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ZONE 2
레드존
네르시온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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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복도를 걷는 라울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화가 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원래부터 저런 얼굴이었다. 크게 웃거나 화를 내거나 일그러진 얼굴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무표정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다른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동요하는 거야?”
옆을 돌아보자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오르베가 보였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닮은 붉은빛 드레스를 입고 있던 그녀는 라울과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신경을 긁는 오묘한 미소였다.
“조카님. 당신답지 않은 얼굴을 하고 계시네?”
“고모님이야말로 답지 않은 짓을 하시는군요. 언제부터 그런 비겁한 짓을 저지르시게 된 겁니까?”
“쓸데없이 질질 끄는 시간을 단축하려는 것뿐이야.”
벽에서 등을 뗀 오르베는 라울 앞으로 걸어왔다.
몸을 가까이 붙이고는 나직이 속삭였다.
“그 아이가 마음에 들면 당장 취해. 그래도 되는 입장이잖아?”
“돈으로 그를 샀다 이겁니까?”
“20만 베리의 몸값이야.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고작 그런 사내인데 무려 20만 베리였다. 그런 뉘앙스를 풍기며 올려다보자 라울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저를 화가 나게 해서 좋을 게 뭐가 있으십니까?”
차분한 녹빛 눈동자 속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졌다.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내는 라울의 모습에 오르베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양손을 들며 뒤로 물러났다.
“조카님. 내가 잘못했어.”
“정말 그리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말만 그리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다시는 이런 저급한 짓을 꾸미지 마십시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생겼을 경우, 보고만 있지 않겠습니다.”
“어찌하려고?”
“애초에 이곳은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었지요. 내쫓김을 당하고 싶으십니까?”
오르베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로서는 참기 힘든 굴욕일 거다. 이런 식으로 건드려 봤자 좋을 거 없는 여자라는 걸 알고는 있으나 그녀의 행동을 마냥 모르는 척할 순 없었다.
라울은 가면을 쓴 얼굴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속을 읽기도 어렵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이쪽이 하고 싶은 대로 일을 추진할 수 없었다. 오르베는 분함을 내리눌렀다.
“너무 그리 흥분하지 마. 괜한 생각을 하게 되잖아. 네가 저 마기휼이라는 자에게 진지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말이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라울을 건드리는 말을 하는 순간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 날카롭게 변했다. 차갑게 쏘아보는 시선에 오르베는 손을 저었다.
“알았어. 그만하지.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요.”
오르베는 몸을 돌렸다. 화가 단단히 난 듯 그 걸음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르베는 그냥 가버렸지만 그렇다고 껄끄러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저대로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둘 수만은 없었다.
굳은 얼굴로 있던 라울은 몸을 돌렸다. 하지만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존재를 발견해냈다. 그를 확인하고는 발길을 멈추었고 상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특유의 미소를 보냈다.
“어디를 가는 거야? 다시 마기휼에게 가려고?”
“……형님.”
상대를 부르는 라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허리에 한 손을 올린 라우젝은 설렁거리며 걸어와 라울의 옆에 서선 그에게 팔짱을 끼었다. 입술의 양 끝을 올리는 그는 사랑스러웠다. 나란히 서 있는 걸 봤을 때, 그가 라울보다 연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요즘 재미있어 보여.”
라우젝의 말에 라울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색을 굳힌 채로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에 라우젝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 네가 예민하게 반응을 취하니까 오르베도 더 재미있어 저러는 거잖아.”
“……그녀는 지금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끌어들인다는 거야?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마기휼의 동생이 돈을 받는 대신에 형을 판 거야. 그 계모와 짜고서 말이야. 그걸 마기휼도 알고 있다고. 그런 주제에 너무 건방진 것 같아.”
똑바로 쳐다봐오는 보랏빛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한 번도 자신에게 그리 말을 하거나 행동을 취한 이들은 없었다. 언제나 늘 비굴하게 아첨을 떨어 대는 놈들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그저 한 순간의 흥밋거리일 뿐이었다. 그 이상은 되지 못한다. 되어서도 안 되었다. 라우젝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라울의 가슴을 눌렀다. 누른 채로 손가락이 느리게 아래로 내려갔다.
“어차피 돈으로 산 거라면 진지해지기 전에 원하는 것만 얻어내. 우리가 필요한 건 건강하고 튼튼한 후계자잖아.”
달라붙어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이는 말에 라울의 미간 사이로 주름이 잡힌다.
“너랑 나는 이미 글러먹었어. 오르베도 그걸 아니까 저렇게 서두르는 거야. 다소 강제적인 짓을 저지르기 전에 네가 알아서 손을 써.”
바라보는 라우젝의 눈동자에는 웃음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차갑기만 한 시선에 라울도 대꾸가 없었다. 입을 굳건히 다물고 응시하자 라우젝의 눈빛이 더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라울에게서 떨어졌다.
“재미없는 놈. 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두어 걸음 물러난 라우젝은 험악한 표정을 지은 채로 날카롭게 내뱉었다.
“그런 식으로 굴면 아무도 네 곁에 남지 않아. 네가 대단하다 해도 결국은 그뿐이야. 여자를 안지 못하는 넌 저들에게 있어 단순히 변태에 뭔가가 결핍된 놈일 뿐이라고. 사내를 안아서 아이를 얻어야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
작정하고 라울의 자존심에 타격을 입히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라우젝이 던진 말에 라울의 안색이 더 어둡게 변했다. 다른 이들은 알아차릴 수 없는, 라우젝만이 아는 표정의 변화에 그는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코웃음을 친 그는 바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멀어지는 라우젝을 앞에 두고도 라울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던 라울은 고개를 돌렸다.
“―결핍이라.”
그리고 변태인가.
중얼거리는 라울의 얼굴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만히 서 있던 그는 몸을 돌렸다. 걸어왔던 곳을 되짚어가는 그의 걸음은 빨랐다. 순식간에 도서관 앞에 도착을 한 라울은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발랑 까진 놈들이!”
분노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날카로운 음성. 그건 바로 마기휼의 것이었다. 뭔가 싶었던 라울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과 책상 사이를 돌며 똑같은 얼굴을 지닌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는 마기휼을 볼 수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책상을 돌아 아이를 잡을 만한 타이밍에 다리가 꼬였다. 아깝게 아이를 놓친 마기휼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책상을 후려쳤다.
“이리로 안 와?! 당장 이리로 와!”
노려보는 얼굴이 무시무시했다. 더 멀리 도망을 간 아이들이 너무한다는 듯 마기휼에게 원망의 시선을 던졌다.
“너무 거칠어! 그러면 좋은 신부가 될 수 없어요!”
“이렇게 우락부락하고 화만 내는 신부는 최악이야!”
“그래! 맞아! 라울 님도 싫어할 거야!”
다른 두 아이도 양손을 흔들며 야유를 퍼부었다.
“폭력 신부!”
“……이 녀석들이 정말이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마기휼은 당장 의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소리를 지른 아이들이 한곳으로 모여 서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눈을 질끈 감으며 한 몸처럼 뭉쳐서 덜덜 떠는 걸 본 마기휼은 주춤했다.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의자를 들기는 했지만 아이들도 너무 저렇게 노골적으로 무섭다는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이쪽이 완전 악인이 되어버린 것 같잖아.
한 아이가 마기휼을 쳐다보다가 재차 눈을 질끈 감으며 다른 아이의 품으로 파고들어 갔다.
“무서워―.”
무섭다니. 정말 무서운 건 네놈들이잖아.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나한테 또 이상한 짓을 하려고 했잖아. 너희가 한 짓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게 이쪽한테 모든 걸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건 너무하잖아.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있던 마기휼은 이내 의자를 천천히 내려놨다. 그리고 빈손이 되어선 그걸 위로 보였다.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다는 듯 양손을 펼치며 지극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자, 의자 내려놨다. 이러면 안 무섭지?”
아이 중 셋이 고개를 들어 마기휼을 쳐다봤다. 그것에 용기를 얻은 마기휼의 미소가 한결 짙어진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너희가 먼저 이상한 짓을 했잖아. 라울이 막 잠에서 일어날 때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말해주지 않았던 거잖아. 안 그래?”
차분하게 나오는 말에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알아버렸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런 의미가 섞인 눈빛을 교환하던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 마기휼을 쳐다봤다.
“우리는 몰랐어요.”
“웃기고 앉았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마기휼은 책장에서 책 하나를 꺼내 아이들에게 던졌다. 소리를 지른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웃으면서 뿔뿔이 흩어지는 아이들을 정신없이 보던 마기휼은 당장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하나만 걸려라! 하나만 걸리면 그 날로 엉덩이 팅팅 불게 해줄 테니까!”
어린애면 어린애답게 솔직하게 굴면 얼마나 귀여워. 속이려고만 하는 게 발칙했다. 그리고 너희가 하는 말을 내가 무조건 믿어줄 거라 생각하면 그건 엄청난 착각이란다. 나도 이제는 슬슬 뭔가를 알 것 같단 말이야.
미친 들소처럼 뛰어다니는 마기휼의 꼬랑지 머리가 바쁘게 팔랑거렸다. 그러던 차에 한 아이가 비틀거리는 게 보였다. 눈을 빛낸 마기휼은 당장 그리로 달려가며 양팔을 뻗었다.
“잡았-!”
막 아이를 붙잡으려던 찰나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손이 아이의 머리를 잡아 옆으로 밀어냈다. 마기휼은 달려온 상태 그대로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어 갔다. 벌려진 팔은 상대를 끌어안았고 무릎이 휘청인 마기휼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상대에게 매달린 꼴이 되어버렸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하게 변했다. 그러다가 금방 정신을 차린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라울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이, 이건 말이지.”
바로 변명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설프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마기휼은 이내 자신의 자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에 끌어안은 건 라울의 허리였고, 얼굴이 있는 건 사내의 중심 부위였다. 바로 마기휼의 얼굴이 확- 하고 일그러졌다. 지금 자세가 상당히 이상했다. 오럴을 할 것도 아닌데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조금 전 라울이 진한 키스를 했던 상황인지라 더더욱 민망했다.
마기휼은 잽싸게 떨어졌고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마기휼을 대할 때에는 발랄하니 잘 웃던 아이들도 갑자기 등장한 라울을 보고는 당황이 역력한 얼굴이 되었다. 눈치를 살피더니 슬슬 물러나는 것에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야. 너희들-.”
“그냥 가게 둬.”
라울의 제지에 마기휼은 입을 다물고 든 팔을 내렸다. 순순히 하는 말에 따르긴 했지만, 아이들을 그냥 보낸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걸 확인한 라울이 입을 열었다.
“저런 식으로 웃는 아이들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특이하군.”
“특이할 게 뭐가 있어. 하여튼 까불거리는 데에 뭐가 있다니까.”
하나하나 잡아서 엉덩이를 퍽퍽 쳐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라며 마기휼은 입술을 씰룩였다. 이내 라울의 시선을 느끼고는 움츠러들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말을 하고 나서 아뿔싸 싶었다.
라울은 조금 전 이상한 말을 했었다. 취향이니 뭐니 하는 거 말이다. 그래서 접근을 하지도 말라는 경고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금 단둘이 남아 있게 되었다.
이러면 어색해지는데?
눈을 굴려 대려니 라울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나는 바깥에 나가 있을 거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집 안에 남아 있으면 저 아이들이 다시금 접근할 거다.”
난 저런 아이들 따위 두렵지 않아. 그리 말하고 싶은 듯 마기휼의 눈동자가 당당하게 라울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이 그를 움츠러들게 했다.
“오르베와 라우젝도 나타나겠지.”
“…….”
마기휼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건 정말 싫다.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고민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이내 라울을 조심스레 올려다봤다.
“밖으로 나간다고?”
“수행원 정도로 해서 날 쫓아와도 괜찮다.”
특별히 허락하겠다. 그런 뉘앙스로 들렸다. 살짝 굴욕적이었지만,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었다. 라울이 데려가지 않는다면 달리 갈 곳도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루 정도 있어봐서 아는데, 혹시라도 자신이 다른 곳으로 가려 한다면 당장 저 라우젝이나 오르베가 나타날 거다.
둘 다 상대하기에는 상당히 껄끄러운 인물들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라울이 나았다. 지금은 막 잠에서 깨어난 상태도 아니고 이성을 되찾은 라울은 그럭저럭 괜찮은 사내였다.
라울을 흘깃 쳐다보던 마기휼은 “그러면 따라갈게.”라고 중얼거렸다.
노르디아의 수도라는 명칭답게 안베르는 화려한 곳이었다. 건물이나 길이 잘 정리되어 있고 깔끔했다. 가게들도 한 곳에 모여 있는 데다 일정한 디자인의 간판을 사용하고 있어 질서정연한 느낌이 강했다. 또한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끔하고 차림새가 좋았다. 한눈에 봐도 모두 귀족인 것 같았다. 평민은 가게를 운영하는 이들뿐인가.
바깥을 내다보던 마기휼은 옆을 쳐다봤다. 라울이 책을 읽고 있었다. 잘도 책을 보는구나. 그러고 보니 라울은 늘 손에서 책을 떼어 놓지 않는 것 같았다.
“안베르로 이동한다면서요?”
내내 북방군에 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노르디아의 중심으로 이동을 하는 거였다. 더군다나 대령으로 진급도 하고 말이다.
“외곽에 배치되는 겁니까? 해적들이 많이 나오는 국경을 지키시게 된 겁니까?”
하는 일은 험해도 막중한 임무였다. 그로 인해 라울은 조금 더 높은 위치로 상승할 수 있을 거다. 마기휼의 질문에 라울은 대답을 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시선은 책 위에 고정이 된 채였다. 마기휼은 빈정거렸다.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으시니 학자가 되었어도 크게 성공했겠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울은 책을 덮었다. 그리고 그걸 옆자리에 두더니 다리를 꼬고 고개를 들었다.
책을 잘 보고 있다가 이쪽이 한마디 하는 순간 바로 덮어버린 거였다. 그것에 무안함을 느끼며 마기휼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분위기 이상해지게 왜 저래.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이쪽이 먼저 건드렸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굉장히 무안해진 마기휼은 눈치를 살피다 재차 바깥을 내다봤다. 마차는 계속 굴러갔다. 외곽으로 빠지는 모양이다.
“새로 배치된 요새로 가는 겁니까.”
“그래.”
겨우 대답을 해주는 건가. 덕분에 더 말을 건넬 수 있게끔 되었다.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으십니까?”
“몇 달만 더 신경을 쓰면 완벽해질 거다.”
“그러면 그쪽 해적들은 모두 소탕이 되겠군요.”
안베르는 노르디아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종종 침략을 하는 해적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들었다.
여왕이 있는 장소이니 만큼 보안에서는 더더욱 철저해야 하는데 해적질이 끊이질 않아 연방군도 골치를 꽤나 썩힌다 들었다. 뭐, 새롭게 라울이 배치되었으니 조금은 달라질까. 그렇다고 해서 라울이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는 슈퍼맨은 아니니까 약간의 시행착오도 거치겠지.
“마리아가 어찌 되었을지 궁금하지 않나?”
창틀에 한 팔을 올리고 느긋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런 반응을 취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리할 수 없게 된 마기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라울을 쳐다보자 그는 무표정을 한 채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의도가 있는 질문은 아닐 테지만 그것에 예민한 반응을 취하게 되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요? 제가 궁금해하는 것 같습니까?”
“넌 정이 많은 사람이지 않나. 그녀가 어찌 되었을지 신경 쓰는 건 너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겠지.”
정이 많은 사람인가. 그 순간 경계심이 다소 누그러졌다.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가만히 있나 싶던 그는 중얼거렸다.
“그녀가 한 일에 대해서 두둔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녀는 무고한 사람을 죽였고, 그로 인해 처벌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해를 할 수 없는 게 있었다.
현재의 안락함을 즐기고 배를 타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이 배를 한 번 띄우는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나. 분명히 그리 말을 했었지. 그리고 그녀는 레드존으로 가기를 원했다.
삼국의 감시체제 안에 들어가는 지역이었다. 위험한 곳으로 구분되어 군함을 제외한 일반 배나 무역선은 항해하는 게 금지된 지역이기도 했다. 왜 마리아는 그리로 가려 했던 것일까. 그곳에 그들의 아지트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한번 물어볼까?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여지없이 눈이 마주쳤다. 애초에 라울이 계속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다면 저런 식으로 눈이 마주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말이다.
이상한 기분이 든 마기휼은 물었다.
“레드존은 어떤 곳입니까?”
“삼국의 감시 지역이다. 왜 그런 걸 묻나?”
“아니요. 그냥 어떤 곳인가 해서요.”
그래. 저런 대답을 들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달리 들을 수 있는 말도 없을 거다.
“죽음의 땅이다.”
마기휼은 주춤했다. 라울은 재차 말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입을 다문 라울은 정면을 응시했다. 더 무엇을 물어도 제대로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죽음의 땅. 그걸 말해준 게 최선이라는 느낌이었다. 왠지 좀 처지는 기분을 느끼며 마기휼은 마차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는 아무 말도 안 해야지. 애초에 이쪽과 대화하기를 원치 않은 상대를 가지고 너무 길게 말했던 것 같았다. 이제는 네놈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 나는 입 꾹 다물고 있을 거야. 실제로도 입술을 깨문 채로 있는데 마차가 멈췄다. 아직 시내였다. 요새는 분명 아니었다. 마기휼은 커튼을 살짝 올렸다. 3층짜리 건물 앞에 마차가 붙어 서 있었다. 여기는 또 뭐지?
“여기가 어딥니까?”
“잠시 다녀오겠다. 기다리고 있어라.”
기다리고 있으라니. 같이 나가자는 말은 안 하는 거냐.
마기휼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편하게 앉아 있는 마기휼을 확인한 후, 라울은 마차에서 내렸다. 다른 군인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 후 마기휼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푹신한 소파에 옆으로 누운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미치겠네.”
중얼거리자 더 가슴이 답답해진다. 혼자 있으려니 더 죽겠다. 라울이 하려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걸까? 마냥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그리 생각을 하며 눈을 굴리던 마기휼은 몸을 일으켰다.
바깥에 나가고 싶어졌다. 마차가 보이는 곳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라울이 보이면 잽싸게 들어가면 되었다. 마기휼은 당장 마차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마부석에 앉아 있던 자가 쳐다본다.
“필요한 게 있어서 사고 올게요.”
“다녀오십시오.”
저자에게는 따로 언질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기는 했다. 그냥 라울이 돌아오기 전까지만 나가 있자. 그리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가게로 걸어갔다.
가게들이 세련되다 보니 물건들도 하나같이 좋았다. 10베리는 다들 우습게 넘을 것 같았다. 여기 물가는 어떨까. 턱에 손가락을 댄 채로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가게 주인이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좀 껄끄러워하는 시선. 하나를 인식하게 되자 다른 쪽에서도 묘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들은 이방인을 경계하고 있었다.
마기휼은 스스로를 체크했다. 차림새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수상한 행동거지를 취한 것도 아니고 아직까지는 평범하게 있었다. 그런데 저들에게 저런 눈빛이 되게 할 만한 일이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외모와 피부, 눈동자, 머리카락인가. 지나치게 진하고 강렬한 색이긴 했다. 하얀 피부에 연한 머리카락을 지닌 저들에게 있어 낯설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돌연변이 종으로 생각할 지도 모르지.
수도에서는 돌연변이를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하던데 진짜였던 모양이었다.
마기휼은 불쾌한 속내를 감추며 웃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건네자 가게 주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대꾸하고 싶지는 않으나 입장상 그리할 순 없었다. 주인은 껄끄럽다는 듯 웅얼거렸다.
“외지에서 오셨습니까?”
“아니요. 로노베에서 왔습니다.”
“여행을 하시는 겁니까.”
“안베르에 요새가 생기지 않습니까. 그쪽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실제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리 말을 하는 게 훨씬 더 효과가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 가게 주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빛 자체가 달라진 주인은 조심스레 물었다.
“군인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소령입니다.”
“아아. 그러시군요.”
알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 가게 주인은 이젠 완전히 호감인 얼굴이 되어 있었다. 직책 같은 건 일부러 알려주지 않는데 이런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가게 주인은 과도한 친절을 베풀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말씀만 하시면 바로 꺼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알아서 구경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가게 주인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부터 차분하게 구경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진열대 위를 살피는데 입이 근질거렸던 건지 주인이 재차 말을 꺼냈다.
“저희들은 군인을 아주 좋아하지요.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모두 여러분들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이번에는 안제크가의 라울 님께서 이리로 오시게 되어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릅니다. 해적들은 겁도 없이 안베르의 국경을 자주 넘보거든요. 어이없는 것들이지요. 사회악이랍니다.”
가게 주인의 말에 마기휼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지요-라는 긍정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물건을 확인했다. 그런 마기휼의 눈에 편지지가 들어왔다. 그리로 시선이 고정된다.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그리로 손을 뻗어 편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편지를 써도 될 것인가. 자신이 보낸 편지를 과연 가휼이 제대로 읽어나 줄까. 읽지 않으면 어쩌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
불현듯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았다. 가족이 있다 당당하게 말하고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더는 그리할 수 없게 되었다. 가족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남에게 말하는 것도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편지를 누구에게 보낼 예정이지?”
낯선 듯 하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목소리였다. 뭔가 싶었던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옆에는 장신에 체격이 좋은 사내가 서 있었다. 낡은 망토를 머리까지 눌러쓰고, 그 위로 터번 같은 것도 두르고 있었다. 등 뒤로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는 사내는 전체적으로 모래 냄새가 날 것 같은 인상이었다. 첫 만남이 특이했기 때문에 보는 순간 기억을 해냈다. 사내 또한 마기휼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검은 선글라스 너머의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누구에게 보내려 그리도 고통스러운 얼굴인 건가?”
“아이작, 이라고 하셨지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나. 기쁘군. 마기휼.”
유감스럽게도 이쪽은 사내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순순히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딱 집어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에 마기휼은 쉽게 꺼낼 수 있는 화제를 입에 담았다.
“여행하신다는 게 안베르였습니까?”
“그렇다네. 왜? 이리로 오면 안 되나?”
“안 될 건 없지만…….”
중얼거린 마기휼은 뒷말을 흐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가게 주인은 아주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리도 큰 덩치에 변종이라는 걸 뚜렷이 알리는 외모인데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너무 티가 나면 안 되는데. 마기휼은 아이작을 흘깃 봤다.
그는 물건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귀걸이를 살펴보고 있었다. 원래도 작은 원석이 커다란 손에 들려 있으니 더더욱 작게 보인다. 그걸 유심히 살피던 아이작은 가게 주인을 쳐다봤다.
“이건 얼마지?”
“250베리입니다.”
되게 비싸네. 나 같으면 저런 거 절대로 안 산다.
그리 생각을 하며 투덜대고 있으려니 아이작이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금화를 꺼냈다. 100베리 짜리였다. 그것 두 개와 10베리짜리 다섯 개를 골라 가게 주인에게 건넸다.
“고, 고맙습니다.”
돈을 받고도 가게 주인은 그리 썩 좋아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손바닥 위에 들린 동전이 굉장히 껄끄럽다는 듯 보던 그는 그걸 슬그머니 아래로 옮겨 놨다. 아이작은 산 귀걸이를 한 손에 쥐고 재차 물건을 살펴봤다.
그러는 동안 마기휼이 먼저 말을 건넸다.
“안베르에서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 그냥 구경을 하러 왔을 뿐이네. 이곳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니야. 곧 떠날 거지.”
“혼자 다니면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습니까.”
재미있다는 듯 아이작의 입가로 미소가 생겨났다. 그는 재차 마기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도 작은 키가 아닌데 그가 저렇게 보면 마치 꼬마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위축됨을 느끼며 입을 꾹 다물자 아이작이 물었다.
“나를 혐오하는 듯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느냐고 묻는 건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이리 불편한 시선을 받는 건 싫은 일이 아닙니까.”
“그렇다 해서 내가 숨어 다닐 필요가 없네. 내 두 다리가 있는 이상 어디를 가는지는 모두 내 자유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 즐거운 일을 포기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지.”
그래. 누구나 그런 말을 할 수는 있지. 하지만 그걸 실행으로 옮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기휼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강한 분이시군요.”
“강한 것이 아니라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걸 누리는 것뿐이야.”
아이작은 꽤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저런 사내라면 어디를 가든지 잘 먹고 잘 살 터였다. 이쪽하고는 다르게 말이다. 마기휼은 손에 들린 편지지를 만지작거렸다. 아이작의 하얀 동공이 그걸 지적했다.
“편지를 쓸 생각이라면 번뇌를 떨쳐버린 후에나 펜을 들게나. 마음의 혼돈은 결국 글에 담기게 되고, 그건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함만 느끼게 하지.”
마치 뭔가를 알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기분이 살짝 처지려 했지만 아이작의 말이 아주 아닌 것도 아니었다. 알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마기휼은 편지 봉투를 조심스레 내려놨다.
아직은 아니었다. 스스로 정리가 된 후에나 연락을 취하는 게 나을 거다.
“편지는 안 쓰기로 마음을 정한 건가.”
“댁이 그렇게 말하는데 쓸 수는 없지요.”
“나 때문에 편지를 쓸 수 없게 된 건가. 그러면 사과의 의미로 이걸 주겠네.”
아이작이 내민 것은 붉은 보석이었다. 투박한 사내의 손바닥과는 어울리지 않는 앙증맞고 귀여운 보석 두 개가 반짝거렸다. 마기휼은 당황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편지를 쓸 마음도 없었습니다.”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 받게.”
“전 귀도 안 뚫었고 무엇보다 장신구를 몸에 다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냥 애인한테나 주세요.”
“애인이라. 차라리 자네가 귀에 이걸 달고 내 애인이 되면 어떻겠나?”
“……네?”
지금 도대체 뭔 소리를 들은 건가 싶었던 마기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쳐다보는 얼굴이 멍했다. 그걸 확인한 아이작의 입술 꼬리가 올라간다.
“농담이었네.”
“아. 그렇겠지요.”
그러시겠지요. 또 그래야만 하는 거겠고요.
마기휼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고 아이작은 손에 쥔 귀걸이를 품 안에 밀어 넣었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눌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아이작은 금세 물러났다.
“난 이만 가 보겠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알면 따라올 텐가?”
“글쎄요. 그건 들어보고 난 후에 결정해봐야겠군요.”
“연방군 감옥소에 간다네.”
감옥소? 의아한 듯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런 마기휼의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듯이 아이작이 부연 설명을 했다.
“친구가 그곳에 있거든.”
“면회하러 가시는 겁니까?”
“비슷한 거네.”
말을 하다 말고 아이작은 눈을 들었다. 이내 덮고 있던 망토를 잡아 아래로 내린 그는 “다음에 봅세.”라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도 빨랐다. 순식간에 사람들 틈에 섞여 멀어지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목에 한 손을 올렸다.
정말 특이한 사람이네. 전에 공항에서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러다가 또 이상한 데서 만나게 되는 건 아니겠지.
“마기휼.”
편안한 자세로 서 있던 마기휼의 어깨로 힘이 들어갔다. 놀라 고개를 휙 돌리자 라울이 보였다. 라울의 눈동자가 굳어 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반사적으로 머리에 한 손을 올리고 어벙한 웃음을 지었다.
“마차 안에 있으라 하지 않았나?”
마치 말 안 듣는 마누라를 타박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돈이 걸려 라울의 신부로 안제크에 팔려 온 것 같은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괜히 그리 느끼는 것일 뿐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말투가 퉁명스럽게 나왔다.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사러 나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차 안에만 있는 건 답답해서 싫습니다.”
“내 말에 따르지 않고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다닐 거라면 지금이라도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해.”
“……알았습니다. 말 들으면 되지 않습니까.”
굴욕을 느낀다 해도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상한 사람들에게 들들 볶이느니 차라리 라울 말대로 얌전히 있는 편이 나았다. 그리 생각을 해도 불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온다.
마기휼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울은 턱짓을 했다.
“올라타라. 요새로 바로 들어갈 거다.”
요새라는 말에 마기휼은 눈을 깜박였다.
“거기에 제가 가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것도 없지.”
하긴, 안 될 것도 없었다. 이쪽이 요새의 비밀을 폭로할 것도 아니고, 어차피 같은 군인이 아닌가. 지금은 북방에 있어도 언제 갑자기 안베르 요새로 이동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소문의 요새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던 마기휼은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그란 원형의 담이 높이 쌓여 있었다. 단순한 벽돌이 아니라 모두가 합금이었다. 간간이 포구도 보이고 중간 지점으로 열릴 수 있는 문도 더러 있었다. 보안도 철저했다. 얼굴을 보면 분명 라울임이 확실했지만 모든 절차를 거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가는 게 허락되었다.
요새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마기휼은 혀를 내둘렀다.
“굉장하군.”
배열이 잘 된 군사형 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도로도 정리되어 있었다. 곳곳에 무기를 장착하거나 탈출을 할 수 있는 비상통로도 만들어져 있고 안쪽으로는 정박해 있는 군함도 더러 보였다. 북방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면적은 적다 해도 질은 이쪽이 훨씬 더 좋은 것 같다.
하긴 노르디아의 수도 안베르에 있는 요새였다. 이 정도 돈 바른 티가 나야 체면이 서겠지.
“이만한 규모라면 세워진 지 하루 이틀이 아니겠는데요?”
“15년의 계획에 걸쳐 설립된 거다.”
그래. 이만하면 그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기는 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문득 다른 의문점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해적 소탕이 주목적입니까.”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기합이 들어간 게 아니냐는 요지로 묻는 거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라울의 날카로운 눈빛은 ‘쓸데없는 소리’라는 타박이 실려 있었다. 마기휼은 알아서 물러났다.
“알았습니다. 알아서 입을 다물지요.”
모처럼 데리고 왔으면 이것저것 알려주면 좋잖아. 나 그렇게 입이 싼 놈이 아니라니까. 속으로 꿍해서 중얼거리는 동안 라울은 그런 마기휼을 쳐다봤다. 아랫입술이 앞으로 주욱 내밀어져 있었다.
난 정말 화가 나. 그리 분명하게 말을 하는 얼굴을 확인한 라울은 고개를 돌렸다.
마차가 다 멈추고 라울이 먼저 내려섰다.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노드만이 바로 다가왔다.
“대령님. 오셨습니까.”
라울을 맞이하는 노드만의 얼굴로 숨겨지지 않는 반가움이 서렸다. 하지만 그것은 뒤를 따라 내려오는 마기휼에 의해 반감되었다. 뒤따라 내린 마기휼은 주변을 둘러봤다. “흐음. 이런 느낌이로군.”이라고 중얼거리는 마기휼을 확인한 노드만은 라울을 쳐다봤다.
“대령님. 저자는 뭡니까?”
“견학이다. 중요치 않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라울의 말에 마기휼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중요치 않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라고 라울이 한 말을 고대로 따라하며 이상한 표정을 짓다가 노드만이 노려보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입을 꾹 다물고 애초에 이상한 표정을 지은 적이 없다는 어필을 하는 마기휼이었으나 이미 노드만에게는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상태였다.
“이곳은 외부인에게 공개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괜찮아. 함부로 발설할 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성가시게 굴지 마라.”
냉랭한 말에 노드만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노드만은 마기휼의 정체에 대해 캐묻는 걸 중단해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노드만의 얼굴 위로 선명한 굴욕이 묻어났다. 그걸 보고만 있는 마기휼도 솔직히 편한 상태가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저 둘이 불화를 겪을 필요는 없었다. 노드만은 이곳을 자신에게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인데, 그냥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될 일이었다. 자신은 그저 불청객일 뿐이니 말이다. 마기휼은 라울과 노드만 쪽으로 걸어갔다.
“저기 싸우지 마. 나는 이만 가 볼 테니까―”
더 말을 하고는 싶었으나 갑자기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 때문에 그리할 수 없게 되었다. 정말 말도 안 되게도 마기휼이 서 있는 곳으로만 굵직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그걸 다 받아낸 마기휼은 순식간에 쫄딱 젖은 상태가 되었고, 눈을 감은 채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인 것은 근처에 있던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호들갑을 떨어 댔다.
“괜찮습니까?!”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당황해하는 군인들의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 물벼락을 마기휼이 아니었다면 라울이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른 거냐며 위를 쳐다보자 3층 쪽에서 정비공이 얼굴을 내밀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수도관을 수리하던 중이었는데 잠가 뒀던 밸브가 새는 바람에―”
황급히 설명하던 정비공은 라울을 확인했다. 굳은 얼굴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미남형의 얼굴은 모를 수가 없었다.
정비공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대령님! 정말 죄송합니다!”
정비공의 사과에 라울은 마기휼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에 모두가 마기휼을 쳐다봤다.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쩌면 좋아.’라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마기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손을 들어 얼굴을 닦아 내며 머리카락을 전부 뒤로 넘긴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군인을 보며 방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물벼락만 맞는구나. 그때보다 조금 더 강도가 세지만,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괜찮아. 난 이런 건 익숙하니까. 그런 느긋함으로 마기휼은 위를 올려다보며 정비공에게 손을 흔들었다.
“괜찮으니 수도관 수리 마저 하십시오.”
솔직히 나니까 참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림도 없었다. 계속되는 괜찮다는 사인에 라울의 눈치를 보던 정비공의 머리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이 라울을 쳐다봤다. 그 순간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대령님도 젖으셨네요?”
지적을 받은 라울은 오른쪽 팔을 쳐다봤다. 어깨부터 소매까지 푹 젖어 있었다. 그걸 확인한 라울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군.”
워낙 마기휼이 젖은 면적이 넓어서 라울에게는 미처 신경을 쓸 수 없었던 이들은 더더욱 경악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금 전 마기휼 때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오바스러운 반응들이었다. 특히 노드만이 심했다. 그는 당장 위를 올려다보며 정비공을 끌고 내려오라 했고 기다렸다는 듯 군인 둘이 움직였다. 이쪽이 대상이 되었을 때에는 형식적이었다 한다면 라울일 때에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당황한다는 게 전해졌다.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만둬라.”
왈왈거리던 군인들은 행동을 멈추고 라울을 쳐다봤다. 라울은 젖은 어깨 쪽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냄새가 나는군. 씻어야겠어.”
“지금 당장 정비공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겠다고? 수리를 하다가 터진 물줄기에 내 옷이 젖었다 해서 그를 처벌할 건가. 정말 그런 짓을 한다면 난 노르디아의 비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령님―”
“되었으니 몸을 씻을 수 있게 준비나 하도록.”
더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라울은 마기휼을 돌아봤다.
“가자.”
잔뜩 젖은 옷을 붙잡고 물기를 짜 내던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저 말입니까?”
“안 씻을 거냐?”
지저분한 녀석.
그리 말하고 싶은 눈동자로 쳐다보는 것에 마기휼은 순간적으로 부아가 났다.
“당연히 씻어야지요. 완전히 젖었는 걸요.”
“그러면 따라와라.”
알았다며 마기휼은 씩씩하게 라울의 뒤를 따랐다. 노드만의 옆을 지나쳤을 때 살벌한 시선을 느낀 마기휼은 기분이 확 상했다.
처음 봤을 때에도 이 자식은 이런 눈빛이었다. 내가 너의 소중한 라울 대령님을 어찌할 것 같으냐? 그런데 어쩌냐. 난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는데 저놈 집안에서는 날 신부로 샀다 이거야. 그리고 저놈은 내가 취향이라는데? 그걸 네가 어쩔 거야? 응?
마기휼은 노드만에게 도발적인 눈빛을 던졌다. 그 날카로운 눈빛에 노드만의 표정이 확 구겨진다. 뭐라 하고 싶어도 라울이 있어 그리 못 할 터였다. 그것 참 쌤통이라며 헤죽거리고 웃는 얼굴이 된 마기휼은 걸음도 가볍게 라울의 뒤를 쫓았다. 안으로 들어온 마기휼은 라울의 옆에 붙어 섰다.
“여기 탕도 있습니까?”
아침에 욕조에 몸을 담갔지만 역시 대형탕이 있는 게 최고였다. 의도치 않았다 한들 씻게 된 이상 탕에 들어갔으면 싶었다. 헤실거리고 웃는 얼굴로 있던 마기휼은 라울의 오묘한 시선을 깨닫고는 “응?” 하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라울은 눈을 내리떴다.
“내가 오늘 한 말은 모두 한 귀로 흘려 넘겼나?”
말을 들어도 마기휼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걸 본 라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조금은 위기감을 가져야 할 것이 아닌가.”
네 몸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라울이 하지 않은 말이 들리는 것 같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마기휼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위험한 상황일지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어찌할 수 없었다. 안색을 굳힌 채로 있던 마기휼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라울은 칸만이 안으로 들어가 몸을 씻고 있었다.
칸막이가 그의 몸통을 가려주고 있다고 한들 튼실한 다리와 팔뚝마저 가리는 건 아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등 뒤로 넘어가고 근육질 팔이 위로 움직였다. 팔을 문지르자 거품이 생겨나는 걸 본 마기휼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탕 속에 얌전히 들어간 그의 얼굴은 긴장이 역력했다.
라울에게 탕이 있느냐고 물은 주제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안 좋은 인식을 심어줄 뿐이다. 라울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을 의식하고 일부러 보란 듯이 가장 먼저 탕으로 들어갔지만 덕분에 전신이 배배 꼬였다. 의식하지 말자 생각을 해도 하게 되는 건 어찌된 연유인지를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전에 한번 알몸을 보인 적이 있었지. 그때 라울은 이쪽이 들어가 있던 칸을 열었다. 굳이 그리할 필요가 없는데도 그리 행동을 취한 건 이상했다.
“설마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내 몸을 보고 싶어서 말이다.
진짜 그런 거라면 완전 짐승인 거잖아?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대번에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막 바깥으로 나오는 라울과 시선이 부딪쳤다. 의도치 않게 튼실한 그의 물건을 다시금 보고야 말았다. 놀란 마기휼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이, 일부러 본 건 절대로 아니야!”
입을 다물자 지나친 적막을 느낄 수 있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그 어색한 침묵을 더더욱 참을 수 없었던 마기휼은 다급히 말했다.
“일부러 본 거 정말 아니라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마.”
그러면 정말 곤란하니 말이다. 내가 네 물건을 보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이건 어디까지나 실수로 쳐야 하는 문제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상한 짓은 하지 마. 네 걸 봤으니 너도 내 물건을 봐야 한다는 그런 이상한 논리를 취하지 말란 말이야.
그런데 묘하게 조용했다.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건가 싶었던 마기휼은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라울이 서 있던 자리가 텅 빈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깜박였다.
“……어?”
어디로 간 거야?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라울은 없었다. 소리가 들려 안쪽을 쳐다보자 바깥으로 통하는 불투명 유리 너머로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설마 다 씻고 가버린 거야?
아무 말도 안 하고?
“―이게 뭐야?”
어쩜 이렇게나 어이없는 일이 다 있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허탈한 듯 헛웃음을 흘리던 마기휼은 주섬주섬 수건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유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거의 다 옷을 다 입은 라울이 보였다.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대충 셔츠를 입고 겉옷을 걸친 라울이 그대로 쏙 나가버리자 마기휼은 재차 헛웃음이 나왔다.
보고 싶으면서 괜히 저러네?
불현듯 드는 생각에 마기휼은 더더욱 기분이 가라앉았다.
라울 저놈이 이쪽을 보든 말든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본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없고 안 본다고 해서 괜히 속이 꼬일 필요도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라며 마기휼은 거칠게 몸을 닦아 냈다.
물기를 다 닦아 내지도 않고 대충 옷을 챙겨 입은 마기휼은 머리에 큰 수건을 덮은 채로 바깥으로 나왔다.
라울은 보이지도 않았다. 혼자 복도에 덩그러니 놓이게 된 셈이었다.
“나 진짜 미치겠네.”
낯선 곳에 데리고 왔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라고 나만 두고 지놈은 쏙 빠져나가는 건데?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던 마기휼은 허리에 한 손을 올렸다.
사령관실로 들어온 라울은 머리를 말리던 수건을 의자에 걸치고 책상 위를 살폈다. 이런저런 보고서가 올려져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물기가 서류 위로 떨어지자 한 손으로 머리를 모두 뒤로 넘기고 눈을 내리뜬 채로 서류를 살폈다.
막 몸을 씻고 와 젖은 채로 있는 라울은 섹시함의 결정, 그 자체였다. 보고만 있는데도 목이 타는 걸 느끼며 노드만은 눈을 내리떴다.
“이곳에 요새가 생겼다는 소문이 돈 것인지 해적의 활동이 뜸해졌습니다.”
“상대적으로 잦게 출몰하는 지역은 어딘가?”
“동쪽과 서쪽입니다.”
라울은 지도를 살폈다. 기다렸다는 듯 노드만은 기다란 막대로 지도 위를 각각 눌렀다. 공통점은 산세가 험하거나 절벽이 있고, 해안가 등이 있었다.
“군함이 뜨면 바로 몸을 숨길 수 있는 자연환경인 건가.”
중얼거린 라울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이들에 대한 토벌은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다른 쪽 문제가 더 신경 쓰였다. 이쪽이 안베르로 오는 도중에 마찰이 있었던 존재들. 엔온의 소속일 것이 분명한 마리아 말이다. 일을 벌인 것 치고는 너무도 순순히 붙잡을 수 있었다. 그것이 영 수상쩍었다.
“마리아에 대한 일 처리는 어찌 되었나?”
“연방국 감옥소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소라. 생각보다 절차가 빨리빨리 진행된 모양이었다. 더 말을 해보라는 듯 보자 노드만은 자세를 번듯하게 취했다.
“일단은 독방을 주었습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것인지라 어떤 대우를 해야 할지 그쪽도 파악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알게 모르게 노드만의 얼굴 위로 혐오가 떠오른다. 두 개의 성별을 지닌 존재에 대한 혐오였다. 원래 변종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는 그였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태도를 취하면 좋지 않다고 누누이 말해도 바꾸지를 않으니, 이제는 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라울은 다른 서류를 건드렸다.
“그런데 그 사내는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괜찮으십니까?”
안 들리는 척 라울은 계속 서류를 뒤적였다. 사람이 눈치가 있으면 거기서부터 더 말을 말아야 했는데 노드만은 그렇지 않았다.
롤모델로서 존경하고 흠모하는 라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마기휼의 존재가 눈엣가시였다. 그의 정체를 확실하게 하지 않는 이상 두 다리를 쭉 뻗고 편히 잠을 잘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설마하니 이 요새로 데리고 오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안 될 것도 없지. 그는 군에 있었을 때에도 늘 50위 안에 들던 우수한 군인이야.”
“하지만 그 태도가 천박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자가 대령님 곁에 있다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겁니다. 대령님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는 자네는 나와 어울리는 사람인가?”
조금 더 마기휼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예리하게 파고드는 말에 노드만 중령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설마하니 라울이 그리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시선을 던졌다.
“저기. 저는…….”
“농담으로 하는 말이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게.”
성의 없이 그리 말을 한 라울은 재차 서류를 뒤적였다. 이미 이쪽은 관심 밖이라는 듯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는 태도였다. 별처럼 높은 존재인 라울이 자신을 신경 쓸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래도-.
바로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라울은 들어오라 짤막하게 말했고 이내 문이 열리고는 군인이 들어왔다. 라울을 향해 경례를 한 자는 팔을 내리며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보고를 했다.
“대령님. 2분 전 감옥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동쪽 관문에서 갑자기 폭발이 일어났고, 모두가 혼란한 틈을 타서 죄수 마리아가 탈주했다 합니다.”
“뭐라고?”
바로 고개를 든 라울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살벌함이 감도는 시선에 군인은 놀라 숨을 삼켰다.
“누가 탈주를 해?”
“죄, 죄수 마리아가 탈주했다 합니다.”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나왔다. 마리아의 탈주가 이쪽 잘못이 아님에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눈을 내리뜬 군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라울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놨다.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에 당황한 노드만이 그 뒤를 쫓았다.
“대령님. 어디를 가십니까?”
부름에도 반응이 없다. 내가 갈 길을 가겠다는 듯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라울의 등 뒤로 분노가 드러났다. 쉽사리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죄수가 탈주를 했다지 않나. 마리아라니. 그 여자가 마지막까지 사고를 치는군. 역시 붙잡은 순간 사살해야 했다며 노드만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찾았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노드만은 날카로운 외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막 계단에서 뛰어 올라오는 마기휼이 보였다.
마기휼의 손가락 끝은 정확히 라울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치사한! 이런 곳에 나 혼자 두면 어떻게 합니까?!”
치사하다고? 그게 지금 대령에게 할 법한 말인가? 그보다 감히 라울에게 손가락질을 하다니.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노드만 중령은 그리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노드만이 마기휼에게 지엄한 철퇴를 내리려 하기도 전에 라울이 움직였다.
라울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마기휼의 손목을 잡아챘다.
“억?”
마기휼이 내는 이상한 소리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갔다. 마기휼의 팔을 잡고 사라지는 라울의 모습이 망막에 또렷이 박힌 노드만은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라울을 보자마자 소리를 치긴 했지만, 실상 그리 화가 난 상태는 아니었다. 그를 찾아 많이 헤맨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저 생색을 내고 싶었다. 그런데 라울이 손목을 붙잡고 질질 끌고 갈 줄은 또 몰랐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던 마기휼은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군용차를 봤을 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자, 잠깐만!”
웬만큼 시급한 일이 아니라면 사용하지 않는 군용차였다. 타고 온 마차도 있는데 굳이 차를 움직이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라울의 태도도 그렇고, 기다렸다는 듯 입구에 서 있는 군용차도 그렇고, 주변 군인들의 굳은 얼굴 등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던 마기휼은 다리에 힘을 주고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라울은 아랑곳없이 팔을 당겼다.
마기휼은 군용차 뒷좌석으로 던져졌다.
“우왓!”
얼굴부터 떨어진 마기휼은 보기 흉한 몰골로 엎어졌다. 하지만 그런 그가 방해된다는 듯 마기휼의 엉덩이를 잡아 안으로 주욱 밀어버린 라울이 그 옆에 앉았다.
라울의 손이 엉덩이에 닿은 것도 그렇고, 그가 옆자리에 앉은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마기휼은 황급히 일어나 라울을 쳐다봤다. 정면을 응시한 라울은 한마디 했다.
“당장 감옥소로 간다.”
운전병은 토 다는 일 없이 바로 차를 몰았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마기휼은 몸에 들어간 힘을 뺐다. 뱅글뱅글거리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 머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야.”
“마리아가 탈주했다는군.”
마기휼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눈을 크게 뜬 마기휼은 라울 쪽으로 얼굴을 내민 채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어안이 벙벙해 묻는 말에 라울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래.”
“말도 안 돼.”
너무도 엄청난 말을 들어버려서 그 외에는 달리 할 말도 없었다. 마리아의 면회라도 가 봐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만 했지, 그녀가 탈옥을 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마기휼의 부정은 계속되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사실이니까 쓸데없이 소리치지 마라.”
귀가 아프니까. 그런 뉘앙스였다.
하지만 마기휼은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믿기지가 않아.”
“나는 농담이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마리아는 탈주한 거다. 다음에 붙잡히면 그 자리에서 사살감이야.”
“…….”
정말 살벌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뭐라 할 수 없는 건 그리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탈주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감옥 안에 가만히 있었으면 형량이 줄어들기라도 했을 텐데.
표정이 굳은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고, 젖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반사적으로 그걸 뒤로 넘겼다.
“정신 사나우니까 머리 묶어.”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던 마기휼의 손가락이 움찔하고 떨렸다.
방금 들은 말이 도대체 뭔 쉰 소리인가 싶었다. 마기휼은 라울을 봤지만 그는 이쪽을 아예 무시할 속셈인지 정면만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야? 아니, 머리 묶는 건 자율에 맡겨야 하는 거 아니야? 이제는 머리 묶는 것 가지고도 왈가왈부할 셈인가? 진짜 너무하네.
속으로는 오만 가지의 생각을 하면서도 마기휼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머리를 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