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27)

#10

“이곳으로 들어가십시오.”

안내한 집무실은 꽤나 쾌적하고 깔끔했다. 책을 좋아하는 라울의 성격답게 한쪽 벽면이 다 책장인 건 좀 거시기했지만 푹신해 보이는 소파와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는 마음에 들었다. 뒷짐을 진 마기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곳이로군요.”

“달리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면 굳이 밖으로 나오지 말고 그냥 안에서 말로 다 해결 보라는 거냐. 괜한 문제 일으키지 말라는 소리구만.

여군이 직접적으로 그리 말을 한 것은 아니건만 그리 해석하는 건 이쪽이 그만큼 뒤틀린 상태이기 때문일까? 그리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노골적으로 계속해서 틱틱거릴 순 없었다. 마기휼이 방으로 설렁거리며 걸어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난 후, 여군은 문을 닫았다.

혼자 방에 있게 된 마기휼은 근처에 있던 책장을 건드렸다. 손가락으로 책장을 툭툭 치면서 걸어가다가 주변을 주욱 둘러본다. 소파가 보였다. 그리로 가서 몸을 날렸다. 공중에 붕 뜬 몸이 소파에 안착을 했다. 늘어지게 누운 상태로 마기휼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심심했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문득 드는 생각에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이것도 불만, 저것도 불만이었다. 그럴 입장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열외의 대상이 되는 건 그리 썩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다. 나도 남들만큼 일을 잘 할 수 있단 말이지.

계속해서 아랫입술을 씰룩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소파에 길게 누운 상태로 위를 올려다봤다. 천장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지금 라울은 뭘 하고 있을까. 초반에 봤던 인상과 달리 확실하게 일을 하는 놈이었다. 분명 이쪽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모두 생각을 하고 일을 처리하고 있겠지. 마리아를 재차 잡으려 들 거다.

마리아. 무시 못 할 여자였다. 그리고 그 아이작이라는 사내도 말이다.

오늘 있었던 일은 그 두 사람의 합작품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확신을 할 거리는 하나도 없는데 왜 괜히 그리 생각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마기휼의 표정이 점점 진지하게 변했다. 그에 맞춰 갑자기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군인이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선 군인은 들고 있는 쟁반을 보이며 친근감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차 좀 드시라고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 목말랐는데 잘됐네요.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군인이 밖으로 나가고 마기휼은 자리를 바로 잡고 앉았다. 먼저 차를 마셨다. 미지근한 게 목 넘김이 좋았다. 다음으로 과자를 집어 들어 한입 물었다. 아주 딱딱하지도 않고 적당하게 부드럽고 달콤한 것이 좋았다.

원래 단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최고의 간식이었다. 입맛을 다시며 마기휼은 열심히 쿠키를 먹고 차를 마셨다.

“아, 그러고 보니 사령관님한테 연락을 안 했네.”

휴가는 딱 10일 정도를 받았다. 그런데 너무 속 편하게 있었던 거 아니야? 사령관님에게 달리 연락을 취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야.

……혹 모르지. 그 오르베인지 라우젝이라는 놈이 먼저 선수를 쳤을지도 말이야. 그런 쪽에는 꼭 손이 빠르단 말이지. 그렇다 해서 놈들에게 모든 걸 맡길 순 없었다. 일단 자신의 문제는 이쪽이 조금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면서 마기휼은 열심히 턱을 움직였다.

원래 생각이 많을 때에는 당분 섭취를 충분하게 하는 편이 좋았다. 그러다 보면 더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법이었다. 입맛을 다시면서 열심히 쿠키를 먹던 중에 문이 열렸다. 쿠키를 문 채로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라울이었다. 그는 양손에 쿠키를 들고 입에도 하나 물고 있는 마기휼을 확인하고는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온 라울은 마기휼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러는 동안 마기휼은 우물거리며 물고 있던 쿠키를 다 먹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걸 라울에게 권했다.

“드실 겁니까?”

“아니. 이런 건 또 어디서 준비를 한 거지?”

라울의 눈은 쟁반 위에 담긴 쿠키와 주전자, 그리고 찻잔을 살폈다.

이상한 물건을 보는 듯한 그 눈초리에 마기휼은 왜 그러냐는 듯 다른 쿠키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혼자 있으면 심심할 것 같으니까 대령님께서 보내신 거 아닙니까? 이거 맛있네요. 저 단 거 좋아하거든요. 조금 더 먹을 수 있을까요?”

손가락을 핥으며 말하는 마기휼은 너무도 태평했다.

“내가 보냈다고?”

“왜 그러십니까? 같이 먹어야 하는데 저 혼자 먹어서 화가 나신 겁니까? 아니면 쑥스러워서 그러시는 겁니까? 그러지 말고 어서 앉아서 좀 드십시오. 안 그러면 이거 제가 다 먹습니다?”

마기휼은 찻잔에 입을 댔다. 그 순간 라울의 눈이 빛났다. 그는 당장 찻잔을 들고 있는 마기휼의 손을 쳐 냈다. 호되게 맞은 손이 옆으로 휙 치워지고 들고 있던 찻잔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날카로운 음향을 내며 박살이 나는 찻잔과 동시에 안에 담겨 있던 액체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막 차를 마시려 했던 마기휼은 이 갑작스러운 일에 굳어버렸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던 것도 잠시, 그는 라울을 올려다봤다. 내려다보는 라울의 눈동자가 굳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마기휼도 순간적으로 열이 화악 올랐다.

“이제는 내가 뭐 먹는 것도 아까워서 이래?!”

마기휼은 벌떡 일어서 라울의 가슴을 세게 밀어냈다.

“왜 이러는 거야?! 이렇게 안 굴어도 나 지금 충분히 서럽거든?! 나도 내 입장 안다고! 쥐 죽은 척 숨죽이고 있어야 한다는 걸 알기는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왜 이렇게 치사하게 구는 건데?! 이렇게 하면 너 부자 될 것 같아?! 엉?!”

“너에게 이런 걸 보낸 기억은 없다.”

냉랭한 반박에 순간적으로 이성이 돌아왔다. 눈을 댕그랗게 뜨는 마기휼을 똑바로 바라보며 라울은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이런 음식 같은 건 집무실로 반입하는 것 자체가 금지다.”

라울은 원래 농담과는 거리가 먼 사내였다. 지금 하는 말도 거짓이 아닐 터였다.

“……그러면 이건 뭐야?”

굉장히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각. 그건 오한과도 같았다. 당했다.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에 마기휼은 당장 라울에게 따져 물었다.

“누가 보낸 건데?!”

소리를 치자마자 라울이 어깨를 잡아 있는 힘껏 뒤로 밀었다.

원한 것은 누가 보낸 건지에 대한 대답이었다. 갑자기 라울이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몸을 끌어안은 라울이 소파로 내리누르는 순간 마기휼은 기겁을 했다.

“우와! 왜 이래?! 하지 마!”

달라붙으려는 라울을 밀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라울은 마기휼이 움직일 수 없도록 하고는 그의 목을 한 팔로 감쌌다. 다른 손으로 턱을 잡자 마기휼은 사색이 되어 외쳤다.

“키, 키스 같은 건 싫단 말이야!”

“헛소리하지 말고 토하기나 해라.”

마기휼은 몸 위에 올라타 있는 라울을 노려봤다.

“왜 이래! 토하는 게 속에 얼마나 안 좋은 건지 알고나 있는 거야?! 잘 먹은 걸 왜 토하라고 하는 거야!”

말을 하는 동안에도 라울의 손가락은 집요하게 입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비위 상하는 것도 상하는 거지만 이런 식으로 라울이 달라붙는 건 사양이었다. 단단한 몸으로 내리누르는 상황 자체가 싫었다.

마기휼은 고개를 저으며 미친 듯이 저항했고, 라울은 라울대로 마기휼을 놓치지 않으려 하며 계속해서 그의 턱을 붙잡고 입을 벌리게 했다.

입술을 간신히 벌리고 손가락을 밀어 넣을라치면 바로 이로 깨문다. 아프기도 하지만 워낙에 저항이 세서 금방 손가락을 빼내야 했던 라울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냈다.

“가만히 있지 못해?!”

“너 같으면 가만히 있겠냐?!”

마기휼은 반항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눈으로 라울을 노려봤다. 악에 받쳐 한 소리 더 하려던 순간 갑자기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강하게 뛰어서 순간적으로 호흡이 멈추는 것 같았다. 마기휼의 몸으로 힘이 들어가고 눈이 크게 떠진다. 그 모습이 이상했기 때문에 라울도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는 동안 마기휼은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게 흐릿했다. 눈이 이상했다.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두어 번 터는 동안 뭔가가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속에서 역류하는 느낌. 저절로 입술이 벌려지고 뭔가가 흘러나왔다. 주르륵- 하고 토해져 나오는 걸 느끼며 위로 손을 들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왜 이러지?

슬슬 몸 상태가 이상해짐을 느낀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경악한 듯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라울이 보였다.

왜 그럴까? 모든 것이 흐릿하니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왜 라울 그의 얼굴은 또렷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마기휼은 입을 열었다.

“라―”

쿨럭- 하고 기침이 나왔다. 뭔가가 한꺼번에 입을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놀란 마기휼이 턱 아래를 닦아 내 손을 위로 들었다.

갈색 손가락 위로 붉은 피가 묻어 있는 게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마기휼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이게 대체…….”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왜 피를 토해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마기휼은 재차 라울을 쳐다봤고, 그 순간 라울이 마기휼의 위에서 떨어졌다.

어디를 가려는 거야?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엄습한다. 마기휼은 양손으로 라울을 붙잡았다. 라울은 그를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기휼은 천천히 입을 벌렸다. 피에 젖은 입술이 뭔가를 전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내 그런 자신의 상태에 답답함을 느끼는 건지 보랏빛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들어 간다. 또 울려 하고 있었다.

라울은 당장 위에 옷을 벗어 마기휼의 얼굴에 덮었다. 그가 피를 흘리는 걸 다른 이들이 볼 수 없게 한 후 그 몸을 안아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양팔이 라울에게 매달린다. 고개를 흔들면서 기침을 했다. 그때마다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거다.

라울은 마기휼을 안아 든 채로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걷던 군인이 그런 라울의 모습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대령님?”

“난 지금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겠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쪽으로 연락해라.”

“아,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군인은 이내 자신이 라울에게 예를 차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라울이 워낙에 다급한 얼굴인지라 버릇없이 양팔을 늘어뜨린 채로 있었던 거다. 지금이라도 깨달았을 때 경례를 하는 게 좋겠다 싶어 손을 들었지만 이미 라울은 저 멀리로 사라져버린 후였다. 라울 그답지 않게 굉장히 서두른다. 이마를 누르고 있던 손을 내리며 군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차를 준비해라!”

밖으로 나오자마자 외치는 소리에 인근에 있던 모두가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라울을 보고는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하나같이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이내 라울 쪽으로 한 군인이 황급히 달려갔다. 그런 그를 노려보며 라울이 재차 소리를 쳤다.

“아니다! 마차 말고 차량을 준비해라!”

“차량을 말입니까?!”

“당장 내와라!”

서슬 퍼런 라울의 태도에 놀란 군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기다려주라는 건 말도 안 되었다. 재차 무슨 말을 하려 했던 라울이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서둘러 봤자 준비하는 시간이 단축되는 것도 아니었다. 라울은 안긴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라울의 눈빛이 어두운 빛으로 가라앉았다.

“대령님. 차량을 준비했습니다.”

막 달려와 멈추는 차량이 보였다. 라울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리로 걸어갔다. 뒷좌석에 앉아 품에 안은 마기휼의 허벅지 아래를 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군인이 거울 너머로 보이는 라울을 바라봤다.

“어디로 모실까요?”

물으면서 군인은 라울이 품에 안고 있는 마기휼을 쳐다봤다. 윗옷으로 인해 얼굴이 가려져 있어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사내인 것은 분명했다. 라울이 누군가를 안고 이렇게 다급해하니 그게 참 신기하고 이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던 군인은 거울을 통해 라울과 눈이 마주치자 마른침을 삼켰다. 라울의 눈빛은 마주 보기가 겁이 날 정도로 날카로웠다.

“지금 바로 저택으로 간다.”

“저택으로 가신다고요? 그러려면 마을을 통과해야 합니다.”

“상관없다.”

“……알겠습니다.”

차량이나 엔진. 동력 기관이 달린 것들은 무조건 군 내에서만 사용해야만 했다. 차량이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아주 위급한 상황일 때뿐이었다. 예를 들어 동쪽 감옥소에서 죄수가 탈주를 했을 때 같은 경우 말이다.

하지만 이미 명령을 받았다.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군인은 더 토를 달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군용 차량이 빠르게 요새를 벗어났다. 문 앞에 서 있던 군인들 몇이 놀란 듯 달려오다가 이내 멈추는 게 보였다. 차량 뒷자리에 타고 있는 게 라울이라는 걸 확인했기 때문일 거다.

라울은 눈을 내리떴다. 얼굴이 있는 옷은 이미 붉은 피가 많이 번진 상태였다. 손을 들어 옷을 살짝 걷어 냈다. 마기휼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입 주변은 피로 엉망이었다. 흐릿하게 풀린 눈동자로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라울은 그 눈물을 닦아 냈다. 예고 없이 마기휼의 손이 라울의 손을 붙잡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필사적으로 라울을 붙잡으며 마기휼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위를 올려다보는 눈동자 안쪽으로 절박함이 느껴졌다.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그리 말하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닌 자신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마기휼은 예민하게 그걸 감지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좋을 일이 없다는 걸 말이다. 손을 잡은 갈색 손가락으로 점점 힘이 빠져나간다. 그 손이 흘러내리자 이번에는 라울 쪽에서 마기휼의 손을 붙잡았다.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속삭임에 마기휼이 반응을 보였다.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흘러나온다. 눈물이 사라진 눈동자는 조금 더 맑아졌다. 투명한 빛을 발하는 눈동자로 라울을 바라보던 마기휼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까처럼 피를 토해 내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고열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곧 있으면 오한이 들겠지. 라울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재차 옷으로 마기휼의 얼굴을 감추며 그 몸을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 등을 감쌌다. 마기휼은 한결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몸 상태는 점점 더 안 좋아질 거다. 최대한 빠른 치료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을 만나봐야 했다. 오르베와 라우젝을 말이다.

정면을 바라보는 라울의 눈동자 안쪽으로 증오가 피어올랐다.

넓은 소파에 편하게 앉은 상태로 라우젝은 발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은의 대야에 따뜻한 물이 가득 담겨 있고, 그 위로 장미 꽃잎이 떠올라 있었다. 라우젝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준수한 사내는 무표정을 한 채로 라우젝의 발가락 사이사이를 말끔하게 씻겨줬다. 섬세한 그 손놀림이 마음에 들었다.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옆으로 내밀자 뒤에 서 있던 사내가 양손으로 그걸 받아 들었다. 다른 쪽에 서 있던 사내가 손수건을 건네자 그걸 받아 든 라우젝은 손을 닦았다.

라우젝 한 사람을 위해 그 주변으로는 사내가 셋이나 있었다. 하나같이 몸이 좋고 준수한 사내들이었다. 라우젝이 고르고 고른 이들이었으니 흠잡을 데가 없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닦아 내던 라우젝은 사내의 손이 닿은 발을 위로 들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마사지를 하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 사내 앞으로 발을 내밀며 라우젝은 말했다.

“핥아.”

명령에 불복종이란 없다. 사내는 라우젝의 발을 받아 들고 그곳으로 입술을 댔다. 발가락에 혀를 대 핥고는 천천히 옆으로 이동했다.

발을 애무하는 것이 능숙했다. 이내 익숙한 쾌감이 퍼지는 걸 느끼며 라우젝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소파 쪽으로 몸을 기대며 라우젝은 고개를 뒤를 젖혔다. 뒤에 서 있던 사내에게 손을 뻗었다. 미소를 짓는 하얀 얼굴은 고혹적이었다. 사내는 거절을 모르는 듯 라우젝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입을 맞췄다. 질척한 음향과 더불어 거칠어지는 호흡이 방 안으로 퍼져 나갔다.

발을 애무하던 사내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그는 라우젝의 다리를 벌렸다. 가운이 벌어지고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나자 그곳으로 얼굴을 묻었다.

“음―”

신음을 흘린 라우젝은 고개를 내렸다. 사내가 라우젝의 목덜미를 애무하고 손을 내려 가슴을 더듬었다. 그걸 음미하듯 눈을 가늘게 뜬 라우젝은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붉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불청객으로 인해 그 여흥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기습적으로 문이 열리고 라울이 들어왔다. 라우젝에게 달라붙어 그를 애무하던 사내들은 갑작스러운 방문객을 확인하고는 당장 라우젝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라우젝이 손을 뻗어 사내의 머리를 붙잡았다.

재차 다리 사이로 내리누르는 것에 사내가 그를 올려다봤다. 눈동자 안쪽으로 곤혹스러움이 묻어났다. 라우젝은 사내를 내려다보며 오만하게 명령을 내렸다.

“계속해.”

사내는 짧은 순간 망설였으나 이내 하던 일을 계속했다. 라우젝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얼굴을 밀어 넣는다. 그 순간 라우젝의 얼굴로 재차 미소가 걸렸다. 즐겁다는 듯 웃는 얼굴이 음란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때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라우젝의 발 오른쪽에 놓여 있던 대야가 엎어지면서 안에 담긴 물이 바닥으로 뿌려졌다.

갑작스러운 일에 사내들이 빠르게 움직여 라우젝의 앞을 막아섰다. 라울은 한 손으로 마기휼을 안아 어깨에 걸친 채로 총을 든 손을 위로 올렸다.

“비켜라.”

“라울 님. 라우젝 님이십니다. 총을 치우시지요.”

사내의 말에 라울은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날아간 총알이 사내의 준수한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긴 붉은 선이 그려지고 그곳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사내는 말없이 한 손을 들어 뺨을 감쌌다. 이쪽을 쳐다보는 사내의 눈동자가 경직되어 있었다.

“비켜라. 다음에는 네놈의 머리를 관통하겠다.”

“왜 그렇게 예민한 거야?”

라울의 눈빛은 살벌했다. 그가 농담으로 이러는 건 아닐 터였다. 진심이 느껴졌다. 그렇다 한들 여기서 비켜설 순 없었다.

그들은 굳은 얼굴이 된 채로 조금의 미동이 없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라우젝이 앞에 있던 사내의 몸을 밀어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나타난 라우젝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마기휼을 한 팔로 안아 든 라울을 봐도 변하지 않았다. 조금 전 라울이 들어올 때부터 봐서 알고 있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눈에 보이는 험악한 라울의 모습에 라우젝은 놀랍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기휼이야? 다쳤어? 그래서 그렇게 예민해진 거야? 촌스러운 짓 하지 마. 사랑하는 그이가 다쳤다고 그리 흥분한 모습을 보이다니. 너 스스로 네 약점을 드러내는 꼴밖에 되지 않아.”

“누가 한 짓이지?”

나직한 물음에 라우젝의 입가에 지어져 있던 웃음이 사라졌다.

“무슨 말이야? 마기휼이 그리된 게 내 탓이라는 거야?”

“너와 오르베의 합작품이겠지. 내 말이 틀린가?”

“한 건 오르베뿐이야. 나는 그저 방조했을 뿐이지.”

하는 말에도 라울의 얼굴은 변동이 없었다.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믿든 안 믿든 그건 크게 중요치 않았다.

라우젝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을 흘겨봤다.

“나가.”

라우젝의 말에 사내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괜찮을까. 잠시 그런 눈빛을 교환하던 그들은 느릿하게 움직였다. 라울을 피해서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혔다. 라우젝은 벌어져 있던 가운을 정리하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내 나이도 서른을 훌쩍 넘겼지. 재미없는 짓을 하기는 하지만 센스 없는 짓은 하지 않아. 약을 사용하다니. 식상하기 그지없어.”

소파에 몸을 기댄 라우젝은 라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지금의 라울은 완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라 해도 지금의 라울을 본다면 그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단박에 파악할 수 있을 만한 모습이었다. 그 얼굴은 라우젝에게 있어서도 꽤나 생소하고 신선한 것이었다. 무표정을 하고 있던 라우젝은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너의 그런 흥분한 모습은 처음이야. 역시 가만히 있기를 잘한 것 같네. 지금 꽤나 재미있어.”

말을 하는 라우젝에게서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들이 모두 진짜임을 알게 되었으나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마기휼의 상태이고, 그를 해독하는 데 필요한 것은 약이었다.

“오르베는 어디에 있나?”

“잠적했어. 그 시끄러운 아이들과 함께 말이야.”

“어디로 갔는지 말을 하지 않을 건가.”

“알면서 왜 이래.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못 찾아. 원래 일 치고 숨는 게 특기인 사람이잖아. 안 그래?”

라우젝은 양팔을 벌리며 “민폐 9단의 고수가 바로 오르베지.”라고 말했다. 라우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어가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선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그 얼굴에서 이미 이쪽에 대한 흥미는 사라져 있었다. 무엇을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지 않을 거다. 가만히 있던 라울은 마기휼을 안아 든 채로 몸을 돌렸다.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라우젝은 라울이 서 있던 곳을 쳐다봤다. 그곳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라우젝의 입매가 서서히 일그러졌다.

라우젝은 거울 속을 살폈다. 어리디어린 청년이 그곳에 서 있었다. 산 시간은 훨씬 더 많은데, 딱 그 절반만의 세월의 흔적이 묻은 얼굴이었다.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밀려왔다. 참을 수 없었던 라우젝은 주먹으로 거울을 후려쳤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거울이 깨졌다. 날카로운 파편이 손등에 상처를 만들고 이내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피를 흘리는 손을 감싸며 라우젝은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아.”

그것이 라울에게 향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 안쪽으로 참을 수 없는 혐오가 담겨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들고 있던 총을 품 안에 밀어 넣고 양손으로 마기휼을 안아 들었다. 그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이동을 했다. 누군가를 안고 걸음을 서두르는 라울은 저택에 몇십 년간 있으면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마기휼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옷은 여기저기에 피가 묻어 있었다. 마치 라울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다른 때라면 라울이 무엇을 해도 겁이 나 말을 걸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리할 수 없었다. 근처에서 일을 보고 있던 고용인들을 하나같이 라울 쪽으로 모여들었다.

“주인님. 왜 그러신 겁니까? 부상을 입으신 겁니까?”

“피가 납니다. 주인님의 것입니까?”

“의원을 불러라.”

당장 눈에 보이는 피가 묻은 옷만을 쳐다보고 있던 그녀들은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끔벅였다.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며 라울은 차분하게 말했다.

“어서 주치의를 불러라. 그에게 독과 관련한 약재를 모두 들고 오라고도 해라.”

“네. 알았습니다. 지금 바로 모셔오겠습니다.”

황급히 움직이는 그녀들의 머릿속으로는 라울이 말했던 독이라는 단어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라울이 독에 당했나? 만약 그게 진짜라면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감히 그 누가 겁도 없이 라울에게 독을 사용한단 말인가. 서둘러 반대편으로 뛰어가는 하녀들을 확인한 후 라울은 방문을 발로 밀어젖혔다. 곧장 침대로 걸어가 안고 있던 마기휼은 그 위에 내려놨다.

침대에 눕자마자 양손이 위로 올라온다. 매달리고 붙잡을 것을 찾고 있었다. 기운 없이 허공에서 흔들리는 손을 확인한 라울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마기휼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옷을 위로 들어 올렸다.

흐릿하게 풀린 눈동자가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 눈동자는 라울을 확인하는 순간 더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허공을 휘젓던 손이 정확히 라울 쪽으로 움직였다. 라울은 그런 마기휼의 손을 붙잡았다. 기다렸다는 듯 양손으로 라울의 손을 붙잡은 마기휼은 깊은 숨을 들이켰다.

“괜찮을 거다.”

라울의 손을 잡고 간신히 안심한 마기휼은 나직한 속삭임에 그를 바라봤다. 바라보는 눈동자가 혼탁했다. 지금은 의식이 있지만 그것도 곧 끊어질 터였다. 오르베가 사용하는 약물들 중에는 악질적인 것들이 많았다. 분명 지금 마기휼이 이리된 것은 그 약물들 중 하나 때문일 거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어서 빨리 마기휼이 이리된 원인을 파악해야만 했다.

라울은 마기휼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괜찮을 거다.”

“……무서워.”

중얼거림에 라울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런 라울을 매달리듯 바라보며 마기휼은 재차 말했다.

“정말……. 무서워.”

그리고 괴로웠다. 몸속에서 뭔가가 자꾸만 들쑤시고 있었다. 속이 거북하고 안쪽에서 아린 통증이 퍼져나갔다. 그건 괜찮아졌다가 다시 심해지고는 했다. 이렇게 계속 아프다가 난 죽어버리는 건가? 문득 드는 생각이 그를 더욱 두렵게 했다.

이런 건 싫어. 벗어나고 싶었다. 마기휼은 라울을 바라봤다. 그에게 조금 더 매달리고 싶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라울밖에 없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재차 물기를 머금는다. 무슨 말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것은 아니나 그 눈동자만으로도 충분했다. 가만히 있던 라울은 마기휼의 몸을 끌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 마기휼이 매달려 왔다. 기운 없이 라울의 등에 손을 두른 마기휼은 이내 약한 울음을 터트렸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목소리가 정확하게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웅얼거리는 것으로 들릴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정확하게 들은 라울은 안색을 굳혔다.

“라울 님. 저 호그입니다.”

바깥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라울은 마기휼에게서 떨어졌다. 갑자기 체온이 떨어져 나가자 마기휼은 당황한 듯 라울의 팔을 잡아당겼다.

“라울, 가지 마.”

아까와 달리 명확하게 하는 말에 라울은 더 움직일 수 없었다. 가만히 선 채로 주춤거리고 있는 동안 문이 열리고 의원이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선 의원 호그는 라울의 어정쩡한 상태를 확인하고는 눈을 내리떴다. 그는 조용히 라울의 곁으로 다가서 마기휼을 확인했다. 보는 순간 안색이 굳어진다. 그는 라울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알아서 스스로 움직였다.

들고 온 가방을 침대에 내려놓은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걸로 마기휼의 얼굴을 닦아 내려 했다. 낯선 자가 손을 대려는 순간 마기휼은 몸을 움츠렸다. 라울 쪽으로 몸을 붙이며 얼굴을 구겼다. 그걸 확인한 라울이 한마디 했다.

“너를 치료해줄 의원이다. 괜찮아.”

괜찮다는 말에도 마기휼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호그의 손을 거부했다. 억지로 하면 마기휼이 더 거칠어질 뿐이었다. 순간적으로 그걸 판단한 호그는 들고 있던 손수건을 라울에게 건넸다.

“라울 님께서 얼굴과 손에 묻은 것들을 닦아 내주시겠습니까? 이분께서 그쪽에 집중하는 사이에 상태를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다.”

라울은 의원의 손에서 손수건을 들고 갔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망설이던 라울은 우선 마기휼의 뺨을 건드렸다. 움찔하기는 했지만 조금 전 의원을 거부할 때처럼 완강한 것은 아니었다. 마기휼은 얌전히 라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걸 느낀 라울도 한결 편하게 마기휼의 뺨과 턱 부근에 묻은 타액과 피를 닦아 낼 수 있었다.

라울이 하는 걸 확인한 의원은 가방을 열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리고 마기휼의 옷 위에 그걸 댔다. 마기휼은 몽롱한 눈빛으로 라울을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의원 쪽으로는 미처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한결 수월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의원의 진료는 묘하게 시간이 걸렸다. 덧붙어 그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는 것이 불길함을 예고했다. 뭔가 싶으면서도 라울은 마기휼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닦아 냈다. 그리고 마지막 엄지를 닦아 내는 순간 의원이 한숨을 쉬며 마기휼에게서 떨어졌다.

일어선 그는 굳은 눈으로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마기휼은 아예 눈을 감고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간간이 마른침을 삼키면서 몸에 힘을 주고는 했다.

마기휼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고 있는데 어째서 의원은 별다른 말이 없는 건가 싶었다. 참다못한 라울이 물었다.

“왜 이러는 거지?”

의원은 재차 가라앉은 표정을 지었다. 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 고민을 하던 그는 고개를 들어 라울을 바라봤다.

“이분의 몸속에는 남자가 가지고 있어선 안 되는 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의원은 눈을 감았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싶던 그는 차분히 물었다.

“오르베 님이 꾸민 일 같군요. 맞습니까?”

“그렇다.”

돌아온 대답도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긴 했지만 막상 듣게 되자 그리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의원은 오르베와 오래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이곳에서 의원으로서 30여년 일하는 동안 오르베와도 독특한 친분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녀가 한 일이 남이 한 것 같지 않았다. 의원은 침울해져선 중얼거렸다.

“아주 질이 나쁜 약물입니다. 음독에 이미 중독 상태인 것 같습니다.”

“음독이라니?”

“……최음제라는 건 아시겠지요?”

그 순간 라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표정으로 있던 그가 천천히 눈동자를 내리떠 마기휼을 바라보는 걸 확인한 의원은 긴 한숨을 쉬었다.

“지독한 겁니다. 아무리 점잖고 신앙심이 깊은 신자라 할지라도 이 약을 먹게 되면 음욕을 풀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이건 강제성이 100% 들어간 약물입니다. 이 상태로 둔다면 결국에는 죽게 될 겁니다.”

“죽게 된다니?”

“해소가 되지 않으면 몸속의 장기가 모두 망가지게 말 겁니다. 음욕을 내리누르면 피를 계속 토하다가 죽게 되는 것이고, 결국 참지 못하고 되는대로 그 일을 하게 되면 나중에 의식을 차렸을 때 치욕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지요. 아주 악질적인 것입니다. 워낙에 악명이 높기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구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걸 잘도 사용하실 생각을 하셨군요. 그분께서는 말입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 안쪽으로 오르베의 악독함을 책망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하지만 라울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르베 따위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신경 써야 할 일은 달리 있었다.

“그대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건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전 아무런 도움이 되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저 통증을 감소하는 약을 드릴 뿐이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보통의 사내였다면 지금 당장 제가 여자를 돈으로 사 왔을 테지만, 이분은 평범한 사내의 몸이 아닌지라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정말로 남자의 몸에 여성의 기관이 달린 사람을 본 것도 처음이고 말이다. 의원은 허리를 숙여 가방을 뒤적였다. 이내 작은 봉지 하나를 꺼내 라울에게 건넸다.

“일단 이 약을 먹이시면 됩니다. 그리고 오늘 밤이 고비가 될 겁니다.”

의원이 건네는 약을 받아든 라울은 굳은 얼굴이었다.

“오늘 밤이라고?”

그렇게나 빨리?

의원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용서를 구했다.

“전 도움을 드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죄송합니다.”

“……….”

의원으로서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인가. 실제로 의원은 라울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눈을 내리뜬 채로 있는 그 모습에 라울은 마기휼을 바라봤다.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갈색 피부의 건강함을 풍기던 사내가 이렇게나 맥없이 흐트러져 있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호그 의원은 그런 라울의 옆얼굴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보이던 라울의 그 얼굴이 아니었다. 다소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으나 이쪽이 끼어들어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오르베가 저지른 일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 싶었던 그는 이만 물러나 보겠다는 말을 전하고는 느린 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자 라울은 침대의 끝에 앉았다. 바로 마기휼이 눈을 떴다. 풀어진 눈동자는 이제 초점도 맞지 않았다. 손에 힘도 들어가지 않는 듯 가만히 놓여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뭔가를 찾고 있었다. 라울은 마기휼의 손을 잡았다. 기다렸다는 듯 마기휼도 라울의 손을 잡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매달리려 하고 있었다. 그걸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깊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마기휼이 이를 악문 채로 울음을 참고 있었다. 울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눈물이 나온다.

소리를 죽여 흐느끼는 그 모습에 라울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마기휼.”

이름을 부르고 난 뒤,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혓바닥 위가 굳어버린 듯싶었다.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갑자기 마기휼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몸 안에서 뭔가가 세게 후려친 듯 몸이 반쯤 떴다가 내려앉았다. 그러다가 입을 벌렸을 때 피가 토해졌다.

“마기휼?!”

놀란 라울이 반쯤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마기휼은 재차 피를 토해 냈다. 양은 많지 않아도 마기휼이 너무도 괴로워 보였다. 양손으로 목을 감싼 채로 마기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라울은 그런 마기휼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조금 전 의원이 두고 갔던 봉투를 확인했다. 봉투를 열다가 마기휼의 움직임이 너무도 거세서 안에 든 것을 떨어뜨릴 뻔했다. 봉투 안에서 나온 건 하얀 알약이었다. 이대로 마기휼에게 먹일 순 없었다.

“쿨럭! 쿨럭!”

기침할 때마다 라울의 옷 위로 붉은 얼룩이 번졌다.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라울은 알약을 자신의 입 안에 넣고 마기휼의 턱을 감쌌다. 그가 입을 벌리게 하고는 그 안으로 알약을 밀어 넣었다.

“읍!”

뭔가가 들어오는 느낌에 마기휼은 바로 이를 세웠다. 손으로 턱을 붙잡지 않았다면 혀가 깨물릴 뻔했다. 라울은 마기휼이 입을 다물지 못하도록 그를 단단히 고정한 후에 침착하게 약을 밀어 넣었다. 혀 끝에 퍼지는 알싸한 맛에 마기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상한 걸 먹는 건 싫었다.

거부감이 강한 만큼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몸을 뒤틀고 주먹으로 라울의 몸을 마구 때렸다. 기운 하나 없는 사람답지 않게 그 주먹이 꽤나 매서웠다. 하지만 라울도 만만치 않았다. 마기휼의 모든 저항을 억누르고 결국 알약을 모두 마기휼이 먹을 수 있게끔 했다.

입술을 떨어뜨렸을 때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와 타액으로 인해 입술 주변이 엉망이었다.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라울은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눈을 반쯤 뜬 채로 마기휼이 헐떡거렸다. 피로 범벅이 된 입술 부근이 그리 썩 보기 좋지 않았다. 라울은 손으로 조심스레 턱을 닦아 내며 마기휼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까처럼 몸을 떨면서 피를 토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지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몸에 안겨 반쯤 떠진 눈동자가 몽롱했다. 가만히 있나 싶더니 보랏빛 눈동자가 일렁거린다. 얼굴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걸 본 순간 라울은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마기휼이 뭐라 하는 건 아니었다. 소리를 내 비난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날카로운 무언가가 심장을 찌르는 것 같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야. 너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어?

그리 묻는 눈빛에 할 말이 없다. 라울은 가만히 있었고 마기휼의 눈동자가 서서히 감겼다. 눈을 감은 채로 마기휼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잠이 든 듯싶었다. 호그가 남기고 간 약이 제대로 듣는 건가. 하지만 언제 갑자기 상태가 변할지 알 수 없었다.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귓가에 맴도는 말에 라울은 눈을 감았다. 가만히 있나 싶던 그는 침대에 흐트러져 있던 시트를 모아 그걸로 마기휼의 몸을 감쌌다. 마기휼의 몸을 씻기고 침대를 정리하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언제 갑자기 마기휼의 상태가 안 좋아질지 알 수는 없지만 치울 수 있을 때 치워 두는 편이 좋았다.

시트를 정리하는 라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굳어 있었다. 동시에 품 안에 안긴 마기휼을 끌어안은 다른 한 팔은 지나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안제크가의 저택은 언제나 늘 조용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더더욱 조용했다. 오르베가 저택에 없고 라우젝도 무척이나 조용해서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라울도 오늘 일찍 들어와서는 내내 방 안에 있었다. 갈 시트를 준비해 오라는 것 말고는 저녁 식사를 한다는 말도 없었다. 낮에 누군가를 안아 들고 왔는데 그 사람은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궁금한 게 한가득이었지만 직접 라울을 찾아가서 그 사람의 상태를 살필 수는 없었다. 명령을 받기 이전에는 움직여서는 안 되었다. 그게 이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굳건히 닫힌 라울의 방문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꼭꼭 닫혀 있는 것이 마치 어떤 비밀을 은폐하려는 것도 같았다. 실제로 라울의 방은 어두운데도 불을 켜 두지 않았다. 벽에 걸린 촛불이 미약한 흔들림을 보일 뿐이었다. 간간이 누군가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침대 근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라울은 바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래부터 책을 읽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킨 라울은 마기휼의 상태를 살폈다. 얇은 가운 하나만 입은 마기휼은 재차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는 피를 토해 내지 않았다. 대신에 자꾸만 물을 찾았다. 말라서 끝이 갈라진 입술 상태를 확인한 라울은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마기휼의 얼굴을 감싸 위로 들고는 입을 맞췄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물을 조금씩 흘러 넣었다.

처음에는 이것도 잘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기휼에게 물을 마시게 한 후에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눈을 반쯤 뜨고 있던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눈동자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괜찮은 건가.”

괜찮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질문을 하다니. 스스로가 참으로 어리석다 생각을 하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울의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마기휼은 입술을 핥았다. 물이 들어오자 아주 조금 머리가 맑아진다. 가만히 있다가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라울의 방이었다. 이내 라울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고정했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라울의 얼굴이 그답지 않게 굳어 있었다. 녹안이 경직된 채로 있었고 미간 사이로 선명한 주름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어떠한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저런 얼굴을 할 사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마기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 이대로 죽는 걸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실제로 말을 하는 동안 목이 갈라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속이 이상해.”

마기휼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움직여 배 위에 올렸다. 숨을 쉬기 위해 일정하게 위로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배의 상태가 이상했다. 아까 미칠 듯이 뜨거웠던 배가 지금은 차가웠다. 슬슬 오한이 들었다.

“추워.”

기다렸다는 듯 시트를 끌어당겨 몸을 감싸온다. 아까부터 라울은 계속 이런 상태였다. 이쪽이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꽤나 간병을 잘 하는 사내였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잘 해줄 거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마기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 어떻게 되는 걸까.”

“괜찮을 거다.”

“안 괜찮을 걸 알면서도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내가 정말 믿을 것 같아?”

“…….”

기운 하나 없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하는 말에 라울의 안색이 굳었다. 마땅히 반박을 하지도 못하고 굳은 눈동자로 쳐다만 보는 것에 마기휼의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가만히 있던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눈을 감았다.

라울은 이쪽을 밀어내지 않았다. 처음에 몸을 안아 올 때에는 어색하기만 하더니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쪽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잘 받쳐주고 있었다. 꽤나 성실한 놈이었다. 이리된 것이 그의 탓이 아닌데도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만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재차 몸속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몸속이 요란하게 들끓기 시작할 테고 다시금 피를 토해 내게 될 터였다. 다음에 피를 토해 내게 되면 정말 위험해질 것 같았다. 더는 버틸 기운이 없었다.

마기휼은 눈을 떴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단단한 팔에 손을 댔다. 가만히 있지만 알게 모르게 긴장감이 전해졌다. 이쪽의 손길을 피하진 않지만 반기지도 않았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나 싶던 마기휼은 눈동자를 들어 라울을 바라봤다.

“의원이 한 말은 다 들었어.”

“…….”

“오늘 밤이 고비라고 하던데.”

차분한 말에 라울은 대꾸가 없었다. 굳건하게 입을 다물고 있을 따름이다.

마기휼은 쓴웃음이 나왔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스스로 해결을 봐야 할 일들이 모두 남들의 의사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참으로 싫고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상황은 이랬다. 저들이 쓰는 방식이 너무도 악독하니까 미처 방비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물러날 수도 없고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그런 나약한 자신의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 오늘 밤이 고비인 거냐. 남자인 내가 남자에게 안겨야만 이 불쾌한 몸속의 열기가 사라지게 되어버리는 거란 말이지.

남자로 살면서 거의 30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대해서 처음 듣게 되었을 때부터 이런 상황만은 피해 가려 부단히 노력했다. 절대로 사내에게 안기지 않을 거라 다짐을 하며 그런 상황이 만들어졌을 때에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이 모양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정말 죽는 걸까. 내가 죽고 나면 라울은 어찌 될까. 상황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죽는 순간부터 저들의 미래 따위는 자신이 볼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언제나 늘 불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을 때 외면을 하고 도망갈 것만을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요리조리 잘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궁리를 했지 정정당당하게 마주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리해서는 안 되었다. 정면으로 맞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 건 결국 자신뿐이었다.

아직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해결을 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러니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절대로 말이다.

라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팔이 욱신거리고 아파지는 걸 느끼며 라울은 눈을 내리떴다. 마기휼의 얼굴을 바라봤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마기휼은 뭔가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그 결심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라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싫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마기휼은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굳은 그 얼굴 아래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네 자긍심을 해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너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어.”

라울의 말은 듣기만 하면 참 좋은 것이었다.

자긍심 좋지.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가 늘 걱정하고 염려하던 그 부분을 숨기고, 그가 생각했던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그냥 깔끔하고 조용히 갈 수 있는 거였다. 죽음. 지금까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건 백발이 된 후에야 찾아오는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마기휼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죽고 난 후에 뒷마무리를 해주시겠다?”

묻는 말에 대답이 없다. 정말 그리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너 나 좋아한다며. 취향이라며. 나 다 알아. 너 나 만지고 싶어했던 거. 안고 싶어했던 거. 그런 주제에 그런 중요한 말을 쏙 빼놓고 뒷수습을 해주겠다는 말이나 해?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정말로 좋아할 것 같았냐?

마기휼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들었다. 라울의 팔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던 라울도 이내 마기휼이 움직이는 걸 도와줬다. 등에 한 손을 댄 채로 그가 보다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게끔 했다. 그렇게 도움을 받아 편히 앉을 수 있게 된 마기휼은 눈을 내리뜬 채로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아팠다.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피로가 밀려들어 왔다. 멍하니 있다가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가만히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라울은 마기휼의 어깨에 한 손을 댔다.

“괜찮나?”

“안 괜찮아.”

아까와 달리 또렷해진 목소리였다. 다소 날이 서 있는 듯도 싶었다. 마기휼이 그런 목소리를 내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라울은 입을 다문 채로 눈을 내리떴다. 마기휼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시선을 비킨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울은 꽤나 미남이었다.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라 어쩌면 노르디아 최고의 미남일지도 몰랐다. 이 정도면 성격도 그럭저럭 괜찮고 집안도 빵빵하고 본인 능력도 뛰어났다. 상위 1%가 뭔가. 이 정도면 0.1%라고 해도 과할 게 없었다.

남자에게 안겨야만 하는 팔자라면 이 정도여야 하지 않겠나. 담배 냄새 나는 배불뚝이 사내놈은 사절이었다. 하지만 라울이라면―.

‘절대로 너의 탓이 아니다.’

강한 부정을 하며 똑바로 바라보던 눈동자. 그 눈빛은 진심이었다. 자신과 다른 상황이라고는 하나 비슷한 것을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분명하게 말을 해줄 수 있었던 거다. 단순히 위로를 하기 위한 말도 아니었다.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분명하게 말이다.

라우젝을 따라 도박판에 가게 되었을 때 만난 여자가 말했었다.

자신하지 말라고. 좋아하는 감정은 사소한 계기로도 생길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 그 여자는 현명했던 거다. 어쩌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리 말을 할 수 있었던 거겠지. 이래서 경험자의 말을 무시하면 안 되는 거라면서 마기휼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손을 들어 라울의 뺨에 한 손을 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건지 라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가 눈동자를 들어 이쪽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기휼은 눈을 감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라울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는 느낌은 특별하거나 크게 환상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부드럽고 말캉한 살이 닿았다 뿐이었다. 그러나 물을 준다거나 약을 먹이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입술이 닿는 순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미칠 듯한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내내 기운 없이 늘어져 있던 마기휼은 적극적으로 라울에게 매달렸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을 벌리고 라울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으려던 순간 밀쳐졌다.

뒤로 밀려난 몸이 쓰러졌다. 침대 위에 쓰러진 채로 마기휼은 자신을 밀어낸 라울을 올려다봤다.

“뭘 하는 거지?”

떨어진 라울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마기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려는 거잖아.”

태연하게 한 말에 라울의 눈동자가 더 굳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기휼은 할 말을 했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건데?”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싸늘했다. 라울은 이를 악물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다.”

“다른 방법은 없어.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책만 파고 있는 거 아니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옆에만 있다가 이쪽이 고통스러워하면 손을 잡아주고 끌어안아줬다. 그래. 그것이 아주 쓸모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곁에 아무도 없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나마 라울이 곁에 있어주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이지 좋은 수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될지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단지 외면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기휼은 그걸 그만두기로 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한 번이면 될 거야. 이리로 와.”

“……그럴 순 없다.”

앞으로 손을 내민 채로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미동 없이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를 차마 마주할 수 없었던 라울은 고개를 돌렸다.

“절대로 그럴 순 없어.”

“참기는 뭘 참는 거야. 너도 하고 싶을 거 아니야.”

라울의 턱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안색이 변하는 걸 알면서도 마기휼은 말하길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니까 허락하는 거야.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을 걸? 사내를 품지도 못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라!”

목소리를 높인 라울은 당장 마기휼을 노려봤다.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바라보는 눈동자 안쪽으로 혐오감이 드러났다. 그 눈빛에 이쪽이 밀려나는 걸 느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쳐도 먼저 손을 내민 게 너무도 부끄러웠다. 이런 상황이라는 걸 빌미로 숨겨 왔던 걸 드러냈는데 그게 가차 없이 거절당한 것이었다. 마기휼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네가 남자를 사랑하고 남자만을 안을 수 있는 몸이라는 게 부끄러워?”

묻는 말에 라울은 가만히 있지만 양손을 주먹 쥐고 있었다. 온몸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이쪽이 아파서 그렇지 안 그랬다면 당장 입을 틀어막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상황이 너무도 재미없었다. 굉장히 불쾌해지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식으로 너 자신을 죽이면 좋아?”

“……입 다물어.”

음산하게 중얼거린 라울은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탕-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마기휼의 입가로 어이없다는 뉘앙스의 미소가 걸렸다.

“제일 중요할 때 튕기네.”

본인의 입으로 이쪽이 취향이고, 알아서 조심하라고 했던 주제에 개뿔이.

마기휼은 피식하고 웃으며 천천히 앞으로 엎드렸다. 엎드리고 있을 기운도 없다. 그냥 퍼져서 누운 채로 고개를 들자 침대 끝이었다. 팔을 주욱 뻗자 아래로 툭 떨어진다.

아, 진짜 몸에 힘 안 들어간다. 이 상태로 도둑이 들어오면 그냥 칼에 찔려 죽는 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 죽게 된다면 완전 꼴사나운 건데. 그렇게 죽고 싶지 않은데. 마기휼은 웃었다. 웃기지도 않는데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하하- 하고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면서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

괜히 눈이 시큰해진다. 재차 눈물이 나오려 하고 있었지만 그걸 참아 낸 마기휼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래.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자. 그냥 죽는 걸로 하고 마지막 유언이나 생각해보자. 하지만 그 유언을 전달해줄 사람도 없으니 애석하기 짝이 없다.

“화나게 하지 말고 그냥 옆에 있게 할걸.”

중얼거린 마기휼은 몸에서 힘을 빼냈다.

그리고 서서히 사그라지는 자신의 생명력을 느꼈다.

복도로 나오기는 했으나 더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복도 한가운데에 멈춘 라울은 마치 동상처럼 서 있기만 했다. 그는 혼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로 있던 라울은 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기 복도의 끝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으려니 그 모습이 점점 또렷하게 보였다. 가녀린 몸. 흩날리는 금발. 어리게만 보이는 얼굴. 라우젝이었다.

걸어오던 라우젝은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는 라울을 확인하고는 발을 멈췄다. 열 보 이상 떨어진 곳에 선 그는 라울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폈다.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낮과는 옷이 달라지긴 했지만 일을 친 흔적은 없어 보였다. 라우젝은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기휼을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나 보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바로 나오는 말투가 날카롭다. 말투만 그런 게 아니라 쳐다보는 시선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라우젝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원망스러운 거냐. 아니면 오르베가 원망스럽냐. 그도 아니라면 그런 몸인 너를 원망하는 거냐.”

라울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라우젝은 한숨을 쉬었다.

“원망하는 건 좋아. 마기휼이 죽고 난 후에 미친 듯이 날뛰는 것도 괜찮아. 그리해도 되는 입장에 있지. 그래도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냐. 이대로 마기휼이 죽게 하는 건 안 될 말이야. 우리 때문에 죄 없는 생명이 가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지.”

본인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 하는 말에 가증스러움을 느낀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증오를 느끼며 라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자격 같은 건 만들면 그만이야.”

동시에 라우젝이 움직였다. 그가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 라우젝의 앞을 막아서며 라울은 물었다.

“어디를 갈 생각이냐.”

“마기휼을 안으러 갈 거야.”

그 순간 라울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약간의 동요를 드러냈다. 그걸 놓치지 않은 라우젝은 눈을 빛냈다.

“남자에게 안기면 되는 거잖아. 나는 이런 몸이지만 발기는 돼. 마기휼을 안아줄 수 있어. 어쩌면 그로서도 너같이 커다란 것보단 나처럼 아담한 몸이 덜 부담이 될 거야.”

라우젝은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서도 그 얼굴로 조금의 죄책감이 읽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눈을 깜박인 그는 라울의 어깨에 손을 대고 그 몸을 뒤로 밀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라우젝은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 안쪽으로 짜증스러움이 묻어났다.

“길 막지 말고 저리로 가 있어. 너는 할 수 없는 걸 내가 해주겠다는 거잖아. 아니면 뭐야? 다른 사내가 마기휼을 건드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냐?”

도발하는 말에 라울의 전신으로 날카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살벌했다. 딱 봐도 라우젝은 라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라우젝은 날카로운 말을 던지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너 혼자 고고한 척하지 마. 너도 어차피 우리랑 동류야.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 이건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야. 나라와 여왕과도 관련이 된 문제야. 네가 지금 마기휼을 안지 않아 그를 죽게 내버려 둬도 크게 상관은 없어. 다른 사내놈을 끌고 오면 되니까.”

라울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졌다. 그걸 보면 이쯤 해서 그만둘 만도 한데 라우젝은 말하길 멈추지 않았다. 지금 라울에게 상처 입히는 것만이 중요한 일이라는 듯 그의 속을 날카롭게 파헤쳐냈다.

“네가 암만 거부를 하고 도망을 친다 해도 상관없어. 결국 너는 사내를 안게 될 거고 그 사내는 아이를 낳아야만 해. 그리되어야만 하는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네가 좋아할 만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마기휼을 살리고 아이를 낳게 해. 그러면 마기휼, 그도 자유가 되는 거야.”

라울은 입을 살짝 벌렸다. 라우젝을 쳐다보는 눈동자는 혐오스러운 괴물을 보는 듯했다. 욕설을 내뱉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심한 말을 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그걸 참은 라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그가 용납할 리 없어.”

“네 잣대에 맞춰 판단을 내리는 건 금물이야. 라울.”

라우젝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은 죽는 것보다 사는 걸 더 원해. 죽고자 하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나는 마기휼이라는 사내에 대해서 잘 알아. 그는 이만한 일에 타격을 입지 않아. 분하지만 그는 강한 인간이니까. 그는 이런 상황이 되어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살기를 원할 거야.”

비단 마기휼뿐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두가 지속적인 삶을 유지하는 걸 원할 거다. 라우젝은 본인의 말을 강조하듯 재차 말했다.

“그는 살기를 원해. 라울. 내가 그걸 아니까 그를 살려주려는 거야.”

라울은 가만히 있었다.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라면 라우젝 그가 정말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마기휼은 화가 나는 성격이긴 했으나 이런 식으로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도 않았다. 같이 있으면 열은 받아도 재미있었다. 상당히 다양한 재미와 흥미를 느끼게끔 해주는 존재였다. 실제로 약에 취한 사내 안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나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할 거야? 눈빛으로 종용을 하자 라울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라우젝을 노려보던 라울이 완전히 몸을 돌렸다. 곧장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라우젝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가면을 쓴 듯 무표정이 된 그는 닫힌 문을 바라봤다.

“다 똑같아.”

중얼거린 라울은 눈을 내리떴다. 그 눈동자가 혼탁한 빛으로 물들었다.

“다 똑같아져야지.”

모두가 진탕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었다. 그것에서 벗어나 혼자서만 잘되어 빛 속으로 들어가는 건 인정할 수 없었다.

시작이 같으니 결말도 같아야 했다. 라울. 너만 행복해지는 걸 결코 용서할 수 없어.

라우젝은 몸을 돌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 속으로 사라졌다.

방으로 들어왔을 때 보이는 광경에 라울은 당장 움직일 수 없었다. 마기휼은 아까와 크게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침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채였고 아래로 늘어뜨려진 팔은 마치 막대기 같다.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그 모습에 라울은 다리를 움직였다.

빠른 걸음을 옮겨 마기휼의 몸을 안아 들었다. 뒤로 고개가 젖혀진 마기휼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파리하게 질려 있는 걸 확인한 라울은 입을 벌렸다.

“마기휼?”

이름을 부르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이쪽을 보려 노력하던 마기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없었다. 안아 들어도 매달리지 않는다. 온 체중을 실은 채로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고 있었다. 죽은 건가. 라울은 급히 코 아래에 손을 댔다. 다행스럽게도 숨을 쉬고 있었으나 미약했다.

숨을 쉬고 있으나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었다. 라울은 마기휼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에 뺨을 댔다. 닿은 피부는 미지근했다. 금방 차갑게 변할 터였다.

이대로 있으면 정말로 죽는 건가.

정말로?

가만히 있던 라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짧은 순간 참으로 많은 고뇌와 망설임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라울은 마기휼을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침대에 한쪽 무릎을 올렸다. 천천히 움직여 마기휼을 침대 한가운데에 눕히고 머리 아래에 베개를 댔다. 그리고 마기휼을 만지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똑바로 누운 마기휼은 흐트러진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 가운도 조금의 움직임으로 인해 앞이 다 벌어졌다. 매끄러운 피부와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바라보던 라울은 셔츠에 손을 댔다.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는 라울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하얗게 지워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그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이어져도 결국에는 태양이 떠오른다.

커튼 사이로 미미한 빛이 스며들어왔다. 그걸 바라보던 라우젝은 무릎 위에 얼굴을 댔다. 멍하니 방 안에 만들어지는 빛의 그림자를 살펴보던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이 된 건가.”

오늘이 되었기 때문에 어제가 있고 내일이 있는 거였다.

오늘은 또 무슨 재미있는 일이 생겨날 것인가. 아마도 지금까지 없었던 그런 색다른 즐거움이 있을 거다. 마기휼을 만나고 싶었다. 이 눈으로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스스로의 생각에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때 아래에서 올라온 단단한 팔이 라우젝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 손길에 마다하지 않고 라우젝은 뒤로 몸을 젖혔다. 침대에 눕자 기다렸다는 듯 건장한 사내가 라우젝의 위로 엎드려 왔다. 그가 입을 맞추는 걸 느끼며 라우젝은 눈을 감았다.

오늘은 늦게 일어나도 되었다. 오후 늦게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다. 오늘은 그래도 되는 날이었다. 그렇게 스스로가 결정을 내렸는데 눈치도 없이 꼭 문을 두드리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라우젝 님. 여왕 폐하께서 연락을 해 오셨습니다.”

그쪽을 쳐다보자 커다란 손이 얼굴을 감싸고 앞으로 돌렸다. 이쪽을 보라는 듯 귀여운 투정을 하는 손짓에 라우젝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기다렸다는 듯 라우젝의 입술을 깨물며 사내가 달라붙는다. 서서히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라우젝은 눈을 감았다. 하아- 하고 떨리는 호흡이 퍼져 나간다.

문 앞에 서서 안에서 어떤 반응이 오길 기다렸던 자는 재차 말을 꺼냈다.

“라우젝 님. 여왕 폐하께서―”

“오늘은 그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아.”

라우젝의 말에 문 건너편에서 대답이 없다. 다른 이도 아닌 여왕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라우젝 그도 지금의 행동이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말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라우젝은 떨어지는 사내의 목에 팔을 둘렀다. 눈을 감자 재차 입을 맞춰 온다. 다른 쪽에서도 나타난 사내가 라우젝의 가슴에 매달려 애무를 했다.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라우젝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중얼거리는 라우젝의 하얀 몸 위로 건장한 사내들이 손을 뻗어 왔다.

닫힌 문 너머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집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어린 하녀에게 말을 전하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라우젝은 연락을 받을 것 같지 않으니 라울에게 가 봐야 할 듯싶었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집사의 걸음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라울의 방 근처의 복도에 서 있는 의원으로 인해 더는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나갈 수 없다니요?”

언제부터 이 저택에서 지나갈 수 있는 복도와 그렇지 않은 복도가 생겼던 겁니까? 그리 묻고 싶은 듯 쳐다보는 집사의 모습에 의원은 굳은 얼굴이 되었다. 생각을 하나 싶던 그는 아까와 똑같은 말을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만 더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여왕 폐하께서 연락을 취해 오셨습니다.”

“그래도 안 되네.”

고개를 젓는 호그 의원의 태도는 단호했다.

지금껏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쪽도 그냥은 물러날 수 없었다.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저는 지금 여왕 폐하의 연락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라울 님은 편찮으신 상태네. 그러니 어쩔 수가 없어.”

“주인님께서 편찮으시다고요?”

다른 의미로 집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껏 라울이 아프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엄청나게 큰 사건을 들어버린 듯 굳은 얼굴이 되는 집사를 앞에 두고 의원은 차분히 말했다.

“오늘 하루만 푹 쉬면 나으실 거라네. 그러니 양해를 해주게. 여왕 폐하께 연락을 받을 사람이 없다고 전해주게나.”

자세한 정황을 알지 못하나 연락은 라우젝에게 먼저 갔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연락 받기를 거부해서 이리로 온 것일 거다. 하지만 이리로 온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라울도 여왕의 연락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잠시 생각을 하나 싶던 집사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오르베 님도 없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어쩔 수 없군요. 제가 알아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여왕이었다. 그녀의 연락을 이쪽 선에서 물릴 수는 없었다. 라울이 아픈 상태라는 걸 솔직하게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돌리는 집사를 확인한 후, 의원은 라울의 방 쪽을 흘깃 쳐다봤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지는 못했어도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거였다. 그 누구라도 저곳으로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설령 여왕이 직접 찾아온다 한들 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 거라며 의원은 눈을 내리떴다.

새벽쯤에 갑자기 라울이 이쪽을 찾았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저택에 따로 마련이 된 의무실에 있었던 그였다. 라울이 부를 것을 예상하고 있기는 했으나 그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라울이 요구한 것을 들었을 때에는 크게 놀랐다. 이내 의원은 라울이 말하는 걸 모두 찾아서 그 손에 쥐여 줬다. 라울은 별다른 말 없이 돌아갔다.

돌아가고 난 후, 분명 라울은 그 사내를 안았을 거다.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오랜 기간 이 저택의 주치의로 있으면서 이런저런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의원이었다. 자연스럽게 라울의 성적인 기호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어도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라울이 어떤 사내인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런 기호라 할지라도 결코 사내를 찾아 안지 않을 사람이 바로 라울이었다. 그런 그가 사내를 안으려 하고 있었다. 오르베가 중간에 장난을 친 거라 하나, 라울 스스로 사내를 안으려 하는 의지를 보인다는 게 중요한 거였다.

물론 그것은 공공연히 알려져선 안 될 일이었다. 때문에 새벽부터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거였다. 그 누가 온다 하더라도 결코 자리를 물리지 않을 거라며 의원은 굳게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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