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막간
* * *
이번 사건에 대한 뒷정리는 엘트먼이 마무리 하기로 하였다.
사실, 그가 이미 거의 끝을 내놓은 상태이기도 하였고 나와 엘레나가 한 것이라고는 마지막에 도망치려는 주교를 잡은 것 말고는 딱히 없었기에 사건의 마무리를 엘트먼에게 맡긴 우리는 곧장 학구로 발을 빼었다.
이교의 주교를 잡아넣은 것이 별거 아닌 일 취급할 정도의 사안은 아니다만 굳이 이를 남들에게 알려 시끄럽게 만들 생각은 엘레나도 나도 없었다. 원래 이번 사건은 엘트먼이 해결하려 하였던 건이었기에 이번 소탕은 온전히 그의 공이라 보아도 좋았다.
"그럼 여기는 내가 마무리 지을 테니 너희들은 그만 돌아가 봐. 엘레나, 아버지하고 어머니께는 말씀드리지 말고."
"저희 한테 그렇게 말하셔도 어차피 나중가면 아버지 귀에 들어갈꺼 같은데요?"
"뭐, 황군 녀석들에게 말 잘해놔야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처남이 황자님께 말씀 좀 드려줘. 그대로 보고 하지 말아달라고 말이야. 지금 군권은 오르커스 전하가 잡고 있으니까 내가 그 꼴통들을 설득하는 것 보다 매제가 황자님께 직접 이야기 하는게 효과가 더 좋을 지도 모르겠네."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해야했으니 그때 같이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현 상황의 책임자로 있는 오르커스에게는 사실대로 말을 해야겠지만. 왜 말도 없이 뛰쳐나갔냐고 문책할게 뻔하긴 하여도 해야만 했다. 내 처지를 이해 못할 녀석은 아니었기에 사실대로 말하면 어련히 정리하고 넘어가 주지 않을까.
"고마워 매제. 그런데 이 매제라는 호칭. 쓰면 쓸수록 입에 착 달라 붙는게 마음에 든다. 아, 불편하면 바로 말해도 돼. 아직 친해지지도 않았는데 너무 격 없이 다가갔나?"
"아니요. 이전 보다는 지금이 낫군요. 형님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형, 형님...!"
이리 답하니 엘트먼은 내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뭐라 띄엄띄엄 중얼거리다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자신은 그리 쉽게 매제라 불렀으면서 형이라 불리는 건 또 부끄럽나 보다. 남자 형제가 없어서 그런가?
그런데 반응으로만 따지면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엘레나가 더 야단법석이었는데, 내가 엘트먼을 형님이라 부르는 것을 보더니 몸을 부르르 떨면서 내게 안겨왔다.
설마 내가 전날의 행동들 때문에 엘트먼을 싫어했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 어느 포인트에서 좋아하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좋아하는 모습이 보기 좋으니 그거면 되었다.
"하하하...그, 그때는 내가 너무 바빠서 정신이 조금 없었다고 해야할까...미안! 혹시 내일 시간이 남으면 매제는 내 연구실에 한번 들리도록 해. 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신경을 너무 안 쓰긴 했으니까. 재밌는 것도 보여줄테니 기대 하고 있어!!"
엘트먼도 거기에 대해서는 미안했는지 사과를 하며 내일 보자는 약속을 잡았다. 이전과는 다르게 확실히 여유가 생기긴 한 모양이다. 연구실에 사람도 초대하고. 이번에 붙잡은 학회장이 엘트먼 학과의 정교수였으니 이에 대한 정리를 하려면 한동안은 정신이 없을 텐데 말이지.
그래도 이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는데, 말 했다가는 또 이전처럼 엘트먼이 정신이 나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용히 입에 지퍼를 채웠다. 동생의 소소한 복수라고나 할까. 죄책감은 없었다.
"밤이 늦었다. 괜히 들떠서 딴데로 세지 말고 그만 돌아가도록 해. 내일 보자."
엘트먼과는 그리 짧게 대화를 하고 헤어졌다. 엘트먼이 언제 이 사실을 깨달을지는 모를 일이 다만 적어도 내일까지는 괜찮을 것 같았다.
하여튼 이 인질극 아닌 인질극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나비효과니 뭐니 크게 걱정을 하고 갔더니만 모두 엘트먼과 엘레나의 손 바닥 위였다니, 역시 주인공네 집안은 뭔가 달라도 다른가 보다. 허탈하기도 하고 세상 살이가 쉽지 않다는 것이 이교도들에게도 통용되는 개념이라 안심 또한 되었다.
현재 상황은 우리에게 좋았으면 좋았지 해가 될 것은 전혀 없는데. 내가 걱정이 너무 많은 걸까? 초반에 너무 깽판을 처 놓아서 그런지 나비효과로 바람이 불어와도 산들바람 수준이 아닐까, 이제는 반대로 이런 생각이 든다.
너무 원작을 기준으로 생각을 한게 아닌가 싶다.
훗날 서른도 안되는 나이에 대륙제일검이 되는 라인하르트가 지금의 나와 합을 겨룰 수 있는 것을 보면서 그를 넘어서는 재능을 가진 엘레나라면 당연히 라인하르트 보다 강할 것이라 고는 생각했다. 그 경지가 초월자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만.
뭐랄까. 이제는 뭔 일이 일어나도 엘레나가 손짓 한번하면 다 정리될 것 같다.
오늘 보니까 손에서 데스빔도 쏘던데. 그걸 보니 사냥대회 때 본진을 공격한 마물들이 어찌 쓰러졌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어쩐지 숲으로 가기전 까지만 해도 평평했던 지면이 돌아오고 나서 보니 여기저기 크레이터가 만들어져 있던 게 엘레나 때문이었나 보다.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손을 한번 휘두르시니 마물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발길질을 한번 하시니 그대로 지면이 갈라지면서 땅이 꺼졌다구요!!'
그때는 로빈이 아무리 설명해도 뭔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는데 역시 이런 건 직접 눈으로 봐야 한다.
마음이 뒤숭숭해졌다기 보다는 최근 복잡했던 머릿속이 명확하게 정리가 된 것 같다. 깊게 생각할거 없다.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냥 내가 나 자신에게 너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혼자 개고생 하는 걸 엘레나가 좋게 볼리가 없는데 말이야. 그래서 그녀가 오늘 이렇게 보여주었던 것 같다. 혼자 고생하지 말라고, 주변 좀 둘러 보라고 말이다.
달이 하늘에서 떨어지기 전에 학구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열심히 달려서 그런지 어째 갈때 보다 돌아올 때가 시간이 더 적게 든 것 같았다. 갈림길을 앞에 두고 엘레나가 내게 말했다.
"가끔은 이렇게 밤산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그렇죠?"
"너무 늦지만 않는다면요. 오늘 처럼 행동했다가는 다음날 늦잠 잘지도 몰라요. 그래도 다음 부터는 나가기 전에 항상 미리 말씀 드릴게요. 그러니, 엘레나. 파랑이로 저 지켜보는 건 좀 자제해 주세요."
".....자제라는 건 가끔은 괜찮다는 건가요?"
"저 들어가 볼게요. 잘 자요."
"아,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안 할게요!!!"
아무리 그래도 프라이버시는 중요하니까. 사실 그냥 한번 찔러 본건데 이렇게 반응을 하는 걸 보면 엘레나가 그렇게 나를 지켜 본게 한 두 번이 아닌가 보다. 그건 그렇고 파랑이를 통해 나를 볼 수 있다는게 엘레나가 파랑이의 시야로 본다는 것인가? 이건 또 오늘 처음 안 사실이다.
설마 엘레나가 나를 빅 브라더 마냥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감시한 것은 아닐 테다. 가끔 내 얼굴이 보고 싶을 때 한 두번 파랑이를 날려 본 것이겠지.
음...아마도?
진실은 엘레나 만이 알고 있을 테지만 엘레나가 그런 사실을 내게 알려줄리 없지. 이건 여기서 그만 묻도록 하자.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면 이제 이런 일이 생기면 오르커스가 아닌 저하고 가장 먼저 상의 하는 거에요. 약속."
"근데 그건 오르커스도 일이라..."
"약속."
"약속..."
갑자기 오르커스의 이름이 왜 나오나 했더니 그동안 이런 일은 녀석과 만 이야기하고 다녔다는 게 생각이 났다. 여기에 질투라도 하는 걸까? 설마 싶었지만 엘레나는 은근 사소한 부분에서도 독점욕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엘레나를 기숙사로 돌려보내고 나 또한 자리를 옮겼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정신이 너무 또렷하다. 때마침 검도 들고 있겠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
항상 깨달음이라는 것은 불현듯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를 얻는 계기는 극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매우 사소한 행동 하나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허구한날 쌈박질만 한다고 보다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은 아니니까. 이는 정형화된 수식과 같은 것이 아니라 얻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엘레나와 있었던 일이 이러한 계기가 될 지는 모르는 일이다만 나는 잠을 자러 가는 것 대신 연무장으로 향하기를 택했다. 왠지 검을 휘두르고 싶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러한 기분이 들면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하는 것이 편하기에 그리 하였다.
특별한 무언가를 추가해서 단련하는 것이 아닌 평소에 하던 단련을 그대로 하였다.
연무장을 돌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사전에 짜두었던 루틴 그대로 몸을 단련한다. 몸의 단련을 끝내면 이후에는 올려베기, 횡베기나 내려베기 같은 기본기부터 시작해서 가문의 검법, 내가 체득했던 기술들을 하나하나 빠짐 없이 시전하며 내 마음에 들 때까지 이를 반복하면 끝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평소와 같았다.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는 듯한 느낌.
갑자기 나를 한계단 위로 올려주는 깨달음 같은 것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도 제자리 걸음이 아닌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다가 내 머리를 주먹으로 한대 쥐어 박았다.
사실 제자리 걸음 같은 것은 없는데 말이다.
사람마다 재능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훈련은 전날의 자신보다 강한 나를 만들어 준다. 천재 같은 이들이나 남들이 십년 노력할 거 일년 안에 해내지만 어쨌든 천재가 아닌 이들도 십년을 노력하면 그와 같은 성취를 이룰 수 있으니까. 항상 머릿속에 새겨두고 있던 것이었는데 오늘 따라 왜 이럴까. 당연한 사실을 잊어 먹고 있었다.
"나 왜 이러냐..."
엘레나의 앞에서는 괜찮은 척 했지만 혼자 남게 되니 내가 조급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유는 당연히 엘레나가 보여주었던 것 때문이겠지. 아무래도 그저 먼 일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코 앞으로 다가오니 그에 따라 마음도 급해진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 그럴 필요까지는 없음에도 내 목표는 그녀와 나란히 서는 것이었으니까.
원작보다 훨씬 강해진 엘레나였다. 그도 그럴게 초월자니까. 스물도 안되서 초월의 경지에 도달한 이가 이 대륙 역사에 존재했던가?
스스로가 천재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감히 이를 따라하려 한다. 이전이야 전생의 경험으로 나름 무게 추를 맞추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마음이 그에 맞추려는 것이었다.
그런다고 심적인 부담감만 커질 뿐이지 달라지는 것은 없는데 말이야.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 하려는 게 참, 사람 맘이라는 게 참으로 알 수 가 없다.
잠시 명상이라도 할까 자리에 앉으니 누군가 이리로 오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 했더니 라인하르트다. 이 녀석 아침 단련은 항상 나하고 같이 했었는데, 사실 이전에 먼저 나와서 하고 또 나와 같이 했던 걸까. 녀석도 보통 성실한게 아니다.
라인하르트는 연무장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더니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원래라면 자고 있을 시간이었으니까. 내가 수면 시간은 꽤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을 알고 있는 녀석이었으니 놀랄 만도 하다. 녀석이 먼저 입을 열기 전에내가 먼저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아침 되려면 멀었는데 뭘 벌써 부터 나와 있어."
"나는 원래 항상 이 시간에 나와서 몸을 푼다. 그것 보다 데미안. 오늘은 일찍 나온 이유가 있나? 너는 항상 수면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지 않는가."
"그냥 갑자기 나와서 검을 휘두르고 싶은 기분이었어. 가끔 그럴 때 있잖아."
"이해한다."
라인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자기가 할 일을 하였다. 녀석의 훈련도 나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결국 배운 것의 반복이다. 나 또한 검을 들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