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불나방들 (4)
간만에 하는 나들이에 엘레나는 마음이 들떴다.
사실 흑의(黑衣)에 몸을 숨긴채 남들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나들이를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엘레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데미안과 단 둘이서 움직이면 그것이 나들이고 그것이 소풍이었다.
데미안의 품에 안긴 채 내려다보는 루덴의 밤거리는 실로 아름다웠다.
한가로이 풍경을 감상할 시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만 그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녹아내리는 것이 엘레나 에델바이스라는 인간이었기에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랴.
'오랜만이네.'
엘레나는 어두운 밤의 그늘 아래에 펼쳐진 익숙한 풍경에 과거의 기억을 하나 둘 떠올려 보았다.
데미안은 모를테지만 회귀자인 그녀에게 있어 이렇게 데미안과 밤산책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이전의 삶에서는 그녀가 회귀자임을, 그가 미래를 알고 있음을 서로 공유했기에 지금과 같이 둘이서 몰래 밖으로 나가 이교도들을 처단하는 일은 일상이나 마찬가지 였으니 말이다.
해와 달 사이의 거리처럼 멀었던 그와 자신의 사이를 좁혀준것도 이러한 경험들 덕분이었다는 걸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기에 저도 모르게 그에게 더 다가갔는지 엘레나를 안아든 데미안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엘레나. 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있으세요. 간지러워요. 혹시라도 떨어지면 어쩌려고..."
"네. 꽉 잡을게요. 아주 꽉."
"...잘했어요."
때문에 엘레나는 지금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과거에는 그와 나란히 걷는 것이 끝이었다면 지금은 이렇게 그에게 안겨있을 수 있으니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그가 자신에게 의지하려 하지 않는 다는 점일까.
엘레나는 데미안의 품에서 그 온기를 느끼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어두운 밤에도 밝게 빛을 내는 그의 금안(金眼)은 태양과도 같았지만 엘레나는 그 속에 품은 불안감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야 그가 품은 걱정의 원인은 다름 아닌 엘레나,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지금 그가 자신을 위험에 노출 시키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 하고 있음을 엘레나는 알고 있었다.
이 또한 과거와는 달라진 점이라고 해야할까.
옛날에는 엘레나가 회귀자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걱정 대신 자신이 곁에 있어 든든하다는 눈이었는데, 조금 아쉽기는 해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 만큼 자신을 아낀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무엇보다 저런 감정이야 이번 기회에 바꿔주면 되는 것이었으니.
이교도 건은 그렇다 해도 엘트먼과 관련된 것 까지 말 없이 해결하려는 데미안의 모습에 그동안 얌전히 그를 기다리던 엘레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그에게 있어 전장으로 데리고 갈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당신은 걱정이 너무 많아.'
사실 그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
검성, 황실의 후계자와 협력하는 것 보다 엘레나 에델바이스와 힘을 합쳐 일을 해결하는 것이 더 쉬운 방법임을. 그야 엘레나 에델바이스 였으니까.
그가 읽은 소설의 주인공이자 모든 일의 해결사.
회귀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가 지닌 뛰어난 재능과 유능함은 변하지 않는다. 일을 해결하는데 있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는 바로 엘레나 에델바이스라는 것을 그가 모를리 없다.
당장 엘레나가 회귀하기 이전의 삶만 하더라도 그러했으니.
항상 사건과 멀리 떨어져 평온한 삶을 살겠다고 하던 그였지만 막상 사건이 터질려고 하자 앞장서서 이를 막아낸 것은 그였다. 그리고 그런 그가 선택한 최선의 선택이 바로 엘레나와의 협력이었고 말이다.
그가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 현재와 과거의 차이일 것이다. 그는 미련한 남자니까. 그는 따뜻한 남자였으니까. 쉬운 길이 있다하더라도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람을 위험에 놓이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한 길을 택할 이였다.
그 때문에 루덴에 와서 위험한 일에 대한 것은 전부 오르커스와 이야기하지 않았나. 옛날이었다면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엘레나는 그 점이 아쉬웠다.
그에게 보호 받고 사랑 받는 것이 싫을리가 있나. 다만 엘레나는 그가 조금만 더 자신을 의지해주었으면 했다.
오르커스나 다른 이들이 아니라. 바로 이 엘레나 에델바이스를.
이는 절대 오르커스와만 일을 꾸며서 그에 질투한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신에게 좋은 경험만을 겪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알고 있다만 이는 엘레나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엘레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위해서,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였는지 말이다.
그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행복을 위해 이 순간으로 돌아왔다.
옛적에 끝내었던 결심을 곱씹는 것을 끝으로 엘레나는 마음을 완벽히 정리했다. 그녀는 자신의 자줏빛 눈에 데미안을 가두며 이리 말했다.
"데미안, 도착하면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제가 다 해결할테니까요."
"네? 아니 그게 무슨..."
"아셨죠?"
당당하게 자신에게 말하는 엘레나의 모습에 데미안은 차마 거절하지는 못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뜻에 수긍했다.
물론 그가 얌전히 있을 거라고는 가만히 있으라 말을 한 엘레나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리 하게 만들 것이었다. 엘레나는 이번 기회에 그가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도록 하는데 진심이었으니.
엘트먼의 구출이 목적이었음에도 그 목적이 잊혀진지는 이미 오래다.
진정으로 그에게 위험이 닥쳐왔다면 그녀가 알아차렸을 테니, 지난번 저택에서 만났을 때 이에 대한 조취는 끝내 두었다.
엘트먼이 있는 장소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곳에 다가갈 수록 거리의 소음이 심해지는 것 같은 건 착각이 아닐테다.
엘레나는 부디 엘트먼이 자신의 몫을 남겨두었길 바라며 데미안의 품에 파고들었다.
"히히, 따뜻하다..."
"...."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나?'
물론 그러한 속 사정을 모르는 데미안은 이런 엘레나의 모습을 보고 두 남매의 사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지만 이는 다른 이야기였다.
***
족쇄를 푼 엘트먼은 지하에서 빠져나와 빠른 속도로 건물을 차례대로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잡힌 것은 저들을 한번에 상대할 능력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혹시 모를 증원을 대비해 얌전히 잡혀준 것이지 그가 알고 있는 이들이 전부였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다. 적들의 전력을 파악한 엘트먼에게 있어 망설임이란 없었다.
골렘과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엘트먼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이교도들을 제압해 나갔다.
"알파(α)! 베타(β)! 감마(γ)! 가라!!"
"갑자기?!! 뭐야? 누가 녀석을 풀어줬어!!!"
"모, 모르겠습니다! 으아아아아악!!!!"
"젠장!! 분명 마법 구속구로 묶어놨었는데!! 다들 당하지 말고 반격해!! 어차피 우리의 위치는 다 드러났다. 녀석 만이 우리가 살 길이야!! 모두 신성력을 해방해라!!"
물론 이교도들이 얌전히 당해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동안 황가의 대척점으로 지내왔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그들은 갑작스런 기습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대열을 가다듬고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골렘들을 막아섰다.
거짓으로 꾸며낸 학회라 할지라도 실제로 이들은 전부 마도(魔道)에 길을 든 마법사들이었다.
일반인은 결코 넘볼 수 없는 힘을 가진 초인들. 거기에 평범한 마나 유저도 아니고 외신의 신성력을 가진 이교도들이다. 마법과 성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이들은 일개 마법사 한명이 감당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이 상대하는 엘트먼은 일개 마법사라고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만 썩어도 준치라고, 어느 정도 대열이 완성되자 이들은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이 아닌 일정 전선을 유지하며 엘트먼의 골렘들을 상대로 버텨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현 상황으로만 보자면 전투의 흐름은 완벽히 백중세.
서로가 서로에게 손속을 두고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앞으로 상황이 어찌 흘러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엘트먼은 이들을 생포해 그 윗자리의 인물들의 정보를 얻기를 원했고 이교도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선 엘트먼을 생포해야 했으니 말이다.
"젠장!!! 대체 어디서 저런 많은 수의 골렘들이 튀어나온거야? 저 것들을 전부 아공간에 수납하고 있었단 말인가?!"
엘트먼의 골렘을 상대하는 이교도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둘 중 여유가 없는 쪽이 누군가 하면 당연 이교도들이었다. 그들이 있는 이곳은 제국의 중심부인 루덴이었고 이는 사실 상 호랑이 입 속에 반쯤 들어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들이 지금껏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엘트먼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고 이상함을 느낀 황군이 언제 들어닥칠지 모르는 마당에 엘트먼을 제압하는데 있어 오래 시간을 들여봤자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좀처럼 우위를 점할 수 없자 리더 역할을 하던 이교도가 자신의 동료들에게 외쳤다.
"시간이 없다! 팔을 자르든 다리를 자르든 죽이지는 말되 어떻게든 제압하라!!!"
그 명령에 여태껏 수비적이었던 이교도들의 기세가 돌변하였다.
아주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그저 여태까지 골렘을 제외하면 엘트먼과의 전투에서 수비와 제압에 치중하던 이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엘트먼을 공격하게 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조심스러워 하는 것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명령 대로 엘트먼의 사지 중 하나는 잘라내려는 의지가 보였다.
"다들 내 실력 알면서 왜 이러실까."
엘트먼이 당황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공격적으로 변한 이교도들을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약간 과장되게 움직이는 것 같은 엘트먼의 손 동작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연상시켰는데 이는 단순히 느낌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서 엘트먼 에델바이스는 지휘자였다. 그의 지배 아래에 놓인 골렘들이 그의 지휘에 맞춰 움직임을 바꾸었다.
아껴두었던 힘을 개방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그들이 가진 조급함은 독이 되었다.
"골렘은 나중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녀석부터 먼저 확보해!!"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
이교도의 말에 엘트먼이 반박하며 골렘을 운용했다.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시간에 압박을 이기지 못해 시야가 좁아진 이들은 분명히 있었다. 엘트먼은 그러한 이들을 정확히 캐치하고는 자신을 향해 덤벼오는 이교도들 중 그들을 최우선으로 정리해 적의 수를 줄여갔다.
적들이 강해졌으면 그 만큼 전력을 강화하면 될 일이다.
신성력을 개방함으로서 상승한 전투력을 엘트먼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면 모를까. 그의 역량은 이를 감당하기에 충분했다. 저들의 적극적인 공세는 엘트먼에게 있어 빈틈이었고 정렬된 화음에 모처럼 생겨난 불협화음이었다. 엘트먼은 빠르게 그 자리를 자신의 것으로 채워나갔다.
"자이언트. 돌격."
적의 전력이 줄어든 것을 확인한 엘트먼이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들은 옆에서 가만히 그를 보호하던 거구의 골렘. 자이언트가 이교도들을 향해 돌진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퍼부은 마법들은 자이언트의 돌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스트라이크."
볼링공에 맞은 볼링핀들 처럼 사람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 엘트먼은 공중에 붕 뜬 이들을 향해 구속마법을 걸어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한 명이라도 죽은 이가 있는지 확인을 한 뒤 다시 전투에 나섰다.
"다행이야. 모두 살아있어."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엘트먼이었지만 듣는 이들에게 있어 어딘가 섬찟한 느낌이 드는 말이었다.
살인을 두려워서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을 바라보는 엘트먼의 눈이 너무나도 차가웠기에. 그것은 결코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