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알고 보니 공학천재(2)
* * *
"아, 너희들이었구나? 다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엘트먼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낸다. 다만 우리의 시선은 그가 아니라 그의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에게 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와 안면이 있는 이들이었다.
비록 좋은 만남은 아니었다만.
미셸 프랑크와 레베카 로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어서 나 또한 뜬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배경만 본다면 그리 뜬끔 없는 것은 또 아닌가.
미셸은 자타공인 남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프랑크 상단의 여식이었고 레베카는 중앙 정계 거두 로즈 가의 영애였으니까. 엮으려고 한다면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인연이다.
다만 상가의 자제로서 매사 계산적인 미셸의 성격 상 엘레나와 트러블이 생긴 레베카를 가까이 두려 하지 않을 터인데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 거기에 의외라 생각했을 뿐이다. 아카데미에 오기 전 부터 인연이 있었다고 하면 이해 못할 건 또 아니었다. 그녀가 그리 모질기만 한 인간은 아니었으니.
"어머, 데미안 공자와 엘레나 양 모두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사냥대회 이후로 처음이던가요? 모처럼 같은 학부에 입학했는데 반이 달라 그리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서로가 예상치 못한 등장이었기에 분위기가 살짝 경직된 와중에 먼저 입을 연 건 미셸이었다.
부드러운 말투로 운을 떼는 것이 그녀로서는 딱히 찔리는 것이 없기 때문일까. 미셸의 옆에 앉아있는 레베카는 여전히 엘레나를 보는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만 그리 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엘레나는 미셸의 인사에 가볍게 답했다.
"그렇네요. 미셸 양."
둘을 본 엘레나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것이 보인다.
아무래도 엘레나로서는 이렇게 레베카와 마주하는 것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방금전까지 데이트를 하고 있어서 그런가. 레베카의 등장에 방금 전까지만 하여도 고점이었던 그녀의 기분이 약간 다운 되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엘레나가 조금 뒤끝이 있는 편이긴 하지.
그렇다고 남들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티가 난 것은 아니었기에 대화의 분위기는 원만하게 흘러갔다. 레베카가 거의 없는 사람 취급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혹시라도 대화에 끼어들기라도 했으면 그대로 분위기는 저세상으로 가버릴 테니. 레베카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랴.
"기숙사에서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던데 미셸 양은 혹시 학구 내 달리 건물을 구해서 생활 하시고 계신 건가요?"
"아, 엘레나 양은 기숙사 생활을 하셨던가요. 네. 맞아요. 아무래도 상단의 일을 어느정도 떠맡아두고 있는 신세라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병행하기에는 무리더라구요. 엘레나 양도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 해주세요. 대금만 확실히 지불해 주신다면야 뭐든 구해드릴 테니."
"후훗. 기억할게요. 아, 혹시 지금 여기에 오신 이유도."
"맞아요. 엘트먼 교수님께서 구하시고 싶으신 물건이 있으시다고 하셔서. 마탑에 계실 적부터 거래하신 인연이 있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견적만 짜시던데, 이번에 아주 통 크게 주문 하시더라구요."
"....그 이야기는 거기 까지만 하는 걸로 합시다. 미셸 양."
"음, 사설이 조금 길었네요."
엘트먼의 말에 미셸이 멎쩍게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와는 별개로 미셸이 엘레나에게 계속 아는 채를 하고 엘레나가 이를 받아주자 엘트먼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엘트먼이 기억하기에 그녀는 그리 사교성이 좋지 않은 편이었으니. 아마도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겠지.
"그래도 이건 좀 의외인걸 미셸 양과 엘레나. 설마 서로 면식이 있었을 줄이야."
"네. 남부 사냥대회 때요. 뭐, 중간에 그리 일이 터져버려 오래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요. 그건 그렇고 데미안 공자도 정말 너무하시네요. 저희가 알고 지낸 시간이 있는데 소개 한번 안 시켜주시고. 약혼자를 아끼시는 건 좋지만 너무 가둬두시지는 마시죠."
엘트먼과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내게로 화제를 돌리는데,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오랜 지기를 간만에 만나기라도 한 것 같이 애정이 아주 뚝뚝 묻어났다.
굳이 지금 자리에 꺼낼 필요도 없는 알고 지낸 시간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 나와 친분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다는 건데. 지금 자리에는 죄다 내 지인 밖에 없던 터라 나는 순간 미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싶다가 잠시 뒤 나는 내 옆에 엘레나가 앉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다.
이 사실을 깨닫자 내게 친근히 말을 걸어오는 미셸의 모습에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발을 저리는 건지 원. 아무래도 엘레나가 이쪽으로 많이 예민한 편이었으니 절로 조심스러워 진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이를 건들인 레베카가 바로 눈 앞에 있었기에 이런 사소한 자극이라도 어찌 반응할지 몰라, 나는 정신줄을 꽉 붙잡았다.
하지만 이도 내 걱정이 과한 것이었던 걸까. 엘레나는 미셸이 던진 미끼에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미셸의 장난이었음을 알아차린건지는 모를 일이다만 엘레나는 이전과 같이 온화한 미소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이건 이것대로 섭섭하네.
"정 그러셨으면 먼저 편지를 쓰셨어야죠. 제 기억에 프랑크 가에서 온 편지라고는 상단 이용 내역 밖에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말입니다."
"뭐....그건 할 말이 없네요. 앞으로는 자주 쓰도록 하죠. 물론 엘레나 양에게도 보내는 거니 답장 잘 해주셔야 해요?"
내 대답에 미셸은 순순히 인정했다. 더 물고 늘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엘레나가 이에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겠지. 미셸이 더 이상 대화를 끌고 갈 마음이 사라지자 자연스래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끝을 맺었다.
엘트먼과의 대화도 우리가 왔을 때 이미 막바지였는지 그리 길게 걸리지 않았다.
"주문하신 물품은 적어도 이번 달 말까지는 받으실 수 있을 거에요. 추가로 더 구매하시고 싶은 의사가 있으시거나 다른 물품을 수배하실 거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네, 언제나 신세를 지내요. 미셸 양. 아, 그런데 지급해야 할 대금이 아까전에 비해 조금 줄어든 것 같은데 이건...?"
엘트먼의 질문에 미셸은 나를 흘겨보더니 여우같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건 지인 찬스라고나 할까요. 크라우스 가는 저희 상단 특급 고객 중 한 분이시죠. 그것 말고도 데미안 공자님께는 이런저런 신세를 진 것도 있고 하니, 데미안 공자님과 엘트먼 교수님이 더 가까워지셨으면 하는 마음에 드린 혜택이랍니다."
그러면서 내게 눈을 찡긋 하는데 이번에는 엘레나는 가만히 있어도 엘트먼이 나를 기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 여자가 진짜...
***
엘트먼과의 이야기가 끝나자 미셸과 레베카는 곧장 연구실을 나섰다. 대신 그렇다고 해서 그 둘만 연구실을 나간 것은 아니었는데 두 사람이 나가고 의자에 앉아 있던 엘레나가 그 둘을 따라 나갔기 때문이다.
잠시 할 이야기가 생겨서 라고는 하는데 지난 번의 일을 기억하는 나로선 불안감이 들 수 밖에 없다. 면식이 거의 없는 레베카라면 몰라도 미셸은 조금 짓굳은 면이 있기는 해도 친구라 생각하고 있는 인물 인지라 찜찜하기는 하다.
뭐, 엘레나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방금전에도 얌전히 있었던 걸 보면 그녀가 굳이 미셸과 마찰을 일으키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연구실에 남은 인원은 나와 엘트먼 단 둘 뿐이다. 원래도 혼자 오려고 했던 걸 생각해보면 우연찮게 생각했던 대로 된 꼴이었다.
"하하. 미안. 학회 일로 오늘 미셸 양을 부른 것을 깜빡하고 있었지 뭐야. 조금 많이 기다렸지?"
"아니요. 딱히..."
"혹시 방금 전에 엘레나가 나간게 걱정이 되서 그런거야? 그거라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러고 보니 엘레나도 못본 사이에 정말 많이 변했네. 확실히 내가 너무 다른 사람들과 연락을 끊어두고 살기는 했나봐."
"지금 부터라도 잘 하시면 되죠. 형님이나 저나 앞으로 몇년은 이곳에 있을 텐데, 이전과 같은 일은 더 이상 없을 겁니다. 너무 연구에 빠지게 되시면 제가 주먹을 휘둘러서라도 제정신으로 만들어 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 음...고마워."
엘레나가 빠졌다고 해서 나와 엘트먼의 사이가 어색해지거나 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 미셸과 어떤 관계냐는 질문이 대뜸 날아오기는 했지만 오해를 푸는 것도 금방이었고 말이다. 솔직히 내가 그녀와 친분이 있는 건 딱히 숨길만한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냥 솔직히 다 말해주었다.
어릴 적에 내가 그녀를 마물에게서 한번 구해 주었고 그때부터 알고 지냈다는 걸. 정말 별거 없다.
말해주고 나니 엘트먼이 왠지 모르게 쓸쓸하면서도 안타까움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엘트먼은 몇번 고개를 가로 젓더니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역시 크라우스가 다르긴 다르구나. 열 세살? 그 어릴 때부터 마물을 쓰러뜨리다니 말이야. 나는 그 나이 때 뭐했더라. 아마 마탑에서 사서(史書)나 주구장창 읽었던 것 같은데."
"저희야 무가(?家)니까요. 마법사는 무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 잖습니까. 분야의 차이인 셈이죠."
나는 그렇게 답하고 엘트먼의 연구실을 훑어 보았다.
학과가 학과여서 그런지 무언가 기계장치로 보이는 것들이 한 눈에 보기에도 많았다. 중, 근대 시절에서나 보일 법한 것도 여러 있었지만 마법사의 연구실이어서 그런지 확실히 내가 살던 현대와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것도 몇가지 눈에 띄였다.
내가 신기하다는 듯이 연구실을 살피고 있자 엘트먼은 그제야 우리의 대화가 원래 어제 밤에 말했었던 주제에서 많이 멀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는 잡동사니로 이루어진 더미 같은 곳을 향해 손을 뻗더니 장난 스런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런데 역시 남매는 남매인건가. 엘레나와 엘트먼 이 두 사람 웃는 얼굴이 많이 비슷하다.
"잘 봐바."
엘트먼이 손을 뻗고 묘하게 힘을 주는 것 같이 팔을 움직이자 잡동사니 더미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염동력이라도 사용한건가 싶더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엘트먼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방출이 아주 미미하였다.
그렇다고 마력이 아예 안 움직인 것은 아니었고 정말 쥐꼬리 만큼 작은 마력이 전파가 송수신 되듯 움직인게 전부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느끼었던 이러한 느낌이 단지 느낌 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잠시 후에 알게 되었다.
몇 번이고 들썩 들썩 흔들거리던 잡동사니의 산에서 어떤 물건 하나가 엘트먼에게로 빠르게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이를 쳐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엘트먼이 워낙 자신만만한 얼굴이었기에 그것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여차하면 쳐낼 준비를 한 채로 말이다.
엘트먼과 날아오는 물건과의 거리가 불과 몇 센티 밖에 남지 않았을 때 나는 그에게로 날아가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장갑이었다.
강철인지 아니면 다른 특수한 합금인지 주재료가 된 것이 무엇인지 확실 하게는 알 수 없었다만 척 보기에 금속으로 제작된 장갑 같았다. 생김새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는 기사들이나 쓸 법한 물건이었는데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의 모양이나 재료가 아니었다.
정확히 한치의 오차도 없이 부드럽게 엘트먼의 손에 씌워지는 장갑.
분명 처음에 보았을 때는 엘트먼의 손 크기보다 품이 큰 장갑이었는데 날아와서 엘트먼의 손에 씌워진 장갑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엘트먼을 위해 주문 제작된 것 같이 딱 그의 손의 크기에 알맞아 보였다.
아니, 이건...
"어때?"
짝짝짝짝짝짝짝짝!!!!
난 엘트먼의 질문에 격한 박수의 세례로 답을 대신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