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동쪽 관문은 폭발로 인해 여기저기 무너진 잔해로 인해 엉망이었다. 곳곳에 치료를 받기 위한 환자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신음을 흘리거나 붕대를 감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부상자는 많지 않으나 건물이 무너진 것은 큰 타격이었다. 지난 200여 년간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 만큼, 이번 사고는 중앙군 감옥소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히는 일이었다.
“반드시 붙잡아서 끌고 와라!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내 용납할 수 없어!”
중앙군 소속의 튜완 사령관은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어 댔다. 다른 때라면 그의 곁에 달라붙어 화를 달래줄 이들도 지금은 정리를 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런 그들 사이로 마기휼과 라울이 있었다.
참상을 눈으로 본 마기휼은 할 말을 잊었다. 가만히 있는 동안 라울은 마리아가 있던 탑과 그 주변을 살폈다. 동쪽 관문은 완전히 박살이 났지만 탑은 무사했다. 아마도 동쪽으로 사람이 몰리는 틈을 타서 마리아를 탈주시킨 것이 분명했다.
“대령님.”
부름에 라울은 몸을 돌렸다. 달려온 노드만은 라울의 옆에 멈춰 서선 나직한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알아보라 한 것을 조사해 봤습니다. 조사를 위해 다른 쪽에 구속되어 있던 톰이라는 죄수도 탈주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적어도 2개 이상의 무리가 동시에 움직였다는 건가.”
그래도 이만한 속도라니. 안베르의 감옥소를 폭발시킨다는 발상도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던 건가. 마리아를 봤을 때 그들 무리에서도 꽤나 상위권에 속해 있었을 거다. 그냥 갇힌 채로 둘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이는 지나친 감이 없었다.
여왕이 있는 수도에서 테러를 감행한다는 것 자체가 노르디아 연방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짓이었다. 자연스럽게 라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라울 대령!”
날카로운 목소리는 듣기 싫을 정도로 거북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숨긴 채로 그는 하마처럼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튜완 사령관을 바라봤다.
라울 앞에 선 그는 큰 주먹으로 본인의 가슴을 두드리며 시끄럽게 굴었다.
“이번 일은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네! 감히 노르디아의 수도에서 이런 짓이 벌어지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고 용납해서도 안 되는 일이야! 내가 여왕 폐하의 이름을 걸고 그 괘씸한 놈들의 목을 잘라버릴 거야!”
“진정하십시오. 일단은 그들의 이동 경로를 알아보는 게 우선입니다.”
“이미 내가 사람을 풀었네. 놈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는 건 이제 시간문제야.”
과연 그럴까. 이만큼 대담하게 움직이는 놈들이었다. 쉽사리 붙잡을 수 없을 거다. 이쪽이 나서고 싶었지만 그건 튜완 사령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일단 그가 움직이고 난 후, 그래도 해결이 나지 않으면 이쪽이 나서야 할 거다.
흥분해서 계속 욕설을 토해 내는 튜완 사령관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던 라울은 눈동자를 움직였다. 마기휼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를 살펴보는 중이다. 무엇을 보는 걸까.
뒤를 돌아 앉아 있는 폼이 꽤나 다소곳했다. 엉성하게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빠져나온 부분도 있었다. 아직 젖은 머리카락이 등에 아무렇게나 달라붙어 있는 걸 확인한 라울은 고개를 돌렸다. 튜완 사령관의 거친 말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마기휼만이 조용했다. 쪼그리고 앉은 채로 하염없이 바닥을 내려다봤다. 단순히 그곳을 살펴보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생각에 여념이 없는 상태였다.
마리아가 탈주를 하다니. 충격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을 저지르는 스케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만한 여자이니 관문을 폭파하고 탈주를 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쯤 어디에 있는 걸까? 그리고 그녀가 탈주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연방군 감옥소에 간다.’
문득 떠오르는 투박한 목소리.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던 눈동자.
마기휼의 입이 살짝 벌려졌다.
‘면회를 하러 가시는 겁니까?’
‘비슷한 거네.’
마기휼의 입이 조금 더 커졌다.
“설마―!”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위로 휙 들던 마기휼은 옆을 지나치던 군인이 이상하다는 듯 보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는 마기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설마. 아닐 수도 있었다. 이쪽이 괜한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아주 아닌 일이 아니라면―?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왜 아이작은 그때 공항에 있었던 거지?
그리고 왜 안베르에 왔었던 걸까? 둘 다 마리아가 있던 장소였다. 우연이 아니라 마치 정하고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사람의 겉모습으로 편견을 갖는 건 안 좋은 일이었지만, 한번 수상하다 생각을 하자 끝이 없었다. 계속해서 의심하게 된다. 애초에 마리아와 아이작이 한편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무슨 생각을 하지?”
심도 있는 추리를 이어가고 있는데 웬 놈인가 싶었던 마기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곁에 다가선 자가 라울이라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눈꼬리를 살며시 내렸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정말인가?”
“물론이지요. 전 머리가 안 좋아서 생각 같은 건 안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이상한 말이었다. 이런 말 따위 라울이 무시를 해도 하나 이상할 게 없었다. 스스로 민망함을 느끼며 마기휼은 웃었다. 어설픈 미소를 확인한 라울은 주변을 살폈다.
“이건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다.”
갑자기 옆에 와서 왜 이런 무서운 말을 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말했을 때 이쪽이 적극적으로 ‘그렇습니다. 옳은 말입니다!’라고 할 줄 알았나? 마기휼은 라울의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냥 탈주 정도로 축소해서 생각하시면 안 되는 겁니까. 너무 과하게 가면 머리 아파질 일만 늘어날 겁니다.”
“너는 범죄자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옳은가.”
가자미눈을 뜨고 있던 마기휼은 라울의 똑바른 시선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는 동안 라울의 질책은 계속되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정의가 있고 이유가 있으니 움직이는 거겠지. 그리고 그 일이 성공을 해야만 그들에게도 이득이 돌아오는 것이겠고 말이야. 하지만 이걸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얻는 이득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된다. 나라와 규칙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법을 준수하며 살아온 죄 없는 이들이 죽고, 다치고, 살아갈 장소를 잃게 되는 거다. 지금 너의 행동과 판단은 그러한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의 행위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이 될 법한 일인가?”
침착한 저음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말들은 모두 마기휼의 귀에 속속 들어왔다. 너무도 바른 말을 하는 것에 마기휼은 멍한 얼굴이 되어 라울을 올려다볼 따름이었다.
그러는 동안 라울의 눈빛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감성적으로 굴지 마라. 냉철하게 판단해. 지금 너의 물 흐르고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는 행위는 양날의 검이다. 나는 너의 그런 우유부단함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농담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불현듯 라울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동시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화가 나진 않았다. 그저 답답했다. 너무도 옳은 말을 하는 그에게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음이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그래. 마리아는 범죄자였다. 알고 있었음에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멍청한 얼굴이 되어 위를 쳐다보기만 하는 마기휼을 확인한 라울은 몸을 돌렸다. 라울이 곁에서 떨어지자 마기휼은 고개를 숙였다.
완전 침울하네. 마기휼은 발끝으로 바닥을 쿡쿡 찔렀다.
가만히 있으려니 열 받네. 어디서 잘난 척이야. 화가 나 라울을 노려봤다. 때에 맞춰 그가 이쪽을 돌아본다. 움찔했지만 이상함을 깨닫지 못한 듯, 그는 가자는 말을 할 뿐이었다.
마치 기르는 개를 부르는 듯한 억양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표정을 굳히던 것도 잠시, 마기휼은 라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마리아의 추적은 튜완 사령관이라는 자가 맡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라울이 움직이지 않기로 한 모양이지만 알게 모르게 사람을 썼다. 그가 있는 방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걸 유심히 지켜보던 마기휼은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들었다.
“신부님. 왜 그러세요?”
이제는 이 목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고 자신의 뒤에 나란히 붙어 쪼그리고 앉아 있는 다섯의 아이들을 바라봤다.
분명 우스운 몰골이었다. 이러고 있으면 다들 무슨 구경거리가 났나 싶어 몰려들 게 분명했다. 나름 조용히 움직인다고 하고 있는데 이 망할 아이들 때문에 다 그르치게 생겼다. 목까지 찬 한숨을 토해 내며 마기휼은 재차 라울의 방을 쳐다봤다.
무시하는 마기휼은 이상했다. 소리를 치거나 혼내려 달려들어야 마기휼인데. 이렇게 침착한 마기휼은 재미없었다.
아이들 중 하나가 마기휼의 등을 쿡 찔렀다. 그런데 반응이 없다. 아예 양 손가락으로 등을 찔러 댔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선다. 이제부터 재미있어지는 걸까. 아이들은 기대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마기휼은 아이들을 무시하고 지나쳐 갔다.
화를 내지도 않고 큰 소리도 없다. 그냥 멀어지는 마기휼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이상했다. 한 번도 없던 패턴이었기 때문에 쉽사리 달라붙을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심심한 마기휼의 행동이 불만인 듯 한쪽 뺨을 통통하게 부풀렸다.
기억을 더듬어 첫날 잠을 잤던 방으로 들어간 마기휼은 주변을 둘러봤다. 지나치게 좋은 방은 거북스러웠다. 하지만 일단은 잘 장소가 필요했다. 흐느적거리며 걸어간 마기휼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누운 채로 신을 벗고 겉옷을 벗고 바지도 대충 벗었다. 속옷만 입은 채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렇게 딱 누워 자려는데 불현듯 스스로가 너무도 한심하게 여겨졌다.
밖에서는 라울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지금 잠이나 자고 있다. 한량 그 자체였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7년가량을 살았다. 남들 바쁠 때 마기휼 그가 한가한 것은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오늘따라 이렇게 답답한지 모르겠다. 그건 분명 라울 때문이었다.
내가 이렇게 답답한 것도, 짜증이 나는 것도, 졸리지 않은 대도 침대에 누운 것도, 그리고 조금 있다가 자 버리는 것도 모두 라울 탓이었다. 상당히 유치한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색을 굳히는 그 얼굴은 일견 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여자가 담배를 물자 기다렸다는 듯 불을 붙였다. 깊게 연기를 빨아들이고 코로 그걸 뱉어 낸 오르베는 발바닥을 마사지하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그래서. 지금 마기휼은 자고 있다는 거냐? 자기 방에서?”
아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부채를 흔들던 아이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마기휼의 앞에 있을 때와는 영판 다른 얼굴들이었다. 조금도 웃지 않고 장난기도 없는 아이들은 오르베의 모든 것에 집중했다. 그녀가 원하는 게 생겼을 때, 늦지 않게 그걸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던 오르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질질 끌고 있어.”
곰방대로 옆의 테이블을 툭 치며 그녀는 허리를 주욱 폈다. 자신만만하게 눈동자가 반짝였다.
“서로 내숭을 떨고 있다면 내가 돕는 게 응당 옳은 일이겠지.”
처음에는 또 왜 그랬던 거냐며 말도 안 되는 내숭을 떨어 대겠지만 곧 자신에게 고맙다며 굽실거리게 될 거라며 오르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몰려든 아이들을 내려다봤다.
“너희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명령만 내리세요.”
“뭐든지 따르겠습니다.”
대답을 하며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눈동자 가득히 충성심이 넘실거린다. 그걸 읽은 오르베는 만족한 듯 붉은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푹신한 천 위에 누워 있는 느낌이 일품이었다. 무척이나 편안하고 아늑해서 기분 좋았다. 이대로 자라고 하면 24시간도 더 넘게 잘 수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마기휼은 옆으로 돌아누우려 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느낌 탓이겠거니 싶어서 재차 몸을 움직여봤다. 그런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슬슬 이상한 기분이 든 마기휼은 살짝 한쪽 눈을 떴다. 잠에 취한 눈으로 천장을 확인하던 그의 눈 양쪽이 다 떠졌다. 그가 다급히 눈을 뜬 것은 천장이 그 천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야? 여기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마기휼은 정신없이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다가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누워 있음을 깨닫고는 헛숨을 삼켰다.
“…….”
설마 아니겠지. 불현듯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점점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기휼은 이쪽으로 몸을 돌린 채 잠이 든, 라울을 발견했다.
보고도 믿을 수 없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크게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로 있던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자신의 현재 상태를 파악했다. 위로 팔이 올라간 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손목을 감싸는 이 느낌은 밧줄이 아니었다. 쇠사슬이었다.
얼굴이 해쓱하게 질린 채로 마기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가능하다면 발작을 일으키고 싶었다. 소리를 치거나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놈을 실컷 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라울이 깨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입을 딱 다문 채로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손목을 조금씩 움직여봤다. 위로 당겨도 꼼짝 않고, 옆으로 당겨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마기휼의 표정이 굳어진다. 일그러진 채로 있던 마기휼은 옆을 쳐다봤다.
라울은 미동이 없었다. 그 모습에 더더욱 초조해진다. 더 세게 손목을 비틀었다. 가능하다면 쇠고랑 사이에서 손을 빼내려 했으나 틈이 없었다. 그러면 끊어야 하나. 마기휼은 위를 쳐다봤다.
손목을 당기자 꿈쩍도 하지 않는다. 틀렸다. 이건 끊어 낼 수 없는 재질이었다. 그래도 포기를 할 수 없는 노릇인지라 마기휼은 주먹을 쥔 채로 열심히 손목을 비틀고 누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긴장으로 인해 이마로 땀이 촘촘히 맺혔다. 악문 어금니로 힘이 들어갔다. 온몸에서 땀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어 계속 손을 움직이는 동안 묵직한 것이 가슴 위로 올려졌다. 너무 놀란 마기휼은 그대로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어버렸다. 헛숨을 삼키며 말없이 있던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라울의 팔이 가슴에 올려져 있었다.
설마 싶어서 옆을 쳐다봤다. 라울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고른 숨을 토해 낸 것을 보아 잘 자고 있었다. 하지만 라울의 팔이 올라간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를 어쩌나 싶었던 마기휼의 얼굴이 사악 굳어졌다.
내가 정말 미치겠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 하여튼 걸리기만 하면 내 가만 두지 않을 거다. 여기서 떠오르는 인물이라면 딱 둘밖에 없었다. 오르베와 라우젝. 그 두 녀석들.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러는 거야. 걸리기만 해봐라, 내 가만히 있으면 사람이 아니다.
한 번 더 벗어나기를 시도하기 위해 마기휼은 재차 손에 힘을 줬다. 그때 묘한 느낌이 들었다. 오른쪽 얼굴 옆으로 소름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당황한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리고 눈을 뜬 라울과 정면으로 마주쳐 버렸다.
“…….”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혀끝이 얼어붙어버렸다. 멍하니 있는 사이 라울의 녹빛 눈동자가 점점 어두운 빛으로 물들었다.
그걸 본 순간 마기휼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 이건 내가 일부러 이런 게 아니야!”
이건 어디까지나 음모야! 네 동생이랑 고모라는 여자가 한 짓이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라울이 움직였다. 그가 위로 엎드리는 순간 마기휼은 소리를 질러 댔다.
“우아아앗!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팔을 움직일 순 없어도 다리는 움직일 수 있었다. 버둥거리는 순간 라울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땀에 젖은 이마에 닿는 말캉한 감촉에 마기휼은 고개를 마구 저어 댔다.
“그만둬! 그만두라니까!”
엄청난 저항을 하고 있지만 손목이 묶인 채로는 아무 소용없었다. 그러는 동안 라울의 손이 몸을 건드린다. 그 순간 마기휼은 지금 자신이 가운만 걸치고 있는 상태임을 깨달았다. 때문에 라울이 몇 번 건드리는 동안 순식간에 가운이 벌어지고 그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커다란 손이 가슴에 닿았을 때 정말이지 소름이 돋았다. 누구도 그런 곳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몸을 누군가에게 보인 적도 없었다. 자신의 몸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꽁꽁 싸매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너무 놀라고 당황스럽고 싫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라울의 손이 멋대로 움직여 댔다. 가슴을 주무르고 허리를 만져 댔다. 그의 양손이 엉덩이로 내려와 감싸는 순간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손을 움켜쥔 채로 숨을 죽였다.
온몸으로 힘이 들어갔다. 마치 뻣뻣한 시체와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라울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하반신을 밀착하자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자신의 게 아닌 다른 사내의 느낌이었다. 그 순간 마기휼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싫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몇 번이나 싫다고 하는 사이에 눈물도 조금 나와버렸다.
이런 약한 모습은 원치 않았다. 정말은 강한 사람이었다. 난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가 되어 같은 사내에게 당하고 있다는 것은 마기휼로 하여금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두려움을 안겨줬다.
이대로 계속하게 되면 정말 자신의 안에 아이가 생겨버리는 건가 싶었다. 남자인 내가 아이를 갖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싫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는 마기휼의 몸이 점점 떨리기 시작한다. 질끈 감은 눈꺼풀이 촉촉하게 젖어들어 갔다. 얼굴이 발갛게 된 채로 마기휼은 소리를 죽이며 눈물을 흘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지금 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식할 수 없었다. 그저 위가 휑하다고만 느꼈을 따름이었다. 마기휼은 코를 훌쩍거리며 몸을 떨었다. 할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울고만 있었던 것 같다. 라울은 그런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앞으로 넘어왔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가라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눈동자는 마기휼의 얼굴로 고정되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잠자코 있던 라울은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그리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근처에 있던 이불을 끌어 마기휼의 위에 덮었다.
부드러운 천이 마기휼의 몸을 감쌌다. 느리게 날씬한 몸을 가리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인 라울이 마기휼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이 몸을 끌어당기는 느낌에 마기휼은 놀라 숨을 삼켰다.
“미안하다.”
“…….”
라울을 외면하고 있던 마기휼의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떠지지 않았다. 그걸 확인한 라울은 더 강하게 마기휼을 끌어안고는 몸을 떨어뜨렸다. 그런 그의 눈에 앙다문 붉은 입술이 들어왔다. 그걸 흘깃 보나 싶던 라울은 고개를 숙였다.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빠르게 무게감이 사라졌다. 체온이 떨어지나 싶더니 부스럭거리는 음향이 들렀다. 뭔가가 손을 감싸는 느낌에 마기휼이 놀라 히익-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동시에 날카로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위에 고정되어 있던 것이 뚝 떨어졌다. 양손이 침대 위로 떨어지고 닿아 있던 온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인기척이 멀어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도 마기휼은 바로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떴다가 옆에 라울이 서 있으면 어쩌나 싶었다. 이런 엉망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혹여라도 이쪽을 보고 라울이 이상한 표정을 짓는 걸 확인한다면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마기휼은 한쪽 눈부터 떴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다른 쪽 눈도 떴다.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양손을 감싸는 쇠사슬은 여전했지만 침대에 고정되어 있던 부분은 떨어져 있었다. 절단된 면을 보아하니 총을 쓴 모양이었다.
손목에 감긴 하얀 천을 확인한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시트를 모아 그걸로 몸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침대 머리맡으로까지 물러나 세운 무릎을 끌어안았다.
아직도 몸의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조금 전 있었던 일이나 라울이 한 일 같은 건 전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하나밖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한심하다. 너무도 한심했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죽고만 싶었다.
복도로 나온 라울은 흐트러진 차림이었다. 방에서 나올 때 늘 옷을 단정하게 입고 머리도 다듬는 라울이었다. 언제 어느 때에나 완벽한 모습이던 그가 지금은 흐트러진 채였다. 머리도 산발이고 가운을 입은 채였고 무엇보다 맨발이었다.
어차피 그의 저택이니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잘못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집안의 고용인들은 당황한 듯 그를 쳐다보다가도 바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는 위로 올라갔다. 저택의 4층. 가장 안쪽으로 가는 동안 점점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다. 그리고 그 안쪽에 서 있는 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단단히 닫힌 문 앞에 서 있는 장신에 준수한 용모를 지닌 사내는 다가오는 라울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셨습니까.”
“라우젝은 안에 있나?”
“지금 막 일어난 상태십니다.”
‘그러니 조금 있다가 찾아오시지요.’라는 뉘앙스가 숨겨져 있었으나 라울은 무시했다. 앞을 막는 사내를 쳐다봤다. 불쾌함이 역력한 그 눈빛에 사내는 가만히 있다가 뒤로 물러났다. 사내가 물러나고 라울은 직접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한가운데에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온통 하얀 천과 시트가 깔린 침대는 투명한 천개까지 달려 있었다. 그 가운데에 앉아 따뜻한 수프를 마시는 라우젝은 굽실거리는 금발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였다. 모르는 이들이 봤다면 천사라 칭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침대 주변으로는 하얀 제복을 입은 친위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라우젝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라울을 발견하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 동생. 왜 그런 얼굴인 거지?”
먼저 묻는 말에도 라울의 굳은 얼굴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마냥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는 것에 라우젝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라울은 주변에 있던 사내들에게 손짓했다.
“너희는 나가 있어라.”
사내들은 라우젝을 바라봤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확인하고 나서야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 하나가 나가자 라우젝은 기다렸다는 듯 투덜댔다.
“왜 내 아이들을 나가라 하는 거야. 나는 그들이 없으면 불안해. 알잖아?”
“오르베와 모종의 계약을 맺은 겁니까.”
“내가 왜? 나는 그녀가 싫어.”
피식- 하고 웃으며 라우젝은 하얀 잔을 들어 입술을 댔다. 수프를 마신 그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좋네.”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내리뜨는 사내의 용모는 어렸다.
원래는 서른도 훨씬 넘은 나이의 사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18살가량이었다. 제 나이에 어울리는 외관을 갖추지 못한 그는 너무도 오랫동안 이 저택 안에서만 머물러 있었다. 다른 이들이 그에 대해 아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며, 누군가 본인에 대해 거론하는 것 자체를 껄끄러워하고 싫어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내면에 어둠이 내려앉게 되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라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형님. 괜한 초조함을 가지지 마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초조함?”
하- 하고 소리를 내 웃은 라우젝은 라울을 노려봤다.
“시건방진 소리는 지껄이지 마. 나에게 그런 것 따위는 없어.”
입을 다문 라우젝은 더는 웃지 않았다. 한기가 묻어나는 눈빛에 라울은 침묵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한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언제나 늘 할 말이 끝나면 물러나던 그였는데 말이다.
라우젝은 흥미로운 얼굴이었다.
“그가 신경 쓰이나?”
라울은 속을 읽어낼 수 없는 완벽한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우젝은 그를 자극하는 말을 계속해 댔다.
“마기휼. 귀엽던데? 아직은 원석이야. 사내를 알면 점점 더 빛이 나게 될 거야. 그 사내가 네가 되어야 할 게 아니겠어?”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런 건 그가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런 몸이야.”
눈을 가늘게 뜬 라우젝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되었다.
“어차피 사내에게 안겨 사내가 원하는 걸 제공해야만 하는 몸이란 말이야. 네가 아니면 언제고 다른 놈이 그 몸을 취하게 될 거야. 나중에 가서 땅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해버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오르베와 똑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지적에 라우젝의 눈썹이 위로 휙 올라갔다. 오르베와 비교가 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쾌함을 드러내지만, 그걸 보고도 라울은 말하길 멈추지 않았다.
“똑같은 말로 절 부추기시면서 손을 잡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우젝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한 채로 바라보는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었다.
입을 다물면 더 말을 하지 않는 라우젝이었다. 여기까지였다. 라울은 쉬라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라울. 너도 나와 같아.”
라울의 발이 멈췄다.
“너도 나처럼 결핍되어 있어. 그들이 원하는 건 그저 우리의 핏줄일 뿐이야. 그러니까 원하는 걸 줘버리고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는 라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의 불쾌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도 라우젝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에 반박할 수 있는 거냐.
묻는 눈빛을 확인한 라울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핏줄을 남겨주고 나서 저는 자유를 얻을 수 있지만, 마기휼 그에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막대한 돈을 얻지.”
라우젝은 수프 그릇을 침대 한편에 내려놓고 라울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 가족들이 바라는 돈 말이야. 그걸로 마기휼은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어. 그가 힘들어하고 고민하는 게 바로 그 문제란 말이야. 그걸 해결해주고 그가 가족들에게 돌아가게 해주자고. 그러고 나서 우리끼리 재미있게 살잔 말이야. 좋지 않아?”
말을 하는 라우젝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내가 하는 말은 굉장히 좋은 것이니 너도 그냥 따라줘. 그리 말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라울은 넘어가지 않았다.
애초에 넘어갈 수도 없는 말이었다.
“하나도 좋지 않습니다.”
차분하게 말을 하는 라울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거짓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이쪽 말이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말이다.
이상하게 변하는 라우젝의 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라울은 당장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걷는 동안 라울은 가운을 바로 잡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겼다. 그리고 3층으로 다시 내려오게 되었을 때 무리를 지어 오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이들은 라울과 마주치자 숨을 죽이며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런 아이들을 확인한 라울은 잠자코 있었다.
라울의 눈치를 보던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종종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막 그의 옆을 지나치려는 순간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너무 놀란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목을 움츠렸다. 눈을 댕그랗게 뜬 채로 가만히 있나 싶더니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도망치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그걸 확인한 후 라울은 자신의 방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들어가서 씻고 옷을 새로 갈아입어야 했다. 자신의 방이니 들어가는 것에 눈치를 보거나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방에는 그가 있었다. 마기휼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아직 자신의 방에 남아 있다면 얼굴을 보이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집안에 그를 혼자 둘 수도 없었다. 위험 요소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하던 라울은 일단 걸음을 옮겼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있던 마기휼은 손을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바닥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손을 움켜쥔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안 생겼어. 그냥 그건 사고야. 라울 그놈이 자다 일어나면 그런 개말종이 되는 것뿐이었고, 누군가의 음모로 인해 나는 제물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뿐이야. 라울이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그가 한 짓은 절대로 아니야. 그도 중간에 하다 말고 그냥 일어났잖아? 앞으로 이런 일이 종종 생겨도 크게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그냥 쿨하게 넘겨. 괜찮으니까.
“……안 괜찮아.”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더더욱 큰 타격을 입는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마기휼은 고개를 숙였다.
말도 안 되었다. 고작 이런 일 때문에 이리도 침울해지다니.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평소 과도할 정도로 몸을 사렸기 때문에 애초에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을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새 좀 방심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제일 위험한 시기인데 말이다.
저들은 자신의 약점을 잡아 어떻게든 라울과 맺어지게 하려는 거다. 이 몸을 이용해서 후계자를 원하는 거였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명확해져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대로 휩쓸려가 버릴 거다. 원치 않게 관계를 맺고 그대로 라울의 아이를 가지는 건가.
그 순간 마기휼의 안색이 변했다.
라울이 함부로 자신을 대할 것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막 행동하는 사내는 아니었다. 자신이 취향이고 조심하라는 말을 던지긴 했어도 그가 어느 정도 이성을 유지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람이라는 건 굉장히 나약한 동물이었다.
“마기휼.”
라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말 놀랐다.
헛숨을 삼킨 마기휼은 고개를 들어 닫힌 문을 쳐다봤다. 불현듯 저 문을 열고 라울이 쳐들어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기휼은 당장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 쪽으로 갔다. 까닥하면 창문을 통해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난 일이 있어 오늘도 바깥에 나갈 거다. 너는 어떻게 할 거지?”
바로 라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내 이 저택에 남아 있을 것인지 그를 따라올 것인지를 묻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확실히 혼자 남아 있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장소였다. 그걸 염두에 두고 저리 말을 하는 거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선뜻 따라간다는 말을 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어찌 본단 말인가. 고민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은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곳에 있겠습니다.”
작았지만 분명 들렸을 터였다. 그런데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혹시 하는 말을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 불안해서 닫힌 문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러면 그렇게 해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은 조용했지만 라울이 다른 쪽으로 가버렸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마기휼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무릎을 꿇고 앉아 침대 위에 얼굴을 묻은 채로 숨을 죽였다. 빌어먹을. 젠장.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마기휼은 주먹으로 침대를 쳤다. 연속으로 치는 동안 가슴에 시퍼런 멍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내 잘못이 아니야.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하지만 애초에 이런 몸이 아니었다면 문제가 생길 일도 없었다. 그리 생각하자 더더욱 답답해진다. 가슴 안쪽으로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아 숨을 쉴 수 없었다. 마기휼은 허탈한 듯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침대에 이마를 댄 채로 가만히 있었다.
“우울해?”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기겁하며 뒤를 돌아봤다. 바로 뒤에 있는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곳으로 한 사내가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창틀 위에 서 있는 라우젝을 발견한 마기휼은 경악하며 침대 쪽으로 완전히 몸을 붙였다.
“다, 당신은 또 뭡니까?!”
“라우젝이야. 알고 있잖아?”
웃는 얼굴이 상큼했다. 하지만 마기휼은 그 얼굴을 보고 기분 좋게 있을 수 없었다. 당장 창문을 닫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라우젝이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나 이런 걸 가지고 있어.”
“그건 또 뭡니까?”
“로노베에서 온 편지야. 네 동생이 보낸 걸로 되어 있군.”
지금은 안정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라우젝처럼 위험할 게 분명한 사람하고는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은 이 방 안에서 한발도 안 나가는 게 가장 안전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가휼이 보낸 편지가 마기휼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선 채로 가만히 있는 마기휼을 확인한 라우젝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오늘 내가 하자는 대로 하지 않으면 이 편지는 보여주지 않을 거야.”
그런 게 어디에 있어. 그 편지는 애초에 이쪽으로 보내진 거였다. 그걸 중간에 가로채서는 협박의 미끼로 삼다니. 말이 돼?
하지만 애초에 그런 상식이 그에게 먹힐 리 없었다. 원래부터 오만하고 독선적인 사내였으니 말이다.
라우젝은 창틀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편지봉투를 흔들었다.
“이걸 받고 싶으면 오늘 3시간 동안 나랑 놀아줘.”
“놀아 달라고요?”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딱 봐도 수상한 인물이 놀아 달라 하는데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뭔 속셈인가 싶어 안색을 굳힌 채로 있으려니 라우젝이 편지 봉투를 입술에 댄 채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은 가지 않아. 오전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멍청한 짓은 하기 싫으니까. 있다 저녁 시간에 부르도록 할 테니 알아서 준비하고 있어. 알겠지?”
그 말을 남긴 라우젝이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마기휼도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고 복도 양 옆을 둘러봤다.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라우젝이 보였다. 마기휼은 냉큼 그리로 갔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마기휼의 앞을 막아섰다. 놀란 마기휼은 헛숨을 삼키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순간 앞을 막은 이들이 보다 더 자세히 보였다. 그들은 하얀 기사복을 입은 라우젝의 친위대였다. 물론 그들이 친위대라 스스로를 밝힌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런 그들의 중심에 서 있던 라우젝이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보란 듯이 편지를 흔들었다.
“이걸 빼앗으려고 했나?”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어리석어. 네가 내 아이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이걸 빼앗을 수 있을까?”
“그건 안 해보면 모르는 일이지요.”
마기휼은 손을 움켜쥐었다.
전이라면 말을 하기보다 당장 주먹을 휘둘렀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할 수 없었다. 굉장히 움츠러든 상태였다. 이럴 때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을 테지만 그걸 숨기고 애써 강한 척을 해 보였다. 그런 마기휼의 모습에 라우젝은 코웃음을 쳤다.
몸을 돌린 그는 덩치 좋은 친위대들과 함께 마기휼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걸 확인하는 동안 치미는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가만히 있나 싶던 마기휼은 자신의 몰골을 확인했다.
가운을 입고 그 위로 이불을 빙빙 두른 채로 있었다. 머리는 산발일 테고 얼굴 꼴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엉망이겠지. 사내에게 당할 뻔해서 잔뜩 주눅이 든 그런 얼굴 말이다. 아랫입술을 깨문 마기휼은 당장 걸음을 옮겼다. 라울의 방이 아닌, 자신이 머무는 방으로 말이다.
가휼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편지를 보낸 건지 모르겠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걸 알고 편지를 보낸 걸까. 그렇겠지. 애초에 제의를 한 것이 그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안부를 물으려 편지를 보낸 건가?
안 좋은 감정이 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말 무슨 일일까. 또 집안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으로 인해 초조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촌스러운 머리 모양이야.”
턱에 손을 댄 채로 생각에 잠겨 있던 마기휼은 시비를 거는 소리에 한쪽 눈썹을 위로 사악 올렸다. 이건 또 뭔 잡소리야. 그리 말하고 싶은 듯 눈을 매섭게 뜨며 정면을 노려봤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라우젝은 땋아 내린 마기휼의 머리 모양이 탐탁지 않은 듯 재차 지적에 들어갔다.
“풀거나 하나로 묶어 올리는 게 나아.”
“제가 13살짜리 계집아이였다면 그렇게 머리를 묶었겠지요. 하지만 전 29살이랍니다. 내년에 서른이 될 남자가 꽁지머리를 하면 모두가 손가락질할 겁니다.”
“모두가 네 나이를 아는 게 아니야. 또한 너만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지. 괜한 걸로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
“전 걱정이 됩니다. 머리를 묶는 건 저이니까요.”
그러니까 내 머리 모양 가지고 뭐라고 하지 마. 이 자식아. 난 땋은 머리에 대해서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눈을 매섭게 뜨는 마기휼의 모습에 라우젝은 피식하고 웃더니 부채의 끝을 세웠다.
“눈꼬리 내려. 다시 한번 더 그렇게 날 본다면 당장 그 눈알을 파버리겠어.”
잘도 그러시겠다. 이제는 라우젝이 무슨 말을 해도 조금의 동요도 생기지 않았다. 그냥 네 멋대로 해봐라. 그런 상태가 된 마기휼은 천장을 쳐다보다가 눈을 내리떴다. 다리를 꼰 마기휼은 창가를 내다봤다.
느낌 탓이 아니라면 점점 으슥하고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장소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안베르에 이런 장소가 다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술집으로 데려갈 생각인가. 그게 아니면 더 이상한 장소에 데리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불안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마기휼의 옆얼굴은 평온했다. 그걸 확인한 라우젝의 입술 꼬리가 올라갔다.
“흥미로워.”
보랏빛 눈동자가 움직였다.
‘뭐가?’라고 묻는 눈빛에 바로 라우젝이 소리 내 웃었다.
“너 마치 내 동생처럼 행동하는구나.”
마기휼의 인상이 변했다.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에 라우젝은 소리 내 웃었다. 겉으로 보기엔 정말 재미있는 듯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보여주려는 느낌이 강한 미소였다.
그걸 알기에 마기휼은 말려들지 않았다. 다만 왜 자신의 행동이 라울 같은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굉장히 큰 건물이었고 경비가 삼엄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두의 신원 확인을 한 이들은 패스가 된 사람들에게만 가면을 나누어 줬다. 마기휼은 내밀어진 하얀 가면을 한 손에 든 채로 라우젝을 쳐다봤다. 라우젝은 붉은색이 들어간 가면을 쓰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다른 문으로 들어갈 거야. 너는 평생 가야 구경도 할 수 없는 곳인데 내 덕분에 편히 들어갈 수 있는 거야. 감사 인사는 생략해도 괜찮아.”
별걸 다 감사한다. 내 편지나 내놔. 이 도둑놈아.
처음에는 그렇다 쳐도 점점 기분이 가라앉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입술을 씰룩이며 마기휼은 가면을 썼고, 라우젝이 앞장을 섰다.
나름 보안을 신경 쓰는 곳인지 몇 개나 되는 문을 통과해야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입 다물고 잠자코 뒤를 따르던 마기휼은 건물 내부로 들어가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보고 슬슬 감이 왔다.
얼굴을 가리고 신분도 철저하게 확인을 받아야 한다. 방에서 나오는 이들이 들고 다니는 칩 같은 것이나 카드만 보고 확신한 마기휼은 라우젝을 쳐다봤다.
“여기 설마하니 도박장입니까?”
“도박장이라니. 카지노라는 이름이 있는데.”
“그게 그거 아닙니까.”
심드렁하게 대답한 마기휼은 주변을 둘러봤다. 종종 복도에 서 있던 여성이나 사내들이 라우젝에게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 보였다. 가면을 쓴 이들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미 라우젝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은 일종의 거대한 귀족의 놀이터였다. 신분을 감추고 하룻밤 마음 편히 즐기는 거다. 도락을 위한 공간. 그런 만큼 더더욱 음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았다. 라우젝의 성격이나 평소 그가 취하는 행실을 볼 때 딱 맞는 공간이라 할 수 있었다.
“언제나 이곳에 오시는 겁니까?”
“가끔.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에는 오지.”
“라울 대령님도 알고 계십니까?”
라우젝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돌아갔다. 가면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가 위협적이었지만 마기휼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 성격에 이런 곳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아서요.”
“물론이지. 내 동생은 지나치게 올곧고 바르고 딱딱한 사내이니까. 그래서 숨이 막혀. 미울 때도 있고 말이야.”
라우젝이 하는 말에서 전해지는 건 하나뿐이었다. 콤플렉스. 그는 동생인 라울에게 지나치게 적대적인 부분이 있었다.
어쩔 수 없겠지. 앞서 생각을 했듯이 자신보다 월등하게 잘난 동생은 형님으로 하여금 불쾌함을 안겨준다. 이쪽이 건드리면 안 되는 부분인가. 마기휼은 입을 다물었고 그런 그를 흘겨보던 라우젝은 문 앞에 멈춰 섰다.
“자, 이 방으로 들어가지.”
손가락을 까닥이는 폼이 문을 열라는 거였다. 한숨을 쉰 마기휼은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네. 알아 모시지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넓은 공간과 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원형의 테이블, 그리고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리에 앉은 이들은 진지한 얼굴로 카드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마기휼은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곁에 선 라우젝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창 베팅 중이로군요.”
“해볼 텐가?”
은근슬쩍 들어온 제의에 마기휼은 나직이 속삭였다.
“도박을 하는 건 좀 거시기한데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는 사용하지 마. 도박을 한다고 해서 당장 밑바닥 인생이 되는 게 아니야. 아,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나. 잃은 돈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겠어. 하지만 따낸 돈에 대해선 그걸 모두 자네가 가지고 가는 걸로 하지.”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릴 생각인지 모르겠다. 설마하니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이쪽이 냉큼 먹이를 물 거라 생각한 건가.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마기휼은 라우젝의 도발을 웃음으로 넘겼다.
“그런 게 도박이라 한다면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어마어마한 판돈이 걸리는 게임이야. 잘 하면 20만 베리를 한번에 따낼 수 있고, 그러면 자네는 자유의 몸이 될 거야.”
“그런 되지도 않는 말에 제가 넘어갈 것 같습니까.”
“넘어오지는 않아도 재미로 할 마음은 생겼겠지.”
때에 맞춰 한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라우젝은 그 자리를 가리켰다.
“마침 한 자리가 비었군.”
손가락이 가리키는 텅 빈 의자. 저 의자에 정말로 자신이 앉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에 넘어갈 거라 생각하는 걸까. 차가운 눈길을 보내자 라우젝 또한 만만치 않은 시선을 던졌다.
가라앉은 눈빛. 너는 내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그리 말하는 눈빛을 하고 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개자식. 멱살을 잡고 두어 대 때렸으면 좋겠다. 그 키만 멀대같이 큰 친위대 놈들 다 물리치고 이놈만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서 진짜로 그리할까 보다. 마기휼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웃었다.
“그러면 한번 게임을 즐겨볼까요?”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좋아. 한번 넘어가주지. 하지만 언제까지 네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될 거라고 생각은 하지 마라. 이 자식아.
마기휼은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자리를 잡고 앉자 다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이 쳐다봤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리 묻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뒤에 서 있는 라우젝을 확인하고는 시선을 피한다. 이곳에서 라우젝은 꽤나 강한 입김을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뭐, 그러든 말든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패를 받으시겠습니까?”
제의를 받은 마기휼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들을 살폈다. 하나같이 새롭게 나타난 자신을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마기휼은 어깨를 으쓱였다.
“한번 놀아볼까요?”
카드는 초짜라도 잔기술에는 나름 자신이 있으니 말이다.
마기휼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카드를 받았다. 일단 안을 확인한 후, 칩을 앞으로 밀었다. 초반부터 강하게 나가는 마기휼의 행동에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게 초반 공세를 부리면 나중에 후회할 텐데. 그런 뉘앙스의 휘파람에도 마기휼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집중해서 카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카드 패가 다시 돌아가고 이내 하나씩 내려놓는 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마기휼도 집중해서 카드를 골라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조금 더 칩을 넣었다. 주변에서 눈치를 보던 이들도 조금씩 칩을 내놨다.
결국 모든 게 눈치 보기 작전이었다. 그러면서도 운이 뒤따라야 했다. 이왕 하게 된 거 반드시 이기고 말 거다. 그래서 돈을 벌고 말 거라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도박을 시작한 마기휼의 눈동자는 이글이글 타올랐다.
“보랏빛 신사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벌써 4회 연속이었다. 마기휼이 이길수록 그의 앞으로 들어오는 돈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거의 5만 베리가 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이렇게만 이기면 20만 베리도 우스울 듯싶었다. 이쯤 하고 싶었지만 욕심이 났다. 한 번 하면 10만 베리를 채울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욕심 말이다.
마기휼은 카드를 섞는 딜러를 쳐다봤다. 딜러가 마기휼을 비롯해서 자리에 앉은 이들을 주욱 둘러봤다.
“게임을 시작할까요?”
“난 포기하겠소.”
한 사내가 카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숫자가 맞아야 조금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었다. 자신의 옆으로 빈자리가 생기자 사내가 애석하다는 뉘앙스로 중얼거렸다.
“사람이 하나 비는군. 이러면 재미있게 게임을 할 수가 없어지는데 말이야.”
“그러면 저기서 구경을 하는 신사분께서 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종목도 바꾸어볼까요?”
누군가 라우젝을 가리켰다.
라우젝은 눈을 내리떠 자신을 가리키는 자를 흘겨봤다.
“넌 이곳에 출입한 지 얼마나 되었지?”
나직한 물음과 동시에 라우젝의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웃고는 있으나 불쾌함이 숨겨지지 않았다. 말을 꺼낸 이는 싸하게 가라앉는 분위기를 읽어내고는 본인이 실수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파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근처에 있던 이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멋진 실력이었어요. 신사분.”
“다음에 또 뵙지요.”
그렇게 모두가 바깥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마기휼과 라우젝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마기휼은 무표정을 한 채로 카드의 뒷면을 손가락으로 살살 비볐다.
그 옆으로 라우젝이 다가왔다.
“5만 베리라, 나쁘지 않군.”
라우젝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러다가 카드를 하나 꺼내 눈 위로 들어 보였다. 뒷면을 살피던 라우젝은 그걸 쥔 채로 의자에 앉았다.
“돈이 생겼는데 그걸로 어찌할 거야? 빚을 갚는 데 쓰도록 하겠어? 아니면 그냥 네가 가질래?”
마기휼은 라우젝을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기휼의 입술 양 끝이 완만한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리곤 다소 딱딱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 당신이 가지고 가십시오.”
“어째서? 네가 번 돈이잖아.”
“딜러와 사전에 입을 맞춘 거라는 걸 모를 것 같습니까.”
라우젝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라는 듯 모르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봐 봤자 넘어갈 턱이 없었다.
“전 원래 카드를 못 해요. 쥐약이란 말입니다.”
이런 인간들은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손바닥 위에 사람을 올리고 곯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리 하면 이쪽이 완전 넘어가서 헤롱거릴 것 같나? 어림도 없었다. 첫판 이겼을 때부터 감이 왔다 이거야. 웃고는 있으나 정말로 라우젝을 두들겨 패고 싶은 표정을 지은 채로 마기휼은 말했다.
“즐거우셨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최대한 기뻐하는 얼굴을 해 보였는데 말이지요. 그걸로 인해 당신의 우월감이 충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는 이쪽을 건드리지 말라고. 네놈이 그렇게 툭툭 치지 않아도 충분히 인생 괴롭거든?
마기휼의 도전적인 시선에 라우젝은 픽- 하고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금방 지워졌다. 무표정이 된 라우젝은 싸늘하게 내뱉었다.
“나는 너같이 주제를 모르는 것들이 마음에 안 들어.”
피차일반이야. 자식아.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는 거니 이거야말로 천생연분이 아니겠어? 노려보는 마기휼에게 눈을 흘기며 라우젝이 품에 손을 넣었다.
거기서 나오는 건 편지였다.
“자, 약속대로 편지를 보여주지.”
라우젝의 손에 들린 가휼의 편지. 마음 같아서야 당장 채 가고 싶었지만 사전에 라우젝이 말을 했던 단서가 남아 있었다. 아직은 그가 제시한 시간을 다 채우지 못했던 거다.
“아직 3시간이 안 지난 것 같은데요.”
“편지를 읽고 나서 1시간 정도 더 놀아주면 되잖아?”
그러고 나서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네놈이 무슨 꿍꿍이인지 궁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프거든?
그냥 시간 다 채운 후에 편지를 보는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도대체 저 편지 안에 어떤 글이 적혀 있을까. 문제가 발생한 거라면 이번에야말로 늦지 않게 알아내서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휼 혼자 짐을 끌어안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망설이던 마기휼이 편지를 집어 들었다. 봉투를 찢고 안에 들어가 있던 편지지를 꺼냈다. 두 장으로 다 담기는 글이었고, 그 내용은 마기휼의 안색을 지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굳어지는 보랏빛 눈동자를 확인한 라우젝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이제 어떻게 할까? 그 돈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건데? 나에게 준다면 빚이 다시 느는 건데 말이지.”
손이 떨렸다. 정말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마기휼은 편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라우젝이 그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손가락에 턱을 댄 채로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모습에 마기휼은 천천히 편지를 내렸다.
“충격이야? 하지만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지 않아? 너도 방금 해봤잖아. 도박에 빠지게 되면 5만 베리는 우습지. 순식간에 그 배가 되는 돈을 벌고, 또는 잃게 되는 거야. 네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된 이들은 눈이 뒤집혀서 빌려준 돈을 받으려 들겠지. 물론 몇몇은 빌려주지도 않는 돈을 뜯어내려 들 테고 말이야.”
라우젝의 말은 한 귀로 들어와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동시에 조금 전에 읽은 가휼의 편지가 두통을 유발했다.
살아생전 부친에게 돈을 빌려줬다는 이들이 나타나 지금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이라며 급한 대로 5만 베리를 더 보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5만 베리라. 그런 걸 말한다고 이쪽이 바로 제공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군인으로 일하면서 받은 돈은 7년 동안 2만 베리 남짓이었을 뿐이었다. 소령이라 보수가 꽤 좋은 편이었는데도 그만한 돈인데 5만 베리라. 군인으로 일한다 해도 앞으로 도대체 몇 년을 더 벌으란 말이야.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기도 전에 원망부터 하게 생겼군.”
마기휼은 라우젝을 바라봤다. 분노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황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속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라우젝은 입술 꼬리를 올렸다.
“술이라도 마시러 갈까?”
웃는 라우젝은 진정 즐겁다는 투였다.
잔 안으로 붉은 액체가 따라졌다. 마기휼은 엎드린 채로 그걸 쳐다만 봤다. 그러다가 술이 다 따라지면 몸을 일으켜 술을 마시고 재차 빈 잔을 내려놨다. 그러면 다시금 술이 따라진다. 졸졸졸 하고 잔에 채워지는 술을 유심히 쳐다보는 마기휼은 진지했다.
지금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 여러 가지 주정을 봐 왔지만 마기휼 같은 이는 또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술이 채워지는 것만을 보고 있다. 그러면서 간간이 눈을 깜박이고 술만 마시는 모습이 영판 귀여웠다. 술을 따르던 여자는 마기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정말 귀여운 분이시네.”
고개를 떨어뜨린 여자가 달콤하게 속삭이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무표정을 하고 있을 뿐인 마기휼을 확인한 여자가 소리 내 웃으며 라우젝을 돌아봤다.
“나으리. 이런 귀여운 사람을 어디서 주워 오신 거예요? 가실 때 이 사람 저 주고 가면 안 될까요?”
“안 돼. 갈 때에도 꼭 챙겨 가야 하는 물건이야.”
“어머나. 그래요? 별거 아닌 인물이 아니었던 거로군요.”
마기휼을 쳐다보는 여자의 눈동자에 열기가 서렸다. 라우젝이 저렇게 챙기는 걸 보아하면 그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거였다. 여자는 재차 술을 마시는 마기휼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이게 벌써 몇 잔째인지 알아요? 당신 술이 참 세군요.”
말을 걸어도 대꾸가 없다. 재차 빈 잔을 내리고 술이 따라지는 걸 기다리는 모습에 여자의 붉은 입술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그런 식으로 굴면 더 이상 술은 없어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에 마기휼의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였다. 무덤덤하지만 쳐다보는 눈동자는 경직되어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인이 담긴 눈빛에도 여자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술을 원하면 여기에 뽀뽀해주세요.”
여자는 자신의 뺨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웃었다. 놀림의 의도가 명확한 행동이었지만 마기휼은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쪽- 하고 금방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에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마기휼은 재차 엎드렸다. 빈 잔에 술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조금 전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서는 진즉 잊은 얼굴이었다. 여자는 하- 하는 소리를 내며 라우젝을 돌아봤다.
라우젝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라우젝의 그 모습에 여자도 뻥 터졌다. 큰 소리를 내며 웃는 여자를 쳐다도 보지 않는다. 마기휼이 지금 원하는 건 술이었다. 술을 마심으로 인해 모든 걸 잊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머리가 텅 비워지기를 원했다.
“뭐가 그렇게 괴로운 거야.”
속삭이는 말에 마기휼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표정에 변화는 없어도 올라간 눈꼬리가 그의 불편한 속내를 익히 짐작하게끔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기휼의 곁으로 온 라우젝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이번 도박판에서 번 5만 베리를 동생에게 준 게 그렇게나 아까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야? 동생이 어렵다고 하는데 응당 도움을 줘야지. 넌 장남이잖아.”
그리고 네 부친이 그리되기까지 넌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도움을 주지도 않았잖아. 돈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자신의 무심함에 대해 보상을 할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없는 거잖아.
마기휼의 보랏빛 눈동자가 점점 어두운 빛으로 물들었다. 그걸 확인한 라우젝의 미소가 한결 진해졌다.
“네 도전적인 태도도 괜찮지만 지금 이런 모습도 나쁘지 않군.”
라우젝의 손가락이 마기휼의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두피를 느리게 문지르며 라우젝은 고개를 숙였다.
“침울해서 축 늘어진 몰골이 더 나은 것 같아. 적어도 지금은 시건방진 말을 지껄여서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테니 말이야.”
계속 건드려도 가만히 있다.
너무 반응이 없는 것도 재미없는데.
라우젝은 마기휼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단기간에 돈을 버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그거라면 단박에 끝낼 수 있어. 한 10개월 동안 자유를 상납하면 돼. 그 기간이 끝나면 넌 빚을 다 갚고 어쩌면 더 큰 돈을 손에 쥘 수 있을지도 몰라.”
10개월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마기휼은 웃었다. 메마른 사막과도 같은 웃음이었다. 그걸 본 라우젝은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팔에 얼굴을 묻은 라우젝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내 동생은 네가 생명의 은인이라 하더군. 그런 걸로 치면 20만 베리는 약소하지. 100만 베리인들 못 주겠어? 실제로 라울은 그런 일이 있었다며 너에게 부과된 빚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고 있어. 네가 그것에 대한 증명을 요구한다면 그 자리에서 적어 줄 거야. 그리고 넌 빚이 순식간에 없어지는 거지. 그런데도 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빚이 없어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걸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웃는 얼굴은 천사와도 같다. 하지만 하는 말은 악마보다 더했다.
“이미 알고 있지? 고향에는 네가 머무를 곳이 없다는 걸 말이야. 알고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질질 끄는 거야. 지루하게 말이야. 정말 책임감을 느낀다면 애초에 네 동생이 돈을 빌리면서 제시했던 부분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아깝잖아. 모처럼 그런 몸을 가지게 된 건데.”
그런 몸이라. 그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내의 몸이란 말이지.
라울의 성적 취향에 걸맞은 사내이고, 임신도 된다. 완벽한 풀 패키지였다. 나만 한 사내가 어디에 있겠어.
마기휼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다분히 자조적인 미소였다.
그걸 확인한 라우젝이 물었다.
“지금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당신만 한 사람을 납치하면 얼마까지 요구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기휼의 중얼거림에 라우젝은 소리 내 웃었다.
“그만둬. 범죄라니. 너답지 않아.”
“구석에 몰린 사람은 뭐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실제로 당신의 그 아름다운 얼굴에 주먹을 날려보고 싶군요.”
라우젝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굴던 그는 이내 웃었다. 구석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하하- 하고 소리를 내 웃는 라우젝을 바라보며 마기휼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앞니가 다 나가고 코뼈가 문드러지고, 뼈가 함몰돼 엉망인 얼굴로도 그렇게 나불댈 수 있을지, 한번 확인해보고 싶군요.”
점점 라우젝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걸 보고도 마기휼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근처에 있던 여자는 다른 곳으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라우젝은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깊게 숨을 들이켜나 싶던 그의 한쪽 입술 꼬리가 올라갔다.
“이미 한번 말한 걸로 아는데. 나를 화나게 하지 마.”
“피차일반이야. 나 건드리지 마. 개자식아.”
욕설에 라우젝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누군가에게 이런 욕을 들어봤겠는가. 하지만 이것도 많이 참은 거였다.
마기휼은 라우젝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입술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붙인 후에 입을 열었다.
“라울에게 지닌 네 콤플렉스를 괜한 사람에게 휘두르면서 분풀이하지 말란 말이야.”
눈동자 안쪽으로 불꽃이 튀었다. 급격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라우젝이었지만 마기휼은 두렵지 않았다. 너도 당해보라는 듯 마기휼은 라우젝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라울은 대령이고 외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지. 하지만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넌 아무것도 없어. 너의 그 몸은 지나치게 큰 약점이니까. 네가 할 수 있는 건 그 드넓은 저택 안에서 폭군처럼 군림하는 것뿐이야. 지금은 받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너 좋을 대로 하는 거겠지만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아?”
라우젝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질린다. 지금 당장 귀를 틀어막고 싶을 테지만 그리 하지 못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의 손이 부들거리고 떨렸다. 마기휼은 그 손을 잡아줬다. 위로를 하듯이. 하지만 마기휼의 입을 타고 나오는 말은 여전히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네가 변하지 않는 그 모습으로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변해 가지. 그때에도 네 비위를 맞춰주는 사람이 있을까? 살아 있기나 할까?”
입을 다문 마기휼은 라우젝을 바라봤다. 라우젝의 얼굴은 도자기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금 당장으로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터였다. 설마하니 이쪽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겠지. 전혀 예상 밖의 행동을 취하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기휼은 느릿하게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끌리면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테이블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마기휼은 라우젝을 내려다봤다.
“돈 따위가 문제가 아니야. 그런 건 죽을 때까지 일을 해서라도 갚으면 그만이니까. 그러니까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하지 마. 하나도 재미없어.”
다음에는 정말 참지 않을 거다. 이쪽 목이 잘린다 해도 네놈 그 입에다가 한방 크게 먹여줄 거라며 마기휼은 몸을 돌렸다.
앉아 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일어서서 걸어가려니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몇 번이나 비틀거리는 동안 넘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면서 마기휼은 룸 바깥으로 나왔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여자가 손을 들었다.
“어디를 가시게요? 당찬 도련님.”
여자의 말에 마기휼은 웃었다. 헤실거리고 웃던 그는 여자의 옆으로 가서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기다렸다는 듯 여자가 마기휼에게 안겨 왔다. 그녀는 들뜬 듯 눈동자를 반짝였다.
“당신처럼 그에게 당돌하게 나간 사람은 처음이야. 나 정말 반한 것 같아.”
“저놈에게 세게 나간 것 때문에 지금 나한테 반했다는 거야?”
“반하는 계기는 아주 쉽게 이루어져요. 그렇게 대단찮은 게 아니에요. 순간적으로 끌리면 그걸로 모든 게 결정되는 법이에요.”
여자의 손가락이 마기휼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은근슬쩍 붙여 오는 몸은 꽤나 글래머였다. 몸을 밀어붙이며 여자는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어때요? 나 잘하는데. 잘해줄게요.”
“듣기만 해도 황홀하군. 하지만 미안―.”
마기휼은 양손을 모으며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분간 이런 분위기에서 일하는 여자하고는 깊게 사귀지 않기로 했어.”
“어머? 그거 상당히 기분 나쁘게 들리는 말인데요?”
여자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마기휼은 급히 뒷말을 이었다.
“전에 정말 친하게 지냈던 술집 마담이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온갖 종류의 총을 다 섭렵한 저격수였지. 그녀를 믿었던 만큼 배신감이 컸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 배신감이 아물 때까지는 그녀와 비슷한 직종에서 일하던 여자는 안 만나기로 했어.”
“변명이 듣기 좋네요.”
여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입술을 씰룩이며 고개를 돌려버렸고 마기휼은 그러지 말라는 듯 여자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 쪽으로 몸을 붙이며 은근히 속삭였다.
“그러지 말고 나 여기서 어떻게 나가면 될지 알려주면 안 될까?”
“안에 계신 분하고 같이 돌아가시면 되잖아요.”
“왜 그래. 저 사람 성격 몰라서 이래? 지금 들어가면 나 벌집 되는 거 알잖아.”
마기휼은 여자의 팔을 감싸고는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보통 사내들은 잘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달라붙는 게 껄끄럽지만 그렇다고 아주 싫은 것도 아니었다. 마기휼은 상대가 크게 불쾌함을 느끼지 않을 선에서 애교 부리는 게 능숙한 사내였다. 결국 굳어 있던 여자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변죽하고는.”
코웃음을 친 여자는 몸을 돌렸다. 쌀쌀맞게 따라오라 하는 말에 마기휼은 재차 그녀의 팔에 매달렸다. 고맙다며 되지도 않는 애교를 떨어 대는 마기휼을 흘깃 쳐다보던 여자는 이내 웃어버렸다. 그리고 매달리는 그를 밀쳐 내지 않고 뒷문으로 안내했다.
헤어질 때에는 마지막이라며 그녀의 이마에 뽀뽀했다. 입술이 아닌 뺨에다 해주는 것에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이런 식으로 여자의 마음을 농락하나요? 당신은 바람둥이예요.’ 라고 말하며 들어갔다.
바람둥이 흉내를 내려던 건 아니고 그저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걸 오해하면 안 되는데. 그리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몸을 돌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는 꽤나 황량했다. 사람이 없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휘잉 불어오는 바람이 앞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순간 마기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으, 춥다.”
어깨를 움츠린 마기휼은 재채기를 했다. 몇 번이나 기침을 한 후에 벽에 등을 기댔다. 몽롱한 눈빛을 한 채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토할 것 같았다. 마기휼은 벽에 한 손을 짚은 채로 발을 뗐다.
라우젝의 앞에서는 태연한 척을 하기는 했지만 그건 꽤나 필사적으로 꾸민 거였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라우젝 그놈 앞에서는 절대로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비굴해지거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놈의 입에서 가휼이나 아버지에 대해 거론되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가 진실만을 말하는 거라 해도 말이다.
아버지가 그런 일을 했으니 집안 분위기도 말이 아닐 터였다. 가휼도 힘들겠지. 계속해서 빚쟁이들이 찾아오게 되면 모두가 불안할 거다. 돈은 필요할 테지만 나올 구멍이 없었다. 도박을 해서 번 거라 해도 그게 가휼의 손에 들어가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된 거다. 그렇게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였다.
마기휼은 손으로 코를 문질렀다. 눈가가 시큰해진다. 불현듯 울적해졌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싫은데. 이런 곳에서 울고 싶지 않은데. 마기휼은 어딘지 알 수 없는 골목으로 들어가 벽에 손을 집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마기휼은 갑갑한 가면을 벗어 던지고는 고개를 들었다. 목이 꺾일 정도로 젖히고는 검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총총 박힌 것이 참 예뻤다. 멍하니 그걸 쳐다보다가 양손을 위로 뻗었다. 조금 무리한 걸지도 몰랐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이내 소리를 내 웃었다.
우스웠다. 이제부터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싶었다. 빚 같은 거 그냥 일해서 갚는다 하고 라울네로 들어가지 말까. 그게 아니면 빚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도망가버릴까.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 처박혀서 살까.
난 원래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걸 싫어하는 사람이야. 조용하고 한적한 게 좋단 말이야. 그런데 최근 들어 너무 일이 많이 터지잖아. 그런 건 싫어. 난 놀고 싶어. 한량처럼 지내고 싶어. 그리 지내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지금까지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정신 상태 때문에 일이 이리된 거지.
조금 더 빠릿하게 굴었으면 좋았을 텐데. 더 노력해서 계급을 높이는 편이 좋았을걸. 그러면 선택의 폭이 보다 넓어졌을 텐데. 이런 일을 겪고 이렇게나 당황스럽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마기휼은 웃었다. 상당히 어이없다는 듯 발끝으로 벽을 치던 것도 잠시 몸을 돌렸다. 더 마셔야겠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기휼은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고급스러운 건물이 즐비한 수상쩍은 동네. 그렇기 때문인지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군대에는 차량도 종종 다니지만 평범한 길거리를 지배하는 건 온통 마차뿐이었다. 하늘은 군함이 날아다니고 배도 움직인다. 나름 고도의 문명이 발달해 있는데 그건 일상생활에 조금도 적용이 되지 않는다. 모든 건 군대와 왕실이 장악하고 있었다.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연료가 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때때로 생각하게 된다. 마차 같은 것보다는 차를 타고 다니는 게 훨씬 더 편할 거라는 생각 말이다.
손가락을 두 개를 들어 눈앞에서 까닥거렸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손가락을 세우고 빠르게 까닥였다. 마치 달리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웃다가 지금 자신의 모습이 너무 바보 같아서 더 크게 웃어버렸다. 배를 잡고 하하하- 하고 짧게 끊어서 웃던 마기휼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한심해. 나 같은 놈 세상에 둘 있으면 안 되겠다. 이렇게나 한심하다니.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 이 순간에는 스스로가 너무도 한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싫게만 여겨졌다.
양손을 들어 머리를 토닥였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자. 괜히 우울해하지도 말자. 이렇게 꽁해 있는 건 너답지 않았다. 네 캐릭터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정신 차려. 꼭 좀 정신 차리란 말이야.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마차가 지나가려나?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멀지 않은 건물로 사람이 나오는 게 보였다. 괜히 헤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저기 사람이 있네?”
미친 척 말을 걸어볼까?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거다. 그게 아니면 돈 좀 빌려 달라고 할까? 그러다 시비가 붙어서 두어 대 맞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정말 그리해버릴까 싶어 그쪽으로 한쪽 발을 옮겼다. 바로 그때 바람이 불었다.
나오던 호리호리한 자의 얼굴을 가리던 망토가 슬쩍 올라갔다. 금발이 흘러나왔다.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상대가 고개를 든다. 달빛이 비치는 그 얼굴은 작고 하얗다. 그 순간 마기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마리아?”
중얼거림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쳐다보나 싶던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건 짧은 순간의 일이었고 이내 그녀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웃은 마리아는 마차에 올라탔고 마차가 출발했다.
“잠깐 기다려!”
이런 곳에 있었나? 아직 멀리 떠난 것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고작 하루였다. 그 정도라면 진작 안제크에서 빠져나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기휼은 달려오는 마차 쪽으로 뛰어갔다. 손을 뻗었지만 마차에 살짝 스치고 말 뿐이었다. 손끝이 얼얼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는 마차를 쫓았다.
“이봐! 마리아! 자수해!”
소리를 치고 나서 굉장히 어이없는 말을 했구나 싶었다. 관문을 폭발시킨 그녀가 자수 같은 걸 할 턱이 없는데 말이다.
토하고 나서 속은 안 좋고 머리는 어지럽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그렇지만 있는 힘을 다 해서 마차를 쫓았다. 그런 마기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마리아! 기다려!”
미칠 것 같았다. 숨이 목까지 차서 이만 쫓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 할 말이 있었다. 지금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이 옳지 않음을 알려줘야만 했다. 일단 자수를 해서 조용히 있으면 감형이 된단 말이다. 그렇게나 생각을 하고 걱정을 해주는 이 마음을 알기나 하느냐며 마기휼은 이를 악물었다.
“마리―!”
이름을 채 부르기도 전에 뭔가가 팔락거리며 얼굴에 덮어졌다. 놀란 마기휼은 앞으로 나자빠졌다. 달리던 기세 그대로 넘어진 거라 앞으로 몇 바퀴를 굴렀는지 모른다. 하지만 금방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꼴사납게 주저앉은 마기휼의 눈앞으로 마차가 점점 멀어졌다.
“……놓쳤어.”
중얼거린 마기휼은 헐떡거리는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내리떴다. 크게 벌린 다리 사이로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집어 들자 하얀 손수건 가운데로 붉은 입술 립스틱 흔적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자기. 용쓰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허탈해진 마기휼은 웃었다. 하- 하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던 것도 잠시, 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빌어먹을!”
한 번 더 후려쳤다. 주먹이 얼얼했다. 실상은 바로 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마기휼은 주먹으로 바닥을 누른 채로 정면을 노려봤다. 그 눈초리가 살벌했다.
“다음에는 붙잡을 거야.”
네가 더 이상 나쁜 길로 가게 하지 않을 거야. 마차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고 있으려니 옆 건물에서 문이 열렸다. 아직 늦은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요란한 소리가 나자 뭔가 싶어 바깥으로 나와 보는 모양이었다.
손수건을 챙긴 마기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렸다.
“아얏.”
인상을 쓴 마기휼은 허리를 굽히며 왼쪽 무릎에 한 손을 올렸다. 욱신거렸다. 제대로 구른다 싶더니만 부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고작 마차를 쫓다가 이런 부상이라니. 그간 내가 너무 나태했구나 싶어 입 안이 썼다.
씁쓸한 얼굴로 무릎을 쳐다보던 마기휼은 손수건을 품 안에 밀어 넣고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길가로 물러났다.
술을 마실 마음은 진작 사라졌다. 일단은 자고 싶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만 있을 수 있다면 황제가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자신이 마음 편히 누울 침대라는 게 있을까. 그런 게 어디에 있을까. 로노베가 집인데. 하지만 그곳에는 갈 수 없는데.
고개를 숙인 마기휼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눈을 꾸욱 감았다 뜬 마기휼은 손등으로 문질렀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오지게 추웠다. 다 토해서 속은 허하고, 무릎은 아프고, 왠지 등이나 팔도 아픈 것 같았다. 머리는 어질거리고 자꾸만 비틀거리게 된다. 완전 다 망가진 몸 같았다.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난 원래 안 이랬는데. 원래 이렇게 고민이 많지 않았는데. 나는 원래 널널한 인간이었는데. 그런데 도대체 뭐 때문에―.
“마기휼.”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음성에 마기휼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을 취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천천히 고개를 든다. 위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몽롱함에 젖어 있었다.
굉장히 잘생긴 놈이 앞에 있었다. 그놈이 둘이 되었다가 셋이 되고, 이내 하나로 모이게 되었다. 그의 얼굴이 선명해지는 순간 굉장히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몰골이 왜 그 모양인 거지?”
라울이었다. 이 빌어먹을 왕자놈.
그래. 세상의 모든 건 네 거라 이 말이지?
이 시건방진 황태자지랄염병뽕짝 같은 놈아.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지금은 제대로 된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점점 마기휼의 눈이 몽롱하게 풀려 갔다.
“……때문이야.”
“뭐?”
라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에 열이 화악 받았다. 순식간에 체온이 올라가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당장 라울에게 삿대질했다.
“다 너 때문이라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지금 이게 뭔 짓인가도 싶었지만 마기휼은 열심히 팔을 흔들어 댔다.
“너 때문에 이러는 거야! 너 때문에 내가 지금 우는 거라고! 머리 아픈 거랑 팔다리 아픈 것도! 정신 사나운 것도 다 너 때문이야! 전부 너희 때문이라고!”
아무나 걸리면 다 죽여버리겠다, 라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원망은 할 수 있었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원망을 하고 뒤집어씌울 만한 존재가 필요했다. 그게 라울이 된 것뿐이었다. 그렇게 봤을 때 지금 걸린 라울도 참 재수가 없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울음으로 인해 할딱거리며 마기휼은 크게 외쳤다.
“너 때문이야! 나 때문이 아니야! 너 때문이란 말이야!”
손바닥 위에 얼굴을 묻고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으허헝-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대성통곡을 하는 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듣고 나서 두 번째인 것 같았다. 원래 이런 식으로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울어서도 안 되는 거였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 내가 무능하기 때문이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이런 몸이기 때문이야.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니까…….”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었다. 눈물이 더 많이 나오게 되었다. 딸꾹질을 하며 마기휼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런 마기휼의 얼굴로 커다란 손이 닿아 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마기휼은 당장 그 손을 뿌리쳤다.
“뭐, 뭐야!”
양손을 위로 뻗으면서 뿌리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여파로 인해 뒤로 나자빠지게 되어버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마기휼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황급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 얼굴 보지 마! 이런 꼴사나운 모습은 보지 말라고!”
무릎을 세우고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왜 여기서 이런 꼴로 있는 걸 라울에게 고스란히 보이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조금 더 당당하고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게 보잘것없는 사내의 자존심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머리로 뭔가가 올려졌다. 라울의 손이었다. 헛숨을 삼킨 마기휼은 마구 고개를 저어 댔다. 고개를 들면 다시금 꼴사나운 얼굴을 그에게 보이게 될까 봐 그게 싫었다.
“저리로 가란 말이야! 이 자식아! 연하 주제에 건방져! 너 지금 날 위로하려는 거냐고?!”
그러려면 한 백만 년은 일렀다. 너같이 무표정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놈 같은 건 지금 내 마음을 알 턱이 없어. 넌 그저 네 취향인 나를 안고 싶은 것뿐이잖아. 만지고 싶을 뿐인 거잖아. 따뜻한 말 한마디도 못 하는 주변머리는 필요 없으니까 썩 저리로 가버리라고―.
“네 탓이 아니다.”
마기휼의 어깨가 굳어졌다.
마기휼이 숨을 죽인 채로 있는 동안 라울이 재차 말했다.
“절대로 네 탓이 아니다. 그건 모두 그들의 탓이야.”
마기휼은 조용히 있었다. 그렇게 펑펑 쏟아지던 눈물이 쏙 들어가버렸다. 몽롱했던 머리도 맑아졌다. 숨을 죽인 채로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바닥으로 감추고 있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라울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쪽 머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있는 그는 너무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웅얼거린 마기휼은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걸 닦아 내지 않은 채로 흐릿하게 보이는 라울을 바라봤다.
라울은 마기휼의 눈물로 범벅된 뺨에 손을 댔다. 처음에는 가볍게 대고만 있다가 이내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서 감쌌다. 라울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어서 하나도 따뜻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손을 치워 내지 않았다. 마기휼은 재차 눈을 깜박였다. 보랏빛 눈동자에 서려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우리는 단지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욕심을 부리고 있지.”
바라보는 눈동자의 떨림이 멈췄다.
마기휼은 라울을, 말을 전달하는 그의 입술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자기들 욕심에 따라 우리를 좌지우지하려는 것뿐이야.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옳은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어. 싫은 일쯤은 거부하고 외면해도 괜찮아. 그렇다 해서 그들이 우리를 비난할 수는 없는 거다. 우리는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모든 상황은 결국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이 상황은 라울이나 마기휼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이 그들의 욕심에 의해 꾸며 대고 있는 일이었다. 그 일들이 너무도 많고 크고 힘들어서, 힘들어한다고 해서 그게 나쁜 건 아니었다. 그걸 거부한다 해서 그게 큰 잘못인 것도 아니었다. 모든 걸 다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끌어안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라울의 녹빛 눈동자를 바라보는 동안 점점 치유되는 걸 느낀다. 어디가 어떤 식으로 아무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한결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와 자신이 너무도 닮게 느껴졌다. 전혀 다른 외모에, 환경에서 자랐지만 마치 판에 찍힌 쌍둥이 같은 느낌이었다. 동지라는 감각. 그것이 마음을 뜨겁게 한다. 마기휼의 얼굴이 아이처럼 어려졌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안아드리지 못했어.”
입술이 떨렸다. 눈물이 또 나오려 했다.
마기휼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재차 눈물을 흘렸다. 아까처럼 통곡하진 않았다. 마음에서 흘리는 눈물은 조용하고 상처가 깊었다.
라울은 오랫동안 우는 마기휼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마기휼이 스스로 눈물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아군을 만난 기분이었다. 100대 1로 싸우다가 모든 걸 다 갖춘 막강한 아군이 나타나 그 적들을 다 때려눕히고 도움을 주겠다며 손을 내민 거다. 아직은 그 손을 잡을 건지, 말 건지 생각을 하는 단계였다.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손을 잡게 된다면 어찌 되는 걸까.
라울의 아이를 배게 되는 걸까?
마기휼은 배를 문질렀다. 이내 그 손을 허벅지 위에 올리고 눈을 위로 들었다. 흔들리는 마차에 라울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원래라면 마주 보고 앉아야 할 텐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렇게 앉아 있었다. 이제는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창에 이마를 기댄 채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은 중얼거렸다.
“힘들었을 것 같아.”
마차가 흔들리자 창에 닿아 있는 이마로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기휼은 고개를 뒤로 물렸다.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재차 말했다.
“라우젝은 너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어. 딱 보니까 너에게 흠집을 내고 싶어서 안달 난 상태 같던데?”
“알고 있다.”
태연한 대답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렇게나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였다. 마기휼은 라울을 흘겨봤다.
“네가 남자밖에 상대할 수 없다는 건, 다른 사람도 알고 있어?”
“그들이 알고도 내 곁에 있을 것 같나?”
되묻는 말에 마기휼은 입을 다물었다.
곁에 있어줄 거야. 그렇게 단정을 해서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위에 있는 놈들일수록 머리가 굳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라울에 대해 알려지면 그를 매도하는 이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 이상한 말이 만들어지고 소문도 퍼지겠지. 그의 평판에 흠집이 생기는 거였다. 완벽한 왕자님으로 포장되어 있는 라울이다. 그가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것일까 라울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내 성적인 기호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저 여자를 안을 수 없을 뿐이니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갈 생각이었지. 그런 삶이 그리 나쁘지도 않을 것 같았고 말이야.”
“나랑 똑같네.”
가볍게 나오는 대꾸에 라울이 마기휼을 바라봤다.
“평생 혼자 살려고 했어.”
라울이 쳐다보는 시선에 마기휼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마치 스스로를 비웃는 것 같은 웃음이기도 했다.
“이런 몸이잖아. 얼마나 주눅이 드는데. 남자랑 같은 공간에 있기라도 하면 몸에 완전 힘 들어가. 전에는 이상한 눈빛을 보내던 놈들도 종종 있었지. 물론 먼저 시비를 걸어서 완전 죽사발을 만들었지만 말이야.”
그러고 나서 치료비 대주고 한 게 벌써 몇 번인지 모르겠다. 군에서는 한량이기도 했지만 괴짜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성격 좋은 것 같으면서도 막상 이상한 부분에서 틀어져 주먹을 날려 댔으니 말이다.
그냥 다른 사람들 같은 몸이었으면 좋았잖아. 그러면 조금 더 나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마기휼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난 나에 대해서 정말 자신이 없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멍하니 있던 마기휼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라울을 쳐다봤다. ‘네가 정말 너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없다고?’ 그리 묻는 눈빛에 라울은 시선을 피했다.
“형님은 그런 몸이고 아이를 만들 수 없다. 가문에서 가장 진한 왕통은 나뿐이지. 왕통이 끊기면 안 되는 입장에서 하나 있는 나는 여자를 안을 수 없어. 그런 것을 다른 이들에게 밝힐 수도 없다. 평생 숨기고 살아가야만 하는 거지.”
라울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건방지고 자신감을 가져도 될 만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는 남자만 성적 대상으로 볼 수 있었다. 그것에 대해 남들의 평판도 문제겠지만, 그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봐도 이상한 집안. 대귀족이자 왕통으로서는 인정받을 수 없는 성적인 기호. 그건 고친다고 해서 정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지만 다른 이들과 다르다. 그것으로 인해 평생 비밀을 간직하며 진짜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야만 하는 거였다.
프라이드가 그렇게나 높은 사내가 그런 자신의 상태를 인정할 수 있을까.
진심으로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 그것에 대해 라울은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높은 자존감을 지니면 지닐수록 그 혐오감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성적인 기호를 알고 자신을 떡하니 내놓는 오르베와 그걸 비웃고 조롱하는 라우젝이 있었다.
자신이 라울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라울같이 완벽한 조건의 사람이었다면 굉장히 화가 날 것 같았다. 가족이라 해도 모두 다 죽이고 싶을 만큼의 살의를 느끼지 않았을까.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그가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보였다. 연민이나 동질감은 아니었다. 그것과는 다른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지나치게 잘 정돈이 된 라울을 쳐다보던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아까 완전 끝장나게 추하게 울어 댔는데. 그 모습을 라울이 다 봤는데. 안 그래도 못난 얼굴이 더 이상하게 보였겠지.
……갑자기 굉장히 우울해진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저택에 도착한 후, 마차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고용인들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보였다. 어쩔 수 없겠지. 지금 완전히 상거지 꼴을 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본인 스스로는 괜찮다고 해도 주변에서 너무들 놀란 얼굴을 하면 무안해진다. 창피하기도 했던 마기휼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의원을 부르도록 해라.”
뒤에서 들리는 말에 마기휼은 당장 라울을 돌아봤다.
“괜찮아. 이건 조금 굴렀을 뿐이야.”
“의원에게 진찰을 받도록 해.”
라울이 화를 내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건 아니었지만, 차분하게 응시하며 하는 말에 더 뭐라 할 수 없어졌다.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느낌에 마기휼은 입을 다물었고 그러는 동안 라울은 주변에 서 있던 이들에게 하나하나 명령을 내렸다. 그중 하나가 마기휼의 목욕과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라는 거였다.
라울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뒤를 흘깃 보나 싶던 마기휼은 이내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이층 안쪽 창가에 서 있던 여자가 이쪽이 쳐다보는 순간 안으로 몸을 피했다. 그걸 확인한 직후 라울은 안색을 굳혔다. 미간 사이로 주름이 만들어지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팔을 들어주세요.”
정중한 요청에 마기휼은 순순히 팔을 들었다. 그러자 목욕 시중을 들던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 마기휼을 빤히 쳐다봤다.
마기휼은 멍한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저런 얼굴인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마기휼의 몸을 씻는 것에만 집중을 하려 했지만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이쪽이 한 행동에 대해서 마기휼이 어떤 식으로 반응을 보일까 싶어 굉장히 흥미진진했다.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다른 하녀들을 모두 물리고 이쪽이 하겠다 했을 때에도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어떤 장난을 쳐도 혼나지 않을 건, 지금밖에 없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눈을 빛낸 아이 중 하나가 거품을 걷어 마기휼의 코에 묻혔다. 그리고 웃었다. 하지만 마기휼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아이들은 더 웃지 못했다.
“이상해.”
중얼거린 아이가 옆에 있던 아이를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인 아이가 마기휼의 뒤로 가서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주욱 당겼다. 꽁지 머리가 위로 섰다. 굉장히 우스운 몰골이었다. 아이들은 크게 웃을 준비를 했다. 폭소를 터트리려 했지만 여전히 마기휼은 무표정이었다.
“재미없어.”
그리 말을 한 아이가 잡고 있던 꽁지머리를 내려놨다. 그리고 모두가 욕조에 달라붙어 마기휼을 쳐다봤다.
원래 장난이라는 건 상대가 반응을 보여야 즐거운 거였다. 이렇게까지 반응이 없으면 즐겁지 않았다. 특히나 마기휼처럼 반응이 컸던 사람이 이렇게 멍하니 있으면 더더욱 재미없었다.
한 아이가 마기휼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마기휼, 왜 그래?”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굴을 가까이 붙여도 마기휼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인 모습에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큰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나도 재미없어.”
중얼거리는 목소리 안쪽으로 물기가 스며 나왔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원래 본인들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정성껏 마기휼을 씻기고 닦이고 말리고 입히고 마지막으로 재웠다. 침대에 가지런히 누울 때까지도 마기휼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가 정말 왜 이럴까.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며 아이들은 문을 닫았다.
“마기휼. 잘 자.”
한 아이가 하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히고 방 안은 완전히 캄캄해졌다.
마기휼은 똑바로 누워 있었다. 그러나 싶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양손을 들어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그렇게 순식간에 머리를 산발로 만들더니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씩씩거리는 그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오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거였어.”
그래.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냥 이대로 머릿속에서 통째로 지워버려도 되는 일이었다. 라우젝하고 있었던 일은 열 받는 것이었을 뿐이고, 마리아는 우연히 만난 것뿐이고 그리고 라울은…….
‘너의 탓이 아니다.’
바라보는 눈동자가 진지했다.
진심으로 그리 말을 해주는 거였다. 라울 그도 자신과 같은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말을 하고 위로를 해줄 수 있는 거였다. 아니. 그게 위로였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냥 한 말이었던 걸까. 단순히 생각을 전하려는 말에 낚여서 너무 끙끙거리는 게 아닐까. 그래도 듣는 순간 기분이 되게 묘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진찰을 받아보도록 해.’
단호히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내심이 전해졌다. 다쳤을지도 모르니 확인을 해보라는 거였다.
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넘어진 것 가지고 일일이 걱정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냥 두면 알아서 잘 움직이고 걸어 다닐 수 있었다. 분명히 그런 것일 텐데. 그런데―.
심장이 두근거리고 뛴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마기휼은 자신의 변화에 당황하며 “어? 어?” 하는 이상한 소리만 연거푸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