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화 (1/27)

RED ZONE 1

레드존

네르시온

Contents

#1

#2

#3

#4

#5

#6

#1

하늘 위로 떠다니는 구름이 뭉쳐 있는 게 보기 좋았다. 볕은 따사롭고 바람도 선선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천국이라 해서 정해진 게 있을까. 마음을 주고 편하면 거기가 천국인 셈이었다. 이렇게 땡땡이를 치고 풀밭 위에 나른하게 누워 있는 것도 행복을 만끽하는 한 방법이었다.

“으아. 좋다.”

길게 소리를 낸 사내는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렸다. 발목을 휙휙 둘리며 콧노래를 길게 뽑아내는 얼굴은 나른함 그 자체였다.

선이 가늘고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닌 사내는 검은 머리카락에 약간은 갈색빛을 띠는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키는 작지 않지만 워낙에 날씬한 체형이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면 원래 키보다 5cm 정도 작게 보고는 했다.

사내의 이름은 마기휼. 올해 29살이 되는 그는 노르디아 연방국 북방 쪽 경계 임무를 담당하는 군부대의 소령으로, 23살 때 파격적인 진급을 한 이래 계속 소령으로만 머물고 있었다.

초반에는 그에 대해 기대를 품는 이들이 많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대심리는 더는 적용되지 않아, 이제는 군 최고의 한량이라는 말도 노골적으로 나올 지경이었다.

자신에 대한 뒷말 듣기를 즐기는 사람이 존재할까 싶지만, 마기휼은 자신에 대해 뭐라 말을 한들 모두 다 한 귀로 흘려듣고 넘겼다. 오래전에 발견된 고서 중에 있는 글귀인 ‘산은 신이고, 물은 물이로다.’ 그것이 마기휼의 인생철학이기도 했다. 물론 그런 마기휼의 철학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웃기고 있다.’라는 분위기였지만 말이다.

바로 그때 멀리서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마기휼은 감은 눈을 떴다. 보랏빛 눈동자가 햇볕 아래로 반짝거리며 드러났다.

“오오!”

다리를 주욱 뻗은 채로 마기휼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강풍에 의해 좌우로 빠르게 흔들린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푸르디푸른 하늘을 검은색의 대형 군함이 가렸다.

배처럼 생겼으나 좌우로 날개가 대칭으로 길게 뻗어 있고, 그것들은 마치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그 동력으로 인해 공중에 뜬 군함은 바람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그 군함의 겉면에 찍힌 금빛의 노르디아 연방국 상징이 보기 좋았다.

“역시나 잘빠진 선체라니까.”

주먹으로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리고 엄지를 세워 군함 쪽으로 주욱 뻗었다. 그런 마기휼의 사인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군함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지는 군함을 확인한 마기휼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기분 좋게 웃던 것도 잠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농땡이는 그만 칠까.”

슬슬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라며 마기휼은 옷에 묻은 풀잎을 떼어 내며 아래로 내려갔다. 설렁거리며 내려가는 폼이 딱 한량이었다.

애초에 주변 평판에 대해선 포기를 하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들에 구속되지 않는 그는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배를 긁적여 대던 그는 저기 아래에서 서둘러 뛰어오는 동료를 확인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상대도 마기휼을 발견하고는 양손을 위로 들었다.

“찾았다! 마기!”

마기라는 호칭에 마기휼은 켁-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멋대로 남의 이름 뒷자리를 뚝 잘라먹는 동료를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이 몸은 마기휼이라는 정식 이름을 가지고 있어!”

“아무렴 어때?! 일단은 내려와! 급한 일이야!”

“뭐가 급한데 그래? 이번 평가서에서 내가 톱을 달린 건 아니겠지?”

한 달에 한 번씩 군에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일정한 시험이 치러진다. 시험이라 하면 비공개로 해야만 유쾌한 법인데 이 평가는 그렇지가 않았다. 각 지부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지부의 성적까지 모두 포함해서 상위 100명의 점수를 공개하고는 했다. 그리고 마기휼은 한량인 주제에 늘 50위권 안에 드는 편이었다.

이번에는 한 10등 안에 든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놈이 이렇게 다급한 것이 아니겠느냐며 마기휼은 잘난 척을 하듯 길게 땋아 내린 꼬랑지 머리의 끝을 잡고 빙빙 돌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평범한 얼굴이 웃을 때가 되면 참으로 매력적으로 변하는 마기휼이었다. 하지만 동료가 전하는 말이 그 매력을 앗아갔다.

무표정이 되어 아무 말도 못 하는 마기휼의 모습에 동료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안되었어. 뭐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해. 일단은 사령부실로 가 봐.”

마기휼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일부러 말을 전달하러 와줘서 고맙다.”

“아니야. 천천히 가 봐. 괜히 뛰어가다가 넘어지지 말고.”

“그럴 리가 있겠냐. 난 어린애가 아니야.”

웃으며 하는 말에도 동료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이쪽을 쳐다보는 눈동자 가득히 연민이 묻어난다. 그런 그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마기휼은 알았다며 한 손을 들어 보이곤 몸을 돌렸다.

분명 처음에는 걷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다.

노르디아력 478년 5월 45시. 3분기 종합 평가에 관한 결과물이 전광판에 떡하니 찍혀서 나왔다. 이름 옆에는 사진과 그 점수가 같이 공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종합 평가를 보러 온 이들은 언제나처럼 고정 멤버처럼 이름을 올리고 있는 상위 성적자들에 대한 감탄을 한마디씩 토해 냈다.

“이번에도 라울 중령님이 1등이야.”

“당연한 일이지 않겠어? 라울은 노르디아 최고의 군인이야.”

덧붙여 그는 노르디아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왕통에 대귀족이었다. 안베르가의 최연소 대표이기도 했다. 올해 26세인 그는 23세에 군인이 되어 최고속의 진급을 이어 나가 지금은 중령이었다. 내년 안에 대령이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의 실력은 최고였고, 덧붙여 그 추종자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나 그는 일부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연하, 연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서른이 되면 노르디아 연방국의 요직에 올라 여왕 폐하의 보좌관이 될 수도 있을 법한 인물이었다.

다른 때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대단한 인물이 같은 군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함께 활동을 하고 대화를 나누고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거였다. 그리고 때때로 나오는 이 성적 발표는, 그들로 하여금 라울의 성장 과정을 엿보게 하는 듯한 은밀한 기쁨을 제공하기도 했다.

“쉿. 라울이 온다.”

누군가의 지적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고개를 돌려 뒤편을 바라봤다. 그러자 한 무리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오는 라울이 보였다.

다른 이들보다 머리 반 뼘은 더 큰 그는 190이 넘는 최장신에 체격 또한 당당했다. 긴 금발을 자연스럽게 흩날리며 다가오는 라울의 용모는 실로 훌륭했다.

한번 보면 시선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준수한 미남이었던 그는 차가운 녹안으로 주변을 한번 훑어봤다. 그러자 놀란 이들이 알아서 그 앞에서 물러난다.

성적표가 게시된 전광판 앞으로 길이 만들어졌다. 라울은 그 길을 따라 가장 앞에까지 갈 수 있었다. 라울의 아름다운 얼굴이 첫 번째에 걸려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그의 추종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씩 했다.

“역시나 대단해. 과연 라울이야.”

“군인이 된 후 한 번도 탑을 놓쳐본 적이 없잖아. 라울은 지금 전설을 만들고 있는 거야.”

“그 외에는 이런 일 절대로 하지 못할걸?”

라울이 원한다면 그의 발등을 핥아 댈 기세였다. 칭찬을 입에 담는 그들의 눈동자 안쪽으로 강렬한 탐욕이 서렸다. 이리 말을 하는 날 바라봐줘. 나에게 관심을 가져줘. 간절히 바라는 눈빛에도 라울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아래에 있는 이들과의 점수 차이를 확인했다.

각 항목당 50점이 만점이었다. 라울은 대부분이 만점이었으나 딱 하나는 49점에 그쳤다. 그것은 바로 검술 분야였고, 49점도 최상급에 속하는 점수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굳어진 채로 풀리지 않는 것은, 그보다 높은 점수를 얻은 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검술 분야에서 50점을 받은 자는 마기휼이었다.

밋밋한 얼굴에 갈색 피부. 긴 검은 머리카락은 대충 땋아 내려 한쪽 어깨에 늘어뜨려져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나 한쪽으로 올라간 입술 꼬리가 그의 장난스러움과 가벼움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라울의 표정이 그리 썩 좋지 않음을 깨달은 이들은 뭔가 싶어 그가 바라보는 쪽을 살폈다. 이내 원인을 발견해낸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기휼 이놈은 도대체 뭐야.”

“다른 건 다 바닥인 주제에 검술 하나만 만점이로군.”

바닥이라고 하기에는 말의 어폐가 있었다. 하나같이 간당간당하게 40점 위, 아래로 받고 있었다. 덕분에 이번에는 36등에 체크되어 있었다. 총 10과목에서 499점을 받은 라울이 1등이고 2등이 437점이라는 걸 감안하면 라울이 굉장히 우수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었다.

즉, 그 아래로는 다들 고만고만한 점수라는 거다. 그걸 생각하면 마기휼의 점수도 나쁘지 않았으나 그들은 그런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옆에 라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울과 비교를 해보면 마기휼은 귀족이라 하나 못나고, 엉뚱하고, 제 할 일은 하지도 않고 놀기만 하는 한량에 불과했다. 그가 왜 아직도 군에 남아 물을 흐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며 분통을 토해 내는 이들 사이로, 라울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마기휼의 웃는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그 얼굴을 응시하던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중앙 사령탑 쪽으로 달려가는 한 인물을 발견했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그는 마기휼이었다. 저런 얼굴을 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절박해 보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었다. 흥미를 느끼며 그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멀리서 달려온 군용 차량이 뒤에 멈췄다.

“라울 중령. 사령관님께서 찾으십니다.”

운전석에 앉은 자의 말에 라울은 곧장 그리로 갔다. 조수석 쪽에 앉자마자 차량이 출발했다. 라울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넘기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이번에 우수한 성적을 받으신 것을 축하합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축하를 받을 것도 없다는 듯 라울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조금 더 대화를 주고받고 싶었지만 말을 걸기가 무안한 상황이었다.

군인은 운전에 몰두하는 간간이 라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바람이 불어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근사하게 느껴졌다. 거기다 능력을 갖추고 가문도 좋으니 출세는 보장된 셈이고, 그런 그의 눈에 들면 나중에 요직 한자리쯤은 꿰찰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 당장으로선 그의 흥미를 끌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했다.

거대한 하나의 땅덩이였던 대륙은 지진으로 갈라져 3등분이 되었다. 그리하여 3개의 연방국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 명칭은 노르디아, 알센, 차울스였다.

각 연방국 아래로는 다양한 인종과 나라, 그리고 속국이 통합되어 있었고, 각 연방국에 종속된 군대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왕정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고, 왕이나 여왕은 그들만의 회의 기관을 운영하여 정치와 경제, 국방을 이끌었고, 그것은 아직까지 유지되었다. 여러 번의 실패가 있었으나 그걸 극복하여 지금의 상태를 완성한 것이다.

노르디아 연방국이라 하나 그에 속한 이들은 참으로 많고 다양했다. 라울처럼 왕통을 이어받은 대귀족이 있는가 하면, 그냥 귀족이 있고, 그보다 낮은 단계의 하급 귀족, 그리고 전문 직종에서 종사하며 돈을 모은 이들 및 일반 계급, 마지막으로 소수의 노예 계급이 존재했다.

라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본인이 왕통으로서 막대한 책임감이 부여된 사람이라는 걸 인지했다. 앞으로 노르디아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사람으로서 교육을 받고 그리 키워졌다. 지금은 군에 있지만 몇 년 안에 노르디아 왕실로 들어가 여왕의 오른팔이 되어 일하게 될 터였다.

그는 본인이 해야 할 일에 충실했다. 모든 걸 대충 하고 소홀하게 하는 건 그와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때문에 마기휼이라는 사람이 거슬렸다.

사령관실에 와서 주변을 둘러보며 마기휼을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필사적으로 달려가기에 지금쯤 도착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쪽이 먼저 도착을 한 모양이다. 하긴 자신은 차량으로 이동했었다. 마기휼이 도착하려면 앞으로 몇 분은 더 소요될 거다.

“라울 중령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말을 전달하는 비서관의 얼굴은 온통 붉은빛이었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작은 체구의 여자는 귀여웠다. 하지만 그녀가 암만 이쪽에 연정을 품는다 한들, 라울은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사무적인 선을 그어 놓고 대꾸 없이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그런 라울의 차가운 태도에 원망하면서도 참 멋지다며 여자는 괜히 쑥스러워했다.

라울은 문을 열고 사령관실 안으로 들어갔다.

“라울 중령. 도착했습니다.”

“그래. 왔나?”

서류를 정리 중이던 사령관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백발인 깔끔한 용모를 지닌 중년 사내였다. 올해로 64세가 되는 고드 사령관은 인품과 지략의 출중함으로 인해 평판이 좋은 이였다.

그는 다가오는 라울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도 1등이더군. 동서남북 군을 통틀어 톱이야. 이제는 새삼스레 놀랍지도 않은걸?”

“그 모든 것이 사령관님의 가르침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이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아부를 다 하는군.”

하지만 그 아부가 싫지는 않은 듯 고드 사령관은 호탕하게 웃었다. 한참을 웃던 그는 이내 손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고드 사령관의 앞에 놓인 의자를 뒤로 끈 라울은 자리에 앉았다. 사령관은 앞에 둔 서류를 옆으로 치워 내며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 군 생활은 어떤가? 불편함이 없나?”

“없습니다. 이곳의 모든 경험은 저에게 유익하기만 합니다.”

“자네가 그리 말을 해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마냥 고마울 따름이지. 내가 보기에도 자네는 이곳의 생활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웬만하면 군에 남게 하고 싶지만 여왕 폐하는 그게 아닌 모양이로군. 자네를 대령으로 진급시키고 저택 인근에 있는 요새를 자네가 관리하게끔 했어. 이걸 읽어보게나.”

라울은 사령관이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였다.

고드 사령관이 말하는 대부분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금 바로 가문으로 돌아와 가문과 연방국을 수호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찍혀 있는 여왕의 인장이 보였다. 그런가. 3년 안에 대령으로 진급을 하는 건가. 그리고 저택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가. 군에서의 단체 생활이나 빡빡한 활동은 어렵고 힘든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그걸 뒤로 하고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선택받은 엘리트의 삶으로 말이다.

라울은 종이를 받은 접으며 고드 사령관을 응시했다.

“저희 가문이 노르디아 외곽에 자리해 해적들의 침입이 잦은 것은 사실입니다. 요새를 두고 방어에 힘쓰면 해적들을 토벌할 수 있을 겁니다.”

“자네가 거기에 주둔하기만 하면 해적 소탕이 문제가 되겠는가. 내 장담하는데 2년 안에 다 잡아들일 수 있을 거야.”

2년도 길었다. 1년 안에 끝내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라울은 표정의 변화 없이 고드 사령관의 말을 계속 들었다.

“이리된 것이 자네에게 훨씬 더 좋은 일이 될 걸세. 몇 년만 지나면 내가 먼저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할 정도로 높으신 분이 되는 게 아닐지 모르겠군.”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전 늘 사령관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있겠습니다.”

“그래. 그래주면 고맙지. 그러면 앞으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활짝 열렸다. 고드 사령관과 라울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마기휼이었다.

문을 닫고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내내 마기휼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 모양과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 암만 봐도 제정신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런 모습으로 다가오는 걸 마냥 지켜만 볼 수는 없었던 라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기휼 쪽으로 나서 그 앞을 막았다.

우선 마기휼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자네. 잠시만 기다려보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까?”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이 라울을 멈칫하게 했다. 아버지라니?

마기휼은 분명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으나 초점이 맞지 않았다. 이쪽은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라울은 고드 사령관을 내려다봤다.

사령관은 낭패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마기휼이 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겁니까?”

“……아아. 그렇다네. 어찌 애도를 해야 할지.”

대답하면서도 굉장히 껄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굳은 고드 사령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기휼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머리에 한 손을 짚은 채로 있던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이런! 마기휼! 자네 괜찮나?!”

놀란 고드 사령관은 급히 마기휼의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손안에 얼굴을 묻은 마기휼은 어깨를 떨며 울고 있었다.

“……마기휼.”

언제나 늘 능청스럽게 굴며 힘든 상황에서도 속속 잘 빠져나가던 그였다. 이런 식으로 울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만큼, 그의 이런 모습은 확실히 당황스러웠다.

고드 사령관은 라울을 쳐다봤다. 젊은 자네가 어찌 해보라는 말을 건네려 했지만 라울은 굳은 얼굴로 흐느껴 우는 마기휼을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그 메마른 옆얼굴을 살핀 사령관은 한숨을 쉬었다. 말자. 그냥 자신이 위로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는 마기휼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다독였다.

“마기휼. 자네, 이러지 말게나. 이럴 때일수록 자네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지 않겠나. 일단은 스스로를 추스르도록 하게. 나도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네. 하지만 시간이 약이야. 시간이 흐르니 그 모든 것들이 치유되더군. 원래 그런 거야.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겠나?”

고드 사령관의 위로에 마기휼은 고개를 저었다. 듣고 싶지 않다고 저항하는 몸짓이었다.

고드 사령관은 더 당황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라울은 가늘게 떨리는 마기휼의 어깨와 등을 응시할 뿐이었다.

마기휼이 이런 식으로도 우는 사람이었나.

언제나 늘 실없는 농담을 일삼으며 불량한 태도를 취하고, 훈련에도 집중하지 않던 자였다. 승급 시험 때에도 성실하지 못하여 매번 낙방을 해 벌써 5년 넘게 소령에만 있는 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한심하면서도 왜 꼭 검술은 자신보다 우위인지 의문스러워 했다.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

울지도,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집중한 모습도 아니었다. 늘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그가 하늘이 다 무너져 내린 듯 흐느껴 우는 모습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그것이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알 수는 없었다.

라울은 침묵한 채로 눈이 녹아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 울고, 울고 또 우는 마기휼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울어봤다. 사람들의 무시나 비아냥거림을 듣거나 자신의 몸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죽음이 왜 이렇게 슬픈 건지 모르겠다.

울적하고 한없이 가라앉는다.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던 커다란 보호막이 사라져버린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 이건 두려움이었다.

세상에. 천하의 마기휼이 두려움을 느끼다니. 이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건 모두 다 아버지 당신 탓입니다. 나를 너무도 사랑해줬으니까, 내가 당신을 의지하게 되어서 이리되어버린 게 아닙니까. 진정 모두 당신 탓입니다.

마기휼은 멍한 얼굴로 손바닥 사이에 놓인 작은 사진을 내려다봤다. 검은 머리카락에 평범한 외모의 사내가 아이를 안고 있는 아담한 체격을 지닌 여인과 함께 있었다.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그 모습에 괜히 눈가가 촉촉해진다. 마기휼은 사진을 가슴에 품었다. 재차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봐. 마기휼.”

맞은편 침대를 사용하는 룸메이트가 이불을 걷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기휼이 너무 우울해하니까 위로를 해줄 생각으로 말을 건넸지만 침대 위에 엎드려 있는 마기휼을 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마기휼을 보자니 안 그래도 편찮으신 아버지 생각이 나 심란해 죽을 것 같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마기휼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봐. 일어나.”

싫다는 듯 고개를 마구 젓는다. 젝슨은 손에 더 힘을 줘 마기휼을 당겼다. 억지로 고개를 들게 된 마기휼은 내년에 서른이라 여겨지지 않는 엉망진창인 얼굴로 아기처럼 흐느꼈다.

“흐윽, 흑, 흐엉-.”

눈물은 당연한 거고 콧물은 옵션이었다. 늘 장난치기를 좋아하고 느슨하게만 있던 그가 이렇게 우니 더더욱 마음이 쓰인다.

자신보다 연상인 주제에 이리 울다니. 코끝이 짠해지는 걸 느끼며 젝슨은 시트로 마기휼의 얼굴을 닦아 냈다.

“쉿. 울지 마. 착하지? 일단은 일어나. 기분 전환 하러 가자.”

“젝스으은-.”

기다렸다는 듯 목에 매달리는 마기휼 덕분에 젝슨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사내치고는 날씬하고 지나치게 말랑말랑한 몸이 안겨 오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왠지 마기휼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아 살짝 당황스러웠던 젝슨은 헛기침을 하며 마기휼의 등을 토닥였다.

그 위로에 마기휼의 울음은 통곡이 되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아아-.”

“그래. 알아. 안다고. 그래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어. 우리는 노르디아 여왕 폐하의 자랑스러운 군인이야. 그걸 생각하란 말이야. 정신 차려.”

“여왕 폐하가 우리 아버지를 살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여왕도 고작 인간일 뿐이라구우우-.”

젝슨은 화들짝 놀라며 마기휼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허. 그런 말은 입에 담는 게 아니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아지마. 아지만으니-.”

입이 막힌 주제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눈물 콧물이 범벅되어 그게 손에도 묻는다. 일순 더럽다는 생각이 든 젝슨은 마기휼의 목에 팔을 두르며 침이 묻은 손을 탈탈 털었다. 그래도 콧물은 떨어지지 않는다. 정말 싫다는 얼굴을 하던 것도 잠시, 젝슨은 술을 마신 것마냥 주정을 부려 대는 마기휼을 끌고 방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오늘 잠자기는 다 글러 먹었다. 이런 날에는 오로지 술, 술밖에 없었다. 한잔 술에 나를 잊고, 너를 잊고, 모두를 잊는다. 부친의 죽음도 금방 털어 낼 수 있을 거라며 젝슨은 마기휼을 끌고 갔다.

군 외곽시설이라 하나 음란퇴폐업소를 빼고는 없는 게 없었다. 바깥으로는 일상생활에 거의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만큼의 가게가 즐비해 있었고, 그중에서도 술집이 가장 많았다. 다양하고 개체수도 많은 술집 중, 가장 인기인 곳을 꼽으라면 [첫사랑] 바로 그곳을 들 수 있었다.

과거의 아련한 사랑을 상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단어. 그것에 이끌려 첫사랑을 찾은 이들은 훌륭한 맥주와 음식, 미인 여주인과 싹싹한 그 서비스에 반해 재차 찾게 되었다. 때문에 종종 단체 예약도 들어왔고, 그때에는 당일 찾아오는 단체 손님들은 아쉬움을 다잡으며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은 인원이라면 수용할 수 있었다.

“어머나. 오셨어요?”

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미인 여주인이 상냥한 태도로 기꺼이 맞이하는 순간 마기휼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금방이라도 또 울 것 같은 모습에 젝슨이 진저리를 치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아! 그만 좀 하라니까!”

이런 미인 앞에서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거냐? 열심히 타박을 하려는데 마리아가 마기휼의 손을 잡았다.

하얗고 작은 손이 마기휼의 손을 감싸는 순간 젝슨의 눈으로 불똥이 튀었다. 단숨에 험한 말을 하고 싶었으나 눈빛을 교환하는 마리아와 마기휼은 이미 그들만의 세상으로 가버린 상태였다.

“들었어요. 슬픈 일이 있었다지요? 괜찮나요?”

“괜찮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걸.”

“그래요. 당신은 언제나 늘 아버지에 대해 말을 할 때마다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드러나고는 했지요. 참 힘들겠어요.”

“마리아.”

이름을 부르고는 더 뭐라 할 수 없었다. 축 처진 어깨에 울어서 다 부은 눈두덩과 발갛게 된 코. 안 그래도 평범한 얼굴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자의 눈으로 봤을 때 살짝 귀여운 맛도 있었다. 슬픔에 젖었기 때문에 이런 얼굴이 된 것이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마음이 쓰였다.

마리아는 마기휼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백 마디 말보다 마주 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모든 걸 대변한다.

마기휼은 얼어붙은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정말 고마워.”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하지 말도록 해요.”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술에 댄 마리아는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그 상냥하고 아름다운 미소에 마기휼의 눈꼬리가 살짝 내려간다.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상당히 멜랑꼴리했다. 힘들게 마기휼을 여기까지 데려왔던 젝슨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재주는 곰이 다 부린 격이지 않은가. 그래도 오늘 마기휼에게 슬픈 일이 있었기 때문에 참아준다며 젝슨은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바로 가게 내부가 나오는 게 아니었다. 좁은 통로를 지나 문 하나를 더 열어야 비로소 넓은 가게의 전경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가 그 문을 여는 순간 엄청난 환성과 웃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다른 손님들이 이미 와 있었나?

젝슨은 마기휼의 뒤로 가 가게 안을 살폈다. 30여 명이 되는 사내들이 있었다. 하나 같이 군 내에서 힘깨나 쓴다고 목이 힘주고 다니는 재수탱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앉아서 고고하게 와인 잔을 기울이는 건 라울이었다.

젝슨은 마리아를 바라봤다. 묻지 않아도 눈빛으로 모든 게 통한 건지 마리아는 붉은 입술을 양 끝으로 사르르 올렸다.

“단체 예약을 하셨어요. 라울 중령님께서 대령으로 진급하셨다고 하네요.”

“……26살에 대령이라고?”

그런 개사기가 어디에 있어. 물론 라울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입술 끝만 씰룩거리고 있으려니 마리아가 마기휼의 팔을 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

“안은 시끄러우니까 바텐더가 있는 안쪽으로 가요. 첫 잔은 내가 서비스할게요.”

마기휼은 라울 일행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가 이내 흥미가 사라진 듯 마리아를 쫓아갔다. 술을 조합하던 바텐더가 마기휼을 알아보고는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엉성하게 고개를 끄덕인 마기휼은 의자에 앉아 어깨를 축 늘어뜨렸고 그 옆으로 젝슨도 앉았다.

마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칸막이를 앞으로 주욱 끌었다. 높지는 않지만 얼굴 절반 정도는 가릴 수 있었다. 그러자 조금 아늑한 그들만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가게 안을 가득 채우는 소음은 어쩔 수 없다지만 말이다.

“어때요? 썩 괜찮지 않나요?”

칸막이에 팔을 올린 채로 웃는 마리아를 향해, 젝슨은 엄지를 세웠다.

“딱 좋아. 역시 당신은 센스쟁이야.”

“고마워요. 젝슨”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키스를 날린 마리아는 이내 마기휼의 뒤로 걸어가 그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가볍게 주무르다 고개를 숙여 마기휼의 뺨에 혀를 댔다. 살짝 핥고는 눈을 가늘게 휘며 미소를 지은 그녀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을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이 어서 빨리 기억 속에서 지워지기를 기도할게요.”

마리아가 마기휼의 뺨을 핥을 때 젝슨은 너무 놀라 입을 크게 벌렸고, 바텐더는 들고 있던 술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하지만 마기휼만이 태연했다. 무표정을 한 채로 있던 그는 ‘노력해볼게.’라고 말하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을 느낀다는 듯 마리아의 손길이 천천히 떨어지자 마기휼은 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내심 마리아를 좋아하고 있었던 젝슨은 입가를 씰룩였다.

“참 좋겠다. 만인의 마돈나인 마리아의 관심을 받아서 말이야.”

“마리아도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었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마음이 쓰이는 것뿐이겠지.”

중얼거리던 마기휼의 눈가로 눈물이 글썽거렸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마기휼은 고개를 숙였다. 호흡을 고르며 힘겹게 눈물을 참는 모습에 젝슨은 표정을 굳혔다. 이내 그는 마기휼의 등을 툭툭 쳤다.

“일단 오늘은 마시고 죽자. 이봐. 마리아가 서비스하는 술 뒤에 완전 독한 걸로 또 부탁할게.”

“네. 맡겨만 주십시오.”

바텐더가 솜씨 좋게 쉐이커를 돌리자 젝슨은 금방 그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하지만 한 손은 마기휼의 어깨를 잡은 채였다.

친구. 힘내게나. 말은 하지 않아도 그의 위로가 전해졌다. 그것이 큰 힘이 되기는 하나 지금 당장으로서는 위안이 되지 않았다. 마기휼은 눈을 내리떴다.

언제나 늘 자신을 걱정하던 아버지였다. 바라볼 때마다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맺혔지.

‘정말 미안하구나. 널 그런 몸으로 태어나게 해서.’

이런 몸으로 태어난 것은 아버지의 탓이 아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지역은 인위적인 자정 활동으로 인해 오염도가 낮으나 외부는 그렇지 않았다. 심각한 오염은 화학적인 폭발이나 기상 이변 등으로 일어나기도 했고, 암암리에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기형이 발생하기도 했다. 외관으로 보이는 기형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내부적인 기형도 존재했다.

정말 다양한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 예를 들자면 남자가 임신하는 경우였다.

마기휼이 바로 그 기형에 속했다. 그 사실에 대해 아는 건 아버지와 일부 가족들. 그리고 집안의 주치의뿐이었다. 마기휼은 집안의 장남이나 정자가 없어 아이를 만들지 못하고, 대신에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이상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외관은 분명 남성인데. 발기가 되는데도 말이다.

철이 들어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받은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충격이 길게 이어져 반항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그 사실을 전하는 아버지의,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 듯한 그 표정 때문이었다.

마기휼은 고개를 들었다. 그 눈가가 촉촉했다.

아버지. 당신은 가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제 걱정을 하셨겠지요.

그리 생각을 하자 더 미칠 것 같았다.

마기휼은 바텐더가 내미는 잔을 받아 한번에 주욱 들이켰다.

“자! 모두 잔을 들자!”

누군가의 외침에 한참 시끄럽던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눈길이 자신에게 쏠리는 걸 확인한 사내는 한쪽 입술 꼬리를 올렸다.

의자에 올라선 그는 잔을 머리 위로 들었다.

“우리의 라울 대령님의 진급을 축하하며! 다 함께 건배!”

“건배!”

기다렸다는 듯 모두가 합창하며 바로 술잔을 비웠다. 술은 결국 분위기를 타게 되어 있었다. 모두가 술잔을 다 비웠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머리 위로 잔을 탈탈 털었다. 그러면서 옆에 앉은 동료의 어깨를 치며 호탕하게 웃어 댔다.

“오늘따라 유난히 술맛이 좋은데?”

“좋은 날이라 그런 거잖아. 우리 자랑스러운 라울 님께서 대령으로 진급하셨잖아.”

그들은 가장 윗자리에 앉은 라울을 쳐다봤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라울은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보기만 해도 뿌듯해진다. 한 군인이 라울의 옆으로 가 가슴에 한 손을 댄 채로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축하합니다. 국방 총사령관이 되실 날도 머지않으셨습니다.”

“국방 사령관은 되지 않아. 일단은 대령이 되어 자택 근무를 명 받았다.”

“……뭐라고요?”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일순간 좍 가라앉았다. 모두가 크게 웃지 못하고 경직된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는 동안 움직이는 건 라울뿐이었다. 스스로 잔에 와인을 따라 마시는 것에 옆에 앉아 있던 미청년이 다급히 물었다.

“그건 좌천인 겁니까?”

“그렇지 않아. 본가 근처에 있는 요새를 받아 그곳에 개인 군대를 이끌고 해적 소탕과 불온한 세력의 감시를 명 받았다. 일주일 안으로 거처가 옮겨질 거다.”

요새 하나를 받는다는 건 라울 스스로 휘두를 수 있는 실권이 생기는 것이니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라울을 맹신하며 앞으로도 계속 그를 따를 마음을 품고 있던 이들에게 있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라울이 군에서 사라진다.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 되는 것이지? 한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울 대령님.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연달아 나오는 말이 술자리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전염되듯이 모든 군인들이 본인들의 충성을 내비치겠다는 듯 호기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함께 이동하겠습니다.”

“저도 당신과 함께 갈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당신 한 사람을 모실 겁니다.”

“절 데리고 가주십시오. 끝까지 충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멍청한 소리는 하지 마라.”

뜨거운 충성심에 물 끼얹는 말이었다. 한창 뜨거운 기분에 고취되어 반 흥분 상태에 있었던 혈기왕성한 군인들은 라울을 바라봤다. 라울의 눈동자가 군인들을 차갑게 응시한다.

“인사권은 오로지 군 총사령관님만이 가지고 있다. 너희 멋대로 이동을 하고 싶다고 해서 그리되는 게 아니야. 만일 총사령관님의 명령 없이 너희 임의대로 소속을 옮기는 건, 파직을 의미한다. 나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은 필요가 없어.”

냉랭한 말에 모두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명령을 받지 않은 이동은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크게 낭패를 볼 수도 있음이었다. 그렇지만, 하지만-.

초조함이 커진다. 라울이 없는 군이라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조금 전의 즐겁고 흥분된 기분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들 모두 예민해진 상태가 되었다. 한창 떠들면서 놀 때라면 몰라도, 모든 것이 싫고 짜증스러울 때에는 주변의 사물이 유난히 잘 보이는 법이었다. 달리 시빗거리가 될 만한 게 없는 건가.

그때 한 군인의 시선이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젝슨과 마기휼에게 닿았다.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들을 발견하는 즉시, 군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벌레 두 마리가 끼어들었군.”

군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던 이들도 이내 동료가 걸어가는 쪽에 마기휼과 젝슨이 있다는 걸 알고는 눈을 빛냈다. 몇몇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탕탕 쳤다.

“당장 없애버려!”

안 그래도 호전적인 상태인데 검술로 라울을 누른 마기휼이 마음에 들 턱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의 평소 행실이 거슬리던 참이었다. 모두가 마기휼에게 걸어가는 동료를 집중해서 쳐다봤다.

이내 그 낌새를 알아차린 라울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때 칸막이를 발로 차버리는 사내와 그 너머에 앉아 있던 마기휼이 눈에 들어왔다.

잔을 입술에 댄 채로 이쪽을 쳐다보는 그 얼굴은 기운 하나 없었다. 그걸 확인하는 즉시, 라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둬.”

라울이 만류를 하는 것과 동시에 군인이 젝슨의 머리를 후려쳤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병의 파편이 튄다. 그가 술병으로 젝슨의 머리를 친 것이었다. 순간 라울이 의자를 뒤로 끌고 바깥쪽으로 나섰다.

“그만-!”

쓸데없는 사고가 생기려 하고 있었다. 그걸 중재하려던 순간 술병을 들고 있던 군인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보이지 않을 정도의 몸놀림으로 젝슨을 공격한 이의 복부와 턱을 후려친 마기휼은 마지막으로 다리를 들어 상대의 등을 찍어버렸다.

동료가 바닥에 완전히 늘어져 찍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음에도 그걸 보는 이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는 동안 마기휼은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마기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득였다.

살기마저 감도는 그 눈빛의 정면에는 라울이 서 있었다.

“다 죽여버리겠어.”

테이블에 한 손을 짚은 채로 서 있던 라울은 음산한 중얼거림에 눈을 깜박였다.

그 순간 마기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다 죽여버릴 거야!”

괴성 같은 고함을 치며 마기휼이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이들이 방심 상태로 있는 동안 두 명이 쓰러졌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소리를 내면 바로 쓰러지고 눈을 깜박이면 바로 테이블 위로 올라선다.

마기휼은 차려진 접시와 음식을 발로 후려쳤다.

“개새끼들! 개자식들!”

욕설을 토해 내며 난동을 부리는 마기휼은 미친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계속해서 접시가 박살 나고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들이 의자를 들어 테이블 위에 서 있는 마기휼을 공격했다.

“당장 내려와!”

“어디서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찌 라울의 진급 축하 자리에서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하지만 그들이 내민 의자는 마기휼의 발길질에 모두 날아갔다.

한번 다리를 움직였을 뿐인데 손에서 날아간 의자가 구석에 가 처박혔다. 의자를 쥐고 있던 손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마기휼이 호리호리한 것과 달리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걸 깨달은 이들은 당혹스러운 듯 눈을 크게 떴다.

때에 맞춰 고개를 돌려 노려보는 마기휼의 살벌한 얼굴에 그들은 숨을 죽였다. 마기휼은 허리를 굽혀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 던졌다.

“나는 네놈들이 싫어! 다 싫어!”

“우, 우왓! 막아! 어서 막아!”

누군가 용기를 내 테이블 위로 따라 올라갔지만 당장 복부를 맞고 뒤로 날아갔다. 누가 보더라도 술에 취한 마기휼은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을 만큼 포악했다.

한 군인은 라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울 대령님. 일단 다른 곳으로 가 계십시오.”

“그렇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양쪽에서 하는 말에 라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처리한다고?”

라울이 보기에 여기에 있는 이들이 마기휼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달려들었다가는 되레 나가떨어지게 될 뿐이었다.

바로 그때 군인 한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이내 품에 한 손을 밀어 넣었고, 끄집어낸 것은 총이었다.

난동을 부리는 마기휼의 모습이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그 순간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핏속으로 알코올이 스며든 것일까. 굉장히 호전적이 되는 걸 느끼며 그는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손가락에 힘을 주려던 찰나 뒤에서 나타난 커다란 손이 사내의 손목을 잡았다. 움찔하는 사이 사내의 손목이 꺾였고, 그 반동으로 총알이 발사되어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스쳤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놀란 이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마기휼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휘두르려던 의자를 빼앗아 들고 가 어정쩡하게 서 있던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목이 뒤틀린 채로 무릎을 꿇고 앉은 사내와 그 옆에 서 있는 라울을 발견했다.

손목을 붙잡힌 사내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고 있었으나 라울은 무표정이었다. 칙칙하게 가라앉은 녹빛 눈동자를 본 마기휼의 입가가 씰룩였다. 뭔가를 자극 받은 듯 아랫입술을 깨문 그는 들고 있던 의자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테이블을 달려 바닥으로 착지했다.

곧장 라울에게 달려드는 마기휼을 본 이들이 놀라 다친 부위를 감싼 채로 몸을 일으켰다.

“라울 대령님! 위험하십니다!”

“피하십시오! 어서!”

모두의 외침에도 라울은 그 자리에서 조금의 미동이 없었다. 바닥에 두 다리를 내린 채로 있던 그는 마기휼이 코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는 순간 주먹을 쥐었다.

마기휼의 양손이 라울의 목을 끌어안았고 라울의 팔이 뒤로 빠졌다가 앞으로 나아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기휼은 라울을 끌어안았다.

낭창하고 부드러운 몸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라울의 주먹은 그 몸의 중심, 복부에 닿은 후였다. 꽤 아픈 소리가 났음에도 마기휼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마치 굳어버린 것 같았다.

처음부터 공격할 의사가 없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마기휼의 자세가 상당히 묘했다. 마치 포옹만을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라울은 마기휼의 복부에 대고 있던 손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기다렸다는 듯 마기휼이 더 달라붙고 동시에 라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 사이로 아주 작게 아버지, 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가느다랗게 간신히 토해 내는 단어. 그걸 듣는 순간 라울은 몸에 들어간 힘을 뺐다. 마기휼이 달라붙은 상태 그대로를 유지한 채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은 그러지 못했다.

마기휼 따위가 감히 라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말도 안 되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그들은 당장 마기휼을 라울에게서 떨어뜨리려 했다.

“이 재수 없는 자식이 감히 우리 라울 대령님께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당장 떨어뜨려! 이 주제도 모르는 놈이-!”

라울은 달려드는 이들을 돌아봤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이들은 마치 야차 같았다. 그 모습들에 환멸을 느낀다. 때문에 그들이 손을 뻗어 마기휼을 잡아당기려 했을 때, 라울은 그 손들을 모두 쳐 냈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이 떨어진다.

마기휼만을 보고 달려들었던 이들은 갑작스런 일에 당황한 듯 주춤거렸다. 라울은 그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

“마기휼 소령은 너보다 계급이 높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영창감이라는 걸 모르는 거냐.”

“하지만-.”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 것은 라울의 눈빛이 너무 싸늘했기 때문이었다. 주춤하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뗀 라울은 술집 내부를 주욱 훑어봤다. 엉망이었다.

“시작은 이쪽이 먼저 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목소리를 높이다니. 다들 엉망이로군. 정말 실망이다.”

“라, 라울 대령님.”

목소리 톤도 그렇고 표정 또한 안 좋았다.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서늘해서 할 말을 잃은 군인들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라울은 눈을 내리뜨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젝슨을 불렀다.

“젝슨 하사관.”

기절한 척을 하며 위험한 상황에서 좀 벗어나보려 했던 젝슨은 부름에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주저하던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모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에 식겁한 그는 행동이 빨라졌다.

일단은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자 이쪽을 찾았던 라울의 앞으로 걸어간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여 댔다.

“머, 머리가 좀 아파서.”

“그래도 이 물건을 데리고 돌아갈 수는 있겠지? 안 그런가.”

물건이라는 건 지금 라울의 품에 안겨 있는 마기휼이었다.

“……못 할 것 같아도 데리고는 가야겠지요. 같은 방을 사용하는 동료이니까.”

“그러면 당장 받아야지 않겠나?”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라는 거였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바보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라울 같은 잘난 놈이 저렇게 말을 하니 굴욕스러웠다. 그래도 티가 나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젝슨은 꼼지락거리며 팔을 뻗었다. 라울이 마기휼을 젝슨에게 건넸다.

호리호리한 체형이라고는 해도 키가 컸다. 라울처럼 공주님 안기로 마기휼을 안아 들 수 없었던 젝슨은 헛숨을 삼켰다. 마기휼을 안은 팔이 부들거렸다. 이내 마기휼을 안은 채로 천천히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젝슨은 라울을 올려다봤다. 라울의 눈빛이란 게 참으로 차가웠다. 그 시선이 참으로 사람을 굴욕스럽게 한다. 얼굴로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젝슨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만 라울 대령님. 조금만 더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순간 라울의 미간 사이로 주름이 잡힌다.

싫다는 건가. 그 의사가 전달되었던 젝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말아라. 그냥 내가 데리고 가마. 왠지 모르게 화가 났던 젝슨은 아랫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러다가 끙- 하고 자리에서 재차 일어나려 했으나 역시 힘들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리 생각하며 잔뜩 얼굴을 구기고 있으려니 뒤에서 나타난 커다란 손이 젝슨의 품에 안겨 있던 마기휼의 겨드랑이를 붙잡았다.

“어?”

순식간에 마기휼이 들려졌다. 그를 공주님 안기로 든 것은 2미터가 넘는 거구의 사내였다. 무뚝뚝한 인상의 사내와 눈이 마주친 젝슨은 얼빠진 얼굴이었다.

이건 또 뭔가 싶어 멍하니 있는 사이 거구의 등 뒤로 작고 아담한 미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젝슨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마리아-.”

어쩌면 얼굴도 예쁜 사람이 마음도 이렇게나 착한 건지 모르겠다.

당장 두 눈으로 하트가 그려질 것 같은 기세로 그녀를 올려다봤지만, 마리아가 고개를 돌린 건 라울 쪽이었다.

“이쪽은 제가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다들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이만 돌아들 가세요.”

“아니다. 이곳의 정리는 저놈들에게 시켜도 된다. 애초에 문제를 일으켰으니 그것에 대한 처리도 그들이 해야 할 거야.”

라울의 말에 마리아의 미소가 가벼워졌다. 그녀는 기분 좋게 말했다.

“그러면 청소를 좀 부탁해도 될까요? 계산은 어찌할까요?”

“지금 내가 하도록 하지.”

라울이 계산대 쪽으로 걸어가는 걸 확인한 마리아는 마기휼을 안아 들고 있는 청년을 올려다봤다.

“마기휼 소령님을 조심해서 잘 모셔다드리도록 해. 알았지?”

“물론입니다. 마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건장한 청년은 이내 젝슨을 내려다봤다.

“가시지요.”

“아, 그래. 가야겠지.”

얼굴은 험상궂고 체격도 이쪽의 1.5배인 것 같다. 마기휼만 아니라면 절대로 함께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느릿하게 일어선 젝슨은 먼저 몸을 돌리는 덩치의 뒤를 쫓았다. 덩치의 팔 너머로 살짝 보이는 마기휼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있는 게 완전 뻗은 것 같다.

사고란 사고는 다 친 주제에 자면 그만이냐? 하여튼 술 취해서 난리 부리고, 자버리면 그걸로 장땡이라니까. 그나저나 뒤통수가 유난히 따갑다면서 젝슨은 걸음을 서둘렀다.

뜨거운 햇볕이 얼굴 위로 떨어지자 마기휼은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뵈는 게 없다. 지금 여기가 어딘가 싶어서 멍하니 있다가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숙소였다. 그걸 인지하는 순간 머리가 박살 나는 통증이 엄습했다.

“흐읍-!”

머리는 아프고 속은 뒤집어질 것 같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정말 딱 죽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침대 위에 엎드려 어쩔 줄 몰라하는 마기휼의 뒤로 문이 열리고 젖은 머리카락 위에 수건 한 장 올린 젝슨이 나왔다.

머리를 말리던 그는 자신의 침대로 걸어가며 한마디 던졌다.

“일어났냐?”

심드렁한 목소리 안쪽으로는 유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이건 또 뭔가 싶었던 마기휼은 머리를 감싼 채로 말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봤다.

머리에 수건을 올린 채로 이쪽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젝슨의 상태가 이상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마기휼은 의문을 표했다.

“왜 그런 구린 얼굴로 날 보는 건데?”

“구린 얼굴이라니! 내 이 얼굴은 무척이나 준수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야!”

수건을 침대 위에 집어 던지며 외치는 주장에 마기휼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머리통을 감싼 그는 고개를 숙였다.

“헛소리하지 마.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단 말이야.”

깨지기 일보 직전인데 그런 되지도 않는 말을 하다니. 그건 고문 수준이라면서 끙끙 앓는 마기휼의 태도는 굉장히 무례한 것이었다. 한 소리 하고 싶었으나 딱 봐도 괴로워 보였기 때문에 젝슨은 입술을 씰룩였다. 토라진 젝슨이 앞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 마기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찌어찌 침대 끝에 앉는 것에는 성공했는데 아주 죽을 맛이었다. 어제 마리아의 가게로 가서 한잔한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후로는 암전이었다. 암만 생각을 해보려 해도 기억나는 것이 없으니 답답했다.

왠지 모르지만 굉장히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지?

잊어버리면 안 될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데-.

“웁!”

생각하다 말고 갑자기 속에서 화악 올라오는 불쾌한 느낌에 마기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마기휼은 급히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고, 그런 그의 등 뒤로 “야! 방에서 토하면 죽을 줄 알아!”라는 젝슨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지금은 어디서 토할 것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쪽 몸 상태를 먼저 생각해줘야 하는 게 아니던가. 하긴, 전에 젝슨이 침대 가운데에 거하게 토했을 때 그를 팬티 한 장만 입히고는 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적이 있었지. 그때의 경우랑 지금이랑 쌤쌤으로 쳐야 할까.

머리로는 가볍게 생각을 해도 육체적으로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태가 아니었다. 속에 있는 모든 걸 게워 낸 후에 마기휼은 바로 물을 내리고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먼저 바지를 벗고 셔츠 차림 한 장으로 거울 앞에 섰다.

“허걱!”

거울을 보자마자 나오는 소리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늘 아침이 되어 마기휼을 맞이하는 상큼하고 준수한 얼굴은 오간 데 없었다.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눈은 탱탱 붓고, 코는 벌겋고, 입술은 파랗고, 머리는 엉망이었다. 완전 괴물 한 마리가 거울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천하제일의 미남 마기휼 님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야!”

거울을 붙잡고 울부짖고 있으려니 옷을 집어 던지며 젝슨이 한마디 했다.

“아주 지랄을 한다.”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말에도 마기휼은 굴하지 않았다. 연신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울먹거렸다.

“말도 안 돼. 이 얼굴은 절대로 내가 아니야. 내가 이럴 수는 없어.”

이런 엉망진창인 얼굴이라니.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면서 마기휼은 셔츠도 벗었다. 일단 온몸을 청결하게 한 후에 단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셔츠를 벗자마자 보이는, 복부 가운데에 남은 엄청난 멍을 확인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뭐, 뭐야?!”

마기휼이 자화자찬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비명은 이상했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었던 젝슨은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검다 못해서 그 주변이 보랏빛으로 물이 든 마기휼의 복부를 보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어제 있었던 모든 일을 아는 젝슨이었다. 그는 배를 붙잡고 울부짖는 그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걸 모르는 마기휼은 흥분해서 날뛰었다.

“감히 어느 놈의 새끼가 이 귀한 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남긴 거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몸이 얼마나 잽싼데 감히 그 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기휼은 당장 젝슨을 노려봤다.

“이 새끼야! 너냐?! 네가 그런 거냐?!”

“괜한 사람 잡지 말고 옷이나 입어! 덜렁거리는 거 보기도 싫어!”

젝슨의 지적에 수건으로 중심을 가리며 마기휼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누구야?! 누구냐고?!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

“누구긴 누구야?! 라울이지!”

“……뭐? 라울?”

여기서 왜 그 이름이 나오는 거야.

이곳 최고의 인기인이자 노르디아의 차기 실세가 아니던가. 이쪽과는 조금도 연관이 없어야 할 인물이잖아.

의아해하는 마기휼을 두고 이번에는 젝슨이 목소리를 높였다.

“시발! 어제 내가 너 달래주려고 마리아 술집으로 데리고 갔잖아! 거기서 술에 만땅으로 취해서 먼저 와 있던 라울놈 꼬붕들하고 치고 박고 한 거 기억 안 나?! 결국에는 라울한테도 달려들어서 한 대 맞은 거잖아! 얼마나 난리였는데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인데?!”

젝슨은 마기휼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 날카로운 손끝 공격에 마기휼은 양손으로 뺨을 감싸고는 “에헷?”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멍청한 얼굴이었다. 나름 분위기를 풀기 위해 바보 같은 얼굴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도 젝슨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무리였다.

“술 처마시고 난 후에 기절해버리고는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놈들이 제일 싫어! 짜증 난다고! 시끄럽게 굴지 말고 어서 씻고 나와! 사령관님이 호출했어!”

더는 얼굴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젝슨은 문을 닫았다. 그 순간 마기휼의 표정이 돌변했다. 빌빌 기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대번에 껌 씹는 형님 얼굴이 된 마기휼은 혀를 찼다.

평소에는 조용한 젝슨이 왜 저리도 흥분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머리가 텅 비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 머리가 이렇게 백지처럼 청순해지면 안 되는데―.

하지만 암만 끙끙거려도 기억이 안 나는 건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내 생각하기를 포기한 마기휼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 도대체 뭔 일이었던 거야.”

마기휼과 라울 사이에는 인연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초반에 라울이 이곳 군부대로 소속되었을 때, 그는 마기휼과 룸메이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에게 배워보라고 붙인 것이었겠지만, 그건 군의 큰 실수였다.

그때는 아직 초반이었기 때문에 그들도 마기휼이 날라리라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거다.

마기휼은 라울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아주 기본적인 규칙 몇 가지만 알려주고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그걸로 땡이었다.

라울은 바른 청년으로, 정해진 규칙이라는 틀 바깥으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도 좋아서 마기휼이 저지르는 사고에 휘말리지 않고 한발 물러나 방관자로서의 중심을 잘 잡았다.

그렇게 너무도 번듯한 라울의 곁에 있다 보니 마기휼의 엉망인 상태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군은 초반에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인정하고 급히 마기휼과 라울을 분리했다. 그걸로 라울과 딱히 접점은 없었다. 물론 훈련을 할 때 마주치기는 해도 이미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마기휼은 헐랭이었고, 라울은 만인의 인정을 받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아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눈이 마주치면 간단히 눈인사만 주고받던 둘이 아니던가. 그런데 무슨 실수를 했다는 거지? 암만 생각을 해봐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 좋은 분위기였던 것은 분명할 터였다. 그러니까 지나치다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게 아니겠는가.

내가 진짜 미치겠네. 마기휼은 죽어라 노려보는 자를 앞에 두고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굽실거렸다. 그렇게 간신히 사령관실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막 바깥으로 나오던 자와 부딪칠 뻔했다.

우습게도 눈 한쪽이 시퍼렇게 멍이 든 얼굴의 사내를 확인한 마기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풋- 하는 소리에 상대의 눈꼬리가 위로 확 올라갔다.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빛에 마기휼은 재빨리 사령관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박장대소를 했다.

“푸하하! 하하하! 얼굴이 저게 뭐야!”

진짜 웃긴다. 잘도 저런 얼굴로 다닐 생각을 한다면서 마기휼은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두드려 댔다.

사령관실에 들어오나 싶더니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마기휼의 모습에 안쪽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고드 사령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리고 마기휼의 웃음이 잦아드나 싶었을 때 한마디 던졌다.

“자네 얼굴도 만만치 않아.”

사령관의 목소리가 들리자 마기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사령관의 앞으로 걸어가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고드 사령관님.”

“사령관실 안으로 들어와 완전 즐겁게 웃고 난 후에 취하는 인사치고는 어설프지 않은가?”

“그래도 좀 봐주십시오. 방금 나가는 사람 보지 않으셨습니까. 멍이 이렇게 들었던데요? 자다가 바닥이랑 진한 딥키스라도 나눈 거 아닙니까?”

실실거리며 마기휼은 사령관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게 아니라 마기휼의 막강한 주먹과 진한 연분을 나눈 거겠지.”

더 웃으려 했던 마기휼이 움찔했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었던 마기휼은 고드 사령관을 쳐다봤다. 조심스러운 시선에 고드 사령관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농담하려는 얼굴은 결코 아니었다. 그걸 봤을 때, 그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는 거다. 슬슬 어젯밤에 있었던 일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 같았던 마기휼은 사령관의 눈치를 살폈다.

초반부터 실수를 지적당했기 때문일까. 굉장히 조심스러워졌다.

마기휼은 무릎 위에 양손을 올린 채로 조심스레 물었다.

“……저 때문이라고요?”

“그러면 아닌가?”

되묻는 말이 의미심장했다. 때문에 마기휼은 잠시 생각에 잠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역시나 기억이 나는 게 없었다. 머릿속이 몽롱한 것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인상을 쓴 채로 좌우로 고개를 돌려봐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마기휼은 고드 사령관의 안색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전 아무런 기억도 안 나는데요.”

“그렇겠지. 저 불리한 건 머릿속에서 통째로 날려버리는 멋진 재주를 지닌 자네가 아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한들, 내 어쩔 수 없겠지.”

지금 고드 사령관이 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속에 박힌 가시가 느껴졌다. 이쪽이 엉성하게 다녀도 많이 너그럽던 고드 사령관이었다. 그런 그가 보이는 다른 태도가 마기휼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사령관의 눈치를 살피던 마기휼이 물었다.

“혹시 화가 나신 겁니까.”

“화날 게 뭐가 있어. 한창 싸우고 문제를 칠 놈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쌈박질 한두 번이야 우습지. 그저 괜히 강한 척을 하는 꼬마놈을 보자니 속이 쓰릴 뿐이야.”

강한 척이라니. 의외의 말을 들어 주춤한 마기휼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드 사령관은 연민이 서린 시선을 보냈다.

“더는 울지 않는 거냐.”

“하루면 충분합니다. 이틀까지 질질 끌고 갈 필요가 없어요.”

대답하면서도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낀다. 그러나 그걸 내색하고 싶진 않았다. 이런 대화는 불편하다는 듯 시선을 피하는 마기휼의 모습에 고드 사령관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넌 원래 강한 놈이었지.”

가만히 있나 싶던 고드 사령관은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봉투를 꺼내 마기휼에게 내밀었다. 주는 것이니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받아든 마기휼은 봉투를 열어 봤다. 봉투 안에 탑승권이 있는 걸 확인한 마기휼은 놀라 사령관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사령관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지금 바로 내 친구이자 네 아버지의 장례식에 다녀오너라. 특별히 일등석을 얻어 놨다.”

마기휼은 입을 살짝 벌렸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걸 다잡은 마기휼은 봉투 안에 탑승권을 밀어 넣었다. 고개를 저었다.

“전 지금 집중 훈련 기간입니다. 어차피 친족들이 다 모이기 전까지는 시간이 다소 소요될 테고, 그전까지는 장례도 치러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있다가 알아서 다녀오겠습니다.”

“괜히 멋진 척하지 말고 가라고 할 때 얼른 가. 그리고 너 하나 없어도 우리 군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돌아가니까 지금 당장 그 무거운 엉덩이 들고 냉큼 일어나거라.”

노려보는 사령관의 눈빛은 무시무시했다. 당장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주먹을 날릴 것도 같았다. 실제로 그리하고도 남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마기휼은 손에 들린 봉투를 내려다봤다. 아버지를 보러 가고 싶었다. 집안에 혼자 남아 있을 동생이 걱정되었다. 한시라도 빨리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이 마음은 진짜였다.

원래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사령관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안부 좀 전해주거라.”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한 고드 사령관은 고개를 숙였다. 서류를 살피고는 있으나 그 얼굴 전체적으로 떠오른 복잡함을 모를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가장 슬퍼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마기휼은 고개를 숙였다.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몸을 돌린 마기휼은 당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닫은 문을 뒤에 대고 선 마기휼은 눈을 감았다. 가만히 있던 그는 이내 손에 쥔 표를 내려다봤다. 마기휼의 눈빛은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어 지금 당장 그가 느끼는 답답함을 알려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