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2살에 군에 들어와 7년 동안 집에 돌아가 본 적이 없던 그였다. 아버지가 있고 동생이 있는 곳이었지만 동시에 불편한 곳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런 자신을 반길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싶었다. 그냥 아버지만 보고 빨리 돌아오자. 그 생각뿐이었다.
멍하니 눈을 내리뜬 채로 있던 마기휼은 큰 소리가 나자 고개를 들었다. 배를 타기 위해 공항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투명한 창으로 된 한쪽 면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인다. 이미 그곳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났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알 턱이 없었다. 가만히 있기에도 심심했던 마기휼은 의자에서 일어나 사람들 뒤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잘 보이지 않았다.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보고 싶어졌다. 마기휼은 양해를 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좀 가겠습니다.”
밀쳐진 여자가 화가 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모르는 척을 했다. 결국 유리벽 앞으로까지 와서야 아래가 훤히 보였다. 배의 아래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게 육안으로 확인이 되었다.
저만한 연기라니. 거기다 위치를 보아하니 중심부였다.
“엔진 고장인가.”
중얼거린 마기휼은 배의 넘버를 확인했다. 마침 이쪽이 가는 곳이 경유하는 지점이었다. 오늘 그리로 가는 사람은 좀 기다려야겠군. 그래도 자신이 타는 배가 아닌 게 다행이지 않으냐면서 마기휼은 하품을 했다.
그때 자리를 비켜줬던 여자가 싫은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날카로운 시선에 마기휼은 입을 다물고는 뒤로 물러났다.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재차 하품을 하며 원래 앉아 있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공항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별의별 것들을 다 보게 되었고, 종종 외관적으로 기형인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지나치게 키가 크거나 작거나 한 건 평범한 축에 속했다.
눈과 코의 위치가 미묘하게 다르거나 피부 위로 이상한 반점이나 줄이 그려진 사람도 있었다. 눈이 3개인 사람도 종종 있지만 그런 경우 달리 있는 눈을 붕대로 감아 감추기 때문에 그리 티가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거기에 종종 꼬리가 달린 사람도 있고 손이 유난히 크거나, 허리가 굽거나,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에 대한 차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 정상의 범주에 들어간 이들은 그런 그들에게 일부러 접근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눌 일이 있지 않고서야 먼저 살갑게 굴거나 친분을 새로 만들지도 않았다.
본인이 정상으로 태어난 이들은 그것에 지나칠 정도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는 분명 선입견을 품고 있을 거다. 그 선입견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마기휼도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이지만 속은 분명 기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과 다르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비밀로 한다면 그걸 숨기고 살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의 유언처럼―.
‘네가 이상한 게 아니다. 모든 게 나의 책임이다.’
안타까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마른침을 삼킨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재차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낀다. 한없이 마음이 쓰라려지는 통증을 느끼며 마기휼은 긴 한숨을 쉬었다.
“마실 텐가.”
옆에서 내밀어지는 잔에 마기휼은 그쪽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남루한 차림의 덩치 큰 사내가 보였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나 그 속에 숨겨진 눈동자가 감추어지진 않았다.
백안에, 턱이 발달되어 있는 데다 전체적으로 골격이 크다. 그는 짐승과 관련된 변이종인 것 같았다.
잔을 쥔 손도 크고 투박했다. 손목 바로 위까지 내린 소매 아래로 무성한 털이 보였다. 마기휼은 사내가 내민 잔을 받았다. 따뜻했다. 그걸 마시자 사내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어디를 가는지 물어도 되나?”
“……로노베로 갑니다.”
로노베인가. 그리 중얼거린 사내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독한 향이었다. 분명 마약이 첨가되어 있었다. 그 향을 맡고 싶지 않았으나 바로 자리를 피하진 않았다. 마기휼은 계속 잔에 담긴 액체를 마셨다.
사내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마기휼을 찬찬히 살폈다. 느슨하게 풀어져 있다 해도 자세가 곧고 손등이 단단했다.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읽은 사내는 눈을 가늘게 휘었다.
“군인이로군. 그렇지?”
“그렇습니다. 당신은…… 떠돌이군요.”
한번 사내를 주욱 살펴보고 나서 하는 말에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가 나나? 웬만한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눈썰미가 좋군.”
“저도 서른 중반쯤 되면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살아가고 싶거든요.”
“그래? 좋은 계획을 세우고 있군.”
사내는 웃었다. 어울리지 않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기휼은 사내의 오른편에 놓인 짐 가방을 살폈다. 굉장히 컸다.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여기저기 다니는 동안 얻은 물건을 팔려고 저리 가방에 담은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관심이 사라졌다.
마기휼은 잔에 담긴 모든 걸 다 마시고는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이작이라고 하네. 자네는?”
“마기휼이라고 합니다.”
“독특한 이름이로군. 어머니가 혹시 집시셨나?”
“……그렇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모를 수가 없지. 휼은 집시들만의 돌림자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걸 아는 이들은 아주 드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난 알 수 있어. 내 어머니도 집시였으니까. 그래서 나도 돌림자를 쓰는 이름이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낙인이 아니던가. 누군가 내 이름만을 듣고 내 핏줄에 대해 아는 걸 원치 않아. 그래서 개명을 한 거라네. 자네는 이름으로 인해 알려지는 자네의 핏줄이 좋은 건가?”
선글라스 너머의 눈동자가 유난히 차갑게 보인다. 그걸 읽어낸 마기휼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싫지는 않습니다. 전 어머니를 사랑하니까요.”
“그런가. 그 차이인가. 난 어머니가 싫었어.”
사내는 이를 드러냈다. 숨겨져 있던 날카롭고 단단한 이가 드러났다. 저 이가 사람의 신체를 물면 살점이 뜯겨 나가고 뼈가 부러질 터였다. 그제야 사내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공항에서 만나는 이들과는 함부로 대화를 나누어선 안 되었는데-.
본인의 실책을 타박하는 동안 방송으로 출발할 배의 번호가 불렸다. 그중에는 마기휼이 탈 배도 있었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마기휼은 잔을 사내에게 건넸다.
“잘 마셨습니다.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사내는 빈 잔을 받아 머리 위로 살짝 올렸다.
“가는 걸음마다 안전과 평화가 머물기를 바라네.”
“그쪽이야말로.”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은 채로 마기휼은 작은 짐 가방을 한쪽 어깨에 올린 채로 걸어갔다. 점점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내의 눈동자가 이내 마기휼의 허리와 엉덩이 부근에 닿았다. 사내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사악 핥았다. 그리고는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GX 로노베행 항공함에 탑승하신 고객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정확히 13시 30분에 출발한 이 항공함은 엘레노드만, 안베르를 거쳐 로노베에 도달하게 됩니다. 소요 시간은 대략 10시간이 되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여러분들의 편리를 위해서 최대한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운항 중인 배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어떤 식으로 움직이면 될지에 대한 안내 방송이 줄줄 나왔지만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안대를 하고 귀마개를 장착한 마기휼은 일등석에 마련된 침대에 다리를 죽 펴고 누워버렸다.
적어도 출발할 때까지는 의자에 앉아 안전띠를 해줘야 했다. 군에서 모든 걸 배운 주제에 가장 먼저 준수할 사항을 위반하고 있었다. 이래서 알고 있는 것들이 더한다는 말이 나오는 거겠지만 마기휼은 코를 골아 댔다.
괜히 일등석이 아닌 모양이었다. 개인실에 있는 냉장고와, 그 안에 있는 맛깔스러운 음식 및 술은 그를 환호케 했고, 푹신하고 녹아들 듯한 침대는 그를 유혹했다. 이렇게 좋은 침대는 군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었다. 눕자마자 퉁겨져 나와 바닥을 뒹굴어야 하는 싸구려 위에서만 눕다가 이런 침대에 누우려니 그대로 승천할 것 같았다.
아. 좋다. 정말 좋다. 그리 생각만 하고 있으려니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에 닿았다.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지만 알게 모르게 “손님. 잠시만 일어나 주십시오.”라는 계속되는 소리가 그리할 수 없게끔 했다.
아. 난 지금 굉장히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거란 말이야. 도대체 어떤 놈이 그걸 방해하는 건가 싶었던 마기휼은 귀를 막고 있던 마개를 떼어 내고 안대를 벗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짓는 여자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런 미인이 곤란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남자라면 다정하게 대해줘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언제 짜증스러워했느냐는 듯 마기휼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귀마개를 침대 한쪽으로 처박았다.
“무슨 일이신지요? 그리 곤란해하지 마시고 말씀을 하시지요.”
나름 왕자님 어투로 말을 전하자 승무원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녀는 반쯤 숙이고 있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현재 약간의 문제가 생겨 손님의 협조를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랍니다.”
“……약간의 문제?”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되묻는 순간 안 좋은 느낌이 사악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여자만 보였던 그의 시야가 넓어져 주변의 다양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승무원의 뒤에 서 있는 사내 둘도 말이다.
평상복 차림으로 나온 마기휼과 다르게 그들은 군복에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뒤에 서 있는 어중이는 그렇다 쳐도 앞쪽에 선 사내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금발을 하나로 묶은 사내의 가슴에는 대령을 알리는 화려한 계급장이 번쩍였다. 그리고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그 눈부신 외모는 분명 라울의 것이었다. 마기휼은 벌떡 일어났다.
“정말 라울이냐?”
묻고 나서 아차 싶었다.
저런 얼굴이 세상에 둘일 터는 없을 테니 분명 라울 그였다. 괜한 질문을 해서 바보 취급을 받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는 아까와 별 다름이 없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너는 분명 라울일 거야. 그런데 문제는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는 거야. 설마하니 자는 내 얼굴을 보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말이다. 순간 마기휼의 머리로 엔진 쪽에서 검은 연기를 토해 내던 배가 떠올랐다. 마기휼은 눈을 번득이며 승무원을 쳐다봤다.
“합석인가?”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승무원은 눈을 굴렸다. 합석은 쉽사리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특수한 상황이었다. 승무원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같은 군부대 소속인 걸로 압니다. 원래 이런 경우는 안 될 것이지만, 위급한 상황이니 양해 바랍니다. 안베르행을 타실 예정이셨던 분들 대부분이 저희 항공함으로 옮겨 타시기로 했답니다.”
옮겨 타는 거야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 문제는 왜 나랑 합석을 해야 하는 거냐는 거다. 승무원 눈으로 봤을 때 같은 군에 있었으니까 사이가 좋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이었다. 저놈이랑은 제대로 말을 섞은 적도 없단 말이야.
품은 불만이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가만히 있던 라울이 입을 열었다.
“고드 총사령관님께 타야 할 배에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려드리자 자네와 함께 가면 될 거라고 하시더군. 그래서 이렇게 온 거네. 물론, 괜찮겠지?”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갔다.
그래. 이제는 대령이라 이거냐. 그에 비해 나는 만년 소령이지. 계급의 차이도 그렇지만 전날 있었던 일 때문에 강하게 나갈 수 없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분명 이쪽이 실수를 한 부분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입을 다문 채로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눈으로 라울의 뒤에 서 있는 군인을 쳐다봤다.
“저놈도 이리로 오는 겁니까?”
“그는 일반실에 타게 될 거다.”
“그래요? 그러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여기는 혼자 쓰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넓으니까 타든가, 말든가 하십시오.”
웅얼거린 마기휼은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라울의 뒤에 서 있던 군인이 앞으로 나섰다.
“마기휼 소령. 라울 대령님 앞입니다. 그렇게 누워만 있는 게 옳은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존대로 말을 하기는 하지만 정말은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어하는 얼굴이었다. 그걸 느끼지 못할 마기휼이 아니었다. 저걸 시빗거리로 문제 삼아 일을 크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물론 일어나야지. 일어나야겠지요.”
그래. 대령이라지 않은가.
어제 일은 어제 일이고 지금은 지금이었다. 이런 재수 없는 경우라니. 전에 라울이 자신의 아래에 배치되었을 때 마구 굴려 대지 못한 게 이렇게나 후회가 될 줄은 또 몰랐지.
마기휼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내 무릎을 꿇고 앉아 허벅지 위에 양손을 올린 채로 라울을 빤히 쳐다봤다.
“이러고 있어야 할까요?”
침대에서 일어나 똑바로 설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군인은 당황했다. 그건 승무원도 마찬가지였다. 이 무슨 장난인가 싶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으려니 얼굴이 붉어진 군인이 언성을 높였다.
“마기휼 소령. 당신 정말로―!”
“이만 됐다.”
라울은 군인이 들고 온 가방을 빼앗아 근처 의자에 올렸다. 덮고 있던 망토를 벗고 모자까지 벗은 그는 승무원과 보좌관을 동시에 내려다봤다.
“수고했소. 이만 나가보십시오. 그리고 너도 나가 있어라.”
자세한 정황을 알지는 못해도 분위기가 묘하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 해서 이쪽이 달리 개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눈치를 살살 보던 승무원은 고개를 숙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뒤를 이어 하사관이 마기휼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저놈한테 쪼르륵 달려가서 일러라. 그러면 저놈이 내 엉덩이에 때찌라도 해주겠지. 심드렁하니 있던 마기휼은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이 나가자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침대를 반으로 접어 벽으로 밀어 넣는 걸 보고 라울이 한마디 했다.
“그냥 누워 있어도 괜찮다.”
“그래도 대령이십니다. 제가 어찌 감히 계속 누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 말을 하면서도 침대를 정리하는 손길이 거칠기 짝이 없었다.
소리가 탕탕 나게끔 침대를 정리한 후, 마기휼은 안쪽 의자를 펴고 그것을 손으로 가리켰다.
“앉으시지요.”
라울은 순순히 자리로 가 앉았다. 마기휼도 침대를 펴려 한쪽으로 밀어 둔 의자를 원래 자리에 두고 그 위에 앉았다.
이렇게 하니 상당히 이상했다. 객실은 넓은데 의자는 서로 마주 보는 식이었다. 라울은 책 하나를 꺼내 읽고 있었지만, 마기휼은 그런 것도 없었다. 그는 뒤에 있는 서랍에서 담요를 꺼내 몸에 덮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의자에 편히 앉은 채로 창밖을 내다봤다.
사람들이 모두 탑승을 한 건지 연결되어 있던 줄이 떨어지고 배를 받치고 있던 기둥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부연 연기가 바닥으로 퍼지더니 내부로 진동이 퍼졌다. 기다렸다는 듯 방송이 나왔다.
[곧 출발하겠습니다. 함 내에 계시는 손님 여러분들께서는 모두 자리에 앉아 안전띠를 착용해주십시오. 이륙 시 신체에 이상이 생기신 분들께서는 꼭 승무원에게 말씀해주십시오.]
안내 방송을 들으며 마기휼은 입맛을 다셨다. 그 얼굴로 숨겨지지 않은 탐탁잖음이 서렸다. 혼자서 느긋하게 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 웬 불청객인가 싶었다.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다리를 꼰 마기휼은 창밖을 내다봤다.
금방 구름이 보이게 되었다. 다른 때라면 보는 순간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서 내내 꽁한 얼굴로 있을 필요는 없었다. 라울도 원래 타야 할 배에 오르지 못한 게 아니던가. 그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먼저 말이나 걸자며 마기휼은 라울을 흘겨봤다.
“안베르로 가시는 겁니까.”
“그렇다. 너는 로노베로 가는 건가.”
“그렇지요. 뭐.”
“부친 일은 안되었다. 힘들겠군.”
무표정을 한 마기휼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고 물었다.
“그러는 대령님께선 아버지가 살아 계십니까?”
“돌아가셨다. 어머니도 안 계시고 형님이 한 분 계시지.”
“그렇군요.”
마기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끊기지 않게 하려고 예의상으로 말을 했다는 뉘앙스가 강한 태도와 분위기였다. 이대로 재차 침묵이 형성될 거라 생각했으나 이번에는 라울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계신다면 아버지께 하지 못한 효도를 하면 될 거다.”
“계모십니다. 그리고 그녀는 절 그리 좋아하지 않으시지요.”
이쪽과 그리 나이 차도 많이 나지 않았다.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집에서 자신과 동생을 쫓아낼지만을 궁리하는 영악한 여자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분명 변호사를 선임해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돌아가면 아주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
첫째 날은 아버지의 죽음만을 걱정했지만 둘째 날이 되니 서서히 현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점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을 내가 잘 처리할 수 있을까. 영리한 동생이 있으니까 미리 손을 써 두었을 터였다. 별 힘은 들지 않겠지만, 그래도 걱정이었다.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그때 배의 진동이 더 강해졌다. 위로 뜨고 있었다. 시끄러운 엔진음을 들으면서 마기휼은 입을 열었다.
“대령으로 진급하신 거 축하합니다.”
“고맙다. 네 덕분이다.”
마기휼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제 덕분이라니요. 무슨 그리 말씀을-.”
“군으로 처음 들어와 멋대로 행동하는 너를 보고, 너처럼 하지 않으면 잘 적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적중한 듯싶군.”
“……….”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욕 들은 거 맞지?
마기휼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정말은 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할 수 없었다. 대령이라지 않은가. 아직은 군 생활을 더 하고 싶었다. 나중에 내가 다 정리하고 뜰 때가 되면 넌 필히 손봐준다.
속으로 이를 갈아대던 마기휼은 이내 어떤 걸 떠올렸다. 오늘 아침에 본 배에 든 엄청난 멍. 젝슨이 하는 말에 따르면 그건 분명 라울이 만든 것이었다.
“독서를 하시는 중에 자꾸 말을 걸어 죄송합니다만, 어제 제가 라울 대령님께 한 방 맞은 겁니까?”
“미쳐 날뛰는 망아지를 진정시키는 방법으로는 매처럼 좋은 게 없지.”
라울 그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수롭지 않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아, 그렇군요.”
공감한다는 듯 마기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거야. 난 다 이해해. 다 알겠어. 그리 표현하는 얼굴을 하던 마기휼이었으나 막상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급변했다. 입술을 씰룩거리며 코평수를 넓힌 그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 상태로 속으로 중얼거렸다. 개새끼. 라고 말이다.
10시간이라는 건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폐쇄적인 공간에서 10시간가량 있으라는 건 너무도 고되고 피곤하고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배를 탈 때에는 각자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걸 챙겨 오기 마련이었다.
라울은 그것이 책이었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작은 판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잘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검은 판은 손가락으로 건드리거나 펜으로 글씨를 쓰면 미묘하게 그 형태가 달라지고는 했다. 신비의 돌이라 해서 돌을 건드리는 이의 심리 상태나 깊게 생각하는 것에 따라 조금씩 나타나는 형태가 달라지게 되는 것으로, 그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시간을 잘 보내고 있었다. 집중을 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그 시기가 길어지면 다른 것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예를 들면 작은 숨소리 같은 거 말이다.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담요로 몸을 돌돌 감은 채로 잠이 든 사내가 보였다. 초록색 담요에 푹 파묻힌 얼굴은 건강한 구리빛이나 머리카락은 검었다. 숨소리를 들으면 굉장히 깊이 잠이 든 것 같은데 미간 사이로 진한 주름이 만들어져 있었다. 불편해 보였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그는 침대에 편하게 누운 상태로 있었다. 이쪽이 들어와서 그의 휴식을 방해한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의자는 옆에도 하나 더 있으니 이쪽이 그걸 이용하고 침대를 펴면 거기서 마기휼이 자도 괜찮을 거다. 라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이 든 마기휼 쪽으로 다가서 허리를 숙였다.
“마기휼 소령.”
부름에도 눈을 뜨지 않는다. 편하지 않은 얼굴이지만 정말 깊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라울은 재차 그 이름을 불렀다.
“마기휼 소령. 의자에서 자지 말고 침대로 옮겨서 자도록 해.”
이번에도 반응이 없다. 잠시 생각을 하던 라울은 마기휼 쪽으로 몸을 숙였다. 의자 안쪽으로 팔을 밀어 넣었다. 마기휼의 등을 감싸고 다른 팔은 다리 쪽으로 갔다. 그를 안아 들려 하는 순간 마기휼이 눈을 떴다.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정확하게 라울을 바라봤다.
“…….”
눈이 마주치는 순간 라울은 아주 약간의 동요를 느꼈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으나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에 손을 댄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치한을 바라보는 듯한 눈이지 않은가.
라울은 천천히 마기휼의 몸에 닿아 있던 팔을 떨어뜨렸다. 그는 양손을 위로 들며 차분히 말했다.
“의자에서 자는 게 불편해 보여서 침대로 옮겨주려 했을 뿐이다.”
“……그렇습니까.”
나지막한 목소리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마기휼의 목소리였다. 늘 가볍고 밝은 음색이었으나 지금은 굉장히 가라앉고, 경계심이 가득 뭉쳐져 있었다. 방금 느낀 게 착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조금 전 마기휼은 정말 치한을 대하는 듯한 태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울은 기분이 상했다. 같은 사내끼리 왜 그런 눈으로 이쪽을 보는 것이란 말인가. 지금도 자세를 바꾼 마기휼은 담요를 끌어 목 아래까지 덮었다. 마치 라울의 시선에 노출된 자신을 감추려고 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 행동은 이상했다.
“요조숙녀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몸을 사린다면 내 입장이 어떨지 생각을 해봤나?”
다른 때라면 이런 식으로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좁은 공간에서 함께 있는 마당이었다. 앞으로도 몇 시간 동안 더 함께 있어야 하는데 마기휼의 이런 태도를 그냥 참고 넘길 수 없었다.
“그저 자네가 불편해 보여서 편하게 해주려고 했던 것뿐이야.”
“쓸데없는 배려십니다.”
마기휼은 눈동자를 움직여 라울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전 의자에서도 잘 자는 타입이거든요.”
“그걸 미처 몰랐군. 앞으로는 절대로 신경 쓰지 않겠네.”
“그렇게 해주십시오. 아니면 대령님께서 침대에 눕고 싶으셨던 게 아니십니까?”
라울의 표정이 굳어졌다. 화가 난 얼굴을 하는 걸 보며 마기휼은 담요를 치워 내고 몸을 일으켰다. 담요를 돌돌 말아 의자에 대충 던진 그는 이쪽보다 조금 더 시선이 높은 라울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침대를 사용하고 싶으시다면 펼쳐도 됩니다. 의자는 다른 곳에도 많으니까요.”
냉소적인 미소. 그 속으로 이쪽에 대한 적대감이 느껴진다. 그걸 확인한 라울의 미간 사이로 주름이 만들어졌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냐. 그리 묻는 눈빛을 읽은 마기휼은 몸을 돌렸다.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간 마기휼은 굳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눈꼬리에 들어가 있던 힘이 빠져나간다. 다소 나른한 상태가 된 그는 한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잘 땋은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얼굴을 하던 것도 잠시, 그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하아-.”
실수했다. 가장 먼저 그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을 때, 라울이 거의 자신을 안고 있는 자세였던 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도움을 줄 생각이었겠지. 의자에 앉아 자고 있는 게 불편해 보여서 침대를 펴줄 생각이었다고 하지 않은가. 그 얼마나 친절하냐고 스스로도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화가 났다.
왜 그렇게 가까이 달라붙는 거야. 그런 느낌이었다. 보통 사람과 조금은 다른 이 육체는 누군가의 접근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할 필요가 없는데. 저 라울이 자신을 보고 음욕을 느낄 리도 없는데 말이다.
마기휼은 가슴을 양손으로 토닥였다.
“진정해. 넌 사내야.”
정체성도 분명한 사내였다. 몸이 보통 사람과 다를 뿐이야. 네가 다리를 벌려 사내를 받아들일 일도 없을 테고, 그로 인해 임신할 일도 없어. 지금처럼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괜히 경계하지 마. 그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단 말이야.
지금 방 안에 있을 라울은 얼마나 황당할까. 내가 왜 이러나 싶을 터였다. 지금 당장은 라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조금 기분 전환을 하고 난 후에 안으로 들어가야지. 그리고 조금 전에는 자신이 너무 예민했다고 하면 되겠지. 착한 사람이니까 이해해주지 않겠는가. 이내 마기휼은 썩소를 지었다.
치한 취급을 받았는데 그냥 넘어갈 턱이 있나. 그 엘리트놈. 자존심에 꽤나 타격을 입고 이쪽이 들어오면 바로 뱁새눈을 하고 노려볼 게 분명했다. 이미 다 지난 일 신경 쓰지 말자며 마기휼은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복도로 걸음을 옮기며 기지개를 켰다.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바람이나 쐬러 가자며 마기휼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저기 아래의 땅과 산과 마을이 간간이 보였다. 푸른 초원 위로 한가롭게 모여 있는 양 떼들. 그리고 그 양을 관리하는 듯한 소년이 쓰고 있던 모자를 크게 흔들었다.
소년의 행동에 안전 유리에 달라붙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웃으면서 덩달아 손을 흔들었다. 그들 사이로 마기휼도 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서 있던 마기휼은 이내 구석으로 이동했다. 한쪽에 붙어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빠르게 사라지는 구름과 아래의 땅을 무감동하게 바라보다가 근처에 있던 아이스크림 장수에게 한 손을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 장수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내밀었다.
“1베리입니다.”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나서 동전을 건넸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동전을 받은 장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맛있게 드십시오.”
고개를 꾸벅인 자가 다른 쪽으로 가고 마기휼은 아이스크림에 혀를 댔다. 그리고 간판 쪽으로 나온 사람들을 구경했다.
한쪽이 전면 유리인지라 그곳으로 모든 게 보였다. 안전 유리가 있다 해도 아래가 훤히 다 보이고 스치는 구름까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 있었다. 웬만큼 용기가 있지 않고서야 가까이 서는 것도 힘들었다. 때문에 구경을 하고 싶지만 겁이 많은 사람은 반대편 의자에 앉아 전면 유리 바깥쪽을 구경하며 연신 감탄사를 토해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실은 마기휼도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만 듣지 않았다면 전면 유리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했을 거다. 그리고 어린애들보다 훨씬 더 유치하게 굴었을 테지. 그런 자신을 보고 아버지가 뭐라 타박을 한 적도 수두룩했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자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마기휼은 쓴웃음을 지었다.
“싫어. 아빠 무서워.”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이건 또 뭔가 싶어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사람들 틈으로 사내의 품에 매달린 어린 여자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자꾸만 사내의 어깨로 고개를 묻으려 했고, 사내는 아이를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괜찮아. 아빠가 잘 붙잡고 있잖아.”
“떨어질 것 같아. 안으로 바람이 들어올 것 같아.”
“안 들어와. 들어와도 우리 딸은 안 날아가. 아빠가 계속 붙잡고 있으니까.”
계속되는 달래는 말에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친의 뺨을 양손으로 감싼 아이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정말? 아빠가 계속 붙잡아줄 거야?”
“물론이지. 아빠만 믿어.”
“믿어. 아빠를 믿어.”
아이는 웃으며 부친의 품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찰싹 달라붙은 채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 얼굴이 조금 전과 달리 꽤나 안정된 상태였다.
아이와 부친의 즐거운 한때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그건 마기휼도 마찬가지였다.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로 다정한 부녀를 바라보던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안으로 들어가자. 마기휼은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그때 띠- 하는 통신음이 마기휼의 귀에 들어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었다. 다른 통신음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거슬리는 건, 그것이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기휼은 모르는 척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계단 뒤에 있는 작은 틈으로 몸을 밀착시켰다. 들키지 않을 정도는 아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에 바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 상태로 기다렸다. 그러자 뒤를 이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배에 전체적으로 깔린 엔진음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소리를 제외하고 다른 소리를 듣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곧 투박한 사투리가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울 그놈은 지금 일등실에 머무르고 있다. A03호다. 틀리지 마라.”
발걸음이 빨라지고 목소리도 선명하게 들렸다. 물론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 소리이긴 했다. 그저 이쪽이 고도의 훈련을 받았기에 들을 수 있었던 거였다.
“들키지 않았어. 그러니까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시간이 얼마 없어.” 그리 말을 한 이는 세우고 있던 목깃을 내렸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와 주의 깊게 주변을 둘러봤다. 별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검은 꽁지머리가 나타났다. 놀란 사내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 마기휼은 손가락 두 개를 앞으로 뻗었다.
퍽-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면서 양손으로 눈을 감쌌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마기휼은 놈의 목 옆을 손으로 가격했다. 숨을 삼키며 사내가 무릎을 구부렸다. 기운 없이 쓰러지는 그 몸을 받아 계단 뒤로 끌고 갔다. 그리고 바닥에 눕힌 후에 사내의 옷깃을 살폈다.
엄지손톱만 한 통신구를 발견하고는 그걸 재빨리 분해했다. 그걸 한 손에 쥔 채로 마기휼은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그걸 확인 후 일어섰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놈들은 라울을 노리고 있었다. 중간에 노선이 변경된 것도 알고 있었다. 방 호실도 알고 있다는 건 완전 계획적이라는 거였다. 이쪽과 달리 엄청 유명한 사람이다 보니 이런 일도 당하는구나 싶었던 마기휼은 걸음을 서둘렀다.
일반실을 지나 이등실, 이내 일등실로 진입을 했다. 서두르는 마기휼을 사람들을 이상하게 쳐다봤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일등석 칸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앞을 막는 자가 있었다. 음식이 담긴 카트를 끌고 가던 남자 승무원이 미소 지었다.
“손님. 쾌적한 여행을 하고 계십니―”
승무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기휼은 주먹을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승무원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마기휼은 그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직한 비명이 퍼진다. 크게 꿈틀거리던 사내는 이내 잠잠해졌다. 마기휼은 쓰러진 자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멍청아. 승무원 중에 너처럼 검은 이를 가진 놈은 없어.”
분장을 하려면 조금 더 제대로 해야 할 게 아닌가.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기계음을 확인한 마기휼은 승무원의 옷깃을 열었다. 역시나 장치가 걸려 있었다. 그걸 손으로 떼어 내 귀에 대자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방금 그건 뭐지?]
“문제가 생겼다는 거겠지.”
상대방이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굳어버리는 게 느껴졌다.
마기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알아버렸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안 그래?”
거기다 라울에게 사과할 수 있을 만한 자연스러운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이번 건 생명의 은인이 될 귀한 기회였다. 생색도 내고 자연스럽게 그때의 일을 끄집어내며 사과도 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마기휼은 들고 있던 통신구를 바닥에 놓고 주먹으로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 분해가 된 통신구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울이 있을 방으로 걸어갔다. 문을 연 마기휼은 입을 열었다.
“이봐. 위험하니까-.”
의자에 앉아 여전히 책을 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라울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텅 비어 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로 가버린 거야?”
아연해 중얼거린 마기휼은 탕- 하는 소리에 놀라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일등실로 연결이 된 문을 활짝 열고 있는 사내 둘이 보였다. 딱 봐도 수상쩍은 차림을 한 그들은 마기휼을 보는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 손이 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당황해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봐! 기다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포했다. 날카로운 음향과 동시에 마기휼은 방 안으로 몸을 날렸다. 구석으로 처박혀서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는 사이에 계속해서 날아오는 총알이 반쯤 연 문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여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런 젠장맞을-!”
저 예의를 밥 말아먹은 놈들. 마기휼은 바닥을 기어 의자 아래에 둔 가방을 끄집어냈다. 급히 가방을 열고 안을 뒤졌다. 구석에 둔 반으로 접은 부채가 나타났다. 그걸 꺼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채의 하단에 달린 구슬을 뽑아내며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총을 든 채로 다가오던 놈들이 재차 총구를 겨눈다. 마기휼은 손에 들고 있던 구슬을 던졌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부연 연기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뭐, 뭐야?! 이건!”
당황한 외침에 바깥으로 나온 마기휼은 부채의 양 끝을 잡아 뜯어냈다. 팔을 벌리자 가느다랗고 긴 채찍이 나타났다. 채찍으로 바닥을 한번 치고 크게 휘둘렀다. 날아간 채찍이 연기에 감싸인 자의 목을 휘어 감았다.
“커헉!”
목이 감긴 자가 앞으로 쓰러지자 뒤에 있던 자가 손으로 얼굴 앞을 휘저으며 총을 쐈다. 허리를 숙이며 마기휼은 들고 있던 부채의 뚜껑 부분을 있는 힘껏 던졌다. 날아간 것은 정확히 테러범의 낭심을 가격했다.
“읏!”
마기휼은 채찍을 당기면서 앞으로 달려갔다. 쓰러져 있던 놈의 머리를 후려치고 급소를 잡은 채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놈의 목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커헉-!”
고개가 위로 휙 들린 사내는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였다. 그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마기휼은 나직이 물었다.
“몇 명이야?”
사내는 목이 잡힌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이 목을 놓고 주먹으로 사내의 얼굴을 후려쳤다. 빠르고 정확하게 들어간 주먹질이 정확히 3번.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로, 그 사이에 사내는 콧대가 내려앉고 이가 3개가량 날아갔다.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내의 목을 잡으며 마기휼은 재차 물었다.
“몇이냐고?”
“열이었는데 덕분에 4명이 쓸 수 없게 되어버렸어.”
대답은 앞이 아니라 등 뒤에서 들려왔다. 참 반갑지 않은 연출이었다. 더군다나 등 가운데를 누르는 딱딱한 물건 덕분에 마기휼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무슨 낭패인지 모르겠다. 사내의 목을 죄는 마기휼의 손으로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걸 지적하듯 재차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놔. 안 그러면 멋진 자기 등으로 커다란 구멍이 생겨날 거야.”
여자 목소리였다. 그것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목소리. 이건 또 뭔가 싶었던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싸한 기분이 들었다.
마기휼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쪽이 머무르고 있던 바로 옆방의 문 앞에 서 있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을 발견했다.
언제나처럼 단출한 드레스가 아니었다. 대놓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까지 확실하게 치장한 여성은 마기휼과 눈이 마주치자 입술 꼬리를 살짝 올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이 여성은 분명 마기휼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마리아?”
이름을 부르고도 믿을 수가 없어 멍하니 있었다.
굉장히 안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군대 근처의 수많은 술집 중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첫사랑의 마담 마리아였다. 그런 그녀가 왜 이런 곳에서, 저런 흉악한 총을 들고 있을까. 총을 잡는 각을 보자니 장난감이 아니었다. 그녀는 확실히 총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기휼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쏘면 이놈도 죽어.”
“쓸모없는 놈이야. 그놈 하나를 없애서 당신도 죽일 수 있다면 이쪽이 득이야.”
마리아의 붉은 입술이 양 끝으로 올라갔다. 마기휼이 익히 아는 바로 그 얼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소름이 돋았다. 마기휼은 믿을 수 없어 망연히 중얼거렸다.
“마리아. 이건 당신이랑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야.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성에게 그런―”
눈을 내리떠 들고 있는 총을 자세히 살핀 마기휼은 더더욱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가느다란 그녀의 팔이 들기에는 지나치게 투박하고 무거운 물건이었다. 거기다 이건 사람 몸통에 커다란 구멍을 만드는 게 가능한 아이였다.
“흉악한 BJ007인가. 그거 일반인 사용은 금지된 건데.”
“괜찮아. 일반인이 아니니까.”
마리아는 총구로 마기휼의 등 가운데를 눌렀다. 둔탁한 느낌에 마기휼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채찍을 놔. 어서.”
“……어쩔 수 없나. 나도 살고 싶으니까.”
마기휼은 잡고 있던 채찍을 놓았다. 기다렸다는 듯 방 안에서 커다란 덩치가 나타났다. 마리아의 술집에서 주변 정리꾼으로 일하던 이였다. 분명 톰이라는 이름이었을 거다.
2미터 30은 되는 사내는 커다란 손으로 마기휼의 멱살을 잡아 위로 올렸다. 순식간에 천장에 머리가 닿게 된 마기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리아를 내려다봤다.
“바, 바로 죽일 셈이야?”
“아니. 안 죽여. 하지만 움직일 수 없게 해야지 않겠어?”
“그러지 마. 당신 날 사랑하지 않았어? 차라리 날 회유하는 게 어때? 나 꽤 잘 싸워.”
“말은 잘 하시네. 라울을 지키려고 그렇게나 날아다니던 주제에.”
“어쩔 수 없잖아. 라울은 노르디아 대귀족이야. 잘 보이면 나도 편하게 살 수 있었다고.”
“있었다라―”
과거형이잖아.
그리 묻는 눈빛에 마기휼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기에도 붙고, 저기에도 붙는 박쥐 같은 놈이라는 거 알면서―.”
마기휼은 윙크를 했다. 하지만 그것에도 마리아의 표정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차갑다 할 수 있는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에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수가 필요했다. 그녀를 넘기기 위한 다른 방법. 마기휼은 매달리는 눈으로 마리아를 내려다봤다.
“나 당신 사랑해.”
“알아. 나도 사랑해.”
마리아는 웃었다. 조금도 사랑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다 틀렸다. 빌어먹을,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마기휼의 눈동자가 약하게 흔들렸다. 그걸 읽은 마리아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녀는 마기휼의 멱살을 잡고 있는 톰을 흘겨봤다.
“내려놔.”
“하지만 이놈은…….”
“쓸데가 많아. 평범하지 않지. 우리랑 같아. 그러니까 같은 편이 될 수 있어.”
마리아의 말에 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말에 수긍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이지만 마리아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듯 그는 마기휼을 천천히 내려놨다.
바닥에 두 다리가 닿는 순간 마기휼은 재채기를 했다. 얼마나 힘이 센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였다. 마기휼은 목을 감싼 채로 괴로워했지만, 마리아는 그런 그를 봐주지 않았다. 들고 있던 걸 톰에게 건넸다.
“따라와.”
턱을 까닥이며 고고하게 명령을 내린 그녀는 앞장을 섰다. 그녀가 움직이고 톰은 마기휼의 팔을 잡아 뒤로 꺾었다. 앞으로 나서게 된 마기휼은 통증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뒤에서 미는 것에 어쩔 수 없이 다리를 움직여 어정쩡한 상태로 걸어갔다. 마리아는 문을 열고 이등실로 연결된 좁은 통로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남자 승무원과 마주쳤다. 얼굴이 마주친 그는 마리아를 확인하고는 황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리아는 긴 설명을 하지 않았다. 치마 안에서 소형 총을 꺼낸 그녀의 날씬한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고 승무원의 이마 가운데로 붉은 점이 생겨났다. 길게 튀어나온 피가 벽에 뿌려졌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여승무원이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마리아는 그녀의 가슴에도 총알을 박아 넣었다. 숨을 삼킨 여자가 뒷걸음질을 치며 벽에 달라붙은 채로 천천히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마리아는 짧은 복도를 지나 드레스 자락을 옆으로 걷어 냈다. 날씬한 다리가 나타나나 싶더니 이내 문을 후려 찼다. 크게 문이 열리자 정면으로 향해져 좌우로 붙은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던 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 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고, 입구 쪽에 서 있던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마리아에게 장총을 내밀었다.
이미 다른 놈이 안쪽을 장악하고 있었던 건가. 마리아의 좌우로 새로 나타난 자들은 조금 전 쓰러뜨렸던 놈들과는 박력이 달랐다. 그들은 덩치에 잡혀 있는 마기휼을 흘깃 쳐다봤지만, 이내 관심이 없다는 듯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는 앞으로 걸어갔다.
장총 같은 살벌한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아름다운 여자였다. 굽실거리는 긴 금발. 촉촉한 푸른빛 눈동자. 오뚝하고 귀여운 코와 붉고 두툼한 입술. 코르셋으로 한껏 죄인 허리는 한 팔에 다 감싸이고도 남을 정도이고, 가슴은 풍만했다.
귀엽고 아름답고 섹시하고 동시에 고혹적이었다. 그런 그녀가 장총의 아랫부분을 당겼다. 달칵달칵- 하는 소리를 내며 장전이 되나 싶더니 장총의 끝을 어깨에 대고 단단히 고정한 후, 뒤로 한 발을 물렸다.
웬 미인이 나타나나 싶어 멍하니 있던 자들은 고막을 찢는 큰 소리와 함께 수박이 깨지는 소리가 나자 놀라 숨을 죽이거나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의 머리가 박살 나는 걸 보거나, 그 파편이 몸에 묻은 이들은 그리할 수 없었다.
“으아악!”
“캬아아악!”
“살려줘! 살려줘어어! 으아악!”
순식간에 아비규환이었다. 갑작스럽게 총살이 된 이의 피나 살점이 몸에 묻은 이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친 듯이 버둥거리거나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려 난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곧 정리되었다.
“입 다물어.”
시끄러운 혼란 속에서도 무척이나 잘 들리는 달콤한 목소리에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목 끝까지 비명이 차올랐지만 양손으로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내리눌렀다. 크게 떠진 그들 눈동자 안쪽에 서린 것은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할딱거리는 호흡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공포가 내부를 가득 채운다. 그제야 마리아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지금부터 개인 통신기를 사용하는 놈들은 그 자리에서 사형이다.”
마리아는 장총을 세워 천장을 향하게 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을 살피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얌전히. 말을 잘 들으면 해는 끼치지 않아. 그리고 협조를 하는 이들은 석방을 해주겠어. 그러니 부디 나 마리아의 말에 따라 최대한의 질서를 유지하며 입 닥치고 조용히 있어주기를 바라겠어. 알겠지? 내 배에 탄 귀여운 손님들.”
대답은 없으나 그들의 현 상태는 분명히 읽혔다. 쓸데없는 짓거리는 절대로 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겠다는 의지가 전달되었다.
마리아는 장총을 뒤에 서 있던 사내에게 건넸다. 그걸 받아든 사내가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일반실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나 싶더니 다시금 총소리가 났다.
입을 틀어막고 흘러나오는 흐느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지린내가 나기도 했다. 너무도 두려워 실수를 하는 이들도 더러 생겨난 거다.
잡힌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마기휼은 다가오는 마리아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마기휼은 웃을 수 없었다.
“당신 정말로 악독하군.”
“그래서 반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
숨길 수 없는 역함이 마기휼의 얼굴로 드러났다. 그런 그의 얼굴에 마리아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녀의 손이 마기휼의 턱을 붙잡았다.
“실없이 굴 때에는 별로더니 그렇게 화가 난 얼굴은 꽤나 매력적이네?”
마기휼의 턱을 잡고 두어 번 흔든 마리아는 그의 뺨을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렸다. 그리고 다른 쪽에 서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라울은?”
“없습니다.”
“그래? 눈치가 꽤나 빠르군.”
마리아는 마기휼을 쳐다봤다. 마리아에게 뺨을 맞고 난 후에 기분이 상당히 거시기한 상태로 있었던 마기휼은 입술을 씰룩였다.
이쪽이 알려줘서 라울이 도망을 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마기휼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알려줬어.”
“알고 있어. 예민한 반응 보이지 마.”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상대가 마리아이기 때문에 더더욱 적응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태연히 주변에 명령을 내렸다.
“같이 온 군인놈이 있었겠지. 데리고 와.”
“네. 알겠습니다.”
다른 사내가 일반실로 걸어갔다. 그가 움직이기가 무섭게 양쪽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겁에 질려 있었고 그건 마기휼도 마찬가지였다. 재수가 없어 갑자기 자신도 죽을 수 있는 노릇이었다. 입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걸 알기는 하지만 이놈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마리아. 이러지 마. 이건 당신이랑 어울리지 않아. 차라리 라울을 유혹해서 첩실로 들어가지그래? 그 녀석 대단한 놈이잖아? 한자리 꿰면 죽을 때까지 고생 안 해도 된다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로 꺾어진 팔이 위로 주욱 올라갔다. 팔이 어깨에서 떨어져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에 마기휼은 기겁을 하며 몸을 비틀어 댔다.
“미, 미미미안해!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을게!”
“톰. 그만해.”
톰은 마리아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고개를 젓자 마기휼의 팔을 내렸다.
그래 봤자 여전히 뒤로 팔이 꺾인 상태로 아프기는 여전했다. 팔이 떨어진 듯 얼얼한 것이 아무런 느낌도 없다면서 짜게 식은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마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톰은 나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어. 어머니를 모욕하거나 더럽게 쳐다보면 죽여버리고 싶어하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
그리 말을 하고는 일등석 쪽으로 들어갔다.
조종칸으로 넘어갈 셈인가. 인원은 적어도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경비들은 어찌 된 거지? 우선적으로 처리를 했던 건가?
마기휼은 눈을 굴려 댔다. 그러다가 앞장서 걸어가는 마리아의 등에 대고 물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건데?”
“노르디아 연방국과 협상을 할 거야.”
“협상이라고? 이건 협박이야.”
“아니. 협상이 될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소중한 왕통의 목이 날아갈 테니까.”
그러니까 세상은 그걸 두고 협박이라고 한다니까?
그보다 노르디아가 라울 한 사람을 인질로 삼는다고 이런 무모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어림도 없다. 라울은 고작 대귀족일 뿐이야. 그런 그를 인질로 삼아 뭘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지 마. 이건 무고한 사람들을 괜히 잡는 것밖에 되지 않아. 되지도 않는 일이라고.
하고 싶은 말들을 꾸욱 참으며 마기휼은 입을 다물었다.
조종칸으로 가는 동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셋가량의 승무원을 봤다. 여섯이라고 해서 하나는 어디로 갔나 싶었더니 한발 먼저 움직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기휼의 예상대로 검은 복면을 한 사내가 조종칸으로 들어가 조종사 둘의 뒤통수 뒤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마리아는 사내의 옆으로 다가서 한마디 했다.
“잘했다.”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옆을 지나친 그녀는 배의 조종칸에 앉아 있는 수석 조종사의 머리에 한 손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전 마리아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간신히 대답했다는 듯, 조종사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채였다. 숨도 크게 내쉬지 못하는 이를 부드러운 눈길로 내려다보며 마리아는 속삭였다.
“지금부터 우리는 레드존으로 향합니다.”
조종사는 헛숨을 들이켰다. 당황한 듯 마리아를 쳐다봤다.
“그곳은 접근 금지구역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걸 따지는 겁니까. 손가락 하나가 날아가야 제 말에 대꾸 안 하고 순순히 따르실 건가요? 아, 손은 조종을 해야 할 테니 건드리면 안 되겠지요. 그러면 발가락도 괜찮은데. 어떠세요?”
농담이 아니라는 듯 그녀의 다른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그걸로 정확히 다리를 겨누자 조종사는 급히 대답했다.
“레, 레드존으로 가겠습니다.”
조종사의 대답에 만족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은 마리아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총을 다른 사내에게 건네고는 사뿐히 걸어가는 걸 지켜보던 마기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거기로 들어가는 즉시 삼국의 폭격 대상이 될 거야.”
노르디아. 알센. 치울스. 삼국이 늘 삼엄한 감시를 하는 구역이었다. 그런 곳으로 들어가려 하다니. 말도 안 되었다.
마리아는 마기휼을 돌아봤다.
“괜찮아. 라울이 있으니까.”
“그놈은 먼저 빠져나갔을지도 몰라.”
마리아는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계속 말대꾸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톰이나 다른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이 새끼는 뭐야.’ 그리 묻는 시선을 보내는 것에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머리는 좋은 놈이야. 낌새를 눈치 채고 먼저 도망친 걸 봐. 화물칸의 소형함을 이용해서 저 혼자만 쏙 달아난 게 분명해. 지금 이건 헛고생만 하는 거라고.”
마기휼은 눈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마리아의 인정에 호소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이런 잔악무도한 일은 아름다운 당신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아. 지금이라도 그만두자. 응?”
“싫어.”
너무도 상큼하게 거절을 한 마리아는 이내 사내를 쳐다봤다.
“내 배에 탄 손님들을 모두 아래 화물칸으로 이동시켜. 장소가 협소하면 이미 실은 짐은 모두 지상으로 떨어뜨리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사내는 조종사를 위협하던 총을 옆구리에 끼워 넣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움직임을 확인하며 마기휼은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뭘 하려는 거야?”
“라울 그자는 분명 이 배 어딘가에 있어. 숨어 있을 것이 분명하니 일단은 나오게 해야겠지. 안 그래?”
붉은 입술이 양 끝으로 올라갔다.
마기휼은 마른침을 삼켰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을 느낄 때, 여지없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게 불행이라면 불행일 거다.
도대체 이놈은 어디로 가버린 거야. 그 자식을 위험한 상황에 밀어 넣을 마음은 없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그놈 때문에 피해를 볼 필요는 없었다. 뒤처리는 그놈이 알아서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 생각을 하며 마기휼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화물칸의 반을 차지하는 물건이 모두 지상으로 떨어졌다. 개중에는 정말 중요한 것도, 돈이 될 만한 것도 있었을 거다. 다른 때였다면 자신들이 맡긴 물건이 버려졌을 때 사람들은 난리를 쳤을 테지만, 특수한 상황이니만큼 그런 일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입을 벙긋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로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 것만을 생각하고 또 바라 마지않았다.
화물칸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백여 명이었다. 원래 배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정원은 80명 정도였겠지만, 배 하나가 망가져서 이동이 있었기 때문에 정원이 살짝 초과가 된 상태였다. 그들 모두 파리한 안색이었다. 하긴 이런 상황 속에 있는데 마냥 밝은 얼굴로 있을 순 없을 터였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괜한 일이라도 당할까 그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들을 살펴보던 마리아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내 둘에게 잡힌 채로 있던 군인이 흠칫하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군복을 다 갈아입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민간인 행세를 하기 위해서 나름 열심이었던 거다.
“너 혼자 살겠다고 군복을 벗어? 그러고도 네놈이 노르디아 연방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이라 할 수 있겠나?”
비웃는 아름다운 마리아를 앞에 두고 군인의 떨림이 점점 커졌다.
마리아는 사내를 마음껏 비웃어줬다.
“혼자 살겠다고 아닌 척 몸을 숨기고 있다니. 너 한 사람 때문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무고한 자가 군인으로 오인을 받아 죽을 수도 있었어.”
그녀의 말에 사람들 사이로 술렁거림이 생겨났다. 몇몇 이들은 지독한 증오를 담아 그를 노려봤다. 그가 군인이라는 걸 숨겼기 때문에 자신들이나 소중한 가족이 죽을 수도 있었음을 생각하는 걸 거다.
두려웠기 때문에 증오와 미움의 감정은 상대적으로 더 확대될 수 있었다. 그 날카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군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 낯빛이 침통함으로 굳어졌으나 마리아는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유심히 살폈다. 라울은 보이지 않았다. 이내 그녀는 뒤를 돌아봤다.
손과 발이 묶인 채로 고급 소파에 앉은 마기휼이 보였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던 그는 마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인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힘겹게 양 끝으로 올라가는 입술 꼬리가 재미있다. 피식- 하고 웃은 그녀는 턱을 올렸다.
“해치를 열어.”
마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옆으로 이동했다. 그는 비상 버튼을 눌렀고 이내 사람 하나가 나갈 수 있을 만한 문이 열렸다. 강한 바람이 불어오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가족이나 연인을 끌어안았다. 그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를 예감한 듯 하나같이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마리아는 팔짱을 낀 채로 군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접근에 두려움을 느끼는 듯 군인은 숨을 죽이며 조금 더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네 이름이 뭐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든 군인은 덜덜 떨며 말했다.
“아, 알렌입니다.”
“쓸데없이 좋은 이름이로군. 뭐, 그런 건 상관없어. 라울은 지금 어디에 있지?”
알렌은 입을 다물었다. 짧지만 그에게는 참으로 긴 시간으로 여겨졌을 거다. 긴장으로 인해 그는 전신이 땀투성이었다.
실제로 머리에 김이 나고 있을지도 모르지. 지금 상황에서 그는 심한 갈등의 기로에 선 것이었다. 삶이냐. 아니면 배신이냐. 배신한다고 해도 라울이었다. 그를 팔아넘기면 노르디아 영토 내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알렌은 긴 망설임 끝에 어렵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모릅니다.”
“모른다라?”
중얼거린 마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옆을 쳐다봤고, 사내는 알렌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으악?!”
버둥거리는 알렌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는 그를 질질 끌고 갔다. 가려는 방향은 명확했다. 해치로 끌려가는 알렌은 계속해서 저항했다.
그는 뒷덜미를 잡은 사내의 손을 붙잡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살려주십시오! 정말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 모른단 말입니다!”
순식간에 알렌은 열린 해치 바깥으로 상반신이 내밀어졌다. 그를 붙잡고 있는 건 멱살을 쥔 사내의 손 뿐이었다.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는 그는 전신이 뻣뻣해졌다. 마리아는 재차 물었다.
“라울은 어디에 있지?”
“저, 정말 모릅니다. 저는 라울님과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분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애원하는 얼굴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마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사내를 가엽게 생각하는 미소. 그것은 결코 좋은 의미의 것이 아니었다. 마기휼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도망쳐.”
도망쳐야 해.
하지만 그런 마기휼의 말이 알렌의 귀에 닿기도 전에 그는 해치 바깥으로 던져졌다. 그가 그리될 것이라는 걸 실상 모두 알고 있었을 터였다. 알고 있는데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던져진 알렌이 내지르는 비명이 점점 멀어져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화물칸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완전한 적막에 감싸이게 되었다.
그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있는 그들의 모습에 마리아는 손을 문질렀다.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이내 그녀의 손가락이 가장 앞에 있던 두 젊은 연인을 가리켰다.
“너와 너. 둘 다 이리로 나와.”
“꺄아아악!”
마리아의 손길이 자신을 가리키는 걸 보자마자 여자는 반실성한 듯 비명을 질러 댔다. 도망치려 했으나 톰이 훨씬 더 빨랐다.
그는 남자와 여자를 하나씩 붙잡고 마리아의 앞으로 걸어갔다. 여자와 남자는 톰에게서 벗어나려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쳐 댔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마리아의 앞으로 끌려 나왔고 마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자, 너희를 어떻게 할까.”
“제, 제발 살려주세요! 저희는 라울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지 못해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우리는 단지 여행을 하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두 남녀의 비명을 닮은 외침에 마리아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여행이라. 정말 팔자 좋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리아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던져버려.”
“싫어! 살려줘!”
“으아아악! 이 괴물! 날 놓지 못해?!”
두려움이 크다 보니 이제는 분노가 자리를 잡게 된다. 사내는 주먹으로 톰을 마구 쳐 댔다. 하지만 톰은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해치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사람들 사이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히스테릭한 비명과 동시에 기도문이 들려왔다.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라울이 나타나기 전에는 절대로 수습되지 않을 일이었다.
해치 앞으로 끌려 나온 남자의 한쪽 다리가 바깥으로 밀려났다. 놀란 여자가 그런 남자 쪽으로 손을 뻗었다. 사내의 팔을 잡으며 비명을 질러 댔다. 남자도 울면서 여자의 손을 붙잡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멈춰.”
마리아의 목소리에 사내는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허리에 한 손을 올린 마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도도한 여배우처럼 화물칸을 주욱 둘러봤다.
“라울. 어디에 있지? 근처에 있으면 어서 나타나. 그렇지 않으면 무고한 생명이 죽게 될 거야.”
마리아는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상대가 어딘가에 있으면 대답이 들려올 거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마리아가 아는 라울이라는 자는 이런 상황에서 저 한 몸을 지키는 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금 더 놀고 있어야 하는 건가.
한숨을 쉰 그녀는 톰을 쳐다봤다.
“던―”
“라울을 데리고 오겠어.”
마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의자에 앉은 채로 이쪽을 노려보는 마기휼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어금니를 악문 채로 말했다.
“내가 라울을 데리고 오겠어. 그러면 되잖아.”
마리아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단지 웃을 따름이었다. ‘네가 어떻게?’ 그리 묻는 눈동자 안쪽으로 미묘한 비웃음마저 서려 있었다.
“이건 협상도 협박도 아니야! 단순한 화풀이일 뿐이잖아! 네가 원하는 게 라울이라면 그놈만 데리고 꺼지란 말이야! 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려는 거야!”
“그들은 이 배를 타고 있었지. 그 자체가 죄야.”
마기휼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건 또 뭔 소리야.’ 그리 묻고 싶은 얼굴을 한 마기휼 쪽으로 몸을 돌린 마리아는 크게 팔을 벌렸다.
“이 배 하나를 띄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희생되는지 알기나 해? 알지도 못하면서 이들은 여행을 위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배를 이용하지.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거리야.”
마리아는 웃고 있으나 눈동자는 굳은 채였다. 그 속으로 숨겨지지 않는 증오가 드러났다.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마기휼은 마리아를 멍하니 쳐다보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마리아. 네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
“몰라도 상관없어. 지금은 말이야.”
쓸데없는 일로 괜히 흥분을 해서 시간 낭비를 한 격이라며 마리아는 톰을 쳐다봤다.
“던져버려.”
“그만둬라.”
마리아의 목소리에 겹쳐서 다른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너무 놀란 마기휼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2층 쪽 난간에 서있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군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사내의 용모는 흠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귀족임이 분명한 금발에 깊은 녹안을 지닌 사내는 분위기만으로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존재를 깨달은 사람들은 현재 상황도 잊고 멍해졌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라울은 입을 열었다.
“나를 찾았나?”
라울을 찾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쉽사리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적어도 절반가량을 던져야 등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주인공이 등장하셨군.”
마리아는 라울을 위아래로 살펴봤다. 확실히 그였다. 다른 인물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사내를 반쯤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는 톰에게 손짓을 보냈다.
“됐어. 그만둬. 내가 원하던 분이 나오셨으니 다른 놈들은 아무래도 좋아. 슬슬 여기를 뜰 준비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사내 둘이 위로 올라갔다. 이내 그들은 라울을 붙잡을 수 있었다. 각각 한 팔씩 붙잡힌 채로 라울은 아래로 내려왔다.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라울은 지나칠 정도로 차분했다. 그 당당한 모습을 사람들은 홀린 듯 바라봤다.
하지만 마기휼은 아니었다.
쓸데없이 왜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이쪽이 볼 때 그가 나타났다고 해서 마리아가 그와 협상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라울이 나타난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계속해서 사람을 죽이려 들 터였다. 마기휼은 초조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의 눈앞으로 마리아와 라울이 조우했다.
눈이 마주친 두 남녀는 말이 없었다. 가만히 라울을 바라보던 마리아가 양팔을 벌려 라울을 끌어안았다. 가볍게 안았다 놓은 그녀는 그에게 애틋한 눈빛을 보냈다.
“왜 이렇게 금방 나타나지 않으셨던 거예요? 한참을 찾았답니다.”
마치 연인을 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라울이 술집을 찾을 때마다 그녀는 이런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것이 단지 술을 팔아주는 사람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 생각했건만, 이렇게 그녀를 앞에 두고 있으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마리아를 바라보던 라울이 딱딱한 음성으로 한마디 했다.
“넌 미친 거로군.”
“아니. 난 미치지 않았어. 그저 너무도 원했던 사람이 눈앞에 있어서 이후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생각할 따름이야.”
“나를 찾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것이 아니던가. 날 찾아냈으니 민간인들의 안전을 약속해라.”
라울의 말에 마리아는 웃었다.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건가 싶어 대화를 엿듣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마리아의 말로 인해 그들의 기대는 무너져 내렸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라울을 바라보며 그녀는 날카롭게 쏘아 붙었다.
“잘난 척하지 마. 너도 저들과 같은 입장이야. 내가 죽이려면 죽일 수 있어.”
“과연 그럴까.”
다른 이들과 달리 라울의 얼굴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태연하고 침착했다. 어떻게 저런 얼굴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이쪽이 라울의 상태였다면 그 때문에 휘말려서 피해를 본 사람들 때문에 고개를 똑바로 들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다.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 마기휼은 라울의 시선이 닿는 순간 숨을 죽였다.
짧은 순간 닿은 눈동자가 뭔가를 전하려 하는 것 같았다. 그게 뭐지?
순간적으로 생각을 하다가 뒤로 묶인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아까는 느껴지지 않던 딱딱하고 서늘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그걸 천천히 손에 쥐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날카로운 물건이었다. 끝은 정말 예리했다. 손끝이 따끔할 정도로 말이다.
그걸 슬슬 문지르며 마기휼은 재차 주변을 살폈다. 아직 그들은 이쪽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라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라울에게 쏠린 것을 이용해 마기휼은 침을 위로 세우고 그걸로 손을 단단히 묶은 줄을 긁어 냈다.
“그래. 고대하던 분이 나타나셨으니 이제 협상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군.”
마리아는 라울의 팔을 붙잡고 있는 사내 둘에게 눈빛을 보냈다.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고 양손을 깍지를 껴서 머리 위에 올리도록 해.”
고개를 끄덕인 사내 둘이 동시에 라울에게서 떨어졌다. 마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총을 꺼내 라울을 겨누었다. 총구가 코앞으로 드밀어져도 라울은 태연했다. 마리아는 그런 그를 비웃었다.
“그 얼굴이 언제까지 침착해질 수 있을까.”
“나를 조롱하고 싶은 거라면 쓸데없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네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할 거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들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생각할 시간도 필요할 테니 말이야.”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그런 말 따윈 지껄이면 안 되는 거야. 무조건 들어줘야지. 노르디아의 대귀족이자 왕통이라면 응당 그래야 할 것이 아니던가.”
“노르디아의 왕족은 너희 해적들과는 협상치 않는다.”
마리아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그녀의 입술 꼬리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미소도 잠시, 금세 살벌한 얼굴이 된 마리아가 말했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모두가 다 죽는 한이 있어도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시겠다?”
“네가 그 태도를 유지한다면 더는 말을 듣지 않겠다.”
불쾌한 어조에 마리아의 눈동자 안쪽으로 이채가 번득였다.
“너와 나만의 일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절대로 관련시키지 마라.”
즉, 말을 할 때에도 여기에 있는 이들을 인질로 삼는다는 발언은 삼가라는 거였다. 라울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 선택을 하라는 거였다. 당당하기만 한 라울을 바라보던 마리아는 이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그녀는 총을 뒤로 물렸다. 동시에 이상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현재 그들이 타고 있는 배와는 또 다른 음향이었다. 라울이 고개를 돌리는 걸 확인한 마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안 그래도 슬슬 장소를 이동할 참이었어.”
해치 쪽에 서 있던 사내는 바깥을 내다봤다. 날씬하게 빠진 검은 배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동지였다.
사내가 왔다는 표시로 손을 들자 마리아는 턱으로 그쪽을 가리켰다.
“그러면 라울 대령님.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라울은 고개를 돌렸다. 해치 너머로 보이는 검은 배가 그의 시야에도 포착되었다. 아직은 먼 거리에 있었으나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는 얼굴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표정을 확인한 마리아의 한쪽 입술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강한 척을 하는 것도 지금뿐이―”
그녀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빠르게 다가온 검은 배가 갑자기 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크읏?!”
검은 배의 폭발은 그들이 타고 있는 배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막을 두드리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배가 좌우로 마구 흔들렸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몇몇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해치 근처에 서 있던 사내는 그만 중심을 잃고 해치 쪽으로 떨어졌고 놀란 톰이 손을 뻗었으나 붙잡을 수 없었다. 사내의 비명은 추락하면서도 계속 폭발을 일으키는 검은 배에 의해 완전히 묻혀버렸다.
쿵. 쿵. 하는 둔중한 폭발음. 그 뜨거운 열기가 마리아의 잘 정리된 금발을 마구 흔들어 놨다. 멍하니 그쪽을 쳐다보던 마리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녀는 라울을 바라봤다. 라울은 여전한 얼굴이었다. 아무것도 읽히질 않았다.
그러나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마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냐?”
대답이 없다. 라울은 서늘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네놈이로구나!”
감히 네가! 얼굴이 일그러진 마리아는 총을 위로 들었다. 그대로 라울의 머리를 후려칠 생각이었으나 마치 춤을 추듯이 뒤에서 날아온 채찍이 그녀의 손목을 휘어 감았다. 손이 위로 휙- 올라가고 총알이 천장을 향해 발포되었다. 그녀는 팔이 뒤로 당겨진 채로 넘어져서 그대로 끌려갔다.
“마담!”
“크윽-!”
당황한 사내들이 달려드는 순간에도 마리아의 몸은 계속 끌려갔다. 그녀가 멈춘 것은 한 사내가 그 몸을 눌렀기 때문이었다.
마리아의 양손을 잡아 포박한 마기휼은 무릎으로 그녀의 등을 눌렀다. 마리아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게 보였으나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 여자를 상대로 거칠게 굴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은 지금 상황을 정리하는 게 중요했다.
마기휼은 마리아가 움직일 수 없도록 단단히 내리누른 채로 달려드는 톰을 노려봤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 네 소중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그녀에게 손을 대면 널 죽여버리겠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꽤나 컸다. 살의도 상당히 실려 있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식겁한 마기휼이었지만, 지지 않고 톰을 노려봤다.
“지금은 나도 절박해. 그러니까 괜히 자극하지 말고 당장 그 덩치부터 줄여.”
톰은 무시무시하게 이를 갈아 댔지만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다른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정리하는 게 중요했다.
마기휼은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무기를 내려놔! 모두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인질을 삼거나 헛짓거리를 저지르면 그녀는 죽어! 이런 가느다란 목 비트는 것쯤이야 간단하다고!”
실제로 해버리겠다는 듯 마기휼의 손이 마리아의 목을 눌렀다. 바닥에 얼굴이 눌려져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채로 그녀가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당신. 날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
움찔하게 되는 말이었다. 마기휼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지. 하지만 여긴 우리의 애정을 논의할 자리가 아닌 것 같아.”
“그래. 그런 것 같네.”
마리아는 눈동자를 움직였다. 라울은 아까부터 한 자리에 서 있었다. 지금 상황이 이리될 것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는 투였다. 저리도 태연한 모습이라니. 보기만 하는데도 부아가 치민다. 증오를 담아 라울을 노려보며 마리아는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당신 실수하는 거야. 저런 자를 위해 움직이다니.”
“어쩔 수 없잖아. 난 군인이야. 거기다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걸 두고만 볼 수 없어.”
“무고한 사람들이라-.”
중얼거린 마리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거나 엎드린 채로 오열하는 사람들을 주욱 살폈다. 그 눈동자가 차갑기만 했다. 그녀는 이내 핏- 하고 웃었다.
“해택 받은 삶을 살아온 그들도 이제는 슬슬 피해를 입어도 괜찮지 않겠어?”
“……뭐?”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던 마기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마리아는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쪽의 의문에 답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듯 무표정을 한 그녀를 바라보던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에게 타박의 말을 던졌다.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조종칸으로 가! 거기에도 사람이 있어!”
“이미 처리했다.”
“처리했다고?”
언제?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마기휼이 의아해하는 사이 라울이 근처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들 이리로 와서 무릎을 꿇고 앉도록 해라.”
처음에는 움직일 마음이 거의 없던 이들도 마기휼이 마리아를 일으켜 세우자 발을 움직였다. 그들이 하나둘 라울의 앞으로 몰려들어 무릎을 꿇고 앉았고 마기휼은 마리아를 데리고 그쪽으로 이동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마리아가 잘못을 했다고는 해도 괜히 기분이 구려진다.
굳은 얼굴인 마기휼은 가능한 마리아를 보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마리아까지 라울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게 되었다.
마리아가 앉자마자 톰이 달라붙으려 했지만 마기휼은 당장 그의 머리통을 쳤다. 톰이 무시무시한 눈빛을 던졌지만 마기휼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분한 듯 이를 악문 톰이 마리아와 떨어지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사내들의 움직임을 찬찬히 살폈다. 그때 마리아의 손이 움직였다. 놀란 마기휼은 당장 마리아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할 따름이었다. 천천히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넘긴 마리아는 라울을 올려다봤다.
“우리만 왔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곧 다른 배가 도착할 거다.”
“그러면 그 배도 추락시키면 된다.”
멀리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아도 들었고 마기휼도 들었다. 이만한 바람이라면 보통 크기가 아닌 배여야 했다. 아니다. 이런 규모의 배라도 저런 날카로운 소리는 내지 못한다.
뭐지? 뭐가 다가오는 거지? 조금 전 검은 배를 격추한 것이긴 할 텐데, 설마하니…….
생각을 하다 말고 마기휼은 라울을 쳐다봤다.
라울은 마리아를 내려다봤다.
“나도 아무 준비 없이 너희를 맞이한 게 아니다.”
가만히 있던 마리아의 눈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바로 그때 자유로운 틈을 타 벽에 달라붙어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군함이다! 노르디아의 군함이야!”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화물칸의 왼쪽 천장 쪽은 안전 유리가 깔려 있었다. 그 너머로 갑자기 나타난 군함 하나를 발견해낼 수 있었던 마기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왕실 소속이잖아.”
날씬하게 빠진 검은 선체. 그 위에 찍힌 하얀 그림은 독수리를 뜻하는 문양이었다. 연방군이 아닌 중앙군이었다. 오로지 여왕만이 움직일 수 있는, 무시무시한 놈들이었다. 보통 군에 속한 군함도 대단하긴 했으나 저 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경도와 가벼움, 동시에 화력을 갖춘 데다 최대 인원을 수용할 수 있고, 그 외에 다른 기능도 일반 군함과는 비교될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한 저놈은 웬만한 일에는 출동하지 않았다. 연방국 차원에서 위급하다고 인정할 때에만 나타나는 귀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들이 도대체 왜-.
마기휼은 라울을 바라봤다. 라울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태연했다. 지금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태연함에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넌 도대체 뭐야.”
그리 묻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괴성이 들렸다. 깜짝 놀랄 정도의 소리였다.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고 이쪽으로 날아오는 커다란 상자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급히 마리아를 데리고 몸을 피하려던 순간 옆에 있던 사내가 움직였다. 그는 마기휼의 목을 감싸 뒤로 당겼고, 라울이 그 사내에게 손을 뻗었다.
총소리보다는 조금 가벼운 음향이 들리고 이내 총알 하나가 사내의 머리를 관통했다. 하지만 사내는 죽는 순간까지 마기휼을 놓지 않고 끝까지 당겼다.
“크윽-!”
채찍을 쥔 손힘이 느슨해졌다. 마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목을 죄는 채찍을 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울의 총구가 그녀에게로 향해진다. 사내의 팔을 간신히 푼 마기휼이 놀라 소리를 쳤다.
“제길! 죽이지 마!”
날카로운 외침과 동시에 갑자기 던져진 주머니가 펑- 하고 터졌다. 순식간에 시야가 막힌다. 라울은 손으로 코 아래를 막은 채로 뒤로 물러났고, 마기휼도 마찬가지였다.
양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엎드렸다. 잽싸게 피한 이쪽과 달리 일반인들은 그러지 못했는지 여기저기서 울음소리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에게 있어 정말 수난인 날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가거나, 일하거나, 또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난데없는 테러범을 만나 이 개고생인 거였다. 그런 걸로 따지면 이쪽도 마찬가지일까. 애초에 아무런 상관없는 라울 때문에 이리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숨을 죽인 채로 연기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입과 코를 막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해치로 달려갔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무것도 없었다. 가라앉은 연기 너머로 사람들과 라울이 보였다. 하지만 마리아나 톰. 그 일당이 보이지 않았다.
살아남은 것은 모두 셋. 그 모두가 아래로 뛰어든 건가. 빠르게 지나치는 구름을 확인한 마기휼의 표정이 굳는다. 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던 마기휼은 옆으로 물러났다. 해치의 문을 닫은 후에 몸을 돌렸다. 일부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물을 한가득 담은 망연자실한 그 눈빛들에 마기휼은 어깨를 으쓱였다. 웃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마무리가 된 것 같군요.”
“하느님 세상에…….”
누군가의 중얼거림을 시작으로 재차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징하게도 많이 운다 싶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일을 보통 사람은 절대로 견디어내지 못하는 법이었다. 금방 기억 속에서 잊히지도 않겠지. 꽤나 오랫동안 정신과 상담을 받아봐야 할지도 모른다면서 마기휼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라울이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그걸 확인한 마기휼이 그를 바라봤다.
“지금부터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라울의 입술을 타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가 라울을 바라봤고, 눈물이 담긴 그 눈동자 하나하나를 마주하듯 살펴본 그는 말을 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선 노르디아 연방국과 군을 대신해서 사과를 드립니다. 앞으로 가실 목적지에 대해서는 저희 군이 책임을 지고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추후 보상 문제에 대한 거론이 있을 것이니 부디 협조를 부탁합니다.”
꽤나 딱딱한 말이었다. 험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절로 들어 굳은 안색을 하고 있으려니 이내 라울이 눈을 내리뜨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순간적으로 식겁했다. 조금 더 다정하게 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으나 설마하니 저 라울이 고개를 숙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천하의 라울이 고개를 숙이다니. 저 사람들이 과연 자신이 느끼는 충격을 1할이라도 이해할지나 의문이었다. 마기휼은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이내 자신의 걱정이 괜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멍하니 라울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재차 흐느끼긴 했으나 아까처럼의 날카로움은 없었다. 다소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라울의 사과에 마음이 녹아내린 듯했다. 그래. 그들이 보기에도 라울은 대단했던 거다. 그런 인물이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니 다 풀린 거고.
……정말 정리가 된 건가.
멍하니 있던 마기휼은 재차 주변을 살폈다.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서 있을 수 없어진 마기휼은 천천히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목이 뻐근하다면서 고개를 좌우로 돌린 그는 이내 뒤로 몸을 젖혔다. 몸을 기댄 채로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공항이 아닌 곳에 임시로 배가 섰고 사람들은 원하는 방향대로 각 군함에 올라탔다. 한 대만 온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무려 3대나 출동을 했다. 이쯤 되니 조금 과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고작해야 라울 같은 거라니까? 내심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다.
팔짱을 끼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로노베로 가는 쪽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기휼도 로노베 방향이었다. 혹여라도 올라타지 못할까 봐 마기휼은 서둘렀다.
“마기휼 소령.”
부름에 마기휼은 주춤했다. 어정쩡하게 멈춰 서게 된 마기휼은 뒤를 돌아봤다. 라울이 서 있었다.
순간 살짝 짜증이 났다. 무시하고 군함에 올라타고 싶었지만 그리할 순 없었다. 라울 쪽으로 몸을 돌린 마기휼은 경례를 했다.
“대령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마음 같아서야 ‘모두 너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리게 되어버렸잖아.’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냥 말았다. 군에 있으면서 계속 얼굴을 봐야 할 사람이 아니던가. 마기휼은 스스로가 지을 수 있는 가장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마기휼을 가만히 바라보던 라울은 입을 열었다.
“도와줘서 고마웠다.”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좀 놀랐다. 네가 그렇게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원래 제가 좀 빠르기는 하지요.”
내색하지 않다뿐이지. 순수한 실력으로만 따지면 너보다는 내가 나을 거다.
마기휼은 라울을 바라봤다. 라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이쪽을 마주 응시했다. 그 시선이 슬슬 부담스럽게 여겨졌다. 이렇게 마냥 얼굴을 마주 볼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슬슬 작별을 고해야 할 것 같다면서 마기휼은 방금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정말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방으로 갔는데 보이지 않아서 정말 놀랐습니다. 혹시 누군가가 노리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건 아니다.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숨어 있었을 뿐이다.”
“……숨어 있었다고요?”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리 묻고 싶은 듯 쳐다보자 라울은 담담하게 말했다.
“천장에 달라붙어 있었지.”
“…….”
가만히 있던 마기휼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천장? 거기가 어디지?’ 일순 그런 얼빠진 생각을 할 만큼 충격의 강도가 상당했다.
천장? 천장이라고? 내가 총질을 피해 난리를 부려 대는 동안 네놈은 천장에 달라붙어 있었다는 거야? 거미처럼? 그러고 날 도와주지도 않았던 거라고?
마기휼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확 죽여버릴까? 그리 말하는 듯 입술 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라울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확인했다. 그 태연함에 열 받은 마기휼이 일을 치기 전에 다행스럽게도 라울의 등 뒤로 군인이 다가왔다.
“라울 대령님. 이제 슬슬 이동하셔야 합니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라울이 먼저 손을 뻗었다.
“다음에 다시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
“아. 네. 그러면 좋겠지요.”
내밀어진 손을 잡고 악수를 한 마기휼은 라울이 몸을 돌리고 가버리는 걸 쳐다봤다. 아직도 머리가 멍멍했다. 방금 뭔 말을 들은 건가 싶어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마기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숨어…… 있었다?”
그게 뭐야?
굉장히 허탈하기도 하고, 동시에 어이가 없었던 마기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에서 ‘마기휼 소령님. 올라타십시오.’라는 소리가 들리자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걸어가면서도 내내 라울에게 속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동시에 오늘 있었던 일 덕분에 이쪽도 큰 타격을 입었다는 걸 상기했다.
마리아가 설마하니 그런 무리일 줄은 또 몰랐지.
아름다웠던 그녀가 소형에서 중형 총까지 두루 사용할 수 있는, 꽤나 실력 좋은 여자였다는 걸 알게 된 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