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7)

#9

아침 일찍 일어난 라울은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정리한 후에 밖으로 나왔다. 나서는 그를 확인한 고용인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려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아주는 일은 없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바로 밖으로 나갈 요량으로 있었던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오던 마기휼을 발견했다.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로 걸어오는 사내의 걸음은 껄렁거렸다. 다른 쪽을 쳐다보며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도 라울을 발견하고는 눈을 깜박였다.

다소 당황한 것 같았다. 눈을 굴리나 싶던 마기휼은 한 손을 들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안녕?”

잘 잤어? 그런 뉘앙스로 인사를 건넨다.

그 인사에 라울은 고개를 까닥였다. 그리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에 손을 들고 있던 마기휼의 표정이 굳는다.

원했던 건 이런 반응이 아닌데?

눈썹이 오묘하게 올라간 채로 있던 마기휼은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라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가버리는 라울을 쳐다만 보던 마기휼이 그 뒤를 쫓았다. 따라붙자 바로 옆으로 눈동자를 움직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기휼은 움찔했다. 왜 라울을 따라 움직인 건지 모르겠다.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언제나처럼 실없는 말을 건넸다.

“아침은 먹었어?”

“먹으러 갈 생각이다.”

“어디서 먹어? 식당에서 안 먹는 것 같던데. 아, 여기는 식당이 많으니까 다른 곳에서 먹는 건가? 너 사람 없는 곳 좋아하지?”

말을 하면서도 이런 식의 대화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싶었다. 스스로 의문을 품어도 어쩌겠는가. 이미 말은 입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는데 말이다. 발을 멈춘 라울은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차분한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눈을 댕그랗게 떴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 그리 말하는 듯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이내 라울의 입이 열렸다.

“말이 상당히 짧군.”

“……응?”

“난 대령이고 자네는 소령이 아닌가. 그런 계급을 떠나서라도 나에게 이런 식으로 짧은 말을 할 입장은 아니지 않나?”

“…….”

마기휼은 가만히 있다가 눈을 깜박였다. 멍한 얼굴을 하던 것도 잠시, 마기휼은 입을 반쯤 열었다.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다음부터 조심하도록.”

“그렇게 하지요.”

어쩔 수 없이 빈정거리는 억양이 나왔다. 마기휼을 흘겨본 라울이 그를 지나쳐 간다. 그렇게 혼자 복도에 남은 마기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지금 이 상황이 어이없다.

“이게 뭐야?”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이건 결단코 이쪽이 기대하거나 상상하던 장면이 아니었다. 이런 식의 대화를 원했던 게 아니었다. 물론 딱히 정해진 대화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저 재수탱이는 도대체 뭐야? 나한테 저런 식으로 말을 해도 되는 거야?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야. 이 자식아. 너는 꼭 그런 식으로 말을 해야 하는 거냐? 내가 취향이라며? 조심하라고도 한 놈이 이게 뭔 짓이야. 부드럽게 대해주지 못해? 그런 식으로 딱딱하게 나오면 잘도 내가 넘어오시겠다. 내가 널 좋아하게 될 것 같기나 하냐?

허리에 양손을 올린 마기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어이가 없었다.

“우와― 나 미치겠네.”

고개를 돌리며 오만상을 찡그리던 마기휼은 복도에 나타난 고용인을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움켜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 괜히 머리를 긁적이며 딴청을 피운다. 그런 그를 지나쳐 고용인이 가버린 후, 마기휼은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방금 내가 뭘 한 거지? 그 멍청한 행동을 한 게 정말 나였던 걸까?

애초에 먹히지도 않을 행동이었다. 이쪽이 그런 식으로 군다 해서 라울이 당장 넘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넘어와?

“나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지?”

중얼거리는 마기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당혹과 황망함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은 양손으로 뺨을 탁탁 두드렸다. 그러다 고개를 마구 저었다.

복도 한가운데에 서서 저렇게 있는 마기휼은 어떻게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왜 저러나 싶기도 했던 아이들은 조각상 뒤에 몸을 숨긴 채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상하다.’라든가 ‘어딘가 아픈 것 같아.’라는 의미가 담긴 시선을 주고받던 아이들은 이내 몸을 돌렸다. 새롭게 알아낸 마기휼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대해서 보고를 할 필요가 있었다.

생각을 하던 마기휼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차라리 말자. 지금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은 바보 같은 짓이고, 어리석은 거다. 이런 멍청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라 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라울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거였다. 그놈에게 팔려 온 신부라고 일단 정해진 것 같던데 난 안 그래. 그런 멍청이가 아니란 말이야. 20만 베리? 까짓것 갚으면 되잖아. 그러면 되는 거야.

하지만 계속해서 아버지의 빚이 나오면 어떻게 하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마기휼의 안색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계속해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고향 집에 내려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가휼만 빚쟁이들의 독촉을 받게 할 수도 없고, 라우젝의 말처럼 돈을 빌려준 것도 아닌데 달라고 하는 놈들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군인인 자신이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말고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맞다.”

편지랑 손수건. 그건 다 어디에 있는 거지?

마기휼은 당장 아래로 내려갔다. 전날 옷을 벗어 두고 어디에 두었을지를 떠올렸다. 그 어린 악마들이 아래로 내려놨을 터였다. 대부분의 빨랫감들은 한 곳에서 처리가 된다고 들었다. 그 위치가 가장 구석 쪽이라고 했지.

건물 뒤편에 빨래를 말릴 수 있는 공터가 있다고 했다. 거기서 어디일까 싶어 계속 걸음을 옮기던 중에 1층 복도 끝에 다다르자 반쯤 열린 문이 보였다. 거기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마기휼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갔을 때 보인 건 줄에 걸려 펄럭거리는 하얀 이불과 옷가지들이었다. 막 빨래를 한 것인지 바람결에 좋은 향기가 퍼져 나갔다. 중간에 서서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아, 왠지 마음이 안정되고 있어. 막 빨래한 옷감의 냄새가 이렇게나 좋은 것이었나. 새삼스럽게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가만히 서 있으려니 막 빨래통을 들고 나오는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도 이쪽을 봤다. 눈이 마주쳤는데 가만히 있기는 좀 뭐했던 마기휼은 당장 그리로 접근했다.

“저기. 실례합니다.”

“말씀하십시오.”

대답하는 여자의 태도는 깍듯했다. 고개를 조아리며 다시 위로 드는 움직임이 물처럼 자연스러웠다. 자신들 집안에 있던,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지나치던 시종들과는 많이 달랐다. 멍청한 얼굴로 있는 동안 여자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차분한 태도로 응시해 왔다. 이쪽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내가 입었던 옷에서 꺼내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그거라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바로 깨달은 건가. 빨래할 때 주머니 검사를 할 테니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바로 찾게 될 줄은 몰랐다. 마기휼은 잘되었다며 기다렸다. 조금 후 여자가 마기휼에게 다가왔다.

“여기에 있습니다.

여자가 내민 건 주머니였다. 그걸 받아 든 마기휼은 주머니의 매듭을 풀었다. 워낙에 꽁꽁 묶여 있어서 풀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렇게 간신히 주머니를 연 마기휼은 안에 담긴 것들을 확인했다. 편지와 손수건. 딱 두 가지였고 마기휼이 찾던 바로 그것이었다.

손을 대지 않은 듯 깔끔하게 들어가 있는 걸 확인하고 있으려니 여자가 물어 왔다.

“찾으시는 물건이 맞으신지요?”

“아, 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세탁하다가 나오는 물건은 모두 그런 식으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물건에 대해서는 따로 살펴보거나 확인을 하지 않으니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지요. 그러실 것 같습니다.”

마기휼은 여자를 바라봤다. 신뢰가 담긴 시선에 여자 또한 미소가 한결 가벼워졌다. 여자는 정중히 인사를 하더니 빨래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기휼도 주머니를 들고 몸을 돌렸다. 건물 안으로 바로 들어가진 않았다.

건물을 돌아 인적이 드문 곳으로 들어간 마기휼은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레 편지를 펼쳐봤다. 썩 유쾌한 내용이 적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외면만 할 순 없었다. 한 번 더 내용을 살펴보고 싶었다. 글을 쓰면서 가휼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그 심중을 파악하고 싶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마기휼은 글귀의 첫 부분에 시선을 고정했다.

[형님. 사실은 떠나는 형님께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형님은 그 전에 저택을 나간 후여서 그리할 수가 없었지요. 그게 참 아쉽고 마음이 안 좋습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왜 진작 편지를 쓰지 않았던가 싶습니다. 형님이 처음 군에 들어갔을 때, 저는 정말 외로웠습니다. 이 넓은 저택이 더 크고 거대하게만 느껴졌지요. 형님이 없는 동안 내가 이곳에서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실제로 모든 걸 다 잘해서 나중에 형님이 돌아왔을 때 자랑스러운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전 형님의 자랑스러운 동생이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시간은 많이 흘렀고, 그 속에서 벌어진 일이 너무도 많았으니까요.]

글씨체가 흐트러진 게 눈에 보였다.

편지를 쓰는 동안의 가휼의 심경이 복잡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마기휼의 표정이 덩달아 굳어졌다.

[형님이 지금 안베르에 도착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놀라고 당황스러웠지요. 무작정 들어가도 정말 괜찮은 건가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전 걱정이 되면서도 형님께 도움이 되어줄 수가 없습니다. 저는 힘이 없는 무능한 놈입니다.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도 그런 제 무능함이 뒷받침하기 때문이겠지요.]

안베르에 와 있다는 걸 광고도 하지 않았는데 가휼이 어떻게 아는 건가 싶었다. 누군가 연락을 준 건가.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대상은 빤했다. 라우젝이 아니면 오르베겠지.

마기휼은 안색을 굳혔다.

[아버지가 많이 변하셨지만, 그 변화가 갑작스러웠던 건 아닙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 깊은 죄책감을 느낍니다. 제가 많은 잘못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한 일이나 결과에 대해 원망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일들에 대해서는 저 스스로 해결을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형님께 드러내고 싶지는 않지만 달리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습니다. 친척들은 땅을 팔라고 합니다. 저택을 팔아서 작은 데로 이사를 하라고 하더군요. 다른 친척은 헐값에 넘기라고 했습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이곳은 우리 가족의 추억이 담긴 장소이고, 저는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곳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로 인해 형님께 더 큰 부담을 주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친척들이 땅을 팔라고 하는 건가.

믿을 사람 하나 없었다. 지금이라면 땅도 제값을 받을 수 없었다. 헐값으로 내놓으면 분명 그 친척이라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사려 들 거다. 예전부터 그들은 그 땅과 저택에 욕심을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형님. 돈이 필요합니다. 당장 필요한 돈은 5만 베리입니다. 이런 말을 꺼내면 안 되지만 달리 생각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형님께 한 짓을 생각하면 편지를 보내서도, 이런 내용이 담겨 있어서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의지할 사람은 형님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의 무능함은 오로지 형님만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게 제 착각이라 해도, 오만에 가까운 억지라고 해도 말입니다. 이제는 정말 형님밖에 없습니다.]

전날 편지를 읽었을 때에는 거부감과 황당함만이 가득했다.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런 편지를 또 쓸 수가 있는 거지? 그게 말이나 되는 거야? 그리 생각을 하게 되어 가휼에 대한 원망이 컸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처음부터 주욱 읽어 내려가는 동안 가휼의 참담함이 전해졌다.

나에 대해서 이곳에 말을 해 돈을 빌린 것이나, 이렇게 편지를 써 다시금 돈을 달라 하는 것에는 그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다급함마저 느껴졌다. 그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초조해하고 다급해해야 하는 건지,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가휼이 마지막으로 믿고 의지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되어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어려서부터 형을 잘 따르던 아이였다. 이런 한심한 형이 세상에서 제일이라 생각하고 군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 지난 몇 년간 자신을 대신해서 집안을 이끌기도 했던 가휼이었다. 아버지의 변화로 인해 가장 힘들었던 것도 바로 그였다. 돈이 대수냐. 그리 생각을 한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벽에 머리를 기댄 채로 앉아 멍하니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기휼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라울이 있는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리 썩 유쾌한 상태는 아닌 듯싶었다. 일견 보기에 가볍고 활달할 것 같지만, 혼자 있을 때에는 저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몸에서 힘을 다 풀고 맥이 빠진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지쳐 보이는 그 모습에서 쉽사리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라울은 창가 앞에 선 채로 아주 조금 보이는 마기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차려진 음식들은 식어 가고 있었다. 식은 음식은 맛이 없는 법이었지만 라울은 그것에 개의치 않아하는 모습이었다. 그저 차분한 눈길로 마기휼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나 마음에 들어?”

빈정거림이 섞인 목소리였다. 라울은 뒤를 돌아봤다. 테이블의 끝에 앉아 있는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다리를 꼬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라우젝이 이상한 존재로 여겨졌다. 적어도 라울이 철이 들 무렵부터 그는 계속 그 모습이었다. 고정된 외모와 신체. 그리고 뒤틀린 분위기는 어렸던 라울에게 있어 껄끄럽고 두려운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성장을 하고 나이를 먹어 가는 자신과 달리 그는 노인이 되는 순간에도 저런 젊음을 유지하고 있을 거다. 그건 본인 스스로에게도 끔찍한 일이겠지만 그걸 보는 입장도 그리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쳐다보는 라울의 눈동자는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는 감정을 많이 감출 수 있게 되었지만 그가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 모를 라우젝이 아니었다.

라우젝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음에 들면 취하면 되잖아. 뭐가 망설여져? 그는 팔려 온 거야. 내키면 돈을 주고 성욕 처리를 해주는 길거리의 여자와 크게 다름이 없어. 그러니 죄책감 가지지 말고 안아버려. 그러면 한결 편해질 거야. 응?”

그건 굉장히 쉬운 일이야. 그리고 그것에 대해 네가 망설일 필요도 없어.

그리 종용하는 눈빛을 받은 라울의 미간 사이로 미미한 주름이 만들어졌다.

“오르베와 짜고서 날 화나게 할 속셈인가?”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널 위해서 하는 말일 뿐, 널 화나게 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런 내 말에 네가 자극을 받고 힘들어한다면,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

라우젝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웃는 그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교활하고, 비열해 보였다.

“네가 진심으로 저 마기휼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말이야.”

입을 다문 라우젝의 입술 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이쪽이 하는 말 여하에 따라 크게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라울은 그에게 다가갔다. 바로 앞까지 와 발을 멈춘 라울이 라우젝을 내려다본다. 껄끄러운 눈빛을 보내도 라우젝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살벌하기까지 한 지금의 분위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의 당신에 비해 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내내 여유로운 미소를 짓던 라우젝이었으나 그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

“지금의 나를 당신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경직된 얼굴이 된 라우젝을 내려다보며 라울은 말을 이었다.

“당신의 농지거리에 내가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장난은 적당한 수위에 맞춰 저질러주십시오. 그리고 하나 더―”

라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전 실없는 장난을 가장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괜한 일에 마기휼을 끌어들이지 말고, 우리 두 사람을 엮으려 들지도 마라. 눈빛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입을 다물고 서 있는 사내가 지나치게 커 보였다. 그리고 그가 풍기는 강함은 라우젝으로 하여금 더는 미소를 지을 수 없게끔 했다. 안색을 굳힌 채로, 말이 없는 라우젝을 두고 라울은 몸을 돌렸다. 그는 다 식어버린 음식에 손 하나 대지 않고 조용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고 잠시 후 하녀가 들어왔다. 안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들어섰던 그녀는 식탁 위에 앉아 있는 라우젝을 발견하고는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할까 싶어 가만히 있던 그녀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양손을 모아 쥔 채로 입을 열었다.

“라우젝 님. 식탁 위를 정리해도 될까요.”

묻는 말에 대답이 없다. 정리해도 되는 걸까. 머뭇거리던 하녀가 접시에 손을 대는 것과 동시에 라우젝이 크게 팔을 휘둘렀다.

“시끄러워! 입 다물어!”

“꺄악-!”

라우젝의 손에 맞아 날아간 접시가 하녀를 쳤다.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놀랐던 하녀는 당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라우젝은 분을 참지 못하고 양손을 주먹 쥐며 부르르 떨었다.

“감히 나에게 저런 시건방진 태도를 보이다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울은 그래선 안 되었다. 적어도 이 저택 안에서 그는 자신의 말에 복종해야만 했다. 하라고 하면 따르란 말이야.

“왜 그렇게 화가 났지?”

옆에서 들리는 차분한 목소리에 라우젝은 당장 고개를 들었다. 돌아보는 눈동자가 날카로웠다. 그 시선에 오르베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하녀를 흘겨봤다.

“넌 언제까지 울고 있을 생각인 거냐. 어서 나가 봐라.”

“네, 네.”

우느라고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울먹거리며 시녀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쪽으로 달려가는 걸 확인하고 난 오르베는 라우젝의 앞에 다가섰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는 라우젝의 눈빛은 날카롭다.

“뭐야. 저리로 꺼져. 너 따위는 보고 싶지도 않아.”

“라울에게 그런 꼴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셈이야?”

순간적으로 라우젝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성이 돌아오는 걸 확인한 오르베는 재미있다는 듯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확실히 겉으로만 보면 우리 중에서 가장 번지르르한 게 바로 라울이야. 하지만 그는 결국에 우리 과야. 암만 잘나가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한들 그도 그림자 하나쯤은 품고 있어. 그런 주제에 아닌 척 혼자서만 고고하게 있는 모습은 솔직히 재수가 없지 않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라울이 결정하기 어려운 듯싶은데 우리가 도와주자고.”

오르베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 속으로 숨겨지지 않는 교활함이 감돌았다.

“조금만 도와주면 금방 자기 주제를 알게 될 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그놈은 사내를 밝히는 변태라는 걸, 스스로도 뼈저리게 깨달아야 두 번 다시 우리에게 까불지 않게 될 거야.”

오르베는 가슴골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위로 든 작은 호리병 속에는 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렸다.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조금만 손을 쓰면 그 뒤는 수월해. 남녀 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그들도 비슷하게 굴러갈 거야.”

호리병 속의 액체를 바라보던 라우젝은 오르베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오르베의 미소가 한결 짙어지고, 라우젝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편지를 접은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편지를 반으로 접어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도톰하게 오른 가슴에 한 손을 댄 채로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깥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여러 사람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원래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사람이 살기는 하나 늘 조용한 이 저택은 마기휼에게 있어 껄끄러운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곳이 이런 식으로 시끄러워지는 건 무척이나 드문 일이었다.

마기휼은 당장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건물을 가로질러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차 한 대와 군인 여럿이 서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서 있는 군인들 사이로 노드만이 보였다. 그는 이쪽에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굳이 그의 눈앞에서 알짱거릴 필요가 없었다. 마기휼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바로 그때 노드만이 고개를 돌렸고, 마기휼을 발견했다.

그 순간 노드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네놈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리 묻고 싶은 얼굴을 하던 것도 잠시, 노드만은 거침없이 마기휼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 앞에 멈춰선 그는 눈에 힘을 딱 준 채로 물었다.

“네놈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네놈이라. 그래도 난 소령이란 말이야. 중앙군 소속 중령의 눈에는 우습게 보일지는 몰라도 말이야.

마기휼은 썩소를 지었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도 않고 불량스럽게 있는 모습이 그리 썩 보기 좋지만은 않았다. 자연스레 노드만의 안색이 변했다.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지? 도대체 언제부터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거냐?”

“안베르에 왔을 때부터 라울 대령님의 신세를 지고 있었지요.”

“뭐라고?”

일부러 자극을 가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지만 노드만의 건방진 태도가 못내 거슬렸다.

무엇보다 이쪽은 네놈한테 그런 식의 대접을 받을 필요가 없는 몸이란 말이야. 난 나름 잘나가는 마기휼이라니까?

마기휼은 턱을 살짝 올리고는 눈을 내리떴다.

“마음 같아서야 지금 당장 저택에서 나가고 싶은데 대령님께서 그러지 말고 제발 좀 저택에서 지내 달라고 하시니 수가 있습니까. 싫어도 그냥 머물러주는 거지요. 나는 정말 껄끄러운데. 대령님이 원하시니까.”

정말 얄미운 표정과 억양을 사용해서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 앞에서 이런 식으로 굴면 당장 펀치를 날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기휼은 아랑곳하지 않고 약 올리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이리 말을 한다고 해서 네가 뭘 어찌할 수 있겠어. 그리 묻는 표정을 짓자 노드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놈―”

파들거리고 떨리는 뺨이나 입술에서 그의 분노가 충분할 정도로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기휼은 태연하게 눈을 굴렸다.

노드만은 손을 움켜쥐었다. 한 대 칠 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던 때에 노드만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자세를 바로잡았고, 마기휼도 뭔가를 감지하곤 뒤를 돌아봤다. 저택에서 나오는 라울이 보였다. 노드만은 숨겨지지 않는 열망이 담긴 눈길로 라울을 바라봤다.

“대령님. 오셨습니까.”

“그래.”

차분하게 대답을 한 라울이 옆을 지나칠 때 마기휼은 순간적으로 달아오르는 얼굴을 정리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해야 했다.

방금 온 것 같은데 설마하니 내가 한 말을 듣지는 않았겠지? 들으면 안 되는데. 쓸데없이 노드만 앞에서 센 척을 했나? 초조해져서 고개를 똑바로 들지도 못하는데 라울은 그런 마기휼을 싹 무시하고 노드만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지금 바로 이동해야 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바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바로 움직이자.”

주고받는 말이 다소 심각하게 들렸다. 서두르는 걸 보아하니 실제로 무슨 일이 터지긴 한 모양이었다. 끼어들기엔 좀 거시기한 분위기였다. 알아서 입 다물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어느새 마기휼은 라울을 붙잡고 있었다.

라울의 팔에 손을 댔을 때, 노르만의 얼굴이 굉장히 살벌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걸 본체만체하며 마기휼은 라울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니라 한다면 믿을 건가.”

“제가 믿을 것 같습니까?”

이런 상황에 분위기인데 말이다. 초짜라 해도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단박에 알 거라며 마기휼은 눈을 부라렸다.

숨기려 들지 말고 어서 불지 못해?

추궁하는 눈빛에 라울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도주한 마리아가 일을 친 모양이로군. 때문에 지금 나가 봐야 한다. 따르겠나?”

“…….”

아아. 마리아. 이 독하고 손 빠른 여자. 너를 본 게 바로 어젯밤이었던 것 같은데 오늘 사고를 쳤다는 말을 듣게끔 하다니. 사람 숨넘어가게 해서 죽일 일 있는 거니. 마기휼의 얼굴이 칙칙하게 변했다. 그 얼굴을 확인한 라울의 눈빛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그냥 이곳에 있어야겠군.”

“어? 나 데리고 갈 생각이었어?”

아무래도 그냥 이곳에 있어야겠다니. 마치 처음에는 이쪽을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변했다는 뉘앙스였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일단은 라울을 쫓아가 봐야 한다는 거였다.

“저도 데리고 가십시오!”

저택 안에 혼자 있으면서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나 싶어 전전긍긍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앉아만 있으면서 잡생각을 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라울을 쫓아다니면서 함께 움직이는 편이 백 배, 천 배는 나았다.

이쪽을 쳐다보는 라울은 무심함 그 자체였다. 그 얼굴만 보자면 도저히 이쪽을 데리고 갈 것 같지 않았다. 마기휼은 조금 더 강한 어필을 했다.

“꼭 따라가고 싶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에도 라울은 여전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속이 읽히질 않으면 괜히 초조했다. 한 번 더 강한 어필을 해야만 하는 건가 싶어 눈을 굴리려니 뒤에서 지켜만 보던 노드만이 앞으로 한발 나섰다.

“억지 부리지 마라. 너 같은 걸 데리고 가실 리가―”

“문제는 일으키지 마라.”

말을 하다 말고 노드만은 당장 라울을 쳐다봤다.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그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라울의 말은 지금 마기휼을 데리고 가겠다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급히 마기휼을 쳐다보자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 즉시 저택으로 돌아와야 할 거다.”

“물론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도움이 되면 되겠지만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린 마기휼의 입술 양 끝이 한껏 올라갔다. 그 얼굴을 확인한 라울이 몸을 돌렸다. 그렇게 라울이 먼저 마차에 올라타자 마기휼도 급히 뒤를 쫓았다. 마기휼의 팔을 노드만이 붙잡았다.

“잠깐. 지금 어디를 가려는 거냐.”

“마차에 타려는 거잖습니까.”

대꾸하는 마기휼은 심히 탐탁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라울이 허락을 한 일인데 네가 왜 자꾸 틱틱거리는 거냐.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자 노드만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감히 네놈 따위가 대령님과 같은 마차에 타다니. 죽고 싶은 거냐.”

죽고 싶지 않다고 해도 당장 때려잡을 기세였다.

지나칠 정도로 라울에게 맹신하는 사내였다. 그런 사내를 굳이 건드릴 필요가 어디에 있겠나 싶었다.

그래. 네 마음 다 안다. 너의 워너비 라울 님께 달라붙는 거대 왕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하지만 어쩌냐? 나도 너 진짜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

속이 꼬이는 걸 느끼면서도 마기휼은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양손을 위로 들며 친근함이 풍기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 전 어디에 타면 될까요?”

“바깥쪽에 다른 마차가 있다. 그걸 타고 와라.”

노드만의 말에 마기휼은 반사적으로 라울이 탄 마차를 쳐다봤다. 그 순간 노드만의 눈에 더 힘이 들어갔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는 건가. 알았다는 듯 마기휼은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 가벼워 보이는 태도나 금방 고개를 돌리고 휘파람을 부는 모습이 보기에 거슬렸다. 어디서 저런 촌뜨기가 나타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금니를 악문 노드만은 마기휼을 노려보다 라울이 타고 있는 마차로 걸어갔다.

“출발한다.”

말을 전한 노드만이 마차에 오르는 걸 확인한 후 군인들도 움직였다. 마차가 움직이나 싶더니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노드만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라울에게 공손하게 서류를 건넸다.

“보고서입니다.”

라울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내용을 살펴보는 그 얼굴은 태연했다. 노드만이 익히 알고 있는 라울이었다. 이쪽이 라울보다 연상이었지만, 노드만은 라울에게 인간적으로 강한 매력을 느꼈다. 그라면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실수 없이 완벽해질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마기휼이 곁에 있으면 느낌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았다. 노드만에게 있어선 참 거슬리는 일이었다.

“저런 가벼운 자는 대령님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참으려 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막을 도리도 없이 바로 말이 나왔다. 처음이 어려울 뿐이지 일단 말을 하게 되자 뒤는 수월했다.

노드만은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움켜쥐었다.

“저런 자가 대령님의 곁에 있으면 결국 대령님의 평판만 나빠질 따름입니다. 현장에 데리고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하십시오. 저택이 아닌 다른 곳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런 사내가 알짱거리는 걸 다른 이들이 보게 된다면 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너는 나의 사생활에도 관여할 생각인가.”

라울은 서류를 내렸다. 그걸 손바닥 위에 올린 채로 노드만을 바라봤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너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너는 그저 네가 맡은 일만을 하면 된다. 네 역할이 뭐지?”

차분하게 묻는 목소리 안쪽으로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었다.

목 안쪽이 칼칼해지고 두려움이 잠식한다. 눈동자가 떨리는 걸 느끼며 노드만은 어렵게 대답을 했다.

“전 중령입니다. 대령이신 라울 님을 보좌하는 입장입니다.”

“그게 내 사생활에도 관련되는 입장인가?”

“……아닙니다. 군 내에서만 통용되는 입장입니다.”

“잘 알고 있으면서 거듭되는 실수를 하는군. 나는 두 번 반복해서 말하는 걸 싫어한다.”

“물론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노드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로 열이 오른다. 너무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동시에 라울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모든 것이 그를 위해 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말을 들어 그에게 나쁠 것이 없었다. 그는 진정 그걸 모르는 건가. 노드만은 떨리는 눈빛을 아래로 떨궜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다.”

무거운 말이었다. 다음에도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될 경우, 라울은 당장 자신을 내칠 터였다. 그의 곁을 다른 이가 보좌하게 되는 건가.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노드만은 가만히 있었고, 그걸 확인한 후에야 라울은 재차 서류를 살펴봤다.

무기 창고가 다 날아갔다. 한쪽 벽면은 물론이거니와 옆에 붙어 있던 군인들의 휴게 시설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휴게 시설 내에 있던 군인 다섯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무기 창고를 지키던 군인 셋도 사망했다. 중상을 입은 이들이 열이고, 경상은 다섯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나타나 이런 짓을 저지르고 바로 사라져버렸다. 워낙에 신속해서 미처 방비할 수 없었다는 보고를 하는 군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상대적으로 부상의 정도가 경미해서 보고를 하게 된 입장이 된 그는 이미 튜완 사령관에게 엄청 깨진 상태였다. 지금 이렇게 버티고 서 있는 것도 그에게 있어선 꽤나 힘든 일이었다.

“그들 중에 여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짧은 금발 머리카락에 붉은 슈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날렵하고 주변 사람들을 이끄는 게 능숙해 보였습니다. 그 여자의 뒤로 키가 2미터가 넘는 사내도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톰인가.”

중얼거림을 들은 군인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을 한 거냐고 묻는 얼굴에 라울은 계속 말을 해보라 했다.

군인은 기억을 더듬었다. 아까 튜완 사령관은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닦달을 해서 본 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라울은 이쪽이 기억을 떠올리고 정확하게 말을 할 수 있도록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군인은 다소 편안한 상태에서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한 사내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상한 사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건가.”

“검은 선글라스를 쓴 체격이 좋은 사내였습니다. 망토를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습니다. 팔이나 목 부근에 털이 나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에도 그 사내는 가만히 서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만 보는 인상이었습니다. 묘하게 눈길이 가는 사내였습니다. 인간이기는 한데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체격이 좋고 털이 많이 있는 사내라.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신체적인 변형이 일어난 사내인가. 때때로 짐승의 특징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으나 부르는 호칭은 달리 정해져 있었다.

“종족인가.”

그리고 비밀결사 엔온 인가.

이쪽이 그렇게나 뒤를 쫓던 존재가 수면 위로 올라온 건가.

먹이를 문 건가. 그게 아니라면―.

“그 사내가 뭔가를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라울은 군인을 쳐다봤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군인의 얼굴은 창백했다. 이마에 닿은 손가락이 덜덜 떨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군인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고, 말을 하려 했다.

“그 사내가 직접 말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 머릿속으로 말이 전해졌습니다. 그 사내가 말했습니다.”

군인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그 목소리의 톤도 달라진다.

손을 내린 군인은 라울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라울의 옆에 서 있던 노드만은 기분 나쁘다는 듯 얼굴을 굳히며 군인 쪽으로 팔을 뻗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나는 아이작이다. 나를 만나려면 레드존으로 와라.”

노드만과 군인의 말은 동시에 나왔다. 자연스럽게 말이 겹쳐졌으나 라울은 군인이 하는 말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라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군인의 입술 양 끝이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창백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을 하던 아까의 군인이 아니었다. 노드만은 놀란 듯 숨을 들이켰고 라울은 눈동자를 움직였다. 무너진 건물을 살펴보는 마기휼이 보였다. 쪼그리고 앉은 사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돌리자 하나로 땋아 내린 꼬랑지가 빙글 돌아갔다.

보랏빛 눈동자가 정확히 이쪽을 바라본다. 그 순간 라울은 앞에 서 있는 군인을 재차 확인했다. 군인의 미소가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이내 그의 코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놀란 노드만이 라울의 앞을 막아섰다.

“대령님! 피하십시오!”

노드만이 나서는 것과 동시에 군인이 품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 검이 크게 휘둘러져 노드만의 팔을 갈랐다. 노드만이 소리를 지르며 팔을 감싸는 순간 군인이 앞으로 크게 몸을 내밀었다. 그 순간 뒤에서 날아온 채찍이 군인의 목을 휘어 감았다.

뒤로 목이 꺾어진 군인의 몸이 공중에 부웅 떴다. 그 뒤로 채찍을 손목에 감아 뒤로 당기는, 굳은 얼굴의 마기휼이 보였다.

라울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을 읽었을 때 본능적으로 손이 움직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기휼은 쓰러진 군인에게 달려가 그가 움직일 수 없도록 엎드리게 하고는 팔을 뒤로 꺾어 무릎으로 등 가운데를 눌렀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너진 무기 창고를 살펴보고 있었던 군인들 중 대부분이 마기휼이 군인 하나를 내리누르는 모습만 봤다. 때문에 그가 왜 저러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을 보였다.

노드만은 베인 팔을 감싼 채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맺힌 그 얼굴은 통증을 참기 위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를 지나쳐 라울은 마기휼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엎드려 있는 군인을 내려다봤다. 군인의 입과 코로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인격이 변한 듯 굴던 군인은 지금 기절을 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묘한 현상이었다.

“이건 뭐지?”

“세뇌야!”

그것도 모르는 거냐는 듯 마기휼은 당장 라울을 올려다봤다.

“빌어먹을! 완전 짜증 나는데?!”

재차 나오는 말도 정확히 라울을 쳐다본 채였다. 마치 라울 그가 짜증이 난다는 투였다. 다른 이들이라면 뭐라 반응을 보일 만도 한데 라울은 그런 게 없었다.

“이 군인이 움직일 수 없도록 구속하고 재갈을 물려 요새로 이동시켜라. 그리고 노드만 중령을 치료해주도록 해라.”

다른 이에게 부축을 받고 있던 노드만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가벼운 부상입니다.”

“그렇게 피가 흐르는데 가볍다 말할 생각인가. 군의관을 따라가라.”

더 할 말은 없다는 듯 라울은 당장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는 손을 털고 일어나는 마기휼에게 붙어 섰다. 뭐라 말을 걸자 바로 마기휼의 입술이 씰룩거린다. 싫다는 내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마기휼은 “왜 그런 것도 모르시는 겁니까.”라고 날을 세웠다.

감히 라울에게 저런 식으로 말을 하다니. 화가 났다. 그러는 동안 군의관이 다가와 부축을 해줬다. 라울의 말이 있었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그는 당장 군의관의 손을 뿌리치고는 스스로 이동을 했다.

노드만이 가고 난 후 라울은 다른 이들에 의해 부축을 받고 일어서는 자를 쳐다봤다. 여전히 의식을 잃고 있는 듯 축 늘어져 있었다. 라울이 손을 뻗어 그 군인의 턱에 손을 대자 부축하고 있던 자가 황급히 말했다.

“대령님 위험하십니다.”

걱정의 말을 해도 라울의 손길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차분한 눈길로 군인을 바라볼 뿐이었고, 군인은 눈을 뜨지 못했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습니다. 의식이 완전히 날아가버린 상태니까.”

라울은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채찍을 감으며 마기휼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뇌는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히는 짓입니다. 치료를 잘 받으면 모르겠지만 방치를 하면 불구가 되거나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리지요. 조사도 좋지만 사람 목숨 하나 건질 요량이라면 지금부터 제대로 된 치료를 해야 할 겁니다.”

라울을 상대로 잘도 저런 식으로 말을 하는구나 싶었다. 마기휼이 대단하다 여겨지는 동시에 일단은 라울의 생각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군인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라울은 잠시 생각을 했다. 어찌할 것인가. 이내 그는 입을 열었다.

“움직일 수 없도록 구속을 한 상태로 군의관에게 인계하도록 해라.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쇼크 상태이니 약물 치료부터 들어가게끔 해라.”

“네. 알겠습니다.”

라울이 내린 명령에 마기휼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쪽 말을 들어주는 건가. 라울을 찌르려 했지만 그것 모두가 세뇌를 당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본인의 의사는 1g도 섞여 있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치료를 잘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분명 정신세계가 다 붕괴할 거다. 그나저나 이런 짓까지 사용하다니. 사람을 실망하게 한다면서 마기휼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라울은 굳은 마기휼의 얼굴을 쳐다봤다. 잠자코 있던 그는 마기휼의 뒤에서 다가오는 튜완 사령관을 발견해내곤 앞으로 나섰다. 갑자기 앞을 가리는 라울의 행동에 마기휼은 뭔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성질머리 안 좋게 생긴 사령관이 라울의 앞에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마기휼은 그 순간 켁- 하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그것도 라울이 앞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표정을 변화를 사령관이 봤다면 분명 한 소리 했을 터였다. 사령관의 물음에 라울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별일 아니라니? 내 아들인 노드만 중령이 부상을 입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걸 다 봤는데.”

다 봤다면 일부러 숨길 필요가 없었다. 숨긴다 해서 그냥 넘어갈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라울은 순순히 말했다.

“불온한 세력이 군인 중 하나에게 세뇌를 걸어 둔 모양입니다. 이성을 잃고 저를 공격한 것을 노드만이 막았고, 범인은 지금 군의관에게 옮기도록 했습니다.”

“왜 군의관에게 보낸 건가? 그런 괘씸한 놈은 당장 더 심문해봐야 한다. 그래야 이곳을 이리 만든 놈들에 대해서도 알아낼 수 있을 게 아닌가.”

“세뇌로 인해 자의가 아닌 행동을 했던 것뿐입니다. 신속하게 빠른 치료를 받지 않으면 그의 정신 자체가 무너지게 될 겁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당장 나에게 인계하도록! 내가 조사를 하겠다!”

“사령관님.”

침착한 부름에 튜완은 움찔했다.

“직접 나설 만큼 가치가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사소한 일은 아랫것들이 처리하게 두십시오.”

마기휼은 의외라는 눈빛을 던졌지만, 라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가뜩이나 처리할 일도 많은 분이 아니십니까.”

“…….”

라울의 말에 튜완의 뺨이 파들 떨린다.

다른 사람도 아닌 라울만 한 사내가 이렇게 말해주니 살짝 마음이 누그러진 그는 헛기침을 했다.

“뭐,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군―.”

하지만 이 일을 저지른 놈들에 대해선 용서가 되지 않았다.

튜완은 분하다는 듯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 괘씸한 놈들. 날 진심으로 화나게 하다니. 반드시 붙잡아서 사지를 뜯어내버리겠다. 감히, 감히―.”

실은 무기 창고가 이리된 것은 그리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거다. 사령관이 신경 쓰는 건 이번 일로 인해 흔들린 그의 평판이겠지. 마리아가 탈주하고 그 일당들도 도주를 해버렸다. 그걸 붙잡아야 하는데 일주일 안에 다시금 사건이 터진 거였다.

무기 창고가 털린 것이니 개중 위험한 것들도 있을 거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튜완 사령관 그만 불리해지게 될 터였다. 그러니 저렇게 화를 내는 한편으로,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것이겠지.

튜완 사령관은 라울을 흘겨봤다. 부리부리한 눈동자 안쪽에 서린 경계심이 감추어지지 않았다.

“이번 일은 내가 다 처리를 할 것이다. 너는 가만히 있어야 할 거다. 알았나?”

“물론입니다. 유능하신 튜완 사령관님께서 모든 걸 잘 처리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분명 여왕께서도 그리 생각하실 겁니다.”

라울답지 않은 아부에 튜완 사령관은 가슴을 넓게 펼쳤다. 아주 조금 상처를 입은 그의 자존심이 회복된 모양이었다. 더 수색을 해보겠다며 몸을 돌리는 튜완을 확인한 마기휼은 라울 쪽으로 걸어갔다. 그를 흘겨봤다.

“아부도 하실 줄 아는 성격이셨습니까?”

“못 할 것도 없지.”

“거짓말 같은 거 못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튜완 사령관은 오만하고 성급하기는 해도 유능한 인물이다. 그것이 거짓은 아닐 테지만 이번 일은 그의 역량을 넘어서는 문제가 될 듯싶군.”

차분하게 말을 하는 게 묘하게 박력이 넘쳤다. 괜히 더 속을 긁지 말아야겠다며 마기휼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가 어디로 갔을 것 같나.”

마기휼은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왜 나한테 그런 걸 물어?’라고 따져 묻고 싶어하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 같나.”

“그런 걸 알면 제가 여기에 있겠습니까? 진즉 진급해서 어느 구역 담당자가 되었을 겁니다.”

“너는 알고 있지 않나.”

응시하는 눈동자가 속내를 다 파헤친다. 숨기려 해도 도무지 그럴 수 없게끔 하는 눈동자였다. 살짝 부아가 나기도 했지만 괜한 언쟁을 피하고 싶었던 마기휼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딱 한 곳밖에 없지요. 암시장. 그곳이겠지요.”

라울도 모르는 장소는 아닐 거다. 지저분한 쪽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었을 터였다.

“대대로 더러운 일은 모두 그곳에서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암시장은 열리는 시간이 일정치 않고 장소도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곳과 관련한 정보는 신원이 확실한 범죄자들만 알지요.”

“그곳에 대해 알아낼 수 없나?”

“알아낼 수 있을 턱이 없잖습니까.”

그런 게 가능하면 나도 이 자리에 없다니까. 거기서 물건 제대로 고르면 20만 베리가 문제일까. 웃돈을 받을 수 있는 물건들을 되는대로 모아 귀족들에게 팔면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다. 농담으로 암시장에서 굴러다니는 돌도 100베리의 값어치를 한다, 라고 하지 않는가.

사람도 팔고, 희귀한 짐승도 팔고, 때로는 군함도 거래 품목이 된다고 하는 이런저런 소문이 가득한 암시장이지만 그 정확한 위치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건 알아낸다고 해서 알아낼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나를 너무 과대평가 하지 말라고. 마기휼은 라울을 찌릿- 하고 노려봤다. 라울은 중얼거렸다.

“당분간은 요새에 처박혀 있어야겠군.”

“요새에 처박혀 있는다 해서 달리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내가 가만히 있으면 놈들은 다시 움직일 거다.”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라울은 대답 없이 혼잣말을 할 따름이었다.

“놈들은 아무래도 날 도발할 작정인 것 같군.”

라울의 말에 더더욱 알 수가 없어졌다. 그는 단지 왕통이고 대귀족이고 대령이고 안베르 요새를 맡은 군인이었다. 뭐, 여왕과의 인맥이 다른 이들보다 돈독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가 저 마리아가 속한 엔온과 거래를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입장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를 자극한단 말인가.

전에 배에서 일어났던 일도 수상쩍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건 평범한 군인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레드존까지 운운할 리는 없잖은가.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위를 쳐다봤다.

레드존이라. 삼국이 집중적으로 경비 체제를 설치한 장소였다. 그곳에 대해서 자세한 건 알지 못한다. 그저 고대의 유물이 잠들어 있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용의 이빨과 마녀의 안개가 깔린 위험한 지역이니 암만 대단한 유물이 있다 한들,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무사히 들어갔다 나올 수 없는 장소였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초반에 그곳을 지정했던 걸까. 이쪽이 모르는 뭔가가 있나.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허공을 쳐다봤다.

“마기휼. 안 따라오는 거냐.”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마기휼은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몸을 돌린 채로 이쪽을 보는 라울이 보였다. 움직일 때부터 알아서 뒤를 쫓아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눈빛을 보내는 것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을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마기휼은 괜히 투덜댔다.

“내가 지놈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개인 줄 아나.”

두 번째로 요새에 들어왔을 때 마기휼은 위부터 살폈다.

전에는 건물에 들어가려 했을 때 하늘에서 물벼락을 맞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별문제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것도 잠시 마기휼은 라울의 뒤를 졸졸 따랐다. 그러자 저기 안쪽에서 단발머리의 여자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여군은 어디를 가나 귀한 존재였다. 더군다나 저렇게 예쁘고 몸매가 좋은 타입은 더더욱 귀했다.

“대령님. 여왕 폐하께서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라울은 여군이 건네는 편지를 받아 들며 물었다.

“언제 도착했지?”

“11분 전입니다.”

“그래. 알았다.”

보내진 지 얼마 안 되는 편지였다. 그걸 품 안에 집어넣은 라울은 여군을 대동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 옆에서 잠자코 쫓아가던 마기휼은 라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까와 조금 달라진 시선이었다. ‘꽤 하는데?’ 그런 눈빛을 보내는데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라울은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아니요. 그저 대단하다 싶어서요. 정말로 여왕 폐하와 연락을 주고받기는 하는군요.”

“그건 당연한 거다.”

그쪽은 당연할지 몰라도 이쪽은 아니라니까. 태어나서 한 번도 여왕의 얼굴을 본 일이 없단 말이다. 일부러 말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는 불만이 그득한 눈빛을 던졌다. 라울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발길을 옮겼다.

요새에 틀어박혀서 어떻게 마리아의 행적을 좇을 셈인지 모르겠다. 보아하니 놈들은 즐기고 있었다. 라울이 상대가 아니라 마치 노르디아 연방국을 대상으로 삼은 듯싶었다. 정말 대담한 놈들이었다. 마리아만 봐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북방군 쪽에서 몇 년 동안 술집 첫사랑의 주인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가 엔온 소속이라는 걸 몰랐을 거다. 오랫동안 자신의 신분을 감춘 이들이 그런 식으로 군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나중에 불 후폭풍은 어마어마할 터였다. 상상만 해도 오한이 돋는다며 몸을 부르르 떨던 마기휼은 갑자기 멈추어 선 라울의 등에 얼굴을 부딪쳤다.

급히 뒤로 물러난 마기휼은 코에 한 손을 댄 채로 라울을 노려봤다.

“왜 갑자기 멈추는 겁니까?”

네놈의 등에 얼굴 부딪쳤잖아.

마기휼은 반항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시선을 보냈다.

“내 부관이 방을 안내해줄 거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아. 그렇군.’ 하고 갑자기 느낌이 확 왔다.

지금까지 같이 행동을 하긴 했지만 이쪽이 라울의 뭐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이 요새로 이동을 한 것도 아니고, 라울이 하는 일에 도움을 주거나 한 자리를 꿰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손님, 아니면 짐, 그도 아니면 민폐 덩어리. 그 정도의 모호한 입장에 있을 따름이었다.

비록 일을 친 마리아를 알고 있다 한들 그녀를 붙잡는 일에 협력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큰 도움을 줄 수도 없었다. 라울이 지금부터 하는 일에 이쪽은 열외인 존재였다. 딱 여기까지가 마기휼 그가 개입될 수 있는 선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지 모르겠다.

마기휼은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굳은 눈을 내리뜨는 걸 확인한 라울이 고개를 돌렸다. 단발머리의 여군이 보였다.

“히로. 그를 3집무실로 안내해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여군은 마기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난 복도를 가리켰다.

“절 따라오시지요.”

전이라면 호감이 갈 만한 미인의 미소도 지금은 그저 그랬다. 딱히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잠자코 그 뒤를 쫓았다. 마기휼이 히로 부관과 함께 이동을 하는 걸 확인한 라울은 혼자서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로 가는 동안 지문인식 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어두운 계단을 지나 앞에 있던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안쪽으로 각종 기계들이 놓여 있고 그 앞으로 군인들이 하나씩 배치가 되어 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수많은 화면들을 확인하며 라울은 가운데 길로 들어왔다. 차트를 살펴보고 있던 군인은 라울을 발견하고는 급히 그 앞으로 다가섰다.

“대령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막 암시장의 루트를 확인해 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군인은 차트를 든 손으로 한쪽 벽을 가득 채우는 화면을 가리켰다.

가운데 부분으로 큰 화면이 뜨고 대륙 지도가 그려졌다. 대륙은 세 분류로 나뉘었고 검은색, 붉은색, 하얀색이 삼국의 세력 분포도로 표시되었다. 안베르 쪽에서 세 갈래 선이 이동을 하는 게 보였다. 노르디아의 국경을 넘어 치울스로 진입하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튜왈리 산맥으로 이동하는 것 같습니다. 중간 정도에 3팀으로 나뉘긴 했으나 산맥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 중심 세력인 것 같습니다.”

튜왈리 산맥. 치울스 국경 내에 있으나 노르디아와 밀접한 지역이었다. 사전에 치울스에 연락을 취한다면 군함이 들어갈 수도 있는 지역이었다. 저곳 어딘가에서 암시장이 열릴 거다. 하지만 아직 속단은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닐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훔쳐서 달아간 물건이 대공포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공포에는 대령께서 지시한 대로 추적 장치가 붙어 있지요.”

대답을 하는 자의 눈동자 안쪽으로 미미하게 감탄이 드러났다. 오늘 무기 창고가 공격을 당할 것이라는 걸 라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서 사전에 손을 봐 두었던 것이다. 붉은 선은 대공포에 달린 칩으로 인해 그려지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언제 갑자기 변동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확신은 아직 일렀다. 그 무엇도 명확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쪽이 쳐 놓은 덫에 스스로 발목이 묶인 걸 수도 있었다.

“그들이 알아낼 가능성은?”

“없습니다. 아직 엔온이 지닌 기술력으로는 무리입니다.”

“확신은 하지 마라. 언제 갑자기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다.”

가능한 모든 사고를 열어 둬야만 했다. 그래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에 대해 흔들리지 않고 당황하지도 말아야 했다.

진지한 얼굴의 라울을 확인한 군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엔 긴장이 역력했지만 라울은 상관치 않았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암만 열심히 한다 한들 라울이 칭찬을 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가 잘 했다고 말을 해주는 것은 진정으로 모든 일들이 마무리가 되는 때일 뿐이었다.

“이곳은 너에게 맡기겠다.”

어떻게 해야지만 라울의 예견을 좇아갈 수 있을까 싶었던 군인은 갑작스러운 말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라울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뿔싸 싶으면서도 군인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혹여 변동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면 바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노드만은 모든 일을 추진함에 있어 열외로 치도록 한다.”

라울의 말에 군인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중령님을 말입니까?”

“유능하기는 하나 나와는 맞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가야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자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모든 계획에서 노드만 님을 제외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것도 잠시, 라울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벽 쪽으로 가서 서는 걸 확인한 군인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이들이 모두 자기 자리에서 일을 하는 걸 확인한 라울은 품에 넣어 뒀던 편지를 끄집어냈다. 접착면을 뜯어내고 안에 들어가 있던 편지를 꺼냈다.

하얀 종이를 펼치자 유려한 문체가 눈에 들어왔다.

[친애하는 나의 라울.]

언제나 늘 똑같은 문장으로 시작되는 걸 확인하며 라울은 아래 내용을 살폈다.

그 얼굴은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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