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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125화 (125/131)

〈 125화 〉 불나방들(6)

* * *

데미안은 처음 출구 밖으로 나온 파르켈을 보았을 때부터 그가 상당한 강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와의 격차를 잴 줄 아는 것은 무인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지난 날 숲에서 보았던 추기경의 아랫 줄 정도의 인물인 것 같았는데, 아마 루덴 내에 존재하는 교구마다 있는 주교라는 직책을 가진 이교도가 아닐까 싶었다.

그저 그렇다 추측을 할 뿐, 확신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미래를 알고 있다 하여도 그건 책에 적혀있는 내용만 알고 있을 뿐, 이는 지극히 한정된 정보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이미 확신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교도들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느낌이 그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기에 데미안은 곧바로 제 손에 검을 가져다 대고는 엘레나의 앞에 섰다.

죽이지 못할 상대는 아니다.

저보다 격이 낮음은 보는 것 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위기감을 가질 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데미안의 행동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는 꼭 여유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이유라고 한다면 그의 옆에 있는 소녀. 엘레나가 이유였다.

파르켈을 보자마자 검을 들고 그녀의 앞에 선 것은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여기에 오는 동안 엘레나가 그러지 말라 미리 말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몸이 그리로 움직였다. 그녀는 보호 받아야 할 약자가 아니었지만 언제나 지키는 쪽이었던 데미안이었기에 약속을 했음에도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데미안. 약속."

엘레나가 저에게 말을 걸자 그제야 데미안은 자신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앞에 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래도 데미안은 곧장 자리를 비키지는 않았다. 엘레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엘레나는 데미안의 그런 감정을 읽고는 잠시 그와 눈을 맞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약속."

한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알았어요."

두번째로 들려오는 그녀의 말에 데미안은 자리를 비킬 수밖에 없었다. 약속이었으니까. 길게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엘레나는 자리를 비켜준 데미안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자랑하기 전에 짓는 것과 닮아있었다.

이후 엘레나의 행동은 간단했다.

눈 앞에 서 있는 파르켈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 순간 데미안은 자신의 앞에 선 엘레나의 뒷모습이 아득한 무언가와 같이 느껴졌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끝이 보이지 않는 산이기도 하였고 하늘 끝에 닿은 거대한 거인이기도 하였다. 끝에는 하늘에서 가장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엘레나가 달리 무언가로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손가락을 들었을 뿐이었고 그녀에게서 새어 나온 무언가를 데미안이 그리 느꼈을 뿐이었다.

데미안은 과거 이와 비슷한 느낌의 이들을 마주했던 기억이 있었다. 엘레나 만큼 강렬한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과는 격이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었던 이들이었다.

아서와 검성.

초월자(??者)라 불리우는 압도적인 강자들.

인간이라는 종을 넘어 생명체로서 한계를 넘어선 이들에게서 느껴지던 아득함이, 지금의 엘레나에게서는 그들에게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한순간의 착각이었지만 엘레나가 바로 앞에 있었음에도 데미안은 순간 그녀와의 거리가 저 머리 위에 떠 있는 별과 같이 멀어진 듯 했다.

멀고도 가깝다. 모순되지만 그리 느꼈다. 영원히 닿지 못할 곳은 아니었다만 지금은 아직 부족했다.

사실,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역시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 만은 못한지 충격이 적지 않다.

빛이라고는 저 아득히 높은 하늘의 별과 달 밖에 없던 골목에 새하얀 섬광이 흑색의 공간을 채워 넣었다. 대로를 걷는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잠시 촛불이 점멸할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찰나의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영원과도 같았다.

하늘을 빛내는 별의 빛이 지상에서 재현되어 파르켈의 전신을 두들기고 지나간다.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반짝였던 빛이었지만 그러한 시간은 빛에게 있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파르켈이 빛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엘레나가 만들어낸 별빛이 그의 몸을 부숴버린 후였다.

"꺼어억­!!"

빛에 직격당한 파르켈은 짧은 신음소리를 끝으로 그대로 지면에 고꾸라졌다. 명색이 이교의 주교에 위치한 인간인데 딱히 이렇다 할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격퇴 당했다.

파르켈이 완전히 전투불능이 된 것을 확인한 엘레나는 이에 고개를 돌려 아까와 같은 얼굴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방금전 그녀가 쓰러뜨린 상대는 이교도의 주교였다만 당연한 결과라 생각을 하는 건지 엘레나는 방금 전 승리에는 그다지 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엘레나의 정신은 데미안에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자신의 모습을 본 그가 어찌 반응하는지. 이를 살피는 듯 했다.

"어때요?"

엘레나의 목소리에 데미안은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 나올 수 있었다.

아까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는데 현실로 돌아오니 바로 코 앞에 자신을 들여다 보는 엘레나의 얼굴이 보였다. 잠시 넋을 놓았기에 그런지 엘레나는 처음과는 다르게 어딘가 불안한 얼굴이었다.

"데미안?"

갑작스레 가까워진 거리감 때문에 그랬던 걸까. 데미안은 무심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볼을 쭈욱 늘어뜨렸기에 엘레나의 발음이 절로 뭉개졌다.

".....며하는 겨에여어..."

"엘레나. 잠시만. 저는 지금 안정이 필요해요."

말랑말랑한 볼의 촉감이 기분이 좋다.

엘레나는 이런 데미안의 행동에 당황은 했어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전부터 데미안이 그녀에게 꽤 자주하였던 장난이었으니, 데미안의 말을 들은 그녀는 이후에는 아무 말 없이 데미안의 손을 받아들였다.

너무 엄청난 것을 봐버려서 그런지 머리가 혼란스럽기는 하다만 그것도 평소와 다름 없는 엘레나의 모습에 천천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달라진 것은 없었고 그녀는 여전히 엘레나 에델바이스였다. 그거면 충분했기에 이에 대한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엘레나를 바라보니 그녀는 데미안이 어찌 반응하는지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그 모습에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다가도 뭐라 말을 해야 할까 고민에 잠겼다. 결국 고르고 고르다 데미안은 엘레나에게 간단히 한마디 하였다.

"잘했어요."

"그갸 전부에야?"

"그러면 화들짝 놀라면서 공중제비라도 돌까요? 사실, 뭐라 말을 더 하고 싶은데 그냥 여기 까지만 할래요. 혹시 조금 부족했나요?"

어느새 제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데미안의 손을 본 엘레나는 약간 고민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거면 충분해요. 좀 더 쓰다듬어 주실래요?"

"얼마든지."

"음, 또 꼭 안아주세요."

"역시 부족했잖아요."

엘레나를 안아 들면서 그 너머에 있는 파르켈이 시야에 들어왔다. 죽지는 않았는지 쓰러진 그에게서 옅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아."

흐름이 어쩌다 이렇게 넘어 가버리긴 했지만 지금 두 사람은 이교도에게서 엘트먼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주교가 저리 쓰러져 있으니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여도 슬슬 엘트먼을 찾으러 가야했다.

파르켈이 저렇게 몰래 도망쳐 나온 것으로 보아 무사한 것은 확실해 보여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물론 그런걸 신경 쓰는 것은 데미안 뿐이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아 보여도 애초에 엘레나는 이쪽이 목적이었으니까. 데미안에게 칭찬을 받았으니 그녀는 아무래도 좋았다.

"...니, 무슨 계단이...렇게 길어.."

파르켈이 나온 출구로 들어갈려는 찰나, 그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숨이 찬 목소리였는데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문을 넘어온 것은 전신에 갑옷을 두른 듯한 골렘이었지만 그 다음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사람이었다.

달빛에 반사되는 은빛 머리카락과 자안(??)이 그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젠장. 이 정도 길이였으면 이미 도망치고도 남았겠...엘레나? 그리고 매제까지? 아니, 왜 여기에? 어? 뭐야? 이건 또 왜 여기에 쓰러져 있어?!"

지난번에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활기가 도는 얼굴. 거기에 보기보다 수다스런 모습까지. 누가 보면 전혀 다른 인물 인줄 알겠다만 그는 틀림 없는 엘트먼 에델바이스였다. 본래 데미안이 소설로 보았던 엘트먼의 모습은 이와 같았으니 이전에 만났을 때가 특이 케이스였던 것이었다.

멀쩡하다 못해 태연하게 밖으로 나온 엘트먼의 모습에 데미안은 긴장이 확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자연스레 처남이라 부르는 것도 그렇고 그가 소설을 통해 보았던 엘트먼이 맞았다. 데미안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뭔가 잔뜩 걱정을 하며 달려왔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일이 쉽게 쉽게 풀려버리니 조금 허무한 감이 없잖아 있다. 괜히 걱정을 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여러모로 맥이 빠진 달까. 하지만 이런 생각도 멀쩡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금새 날아가 버렸다.

그래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된 거 아닌가.

생각해보니 그거면 충분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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