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7)

#5

24시간 내내 달콤한 향기가 머무는 장소였다. 맛있는 음식과 시원한 음료 및 술이 끊이지 않고 제공되었고, 언제나 늘 그녀가 관심을 보이는 드레스나 보석, 미술 작품과 사람에 관한 이야깃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노르디아 연방국에 한해선 그녀가 알 수 없는 정보나, 그녀가 모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하나라도 일단은 그녀의 귀에 들어갔다가 나와야만 했다.

그걸로 인해 그녀가 어떤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치 않았다. 그녀의 이름은 오르베. 노르디아 연방국의 대귀족가에 속하는 안제크가 사람인 동시에 현 여왕의 가까운 친척이기도 했다. 평상시에도 종종 여왕을 찾아 사담을 나눌 정도로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라 해도 스스로의 지위나 입장에 만족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것이 지금 그녀의 상태로, 그녀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정보에 대해서 불만스러운 상태였다.

“라울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을 높이 틀어 올린 여자는 소녀같이 사랑스러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였다. 탐스러운 가슴과 가는 허리를 충분히 강조할 수 있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주변에는 15세 정도의 비슷한 용모를 지닌 소년소녀들이 모여 그녀에게 부채질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르베는 모든 게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아이들도 성가셨다. 권하는 음식을 치워 내며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뺨 가운데에 찍힌 점 하나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나 싶던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한숨이 늘어나고 그녀의 미간 사이의 주름이 진해질수록 곁에 있던 미동들은 초조해졌다.

지금 그녀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어서 빨리 그녀의 환심을 살 만한 어떤 것이 등장해야만 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집사 차림을 한 사내가 들어왔다. 오르베의 앞에 서서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린 그는 바로 보고를 올렸다.

“마담. 안베르 상공에 군함이 진입했다 합니다.”

오르베는 당장 사내를 쳐다봤다.

“그곳에 라울이 타고 있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이 괘씸한 놈.”

오르베는 붉은 눈동자를 빛냈다.

당장 나오는 험한 단어에 주변에 있던 미동들은 숨을 죽였다. 평소에는 한없이 다정한 여자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사람을 상대로 폭언을 하거나 폭행을 하는 건 아니지만, 거침없이 몇천을 호가하는 물건을 집어 던지니, 그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큰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제공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여인의 행동에 편하게 앉아 있던 미동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치마를 펄럭이며 거침없이 복도를 걸어가는 그녀의 뒤로 미동들이 따랐다. 저택 바깥으로 나온 오르베는 당장 마차를 준비하라 했다.

“내가 타는 마차를 끌고 나와라!”

이리 말을 하면 바로 행동하는 게 눈에 보여야 했다. 하지만 뒤를 따르는 집사나 바깥에 서 있는 시종들은 하나 같이 가만히 서 있었다. 이쪽 눈치를 살살 살피는 것에 화가 난 오르베는 당장 목소리를 높였다.

“왜 바로 준비가 안 되는 것이야!”

“저기 그것이…….”

“뭐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당장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가 두려웠다. 사색이 된 집사는 이미 등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우젝 님께서 마담의 마차를 끌고 나가셨습니다.”

“……뭐라고?”

오르베의 눈이 커졌다. 동그란 눈이 더 커지니 귀여웠다. 하지만 뒤를 이어서 나올 반응을 알기에 집사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몇 시? 언제 나간 거냐!”

앞으로 다가오는 오르베에 맞춰 집사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힘겹게 보고했다.

“마담께 보고하러 가는 도중에 붙잡혀서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말을 전해 듣고는 바로 달려 나가셨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아랫입술을 깨문 집사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해 봤자 나중에 일만 더 커질 따름이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그냥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해버리는 편이 나았다. 식은땀을 질질 흘려 대는 집사였으나 오르베는 이미 안중에 없었다. 다만 자신의 마차를 멋대로 타고 나가버린 발칙한 자에 대해서 분통을 터트렸다.

“이, 이 빌어먹을 놈! 하나도 귀엽지 않은 녀석!”

짜랑짜랑하게 울리는 오르베의 목소리에 미동들은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면서 눈을 데굴데굴 굴려 대는 폼이 마치 이러다가 불똥이 그들에게 튀지나 않을까 싶어 걱정하는 투였다.

“푸에칫!”

기침을 하자마자 근처에서 식사 중이었던 군인이 흘깃 쳐다봤다. 그 시선에 멋쩍어진 마기휼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기를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고 씹자 풍부한 육즙이 입안 가득히 퍼졌다. 아무래도 이곳 식단의 질이 더 좋은 것 같다. 고기도 그렇고, 채소도 그렇고, 북방군의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먹을 걸 가지고 차별하면 안 되는데. 사람 서글퍼지는데 말이다.

어느새 고기를 다 먹은 마기휼은 채소도 싹 비웠다. 영양밥도 다 먹은 후였지만 뭔가가 허했다. 더 먹고 싶어서 포크를 입에 문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깨끗이 비운 식판을 들고 배식대 앞에 섰다. 그러자 인자하게 생긴 조리사 아줌마가 국자를 흔들었다.

“왜? 더 먹으려고?”

포크를 입에 문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 더 줘야지. 자, 더 먹고 쑥쑥 커라.”

이미 클 나이는 지났지만 맛있는 걸 주는 사람인데 뭐라 구시렁거리고 싶지 않았다. 은혜에 감사한다는 마음을 담아 마기휼은 당장 식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식판에 음식을 그득 담아주며 조리사는 그를 쳐다봤다.

“그런데 여기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네? 어디서 왔지?”

묻는 눈빛이 서글서글한 것이 성격도 좋을 것 같은 아줌마였다. 마기휼은 식판에 살짝 삐져나온 양념을 손가락으로 닦아 혀로 핥았다.

“북방군에서 왔습니다.”

“그러면 라울 대령님과 함께 있었던 거야?”

“뭐, 그렇지요.”

여기는 조리사도 대령의 전속이 어디인지를 아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저 대령이 유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에 대한 소문이 도는 건가.

마기휼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고 배식대에 식판을 내렸다. 배식대를 식탁 삼아 포크질을 하는 마기휼의 모습에 바로 조리사가 한마디 했다.

“왜 거기서 먹어? 저기 제대로 된 식탁이 있잖아.”

“혼자 밥 먹는 게 외로워서 그렇지요. 여기서 먹으면 안 되는 겁니까?”

“안 될 건 없지만 특이해서 그렇지. 30년 넘게 일을 했지만 배식대 앞에서 밥을 먹는 놈들은 없었어.”

“어차피 사람도 없잖아요. 금방 먹고 일어날게요. 부족하면 더 말씀드릴 거고요.”

“그래. 그렇게 해. 녀석 넉살 좋은 게 마음에 드네.”

저도 당신이 마음에 든답니다.

일단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를 원했고, 정보를 줄 수 있을 만한 사람도 필요했다. 인어의 늪에서 안베르로 간다는 걸 알지만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한 몇 시간을 허비했으니 벌써 안베르에 도착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넌지시 물었다.

“안베르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앞으로 30분 후면 도착할 거야.”

“……그렇군요.”

생각보다 훨씬 더 촉박했다. 1시간 정도 남았다 하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을 텐데 말이다. 30분이라. 밥 먹고 똥 싸고 소화 좀 시키면 금방 가버릴 시간이었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진다면서 깨작거리고 있으려니 조리사가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런데 말이야. 라울 대령님은 소문대로 그렇게나 대단한 분이셔?”

“뭐가요?”

마기휼이 고개를 들자 얼굴 옆에 손을 댄 조리사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런저런 소문들도 많지만 그게 제일 유명하거든. 눈을 가리고도 사격은 만점이고, 200여 권이 넘는 전략이나 비책을 모두 다 암기하고 있고, 모의 전투에서는 1대 1,000의 싸움에서도 쉽게 승리했다고 말이야. 손가락 하나로 장정 열을 그냥 쓰러뜨린 일화도 있지만, 그건 좀 우스우니까 넘긴다 쳐도― 라울 대령님이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이야?”

그런 거 내 알 바 아니었다. 애초에 남 일에는 관심 없다고.

하지만 조리사를 통해 달리 알아낼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고, 초반부터 너무 틱틱거리는 것도 안 좋다 생각이 든 마기휼은 어깨를 으쓱였다.

“유명하니까 소문은 많겠지요. 그리고 제가 봤을 때 소문이라는 건 원래 절반만 믿고 절반은 믿지 않는 게 제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라울 대령님이 우수한 것은 사실이지요.”

테스트를 볼 때마다 늘 원톱이었다. 거기다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는, 거의 만점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그런 점수는 군대가 개편된 이래 한 번도 없던 것이라고 했다.

성적은 좋고, 외모는 훌륭하고, 집안은 빵빵하고, 특유의 카리스마도 있어 추종자들도 수두룩했다. 보통 사람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 걸로 치면 비범하기는 한 것 같았다.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지요.”

“그렇구나. 애초에 왕통이니까 말이야.”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이는 조리사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조리사가 중얼거리는 말 덕분에 마기휼은 달리 알고 싶은 게 생겨버렸다.

마리아도 그랬다. 라울이 왕통이라고 말이다. 왕통이라 해 봤자 마기휼에게 있어선 왕족의 후손이라는 느낌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여기고 저기고 계속해서 왕통, 왕통이라는 건지를 모르겠다.

“왕통이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왕통이 대단하냐니. 진심으로 그게 궁금해서 묻는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조리사는 세상에서 가장 별난 어떤 걸 보는 눈빛이었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니?’ 그리 묻는 시선이기도 했다. 그 눈빛에도 굴하지 않고 마기휼은 태연히 받아쳤다.

“전 원래 그런 거 잘 몰라요.”

“잘 몰라도 기본 상식은 알아야 할 게 아니야.”

“원래 전 기본 상식도 좀 딸리는 사람이거든요.”

입을 다문 마기휼은 눈을 깜박였다. 보랏빛 눈동자 속으로 다른 꿍꿍이나 이쪽을 놀리려는 기색은 읽히질 않았다. 정말로 궁금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조리사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노르디아 왕족은 대대로 친족끼리의 혼인을 맺지. 지금의 여왕은 혼기가 꽉 찼어. 즉, 여왕과 비슷한 연배의 남자 왕통이라는 건 부마 후보라는 뜻이야.”

“……여왕의 이거요?”

마기휼은 반사적으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순간 폭발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우습다는 듯 조리사는 손바닥으로 배식대를 두드리며 목이 터지라 웃어 댔다. 본의 아니게 취한 행동이 그녀에게 크나큰 즐거움을 선사한 모양이었다. 어떤 식으로 가든지 타인을 즐겁게 하면 그걸로 좋은 게 아닌가 싶었던 마기휼은 어깨를 으쓱였다.

한참을 웃어 대던 조리사는 손으로 마기휼의 머리를 툭툭 쳤다.

“이거 아주 인물이네. 어쩌면 그런 식으로 표현할 생각을 다 했지? 그러지 마. 나나 되니까 웃지 다른 사람이 봤으면 당장 영창감이야.”

손가락을 내밀며 말하는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감돌아 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꽤나 서늘했다. 그 눈빛과 마주했을 때 마기휼은 이 조리사가 보통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본심을 너무 보이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 여왕의 부군 후보지. 즉 왕이 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왕통이라는 거야.”

“그렇구나. 대단한 사람이었던 거로군.”

어쩐지 처음 봤을 때에도 심상치 않았다.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지. 정말 잘생기고 번듯하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전해졌다. 마치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인의 머리 위에 서는 걸 배워 나온 것처럼 말이다.

그래.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말이지. 애초에 콤플렉스 같은 것도 없을 거다. 걸릴 게 뭐가 있겠는가. 온 세상 모든 게 자신의 것 같겠지.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움직이는 방법도 알 터였다.

사람은 겪어보지 않는 이상 모르는 거였다. 그리고 라울이 그런 사람들 중에서 최고봉일 거다. 여왕의 부군이라. 왕 후보라 이거지. 그 자식이라면 여왕을 밀어내고 왕으로서의 권한을 다 누릴 것 같았다. 안 그런 것 같아도 오늘 있었던 일을 보면 꽤나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었다. 마리아같이 잔머리가 돌아가는 여자를 속여서 결국 붙잡을 정도이니 말이다.

어쩌면 그놈을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지.

마기휼은 포크로 식판을 눌렀다. 다 먹었다.

“더 줄까?”

기다렸다는 듯 묻는 말에 마기휼은 당장 고개를 저었다.

“다음 기회를 노리도록 하지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마기휼은 시원하게 웃으며 식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조리사는 식판을 쳐다보기만 할 뿐, 받아 들지 않았다. 왜 그러나 싶었던 마기휼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조리사가 옆을 가리켰다.

“식판을 두는 장소는 저기야.”

마기휼의 고개가 조리사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과연, 배식대 가장 왼쪽으로 따로 식판과 수저를 두는 장소가 있었다.

그래. 여기는 단지 음식을 나누어 주는 장소일 뿐이라는 거지?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에 틈이 없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거겠지만 말이다.

마기휼은 어색하게 웃으며 식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잘 몰라서요.”

정말 미안한 마음을 담아 고개를 꾸벅이며 마기휼은 왼쪽으로 걸어갔다. 식판을 내리고 조리사에게 재차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30분인가. 먹고 떠들다 보니 거의 20분 남짓이 남았다. 그동안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도망가는 것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달리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마리아가 어떻게 되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이렇게 신경 쓰는 걸 저 라울 놈이 알면 보나마나 의심을 할 테니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수상하지 않을 선으로 넌지시 알아보는 편이 옳았다.

솔직히 이쪽이 마리아를 사랑한다거나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조금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친구였다. 그녀는 북방군에서 무려 5년 가까이 술장사를 한 여자였다. 그간 얼마나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고 고민을 털어놨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실없다 할 만한 말도 유독 잘 들어줬던 그녀였다. 그렇다고 모든 이들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에게만큼은 다른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마치 어머니처럼 다정했단 말이다.

“……난 절대로 마더콤이 아니야.”

다만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여자가 어찌 될 것인지 걱정될 따름이었다. 그 마음이 이상할 건 없었다. 조금도 말이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상태를 억지로 끼워 맞춘 마기휼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잡생각이 너무 많았다. 그보다 피곤했다. 한 사흘가량을 제대로 씻지 못했다. 집에 가서 좀 쉬면서 몸도 씻고 그러려고 했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서 세수만 할 뿐이었다. 냄새가 나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찝찝했다. 여기 샤워 시설이 어디에 있나 싶었던 마기휼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침 곁을 지나치는 군인 쪽으로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여기 샤워하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기 앞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은 곳으로 샤워 시설을 알리는 표시가 있었다. 코앞에 있는데도 못 찾고 물어봤으니 한심하게 여겨질 만도 했다. 무안해진 마기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고맙다 말을 한 그는 당장 샤워실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깔끔한 공간이 나타났다. 옷 갈아입는 곳 따로, 샤워 시설이 있는 곳 따로 분리가 되어 있었다. 디자인도 그렇고 크기도 그렇고 깔끔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우와. 굉장히 좋은데?”

이런 곳이라면 일할 맛이 날 것 같았다. 물론 험한 일을 하는 곳이다 보니 재수 없으면 이 군함째로 박살이 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벗은 마기휼은 수건 한 장을 챙겨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건가?”

정말 운이 좋았다. 조용히 몸을 씻으면서 노래를 부를 수도 있겠다 싶었던 마기휼은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물을 틀자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물이 떨어졌다.

얼굴로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에 서 눈을 감는 마기휼의 입술 양 끝이 한껏 올라갔다. 완전 기분 좋고 상쾌하다는 얼굴을 한 채로 마기휼은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았다. 깜박하고 땋은 머리를 푸는 걸 깜박했다. 그냥 감으면서 다 처리를 하자면서 머리를 풀면서 비누를 찾았다. 그걸로 머리를 대충 비비고 감은 후에 몸을 씻었다. 거품을 내는 것도 있어서 정말 좋았다.

이렇게 씻고 난 후 탕에 들어가면 딱인데. 하지만 일단 이걸로 만족해야겠지.

“좋다아―.”

몸이 개운하니 다른 잡생각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마냥 좋아서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이런저런 노래를 다 짬뽕해서 부르며 팔을 문질렀다. 갈색의 피부는 결이 좋았다. 손가락이 착착 달라붙는 느낌이 일품이라며 마기휼은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양손으로 배를 문질렀다. 허리도 문지르면서 다리도 씻기 위해서 허리를 숙였다. 바로 그때 갑자기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뭔가 싶었던 마기휼은 허리를 숙인 채로 뒤를 돌아봤다. 물이 눈에 들어가 따끔했다. 짤막한 소리를 낸 마기휼은 허리를 세우고는 양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자 비누 거품이 들어가서 더 따끔거렸다.

“아야얏.”

이 무슨 이상한 꼴인지 모르겠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물 아래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금방 비누 거품이 씻겨나간다. 그 상태로 마기휼은 재차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부옇게 올라오는 김 너머로 보이는 라울을 확인했다.

“……….”

순간 문을 안 잠갔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고리를 걸지 않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에 지나치게 안심해서 그냥 문을 닫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누군가 안에 있는데 저런 식으로 문을 열고 보는 게 정상인가 싶었다.

마기휼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문을 닫아주시지요.”

나오는 목소리가 굉장히 딱딱했다. 이쪽이 그걸 느낄 정도인데 라울에게도 전해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바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물줄기 아래에 서 있는 이쪽을 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게 얼마나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몸을 가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분위기 더 이상하게 될 것 같아 마기휼은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방정맞은 노래 소리가 들려와서 누군가 싶었을 뿐이다.”

“여기는 샤워하면서 콧노래 부르는 것도 안 되는 겁니까?”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노래를 부르는 이가 없었지.”

“정말 재미없는 놈들밖에 없었던 모양이로군요.”

장난스럽게 말을 던지면서 분위기가 풀리기를 바랐지만, 억양에 날이 서 있었다. 날카롭게 반문을 하는데 좋은 반응이 올 리 만무했다.

정말 싫었다. 이쪽의 모든 게 라울의 앞에 드러난 상황이고, 그리고 라울의 알몸을 보고 있는 것도 말이다. 그래. 너 진짜 몸 좋구나. 전체적인 신체 균형도 좋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계속해서 보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만 이 불편한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추운데요. 이만 닫아주시지요. 거의 다 씻어서 헹구고 바로 나가면 되거든요.”

“그렇게 하지.”

문이 닫히고 라울의 얼굴만 보이게 되었다. 어차피 몸통이 있는 부분만 가릴 수 있는 칸막이 문이었으니 연다고 해서 크게 추울 것도 없었다. ‘그렇지 않나?’라고 묻는 눈길로 마기휼을 바라보던 라울이 옆 칸으로 들어갔다. 바로 물을 틀고 고개를 든다. 눈을 감은 라울의 얼굴 위로 물줄기가 떨어지는 걸 본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젠장.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라울의 성기였다. 지나칠 정도로 훌륭한 물건이었다. 그렇다 해서 이쪽이 꿀리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왜 하필 내 옆에서 씻는 건지 모르겠다. 반대편으로 갔으면 좋았잖아.

마기휼은 재차 몸을 씻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불편하게 여겨졌다. 옆 칸에 있는 라울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게 열 받아서 이쪽도 모르는 척 몸을 씻고 싶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마기휼은 대충 몸을 헹구고는 도망치듯이 밖으로 나와야 했다.

유리문을 닫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정말 기가 막혀서 뒤를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물소리가 들리는 그곳으로 다시금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냥 똥 밟은 걸로 넘어가야 하는 건가? 그런 걸로 그냥 넘기기에는 거슬리는 부분이 묘하게 많은데? 이내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해버리기로 했다. 마기휼은 당장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내고는 옷을 끄집어냈다. 입었던 옷을 다시 입는 게 조금 거시기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여기서 나가야 했다.

너무 급하게 옷을 갈아입는다고 바지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는 바지를 주욱 올린 마기휼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바구니에 던지듯 집어넣고는 샤워실을 빠져나왔다.

삼국 중 하나인 노르디아의 수도는 안베르다. 때문에 공항의 규모는 삼국의 그 어느 곳보다 크고 디자인이 뛰어나며 동시에 편의 시설을 다양하게 갖춘 것으로 유명했다. 더불어 뛰어난 인재들이 많기로도 유명해서 승무원들이 하나같이 미남 미녀인 걸로도 정평이 나 있었다. 한번쯤 내려가서 구경을 하고 싶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타고 있는 건 군함이었다. 안베르 공항을 지나 곧장 중앙군으로 이동하는 것에 마기휼은 애석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달리 구경거리가 많았다. 동그란 창에 달라붙은 채로 마기휼은 높은 건물들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색다른 느낌이었다. 이리 보니 자신이 정말 촌놈이었다는 걸 실감하기도 했다. 한 곳에 내내 정착해 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막상 바깥으로 나와 보니 더 많은 걸 직접 보고 만지고 싶어진다. 물론 이런 감정도 한 곳에 콕 처박혀 있으면 금방 사라져버리겠지만 말이다.

아래를 살펴보는 동안 점점 머리가 멍해진다. 그렇게 자고도 왜 졸린지 이해를 못 하겠다. 멍한 얼굴로 있던 마기휼은 바닥이 미미하게 떨리는 걸 감지하고는 중얼거렸다.

“착함인가.”

안베르로 들어가게 되는 건가.

안베르에 도착하고 난 후, 어떤 식으로 행동을 취할지 머릿속으로는 정리를 다 해 뒀다. 일단은 마리아가 어찌 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 도망을 치는 거다. 라울의 존재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도 안베르에 도착한 이상, 달리 할 일이 많을 터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틈을 이용해서 잽싸게 도망을 가버리면 될 일일 거다.

마기휼은 눈을 반짝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파이팅. 마기휼. 넌 할 수 있어.

본인만 알아들을 수 있는 파이팅을 외치는 마기휼이었다.

중앙군의 군함은 착함하고 난 후 일정하게 받는 검사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반에 착함하는 장소는 늘 정해져 있었고, 철저한 보안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 한 무리의 수상한 이들이 나타났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은 중세 기사와 같은 복장을 입고 있었고, 가운데에 선 소년은 너무도 아름다운 용모의 소유자였다. 금발에 녹안을 지닌 소년은 18세 정도였다. 낭창한 몸매를 지니고 있다 보니 언뜻 보면 여성 같기도 했다.

하여튼 눈에 띄는 존재들이다 보니 기름과 땀으로 범벅이 된 정비사들은 지나칠 때마다 그들을 흘깃거렸다. ‘저런 부르주아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리 묻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자들 몇몇은 바닥에 침을 뱉고는 했다. 본인들이 일하는 신성한 장소에 저런 것들이 있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하지만 그들이 불만이듯 미소년도 지금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럽고 구역질 나는 냄새가 나.”

날이 선 목소리를 들은 주변의 사내들은 표정의 큰 변화가 없었다. 소년이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 듯 행동을 취했다. 하지만 이곳의 관리 차장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콧수염을 길게 기른 40대 중반의 사내는 보기에도 지극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비벼 댔다.

“이것은 기름 냄새입니다. 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안에 들어가 계시지요.”

“안 돼. 나는 라울이 들어오는 걸 눈으로 봐야 해. 그가 무사히 귀환하는 걸 가장 먼저 축하해주고 싶단 말이야.”

“라울 대령님께서는 곧 도착하시게 됩니다. 상공에 도착한 것을 보고받은….”

“시끄러워. 입 다물어.”

차장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이 그리 좋지가 않았다. 마음 같아서야 그도 이 철부지 귀족 나부랭이를 끌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놈의 신분이 뭔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게 참 답답하다며 한숨만 푹푹 내쉬려니 미미한 바람의 흔들림이 감지되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봤다. 멀리 검은 군함이 한 대 눈에 들어왔다. 그걸 확인한 소년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도착하는 거로군.”

군함이 좀 더 또렷하게 보임에 따라 바람도 훨씬 더 강하게 불었다. 머리카락이 온통 흔들리는 통에 스타일이 망가지게 생겼다. 인상을 쓴 소년은 옆에 선 이에게 턱짓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 사내가 긴 막대를 앞으로 세우고 아래를 눌렀다. 그러자 동그랗게 펴진 천이 소년의 앞을 막아줬다. 덕분에 바람이 덜 불게 되었다.

짤막한 코웃음을 친 소년은 품 안으로 한 손을 밀어 넣었다. 바깥으로 나온 손에는 사진이 한 장 들려 있었다. 20대 중반의 청년 사진이었다. 갈색 피부에 보랏빛 눈동자. 그리고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지닌 청년의 웃는 얼굴에서 장난스러운 성격이 묻어났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인 것 같지만 유심히 보면 독특한 구석도 있었다. 계속 보게끔 하는 오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라울이 좋아할 만한 얼굴이야.”

소년 라우젝은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조금 더 강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라울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감각이 전해졌다.

“고모님은 역시나 대단하다니까.”

어쩌면 이렇게 라울의 취향을 단박에 찾아낸 건지 모르겠다며 그는 사진을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부는 바람의 힘이 약해진 것을 확인하고는 “치워라.”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을 막는 천막이 치워지고 맞은편에 있는 텅 빈 공간을 가득히 채우는 군함이 보였다.

중앙군에서도 탑클래스에 해당하는 강력한 군함이다 보니 그 위용이 대단했다. 만족한 표정인 라우젝은 당장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군함이 착륙하자 안에 타고 있던 이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덕분에 마기휼도 자연스럽게 이동할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그는 마리아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혹여라도 잘못 물었다가 수상한 사람 취급을 받으면 곤란했다. 때문에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이려 했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군함의 출구 쪽에 몰래 숨어서 바깥을 살피는 게 고작이었다.

어쩌면 마리아에 대해선 잊어야 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녀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이쪽 입장 곤란해지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테니 말이다. 사람이라는 건 결국 자기 밥그릇이 먼저이니까.

점점 암울해지는 상태였다. 이러다가는 지구 반대편도 뚫고 나가겠다며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데 아래가 소란스러워진다. 마기휼은 그쪽을 내려다봤다. 동시에 그가 숨어 있던 곳 바로 아래 입구에서 나오는 마리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정말 놀라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를 뻔했다. 가까스로 그걸 참고 가만히 있는 동안 마리아는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밖으로 나가버렸다.

걸음걸이가 그리 불편한 것 같지는 않았다. 주변 군인들이 그녀를 나쁘게 대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문신을 지우는 작업이 참으로 고되고 힘들었을 텐데 말이다. 굳은 얼굴로 있던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여기까지다. 마리아와 관련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말이다. 무표정을 한 채로 있던 마기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몰래 빠져나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주변을 살펴보던 그는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뒷문을 찾기보다는 그냥 정면 돌파를 하는 게 훨씬 더 현명한 방법이 될 터였다.

자연스럽게 나가서 그냥 딴 데로 빠지는 거다. 마기휼은 차분하게 순서를 기다렸다. 그리고 일단의 무리가 짐을 옮기는 걸 확인하고는 급히 그 옆으로 붙어 섰다.

“도와줄까?”

동료 세 명과 짐을 옮기던 군인은 뒤에 달라붙는 마기휼을 흘겨봤다. 특이한 외모였지만 군복을 입고 있었다. 더군다나 착함한 군함 내에 수상한 이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그 얼굴은 느슨해졌다.

“못 보던 얼굴인데?”

“라울 대령님과 같은 소속이었어. 이번에 좀 신세를 졌지.”

“아, 누군지 알 것 같아. 이번에 새롭게 안베르로 발령이 나는 건가?”

“그렇게 되지 않겠어?”

군인이 무슨 말을 하든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넘기면 그만 이었다. 일단은 바깥에까지 자연스럽게 나가면 되었다. 그러고 나서 필요한 것은 빛과 같은 스피드다. 반드시 여기서 빠져나가 보이겠다며 마기휼은 눈을 빛냈다. 그리고 군함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게 되었을 때 보이는 전경에 말문이 막혔다.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공장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있는 건 군함이었다. 최신식 군함 위로 줄이 달려 수리를 받거나 새롭게 뭔가가 장착되었다. 코를 찌르는 건 연료와 쇠 냄새. 쿵쿵거리고 동력이 돌아가는 소리가 실감 나게 났다.

북방군의 요새와 비교가 될 만한 거대 공장이었다. 이런 곳에서 군함이 만들어지는 건가. 마기휼은 기가 질려 나직이 중얼거렸다.

“굉장하다.”

“여기는 처음 오는 거야?”

촌놈이라는 평가를 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처음이니까.

마기휼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걸 본 군인은 자부심이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군함은 언제나 늘 여기에 가장 먼저 착륙하게 되어 있어. 기본적인 검사를 받고 다시 중앙군으로 이동하게 되지. 신분이 정확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야. 라울 대령님과 아는 사이라 해도 거기 들어가는 건 좀 힘들 거야.”

“그렇겠지?”

그보다 나 전혀 관심 없거든? 하지만 겉으로는 정말 부러워 죽겠다는 얼굴인 마기휼이었다. 덕분에 군인의 어깨로 더 힘이 들어갔다. 지나치게 들어가서 저러다가 뒤로 넘어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군함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이 닿았을 때 마기휼은 당장 짐에서 손을 놨다.

“아, 나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각났어.”

“읏?!”

갑자기 무게가 증가하자 군인은 당황한 듯 비틀거렸다. 그런 그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마기휼은 잽싸게 몸을 돌렸다.

됐다. 이걸로 무사히 탈출할 수―

“어디를 가. 마기휼?”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누가 쫓아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뒤를 돌아본 채로 바쁜 걸음을 옮기던 마기휼은 움찔했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너무도 아름다운 사내를 발견하고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굽실거리는 금발 머리카락은 어깨쯤에서 찰랑거리고 있었고 하얗고 주먹만 한 얼굴 안으로 눈, 코, 입이 다 들어가 있었다. 하얀 제복을 입고 기품 있는 태도로 서 있는 걸 보자니 마치 동화책에서 방금 빠져나온 왕자님 같기도 했다. 이런 기름 냄새 나는 곳하고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가 방금 자신의 이름을 부른 건가 싶었던 마기휼은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세요?”

그보다 절 아시나요?

전혀 모르는 얼굴이 분명한데 너무도 당연한 듯 아는 척을 하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지금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만 끔뻑이려니 아름다운 소년의 입술 양 끝이 올라갔다.

“붙잡아.”

“억?”

붙잡으라니? 내가 붙잡아야 하는 거야?

얼빠진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양팔이 잡히고 몸이 부웅 떴다.

“우악?!”

소리를 지른 마기휼은 사색이 되어 양옆을 쳐다봤다. 그러자 각이 잘 잡힌 얼굴이 보였다. 준수한 외모에 몸도 좋은 덩치들이 지금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인지라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소년이 상큼하게 웃으며 옆을 가리켰다.

“그러면 가자.”

“가, 가기는 뭘 가자는 거야?!”

지금 장난하자는 거지?

마기휼은 저항했다. 다리를 휘두르며 체중을 뒤로 실었다. 팔을 잡고 있던 것들이 휘청이는 것 같았으나 끝끝내 손을 놓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다른 놈들이 나타나 마기휼의 두 다리를 붙잡아 위로 올렸다. 마치 먹이를 잡은 원시인들처럼 들고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마기휼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이것 놔! 빌어먹을! 이건 인신매매라고!”

당장 라울에게서 도망갈 생각만을 하고 있었지, 이런 상황은 조금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굉장히 당황스러웠기 때문에 제대로 힘이 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굉장한 속도로 운반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기휼은 마차 안으로 던져졌다.

“으헉?!”

이상한 비명을 지른 마기휼은 간신히 얼굴부터 떨어지는 걸 피할 수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자 문이 닫힌다. 그리고 마차가 움직였다.

놀란 마기휼은 당장 문으로 달려가 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손잡이를 잡아 흔들어도 마찬가지였다. 문짝을 떼어 내지 않는 이상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마기휼은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이게 어찌 된 거야? 설마 나 납치를 당한 거야?

“후훗.”

진지한 이쪽과 다르게 유쾌하게 울리는 웃음소리에 마기휼은 당장 고개를 돌렸다.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가 크게 원을 그리며 뒤로 가지런히 떨어졌다. 눈을 크게 뜬 마기휼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얼굴이 유쾌하기 짝이 없다는 듯 다리를 꼬고 앉은 소년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지? 가만히 있으면 좋은 곳으로 가게 될 거야.”

“……너 뭐야.”

이내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시끄러워. 목소리 크게 내지 마.”

“어떻게 목소리를 크게 안 낼 수 있겠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말이야!”

납치한 주제에 왜 그렇게 당당한 거야. 그보다 어린애 주제에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건데? 딱 보아하니 귀족인 것 같은데 나도 귀족이거든? 애초에 평민은 아니란 말이야!

따져 묻고 싶은 말은 많아도 워낙 당황스러워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버버거리는 마기휼의 모습에 소년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후후- 하고 웃었다.

“신선해. 지금껏 나에게 이런 무례한 태도를 취한 이들은 없었어.”

“이거 미친놈 아니야?”

이쪽도 저런 이상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냥 무작정 치고 덤비는 것보다 훨씬 더 질이 나빴다. 엮여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을 거라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마기휼은 소년에게 달려들 태세를 취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당장 마차를 세워.”

“싫다면?”

“그 예쁜 얼굴 절반에 커다란 멍이 들게 될 거다.”

“그리고 넌 단두대에 서게 될 거야.”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마기휼을 돕기 위해서 소년의 표정이 비열하게 변했다.

“천한 놈이 왕통에 손을 대었으니 목숨 하나는 우습지. 네 가족들까지 죽이고 싶다면 어디 뜻대로 해봐라.”

나직하게 속삭이는 말이 지나치게 귀에 잘 들어왔다. 정말 저 아름다운 얼굴에서 나오는 말인가 싶었다. 일은 다 제가 치고서 뒤처리는 모두 이쪽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어이없었다. 문제는 저 소년이 허풍을 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에 있었다. 말하면 정말 그리할 것 같았다.

도대체 뭐지? 빚 말고는 안제크와 딱히 연관되는 일이 없는데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일단은 사건 경위를 알아봐야 했다. 왜 저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놈이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에 대한 확인 절차가 필요했다.

“너 진짜로 정체가 뭐야?”

“내 얼굴을 보고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잖아. 무엇보다 너처럼 예쁜 얼굴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입을 반쯤 벌린 채로 가만히 있던 마기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잖아.

스스로에게 반문을 하는 동안 재차 소년의 얼굴을 살폈다.

“이제 깨달은 모양이로군.”

“……진짜야?”

되묻는 말에 라우젝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지금 네가 무슨 상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맞을 수도 있어. 그리 말하는 눈빛을 보내며 어깨를 으쓱인다. 눈이 가늘게 휘어지고 붉은 입술이 살며시 올라갔다. 웃는 얼굴로는 잘 모르겠지만 정색을 했을 때에는 분명 그와 닮았다. 라울 대령과 말이다.

그 순간 마기휼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이런 젠장맞을!!”

날카로운 마기휼의 외침과 유쾌한 웃음소리가 섞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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