이 잘해주고 있으니까, 나도 어느 정도 도움을 주는 것 같으니까 그걸로 집안으로 살짝 들어갔다 나오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하지만 지금 바로는 아니었다. 조금 더 있은 후였다.
“지금 당장은 힘들 것 같다.”
[그쪽 일이 안 좋으신 겁니까. 혹사당하고 계시는 건 아닙니까.]
어떤 종류의 혹사인 걸까. 가휼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역시 동생에게 말을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괜한 걱정을 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기휼은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했다.
“가휼. 내가 물에 물 타고, 술에 술 탄 듯 구는 사람이라지만 정말 싫은 건 하지 않아. 안 되면 여기에 있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라울 대령은 굉장히 고지식하고 딱딱하고 규칙만 지키는 바른 생활 사나이지. 주변의 압력 같은 것에 휘둘리지 않아. 본인 판단이 아니면 끌려가지도 않아. 나랑 완전히 다르지만 동시에 같아. 우리는 아닌 일은 하지 않아.”
왜 우리라는 말이 나온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버린 걸 어쩌겠는가.
가휼에게 비밀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시간은 짧았는데 말이다. 원래 일이 터지면 겹겹으로 생긴다던데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아직은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그걸 가휼이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라울과 그런저런 일이 있을 거라는 오해는 삼가줬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눈을 내리뜬 마기휼의 얼굴이 알게 모르게 붉어졌다. 마기휼이 입을 다물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반대편의 가휼도 조용해진 채였다. 말없이 있던 그는 이내 먼저 말을 꺼냈다.
[형님.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응? 집안 문제라면 지금 해도 되는데?”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 그러면 근시일 내에 진짜로 집에 찾아가 봐야겠네.”
[네. 꼭 와주십시오. 형님이 보고 싶습니다.]
간질간질거렸다. 형님이 보고 싶다니. 아주 어렸을 적에도 들어본 말이었다. 새삼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마기휼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살짝 웃었다.
“꼭 찾아갈게. 그때까지 기다려라.”
[……고맙습니다. 형님.]
고맙다니.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야.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잖아.
이런저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 동안 “이만 끊겠습니다.”라는 말이 들렸고 곧 가휼의 목소리나 호흡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쉽사리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이제서 연락을 해 온 가휼의 상태가 이상했다는 느낌이 든 탓이었다.
이쪽이 알고 있던 가휼이 아닌 것 같았다. 잘 웃고, 장난꾸러기지만 동시에 수줍음이 많던 아이가 중간 성장과정을 다 떼어 놓고 어른이 되어버린 거였다. 그에 대한 안쓰러움이 있었다. 18살 때부터 그 저택에 남았던 가휼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보며 어른이 되었던 걸까.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들고 있던 걸 내려놓고 책상에 양손을 올렸다. 긴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목을 좌우로 까닥였다. 목 뒤가 뻐근했다. 피곤했지만 문득 북방군 사령관에게 연락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미 제적된 상태 아니야? 그럴 리가 없겠지만 불현듯 드는 걱정에 마기휼은 급히 북방군의 좌표 번호를 눌렀다.
최신식인 것도 있고 통신기기는 원래 사용하기에 복잡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 위를 움직이는 마기휼의 손은 자유로웠다. 아주 예전에 이쪽이 너무 기력 없이 구니까 사령관이 화를 내며 ‘너는 통신병이나 돼라!’라며 1년 동안 이쪽 걸 익히게 했던 것이다.
물론 딱 1년만 했을 뿐으로 이후로는 사령관도 두 손, 두 발을 들었었다. 배울 때 나름 평판 좋았는데. 그대로 주욱 갔으면 중앙군의 군함에 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며 딱딱하고 차가운 동그란 통을 집어 귀에 댔다. 그러자 잠시 후 반대편으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히 알고 있는 음성이었다.
“북방군 사령관실입니까? 저는 마기휼이라고 합니다. 사령관님께서 자리에 계십니까.”
[마기휼 소령님이십니까? 기다려주십시오. 바로 연락을 해드리겠습니다.]
상대방도 이쪽 목소리를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바로 연락이 갈 수 있었다. 원래 사령관은 이렇게 쉽게 연결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중간에 몇 번의 연결음이 들리고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우리의 왕자 마기휼이 전화를 다 걸어주시는군. 참으로 반갑군.]
“놀리지 마십시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지. 난 언제나 잘 지내. 자네는 어떤가? 특별휴가는 이미 훌쩍 지나버린 것 같은데 말이야.]
“저도 그것 때문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걸까? 불명예 제대가 되려나.]
“그건 좀 곤란한데요.”
사령관의 목소리로 장난스러움이 한가득 묻어났다. 평소에도 유머가 있는 사령관이긴 하지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에는 엄청난 질책과 비난을 퍼붓는 사람이었다. 그냥 할 일만 제대로 하면 화를 낼 일 없는 사람이었다. 특별 휴가 기간이 굉장히 오래 지났는데도 이렇게 사근사근한 것을 보면 사전에 누군가 먼저 손을 써준 모양이었다.
그게 누군지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앞으로는 훈련도 잘 받고 수업도 열심히 듣겠습니다. 변방으로 나가서 보초 임무도 자진해서 설 테니까 어떻게 좀 선처를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게나. 라울이 이미 연락을 취해 왔네.]
아. 역시나.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그래. 마지막 날에 알고서 연장 신청을 하더군. 지금 중앙군 소속이지? 힘을 좀 써서 한 달 특별 휴가를 얻어줬어. 그간 마음 좀 추스르고 기운 다 차려서 오도록 해. 돌아와서도 처진 모습으로 있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알았나?]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대답을 하는 마기휼은 다소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이후로 사령관 쪽에서 먼저 이런저런 걸 물었다. 부친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장례를 치른 것에서부터 가족들 이야기까지. 그리고 지금 라울과 함께 있는 거냐면서 그에게서 잘 배우라는 말도 전했다. 그쪽보다 이쪽 경력이 더 긴데 뭘 배우라는 거야. 내가 그놈보다 더 잘한다니까. 그런 생각을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아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러다가 통신이 끊겼다.
통신구를 내려놓은 마기휼은 재차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라울 이놈. 그래도 꽤 신경을 써준단 말이야. 아예 관심이 없다면 이렇게 해주기도 힘들 텐데. 나한테 관심이 있나. 나를, 좋아하기는 하겠지만.
순간적으로 마기휼을 흠칫하고 놀랐다. 지금 뭔 생각을 하나 싶어 뺨을 마구 토닥인 그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인상을 쓴 채로 통신기를 노려봤다.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걸 하기로 하자. 이걸 사용해서 다른 사람하고 연락을 취하는 거야. 좋았어. 씩씩하게 손을 뻗다 말고 마기휼은 인상을 썼다. 달리 연락을 할 만한 사람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 구경도 하기 힘든 통신기를 앞에 두고 더 연락을 취할 사람이 없다는 게 거시기했다. 더 있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정말 없나.
위를 쳐다본 채로 으음- 하는 소리를 내던 마기휼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라울을 발견해냈다. 라울은 정확히 이쪽을 봤다. 애초에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투였다. 그 눈빛을 받은 마기휼은 자리에서 일어나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설렁설렁 걸어갔다.
“누구에게 연락이 온 거지?”
옆을 지나치기가 무섭게 묻는 말에 마기휼은 라울을 흘깃 봤다.
“동생한테서. 여기 위치를 알고 있었나 봐. 고맙게도 모처럼 연락 잘 주고받았지.”
자연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굴어야 해. 오로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나가는 건 이상하다 싶었던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잘생긴 얼굴을 앞에 두려니 괜히 움츠러드는 것 같다. 주춤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마기휼은 최대한 태연히 말을 꺼냈다.
“자택 근무는 계속되는 거야?”
“그렇다.”
“그래?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마기휼은 라울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완전히 라울에게서 떨어져서야 온몸에 들어간 힘을 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일단 그렇게 라울을 두고 방에서 나온 마기휼은 복도를 걸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 땀 나. 그리고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다며 손부채질을 하던 마기휼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봤다.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넓기만 한 저택. 사람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적막한 공간. 처음에는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적응이 되는 것 같았다. 때때로는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사람은 적응이 빠른 동물인 거냐며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던 마기휼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노르디아의 중심 수도는 안베르로, 안베르에는 수많은 귀족 가문들이 밀집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귀족가는 한 손에 꼽을 정도이고, 안제크가도 그에 속해 있었다. 그 안제크가의 젊은 가주인 라울이 이번에 안베르로 돌아와 경계선 쪽 요새를 맡았다는 정보가 돌았을 때 대부분의 귀족들은 안도했다.
라울은 정평이 난 군인이고, 요새에는 강력한 군함이 몇 대나 정박해 있어 위급 상황 발생 시 그들이 나라를 잘 보호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지금 안베르가 노르디아의 수도로서 적합한지에 대해서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연방국의 수도는 모두 나라의 중심 지역에 위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르디아만이 유독 경계 지역에 밀착하는 곳에 수도가 있었다. 여왕의 안전을 위해 중심부로 이동을 해도 좋을 만한데도 말이다. 그리고 종종 그 건의가 올라오고는 했다.
“안베르가 아닌 토호로 수도를 옮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을 꺼낸 중년 사내는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앉은 여성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쫓아 모두가 그녀를 바라봤다.
목을 감싸는 체형에 딱 맞는 하얀 제복을 입은 여성은 은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머리 위에 동그랗게 말아 올렸다. 그리고 그 머리에 금빛 왕관을 쓰고 있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장신구 하나 없었으나 충분히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특히나 차분한 그녀의 청안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마음이 평안하게끔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노르디아의 여왕인 가이나였다. 언제나 여왕은 아침마다 티타임을 가졌다. 그 티타임에는 늘 다른 얼굴의 대신과 귀족, 노르디아의 요직에 있는 이들이 참여를 했다. 그리고 오늘 모인 이들은 열 남짓. 그들이 오늘 나누는 대화의 요는 수도를 옮기자는 거였다.
“최근 안베르에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어떻게 봐도 왕정을 위협하려는 발칙한 무리의 소행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지리적으로 외부로 쉽사리 빠져나갈 수 있으니 저들의 방식도 점점 대범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안으로 옮기신다면 그들도 쉽사리 파고들 시도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퇴로가 차단될 수 있으니 말이지요. 여왕 폐하의 안전을 위해서도 수도를 옮기실 것을 진지하게 권유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여왕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나는 침묵했다. 찻잔을 들어 맛을 보고 그걸 내려놨다.
“수도를 옮기면 여러분들도 이동을 하셔야 합니다. 권력이 분산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보다는 여왕 폐하의 안위가 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가이나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절 기쁘게 하는군요. 하지만 수도는 이동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앞으로 더더욱 집요한 테러를 감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될 경우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해적과 테러를 피해 여왕이 이동할 수는 없습니다.”
온화한 표정을 짓던 여성은 금세 냉철한 여왕이 되어 말했다.
“저들과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불온한 세력이 테러를 감행하기 이전에 그걸 막으세요. 사고가 나기 전에 미연에 방지하고 덫을 놔 잡도록 하세요. 앞으로 한 달 안에 그 성과를 나에게 알려야 할 것입니다. 다들 노력해주세요.”
여왕이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것에 대한 사안을 재차 권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여기까지였다. 이것이 한계였다. 그걸 깨달은 귀족들은 입을 다물고 대신에 훌륭한 맛의 차를 즐겼다. 몇 분 동안 사담을 나눈 후, 여왕은 고개를 들었다.
“오늘 아침 티타임은 이걸로 마무리 짓도록 하지요. 다들 오늘 하루 열심히 노력해주십시오.”
“저희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자리를 정리한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의자를 밀어 넣고 몸을 돌리려던 찰나 여왕이 입을 열었다.
“라울.”
귀족들은 숨을 죽였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가장 구석에 조용히 있었던 미남자를 확인했다. 군복을 차려입은 사내는 여왕을 바라봤다. 라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여왕이 미소를 지었다.
“잠시 있다 가세요.”
“네. 폐하.”
대답을 한 라울은 의자를 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라울이 자리에 앉는 걸 보고도 다른 이들은 뭐라 하는 얼굴들이 아니었다. 여왕과 라울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다들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바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가고 난 후, 라울은 가이나를 바라봤다. 가이나도 다른 이들이 있을 때와 달리 라울을 똑바로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가이나가 입을 벌리며 웃었다. 조금 전의 격식을 차리던 얼굴이 아닌, 마치 어린애 같은 웃음이었다.
“안베르로 온 지 꽤 되었는데 늦게 불러 죄송합니다.”
“바쁘셨던 게 아닙니까. 저도 적응을 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 지금은 얼마나 적응을 하셨습니까?”
“아직은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여왕은 소리 내 웃었다. 대신과 귀족들 앞에서는 정좌를 했던 그녀는 다리를 꼬았다. 의자에 몸을 기댄, 다소 느슨한 자세를 취했다.
“튜완 사령관이 동분서주하고 있더군요. 그는 좋은 사람이긴 하나 훌륭한 참모는 아닙니다. 그가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다려보십시오. 타고난 우직함으로 잘 마무리를 지으실 겁니다.”
“그리고 그 마무리를 짓는 동안 당신은 몇 번이나 도움을 줄 생각이신가요?”
라울은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으로 변하는 걸 확인한 여왕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들에 대해 알고 있다면 말씀을 하세요. 보아하니 이번 문제는 그리 호락호락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나와 당신을 자극하고 있어요.”
뺨에 손가락을 댄 그녀는 생각에 잠기는 듯싶다가 중얼거렸다.
“그들이 원하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타협 또는 구걸이 아니겠습니까.”
구걸이라.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그들이 사용하는 방식은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도발을 지나쳐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몸짓이었다.
시간을 끌수록 이쪽이 불리해진다. 그들은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거기다 그들은 그 지점에 대해서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물음에 라울은 여왕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이나는 테이블에 한쪽 팔을 올리고 그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이미 그들을 끝낼 수 있는 묘안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렇게 쉬이 해결을 볼 수 있는 자들이라면 진작 문제는 해결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리 만만한 자들이 아니지요. 게다가 늘 저에게 레드존으로 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레드존이라고 하셨습니까?”
되묻는 여왕의 얼굴이 변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의외의 말은 들은 것이겠지. 단순한 테러 조직들이 그 지역에 대해 거론을 한 것이었다. 이로써 여왕도 그들을 하찮은 무리로만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 거다.
라울은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턱에 손가락을 댄 채로 생각에 잠겨 있던 여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곳에 가기를 원한다라. 그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페하.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는 듯싶습니다.”
“큰 이상을 품고 있단 말입니까.”
큰 이상. 현재에 안주하고 만족하는 이들은 결코 바라지 않는 것. 하지만 현재에 불만을 품고 체제를 바꾸길 원하는 이들이라면 레드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그곳을 완전히 정악하게 된다면, 이 세계를 통제할 수 있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이미 전설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미 1500년 넘게 시간이 흘렀지요. 인류가 다시 이만큼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불과 400여 년 남짓입니다. 천 년이라는 시간의 과거는 이제 전설로밖에 남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그것에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는 겁니까?”
“거기까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바꾸고 싶은 걸까요?”
“그런 마음을 품는다 한들 그들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차분한 말에는 큰 감정의 폭이 느껴지지 않았다. 라울은 어디까지나 침착했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말을 하고 난 후, 이쪽이 생각을 할 수 있게끔 하는 여유를 제공했다. 그리고 여왕은 그런 라울의 태도가 싫지만은 않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여왕의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라울 같은 이는 없었다. 때문에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이런 식으로 라울과 대화를 나누는 건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오르베가 절 찾아왔습니다.”
오르베가 거론되는 순간 라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가 불쾌해하는 걸 흥미롭게 여기며 가이나는 턱을 괸 채로 그를 바라봤다.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가 장난스러웠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듣고 싶지 않았으나 그녀가 질문하기를 원하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던가요.”
“당신이 그녀를 박대한다며 눈물로 호소를 했습니다. 비록 집안에서 나간 몸이라고는 하나 안제크가를 지금까지 이끈 것은 그녀 자신이라고 하더군요. 결국 당신의 뜻을 꺾고 다시 그 저택으로 들어갈 수 있게끔 도움을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그녀를 다시 집안으로 들일 마음은 없습니다.”
단호한 말에 가이나는 ‘이런-.’ 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오랫동안 잘 지내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 그녀와 반목을 하시려는 겁니까. 그녀는 적이 되면 무서운 사람이랍니다.”
“사람들의 평판 따위는 두려울 것이 못 됩니다. 그리고 제 평판을 망가뜨리는 건 곧 가문 자체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르베가 오랫동안 집안을 이끈 것은 사실이었다. 이쪽이 군에 가 있는 동안 가문의 실세가 되었던 것도 오르베 그녀였다. 이쪽은 사교에 취약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걸 훌륭하게 커버를 해줬다. 이번 일로 사람들이 그녀의 곁으로만 몰리게 된다면 생각하기에 따라 굉장히 안 좋은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안제크가에서 왕통으로서 인정을 받은 건 자신과 라우젝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우젝은 성장하지 않는 몸으로, 사람들 앞에 공공연히 나설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상황과 주변 평판을 봤을 때 그나마 자신이 가장 나았다. 그녀가 이쪽이 아닌 성장하지 않는 라우젝을 안제크가의 주인으로 밀지는 않을 거다. 그녀는 겉보기가 좋은 이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지금에 와서 안제크가의 주인을 바꿀 순 없었다. 오르베 그녀에게 그 권한이 있었다 한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라울은 그녀가 손을 대기에는 지나치게 성장해버린 감이 없잖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그리 생각 없이 행동을 취하진 않을 것입니다.”
이쪽 평판을 어지럽히고 몰락하게 한다는 건 결국 안제크의 몰락을 의미하는 거였다. 안제크가는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해도 실상 상당 부분이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그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굳은 라울의 얼굴을 바라보던 여왕은 한쪽 입술 꼬리를 올렸다. 미묘한 미소를 짓던 것도 잠시 여왕은 찻잔에 손을 댔다.
“당신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군요.”
라울의 녹빛 눈동자가 움직였다. 움직임에서 동요가 읽히지 않았다. 그것이 여왕을 흥미롭게 했다.
“여왕이 아닌 여자의 감으로서 말하는데, 확실히 뭔가가 달라졌어요.”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폐하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2년 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나요.”
2년이라는 시간은 긴 것이었지만 그간 놀고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때문에 그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때문에 지금 보이는 라울의 변화가 색다르면서도 놀라웠다. 여왕은 라울을 바라봤다. 차분하게 변한 눈빛 아래로 연정과는 또 다른 호감이 전해졌다.
“라울. 우리는 여왕과 가신이라는 입장 말고도 다른 관계가 정립되어 있어요, 그건 바로 친구지요.”
친구라는 호칭에도 라울은 가만히 있었다.
여왕과는 동갑으로,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부모님의 품에 안겨진 상태였을 때였다. 그때 라울은 1살이었고 여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만나게 되어 암암리에 여왕의 배필이라는 인식을 주변 사람들에게 심어주게 되었다. 노르디아에는 라울의 연배인 왕통이 다섯가량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라울을 가장 쳐주고 그에게 왕통이라는 걸 강조하는 건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 비해 라울을 대하는 여왕의 태도는 확실히 살가웠다.
“라울. 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번 테러 건은 가능한 빠른 처리를 요구합니다. 전 그 상황이 오래 유지되어 내 백성들이 불안에 떠는 걸 원치 않아요.”
그보다는 레드존이라는 장소를 평범한 이들이 알아버리는 걸 저어하는 것이겠지. 여왕의 속내가 읽혔으나 라울은 내색하지 않았다. 레드존이라는 장소가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는 건 라울 그도 바라지 않았다. 굉장히 껄끄러운 사안이니만큼 최대한 빠른 처리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
“폐하의 말씀을 잘 알아들었습니다. 속히 해결을 봐 결과물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 당신만 믿고 있겠습니다. 그렇기에 제 연락에 답이 없어도 그냥 넘어간 것이지요.”
“…….”
며칠 전 저택으로 여왕의 연락이 도착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라울이 아닌 라우젝에게 간 것이었다. 여왕이 대화를 하길 원하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지만, 라울은 침묵을 지켰다.
다른 이들이라면 굉장한 부담을 가질 만한 일에도 라울은 차분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넨 라울은 방에서 나왔다.
여왕에게 말을 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암시장의 존재였다. 원래 예정됐던 시일에 암시장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의 오차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바였기 때문에 그리 동요를 하진 않았다. 대신에 그 일로 인해 다음 암시장에 관한 위치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처음 장소에서 열릴 예정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쪽이 보낸 신호를 감지한 그들은 다른 세력이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음을 알고는 예정일과 장소를 아예 바꿔 버린 것이었다. 그로 인해 그들이 장소와 시각을 정하는 방식이 아주 조금 읽히게 되었다. 다음에는 일부러 신호를 보내지 않을 거다. 숨을 죽이고 있다가 그 속으로 진입하겠지.
그때가 마지막이 될 거라며 라울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다음 권으로 계속
WET NOVEL RED ZONE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