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127화 (127/131)

〈 127화 〉 알고 보니 공학천재(1)

* * *

아무리 계절이 여름에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새벽의 한기는 여전히 냉랭하다.

북부에서 경험하였던 한풍에 비교하자면 새발의 피에 불과해도 몸을 움직여 후끈 달아오른 몸의 열기를 식혀주기에는 충분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만 이러한 바람은 반갑게 느껴졌다.

저 멀리 보이는 아침 노을이 밤이 다 끝나갔음을 알려준다. 이에 맞춰 연무장 바닥에 앉아있던 나와 라인하르트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이 텄으니 곧 있으면 다른 아이들도 아침 훈련을 하러 밖으로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나와 라인하르트에 대한 아이들의 거리감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이대로 여기에 앉아 있다면 아이들에게 붙잡혀 훈련을 봐주게 될 미래가 훤히 보였다.

못해 줄 건 아니지만 새벽에 뜻하지 않게 몸을 많이 움직였기에 그런가, 아니면 평소에 잘 지키고 있던 수면 패턴을 지키지 않은 것의 반동인 걸까. 눈꺼풀이 무겁지는 않다만 그래도 지금은 방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라인하르트는 원체 표정의 변화가 없는 녀석인지라 졸린 건지 아닌건지 감이 잘 오질 않았는데, 그냥 내가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하니 따라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녀석이나 나나 단련에 가지고 있는 목표량은 비슷한 수준이었기에 어쩌면 새벽에 하였던 단련으로 충분히 만족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이 시간에 나올 것인가?"

기숙사로 가는 길에 라인하르트가 내게 이리 물었다. 새벽에 하였던 대련이 꽤나 만족스러웠나 보다. 새벽이라는 시간대의 영향인가. 나나 녀석이나 꽤나 감성적으로 검을 휘둘렀으니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기는 하였다.

나는 그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오늘은 예외였어. 역시 나는 그 시간에 자는게 맞는 것 같다."

"수면 패턴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바꿀만한 건 아니지. 알았다."

사실 새벽 대련의 원인이 시간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지 라인하르트는 순순히 수긍했다. 내게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챈 것 같은데 라인하르트는 굳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냥 새벽에 있었던 대련이 재미있었다는 말이 전부였다.

아마도 이전에 하였던 대련들 보다는 더 마음에 들었다는 것 같다. 라인하르트라는 세기의 천재 중 한명이 인정을 해줘서 그런가.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이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닌것 같았다. 뭔가 칭찬을 받은 느낌이라 마음은 전보다 홀가분해져 있었다.

우리는 아침에 무얼 먹을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이야기를 나눈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메뉴를 통일 할 수 있었는데, 녀석이나 나나 새벽부터 계속 찬 바람을 맞고 있어서 그런지 결론적으로 나온 음식은 스튜였다.

"야, 야. 일어나."

"아니, 지금이 몇신데..."

"일곱시. 아침 밥 먹으러 가자."

기숙사로 돌아가자 우리는 자고 있던 리처드를 깨워 밑으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싫다는 듯 이불을 뒤집어 쓰는 리처드였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리처드는 스스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였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먼저 밥을 먹으러 갈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 잠이라는게 남이 깨워서 일어나면 더 자고 싶은 법이다. 그렇기에 이런 리처드의 첫번째 거절은 항상 있는 일이었다. 항상 그리 말 해두고 나와 라인하르트가 몸을 씻고 나오면 녀석은 밖으로 나갈 준비를 끝내논다.

기숙사에 들어 산지도 어언 두달이 넘어가는데 친해지지 않았을리가.

기본적으로 순딩순딩한 면이 있는 리처드였고 친화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우리에게 녹아드는 건 한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낯을 가리며 다른 아이들에게 존대를 하였던 리처드도 우리와 한달을 지내다 보니 이전과 같은 조용한 아이의 면모는 많이 지워진 상태였다.

근묵자흑이라. 원래 순수할 수록 쉽게 물드는 거다.

"오늘은 다들 스튜로 통일인거야? 밖이 많이 추웠나? 밤에 창문에서 바람 소리가 많이 들리기는 했는데."

"아마? 서늘하긴 해."

"그래도 겉옷 같은 건 안 입는게 좋을거다. 바람은 강해도 태양은 뜨거울 테니. 챙기면 괜히 거추장 스럽고 땀만 날 테다."

"음...그래도 나는 챙길래. 더우면 벗으면 되니까. 거추장스러우면 아공간에 넣으면 되고."

우리는 스튜를 퍼 먹으며 항상 그랬듯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듣고 있다보면 바뀐건 리처드 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과묵했던 라인하르트도 바뀌었고 나도 변했다면 변하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기도 한데, 나는 매번 이 사실에 놀라곤 한다.

어느새 그릇을 깨끗이 다 비운 리처드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다들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어? 얼마 안 있으면 성신제 잖아. 이번 축제 대회는 학년 제한 없이 출전이 가능하다 고는 하니 너희들이 거기에 빠질 리는 없으니 말이야."

"준비야 언제나 하고 있지."

내 말에 동조하듯 라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단련하고 있으니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다른 아이들이야 대회 기간에 맞춰 영약을 준비하든 새로운 무구를 맞추든 분주히 움직이고 있겠다만 나와 라인하르트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무구야 가문의 신물들이 있고, 영약은 드래곤 하트와 같은 규격 외의 것이 아니라면 야 지금에서 야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명문가가 괜히 명문가가 아닌 것이 우리에게 있어 준비라는 것은 다른 외적인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닌 본인에게 달린 것이었다. 아마, 이는 리처드에게도 똑같이 해당이 되는 말일 터. 녀석도 알면서 그냥 한 소리일테다.

그건 그렇고 성신제라...

성신제(???)

에스텔리아에서 행해지는 건국절 행사 중 하나다. 원래라면 지금 시점에서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지만 리처드가 말 한대로 이번에 나는 그곳에 참가하게 되었으니 마냥 묻어 만 둘 수 없는 문제들 중 하나가 되었다.

제국 최고의 인재들을 모아둔 아카데미인 만큼 학생들간의 결투가 메인인 축제인데, 원래는 1학년 같은 파릇파릇한 신입생은 출전을 못하는 걸로 알고 있다만, 이번에 은거하고 있던 검성이 학부장으로 취임한 것의 여파인지 몰라도 전 학년 출전이 가능해진 것으로 기준이 완화 되었다 한다.

덕분에 원작에서도 2학년때나 나갔던 것을 미리 치르게 생겼다.

아무래도 원작과는 다르게 앞서 여러 사건이 터졌기에 나름 사건의 주역들이라 할 수 있는 황금기수라 불리우는 현 1학년들을 의식한 조치인 것 같은데, 당연 그 중 선두를 달리는 4대 가문의 자식들이 축제에 빠질 수 있을 리가 없다. 뭐, 좋은 성적을 거둘수록 얻을 수 있는 혜택도 있으니 나쁠 건 없다만.

나는 리처드와 라인하르트의 눈을 보았다. 라인하르트야 그렇다 쳐도 나를 보는 리처드의 눈에도 투쟁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허허허...이것 봐라?

마냥 조용하기만 하던 녀석이 눈에 불을 키며 나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요상했다. 원래 리처드가 싸움을 즐기는 성격이 아닌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 대체 무엇이 녀석의 동기가 되었을까. 그것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내가 리처드에게 그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

라인하르트가 그랬던 것 처럼 그런 자잘한 이유는 알 필요가 없으니까.

대회에서 만나게 되면 그냥 각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다.

'뭐, 중간에 엘레나랑 만나게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릇도 다 비웠겠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강의가 끝나고 나서 나는 전날 밤에 약속했던 대로 엘트먼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혼자는 아니었는데, 나는 마법부의 구조를 모르고 전날 엘트먼이 내게 초대를 하였을 때 엘레나가 곁에서 듣고 있었으니 당연하게도 연구실로 가는 길은 엘레나와 함께였다. 미리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은 것은 아니었고 마법부 본관으로 들어가자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엘레나와 만난 것이었다.

애초에 오늘은 엘트먼과 단 둘이 이야기 할 생각이었다만 그와의 만남이 이번 한번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마법부의 길도 익힐 겸 엘레나의 안내를 받으며 나는 마법부 이곳 저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딱히 신기해 보이는 기물을 보이지 않았다. 눈으로 보았을 때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것이라면 지난 번 시계탑 거리에서 보았던 것들이 더 신기하지. 이곳에 그런 건 없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단에는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되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였다.

대신 신기한 기물의 유무 보다는 사람의 손에서 펼쳐지는 마법이 더 많이 보였다. 강단 위에선 교수들이 학생들 앞에서 마법을 시연하는 모습은 옛날 영화에서나 보았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해 자꾸만 눈길이 갔다.

마법사들의 수업은 무엇인걸까. 궁금해 하며 다른 강의실을 빼꼼하고 들여다 보자 엘레나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작게 웃기도 하였다.

나는 그에 멎쩍게 웃어 넘기면서도 쉽사리 눈길을 돌리지 못하였다. 나는 마법사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하지 못하는 영역이었으니 경지와는 무관하게 마냥 동경하게 되는 점도 있었다.

"데미안은 가끔 보다보면 마법사가 되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다니까요."

"그런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면 되고 싶기는 해요. 그런데 만약 제가 마법사였다면 반대로 무술에 이렇게 반응했을지도 몰라요. 왜 이 세상에는 그 두가지를 전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마검사. 뭔가 멋있지 않아요?"

엘레나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는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이렇게 말했다.

"한 우물이라도 제대로 파는게 좋죠. 일단 그런건 마스터가 되고 나서 생각하자구요."

"지금 약 올리시는 거죠...?"

엘레나는 대답 대신 혀를 베에­ 내밀었다. 이런 문답은 아버지와 요하임 공작의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 반대네. 엘레나가 장난으로 아버지 흉내를 낸다는 것을 알았다만 이상하게 짜증은 나지 않았다. 내 콩깍지가 단단히 꼈는지 마냥 귀여워 보일 뿐이다.

"하기야 일단 제 앞에 주어진 길부터 전부 걷는게 우선이 맞죠."

나는 엘레나의 말에 순순히 수긍하고는 그녀의 옆구리에 손을 뻗어 손가락을 움직였다. 소소한 복수였다. 엘레나는 간지럼을 잘 타는 몸이었기에 그 작은 자극에도 몸을 크게 몸을 움직였다. 가까스로 웃음이 입 밖으로 나가는 것은 막았는데 내가 이리 반격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치, 치사하게...갑자기 기습하는게 어딨어요..."

나는 엘레나의 말에 시치미를 때고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장난을 치기는 했어도 손을 잡는게 싫은 것은 아닌지 그녀는 억울한 눈을 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어 주었다. 나는 그에 방긋 미소를 지었지만 엘레나는 부끄러운지 조용히 고개를 돌릴 뿐이다.

잠깐의 구경이 끝이나고 우리는 엘트먼의 연구실에 가까이 도착을 하였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주변이 그리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되려 인기척이 아주 적게 느껴졌는데, 아직 황군 쪽에서 상황의 정리가 끝나지 않았나 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오르커스를 보질 못했던 것 같은데, 아마 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만 할 뿐이다.

아직 들어가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무언가 횡한 느낌이 나기 시작한다. 나는 연구실 문 앞에 서서 주먹으로 두어번 문을 두드렸다.

"아, 네. 들어오세요."

반응은 곧장 돌아왔다. 엘트먼의 목소리였다. 아직 살 만해 보이는 목소리가 이곳에 아직 황군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로 문을 열어제꼈다.

어쩐지 횡하다 싶더니 연구실 안에 들어와 있던 인원은 단 세명 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은 전부 어디로 간걸까. 엘트먼이 잡아 넣은 사람이 이곳의 교수라는 사실은 알았어도 나머지 인물에 대해서는 무지했기에 내 알길이 없다.

그건 그렇고. 엘트먼이야 그렇다 쳐도 나머지 두명은 내가 아는 얼굴이었는데 왜 이곳에 있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엘레나도 아는 얼굴들이었기에 두 사람의 존재에 잠시 얼굴을 굳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