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계기판 위로 점점이 붉은 점이 나타났다. 그걸 확인하는 즉시 통신병에게 신원을 확인해 보라 하자 화물선 아니면 운송함이었다. 이쪽은 삼국이 관리하는 영토 내였다. 수상한 배가 없기는 할 테지만 확인을 해 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쪽을 살펴보던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사령관실 정면으로 강화 유리가 깔려 모든 전경이 눈에 다 들어왔다. 그 아래로 4명이 나란히 앉아 주변을 탐색해 그때마다 보고했지만 라울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뮤투 마을을 경유한 후, 인어의 늪으로 이동하는 걸 확인한 자가 있다 합니다. 인어의 늪은 지형이 험한 데다 배를 댈 수가 없어 전부터 암암리에 불법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통신병의 설명에 라울은 물었다.
“배를 댈 수 없다면 거래를 할 때 어떤 방식으로 하는 거지?”
“이런 하늘을 뜨는 배가 아닌, 진짜 배를 타고 가는 것이지요.”
“진짜 배라.”
바다를 항해할 때 쓰는 배를 말인가. 그렇군. 그런 걸 타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쪽 탐색망에 걸리지도 않을 터였다. 동력이 아닌 물리적인 힘. 그거라면 가장 안전했다. 동시에 원시적이기도 했다.
이쪽이 볼 때에는 참으로 쓸데없는 힘의 소모밖에 되지 않는 행위였으나 저들에게는 아닌 건가.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서 그런 일도 기꺼이 할 수 있다는 건가.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2시간 반 후에 도착하게 된다. 인근에 배를 대고 바로 늪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수색에 나설 군인들에게 사전에 준비할 수 있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라울은 팔짱을 낀 채로 정면을 바라봤다. 빠르게 멀어지는 구름과 그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이 시야 가득히 펼쳐졌다. 라울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만끽할 수 있었을 텐데. 참 아쉬운 일이다.
“라울 대령님. 본가로부터 연락입니다.”
“본가라고?”
명령을 수행 중에 있었다. 그럴 때에 왜 이쪽으로 연락을 취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연락을 받지 않는다 한들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거슬리는 문제 사항이 있었다. 다른 때라면 절대로 받지 않았겠지만, 지금만은 조금 다른 경우라 할 수 있었다.
라울은 아래로 내려갔다. 통신병이 내미는 동그란 통을 귀에 대고 바로 “라울입니다.”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왜 바로 연락을 받지 않는 거니? 나를 피할 생각은 아니겠지?]
듣기 좋은 온화한 목소리. 한번 들으면 쉽사리 잊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이 목소리를 듣고 자라지 않았던가.
라울은 긴 한숨을 쉬었다.
“고모님. 공무 집행 중입니다. 이런 연락은 곤란합니다.”
[곤란한 건 나야. 모처럼 널 위해 선물을 준비했는데 보아하니 로노베에 군함을 잠시 댔다가 바로 출발을 했더구나. 그런 식으로 신부를 못 찾았다고 나를 속일 생각이었니?]
“고모님이야말로 절 속이셨더군요. 6살짜리 어린애를 염두에 두고 절 이리로 보내신 겁니까.”
[나를 범죄자로 만들고 있구나. 내가 고른 신부는 너보다 3살 연상이란다.]
“……연상이라고요?”
라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일까. 곁에 있던 통신병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라울은 다른 쪽으로 가 있으라는 손짓을 보냈고, 통신병은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고모님. 당신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절 놀리고 싶으신 거라면 솔직하게 그리 말씀하셔도 됩니다.”
[나는 널 놀리지 않아. 다만 네 취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이런 성가신 일을 벌이는 거야. 내가 친절하게 네 신부의 이름까지 적어서 보냈잖니?]
그래. 적어서 보냈었다. 마기휼이라고 말이다.
라울이 대답 없이 침묵으로 일관된 자세를 취해도 그녀의 말은 계속되었다.
[알아보니 같은 군에 소속된 자더구나. 네가 군에 들어가자마자 몇 개월 동안 그 아래에 있기도 했고 말이야. 바로 그 사람이란다.]
“그 사람이 고모님이 말씀하신 자라는 말입니까.”
[그래.]
라울은 눈을 감았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두고 장난을 치고 싶을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농을 걸어 자신이 어떤 반응을 취할지를 두고 보려는 거다. 말도 안 되게 말이다.
어렸을 적에는 그녀에게 속아 몇 번이나 곤란한 일을 겪었지만 더는 아니었다. 라울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는 이미 이 군함에 타고 있습니다.”
[그래? 만나서 바로 군함을 띄운 거로구나. 너도 참, 그런 거라고 솔직하게 말을 해주지 그러니.]
“고모님 장난은 하지 마십시오. 그는―”
[내가 왜 이러는지 너도 이미 알고 있잖니.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거니?]
순간 라울의 표정의 굳어졌다. 그의 분위기가 변하는 걸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슬슬 인정하렴. 난 너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것뿐이야. 외면하고 숨기려고만 하는 것은 결국 너 자신을 망칠 뿐이라는 걸 명심하렴.]
그녀의 말이 라울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침묵한 채로 가만히 있는 동안 통신은 끊겼다. 통신병은 그걸 알 거다. 그럼에도 통신기를 내려놓지 않는 라울 때문에 그는 계속 어정쩡한 채로 서 있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라울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굳어 있었다. 보기에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이쪽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겠지. 그리 생각을 하며 눈을 굴리고 있으려니 라울이 통신기를 내려놨다.
“통신 쪽으로 이상한 것이 잡히면 바로 보고를 해라.”
“네. 알겠습니다.”
통신병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난 후 라울은 본인 자리로 돌아왔다. 뒷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군함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고모님이 한 말이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잡념이 생겨난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럴 때 무슨 일이 터지면 그릇된 명령을 내려 모두가 위험해지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노드만. 잠시 동안 네가 내 자리를 지키고 있어라.”
“네. 대령님.”
고개를 끄덕인 노드만이 기다렸다는 듯 라울이 서 있던 곳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등 뒤에 손을 돌린 채로 서 있는 그 얼굴로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드러났다. 그걸 확인한 후 라울은 바깥으로 나왔다.
눈을 내리뜬 채로 있는 그 얼굴은 굳어 있었다. 하지만 원체 표정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다 보니 그 차이가 확연히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다만 지나가다 그를 보게 된 이들이 황급히 경례를 하다가도 ‘박력 죽이네.’ 라는 생각을 할 따름이었다.
라울은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가 마기휼을 두고 나왔던 방을 찾았다. 문을 열었을 때 그 방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는 바로 밖으로 나왔다.
안색이 굳은 그는 문 옆에 붙은 붉은 버튼을 눌렀다.
[네. B3구역 담당자입니다.]
“라울이다. 이 방에 있던 자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나?”
[마기휼 소령에 대해 물으시는 거라면 그는 지금 대령님의 방에 가 있습니다.]
“……내 방이라고?”
뉘앙스가 묘한 것을 듣고 일이 잘못된 것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조용히 있던 이는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뭔가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하시더니, 불현듯 떠오른 것처럼 대령님께서 그리로 가 있으라 했다고 하시기에 방을 알려드렸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
라울은 바로 대답이 없었다. 입을 다문 채로 있는 게 더 무서웠다. 담당자는 곧 죄송하다는 사과를 했지만 라울은 담담했다.
“괜찮다. 내가 그리로 가서 확인하겠다.”
말을 하고 난 후, 라울은 몸을 돌렸다.
여기에 있을 줄 알았는데 방으로 간 건가. 다른 군에서 이런 경우가 발생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었다. 이쪽 소속이 아닌데도 사령관의 방을 찾는다라. 얼마나 또 태연하게 말을 했을까. 그러니 사람들이 속아 순순히 자신의 방 위치를 알려준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기어이 방으로 들어가 지금쯤 침대에 누워 있을 거다. 그리고 라울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곳에 와 있으라 했다 하셨습니다.”
보고를 하는 이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실수한 건가. 그리 말하고 싶은 얼굴로 서 있는 자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라울은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는 사내를 내려다봤다. 등을 돌린 채로 있어 그 표정까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속 편한 상태일 거다.
별다른 말없이 마기휼을 보기만 하는 라울의 모습에 군인은 눈을 굴렸다.
“대령님. 제가 실수를 한 거라면 말씀해주십시오.”
“아니다. 되었으니 이만 나가 봐라.”
“네. 알겠습니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긴 했으나 크게 혼나지 않은 게 어딘가 싶기도 했다. 안심하는 한편으로 대령의 침대 위에 떡하니 누워 있는 저 사내의 정체가 뭔가 싶었다. 궁금했으나 물을 수 없어 눈치만 살피던 그는 바깥으로 나갔다.
군인이 나가자마자 라울은 한숨을 쉬었다.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고 그 위에 앉은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얼굴 또한 준수하기 그지없으나 그 위로 알게 모르게 그늘이 져 있었다. 한동안 그리 있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뒷모습이 날씬했다. 언뜻 보면 사내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도 그렇고, 갈색 피부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평범한 듯한 인상도 자꾸만 보면 꽤나 단아한 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는 그 모든 특징을 라울은 알고 있었다. 처음 그를 본 순간부터 말이다.
“…….”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마기휼을 응시하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마기휼의 한쪽 어깨를 잡아 뒤로 당겼다. 몸이 돌아가도 마기휼은 눈을 뜨지 않았다. 편한 자세를 취하게 된 그는 나직이 코를 골기도 했다.
부친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동안 제대로 자지 못했다면 이런 상태가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라울은 눈을 내리떠 마기휼의 살짝 벌려진 입술을 쳐다봤다. 그 사이로 조금씩 숨결이 토해 내지고 있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것도 잠시, 라울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기휼.”
독특한 이름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에는 바로 기억을 할 수 없으나 부르다 보면 입에 달라붙는다. 마치 그처럼 말이다.
“마기휼. 눈을 떠라.”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바로 배 위에서였다. 두 번의 이름을 부르고 난 후, 마기휼이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의자에 앉은 그를 다른 쪽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눈을 떴다. 지금처럼 말이다.
위로 올려진 눈꺼풀 아래로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 위에 서린 것을 읽어낸 라울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와 같군.”
마기휼은 인상을 썼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그리 묻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에 라울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배 위에서도 그렇고, 처음 당신과 만났을 때에도 날 그런 눈으로 봤지.”
처음 마기휼과 같은 방이 되었을 때의 일이 기억난다. 창고로 쓰는 방이 있기는 하나 첫날부터 각방을 쓰면 안 될 듯싶어, 억지로 같은 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하지만 적응이 되지 않아 바로 잠도 오지 않았다. 늦은 새벽 눈을 뜬 채로 누워 있다가 이쪽으로 몸을 돌리는 마기휼과 눈이 마주쳤다. 별생각 없던 라울은 바로 굳어지는 마기휼의 표정을 보는 순간 솔직히 불쾌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마치 일부러 엿보고 있던 치한을 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다음 날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웃으며 말을 거는 마기휼 덕분에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지만, 그 이후로 마기휼과 같이 방을 사용하면서 일부러 그를 보려 하지 않았었다. 재차 그런 불쾌한 기분이 드는 시선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라울도 뭔가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물었다.
“사내가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싫은가?”
응시하는 보랏빛 눈동자 속으로 알게 모르게 몽롱함이 감돌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일시에 걷혔다. 또렷한 힘이 실린 눈동자로 가식적인 미소가 그려졌다.
“징그럽지 않습니까. 제가 대령님의 침대에서 자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발로 걷어차는 걸로도 충분한데 굳이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은…….”
뒷말을 흐리며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라울은 바로 옆에 앉은 상태로, 그의 다른 손은 마기휼의 허리 부근에 놓여 있었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자세도 이상했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오해하기에 딱이었다. 자연스럽게 마기휼의 미소는 경직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를 할 것 같군요.”
“무슨 오해를 하겠나. 자네와 나는 사내인데. 아무도 오해를 하지 않아.”
마기휼은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개방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흠잡힐 데 없는 유능한 대령님께서 저 때문에 남색을 즐기신다는 소문에 연루되는 걸 원치 않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대령님의 추종자들이 제 목을 댕강- 하고 잘라버릴 겁니다.”
그놈들이면 그리하고도 남았다. 혹 모른다. 아예 화형을 시켜버리겠다고 날뛰어 댈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떨어져주지 않을래? 그런 마음을 담아 라울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라울을 확인한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확실히 똑바로 올려다보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난 얼굴이기는 했다. 그런 멋들어진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눈길이 닿는 부위가 간질거린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이 든 마기휼은 눈을 굴렸다.
똑바로 라울을 쳐다볼 수 없었다. 차라리 화를 내는 편이 나았다. 저렇게 말도 없이 보면 나는 어쩌란 거야.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마기휼은 그냥 일어날까도 싶었다. 어쩌면 고상한 라울 대령은 괜히 목청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이쪽이 눈치껏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걸지도 모르지. 마기휼은 양손을 펼쳐 바닥을 눌렀다. 그리고 일어나려는 순간 커다란 손 하나가 가슴에 닿았다.
마기휼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가만히 있나 싶던 그는 천천히 눈을 내리떴다. 라울의 손이 가슴에 닿아 있었다. 다음으로 라울을 쳐다봤다. 라울의 눈동자는 마기휼의 가슴에 올려진 자신의 손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내 그는 중얼거렸다.
“가슴이 없군.”
서서히 숨을 들이켰다. 그제야 멈춰져 있던 뇌가 돌아갔다.
가까스로 마기휼의 입술 꼬리가 완만한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아직도 그런 소리십니까? 전 진짜로 남자라니까요.”
자연스럽게 일어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마기휼은 라울의 손을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자연스럽게 뒤로 몸을 물리고 벌떡 일어나선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라울을 내려다봤다.
“고모님의 말씀에 너무 연연하지 마십시오. 대령님 말대로 장난을 치고 싶으신 모양이지요.”
마기휼은 입술의 양 끝을 올렸다. 조금의 수상함이나 이상함이 느껴지지 않는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라울은 마기휼을 올려다봤다. 마기휼의 가슴이 아닌 침대 바닥을 누른 채로 있던 그의 손은 천천히 움켜쥐어졌다. 라울도 일어섰다. 자연스럽게 마기휼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갔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사내가 위에서부터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없이 응시하는 그 눈빛이 유난히 깊다.
묘한 불편함을 느끼며 마기휼은 슬그머니 눈을 내리떴다.
“곧 인어의 늪에 도착하게 된다.”
“인어의 늪?”
깊이 생각을 할 것도 없었다.
어린애도 알만큼 위험한 장소였다. 늪이라고 하나 강도 있었다. 하지만 강이라 해서 방심하고 나무배를 타고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은 어느새 늪에 다다르게 되고 나아가지 않는 배의 상태에 이상함을 느끼며 노를 젓다가 점점 가라앉게 된다. 그때에는 헤엄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손과 발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인어에게 감싸인 채로 저 깊숙한 늪 아래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런 커다란 군함은 착함할 장소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 곳에 왜 가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라울은 그곳으로 가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그곳에 숨어 있는 마리아를 수색하게 될 거다. 만약 그곳에 그녀가 있다면 생포할 예정이다.”
보랏빛 눈동자가 올려다본다. 그런 그를 도발하듯 라울이 물었다.
“다시금 그녀를 도와줄 건가?”
“그때에도 그녀를 도와줄 마음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 후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뜨는 마기휼의 안색은 굳어 있었다. 그걸 확인한 라울은 “그래. 알았다.”라고 말하며 몸을 돌렸다. 대령이 나가는 순간 마기휼은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내 그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린다. 쪼그리고 앉은 마기휼의 양손은 조금 전 라울의 손이 닿았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저 자식은 도대체 뭐야.”
중얼거리는 마기휼의 얼굴은 이도 저도 아닌 표정을 짓고 있어, 언뜻 보면 굉장히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인어의 늪 주변을 감싸고 있는 들판을 하나 발견해낼 수 있었다. 위치나 각도를 봤을 때 군함 한 대 정도는 어찌 댈 수 있었다. 들판 아래의 절반이 바위로 형성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은 라울은 당장 그리로 착륙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별 어려움 없이 착륙한 군함의 옆구리가 열리고 배가 내려졌다.
배는 곧장 인어의 늪과 연결이 되는 강둑으로 운반이 되었고 군인들도 군함에서 내렸다. 배는 모두 다섯 척. 그리고 이동하는 군인들은 7명씩 35명이었다. 그곳에 라울도 가기로 했다.
“조심하십시오.”
노드만이 건네는 지휘봉을 받아든 라울은 묵묵히 무기를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필요에 따라 열 체크를 할 수 있는 고글을 쓴 라울은 노드만을 돌아봤다.
“문제 상황이 발생하면 바로 연락을 하도록.”
“물론입니다. 그런데 정말 직접 가셔야겠습니까?”
라울은 모든 준비를 끝냈다. 간소한 바지와 경량화 된 군화. 민소매지만 방탄 재질의 검은 티와 각종 무기들. 거기다 조금 전에는 고글까지 썼다. 이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라울은 조용히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바라보는 시선이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걱정이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안색이 굳은 노드만을 흘겨보며 라울은 열린 해치 쪽으로 걸어갔다.
“대령님. 손을 잡아드리겠습니다.”
입구에 서 있던 군인 하나가 손을 뻗었지만 라울은 무시했다. 통로를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쪽으로 군인들이 줄을 맞춰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오른쪽에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자를 발견한 라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는 곧장 그리로 갔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다른 군인들과 달리 느슨하게 서 있는 건 마기휼이었다.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던 마기휼은 막상 라울이 앞에 서서 내려다보자 그쪽을 쳐다봤다. 올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 안쪽에 서린 껄끄러움마저 숨길 수 없었다.
“언제 나온 거지?”
“방금 나왔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던가.”
“대령님과 함께 온 동료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가. 로노베에서 직접 군함에 태웠고, 자신의 방을 당당하게 묻던 마기휼이었다. 그를 수상하게 여기며 그의 행동에 제지할 리가 없었다.
마기휼은 긴장된 눈으로 라울을 쳐다봤다. 다시 군함으로 들어가라 하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그는 별말 없이 왼쪽으로 걸어갔다.
“다들 타야 할 배의 번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이동한다. 오늘 우리가 잡아야 할 것은 여자와 남자다. 외형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겠지. 혹시라도 그들을 생포할 수 없다면 그 자리에서 사살해도 좋다. 다들 움직여라.”
라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군인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뒤에서 쫓아가는 마기휼의 옆으로 라울이 붙어 섰다. 최대한 수상하지 않도록 은밀히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마기휼은 붙어선 라울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라울이 물었다.
“마리아를 빼돌릴 생각인가.”
“아니요.”
“그렇다면 왜 따라오는 거지?”
“대령님을 지켜드리려고 따라 움직이는 겁니다.”
라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고 묻는 눈빛에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휘었다.
“제가 있으니 안심하고 마음껏 행동하십시오.”
라울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속인지 모르겠군.”
무슨 속이긴. 이번에는 별다른 음모는 없었다. 이쪽이 말을 한 그대로 라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쫓아가려는 것뿐이었다.
한 번 더 그의 목숨을 구해줘야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더 강하게 생색낼 필요가 있었다. 안베르로 가서 이놈의 고모님인가 뭔가 하는 여자를 애초에 만나지 말아야 했다. 그 여자를 만나게 되면 일이 더 복잡해질 것 같은 막연한 예감이 든다면서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노를 젓자 질척한 액체가 주욱 밀려났다. 맑은 물이 아니라 점액질 액체였다. 때문에 그걸 밀기도 힘들고 그런 곳 위에서 배를 타고 있는 입장도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넓은 배에 앉은 군인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굳은 채였다. 노를 저으면서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총을 끄집어 들 태세였다. 그런 그들과 달리 가운데에 앉은 마기휼은 느긋했다.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마기휼은 그들에게 있어 미지의 존재였다. 도대체 누군가 싶어 흘깃거리던 몇몇은 가장 앞에 있는 라울을 의식하고는 이내 더 열심히 노를 저었다.
라울은 고글의 측면을 만졌다. 그 상태로 숲 너머를 찬찬히 살폈다. 아직까지 수상쩍은 것은 없었다. 고글을 원 상태로 돌린 그는 뒤를 돌아봤다. 하품을 하던 마기휼은 라울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웃는 그 얼굴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마기휼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듯 라울은 재차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툭 내밀었다.
젠장. 하품도 못 하냐.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해도 내색은 할 수 없었다. 일단 이쪽은 여러모로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제 성질머리 다 어필하고 다닐 수 없는 처지다. 마기휼은 근처에 앉아 있는 군인을 확인했다. 하나같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하다 이거지? 하지만 마기휼이 보기에 그런 그들의 행동은 쓸데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말을 해줄 필요는 없었다. 때가 될 때에 슬쩍 언질을 해주자며 코를 훌쩍이려니 통신병이 라울을 올려다봤다.
“라울 대령님. 서쪽으로 간 이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수상한 이들은 없다 합니다.”
통신병의 보고를 들은 라울은 말이 없었다. 그저 정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 본다고 해서 뭔가가 나타날 리 없는데 말이다.
지금이 기회라며 마기휼은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찾기 힘들 겁니다.”
기다렸다는 듯 라울이 고개를 움직였다. 뒤를 돌아보는 라울의 눈빛은 사람을 주눅 들게 했다. 그의 앞에서는 정확한 사실만을 전해야 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해서 지금 이쪽이 하려는 말이 거짓인 것도 아니었다.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원래 불법 거래라는 것은 땅이 있고, 하늘이 막히고, 주변이 조용한 곳에서 실시되어야 하지요. 그런 걸로 봤을 때 그들은 배를 이용하지 않을 겁니다. 튼튼한 두 다리가 훨씬 더 이동하기에 수월하다는 걸 알 테니까요.”
마기휼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배를 띄운 질척한 물을 내려다봤다.
“늪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벌집과도 같은 형태입니다. 길을 아는 이들에게는 이곳은 평지와도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늪의 길을 통해 재빨리 이동을 해서 물건을 받고 도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지요. 배를 모두 띄워서 이렇게 이동할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곳에 배를 대고 이동하는 게 더 나을 겁니다.”
마기휼은 입을 다물고 라울을 쳐다봤다.
이쪽은 할 말을 전했으니 판단은 네가 내려라. 그리 말을 하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 침묵하고 있던 라울은 앞줄에 있던 군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배를 대도록 한다. 육지로 이동한다.”
“알겠습니다.”
이쪽 말을 듣는 건가. 의외였기 때문에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하지만 라울은 정면을 보고 있어 지금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마기휼은 웃었다.
갑작스러운 건의를 했을 때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들어주는 상관이 현명한 것이었다. 만약의 1%라는 것을 염두에 두는 자야말로 아래에 있는 부하를 덜 죽일 수 있었다. 그런 걸로 따지면 라울은 꽤 괜찮은 상관인 것 같았다.
천천히 배가 육지에 닿았다. 풀을 걷고 더 깊숙한 곳으로 배를 대는 것에 성공한 군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로 올라가야 했지만 앞에 넝쿨이 있어 머뭇거려지는 모양이었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이 품에서 칼을 꺼냈다. 반으로 접혀 있던 걸 똑바로 펴며 앞에 서 있는 군인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어냈다.
“비켜봐.”
갑작스러운 말에 뒤를 돌아보는 군인은 다소 경직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 군인을 어깨로 밀며 마기휼은 칼로 넝쿨을 잘라 냈다.
한번 손을 움직일 때마다 넝쿨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렇게 앞을 막는 모든 넝쿨을 잘라 낸 마기휼은 칼을 품에 밀어 넣고는 뒤로 물러났다.
“올라가시지요.”
앞으로 팔을 뻗으며 라울을 쳐다봤다. 수상쩍은 마기휼의 행동에도 라울은 순순히 움직였다. 라울이 앞장서서 위로 올라가자 눈치를 살피던 군인들도 따라 움직였다. 그들이 모두 올라가는 걸 확인 후, 마기휼도 올라갔다.
언덕을 올라 위로 가자 무릎 넘게 풀이 자란 곳이 나타났다. 그곳에 우뚝 선 라울은 위를 올려다봤다. 정리가 되지 않아 10미터 가깝게 자란 나무와 그것을 휘감고 자란 넝쿨들. 하늘을 절반쯤 가리는 나뭇잎과 나뭇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어두운 청빛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칙칙한 나무와 풀이 무성한 곳에 서 있으려니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이상한 세상에 온 것 같군.”
“원래 괴담의 온상지인 곳이 아닙니까. 정신 제대로 박힌 이들이라면 쳐다도 안 보는 곳이지요.”
별의별 이야기가 많이 만들어지는 장소였다. 척 봐도 음침하고 우울하지 않은가. 마기휼도 이런 장소는 싫었다. 덩달아 우중충한 기분이 든다.
“그래. 여기서 어디로 가면 되는 거지?”
물음에 마기휼은 라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곳의 지도가 있습니까?”
라울이 손짓을 하자 군인이 지도를 들고 왔다. 그걸 받아 든 마기휼이 지도를 펼치고 유심히 살폈다. 그러는 동안 군인들은 옆으로 흩어져 수상한 것이 없는지를 살펴봤다.
마기휼의 눈은 지도를 모두 확인하고 있었다.
과연. 중앙군에서 나오는 것이라 그런지 꽤나 자세히 그려졌다. 정확하기도 하겠지. 그들이 모일 만한 곳을 살펴보면서 마기휼은 지나치는 어조로 물었다.
“근데 마리아를 왜 잡으려는 겁니까. 괘씸죄입니까?”
배에서 당신을 납치하고 무고한 사람을 몇 죽인 것이 괘씸해 잡으려는 건가. 물론 살인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 하기는 했다. 하지만 군함과 라울이 움직이는 건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대답을 해보라는 듯 쳐다보자 라울이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녀가 군의 중요 문서를 훔쳐간 것 같다.”
“중요 문서라고요?”
“새로 개발 중인 군함에 관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봤다면 단순한 설계도겠지만 아는 이들이 본다면 약점도 파악해낼 수 있어.”
“아하, 그런 거로군.”
신형이라 해도 결국에는 전에 있던 것에서 조금 변형을 주는 수준일 터였다. 그런 것의 설계도를 가지고 간다면 모든 게 까발려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문가가 본다면 무엇이 중요하고 어떤 곳을 집중 공략하면 쉽사리 군함을 침몰시킬 수 있는가를 알게 될 거다. 그걸 운용해서 다른 배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 거고 말이다.
마리아. 처음 가게에서 볼 때부터 보통 여자가 아니다 싶었는데 이 정도였단 말이지. 여자는 알 수 없는 존재라 하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그 배에서 훔쳐낸 겁니까?”
“아니. 우리가 있었던 군에서 빼돌린 것 같다. 그녀의 애인이 중앙군 소속 과학자였다가 그쪽으로 이동을 했던 거였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그녀에게 설계도를 알려준 모양이야. 그녀는 그걸 운반하는 입장이었고 말이지.”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내밀고는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만한 미인을 어느 사내가 마다하겠어. 과학자라면 학문만 파고든 꽁생원이었을 터다. 마리아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모든 걸 알려준 건가. 하여튼 사내라는 것들은-.
마기휼은 지도에서 시선을 떼고는 라울을 쳐다봤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건 중앙군의 정보를 통해 알아낸 겁니까.”
“그렇다.”
“그러면 그녀는 이쪽의 존재를 알까요?”
“왜 모르겠나. 우리는 인어의 숲에 조금 전 착함했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귀머거리밖에 없어.”
“아, 그렇겠군요.”
마기휼은 지도를 덮었다. 이걸 더 볼 것도 없었다.
“다시 군함에 타야 합니다. 그들은 분명 반대편으로 돌아갔을 테니까요.”
착함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그네들이 계속 이곳에 있을 리 만무했다. 나라도 반대편으로 진즉 도망을 쳤을 터였다. 애초에 접근하는 방식이 문제였다. 라울도 참. 이런 기본적인 실수를 저지르다니. 의외로 빈틈이 있구나 싶었다.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마기휼의 눈빛에 라울은 차분히 물었다.
“반대편으로 갔을 것 같나.”
“그렇습니다. 아마도 이쪽이 오기 전에 물건은 다 전했을 것 같은데요.”
“나도 그 말에 동감한다. 그래서 이미 손을 써 뒀다.”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쳐다보는 얼굴이 멍했다. ‘무슨 소리 하시는 중?’이라고 묻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에 라울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우리는 미끼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지독히도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 순간 아주 멀리서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마기휼은 황급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를 이어서 폭발음이 들리는 걸 확인한 라울이 고개를 들었다.
“시작했나 보군.”
선명한 녹빛 눈동자 안쪽으로 예리한 빛이 감돈다. 지금까지 이쪽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던 것과는 또 달랐다. 전혀 다른 인상의 사내가 눈앞에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람의 변모에 마기휼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너 도대체…….”
“뭐야?”라고 물으려던 찰나 머리 위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놀란 마기휼은 머리를 한 손으로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검은 물체가 보였다. 12미터 정도나 되었을까. 전체적으로 보면 날씬하지만 좌우로 대칭되듯이 뻗어 나온 날개가 튼튼하고 길었다. 꼬리 부분에서 공간의 이지러짐 현상이 포착되는 걸 보아하니 저곳에서 나오는 열원으로 공중으로 떠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배와는 달랐다. 양쪽으로 날개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거대한 몸체를 떠받드는 배 자체의 구조가 달랐다. 군함하고도 달랐다. 실제로 모든 부분이 밀폐되어 매끄러운 형태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형태의 소형 물체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군함에 비하면 1/5 수준인 그것은, 움직임이 기민하고 무엇보다 이동 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바람만이 불 따름이었다.
“안베르 요새에 새로 배치될 소형함이다. 멋지지 않나?”
위를 올려다보는 마기휼의 입이 반쯤 벌려진 채로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 눈동자가 경직되어 있었다.
“노르디아 중앙군의 기밀인데 이렇게 자네가 알게 되는군.”
마기휼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었던 마기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울을 쳐다봤다. 그리고 느긋한 얼굴을 한 사내를 보게 되었다.
언제나 늘 보던 얼굴이었지만 전과는 달랐다. 마기휼이 처음 보는 표정이 그곳에 있었다. 냉철함. 모든 것이 사전에 계획되어 그대로 실행되어야 만족하는 책략가가 그곳에 있었다.
마차가 빠르게 움직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마차인데 속도는 그게 아니다. 앞에는 말도 없었다. 분명 배에나 붙일 만한 동력 기관을 교묘하게 마차에 장착한 거다. 완전한 불법이었다. 중요한 동력을 마차 따위에 붙이다니. 실제로 군용이 아니라면 일반인들은 동력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해선 안 되었다.
움직이는 마차의 속도는 상당했다. 저 정도라면 차량이라 할 만했다. 마차로 위장했다가 위급한 순간일 때에는 저리 변신을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마차의 외관도 이쪽이 날리는 공격에 의해서 서서히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마차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서 대포를 쏘아 대던 이의 가슴이 뭉개지듯이 터지더니 이내 추락했다. 떨어지는 이를 밟고 마차가 지나갔다. 그걸 본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싫은 얼굴이었다.
“포위망을 좁혀라. 10미터 후 한쪽 바퀴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해라.”
10미터는 금방이었다. 실제로 라울은 바로 공격을 명령했다.
“지금이다.”
거의 동시에 날아간 대포가 마차의 바퀴를 날려버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붕 떴다가 그 자리에서 헛돌았다. 이내 뒤집어지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기어이 잡았군. 마기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중앙군의 기밀무기인 소형함은 군함보다 작았기 때문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도 적었다. 하지만 움직임이 빠르고 아까의 공격을 보아하니 정확도가 높았다. 바로바로 반응을 취하는 것도 뛰어난 점이었다. 내부의 안정감은 군함과 비슷한 것 같으니, 그저 놀라웠다.
라울은 무전기에 대고 명령을 내렸다.
“1번기와 3번기는 마차를 포위해라. 저항하는 놈들은 죽여도 좋다.”
죽여도 좋다니.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싶었던 마기휼의 입꼬리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리 어필하는 듯 굳은 얼굴을 하는 마기휼의 앞으로 라울이 다가왔다. 그에게 접근을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닌, 그저 지나치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라울이 다가왔을 때 마기휼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뭐지?”
이쪽이 질문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걸음을 멈춘 라울이 내려다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기휼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저도 의심하고 있었던 겁니까. 마리아와 한패일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까.”
응시하는 마기휼의 눈빛은 도발적이었다. 의심 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듯싶었다. 라울은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자네가 그런 주변머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저들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서 나와 함께 이동을 한 것뿐이야. 놈들은 분명 우리를 멍청하다 욕하며 속 편히 뒷일을 보고 있었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군인 놈들이 늪의 으슥한 곳으로만 들어가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속아 넘어간 것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었다. 그리고 마기휼은 라울의 저런 설명에 순순히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번 문제는 확실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지 이쪽도 뒤끝이 남을 것 같지 않았다.
“저를 의심한 적은 없다고 말하시는 겁니까.”
“내가 자네를 의심할 필요가 있나.”
“아니요. 그럴 필요가 없지요. 애초에 전 구릴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니까요.”
엄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을 하는 마기휼은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지금 당장 뒤집어 놓고 탈탈 털어도 나올 건 하나도 없을 거라는 듯 당당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라울은 그를 지나쳐갔다.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
“……….”
마기휼만이 들을 수 있도록 조용하게 하는 말에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라울은 군인 몇을 대동하고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뒤에 남겨진 마기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화가 나 일그러진 그 얼굴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뭐야. 방금 그 말은? 그건 또 모르는 일이라니? 그렇다는 건 내가 뒤가 구린 인간이라는 거냐. 물론 당당하게 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런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잖아.
이를 악문 마기휼은 급히 라울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마기휼이 나가고 난 후, 정면 쪽의 조종칸에 각각 앉아 있던 군인 둘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라울 대령님과 함께 다니는 저 사내는 뭐지? 뭐 아는 거 있어?”
“나도 잘 모르지. 처음 보는데? 안베르 요새에서 함께 일하려고 픽업해 온 자가 아닐까?”
“흐음. 그런가?”
그런 것 치고는 꽤나 격의 없는 사이인 것 같았다. 묘한 구석이 있다면서 고개를 갸웃하던 것도 잠시 군인은 무전기를 통해 착함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바로 기어를 낮췄다.
마차를 뒤집고 2미터가 넘는 덩치 좋은 사내가 나타났다. 다친 건지 얼굴의 반이 피로 범벅이었다. 사내는 주변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구를 겨누고 있는 군인들을 확인하더니 어금니를 악물었다.
화가 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나 싶던 그는 등을 미는 작은 손길에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사내가 옆으로 물러나고 그 뒤로 작은 여자가 나타났다. 남자처럼 바지를 입고 있지만 그 미모가 가려지는 건 아니었다.
사내, 톰의 보호를 받은 마리아는 한 구석도 다친 데가 없이 보였다. 비교적 말끔한 상태로 있던 그녀는 주변을 둘러싼 군인들을 확인하고는 붉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정말 대단해.”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어도 그 속에 숨겨진 분노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가늘게 떠진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군인들 사이로 나타나는 라울을 노려보며 마리아는 손을 벌렸다.
군인들이 긴장한 듯 총구를 내밀었으나 그녀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손뼉을 쳤다. 짝짝짝. 황량한 들판에 그녀의 손이 터질 듯 부딪치는 음향이 퍼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손뼉을 친 마리아는 라울을 노려보며 나직이 말했다.
“너무도 대단하지 않으십니까. 완전히 속았습니다.”
“네가 날 멍청한 귀족으로 생각해준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지.”
“고맙다는 인사는 접어두시지요. 화가 나니까요.”
마리아는 웃었지만 그 표정이 살벌했다.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앙칼진 시선을 앞에 두고 태연해지기란 힘들 거다. 하지만 라울은 어디까지나 포커페이스로, 본인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슬슬 그대의 악행을 끝내야 하지 않을까 싶군.”
“끝내다니요. 지금부터 시작인 걸요.”
마리아의 눈동자 안쪽으로 광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보이는 태도가 워낙에 당당하고 살벌했기에 군인들 사이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차적 충돌이 있을 것 같았던 그들은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어.”
차분한 한마디에 마리아의 얼굴에 서려 있던 미소가 지워졌다.
뒷짐을 진 채로 라울은 마리아를 바라봤다. 부드럽게 응시하는 눈동자 너머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쓸데없이 강한 척은 말게.”
마리아는 무표정이 되었다.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마리아의 모습에 톰이 초조한 듯 그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담. 어떻게 하지?”
묻는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라울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톰을 더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는 조금 더 마리아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리아의 손이 올라가 톰의 얼굴을 만졌다. 피에 젖어 있던 얼굴을 만지자마자 붉은 물이 묻어났다. 피가 묻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리아는 부드럽게 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가야.”
“……엄마.”
험악한 얼굴의 사내가 금방 온순해진다. 그는 말없이 마리아의 뒤로 물러났다. 톰이 물러나고 난 후에 마리아는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라울이 턱짓을 하자 그녀의 앞으로 걸어간 군인들이 톰과 마리아를 구속했다.
앞으로 모은 손목에 전자 팔찌를 달고 목에도 가느다란 줄을 걸었다. 억지로 팔찌를 풀면 순식간에 목을 죄는 물건이었다. 비인도적이라는 학자들의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군 안에서 범죄자를 다룰 때 공공연히 사용되는 것이었다.
군인의 손가락이 목에서 떨어지자 마리아는 혀를 찼다. 탐탁지 않은 듯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라울의 뒤로 나타나는 호리호리한 사내를 발견해냈다. 이쪽을 주시하는 사내의 시선이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당황스럽고 놀랍고, 약간의 연민이 담긴 그 눈빛에 마리아의 입가로 쓴웃음이 생겨났다가 금방 사라졌다.
군인들에게 이끌려 마리아가 이동하는 걸 보는 기분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경직된 눈빛을 한 채로 있으려니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라울이 보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눈동자를 돌리고 있었지만 마기휼은 그가 이쪽을 보고 있었던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또 뭐가 수상쩍어서 몰래 훔쳐보고 있는 거야. 기분 나쁘게.
“마차를 수색해라.”
라울의 명령에 기다렸다는 듯 군인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마차의 주변에 기계를 대서 위험한 것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몇몇이 마차의 안쪽을 살피는 걸 보고 있으려니 옆으로 라울이 다가왔다. 눈을 내리뜨고는 물었다.
“마리아에게 갈 거다. 함께 갈 텐가.”
“……제가 굳이 가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나름의 배려를 해주는 거야.”
“배려 좋아하시네.”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나왔다. 물론 바로 입을 다물긴 했지만 라울에게는 다 들렸을 터였다. 한 말에 대해서 부인을 하거나 잡아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기분이 구린 걸 어쩌라는 거야.
“범죄자를 동정하나.”
마기휼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옮겨지는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라울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군인으로 있지 말아야 할 거다. 군복을 벗는 편이 훨씬 더 속 편할 거야.”
이자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건가 싶었다. 재수가 없는 것도 정해진 선이 있는 법이었다. 네가 뭔데 그딴 말을 지껄이는 거야. 순간적으로 치미는 화를 내리누르며 마기휼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꽤나 속이 뒤틀린 미소였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 죽을 때까지 군인으로 있을 겁니다.”
“나쁘진 않겠지.”
비꼬는 억양은 아니지만 그리 들리는 건 속이 꼬인 상태이기 때문일 거다.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동안 군인들의 수색은 계속 되었다. 인원이 많기 때문에 수색은 의외로 빨리 끝났다. 군인 하나가 라울의 앞으로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약간의 무기와 금덩어리가 있을 뿐으로 그 외에 수상한 것은 없습니다.”
“설계도가 없는 거냐.”
“그렇습니다. 일단은 마차째로 군함으로 운반해서 완전히 분해해 보겠습니다.”
그러다보면 뭔가가 나올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꽤나 무식한 방법을 사용하는 셈이었으나 라울은 그러지 말라는 말이 없었다. 뭔가를 생각하던 그는 몸을 돌렸고 마리아가 탄 쪽으로 걸어갔다. 마기휼도 뒤를 쫓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신경이 쓰여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자식이 마리아에게 또 뭔 짓을 저지를까 싶었던 거다.
라울의 말처럼 범죄자를 두둔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했을 때 위로를 하던 그녀는 진심이었다. 아주 작은 배려로 인해 얼마나 위안을 받았던가.
그때의 일도 그렇고, 배에서도 바로 자신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그런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도저히 무시할 수 없게끔 했다. 자연스럽게 뒤를 쫓는 마기휼의 걸음은 성급할 수밖에 없었다.
여군은 마리아의 몸을 수색했다. 남자가 건드리면 성희롱이 분명할 곳도 서슴없이 건드리고 만져 댔다. 1차적으로 검사를 할 수 있는 곳은 모두 건드렸다. 그런데 없었다. 여군은 라울을 쳐다봤다.
“이상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여군의 보고에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던 라울은 마리아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마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원하면 2차 검사도 해보시든가요.”
여자의 은밀한 부위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하는 것도 괜찮다는 식이었다. 라울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입가에 서린 마리아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알 듯 말 듯한 그 미소에 라울이 옆에 선 노드만 중령을 쳐다봤다.
“나가 있어라.”
“제가 말입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는 노드만이었지만 라울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에 있던 군인들을 더 지적했다.
“너와 너. 그리고 너도 나가 있어라.”
“알겠습니다.”
지적을 받은 군인들은 잠자코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간 마당에 노드만 중령도 버티고 있을 수 없었다. 라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분한 듯 아랫입술을 깨문 노드만이 밖으로 나가자 안에 남은 것은 마리아와 여군, 그리고 라울과 마기휼 뿐이었다. 그것에 의문을 느끼고 문 옆에 서 있던 마기휼은 스스로를 가리켰다.
“저도 나가 있을까요?”
“이 안에서 벌어질 일이 궁금할 텐데.”
바로 마기휼의 얼굴로 불쾌함이 드러났지만 라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마리아를 바라봤다.
“뒤로 돌아.”
그 순간 마리아의 눈썹이 위로 사악 올라갔다.
이내 그녀는 날카롭게 내뱉었다.
“당신 변태인가요?”
“뒤로 돌라고 했을 뿐인데 그걸로 인해 내가 변태가 되는 건가?”
라울의 눈빛은 무척이나 깊었다. 모든 속내를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식이었다.
마리아는 옆에 서 있는 여군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바로 날카로운 표정을 짓는다. 이쪽이 따르지 않으면 그녀 쪽에서 먼저 억지로 몸을 돌려세울 터였다. 마리아는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무슨 생각인지를 모르겠네.”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뒷모습도 보기 좋았다. 물론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고개를 돌렸다.
“옷을 벗겨라.”
마기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바로 라울을 쳐다봤다. 이상한 말을 한 것치곤 라울은 꽤나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가 하는 말은 여군으로서도 꽤나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마기휼을 흘겨보며 웅얼거렸다.
“대령님. 사내가 있는데…….”
“옷을 벗겨라.”
재차 나오는 명령에 여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기휼을 흘겨보나 싶던 그녀는 이내 마리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라울이 내리는 명령이니 듣지 않을 수 없지만 기분은 그리 썩 좋지 않을 거다. 저 변태자식. 그리 생각을 할지도 몰랐다. 실제로 지금 마기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옷을 벗기라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이상한 의도로 그런 명령을 내린 거라면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며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마리아가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는 걸 볼 수 없었다.
“이건…….”
다소 질린 듯한 중얼거림에 무슨 일인가 싶었던 마기휼은 아주 조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이는 걸 확인한 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옷을 벗겼으니 날씬하게 잘 빠진 등이 드러나야 할 터였다. 마리아의 몸매가 좋은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때문에 그 아래의 피부도 곱디고운 우윳빛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등은, 날개뼈 아래로 온통 지렁이 같은 검은 글자나 그림이 틈 없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래. 딱 수였다. 엄청난 내용과 정보가 그녀의 날씬한 등에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은 엉덩이 절반가량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치마까지 이어졌다. 내리면 더 나타날 거다. 설마하니 이런 결과물이 나타날 줄은 몰랐던 여군은 질린 얼굴이 되어 라울을 쳐다봤다.
“대령님.”
“다 벗겨라.”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더 망설일 게 없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여군은 거침없이 옷을 모두 벗겼다. 하얀 속옷까지 벗겨지고 드러난 것은 마리아의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정강이 바로 위까지 그 수가 이어지고 있었다.
“작품을 그려놨군.”
경악한 다른 이들과 달리 라울은 차분했다.
그 말에 여군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맙소사―.”
경악이 감추어진 그 소리를 듣고 난 후, 마기휼은 손을 들어 이마에 올렸다.
마리아에게 푹 빠진 그 미친 과학자놈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저질렀다. 차라리 지도나 나올 것이지, 저게 뭐야. 그 자식은 도대체 몇 날 며칠 동안 마리아의 등 뒤에 저런 문신을 그려 댔던 걸까. 저렇게나 섬세한 문양이라니. 엄청난 집착과 광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걸 잠자코 받아들인 마리아도 도무지 보통 여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아니지. 그녀는 이미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마기휼은 안색을 굳혔다. 입을 다물고 마리아를 바라봤다. 마리아는 자신의 뒷모습이 모두 드러났음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포기를 하고 정리를 한 모양이었다. 모두가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사이로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리아. 선택해라. 살을 지지는 것과 약품을 바르는 것 중 뭐가 더 좋은가? 참고로 말하면 어느 쪽이든 아프지 않은 건 없다.”
라울은 입을 다물었고 재차 무거운 침묵이 내부에 감돌았다.
마기휼이나 여군은 이미 그 상황에서 열외가 된 인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마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보는 눈빛이 꽤나 살벌했다.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나 싶던 그녀는 이내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짤막한 말을 입에 담았다.
“네 마음대로 하시죠.”
조롱이 역력한 그 말에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
일부러 라울을 도발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런 식으로 말을 하는 그녀가 현명하게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라울은 여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군의관을 불러 CAX207을 가지고 오라 해라.”
여군은 놀라 숨을 들이켜며 라울을 바라봤다.
“대령님. 피부에 바로 바르면 화상을 입을 수 있는 약품입니다.”
“이건 노르디아 연방국의 안보가 걸린 일이다.”
라울은 마리아의 등과 엉덩이에 걸쳐 그려진 설계도를 노려봤다.
“화상을 입든 문드러져서 흉측하게 변하든 일단은 저걸 지워 없애야 할 거다.”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는 듣기만 하는 데도 소름이 돋았다.
마기휼이 제 팔을 문지를 정도인데, 여군은 오죽하겠는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그녀는 고개를 떨구더니 “바로 군의관에게 말을 전달하겠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
여군이 나가고 난 후 마기휼은 기분이 급 다운됐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굉장히 불편하게 여겨졌다.
따지고 보면 마리아가 나쁜 일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여자인 줄 몰랐어- 할 정도로 꽤나 활약을 하고 있었고 그것은 노르디아 연방국에서 볼 때에는 참으로 위험하고 발칙한 행동이었다. 그로 인해 나라가 위험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자 마리아의 정체를 알 법도 싶었다.
비밀결사 엔온 인가. 평범하지 않은 돌연변이 인간들이 모여 있는 집단. 그들은 삼국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사건과 사고를 일으켰다. 테러 활동이라 할 수 있는 것들 중에는 수위가 높은 것들도 있었고, 연방국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 기반을 흔들 정도의 큰 사고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가 한 행위는 그 사건 중에서도 꽤나 상위에 속하는 일이었다.
“군의관이 올 때까지는 옷을 입고 있어도 된다.”
마리아는 라울을 돌아보며 코웃음을 쳤다.
“꽤나 다정하시군요.”
“빈정거리지 마라.”
한마디를 하는 라울은 그 인상이 달라져 있었다.
노르디아의 왕통이자 대귀족인 그로서는 마리아가 더할 나위 없는 역적으로 여겨질 터였다. 앞으로 그가 마리아에게 심한 행동을 취하진 않겠지만 마리아 그녀의 운명에 대해서는 짐작하는 게 가능했다. 때문에 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마기휼은 주변 눈치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당신, 가는 거야?”
마기휼은 문을 연 채로 뒤를 돌아봤다. 마리아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고 있었다.
“도와줘서 고마웠어. 지금까지 만난 사내 중에서 당신이 그나마 의리가 있었어.”
“……난 당신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했어.”
웅얼거리는 말에 마리아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다정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좀 거시기했다. 그녀에게 있어 정말로 도움을 준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떤 형을 받는다 한들, 이쪽이 그걸 감해주거나 좋은 상황으로 빠지게 하게끔 할 만한 능력도 못 되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으로서는 내 살길 마련하는 것도 벅찼으니 말이다.
마리아의 눈빛은 고요했다. 모든 걸 단념한 듯싶은 그 얼굴이 그리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어쩌면 이건 그녀의 수작일지도 몰랐다. 저런 식으로 이쪽에게 어떤 움직임을 취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려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리할 수 없었다.
“대령에게 최대한 협조하도록 해. 그리하는 게 당신에게 좋을 거야.”
더 말을 할 것도 없고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하아-.”
복도에 서자마자 한숨을 쉰 마기휼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 얼굴이 멍했다.
그저 한량이었는데. 하루하루 훈련을 받고 테스트를 하고 모의 전투를 할 뿐인 평범한 군인이었는데. 계속 그렇게 살아가면 될 것 같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달라졌다. 물론 그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저 생각할 따름이었다. 어째서 아버지가 그리해야만 했던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분이 아니었는데. 굉장히 좋은 분이었는데.
허공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이 차분해진다. 마기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이 군함에서 내리자. 타고 있으면 안베르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테지만 여기에 계속 있으면 싫은 일에 휘말리게 될 것 같았다. 실제로 마리아가 저리되는 걸 보게 된 것은, 이 군함에 탔기 때문이었다.
라울을 도와주고 얻을 이차적인 목숨값은 집어치우자. 그 고모라는 사람도 수상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곁에 라울이 없는 상태일 때 만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말을 잘 하면 다른 방식으로 빚을 갚을 수 있겠지.
애초에 돈을 빌려주고 자신을 라울의 신부로 샀다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그녀도 상식이 있다면 사내인 자신을 라울에게 붙여주려 하지 않을 거다. 대귀족이고 왕통인데, 곁에 사내인 자신이 있어봐라. 삼국의 놀림감밖에 되지 않을 거다.
무슨 상황이 닥쳐도 차분하고 침착하게 대응하자. 그러다 보면 빠져나갈 구멍 하나쯤은 있을 거라며 마기휼은 진지한 얼굴로 정면을 노려봤다.
군의관이 하얀 천을 마리아의 위에 덮었다. 엎드려 누운 상태인 그녀의 눈빛은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문신을 지우는 동안 소리 한 번 내지 않았지만 분명 고통스러웠을 터였다. 피부 상태도 엉망이고 말이다. 일단은 그에 대한 치료부터 확실히 해야 했다.
내내 말없이 의자에 앉아 있던 라울은 다가선 군의관을 쳐다봤다.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린 군의관의 안색은 해쓱했다. 피곤에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보고는 확실히 했다.
“혹여라도 피부 아래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서 조금 더 깊이 문신을 지워냈습니다. 그가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시간이 덜 걸렸습니다. 급한 일이라 쉬지 않고 작업을 했고, 그 또한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지만 분명 고통스러울 겁니다. 통증이 금방 사라질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치료는 확실히 해줘라. 힘들어하면 진통제도 수시로 놔주고.”
“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군의관은 말하기를 망설였다. 아직 마리아는 의식이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쳐도 보고를 올려 최대한 빨리 일 처리를 하는 게 중요했다.
“그에 대해서 보고를 올려야 합니다. 바로 수감이 이루어져야 할 테니 말이지요. 그런데 그를 어떤 걸로 넣어야 할지…….”
라울은 군위관을 올려다봤다.
“너는 그라고 칭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생식기가 달려 있으니 그라고 했지만 내심으로는 여자라 인정하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었다. 군의관은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전체적인 모든 것들이 여성이 분명한데 남자의 성기가 달려 있다 해서 그를 남자들이 있는 수용소로 보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남자야.”
기운이 없으나 확실히 들리는 목소리였다. 군의관은 놀라 뒤를 돌아봤다. 마리아는 라울을 똑바로 바라봤다.
“동시에 여자이지. 이번 기회에 그런 존재를 배려해 중성들만 모아 둘 수 있는 수용소 하나쯤 더 만들지그래? 그러다 보면 금방 정원이 차게 될 텐데?”
빈정거림을 왜 못 알아듣겠는가. 하지만 군의관은 그녀가 라울을 상대로 빈정거리는 것보다 아직까지 그리할 수 있는 체력에 놀라고 있었다.
라울은 마리아를 바라봤다.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를 응시하던 라울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한번 알아보겠다.”
라울은 아까부터 뒤에 서서 마리아의 등의 문신 지우는 작업을 지켜봤던 노드만 쪽으로 몸을 돌렸다.
“노드만 네가 관리하도록 해라. 연방국까지 인계할 때까지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그녀는 중요한 인물이니 상처 치료를 제대로 해주고 그 외의 문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라.”
“네. 물론입니다.”
“너는 변종에 대한 혐오감을 품고 있지.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거다.”
라울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되어 한창 기분이 좋았던 노드만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살짝 경직된 그는 더듬거렸다.
“저,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변종을 혐오하는 건 본능적인 것이다. 그걸 가지고 널 그런 사람이라는 범주에 넣을 생각은 없다. 다만 일을 할 때에는 객관적인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노드만 중령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못했다. 원체 완벽주의인 그는 지적받는 걸 싫어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두고 넘어가는 건 다른 문제 상황을 야기할 수 있었다. 초반에 바로잡는 게 중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추후 이쪽과도 마찰이 빚어질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노드만을 한 번 더 바라본 라울은 밖으로 나왔다. 마기휼은 보이지 않았다. 라울은 복도 가운데에 서 있던 군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마기휼 소령은 어디에 있지?”
처음 듣는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 군함 내에서 이름을 모르는 낯선 인물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가 살짝 언질을 한 것이 있기 때문에 대답을 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대령님의 서재에 가 계신다 하셨습니다.”
“내 서재인가?”
침실에 가지 않고 왜 또 서재인가 싶었다. 마리아가 신경 쓰여 내내 곁에 있을 줄 알았는데 나가버린 것 자체가 의외이긴 했지만 말이다. 거기서 또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라울은 그리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의자 4개를 간격을 두고 일렬로 세운 후 그 위에 누운 사내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인데도 정작 당사자의 얼굴은 평온했다. 자고 있을 거란 걸 예상하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이런 상태로도 잘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색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에 라울은 가만히 있었다.
잠이 든 마기휼은 역시나 평범한 얼굴이었다. 동시에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얼굴이기도 했다. 한번 보게 되면 계속 보게 된다. 이내 그런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 판단을 내린 라울은 관심을 지우기로 했다.
대신에 그는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비밀번호가 걸린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서류철을 꺼내 들고 의자를 뒤로 당겼다. 자리에 앉아 서류를 바로 하고 펜을 드는 것과 동시에 잘 자고 있나 싶던 마기휼이 벌떡 일어났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 건가.”
마치 처음부터 이쪽이 반응을 보일 걸 예상하고 있다는 투였다. 태연하게 반문하는 것에 마기휼은 살짝 당황했다. 그러는 동안 라울은 옆으로 눈동자를 움직여 마기휼을 바라봤다.
“태도를 정확히 했으면 좋겠군. 일단 난 대령이야. 소령보다는 한참이나 높은 계급이 아닌가.”
그러니까 두 번 다시 반말지거리는 하지 말라는 거냐.
물론 라울이 그런 걸 요구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었다.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괜히 부아가 났다. 여러모로 안제크가의 라울에게는 꿀리는 게 많은 입장이기 때문일까.
빚과 관련된 문제는 자신이 거부할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지 마주쳐야 할 거고, 그로 인한 갈등 상황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니까 일단은 혼자 있고 싶었다. 라울이나 안제크가를 생각하지 않고 혼자서 머리를 텅 비운 채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불리하기는 해도, 완전히 말려드는 상황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 이만 군함에서 내리고 싶습니다.”
“안 되네.”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는 있었지만 저렇게 단박에 자를 줄은 몰랐다. 듣는 순간 한쪽 머리가 멍해지는 걸 느끼며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이내 벌떡 일어났다.
“왜 안 되는 겁니까?”
“군함을 이, 착륙 할 때마다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되지.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2만 베리야. 공무를 수행할 때에는 모르겠으나 자네 한 사람의 말을 듣고 함부로 군함을 세울 수는 없네. 군함은 지금부터 안제크로 곧장 가게 될 거야.”
아니. 이 자식이 지금 뭔 놈의 헛소리를 지껄여 대는 거야.
물론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군함을 세운다는 게 말도 안 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는 단서는 붙이지 않았다. 그냥 가던 길목에서 살짝 내려 달라는 거잖아? 굳이 안제크로 곧장 간다는 말을 할 필요가 어디에 있어?
원래 한 가지에 모가 나면 모든 것이 성에 안 찬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더더욱 싫은 기분이었다.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게 낫다는 걸 알고 있어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노베로 온 것은 대령님의 개인적인 용무를 처리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마리아의 위치 추적을 위해 경유해야 했을 뿐이다.”
호오, 그러셔?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고모님의 명을 따라 당신의 신부를 데리러 온 게 아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공무 수행 중에 사적인 일을 할 수야 없지. 우연히 널 만나 그런 말이 주고받아진 것뿐이지, 내가 고모님의 뜻에 따라 누군가를 데리러 그곳에 간 것은 아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이다. 그보다 너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어디에 있나 싶군.”
쓸데없는 대화는 이쯤에서 마치고 싶다는 뉘앙스였다. 마기휼은 기분이 확 틀어졌다.
라울이 보기보다 무서운 인간이라는 건 조금 전 마리아 건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일로 인해 이리저리 치이는 자신의 입장이라는 게 참으로 억울했다. 이 상황 자체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게 되었다.
“착륙하는 데 2만 베리라고 하셨습니까?”
“왜? 자네 빚에 포함시켜줄까?”
마기휼은 위를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나 진짜 미치겠네. 이 자식은 왜 또 이렇게 나오는 거야?
마음 같아서야 당장 달려가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배에서 널 구해줬던 내 은혜를 잊은 거냐고 따져 묻고도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그리함으로 인해서 괜히 이쪽이 라울과 같은 치사한 인간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마기휼은 진정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얼굴 전체에 띠며 라울을 노려봤다.
“정말 완전 치사하시군요.”
“규율대로 행동하는 것뿐이다. 그것을 두고 왜 치사하다 하는 거지? 그리 말하는 자네는 군인답지 않군.”
“제가 언제 군인다웠던 적이 있었습니까? 대령님도 제 별명에 대해 아시지 않습니까? 한량 마기휼을 말입니다.”
“알고는 있지만, 정말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잘도 그러시겠다. 정말은 한심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마기휼의 표정이 굳어졌다. 앞으로 튀어나온 입술만큼 그의 불만의 정도가 느껴졌다. 하지만 라울은 모르는 척 말했다.
“어차피 빚과 관련해 고모님과 만나봐야 할 거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네 집안에 여자는 없다는 걸 설명해야 하니 자네는 꼭 나와 함께 가야 해.”
“……설명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 정체 모를 고모라는 여자에게?
내 신체의 비밀에 대해서 다 알고 있을 법한 그 여자에게 가야 한다고?
만약 그랬다가 라울이 그 사실에 대해 알게 된다면-.
“내 고모님과 마주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건가?”
“없지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마기휼은 단호히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울에게 밀리고 싶지 않았던 마기휼은 재차 말했다.
“한 개도 없습니다그려.”
“그러면 아무 문제 없겠군.”
라울은 고개를 돌렸고 서류 위로 펜을 휘갈겼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모양이었다. 일견 보기에 편안한 라울과 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진 마기휼은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이놈의 자존심. 이놈의 성질머리. 그냥 싹싹 빌 것을. 솔직하게 말을 하지는 못해도 지금 당장은 안제크에 가고 싶지 않다 애걸복걸했다면 조금은 다른 상황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을 뻥 차버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쪽이었다.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 걸까.
아니다. 일단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옛말에 하늘에서 해적을 만나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고 했다. 정신 차리자. 이건 내 미래가 관련된 문제야. 그러니까 마기휼. 꼭 정신 차리자며 눈에 힘을 줬다.
글을 적던 라울은 마기휼을 살짝 엿봤다. 주먹을 쥔 채로 치미는 분을 간신히 억누르는 그가 보였다. 그걸 확인한 라울은 살짝 입술 끝을 올렸다. 하지만 금방 지워진 미소 대신에 그는 오늘 일을 기록하는 데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