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7)

#6

군함의 사용 기간과 용도를 작성하던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대령님?”

작성하다 말고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라울의 행동에 노드만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부름에도 라울은 한동안 뒤를 돌아본 채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눈을 내리뜬 채로 있던 그는 금방 펜을 놀리고는 그걸 노드만에게 건넸다.

“마리아 일당은 제대로 넘겼나.”

“네. 그들의 조사는 앞으로 중앙지부에서 맡아 처리될 겁니다.”

“조사를 하는 중에 내 증언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협력하겠다고 전해라.”

“그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대령님께서 더 신경 쓸 일은 없으십니다. 달리 해야 할 일도 많으신 대령님이 아니십니까?”

라울은 노드만을 흘겨봤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 가득히 충성심이 넘쳐흘렀다. 이렇게 보면 나쁜 자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쪽에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열의는 인정할 만했다. 하지만 성가셨다.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말을 더 섞고 싶지 않았던 라울은 몸을 돌렸다.

열린 군함으로 군인들과 정비사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이쪽도 도착하게 되어 달리 할 일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쪽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 틈을 타서 마기휼은 도망을 쳤을 수도 있었다.

……뭐, 그가 도망을 친 것이 큰일인 것은 아니었다. 그냥 간단하게 무시를 해도 되었다. 그런데 신경 쓰이고, 묘하게 거슬렸다. 제대로 잡아 두고 있었어야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라울 대령님.”

부름에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긴 수염을 지닌 중년의 사내를 확인한 라울은 가벼운 눈인사를 보냈다.

“소장. 군함이 망가진 곳은 없지만 프로그램을 잘 살펴봐줬으면 좋겠군.”

“물론입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그런데―”

소장은 말을 하려다 말고 주변을 살폈다.

눈치를 보는 듯한 그 모습에 라울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라우젝 님께서는 돌아가신 겁니까?”

순간 라울의 한쪽 눈꼬리가 파들 하고 떨렸다.

“형님이 여기에 오셨나?”

“만나보지 못하신 겁니까? 대령님께서 돌아오는 모습을 가장 먼저 봐야겠다고 저곳에서 버티고 계셨습니다.”

소장이 가리키는 곳은 군함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착함하기 전에 주변을 살폈던 라울이었지만 라우젝을 보지는 못했다. 자신을 보러 왔다면서 얼굴도 비치지 않고 사라지는 건 이상했다. 게다가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던 라울은 “설마.” 하고 중얼거렸다. 이상한 라울의 모습에 소장이 의아한 듯 눈을 깜박였다. 그런 그의 뒤로 군인이 다가왔다.

“대령님. 보고를 드려야 할 것이―”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난 이만 들어가 보겠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딱 자르며 그냥 가버리는 모습에 소장도 그렇고 보고를 하러 온 군인도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멍하니 있는 사이 저만치 가버린 라울은 근처를 지나치는 군용차를 세우기 위해 한 손을 들었다.

인생이 물이라 한다면 지금까지는 언제나 늘 잔잔한 수평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서 거센 물결이 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가 물그릇을 잡고 마구 흔들어 대는 게 아닐까 싶었다. 설마하니 아버지의 죽음 이후 이런 일이 생기다니. 하나가 정리되었다 싶으면 다시금 생기는 문제 상황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반응하면 되는 건가 싶었다. 그보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대체 뭔가 싶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었던 마기휼은 살짝 감은 눈을 떴다. 그러자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 둘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아까 봤던 것 같은 아이 둘이 활짝 웃었다.

“…….”

내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이 빌어먹을 상황이 이상한 건지를 모르겠다.

마기휼은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여지없이 비슷하게 생긴 얼굴의 아이들이 활짝 웃었다. 그 그늘 없는 미소를 보는 순간 마기휼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이 모두 일어났다.

“어디를 가시게요?”

“그러지 말고 그냥 앉으세요.”

“곧 마담이 오실 거예요.”

“앉아서 편히 쉬고 계세요. 마담이 오실 때까지 다른 곳에 가지 마시고요.”

“그래요. 다른 곳에 가시면 안 돼요.”

“마담이 오실 때까지 당신은 여기에 있어야 해요.”

기다렸다는 듯 말을 해 대고 있지만 그중에서 겹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보다 비슷하게 생긴 여자, 남자아이들이 달라붙어 병아리처럼 쨍쨍거리는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징그럽고, 소름이 돋았던 마기휼은 당장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만두지 못해?!”

소리를 치자 마기휼 쪽으로 손을 뻗던 아이들이 주춤거렸다. 맑은 눈망울로 이쪽을 쳐다보는 아이들을 노려보며 마기휼은 언성을 높였다.

“가만히 앉아 있어! 제발 조용히 있으란 말이야! 난 지금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

미친 꽃돌이에게 납치를 당하고 이상한 곳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갑자기 억지로 씻겨지고 이 우습지도 않은 치렁거리는 옷을 입게 되었다. 머리도 제멋대로 높이 틀어 묶었고 화장도 하려는 걸 필사적으로 거부해서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완전 인형놀이의 실험체가 된 것 같았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음을 인지하고는 있으나 그걸 거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장난을 쳐 대는 놈하고는 모종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이 꼬여도 어쩜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남의 인생을 마구 주물러 대는 것 같았다. 기운이 빠진 마기휼은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재차 손안에 얼굴을 묻는 마기휼의 전신으로 암울한 공기가 감돌았다. 아이들은 재차 마기휼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아름답게 생긴 15세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무릎을 꿇고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은 굉장히 묘했다. 호러틱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아이들밖에 없었다. 일단은 아쉬운 대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긴 한숨을 토해 낸 마기휼은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아이들을 내려다봤다.

“여기가 어디라고 했지?”

“안제크의 본가에요.”

“본가라고? 그러면 여기가 라울 대령의 집이라는 거지?”

“라우젝 님의 집이기도 하고 마담의 집이기도 해요.”

“라우젝은 라울의 형님이고, 마담은 라울의 고모님이고. 그렇지?

“네. 맞아요.”

“훌륭하세요.”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은 아이들이 손뼉을 쳤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마치 어린애를 칭찬하는 듯한 그 행동들에 마기휼은 웃었다.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던 것도 잠시 그는 이내 소파의 팔걸이를 마구 두드려 댔다.

“이게 아니야!”

이런 어린애 말장난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단 말이야. 내가 원하는 건 보다 더 정확하고 명확한 정보란 말이야.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면 차라리 말을 말란 말이야. 그보다 너희들 지나치게 얼굴이 비슷해! 다섯 쌍둥이나 되는 거냐?

이제는 모든 것이 화가 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화가 난 것을 숨기려 들지 않는 마기휼의 모습에 아이들의 눈이 댕그랗게 떠졌다. 그 얼굴에 아뿔싸 싶었다. 설마하니 겁을 먹은 건 아니겠지. 괜히 어린애들을 위협한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던 마기휼은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풉-.”

풉. 이라고?

들리는 소리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 마기휼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동시에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 재미있어!”

“재미있다! 정말 재미있어!”

말뿐이 아닌지 아이들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가며 웃어 재꼈다. 그늘 없이 활짝 웃는 얼굴은 확실히 사랑스러웠다. 마치 그림 속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으나 지금 마기휼은 심적으로 그리 여유가 넘치는 상태가 아니었다. 때문에 혈압이 급속도로 상승했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했다. 어린애들이었다. 비록 지금까지 계속 크게 웃는다고 해도 말이다. 어린애를 상대로 화를 내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참자. 참아야 한다.

……그런데 더는 못 참겠다.

“이 망할 꼬맹이들!”

“꺄아악! 화낸다!”

기다렸다는 듯 아이들은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똑같은 얼굴이라 어떤 걸 먼저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숨바꼭질하듯 방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러다가 이내 자기들끼리 손짓을 해댔다.

“이리로 와. 이리로 와야 해. 어서.”

눈치를 살피던 아이들이 그리로 달려갔다. 이쪽이 잡으려 하면 다시 사방으로 흩어질 게 뻔했다. 지금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던 마기휼은 저 많은 아이들을 일일이 붙잡으러 다닐 수 없었다. 때문에 아이들이 알아서 이리로 오게 할 필요가 있었다. 마기휼은 아이들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네놈들 정말이지. 내가 마냥 사람 좋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크나큰 착각―”

“꽤나 즐거워 보이는군.”

예고 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마기휼은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라우젝을 발견했다.

그는 옆으로 눈을 흘겼다. 그러자 방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아이들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서로 눈치를 보던 아이들은 슬그머니 한 곳으로 모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라우젝을 지나쳐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뛰어나가는 모습에서 그들이 라우젝을 두려워한다는 걸 깨달았다.

문이 닫히자 라우젝은 코웃음을 쳤다.

“정말 악취미라니까.”

무엇이 악취미라는 걸까. 마기휼이 보기에는 라우젝이 이쪽을 납치하려 할 때 쓴 그 사내놈들 또한 충분히 악취미였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운 놈의 등장이었다. 마기휼은 경직된 얼굴로 라우젝을 쳐다봤다. 라우젝도 마기휼을 위, 아래로 흩어보더니 이내 만족한 듯 한쪽 입술 끝을 올렸다.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모습이로군.”

그 나아진 모습은 네가 멋대로 만든 거잖아. 이쪽 의사도 묻지 않고 멋대로 씻기고, 입히고, 머리도 다시 묶고 말이야. 땋은 머리는 내 트레이드마크라고. 내가 그 머리 모양을 몇 년이나 고수했는지 알기나 하는 거냐?

되기만 하면 당장 멱살을 잡고 싸대기 왕복으로 100대만 날리고 싶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마기휼과 달리 그런 그를 흘겨보는 라우젝은 태연함 그 자체였다.

“왜 그런 얼굴이지? 앉아.”

그래. 앉아야겠지. 진정하자며 스스로를 다독인 마기휼은 소파에 앉았다.

상대에 대한 반발심이 있는데도 라우젝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라울의 형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형이라니. 저 얼굴이 어떻게 형이 될 수 있는 거지. 딱 봐도 어리잖아. 기껏해야 17, 8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왜? 내가 지나치게 젊어 보이나?”

생각하고 있던 걸 지적받게 되자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었다.

다소 곤혹스러운 듯 눈을 굴리던 마기휼은 돌려 넌지시 물었다.

“라울의 형님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맞아. 난 라울의 형님이야. 그런데 그보다 젊은 건 병 때문이야.”

병이라고? 나이에 따라 성장하지 못하는 병이라도 걸린 건가?

생각하던 것에 대해서 물을 수 없는 것은, 돌아올 파장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사람 좋은 듯 미소를 짓는 라우젝이었으나 수틀리면 불현듯 인격이 변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몇몇 보기도 했고 말이다.

이만한 대귀족에 왕통이라잖은가. 그런데 성장을 하지 못하는 거다. 때문에 외부 활동을 라울이 다 책임지고 그의 형님은 저택에 늘 상주 중인 상태로 있어야 하는 거였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프라이드의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닐까. 딱 보기에도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가능하면 그가 예민한 반응을 취할 만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라우젝이 물어 왔다.

“그보다 바깥에서 우리 고모님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할 거야?”

순간적으로 마기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썩 좋다 할 수 없는 얼굴이 되는 마기휼을 앞에 두고 라우젝은 말을 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오르베. 안베르 내에서는 꽤나 유명한 여자야. 원하는 일은 어떻게든 밀고 나가는 야심가인 동시에 독하지. 아무나 쉽게 그녀를 상대할 수 없어. 만약 네가 그녀와 마주치게 된다면 너는 바로 발가벗겨져서 라울의 침대 위에 던져지게 될 거야.”

마기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듣기만 하는데도 당장 그리될 것 같았던 마기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저, 저는 남자입니다.”

“알아. 딱 봐도 남자 같더군. 하지만 다른 게 있겠지. 그렇기 때문에 오르베가 널 선택한 게 아니겠어?”

마기휼의 눈동자가 굳어진다.

역시나 이 소년 같은 외형의 사내는 만만치가 않았다. 정말은 모르고 있는 듯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신에 대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을 거다.

신체의 비밀. 남자인 주제에 임신할 수 있다. 그걸로 인해 설마하니 이런 곤란한 일을 겪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 해서 이런 상황을 질질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쉬운 길을 선택해서 가려 했지만 그리할 수 없게 된 마당에는 정면 돌파밖에 방법이 남지 않았다.

마음을 다독인 마기휼은 차분히 말했다.

“20만 베리는 제가 다른 방법으로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제가 이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녀가 돈이 아쉬워서 이러는 줄 알아?”

라우젝은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비웃듯이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이라도 당장 너희 집안에 100만 베리를 더 던져줄 수 있어. 그러면 그것도 다 네 빚이 되겠지.”

마기휼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지극히 어색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희 집안사람들이 그 돈을 받지 않을 것 같나?”

재차 마기휼의 얼굴이 굳어졌다. 웃는 얼굴이 지극히 어색했다.

딱 보기에도 마기휼은 심적으로 타격이 간 상태였다. 그런 그의 속을 더 긁어 내버리겠다는 듯 라우젝은 비열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모르겠어? 너는 이미 팔린 거야. 너희 집안사람들은 널 팔아서 자신들의 안위를 선택한 거야. 너 하나를 넘겨서 더 많은 돈을 얻으면 그들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 될 뿐이지.”

“……….”

아니라고 단언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억울하고 화가 났다.

어색한 마기휼의 얼굴을 바라보며 라우젝은 말했다.

“사람을 믿지 마. 가족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혈연일 뿐이야. 그렇다 해서 그 사람이 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나만을 100% 생각해주는 것도 아니야. 결국에는 세상은 혼자이고, 스스로 판단을 내려 곤란한 상황을 벗어날 수밖에 없어지는 거지.”

마기휼은 웃었다. 지금 당장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뭐라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마기휼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나른한 자세로 앉아 라우젝을 바라봤다.

“본론부터 꺼내십시오.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시는 겁니까.”

“라울이 아닌 나를 선택하는 게 어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라울 말고 내가 좋다고 하란 말이야. 빚을 갚으며 사내의 곁에 있을 거라면 내가 더 낫지 않겠어? 라울의 곁에 있어 봤자 자존심에 타격만 입을 따름이야. 남자라는 성별을 넘어서 라울은 정말 완벽한 인간이거든. 그런 사람 앞에 있으면 괜한 굴욕감만 느낄 따름이야. 그러니까 내 옆에 있으면서 재미있게 지내자.”

다리를 꼬고 앉은 라우젝은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바라보는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이쪽이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순간 마기휼은 상대적으로 편안해졌다. 이 사내의 이 알 수 없는 움직임. 그 근본에 깔린 걸 알 것 같기도 했다.

“당신도 라울의 곁에 있으면서 콤플렉스를 느끼는 게 아닙니까.”

“……뭐?”

미소를 짓던 라우젝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표정이 된 라우젝의 주변 온도가 순간적으로 -10도로 내려간 것 같았다.

그는 무서운 인간이었다. 화가 나게 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음을 알고는 있지만 이놈의 입이 말썽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냥 저 하고 싶을 대로 말이 나오는 것을 말이다.

마기휼은 입을 다물었고 라우젝은 그를 노려봤다. 극한의 분노를 느끼는 듯 눈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소파의 손잡이 부분을 그러잡는 손끝으로 힘이 들어갔다. 입술을 씰룩이나 싶던 라우젝은 벌떡 일어났다. 놀란 마기휼은 잽싸게 뒤로 몸을 물렸다. 하지만 일어서기만 할 뿐 라우젝은 손을 대지 않았다. 마기휼을 노려보다가 당장 몸을 돌렸다. 탕-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우와. 겁나게 무섭네.”

정말 무서웠다. 차라리 징그럽게 변형이 된 괴물 생명체를 앞에 두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곡을 제대로 찌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기보다 잘난 동생을 둔 형의 마음이야 뻔한 게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본인의 능력 차이가 아닌, 몸이 자라지 않는 어찌할 수 없는 이유 때문이라면 말이다.

마기휼은 주변을 둘러봤다. 흠 하나 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꾸며진 방 안. 그리고 이쪽은 쉽사리 만날 수 없는 왕통의 대귀족들. 다른 이들이 보기엔 한없이 완벽하나 실상은 이런 건가 싶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눈을 내리뜬 마기휼은 몸을 일으켰다.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막 일어서려던 찰나 들려오는 미성에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서 있는 도발적인 매력을 풍기는 미인을 발견한 마기휼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전체적인 느낌이 말쑥했고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강렬했다. 오른쪽 뺨 가운데에 있는 점이 그녀의 분위기를 더 독특하게 만들었다. 몸매도 좋고, 미소 짓는 얼굴에서 전달되는 느낌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껄끄러운 느낌을 풍기는 여성이었다.

느릿하게 걸어와 마기휼의 앞에 선 여성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안녕하세요? 전 오르베라 합니다.”

“……마기휼이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상대가 먼저 소개를 했기 때문에 이쪽도 한 것일 뿐이었다. 그것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알고 있다는 말을 하는데 바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져 입을 다물었다.

맞다. 라우젝이 바깥에서 이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했었지. 그래도 그가 나가자마자 들어올 줄은 몰랐다. 이렇게 빨리 문제의 인물과 마주치게 될 줄이야.

오르베는 조금 전까지 라우젝이 앉아 있던 의자에 앉으려다 말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소파를 빤히 응시하나 싶던 그녀는 마기휼을 쳐다봤다.

“이 의자에 그가 앉았었나요?”

그라니? 이내 라우젝을 칭하는 거라는 걸 깨달은 마기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치우세요. 그리고 저 의자를 끌고 오세요.”

오르베가 가리키는 것은 이인용 소파였다.

이미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있는데도 왜 굳이 바꿔 달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부터 오르베의 포스에 눌린 마기휼은 토 달지 않고 바로 행동을 취했다. 우선 라우젝이 앉았던 소파를 치우고 안쪽에 있던 소파를 끌고 왔다.

양탄자가 있어 끌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들 수도 없었다. 끙끙거리며 간신히 소파 옮기기에 성공한 마기휼은 땀이 난 이마를 손바닥으로 훔쳐 냈다. 오르베는 마기휼이 끌고 온 소파에 앉고는 그 위에 한 손을 올렸다. 한쪽 입술 꼬리를 올린 채로 마기휼을 쳐다봤다.

“한결 좋군요.”

“……다행이군요.”

특이하군. 가장 먼저 그 생각이 들었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힘부터 쓰게 된 마기휼은 오른쪽 팔을 살살 흔들었다. 서 있는 그를 바라보나 싶던 오르베가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시지요.”

“고맙습니다.”

왠지 이 여자 앞에서는 예의 바르게 굴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는 편이 이야기를 풀어내기가 훨씬 더 수월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판단한 걸지도 몰랐다. 마기휼은 의자에 앉아 재차 이마를 닦아 냈다.

“눈동자가 아름답군요.”

이마에 닿아 있던 손이 움찔하고 떨렸다. 손을 떼지 않은 채로 마기휼은 오르베를 바라봤다. 보랏빛 눈동자를 확인한 오르베는 만족한 듯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듯싶으나 보면 볼수록 좋네요. 말끔해요. 그리고 체형도 나쁘지 않고 성격도 괜찮은 것 같고요.”

이 여자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품평회 왔냐?

살짝 표정이 일그러지려던 찰나 오르베의 미소가 한결 진해졌다.

“불만이 있어도 속으로만 구시렁거릴 법한 그 비굴함도 나쁘지 않아요.”

“……….”

그저 예쁘기만 한 여성이 아니란 말이지. 꽤나 예리하고 빈정거릴 줄도 아는 여자였다. 마리아에서부터 이 오르베라는 여자까지. 최근 여자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기가 센 건가. 아니면 자신의 주변에 모이는 여자들이 유독 강한 건가.

말장난은 애초에 쓸모가 없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가장 현명한 일이 될 터였다. 자세를 바로잡은 마기휼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당신이 저희 집안에 돈을 빌려주신 걸로 압니다.”

“레나는 전부터 친분이 있던 아이였어요. 영리하고 자기주장이 강했지요. 그러면서도 상황 파악이 빠르고 적응도 잘 하는 아이였어요. 그러니까 그런 곳에서도 잘 버텼던 거예요. 그래야지만 자신의 딸을 확실히 보호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한 거겠지요.”

그런 곳이라니. 자신의 집안을 굉장히 질 나쁘게 칭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당장 화를 낼 순 없었다.

“도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곤란한 상황이 생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곤란한 상황은 앞으로 생기게 될 문제예요. 돈은 한번 빌리면 또 빌리게 되어 있는 법이니까.”

마기휼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기분 나빠하는 마기휼이었으나 오르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장은 급한 불부터 끈 거예요. 하지만 당신 아버지가 어디서 어떤 식으로 돈을 빌렸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연락이 닿았을 때에는 잠자코 있지만, 아버지가 죽고 연락이 닿지 않게 된다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타나서 돈을 갚으라고 들겠지요. 그리고 당신 가족들은 재차 나에게 손을 벌리려 들 거예요. 이미 당신 하나를 담보로 잡아 20만 베리를 빌려 갔으니 더한 걸 요구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 판단할 거예요.”

머릿속이 멍멍해지고 있었다.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점점 사라진다.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더한 요구라니…….”

“당신이 아이를 가지면 안제크가의 후손이 태어나는 게 아닙니까. 20만 베리는 우습지요.”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 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사이에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역시나 이 여자는 알고 있었던 건가.

마기휼은 오르베를 노려봤다.

“전 사내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질 수 있어요.”

단정적으로 하는 말에 마기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다 알고 있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로 인해 새삼스럽다거나 놀라움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걸 열외로 치고라도 지금 여자가 하는 행동 자체는 비상식적이었다.

그래.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라 치자. 그렇다고 라울과 이어주려고 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알아주는 왕통에 대귀족. 군에서 확실하게 밀어주는 젊고 능력이 되는 군인인 데다 여왕의 오른팔이 될 거라는 말까지 도는 전도유망한 청년이 바로 라울이었다. 어쩌면 여왕의 부군이 될 수 있는 그의 신부가 나처럼 집시의 피를 지닌 돌연변이 사내라고 한다면 잘도 사람들이 좋아하겠다.

이 여자 미친 걸까? 아니면 무료함이 지나쳐 한번쯤 사고를 치고 싶어진 걸지도 몰랐다. 속이 뒤틀린다. 자연스럽게 그게 말투로 표현되었다.

“저를 라울과 엮으려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라울은 완벽한 사내입니다. 그가 저를 안을 일은 없고, 제가 아이를 가질 일도 없을 겁니다.”

라울이다. 그자가 남자와 섹스를 할 것 같나? 말도 안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런 걸 요구하는 순간 무시무시한 얼굴이 될 것이 분명했다. ‘미친 거 아닌가?’라고 한마디 하면 다들 벌벌 떨 주제에 너무 제멋대로였다.

“당사자들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고 멋대로들 행동을 취하는 게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겁니다.”

“말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바라보는 오르베의 눈초리가 이상했다. 뭔가를 바라는 듯한 눈길이었다. 기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그럴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녀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없었다.

그녀는 큰 착각에 빠져 있었다. 마기휼은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라울입니다. 그만한 사람이라면 저 말고 더 대단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설령 제가 아이를 가진다 해도 당신은 그걸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까? 라울이 남자와 관계를 맺어 태어난 아이를 정당한 후계로 인정할 수 있습니까?”

일단은 이 여자를 설득해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마기휼의 태도는 절박해졌다.

“돈은 제가 알아서 벌어 갚도록 하겠습니다. 20만 베리. 한 몇십 년만 미친 듯이 일을 하면 벌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

“돈을 다 갚으면 당신 가족들에 대한 면죄부가 되나요?”

예리한 지적에 마기휼은 주춤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르베는 재차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다.

“아버지가 그리된 것을 막지 못했던 당신의 죄책감을 덜어 낼 수 있는 건가요?”

눈을 내리뜬 오르베는 붉은 입술 꼬리를 올렸다.

굉장히 비열하고 기분 나쁜 미소였다. 왜 그녀가 저런 말을 하고 저렇게 기분 더러운 눈빛을 던지는지 모르겠다. 돈 좀 빌려줬다고 해서 남의 집안 문제에 끼어들어도 되는 건 아니었다. 남의 일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마기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런 질문 당신에게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돈을 빌린 건 레나가 아니라 가휼이었어요.”

오르베는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등 뒤로 넘겼다.

마기휼은 바라보는 그녀의 눈썹이 위로 사악 올라갔다.

“당신 동생이, 당신을 담보로 돈을 빌린 거였단 말입니다.”

오르베의 앞에 있는 마기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눈에 보일 정도로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오르베가 하는 말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있던 마기휼은 침묵했다. 그 시간이 꽤 오래갔다. 그러더니 간신히 마기휼의 입이 열렸다. 나온 것은 부정의 표현이었다.

“거짓말.”

“진짜예요. 돈을 빌리러 온 것도 당신 동생이 먼저이고, 내가 무엇 때문에 그리해야 하느냐고 묻자 당신에 대해서 먼저 말을 했어요. 그래서 흥미가 생겼지요.”

오르베는 웃었다. 남의 불행을 앞에 두고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되레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녀 같은 여자였다.

오르베를 바라보는 마기휼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했다. 보랏빛 눈동자 안쪽이 젖어들어 간다. 그걸 확인한 오르베는 짤막한 코웃음을 쳤다.

“정답이었네요.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상황이에요. 덕분에 즐겁네요.”

오르베는 천천히 일어섰다. 손을 마주 잡은 그녀의 입가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돈은 당신이 알아서 갚도록 하세요. 하지만 애초에 제가 가진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들 중 하나는 마기휼이 라울의 아이를 낳는다-가 첨부되어 있답니다. 아무래도 제가 더 자세한 요구 사항이 적힌 서류를 보관하는 게 맞는 거잖아요?”

말을 하는 붉은 입술만 보였다.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 동생이? 가휼이었다고? 그가 나서서 돈을 빌리고 나에 대해서 말을 한 거였다고? 그 가휼이? 그렇게나 나를 따르고 좋아했던 가휼이-.

‘형님.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가휼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눈동자가 괴롭게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미안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죄책감이 섞인 눈동자였던 것인가.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믿고 싶지 않고, 인정하기도 싫었던 일이 이렇듯 밝혀지게 되니,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마기휼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마기휼을 내려다보던 오르베가 그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하얀 손이 마기휼의 뺨에 닿았다.

“가엽게도. 하지만 괜찮아. 여기도 나름 나쁘지 않은 곳이야. 지루할 틈이 없는 곳이지.”

가늘게 휘어지는 붉은 눈동자 안쪽으로 만족감이 서린다. 이대로 마기휼이 자신의 손 안에 들어왔다고 자신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이 마기휼의 어깨에 내려온다. 고개를 숙여 마기휼의 뺨에 입술이 닿으려던 찰나 찬바람이 느껴졌다.

오르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활짝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라울을 발견해냈다. 막 돌아온 것을 알려주듯 여전히 군복 차림인 그의 굳은 얼굴을 확인한 오르베의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라울. 돌아온 거니?”

미소를 짓는 오르베를 응시하더니 이내 마기휼을 내려다본다. 고개를 숙인 마기휼은 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라울은 오르베를 노려봤다.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오르베는 허리를 세웠다.

뒤로 한 발 물러난 그녀는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눠봐야겠구나. 이미 서로를 알고 있겠지만 한번 소개할까. 마기휼, 라울이야. 그리고 라울, 이 사람이 마기휼이란다. 그가 바로 네 신―”

“그는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입니다.”

오르베의 말을 중간에서 자른 라울은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저를 살려준 인물입니다. 그에 합당한 예우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오르베의 앞에 멈춰선 라울은 눈을 내리떴다.

차가운 시선에 오르베의 미소가 사라진다. 라울을 노려보던 그녀는 지금 막 기억났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도 들은 것 같구나. 이리로 오는 동안 네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이야. 하지만 너는 강한 사람이잖아. 이자가 도움을 줘서 문제가 더 복잡하게 되었던 거 아니니?”

웃으며 던진 말에도 라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눈에 힘을 준 채로 쳐다보는 모습이 참으로 차가웠다. 그 모습에 이내 오르베는 짜증을 냈다.

“왜 농담을 건네면 그걸 받아주지 않는 거야? 정말 재미없는 사내가 되었구나.”

“고모님은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는 분이 되셨고요.”

“쓸데없는 짓이라고?”

오르베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네가 감히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다니. 그리 따져 묻고 싶은 얼굴을 하던 것도 잠시, 오르베는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그는 침울해하고 있었다. 그걸 본 그녀는 입술을 씰룩였다. 이만 되었다며 손을 들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두 사람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문제인데 내가 나서서 부아가 난 모양이로구나. 방해꾼은 이만 사라져줄 테니 너희끼리 알아서 잘해보려무나.”

오르베는 라울을 어깨로 밀며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라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괜히 건드렸다가 뒷걸음질을 쳐야만 했던 오르베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결국 그녀는 라울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탕-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라울은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작은 머리가 보였다. 굉장히 침울해하고 있었다.

“괜찮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반응을 취하며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같은 식의 말도 할 수 없어졌다. 마기휼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있을 따름이었다. 그걸 보던 라울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편하게 몸을 기댄 그는 다른 쪽을 쳐다봤다.

실은 마기휼은 지금 혼자 있고 싶었다. 이렇게 침울해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마기휼은 이 자리가 거북했다. 나가 있을까. 그랬다가 저 오르베라는 여자를 다시금 만나게 되면 어쩌나 싶었다.

마기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이쪽을 보고 있던 라울과 눈이 마주쳤다. 솔직히 눈이 마주칠 때에는 당황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가 싶어 멍하니 있는 동안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됐다.”

이상했다. 라울의 사과를 듣는 순간 마음이 풀렸다. 동시에 머리가 아주 조금 맑아졌다. 가만히 있나 싶던 마기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상한 가족들이로군요.”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군.”

저걸 그냥 특이한 걸로 생각할 수 있는 걸까. 그쪽은 그럴지 몰라도 이쪽은 좀 어려웠다. 저런 사람들하고 같이 살다 보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라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나름 적응된 건가.

“옷을 갈아입었군.”

지적을 받은 마기휼은 자신의 모습을 주욱 살폈다.

고급스러운 옷과 부츠. 그리고 머리 모양도 완전히 달라졌다. 애초에 높이 올리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확 당겨서 두피가 아리기도 했고 말이다. 이런 건 생각이 날 때 바꿔야 하는 거였다.

마기휼은 머리를 풀고 마구 고개를 저어 댔다. 흘러내린 머리를 잡아 한쪽 어깨로 늘어뜨린 그는 긴 한숨을 토해 내며 눈을 내리떴다.

“기운이 없나.”

기운이 없다는 걸로 표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그런 곳으로 가버리고 싶었다. 사라지고 싶었다. 당분간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마기휼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으면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말도 안 돼.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이미 많은 것들이 시작된 참이었다. 일이 진행될 대로 된 마당에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애초에 잘했다면 배신감이라도 들었을 텐데 자신은 그럴 자격도 없었다. 7년의 공백. 그것이 이리도 컸던 걸까.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라울을 흘겨봤다. 그는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물었다.

“부모님이 어렸을 때 돌아가신 겁니까.”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추억은 좋은 쪽으로 남겨져 있으십니까.”

“이미 돌아가신 분이시다. 나쁠 추억도 없고, 좋은 추억도 없다.”

“그렇습니까.”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정상으로 보이는 라울이었다. 털어내고 싶었다. 라울이 좋은 대꾸를 해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일단은 말을 들어줬으면 싶었다.

“저는 아버지가 그리 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몰랐다는 것 자체가 변명이 될 따름이겠지요. 7년 동안 저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 집안에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았던 제가 잘못을 했던 겁니다.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되어 원망한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설령 가휼이 날 팔아 돈을 얻었다고 한들 그게 뭐가 어때서. 마지막으로 형이 해줄 수 있는 일을 해줄 뿐이었다. 하지만 내 몸에 대해서 말을 했단 말이지. 그런 것에 홀라당 넘어가 돈을 빌려준 저 오르베라는 여자도 대체 뭔가 싶었다. 나를 던져준다고 해서 라울이 기뻐할 리도 없잖은가.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내가 당신의 신부라는 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말인가.”

“황당하지 않으십니까?”

대답이 없다.

그래. 너도 황당하겠지. 아쉬울 거 하나 없는 너에게 남자 신부라니. 그것도 이런 노땅에 하나도 예쁘지 않은 사내인데 말이다. 키가 작은 것도 아니고, 애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잘하는 것도 없었다.

마기휼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당신 목숨값으로 20만 베리를 해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솔직히 지금 같은 상태에서는 아무려면 어떠냐 싶기도 하군요.”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이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을 해봐도 라울과 그 짓을 해서 아이를 얻는 건 정말 말도 안 되었다. 라울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머리 좋은 사람이니까 모든 걸 알게 된 후 알아서 정리를 해주지 않을까. 설령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도 그는 그리 변화된 태도를 취할 것 같지 않았다. 단지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오르베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

인상을 쓴 채로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그런 사람이 신부라며 남자를 던져줍니까. 그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가 여자를 상대로는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한 거겠지.”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눈을 깜박일 따름이었다. 당황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았다.

사람은 때때로 들리는 말을 알아서 지워버리는 능력이 있었다. 듣고 싶지 않거나, 인정할 수 없거나, 그리고 들어 봤자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들에 대해서는 아예 무시를 해버리는 거다.

지금 마기휼이 그런 상태인 듯싶어 라울은 친절하게도 재차 말을 해줬다.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을 가지고 있다.”

마기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이쪽을 쳐다보는 마기휼은 얼빠진 모습 그 자체였다. 믿기지 않는 말을 들었다는 듯 굳은 얼굴로 있는 그 모습을 확인한 라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가가는 순간 마기휼은 헛숨을 삼키며 뒤로 몸을 물렸다. 그때 라울은 걸음을 멈췄다.

“내가 다가가는 게 싫은가?”

몸을 피한 건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원래 마기휼은 사람의 접근을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당신도 그걸 알잖아. 무안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인 마기휼은 한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마기휼을 내려다보는 라울의 눈빛은 어두운 빛으로 물들었다.

“자네는 남자야. 하지만 오르베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거래의 대상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렇다 해서 우리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필요는 없어. 적당히 맞춰주다가 이곳을 떠나면 돼. 그러는 동안 내가 무슨 짓을 하진 않을 테니, 너무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을 거야.”

라울의 말에도 마기휼은 쉽사리 긴장을 풀지 못했다. 굳은 채로 가만히 있는 마기휼의 보랏빛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더 같이 있어 봤자 서로 간의 긴장만 높일 따름이었다. 라울은 몸을 돌렸다. 간다는 말도 없이 나가버리는 순간 마기휼은 닫힌 문을 쳐다봤다.

“……남자가 좋다고?”

중얼거린 마기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파에 뒷머리를 기댄 마기휼은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보였다. 어지러워서 토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조금 전 라울이 했던 말뿐이었다.

남자가 좋다니. 천하의 저 라울이 여자가 아닌 남자를 좋아하는 몸이었다니. 그러고 보니 평소 주변에 엄청난 추종자들을 이끌고 다녔지. 설마하니 그놈들하고 모두 관계를 가진 거 아니야?

거기까지 생각을 하던 마기휼은 당장 주먹으로 머리통을 후려쳤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서 순간적으로 눈앞으로 별이 반짝였다. 헛숨을 삼키며 머리통을 감싼 채로 몸을 배배 꼬던 마기휼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소파에 완전히 체중을 다 실은 채로 있던 그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라울 덕분에 아주 조금 기운이 났다. 그래. 남자가 좋다 이 말이지. 그렇게 모든 걸 다 가지고 완벽한 사내가 여자를 품지 못하는 몸이라는 건가.

“쉬운 일이 없군.”

그래. 정말 쉬운 일이 없었다.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눈을 감아버렸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던 속도가 걷기였다고 하면 지금은 전력질주를 하는 것 같았다. 눈에 뵈는 거 없이 완전 달리고 있었다. 스스로 뭔가를 해내고 싶어서 달리는 거라면 차라리 나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생겨난 일들로 인해 달리지 않으면 넘어질 만한 상황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러다가 완전 산으로 넘어가버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커튼을 잡아 옆으로 밀쳐 냈다. 그러자 끝도 없이 뻗어진 거대한 정원과 그 너머로 보이는 높은 담과 뒤편에 자리한 산이 보였다. 칙칙한 군의 낡은 건물이 떡하니 보이던 그런 환경이 아니었다. 정리가 잘 된 럭셔리한 환경이었다. 실제로 침대도 엄청 좋았지.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가운도 실크라서 피부에 달라붙는 느낌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음식도 맛이 있었다. 라우젝, 오르베, 라울로 이어지는 사람들과의 대화로 인해 완전히 진이 빠져 있는 동안 갑자기 얼굴이 똑같은 아이들이 쳐들어왔다. 하나로 치면 별거 아니었지만 똑같은 얼굴이 다섯이나 되었다. 아이들은 웃으면서 마기휼을 끌어당겼고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방으로 들어가게 했다.

안 그래도 피곤하고 배가 고픈 참이었는데 쉽사리 볼 수 없는 비싼 요리를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완전히 배가 불러 트림만 하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옷이 벗겨졌다. 놀라 뭐라 하는 동안 간지럼을 피우는 통에 웃으면서 버둥거렸고, 어느새 실크 가운이 입혀졌다. 그 상태로 침대 같은 곳에 눕혀져 전신 마사지를 받았다. 손톱과 발톱 정리도 받았다.

마기휼은 손을 들어 눈앞으로 올렸다. 투박하고 끝이 갈라져 있던 손은 지금 완전 매끈거렸다. 손톱도 윤이 났다. 발가락도 마찬가지인 모양새겠지. 마기휼은 커튼을 내리고 근처에 있던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바로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그대로네.”

조금 관리를 받아서 괜찮아질까 싶었는데 말이다. 이내 마기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원래 잘생겼어. 조금 전 실망을 했던 건 다른 이유 때문이야. 새삼스럽게 내 얼굴에 실망할 필요가 어디에 있어.

암. 그렇고말고. 고개를 끄덕인 마기휼은 당장 몸을 돌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으아악!”

소리를 지르다 말고 마기휼은 당장 뒤로 넘어가버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마기휼은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다섯의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의상. 단지 머리 모양이 다를 뿐인 아이들은 마기휼이 쳐다보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활짝 웃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마기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들을 가리켰다.

“도, 도대체 언제 들어온 거야?!”

“처음부터 이 안에 있었는데요?”

천연덕스럽게 그리 말을 한 아이들은 눈을 깜박였다.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게 뭐가 그리 이상하냐는 듯 묻는 눈초리에 말문이 막힌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동안 아이들은 헤벌죽 웃으며 마기휼의 손목을 붙잡았다.

“씻으러 가세요.”

“뭐? 씻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기휼은 질질 끌려갔다. 방 옆에 붙어 있던 문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나? 어제도 아이들의 등쌀에 밀려 이런저런 것들을 당하는 동안 피곤해져서 잠이 들었던 거였다. 이번에도 놈들 뜻대로 하게 둘 순 없었다.

마기휼은 당장 표정을 굳히며 뒤를 돌아봤다.

“너희들 제멋대로 굴면 내 가만히 두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로 물이 끼얹어졌다. 눈을 감은 마기휼의 얼굴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눈을 뜬 마기휼은 아까보다 독기가 많이 빠진 얼굴이었다. 갑작스러운 이 모든 일들에 대해 더는 화를 낼 기운도 생기지 않았다. 기회는 이때라는 듯 아이는 당당하게 요구했다.

“젖었으니 가운 벗으세요.”

환하게 웃는 얼굴에 마기휼은 입 안에 들어온 물을 뱉어 냈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마기휼의 가운을 벗기고 그를 욕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당장 거품이 나고 욕조 바깥으로 나온 팔과 다리로 각각 아이들이 달라붙어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한 아이는 위에 달라붙어 두피 마사지를 했다.

두피를 누르는 손길이 능숙하다. 다리와 팔을 주무르는 손길은 완전 수준급이었다. 거절을 하려 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간 쌓인 피로가 순간적으로 화악 풀리는 느낌이었다.

마기휼은 흐릿하게 풀린 눈을 한 채로 중얼거렸다.

“기분 좋아.”

“그렇지요? 더 기분 좋게 해드릴까요?”

아이들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아이들은 지나칠 정도로 열심이었다. 마치 이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일과라는 듯 말이다. 마기휼은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똑같은 것 같은데 이리 보니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남녀 구분이 잘 안 되었는데 지금은 되었다. 여자아이가 둘이고 사내아이는 셋이었다. 이름은 뭘까 싶었다. 마기휼은 오른쪽 팔을 주무르는 아이를 쳐다봤다.

“넌 이름이 뭐야?”

“전 4번이에요.”

활짝 웃으며 하는 말에 마기휼은 눈을 깜박였다. 어이가 없어 침묵하는 동안 아이는 재차 팔과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귀족가에는 많은 시종이 있을 거다. 아이도 그런 종류의 것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설마하니 이런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번호가 이름이라니. 장난을 하나 싶었다.

“그건 이름이 아닌데?”

“아니에요. 이름이에요. 전 2번인 걸요. 저 아이는 1번이고 3번이고, 그리고 저 아이가 5번이에요.”

마기휼은 위를 쳐다봤다. 머리를 주무르던 아이는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번호가 이름이라 하는 것에 대해 조금의 불쾌함도 느끼는 얼굴이 아니었다. 되레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리도 산뜻한 얼굴을 하는데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턱이 없다.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고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정성을 다해 마기휼을 씻기고 말리고 옷을 입혔다. 동시에 음식을 먹게끔 했다. 돌아가는 상황이나 좀 살펴보자 싶었던 마기휼은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것들이 이제는 고기까지 썰어준다.

이쪽은 내일모레가 서른이었다. 그런데 반 토막이나 나이 차가 나는 것들이 고기를 썰어주고 목에는 수건까지 둘러준다. 마치 아기를 다루듯 하는 것에 마기휼의 입술 꼬리가 씰룩거렸다.

“야. 그만 좀 해라.”

“뭐가요?”

고기를 썰거나, 과일을 정리하거나, 생선살을 바르고, 와인을 따르던 아이들이 모두 마기휼을 쳐다봤다. 이쪽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부담스럽다. 마치 큰 잘못을 했나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그리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마기휼은 아이가 들고 있던 나이프를 들고 갔다.

“이런 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어? 그러면 안 되셔요.”

안 되기는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 태연하게 고기를 썰고 한 점을 입에 넣는 마기휼은 태연했다. 그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그리 음식을 먹으니 아이들도 잠자코 있었다. 야채를 섞어 가며 음식을 먹던 마기휼은 지나치듯 물었다.

“너희는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 거야?”

“마기휼 님의 시중을 들지요.”

“장난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장난이 아니라 정말이에요. 지금 우리는 마기휼 님의 시중을 드는 일을 하는 아이들이에요.”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아이들의 태도는 단호했다.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지치지도 않냐.”

이대로 가다 보면 지치는 건 이쪽이 될 터였다. 마기휼은 고기 한 덩이를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댔다. 굉장히 맛없는 걸 먹고 있는 얼굴이었다.

실제로 딴 곳에 마음이 가 있으니 암만 산해진미가 눈앞에 있어도 혹하지가 않았다. 돌덩이를 씹는 느낌으로 우물거리는 동안 시선이 느껴졌다. 이건 또 뭔가 싶어 바라보자 테이블에 주르륵 달라붙어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원형의 테이블은 넓지도 크지도 않았다. 그런데 저렇게 달라붙어 쳐다보다니.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자연스레 마기휼의 표정은 굳어졌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식사 다 하시고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여길 뜰 거야.”

“왜요?!”

말도 안 된다는 듯 동시에 외쳐 대는 통에 귀가 찌릿거렸다.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린 마기휼은 손가락으로 귀를 막으며 아이들을 내려다봤다.

“당연하잖아.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어!”

“말도 안 돼요! 빚을 갚으셔야지요!”

빚이라니? 물론 빚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왜 니들이 거론하는 건데?

묻고 싶은 듯 바라보는 시선에 아이들이 한꺼번에 마기휼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빚도 안 갚고 튀려고요?! 그건 인간이 할 짓이 못 되어요!”

“인간 이하! 최저예요! 사람이라는 건 원래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는 존재란 말이에요! 마기휼 님은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분이셨나요?!”

“최악이야! 너무해!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지상 최악의 악인을 앞에 두고 있는 듯 아이들의 비난은 점점 거세졌다. 아예 주변을 둘러싸고 소리를 지르는 통에 귀가 아픈 것은 둘째 치고라도 당황스럽기만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아이들의 압력은 점점 심해졌다. 참다못한 마기휼도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여기에 있어 봤자 도움 될 게 하나도 없다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안 되겠어요! 마기휼 님은 교육을 받으셔야 해요!”

“맞아! 맞아! 공부를 하셔야 해! 인간이 해야 할 도리라는 걸 배우시라고요!”

귀엽게 생글거리던 얼굴은 오간 데 없었다. 그들은 마치 마기휼에게 인간의 기본을 가르치는 것이 현재 가장 큰 목표라도 되는 듯 굴고 있었다.

너무도 강하게 밀어붙이는 통에 뭐라 대꾸를 할 수도 없다. 그저 황망하다는 듯 가만히 있는 동안 아이들의 등쌀에 밀린 마기휼은 급히 식사를 끝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아이들에게 이끌려 책이 수두룩한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안제크가의 도서관이에요.”

아이들 다섯이 모두 보란 듯이 팔을 뻗었다. 마치 자랑을 하는 듯싶어 정말 대단하다며 손뼉이라도 쳐줘야 할 것 같았다. 정말 그리할 생각으로 손을 들려는데 1번이라고 소개를 한 아이가 마기휼 쪽으로 몸을 돌렸다.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당당히 말했다.

“여기서 공부를 하세요.”

뒤를 이어 다른 아이들도 똑같이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제대로 인간의 도리에 대해 익히기 전까지는 나올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나중에 제대로 공부를 하셨는지 저희가 확인할 거예요. 그러니까 대충 넘어갈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저희는 마기휼 님을 믿어요. 제대로 하셔야 해요.”

“꼭 저희의 기대에 부응을 해주세요.”

만약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당장 목이라도 칠 거냐?

멍하니 있는 사이 아이들은 사라졌고 문이 닫혔다. 혼자서 달랑 도서관 안쪽에 남아 있게 된 마기휼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보이는 건 온통 책, 책뿐이었다.

책이라니. 난 원래 이런 거하고는 안 맞는단 말이야.

오만상을 찡그리며 마기휼은 허탈한 듯 웃어버렸다.

“나 정말 미치겠네.”

어쩌면 여기는 자신이 익히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저런 이상한 아이들이 있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다. 세상에. 천하의 마기휼이 저런 꼬맹이들에게 밀리다니. 젝슨이 들으면 비웃을 일이었다.

책이 이렇게 많은 곳에 있으려니 괜히 몸이 간지러웠다. 손을 들어 머리를 마구 문지르던 것도 잠시, 주머니에 손을 넣은 마기휼은 모처럼 온 도서관 구경이나 할까 싶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설렁거리며 걸어가며 안쪽으로 들어가자 책상이 즐비한 곳이 나타났다. 푹신해 보이는 소파도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마기휼의 눈이 반짝였다. 잘됐다. 저기서 부족한 잠이나 자자며 걸음을 서두르던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소파에 누워 있는 인물을 발견해냈다.

“……라울?”

잘못 본 것이 아니라 정말 라울이었다. 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 건 말이다.

처음에는 라울이 왜 여기에 있나 싶었던 마기휼이었으나 이내 뭔가를 깨달은 얼굴이 되었다.

“속아 넘어간 건가.”

그 망할 꼬맹이들. 애초에 여기에 라울이 있다는 걸 알고 데리고 온 게 분명했다. 어리다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다. 그 꼬맹이들 분명 오르베인가 뭔가 하는 여자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거다. 이 발랑 까진 꼬맹이들. 그런 속셈이면 솔직하게 말을 할 것이지, 잘도 사람을 무식쟁이 취급을 했겠다. 다음에 걸리면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며 마기휼은 주먹을 쥐고 몸을 떨었다.

그냥 나갈까도 싶었지만 아직 그 아이들이 지키고 있을 것 같았다. 무섭지는 않아도 껄끄러웠다. 또 시끄럽게 쨍쨍거리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찌할까 싶어 눈을 굴리다가 마기휼은 라울을 내려다봤다.

……그래도 여기서는 가장 정상적인 인물이었다. 덧붙여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 번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나 더 나눠볼까.

조심스레 라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아래로 책들이 잔뜩 깔려 있었다. 전에 배에 탔을 때에도 손에서 책을 떨어뜨리지 않았었지. 책을 좋아하는 건가. 마기휼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전략 130선]

[하늘의 길을 읽는 법]

[후퇴를 하는 때가 바로 싸워야 하는 순간이다]

[안개가 있는 곳 너머에 정답이 있다]

“……이건 또 뭐야?”

이상한 책을 읽고 있는 거라면 그걸 약점 삼으려 했는데 하나 같이 건전한 것투성이었다. 그저 건전한 수준이 아니라 전략서가 대부분이었다. 원래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 노력파였던 건가. 좀 새삼스러웠다. 마기휼은 라울을 내려다봤다.

밤을 새워서 책을 읽은 듯 자는 얼굴이 고단해 보였다. 미간 사이로 선명하게 만들어진 주름이 짜증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잠을 자는데 저렇게 힘든 얼굴이라니. 신기했다.

턱을 괸 채로 라울을 바라보던 마기휼은 창을 올려다봤다.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슬슬 깨워줄까. 마기휼은 라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야, 일어나봐.”

대령이라지만 자신보다 연하였다.

나도 예전에는 진심이 아니었을 뿐이지 제대로만 하면 너보다 훨씬 더 진급 빨리 할 수 있었다구. 그간 내가 너한테 꼬박꼬박 존대하는 게 얼마나 짜증 났는지 알기나 하냐? 그리고 내가 너 같이 새파랗게 어린놈의 신부라니. 말이 되느냐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마기휼은 어느새 라울의 팔을 콕콕 찔러 대고 있었다. 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이놈 때문이라는 원망이 들었다.

애초에 남자를 안 좋아했다면 좋았잖아. 그러면 내가 선택되지 않았을 거다. 아닌가. 그러면 돈을 빌리지 못했을 테니 집안이 더 어려워졌을까. 아니다. 그냥 정상적으로 일을 해서 돈을 갚을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런 걸로 봤을 때, 역시나 너 때문이야. 네가 나쁜 거야. 팔을 찌르는 손가락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리한 것이 실수였던 걸지도 모른다. 라울이 눈을 떴다. 금빛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녹색 눈동자. 그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굉장히 예리하고 차가웠다. 그걸 본 마기휼은 딸꾹질을 하며 급히 손을 치워 냈다.

“아침이니까 일어나라고.”

설마 내가 건드린 것 때문에 화가 났나?

모르는 척을 해버릴까. 애초에 난 너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척을 해버리면 뭐 어쩌겠어. 점점 그리하는 쪽으로 마음이 굳혀진다. 실제로도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는데 갑자기 라울이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손을 뻗어 팔을 잡아당겼다.

놀란 마기휼은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러자 이번에는 끌어당기다 말고 아래로 몸을 던지듯 눌러버렸다.

“우, 우왓?!”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얼얼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동시에 열 받았다.

암만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거칠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일단 내가 네 선배였거든? 예의는 갖추란 말이야!

마기휼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라울을 노려봤다.

“너 말이―!”

말을 채 이을 수 없었던 것은 라울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가라앉은 눈빛. 아직 잠이 덜 깬 그 눈동자에서 위험을 감지했다.

빌어먹을. 안 좋은 상황이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신체에 위협이 생겼음을 깨달은 마기휼은 입을 살짝 벌렸다.

“저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울이 마기휼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곧장 정수리 부근에 입술을 댔다. 뒤통수에 따뜻한 숨이 느껴진다 싶더니 이내 몸 전체로 눌러 온다. 어깨를 잡던 손이 몸 아래로 파고들어 왔다. 가슴을 만지던 손이 배 부근을 쓰다듬는 것에 마기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자, 잠깐! 잠깐! 잠깐!”

이게 도대체 어찌 돌아가는 상황이야?

당황한 마기휼은 몸을 돌렸다. 일단 라울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에 성공한 마기휼은 당장 그의 몸을 밀쳐 냈다. 마기휼의 손목을 잡아 누른 라울이 고개를 숙인다 싶었을 때 입술이 닿았다.

“읍-!”

크게 떠진 눈동자에 서린 경악이 또렷했다. 너무도 놀라고 당황스러운 상황에 경직되어 있는 사이 라울의 혀가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타인의 혀가 닿는 순간 마기휼은 정신이 돌아왔다.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만큼 라울이 달라붙는다. 아예 양손으로 마기휼의 손을 다 구속하고는 다른 손으로 마기휼의 턱을 감쌌다. 힘을 줘 입을 벌리게 하는 통에 잡힌 곳이 얼얼했다.

벌려진 틈을 타 라울의 혀가 재차 들어왔다. 마기휼은 고개를 저으며 필사적인 저항을 했지만 라울도 집요했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와 입 여기저기를 핥아 댔다. 거친 숨이 얼굴 위로 떨어졌다. 머리카락이 눈 안으로 들어와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내리누르는 몸은 왜 이렇게 단단한지 모르겠다.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뒤로 물리자 라울의 혀가 빠져나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기휼은 간신히 소리를 냈다.

“그, 그만! 싫어!”

마기휼은 팔을 빼내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자식 원래 이렇게 힘이 셌던가? 그러면 뭐야? 난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러는 동안 라울의 혀가 입천장을 사악 핥았다. 입 안에 고여 있던 타액을 삼키며 마기휼은 재차 소리를 쳤다.

“정신 차려! 이 개자식아!”

도서관 내부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한 엄청난 성량이었다. 그 순간 라울의 몸이 떨어졌다. 달라붙어 있던 묵직한 육체가 떨어지자 마기휼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머리로 열이 올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기휼의 눈동자는 라울의 얼굴로 고정되어 있었다.

목까지 찬 숨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한 번도 당한 적 없었던 일 때문에 더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당황이 역력한 얼굴로 쳐다보는 동안 라울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눈을 깜박이면 깜박일수록 그 눈빛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내 라울은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그리 있던 그는 천천히 눈을 떴고, 아래에 깔린 마기휼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쳐도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걸 본 순간 혈압이 화악 올랐다.

“떨어지라고!”

라울은 순순히 잡고 있던 마기휼의 손을 놨다. 기다렸다는 듯 마기휼은 황급히 라울의 아래에서 벗어났다. 그래 봤자 워낙 구석인 장소였기 때문에 금방 벽이 등에 닿았다. 마기휼은 잡혀서 얼얼한 손목을 손으로 감쌌다. 마치 겁탈을 당할 뻔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쳐다보는 눈초리는 날카로웠지만,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라울은 태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목에 한 손을 대고 느리게 고개를 저어 댔다. 그러다가 머리카락을 모아 전부 뒤로 넘겼고, 다음으로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책들을 주워 들었다. 그걸 책상에 올려둔 라울은 소파에 앉았다.

내내 라울이 움직이는 걸 쳐다만 보고 있던 마기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사과도 안 하냐?”

라울은 마기휼을 쳐다봤다. 눈빛이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에 용기를 얻은 마기휼은 당장 험한 말이 나왔다.

“이 개자식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며!”

“내가 잘 때에는 그 누구도 접근해서는 안 된다.”

잔뜩 흥분한 마기휼과 달리 대답을 하는 라울은 침착했다. 재차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저혈압인 데다 잠에서 막 깨어난 상태는 정말 위험하지. 그때에는 본능만이 남아 있어 나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인지할 수 없고 컨트롤을 할 수도 없어. 때문에 이 집안에서는 그 누구도 내가 자고 있을 때나, 막 일어난 상태였을 때 건드리지 않아. 그것에 대해 아무도 말을 해주지 않던가?”

해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나도 방금 들은 말인데.

문득 마기휼은 그 악마 같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서 이곳으로 집어넣었다. 묘하게 서두르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속았어.”

그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에게 아주 홀라당 속아버린 거다. 그놈들은 라울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 시치미 뚝 떼고 이곳으로 밀어 넣은 거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지? 스스로 당한 일을 믿을 수 없어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으려니 라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기휼은 놀라 몸을 움츠렸다. 라울이 내려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기휼은 보란 듯이 몸을 움츠리고 세운 무릎을 끌어안았다. 쳐다보는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그걸 확인한 라울은 가만히 있다가 중얼거렸다.

“역시나 우습게 볼 여자가 아니로군.”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알아들 수 있는 말을 해야 할 게 아니야.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혼자 중얼거리기 전에 일단 나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야?”

모르면 지적을 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거라는 걸 맹세해. 지금 당장.”

“그렇게 못 하겠다면?”

“……뭐라고?”

어이없었던 마기휼은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곧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한 마기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라울에게 삿대질했다.

“네가 한 일에 대해서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그런데 못 하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마기휼의 손끝은 정확히 라울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나 있을까. 불쾌할 만도 한데 라울은 뻗어진 마기휼의 손끝만 바라봤다. 무표정을 한 채로 보는 게 지금 이 상황을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듯싶어 더더욱 부아가 났다. 자연스레 마기휼의 목청이 더 커졌다.

“사과하라고!”

“확실히 둔한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예리한 거겠지. 더군다나 오르베 같은 여자이니 더더욱 정확할 거야.”

“여기서 왜 그 여자 이름이 나오는 건데?!”

내가 원하는 건 사과라니까!

“네가 내 취향이라는 거다.”

라울에게로 향해져 있는 손끝이 흔들렸다.

화가 나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를 바라보며 라울은 말을 이었다.

“나도 모르는, 내가 흥미를 느끼는 취향에 완벽하게 부합된다는 거야. 그리고 오르베는 그걸 알고 있어 널 지목했던 거겠지. 내가 너에게 흥미를 느끼고 널 안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번거로운 일을 저지른 거야.”

마기휼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무표정이 되어 가만히 있는 마기휼을 확인한 라울은 손을 들었다. 마기휼의 손을 옆으로 치워 냈다. 마기휼의 손은 기운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양팔을 늘어뜨린 마기휼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울은 그 얼굴을 흘겨봤다.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잠들었을 때에는 접근하지 마.”

미남자가 몸을 돌리고 멀어진다. 그걸 붙잡을 수 없었다. 아직 정리된 게 하나도 없다 해도 말이다.

라울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허탈한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마기휼은 멍하니 서 있다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저게 지금 뭔 소리를 지껄여 대는 거야?”

말이라는 건 이해를 돕기 위해 하는 거였다. 점점 미궁에 빠져드는 말 따위는 필요가 없단 말이야. 그리 생각을 하던 마기휼은 뒷걸음질을 쳤다. 벽에 등이 닿자 천천히 그 자리에 허물어져 내린다. 바닥에 주저앉아 아래를 내려다봤다.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있다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조금 전 라울이 했던 입맞춤이 아직도 생생했다.

‘네가 내 취향이라는 거야.’

그리 말을 하며 바라보는 눈동자. 침착했다. 어쩌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잘생긴 놈이. 아쉬운 것 하나 없는 놈이 말이야. 거기까지 생각을 하는 동안 마기휼의 얼굴은 완전히 붉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라울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버릇이 있었다니. 왜 지금까지 그걸 모르고 있었던 거지? 전에 같은 방을 사용했을 때-.

“아앗!”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같은 방을 사용했을 때에도 언제부터인가 라울 그놈은 꼭 건너 쪽방으로 들어가 자고는 했었다. 그런 모습이 더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에 잘생긴 얼굴이라 해도 이쪽도 일부러 틱틱거리는 게 없잖아 있었다. 대충 가르쳐 주고 나머지는 네가 알아봐라. 그리고 홀라당 내빼버렸다.

반년간 라울과 같은 방을 사용했어도 마기휼은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대충 씻고 옷 입고 나가면서 ‘야! 늦겠다!’라고 닫힌 라울의 방을 향해 외치는 게 고작이었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때 저의 그 시크함이 절 살린 겁니다. 이런 저택도 아닌 군 내에서 라울이 덮쳤다면 견디기 정말 힘들었을 거라며 마기휼은 양손을 마주 잡은 채로 흔들어 댔다.

그때 절 보호해주셨으면 앞으로도 계속 해주셨어야 하잖아요. 그렇게 자주 왔다 갔다 하시니까 사람들이 믿다가도 떨어져 나가는 거란 말입니다. 신이든 인간이든 한결같은 게 있어야 하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하면 라울을 피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네? 그냥 자는 라울을 피하라고요?

어차피 방이 다르니까 상관없지 않느냐고요?

그냥 오늘 있었던 일은 없었던 것처럼 하고 잘 지내보라고요?

“말이 되느냐고!”

혼자 생각을 하고 혼자 대답을 하고 혼자 소리를 치고 난 후, 마기휼은 지쳐 헉헉거렸다. 그 얼굴 가득히 혼란스러움이 서렸다.

지금은 그냥 장난처럼 굴고 있지만 실상은 그리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라울 놈의 그 아침 저혈압을 고쳐주든지 아니면 내가 이곳을 뜨든지. 하지만 그 고모라는 사람도 그렇고 그 꼬맹이 다섯 놈도 만만찮았다. 이쪽이 암만 벗어나려 해도 그 사람들이 다시금 끌고 들어올 것 같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새벽에 몰래 빠져나가야 하나?

라울을 방 안에 가두고 바깥으로 못을 박아 두는 편이 나으려나? 그래 봤자 여기는 라울의 집인데? 손님은 나잖아?

혼란스러운 듯 보랏빛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이마로 식은땀이 촉촉하게 맺혔다. 진심으로 위기감을 느끼는 마기휼은 염통이 쫄깃해질 지경이었다. 아랫입술을 씹어 대던 그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이건 또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저기 큰 책장 뒤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던 아이는 마기휼과 눈이 마주치자 그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리곤 처음부터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름 깜찍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아이였으나 마기휼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부족했다. 마기휼은 저기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를 느끼며 벌떡 일어났다.

“이놈의 자식들!”

저속한 욕설을 토해 내며 헐크처럼 달려드는 마기휼의 모습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지며 캬캬-거렸다. 간간이 들리는 ‘술래잡기다!’ 같은 팔자 좋은 소리가 마기휼을 더더욱 분노케 했다.

술래잡기 좋아하시네. 그래. 그 술래잡기에 걸려서 어디 엉덩이 터질 만큼 맞아봐라!

고민이 많았던 만큼 쌓인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은 상태였다. 분노의 화신이 된 마기휼은 여기저기 흩어지는 아이들을 붙잡기 위해 전력질주를 했다.

-다음 권으로 계속

WET NOVEL RED ZONE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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