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노르디아 중앙군의 군함은 명성 그대로였다. 굉장히 쾌적하고 안락했다. 흔들림도 거의 없고 소리도 나지 않았다. 침대도 있어서 눕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자 바로 로노베 상공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몇 시간이 지난 거지요?”
“2시간 반입니다.”
머리를 긁적이던 마기휼은 움찔했다. 2시간 반이라고? 중간에 이상한 놈들을 만나 궤적이 변했기 때문에 7시간은 더 넘게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이것이 중앙군의 군함이라는 거냐. 마기휼은 감탄했다.
“거의 2배 넘게 빨리 움직이는 거로군요.”
“그렇지요.”
대답하는 군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드러났다. 나라도 이런 군함에 타고 있으면 저리도 자부심을 가지게 될 것 같다면서 마기휼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잠은 잘 잤는데 왜 갑자기 피로가 확 몰려오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만나봐야 할 사람들 생각 때문에 이러는 걸까? 피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닌데.
뒷머리를 긁적이던 마기휼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이쪽을 깨우러 온 군인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건넸다.
“일부러 깨우러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짐은 잊지 말고 챙기십시오. 정확히 10분 후에 착륙하게 될 겁니다.”
알았다며 마기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기휼의 반응을 확인한 군인은 몸을 돌렸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마기휼은 벽면에 난 동그란 창 앞에 서서 바깥을 내다봤다. 구름밖에 보이지 않았다. 너무 좁은 틈이라서 잘 보이지 않았다.
로노베에서는 아직 자연의 상태가 고스란히 유지가 되고 있었다.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다양한 동물들이 살아가고 있는 장소였다. 그리고 마기휼의 집안은 그 지역에서 좀 사는 편에 속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할 게 분명했다.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곤혹이겠다며 마기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군인의 말대로 10분 후에 군함은 착함했고, 사람들은 무사히 로노베에 도착한 걸 기뻐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군의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에 탄 배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듯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당장은 잊을 수 없을 거다. 그런 사람들을 둘러보며 마기휼은 발을 뗐다.
“오빠.”
낯선 호칭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과연 몇 번이나 들어왔을까 싶은 낯간지럽지만 동시에 기분 좋게 하는 부름에 마기휼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린 여자아이가 수줍은 얼굴로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손을 위로 뻗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가 내민 것은 사탕이었다. 마기휼은 그걸 받아 들며 쪼그리고 앉았다.
뒤로 손을 물린 아이는 웃고 있었다. 아이의 뒤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사내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사내는 묵례를 했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탕 고맙다. 잘 먹을게.”
“……헤헤헤.”
쑥스러운 듯 소리 내 웃은 아이는 몸을 돌렸다. 달려가 부친의 품에 안기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마기휼은 천천히 무릎을 세웠다. 그리고 사탕을 꺼내 입 안에 넣었다. 입안으로 달콤함이 퍼지자 느른해진다. 긴장해 있던 몸이 이완되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수속을 마친 후에 공항을 나서자마자 하늘을 올려다봤다.
파란 하늘. 그리고 맑은 공기. 이 모든 것들이 7년 만이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눈을 감고 고향의 감각을 만끽했다.
“마기휼 도련님.”
심취해 고향의 공기를 맡고 있던 찰나 들리는 그리운 목소리에 마기휼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도로 근처에 대어진 마차 앞에 서 있는 할아범을 발견했다. 검은 양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노인의 얼굴 가득히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있었다. 너무도 그리운 얼굴을 보게 된 마기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마기휼은 그쪽으로 걸어가며 양팔을 벌렸다.
“할아범!”
“아이고. 마기휼 도련님.”
노인은 급히 걸어왔다. 마기휼의 손을 잡은 노인의 눈은 벌써부터 물기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렇게나 장성하셔선. 이 모습을 주인님께서 보셔야 했는데…….”
더 말을 잊지 못하고 노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숨길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전해졌다. 그걸 느낀 마기휼은 가만히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의 슬픔이기 때문에 더욱더 잘 전해졌다.
하지만 마기휼은 울지 않았다. 이미 군에 있었을 때 완전 꼴사납게 울지 않았던가. 이곳에서 더 슬픈 일이 생긴다 한들 절대로 눈물을 보일 순 없었다. 마기휼은 노인을 다독였다.
“일단은 이동하도록 하지요. 뭘 타면 되지요?”
“이 마차를 타도록 하십시오.”
노인은 마차 앞으로 가 문을 열면서 마부석에 앉은 사내에게 말했다.
“저택으로 들어가자.”
“네. 집사님.”
대답한 사내는 마기휼과 눈이 마주치자 깊게 고개를 조아렸다.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기휼도 처음 보는 사내였다. 이쪽이 군에 가 있는 동안 새롭게 구한 고용인인 모양이었다.
예전에 기억했던 사람들이 아직도 일하고 있을까. 상당히 많이 변해 있을 법도 싶었다. 마기휼은 마차에 올라탔고 집사가 그 뒤를 쫓았다. 마기휼의 맞은편에 앉은 집사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우는 것만 못한 얼굴이었다.
마차가 움직이자 마기휼은 가방을 옆자리에 뒀다.
“가휼은 지금 어디에 있지요?”
“저택에서 주인님의 장례 절차를 준비 중이십니다.”
“내일 하는 겁니까?”
“네. 큰도련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혼자서 모든 걸 하고 있었을 동생을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했다. 도대체 어떤 낯으로 그 아이를 봐야만 하는 건가도 싶었다.
오랜만에 보는 동생이니만큼 많은 게 달라져 있을 거다. 집안도 그렇겠지. 그것에 대해서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기휼은 넌지시 궁금했던 것에 대해 물었다.
“집안에 별문제는 없는 겁니까.”
집사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한 그의 안색이 어두웠다.
문제가 생긴 건가. 판단을 내린 마기휼의 안색이 덩달아 어둡게 변했다. 이내 집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많은 게 달라졌습니다. 예전 큰도련님이 계셨을 무렵하고는 다르지요. 모든 것들이 말입니다.”
집사는 입을 다물고 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전달하려는 말을 다 이해했다.
마기휼은 고개를 숙인 채로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겼다.
기억 속의 저택은 늘 화사한 빛으로 감싸여 있었다. 아버지가 있고 동생이 있고 어머니가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조금씩 그 빛이 퇴색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렇게나 빛바래고 삭막한 느낌이라니.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갈 때에도 그렇지만, 양쪽으로 펼쳐진 정리되지 않은 정원에는 할 말을 잃었다. 고개를 돌려 건물을 살폈다. 회빛의 건물은 마치 죽은 것 같았다. 저것이 폐가와 다를 게 뭐가 싶었다.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집사는 괴로운 듯 안색을 굳혔다.
“죄송합니다.”
사과의 말에 마기휼은 집사를 쳐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그런 말은 하지 마.”
“제가 지켰어야 했는데.”
집사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모든 추억이 가득 담긴 이 공간을 어떻게든 제가 지켰어야 했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걸 외면하듯이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사실 저택을 지켰어야 했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마기휼이었다. 그 책임을 동생이나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군으로 달려간 것은 그의 선택이었다. 그로 인해 집사가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침묵한 채로 있으려니 어느새 마차가 멈췄다. 주먹으로 눈물을 닦아 낸 집사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마차의 문을 연 집사는 붉게 변한 눈으로 마기휼을 올려다봤다.
“내리시지요.”
마기휼은 말없이 마차에서 내려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열린 문 안쪽으로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이 나왔다. 그들은 마기휼의 손에 들린 가방을 들어주려 했다.
“괜찮다. 내가 들고 가겠다.”
마기휼의 말에 그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짐을 마기휼이 들게 할 수 없다는 듯 다소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은 하나같이 처음 보는 얼굴들뿐이었다.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모두 단정한 선을 지니고 있었다. 누구의 취향에 맞춘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싫은 기분이 드는 걸 느끼며 마기휼은 고개를 돌렸다.
“형님!”
마기휼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고개를 들자 중앙홀 가운데에 난 계단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사내가 보였다. 건강한 갈색 피부에 짧은 흑발을 지닌 미남이었다. 키가 크고 몸이 다부진 데다 풍기는 느낌이 정갈한 멋진 귀족이었다.
딱 봤을 때 전해지는 느낌이 너무도 낯설었다. 순간적으로 누군가 싶어 멍하니 있는 동안 상대는 기쁨을 감추지 않으며 계단을 내려오면서 재차 마기휼을 불렀다.
“마기휼 형님!”
“……가휼이냐?”
이름을 부르자 사내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양팔을 벌리며 마기휼에게 다가왔다. 계단을 내려와 몸을 끌어안는 사내는 커다란 몸을 지니고 있었다.
분명 7년 전에는 자신보다 한 뼘이나 작았다. 그런데 지금은 한 뼘이 더 컸다. 덩치도 거의 두 배가 된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마치 부풀어 오른 밀가루 반죽 같지 않은가.
포옹한 후에 떨어지고는 다정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마기휼은 쉽사리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서 가휼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너 언제 이렇게 아저씨가 되어버린 거냐?”
“아저씨라니요. 형님이 변하지 않으신 거지요.”
가휼은 마기휼을 바라봤다. 마주하는 시선으로 수많은 감정이 전달되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가휼은 재차 마기휼을 끌어안았다.
“형님.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그간 왜 연락이 없으셨던 겁니까.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속내가 느껴졌다. 원망도 하고 싶겠지. 당시 가휼은 고작 18살이었다. 어린 동생을 두고 자신 혼자 도망치듯이 저택을 나와버렸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리고 말도 못 할 정도의 죄책감을 느꼈다. 동시에 두려웠다.
강한 팔 힘에 감싸인 마기휼은 눈빛을 흐렸다.
관 안에 담긴 사람을 봤을 때 마기휼은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려고 했던 사람의 외관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데 보이는 인물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건강한 피부는 칙칙한 흙빛이었고 코도 좀 어긋나 있었다. 입술은 보라색으로 변색이 된 데다 너무 말랐다. 마치 거리의 부랑자가 죽어 있는 모습인 것 같았다. 왜 이럴까. 죽은 후 분명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외관을 정리했을 터인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관 속을 바라보기만 하는 마기휼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가휼은 가만히 있었으나 그 얼굴은 침통했다. 마기휼은 움직이지 않았다. 관 속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게 정말 아버지야?”
“그렇습니다.”
가휼의 대답을 들어도 마기휼은 믿을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인물이 아버지라니. 정말로? 마기휼은 가휼을 쳐다봤다. 보랏빛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굳어 있었다.
“아버지가 편찮으신 곳이 있었던가?”
“지난 2년간 계속 술을 드셨습니다.”
마기휼의 미간 사이로 주름이 만들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듯 서서히 변하는 그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휼은 침통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도박에 빠지셨습니다. 집안의 돈을 모두 쓰자 다른 곳에서 빌리기도 하셨지요. 그도 할 수 없게 되자 집안의 모든 물건을 몰래 들고 나가기도 하셨습니다.”
“말도 안 돼.”
귀로 들었음에도 인정할 수 없었다. 지금 가휼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는 분명 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마기휼은 재차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그럴 분이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나오는 목소리가 딱딱했다. 조금 전까지 기운 없이 나오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가휼은 고개를 들어 마기휼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말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들고 가 판 물건 중에는 어머니의 보석도 있었습니다.”
“…….”
응시하는 눈동자 너머로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넘실거렸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던 가휼이었다. 그가 왜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말려도, 그만하라고 해도 듣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고 폭력을 행사하셨습니다.”
“폭력이라고?”
“……새어머니께서 꽤 많이 맞으셨어요.”
둔중한 무언가가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충격을 받아 시야가 일순 검어졌다가 하얗게 변했다. 숨을 죽인 채로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동생을 바라봤다. 어린 동생은 그곳에 없었다. 이미 성인이 된 사내는 그간의 고생을 알려주듯 얼굴색이 많이 안 좋았다.
어쩌면 그는 부친의 죽음을 속 시원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걸 생각하는 순간 말도 못 할 정도로 불쾌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왜 나는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도 그걸 모르고 있었던 걸까. 장남이었는데.
관을 잡고 있던 마기휼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왜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거냐.”
“형님을 심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형님은 군에서 인정받는 분이 아니십니까. 형님이 집안에 신경 쓰면 제대로 된 군 생활을 하지 못하셨을 게 아닙니까. 그래서 모두 제가 알아서 하려 했으나…….”
가휼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을 다문 그는 고개를 숙였다. 주먹 쥔 그의 손등으로 힘줄이 오르는 게 보였다.
마기휼은 깨달았다.
아, 내가 큰 실수를 범했구나, 라고 말이다.
군에 있는 동안에도 집안을 살펴봐야 했다. 동생이나 아버지. 그리고 한 번도 마음을 나누지 못한 새어머니에게 수시로 연락을 취하며 별문제가 없는지. 괜찮은지를 확인했어야 했다. 그리했으면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모두가 힘들지 않았을 터였다.
차라리 군에서 열심히 했다면 죄책감이 적었을 거다. 하지만 자신은 늘 농땡이만 치고 있었다.
소령 정도면 괜찮아. 복잡하고 어려운 건 싫어. 그냥 이렇게 지내다가 말래. 그런 식이었다. 왜 그랬던 걸까. 더 열심히 할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비웃음을 받으면서 군 생활에 안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랬다면 동생 앞에 서기에 덜 부끄러운 형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오셨군요.”
차분한 목소리는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마기휼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열린 문 앞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단아한 외모의 여성이 서 있었다. 많이 잡아도 서른 중반이나 되었을까. 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부드러운 인상의 여인이었다.
그녀와 딱히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새어머니라는 것 자체가 껄끄러워 그녀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누어보지 않았던 것은 분명 이쪽이었다.
“새어머니.”
“오랜만이에요.”
짤막하게 말을 한 여자에게서 예전의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전보다 훨씬 더 마른 것 같았다.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습니다.”
“마음고생이 심했으니까요.”
목소리를 높이거나 원망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차분하게 하는 그 말들이 마기휼에게 날카로운 침을 날렸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대화를 이어 가야 하는 건가 싶었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동안 여자의 뒤에서 작고 귀여운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마찬가지로 검은 드레스를 입은 6살가량의 여자아이였다. 그 순간 마기휼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 아이는?”
“당신의 동생이랍니다.”
여자의 말에도 마기휼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왠지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웠다. 그런 연락도 받지 못했는데. 마기휼은 가휼을 쳐다봤고 가휼은 눈을 내리떴다.
“레이라. 앞으로 나와 인사를 드리렴. 네 큰오빠란다.”
어미의 말에 아이는 가만히 있다가 뒷걸음질을 쳤다. 가휼이 그쪽으로 손을 뻗으며 오라 하자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그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가휼의 다리 뒤에 매달려 있을 뿐, 앞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가휼이 손으로 레이라의 머리를 감싸 앞으로 보내려 하자 고개를 마구 저으며 저항을 했다. 인상을 쓴 아이는 아랫입술을 툭 내밀었다. 마기휼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적대감이 가득했다.
네가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오빠 노릇을 하려는 거야.
그리 타박을 하는 눈빛을 하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집안은 정말 너무도 많은 것이 변해서 그로서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는 없었다.
여기에 서 있는 자신은 그저 이방인일 뿐이었다.
가느다란 손이 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랐다. 주전자 입구에서 나오는 찻물이 잔에 채워지고 이내 그것은 마기휼 앞으로 밀어졌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좀 드세요. 피로가 풀릴 거예요.”
“고맙습니다.”
차를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러운 맛이라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꽤 좋았다. 몸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연거푸 차를 마셨다.
겉으로 보기에 평화로운 얼굴을 한 채로 있는 마기휼이었으나 속은 그렇지 않았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굳은 얼굴을 한 채로 테이블 한쪽만을 바라봤다. 지금은 앞에 있는 여성을 똑바로 보는 것조차 부담스럽고 힘겨웠다.
“그래요. 군 생활은 어떠신가요? 잘하고 계시겠지요?”
“……그렇지요.”
대답을 하는 목구멍이 칼칼했다.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나 있는 것 같았다.
“가휼이나 저나 당신에게 알리지 않은 건 비밀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어요. 우리에게도 그이의 변화는 갑작스러웠지만, 처음 1년은 우리들끼리 해결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원래 심성이 온화한 분이셨으니 설명을 잘 하면 들어줄 거라 믿었지요. 어린 딸도 있으니. 레이라를 보면 금방 마음을 잡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지요.”
자신이 모르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집안의 일들. 들어야 하는 일이지만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귀를 막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침착하게 경청했다.
“1년 동안은 집안의 돈을 써서 괜찮았어요. 하지만 돈이 떨어지자 물건을 들고 가더군요. 그리고 주변에서 조금씩 돈을 꾸어 갔어요. 절친한 친우뿐 아니라 친분이 있는 분들은 그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지요. 돈을 빌려주면서 그러면 안 된다 말을 하면 마음을 다잡을 거라 생각들 하셨겠지만 아니었지요. 그렇게 계속해서 돈을 빌리다 보니 지인들과의 사이도 소원해지고 나빠지기까지 했어요. 그리고 결국에는 전 부인의 보석이나 드레스까지 들고 나가기 시작하더군요. 거기서 깨달았어요.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구나-라고 말이에요. 그때가 되어서는 당신을 볼 면목이 서지 않아 연락을 취할 수 없었어요.”
그건 그렇지 않았다. 면목이 서지 않는다니.
마기휼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차라리 연락을 하셨으면―”
“그리된 당신의 아버지를 알렸을 때, 당신은 날 원망했을 거예요.”
바라보는 마기휼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충격을 받은 얼굴인 마기휼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는 재차 말했다.
“내가 그를 망쳤다고 생각했겠지요.”
여자는 입을 다물었고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말에 100%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건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마기휼이 대답이 없자 여자는 말을 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 도박을 하겠다고 제 목걸이를 들고 달려 나갔어요. 그리고 말과 함께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지요. 언덕이 가파른 것은 아니었지만, 말 아래에 머리가 깔려서 살릴 수가 없었어요. 뇌진탕으로 인한 즉사였어요.”
비참한 죽음이었다. 죽은 아내뿐만이 아니라 현재 부인의 보석을 들고 나가 도박을 하러 나갔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침묵한 마기휼의 얼굴색은 어두웠다.
“나는 이렇게 그가 죽게 되어서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해요.”
마기휼의 눈동자가 움찔하고 떨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지나치게 차가운, 마치 인형 같은 무표정을 한 채로 그녀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정말 힘들었거든요.”
네가 한 것이 뭐가 있느냐. 네가 이 저택의 일에 대해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었을 때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이 처리하고 해결을 했다. 저택을 유지하고 관리한 것은 나와 가휼이 한 일이었다. 7년 만에 나타난 네가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나에게 뭐라 할 수는 없을 거다. 설령 내가 그의 죽음을 잘되었다고 말한다 해도, 너는 그것을 두고 너무하다 원망해서는 안 된다. 너는 그리할 자격이 없다.
그녀의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때문에 마기휼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이 미미하게 떨린다. 불편하고 두려웠다. 이대로 육체가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다.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부끄러웠다.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금방 비릿한 맛이 입 안으로 가득 감돌았다.
“이걸 읽어봐주세요.”
마기휼은 기운 없이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위로 서류 봉투가 올려져 있었다. 마기휼은 손을 뻗어 그걸 집어 들었다. 봉투를 열자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일단 주욱 흩어봤다. 언뜻 보니 돈을 빌린 영수증 같은 것이었다. 그 금액이 워낙에 엄청나서 순간적으로 정신이 돌아왔다. 마기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것이 뭡니까.”
“그이가 이 저택에서 빼내 간 금액이 너무도 컸어요. 그대로 갔다가는 모든 걸 넘겨야 했지요. 땅과 저택. 그리고 소유한 몇몇 건물들까지도요. 나와 가휼은 괜찮지만 레이라는 아니에요. 전 그 아이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어른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아요. 그래서 임의로 다른 곳에서 돈을 빌려 빚을 갚았어요.”
마기휼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재차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살펴보는 그의 귓가로 여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분이 있는 부인에게서 그 금액을 빌려 대신 갚았어요. 저와 가휼은 그걸 갚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대신 갚아주세요.”
너무도 당연한 듯 요구하는 말에 마기휼은 재차 그녀를 바라봤다.
여자의 양손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태연하게 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듯 살짝 굳은 안색이었다.
“이 집안의 장남으로서 그 정도의 일은 해주세요. 그리한다면 저도 이 집안의 재산에 욕심을 내지 않겠어요. 대부분은 가휼에게 갈 거고, 나머지는 제 딸 레이라에게 갈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그 빚을 가지고 가도록 하세요.
이쪽이 그녀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듯이 그녀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기억 속의 그녀는 자신을 싫어했다. 아니. 혐오했다 하는 편이 더 옳은 표현일 거다. 그녀는 아버지와 단둘이 신혼생활을 즐기고 싶어했으니 자신과 동생이 눈엣가시였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상당히 달라졌다. 전해지는 이미지 자체가 변했다.
그래. 7년의 시간은 길었지. 그 시간 동안 가휼과 함께 있으면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을 테고 아버지의 변화는 그 두 사람의 유대감을 끈끈하게 만들었을 거다. 충분히 이해하고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 충분히 말이다.
“싫으시다면 말씀하세요.”
마기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싫다는 말을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나 있을까.
마기휼은 종이의 하단을 살폈다. 더더욱 재미있어졌다. 어쩌면 일이 이렇게 꼬일까. 하지만 이 사람이라면 생색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목숨을 살려준 것에 대한 것 말이다.
종이의 마지막 줄에 적힌 서명은 ‘안제크’였다.
돈을 빌려 가는 것 때문에 친구들의 신임을 잃었다고 하더니 그게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이 오지 않았다. 멀리서 온 친지들만이 조용한 장례식 분위기가 이상한지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휼이 대신 상대를 해줬다.
마기휼보다 체격도 좋고 사내답게 생긴 그를 첫째로 오인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때마다 가휼은 아니라며 손으로 마기휼 쪽을 가리켰다. 그가 손으로 마기휼을 가리키며 형님이라 하자 사람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쪽으로 걸어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마기휼은 미소를 지으며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렇게 조용한 장례식이 치러지고 아버지의 관은 뒷산에 묻혔다. 그때에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 부친의 죽음을 들었을 때 하염없이 나오던 눈물이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그때 하도 흘려서 나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입고 있던 옷을 의자에 걸치고 소파 위로 엎드렸다.
아직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넋이 나간 사람마냥 멍하니 있으려니 문이 열리고 집사가 들어왔다. 그는 대충 구겨서 던져 놓은 옷을 챙겨 들고는 마기휼의 옆으로 걸어갔다.
“큰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아. 가휼은 뭘 하고 있어?”
“손님들의 식사를 챙겨주시고 계십니다.”
“의젓하네.”
힘들 텐데 끝까지 자리에 남아 일 처리를 하는 거로구나. 원래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그러니까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들도 그를 장남으로 생각하는 거겠지.
마기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았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집사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민망했던 마기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 꼴사납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피곤해 보이십니다. 어제 제대로 못 주무셨지요?”
“오랜만에 왔더니 내가 사용하던 방도 마치 남의 것 같아서…….”
중얼거린 마기휼은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로 눈을 내리뜨고 있으려니 집사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라 그런지 괜히 응석을 부리게 된다. 안 될 일이었다. 의젓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마기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만 나가볼게.”
“조금 더 쉬십시오.”
“충분히 쉬었어. 슬슬 가휼이랑 교대해야지.”
마기휼은 집사가 들고 있던 옷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아래에 서 있는 아이를 발견한 마기휼은 움찔했다. 그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토끼 인형을 품고 있던 여자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다 급히 달아나는 것에 놀란 마기휼이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봐! 잠깐―”
기다려보라는 순간 아이는 덩치 좋은 사내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누군가 했더니 가휼이었다. 쉬고 있던 찰나에 마주친 거라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마기휼은 머뭇거리다가 가휼 쪽으로 걸어갔다.
“아래에 아직 사람들 많지?”
“네. 제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까 형님은 쉬십시오.”
“아니야. 이제는 바꾸자. 내가 내려갈게.”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을 때라면 더 좋았을 터였다. 아버지와 이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괜히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마기휼은 가휼의 다리에 달라붙어 있는 레이라에게 눈짓을 보냈다.
“귀엽네. 새어머니를 닮은 모양이야?”
“……그렇지요.”
가휼은 자신의 뒤에 숨어 있는 레이라를 내려다봤다. 바라보는 눈빛은 부드러웠으나 동시에 약간의 복잡함이 담겨 있었다. 그걸 본 마기휼은 눈을 깜박였다.
가휼은 레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내 마기휼을 바라봤다.
“형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안베르로 가실 겁니까?”
“…….”
마기휼은 대답하지 않고 동생을 쳐다봤다. 가휼의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었다. 수많은 말보다 더 확실하게 의사가 전달되었다.
마기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밖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더구나.”
“사실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휼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래로 내리떠진 눈동자 안쪽으로 복잡함이 서렸다. 고민이 되는 듯한 얼굴을 하던 것도 잠시,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모든 걸 회피해버리고만 싶어했다. 그건 마기휼도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아버지의 죽음 후에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지. 여러모로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되었다. 가휼도, 자신도 말이다.
“내일 일찍 떠날 거야. 조용히 나갈 테니까 괜히 신경 쓰지 마.”
“……형님. 저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의 가휼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아래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레이라를 안아 들고 몸을 돌렸다. 가휼의 품에 안긴 레이라가 마기휼을 바라봤다. 얼굴이 유난히 하얀 아이는 반짝거리는 보랏빛 눈동자를 깜박였다. 그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해지는 순간 드는 알 수 없는 껄끄러움에 마기휼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새벽 5시는 확실히 이른 시간이었다. 그 전부터 조용히 준비했기 때문에 자신이 나오는 걸 본 사람은 없을 거다. 실제로 들킬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마기휼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저택을 빠져나와 마을로 들어가 걸음을 서둘렀다. 일단 마을에서 말 하나를 빌려 공항으로 가야 했다. 거기서 안베르로 가는 배를 탈 생각이었다. 오늘 안베르행이 있을까도 싶었지만 일단은 가 보는 게 중요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저택을 살펴보려 했다. 그런데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보이는 저택이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곳에 아버지의 망령이 머물고 있을 것 같았다. 그가 가만히 서서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면 어쩌나 싶었다.
그토록이나 자신을 사랑했던 아버지였다. 그가 잘못된 길로 가게 된 것을 빠르게 알아차린 후, 말렸어야 했다는 죄책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분명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집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자신이 서 있을 공간이 없었다. 어색하고 불편했다. 가휼이나 새어머니. 그리고 레이라라는 어린 동생은 이미 그들만의 가족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그곳에 낄 순 없었다. 자신은 이방인이었다. 로노베는 태어나 자란 곳으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장소가 되어버렸다.
추웠다. 그렇게 낮은 기온도 아닌데 왜 이렇게 추운 것인지 모르겠다. 마기휼은 몸을 웅크린 채로 걸음을 서둘렀다.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마시장은 아직 조용했다. 간간이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 입구에 한 사내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실례합니다.”
불 앞에 양손을 내밀고 있던 사내는 마기휼을 흘겨봤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직 가게 문은 안 열었는데요.”
“공항으로 빨리 가 봐야 합니다. 다리가 튼튼한 말 한 마리 부탁하겠소.”
마기휼은 동전을 내밀었다. 로노디아 중앙은행에서 나오는 100베리짜리였다. 보통 말을 빌리는 데는 15베리면 충분했다. 그런데 100베리라니.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사내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금방 안으로 들어가나 싶더니 이내 건강해 보이는 말 한 마리를 끌고 나왔다.
“나으리 여기에 있습니다.”
“고맙군.”
어디를 가나 돈의 위력은 강한 법이었다. 그것에 대해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때라면 마기휼도 절대로 손해 보는 성격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거스름돈을 받으려 했겠지만, 지금은 이곳을 떠나는 게 중요했다.
말에 올라탄 마기휼은 출발을 서둘렀다. 아직 새벽이라 잠을 자는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마을의 흙길을 따라 이동했다.
빠르게 지나치는 바람이 마기휼의 뺨과 머리를 긁어 냈다. 달려가는 귓가로 바람을 가르는 둔탁한 음향이 들렸다. 일반 배의 소리가 아니었다. 마기휼은 말을 몰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곳으로 날씬한 검은 군함이 어둠에 잠긴 하늘을 가로질러 갔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한쪽에 있던 사람들에게 가서 말을 전달했다. 말을 받아 고삐의 색을 확인한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기휼에게 5베리를 건넸다. 15베리에 빌리고 말을 반납하면 5베리를 돌려받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이미 100베리를 쓴 마기휼은 5베리를 받아도 그리 썩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이걸로 그냥 아침이나 간단히 사 먹자면서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5시 30분 정도 되었다. 이 시간이니 공항 내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대부분 상인들인 듯 여기저기에 짐이 쌓여 있었다.
6시부터 이동이 시작되겠고, 그때 첫 배가 뜰 거다. 꼭 안베르로 가는 게 아니라 해도 가장 먼저 뜨는 배를 타고 이동을 해버릴까. 멍하니 생각을 하는 마기휼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걸어가는 걸음도 비틀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틀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뜬눈으로 지새웠던 것이다. 로노베로 오는 동안에도 일이 있어 노르디아 중앙군 군함에서 2시간 반을 잔 것이 전부였다.
아침은 대충 먹고 어디 구석으로 들어가 잠이나 잘까. 정말 그리할 생각으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다가 앞에서 오던 이와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피로한 상태였기 때문에 살짝 부딪친 거라 해도 아팠다.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든 마기휼은 검은 베레모를 쓴 군인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마기휼은 짧은 순간 묘하다는 눈빛을 하는 상대 쪽으로 손가락질했다.
“라울 중령?”
“이제는 대령이다.”
지나치게 딱딱한 목소리. 분명 라울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원래대로라면 안베르에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자 라울은 입을 다물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눈을 굴렸다.
뭐, 할 일이 있으니까 이곳에 있는 거겠지. 모처럼 아는 얼굴을 봐서 좋기는 하지만 이쪽과 그리 썩 친분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 친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마기휼의 머릿속으로 서류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 일찍 일어난 탓에 머리 상태가 몽롱해서 바로 생각나지 않았지만, 이쪽은 저쪽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바로 집안의 빚 문제였다. 돈을 빌려준 건 분명 안제크였다. 라울은 그 안제크가의 사람이었고 말이다. 이쪽은 그가 위험했을 때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그걸 가지고 생색을 내면 어느 정도 감면이 되지 않을까.
마기휼은 라울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 시간 있습니까?”
“……뭐?”
라울의 표정이 살짝 이상하게 변한다. 이놈은 또 왜 이러는 거야. 그리 따져 묻고 싶은 얼굴이었으나 마기휼은 그 나름대로 급한 사정이 있었다.
“시간 있느냐고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아주 조금만 있으면 됩니다. 이야기 좀 합시다.”
“대령님, 무슨 일이십니까?”
라울의 뒤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검청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7:3 가르마로 나눈 사내는 안경까지 끼고 있어 딱 봐도 깐깐한 성품일 것 같았다. 중앙군 소속임을 알리는 군복을 입은 자는 라울의 손을 붙잡고 있는 마기휼을 보고는 바로 안색을 굳혔다.
“이 무례한 놈. 네놈은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것이냐.”
그러는 네놈은 뭐냐. 다른 때라면 알아서 웃는 얼굴로 분위기를 정리했을 마기휼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그 얼굴은 굳어졌다.
“라울 대령님. 제가 배에서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는 저 좀 도와주십시오.”
“네놈이 대령님께 뭘 도와준 것이 있다고 그런 망발을 하는―!”
“이만 됐다.”
언성을 높이려 했던 이는 라울의 제지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라울을 쳐다봤으나 라울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마기휼을 내려다봤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인가?”
마기휼은 입을 다문 채로 고개를 저었다. 다급한 고갯짓에 라울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이내 그는 ‘안쪽으로 가자.’라고 말하며 먼저 몸을 돌렸다.
잡고 있는 손을 떨쳐 내지 않았다. 일단 라울이 대화를 나누겠다고 허락을 하자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이상한지 알 것 같았다. 무작정 팔을 붙잡고 무례한 행동을 취했는데도 별다른 지적이 없었다. 전에는 밥맛없는 재수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정말 좋은 놈이었다. 앞으로 나눌 대화도 좋은 쪽으로 풀릴 게 분명했다. 반드시 그리되어야 한다면서 마기휼은 인상을 쓴 채로 라울을 쫓아갔다.
옮겨 간 곳은 군함 내였다. 조금 전 말을 타고 왔을 때 본 것이었다.
이걸 타고 이리로 온 건가. 안베르로 가는 게 아니었나? 궁금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용무는 다른 쪽에 있었다. 라울은 장갑을 벗어 테이블 한쪽에 내려놨다. 의자를 끌고 자리에 앉은 그는 마기휼을 올려다봤다.
“자리에 앉지.”
“……고맙습니다.”
마기휼은 의자를 끌어 앉았다. 7평 남짓의 공간에는 책상과 테이블 딱 두 가지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라울의 개인실인 모양이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일도 없다는 거겠지.
잘되었다. 훨씬 더 말을 꺼내기가 수월하게 된 셈이었다.
“부친의 장례식은 잘 처리되었나.”
갑작스러운 말에 마기휼의 몸으로 힘이 들어갔다. 긴장한 듯 단단하게 조여지는 육체. 분위기도 다소 가라앉았다. 그걸 느끼지 못할 라울이 아니었다.
“내가 말실수를 한 거라면 사과하지.”
“아니요. 아닙니다. 실수하신 건 없습니다. 그저 제가 부족할 따름이지요.”
중얼거린 마기휼은 긴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셔서 이곳에 없고 남겨진 것은 현실적인 문제뿐이었다.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이 처리하고 해결을 봐야만 하는 것이었다.
마기휼은 고개를 들어 라울을 바라봤다.
“당신의 목숨값은 얼마나 됩니까.”
지나치게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기휼이 무슨 말을 꺼내려는가 싶었던 라울은 막상 그가 한 말에 가만히 있다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뭐라고?”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노르디아 중앙군이 움직이더군요. 당신은 그만큼 중요한 인물인 겁니까?”
라울은 입을 다물었다. 현장에 있을 때만 해도 이런 언급을 하지 않던 마기휼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화제를 입에 담는 게 새삼스럽게 여겨졌다. 무슨 생각인 건가 싶었던 라울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가 당신을 도와준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만약 그 현장에 제가 없었어도 일이 그리도 원만하게 해결이 되었을까요?”
마기휼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으로서는 그가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 판단을 내린 라울은 고개를 저었다.
“냉정하게 판단을 하자면 아니다. 네 활약은 아주 뛰어났다.”
“저로 인해서 당신이 보호되었다는 걸 인정하십니까.”
“인정한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죽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원치 않은 곳으로 끌려가 지루한 협상을 해야 했을 테고 말이야. 이것이 너에게 중요한 내용인 건가?”
“그렇습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으로서는 말이다. 암만 노력해도 혼자서 집안의 빚을 다 갚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마기휼은 가방을 열고 그 안에 넣어 온 서류를 끄집어냈다.
“이걸 읽어봐주십시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구겨진 봉투를 가만히 바라보던 라울은 그리로 손을 뻗었다. 봉투를 열고 안에 들어가 있던 종이를 꺼냈다. 찬찬히 내용을 살피던 라울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20만 베리라. 굉장하군.”
“그 돈을 저희 집안에서 빌린 거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저는 그걸 갚아야 합니다.”
20만 베리라니. 어림도 없었다. 그런 돈, 혼자서는 도무지 갚을 수 없었다. 물론 한 20년 저당 잡힌 채로 안제크가에서 노예처럼 살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청춘을 그런 식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벌써 29살이니 청춘이라 하기에 다소 무리가 뒤따르지만.
“당신의 목숨값으로 20만 베리는 가벼운 게 아닙니까?”
문서가 위조된 게 아닐까 싶어 재차 살펴보던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마기휼을 쳐다보는 그 눈동자는 담담했다. 아무것도 읽히질 않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것이 너무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왜 바로 대답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마기휼은 긴장한 채로 라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후에 그가 물었다.
“나를 구해준 것을 이 금액으로 대체하시겠다?”
“그렇습니다.”
20만 베리. 노르디아의 중앙군이 구출하러 올 정도라면 가벼운 값이 아닌가. 중앙군의 군함 한 대를 움직일 때 드는 비용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적어도 2만 베리 쯤은 되겠지. 그런 게 3대. 20만 베리는 너희한테는 껌값일 거 아니야.
마기휼은 초조하게 라울의 대답을 기다렸다.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있던 라울이 뒤로 몸을 물렸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낀 라울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아는가?”
“모릅니다. 그리고 전 지금 제 앞가림하기도 벅찬 상태라 알고 싶지도 않군요.”
“알아야 할 거다. 자네와 아주 관련 깊은 문제일 테니까. 혹시 동생이 여자인가?”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지 모르겠다. 왜 이런 상황에서 내 동생에 대해서 묻는 거야. 게다가 여자냐고? 마기휼은 당장 고개를 저었다.
“남자인데요?”
“……남자라고?”
되묻는 라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이쪽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얼굴에 마기휼도 살짝 표정이 굳어졌다.
“제 동생의 이름은 가휼입니다. 저보다 훨씬 더 덩치 좋은 사내이고요.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으시는 겁니까?”
라울은 대답이 없었다. 턱 아래에 손가락을 대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싶던 그는 마기휼을 흘겨봤다.
“동생 중에 여자가 하나도 없는 건가?”
“……오랜만에 집에 왔더니 6살짜리 귀여운 꼬마 숙녀가 있기는 하더군요.”
“6살이라고?”
목소리 톤이 날카롭게 변한다.
늘 차분한 반응을 보이던 라울이었기 때문에 의외였다.
“왜 갑자기 저희 집안 호구 조사를 하시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라울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심각한 얼굴이었다.
“또 나를 놀리려는 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라울 그는 지금 꽤나 심각한 것 같았으나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이쪽도 그의 대답 하나가 중요했다. 일단 네 목숨값이나 지불하란 말이야.
너무 재촉을 하면 싫어할 것 같아서 참고 있는데 암만 해도 안 되겠다.
재차 말을 꺼내려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문 바깥으로 음성이 들려왔다.
“대령님. 실례하겠습니다.”
통신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목소리는 딱딱한 억양이었다. 라울은 들어오라 했고 자동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라울의 옆에 서선 들고 온 편지를 내밀었다.
“안제크 저택에서의 전언입니다.”
“누가 보내는 거지?”
“오르베 님이십니다.”
“고모님이신가.”
중얼거린 라울은 굳은 얼굴로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걸 확인 후 여자는 밖으로 나갔고 마기휼은 더더욱 초조해졌다.
이 자식. 내가 앞에 있는데 다른 일을 하다니. 네 고모님이 누군지는 관심 없으니까 일단 나에게 집중하란 말이야. 초조함에 마기휼의 한쪽 다리가 달달 떨렸다. 오만상을 찡그린 채로 있는 마기휼은 누가 건드리면 폭발할 지경이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너무도 많아 안 그래도 예민한 상태인데 라울이 그걸 너무 몰라준다. 이러다가 이쪽이 큰소리를 쳐도 네놈은 할 말 없는 거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갑자기 라울이 고개를 들어 읽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뭐로 읽히지?”
마기휼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다가 라울의 물음에 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라울은 굳은 표정이었다. 왜 또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마기휼은 그가 내민 종이를 살폈다.
전언이라고 하는 것 치고는 꽤나 간소했다. 딱 하나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도 [마기휼] 그것으로 말이다.
29년을 살아오면서 저 이름으로 불린 건 아마도 수만 번은 될 터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보게 된 이름은 순간적으로 정말 내 이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끄러미 이름을 살피던 마기휼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이군요.”
마기휼의 대답에 라울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믿고 싶지 않다는 듯 경직된 얼굴이 된 그는 종이를 테이블 위에 내렸다.
“이 이름을 지닌 여동생이 정말 없는 건가?”
“제가 알기에는 저희 집안에서 그 이름인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란 말이야.
이제 슬슬 라울의 앞에 있으면서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게 짜증스러워진다. 그 전에 왜 자신의 이름이 적혀진 편지가 전달된 것인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마기휼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라울은 테이블에 올려진 종이를 각각 살폈다. 하나는 조금 전에 도착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기휼이 보여준 것이었다.
라울의 손이 마기휼이 내민 서류 위에 올려졌다.
“자네가 내민 이 서류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어. 내가 이리로 온 것은 고모님의 명령 때문이었지. 자신이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 나의 신부를 사들였다고 하시더군. 한창 여왕 폐하의 명령을 수행 중에 있었는데 당장 신부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집안이 온통 시끄럽게 난리를 부려 대는 통에 오지 않을 수 없었지. 이곳에 오면 신부의 이름을 알려주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고작 이건가. 자네의 이름이라니―.”
라울의 말을 듣는 동안 마기휼은 머리 한쪽이 텅 비는 걸 느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을 뿐이지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라울은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들어 마기휼을 바라봤다. 평범하지만 하나하나 꼽아보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키가 큰 편이긴 하지만 다른 사내들처럼 우락부락한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날씬하고 가느다란 편에 속했다.
7년 동안 군에 있었으면서도 저런 몸매를 유지하는 게 가능할까. 순간적으로 드는 의문에 라울은 마기휼의 보랏빛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자네 설마…….”
“전 남자입니다. 작은 일은 서서 해결합니다.”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라울의 모습에 아주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았던 마기휼은 재차 자신을 변호하는 발언을 했다.
“같은 방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옷 갈아입는 것도 봤지. 몸이 가늘긴 했지만 분명 사내였어.”
그래. 마기휼은 분명 사내였다. 그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난 7년 동안 어찌 군에 있을 수 있었겠나. 그가 여자라고, 잠시라고는 하나 착각을 했던 것이 어리석게 여겨졌다.
라울이 다른 쪽을 쳐다보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마기휼이 말했다.
“고모님이 저희 집안에 돈을 빌려주셨던 거로군요. 덕분에 위기는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부 건은…….”
말을 하는 동안 혀끝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고모인가 뭔가 하는 여자는 분명 자신의 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라울을 움직이려는 거고. 하지만 보통 20만 베리나 사용하면서 이런 장난을 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쩌면 장난이 아니라 진심일지도 몰랐다. 만나지는 못했으나 얼굴이 마주치면 분명히 말을 할 거다.
‘너 돈 안 갚아도 되니까 내 조카의 아이나 낳아라.’
라고 말이다.
소름이 돋았다. 내내 피해 다녔던 그 빌어먹을 일을 이런 곳에서 까발려지다니. 라울은 모르겠지만 마기휼은 굉장히 수치스럽고 창피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마기휼은 말을 이었다.
“고모님의 장난이 심하시군요.”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분께 제가 당신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그걸로 빚은 없었던 일로 해주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해주시는 게 어떨까요? 어떤 식으로 제 이름을 알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분의 당황스러운 장난에 장단을 맞추고 싶지 않군요. 최대한 서로가 피해를 보지 않고 적당히 이득을 보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했으면 좋겠군요.”
그래서 나는 이쯤에서 손을 떼고 싶다. 금전적인 문제라도 해결을 봐야 다시금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면죄부가 생기는 게 아니겠어? 적어도 동생에게만큼은 말이다.
마기휼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로 라울을 쳐다봤다. 라울은 가만히 있었다. 다른 쪽을 쳐다보나 싶던 그의 눈동자가 마기휼의 얼굴로 고정되었다.
“고모님이 자네에 대해서 알면 안 되는 건가?”
“아니요. 왜 그러겠습니까. 그냥 그분께서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아서 말이지요. 뭣하시면 제 이름을 솔직하게 알려주셔도 됩니다.”
알려줄 경우 문제가 커지게 될 것 같았다. 그런 건 싫었다. 자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아는 건. 특히나 라울처럼 모든 걸 지닌 놈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자. 판단을 내려. 뭐라도 좋으니까 어서 말을 하라고.
마기휼의 눈빛으로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자 라울이 물었다.
“자네 집안에 여동생이 있어도 그건 6살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고모님이 뭔가 착각을 했던 것 같군.”
됐다. 마기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일은 그냥 이렇게 마무리가 되면 될 터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내가 아니라 고모님과 해결을 봐야 할 것 같군.”
진심으로 기분 좋게 웃으려다 말고 굳어졌다.
아니. 이쪽 원하는 대로 될 것 같더니 이건 또 무슨 찬물 끼얹는 소리야?
마기휼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표정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그걸 정리하며 마기휼은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당신 목숨값을 받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당신이 처리해주시면―”
“돈을 빌려준 건 내가 아니라 고모님이다. 우리 집안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다른 이가 개입하는 걸 가장 싫어하지. 그래. 나는 자네 덕분에 안전할 수 있었고 그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현할 생각이야. 그러니 이번 일이 마무리되어 저택으로 돌아가게 되면 사례금을 주도록 하지. 그리고 자네는 그 사례금을 고모님께 집적 전해 드리면 될 거야. 그리하면 고모님도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시고 이번 문제는 없었던 일로 처리하시겠지.”
“그래서 이 문서는 당신의 선에서 처리할 수 없다는 겁니까?”
“돈은 주겠어. 그걸 자네가 고모님께 직접 전해 드리면 되네. 왜? 고모님 앞에 나서기가 껄끄러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강하게 밀고 나갈 필요가 있었다. 라울이 의아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말이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아무래도 대령님의 고모님께서 크나큰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군요.”
라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조금의 물러남도 없는 그 당당한 눈빛에 라울은 잠자코 있었다.
이놈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알고 있는 걸까. 모르고 있는 걸까. 그냥 속 편히 무시할 수 있는 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라울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우습게 볼 수 없었다.
긴장된 눈빛이 주고받아졌다. 그러는 동안 라울의 눈동자 안쪽으로 뭔가가 번득였다. 그걸 읽어낸 마기휼이 움찔하는 동안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대령님 저 노드만입니다.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소리. 라울은 잠시 후 안으로 들어오라 했다. 들어온 사내는 우선 마기휼을 흘겨봤다. 그 눈동자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시비를 걸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마기휼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고, 노드만은 라울의 앞에 서선 보고를 했다.
“그 여자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디냐.”
구체적인 지명에 대해서도 말을 해야 하는 건가. 마기휼을 흘겨보는 눈동자 안쪽으로 숨겨지지 않는 불편함이 감돌았다. 노드만이 마기휼을 쳐다보는 걸 확인한 라울은 입을 열었다.
“그는 괜찮다. 함께 움직일 거니까.”
이쪽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있던 마기휼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함께 움직인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듣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마기휼을 바라보며 라울은 차분히 말했다.
“어차피 자네는 지금 안제크로 갈 것이 아니었나? 나도 이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돌아갈 거다.”
빚으로 청산할 문제가 있어 안베르 내에 있는 안제크가로 가야 할 처지긴 했다. 하지만 지금 라울과 함께 움직이는 건 여러 가지로 껄끄러웠다. 그렇다고 이 군함에서 내린다는 말을 한다면 라울이 수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괜한 건수를 만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건가. 마기휼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함을 가장했다.
“까짓것 같이 이동하지요 뭐. 좋군요. 덕분에 돈 굳었습니다그려.”
어깨를 으쓱이며 별거 아니라는 듯 반응을 보이는 마기휼의 안색을 살피던 라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보고를 듣도록 하지. 그동안 마기휼 소령.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짤막하게 말을 전한 라울은 노드만 중령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자 기다렸다는 듯 노드만 중령은 한마디 했다.
“저런 자를 군함에 태우시다니요. 그냥 내리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저자도 어차피 안베르로 갈 예정이다.”
“설마 저자를 안베르 지부에 넣을 생각이십니까?”
라울 대령은 앞으로 안베르로 소속이 옮겨진다. 거기서 그는 새롭게 그만의 군을 만들어야 했고, 때문에 함께 일을 할 군인도 모집 중에 있었다. 원래부터 예정된 일이었기 때문에 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진행이 되어 가 지금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다. 라울이 앞으로 몇 명을 더 넣을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게 저런 사내인가 싶었다. 갈색 피부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별로였다. 노드만이 볼 때에는 참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은 이였다.
안색을 굳힌 채로 바라보는 노드만을, 라울이 내려다봤다. 가만히 있나 싶던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말은 꽤나 차가웠다.
“너는 쓸데없을 정도로 생각과 말이 많은 자다. 난 그런 이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알면서도 계속 이런 태도를 보일 건가.”
“……죄송합니다.”
알게 모르게 월권을 행사한 건지도 모른다. 다소 굳은 낯으로 눈을 내리뜨는 노드만을 확인하고 나서야 라울이 물었다.
“그래. 그 여자는 어디에 있다는 거지?”
화제를 전환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노드만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북동쪽 인어의 늪입니다.”
“인어의 늪이라.”
이름에서도 느껴지듯이 불길한 장소였다. 가고 싶지는 않으나 그곳에 여자가 있다 하니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다소 굳은 안색으로 있던 라울은 “그러면 그쪽으로 군함을 이동한다.”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혼자 방에 남게 된 마기휼은 당장 머리를 감싼 채로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그 상태로 미동 없이 있나 싶던 그는 발작적으로 바닥을 탕- 하고 쳤다. 이내 고개를 든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그 안색은 창백했다.
라울의 고모인가 뭔가 하는 여자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그녀가 스스로 알아냈을 리가 만무했다. 분명 누군가 말을 흘렸을 거다. 돈을 빌린 건 계모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을 흘린 걸까? 설령 말을 흘렸다 해도, 겉으로 보면 자신은 사내였다. 단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라울의 고모님이 관심을 가지는 건가.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신부를 얻었다고? 말이 돼? 돈이 썩을 정도로 넘쳐나는 대귀족들은 때때로 쓸데없는 유희를 즐긴다던데, 자신도 그 일부분이 된 것 같아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유쾌하기는커녕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신기했겠지. 남자인 주제에 아이를 낳을 수 있다 하니 흥미진진하지 않겠어? 어쩌면 라울을 통해 자신을 만나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라울이 끌고 온 마기휼이라는 사내가 어떤 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구경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 사람들 많이 불러내고 알몸 쇼라도 벌일까? 그리 한 번 해서 20만 베리를 무마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는 이득이었다.
그래. 득이고 말고―.
“빌어먹을.”
중얼거린 마기휼은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었다.
점점 기분이 가라앉는다. 암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처음 계모가 왔을 때, 그녀는 자신을 보자마자 더러운 것을 대하는 것 같은 눈을 했다.
처음인지라 자신이 뭔가를 착각한 듯싶어 초반에는 먼저 살갑게 굴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쩌다 손이 닿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 손을 쳐 내며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더러워! 만지지 마! 이 괴물!’
아직 그녀는 젊었고, 마기휼도 한창 혈기가 왕성할 때였다. 그녀의 말에 지독한 분노와 증오를 느꼈다. 그리고 이내 아버지가 자신의 몸에 대해서 그녀에게 말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그녀의 거부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 세계라 하나, 평범한 사람이라 불리는 이들은 자신들만의 틀에서 정해진 사고만을 유지했다. 다양한 돌연변이를 인정치 않고 그들을 꺼리는 자들도 있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란 그녀가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딸을 하나 낳고, 동생인 가휼과 서로 의지를 하며 살아간 지 어언 7년. 그동안 그녀는 조금 달라진 듯싶지만, 여전히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하나를 버려 집안을 지키려는 거다. 아버지가 없는 그녀만의 가정을 말이다.
다만 지금 마기휼이 가장 신경 쓰는 건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에 대해서 가휼도 찬성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
손을 마주 잡은 마기휼의 얼굴이 차차 굳어졌다. 이내 그의 떨림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몸이 떨리는 건 아니었다. 군함이 이륙하고 있었다. 멍하니 있던 그는 일어서 벽으로 걸어갔다. 동그랗게 난 작은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봤다.
지금 이곳이 로노베였다. 그리고 모든 일이 처리가 되었을 때 자신은 이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아까부터 몇 번이나 생각하게 된다. 그리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앞으로는 로노베로 돌아올 수 없다고 스스로 체념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걸, 슬슬 인정해야 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